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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三角山記

아베베1 2012. 11. 16. 01:03

 

 

 

이익선생님의 삼각산기 (스크랩) 

星湖先生全集卷之五十三

 
遊三角山記 a_199_465c


按國誌三角一名負兒。負兒之山。爲漢都宗。蓋自道峯走而南。至白雲峯而始特。白雲之南有萬景。東有仁壽。皆高199_465d與白雲齊。而仁壽尤削立矗矗。人不得緣。望之最秀絶。實與右二者並峙而得三角之號者也。西落露積峯。峯之下爲中興洞。中興寺在焉。東爲鷲峯。轉南迤爲嶺。嶺曰釋迦。自嶺以東曰漕溪。漕溪寺在焉。寺有瀑。嶺之西歧爲羅漢諸峯。與露積右麓。結襘於中興洞口。此古北漢城之址也。嶺之直南爲普賢諸峯。駸駸而列仁王山。此國朝萬世鞏基。今不敢盡記。普賢之西爲文殊菴。菴之水由蕩春臺入于漢。此其大槩也。余於丁亥仲春。將往遊。願從者一人。遂與之偕。庚子發于家。辛丑由東小門緩步而入漕溪洞。有入山詩一律。登步虛閣。觀十一級瀑。又有觀瀑詩一律。轉199_466a入漕溪寺寄宿。有次澄上人詩軸詩一律。遲明逾釋迦嶺。望三角諸峯。入中興寺始朝飯。遇從祖孫宗煥與之語。仍欲登白雲峯。冰雪尙未釋。路塞不可上。有望白雲臺詩一絶。循內城遺基。觀石門轉入文殊菴。有文殊菴詩一絶。登菴之右巒眺西海。仍午餐于菴中。又陟普賢峯。俯王城。有普賢峯詩一律。亭午遵蕩春臺而下。有出山詩一律。遂由國之北門而還。

세종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도 한성부

◎ 경도 한성부(京都漢城府)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이니, 일명(一名) 북한산군(北漢山郡)이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372) 임신에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와서 도읍을 정하여【남한산은 지금의 광주(廣州).】 1백 5년을 지내고, 문주왕(文周王)이 고구려의 난을 피하여 고마나루[熊津]로 옮겨 도읍하였고, 고려 초에 양주(楊州)로 고쳤다. 숙종(肅宗) 때 술사(術士) 사의령(司儀令) 김위제(金謂磾)가 옥룡 선사(玉龍禪師)의 《도선밀기(道詵密記)》를 증거로 하여 아뢰기를,
“양주(楊州)에 목멱양(木覓壤)이 있는데,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합니다.”
하고, 일자(日者) 소부감(少府監) 문상(文象)이 따라서 그 말대로 아뢰니, 4년 기묘 9월에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땅을 살펴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해서, 5년 신사에 시작하여 9년 갑신에 역사를 마치니, 곧 송(宋)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1104)이다. 8월에 임금이 와서 살펴보고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시켰다. 이로부터 인종(仁宗)·의종(毅宗)·충렬왕(忠烈王)·공민왕(恭愍王)·공양왕(恭讓王)이 모두 순행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충렬왕 34년 무신에【곧 원(元)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元年).】 한양부(漢陽府)로 고쳐서 부윤(府尹)·판관(判官)을 두었고, 본조(本朝)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 3년 갑술【곧 명(明)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27년.】 10월 갑오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쳐서, 판사(判事)·윤(尹)·소윤(少尹)·판관(判官)·참군(參軍)을 두고, 을해 2월에 비로소 종묘(宗廟)와 궁실(宮室)을 경영하여 9월에 모두 낙성되었다.
도성(都城)의 둘레가 9천 9백 75보(步)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가 되며,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홍화문(弘化門)【곧 동소문(東小門).】, 동남(東南)을 광희문(光熙門)【곧 수구문(水口門).】, 서남(西南)을 숭례문(崇禮門)【곧 남대문.】, 소북(小北)을 소덕문(昭德門)【곧 서소문(西小門).】,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태조(太祖) 5년 병자 봄에 각도의 민정(民丁) 11만 8천 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 7백 59명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금상(今上) 4년 임인에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 성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3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
동부(東部) 12방(坊)【숭신(崇信)·연화(蓮花)·서운(瑞雲)·덕성(德成)·숭교(崇敎)·연희(燕喜)·관덕(觀德)·천달(泉達)·흥성(興盛)·창선(彰善)·건덕(建德)·인창(仁昌).】
남부(南部) 11방(坊)【광통(廣通)·호현(好賢)·명례(明禮)·대평(大平)·훈도(薰陶)·성명(誠明)·낙선(樂善)·정심(貞心)·명철(明哲)·성신(誠身)·예성(禮成).】
서부(西部) 8방(坊)【인달(仁達)·적선(積善)·여경(餘慶)·황화(皇華)·양생(養生)·신화(神化)·반석(盤石)·반송(盤松).】
북부(北部) 10방(坊)【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嘉會)·안국(安國)·관광(觀光)·진장(鎭長)·명통(明通)·준수(俊秀)·순화(順化)·의통(義通).】
중부(中部) 8방(坊)【징청(澄淸)·서린(瑞麟)·수진(壽進)·견평(堅平)·관인(寬仁)·경행(慶幸)·정선(貞善)·장통(長通).】
종묘(宗廟)【중부 정선방(貞善坊)과 동부 연화방(蓮花坊) 중앙에 있으니, 담 둘레에 소나무를 심었다.】 영녕전(永寧殿)【종묘의 담 안 서쪽에 있다. 태조(太祖)가 하늘의 명[天命]을 받아 〈왕이 되매〉 왕(王)으로 목(穆)·익(翼)·도(度)·환(桓)의 네 조상을 추존하고, 종묘를 세워 제사를 받들다가, 태종(太宗)을 부묘(祔廟)하게 되매, 목조(穆祖)를 체천(遞遷)해야 하므로, 따로 이 전각을 세우고 목조의 신주를 옮겨 모시었으며, 익(翼)·도(度)·환(桓)의 세 조상도 또한 이곳에 차례로 옮겨 모시었다.】 사직(社稷)【인달방(仁達坊)에 있으니, 둘레의 담에 소나무를 심었다.】 문소전(文昭殿)【처음에 문소전을 창덕궁 서북쪽에 세우고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과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화상[神御]을 모시고, 또 광효전(廣孝殿)을 창덕궁 동북쪽에 세우고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과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화상을 모시었다가, 그 후에 송(宋)나라 경령궁(景靈宮)의 제도에 의하여 원묘(原廟)를 경복궁 성안 동북쪽에 고쳐 지었는데, 앞에는 묘(廟), 뒤에는 침(寢)으로 하여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르고, 이름을 문소전이라 하여, 두 임금(태조·태종)의 화상을 옮겨 모시었다.】 문묘(文廟)【숭교방(崇敎坊)에 있고, 뜰에 비(碑)가 있다. 성균관 학관(成均館學官)을 두어 선비를 가르치는데, 2백 사람으로써 액수를 정하였다. 옆에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섬학전(贍學田) 1천 35결(結)을 주었고, 금상(今上) 13년(1431) 신해에 9백 65결을 더 주었다.】
경복궁(景福宮)【백악산(白岳山) 남쪽에 있다.】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 동쪽 작은 침전(寢殿)을 연생전(延生殿), 서쪽 작은 침전을 경성전(慶成殿), 또 그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정사를 보는 곳.】,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조회를 받는 곳.】, 안문[內門]을 근정(勤政), 안 동문(東門)을 일화(日華), 동각루(東閣樓)를 융문(隆文), 서각루(西閣樓)를 융무(隆武)라 한다.
영제교(永濟橋)【근정문 밖에 있다.】 홍례문(弘禮門)【영제교 남쪽에 있다.】 경회루(慶會樓)【궁 서쪽 담안에 있는데, 둘레가 못으로 되어 있다.】 동궁(東宮)【건춘문(建春門) 안에 있다.】
궁성(宮城)【둘레가 1천 8백 13보(步)이다.】 동문(東門)을 건춘(建春), 서문(西門)을 영추(迎秋), 남문(南門)을 광화(光化)라 한다.【문루(門樓)가 2층이요, 누 위에 종고(鍾鼓)를 달고 새벽과 저녁에 울리어 때알림을 엄하게 한다. 문 남쪽 좌우에 의정부(議政府)·중추원(中樞院)·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 각사(各司)의 공해(公廨)를 벌려 놓았다.】
창덕궁(昌德宮)【정선방(貞善坊)에 있다. 태종(太宗) 5년(1405) 을유에 세워서 이궁(離宮)으로 삼았다.】 인정전(仁政殿)【조회를 받는 곳.】 안문을 인정(仁政), 중문을 진선(進善), 바깥문을 돈화(敦化)라 한다.
광연루(廣延樓)【궁 동쪽에 있다.】 수강궁(壽康宮)【연화방(蓮花坊)에 있다. 태종(太宗) 18년(1418) 무술에 왕위를 물려주고, 따로 이 궁을 지어 거처하였다.】 선양정(善養亭)【궁 남쪽 언덕에 있다.】
혜정교(惠政橋)【중부 서린방(瑞麟坊) 북쪽에 있다.】 운종가(雲從街)【곧 서린방과 수진방(壽進坊)의 중앙이다.】 통운교(通雲橋)【관인방(寬仁坊)남쪽에 있다.】 북광통교(北廣通橋)【광통방 북쪽에 있다.】
큰 저자[大市]【중부 장통방(長通坊)과 경행방(慶幸坊) 중앙에 있다.】 종루(鐘樓)【도성 중앙에 있다. 2층으로 되어 있고, 누 위에 종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깨우쳐 준다.】 도성 좌우 행랑(都城左右行廊)【대략 2천 27간이다.】
태평관(太平館)【숭례문(崇禮門) 안 황화방(皇華坊)에 있다. 이곳에서 중국 사신(使臣)을 접대하는데, 옆에다 별전(別殿)을 지어서 임금이 쉬는 곳으로 삼았다.】 모화관(慕華館)【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있다. 본이름은 모화루(慕華樓)이니, 중국 사신(使臣)을 영접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금상(今上) 12년(1430) 경술에 고쳐 짓고 관(館)으로 하였다. 남쪽에 네모진 못이 있는데, 낮은 담을 쌓고 버들을 심었다.】
오부(五部)의 호수(戶數)는 1만 7천 15호, 성저십리(城底十里)의【동쪽은 양주(楊州) 송계원(松溪院) 및 대현(大峴)에 이르고, 서쪽은 양화도(楊花渡) 및 고양(高陽) 덕수원(德水院)에 이르고, 남쪽은 한강 및 노도(露渡)에 이른다.】 호수는 1천 7백 79호이다.
간전(墾田)은 1천 4백 15결(結)이다.
삼각산(三角山)【도성 밖 정북(正北)에 있으니, 일명(一名)은 화산(華山)이다.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 일컬었다.】 도성(都城)의 진산(鎭山)은 백악(白岳)이다.【산정(山頂)에 사당[祠宇]이 있어서 삼각산의 신을 제사 지내는데, 백악을 붙여서 지낸다. 중사(中祀)로 한다.】
목멱사(木覓祠)【도성 남산 꼭대기에 있으니, 소사(小祀)이다. 봉화(烽火)가 5곳이 있으니, 제일(第一)은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江原道)로부터 온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 제이(第二)는 경상도로부터 온 광주(廣州) 천천산(穿川山) 봉화에 응하고, 제삼(第三)은 평안도·황해도로부터 육로(陸路)로 온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제사(第四)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海路)로 온 무악 서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제오(第五)는 전라도와 충청도로부터 온 양천(陽川) 개화산(開花山) 봉화와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 또 강원도로부터 온 풍양(豐壤) 대이산(大伊山) 봉화에 응한다.】 무악(毋岳)【모화관 서쪽에 있다. 위에 봉화가 두곳이 있으니, 동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육로로 온 고양(高陽) 소달산(所達山) 봉화에 응하고, 서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로 온 영서역(迎曙驛) 서산(西山) 봉화에 응한다.】
연희궁(衍禧宮)【무악 남쪽에 있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일찍이 “이 땅이 무악의 명당(明堂)이 되어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하다.”고 하였는데, 세종 3년(1421) 신축에 태종이 그 말을 생각하고 이궁(離宮)을 짓게 하였다.】
우사단(雩祀壇)·동방 토룡단(東方土龍壇)·선농단(先農壇)【모두 흥인문(興仁門) 밖 평촌(坪村)에 있다.】 마보단(馬步壇)·마조단(馬祖壇)·선목단(先牧壇)·마사단(馬社壇)【모두 흥인문 밖 사근사리(沙斤寺里)에 있다.】 선잠단(先蠶壇)【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에 있다.】 노인성단(老人星壇)·원단(圓壇)·영성단(靈星壇)·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에 있다.】 남방 토룡단(南方土龍壇)【한강 북쪽에 있다.】 서방 토룡단(西方土龍壇)가을두(加乙頭)에 있다.】 북교단(北郊壇)·북방 토룡단(北方土龍壇)·여제단(厲祭壇)【모두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다.】
동적전(東籍田)【흥인문 밖에 있다. 종묘·사직·산천(山川) 백신(百神)의 제미[棄盛]를 제공한다. 또 구도(舊都)의 문교(門郊)에 서적전(西籍田)이 있다.】
한강도(漢江渡)【목멱산 남쪽에 있다. 너비 2백 보. 예전에는 사평도(沙平渡)또는 사리진도(沙里津渡)라 하였다. 북쪽에 단(壇)이 있는데,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며, 중사(中祀)로 한다. 도승(渡丞) 1인을 두어서 드나드는 사람을 조사한다. 나루 머리[渡頭]에 제천정(濟川亭)이 있다.】 용산강(龍山江)【숭례문 밖 서남쪽 9리에 있다. 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 군자 강감(軍資江監)과 풍저 강창(豐儲江倉)이 있다.】 서강(西江)【서소문 밖 11리에 있다. 또한 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 광흥 강창(廣興江倉)과 풍저 강창(豐儲江倉)이 있다.】 가을두(加乙頭)【서소문 밖 12리에 있다. 오똑하고 기이하게 빼어났고, 남쪽으로 큰 강을 임하여 벽처럼 서서, 백 길이나 되는데, 나무를 휘어잡고 아래를 굽어보면 터럭끝이 오싹해진다.】
빙고(氷庫) 2【곧 예전의 얼음집[淩陰]이다. 하나는 두모포(豆毛浦)에 있으니, 나라 제향에 쓸 얼음을 바치고, 하나는 한강 아래 백목동(栢木洞)에 있으니, 어선(御膳), 나라 손님 접대 또는 백관(百官)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바친다.】
조지소(造紙所)【장의사동(壯義寺洞)에 있다. 처음에는 사대(事大)의 표(表)·전(箋)·주(奏)·계(啓)·자문(咨文)에 쓸 종이를, 전라도 전주(全州)와 남원부(南原府)에서 해마다 세밑에 바쳤는데, 많이 쓰는 것을 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금상 2년에 특명으로 조지소를 두어 종이를 만들었는데, 품질이 옛 것에 견주어 훨씬 곱고 좋았다. 이로 말미암아 전주와 남원 두 부(府)의 세공(歲貢) 독촉의 폐단이 비로소 없어졌다.】 물방아[水輾]【장의사 동구(壯義寺洞口)에 있다.】
동활인원(東活人院)【동소문 밖에 있다.】 서활인원(西活人院)【서소문 밖에 있다. 옛 이름은 대비원(大悲院)이다.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의원과 무당을 두어서, 서울 안에 병들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모두 이곳에 모아 놓고, 죽·밥·국·약을 주며, 아울러 옷·이불·자리를 주어 편하도록 보호해 주고, 만일 죽는 이가 있으면 잘 묻어 준다.】
귀후소(歸厚所)【용산강 가에 있다.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중들로 일을 주장하게 하여, 관(棺)·곽(槨)을 만들어 팔아서 초상집의 급작스럽게 당한 일을 예비하게 한다.】
흥천사(興天寺)【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선종(禪宗)에 속한다. 3층탑이 있고, 〈그 속에〉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사리(舍利)를 안치하였다. 태조가 세우고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흥덕사(興德寺)【연희방(燕喜坊)에 있는데, 교종(敎宗)에 속한다. 태조가 궁(宮)을 버리고 절을 만들어서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장의사(壯義寺)【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데, 교종(敎宗)에 속한다. 밭 2백 50결을 주었다.】
봉경(封境)【동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기 5백 40리, 서쪽으로 풍천(豐川)에 이르기 6백 리, 남쪽으로 해진(海珍)에 이르기 9백 80리, 북쪽으로 여영(閭迎)에 이르기 1천 4백 70리, 동북쪽으로 경원(慶源)에 이르기 2천 1백 90리, 동남쪽으로 동래(東萊)에 이르기 8백 70리, 서남쪽으로 태안(泰安)에 이르기 3백 90리, 서북쪽으로 의주(義州)에 이르기 1천 1백 40리이다.】
【원전】 5 집 613 면


 

세종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기 / 양주 도호부

⊙ 양주 도호부(楊州都護府)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인데,【또는 북한산(北漢山)이라 한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취하여, 그 25년 신미에【곧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원년.】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도읍을 옮기어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蓋鹵王) 20년 을묘에【곧 송나라 폐제(廢帝) 원휘(元徽) 3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한성(漢城)을 에워싸니,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살해되매, 이 해에 그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기었다. 그 뒤 79년, 신라 진흥왕(眞興王) 13년 계유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쪽 변방을 취하고, 15년 을해에 왕(王)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이르러 국경[封彊]을 정하였며, 17년 정축에【곧 진(陳)나라 고조(高朝) 영정(永貞) 원년.】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14년 병신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쳤다. 고려가 양주(楊州)로 고치어,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는데, 양주 좌신책군(楊州左神策軍)이라 하여, 해주 우신책군 절도사(海州右神策軍節度使)와 더불어 이보(二輔)를 삼았다. 현종(顯宗) 3년 임자에 이보(二輔)와 십이절도사(十二節度使)를 폐하여 안무사(按撫使)로 고치고, 9년 무오에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가, 숙종(肅宗) 9년 갑신에【곧 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시켰으며,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곧 원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한양부(漢陽府)로 고쳤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 갑술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고 부치(府治)를 동촌(東村) 한골[大洞里]에 옮겨, 다시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가, 4년 을해에 부(府)로 승격시켜 부사(府使)를 두었고, 정축에 또 부치(府治)를 견주(見州) 옛터로 옮겼으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다. 속현(屬縣)이 3이다. 견주(見州)는 본래 고구려의 매초현(賣肖縣)인데, 신라가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견주(見州)로 고치어,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별호(別號)는 창화(昌化)이니, 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사천현(沙川縣)은 본래 고구려의 내을매현(內乙買縣)인데, 신라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견성군(堅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으며, 고려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풍양현(豊壤縣)은 본래 고구려의 골의노현(骨衣奴縣)인데, 신라가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풍양현(豐壤縣)으로 고쳐,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포천(抱川)에 옮겨 붙였으며, 금상(今上) 원년(元年) 기해에 다시 본부(本府)에 붙였다.
삼각산(三角山)【부(府) 남쪽에 있다. 일명(一名)은 화산(華山)이니, 3봉우리가 우뚝 빼어나서 높이 하늘에 들어가 있다.】 오봉산(五峯山)【부(府) 남쪽에 있다.】 천보산(天寶山)【부(府) 동쪽에 있다.】 소요산(消遙山)【부(府) 북쪽에 있다.】양진(楊津)【부(府) 남쪽에 있으니, 곧 한강[漢水]의 남쪽이다. 단(壇)을 쌓고 용왕(龍王)에게 제사지내는데, 봄·가을의 가운뎃달[仲月]에 〈나라에서〉 향(香)·축(祝)을 내리어 제사지낸다. 신라 때에는 북독 한산하(北瀆漢山河)라 칭하고 중사(中祀)에 올렸으나, 지금은 소사(小祀)에 실려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포천에 이르기 18리, 서쪽으로 원평(原平)에 이르기 22리, 남쪽으로 광주에 이르기 47리, 북쪽으로 적성(積城)에 이르기 83리이다.
건원릉(健元陵)은 우리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을 장사지냈다.【부(府) 남쪽 검암산(儉岩山)의 기슭에 있으니, 자룡[坎山]에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능 남쪽에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능지기[陵直]·권무(權務) 2인과 수호군(守護軍) 1백 호(戶)를 두고, 매호(每戶)마다 밭 2결(結)을 주었으며, 동리에 재궁(齋宮)을 짓고 개경사(開慶寺)라 하여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4백 결을 주었다.】 낙천정(樂天亭)【부(府) 남쪽 황대산(皇臺山) 언덕에 있으니, 남쪽으로 한강에 임하였다. 우리 태종(太宗)이 거둥하여 계시던 곳이다.】 풍양 이궁(豐壤離宮)【부(府) 동남쪽에 있으니, 곧 풍양현(豐壤縣)의 옛터이며, 또한 태종이 거둥하여 계시던 곳이다.】
호수(戶數)가 1천 4백 81호, 인구가 2천 7백 26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백 33명, 선군(船軍)이 1백 32명이다.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4이니, 한(韓)·조(趙)·민(閔)·신(申)이요, 내성(來姓)이 5이니, 함(咸)【양근(楊根)에서 왔다.】·박(朴)【춘천(春川)에서 왔다.】·홍(洪)【남양(南陽)에서 왔다.】·최(崔)【수원(水原)에서 왔다.】·부(夫)【과천(果川)에서 왔다.】요, 망성(亡姓)이 2이니, 정(鄭)·예(艾)이다. 견주(見州)의 토성(土姓)이 7이니, 이(李)·김(金)·송(宋)·신(申)·백(白)·윤(尹)·피(皮)요, 사천현(沙川縣)의 토성(土姓)이 1이니, 경(耿)이며, 망성(亡姓)이 4이니, 이(李)·임(任)·송(宋)·허(許)이다. 풍양현(豐壤縣)의 토성(土姓)이 1이니, 조(趙)요, 망성(亡姓)이 4이니, 이(李)·강(姜)·윤(尹)·유(劉)이다. 인물(人物)은 중추원사 한산군 충정공(中樞院使漢山君忠靖公) 조인옥(趙仁沃)이다.【본조(本朝)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 태조 묘정(太祖廟庭)에 배향되었다.】
땅이 기름지고, 간전(墾田)이 1만 5천 1백 90결(結)이다.【논이 10분의 3이 좀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메밀·뽕나무요, 토공(土貢)은 느타리[眞茸]와 지초(芝草)이며, 토산(土産)은 송이[松茸]와 잣[松子]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부 북쪽 사천현(沙川縣) 한탄리[大灘里]에 있으니, 하품(下品)이다.】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부(府) 북쪽 소요산(消遙山) 아래에 있고,【중품이다.】 하나는 부(府) 동쪽 도혈리(陶穴里)에 있다.【하품이다.】
역(驛)이 6이니, 청파(靑坡)·노원(蘆原)·영서(迎曙)·평구(平丘)·구곡(仇谷)·쌍수(雙樹)요, 목장(牧場)이 2이니, 하나는 살고지들[箭串坪]이요,【부(府) 남쪽에 있으니, 동서가 7리요, 남북이 15리이다. 나라의 말을 놓아 먹인다.】 둘째는 녹양벌[綠楊坪]]이다.【부(府) 남쪽에 있으니, 동서가 5리요, 남북이 12리이다. 중군(中軍)과 좌군(左軍)의 말을 함께 놓아 먹인다.】 봉화(烽火)가 2곳이니, 대이산(大伊山)과【부(府) 동남쪽에 있으니, 북쪽으로 포천(抱川) 잉읍점(仍邑岾)에 응하고, 남쪽으로 가구산(加仇山)에 응한다.】 가구산(加仇山)이다.【부(府) 남쪽에 있으니, 북쪽으로 대이산(大伊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서울 목멱산에 응한다.】 회암사(檜巖寺)【천보산(天寶山) 아래에 있다. 불전(佛殿)과 승료(僧寮)가 수백 기둥이 되며, 승도(僧徒)들이 가리어 대가람(大迦藍)을 삼았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5백 결(結)을 주었다. 절에다 서번(西蕃)의 지공 화상(指空和尙)의 부도(浮屠)를 안치(安置)하였고, 비(碑)가 있다.】 소요사(逍遙寺)【소요산(消遙山) 허리에 있다. 태종(太宗) 3년 임오에 태조(太祖)가 절 남쪽 행전(行殿)에 머물러, 여러 달을 두고 〈절의〉 온갖 그림을 새롭게 하였으며, 금상(今上) 6년 갑진에 태조(太祖)의 원당(願堂)으로 하여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1백 50결(結)을 주었다.】 진관사(眞觀寺)【삼각산(三角山) 서남쪽에 있다. 나라에서 수륙재(水陸祭)를 지내며,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승가사(僧伽寺)【삼각산(三角山) 남쪽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1백 45결(結)을 주었다.】 중흥사(重興寺)【삼각산(三角山) 아래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2백 결(結)을 주었다.】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1이니, 원평(原平)이요, 현(縣)이 6이니, 고양(高陽)·교하(交河)·임진(臨津)·적성(積城)·포천(抱川)·가평(加平)이다.
【원전】 5 집 617 면


[주D-001]한골[大洞里] : 곧 성동구 구의동의 항골.
[주D-002]정축 : 6년.
[주D-003]무오 : 9년.
[주D-004]무오 : 9년.
[주D-005]무오 : 9년.
[주D-006]살고지들[箭串坪] : 뚝섬.
[주D-007]녹양벌[綠楊坪] : 의정부.

 

 

訥齋集卷之二 南原梁誠之著
 奏議
便宜二十四事 春秋大射。增置五京。嶽鎭海瀆。設蕃部樂。議行冠禮。定服色。禁服妖。祭前代君相。護前代陵墓。文廟從祀。武成立廟。配享功臣。文崔立祠。侍臣蔭子。文武科法。遣子入學。革其人法。議罷分臺。州郡奴婢。區處白丁。諸州判官。諸鎭置衛。京都四輔。諸道置鎭。○丙子三月二十八日。以集賢殿直提學上。 a_009_298a


臣伏覩主上殿下以上聖之資。光登大位。古今治亂之迹。民俗艱難之事。靡不洞照。宵旰圖009_298b治。以基我朝鮮億萬年太平之業。誠三韓一盛際也。方今朝廷得失。民間利病。大臣謀之。臺諫論之。其他侍從之職。在於論思。臣以庸劣獲侍經幄。愧無寸效上補聖德。凡國家小大之事。罔不商確於微衷。而思有以裨益乎萬一。敢將便宜二十四事。條錄以獻。伏惟聖鑑財幸。
一。春秋大射。盖金人承遼俗。於三月三日。九月九日。拜天射柳。此雖非中原之制。亦藩國之盛事也。我東方雄據海東。自三國至于前朝。郊天饗帝。無不爲之。今固不能悉遵其舊。稍倣遼金009_298c故事。於三月三日。九月九日。親幸郊外。行大射禮。歲以爲常。如是則庶幾張皇我武。士氣亦增。而自成一國一代之風俗矣。
一。增置五京。盖遼金渤海。並建五京。前朝又建四京。而本朝則只有漢城,開城兩京而已。以大東山海之險。州府之盛。而只置兩京。豈不次哉。况元世祖許我以儀從本俗。高皇帝使我以自爲聲敎。是東郊之地。固非腹裏比也。乞以京都爲上京。漢城府,開城府爲中京。屬京畿右道。以慶州爲東京。全州爲南京。平壤爲西京。咸興009_298d爲北京。各設土官。加定軍兵。如是則庶幾得形勢之勝。而緩急亦足以賴矣。
一。嶽鎭海瀆。盖一代之興。必有一代之制。本朝嶽鎭海瀆名山大川之祀。皆倣三國及前朝之舊而爲之。多有可議者焉。龍興江。我太祖興運之地。至於妙香山。檀君所起。九月山。有檀君祠。太白山。神祠所在。金剛山。名聞天下。長白山。在先春嶺之南。甲山之北。實爲國之北嶽。臨津。國之西關。龍津。國之東關。洛東江。慶尙大川。蟾津。全羅大川。博川江。卽古大寧江。以至菩提津009_299a五臺山。皆不載祀典。且東南西海神祠。皆自開城府而定之。亦乖方位。乞命禮官。詳加考定。以三角山爲中岳。金剛山爲東岳。九月山爲西岳。智異山爲南岳。長白山爲北岳。白嶽山爲中鎭。太白山爲東鎭。松岳山爲西鎭。錦城山爲南鎭。妙香山爲北鎭。又移祭東海神於江陵。西海於仁川。南海於順天。北海 鴨綠江上流 於甲山。以龍津爲東瀆。大同江爲西瀆。漢江爲南瀆。豆滿江爲北瀆。又以木覓山,紺岳山,五冠山,雞龍山,五臺山,雉岳山,義館嶺,竹嶺山,爲名山。熊津,臨津,菩009_299b提津,龍興江,淸川江,博川江,洛東江,蟾津爲大川。依例致祭。楊津二處。德津二處。伽倻津。主屹山。于弗山。牛耳山。鼻白山。長山串。阿斯津。松串。沸流水。九津。溺水可革。 以新一代祀典。是則山川之載祀典者。古今皆三十四。而仍舊者十七。移祭者四。新陞者十三。可永革者亦十三矣。
一。設蕃部樂。盖中國之樂。有雅樂,俗樂,女樂,夷部等樂。本朝所用。有軒架皷吹,童男妓女假面雜戲等制。大抵樂者。象成者也。自太祖乘運而興。太宗,世宗相繼而作。東隣獻琛。北國款塞。制禮作樂。雅俗皆正。而獨蕃樂未之議焉。方009_299c今聖上龍飛。新登大位。日本,女眞之使來賀卽位者。常數百人。稽顙闕庭。海東文物。未有盛於此時者也。乞以日本歌舞。爲東部樂。女眞歌舞。爲北部樂。日本樂。習於三浦倭人。女眞樂。習於五鎭野人。其衣冠制度。不爲怪異譏誚之狀。燕東使則兼用北樂而不用東樂。燕北使則兼用東樂而不用北樂。燕中國使則並用東北樂。于以用之朝廷。奏之宗廟。賁餙太平之治。以光我祖宗之業。不勝幸甚。
一。議行冠禮。盖古者。男子二十而冠。所以將責009_299d成人之道也。宋末。進士尹穀在圍城中。行冠禮。鄕人譏之。答云。欲令兒曹冠帶。見先人于地下。其重冠禮如此。東方則前朝明宗時。元子行冠禮。其後無聞焉。乞命禮官。博採古禮。兼考時王之制。上自宗室。下至士大夫之子弟。年十三。行冠禮。以笠子,頭巾,紗帽爲三加。或用紗帽,幞頭,梁冠。其未冠者。不許入學婚嫁從仕。于以克復先王之制。丕變外國之陋。幸甚。
一。定服色。盖服色之定。所以辨上下一風俗。不可不嚴也。元人尙白。大明尙黑。以至日本尙009_300a靑。皆有一定之制焉。吾東方朝冠公服。實倣中國。而常時好着白衣。任用雜色。甚爲鄙俚。乞依公服體制。堂上官以上爲一色。六品以上爲一色。流品員,成衆官,衣冠子弟爲一色。諸衛軍士爲一色。京外良人吏胥爲一色。公私賤口工匠爲一色。以此依品。漸次穿着。或純用一色。以齊國俗。至於女服。亦皆詳定。
一。禁服妖。盖衣裳之制。所以別男女貴賤也。非下民之所敢擅便者也。今國中女子喜着長衣。若男子然。或以長衣着於衣裳之間。成爲三層。009_300b轉相慕效。擧國皆然。疑此卽史文所謂服妖者也。前日。中原女子多服左袵之衣。見聞者皆以爲非吉兆。今女着男服。亦豈嘉祥也哉。况後世。唯女服上衣下裳。最爲近古。若如此從心爲之。則男女衣服。可以自相制度。無所不至矣。何至今不變乎。乞命攸司。定限禁止。其如前穿着者。收其衣。分置東西活人院。以爲貧病者之服。
一。祭前代君相。臣竊觀大明諸司職掌。遣官祭歷代君相。用以太牢。甚盛擧也。本朝以歷代君王。散祭所都。而或有當祭不祭者。又或無配009_300c享大臣。似爲欠典。乞每年春秋。於東郊合祭前朝鮮王檀君,後朝鮮王箕子,新羅始祖,太宗王,文武王,二王統合麗濟 高句麗始祖,嬰陽王,大敗隋兵 百濟始祖,高麗太祖,成宗,顯宗,忠烈王以上十二位。以新羅金庾信,金仁問,高句麗乙支文德,百濟黑齒常之,近日所定前朝配享十六臣及韓希愈,羅裕,禦哈丹有功 崔瑩,鄭地 禦倭寇有功 等配享。
一。護前代陵墓。臣觀續六典。高麗太祖,顯宗,文宗,元宗四陵。各定守護二戶。使禁樵採。太祖陵。加一戶。甚盛德也。然臣竊惟歷代君王。雖未能009_300d皆有功德於斯民。亦皆一國人民所共主也。其不省所在者已矣。其陵墓如古。而使狐狸穴於傍。樵採行於上。豈不可悶也哉。乞令有司。於前後朝鮮,三國。前朝所都開城,江華,慶州,平壤,公州,扶餘及金海,益山等處所在陵墓。仔細尋訪。其有功德者。置守陵三戶。別無功德者。置二戶。正妃陵墓。亦置一戶。略蠲征徭。禁其樵蘇。仍令所在官。春秋省視致祭。
一。文廟從祀。盖東方自箕子受封以後。洪範遺敎。久而不墜。唐爲君子之國。宋稱禮義之邦。文009_301a獻之美。侔擬中華。而配食文廟者。獨新羅之薜聦,崔致遠。高麗之安珦三人而已。臣聞學士雙冀在前朝。始設科擧。以振文風。文憲公崔冲又設九齋。以敎諸生。至於文忠公李齊賢,文忠公鄭夢周,本朝文忠公權近。其文章道德。人皆可以垂範萬世。乞皆配享先聖。以勸後人。若曰東方賢者。焉能如古之人。則孔孟之後。亦有程朱。且賢者如是其難也。則後人何學爲聖賢乎。中國之配享者。果皆如孔孟程朱乎。東方之士。皆不可如中國人乎。大抵人主須施一大政事。以009_301b示勸懲之意。然後可以動人觀聽而風移俗易矣。
一。武成立廟。盖文武之道。如天經地緯。不可偏廢。唐肅宗。尊太公爲武成王。立廟享祀。與文宣王比。後以歷代良將六十四人配享。吾東方先聖之祀。上自國學。下至州郡。而武成王無祠宇。只祭纛神四位。豈非闕典歟。今訓鍊觀。卽宋朝武學也。乞倂纛所于訓鍊觀而立武成廟。祭禮配食。略依文廟制度。又以新羅之金庾信。高句麗之乙支文德。高麗之庾黔弼,姜邯贊,楊䂓,尹009_301c瓘,趙冲,金就礪,金慶孫,朴犀,金方慶,安祐,金得培,李芳實,崔瑩,鄭地。本朝之河敬復,崔潤德配享。
一。配享功臣。盖本朝前後五功臣。皆屬忠義衛。三朝原從之人。亦皆宥罪錄後。與元之四㤼薜。宋之錄隨龍。恩無以加矣。然臣聞前朝配享大臣。稱爲功臣。每大恩例。必錄子孫。本朝五廟。俱有配位。皆功存王室。澤及生民者也。乞依五功臣例。或依原從諸人賜號。配享功臣。並令宥後世祿。且前朝及本朝將相有功德於民者之子009_301d孫。亦使搜訪。特加恩命。則前人感激於冥冥之中。而後人亦克勸於萬世矣。
一。文崔立祠。盖臣聞聖人之制祭禮也。法施於民則祀之。能禦大患則祀之。吾東方舊無木綿種。前朝文益漸。奉使留元。始得而種之。遂流遍一國。至今無貴賤男女。皆衣綿布。又自新羅只有砲石之制。而歷代無火藥之法。前朝末崔茂宣。始學火砲之法於元。東還而傳其術。至今軍陳之用。利不可言。茂宣之功。萬世除民害也。益漸之功。萬世興民利也。其澤被生民。豈曰小哉。009_302a乞於二人鄕貫。官立祠宇。春秋。令本官行祭。其子孫稱爲功臣。宥罪錄用。
一。侍臣蔭子。盖本朝承蔭之法。卽唐之資蔭。宋朝任子之意也。其待士大夫之恩至矣。然其法。三品以上官外。只許曾經臺諫政曹者之子承蔭。新參數日。纔拜監察。而蔭及子孫。而或有侍從數十年。蔭不及後者。誠爲可惜。况宋史以宰執,侍從,臺諫並言之。乞四品以下六品以上舘閣兩制。侍從諸臣之子。特許承蔭。公道幸甚。
一。文武科法。盖今文科初塲講經之時。四書五009_302b經外。如韓文,柳文等書。任意試講。實無定䂓。中塲則並試古賦。本非急務。又進士以此取之。終塲則諸史時務。雖參酌出題。至論歷代之事。權辭以對曰。漢唐之治。何足論於今日。取之者亦不以爲意。以此。史學不明。甚爲不可。且武科試。並講四書五經。亦爲未便。乞武經七書外。只講將鑑,兵鑑,兵要,陳說。文科則四書五經外。只講左傳,史記,通鑑,宋元節要,三國史記,高麗史。中塲。試表箋。以習臣子事上之文。試詔敎。以習君上令下之文。終塲。歷代時務。迭出爲題。如今年009_302c試歷代。明年試時務。以此定制。以新科擧之法。
一。遣子入學。盖子弟入學。其利有六。得賢師友。而質問疑難。一也。親炙賢士大夫。而薰陶其氣質。二也。人心風俗。彼此形勢。無不知之。三也。親見文獻之美。禮樂名物。以漸改習俗之陋。四也。或購求墳典。以補闕遺。五也。因以學中國之語音。以正象譯之訛。六也。今雖奏請。似難蒙允。乞於入朝每行李。擇集賢,藝文,校書,成均,承文院中學問精熟。文章敏贍。器局宏遠者各一人。就差入送。不煩遊學。則庶幾所見旣廣。所得亦多。009_302d而皆可爲國家有用之才矣。
一。革其人法。盖前朝太祖統一三韓。以土豪爲戶長。設鄕職。仍使諸郡吏之子孫。爲其人分番侍衛。卽古質子之意也。逮至于後。視爲賤隷。使之苦役。甚無理也。且其人番上之時。或斂民布貨。或賣其田產。駄載而來。於是。富商大賈。受其直而代其役。其直六朔四十五匹。此則刻民之之膏血。而供京師遊手之人也。大抵鄕吏姦猾者雖多。然一邑庶務。與夫上供諸事。漕運迎送緊苦之務。無不爲之。其忍又使爲苦役乎。况三009_303a丁一子。選爲吏胥。至于登正科。躋顯仕。爲國將相者。固非一族。亦士出於農之意也。何必與賤隷。同爲苦務哉。若以役重。非其人不可當。則臣之意。以謂非其人膂力有以當之也。剝民膏血。以富人代其事也。富人亦以其直。易薪木而供之。以其餘爲利。其剝民何如也。今諸司外方奴子三丁爲一戶。一戶五年一番上。婢子則一歲只納一匹布。乞自今罷其人之法。只令加定選上奴子。以三奴子代一其人之役。如是則官家之事。固無不成矣。若以臣之言爲不可。姑試數009_303b年。幸甚。
一。議罷分臺。盖分遣臺臣。本以察守令之貪暴也。察民生之休戚也。其爲名豈不美哉。其威令豈不靡然於一時哉。然本國八道。就設三百三十四州。道各有監司,首領官。州各有守令,敎官。或有少尹,判官。有節制,處置使。有鎭兵馬使,萬戶,千戶。又有水陸察訪,檢律,敎諭。官非不多。而又遣臺員。豈不民少而官多乎。况今之監司。卽所謂外憲而黜陟守令者也。何必更遣臺臣。以輕監司之權乎。非徒監司之權輕也。反與守令。009_303c同心掩覆。而避分臺之擧劾矣。使分臺但擧大綱而已。則不如不遣之爲愈也。若至於發姦摘伏。則其流之弊。吹毛覓疵。使官吏畏首畏尾。不得措其手足。益長小民凌上告訐之風矣。近日立法之始。尙有過中之弊。安知異時永永無一弊乎。大抵國家政令。固不可柔懶以爲之。而亦不可急迫以御下也。漢宣帝,唐宣宗。皆以剛明聦察爲治。而漢唐之業遂衰。然則剛明聦察。豈非適足爲斲喪元氣之斧斤乎。伏望殿下以寬裕爲政。而勿以苛急爲貴。罷近日分臺之法。009_303d遵前日行臺之䂓。其守令不法。全委監司。考核而殿最之。自然官吏不敢恣貪殘之習。而民安其業矣。
一。州郡奴婢。盖外方官奴。其數不等。假如慶州鄕校奴婢。至數百戶。平壤官奴。亦數千戶。殘郡則數未盈十。而貢賦賓旅之煩。與他郡不甚相遠。或有人吏之妻負戴於道路者。誠爲不均。乞諸司奴婢之在殘郡且隣近者。量給殘郡。仍以他郡剩數官奴。充給其司。則庶幾勞逸均而州郡實矣。
009_304a一。區處白丁。盖白丁。或稱禾尺。或稱才人。或稱韃靼。其種類非一。國家悶其不齒於齊民也。稱白丁以變舊號。屬軍伍以開仕路。然而至今遠者五百餘年。近者數百年。本非我類。遺俗不變。自相屯聚。自相婚嫁。或殺牛。或丐乞。或行盜賊。且前朝之時。契丹來侵。最先鄕導。又詐爲倭形。始起於江原道。蔓延于慶尙道。至遣將以討平之。在今大小賊人之被捉者。太半皆此類也。親戚姻黨。連綿八道。小則饑饉。大則兵興。皆可慮也。乞自今不令別作一戶。皆定爲甲士,侍衛,鎭009_304b軍,奉足。使之一一夾居。仍禁其往來他郡。其獨處山谷。或自相婚娶。或行宰殺。或行寇賊。或作樂丐乞者。京外痛禁。其犯者。並罪戶首。又三世不犯禁者。不復稱白丁。而使同爲編戶。則彼亦自此知農桑之樂。而盜賊稍息矣。
一。諸州判官。盖張官置吏。本以爲民也。今大州簿書雲委。使客坌集。守令以一身。何睱勸農事。何睱聽詞訟。義倉斂散。委之豪猾。斯民之害。不可勝言。乞於京畿水原,楊州。慶尙道善山,星州,金海,密陽。全羅道光州,南原等州。特設判官。民009_304c生幸甚。
一。諸鎭置尉。盖秦法。每郡守以治民。尉以治兵。前朝於西北面。設分道將軍。以主兵事。又有鎭將。有縣尉。今八道六十一處。稱某州道。又稱某鎭。或令左右翼。或自爲一鎭。皆置軍兵。使之團鍊。以戒不虞。誠良法也。然守令。簿書期會。使客支待。出納錢糓。聽理詞訟。勸農興學。一應民事。尙未能辦。亦安能全心治兵。以備緩急乎。乞於各鎭依例置尉。若未能皆置。則其有判官處。文武交差。無判官處。特令置尉。
009_304d一。京都四輔。盖京都。卽所謂北漢山城也。在三國之時。則三國交戰之地。及前朝統一。本朝定都之後。則以之控制四方。昔自四方而爭中央。今在中央而制四方。其形勢可知也。三山鎭北。大江繞南。西有臨津。東有龍津。土地沃饒。道里均適。漕運所會。畜牧所便。在京都四面數十里之地而觀之。則可知其天作之地也。且石城虎踞。朝市碁布。宮闕嚴肅。閭閻殷富。誠萬世之業也。但今中外。列置翼鎭。而京都畿內。只設三鎭。實爲未便。且富平府。雖古安南之地。在今日實009_305a無所係。原平府。據臨津之險。又可以提交河挈豐德。而扼倭寇於海口也。水原府。本觀察置司之地。前朝紅賊之南下。必由乎此。而四通五達之地也。乞依前朝左右輔例。以楊州爲後輔。水原爲前輔。廣州爲左輔。原平爲右輔。則前後左右。皆有臣鎭。而東南二鎭在江外。西北二鎭在江內。南北之勢均。而京師益壯矣。且京城十門。東大門外。皆無甕城。須待豐年並築之。或者以爲使彼賊至於內地。則國不國矣。何用城爲。况昇平百年。有何盜賊。然臣以爲吾東方城郭之009_305b國也。旣不能逐水草爲行國。則其城郭之備。不可緩也。前朝顯宗之於契丹。高元之於蒙古。恭愍之於紅賊。皆因城惡。以貽無窮之恥。恭愍,高元之時則已矣。顯宗之時。豈不堂堂而有此患乎。况前日中國。亦有變乎。倘曰州鎭有城。賊不足恤。則韃靼之於中國。豈無長城乎。倘曰疆域不與之鄰。勢不相及。則蒙人之於燕京。豈但數千里乎。但無敵人之侵耳。但恃吾之有備耳。豈有以數千里之大國。而僥倖其無事於萬一哉。又安知百年無事乎。此臣所以深思過慮。拳拳009_305c不已者也。
一。諸道置鎭。盖臣竊料方今置鎭。又當置者八。當减者一。可倂爲一鎭者二。可自爲一鎭者一。如平安道慈城。爲閭延,茂昌,虞芮賊路之衝。當自爲一鎭者也。大抵諸道州郡。皆設翼鎭。旣非要郡。則不必各自爲一鎭。黃海道長淵與豐川。康翎與瓮津。當各倂爲一鎭者也。且京畿富平府。不必置鎭處也。至於平安道煕川。據狄踰嶺,博川。有大江,三登。則平壤東北路要害處。咸吉道會寧。童槍舊居。黃海道瑞興。據岊嶺。京畿水009_305d原南路要衝。原平。據臨津。慶尙道蔚山。倭船到泊之處。且有留居倭人。皆當置鎭者也。小臣自癸酉冬。叨受上旨。考定京畿及八道地圖。以此凡境內山川阨塞道路遠近。一切州鎭之事。靡不講究。故敢陳管見。至于再三。伏惟睿鑑垂察。

 

 

訥齋集卷之二 南原梁誠之著
 奏議
便宜二十四事 春秋大射。增置五京。嶽鎭海瀆。設蕃部樂。議行冠禮。定服色。禁服妖。祭前代君相。護前代陵墓。文廟從祀。武成立廟。配享功臣。文崔立祠。侍臣蔭子。文武科法。遣子入學。革其人法。議罷分臺。州郡奴婢。區處白丁。諸州判官。諸鎭置衛。京都四輔。諸道置鎭。○丙子三月二十八日。以集賢殿直提學上。 a_009_298a


臣伏覩主上殿下以上聖之資。光登大位。古今治亂之迹。民俗艱難之事。靡不洞照。宵旰圖009_298b治。以基我朝鮮億萬年太平之業。誠三韓一盛際也。方今朝廷得失。民間利病。大臣謀之。臺諫論之。其他侍從之職。在於論思。臣以庸劣獲侍經幄。愧無寸效上補聖德。凡國家小大之事。罔不商確於微衷。而思有以裨益乎萬一。敢將便宜二十四事。條錄以獻。伏惟聖鑑財幸。
一。春秋大射。盖金人承遼俗。於三月三日。九月九日。拜天射柳。此雖非中原之制。亦藩國之盛事也。我東方雄據海東。自三國至于前朝。郊天饗帝。無不爲之。今固不能悉遵其舊。稍倣遼金009_298c故事。於三月三日。九月九日。親幸郊外。行大射禮。歲以爲常。如是則庶幾張皇我武。士氣亦增。而自成一國一代之風俗矣。
一。增置五京。盖遼金渤海。並建五京。前朝又建四京。而本朝則只有漢城,開城兩京而已。以大東山海之險。州府之盛。而只置兩京。豈不次哉。况元世祖許我以儀從本俗。高皇帝使我以自爲聲敎。是東郊之地。固非腹裏比也。乞以京都爲上京。漢城府,開城府爲中京。屬京畿右道。以慶州爲東京。全州爲南京。平壤爲西京。咸興009_298d爲北京。各設土官。加定軍兵。如是則庶幾得形勢之勝。而緩急亦足以賴矣。
一。嶽鎭海瀆。盖一代之興。必有一代之制。本朝嶽鎭海瀆名山大川之祀。皆倣三國及前朝之舊而爲之。多有可議者焉。龍興江。我太祖興運之地。至於妙香山。檀君所起。九月山。有檀君祠。太白山。神祠所在。金剛山。名聞天下。長白山。在先春嶺之南。甲山之北。實爲國之北嶽。臨津。國之西關。龍津。國之東關。洛東江。慶尙大川。蟾津。全羅大川。博川江。卽古大寧江。以至菩提津009_299a五臺山。皆不載祀典。且東南西海神祠。皆自開城府而定之。亦乖方位。乞命禮官。詳加考定。以三角山爲中岳。金剛山爲東岳。九月山爲西岳。智異山爲南岳。長白山爲北岳。白嶽山爲中鎭。太白山爲東鎭。松岳山爲西鎭。錦城山爲南鎭。妙香山爲北鎭。又移祭東海神於江陵。西海於仁川。南海於順天。北海 鴨綠江上流 於甲山。以龍津爲東瀆。大同江爲西瀆。漢江爲南瀆。豆滿江爲北瀆。又以木覓山,紺岳山,五冠山,雞龍山,五臺山,雉岳山,義館嶺,竹嶺山,爲名山。熊津,臨津,菩009_299b提津,龍興江,淸川江,博川江,洛東江,蟾津爲大川。依例致祭。楊津二處。德津二處。伽倻津。主屹山。于弗山。牛耳山。鼻白山。長山串。阿斯津。松串。沸流水。九津。溺水可革。 以新一代祀典。是則山川之載祀典者。古今皆三十四。而仍舊者十七。移祭者四。新陞者十三。可永革者亦十三矣。
一。設蕃部樂。盖中國之樂。有雅樂,俗樂,女樂,夷部等樂。本朝所用。有軒架皷吹,童男妓女假面雜戲等制。大抵樂者。象成者也。自太祖乘運而興。太宗,世宗相繼而作。東隣獻琛。北國款塞。制禮作樂。雅俗皆正。而獨蕃樂未之議焉。方009_299c今聖上龍飛。新登大位。日本,女眞之使來賀卽位者。常數百人。稽顙闕庭。海東文物。未有盛於此時者也。乞以日本歌舞。爲東部樂。女眞歌舞。爲北部樂。日本樂。習於三浦倭人。女眞樂。習於五鎭野人。其衣冠制度。不爲怪異譏誚之狀。燕東使則兼用北樂而不用東樂。燕北使則兼用東樂而不用北樂。燕中國使則並用東北樂。于以用之朝廷。奏之宗廟。賁餙太平之治。以光我祖宗之業。不勝幸甚。
一。議行冠禮。盖古者。男子二十而冠。所以將責009_299d成人之道也。宋末。進士尹穀在圍城中。行冠禮。鄕人譏之。答云。欲令兒曹冠帶。見先人于地下。其重冠禮如此。東方則前朝明宗時。元子行冠禮。其後無聞焉。乞命禮官。博採古禮。兼考時王之制。上自宗室。下至士大夫之子弟。年十三。行冠禮。以笠子,頭巾,紗帽爲三加。或用紗帽,幞頭,梁冠。其未冠者。不許入學婚嫁從仕。于以克復先王之制。丕變外國之陋。幸甚。
一。定服色。盖服色之定。所以辨上下一風俗。不可不嚴也。元人尙白。大明尙黑。以至日本尙009_300a靑。皆有一定之制焉。吾東方朝冠公服。實倣中國。而常時好着白衣。任用雜色。甚爲鄙俚。乞依公服體制。堂上官以上爲一色。六品以上爲一色。流品員,成衆官,衣冠子弟爲一色。諸衛軍士爲一色。京外良人吏胥爲一色。公私賤口工匠爲一色。以此依品。漸次穿着。或純用一色。以齊國俗。至於女服。亦皆詳定。
一。禁服妖。盖衣裳之制。所以別男女貴賤也。非下民之所敢擅便者也。今國中女子喜着長衣。若男子然。或以長衣着於衣裳之間。成爲三層。009_300b轉相慕效。擧國皆然。疑此卽史文所謂服妖者也。前日。中原女子多服左袵之衣。見聞者皆以爲非吉兆。今女着男服。亦豈嘉祥也哉。况後世。唯女服上衣下裳。最爲近古。若如此從心爲之。則男女衣服。可以自相制度。無所不至矣。何至今不變乎。乞命攸司。定限禁止。其如前穿着者。收其衣。分置東西活人院。以爲貧病者之服。
一。祭前代君相。臣竊觀大明諸司職掌。遣官祭歷代君相。用以太牢。甚盛擧也。本朝以歷代君王。散祭所都。而或有當祭不祭者。又或無配009_300c享大臣。似爲欠典。乞每年春秋。於東郊合祭前朝鮮王檀君,後朝鮮王箕子,新羅始祖,太宗王,文武王,二王統合麗濟 高句麗始祖,嬰陽王,大敗隋兵 百濟始祖,高麗太祖,成宗,顯宗,忠烈王以上十二位。以新羅金庾信,金仁問,高句麗乙支文德,百濟黑齒常之,近日所定前朝配享十六臣及韓希愈,羅裕,禦哈丹有功 崔瑩,鄭地 禦倭寇有功 等配享。
一。護前代陵墓。臣觀續六典。高麗太祖,顯宗,文宗,元宗四陵。各定守護二戶。使禁樵採。太祖陵。加一戶。甚盛德也。然臣竊惟歷代君王。雖未能009_300d皆有功德於斯民。亦皆一國人民所共主也。其不省所在者已矣。其陵墓如古。而使狐狸穴於傍。樵採行於上。豈不可悶也哉。乞令有司。於前後朝鮮,三國。前朝所都開城,江華,慶州,平壤,公州,扶餘及金海,益山等處所在陵墓。仔細尋訪。其有功德者。置守陵三戶。別無功德者。置二戶。正妃陵墓。亦置一戶。略蠲征徭。禁其樵蘇。仍令所在官。春秋省視致祭。
一。文廟從祀。盖東方自箕子受封以後。洪範遺敎。久而不墜。唐爲君子之國。宋稱禮義之邦。文009_301a獻之美。侔擬中華。而配食文廟者。獨新羅之薜聦,崔致遠。高麗之安珦三人而已。臣聞學士雙冀在前朝。始設科擧。以振文風。文憲公崔冲又設九齋。以敎諸生。至於文忠公李齊賢,文忠公鄭夢周,本朝文忠公權近。其文章道德。人皆可以垂範萬世。乞皆配享先聖。以勸後人。若曰東方賢者。焉能如古之人。則孔孟之後。亦有程朱。且賢者如是其難也。則後人何學爲聖賢乎。中國之配享者。果皆如孔孟程朱乎。東方之士。皆不可如中國人乎。大抵人主須施一大政事。以009_301b示勸懲之意。然後可以動人觀聽而風移俗易矣。
一。武成立廟。盖文武之道。如天經地緯。不可偏廢。唐肅宗。尊太公爲武成王。立廟享祀。與文宣王比。後以歷代良將六十四人配享。吾東方先聖之祀。上自國學。下至州郡。而武成王無祠宇。只祭纛神四位。豈非闕典歟。今訓鍊觀。卽宋朝武學也。乞倂纛所于訓鍊觀而立武成廟。祭禮配食。略依文廟制度。又以新羅之金庾信。高句麗之乙支文德。高麗之庾黔弼,姜邯贊,楊䂓,尹009_301c瓘,趙冲,金就礪,金慶孫,朴犀,金方慶,安祐,金得培,李芳實,崔瑩,鄭地。本朝之河敬復,崔潤德配享。
一。配享功臣。盖本朝前後五功臣。皆屬忠義衛。三朝原從之人。亦皆宥罪錄後。與元之四㤼薜。宋之錄隨龍。恩無以加矣。然臣聞前朝配享大臣。稱爲功臣。每大恩例。必錄子孫。本朝五廟。俱有配位。皆功存王室。澤及生民者也。乞依五功臣例。或依原從諸人賜號。配享功臣。並令宥後世祿。且前朝及本朝將相有功德於民者之子009_301d孫。亦使搜訪。特加恩命。則前人感激於冥冥之中。而後人亦克勸於萬世矣。
一。文崔立祠。盖臣聞聖人之制祭禮也。法施於民則祀之。能禦大患則祀之。吾東方舊無木綿種。前朝文益漸。奉使留元。始得而種之。遂流遍一國。至今無貴賤男女。皆衣綿布。又自新羅只有砲石之制。而歷代無火藥之法。前朝末崔茂宣。始學火砲之法於元。東還而傳其術。至今軍陳之用。利不可言。茂宣之功。萬世除民害也。益漸之功。萬世興民利也。其澤被生民。豈曰小哉。009_302a乞於二人鄕貫。官立祠宇。春秋。令本官行祭。其子孫稱爲功臣。宥罪錄用。
一。侍臣蔭子。盖本朝承蔭之法。卽唐之資蔭。宋朝任子之意也。其待士大夫之恩至矣。然其法。三品以上官外。只許曾經臺諫政曹者之子承蔭。新參數日。纔拜監察。而蔭及子孫。而或有侍從數十年。蔭不及後者。誠爲可惜。况宋史以宰執,侍從,臺諫並言之。乞四品以下六品以上舘閣兩制。侍從諸臣之子。特許承蔭。公道幸甚。
一。文武科法。盖今文科初塲講經之時。四書五009_302b經外。如韓文,柳文等書。任意試講。實無定䂓。中塲則並試古賦。本非急務。又進士以此取之。終塲則諸史時務。雖參酌出題。至論歷代之事。權辭以對曰。漢唐之治。何足論於今日。取之者亦不以爲意。以此。史學不明。甚爲不可。且武科試。並講四書五經。亦爲未便。乞武經七書外。只講將鑑,兵鑑,兵要,陳說。文科則四書五經外。只講左傳,史記,通鑑,宋元節要,三國史記,高麗史。中塲。試表箋。以習臣子事上之文。試詔敎。以習君上令下之文。終塲。歷代時務。迭出爲題。如今年009_302c試歷代。明年試時務。以此定制。以新科擧之法。
一。遣子入學。盖子弟入學。其利有六。得賢師友。而質問疑難。一也。親炙賢士大夫。而薰陶其氣質。二也。人心風俗。彼此形勢。無不知之。三也。親見文獻之美。禮樂名物。以漸改習俗之陋。四也。或購求墳典。以補闕遺。五也。因以學中國之語音。以正象譯之訛。六也。今雖奏請。似難蒙允。乞於入朝每行李。擇集賢,藝文,校書,成均,承文院中學問精熟。文章敏贍。器局宏遠者各一人。就差入送。不煩遊學。則庶幾所見旣廣。所得亦多。009_302d而皆可爲國家有用之才矣。
一。革其人法。盖前朝太祖統一三韓。以土豪爲戶長。設鄕職。仍使諸郡吏之子孫。爲其人分番侍衛。卽古質子之意也。逮至于後。視爲賤隷。使之苦役。甚無理也。且其人番上之時。或斂民布貨。或賣其田產。駄載而來。於是。富商大賈。受其直而代其役。其直六朔四十五匹。此則刻民之之膏血。而供京師遊手之人也。大抵鄕吏姦猾者雖多。然一邑庶務。與夫上供諸事。漕運迎送緊苦之務。無不爲之。其忍又使爲苦役乎。况三009_303a丁一子。選爲吏胥。至于登正科。躋顯仕。爲國將相者。固非一族。亦士出於農之意也。何必與賤隷。同爲苦務哉。若以役重。非其人不可當。則臣之意。以謂非其人膂力有以當之也。剝民膏血。以富人代其事也。富人亦以其直。易薪木而供之。以其餘爲利。其剝民何如也。今諸司外方奴子三丁爲一戶。一戶五年一番上。婢子則一歲只納一匹布。乞自今罷其人之法。只令加定選上奴子。以三奴子代一其人之役。如是則官家之事。固無不成矣。若以臣之言爲不可。姑試數009_303b年。幸甚。
一。議罷分臺。盖分遣臺臣。本以察守令之貪暴也。察民生之休戚也。其爲名豈不美哉。其威令豈不靡然於一時哉。然本國八道。就設三百三十四州。道各有監司,首領官。州各有守令,敎官。或有少尹,判官。有節制,處置使。有鎭兵馬使,萬戶,千戶。又有水陸察訪,檢律,敎諭。官非不多。而又遣臺員。豈不民少而官多乎。况今之監司。卽所謂外憲而黜陟守令者也。何必更遣臺臣。以輕監司之權乎。非徒監司之權輕也。反與守令。009_303c同心掩覆。而避分臺之擧劾矣。使分臺但擧大綱而已。則不如不遣之爲愈也。若至於發姦摘伏。則其流之弊。吹毛覓疵。使官吏畏首畏尾。不得措其手足。益長小民凌上告訐之風矣。近日立法之始。尙有過中之弊。安知異時永永無一弊乎。大抵國家政令。固不可柔懶以爲之。而亦不可急迫以御下也。漢宣帝,唐宣宗。皆以剛明聦察爲治。而漢唐之業遂衰。然則剛明聦察。豈非適足爲斲喪元氣之斧斤乎。伏望殿下以寬裕爲政。而勿以苛急爲貴。罷近日分臺之法。009_303d遵前日行臺之䂓。其守令不法。全委監司。考核而殿最之。自然官吏不敢恣貪殘之習。而民安其業矣。
一。州郡奴婢。盖外方官奴。其數不等。假如慶州鄕校奴婢。至數百戶。平壤官奴。亦數千戶。殘郡則數未盈十。而貢賦賓旅之煩。與他郡不甚相遠。或有人吏之妻負戴於道路者。誠爲不均。乞諸司奴婢之在殘郡且隣近者。量給殘郡。仍以他郡剩數官奴。充給其司。則庶幾勞逸均而州郡實矣。
009_304a一。區處白丁。盖白丁。或稱禾尺。或稱才人。或稱韃靼。其種類非一。國家悶其不齒於齊民也。稱白丁以變舊號。屬軍伍以開仕路。然而至今遠者五百餘年。近者數百年。本非我類。遺俗不變。自相屯聚。自相婚嫁。或殺牛。或丐乞。或行盜賊。且前朝之時。契丹來侵。最先鄕導。又詐爲倭形。始起於江原道。蔓延于慶尙道。至遣將以討平之。在今大小賊人之被捉者。太半皆此類也。親戚姻黨。連綿八道。小則饑饉。大則兵興。皆可慮也。乞自今不令別作一戶。皆定爲甲士,侍衛,鎭009_304b軍,奉足。使之一一夾居。仍禁其往來他郡。其獨處山谷。或自相婚娶。或行宰殺。或行寇賊。或作樂丐乞者。京外痛禁。其犯者。並罪戶首。又三世不犯禁者。不復稱白丁。而使同爲編戶。則彼亦自此知農桑之樂。而盜賊稍息矣。
一。諸州判官。盖張官置吏。本以爲民也。今大州簿書雲委。使客坌集。守令以一身。何睱勸農事。何睱聽詞訟。義倉斂散。委之豪猾。斯民之害。不可勝言。乞於京畿水原,楊州。慶尙道善山,星州,金海,密陽。全羅道光州,南原等州。特設判官。民009_304c生幸甚。
一。諸鎭置尉。盖秦法。每郡守以治民。尉以治兵。前朝於西北面。設分道將軍。以主兵事。又有鎭將。有縣尉。今八道六十一處。稱某州道。又稱某鎭。或令左右翼。或自爲一鎭。皆置軍兵。使之團鍊。以戒不虞。誠良法也。然守令。簿書期會。使客支待。出納錢糓。聽理詞訟。勸農興學。一應民事。尙未能辦。亦安能全心治兵。以備緩急乎。乞於各鎭依例置尉。若未能皆置。則其有判官處。文武交差。無判官處。特令置尉。
009_304d一。京都四輔。盖京都。卽所謂北漢山城也。在三國之時。則三國交戰之地。及前朝統一。本朝定都之後。則以之控制四方。昔自四方而爭中央。今在中央而制四方。其形勢可知也。三山鎭北。大江繞南。西有臨津。東有龍津。土地沃饒。道里均適。漕運所會。畜牧所便。在京都四面數十里之地而觀之。則可知其天作之地也。且石城虎踞。朝市碁布。宮闕嚴肅。閭閻殷富。誠萬世之業也。但今中外。列置翼鎭。而京都畿內。只設三鎭。實爲未便。且富平府。雖古安南之地。在今日實009_305a無所係。原平府。據臨津之險。又可以提交河挈豐德。而扼倭寇於海口也。水原府。本觀察置司之地。前朝紅賊之南下。必由乎此。而四通五達之地也。乞依前朝左右輔例。以楊州爲後輔。水原爲前輔。廣州爲左輔。原平爲右輔。則前後左右。皆有臣鎭。而東南二鎭在江外。西北二鎭在江內。南北之勢均。而京師益壯矣。且京城十門。東大門外。皆無甕城。須待豐年並築之。或者以爲使彼賊至於內地。則國不國矣。何用城爲。况昇平百年。有何盜賊。然臣以爲吾東方城郭之009_305b國也。旣不能逐水草爲行國。則其城郭之備。不可緩也。前朝顯宗之於契丹。高元之於蒙古。恭愍之於紅賊。皆因城惡。以貽無窮之恥。恭愍,高元之時則已矣。顯宗之時。豈不堂堂而有此患乎。况前日中國。亦有變乎。倘曰州鎭有城。賊不足恤。則韃靼之於中國。豈無長城乎。倘曰疆域不與之鄰。勢不相及。則蒙人之於燕京。豈但數千里乎。但無敵人之侵耳。但恃吾之有備耳。豈有以數千里之大國。而僥倖其無事於萬一哉。又安知百年無事乎。此臣所以深思過慮。拳拳009_305c不已者也。
一。諸道置鎭。盖臣竊料方今置鎭。又當置者八。當减者一。可倂爲一鎭者二。可自爲一鎭者一。如平安道慈城。爲閭延,茂昌,虞芮賊路之衝。當自爲一鎭者也。大抵諸道州郡。皆設翼鎭。旣非要郡。則不必各自爲一鎭。黃海道長淵與豐川。康翎與瓮津。當各倂爲一鎭者也。且京畿富平府。不必置鎭處也。至於平安道煕川。據狄踰嶺,博川。有大江,三登。則平壤東北路要害處。咸吉道會寧。童槍舊居。黃海道瑞興。據岊嶺。京畿水009_305d原南路要衝。原平。據臨津。慶尙道蔚山。倭船到泊之處。且有留居倭人。皆當置鎭者也。小臣自癸酉冬。叨受上旨。考定京畿及八道地圖。以此凡境內山川阨塞道路遠近。一切州鎭之事。靡不講究。故敢陳管見。至于再三。伏惟睿鑑垂察。

 


星湖先生全集卷之三
 
北漢 四首 a_198_101d


老子晨裝興可知。西巖寺裏趁良期。三峯直戴媧皇石。百198_102a朵爭趨聖祖基。濯足泉淸尋有路。洗心樓迥坐移時。諸君正促登高去。把臂相看又一奇。
勝迹何須要衆知。羣公好事集如期。關防勢壯開新堞。寺觀懸高鑿舊基。會借遊人盤礴地。推尋造物攫搏時。也應天餉吾行李。晴靄千峯最現奇。
仙分商量久自知。偶然留滯亦前期。平生長往非無地。終老幽棲合借基。正耐從君攜酒處。更須看我倚樓時。山靑水白微吟罷。不有玆行定負奇。
一度登臨一眼開。山靈與我默相催。水光上接樓臺迥。石氣橫欄日月回。拂袖俄從紅輭出。扶筇徐踏翠微來。孤僧198_102b引到藤蘿外。無限雲嵐照把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