삼각산 관련자료/삼각산 고자료

삼각산

아베베1 2013. 3. 21. 15:59

 

 

 

 

金時習年二十一方讀書三角山


○金時習年二十一方讀書三角山中人有自亰城来傳 魯山遜位事時習即閉戶不出者三日乃大哭盡焚其書彂狂䧟
于溷厠而逃之托跡緇門僧名雪岑累變其号曰清寒子曰東峯曰碧山清隠曰贅世翁曰梅月堂為人㒵寢身短豪邁英彂
勁直不容人過傷時憤俗氣㭗不平自度不能随世俗昂遂放 形骸域中山川足跡殆遍遇勝則捷焉登覧故都則必躑躅悲
歌累日不已山行好白樹題詩諷詠良久輒哭而削之或題于 紙多投水火或刻木為農夫耕耘之刑列置案側熟視終日亦
哭而焚之有時所種禾甚盛乗酔揮鎌盡頃委地囙放聲而哭 行止叵測大被流俗所點時名卿金守温徐居正賞以囯士
居正方趍朝行辟人時習衣藍縷帶藁索戴蔽陽子[주:賤夫所着白竹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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遇諸市犯刖導仰首呼曰剛中[주:居正字]安穏否居正笑應之駐軒語一市皆駭目相視有朝士受侮者見居正欲啓治其罪居正摇首曰止止狂者何足與較今罪此人百代之下必累公名金守温知舘事以孟子見梁恵王論試太學諸儒有上舎生見時習于三角山曰乖崖[주:守温号]好劇孟子見梁恵王豈合論題時習笑曰非此老不出此題乃走茟成篇曰生貟為自製者試瞞此 老上舎生如其言守温讀未終遽問曰悅卿生住亰山何寺上舎生不能隠其見知如此其論大畧以為梁恵王僣王孟子不 當見云今逸不収[주:竹磵閑話]

 

 

 丙午二月初六日廣州北漢山城了


爲相考事 今此

太廟改修時 曳石軍以僧軍限十日使役事 頃已定奪分

付爲有如乎 數多石村 十日之內 沒數運置 其勢誠

難是乎等以 不得已石子畢運間仍爲赴役事 定奪

於榻前爲有置 以此分付施行向事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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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도 한성부

◎ 경도 한성부(京都漢城府)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이니, 일명(一名) 북한산군(北漢山郡)이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372) 임신에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와서 도읍을 정하여【남한산은 지금의 광주(廣州).】 1백 5년을 지내고, 문주왕(文周王)이 고구려의 난을 피하여 고마나루[熊津]로 옮겨 도읍하였고, 고려 초에 양주(楊州)로 고쳤다. 숙종(肅宗) 때 술사(術士) 사의령(司儀令) 김위제(金謂磾)가 옥룡 선사(玉龍禪師)의 《도선밀기(道詵密記)》를 증거로 하여 아뢰기를,
“양주(楊州)에 목멱양(木覓壤)이 있는데,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합니다.”
하고, 일자(日者) 소부감(少府監) 문상(文象)이 따라서 그 말대로 아뢰니, 4년 기묘 9월에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땅을 살펴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해서, 5년 신사에 시작하여 9년 갑신에 역사를 마치니, 곧 송(宋)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1104)이다. 8월에 임금이 와서 살펴보고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시켰다. 이로부터 인종(仁宗)·의종(毅宗)·충렬왕(忠烈王)·공민왕(恭愍王)·공양왕(恭讓王)이 모두 순행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충렬왕 34년 무신에【곧 원(元)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元年).】 한양부(漢陽府)로 고쳐서 부윤(府尹)·판관(判官)을 두었고, 본조(本朝)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 3년 갑술【곧 명(明)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27년.】 10월 갑오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쳐서, 판사(判事)·윤(尹)·소윤(少尹)·판관(判官)·참군(參軍)을 두고, 을해 2월에 비로소 종묘(宗廟)와 궁실(宮室)을 경영하여 9월에 모두 낙성되었다.
도성(都城)의 둘레가 9천 9백 75보(步)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가 되며,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홍화문(弘化門)【곧 동소문(東小門).】, 동남(東南)을 광희문(光熙門)【곧 수구문(水口門).】, 서남(西南)을 숭례문(崇禮門)【곧 남대문.】, 소북(小北)을 소덕문(昭德門)【곧 서소문(西小門).】,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태조(太祖) 5년 병자 봄에 각도의 민정(民丁) 11만 8천 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 7백 59명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금상(今上) 4년 임인에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 성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3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
동부(東部) 12방(坊)【숭신(崇信)·연화(蓮花)·서운(瑞雲)·덕성(德成)·숭교(崇敎)·연희(燕喜)·관덕(觀德)·천달(泉達)·흥성(興盛)·창선(彰善)·건덕(建德)·인창(仁昌).】
남부(南部) 11방(坊)【광통(廣通)·호현(好賢)·명례(明禮)·대평(大平)·훈도(薰陶)·성명(誠明)·낙선(樂善)·정심(貞心)·명철(明哲)·성신(誠身)·예성(禮成).】
서부(西部) 8방(坊)【인달(仁達)·적선(積善)·여경(餘慶)·황화(皇華)·양생(養生)·신화(神化)·반석(盤石)·반송(盤松).】
북부(北部) 10방(坊)【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嘉會)·안국(安國)·관광(觀光)·진장(鎭長)·명통(明通)·준수(俊秀)·순화(順化)·의통(義通).】
중부(中部) 8방(坊)【징청(澄淸)·서린(瑞麟)·수진(壽進)·견평(堅平)·관인(寬仁)·경행(慶幸)·정선(貞善)·장통(長通).】
종묘(宗廟)【중부 정선방(貞善坊)과 동부 연화방(蓮花坊) 중앙에 있으니, 담 둘레에 소나무를 심었다.】 영녕전(永寧殿)【종묘의 담 안 서쪽에 있다. 태조(太祖)가 하늘의 명[天命]을 받아 〈왕이 되매〉 왕(王)으로 목(穆)·익(翼)·도(度)·환(桓)의 네 조상을 추존하고, 종묘를 세워 제사를 받들다가, 태종(太宗)을 부묘(祔廟)하게 되매, 목조(穆祖)를 체천(遞遷)해야 하므로, 따로 이 전각을 세우고 목조의 신주를 옮겨 모시었으며, 익(翼)·도(度)·환(桓)의 세 조상도 또한 이곳에 차례로 옮겨 모시었다.】 사직(社稷)【인달방(仁達坊)에 있으니, 둘레의 담에 소나무를 심었다.】 문소전(文昭殿)【처음에 문소전을 창덕궁 서북쪽에 세우고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과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화상[神御]을 모시고, 또 광효전(廣孝殿)을 창덕궁 동북쪽에 세우고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과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화상을 모시었다가, 그 후에 송(宋)나라 경령궁(景靈宮)의 제도에 의하여 원묘(原廟)를 경복궁 성안 동북쪽에 고쳐 지었는데, 앞에는 묘(廟), 뒤에는 침(寢)으로 하여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르고, 이름을 문소전이라 하여, 두 임금(태조·태종)의 화상을 옮겨 모시었다.】 문묘(文廟)【숭교방(崇敎坊)에 있고, 뜰에 비(碑)가 있다. 성균관 학관(成均館學官)을 두어 선비를 가르치는데, 2백 사람으로써 액수를 정하였다. 옆에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섬학전(贍學田) 1천 35결(結)을 주었고, 금상(今上) 13년(1431) 신해에 9백 65결을 더 주었다.】
경복궁(景福宮)【백악산(白岳山) 남쪽에 있다.】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 동쪽 작은 침전(寢殿)을 연생전(延生殿), 서쪽 작은 침전을 경성전(慶成殿), 또 그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정사를 보는 곳.】,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조회를 받는 곳.】, 안문[內門]을 근정(勤政), 안 동문(東門)을 일화(日華), 동각루(東閣樓)를 융문(隆文), 서각루(西閣樓)를 융무(隆武)라 한다.
영제교(永濟橋)【근정문 밖에 있다.】 홍례문(弘禮門)【영제교 남쪽에 있다.】 경회루(慶會樓)【궁 서쪽 담안에 있는데, 둘레가 못으로 되어 있다.】 동궁(東宮)【건춘문(建春門) 안에 있다.】
궁성(宮城)【둘레가 1천 8백 13보(步)이다.】 동문(東門)을 건춘(建春), 서문(西門)을 영추(迎秋), 남문(南門)을 광화(光化)라 한다.【문루(門樓)가 2층이요, 누 위에 종고(鍾鼓)를 달고 새벽과 저녁에 울리어 때알림을 엄하게 한다. 문 남쪽 좌우에 의정부(議政府)·중추원(中樞院)·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 각사(各司)의 공해(公廨)를 벌려 놓았다.】
창덕궁(昌德宮)【정선방(貞善坊)에 있다. 태종(太宗) 5년(1405) 을유에 세워서 이궁(離宮)으로 삼았다.】 인정전(仁政殿)【조회를 받는 곳.】 안문을 인정(仁政), 중문을 진선(進善), 바깥문을 돈화(敦化)라 한다.
광연루(廣延樓)【궁 동쪽에 있다.】 수강궁(壽康宮)【연화방(蓮花坊)에 있다. 태종(太宗) 18년(1418) 무술에 왕위를 물려주고, 따로 이 궁을 지어 거처하였다.】 선양정(善養亭)【궁 남쪽 언덕에 있다.】
혜정교(惠政橋)【중부 서린방(瑞麟坊) 북쪽에 있다.】 운종가(雲從街)【곧 서린방과 수진방(壽進坊)의 중앙이다.】 통운교(通雲橋)【관인방(寬仁坊)남쪽에 있다.】 북광통교(北廣通橋)【광통방 북쪽에 있다.】
큰 저자[大市]【중부 장통방(長通坊)과 경행방(慶幸坊) 중앙에 있다.】 종루(鐘樓)【도성 중앙에 있다. 2층으로 되어 있고, 누 위에 종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깨우쳐 준다.】 도성 좌우 행랑(都城左右行廊)【대략 2천 27간이다.】
태평관(太平館)【숭례문(崇禮門) 안 황화방(皇華坊)에 있다. 이곳에서 중국 사신(使臣)을 접대하는데, 옆에다 별전(別殿)을 지어서 임금이 쉬는 곳으로 삼았다.】 모화관(慕華館)【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있다. 본이름은 모화루(慕華樓)이니, 중국 사신(使臣)을 영접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금상(今上) 12년(1430) 경술에 고쳐 짓고 관(館)으로 하였다. 남쪽에 네모진 못이 있는데, 낮은 담을 쌓고 버들을 심었다.】
오부(五部)의 호수(戶數)는 1만 7천 15호, 성저십리(城底十里)의【동쪽은 양주(楊州) 송계원(松溪院) 및 대현(大峴)에 이르고, 서쪽은 양화도(楊花渡) 및 고양(高陽) 덕수원(德水院)에 이르고, 남쪽은 한강 및 노도(露渡)에 이른다.】 호수는 1천 7백 79호이다.
간전(墾田)은 1천 4백 15결(結)이다.
삼각산(三角山)【도성 밖 정북(正北)에 있으니, 일명(一名)은 화산(華山)이다.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 일컬었다.】 도성(都城)의 진산(鎭山)은 백악(白岳)이다.【산정(山頂)에 사당[祠宇]이 있어서 삼각산의 신을 제사 지내는데, 백악을 붙여서 지낸다. 중사(中祀)로 한다.】
목멱사(木覓祠)【도성 남산 꼭대기에 있으니, 소사(小祀)이다. 봉화(烽火)가 5곳이 있으니, 제일(第一)은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江原道)로부터 온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 제이(第二)는 경상도로부터 온 광주(廣州) 천천산(穿川山) 봉화에 응하고, 제삼(第三)은 평안도·황해도로부터 육로(陸路)로 온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제사(第四)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海路)로 온 무악 서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제오(第五)는 전라도와 충청도로부터 온 양천(陽川) 개화산(開花山) 봉화와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 또 강원도로부터 온 풍양(豐壤) 대이산(大伊山) 봉화에 응한다.】 무악(毋岳)【모화관 서쪽에 있다. 위에 봉화가 두곳이 있으니, 동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육로로 온 고양(高陽) 소달산(所達山) 봉화에 응하고, 서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로 온 영서역(迎曙驛) 서산(西山) 봉화에 응한다.】
연희궁(衍禧宮)【무악 남쪽에 있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일찍이 “이 땅이 무악의 명당(明堂)이 되어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하다.”고 하였는데, 세종 3년(1421) 신축에 태종이 그 말을 생각하고 이궁(離宮)을 짓게 하였다.】
우사단(雩祀壇)·동방 토룡단(東方土龍壇)·선농단(先農壇)【모두 흥인문(興仁門) 밖 평촌(坪村)에 있다.】 마보단(馬步壇)·마조단(馬祖壇)·선목단(先牧壇)·마사단(馬社壇)【모두 흥인문 밖 사근사리(沙斤寺里)에 있다.】 선잠단(先蠶壇)【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에 있다.】 노인성단(老人星壇)·원단(圓壇)·영성단(靈星壇)·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에 있다.】 남방 토룡단(南方土龍壇)【한강 북쪽에 있다.】 서방 토룡단(西方土龍壇)가을두(加乙頭)에 있다.】 북교단(北郊壇)·북방 토룡단(北方土龍壇)·여제단(厲祭壇)【모두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다.】
동적전(東籍田)【흥인문 밖에 있다. 종묘·사직·산천(山川) 백신(百神)의 제미[棄盛]를 제공한다. 또 구도(舊都)의 문교(門郊)에 서적전(西籍田)이 있다.】
한강도(漢江渡)【목멱산 남쪽에 있다. 너비 2백 보. 예전에는 사평도(沙平渡)또는 사리진도(沙里津渡)라 하였다. 북쪽에 단(壇)이 있는데,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며, 중사(中祀)로 한다. 도승(渡丞) 1인을 두어서 드나드는 사람을 조사한다. 나루 머리[渡頭]에 제천정(濟川亭)이 있다.】 용산강(龍山江)【숭례문 밖 서남쪽 9리에 있다. 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 군자 강감(軍資江監)과 풍저 강창(豐儲江倉)이 있다.】 서강(西江)【서소문 밖 11리에 있다. 또한 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 광흥 강창(廣興江倉)과 풍저 강창(豐儲江倉)이 있다.】 가을두(加乙頭)【서소문 밖 12리에 있다. 오똑하고 기이하게 빼어났고, 남쪽으로 큰 강을 임하여 벽처럼 서서, 백 길이나 되는데, 나무를 휘어잡고 아래를 굽어보면 터럭끝이 오싹해진다.】
빙고(氷庫) 2【곧 예전의 얼음집[淩陰]이다. 하나는 두모포(豆毛浦)에 있으니, 나라 제향에 쓸 얼음을 바치고, 하나는 한강 아래 백목동(栢木洞)에 있으니, 어선(御膳), 나라 손님 접대 또는 백관(百官)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바친다.】
조지소(造紙所)【장의사동(壯義寺洞)에 있다. 처음에는 사대(事大)의 표(表)·전(箋)·주(奏)·계(啓)·자문(咨文)에 쓸 종이를, 전라도 전주(全州)와 남원부(南原府)에서 해마다 세밑에 바쳤는데, 많이 쓰는 것을 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금상 2년에 특명으로 조지소를 두어 종이를 만들었는데, 품질이 옛 것에 견주어 훨씬 곱고 좋았다. 이로 말미암아 전주와 남원 두 부(府)의 세공(歲貢) 독촉의 폐단이 비로소 없어졌다.】 물방아[水輾]【장의사 동구(壯義寺洞口)에 있다.】
동활인원(東活人院)【동소문 밖에 있다.】 서활인원(西活人院)【서소문 밖에 있다. 옛 이름은 대비원(大悲院)이다.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의원과 무당을 두어서, 서울 안에 병들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모두 이곳에 모아 놓고, 죽·밥·국·약을 주며, 아울러 옷·이불·자리를 주어 편하도록 보호해 주고, 만일 죽는 이가 있으면 잘 묻어 준다.】
귀후소(歸厚所)【용산강 가에 있다.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중들로 일을 주장하게 하여, 관(棺)·곽(槨)을 만들어 팔아서 초상집의 급작스럽게 당한 일을 예비하게 한다.】
흥천사(興天寺)【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선종(禪宗)에 속한다. 3층탑이 있고, 〈그 속에〉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사리(舍利)를 안치하였다. 태조가 세우고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흥덕사(興德寺)【연희방(燕喜坊)에 있는데, 교종(敎宗)에 속한다. 태조가 궁(宮)을 버리고 절을 만들어서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장의사(壯義寺)【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데, 교종(敎宗)에 속한다. 밭 2백 50결을 주었다.】
봉경(封境)【동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기 5백 40리, 서쪽으로 풍천(豐川)에 이르기 6백 리, 남쪽으로 해진(海珍)에 이르기 9백 80리, 북쪽으로 여영(閭迎)에 이르기 1천 4백 70리, 동북쪽으로 경원(慶源)에 이르기 2천 1백 90리, 동남쪽으로 동래(東萊)에 이르기 8백 70리, 서남쪽으로 태안(泰安)에 이르기 3백 90리, 서북쪽으로 의주(義州)에 이르기 1천 1백 40리이다.】
【원전】 5 집 613 면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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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기 / 양주 도호부

⊙ 양주 도호부(楊州都護府)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인데,【또는 북한산(北漢山)이라 한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취하여, 그 25년 신미에【곧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원년.】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도읍을 옮기어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蓋鹵王) 20년 을묘에【곧 송나라 폐제(廢帝) 원휘(元徽) 3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한성(漢城)을 에워싸니,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살해되매, 이 해에 그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기었다. 그 뒤 79년, 신라 진흥왕(眞興王) 13년 계유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쪽 변방을 취하고, 15년 을해에 왕(王)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이르러 국경[封彊]을 정하였며, 17년 정축에【곧 진(陳)나라 고조(高朝) 영정(永貞) 원년.】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14년 병신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쳤다. 고려가 양주(楊州)로 고치어,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는데, 양주 좌신책군(楊州左神策軍)이라 하여, 해주 우신책군 절도사(海州右神策軍節度使)와 더불어 이보(二輔)를 삼았다. 현종(顯宗) 3년 임자에 이보(二輔)와 십이절도사(十二節度使)를 폐하여 안무사(按撫使)로 고치고, 9년 무오에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가, 숙종(肅宗) 9년 갑신에【곧 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시켰으며,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곧 원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한양부(漢陽府)로 고쳤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 갑술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고 부치(府治)를 동촌(東村) 한골[大洞里]에 옮겨, 다시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가, 4년 을해에 부(府)로 승격시켜 부사(府使)를 두었고, 정축에 또 부치(府治)를 견주(見州) 옛터로 옮겼으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다. 속현(屬縣)이 3이다. 견주(見州)는 본래 고구려의 매초현(賣肖縣)인데, 신라가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견주(見州)로 고치어,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별호(別號)는 창화(昌化)이니, 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사천현(沙川縣)은 본래 고구려의 내을매현(內乙買縣)인데, 신라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견성군(堅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으며, 고려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풍양현(豊壤縣)은 본래 고구려의 골의노현(骨衣奴縣)인데, 신라가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풍양현(豐壤縣)으로 고쳐,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포천(抱川)에 옮겨 붙였으며, 금상(今上) 원년(元年) 기해에 다시 본부(本府)에 붙였다.
삼각산(三角山)【부(府) 남쪽에 있다. 일명(一名)은 화산(華山)이니, 3봉우리가 우뚝 빼어나서 높이 하늘에 들어가 있다.】 오봉산(五峯山)【부(府) 남쪽에 있다.】 천보산(天寶山)【부(府) 동쪽에 있다.】 소요산(消遙山)【부(府) 북쪽에 있다.】양진(楊津)【부(府) 남쪽에 있으니, 곧 한강[漢水]의 남쪽이다. 단(壇)을 쌓고 용왕(龍王)에게 제사지내는데, 봄·가을의 가운뎃달[仲月]에 〈나라에서〉 향(香)·축(祝)을 내리어 제사지낸다. 신라 때에는 북독 한산하(北瀆漢山河)라 칭하고 중사(中祀)에 올렸으나, 지금은 소사(小祀)에 실려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포천에 이르기 18리, 서쪽으로 원평(原平)에 이르기 22리, 남쪽으로 광주에 이르기 47리, 북쪽으로 적성(積城)에 이르기 83리이다.
건원릉(健元陵)은 우리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을 장사지냈다.【부(府) 남쪽 검암산(儉岩山)의 기슭에 있으니, 자룡[坎山]에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능 남쪽에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능지기[陵直]·권무(權務) 2인과 수호군(守護軍) 1백 호(戶)를 두고, 매호(每戶)마다 밭 2결(結)을 주었으며, 동리에 재궁(齋宮)을 짓고 개경사(開慶寺)라 하여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4백 결을 주었다.】 낙천정(樂天亭)【부(府) 남쪽 황대산(皇臺山) 언덕에 있으니, 남쪽으로 한강에 임하였다. 우리 태종(太宗)이 거둥하여 계시던 곳이다.】 풍양 이궁(豐壤離宮)【부(府) 동남쪽에 있으니, 곧 풍양현(豐壤縣)의 옛터이며, 또한 태종이 거둥하여 계시던 곳이다.】
호수(戶數)가 1천 4백 81호, 인구가 2천 7백 26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백 33명, 선군(船軍)이 1백 32명이다.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4이니, 한(韓)·조(趙)·민(閔)·신(申)이요, 내성(來姓)이 5이니, 함(咸)【양근(楊根)에서 왔다.】·박(朴)【춘천(春川)에서 왔다.】·홍(洪)【남양(南陽)에서 왔다.】·최(崔)【수원(水原)에서 왔다.】·부(夫)【과천(果川)에서 왔다.】요, 망성(亡姓)이 2이니, 정(鄭)·예(艾)이다. 견주(見州)의 토성(土姓)이 7이니, 이(李)·김(金)·송(宋)·신(申)·백(白)·윤(尹)·피(皮)요, 사천현(沙川縣)의 토성(土姓)이 1이니, 경(耿)이며, 망성(亡姓)이 4이니, 이(李)·임(任)·송(宋)·허(許)이다. 풍양현(豐壤縣)의 토성(土姓)이 1이니, 조(趙)요, 망성(亡姓)이 4이니, 이(李)·강(姜)·윤(尹)·유(劉)이다. 인물(人物)은 중추원사 한산군 충정공(中樞院使漢山君忠靖公) 조인옥(趙仁沃)이다.【본조(本朝)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 태조 묘정(太祖廟庭)에 배향되었다.】
땅이 기름지고, 간전(墾田)이 1만 5천 1백 90결(結)이다.【논이 10분의 3이 좀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메밀·뽕나무요, 토공(土貢)은 느타리[眞茸]와 지초(芝草)이며, 토산(土産)은 송이[松茸]와 잣[松子]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부 북쪽 사천현(沙川縣) 한탄리[大灘里]에 있으니, 하품(下品)이다.】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부(府) 북쪽 소요산(消遙山) 아래에 있고,【중품이다.】 하나는 부(府) 동쪽 도혈리(陶穴里)에 있다.【하품이다.】
역(驛)이 6이니, 청파(靑坡)·노원(蘆原)·영서(迎曙)·평구(平丘)·구곡(仇谷)·쌍수(雙樹)요, 목장(牧場)이 2이니, 하나는 살고지들[箭串坪]이요,【부(府) 남쪽에 있으니, 동서가 7리요, 남북이 15리이다. 나라의 말을 놓아 먹인다.】 둘째는 녹양벌[綠楊坪]]이다.【부(府) 남쪽에 있으니, 동서가 5리요, 남북이 12리이다. 중군(中軍)과 좌군(左軍)의 말을 함께 놓아 먹인다.】 봉화(烽火)가 2곳이니, 대이산(大伊山)과【부(府) 동남쪽에 있으니, 북쪽으로 포천(抱川) 잉읍점(仍邑岾)에 응하고, 남쪽으로 가구산(加仇山)에 응한다.】 가구산(加仇山)이다.【부(府) 남쪽에 있으니, 북쪽으로 대이산(大伊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서울 목멱산에 응한다.】 회암사(檜巖寺)【천보산(天寶山) 아래에 있다. 불전(佛殿)과 승료(僧寮)가 수백 기둥이 되며, 승도(僧徒)들이 가리어 대가람(大迦藍)을 삼았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5백 결(結)을 주었다. 절에다 서번(西蕃)의 지공 화상(指空和尙)의 부도(浮屠)를 안치(安置)하였고, 비(碑)가 있다.】 소요사(逍遙寺)【소요산(消遙山) 허리에 있다. 태종(太宗) 3년 임오에 태조(太祖)가 절 남쪽 행전(行殿)에 머물러, 여러 달을 두고 〈절의〉 온갖 그림을 새롭게 하였으며, 금상(今上) 6년 갑진에 태조(太祖)의 원당(願堂)으로 하여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1백 50결(結)을 주었다.】 진관사(眞觀寺)【삼각산(三角山) 서남쪽에 있다. 나라에서 수륙재(水陸祭)를 지내며,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승가사(僧伽寺)【삼각산(三角山) 남쪽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1백 45결(結)을 주었다.】 중흥사(重興寺)【삼각산(三角山) 아래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2백 결(結)을 주었다.】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1이니, 원평(原平)이요, 현(縣)이 6이니, 고양(高陽)·교하(交河)·임진(臨津)·적성(積城)·포천(抱川)·가평(加平)이다.
【원전】 5 집 617 면


 

 

 

軍政編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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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捴戎廳
[北漢山城]

北漢○北漢山城在三角山溫祚舊基。肅宗辛卯。相臣李濡建請。築山城建行宮。峙餉糓,軍器。以爲保障之所。城周七千六百二十步。城廊一百二十一。將臺三。池二十六。井九十九。大門四。暗門十。倉庫七。大寺十一。小寺三。置管城所。 城餉。自宣惠廳劃送。城堞,軍器。訓,禁,御三營設倉分守。置經理廳。在鄕校洞。 以勾管矣英宗丁卯。以北漢當爲捴戎廳信地。特敎罷經理廳。合屬本廳。專管北漢。加設敎鍊官三員。仍差訓,禁,御三倉監官。○正宗壬寅。捴戎使李昌運作减額大節目。减經理軍官四員只存本廳軍官三員。 正宗癸丑。捴戎使李邦一以本廳凋殘。城堞修築。啓請還屬三軍門。管城所木代錢二百兩。取殖。補用於每年北漢治道。○公廨,寺刹修補時。添餉條,月課條,或空名帖,補土所錢等。請得以用。 別牙兵千捴管城將一員。正宗壬寅。以勿拘階梯。擇人自辟。專管糶糴。周年交遞定式。辛卯築城後。以曾經閫帥人啓下。始稱行宮所衛將。後稱都別將。壬寅。改稱管城將。英廟丁卯。罷經理廳合屬本廳後。中軍例兼。甲申。改軍制爲五營時。以防禦使履歷擇差。兼中部千捴。恒留本城。辛卯。因捴戎使金孝大所啓。管城將。依前以中軍兼差。正宗壬子。改軍制爲三營時。改號爲別牙兵千捴兼管城將。 把捴一員。哨官五員。別破陣哨官一員。守堞捴二員。敎鍊官四員。旗牌官五員。軍器監官一員。軍官三員。付料軍官二十員。每朔試射。計劃。付料。內山直監官三員並入。 門部將三員。守堞軍官二百人。散在畿邑。 山城員役四十六名。書員五名。庫直十一名。大廳直二名。使令五名。軍士十二名。門軍士十一名。 軍制。一司五哨。把下軍三十名。別破軍二百名。牙兵五哨。散在畿邑。 標下軍一百九名。十九名。有料。 ○置僧兵號曰緇營。在重興寺。 捴攝一人。本以原居僧差出矣。正宗丁巳。因水原留守趙心泰所啓。以龍珠寺僧輪差。 中軍僧一人。將校僧四十七人。有料。 僧軍三百七十二名。七十三名。有料。 太古寺。在太古臺下。一百三十六間。○藏經書,通史,古文,唐詩板。 重興寺。在登岸峯下。一百四十九間。○緇營所在。 輔國寺。在禁倉下。七十六間。 鎭國寺。在露積峯下中城門內。一百四間。 扶旺寺。在鵂巖峯下。一百十一間。 國寧寺。在義相峯下。七十間。 普光寺。在大城門下。七十五間。 元覺寺。在甑峯下。八十一間。 龍巖寺。在日出峯下。八十八間。 祥雲寺。在靈鷲峯下。八十九間。 西巖寺。在水口門內。閔漬菴舊基。○一百七間。 右十一寺。各置僧將一人。首僧一人。番僧三名。奉聖菴。在龜巖峯下。二十五間。 元曉菴。在元曉峯下。十間。 文殊菴。在文殊峯下。○行宮。在上元峯下。內正殿二十八間。行閣十五間。水剌間六間。廁三間。內門三間。外正殿二十八間。行閣十八間。中門三間。月廊二十間。外門四間。山亭門一間。 ○管城所。在上倉。大廳十八間。內衙十二間。餉米庫六十三間。軍器庫三間。執事廳三間。軍官廳四間。書員廳四間。庫直家五間。月廊二間。各門七。 中倉。大廳六間。餉米庫七十八間。庫直家五間。大門二間。 下倉。大廳六間。餉米庫三十四間。庫直家八間。大門二間。 別庫。在行宮傍。○大廳三間。餉米庫十二間。庫直家五間。大門二間。 右。上倉,中倉,下倉,別庫。謂之管城四倉。○別舘四。山暎樓十間。射亭六間。東將臺三間。御製碑閣一間。○東將臺。壬辰。因特敎建置。 訓倉。大廳十八間。內衙八間。餉米庫六十間。軍器庫十六間。中軍所四間。郞廳所五間。書員廳五間。拘留間三間。行閣十一間。 禁倉。大廳十八間。內衙六間。餉米庫五十四間。軍器庫十三間。中軍所五間。書員廳四間。月廊八間。 御倉。大廳十八間。內衙七間。餉米庫四十八間。軍器庫十間。中軍所四間。書員廳二間。月廊十二間。 ○山城附近之地。分定外字內。新屯,淸潭,西門下,橋峴下爲訓倉字內。彌阿里,靑水洞,加五里,牛耳洞爲禁倉字內。津寬里,小興洞,女妓所,三千洞爲御倉字內。 ○屬屯四。甲士屯。在楊州樓院。○本。兵曹牧場。肅宗甲午。以本屯當爲北漢犄角之勢。筵禀請得。屬之北漢。隨起收稅。置還米盡分取耗。接濟屯屬。餘數添付元還。 水逾屯。在楊州。附於甲士屯。○本。粮餉廳屯。景宗辛丑。經理堂上閔鎭厚請得。屬之北漢。置還租。 黔巖屯。在楊州黔巖。○肅宗己亥。買置。置還租盡分取耗。接濟屯屬。 新屯。在北漢西門外。附於黔巖屯。○肅宗庚子。經理堂上閔鎭遠買置。 ○甲士,黔巖二屯皆有別將。黔巖別將。英宗辛巳。以故別將李聖臣子寅亮永差別將。代代承差事。受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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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漢山城]

北漢○北漢山城在三角山溫祚舊基。肅宗辛卯。相臣李濡建請。築山城建行宮。峙餉糓,軍器。以爲保障之所。城周七千六百二十步。城廊一百二十一。將臺三。池二十六。井九十九。大門四。暗門十。倉庫七。大寺十一。小寺三。置管城所。 城餉。自宣惠廳劃送。城堞,軍器。訓,禁,御三營設倉分守。置經理廳。在鄕校洞。 以勾管矣英宗丁卯。以北漢當爲捴戎廳信地。特敎罷經理廳。合屬本廳。專管北漢。加設敎鍊官三員。仍差訓,禁,御三倉監官。○正宗壬寅。捴戎使李昌運作减額大節目。减經理軍官四員只存本廳軍官三員。 正宗癸丑。捴戎使李邦一以本廳凋殘。城堞修築。啓請還屬三軍門。管城所木代錢二百兩。取殖。補用於每年北漢治道。○公廨,寺刹修補時。添餉條,月課條,或空名帖,補土所錢等。請得以用。 別牙兵千捴管城將一員。正宗壬寅。以勿拘階梯。擇人自辟。專管糶糴。周年交遞定式。辛卯築城後。以曾經閫帥人啓下。始稱行宮所衛將。後稱都別將。壬寅。改稱管城將。英廟丁卯。罷經理廳合屬本廳後。中軍例兼。甲申。改軍制爲五營時。以防禦使履歷擇差。兼中部千捴。恒留本城。辛卯。因捴戎使金孝大所啓。管城將。依前以中軍兼差。正宗壬子。改軍制爲三營時。改號爲別牙兵千捴兼管城將。 把捴一員。哨官五員。別破陣哨官一員。守堞捴二員。敎鍊官四員。旗牌官五員。軍器監官一員。軍官三員。付料軍官二十員。每朔試射。計劃。付料。內山直監官三員並入。 門部將三員。守堞軍官二百人。散在畿邑。 山城員役四十六名。書員五名。庫直十一名。大廳直二名。使令五名。軍士十二名。門軍士十一名。 軍制。一司五哨。把下軍三十名。別破軍二百名。牙兵五哨。散在畿邑。 標下軍一百九名。十九名。有料。 ○置僧兵號曰緇營。在重興寺。 捴攝一人。本以原居僧差出矣。正宗丁巳。因水原留守趙心泰所啓。以龍珠寺僧輪差。 中軍僧一人。將校僧四十七人。有料。 僧軍三百七十二名。七十三名。有料。 太古寺。在太古臺下。一百三十六間。○藏經書,通史,古文,唐詩板。 重興寺。在登岸峯下。一百四十九間。○緇營所在。 輔國寺。在禁倉下。七十六間。 鎭國寺。在露積峯下中城門內。一百四間。 扶旺寺。在鵂巖峯下。一百十一間。 國寧寺。在義相峯下。七十間。 普光寺。在大城門下。七十五間。 元覺寺。在甑峯下。八十一間。 龍巖寺。在日出峯下。八十八間。 祥雲寺。在靈鷲峯下。八十九間。 西巖寺。在水口門內。閔漬菴舊基。○一百七間。 右十一寺。各置僧將一人。首僧一人。番僧三名。奉聖菴。在龜巖峯下。二十五間。 元曉菴。在元曉峯下。十間。 文殊菴。在文殊峯下。○行宮。在上元峯下。內正殿二十八間。行閣十五間。水剌間六間。廁三間。內門三間。外正殿二十八間。行閣十八間。中門三間。月廊二十間。外門四間。山亭門一間。 ○管城所。在上倉。大廳十八間。內衙十二間。餉米庫六十三間。軍器庫三間。執事廳三間。軍官廳四間。書員廳四間。庫直家五間。月廊二間。各門七。 中倉。大廳六間。餉米庫七十八間。庫直家五間。大門二間。 下倉。大廳六間。餉米庫三十四間。庫直家八間。大門二間。 別庫。在行宮傍。○大廳三間。餉米庫十二間。庫直家五間。大門二間。 右。上倉,中倉,下倉,別庫。謂之管城四倉。○別舘四。山暎樓十間。射亭六間。東將臺三間。御製碑閣一間。○東將臺。壬辰。因特敎建置。 訓倉。大廳十八間。內衙八間。餉米庫六十間。軍器庫十六間。中軍所四間。郞廳所五間。書員廳五間。拘留間三間。行閣十一間。 禁倉。大廳十八間。內衙六間。餉米庫五十四間。軍器庫十三間。中軍所五間。書員廳四間。月廊八間。 御倉。大廳十八間。內衙七間。餉米庫四十八間。軍器庫十間。中軍所四間。書員廳二間。月廊十二間。 ○山城附近之地。分定外字內。新屯,淸潭,西門下,橋峴下爲訓倉字內。彌阿里,靑水洞,加五里,牛耳洞爲禁倉字內。津寬里,小興洞,女妓所,三千洞爲御倉字內。 ○屬屯四。甲士屯。在楊州樓院。○本。兵曹牧場。肅宗甲午。以本屯當爲北漢犄角之勢。筵禀請得。屬之北漢。隨起收稅。置還米盡分取耗。接濟屯屬。餘數添付元還。 水逾屯。在楊州。附於甲士屯。○本。粮餉廳屯。景宗辛丑。經理堂上閔鎭厚請得。屬之北漢。置還租。 黔巖屯。在楊州黔巖。○肅宗己亥。買置。置還租盡分取耗。接濟屯屬。 新屯。在北漢西門外。附於黔巖屯。○肅宗庚子。經理堂上閔鎭遠買置。 ○甲士,黔巖二屯皆有別將。黔巖別將。英宗辛巳。以故別將李聖臣子寅亮永差別將。代代承差事。受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