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 18현 우계 성혼

우계 성혼 (해동18현 중의 한분)

아베베1 2011. 6. 26. 09:23

우계연보부록
묘지(墓誌) 선생이 스스로 지은 것이다.


성(成)은 그의 성이고, 혼(渾)은 그의 이름이며, 호원(浩原)은 그의 자이고, 창녕(昌寧)은 그의 본관이다. 아버지는 청송(聽松) 선생 휘 수침(守琛)이고,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며, 조부는 사숙공(思肅公) 휘 세순(世純)이고, 증조는 판서(判書)에 추증된 휘 충달(忠達)이며, 외조는 판관 휘 사원(士元)이다.
혼은 약관 시절에 병을 앓아 몸이 허약하고 정신이 어두웠는데, 이렇게 일생을 마쳤다. 어려서 가정에서 수학(受學)하였는데, 언제나 옛사람이 몸을 닦고 학문한 내용을 들으면 개연히 흠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여 은미한 뜻을 깊이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나 끝내 얻지 못하였으며, 마음을 잡아 지키고 함양하여 허물과 죄악을 면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끝내 잡아 지키지 못한 채 병 때문에 스스로 폐하여 뜻을 조금도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슬프다.
타고난 성품이 경박하여 착실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침착하고 굳세며 독실히 행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으나 또한 이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였으며, 기질(氣質)이 혼탁한 것이나 외물(外物)에 어지럽혀진 것에 이르러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또 남의 과실을 자주 지적하여 이 때문에 사람들이 대부분 꺼리고 싫어하였다.
30여 세에 천거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에 또다시 천거로 6품직에 올랐으며, 몇 년 후에 또다시 천거로 대관(臺官)이 되었으나 모두 질병 때문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만력(萬曆) 경진년(1580, 선조13) 겨울에 성상(聖上)께서 특별히 소명(召命)을 내리셨는데, 말씀한 뜻이 융숭하고 간절하였다. 황공하여 사양하다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스스로 수레를 타고 서울에 왔다. 그리하여 신사년(1581, 선조14) 2월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하였는데, 상이 대도(大道)의 요체를 물었다. 물러 나와 만언(萬言)의 봉사(封事)를 올리니, 상은 경연(經筵)에 출입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조정에서 대우하는 것이 매우 융숭하였다.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현자(賢者)를 우대하는 예(禮)를 베풀 것을 많이 건의하여 성상의 예모(禮貌)가 특별하니, 혼은 더욱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며 사람들 또한 속으로 비웃었다.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돌아왔다.
계미년(1583, 선조16) 여름에 병조 참지로 부름을 받았는데, 다섯 번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마침내 다시 서울에 이르러 군직(軍職)으로 옮겼으며, 또 이조 참의에 제수되고 서반직(西班職)으로 보내진 것이 모두 다섯 차례였는데,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명에 숙배(肅拜)한 지 며칠 만에 삼사(三司)에서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국정을 제멋대로 전횡하고 교만 방자하여 상에게 불경한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글을 올려 “이이가 충성을 다하는데, 삼사에서 붕당을 지어 모함한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삼사에서 “성모(成某)가 사림(士林)을 일망타진한다.”고 탄핵하였으므로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이해 가을에 다시 이조 참의로 부름을 받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궐에 나아가 네 번 사양하였으나 또 허락을 받지 못하여 부득이 봉직하였는데, 반달 만에 이조 참판으로 승진되었다. 또다시 다섯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병을 무릅쓰고 사은숙배하니, 마침내 부모에게 자신과 같은 관직이 추증되었다. 봉직한 지 한 달이 넘자, 사직소(辭職疏)를 올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옮겼다가 갑신년(1584, 선조17) 7월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조정에서는 성모가 외척(外戚)의 간당(奸黨)으로 조정을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혀 국사를 그르친다고 탄핵하니, 조야(朝野)에서는 소인(小人)이라 지목하였는데 혹자는 소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이것이 벼슬을 얻어 나아가고 물러난 대략이다.
성모가 젊어서부터 질병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과거를 일삼지 않는다.” 하였고, 몸이 허약하여 벼슬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화로운 벼슬을 사모하지 않는다.” 하였으며, 파산(坡山)에 있는 선대(先代)의 집을 지키고 있으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은거하며 지조를 지킨다.” 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서로 천거하여 전전해서 요행으로 높은 벼슬에 이르렀으나 그 실제는 하나도 간직한 것이 없었고 한 가지도 제대로 직임을 맡은 적이 없었으니, 이는 모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억지로 이름이 붙여져 끝내 이 때문에 세상의 화(禍)를 취하였다.
일찍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 평생 명예를 도둑질하여 국가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예로부터 신하가 되어 국가의 은혜를 저버림이 누가 나보다 더한 자가 있겠는가. 나의 죄가 크니,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너는 마땅히 나의 유의(遺意)에 따라 부의(賻儀)와 치제(致祭) 등의 예우(禮遇)를 사양하고 묘 앞에 ‘창녕성모묘(昌寧成某墓)’라는 다섯 글자만을 써서 비석에 새겨 자손들로 하여금 나의 무덤이 있는 곳을 알게 하면 충분하다. 옛사람도 묘 앞에 자신의 관직을 쓰지 말라고 명한 자가 있었으나 그 뜻이 다른 데에 있었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죄가 있어 스스로 폄하(貶下)하여 성명만을 쓰게 한 것이니, 일은 같으나 그 실제는 다르므로 옛사람에게 비교하여 똑같이 볼 수 없다. 시신에 삼베옷을 입히고 종이 이불로 염습(斂襲)하여 소달구지에 싣고 고향에 돌아가 장례하여 나의 뜻을 어기지 말라.” 하였다.
그는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30)에 출생하여 아무 해에 죽으니, 향년이 약간이었다. 청송 선생의 묘 아래에 장례하였다. 성모는 스스로 이것을 써서 광중(壙中)에 넣어 묘지(墓誌)로 삼게 하는 바이다. ○ 묘 앞에 작은 돌을 세워 다섯 자를 새기고 후면에는 향리(鄕里)와 세계(世系), 죽고 장례한 날짜와 자손의 이름을 간략히 써서 새기도록 하라.

 

우계연보부록
후서(後敍) 아들 문준(文濬)이 보충한 것이다.


선부군(先府君)께서 자지(自誌)를 만력 정해년(1587, 선조20)에 지었는데, 2년 후인 기축년(1589, 선조22) 겨울에 다시 이조 참판으로 부름을 받고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에 이르렀으나 병환으로 봉직하지 못하였다. 다음 해에 수천만 자(字)에 이르는 봉사(封事)를 올리고 얼마 후 간곡히 벼슬을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임진년(1592, 선조25) 왜적(倭賊)이 대거 쳐들어왔는데, 이때 당화(黨禍)가 크게 일어났다. 부군은 전리(田里)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어 감히 대궐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떠날 적에 일이 경황 중에 벌어진 데다 부군의 집은 산중에 있어 외부와 소식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대가가 이미 멀리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았다.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대가가 급히 행차하여 곧바로 요동(遼東)으로 갔다.” 하였고, 또 “임진 나루를 끊으라고 명했다.” 하였다. 부군은 마침내 통곡하고 산중으로 들어가 병란(兵亂)을 피하였는데, 도로가 막히고 왜적이 사방에서 모여드니, 임금이 계신 서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였다.
마침 동궁(東宮)이 임시로 국사(國事)를 대리하였는데, 글을 내려 부군을 부르고 특명으로 말을 보내 맞이해서 빈사(賓師)의 예(禮)로 대하니, 부군은 황공하여 굳이 사양하였다. 겨울에 의주(義州)의 행조(行朝)로 달려갔는데, 도중에 우참찬(右參贊)으로 높여 제수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착한 다음 강력히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자, 부득이 명에 숙배하고 글을 올려 시정(時政)의 잘못을 아뢰었다. 이해 겨울부터 다음 해 여름까지 세 번 대사헌이 되었으나 모두 병환 때문에 숙배하지 못하였다. 대가를 따라 영유(永柔)에 이르러, 왜적이 이미 남쪽으로 도망하여 한성(漢城)과 개성(開城), 평양(平壤)이 모두 수복되었다는 말을 듣고 다시 글을 올려 물러날 것을 청하였는데, 상소문을 초하여 올리기 전에 마침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봉심(奉審)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마침내 길을 떠났다. 좌참찬으로 옮겼다가 군직(軍職)으로 전임되었으며, 봉심하는 일이 끝나자 해주(海州)에서 복명(復命)하였다. 며칠 후 대가가 도성으로 돌아왔는데, 부군은 병환 때문에 호종(扈從)하지 못하고 인하여 해주의 석담(石潭)에 우거하였다.
다음 해인 갑오년(1594, 선조27) 봄에 호서(湖西)에 역모(逆謀)가 일어나자, 도둑들이 크게 일어나 도성이 진동하고 두려워하였다. 부군은 마침내 스스로 가마를 타고 대궐에 나아갔는데, 다시 참찬에 제수되자 또다시 글을 올려 시정의 득실(得失)을 아뢰었다. 이때 명(明)나라에서는 군사들의 힘이 다 소진되었으므로 왜노(倭奴)들의 항복을 받아들일 것을 허락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고 총독(顧摠督 고양겸(顧養謙))이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황조(皇朝)에 아뢰어 이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진술하게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유 총병(劉摠兵 유정(劉綎))이 이미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으니, 만약 명나라 조정에서 왜적의 항복을 받아 주지 않으면 너희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요동(遼東)과 계주(薊州) 일대는 적과 접경 지역이어서 또 중국의 우환이 될 것이니, 우리와 너희 나라가 모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 문제를 부군에게 묻자, 부군은 대답하기를, “고공(顧公)이 말한 것은 실로 사정에 맞습니다. 더구나 왜적과 화친(和親)하는 것은 중국에게 달려 있고 우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신은 생각건대 고공의 글을 인용하여 상주(上奏)하는 글 가운데에 이러한 내용을 넣어서 잘 말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지오니, 이렇게 하면 우리나라의 대의(大義)에도 잘못되는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은 이를 탐탁하지 않게 여겨 준엄한 성지(聖旨)를 내렸다. 부군은 이에 연달아 글을 올려 파면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체직되었다. 부군은 당일로 배를 사서 서쪽으로 길을 떠나 바다를 항해, 연안(延安)에 이르러 바닷가에 우거하다가 다음 해인 을미년에 파산(坡山)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3년이 지난 무술년(1598, 선조31) 봄에 병을 얻자, 편지를 써서 자손들에게 가정의 학문을 실추시키지 말도록 경계하였으며, 사후의 처분을 매우 상세하게 지시하였다. 병환이 위독하자, 시(詩)를 지어 벗에게 주었는데, “한 번 그대를 보고픈 생각 간절하였는데, 무궁한 속으로 떠나가면 온갖 일 공허하겠지. 오직 상상건대 해마다 산 달이 아름다워, 깨끗한 빛 예전처럼 우계를 비추리라.[思君一見意凄凄 去入無窮萬象虛 惟想年年山月好 淸光依舊照牛溪]” 하였다. 이것이 절필(絶筆)이었다. 여름 6월 6일에 우계에서 고종(考終)하니, 향년이 64세였다. 이해 8월 19일 임신에 파주(坡州)의 향양리(向陽里)에 있는 청송 선생의 묘역(墓域) 뒤에 장례하였는데, 두 묘소의 거리는 겨우 10보쯤 되었다. 처음에는 자지(自誌)에 따라 묘소 아래에 장례하려 하였으나 다섯 가지 걱정이 우려되므로 위의 혈(穴)로 바꾸어 정하였다.
고령 신씨(高靈申氏) 내자시 첨정(內資寺僉正) 여량(汝樑)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문영(文泳)은 관례(冠禮)한 다음 요절하였고, 차남 문준(文濬)은 진사에 합격하여 일찍이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이 되었다. 장녀(長女)는 생원 남궁명(南宮蓂)에게 출가하였고, 중녀(仲女)는 요절하였으며, 계녀(季女)는 부정자(副正字) 윤황(尹煌)에게 출가하였다. 문준은 주부(主簿) 조감(趙堪)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역(櫟)ㆍ익(杙)ㆍ직(㮨)이고, 장녀는 사인(士人)인 신민일(申敏一)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남궁명은 1남 2녀를 두었고 윤황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정해년(1587, 선조20) 이후 12년 동안의 사적(事迹)은 자지(自誌)에 미처 기재하지 않았으므로 뒤이어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불초자(不肖子) 문준이 감히 그 대략을 위와 같이 간략히 서술하여 자지의 아래에 써서 합하여 한 통으로 만들어 예(禮)대로 광중(壙中)에 묻었다.
아들 문준은 보충하여 쓰다.


 

[주D-001]다섯 가지 걱정 : 묏자리를 쓸 때에 피하는 다섯 가지 후환(後患)으로, 후일에 도로(道路)와 성곽(城郭)과 구지(溝池)가 될 곳과 세력가(勢力家)에게 빼앗길 곳과 밭 가는 보습이 미치는 곳을 이른다.

 


 

 

 

신독재전서 제8권

 

 

우계 성혼 선생은 본관이 창령인  해동 18현 중의 한분  

 묘표(墓表)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의 묘표

 


옛날 선묘(宣廟)께서 문치(文治)를 위하여 열심이었는데, 그때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몸소 경세 제민의 책임을 지고서 그 당시의 제일인자를 기용해 줄 것을 청하자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모두 그 대상자로 거명했던 이가 바로 우계 성 선생이었다. 선생은 휘가 혼(渾)이고 자가 호원(浩原)인데, 청송(廳松) 성수침(成守琛) 선생의 아들이며 사숙공(思肅公) 성세순(成世純)의 손자이다. 선생은 청송이 정암(靜庵) 선생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가정에서 얻은 것이 많았던 데다, 또 퇴도(退陶)를 존숭하여 사모하고 율곡(栗谷)과는 벗이 되어 산속에서 도(道)를 지키고 있었기에, 내실과 함께 명망도 갈수록 높아만 갔다.
처음에는 유일(遺逸)로 추대되어 누차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계유년(1573)에는 옛 제도에 의해 지평(持平)으로 발탁하여 제수했으나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겸양하였다. 을해년(1575)에야 비로소 억지로 부름에 응했지만 얼마 안 가 돌아오고 말았다. 그 후로도 벼슬을 제수하는 명령이 계속 있었으나 그때마다 병을 이유로 사양했으며, 선(善)을 따르고 학문에 힘쓰라는 뜻으로 글월만을 올려 주상으로부터 가납(嘉納)을 받았다. 그 후 여러 번 벼슬이 내려져 장령(掌令)을 제수받고 안거(安車)를 이용하여 오라는 명령까지 들었다. 신사년(1581)에는 편전(便殿)에서 주상을 대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주상이 대도(大道)의 요점에 관하여 묻자 선생은 그 대강의 줄거리를 추려서 명백하게 아뢰었으며, 그리고 물러와서 다시 봉사(封事)를 올려 전번에 말했던 점을 되풀이하여 강조하였다. 문성공이 그 봉사를 읽어 보고는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의론(議論)이다.’고 하였고, 대신들은 선생이 말한 내용을 그대로 실행해 보자고 청했으나 상은 역시 난색을 보였다. 선생은 곧 물러갈 것을 청하고 교외로 나왔는데, 상은 어찰(御札)을 내려 다시 오게 한 다음 일단 접견한 후 비로소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그 후로도 집의(執義)와 여러 시(寺)의 정(正)을 제수했지만, 다 나아가지 않았다. 계미년(1583)에는 특별히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제수하고서 하교하기를, “지금 병판(兵判)이 그대의 친구이니, 한마음으로 역량을 발휘할 때가 바로 지금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선생은 사양하다 못해 직에 임했다. 그때 문성공(文成公)이 그 병조의 장(長)으로서 상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얻기 힘든 만남이었다. 그러나 뭇 소인배들이 그것을 시기하여 틈만 있으면 논핵(論劾)을 했기 때문에 선생이 소를 올려 충성스런 사람과 사특한 사람을 가려낼 것을 청했다. 이에 뭇 소인배들은 더욱 화를 내어 드디어 선생까지 싸잡아서 논핵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선생은 그날로 파산(坡山)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주상은 그들 소인배들 중에서 더욱 심하게 구는 자를 파출하도록 명하는 한편, 문성공을 특별히 총재(冢宰)로 임명한 다음 선생을 빨리 나오도록 재촉해서 아경(亞卿)으로 승진시켜 발령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문성공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에 선생은 도(道)가 행해질 수 없음을 알고 돌아갈 뜻을 굳혔었다.
을유년(1585)에 와서 사특한 무리들이 판을 치면서 당색의 명단을 작성하고 선생의 이름도 그 속에다 넣었는데, 기축년(1589)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상은 선생을 생각하고 다시 이조 참판을 제수하면서 간절히 불렀다. 선생은 마지못해 서울에 들어왔으나 병으로 일을 보지는 못했고, 치도(治道)에 관한 상소만 올리고서 다시 돌아갔다. 임진년(1592)에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도 선생은 부난(赴難)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선생이 평소에 결심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 내용이 우리 선자(先子)와 고례를 들어 주고받은 서신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급기야 세자(世子)의 부름을 받고는 성천(成川)으로 달려갔다가 주상이 있는 곳까지 가게 되었으며, 거기에서 참찬(參贊)으로 승진되고 이어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시무(時務)에 관해 조목조목 지적하였는데, 그 내용들이 너무나 절직(切直)해서 주위 사람들이 선생을 위해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상이 환도(還都)할 때는 병으로 뒤따르지 못했으므로 나중에 들어가 대죄(待罪)하였는데, 상은 불평한 빛을 보였다. 그것은 종전부터 쌓여 온 참소가 있었던 데다가 이어 선위(禪位)를 청한 자까지 있었기에 쌓이고 쌓인 의심이 그때 와서 폭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생은 또 좌참찬으로서 군국(軍國)의 사무까지 겸해서 살피고 있으면서 말을 기탄 없이 올렸기 때문에 상으로서는 기분이 더욱 언짢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자(顧咨) 문제를 꼬투리로 잡았는데, 선생은 그 길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정유년(1597)의 재란이 일어났을 때도 부난하도록 권고한 자들이 많았지만, 선생의 생각은 임진년 때와 다를 바 없어 끝내 그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선생이 세상을 뜬 지 4년 뒤에는 선생에 대한 모함이 더욱 심해진 나머지 벼슬이 추탈(追奪)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공론이 안정되어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으며, 청송서원(聽松書院)에 배향하였던 것이다.
아, 선생은 학문의 정통을 이어받은 데다가 세도(世道)를 만회할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만약 뜻이 같은 훌륭한 인물들과 함께 사업을 수행하였더라면 아마도 나라가 잘 다스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도(道)에는 소장(消長)이 있고 운명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는 탓인지 도(道)가 행해질 조짐이 충분히 있었는데도 결국 행해지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은 어쩌면 기묘년(1579)의 현인들 입장과 비슷했던 것이다.
선생은 행동거지를 반드시 정의에 근본해서 했고, 환경의 변화에 따라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출처(出處)가 바르기로는 천지 신명이 보장할 정도였으니, 보통 사람들로서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문성공이 일찍이 칭찬하기를, ‘지조와 행동이 확실하기로는 내가 미칠 바가 아니다.’고 했는가 하면 또, ‘선을 좋아하기는 이 세상을 다스리고도 남는다.’고도 했으며, 또 ‘세상을 요리할 만한 인물’이라고도 했으니, 그러고 보면 문성공만이 선생을 알아보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남들이 선생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생에게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선생은 가정(嘉靖) 을미년(1535)에 태어나 세상을 떠나던 해까지 64년을 살았고, 장지는 향양리(向陽里) 선산 뒤에 있다. 짧은 표석에는 관직도 쓰지 않았는데, 이는 선생의 유언에 의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고, 부인은 고령 신씨(高靈申氏)이다. 아들 성문영(成文泳)은 일찍 죽었고, 다음 성문준(成文濬)은 현감(縣監)이다. 맏딸은 별좌(別坐) 남궁명(南宮蓂), 다음은 대사간(大司諫) 윤황(尹煌)에게 각각 시집갔다. 측실 소생의 아들로 성문잠(成文潛)이 있다. 현감의 아들들은 성역(成櫟), 성식(成栻), 성직(成㮨)이고, 사위는 신민일(申敏一), 안후지(安厚之), 윤정득(尹正得)이다. 별좌의 아들은 남걸(南杰)과 남우(南)이고, 사위는 김여옥(金汝鈺)과 윤형은(尹衡殷)이다. 대사간의 아들은 윤훈거(尹勛擧), 윤순거(尹舜擧), 윤상거(尹商擧), 윤문거(尹文擧), 윤선거(尹宣擧)이며, 사위는 이정여(李正輿)와 권준(權儁)이다. 그 나머지의 증손과 현손들은 다 쓰지 않았다.
내가 일찍부터 선생 문하에서 노닐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스승을 통해 선생의 출처와 언행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대략 이상과 같이 기록해 보았다.


 

우계연보부록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좌의정 김상헌(金尙憲)]


선생은 휘가 혼(渾)이고 자가 호원(浩原)이며 성이 성씨(成氏)이니, 창녕인(昌寧人)이다. 선고 휘 수침(守琛)은 은거하고 도학(道學)을 강명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는데, 별세하자 사헌부 집의에 추증하니, 세상에서 청송(聽松) 선생이라 칭한다. 조고 휘 세순(世純)은 지중추부사로 시호가 사숙공(思肅公)이며, 증조 휘 충달(忠達)은 현령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성씨(成氏)는 고려 때 유명한 성씨(姓氏)가 되었는데, 중윤(中尹) 인보(仁輔)로부터 더욱 크게 현달하였다. 4대를 전하여 여완(汝完)에 이르러 본조(本朝)에 들어와 부원군(府院君)이 되었으며, 석인(石因)을 낳으니 예조 판서였고, 억(抑)을 낳으니 좌찬성이었고, 득식(得識)을 낳으니 한성부윤이었으니, 선생에게 고조가 되신다. 대대로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유명한 분과 덕망 있는 분을 탄생하였다. 선비(先妣)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인데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30) 6월 25일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천품이 독실하고 민첩하여 저절로 도에 가까웠으며 거처하는 집을 묵암(默庵)이라 호하여 스스로 경계하였다. 처음 청송이 조정암(趙靜庵)의 문하에 종유하여 올바른 학문을 얻어들었는데, 선생은 가정에서 배워 도를 들음이 매우 빨랐다. 일찍이 한 번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병환 때문에 복시(覆試)에 응시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평소 조정암과 이퇴계(李退溪)를 높이고 사모하였으며 위로 거슬러 올라가 고정(考亭)을 표준으로 삼았다. 이때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또한 도학으로 자임(自任)하여 서로 함께 의리를 강명하여 조예(造詣)가 더욱 깊으니, 한 시대의 선비들이 모두 귀의하여 우계(牛溪) 선생이라 칭하였다. 얼마 후 도신(道臣)이 학행이 탁월하다고 아뢰어 두 차례나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6품직으로 뛰어올라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배우러 와서 따르는 자들이 더욱 많으니, 선생은 이들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서실의(書室儀)를 게시하여 제생들로 하여금 따라서 행할 바를 알게 하였다. 산서(散署)의 서장(署長)과 여러 시원(寺院)의 관료와 부장관, 공조의 좌랑과 정랑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며, 그 사이에 소명을 받고 한 번 경성(京城)에 갔다가 상소문을 올리고 즉시 돌아온 적도 있다. 사헌부의 관원에 제수된 것은 지평으로 부른 것이 열 번 남짓이었고 장령으로 부른 것이 두 번이었으며, 편안한 수레로 길에 오르도록 명하기까지 하였으나 모두 굳이 사양하고 봉사(封事)를 올려 선을 따르고 학문을 주장하는 방도를 아뢰었다.
선생은 성품이 겸손하고 신중하여 이렇게 관직에 제수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나 그 실제는 자연 엄폐할 수가 없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많이 성상께 아뢰었다. 성상은 이 문성공에게 묻기를, “성모의 어짊을 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으나 다만 그의 재주가 어떠한가?” 하니, 이 문성공은 대답하기를, “홀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임무를 담당할 수 있는지는 신이 감히 알 수 없으나, 사람됨이 선(善)을 좋아하니 선을 좋아하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도 충분합니다. 다만 병이 많아 사무가 많은 부서를 맡기기가 어려우니, 한가로운 부서에 두어서 경연(經筵)에 입시하게 하면 반드시 성상의 덕을 돕고 유익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신사년(1581, 선조14) 종묘서 영에 임명하였는데 부르는 뜻이 정성스럽고 간곡하였다. 선생이 병을 무릅쓰고 서울에 들어오자, 성상은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고 약물을 하사한 다음 편전(便殿)에서 인견하여 치도(治道)의 요체를 물었다. 이에 대답하기를, “임금은 반드시 먼저 몸과 마음을 수습하여 마음과 기운을 항상 맑게 하면 근본이 서서 의리가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짐은 일정함이 없어서 오직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진 보필을 얻고 훌륭한 인재를 널리 수합하여 여러 지위에 두면 훌륭한 정치와 교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오늘날 조정의 인재는 어떠한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몸을 용납하여 지위만 보전하려는 자가 많고 임금을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는 자가 적으니, 이는 우려할 만합니다.” 하였다. 또 백성을 구제할 계책을 묻자, 대답하기를,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고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 주어야 하니, 이는 인심을 굳게 결속시켜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물러 나와 글을 올려 다시 이 내용을 지극히 말하였으나 상은 상소문을 오랫동안 내려 보내지 않았다. 승정원과 옥당에서 이 상소를 대신들에게 보일 것을 청하자, 비답하기를, “상소문 중에 학문을 논한 일 등은 내 마땅히 살펴야 하겠으나 다만 국가의 제도를 모두 변경하려 하였으니, 이는 또한 행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뒤에 인대(引對)할 때에 다시 예전의 말씀을 거듭 아뢰었다.
선생은 일찍이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이 연산군 때에 모두 파괴되고 어지러워졌는데 아직도 다 개혁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이것을 변통하여야 비로소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시세가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위태로운 정국을 바꾸어 편안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요, 옛 법도를 모두 바꾸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 문성공과 서로 의견이 합하여 또한 여러 번 이것을 개진하였으나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상이 선생이 녹봉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특별히 쌀과 콩을 하사하자, 선생은 간곡히 사양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구휼하면 받는 것은 옛날의 도이다.” 하니, 선생은 부득이 받아서 모두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대신이 선왕조(先王朝)의 고사(故事)를 따라 경연직을 겸임하게 하여 입시하게 할 것을 청하자, 상은 허락하지 않고 다시 위급함을 구원하라는 명을 내렸다. 선생은 사양하고 받지 않고는 여러 번 상소하여 물러날 것을 청하고 교외로 나가 명을 기다렸다. 상은 어찰(御札)로 소환하고 인견하여 머물 것을 권고하였으나 선생은 더욱 강력히 간청하였다. 이에 상은 비로소 잠시 돌아갔다가 겨울을 나고 서울로 올라올 것을 허락하였다. 집의와 여러 시(寺)의 정(正)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다음 해 봄에 이 문성공이 병조의 장관(長官)이 되어 선생에게 경륜하는 일을 맡길 만하다고 천거하자, 상은 특별히 병조 참지를 제수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병조 판서가 바로 그대의 친구인데 그대를 참지로 발탁하였으니, 어찌 뜻이 없겠는가. 마음을 함께하고 덕을 함께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일이다.” 하였다. 부르는 명을 여러 번 내리자, 선생은 억지로 서울에 들어갔는데 옮겨 이조 참의를 제수하고 은대(銀帶)를 하사하였다. 선생이 세 번 상소하여 사직하자, 본직(本職)을 체직하도록 허락하고는 그대로 경연에 입시하고 물러나 돌아갈 계책을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 문성공이 정사를 담당하여 중외의 촉망을 받고 있어서 실로 국운을 만회할 기미가 있었으나 소인배들이 틈을 타 논죄하고 탄핵하여 지위에 편안히 있지 못하고 떠나가게 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그들의 모함과 날조를 밝히자, 소인배들은 더욱 노여워하여 선생까지 함께 탄핵하였다. 선생이 당일로 도성을 나와 파산(坡山)으로 돌아오니, 이에 태학생(太學生) 및 호남(湖南)과 해서(海西)의 유생 수백천 명이 글을 올려 구원하였다. 이에 상은 칭찬하여 답하고, 또 하교하기를, “만일 군자라면 당(黨)이 있음을 걱정하지 않으니, 나는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하고는 마침내 간당(奸黨) 중에 심한 자를 배척하여 쫓아내고 특별히 이 문성공을 총재(冢宰)로 임명한 다음 다시 선생을 이조 참의로 불렀다. 얼마 후 이조 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섯 번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선생은 들어가 사은하였다.
갑신년(1584, 선조17) 1월 이 문성공이 별세하자, 선생은 도가 행해지지 못할 줄을 알고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 연달아 글을 올려 해직을 요청하니, 상은 비답하기를, “새로 어진 재상을 잃어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안하지 못하다. 현재 경과 함께 국사를 다스릴 것을 도모하니, 이 어찌 물러나겠다고 아뢸 때이겠는가.” 하였다. 몇 달 있다가 휴가를 받아 분황(焚黃)할 것을 청하자, 상은 하교하기를, “성모가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지키며 은거하여 지조를 지켰는데, 내가 여러 차례 부름으로 인하여 마음을 바꾸어 왔다. 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는데 이제 해가 저물어 가니, 마땅히 지방의 수령으로 하여금 안부를 묻게 하라.” 하였다.
다음 해에 국(局)을 설치하고 《소학(小學)》을 교정(校正)하였는데, 선생을 부를 것을 청하자 이를 윤허하였다.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세 번 사은만 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 문성공이 별세하자 세상일이 크게 변하였다. 여러 소인배들이 점점 등용되어 더욱 옛 원한을 갚으려 하였다. 이들은 선생이 다시 기용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추악한 말로 모함하여 비방하니, 선생은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 겨울에 다시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상이 하교하기를, “국가에 큰 변고가 있으니, 경(卿)이 물러나 산중에 있어서는 안 된다.” 하였으므로 선생은 마침내 조정으로 달려갔다.
상이 직언(直言)을 구하므로 마침내 상소문을 초하여 앞서 말했던 백성을 잘 길러 나라를 보전할 계책을 아뢰려 하였는데, 마침 큰 병이 나서 다음 해 여름에야 비로소 이 상소문을 올리고는 인하여 시골로 돌아갈 것을 청하고 돌아왔다. 태학의 여러 생도들이 선생을 머물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답하지 않았다. 행상(倖相)이 궁중(宮中)과 결탁하여 유언비어를 선동하고 날조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24) 봄에 사화(士禍)가 일어났는데, 이에 관련되어 귀양 가거나 폄출(貶黜)당한 자는 모두 선생의 친구들이었다. 여러 소인배들이 이때를 틈타 기어이 선생까지 함께 몰아넣으려 하니, 선생은 더욱 스스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구(倭寇)가 깊이 쳐들어오자, 상이 장차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려 한다는 말씀을 듣고는 도성으로 들어가 국난(國難)에 달려가려 하였으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본래 산야에서 일어나 붕당을 한다는 죄목을 입어서 불원간에 장차 죄를 받을 것이니, 국가에 비록 위급한 일이 있으나 의리상 감히 가볍게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 대가가 만약 서쪽으로 행차하시게 되면 마땅히 길가에서 곡하며 맞이할 것이니, 만일 성상의 고문(顧問)을 입는다면 대가를 따라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오직 물러나 구학(溝壑)에서 죽을 뿐이다.’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하룻밤 사이에 대가가 갑자기 출발하니, 선생이 거주하는 곳은 큰길과 수십 리의 거리였다. 대가가 임진 나루를 건너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이미 강나루에 배가 끊겨 통행하지 못하였고, 왜병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선생은 마침내 통곡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산중으로 피난하였다. 광해군이 이천(伊川)에 머물면서 글을 내려 불렀으나 병환이 심하여 즉시 가지 못하고 차자(箚子)를 올려 군무(軍務)를 아뢰었다. 광해군이 편의대로 검찰사(檢察使)를 제수하고 말을 보내어 재촉하여 불렀다. 이때 왜적이 산골짝으로 두루 들어와 더욱 노략질과 살인을 자행하였다. 광해군이 급히 성천(成川)으로 옮기니, 선생은 어렵사리 성천에 도착하여 광해군을 뵙고 즉시 의주(義州)에 있는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도중에 참찬에 제수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며, 다시 대사헌으로 바뀌었다.
선생은 상소하여 자신의 죄를 논열(論列)하고 인하여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군량(軍糧)을 모으는 등의 계책을 아뢰었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적국(敵國)의 외환(外患)을 전적으로 천운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옛날 제왕들은 변고를 만나면 혹 조서(詔書)를 내려 자책하여 존호(尊號)를 삭제하고 혹 나라를 그르친 신하들을 처벌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는 뜻을 분명히 알게 해서 국가의 흥복(興復)을 도모하였습니다. 이제 마땅히 큰 뜻을 분발하시어 통렬히 자책하며,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일과 궁인(宮人)들이 정사에 관여하는 단서를 끊고, 정직한 선비를 등용하여 이목(耳目)의 임무를 맡기신다면 인심이 크게 기뻐하고 복종하여 원수인 왜적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보는 자들은 화의 싹이 이 상소문에 있을 줄을 알았다.
명나라 주사(主事)인 원황(袁黃)이 찬획(贊畫)으로 와서는 편지를 보내어 학문을 논하면서 오로지 아호(鵝湖)를 주장하고 낙민(洛閩)을 배척하였다. 그는 평소 뜻이 높고 거만하였으므로 제공(諸公)들은 그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아 답장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그리하여 선생에게 맡겨 답서를 쓰게 하자, 선생은 “소방(小邦)은 황조(皇朝)에서 반포해 준 경서 전주(經書傳註)와 성리(性理)에 관한 책들을 외고 익혀서 이 학설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원황은 다시 논란하지 못하였다. 여러 번 참찬과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산반(散班)에 나아갔다.
왜적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도굴하자, 명을 받들고 재신(宰臣)들과 봉심(奉審)하였는데, 일을 생각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결정할 적에 모두 선생을 추존하였다. 선생은 해주(海州)에 복명(復命)하였다. 대가가 도성으로 돌아왔으나 선생은 병 때문에 남아서 중전(中殿)을 호위하였다. 호서(湖西)의 토적(土賊)이 크게 일어나자, 선생은 병환을 무릅쓰고 상경하여 글을 올려 대죄하였는데, 성상의 어찰(御札)에 변란(變亂)의 초기의 일을 들어, 말씀한 내용이 매우 준엄하였다. 처음 상이 서쪽으로 파천할 때에 임진 나루에 이르러서 이홍로(李弘老)에게 “성모의 집이 먼가 가까운가?” 하고 물으니, 이홍로는 본래 행상(倖相)의 문객(門客)이었는데, 길가에 있는 정자와 집을 아무렇게나 가리키며 “저곳이 성모의 집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와서 나를 만나 보지 않는가?” 하니, 이홍로는 아뢰기를, “이런 위급한 때에 어찌 그가 기꺼이 와서 뵙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의주에 있을 적에 선생이 분조(分朝)에서 행재소로 달려온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모함하는 말을 올리기를, “성모가 이번에 오는 것은 세자를 위하여 내선(內禪)을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상은 이미 여러 번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므로 이때에 이러한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감히 스스로 변론하지 못하고 중한 처벌을 내리기를 원하였는데, 상은 다시 위로하여 타이르는 말씀을 내렸으나 선생이 진달(陳達)한 것을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적이 영남의 10여 개 고을을 점거하고 소굴로 삼으니, 명군(明軍)은 오랜 전쟁에 지치고 피로하여 나아가 점령하지 못하였다. 일을 맡은 명나라의 여러 신하들은 뒷일을 잘할 계책이 없으므로 왜적이 화친을 청한다고 핑계 대니, 황제에게 올린 일 중에 황제를 속이고 은폐한 사실이 많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글을 올려 그 내용을 고발하자, 이 때문에 총독(摠督) 고양겸(顧養謙)은 크게 원한을 품고 자문(咨文)을 보내어 우리나라로 하여금 자신의 뜻에 따라 상주(上奏)하게 하였다. 상은 그들의 협박을 받고는 진실로 이미 그렇게 하겠다고 허락하였으나 우선 이 일을 의정부에 회부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정승 유성룡(柳成龍)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뜻을 굽혀 고양겸의 자문을 따르려고 하여 선생과 함께 들어가 상께 대답하기로 약속하였다. 선생은 ‘우리가 국가를 회복할 수 있는 큰 계책은 오직 중국 장상(將相)들의 마음을 잃지 않는 데에 달려 있으니, 그들의 뜻에 다소 부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상의 앞에 이르러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인데, 상이 매우 불쾌해하니, 유 정승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다가 그대로 물러 나왔다. 조정에서는 마침내 고양겸의 지시에 따라 황제에게 글을 아뢰었으나 상의 뜻은 화의를 주장했다 하여 선생을 허물하였다. 삼사에서 서로 글을 올려 화의를 배척하니, 이는 그 의도가 선생에게 있었다. 선생은 마침내 죄를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정유년(1597, 선조30) 가을에 다시 왜적이 쳐들어오니, 도성이 위급하였다. 친구들이 대부분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국난에 달려갈 것을 권하였으나 선생은 나아가기 어려운 의리를 가지고 답하였으니, 이 내용은 본집(本集)에 자세히 보인다. 선생의 출처(出處)는 한결같이 도의(道義)를 따라 혹 부르는 명이 있어도 가지 않은 경우가 있었으나 일찍이 부르는 명이 없이 스스로 간 적이 없었다.
무술년(1598, 선조31) 여름에 병환이 위독하자, 아들 문준(文濬)에게 유명(遺命)하기를, “내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어 마음속의 일을 밝히지 못하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삼베옷을 입히고 종이 이불로 염습하여 소달구지에 싣고 고향에 돌아가 장례할 것이며, 묘 앞의 비석에 ‘창녕성모지묘(昌寧成某之墓)’라고만 써서 자손들로 하여금 나의 무덤이 있는 곳을 알게 하면 된다.” 하였다. 6월 6일에 파산서실(坡山書室)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4세였다. 이해 모월 모일에 파산의 향양리(向陽里)에 있는 유향(酉向)의 산 청송 선생의 묘소 뒤에 장례하였다. 선생이 별세한 뒤에도 소인배들은 원수처럼 여기고 미워하기를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신축년에 정인홍(鄭仁弘)은 자기의 무리들을 사주하여 상소하여 선생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여 죽였다고 무함(誣陷)하고 비방하게 하였다.
경인년에 최영경은 도신(道臣)의 은밀한 장계로 인하여 체포되었는데, 이때 선생은 조정에서 이미 물러 나와 있었다. 선생이 정승 정철(鄭澈)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가 평소 효도하고 우애하였으니 이러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자, 정 정승은 궁중에 들어가 선생의 말씀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에 성상의 뜻이 풀려 석방되었는데, 뒤에 탄핵(彈劾)하는 글을 만나 다시 옥에 갇혔다가 죽었다. 이때 여러 소인들은 도리어 선생이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였다고 말하니, 선조는 어필로 ‘모함하여 죽였다[搆殺]’는 두 글자를 삭제하였으나 끝내 관작을 추탈(追奪)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유림(儒林)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오공 윤겸(吳公允謙)과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선생이 무함을 받은 내용을 아뢰었다. 상은 또한 평소에 선생이 대유(大儒)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즉시 관작을 복구하도록 명하였으며, 얼마 후 의정부 좌의정을 추증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제생들은 파산에 서원을 세워 청송 선생과 함께 제향하고 있다. 나는 늦게 태어나서 비록 미처 수업하지는 못하였으나 어릴 때부터 선생을 태산처럼 우러러 사모하였다. 삼가 선배와 장자(長者)에게 들으니, 선생은 효성이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청송 선생이 일찍이 병환이 위독하자,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약에 섞어 올려서 몇 달 동안의 수명을 연장하였으며,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고 상례(喪禮)의 절문(節文)을 모두 《소학》과 《가례(家禮)》를 따라 행하였다.
선생은 평소 몸을 수렴하고 단속하여 말씀과 행실이 모두 모범이 될 만하였다. 학문과 실천에 있어서는 후학들이 엿보고 측량할 수 있는 바가 아니나 기상이 장중하면서도 편안하고 온화하여 바라보면 사람들이 도덕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율곡과 사단 칠정(四端七情)의 이기(理氣) 선후(先後)에 대한 내용을 논변하여 왕복한 편지가 수천만 자에 달하는데, 선유(先儒)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내용이 많다. 율곡은 일찍이 칭찬하기를, “견해의 도달한 경지는 내 다소 나은 점이 있으나 조행(操行)의 독실하고 확고함은 내가 미치지 못한다.” 하였으며, 선생 또한 말씀하기를, “율곡은 참으로 나의 스승이다.” 하였다. 선생은 평소 책을 읽고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일삼았으며, 저술하고 글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집 안에 문집 약간 권이 보관되어 있으니, 행여 후세에 덕(德)을 아는 선비를 기다리고 의심하지 않는다.
아, 선생은 스스로 산림(山林)을 지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우리 선조(宣祖)의 특별한 은혜를 입고 덕이 같은 현자가 서로 추존하므로 부득이 세상에 나왔는데, 평소의 포부를 펴지 못하고 여러 모함하는 말들이 집중되어 끝내 낭패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현명한 군주가 선(善)을 좋아하고 현자를 좋아하는 정성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입히려던 본래의 뜻이 행해지지 못하게 되었으니, 도가 장차 폐지되는 것이 천명이라는 말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유현(儒賢)이 훌륭한 세상을 만남은 예로부터 보기가 드물었다. 우리 조선조에 기묘년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시기였으나 간신들이 모함하여 사림의 지극한 애통함이 되었는데, 선생이 만난 환경이 불행히도 이와 같았는바, 다만 화를 당함에 다소 경중(輕重)이 있을 뿐이다. 옛말에 ‘하늘의 인자하지 못함이 심하다’ 하였는데, 이 또한 이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는가 보다. 그러나 도맥(道脈)을 잇고 올바른 학문을 전수하여 드높이 백세(百世)의 훌륭한 스승이 되었으니, 등용되고 버려지며 훼방하고 칭찬함에 따라 더 보태지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군수 여량(汝樑)의 따님인데 2남 2녀를 낳았다. 문영(文泳)은 일찍 죽었고 차남 문준(文濬)은 현감이며, 장녀는 별좌(別坐) 남궁명(南宮蓂)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대사간 윤황(尹煌)에게 출가하였으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문잠(文潛)이다. 문준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역(櫟)이고 다음은 익(杙)과 직(㮨)이며, 딸은 세 명을 두었다. 남궁명은 2남 3녀를 두었고 윤황은 5남 2녀를 두었는데, 내외의 손자가 매우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도가 천하에 있어 / 道在天下
드러나고 은미함이 시기가 있네 / 顯微有幾
훌륭하신 청송 선생이여 / 思皇聽松
일찍 훌륭한 스승을 얻으셨네 / 早自得師
선생은 이를 이어 / 先生接之
올바른 학문을 들었다오 / 正學是聞
마음을 가라앉히고 힘써 구하여 / 潛心力求
하늘이 사문을 도왔네 / 天與斯文
덕은 반드시 이웃이 있으니 / 德必有隣
군자와 함께하였다오 / 君子同人
정밀하고 엄격하고 치밀하며 / 精嚴縝密
고명하고 통달하였네 / 高朗洞達
이기의 묘함을 연구하고 / 妙窮理氣
사단 칠정을 논하였다오 / 商論四七
은미함을 개발하고 지극한 경지에 나아가 / 發微造極
과녁을 깨뜨리고 얼음처럼 풀렸네 / 的破氷釋
이미 선현의 밝음을 이었고 / 旣紹前明
또한 후생들의 몽매함을 열어 주었다오 / 亦啓後蒙
구고에 명성이 알려지니 / 九皐聖聞
하물며 자기가 사는 고을에 있어서랴 / 矧惟在邦
비록 맞이하여 등대함을 입었으나 / 雖被延登
때가 매우 어려웠네 / 孔艱厥時
아, 저 거짓말하는 간신들이여 / 嗟彼奸罔
참소하는 말로 비방하고 속였네 / 讒言詆欺
무릎에 올려놓을 듯 못에 빠뜨릴 듯 하니 / 加膝墜淵
옛 현자들이 탄식한 바라오 / 昔賢所歎
사람이 죽고 도가 버려지니 / 人亡道廢
어찌 천운이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 孰云匪天
운수가 다하면 이치가 돌아와 / 數窮理復
고리를 따라 돌 듯하니 / 若循環然
선생의 도가 / 先生之道
이제 빛난다오 / 於今有光
소자는 뜻은 크나 소략하여 / 小子狂簡
참람하게 명문(銘文)을 지었네 / 僭述銘章
큰 묘에 비석을 세워 / 碑于大隧
무궁한 후세에 밝히노라 / 用昭無疆


[주D-001]행상(倖相) : 군주의 총애를 받는 정승이란 뜻인데,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주D-002]아호(鵝湖)를 …… 배척하였다 : 아호는 산 이름으로, 강서성(江西省) 연산현(鉛山縣) 북쪽에 있다. 송나라 때 주자(朱子)가 육구연(陸九淵) 형제와 이곳의 아호사(鵝湖寺)에서 만나 서로 자신의 학문을 논변하였는바, 아호는 육상산(陸象山)을, 낙민은 정주(程朱)를 가리킨다.
[주D-003]구고(九皐) : 깊은 웅덩이를 이른다.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에서 우니 그 소리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 하였는데, 선비가 시골에서 학문을 쌓고 수행하여 명성이 임금에게 알려지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4]무릎에 …… 하니 : 사랑하여 나오게 하고자 할 때에는 장차 무릎에 올려놓을 듯이 하다가 미워하여 물러가게 하고자 할 때에는 장차 연못에 빠뜨릴 듯이 하여 애증(愛憎)을 마음대로 하여 법도를 넘음을 이른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위정자들은 사람을 나오게 할 때에는 장차 무릎에 올려놓을 듯이 하다가 사람을 물러가게 할 때에는 장차 못에 빠뜨릴 듯이 한다.[今之君子 進人若將加諸膝 退人若將隊諸淵]” 하였다.

우계연보부록
행장(行狀) [우의정 이정귀(李廷龜)]


선생은 휘(諱)가 혼(渾)이고 자가 호원(浩原)이며 창녕인(昌寧人)이니, 스스로 묵암(默庵)이라 호하였으며, 파산(坡山)의 우계(牛溪)에 거주하였으므로 배우는 자들이 우계 선생이라 칭하였다. 고려(高麗) 때에 중윤(中尹)을 지낸 휘 인보(仁輔)의 후손인데, 6대조 휘 석인(石因)은 예조 판서였고, 5대조 휘 억(抑)은 좌찬성이었고, 고조 휘 득식(得識)은 좌윤(左尹)이었고, 증조 휘 충달(忠達)은 현령으로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조고 휘 세순(世純)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시호가 사숙(思肅)이다. 선고(先考) 휘 수침(守琛)은 세상에서 청송(聽松) 선생이라 일컫는데, 젊어서 조정암(趙靜庵)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은둔하여 뜻을 지키며 도학(道學)을 강명하니, 명종(明宗)이 융숭하게 예우하고 여러 번 관직을 내려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별세하자, 사헌부 집의에 추증하였다. 선비(先妣)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판관(判官) 사원(士元)의 따님인데, 가정(嘉靖) 을미년 6월 25일 선생을 한성(漢城)의 순화방(順和坊)에서 낳았다.
선생은 10세에 청송 선생을 따라 파산의 별업(別業)으로 왔는데, 12, 3세에 문사(文思)가 날로 진전되어 책을 대하면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남김없이 통달하였다. 17세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모두 급제하였으나 병환이 있어 복시(覆試)에 응시하지 못하였는데, 이로부터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 힘썼다. 헌납(獻納) 백인걸(白仁傑)이 정사를 말하다가 죄를 얻고는 파산의 집에 거처하였는데, 선생은 수업할 것을 청하였다. 약관 시절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고 높은 학식과 뛰어난 행실로 한 시대의 동류(同類)들에게 크게 추앙과 복종을 받았다.
계해년(1563, 명종18)에 청송 선생이 풍병(風病)을 앓아 위독하자, 선생은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약에 섞어서 올렸는데, 얼마 후 병환이 덜하다가 반년 만에 다시 병이 발작하니, 또다시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약에 섞어서 올렸다. 갑자년(1564, 명종19) 1월 부친이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별세하자, 3년 동안 여묘(廬墓)하였다.
선조(宣祖) 초년(1568)에 경기 감사가 선생이 학문에 침잠(沈潛)하고 효행이 드높다고 조정에 아뢰어 전생서(典牲署)와 목청전(穆淸殿)의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이조에서는 학문과 행실이 뛰어나다고 천거하여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에 올려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경오년(1570, 선조3)에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자, 사은숙배하고 즉시 파산으로 돌아오니, 원근의 학도(學徒)들이 모여들어 문하에 가득하였다. 선생은 간곡히 이들을 가르쳤으며, 서실의(書室儀)를 짓고 서재(書齋)의 규칙을 세웠으며, 손수 《주자어록(朱子語錄)》 중에 학문하는 방법을 초(抄)하여 책자 하나를 만들어서 배우는 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율곡(栗谷) 선생과 사단 칠정(四端七情)의 이기설(理氣說)을 논란하여 긴 편지를 주고받아 옛사람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많이 발명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6)에 공조 좌랑에 제수되고 얼마 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며, 갑술년(1574, 선조7)에 공조 정랑에서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환 때문에 사양하였다.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로 부르고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서울로 올라오라는 분부가 있었다. 그리하여 갑술년부터 기묘년(1579, 선조12)까지 지평에 제수된 것이 열두 번이었고 공조 정랑에 제수된 것이 네 번이었으며,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와 종묘서 영(宗廟署令), 예빈시 판관(禮賓寺判官),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와 장흥창 주부(長興倉主簿)에 제수된 것이 한두 번이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거나 사은숙배한 다음 체직되었다. 경진년(1580)에 또다시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환을 이유로 상소문을 올리니, 상은 말과 가마를 타고 올라오라고 분부하였다.
율곡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성모(成某)에게 가하신 은혜와 예우는 근래에 드문 것입니다.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상의 뜻이 그 사람을 등용하시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한 번 보고 마시려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모의 어짊을 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으나 다만 그 재주가 어떠한지 모르겠다.” 하였다. 율곡이 아뢰기를, “재주가 또한 똑같지 아니하여 홀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자가 있고 선(善)을 좋아하여 여러 사람의 재주를 쓸 수 있는 자가 있습니다. 성모의 재주는 홀로 경세제민의 책임을 맡을 수 있다고 이른다면 지나치지만, 사람됨이 선을 좋아하니 선을 좋아하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도 충분합니다. 이 어찌 쓸 만한 재주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몸에 고질병이 있어서 반드시 사무가 많은 부서는 맡을 수가 없으니, 한가한 부서에 두어 때로 들어와 경연(經筵)에 입시하게 한다면 반드시 성상을 보필하는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신사년(1581) 종묘서 영에 제수되었는데, 부르는 명이 여러 번 내렸으므로 병을 무릅쓰고 서울로 들어갔다. 상은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고 약을 하사한 다음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引見)하였는데, 첫 번째로 대도(大道)의 요체를 묻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군주가 반드시 몸과 마음을 수습하고 정신을 보전하여 전일하고 안정되게 하여 뜻과 기운을 항상 맑게 하면 본원(本源)인 마음이 맑아져서 의리(義理)가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고금의 치란(治亂)에 대하여 묻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짐은 일정한 형체가 없어서 오직 군주의 한 마음에 달려 있으니, 반드시 한 세상의 현인과 군자를 얻어 재상으로 삼고 인재를 널리 수합하여 여러 지위에 둔 뒤에야 훌륭한 정치와 교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내가 즉위한 이래로 등용한 인물 중에 소인이 있는가?” 하고 묻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조정에 몸을 용납하고 지위를 지키기 위해 성상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사람만 많고 강직하고 굳세어 임금을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는 신하가 적으니, 어찌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백성들의 곤궁함을 어떻게 하면 구제할 수 있는가?” 하고 묻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고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 준다면 백성들의 부역이 반드시 가벼워져서, 은혜가 민심을 결속시켜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선생이 녹봉을 받지 않았는데, 모시는 신하 중에 이것을 말하는 자가 있으니, 이에 상은 쌀을 실어 보내 주게 하였다. 선생이 상소문을 올려 사양하자, 상은 비답(批答)하기를, “구휼해 주면 받는 것은 옛날의 도리이다.” 하시니, 선생은 부득이 이것을 받아서 친척과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만(萬) 자에 달하는 봉사소(封事疏)를 올려 전에 등대했을 때에 아뢴 뜻을 펴서 극언하였다. 승정원에서 이 상소문을 대신들에게 보일 것을 청하자, 상은 비답하기를, “상소문 가운데에 학문과 시폐(時弊)에 대한 것은 내 마땅히 자세히 살펴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 다만 조정을 비판한 것이 너무 지나치고 또 나라의 제도를 모두 변경하려 하였으니, 이는 또한 시행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대개 선생의 뜻은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이 연산군(燕山君)에 이르러 모두 폐지되었는데, 아직 완전히 없어지거나 개혁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예를 들면 진상(進上)과 공물(貢物) 따위가 이것이었다. 그리하여 애당초 옛 법을 모두 변경하여야 한다고 말씀한 것은 아니고, 다만 이처럼 백성들에게 폐해를 입히는 정사를 제거하여 선왕(先王)이 만들어 놓은 법을 따르려고 한 것일 뿐이었다.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대신들에게 이 상소문을 보일 것을 청하자, 상은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삼공(三公)이 선생의 말씀을 가납(嘉納)하고 채용(採用)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경연을 겸직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연을 겸직하는 일은 새 규정을 만들 수가 없으니, 마땅히 다시 만나 보겠다.” 하고는 체직하여 공조 정랑에 제수하자, 선생은 연달아 글을 올려 위급함을 구제해 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다.
수개월 동안 병가(病暇)를 내자, 상은 의원을 보내어 약을 하사하였으며, 풍저창 수(豐儲倉守)를 제수하고 편전(便殿)에서 인견하도록 명하였다. 선생은 나아가 아뢰기를, “하늘의 운행이 굳세어 한순간도 간단(間斷)이 없기 때문에 만물을 발육하여 조화(造化)의 공(功)을 이루는 것입니다. 군주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니, 만일 한순간이라도 간단이 있으면 곧 천지의 조화와 서로 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경연에서 글줄을 외고 글자의 뜻을 찾아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제왕의 학문이 아니니, 반드시 깊이 배양하고 후하게 길러서 의리의 마음이 항상 이겨서 뜻과 기운을 맑게 한다면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욕망이 자연 그 사이에 용사(用事)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용》의 구경(九經)《대학》의 치평장(治平章)에 반드시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았고 현자를 높이는 것이 그다음입니다. 《대학》의 혈구(絜矩)는 사물에 대응하는 요체가 되며, 인물을 등용하고 재물을 다스리는 것은 정치하는 도리의 최우선이 됩니다. 우리나라는 농지에 대한 세(稅)는 지극히 가볍고 공물(貢物)은 지극히 무거우니, 모름지기 공법(貢法)을 줄여서 백성들의 힘을 펴지게 하고 세금을 올려서 세입을 증가하게 한다면 백성이나 나라나 모두 편리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은 선생의 말씀을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으나 공안(貢案)은 고치지 못하였다.
상이 분부를 내려 경연에 출입하도록 명하자, 선생은 연달아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선생으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 겨울을 나면서 병을 조리하게 하고자 하니, 대신들은 품계를 올려 주고 경연의 참찬관(參贊官)을 겸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상이 한가로운 직책에 있으면서 입시할 것을 명하자, 선생은 거듭 사양하여 해직을 청하고 도성을 나가 서쪽 교외에 머물렀다. 상은 선생이 도성을 나갔단 말을 듣고는 비망기(備忘記)로 소환하여 편전에서 인견하고 재삼 머물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물러가 죽기를 간곡히 청하자, 상은 그제야 우선 돌아갔다가 다음 해 봄에 올라오도록 허락하였다. 다시 사헌부 집의와 사옹원(司饔院)ㆍ사재감(司宰監)ㆍ내섬시(內贍寺)의 정(正)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계미년(1583, 선조16) 3월 특지(特旨)로 병조 참지를 제수하였는데, 세 번 사양하는 상소문을 올리자 체직시키고 이조 참의에 제수한 다음 인하여 품대(品帶) 한 벌을 하사하였다. 선생이 세 번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자, 비답하기를, “내 감히 직사(職事)를 맡겨 억지로 번거롭게 할 수가 없어서 본직을 체직하는 것이니, 다만 물러나 돌아갈 계책을 하지 말고 전에 내린 전지를 따라 경연에 입시하여 덕이 부족하고 몽매한 나를 돕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율곡이 조정에 있으면서 당론(黨論)을 없애고 잘못된 정사를 개혁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선조(宣祖)는 매우 사랑하고 의지하였다. 취향이 다른 자들이 율곡을 시기하여 공사 간(公事間)에 하찮은 일을 들추어내어 국정을 제멋대로 처결하고 교만 방자하다고 삼사(三司)에서 탄핵하니, 조야(朝野)가 격분하였다. 선생이 마침 부름을 받고 서울에 이르렀다가 글을 올려 율곡을 논변하여 구원하려 하니, 삼사에서는 또 선생까지 탄핵하였다. 선생이 당일로 도성을 나와 파산으로 돌아오니, 태학생(太學生) 470명과 호서(湖西)와 해서(海西)의 유생(儒生) 400여 명이 서로 이어 항의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유생들의 상소문을 보니, 충성스럽고 의로운 간담(肝膽)이 늠름하여 범할 수가 없다. 선비들의 기개(氣槪)가 이와 같으니, 내 어찌 국사를 걱정하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만일 군자라면 붕당(朋黨)이 있음을 걱정할 것이 없으니, 나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당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하였다. 얼마 후 또다시 이조 참의를 제수하고 부르는 명을 네 번이나 내렸다. 선생이 부득이 명에 사은숙배하니, 상은 인견하고 대면하여 타일렀다. 겨울에 이조 참판으로 올려 제수하자, 사양하는 상소문을 다섯 번 올렸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갑신년(1584, 선조17) 1월 율곡 선생이 별세하자, 선생은 한탄하기를, “율곡은 도체(道體)에 대하여 큰 근원을 밝게 보았다. 이른바 ‘천지의 조화가 두 근본이 없다’는 것과 ‘인심(人心)의 발함이 두 근원이 없다’는 것과 ‘이기(理氣)가 서로 발할 수 없다’는 등의 말씀은 모두 실제로 보고서 안 것이니, 참으로 나의 스승이다. 진실로 산하(山河)의 뛰어난 기운을 받고 태어난 인물이요, 삼대(三代) 이전의 훌륭한 인물인데, 이러한 세상에 큰일을 하지 못하고 뜻만 품고서 별세하였으니, 애통하다.” 하였다. 선생이 또다시 네 번이나 정사(呈辭)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인하여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아뢰자, 상은 답하기를, “새로 어진 재상을 잃었으니, 나는 국사를 생각하면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안하지 못하다. 이제 나와 함께 국가를 다스릴 자는 경(卿)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지금이 어찌 물러갈 때이겠는가.” 하였다.
가을에 분황(焚黃)하는 일로 말미를 받아 파산으로 돌아오자, 상은 경기 감사에게 글을 내리기를, “성모(成某)가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지키며 은거(隱居)하여 지조를 지키고 있었는데, 내가 여러 번 부름으로 인하여 마음을 바꾸어 조정에 나왔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병이 많으므로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이제 해가 저물어 가니, 마땅히 수령으로 하여금 안부를 묻고 적절히 헤아려 음식물을 내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을유년(1585, 선조18)에 찬집청(纂集廳)의 당상관(堂上官)으로 부름을 받고 세 번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이보다 앞서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모두 명류(名流)로서 하찮은 일 때문에 서로 비방하니, 선배와 후배들이 마침내 서로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율곡이 아뢰어 두 사람을 외지로 내보내게 하였으나 이때까지도 진정되지 않았다. 심의겸은 바로 인순대비(仁順大妃)의 아우였는데, 젊은 사람들은 외척이라고 지목하여 함께 배척해서 한 함정으로 여겼다. 그러나 선배들은 “심의겸은 권간(權奸)이 조정을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힐 때에 사림(士林)을 부지하여 보호한 공이 있으며, 선조(宣祖)가 왕위를 이을 적에 원로 대신들과 어진 사람을 불러오도록 청하였으니, 비록 외척이라고 하나 평소 중요한 관직에 있지 아니하여 일찍이 조정의 권력을 잡은 적이 없으므로 지나치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선생이 이것을 공론(公論)이라 여기니, 후배들은 마침내 선생까지 함께 탄핵하여 외척과 사귀고 결탁하여 조정을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혀 국사를 그르친다고 모함하였다. 선생은 연달아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하고 유서(遺書)를 써서 아들 문준(文濬)에게 후사(後事)를 부탁하였다.
정해년(1587, 선조20)에 자지문(自誌文) 및 감회시(感懷詩)와 서문을 지어 문생인 오윤겸(吳允謙)과 황신(黃愼)에게 보였다. 기축년(1589, 선조22) 겨울에 다시 이조 참판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이때 마침 정여립(鄭汝立)의 역모(逆謀) 사건이 일어나니, 상은 하교하기를, “나라에 큰 변고가 있으니, 경이 물러나 있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선생은 도성에 들어가 사은한 다음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며, 또 일찍이 정여립을 알고 지냈다 하여 대죄(待罪)하였다. 이때 우상(右相) 정언신(鄭彦信)이 역적과 서신을 왕래하고는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자, 대간(臺諫)에서는 기군망상(欺君罔上)하였다고 논죄하였다. 선생이 요로(要路)를 맡은 대신에게 서신을 보내어 “대신이 한마디 말을 사실대로 하지 않았다 하여 대번에 중한 형벌을 받는 것은 왕도 정치에 손상이 된다. 송(宋)나라 조정은 일찍이 한 명의 대신도 죽이지 않았으니, 인후(仁厚)함을 본받을 만하다.” 하니, 그 의논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이때 역옥(逆獄)이 사대부들 사이에서 일어나 크게 파급되어 만연하였다. 성상이 크게 진노하니, 사람들이 감히 구원하고 해명하지 못하였으나 선생은 강력히 화평한 의논을 주장하였다. 경인년(1590, 선조23) 봄에 봉사(封事)를 올려 옥사를 늦추고 형벌을 신중히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니, 준엄하게 의논하는 자들이 상당히 불평하였다. -경인년 봉사를 살펴보면 백성들을 길러 나라를 보호하고 탐관오리를 다스리고 현자를 등용하는 도리를 위주로 하였는데, 옥사를 늦추고 형벌을 신중히 하는 한 조목은 선생이 상소문을 미처 다 초하기 전에 병환이 났었다. 그리하여 병이 나아 글을 올리려 할 때에는 옥사가 이미 결말이 났으므로 다시 삭제하였는데, 이제 도리어 이 한 조목을 들추어내어 중요하게 여겼다고 하였으니, 이는 선생을 신원(伸冤)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진실을 잃었음을 면치 못하였다.- 이때에 당화(黨禍)가 크게 일어날 기미가 있으므로 선생은 정장(呈狀)을 올려 체직된 다음 마침내 파산으로 돌아왔다. 태학생들이 상소하여 선생을 머물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으니, 선생은 이로부터 다시는 도성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상 또한 다시는 부르지 않았다.
얼마 후 최공 영경(崔公永慶)이 호남의 방백(方伯) 홍여순(洪汝諄)이 올린 장계의 유언비어로 말미암아 또한 체포되어 옥중에 있었다. 이에 선생은 정승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에게 편지를 보내어 “최효원(崔孝元 최영경)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깨끗이 수행하는 사람이니, 어찌 역모에 가담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정 정승의 뜻도 그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탑전(榻前)에서 ‘최영경은 효도하고 우애하며 기절(氣節)이 뛰어난 인물이므로 반드시 역모에 가담하였을 리가 없다.’고 극진히 아뢰었다. 이에 성상의 뜻이 다소 풀렸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변란에 선생은 조정으로 달려가려 하였으나 이때 당론(黨論)이 매우 준엄하여 사대부들이 서로 이어 유배 가고 쫓겨났다. 선생은 정 정승과 절친한 친구 간이어서 불원간에 화가 장차 닥치게 되었으므로 감히 곧바로 대궐 아래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선생은 대가(大駕)가 장차 서쪽으로 피난갈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아들 문준에게 이르기를, “대죄하는 신하는 스스로 나아가기 어렵다. 대가가 만약 과연 서쪽으로 가신다면 오직 길가에서 통곡하고 맞이할 것이다. 내가 만약 고문(顧問)을 입는다면 대가를 따라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죄를 지어 배척받은 신하이니, 감히 스스로 반열에 낄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자제로 하여금 서울에 들어가 분명한 소식을 탐문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급히 서쪽으로 파천할 줄은 진실로 헤아리지 못하였다. 얼마 후 들으니 대가가 이미 임진 나루를 건넌 다음 배를 철거하여 나루터가 통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온 도에 왜병들이 들끓기 때문에 길가에서 통곡하고 맞이하려던 계획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친한 손님과 마주 대하여 통곡하고는 마침내 병든 몸으로 안협(安峽)과 토산(兔山) 사이로 피난하였는데, 병세가 더욱 심해져서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른 것이 여러 번이었다.
광해군(光海君)이 세자로 이천(伊川)에 나가 머물면서 글을 내려 선생을 불렀으나 병환 때문에 즉시 가지 못하고 차자(箚子)를 올려 제왕의 학문과 군무(軍務) 16개 조항을 논하였다. 광해군은 선생으로 하여금 의병장(義兵將) 김지(金漬)의 군중에서 군대의 일을 보게 하고, 인하여 검찰사(檢察使)에 제수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 이정형(李廷馨)과 협력하여 나가 싸워 국토를 수복(收復)하게 하였다. 가을에 광해군이 말[馬]을 보내어 부르자, 선생은 성천(成川)에 며칠 머물다가 즉시 의주(義州)로 갔는데, 도중에 참찬에 제수하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처음에 대가를 미처 호종(扈從)하지 못했다 하여 석고대죄(席藁待罪)하고 새로 제수한 은혜로운 명을 계속하여 사양하였다.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사양하여 체직되고 다시 참찬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상소하여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군량(軍糧)을 모으는 세 가지 계책을 논하였으며, 인하여 군주의 덕을 지극히 논하였다. 이 상소에, “적국(敵國)의 외환(外患)을 전적으로 천운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옛날 제왕들은 이와 같은 변란을 당하면 모두들 통렬히 스스로 경계하고 꾸짖으며 조서(詔書)를 내려 자책하여, 혹은 존호(尊號)를 제거하고 혹은 나라를 그르친 신하들을 처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전의 잘못을 강력히 반성하여 백성들이 우리 군주가 개과천선한 실제를 분명히 알게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걱정하고 멀리 생각하시어 크게 훌륭한 일을 하려는 뜻을 분발하셔야 할 것이니, 단지 공허한 말에 나타낼 뿐만이 아니요, 오직 실제 일에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가까이 모시는 자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일을 금지하고 궁인(宮人)들이 정사에 관여하는 단서를 막으며 한결같이 정직한 선비에게 이목(耳目)의 임무를 맡긴다면 거의 인심(人心)이 기뻐하여 복종하고 천의(天意)가 다시 새로워져서 본원(本源)인 마음이 깊이 배양되어 기강이 떨쳐지고 장병들이 목숨을 바쳐 원수인 왜적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명(明)나라 주사(主事)인 원황(袁黃)이 찬획(贊畫)으로 임명되어 우리나라에 와서 편지를 보내어 학문을 논하였는데, 그의 말은 육상산(陸象山)의 학설을 주장하고 정주(程朱)의 학설은 배척하였다. 행조(行朝)의 재신(宰臣)들은 회답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선생에게 청하여 답장을 초하게 하였는데, 대략 말씀하기를, “소방(小邦) 사람들은 모두 황조(皇朝)에서 반포해 준 경서 전주(經書傳註)와 성리(性理)에 관한 책들을 외고 익혀서 이 학설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원황은 가상히 여기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
계사년(1593, 선조26) 여름에 또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여 체직되고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때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의 화가 현궁(玄宮)에까지 미쳤다. 선생은 명을 받들어 재상들과 봉심(奉審)하였는데, 일을 처리함이 상세하고 신중하며 사려가 보통 사람들의 의표(意表)를 찌르니, 제공(諸公)들이 탄복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병환이 심해져서 9월에야 비로소 해주(海州)의 행조에 복명(復命)하였다. 얼마 안 있어 대가가 도성으로 돌아왔으나 선생은 그대로 남아 중전(中殿)을 호위하였다.
갑오년 봄에 호서(湖西)의 도적이 크게 일어나니, 경성(京城)이 진동하였다. 선생은 병을 무릅쓰고 가마를 타고 서울로 달려가서 상소하여 대죄하였는데, 비답의 대략에, “변란이 일어나던 초기에 내가 경(卿)의 집 앞을 지나갔으나 경이 와서 문안하지 않더니, 이제 경이 찾아오니 감격하여 눈물이 흐른다.” 하였다. 이는 임진년 대가가 서쪽으로 행행할 때에 상이 임진 나루에 이르러 “성모(成某)가 어느 곳에 사는가?” 하고 묻자, 이홍로(李弘老)가 병조 좌랑으로 앞에 있다가 강안(江岸)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을 가리키며 아뢰기를, “저곳이 바로 성모가 사는 곳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와서 나를 보지 않는가?” 하니, 이홍로는 아뢰기를, “이러한 때를 당하여 그가 어찌 기꺼이 와서 뵙겠습니까.” 하였다. 이홍로는 일찍이 선생이 사는 곳을 왕래하여 선생의 집이 임진 나루에서 20여 리 지점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기회를 틈타 이와 같이 무함한 것이었다. 그리고 대가가 의주(義州)에 이르자, 이홍로는 선생이 동궁(東宮)의 부름에 달려가 성천(成川)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는 상에게 아뢰기를, “성모는 온 나라의 중망(重望)을 받고 있는데 그가 이미 세자에게 돌아갔으니, 일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였으며, 선생이 의주의 행조에 왔다는 말을 듣고는 또다시 아뢰기를, “성모가 이번에 온 것은 세자에게 선위(禪位)할 것을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선조는 이미 여러 번 그의 무함하는 말을 들었으므로 이때에 이르자 이러한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선생이 황공하여 상소하여 중한 견책을 내리시기를 원하자, 비답을 내려 위로하고 타일렀다.
여름에 좌참찬 겸 비국당상에 제수되니, 이때 상이 당상관들은 각각 계책을 올리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에 선생은 시무(時務) 14개 조항을 올렸는데, 첫 번째로 공물을 바치는 것을 중지하고 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을 중국의 예처럼 시장에서 사 오기를 청하였다. 소(疏)가 계하(啓下)되었으나 폐기하여 시행되지 않았다.
이때 명나라의 고 시랑(顧侍郞)이 호 참장(胡參將)을 보내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우리 중국은 병사들이 지치고 힘이 다하였으니, 형편상 우선 왜적의 화의(和議)를 들어주어야 하겠다. 그리하여 귀국(貴國)과 함께 병력을 길러 후일을 도모할 것이니, 귀국에서는 이러한 형세를 자세히 갖추어 상주(上奏)하라.” 하였다. 이때 왜적들은 경상도 연변의 13개 고을을 점거하여 날마다 노략질을 자행하였고 전라도 한 곳만 홀로 적들의 칼날을 면하였는데, 우리나라는 병력이 부족하고 군량이 다하여 적이 쳐들어올 경우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의정부에서는 계책을 낼 방도가 없으므로 뜻을 굽혀 고 시랑의 자문을 따르려 하였으나 당시 의논들이 화의를 매우 준엄하게 공박하였다. 이때 정승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선생과 함께 입대(入對)하여 성상께 결단을 내릴 것을 청하였다.
상이 “황제에게 어떻게 주문(奏聞)할 것인가?” 하고 묻자, 선생은 아뢰기를, “국세의 위태로움이 한 오라기의 머리카락과 같으니, 모름지기 다소 적의 예봉(銳鋒)을 늦추어야 거의 자강(自強)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현재 고 시랑은 손수 큰 병권을 쥐고 있어 자기의 생각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는데, 현재 물러나 압록강을 지키자는 의논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미 싸우지도 못하고 또 지키지도 못하면서 다만 중국의 화의를 금한다면 잘못된 계책일 듯합니다.” 하였다. 상은 이에 답하지 않았는데, 이때 마침 전라 감사 이정암(李廷馣)이 장계(狀啓)를 올려 우선 화의를 허락하여 병란(兵亂)을 늦추는 계책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좌우의 신하들은 이정암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다투어 아뢰었다. 선생은 평소에 이정암이 충성스럽고 신의를 지키는 큰 절개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이 때문에 중한 죄를 얻을까 염려하여 아뢰기를, “이 사람이 함부로 아뢴 것은 참으로 죄가 있으나 그 마음은 지극한 정성으로 국가를 염려하여 용감하게 말하고 숨기지 않은 것이니, 중한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매우 진노하자, 유 정승은 끝내 감히 발언하지 못하고 물러 나왔다. 이로부터 상은 여러 번 화의를 배척하는 하교를 내렸으며 삼사에서도 서로 글을 올려 화의를 공격하니, 선생은 글을 올려 스스로 탄핵하고 물러날 것을 청한 다음 파산으로 돌아왔다.
선생이 항상 답답해하며 말씀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문인들이 그 이유를 묻자, 선생은 눈물을 닦으며 말씀하기를, “내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죄를 결정하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천지 사이에 몸 둘 곳이 없다. 그런데 편안히 쉬면서 집에 있으니 어찌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걱정하고 상심하여 병이 되었다. -살펴보건대 이때 성상의 노여움이 그치지 아니하여 엄한 분부를 연달아 내렸으니, 선생이 사람들과 말씀할 때에 혹 허물을 자책하여 대죄한다는 말씀은 있을 수 있으나 어찌 답답해하여 눈물을 닦으며 근심하고 상심하여 병환이 됨에 이르렀겠는가. 이 또한 신원(伸冤)할 때에 상에게 아뢴 말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너무 지나친 것이다.- 마침내 위독해지자 아들 문준(文濬)에게 유서(遺書)를 남기기를, “나는 죄명(罪名)이 지극히 중하여 현재 엄한 견책을 기다리고 있다. 세상일은 날로 위급해지는데 평소의 마음을 군부에게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죽거든 삼베옷을 입히고 종이 이불로 염습한 다음 띠풀을 엮어 관을 덮어서 소달구지에 싣고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하고 묘 앞의 비석에는 ‘창녕성모묘(昌寧成某墓)’라는 다섯 글자만 써서 자손들로 하여금 무덤이 있는 곳임을 알게 하면 된다.” 하고 마침내 파산서실에서 별세하니, 무술년 6월 6일로 춘추가 64세였다.
선생이 별세하였으나 여러 소인들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질시(嫉視)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자신의 무리인 문경호(文景虎)에게 사주하여 상소하여 선생을 모함하기를, “최영경의 죽음이 선생에게서 연유되었다.”고 하니,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때를 틈타 더욱 함부로 비방하여 ‘간흉과 한 무리가 되고 군주를 버렸다’는 것으로 죄안(罪案)을 얽어 만들어 사림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하였다. 선조는 어필(御筆)로 ‘모함하여 죽였다[搆殺]’ 등의 글자를 삭제하였으나 끝내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기에 이르렀으니 슬프다. 선생은 본래 산림에서 일어나 부귀를 보기를 우연히 오는 물건으로 여겼으니, 사후(死後)의 득실(得失)은 선생에게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모함하는 말의 망극함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유림(儒林)들이 함께 원통해하고 분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쇠하고 도가 미미해져서 간사함이 정도(正道)를 이긴 지 오래되었다. 정주(程朱)와 같은 대현(大賢)으로도 오히려 간사한 자들에게 위학(僞學)이라는 지목을 면치 못하였으니, 선생에 대해서 또 무슨 한할 것이 있겠는가. 천운(天運)은 순환하여 가면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 그리하여 성상(聖上 인조(仁祖)를 가리킴)께서 즉위하시던 초년에 선유(先儒)들을 높여 장려하시고 억울한 자들을 신원하여 다스렸다. 이에 나는 지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인 오공 윤겸(吳公允謙)과 함께 선생이 전후에 걸쳐 모함을 당한 곡절을 탑전(榻前)에서 자세히 아뢰니, 성상은 마침내 관직을 복구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 내가 또 경연에서 선생을 표창하여 추증하는 은전(恩典)을 내릴 것을 청하자, 성상은 즉시 의정부 좌의정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제생들이 파산의 옛 마을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청송(聽松) 선생을 배향(配享)하여 국가의 예전(禮典)이 밝게 게시되어 선비들의 마음이 크게 정해지니, 선생의 도가 다시 오늘날에 밝아졌다고 이를 만하다.
아, 선생은 타고난 천품이 매우 높고 덕기(德器)가 일찍 이루어졌다. 어려서부터 가정의 교훈을 가슴속에 깊이 새겨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입신(立身)하는 기본으로 삼았으며,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정밀하게 연구하고 독실하게 실천하여, 지(知)와 행(行)이 겸하여 진전되고 경(敬)과 의(義)가 서로 유지되었다. 그리하여 규모와 절도가 한결같이 주자(朱子)를 기준으로 삼았으며 본원(本源)인 마음을 조존(操存)하는 곳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지극한 공양(供養)과 깊은 조예(造詣)는 일반인들이 엿보고 측량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으나, 외면에 나타난 것을 가지고 관찰하면 용모가 장중(莊重)하면서도 편안하고 온화한 기색이 있고, 지기(志氣)가 정숙(靜肅)하면서도 억지로 구속하는 수고로움이 없었으며, 말씀이 분명하고 간절하며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자상하였다.
평소 거처할 적에 새벽에 일어나서 반드시 사당에 배알하고 저녁에도 이와 같이 하여 날씨가 춥든 덥든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일찍이 그만두지 않았다. 물러 나와 서실에 거처함에 종일토록 엄숙하여 태만한 모습을 신체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사람을 접하고 사물을 대함에 한결같이 겸손하고 온화함을 위주로 하였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함부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가 있어서 절약하고 검소함과 사랑하고 용서함을 힘썼고, 집안사람들에게 직책을 나누어 주고 일을 분담시켜 각각 조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수고롭지 않으면서도 일이 잘 거행되었다. 초상과 제사의 예절은 한결같이 주자의 《가례(家禮)》를 따르고 기용(器用)과 제수(祭需)는 반드시 지극히 정결하게 하였으며, 농사일이 끝나면 언제나 제사에 쓸 곡식을 적절히 헤아려 별도로 저장하고 다른 곳에 쓰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집안사람들은 선생의 가르침을 삼가 지켜서 비록 끼니를 여러 번 굶더라도 감히 제수로 쓸 곡식을 갖다 먹지 못하였다. 선조(先祖)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초상 때처럼 하여 포관(布冠)을 쓰고서 하루를 마치곤 하였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질병이 많아 몸이 수척하고 얼굴이 검게 타서 옷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듯하였으나 정신이 안정되고 눈동자가 빛났으며 언제나 책을 읽다가 뜻에 맞는 부분에 이르면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어 쇳소리가 나는 듯하였다. 젊어서 율곡 선생과 교분을 맺고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여 이택(麗澤)의 유익함이 있었다. 율곡은 일찍이 칭찬하기를, “만약 견해의 경지를 가지고 논한다면 내가 다소 나은 점이 있겠으나 조행(操行)의 독실함은 내가 우계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선생은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산림에서 광채를 숨겨 본래 세상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그런데 학문이 이루어지고 도가 높아지자, 종유(從遊)하는 선비들이 더욱 많아져 빛나는 명성이 알려졌으므로 여러 번 천거하는 글에 이름이 올랐다. 선조(宣祖)는 은혜와 관심이 특별하여 불차(不次)의 지위로 대우하였다. 선생은 강력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비록 부름을 받고 도성에 가곤 하였지만 항상 오래 머물 뜻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벼슬한 기간을 따져 보면 1년이 채 못 되니, 이것이 선생이 나아가고 물러난 대략의 내용이다.
선비들의 의논이 분열된 이후로 세상의 도가 날로 나빠지자, 선생은 마음가짐이 공평하고 정직하여 전혀 편벽되이 얽매이는 것이 없었으나 오직 어진 사람과 간사한 사람이 사라지고 자라는 것을 가지고 걱정과 즐거움으로 삼았다. 이에 한 번 율곡을 위하여 변호하였다가 마침내 일부 사람들의 질시를 당하니, 그들은 남몰래 모함하고 드러나게 꾸짖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그리하여 유학(儒學)을 높이고 현자(賢者)를 예우하는 선조(宣祖)의 거룩한 덕이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지 못하게 하였으며 선생의 큰 포부도 이 세상에 펴지지 못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애통해할 만하다. 선생의 문장은 육경(六經)에서 나오고 성리(性理)에 근원하여 명백하고 정대(正大)하였으며 정밀하고 간절하여 염락(濂洛)의 유풍(遺風)을 깊이 얻었다. 그리하여 문장을 읽어 보면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이 풀리고 이치가 투철해져서 읽고 읽어도 싫지 않게 하니, 참으로 세상을 경륜할 만한 문장이다. 저서로 《우계집(牛溪集)》 6권이 세상에 전한다.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군수 여량(汝樑)의 따님인데 어질고 부덕(婦德)이 있어서 가법(家法)을 잘 지켰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문영(文泳)은 일찍 죽었고, 차남 문준(文濬)은 을유년 진사에 합격하고 천거로 현감이 되었다. 장녀는 남궁명(南宮蓂)에게 출가하였는데 벼슬이 별좌(別坐)이고, 차녀는 윤황(尹煌)에게 출가하였는데 벼슬이 참지(參知)이다. 현감은 주부 조감(趙堪)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역(櫟)이고 그다음은 익(杙)과 직(㮨)이며, 사위는 신민일(申敏一)ㆍ안후지(安厚之)ㆍ윤정득(尹正得)이다. 별좌는 2남 3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걸(杰)이고 그다음은 우(楀)이며, 사위는 신협(申協)ㆍ김여옥(金汝鈺)ㆍ윤형은(尹衡殷)이다. 참지는 5남 2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훈거(勛擧)이고 그다음은 순거(舜擧)ㆍ상거(商擧)ㆍ문거(文擧)ㆍ선거(宣擧)이며, 사위는 이정여(李正輿)ㆍ권준(權儁)이다. 내외의 여러 손자가 모두 60여 명에 이른다.
나는 국가가 위급하던 때에 여러 번 선생을 찾아뵙고서 빛나는 도덕을 바라보고 장려하는 한 말씀을 받았으니, 사모하는 정성이 실로 보통 사람의 갑절이나 된다. 이제 시호(諡號)를 청하면서 올릴 행장(行狀)을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가 없으므로 삼가 가보(家譜)를 가지고 대략을 위와 같이 차례로 쓰는 바이다.


 

[주D-001]율곡(栗谷) …… 논란하여 : 소위 사칠 논변(四七論辨)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처음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한 이(理)ㆍ기(氣) 분속(分屬)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인 것을 이른다. 그 후 우계가 퇴계의 학설을 지지하고 율곡과 문답 형식을 취하여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이 이기설은 조선조(朝鮮朝) 성리학의 정화(精華)로 승화하게 되었다. 평소 퇴계의 성리설에 반대 의견을 갖고 있던 율곡은 우계의 질문에 답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남김없이 털어놓아 자신의 이론을 집대성하였는데, 이것은 퇴계를 정점으로 한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율곡을 정점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탄생하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주D-002]중용의 구경(九經) : 구경은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법칙으로, 곧 몸을 닦는 것[修身], 현자(賢者)를 높이는 것[尊賢], 친척을 친애하는 것[親親],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신하들의 마음을 체찰하는 것[體羣臣],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子庶民], 공인(工人)들을 우대하는 것[來百工],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는 것[柔遠人], 제후들을 품어 주는 것[懷諸侯] 등으로, 모두 《중용장구(中庸章句)》에 보인다.
[주D-003]대학의 치평장(治平章) : 치평은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준말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균평(均平)하게 함을 이른다. 주자(朱子)는 《대학장구》를 경(經) 1장(章)과 전(傳) 10장으로 나누고 전 10장을 치국ㆍ평천하를 말한 장으로 분류하였다.
[주D-004]권간(權奸) : 권간은 권력을 휘두르는 간신으로, 명종(明宗)의 외숙이며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가리킨 것이다.
[주D-005]정주(程朱)와 …… 못하였으니 : 남송 영종(南宋寧宗) 경원(慶元) 원년(1195) 2월에 간신인 한탁주(韓侂胄)가 승상 조여우(趙汝愚)를 모함하여 축출하고 주자(朱子) 등의 도학파를 위학(僞學)이라 하여 배척하였다. 위학이란 곧 탐욕을 부리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사람의 진정이요 청렴결백하고 행실을 닦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었다.
[주D-006]염락(濂洛) : 염은 염계(濂溪), 낙은 낙양(洛陽)으로, 염계는 송학(宋學)의 비조(鼻祖)인 주돈이(周敦頤)와 명도(明道) 정호(程顥), 이천(伊川) 정이(程頤)를 가리킨 것이다.

 

우계연보보유 제1권
덕행(德行)


선생의 학문은 대체로 가정에서 얻었는데, 인륜을 근본으로 삼고 충신(忠信), 독경(篤敬), 반궁(反躬), 절기(切己)를 덕을 진전시키고 학문을 닦는 큰 방법으로 삼았다. 평생에 스승으로 섬기고 벗으로 사귄 분으로는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과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이 있었다. 선생은 항상 말씀하기를, “퇴계 이 선생은 참으로 주자(朱子) 법문(法門)의 종지(宗旨)를 얻었다.” 하여, 비록 몸이 병들고 사는 곳이 멀어 직접 모시고 섬기지는 못하였으나 종신토록 변함없이 존모(尊慕)하여 그 문하(門下) 출신인 것 같았다. 일찍이 퇴계 선생이 서울에 오신 계제에 찾아가 배알하였으며, 언제나 선생의 글을 얻으면 옷깃을 여미고 공경히 반복하여 읽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손이 닿는 대로 글을 초록(抄錄)하여 권질(卷帙)을 이루었다. 그리고 율곡 이 선생과는 약관(弱冠) 시절에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성현의 떳떳한 교훈으로 스스로를 다스렸으며, 경적(經籍)을 토론하고 의리를 강마(講磨)하며 절차탁마(切磋啄磨)해서 붕우 간에 도움을 주고받은 것이 가장 많았다. 선생은 언제나 말씀하기를, “율곡은 나의 벗이 아니고 바로 나의 스승이다.” 하였으며, 기일(忌日)을 만나면 반드시 그를 위하여 소식(素食)을 하곤 하였다. -가장(家狀). 이하 같음-

선생은 후생들을 대할 때에 성의(誠意)가 간곡하고 지극하였다. 그리하여 학문에 뜻이 있는 자를 보면 그 사람의 재주의 높고 낮음에 따라 지도하되 반드시 《주문지결(朱門旨訣)》에 의거하여 형이하학적인 인사(人事)를 배우는 것을 위주로 하고 사우(師友) 간에 강론하는 것으로 보익(輔益)하게 하였다. 그리고 말씀은 평담(平淡)하고 진실하며 질서 정연하게 순서가 있어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가 모두 유익함을 얻었으며, 감히 고원하고 기이하며 현묘(玄妙)한 의논을 하여 후생들을 그르치지 않았다.

선생은 일찍이 주자(朱子)의 글 가운데에서 중요한 말씀을 뽑아내어 배우는 자들에게 보여 주고 제목을 ‘위학지방(爲學之方)’이라 하고, 말씀하기를, “율곡은 비록 세상에 드문 고명(高明)한 재주가 있었으나 저술(著述)을 너무 일찍 하였으니, 이는 경계로 삼아야 하고 본받아서는 안 된다. 이제 내가 주자의 글을 초록(抄錄)한 것은 감히 저술한다고 자처한 것이 아니라 다만 주자의 문하에서 배우고 가르치던 요점을 뽑아내어 제군들로 하여금 준수하여 가슴속에 새겨 두게 하려고 해서일 뿐이다.” 하였다.

선생은 젊었을 적에 집이 가난하여 부모를 봉양하느라 힘들게 일하고 고심하여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며, 힘써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느라 몸소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 수고로움을 피하지 아니하여 일찍이 맛있는 음식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청송(聽松) 선생이 풍병(風病)을 앓아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선생은 밤낮으로 부친을 부축하고 모셔 비록 한겨울과 무더운 여름철이라도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밤에도 물러가지 않았다. 청송 선생께서 선생이 피로가 쌓여 병이 날까 염려해서 자기 방으로 물러가 쉬라고 하면 선생은 감히 그 뜻을 어기지 못하여 즉시 문밖에 나가서 처마 아래에 거적자리를 펴놓고 앉아 창가에 귀를 대고 부친의 숨소리를 살피다가 밤이 깊어 잠이 드신 뒤에야 잠시 물러가 가매(假寐)하였는데 옷의 띠는 풀지 않았다. 그리고 새벽이 되면 채 날이 밝지 않아 부친이 잠을 깨기 전에 먼저 방문 밖에 가서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문으로 들어가 문안을 올리곤 하면서 마치 자기 방에서 막 나온 것처럼 하였다.
부친의 증세가 위독해지자, 선생은 손가락을 잘라 피를 올리려 하였으나 ‘손가락은 사람들이 항상 보는 것이니, 효도한다는 이름을 얻으려는 혐의가 있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두 차례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올렸다. 그러나 선생은 평생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겨 자손들에게 말씀한 적이 없었으므로 아는 자가 극히 드물었다. 문인 신응구(申應榘)는 항상 말하기를, “우리 선생의 효행을 아는 자가 세상에 드물다. 선생은 일찍이 학행(學行)으로 이름나셨기 때문에 한 가지 선행(善行)으로 일컬어지지 못하는 것인데, 실제는 참으로 효자이다.” 하였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경(卿)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분은 평소 어버이 섬기기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하였으니, 국가에서는 마땅히 그분의 집 문에 정표(旌表)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 뒤에 그의 학문이 날로 진전되어 이름이 한 세상을 덮어 유림(儒林)의 사표(師表)가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효자라고 지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였다.
선생은 부친을 여읜 다음 선친의 가르침을 공경히 받들어 돌아가신 분을 살아 계실 때와 똑같이 섬겼다. 그리하여 선조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일에 정성을 지극히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별히 제사를 지내는 일을 삼가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하고 한결같이 함으로써 정성과 사랑을 지극하게 하였으며, 가정 형편에 맞추어 제물을 장만하되 되도록 정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제전(祭田)과 노비(奴婢)를 충분히 마련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자손들에게 유서(遺書)를 남겨 자자손손 전택(田宅)과 노비를 나누어 갖지 못하도록 하여 영구한 계책으로 삼았다.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가 말하기를, “근세에 오직 우계께서 제사를 돌려가며 지내는 법을 고치니, 사대부(士大夫) 집안 중에서도 한두 집안이 이에 교화되었다.” 하였다.

선생은 집 안에 거처할 적에 매일 아침 사당에 배알한 뒤에 물러 나와서 반드시 바깥사랑채에 거처하여, 일이 있지 않으면 안채에 들어가지 않았다. 내외가 엄격하여 규문(閨門)이 정돈되고 엄숙하였으므로 부인과 의상(衣裳)을 접하고 앉지 않았으며 앉는 자리를 항상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아들에게 당부하기를, “자부(姊夫)나 매부(妹夫)가 집에 있지 않으면 밤중에 방에 들어가 자(姊)나 매(妹)와 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혹 어릴 때부터 서로 알아 어른으로 섬기는 분이면 비록 나이가 열 살 이상 차이가 나지 않더라도 대부분 ‘어르신네’라고 불렀으며, 자부(姊夫)는 비록 동고조(同高祖) 8촌(寸) 정도로 멀더라도 반드시 형이라고 칭하며 공경히 섬겼다. 친척과 고구(故舊)들에게 돈독히 하여 곤궁한 자를 구휼하고 환난(患難)을 구제하는 데 정성과 힘을 다하였으며, 아주 가난하고 궁핍한 자가 있으면 매번 재물을 아끼지 않고 노비와 전택(田宅)을 주었다.

선생은 약관(弱冠) 시절에 병에 걸렸고, 뒤이어 친상(親喪)을 연달아 당하였는데 너무 슬퍼한 탓에 몸이 심하게 훼손되어 마침내 고질병이 되었다. 그리하여 하루에 한 끼만 먹고 겨울옷으로 여름까지 났으나 끝내 병이 있다고 하여 스스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평소 근엄하게 지내어 마치 손님을 모시거나 제사를 받드는 것처럼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일찍이 낮에 눕지 않았으며, 나태해지려는 마음이 있음을 깨달으면 그때마다 용모를 정돈하고 수습하여 정신을 다잡았다. 때로 기운이 쇠진하여 지탱할 수 없으면 등을 병풍에 기대고 앉아서 눈을 감고 숨을 고를 뿐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 기운이 다소 소생하면 곧 일어나 앉아 책을 보았다. 이러기를 밤낮으로 계속하여 몸에 병이 들었어도 육체와 정신이 피곤한 줄을 알지 못하였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일찍이 선생을 방문하였는데, 우계에 와서 타이르기를, “공의 병이 이와 같은데도 계속해서 책을 보니, 이는 거의 성벽(性癖)을 이룬 것이다. 옛날 당(唐)나라 명황(明皇)은 여색에 빠져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그런데 이제 공은 독서에 탐닉하여 병을 키웠으니, 책과 여색이 비록 청탁(淸濁)의 다름이 있으나 생명을 해치고 본성을 손상시키는 점에 있어서는 똑같다. 그러니 오늘날 경서(經書)와 자서(子書) 등 성현의 글은 또한 공에게 나쁜 물건이다.”라고 하니, 선생은 웃으며 사례하였다.

선생은 행실이 매우 준엄하였으나 포용하는 도량이 매우 커서 남이 경우 없이 침범해도 일일이 따지지 않았으며, 평소에 사람들을 교만하게 대하거나 미워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혹 속이거나 무함(誣陷)하는 자가 있어도 조금도 개의하지 않고 처음처럼 대하였으며 일찍이 말소리와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다. 불선(不善)한 행실을 하는 자를 보면 조용히 경계하고 타이를 뿐, 그의 잘못을 남에게 드러내어 말씀하지 않았으므로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이 스스로 복종하였고 혹 이로 인하여 나쁜 행실을 고친 자도 많았다.

평소에 편안히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분화(紛華)한 자리에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우뚝하게 서서 스스로를 지켰으며, 특히 명예와 절개를 소중히 여겨 무너진 풍속을 격양(激揚)하였다. 남을 대할 때에는 겸손함으로 자처하였으며, 조금이라도 남과 경쟁하는 데 관계되는 일이면 즉시 버리고 돌아보지 않았다.

본주(本州 파주(坡州))의 성주(城主)를 섬길 적에는 예(禮)와 공경을 극진히 하여 비록 친한 벗을 대하더라도 그의 과실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비록 선생보다 연배(年輩)가 낮은 자라도 반드시 절하고 맞이하고 보내었다. 본관(本貫)인 창녕(昌寧)의 수령에게도 이와 같이 삼가고 공경하였다. 고을에서 부과하는 부역과 세금은 반드시 미리 장만하였으며, 일찍이 가난하다고 핑계하지 않고 항상 마을 백성들의 솔선이 되었다. -일기(日記)를 살펴보면 성주를 언급한 곳에는 반드시 한 글자를 띄워 경의를 표하였다.

어느 날 손님과 바깥사랑채에 창문을 열어 놓고 앉아 있었는데, 촌백성이 말을 타고 100보(步)도 안 되는 곳으로 지나가자, 선생은 즉시 손으로 창문을 닫아 피하고 그를 꾸짖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골에 거처한 50여 년 동안에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이 모두 편안히 여겨 털끝만큼도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선생은 집 안에 거처할 적에 화려함을 통렬히 억제하여 집 안에 쓸데없이 남아도는 물건이 없었다. 심지어는 관청에서 환자곡(還子穀)을 빌리거나 사사로이 대여하여 겨우 곤궁함을 구제할 뿐이었다. 그리고 물건을 사양하거나 받을 때에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대충 처리하지 않았으며, 주현(州縣)에서 보낸 선물은 소소한 토산물 이외에는 비록 쌀 한 말 정도밖에 되지 않더라도 감히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삼베옷과 초립(草笠)으로 일생을 마쳐 처자식들이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다. 또한 작은 일도 대충 지나치지 않고 부지런히 하여 무릇 손님을 접대하고 제사에 올리는 물건이나 내외의 집안일로부터 농사일에 쓰는 집기(什器) 등의 하찮은 것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미리 조처하였다. 그리하여 크고 작은 것이 각각 조리가 있어 모두 편의함을 얻었으며 일을 당하여 군색하고 급박하게 해서 낭패를 보는 경우가 없었다. 사람과 약속을 하면 비록 상대의 신분이 미천하고 일이 또한 하찮더라도 일찍이 신의를 잃지 않았으며, 손님들과 한담(閑談)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방에 고요히 앉아 책을 보며 스스로 즐겼다. 이러한 것들은 학문의 힘이 축적된 결과일 뿐만 아니라 천성 또한 그러했기 때문이다.

정축년(1577, 선조10) 9월에 안습지(安習之 안민학(安敏學))가 나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후생(後生)을 대할 때에 말씀을 너무 번거롭게 많이 하시며 후생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을 많이 하시니, 이와 같이 하면 한갓 빈말이 될 뿐입니다.” 하였다. 나는 절하고 이 말을 받아들이며 나의 병통에 딱 들어맞는 절실한 말이라고 여겼다. 이것은 바로 주자(朱子)가 말한 “가볍게 자신을 드러내어 외인(外人)들의 변론을 야기하고, 지나치게 수응(酬應)을 많이 해서 내면으로 향하는 공부를 분산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실제 공부가 없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이와 같이 들뜨고 경솔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가장 큰 병통이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이 병을 조섭하는 데에 가장 좋으니, 어찌 몸과 마음에 모두 유익하지 않겠는가. 내 이것을 써서 경계로 삼는 바이다. -일기 초본(草本). 이하 같음-

10월 13일에 김복경 기선(金復慶基善)이 찾아왔는데, 만나서 번거롭게 말을 참 많이 하였으니, 이는 옛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이다. 이것을 써서 나의 잘못을 기록하는 바이다.

무인년(1578, 선조11) 1월 12일 신시(申時)에 민씨(閔氏)에게 시집간 누님의 부음(訃音)을 듣고 위(位)를 설치하고 곡(哭)하였다. 성복(成服) 전에는 조석(朝夕)으로 곡하였고 15일에는 대공복(大功服)을 만들어 입고 곡하였으며, 미식(米食)과 면식(麵食), 술과 과일을 위를 설치한 곳에 올렸으니, 이는 편두통과 치통으로 얼굴이 부어서 궤연(几筵)에 달려가 곡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평소에 효도와 공경을 다 바쳐 감동시키지 못하였으며 병환이 위독할 때에 달려가 문병하고 영결(永訣)하지 못하였으니, 마음이 더욱 애통하고 찢어지는 듯하여 스스로 감당할 수가 없다. 부모와 형제 간에 후회스럽고 애통한 일이 많은데 이제는 다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으니, 눈물만 흘릴 뿐이다.
28일에 소식(素食)을 마치고 육식(肉食)을 시작하여 몸이 허손(虛損)된 것을 보양하였으니, 이는 빨리 달려가 곡하려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율곡은 우계 선생과 이기(理氣)를 논란하여 서신을 아홉 차례나 주고받았는데, 우계는 율곡 선생의 말씀을 많이 따랐다. 그러나 율곡 선생은 사람들에게 말씀하기를, “의리(義理)를 아는 부분에 있어서는 내가 우계보다 나아 우계가 나의 말을 따른 것이 많으나, 나는 성품이 느슨하고 해이하여 비록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지만 우계는 알고 나서는 곧 하나하나 실천하여 실제로 자기 것으로 만드니, 이는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하였다. -《율곡별집(栗谷別集)》. 이하 같음-

선생이 도성(都城)에 들어간 날에 마침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생신 모임에 갔었는데, 선생이 뜰에 이르러 기생들이 대열에 있는 것을 보고는 주인에게 말씀하기를, “저 기생들은 오늘의 모임에 마땅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율곡이 웃으며 말씀하기를,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 것이 또한 한 가지 방법이다.” 하니, 선생은 마침내 자리에 올랐다. -살피건대 혹자는 선생이 자리에 들어가지 않았다고도 한다.

율곡과 우계와 우리 선친께서 함께 진사(進士) 이희참(李希參)의 집에 모였었는데, 주인집에서 술자리를 베풀면서 명창(名唱)을 자리에 끼게 하였다. 술잔을 돌리고 노래를 하려 하는데 우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니, 좌상(座上)에서는 감히 아무도 만류하는 자가 없었다. 선생은 평소 음탕한 음악을 듣지 않는 것을 법으로 삼았다 한다. -《기옹만필(畸翁漫筆)》. 이하 같음-

우계는 가정에 있을 때에 집안일을 매우 자세하고 치밀하게 처리하였다. 선생은 이른 아침에 명령을 내렸는데 비록 밭 갈고 수확하는 하찮은 일이더라도 종들을 부릴 때에 반드시 날짜와 인력을 계산하여 나누어 맡겨서 조금도 착오가 있은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시골에 거처하면서도 가난함을 근심하지 않았다. 청송(聽松) 선생은 평소 생업(生業)을 보살피지 아니하여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모든 일을 우계가 주관하였다. 간혹 서울에 나그네로 계실 때에 친구분들이 찾아오면 우계는 반드시 술과 고기를 마련하였는데, 청송 선생은 마치 전부터 있던 것처럼 여겼다.

옛날에 우연히 한 노승(老僧)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내가 용문사(龍門寺)에 있을 때에 우계 선생과 여러 날을 함께 지냈으므로 선생의 기거(起居)를 익숙히 보았다.” 하였다. 내가 “선생께서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무슨 일을 하시던가?” 하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새벽에 일어나서는 반드시 세수하고 빗질한 다음 의관(衣冠)을 단정하게 하고 손을 모으고 바르게 앉아 계셨고, 점심 무렵이 되면 다시 세수하고 빗질하고 앉아 계셨다. 때로 서책을 펴 보다가 만일 생각할 부분이 있으면 책을 덮고 바른 자세로 묵묵히 앉아 계시니, 바라보면 엄숙하여 공경심을 일으키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하였다.

청송 선생이 존귀한 손님과 말씀하시니, 선생은 아침 내내 손을 모으고 기둥 사이에 서 계셨다. 손님이 청송에게 말하기를, “영윤(令胤)을 자리에 들어오게 하시오.” 하자, 청송 선생이 선생에게 앉으라고 명하였고, 선생은 그런 뒤에야 들어와 앉았다. -현손(玄孫) 지선(至善)의 기록. 이하 같음-

충익공(忠翼公) 이시백(李時白)이 나이 아홉 살에 파산(坡山)에서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은 언제나 부인에게 친히 머리를 빗어 주게 하였으며, 내외에 명을 전달하게 할 때에 친자식과 차이를 두지 않았다. 하루는 자기 집에 가서 그 대인(大人)인 충정공(忠定公 이귀(李貴))에게 아뢰기를, “우리 선생께서는 항상 바깥사랑채에 거처하시며 혹시라도 안채에 들어가시면 부인과 한자리에 앉지 않고 정답게 말씀하지도 않으시니, 아마도 부인과 소원하신 듯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충정공은 웃으며 말씀하기를, “소자(小子)는 우리 부부가 항상 함께 거처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런 의심을 하는가? 부부간에는 서로 공경하여 손님처럼 대하는 것이 예(禮)이다. 내가 너를 우계 선생께 보내 배우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선생은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하루는 율곡이 그의 아우 우(瑀)와 함께 거문고를 가지고 오니, 선생과 율곡 형제는 둘러앉아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담론을 계속하여 서로 즐거워하였다.

선생은 크고 작은 서찰에 손수 답장을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글을 써서 즉시 봉하여 부치곤 하시니, 이 때문에 문에 기다리는 심부름꾼이 없었다.

선생은 평소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혹 아무 산과 아무 물의 좋은 경치를 말하면 그때마다 이것을 적어 두었다가 때때로 펴 보며 깨끗한 생각을 붙이곤 하였다.

선생은 항상 책자 하나를 장만하여 날마다 일기(日記)를 써서 퇴도의 《자성록(自省錄)》의 예(例)와 같이 하였다. 여기에는 “오늘은 아무 잘못을 반성하고 아무 악행을 고쳤다.”라는 내용이나 “아무 곳의 아무 사람이 훌륭한 행실이 있으니, 이는 공경할 만하다.”라는 내용이나 “아무 사람은 고상한 뜻이 있으니, 이는 가상하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또 별도로 책 한 권을 만들어 당시에 충절을 지키다가 죽은 사람을 모두 기록하였는데, 간혹 시를 지어 찬탄하기도 하였다. 또 조송설(趙松雪 조맹부(趙孟頫))이 악 무목(岳武穆 악비(岳飛))을 조문한 시와 《시경》 우무정(雨無正)의 제4장과 정월(正月)의 제2장 및 대주(大註)를 책 끝에 썼으며, 또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 중에 있는 “적을 정벌하지 않으면 왕업(王業)도 망할 것이니, 그대로 앉아서 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가서 공격하는 것이 낫다.[不伐賊 王業亦亡 與其坐而待亡 孰若伐之]”라는 17자를 써 놓았다.

일기책의 끝에 ‘돈후주신 평실정정(敦厚周愼平實定靜)’의 8자를 두 줄로 쓰고 분주(分註)하기를 “돈독(敦篤)하면서도 중후(重厚)하고 주밀(周密)하면서도 근신(謹愼)하며, 평담(平淡)하면서도 진실(眞實)하고 응정(凝定)하면서도 안정(安靜)하여야 한다.” 하였다.

선생은 말씀하기를 “날마다 머리를 빗지 않는 자는 뜻이 게으르기 때문이며, 손톱과 발톱이 긴데도 깎지 않는 자는 마음이 거칠어졌기 때문이며, 무딘 칼을 갈지 않고 쓰는 자는 기운이 진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선생은 병이 위독해지자, 시자(侍者)에게 명하기를 “내일은 내가 장차 위태로울 것이다.” 하시고는 집 안의 종들에게 농사일을 나가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라고 명하였는데, 이날 과연 별세하였다. 별세할 때에 흰 기운이 주무시는 방으로부터 집 뒤의 산 위에까지 뻗쳐 한동안 없어지지 않으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동방(東方)의 남자로서 욕심의 함정에서 스스로 초탈한 자가 이지함(李之菡), 성혼(成渾) 외에 다시 몇 사람이 있겠습니까. 신(臣)이 이 세상에서 사사(師事)한 자가 세 분인데 이지함, 성혼, 이이(李珥)입니다. 이상의 세 사람은 학문을 성취한 것은 비록 똑같지 않으나,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하며 지극한 행실이 세상의 모범이 된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신은 그 만분의 일이나마 따르려고 하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봉집(重峯集)》의 병술년(1586, 선조19) 소(疏)-

선생의 가르침에 “마음은 형체가 없고 몸은 형체가 있으니, 예로부터 성현들은 형체가 있는 몸으로부터 공부를 하였다. 만약 마음에만 공부를 하려 한다면 나중에는 반드시 허탄하고 망녕되어 기탄(忌憚)함이 없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하였다. -지구(知舊)의 간독(簡牘)으로 한교(韓嶠)의 글-

《현승편(玄繩編)》에 실려 있는 여러 노선생(老先生)이 주고받은 언론을 보니, 강론하고 문답한 부지런함과 우의(友誼)의 돈독함을 모두 상상해 볼 수 있는바, 지금 세상에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는가. 율곡의 말씀은 솔직하고 평탄하며, 우계의 말씀은 온화하고 공손하며 간곡하였다. 그리고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은 뜻과 기상(氣像)이 준엄하고 깨끗하며 몸가짐이 매우 신중하고 언론이 논리적이었으나 왕왕 온당치 못한 부분도 있었다. -《계곡만필(谿谷漫筆)》-

그대는 주 문공의 소학을 보지 않았는가 / 君不見朱文公小學書
마음을 수습하여 본성을 기르는 내용이 모두 담겨져 있네 / 收心養性之所於
한훤당이 별세하고 정암이 돌아가시니 / 寒暄隕首靜庵喪
세상에서는 모두 이것을 쓸모없는 물건처럼 여겼네 / 世皆視此如土苴
근래에 율곡의 분명한 가르침이 있어 / 邇來德水有明訣
반드시 영재들에게 이 책을 먼저 배우게 하였네 / 必使英才先是書
훈풍에 준걸스러운 인재들이 나옴을 거의 보게 되었는데 / 薰風庶見髦乂變
중도에 별세하니 참으로 서글프네 / 半道云亡可欷歔
다행히 파산에 뜻이 같은 노인 있어 / 坡山幸有同志翁
사십여 년 동안 이 예를 따랐다네 / 四十餘年禮率初
실천하신 것이 모두 이 한 책 속에 있으니 / 踐履都在一部中
누추한 시골에서 빈한하게 살았지만 즐거움은 넉넉하였다네 / 陋巷簞瓢樂有餘
-《중봉집》-

퇴계의 뒤에 율곡과 우계가 동시에 나와 도의(道義)를 강명(講明)하여 후학들을 계발하니, 그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사람들이 떠들어 대고 배척하는 가운데서도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우리들이 의리(義理)를 앞세우고 이해(利害)를 뒷전으로 여겨 위로 군부(君父)와 국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은 이 몇 군자들의 은택이 아니겠는가. -《수몽집(守夢集)》-

목릉(穆陵 선조(宣祖))이 즉위하여 맨 먼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부르니, 이때에 성상(聖上)은 스스로를 가다듬어 학문에 힘쓰려는 뜻을 두고 있었고 조정에서는 청의(淸議)가 막 일어났다. 사서인(士庶人)들도 이러한 소문을 듣고 모두 흠모하여 선비들치고 성명(性命)의 이치를 말하고 예모(禮貌)를 갖추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뒤이어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한 세상에 함께 나오니, 비록 원기(元氣)는 다소 흐려졌으나 풍속이 크게 변하였다. 그러다가 한 분은 별세하고 한 분은 배척을 받게 되자, 세상에 다시는 학문을 말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상촌집(象村集)》-

무인년(1578, 선조11) 3월 8일에 서울에 있었는데, 이경로(李景魯 이희참(李希參))가 숙헌(叔獻 이이(李珥))에게 보낸 답서에 이르기를, “이미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서 남들이 모르기를 바란다면 되겠는가. 자네들은 언제나 이러한 병통이 있네. 사람을 대하여 말할 때에 이미 말을 조심하지 못하고 곧바로 이를 후회하며, 편지를 보내어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하나 결국에는 말과 편지가 모두 사람들에게 누설되고 마네.” 하였다. 이 말이 비록 지나치나 나도 이러한 폐습을 면치 못하니, 참으로 간절하고 지극한 말이다. 이것을 써서 항상 보고 반성하려 한다. -일기 초본. 이하 같음-

군자가 스스로 행동하고 남을 대함에 있어 모두 합당한 도리가 있으며 말하고 침묵하며 옳다 그르다 하는 것에는 그에 따른 이치가 있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그 도리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 남을 책망하는 데 날카롭거나 자신이 먼저 실천하지 않으면서 남을 비평하기를 잘한다면 세상의 화를 범하여 낭패를 당하지 않을 자가 드물 것이다. 내 스스로 시골에서 살고 서울로 올라와 생활한 일을 생각해 보니, 자신도 모르게 후회스럽고 부끄러우며 세상의 화에 관련된 것이 많았다. 일에 느낌이 있으므로 붓을 잡고 이것을 써서 경계로 삼으니, 때는 만력(萬曆) 임오년(1582, 선조15) 4월 24일이다.

일기책의 끝에 쓰기를 “현자(賢者)가 산림(山林)에 거처하면서 스스로 수립하여 저 세상을 잊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반드시 종사하는 것이 있을 것이고,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것이고, 반드시 지켜 편안히 여기는 것이 있을 것이고, 반드시 남들은 알지 못하는 가슴속의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무술년(1598, 선조31) 6월에 전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성혼(成渾)이 졸(卒)하였다. 성혼은 자(字)가 호원(浩原)인데, 타고난 천품(天稟)이 매우 고상하고 덕기(德器)가 일찍 이루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가정의 교훈을 착실히 실천하였고, 또 일찍이 이황(李滉)을 존모(尊慕)하여 사숙(私淑)하였다. 학문은 주자(朱子)를 기준으로 삼아 강론하여 밝히고 실천하는 공부를 모두 지극히 하였으며, 본원(本源)의 공부에 더욱 부지런히 힘썼다.
이이(李珥)와 사단 칠정(四端七情)과 이기(理氣)의 선후(先後)에 대해 논한 말을 주고받은 것이 수천 자에 이르는데, 선유(先儒)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많이 발명하였다. 이이는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견해의 조예를 논한다면 내가 다소 나은 점이 있을 것이나 조행(操行)이 독실하고 확고함에 있어서는 내가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처음 학행으로 천거되어 여러 번 직책을 제수하고 불렀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으니, 상이 더욱 소중하게 대우하여 부르기를 마지않았다. 성혼은 강력히 사양할 수가 없어 비록 간혹 도성에 왔으나 항상 오래 머물 뜻이 없었으니, 조정에서 벼슬한 날짜를 계산해 보면 1년이 채 못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이홍로(李弘老)에게 모함을 당하여 상의 대우가 점점 쇠해져서 마침내 다시는 부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파산(坡山)의 옛집에서 별세하였는데, 배우는 자들이 우계(牛溪) 선생이라 칭하였다. -《선묘보감(宣廟寶鑑)》에 기록된 사신(史臣)의 논단(論斷)-

내 들으니, 청송(聽松)의 학문은 정암(靜庵)에게서 나왔는데 선생은 일찍이 가정의 교훈을 받아 착실히 실천하였으며, 또 일찍이 퇴계를 존모하여 사숙하였다. 학문은 주자(朱子)를 기준으로 삼아 강론하여 밝히고 실천하는 공부를 모두 지극히 하였으며, 본원(本源)을 잡아 지키는 공부에 더욱 부지런히 힘썼다. 평소에 말하고 행동하는 것과 집안을 다스리는 예의범절로부터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의 절문(節文)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따라 행하였는데, 한결같이 정성과 공경에 근본하였다. 수양한 지 오래되자, 덕기(德器)가 이루어져 사람들이 바라보면 도가 있는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문장은 경학(經學)에 근본하여 명백하고 유창하며 전아(典雅)하였는데, 문집(文集) 약간 권이 있다. -《계곡집(谿谷集)》의 비문(碑文). 이하 같음-

하늘이 우리 사문을 도와 / 天胙斯文
철인을 함께 내시니 / 並生哲人
우계 선생과 율곡 선생은 / 坡山石潭
덕이 있는 분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 / 德則有隣
송나라 때 주자와 장남헌처럼 / 擬宋朱張
서로 어진 덕으로 도와주었네 / 相輔以仁
도와 기의 오묘한 진리와 / 道器之妙
성과 정의 은미한 이치를 / 性情之微
자세히 묻고 밝게 분별하여 / 審問明辨
모든 의심 환하게 깨우쳤다네 / 會通無疑
옛사람이 못 밝힌 것 확충하였고 / 旣擴前祕
후세의 의문점들 해소시켜 주었지 / 亦徹來蔽
출처가 일정치 않은 것 무슨 마음인가 / 隱見何心
오직 의리를 따른 것이었다네 / 惟義之比
힘쓰고 노력하신 선생이여 / 亹亹先生
밝음을 지니고 정도를 걸으셨도다 / 含章履貞
매우 어려운 때를 만나 / 遭時孔囏
몸은 곤궁하였어도 마음만은 형통하였지 / 身困心亨
선생을 알아주는 이 없었으나 / 人莫我知
하늘은 속일 수가 없는 법 / 天不容欺
사람이 하늘 이치 어겨 곤액을 당하다가 / 人勝而阨
하늘의 뜻 정해짐에 회복이 되었다네 / 天定乃復

이미 회복되었으니 / 亦旣復矣
그 빛 드러나지 않겠는가 / 不顯其光
백세 뒤를 기다리나니 / 百世以俟
남기신 글이 휘황찬란하구나 / 遺文煒煌

성혼은 산림(山林)의 은일(隱逸)로서 도(道)를 간직하고 스스로 즐거워하였으며, 외물(外物)을 사모하는 생각이 없이 오로지 고요하게 스스로를 지키려는 마음만 지니고 있었습니다. 진실한 덕이 안에 쌓여 명성이 밖으로 알려지니, 사람들은 그의 출처(出處)를 보고서 세상이 잘되고 잘못됨을 점쳤습니다. 일찍부터 이이(李珥)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어 하늘과 인간에 대한 학문과 의(義)와 이(利)의 분별을 서로 강론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그 지취(旨趣)를 다하고 요체(要諦)을 맞췄으니, 비록 마음이 같고 덕이 같다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하락(河洛)의 계미년 소-

이황이 학문이 끊긴 뒤에 분발하여 나와 창도하자 선비의 기풍(氣風)이 한 번 크게 변하였는데, 이것을 깊이 알고 독실히 좋아한 자는 오직 이이와 성혼 두 사람뿐입니다. 이황이 별세한 뒤로 두 사람은 도덕이 더욱 높아져 우뚝이 한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니, 지금 사대부들 사이에 조금이라도 인륜과 예법이 있음을 아는 것은 모두 이황과 이이, 성혼의 공입니다. -충정공(忠定公) 이귀(李貴)의 정해년 소-

성혼은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오로지 고인(古人)의 학문에 뜻을 두어 산야(山野)에서 문을 닫고 학문에 침잠(沈潛)하여 진리를 탐구해서 젊어서부터 늙어서까지 마음과 몸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을 한결같이 법도대로 따랐습니다. 집에 거처할 때에는 내외(內外)의 구별과 장유(長幼)의 차례와 선조(先祖)를 받드는 예절에 있어 모두 일정한 제도를 만들었는데, 한결같이 옛사람을 법으로 삼았습니다. 이이와 도의지교를 맺고 서로 절차탁마하여 덕을 이룸에 이르렀으니, 함양(涵養)하고 체인(體認)하는 공부가 깊고 지극하여 종일토록 엄숙히 앉아 있는 것이 마치 소상(塑像)과 같았습니다. 이이는 말하고 웃는 것이 화락하여 배우는 자들이 그래도 친근히 할 수 있었으나 성혼은 배우는 자가 비록 10년을 함께 거처하더라도 더욱 두렵게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포저(浦渚) 조익(趙翼)의 을해년 소. 이하 같음-

조헌(趙憲)은 행실이 뛰어났으니, 또한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성혼과 비슷하여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도 평생 동안 매우 정성껏 스승으로 섬겼으니, 여기에서도 성혼의 덕행이 높아 사람을 감복시켰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혼의 학문은 가정에서 얻어 연원(淵源)이 매우 바릅니다. 인품이 장중(莊重)하고 순수(純粹)하여 겉과 속이 한결같았으며, 출처(出處)와 어묵(語默)을 모두 성현을 본받아 덕기(德器)가 성취되어 우뚝이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되었으니, 바로 상서로운 기린과 봉황이 당세에 의표(儀表)가 되는 것과 같았습니다. -시남(市南) 유계(兪棨)의 임인년 소-

만력(萬曆) 계미년(1583)은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 16년이었다. 이때 선비들이 유학을 숭상하고 사기(士氣)를 진작시켜 나라가 편안하게 된 아름다움이 옛날보다 빛났는데, 이때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과 우계(牛溪) 성 문간공(成文簡公)이 학문을 강론하고 이치를 밝혀 성대하게 유림(儒林)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이에 선(善)을 좋아하는 선비들이 다투어 사모하여 스승을 높이고 도를 호위하는 데 뜻을 두지 않는 이가 없었다. -《청음집(淸陰集)》-

마음이 통달하고 깨끗하며 도(道)를 봄이 분명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심취해서 자연히 보고서 감동하는 유익함이 있게 하신 분은 율곡 선생이요, 법도를 삼가 지키고 학문하는 순서가 매우 엄격해서 일상생활의 언행이 모두 본받을 만하므로 문하에 있는 자로서 비록 재주가 둔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소득이 있게 하신 분은 우계 선생이니, 그 기상을 논하면 명도(明道)와 이천(伊川)이 서로 다른 것과 같았다. -중봉어록(重峯語錄)-

“우계와 율곡 두 선생은 타고난 기질(氣質)이 같지 않았으므로 성취한 덕(德)도 달랐으니, 그 기상을 상상해 보면 하남(河南)의 두 정 부자(程夫子)와 같은 듯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율곡은 먼저 천리(天理)를 통달한 곳으로부터 들어갔기 때문에 배움에 있어 의거할 곳이 없으나 우계는 일일이 법도를 따랐기 때문에 배움에 있어 자취가 있으니, 바로 정자(程子)가 안자(顔子)와 맹자(孟子)를 논한 것과 같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율곡은 견해가 뛰어났으나 일을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반드시 우계를 추존(推尊)하여 말씀하기를 ‘우계가 아니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계미년에 특별히 우계를 천거하면서 ‘국가의 경륜(經綸)을 맡길 수 있다.’고 말씀하였으니, 덕이 같은 분들끼리 서로 허여함이 이와 같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율곡의 말씀은 고명(高明)하고 통달한 반면 우계의 말씀은 질박(質朴)하고 정엄(精嚴)하니, 그 글을 고찰하면 모두 볼 수가 있다.” 하였다. -《노서집(魯西集)》. 이하 같음-

도덕의 조예에 대해 우계와 율곡 두 분이 각기 품평한 것이 있다. 율곡은 말씀하기를, “우계는 경륜을 맡길 수 있다.” 하였고, -계미년 추천한 글에 보인다.- 선생은 말씀하기를, “율곡은 삼대(三代)의 인물이다.” 하였다. -연보의 갑신년 조에 보인다.- 율곡은 반드시 선생과 함께 정도(正道)를 지키려 하였고 선생은 율곡이 반드시 큰 임무를 맡을 것을 기약하여, 인품의 고하(高下)와 학문의 천심(淺深)에 대해 오직 율곡만이 선생을 알았고 선생만이 율곡을 알았으니, 사암(思菴 박순(朴淳)) 이하는 모두 여기에 참여할 수 없었다. -중봉(重峯)이 병술년(1586, 선조19)에 올린 상소문에, “성혼의 아름다운 덕과 준엄한 행실, 충직한 말과 훌륭한 계책은 실로 군주의 덕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보호한 점이 있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직접 선생의 덕을 보고 심복(心服)한 말이다. 이발(李潑)이 을유년(1585, 선조18)에 아뢰기를, “세상에서는 도학(道學)으로 성모(成某)를 추존하고 있는데, 명성의 높음은 또한 이모(李某 이이(李珥))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하였으니, 이는 여러 소인배들도 스스로 선생을 존모(尊慕)할 줄 안 것이다.

우계 선생은 학문(學問)의 문로(門路)가 올바르고 평생 진퇴(進退)의 의리가 순수하여 한결같이 옛 성현으로 법을 삼았으니, 우리나라 선유(先儒) 중에 이런 분은 없었다. 이는 내가 좋아하여 아첨하는 말이 아니니, 후세에 주자(朱子)와 같은 분이 있다면 반드시 단정하여 말씀할 것이다.

옛날 묵암(默庵) 선생이 우계에서 도를 강론할 적에 근본과 진실을 위주로 하고 부화(浮華)함을 생략하며 도의(道義)를 앞세우고 문예(文藝)를 뒤로하여, 언제나 문막오유(文莫吾猶)의 탄식이 있었으며, 사람을 가르칠 적에는 공자의 ‘선진(先進)을 따르겠다’는 유의(遺意)를 취하였다. 이 때문에 문하의 선비들이 비록 각각 재주와 식견의 높고 낮음에 따라 조예에 깊고 얕은 차이가 있었으나 말을 조심하고 행실을 힘쓰는 것이나 외면을 가볍게 여기고 내면을 중시하는 것이나 자기 몸에 돌이켜 간략함을 지키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그렇게 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대저 파문(坡門)의 제공(諸公)들은 모두 겸양하는 것을 도리로 여긴 나머지 스스로 스승의 말씀을 기술하여 어록(語錄)에 드러낸 자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 후생들이 상고하여 믿을 것이 없게 되었으니, 이는 사문(師門)의 유법(遺法)이 오로지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도를 주장한 데에서 연유하여 그러한 것이다.

우계 선생이 일찍이 《위학지방(爲學之方)》을 초록(抄錄)하였는데, 초록한 내용은 비록 많지 않으나 옛사람들이 학문한 본말(本末)이 모두 구비되어 있고 경(敬)을 지키는 방법에 있어 표리(表裏)가 친절하니, 선생이 직접 공부하신 것도 이 책을 살펴보면 거의 알 수 있다. -처음 배우는 자는 먼저 《위학지방(爲學之方)》과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우계 선생은 정암(靜庵) 조 문정공(趙文正公)의 학문을 선친(先親)인 청송공(聽松公)에게서 배워 파평산(坡平山) 속에서 강학을 통해 전수하였다. 그리고 율곡 이 문성공과 서로 학문을 강론하여 붕우 간에 유익하게 함이 더욱 지극하였으니, 문로(門路)의 올바름과 실천의 독실함이 우리나라 유현(儒賢) 중에 혹시라도 이보다 앞설 분은 있지 않다. -《남계집(南溪集)》. 이하 같음-

묵암(默庵) 성 선생(成先生)은 집안에서 정학(正學)을 전수받고 우계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을 진덕 수업(進德修業)하는 방법으로 삼고 경전의 뜻을 강론하는 것으로 보조하였다. 그분은 말씀이 평실(平實)하고 정확하여 절대로 신기하거나 고묘(高妙)한 경향이 없었으며 저술하거나 말하는 것을 더욱 경계하였으니, 이는 또한 송(宋)나라의 명현인 호안정(胡安定 호원(胡瑗))과 윤화정(尹和靖 윤돈(尹焞))의 유풍(遺風)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계 성 선생의 《위학지방(爲學之方)》은 오로지 회암(晦庵)의 글과 말씀을 취하여 배우는 자들에게 보여 주었는데,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의 공부에 있어서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다. -이 책은 초학자들이 공부하는 과정을 논한 것이 십분 분명하고 간절하여 공부하기가 쉽다.

근간에 우계 선생이 만든 이 책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을 손수 비점(批點)하고 표주(標註)하기를, 대략 퇴계의 《주서절요(朱書節要)》와 같이 하였다. 이 책이 세상에 유포된 지 이제 100년이 넘었으나 독실히 좋아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오직 선생이 일찍이 표장(表章)하여 후학의 표준으로 삼았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마음이 성대하다고 이를 만하다. -금상(今上)은 이러한 본(本)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호남 지방에 명하여 발간하게 하였는데, 한결같이 선생이 비점한 것을 따라 판각(板刻)하게 하였다.

근세에 여러 선생들 중에 퇴계와 우계보다 더 병이 많은 분은 없는데, 병 때문에 학문에 힘쓰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하였다. 심지어는 아픈 가운데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 말씀하기를, “마음을 고르게 간직하고 조금씩 수습(收拾)하라.” 하였고, 또 말씀하기를, “처음 배우는 자의 요점은 반드시 먼저 몸과 마음을 수습하고 정신을 보호하여 마음을 전일(專一)하고 안정(安定)되게 함으로써 뜻과 기운이 항상 깨끗하여 의리가 밝게 드러나게 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 어찌 아픈 가운데 공부하여 힘을 얻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배우는 자가 처음 공부하는 방법은 그 가르침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우계 노선생(老先生)이 한형중(韓瑩中)과 홍선응(洪善應)에게 답한 몇 장의 편지보다 더 간절한 것이 없으니, 이는 바로 귀문(貴門)에서는 예사로운 일일 것이다. 이것으로 학문을 강론하고 몸과 마음을 잡아 지킨다면 딴 것을 구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답성지선서(答成至善書)-

독서하는 방법에 있어 내 어찌 그대의 요구에 바로 부응하고 싶지 않겠는가. 내 일찍이 우계 선생에게 들은 것이 있으니, 선생께서 어떤 사람에게 답한 글에 이르기를, “성현이 남기신 가르침이 방책(方冊)에 갖추어져 있는데, 지금 사람들의 말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이미 잘못된 견해이다. 더구나 한 번 말하는 사이에 어떻게 사람을 깨닫게 하고 계발시켜 오래도록 변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하셨으니, 나는 이 때문에 그대의 요청에 감히 곧바로 말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근세에는 교우(交友)하는 도가 시종 변치 않는 자가 매우 드무니, 오직 율곡과 우계 두 선생만이 계실 뿐이다. 율곡은 어릴 때부터 신동(神童)이었으며 장성해서는 학문과 문장이 한 세상에 크게 알려졌는데, 세상 사람 중에 뜻이 합치되는 자가 없었다. 오직 우계의 덕행과 출처가 자신보다 낫다 하여 마침내 조정에 강력히 천거하였고 종신토록 의의가 변치 않았다.


 

[주D-001]법문(法門)의 종지(宗旨) : 법문은 유학(儒學)의 올바른 길을 이르며, 종지는 줄거리가 되는 중요한 교의(敎義)를 이른다.
[주D-002]위학지방(爲學之方) : 이 글은 뒤에 간행하면서 《주문지결(朱門旨訣)》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D-003]검은 …… 않는 것 : 《논어》 양화(陽貨)에 “단단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갈아도 얇아지지 않으니. 희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의지가 확고하여 변치 않고 지조를 지키는 것을 뜻한다.
[주D-004]우리 선친 : 《기옹만필(畸翁漫筆)》의 저자인 정홍명(鄭弘溟)의 부친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가리킨다.
[주D-005]시경 …… 썼으며 : 우무정(雨無正)과 정월(正月)은 소아(小雅) 기보지십(祈父之什)에 들어 있는데, 모두 나라가 혼란한 것을 걱정하는 시이다. 우무정은 기근(饑饉)이 들어 신하들이 모두 떠나자 떠나지 않은 자가 떠나는 자들을 꾸짖는 내용의 시로, 제4장에 “전쟁이 일어나도 악행이 줄어들지 않고 기근이 들어도 선행이 진전되지 않네. 군주를 가까이 모시는 우리들은 나라를 걱정하여 날로 병드는데 여러 군자들은 이러한 사정을 임금께 아뢰지 않고, 말을 들으려고 물으면 건성으로 대답하고 참소하는 말이 이르면 물러가네.[戎成不退 飢成不遂 曾我暬御 憯憯日瘁 凡百君子 莫肯用訊 聽言則答 譖言則退]” 하였다. 정월(正月)은 4월에 서리가 내려 기상 이변이 일어나고 간신들이 모함하는 말을 날조하는 것을 서글퍼 하는 내용의 시로, 제2장에 “부모께서 나를 낳으시되 어찌하여 나를 이처럼 괴롭게 하셨는가. 나보다 먼저도 아니요 나보다 뒤도 아니요 하필 이 나쁜 시기에 태어났나. 좋은 말도 입으로만 할 뿐 진심이 아니요 나쁜 말도 입으로만 할 뿐 진심이 아니네. 근심하는 마음 더욱 심하여 이 때문에 더욱 사람들에게 업신여김 당하네.[父母生我 胡俾我瘉 不自我先 不自我後 好言自口 莠言自口 憂心愈愈 是以有侮]” 하였다. 대주(大註)는 주자(朱子)의 《집주(集註)》를 가리킨다.
[주D-006]이이(李珥)와 …… 말 : 소위 사칠 논변(四七論辨)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처음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한 이(理)ㆍ기(氣) 분속(分屬)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인 것이 효시이다. 사칠 논변의 발단은 퇴계가 53세 되던 해에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에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고 되어 있는 것을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수정한 것이 사우(士友)들 사이에 전파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데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을 전해 들은 퇴계는 59세 되던 해에 고봉에게 편지를 보내어 앞의 내용을 “사단의 발함은 순수한 이이기 때문에 불선이 없고 칠정의 발함은 기를 겸하였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四端之發純理 故無不善 七情之發兼氣 故有善惡]”라고 수정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해 고봉은 성(性)은 무불선(無不善), 정(情)은 유선악(有善惡)을 인정하지만 칠정 외에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사단은 칠정에 통합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이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처럼 대립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과 그 근거로서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입장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퇴계는 ‘이와 기는 서로 뒤섞일 수 없다’는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의 관점을 강조하였으며, 《주자어류(朱子語類)》 중에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 한 것을 읽고 더욱 자신을 얻어 성(性) 역시 천명지성(天命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이기 분속(理氣分屬)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여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수정하였다. 주자의 이기설(理氣說)은 이기불상리와 이기불상잡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즉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는 반면, 서로 뒤섞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퇴계는 불상잡(不相雜)의 견지에서 이와 기는 서로 뒤섞일 수 없음을 강조한 반면, 고봉은 이와 기가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 후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퇴계의 학설을 지지하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문답 형식을 취하여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이 이기설은 조선조 성리학의 정화(精華)로 승화하게 되었다. 평소 퇴계의 성리설에 반대 의견을 갖고 있던 율곡은 우계의 질문에 답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남김없이 털어놓아 자신의 이론을 집대성하였는바, 이것은 퇴계를 정점으로 한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율곡을 정점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탄생하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로 볼 때 고봉과 우계는 퇴계와 율곡으로 하여금 조선조 성리학을 꽃피우도록 촉매한 인물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D-007]계곡집(谿谷集)의 비문(碑文) : 이 글이 《계곡집》 권13에는 우계(牛溪) 선생 신도비명(神道碑銘)으로 실려 있다.
[주D-008]송(宋)나라 …… 장남헌(張南軒)처럼 : 남헌은 송나라의 학자인 장식(張栻)의 호로, 주자(朱子)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어 학문을 강론하였으므로 우계와 율곡을 주자와 장식에 비견하여 말한 것이다.
[주D-009]사람이 …… 되었다네 : 어떤 경우에는 사람이 하늘의 이치도 무시하고 나쁜 짓을 할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옳고 그름이 결정되어 하늘의 이치가 결국 사람을 이기게 된다는 뜻이다. 춘추(春秋) 시대 초(楚)나라의 신포서(申包胥)가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고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또한 사람을 이긴다.[人衆者勝天 天定者亦能勝人]”고 한 말에서 나온 것으로, 처음에는 천리(天理)를 무시하고 성혼을 비방하는 자들이 이기는 듯하였으나 끝내는 시비가 원래대로 돌아와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게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주D-010]정자(程子)가 …… 같다 : 여기서의 정자는 명도(明道) 정호(程顥)를 가리킨다. 명도는 일찍이 “맹자는 재주가 높아 배움에 있어 의거할 만한 곳이 없으니,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안자를 배워야 한다. 안자를 배우면 성인의 경지에 가까이 들어갈 수 있으며 힘을 쓸 곳이 있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이를 맹자에, 성혼을 안자에 비유한 것이다.《二程全書 遺書》
[주D-011]문막오유(文莫吾猶)의 탄식 : 《논어》 술이(述而)에 “문학에 있어서는 내 남만 못하겠는가. 그러나 군자의 도를 몸소 행함은 내 얻은 것이 없다.[文莫吾猶人也 躬行君子則吾未之有得]”고 한 데서 나온 말로, 문학이나 문장보다는 궁행 실천을 위주로 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주D-012]공자의 …… 유의(遺意) : 선진(先進)은 선배와 같은 말이다. 선배들은 예악(禮樂)에 있어 문(文)과 질(質)이 적당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촌스럽다고 비판하고, 후배들은 예악에 있어 문이 질보다 지나치거늘 당시 사람들은 도리어 군자라고 하는 것에 대해, 공자께서 “내가 만일 예악을 쓰게 되면 선진을 따르겠다.”고 한 말씀을 가리킨 것이다.《論語 先進》

 

우계연보보유 제1권
출처(出處)


무진년(1568, 선조1) 2월에 상(上)이 유일(遺逸)을 천거하라고 명하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윤현(尹鉉)이 명에 응하여 성혼을 천거하며 말하기를, “유일의 선비는 지금 세상에서 얻기 어렵습니다. 성혼이라는 자가 있는데 학문의 깊은 묘리를 터득했으니, 유일의 다음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하였다. 이이(李珥)는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학문의 깊은 묘리를 터득한 것은 유일의 선비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인데, 도리어 유일의 다음이라 말하는가?” 하였다.
성혼은 바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가정의 교훈을 받아 행실이 순수하여 잡되지 않았으며 학문은 전진하기만 하고 퇴보하지 않으니, 고을에서 훌륭한 선비라고 일컬었다. 그러므로 파주 목사(坡州牧使)가 그 이름을 경기 감사(京畿監司)에게 천거하였는데, 이이는 바로 그와 친한 친구 사이이다. 이이는 사람을 통하여 경기 감사를 만류하여 이르기를, “성혼은 학자인데 갑자기 훌륭한 이름을 얻는다면 어찌 부끄러워하지 않겠는가. 이 사람은 마땅히 안정되게 해 주어 성취하기를 기약하여야 한다.” 하였다. 윤현은 듣지 않고 말하기를, “파주 목사가 이미 보고하였으니, 내가 중간에서 막을 수 없다.” 하였다. -《경연일기(經筵日記)》. 이하 같음-

계유년(1573, 선조6)에 성혼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임명하였다. 성혼은 일찍부터 가정의 교훈을 받아 도(道)를 지키고 벼슬하지 않으니 인망(人望)이 매우 높았는데, 이때에 처음 사헌부의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다.

갑술년(1574, 선조7) 3월에 성혼을 계속해서 불렀으나, 성혼은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이이가 성혼에게 이르기를, “성상의 명이 이와 같으시니, 어찌 한번 달려가 은혜에 사례한 다음 물러가기를 청하여 돌아가지 않는가?” 하니, 성혼은 말하기를, “스스로를 돌아봄에 매우 부족해서이다. 그러나 현명한 군주를 잊을 수가 없다.” 하였다.

을해년(1575, 선조8)에 성혼을 지평으로 제수하였다. 성혼은 부름을 받았고, 또 성상의 마음이 선(善)을 향하여 이이가 우대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는 큰일을 할 만한 형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여러 번 부름을 받았는데 한결같이 사양하고 물러나 있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여겼다. 이에 부르는 명령을 받고 서울에 들어왔으나 도중에 더위를 먹어 마침내 사직하는 글을 올렸다. 성상은 그가 서울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내의(內醫)로 하여금 가서 진찰하게 하고 약을 지어 보냈다.

경진년(1580, 선조13) 12월, 이이를 대사간(大司諫)에 임명하고 성혼을 장령(掌令)에 임명하였다. 성혼을 부르는 명이 내리자 조야(朝野)가 모두 기뻐하여 성상의 마음이 선(善)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혼이 부름을 받았으나 병 때문에 오지 못하니, 성상은 세 번이나 계속해서 불렀다. 그리고 이르기를, “이 사람이 병이 있으니, 추위를 무릅쓰고 길에 오르게 할 수 없다.” 하고, 말과 가마를 주어 올라오게 하라고 명하니, 사림(士林)이 감동하였다.

신사년(1581, 선조14) 1월에 성혼은 여러 번 은혜로운 부름을 받고 부득이 서울로 들어왔다. 성혼은 이이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어떤 사람이기에 성상의 과분한 은혜와 예우를 받음이 이에 이른단 말인가.” 하니, 이이는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가 어찌 죽은 말의 머리만도 못하겠는가.” 하였다. -이보다 먼저 김계휘(金繼輝)가 이이를 만류할 적에 죽은 말 머리에 비유한 말이 있었으므로 한 말이었다.

박사암(朴思菴)은 우계가 소명을 받들어 도성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주상은 호걸스러운 군주가 아니겠는가. 아주 촘촘하게 그물을 짜서 마침내 우옹(牛翁)을 그물질해 왔다.” 하니, 한 세상이 전하여 미담으로 삼았다. -사암행장(思菴行狀)-

4월에 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 성혼이 상소(上疏)하여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극언(極言)하여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으니, 상이 답하기를, “내 그대의 지극한 의논을 듣고 매우 가상하게 여기노라. 내 비록 과덕(寡德)하고 혼우(昏愚)하나 감히 그 말을 가슴속에 명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승정원에서 이 상소문을 대신(大臣)에게 보여 시행할 것을 청하자, 상은 답하기를, “상소문 중에 학문과 시폐(時弊)를 논한 것은 내가 스스로 살피겠다. 다만 조정을 비판하여 공경 대신(公卿大臣)이 모두 적임자가 아니라고 말하였고, 또 한 나라의 모든 제도를 어지러이 고치려고 하였으니, 이는 온당치 못할 뿐만 아니라 진실로 지나치고 시행하기도 어렵다.” 하였다. 승정원에서 다시 온당치 못하다는 뜻을 아뢰자, 상은 노하여 이르기를, “겨우 선비 하나를 불러왔을 뿐인데, 어찌 이와 같이 말이 많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사헌부와 옥당(玉堂)이 모두 차자(箚子)를 올려 논열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에게 보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고, 이 상소문을 대신들에게 보였다.
이때 삼공(三公)이 빈청(賓廳)에 모여 있었는데 주서(注書)가 상소문을 가지고 오자, 삼공이 주서에게 펴서 읽게 하였다. 주서가 큰소리로 상소문을 읽으니 육경(六卿)이 빙 둘러서서 듣고 있었는데, 혹 거짓으로 조는 체하며 듣지 않는 자도 있었다. 삼공은 성혼의 상소문을 가납하여 시행할 것을 계청하였다.
이보다 앞서 성혼은 이미 곤궁함을 구휼해 주는 곡식을 받았고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봉직하지 않았으므로 이이에게 이르기를, “내 상소하여 극간(極諫)하고 떠나려고 한다.” 하고는 마침내 문을 닫고 상소문을 초하였는데 오직 이이하고만 상의하였다.
이때 성상은 직언(直言)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끝내 나라에 보탬이 되는 바가 없었으며 사림의 기상도 크게 꺾였다. 성혼이 말하기를, “봉사(封事)를 올리지 않는 것이 좋지 않았겠는가?” 하자, 이이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세상에 이러한 의논이 없어서는 안 되니, 한 번만 읽어도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하였다.
이때 성상은 성혼이 상소문에서 조정의 귀한 사람을 비판한 것을 보고는 마음에 자못 못마땅하였으나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를 잃지 않으려고 넉넉하게 포용하는 답을 했던 것인데, 승정원에서 시행할 것을 계품(啓稟)하자, 속마음을 보인 것이었다.
상은 또 이르기를, “성혼의 상소문에는 이이가 말한 내용과 같은 것이 있다.” 하였다. 이이는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 “소견이 같기 때문에 말도 같은 것이니, 가령 먼 곳에서 선비를 구해오더라도 만약 의사(意思)가 부합된다면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반드시 다르지 않을 것이니, 하물며 붕우 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였다. -《경연일기》-

사암이 정승이 되어 청류(淸流)들을 등용하고 율곡이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의론을 주장하였으며 우계 선생이 성상의 부름을 받고 나와 한 시대의 선비들이 조정에 많이 모이니, 사기(士氣)가 더욱 면려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율곡연보(栗谷年譜). 이하 같음-

계미년(1583, 선조16) 율곡 선생이 물러나니, 조야(朝野)가 분격하여 심지어는 길거리의 아이와 병졸들까지 모두 탄식하고 성을 내며 소인들이 군자를 모함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온 조정에서는 그들의 대단한 기세를 두려워하여 말 한마디라도 꺼내어 변론하는 자가 없었다. 우계 선생은 이때 부름을 받고 서울에 이르러서는 의리상 말할 만하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상소하여 삼사(三司)에서 무함(誣陷)하는 정상을 아뢰었다.

이후 상이 인대(引對)하던 날 율곡 선생과 우계 선생은 삼찬(三竄)을 방환(放還)할 것을 강력히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두 선생은 물러 나와 서로 말씀하기를, “세 사람이 비록 죄가 없지 않으나 간언을 하다가 죄를 얻은 것은 후인(後人)에게 보여 줄 것이 못 되니, 반복하여 아뢰어서 성상의 뜻을 돌리기를 기약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계미년에 율곡 선생이 여러 소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성 선생(成先生)이 마침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왔는데, 글을 올려 선악(善惡)을 분변하여 밝히려고 하였으나 상대방의 노여움을 격동시켜 도리어 해를 입게 할까 염려가 되고 또 산림의 인물로 물러가는 것을 의리로 삼았다가 갑자기 시사(時事)에 대해 극론한다면 말할 때 말하고 침묵할 때 침묵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우려하여 구봉(龜峯)에게 편지로 물었다. 이에 구봉은 답하기를, “존형(尊兄)이 주상의 인정과 대우를 받아 이미 조정에 올랐으면 나아가지 않았다고 자처할 수 없으니, 어찌 흉중에 쌓인 소회를 다 아뢰어 성상의 마음을 돌리게 해서 전후로 존형을 조정에 나오게 한 특별한 명을 그저 형식적인 일이 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성 선생은 그 말씀을 따랐는데 크게 비방을 받았고 구봉은 더욱 심한 비방을 받았다. -구봉묘갈(龜峯墓碣)-

승지(承旨) 유전(柳㙉) 등이 특별히 성혼을 불러올 것을 계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실로 그 사람을 알지 못하므로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김우옹(金宇顒)이 아뢰기를, “그 사람은 학문과 통명(通明)한 재주를 지니고 있다 하니, 임금이 사람을 모두 안 뒤에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질다고 말하면 군주는 지성으로 만나 보고자 하여 만나 본 뒤에 관작을 임명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혼은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인가?” 하니, 조정기(趙廷機)가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그의 나이를 묻자, 조정기가 아뢰기를, “을미생입니다. 신은 이이를 통하여 들었는데, 그 사람은 모든 행동을 반드시 법도를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경연강의(經筵講義)》. 이하 같음-

김우옹이 아뢰기를, “성혼이 서울에서 궁핍하게 지내자 상께서 이를 염려하여 녹봉을 주도록 명하시니, 뜻이 매우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녹봉이라고 명칭을 붙이면 성혼은 반드시 봉직(奉職)하지 않았다 하여 사양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 군주가 백성에게 구휼해 주는 도리가 있으니 이제 그의 궁핍함을 구휼해 준다면 명분이 바르므로 성혼도 사양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옳다. 나의 뜻도 진실로 이와 같다.” 하였다.
좌상(左相) 노수신(盧守愼)이 아뢰기를, “성혼이 서울에 있으니, 마땅히 경연(經筵)에 자주 불러 만나 보소서.” 하기에, 신(臣 김우옹을 가리킴)이 아뢰기를, “그 사람은 질병이 심하여 억지로 조정의 반열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다만 경연에 출입하도록 하면 반드시 도움이 되고 유익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 권징(權徵)이 아뢰기를, “듣자 하니 그는 집에 있을 적에 매일 새벽마다 사당에 배알하고, 또 30리 밖에 있는 선친의 묘소를 며칠마다 한 번씩 성묘(省墓)하여 비바람이 불어도 그만두지 않는다 하니, 이와 같다면 어찌 봉직할 수 없겠습니까.”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이는 신이 모르는 일이나 집에 있는 것과 봉직하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다. 신이 직접 그 사람을 만나 보니, 기력이 결코 봉직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갑신년(1584, 선조17)에 상이 이르기를, “성혼도 심의겸(沈義謙)과 사귀었는가?” 하고 물으시기에, 신이 아뢰기를, “성혼과 심의겸은 과연 서로 친합니다. 그는 심의겸을 쓸 만한 인물이라고 말하여 이이의 견해와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혼이 초야에 있을 적에 여러 신하들이 많이 그의 덕행을 말하고 나더러 등용하라고 권하였는데, 오늘날에는 또 심의겸의 문객(門客)이라고 말하는구나.”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성혼이 어찌 저 사람의 문객이겠습니까. 다만 교분이 두터울 뿐입니다.” 하였다.

“이천(伊川)은 세 번 사양한 뒤에 조정의 부름에 나아갔는데, 우계는 어째서 끝내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으니, 율곡 선생은 말씀하기를, “이천은 당시에 군주가 참으로 임용하려는 뜻이 있어 불렀기 때문에 나아간 것이요, 우계로 말하면 군주가 별로 그러한 뜻이 없으면서 공연히 불렀기 때문에 나아가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그는 지난번 도성에 들어가다가 이르지 못하고 병 때문에 돌아왔으니, 또한 끝내 나아가지 않은 자가 아니다.” 하였다. -《율곡별집》. 이하 같음-

“우계의 동인(東人)ㆍ서인(西人)에 대한 의론은 선생(先生 율곡을 가리킴)의 의견과 부합했습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말씀하기를, “대체로 의견이 서로 같았으나 당초에는 시비가 나와 같지 않았다. 나는 동인을 그르다 하고 우계는 서인을 그르다 하였다.” 하였다. “우계의 소견은 어떠하였습니까?” 하였더니, 선생은 말씀하기를, “우계의 의견은 김모(金某 김효원(金孝元))가 청현직(淸顯職)에 오르는 것을 심모(沈某 심의겸(沈義謙))가 억제한 것은 사심(私心)이라 하였다. 그러나 나의 의견은 윤원형(尹元衡)과 이량(李樑) 같은 무리는 진실로 혐의를 피하여 그대로 지나칠 수 없으나 지금 심모는 비록 청백하고 근신하는 부류는 아니라 하더라도 일개 범인(凡人)에 불과하니, 그대로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김모가 마침내 혐의를 피하지 않고 계속 공격하여 끝내 사림(士林)이 안정되지 못하고 국체(國體)가 손상됨에 이르렀으니, 이는 동인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을해년(1575, 선조8)에 내가 조정에 있으면서 이르기를 ‘당초에는 그 잘못이 동인 측에 있었는데 금년에는 서인 측의 잘못이다.’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은 모두 내 말을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당초에 동인을 그르다고 말한 부분을 숨기고 논하지 않는다고 하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가령 우계가 이런 경우에 처하였다면 반드시 나와 의견이 서로 같았을 것이다.” 하였다.

이이는 ‘경연에서 아뢸 때에 엄격하고 자중하게 하는 선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의 친구 한 사람을 강력히 천거하여 왕의 좌우에 두게 하였으니, 바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 혼(渾)이었습니다. 그는 가정에서 학문을 배웠고 이황(李滉)의 영향을 받았는데, 옛 도를 독실히 믿어 문을 닫고 경서(經書)를 연구하였습니다. 근원이 깊어 발로됨이 무성하였으니 마음을 수양하여 욕심이 없었던 것은, 인주(人主)의 공경을 일으킬 만하고 기울어 가는 국가를 지탱할 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박순(朴淳)도 그를 애지중지하였습니다. 박순은 그가 지평(持平)이 되던 날 맨 먼저 찾아가서 한 번 읍하고 조정에 머물면서 벼슬할 것을 권하였으며 경연에서 간곡히 아뢰어 끝내 이 사람을 데려오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으니, 이는 박순이 그와 친해서가 아닙니다. 온 조정의 명예를 좋아하는 선비라면 그 누가 이이와 성혼을 등용하자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병술년 소. 이하 같음-

혹자는 성혼이 오랫동안 벼슬하여 서울에 머물면서 한 가지 계책도 아뢴 것이 없다고 비판하지만 이는 더더욱 이치에 닿지 않는 말입니다. 산림에서 홀로 수행하던 선비가 다행히 성상의 은혜를 입어 머뭇거리며 외로이 있는데, 사람들의 비난과 비웃음이 사문(師門)에서 일어나고, 배반하여 적에게 항복하는 행위가 동맹(同盟)에게서 나왔으니, 비록 옛날의 현자(賢者)가 이 경우에 처했더라도 오직 낭패하고 관문을 나오고 말았을 것입니다.

계미년에 올린 하낙(河洛)과 유공신(柳拱辰)의 상소문에 운운하기를, “동인과 서인의 공격이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해지니,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을 다시 어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율곡이 당초에 동인과 서인을 조정하려다가 뜻밖에 이러한 비방을 만나니, 우계가 상소하여 구원하고 해명한 것은 과연 시비(是非)에 대한 공정한 말씀이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당론(黨論)이 날로 격해져서 세상일이 매우 어려우면 산인(山人)의 처신하는 도리는 마땅히 재능을 감추고 지조를 지켜 다만 침묵할 계책을 생각하여야 하는데, 어찌하여 굳이 할 수 없을 때에 급급히 말하여 스스로 많은 비판을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우계의 소견이 반드시 여기에 미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이제 결국 이와 같이 되었으니,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그때 마침 호읍(湖邑)의 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찾아가 묻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우복룡(禹伏龍)의 《동계일기(東溪日記)》-

중봉(重峯)이 이명곡(李鳴谷 이산보(李山甫))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우계 선생이 이천(伊川)에 계시다 하니 동궁(東宮)이 가까운 이웃에 와서 머무신다면, 의형(儀形)을 보고 감동받는 것이 하루 동안 햇볕을 쬐는 정도일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또 듣건대 왜적이 핍박해 와서 관서(關西)로 향하므로 대로(大老)의 안보(安保)를 또한 기필할 수 없다 하니, 멀리서 우려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중봉집(重峯集)》-

선인(善人)은 천지의 기강이니 비록 평상시라도 급급히 준걸들을 불러 모아 함께 국사를 도모하여야 할 터인데, 하물며 천지가 폐색하여 크게 혼란할 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동지중추부사 성혼은 오랫동안 산림에 은둔하면서 수양을 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학문은 유림(儒林)의 사표(師表)가 되고 재주는 제세안민(濟世安民)의 경륜을 간직하여 식견이 있는 자들이 모두 한번 세상에 나오기를 바라고 있는데 이제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동궁의 부르는 명에 멀리서 응했다 하니, 학금(鶴禁)을 보필하여 인도함에 반드시 유익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위급하고 어려울 때에 또한 시무(時務)에 절실하게 도움이 되는 좋은 계책이 있었을 것이니,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종품(從品)을 제수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조정에서 노성(老成)한 자를 우대하는 예가 미진한 듯합니다. 이는 실로 조정의 공론이므로 황공하게 감히 아룁니다. -《오음집(梧陰集)》의 용만(龍灣) 계사(啓辭)-

우계 선생이 편지로 퇴계 선생에게 출처의 의리를 물으니 -편지는 《속집(續集)》에 보인다.- 퇴계는 답하기를, “작은 벼슬을 사양하고 큰 벼슬을 받으며 물러가는 것을 매개로 하여 나아간 것은 바로 내가 청의(淸議)에 죄를 얻어 훌륭한 사필(史筆)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이제 이 문제를 가지고 나에게 물으니 부끄러워 진땀이 나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구려. 왜냐하면 나아가라고 권한다면 이는 그대로 하여금 나의 잘못을 본받게 하는 것이고, 나아가지 말라고 권한다면 이는 또한 자신을 책한 뒤에 남을 책하는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오.” 하였다. -이 편지는 본집(本集)에 누락되었는데 고첩(古帖)에서 얻어 기록하였다.

선생이 구봉(龜峯)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이조 참판 정지연(鄭芝衍)이 경연에 들어가 아뢰기를 ‘인재가 매우 부족하니 모름지기 인재를 수습한 뒤에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성혼을 반드시 불러 보소서.’ 하였으며, 영상(領相)과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나와서 아뢰었으므로 이번에 새로 제수한 것입니다. 저는 처음 소지(召旨)를 받고 사양하였는데, 성상께서 승문원에 하교하여 다시 글을 내려 부르게 하셨는바, 승정원에서 지은 글에 ‘학문이 고명하고 덕기(德器)가 성취되었다.’는 말이 있었으며, 기타 과장된 말이 모두 지극히 온당치 못하므로 상소하여 나아갈 수 없는 뜻을 아뢰고 떠나가려고 하는데,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속집(續集)》 초본(草本). 이하 같음. ○ 경진년 8월 중도에 사직할 때이다.

또 말씀하기를, “두 번째 상소문을 올려 사직할 것을 청하였는데 성상의 비답(批答)에 이르기를 ‘매양 사퇴하겠다고 말하니, 내 매우 서운하다. 고상한 뜻만 너무 견고히 갖지 말아 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리는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시니, 미천한 신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염치를 무릅쓰고 한 번 나아가 성상을 뵙고서 몹시 병든 상황을 통렬하게 아뢴 다음 물러갈 것을 간곡히 청원하고 나오려 하며, 또 물러갈 것을 청원한 뒤에 제 자신의 소회를 아뢰려고 합니다. 망극한 은혜를 입고 돌아가 그대로 산중에서 죽으면 보답할 길이 없으므로 감히 한 말씀을 올리고 떠나려 하니, 아울러 분명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형의 떠나가고 머무는 것을 비루한 저 역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초야에 은거하고 있는 몸으로 군주의 큰 은혜를 입고 한결같이 물러나 숨는다면 이는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엄광(嚴光)과 주당(周黨)도 오히려 한(漢)나라 황제의 조정에 나아감을 면치 못하였는데, 하물며 형은 세가(世家)의 신하이니, 어찌 끝내 대궐에 나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위가 물러간 뒤에 한 번 대궐에 나오시는 것은 의리상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집에서 상소하면서 인하여 시폐(時弊)를 아뢰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형은 바로 처사(處士)이니 처사가 나아가 임금을 뵙고서 하문(下問)하는 기회를 통하여 일을 말하는 것은 괜찮으나 먼저 시사(時事)를 말하는 것은 도리가 아닐 듯한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율곡집(栗谷集)》의 답서(答書)-

삼가 살펴보건대 거듭 안거(安車)로 부르는 명을 받들고서 병을 무릅쓰고 대궐에 달려간다 하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됩니다. 멀리서 생각건대, 성조(聖朝)께서 10년 동안 간절히 기다리셨으니 공경을 다하여 자리 앞으로 가까이 나오게 하시고, 좌우가 적막한 상황에서 성상의 말씀이 간곡하실 것이니, 이러한 때에는 성상의 마음이 깨끗하여 물욕이 없을 것입니다. 형께서 이러한 기회를 틈타신다면 정론(正論)을 아뢰고 세도(世道)를 바로잡는 것은 이 한 걸음에 달려 있습니다. 숙헌(叔獻)이 명을 받들고 서울로 달려가는 도중에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두 형이 조정에 함께 계시는 성대한 일을 보게 되어 깊이 축하하나, 도리어 걱정이 되는 것은 근본(根本)이 믿을 것이 없고 말초(末梢)만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구봉집(龜峯集)》의 답서-

“호원(浩原)이 관작을 사양할 수 없어 이제 장차 사은숙배하려 하나 오히려 한사코 이조의 직임을 사양하려고 마음속에 단정하고 있으니, 이 사람의 고집이 답답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진실로 세상에 드문 대우를 받아 다시 의리상 도망할 길이 없는데, 호원은 아직도 물러나 숨을 계책을 생각하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그러나 끝내 반드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율곡집》의 여구봉서(與龜峯書)-

보내온 편지에 과격하다느니 과격하지 않다느니 한 말씀은 끝내 구차하게 이해를 비교하는 것이니, 이러한 의논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저들이 이미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라는 죄목으로 비루한 저를 축출한 뒤에는 비록 과격하게 되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될 수 있겠습니까. 말속(末俗)이 나약해져서 바른말을 하지 못하는데 이러한 때에 또 존형(尊兄)의 과격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논이 그 사이에 행해진다면 천지간의 정기(正氣)가 사라져 없어질 것이니, 매우 우습습니다. -《율곡집》의 서(書)-

박순(朴淳)은 스스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가 부족하다고 여겨 오로지 현자를 천거하고 유능한 자에게 사양하는 데 힘썼다. 그러므로 강력하게 이이와 성혼을 천거하고 시종 협력하여 국가를 구제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당론(黨論)이 분열되자 박순은 이이와 성혼을 두둔한 것 때문에 크게 탄핵을 받아 간사한 사람이라고 지목되었고, 심지어는 세 사람이 모습은 다르나 마음은 하나라고까지들 말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선한 사람끼리 서로 따르는 것이 어찌 도에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선묘보감(宣廟寶鑑)》-

선생이 심예겸(沈禮謙)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이제 성은(聖恩)을 입어 품계를 뛰어넘어 크게 발탁되었으니, 황공하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비가 비록 실제보다 지나치게 소문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나 또한 마땅히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뜻을 지켜 스스로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다만 놀랍고 두려울 뿐이니, 또한 일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작은 벼슬을 사양하고 큰 벼슬을 받는 것은 의리상 편안하지 못하니, 이 사이에 마땅히 제대로 조처해야 거의 한쪽에 치우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파산간독(坡山簡牘)》-

우계가 구봉(龜峯)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숙헌(叔獻)이 등대할 때에 천신(賤臣)의 일을 아뢰기로 신하들과 약속하였는데, 근래 삼공(三公)이 유고(有故)하여 경연(經筵)을 열지 못해서 아직까지 그 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한탄스럽습니다.” 하였다. -《속집(續集)》 초본(草本) ○ 살펴보건대, 《속집》 중의 계미년 10월 편지에 이 위 단락이 있는데 삭제하였으므로 아래 단락의 ‘우선 숙헌이 입시하기를 기다려 돌아갈 계책을 결단하려 한다’는 한 말씀이 내력(來歷)이 없게 되었으니, 이는 율곡이 산으로 돌아가게 해 주자고 아뢰려고 한 것이다.

이이가 죽자 성혼은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병든 폐인으로 헛된 명성을 도둑질하고 있으니, 본래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다만 군부(君父)의 명을 오래도록 욕되게 할 수 없으므로 망녕되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병이 날로 심해져서 정력이 미치지 못하니, 하물며 홀로 국가의 큰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나라를 저버린 죄를 나는 반드시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물러날 것을 청원하여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충정공(忠定公) 이귀(李貴)의 정해년 소-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특별히 우계 선생을 불렀는데, 이때 신만퇴(申晚退 신응구(申應榘))와 오추탄(吳楸灘 오윤겸(吳允謙))이 함께 자리에 있었다. 선생이 거취 문제를 가지고 두 공에게 물으니, 신공(申公)은 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추탄은 갈 것을 강력히 권하였다. 그 후 선생이 비방하는 자들에게 모함을 당하자, 추탄은 항상 한탄하기를, “신공의 식견을 내가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만퇴유사(晚退遺事)》-

동은(峒隱 이의건(李義健))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삼가 제수하면서 내린 글을 보니, 성상께서 우대하고 마음을 쏟으심을 상상하여 알 수 있습니다. 진퇴하는 한 가지 일은 비록 이미 단정했으나 은혜로운 명이 이와 같으니, 진실로 한결같이 겸손하게 물러나기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역변(逆變)이 생긴 이래로 성상께서는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식사하는 양도 태반이나 줄었다 하며, 대소 신민(臣民)들이 모두 근심하고 민망해하고 있습니다. 영형(令兄)께서 재신(宰臣)으로 물러나 전야(田野)에 계시니, 이때에 한번 나와 위로는 성상의 마음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국가의 난리를 진정시킨다면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송강(松江)이 우상(右相)으로 들어오자, 정언신(鄭彦信) 이하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이 모두 우상이 나와 벼슬하기를 고대하는 것이 마치 갓난아이가 젖을 빨기를 기다리는 듯이 하고 있다 합니다. 온 세상이 죽이려고 하던 사람인데 오늘날 도리어 그의 은혜를 바라고 있으니, 참으로 우습습니다.” 하였다. -《파산간독》-

광해군(光海君)이 이천(伊川)에 머물 적에 현(縣)의 관사(館舍)인 동상방(東上房)에 거처하였는데, 장인인 유자신(柳自新)이 서상방(西上房)에 거처하였으나 광해군이 금하지 않았다. 선생은 이 말을 듣고 사사로이 사람들에게 말씀하기를, “후일 세자(世子)가 등극하면 외척(外戚)이 반드시 권력을 남용할 것이니, 이것이 크게 우려되는 점이다.” 하였다.
선생이 성천(成川)으로부터 행조(行朝)로 달려가니, 유자신의 아들 희분(希奮)이 선생을 모함하기를, “성천은 평양(平壤)의 적진(賊陣)과 가까우니, 성모(成某)가 대조(大朝)를 뵙기를 구하는 것은 이것을 핑계 대어 적을 피하려는 것입니다.” 하니, 광해군은 이 말을 그대로 믿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중외(中外)의 유생(儒生)과 문생(門生)들이 서로 계속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끝내 신원(伸冤)되지 못한 것은 유희분이 모함하였기 때문이었다. -창랑(滄浪) 성문준(成文濬)의 기록-

임진년(1592, 선조25) 11월에 좌상(左相) 윤두수(尹斗壽)가 다시 아뢰기를, “임금이 정치하는 방도는 어진 이를 높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 파천(播遷)해 있는 때에 이 방도를 버린다면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성혼의 도덕과 학문은 온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바인데 이제 어렵게 행조(行朝)로 달려왔으니, 어찌 위로하여 대우하고 존경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려 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하여 격려하는 바가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윤허하였다.
당초에 상이 임진(臨津) 나루를 건널 적에 성혼이 대가(大駕)를 따라올 것이라고 짐작했었는데, 마침 성혼이 대가가 출발하는 것을 알지 못하여 미처 따라오지 못하였다. 승지 이충원(李忠元)이 개성(開城)에 있을 때 성혼을 불러올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으니, 이는 성혼이 따라오지 않은 것을 불만스럽게 여겨서였다. 윤두수는 ‘어진 자를 우대함에 어찌 한 자급을 아낄 것이 있는가’라고 여겨 마침내 아뢰어 승진시켰는데, 이는 어진 이를 높이는 도리가 공경을 지극히 하고 예를 다하는 데에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임금을 몰아붙여 뜻밖의 일을 하게 해서는 안 되니, 사람들이 그의 견식(見識)이 부족함을 비난하였다. -《기재잡기(寄齋雜記)》. 이하 같음-

성혼이 차자(箚子)를 올려 시사(時事) 10개 조항을 논하였는데, 임금의 덕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널리 언로(言路)를 여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또 아뢰기를, “나라를 그르치는 자들을 엄하게 처벌하고 총애받는 자들의 청탁을 막아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 구성(具宬)이 대가를 따라 개성에 온 이후로 성상이 연달아 소견(召見)하여 수시로 출입하였고 의주(義州)에 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성혼은 이 말을 듣고 ‘국가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본래 내시와 외척들이 비밀스럽고 사사로운 일을 많이 행함에서 연유하였는데 지금 또 이러한 일이 있으니, 어떻게 전인(前人)을 꾸짖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마침내 차자를 올려 나라를 그르치는 자와 총애받는 자들을 대비하여 거론하였다.

우계가 어떤 사람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보내 준 편지에서 운운하였는데, 의리로써 말한다면 나라를 그르친 자들의 죄를 다스려 백성들에게 사죄하는 것이 실로 급하고 절실한 일이니, 민심을 다시 돌이켜 영원한 국운을 기원하는 한 가지 중대한 일이 됩니다. 그러나 일은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니, 성상의 체후(體候)가 편안하지 못하고 의구심이 풀리지 않아 성상의 노여움을 격발하는 화가 후일에 크게 일어날 수도 있으므로 나의 말은 대략 그 단서를 열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파산간독》-

이때 윤근수(尹根壽)와 구사맹(具思孟)은, 홍여순(洪汝諄), 유영길(柳永吉), 이홍로(李弘老)가 어두운 밤중에 서로 모이곤 하니 반드시 왕실을 넘보는 마음이 있는 것이라 하여 김응남(金應南)과 이덕형(李德馨)까지 아울러 축출하려고 하였다. 성혼은 말하기를, “만약 부득이하다면 마땅히 심한 자를 제거하여야 하니, 김응남과 이덕형은 죄줄 만한 명분이 없다.” 하였다. -기재(寄齋) 박동량(朴東亮)의 행장(行狀)을 살펴보면 “일을 담당한 자들의 의논이 너무 과격해져서 화가 장차 김응남과 이덕형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는데, 공(公)이 이조에 있으면서 진정시키기를 힘썼다. 공이 일찍이 말미를 받아 조정에 나오지 않자, 우계 선생은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장 간곡하게 조정에 나오도록 권하였으며 심지어는 직접 찾아와 세도(世道)를 부지하는 책임이라고 하며 권면하기까지 하였다.” 하였으니, 바로 이 일이다.

상이 성혼을 소견(召見)하자 -내용이 원보(元譜)에 보인다.- 성혼은 다시 아뢰기를, “전하께서 심지(心志)를 더욱 가다듬고 덕업을 힘써 닦으시어 군신 상하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밤낮으로 부지런히 노력해서 내치(內治)가 이미 닦여지면 외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 이괵(李)이 아뢰기를, “성혼의 이른바 ‘마음과 힘을 합한다’는 말이 매우 좋습니다. 성혼이 이 자리에 있으니 신은 함부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근래 조정에 자못 상대편을 배척하고 알력(軋轢)을 일으키는 풍조가 있어 실로 화합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하였다.
성혼이 아뢰기를, “이괵의 말은 신이 또한 이러한 의논을 알고 있었는가 의심하여 신이 올린 말을 틈타서 지적하여 증거로 삼은 것이오나, 신은 상대편을 배척하고 알력을 일으킨다는 것이 어떤 일을 가리켜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듣건대 한두 명의 나쁜 무리들이 분심을 품고 원한을 쌓아 기회를 틈타고 나와서 저지하고 동요시키는 행동을 도모한다 하니, 이것은 분별하여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괵이 아뢰기를, “과연 이와 같을 뿐이라면 좋겠으나 신은 조정의 기색이 반드시 그렇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괵은 김응남과 매우 친하여 항상 윤근수 등이 김응남까지 함께 축출하려는 데 분노를 품고 있었으므로 성혼과 윤근수 등이 서로 의논하였는가 의심하여 마침내 성상의 앞에서 극언하였으니, 이는 실로 성혼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이었다.

갑오년(1594, 선조27) 3월 7일 해주(海州)의 대궐에서 사조(辭朝)할 때에 내전(內殿)에서 술을 하사하시니, 천신(賤臣)의 황송하고 감격스러운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임계일기(壬癸日記)》-

갑오년 5월 26일 좌참찬(左參贊) 성혼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상소문 한 장 -14개 조항을 논한 차자(箚子)로, 원집(元集)에 보인다.- 을 올렸는데, 외람되이 아름답게 장려해 주시니 더욱 황공합니다.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니 백성이 있은 뒤에야 적과 싸울 수 있습니다. 적이 큰 병력으로 온 국토를 짓밟는데 백성들은 부역에 시달리고 있으니, 성상께서 비록 백성들을 자식처럼 걱정하시는 뜻을 가지고 계시나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족(士族)들은 평소에는 수족을 움직이지 않고 놀고먹어서 국가에 큰 관계가 없는 듯하나 오늘날 변란이 일어난 상황에서 국가가 의뢰할 수 있는 것은 진실로 이들 사족이니, 만일 사족이 아니었다면 백성들이 모두 왜적에게 사역당했을 것입니다. 신이 해서(海西) 지방을 살펴보니 백성들이 가렴주구에 시달려 비록 좋은 집과 토지가 있으나 버리고 떠나가 못 본 듯이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노끈을 너무 세게 당기면 어찌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지금 만약 부역을 조금 늦추어 준다면 백성들이 다소 소생할 것입니다. 그러하니 호조(戶曹)로 하여금 모든 공물(貢物)과 부역을 고을의 피폐하고 번성함에 따라 구분하여 책자 하나를 만들어 조목조목 나열해서 팔도에 반포하게 하고, 이외에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일이 있으면 수령을 엄하게 다스리며, 진상물로 바치는 것도 시장에서 구입하여 백성들의 힘을 늦추어 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차자에 논한 것이다.
또 아뢰기를, “책을 읽어 발신(發身)하여 문관(文官)으로 처음 벼슬길에 오른 자는 반드시 의욕이 대단하니, 수시로 이들을 어사(御史)로 뽑아 보내어서 수령들을 규찰하게 한다면 유익한 바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오늘날의 국사는 평상시에 하던 것을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되니, 마땅히 자상하고 착하고 공손한 사람을 선택하여 수령을 삼는다면 어찌 훌륭한 업적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수령들이 제대로 고을을 다스리지 못하거든 천거한 사람까지 함께 논죄하신다면 거의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상례(喪禮)가 크게 무너지고 도적이 횡행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엄한 법으로 다스리지만 마시고 마땅히 관대한 법을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이때 연신(筵臣)이 난리 뒤에 사람들이 상례를 제대로 행하지 않는 일과 멋대로 횡행하는 도적들을 일체 엄단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卿)의 말이 옳으니, 비변사와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계갑록(癸甲錄)》. 이하 같음-

상이 이르기를, “덕빈(德嬪)의 변고는 참혹하여 차마 말할 수 없다. 나는 예문(禮文)을 잘 모르나 마땅히 초혼(招魂)하여 장례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좌참찬 성혼이 아뢰기를, “당(唐)나라 덕종(德宗)이 난리로 인하여 그 어머니를 잃고 간 곳을 몰라 허장(虛葬)을 하였는데, 선유(先儒)들이 이르기를 ‘이미 체백(體魄)이 없는데 장례하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겠는가. 신주(神主)를 만들어 신(神)을 의지하게 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 역시 호치당(胡致堂 호인(胡寅))의 말을 따라 이러한 의논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덕빈(德嬪)의 관(棺)을 잃었다.

행조(行朝)에 있을 때 재상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오늘날의 사세는 하도 위태로워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으나, 또한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송(宋)나라의 애산(厓山)에 비하면 다소 덜하니, 반드시 백성들을 보호한 뒤에야 나라를 지키고 적과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백성을 보호하자는 말을 오활(迂闊)하다 하고 취하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모두 들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 또한 당연합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저의 망녕된 소견으로 생각하면 또한 달리 말할 것이 없고 내치(內治)가 제대로 된 뒤에야 외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이른바 내치를 이룬다는 것은 어찌 갑옷과 병기, 돈과 곡식을 마련하는 데에만 전념한 채 백성들을 보호하여 밭 갈고 김매는 것은 등한시하는 것이겠습니까. 내치를 이루는 실제에 있어서는 근본적인 것으로부터 하여야 하니, 하는 일이 없이 저절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아래의 글과 함께 해원(海原 윤두수(尹斗壽))에게 보낸 편지인 듯하다. ○ 《파산간독》. 이하 같음-

또 재상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선유들이 말하기를 ‘나라를 회복함은 마땅히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으니, 만약 윗사람의 것을 덜어 내어 아랫사람에게 보태 주며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적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를 급히 시행하지 않는다면 끝내 군사들을 선발하여 조련하는 일을 착수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대감은 경륜(經綸)의 뜻과 성리(性理)의 학문으로, 위로 성상의 신임을 받고 아래로 세상 사람들의 명망을 진 채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니, 선유들이 미처 시행하지 못했던 것이 마침내 오늘날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째 전쟁이 계속되어 상처가 이미 극에 달하여 밤낮으로 경황이 없는데도 어째서 효험이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까. 병이 고황(膏肓)에 들어 신의(神醫)라 해도 고칠 방법이 없으니, 말이 이에 이르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턱에 흘러내립니다. 그러나 군자가 군주를 섬길 적에 나아가면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면 군주의 잘못을 보필할 것을 생각하여야 하니, 시세가 위급하여 어쩔 방도가 없다 해서 털끝만치라도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 군주는 성군(聖君)이어서 선언(善言)을 듣지 않아도 법도를 잘 따른다고 하며 어려운 일로 책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아서도 안 되고, 또한 하찮은 일이라고 하여 간하지 않아서도 안 됩니다. 내 들으니, 지난번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백성들의 힘이 다 떨어져 진상할 물건을 장만하기 어려우므로 성상에게 진상하는 물품을 시장에서 사다 올릴 것을 청하였는데, 성상께서 ‘사 온 술과 포는 먹지 않겠다’는 하교를 내리셨다 하였습니다. 아, 평상시 먹고 마시는 절도는 비록 필부(匹夫)라도 마땅히 삼가야 하는데, 하물며 한 나라 신인(神人)의 주인이신 임금께서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하가 나아가 봉양하는 정성으로 볼 때에 어찌 감히 억제하여 줄일 것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제 종묘(宗廟)가 망하고 사직(社稷)이 잿더미가 되어 조종(祖宗)의 강토가 이리와 호랑이의 소굴이 되었으니, 만약 이때에 또한 와신상담(臥薪嘗膽)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시장에서 사 오더라도 오히려 쓸개를 씹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대감께서는 마땅히 이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극언하고 끝까지 의논하여 혈성(血誠)으로 감동시켜 성상의 뜻을 돌려서 사방의 백성들로 하여금 우리 군주께서 나쁜 음식을 드시는 덕과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이 요(堯) 임금과 우(禹) 임금과 똑같음을 명확히 알게 한다면, 왕업(王業)을 다시 회복하고 국운을 연장(延長)함이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들어가 군주에게 아뢰되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은 대신과 재상의 일이니, 이것은 내 감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말할 만한데도 말씀하지 않는다면 대감 말년의 절개를 비록 스스로는 애석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종묘와 사직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였다. -갑오년 ○ 살펴보건대, 선생이 올린 14개 조항의 차자에 성상에게 진상하는 물건을 시장에서 사 올 것을 말씀하였는데,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조처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경기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속히 시행할 것을 청하자, 상은 다시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이 편지는 아마도 이때에 보낸 것인 듯하다.

무진년(1568, 선조1) 봄에 경기 감사가 장계를 올려 나를 천거함으로 인하여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에 제수되었는데, 의논하여 추천한 말에 “학문을 독실히 하여 스스로 터득한 묘함이 있다.”는 등의 내용이 있으므로 내 감히 사은숙배하지 못하였다.
기사년(1569, 선조2) 8월에 또다시 목청전 참봉(穆淸殿參奉)에 제수되었는데, 나는 이조에서 범연히 주의(注擬)한 것이라 하여 도성에 들어가 사은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날씨가 춥고 병세가 심하여 부임하지 못하였다. 이해 겨울 도목 정사(都目政事)에서 이조가 또다시 의논하여 천거해서 장원(掌苑)으로 승진되었다. 감히 사은숙배하지 못하였으나 직명(職名)이 체직되지 않았다.
경오년(1570, 선조3) 6월 도목 정사에서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다. 7월에 나는 도성에 들어가 상소하여 진정(陳情)하고 사직을 허락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미천한 몸으로 낮은 관직을 사양하는 것이 사체상 온당치 못하였으며 또 사람들의 압력을 받아 염치를 무릅쓰고 사은숙배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후 상소를 올리지 않고 이조에 정장(呈狀)하여 체직되었다. -일기에 수록(手錄)된 것이다.

선생은 산림에서 덕을 쌓으려고만 하였을 뿐 본래 세상을 담당하려는 뜻이 없었는데 명성과 실제가 크게 알려져서 선조(宣祖)의 특별한 예우를 받고 불차(不次)의 지위로 대우를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벼슬한 날짜를 계산해 보면 채 1년이 못 된다. 한 번 율곡을 위하여 변론하다가 소인배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받아 마침내 중상(中傷)을 당하여 뜻과 사업을 펴지 못하였으니, 도(道)가 장차 폐해지는 것이 하늘의 명이라는 것이 사실이 아니겠는가. 돌아가신 뒤에 표창하여 높인 것은 다소 사문(斯文)의 기운을 더하였으나 어찌 세도(世道)가 함께 망하는 것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계곡집(谿谷集)》의 비문(碑文)-

우계 선생이 지평(持平)으로 부름을 받고 도성에 들어가던 날, 정승인 사암(思菴)이 찾아갔으나 선생은 읍(揖)만 하고 절하지 않았으니, 선비가 자중하는 도가 그러한 것이다. -《노서집(魯西集)》. 이하 같음-

도학(道學)의 성(盛)함이 선조 초년(初年)보다 더한 적이 없는데, 선조가 뜻을 다하여 나라를 다스리려고 도모하였던 것은 실로 계미년(1583, 선조16)의 만남 때문이었다.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불세출(不世出)의 재주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책임을 담당하여 선생을 강력히 추천해서 함께 정도(正道)를 지키려 하니, 선조는 문성공을 의지하여 기필코 선생을 초치(招致)해서 훌륭한 정치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이에 조야(朝野)에서는 크게 기대하여 선생의 출처(出處)로써 국가의 흥망성쇠를 점쳤는데, 선생은 병으로 사양하고 함부로 거취(去就)를 결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신사년(1581, 선조14)에 성상의 예우가 지극해지자, 선생은 비로소 잠시 나와 사정전(思政殿)에서 한 번 접견하였는데 첫 번째로 대도(大道)를 강론하니, 상하가 모두 추존하고 복종하며 온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계미년에 이르러 특별히 부르는 명령에 ‘마음이 같고 덕이 같다[同心同德]’고 간곡히 말씀하니, 선생은 세 번 사양하고 나서 나아갔는바, 이는 도를 행할 수 있는 조짐을 보고서 뜻을 한 번 바꾼 것이었다. 간사함을 분별하고 충성스러움을 드러내며 이미 물러갔다가 다시 나온 것이 모두 세도(世道)를 높이려는 계책이었으니, 이는 실로 선생의 출처의 큰 단서이다.

선생이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서 올린 차자(箚子)로 인해 거듭 성상의 기휘(忌諱)를 저촉하여, 갑오년 도성으로 돌아온 뒤로부터 선생을 싫어하고 하찮게 여기는 뜻이 있었으나 선생은 그래도 아는 것을 모두 말씀하다가 다시 성상의 뜻을 거슬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상의 노여움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주본(奏本)에 대한 의논에서 폭발하였고 삭탈관직하는 화가 마침내 사후(死後)에 미쳤으니, 이른바 ‘외척과 결탁하고 간신과 붕당을 지어 군주를 저버리고 선비를 죽였다’는 죄안(罪案)은 모두 소인배들이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여 선생을 모함한 것이었다.
대체로 계미년 이전에는 성상의 표창하는 말씀과 총애하는 뜻이 온 나라에 넘쳤었는데, 갑신년(1584, 선조17) 이후로는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넘어져 걸핏하면 그물과 덫에 걸렸다. 그러나 선생의 도는 전후가 똑같아 변치 않았다. 군주가 처음에는 현자(賢者)를 보고 좋아하다가 끝에 의심한 것은 마음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극도로 변한 것이니, 만난 바의 시의(時義)가 바로 조정암(趙靜庵)과 서로 비슷하나 다만 화를 입은 것이 다소 가벼울 뿐이다.

송구봉(宋龜峯)이 난리 뒤에 선생에게 준 시에 “꽃은 피려 할 때에 비로소 색깔이 있고 물은 못을 이루는 곳에 도리어 소리가 없다.[花欲開時方有色 水成潭處却無聲]” 하였는데, 자주(自註)에 “우계가 행재소에 있을 때에 조정에 건명(建明)한 것이 없음은 시세가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선생이 이때에 실로 상하의 사람들과 교분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공업(功業)을 이룩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구봉의 시구에도 이러한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환난(患難)을 대처함에 있어 어떠한 경우를 당하든지 자득(自得)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진년(1592, 선조25)과 정유년(1597, 선조30) 두 차례의 난리에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여 산림처사로 자처하는 도리를 밝혔다. 그리하여 외부의 비판하는 말로 인해 자신의 확고한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며, 또 전후에 올린 시무(時務)를 아뢴 차자에 기휘(忌諱)를 피하지 아니하였으며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아 근본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써 국가를 흥복(興復)하는 제일의 의리를 삼았으니, 다만 이 두 가지 일만이 또한 충분히 당세를 경륜하고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하였다. 역경(逆境) 중의 사업은 이것이 큰 것이니, 구봉의 이른바 ‘건명한 것이 없다.’는 것은 또한 혹 이것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오 상국(吳相國 오윤겸(吳允謙))이 말하기를, “당시에 우리들은 선생이 응당 조정에 달려가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성 영동(成永同 영동 현감(永同縣監) 성문준(成文濬))이 파산(坡山)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황추포(黃秋浦 황신(黃愼))와 함께 찾아가 그를 만나 보고 유숙하였는데, 성 영동이 말하기를 ‘아버님께서는 조정에 달려가지 않기로 결정하셨다.’ 하였다. 우리들은 그 말을 듣고 지극히 놀라고 의아하여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하고 오랫동안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주자(朱子)의 ‘기미를 아는 선비는 지위에 있지 않거나 밖에 있으면 들어가지 않는다.’는 등의 말씀을 본 뒤에야 비로소 선생의 소견이 여기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였다.

성혼은 본래 산중에 은거해 있던 사람입니다. 평생 조심한 것이 일신의 진퇴(進退)에 있었는데, 이때에 조정에서 용납받지 못하여 자취를 감추고 죄를 기다렸으니, 비록 위급한 시기를 당하였으나 진퇴의 절도를 어찌 구차히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코 군주가 찾지 않는데 스스로 나아갈 리가 없습니다. 오직 대가가 피란하던 날 길가에서 통곡하며 맞이하려고 미리 계획을 정했었는데 서쪽으로 파천하던 날 일이 창졸간에 벌어져 미처 알지 못했으니, 이는 사세가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성혼은 평생 동안 옛 도를 배워 평상시 일을 처리할 때에도 모두 의리에 맞게 하였는데, 하물며 국가의 큰 변고와 군신의 큰 의리에 있어 어찌 정해진 소견이 없어서 구차히 달려가지 않았겠습니까. -포저(浦渚) 조익(趙翼)의 소-

탄촌(炭村) 권시(權諰)가 일찍이 말하기를, “부르는 명이 없다 하여 달려가지 않는 의리는 유독 우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 타인은 따를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퇴와 동정을 한결같이 우계와 같이 한 뒤에야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으니, 만약 상투적으로 진퇴하는 자라면 비록 이것을 따르려고 하더라도 될 수가 없다. 만약 그런 자가 대번에 이것을 따르려고 한다면 도리어 의리를 크게 손상시킬 것이다. 우계의 출처는 실로 의심할 것 없이 문묘(文廟)의 종사(從祀)에 오를 만하다.” 하였다. -《노서집》. 이하 같음-

박약기 유연(朴躍起由淵)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우계만큼 출처가 올바른 분이 없으니, 선고(先考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께서 항상 모범으로 삼았다. 정묘년(1627, 인조5)의 호란(胡亂)에 사람들이 난리에 달려갈 것을 권하는 자가 있었는데, 선고께서는 ‘옛사람 중에 이 의리를 행한 분이 있으니, 우계가 바로 그러한 분이다. 후인이 어찌 감히 달리하겠는가.’라고 대답하셨다.” 하였다. 나는 약기의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이 깨끗하고 시원해졌다.

우계 선생이 조정에 달려가지 않은 것은 바로 평소에 정한 의리이니, 창졸간에 경황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신묘년(1591, 선조24) 봄에 저의 선자(先子 김장생(金長生)을 가리킴)께서 우계와 문답한 말씀이 있는데, 우리 선자께서는 마땅히 달려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우계는 옛사람 중에 이것을 행한 자가 있으니, 강만리(江萬里)가 바로 그러한 분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계의 평소 정한 의리가 이와 같았으나 대가가 장차 서쪽으로 파천한다는 말씀을 듣고는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대가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길가에서 통곡하고 맞이하려고 하니, 만약 임금께서 하문(下問)해 주신다면 대가를 호위하여 떠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물러 나와 구학(溝壑)에서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쪽으로 파천하던 날 일이 창졸간에 벌어졌으므로 나와서 절하지 못하고 마침내 산중으로 피란하였으니, 이것이 우계가 변란에 대처한 일의 대략입니다. 후일에 신원(伸冤)을 요청하는 자들의 말은 오로지 길가에 나와 맞이하여 절하려고 한 부분만을 위주로 하여, 평소 정한 의리가 마침내 매몰되었으니, 이제 마땅히 신원하는 투(套)의 말을 일소하고 평소 정한 의리를 표출하여 우계의 출처의 실제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신재집(愼齋集)》의 여청음서(與淸陰書)-

무릇 군자가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은 오직 의리 여하에 달려 있을 뿐이니, 소명(召命)의 있고 없음은 진실로 굳이 말할 것이 못 되네. 선생의 진퇴가 과연 다만 군주의 부르고 부르지 않음에 달려 있었겠는가. 위급하고 어려운 즈음에는 신자(臣子)가 마땅히 스스로 정성을 다하여야 하니, 어찌 소명을 기다려 나아가겠는가. 그러나 일을 담당하여 직책을 맡고 있는 자가 아니면 옛사람들은 난리에 달려가지 않은 자가 많았으니,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고 오직 의리 때문일 뿐이네. 이제 선생의 진퇴를 논함에 있어서는 결단코 의리를 위주로 하여 말해야 하니, 어찌 소명의 있고 없음을 가지고 말하겠는가. 만약 오로지 소명의 있고 없음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군부(君父)는 위급한데 소명만을 기다리려고 하는 것 같으니, 이것이 옳겠는가. 내 들으니, 선생도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하나 이것은 일시적으로 혐의를 피한 말씀이네. 어찌 이것을 가지고 선생의 진퇴를 통틀어 논할 수 있겠는가. -《신재집》의 여노서서(與魯西書)-

율곡이 계미년에 우계를 추천할 때에 경륜(經綸)의 책임을 맡길 만하다고 지목하였습니다. 우계는 실로 경륜을 갖추고 있었으며, 뜻도 또한 나오지 않으려고만 하시지 않았으므로 율곡이 이끌어 나오게 한 것입니다. 만약 우계가 그럴 만한 재주가 없으면서 나오려고 하시지 않았다면 율곡이 반드시 이끌어 나오게 하지 않았을 것이니, 우계는 고요함을 지키려고 하였는데 율곡이 억지로 끌어낸 것이 아닙니다. -《명재집(明齋集)》의 여남계서(與南溪書)-

선조 때에 문간공(文簡公) 성혼이 당상관으로 있었는데 문성공(文成公) 이이가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어찌 아낄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니, 당상관은 달리 나아가 임금을 뵙는 규례가 없고 반드시 가선대부가 된 뒤에야 혹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入侍)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계집(南溪集)》의 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같은 유현(儒賢)들도 일찍이 여러 번 소명을 받고서 사양만 하고 나오지 않은 경우는 없었으니, 이것이 출처(出處)의 정도(正道)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퇴계와 우계 두 선생의 처신한 바가 크게 다른데, 그 본뜻을 찾아보면 학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고 재능이 미치지 못하였다 하여 경솔하게 세상에 나오려고 하지 않다가 끝내 분수와 의리에 매이고 은혜와 예에 구애되어 마침내 다시 소명에 응하여 벼슬하려는 계책을 하신 것이니, 이것이 과연 옛 분들과 비교하여 논하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남계집》-


[주D-001]죽은 …… 못하겠는가 : 전국(戰國) 시대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곽외(郭隗)에게 훌륭한 인물을 구해 줄 것을 부탁하자, 곽외는 대답하기를 “옛날 어떤 군주가 신하에게 천금(千金)을 주고 천리마(千里馬)를 사 오게 하였는데, 그 말이 이미 죽었으므로 오백금(五百金)을 주고 죽은 말의 머리를 사 왔습니다. 그랬더니 그 소문이 퍼져 당장에 천리마 세 필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제 임금께서 참으로 현자(賢者)를 구하려 하신다면 우선 저에게 예우하십시오. 그러면 저보다 훌륭한 자가 어찌 찾아오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戰國策 燕策》 여기에서 죽은 말의 머리만도 못하겠느냐는 것은 웬만큼 훌륭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주D-002]삼찬(三竄) : 선조 16년(1583) 이이를 탄핵하다가 죄를 받은 송응개(宋應漑), 박근원(朴謹元), 허봉(許篈)을 가리킨다. 이때 이이가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종성(鍾城)을 포위한 이탕개(尼湯介) 등의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하여 기병(騎兵)을 파견하였는데, 군마(軍馬)가 부족한 형편이었으므로 3등 이하 사수(射手)들에게 말을 바치면 출정하는 부역을 면제시키고 대신 출정하는 병사들은 그 말을 소유하게 하였다. 이에 이 세 사람은 “병조 판서가 군주의 명령 없이 제멋대로 전횡한다.”고 비판하다가 유배 또는 좌천되었다.
[주D-003]하루 …… 것입니다 : 왕세자가 우계를 만나 보고 큰 감화를 받았을 것임을 말한 것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비록 천하에 쉽게 생장하는 식물이 있더라도 하루 동안 햇볕을 쬐고 열흘 동안 춥게 하면 제대로 생장하지 못하는 법이다. 내가 임금을 뵙는 시간은 드물고 내가 물러 나오면 임금의 마음을 차갑게 하는 자가 이르나니, 싹이 있은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4]학금(鶴禁) : 황태자나 왕세자의 집을 이르는데, 옛날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太子)인 진(晉)이 신선술을 배워 학을 타고 날아갔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5]엄광(嚴光)과 주당(周黨) : 모두 후한(後漢) 초기의 은사(隱士)이다.
[주D-006]안거(安車) : 높이가 낮아 요동이 적은 수레로, 옛날 현자를 초빙할 때에 사용하였다.
[주D-007]덕빈(德嬪)의 변고 : 덕빈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부인 정씨(鄭氏)로 선조(宣祖)의 생모인데, 임진왜란에 관(棺)을 잃은 사건을 가리킨 것이다.
[주D-008]송(宋)나라의 애산(厓山) : 애산은 애산(崖山)으로도 쓰는데, 중국의 광동성(廣東省) 바다 속에 있는 섬이다. 남송(南宋)이 최후에 원(元)나라 군대에게 쫓겨 이곳으로 들어가 임시 정부를 세웠으나 곧 패망하고 말았다.
[주D-009]요(堯) 임금과 …… 똑같음 : 요 임금은 궁궐을 매우 검소하게 지어 초가지붕의 끝을 자르지 않았고 계단도 흙으로 세 자 높이 정도만 쌓았다 한다. 《논어》 태백(泰伯)에 “공자가 말씀하기를 ‘우 임금은 내 비난할 데가 없다. 평소의 음식은 간략하게 하시면서도 제사에는 귀신에게 효도를 다하시고, 의복은 검소하게 하시면서도 보불의 제복에는 아름다움을 다하시고, 궁실은 낮게 하시면서도 백성을 위한 치수 사업에는 힘을 다하셨으니, 우 임금은 내 비난할 데가 없다.[禹吾無間然矣 菲飮食而致孝乎鬼神 惡衣服而致美乎黻冕 卑宮室而盡力乎溝洫 禹吾無間然矣]’ 하였다.” 하였다.
[주D-010]도(道)가 …… 명이라는 것 : 도가 폐해진다는 것은 도가 세상에 행해지지 못함을 이른다. 춘추 시대에 공백료(公伯寮)라는 사람이 계손씨(季孫氏)에게 자로(子路)를 모함하자,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도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명이며 도가 장차 폐해지는 것도 명이니, 공백료가 하늘의 명을 어쩌겠는가.”라고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論語 憲問》
[주D-011]계곡집(谿谷集)의 비문(碑文) : 이 글이 《계곡집》 권13에는 우계(牛溪) 선생 신도비명(神道碑銘)으로 실려 있다.
[주D-012]강만리(江萬里) : 남송(南宋)의 신하로, 도중(度宗) 때에 좌승상(左丞相)이 되었으나 성격이 정직하여 간신인 가사도(賈似道)의 미움을 받고 은둔 생활을 하다가 원(元)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물에 빠져 죽었다.

우계연보보유 제1권
답문(答問)


내가 일찍이 우계정사(牛溪精舍)에 있었는데, 선생께서 말씀하기를, “《대학(大學)》의 소인한거장(小人閒居章)에 ‘그 폐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한다.[如見其肺肝]’는 말을 율곡공(栗谷公)이 자네에게 가르칠 적에 어떻게 말씀하던가?” 하시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말씀하기를, “숙헌(叔獻)은 평소 식견이 뛰어나 보통 사람보다 탁월한 의사(意思)가 있다. 그리하여 언제나 문자상에서 특별한 의논을 만들어 내어 성현께서 말씀하신 본지(本指)를 크게 잃곤 한다. 사람들이 소인을 볼 때에 단지 그 외면적으로 속이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또한 내면에 있는 폐간까지도 본다는 것이니, 그 뜻이 이와 같을 뿐 다시 다른 뜻이 없다.” 하였다.
이때에 율곡 선생이 가솔(家率)을 데리고 석담(石潭)으로 돌아가려 하여 선생을 찾아뵙고 하직 인사를 하였는데, 선생이 전번의 말씀을 율곡에게 하였다. 그러자 율곡 선생은 말씀하기를, “존형(尊兄)의 의논은 원문의 뜻에 크게 부합되지 못합니다. 속으로 불선(不善)을 행하는 자는 비록 그 불선을 엄폐하려고 하나 남들이 자신의 불선을 보기를 실제로 사람들이 자신의 폐간을 보듯이 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대의(大意)가 이와 같아야 문리(文理)가 순하고 이치가 바른데 속학(俗學)의 잘못된 견해가 구투만을 따르니, 애석합니다. 그런데 고명(高明)하신 형도 이런 고루하고 막힌 병통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반복하여 서로 논쟁하였으나 오래도록 귀결되지 못하였다. 최후에 선생은 율곡 선생에게 이르기를, “형이 스스로 고명함을 자부하여 남들이 자신만 못하다고 여기나 끝내 그 잘못을 깨달을 날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시니, 율곡 선생은 말씀하기를, “많은 논쟁은 무익하니, 우선 각자의 소견을 지키며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율곡별집(栗谷別集)》에 실린 윤기헌(尹耆獻)의 기록이다. ○ 명재(明齋)의 편지에 이르기를, “내가 소년 시절 《대학》을 배울 적에 우계가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해석하였다. 그런데 율곡의 이 말씀을 들으니, 율곡의 의논은 일반인의 소견을 벗어난 것이어서 반복하여 연구하고 살펴보았으나 끝내 환히 깨달을 수가 없었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말씀하기를, “율곡의 자부(姊夫)가 율곡보다 나이가 적은데 율곡이 마침내 형이라고 부르고 상좌(上座)에 앉히니, 이는 예(禮)가 아니다. 부인은 남편의 나이를 따라 차례대로 앉는 것이 당연한데, 남자가 도리어 부인의 나이를 따라 순서를 정한다면 되겠는가. 나는 처가(妻家)의 식구들이 모일 때에 고모와 자매와 조카의 남편들은 마땅히 따로 나이에 따라 별도로 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가장(家狀)-

이경림(李景臨)이 말하기를, “선친(先親 이이(李珥))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이현(而見 유성룡(柳成龍))은 재기(才氣)가 진실로 훌륭하나 다만 남을 시기하고 이기려는 병통이 있어서 나와 함께 일하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들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그 재주를 베풀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임진왜란 뒤에 서애(西厓)가 국사를 담당하자, 조정에서 언제나 선친의 선견지명(先見之明)과 뛰어난 재주를 칭찬하곤 하였다. 우계는 이 말씀을 듣고 웃으며 말씀하기를 ‘이현이 본래 이와 같았으니, 이현이 어찌 율곡의 어짐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다만 자기보다 나은 자라 하여 싫어한 것이니, 죽은 뒤에 허여(許與)하는 것이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시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올바른 선비를 좋아함은 범의 가죽을 좋아하는 것과 서로 유사하네. 생전에는 죽이려고 하다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아름다움을 칭찬하네.[人之好正士 好虎皮相似 生前欲殺之 死後方稱美]’ 하였으니, 이현이 이에 가깝다 할 것이다.” 하였다. -《율곡별집》-

백인걸(白仁傑)은 비록 학문에 대한 공부는 하지 않았으나 언제나 성혼, 이이와 학문을 논하여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백인걸은 성혼과 이이를 크게 쓸 만한 인물로 천거하였다. 성혼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백공(白公)의 재주를 바둑 두는 것에 비유하면 때로는 아주 잘 두어서 국수(國手)와 대적할 수 있으나 때로는 패착(敗著)을 두기도 하니, 의지하고 믿을 만한 재주가 아니다.” 하였다. -《경연일기》. 이하 같음-

경진년(1580, 선조13)에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자주 나타났다. 성상은 특별히 재변을 사라지게 할 방책이 없었는데, 대신들이 갑자기 정전(正殿)으로 돌아올 것을 청하니, 식자(識者)들은 이를 옳지 않게 여겼다. 성혼은 대신들이 정전으로 돌아올 것을 청한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박사암(朴思菴 박순(朴淳))도 사람들을 따라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작태를 하는가?” 하였다.

청송(聽松)은 젊어서부터 남명(南冥)과 뜻이 같아 서로 친하였다. 청송의 아들 호원(浩原)은 나와 한 책상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인데, 내가 두 선생이 서로 추존(推尊)한 내용을 묻자, 호원은 대답하기를, “가친께서 남명이 단성(丹城)에서 올린 상소문을 보셨는데, 필봉(筆鋒)이 너무 예리하여 크게 드러났으므로 마침내 말씀하기를 ‘오랫동안 건중(楗中 조식(曺植))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그의 학문이 크게 진전되어 이미 완성되었으리라고 여겼는데, 과연 이 상소문의 내용과 같다면 아직도 미진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셨다.” 하였다. -《청강소어(淸江謏語)》-

안우산(安牛山 안방준(安邦俊))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파산(坡山)에서 우계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한 친구가 자리에 있었다. 선생은 그를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공(公)은 훌륭한 인물을 만나 보았는가?’ 하시니, 그 사람은 웃으며 말하기를 ‘공께서 말씀하신 인물은 우리들이 평소에 보는 인물들이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말씀하기를 ‘내가 보니 지금 사람들은 3, 4십 세 이전에는 엄숙하여 완성된 사람 같다가 4, 5십 세 이후에 이르면 완전한 사람을 하나도 볼 수 없으니, 아, 인물을 어찌 쉽게 얻어 볼 수 있겠는가. 율곡이 생전에 일찍이 말씀하기를 「무릇 사람은 3, 4십 세 이전에는 비록 광대나 배우 같은 짓을 하더라도 무방하다.」고 하셨으니, 이는 말년에 절개를 삼가지 않은 친구를 심히 미워해서 한 말씀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도 너무 격분해서 하시는 말씀으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제서야 율곡의 말씀은 과격한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실로 가슴속에 깊이 새겨 두고 거울로 삼아 경계해야 할 말씀이라는 것을 더욱 알게 되었다.’ 하시고는 한탄해 마지않으셨다.” 하였다. -《우산언행록(牛山言行錄)》-

병자년(1576, 선조9) 9월에 성 선생을 배알하고 등불을 켜고 조용히 앉아 민성장(閔成章)이 연좌되는 일을 저지할 것을 논하였는데, 의논을 채 마치기 전에 선생이 말씀하기를, “자네의 의논이 매우 분명하고 온당하니, 만일 마음이 공평하고 기운이 온화하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나는 처음 최공(崔公) -영경(永慶)- 을 방문하여 그의 방에 들어가서 잠시 그의 미목(眉目)을 보고는 이미 청렴하고 지조가 있어 구차하지 않은 기상이 있음을 알았다. 인하여 최공에게 이르기를 ‘공의 깨끗한 수행(修行)과 굳은 지절(志節)은 비록 옛사람들 중에서도 쉽게 찾을 수가 없다. 고인들은 곤궁한 가운데에도 마음을 화평히 하여 서운해하는 뜻이 없었다.’ 하니, 이에 효원(孝元 최영경)은 여러 번 좋은 말씀이라고 칭찬하였다. 내 일찍이 몇 말의 쌀을 그에게 보내 주고 그의 답서를 보기 전에는 항상 그가 받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이 분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동계일기(東溪日記)》. 이하 같음-

또 말씀하기를, “서화담(徐花潭)이 일찍이 말씀하기를 ‘한마디 말과 한 가지 행실이 뛰어난 선비는 쉽게 얻을 수 있으나 실제의 견해가 있는 선비는 쉽게 만나 볼 수 없다.’ 하였다.” 하였다.

정축년(1577, 선조10) 10월 전 양근 군수(楊根郡守) 이두춘(李逗春)이 별세하였다. 그는 지난번 《진학문정(進學門庭)》 9책(冊)을 나에게 수정(修訂)해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미처 다시 만나 보지 못하고 별안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애석하다. 《진학문정》이라는 책은 대개 지어지선(止於至善)과 중(中)을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의 사이에 놓는 한편 거경(居敬)과 궁리(窮理) 등의 내용을 학문의 지름길로 삼아 여러 책의 좋은 말을 뽑아 분주(分註)하여 발명한 것이다.
내가 손수 이것을 가지고 성 선생에게 바로잡아 줄 것을 청하였더니, 선생은 크게 칭찬하며 말씀하기를, “이와 같은 사람이 있는데도 내 일찍이 이름을 듣지 못하였으니, 매우 애석하다.” 하고는 그대로 두고 가게 하였는데, 뒤에 이 책은 병화(兵禍)에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무인년(1578, 선조11) 12월에 이조(吏曹)에서 계청하기를, “문소전 참봉(文昭殿參奉) 우복룡(禹伏龍) 등 다섯 사람이 청렴하고 근신하여 봉직을 잘하니, 모두 6품으로 승진시키소서.” 하니, 상은 각기 한 자급을 올려 주도록 명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온당치 못하다는 뜻을 아뢰려고 하였으나 친구들이 모두 불가하다 하므로 상소문을 초(草)하였다가 올리지 못하였으니, 식견이 투철하지 못하여 스스로 내 견해대로 하지 못한 것이었다. 뒤에 이 문제를 가지고 성 선생에게 질문하였더니, 선생은 말씀하기를,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우리들은 이 도리를 지니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르려 해도 따를 수 없다.’ 하였다.” 하였다.

경진년(1580, 선조13) 1월에 파평(坡平)에 가서 성 선생을 배알하고 그대로 유숙하였다. 선생은 말씀하기를, “의리에 대한 말은 배우는 자가 마땅히 급급히 강명(講明)해야 하지만 재리(財利) 같은 것에 대해서는 권하지 않아도 스스로 노력한다.”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자네가 율곡의 문 앞을 지나가면서도 뵙지 않은 것은 무슨 생각에서인가?”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일찍이 들어가 배알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말씀하기를, “자네는 율곡을 모르지만 율곡은 항상 자네를 만나 보려고 한다.”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옛날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재상이 되자, 유원성(劉元城 유안세(劉安世))은 사마 온공의 문인이었으나 다시는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대현(大賢)의 사제(師弟) 간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일찍이 한 번도 배알한 적이 없는 문하에 어찌 가벼이 스스로 나아가 뵐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말씀하기를, “율곡은 지금 시골에 있으니, 이 경우와는 다르다.”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율곡이 시골에 계신 것은 또한 선생이 시골에 계신 것과는 다르니, 선생의 문하에 왕래하는 것은 혐의가 없으나 율곡의 문하에는 곧바로 가기가 또한 어렵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말씀하기를, “자네의 말이 과연 좋다. 그러나 후일 율곡의 문 앞을 지날 때에는 모름지기 한번 찾아뵈어 그의 면목을 보도록 하라. 그러면 반드시 지금의 말을 후회할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들으니, 율곡 선생은 말씀하기를, “여식(汝式 조헌(趙憲))이 매양 요(堯)ㆍ순(舜)의 정치를 당장에 회복할 수 있다고 여기나 요란함을 면치 못하니, 그는 단련되고 통달하기를 기다려야 크게 쓸 수 있다.” 하였고, 우계 선생은 말씀하기를, “여식의 학문이 일취월장하니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 하였으니, 율곡이 일찍 별세하여 선생(先生 조헌을 가리킴)의 학문이 크게 진보함을 미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음집(淸陰集)》의 중봉비명(重峯碑銘)-

적성(積城)을 방문하여 함께 이야기하고 또 정랑(正郞) 이숙헌(李叔獻)이 송사련(宋祀連)의 상(喪)에 회장(會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하다고 말하였다. -《송강일기(松江日記)》. 이하 같음 ○ 우계 선생이 일찍이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으므로 적성이라고 칭한 것이다.

송강(松江)이 말하기를, “상중(喪中)의 묘제(墓祭)에 여성(礪城)과 숙헌(叔獻)은 술잔을 한 번 올리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성 적성(成積城)과 김이정(金而精 김취려(金就礪))은 시속을 따라 세 번 올리는 것이 정(情)에 만족할 듯하다 하였다.”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묘제는 새로 별세한 분의 묘제를 가리킨 듯하다.

을해년(1575, 선조8) 2월 우계에 가서 선생을 배알하고 석전(釋奠)을 올려야 하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이때는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승하하여 장례 지내기 전이었다.- 선생은 대답하기를, “문묘(文廟)가 만약 외신(外神)이라면 모르지만 외신이 아닐 듯하다. 사직(社稷)과 문묘는 이미 대사(大祀)와 중사(中祀)로 분류되니, 선후의 순서는 있으나 존숭하는 뜻이야 어찌 구분할 수 있겠는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정한 것은 과연 어떤지 모르겠다.” 하였다. 또다시 묻기를, “문묘에 배알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이미 군주와 스승의 높은 지위로 공자(孔子)를 대우하였으니, 그렇다면 비록 길복(吉服)을 입고 뵙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하였다. -《동계일기》. 이하 같음-

9월에 우계에 가서 선생을 배알하고 묻기를, “혼례를 종자(宗子)가 주장하면 가장(家長)이 비록 상중에 있더라도 혼례를 치를 수 있습니까?” 하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종자가 비록 혼례를 주관하더라도 초례(醮禮)는 가장이 행하는 것이니, 이는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예경(禮經)에 이르기를 ‘연고가 있거든 23세에 시집가라.’ 하였으니, 연고가 있다는 것은 부모의 상을 이른다. 만약 아버지가 상중인 경우 자식이 혼인할 수 없다면 이는 조부모의 상에도 부모의 상과 똑같이 혼인하지 말아야 하니, 이는 또한 행하기 어려울 듯하다. 대체로 가장이 상중에 있는데 혼인하는 것을 만약 한결같이 예경의 제도대로 따르려고 한다면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맹자(孟子)는 ‘친영(親迎)을 하면 아내를 얻고 친영을 하지 않으면 아내를 얻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친영을 하겠는가?’ 하였으니, 만약 부모가 늙어 혼례를 행하는 것이 시급하다면 세속을 따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집안에 일이 있으면 고조(高祖)의 사당에 고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고조를 중히 여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까?” 하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와 유몽학(柳夢鶴)은 모두 말하기를 ‘고조는 마땅히 허위(虛位)를 설치하여 제사해야 하고 신주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이는 매우 옳지 않다. 조고(祖考)가 같으면 4촌 간이요 증조가 같으면 6촌 간이요 고조가 같으면 8촌 간인데, 8촌 형제간에는 복(服)이 있으니, 그렇다면 이는 친함이 다하지 않은 것이다. 고조를 제사하지 않는다면 이는 친함이 다한 것이니, 어찌 친함이 그 손자에게는 다하지 않았으면서 자기를 낳아 준 조고를 제사하지 않는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천자(天子)는 칠묘(七廟)이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이고 대부(大夫)는 삼묘(三廟)여서 등급에 따라 줄인 것은 사당을 세울 때에 각각 신주 하나씩 모시는 것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대부는 삼묘로 제한하였으나 실은 고조를 증조의 사당에 제사하였으니, 그렇다면 고조를 제사 지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부가 사당을 셋만 모시는 제도가 송(宋)나라 때에도 있었는데, 정자(程子)는 말씀하기를 ‘지금 세상에는 한 사당에 네 개의 감실(龕室)을 두니, 그렇다면 고조의 신주를 서쪽 가의 한 자리에 봉안(奉安)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다.’ 하였으며, 주자(朱子) 또한 이것을 옳다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에 고조의 신주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과연 정자와 주자의 뜻에 부합하겠는가.” 하였다.

한교(韓嶠)가 묻기를, “《서의(書儀)》와 《정씨제의(程氏祭儀)》에는 모두 ‘제수(祭需)는 다섯 고임새를 놓는다.’ 하였고, 또한 ‘과일은 다섯 가지를 쓴다.’고 하여 고례(古禮)에 변두(籩豆)를 기수(奇數)와 우수(偶數)로 진설한다는 내용과는 같지 않습니다. 주자의 제례(祭禮)는 비록 《서의》와 《정씨제의》를 참고하였으나 찬품(饌品)을 정한 수는 과일 여섯 가지가 첫 번째 줄이 되고, 포(脯)와 해(醢)와 채소를 합하여 여섯 가지가 두 번째 줄이 되며, 세 번째 줄의 미식(米食), 면식(麵食), 어(魚), 육(肉), 적(炙), 네 번째 줄의 반(飯), 갱(羹), 잔반(盞盤), 시(匙), 초접(醋楪)으로 모두 다섯 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줄과 네 번째 줄은 비록 《서의》와 《정씨제의》의 다섯 가지 고임새를 놓는다는 말과 부합하나 첫 번째 줄과 두 번째 줄은 모두 고례의 변두를 우수(偶數)로 한다는 수에 합치됩니다. 이는 자세히 정한 정미(精微)한 부분이니 가벼이 변경해서는 안 될 듯한데, 율곡의 설찬도(設饌圖)에는 오로지 《서의》와 《정씨제의》만 따르고 《가례》의 수를 따르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우계 선생은 대답하기를, “오늘날 예학(禮學)을 하는 자들은 마땅히 《가례》를 강명(講明)함을 우선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예학찬요(禮學纂要)》-

율곡이 제사에 어물과 육류를 날것으로 사용함은 비록 《서의(書儀)》에 근본한 것이나 《의례(儀禮)》의 궤사례(饋食禮)와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계에게 물었더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비록 날것과 익힌 것을 섞어 올리는 것이 고례(古禮)이기는 하다. 그러나 《가례》에서 주자가 말씀하기를 ‘평소에 사용하는 그릇으로 제기(祭器)를 대신하고 평소의 반찬으로 조육(俎肉)을 대신한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제사에 날것을 쓰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하였다. -《의례문해(疑禮問解)》-

송강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초상을 만났을 때 삭망(朔望)에 참배하는 예를 숙헌(叔獻)과 의논하여, 신주를 내올 때에 먼저 참신(參神)하고 그다음에 강신(降神)하며, 술을 따라 올린 다음 재배하고 사신(辭神)할 때에 재배하여 사당의 참배하는 예와 달리하도록 정하였습니다.” 하니, 숙헌은 말씀하기를, “나의 조상이 당(堂)에 계시니, 어찌 먼저 참배하는 예를 올리지 않고 먼저 강신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송강(松江)의 《신미일기(辛未日記)》. 이하 같음-

또 대답하기를, “정조(正朝)와 추석(秋夕)에 하루 아침에 두 번 상식(上食)하는 것을 번독(煩瀆)하다 함은 어느 예경(禮經)에 나와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나의 생각에는 절사(節祀)의 묘제(墓祭)는 이미 세속을 따른 것이요, 제사 지내는 곳이 또 궤연(几筵)이 아니니, 어찌 의리가 없어 번독스럽게 하는 데에 이르겠습니까. 그 나머지는 초상의 삭망전(朔望奠)에 국과 밥을 올린다는 글이 있으니, 집안사람들이 이미 이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내오신 네 조항의 의논은 저의 소견으로는 예경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세히 알지 못하니, 어찌 감히 옳다 그르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제(虞祭) 뒤에 상식할 때 두 번만 곡(哭)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상례에 우제와 상제(祥祭)의 큰 제례에는 세 번 곡하며 이 중에도 초헌(初獻)한 뒤의 곡은 더욱 중요한데, 상식하여 술잔을 올린 뒤에 곡이 없다면 정(情)에 어찌 맞겠습니까. 우제 뒤에 상식할 때의 예절은 이미 예경에 나와 있는 것이 없으니, 그렇다면 차라리 초상 때의 의식을 사용하여 절하는 횟수를 조금 더하는 것이 근거가 있지 않겠습니까. 삭망에는 대제(大祭)를 지내는 달이 아니라면 우제를 따라 삼헌(三獻)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며 절사(節祀)도 그러합니다.” 하였다.

또 대답하기를, “축관(祝官)은 모름지기 예를 알고 의식에 익숙한 사람을 뽑아서 시켜야 하니, 부인의 상(喪)이 아니면 비록 자제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하였다. ○ 강신하고 삼헌할 때에 만약 당하(堂下)에 차례로 서는 예를 따르지 않는다면 제사하는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마땅히 부복(俯伏)하여야 할 것입니다. ○ 대상(大祥)과 소상(小祥)을 모두 날이 밝을 무렵에 제사한다면 평상시 곡하고 절하는 예를 먼저 행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 삼제모상(三祭茅上)은 모사(茅沙) 위에 술을 세 번 붓는 것입니다. 주인이 곡하고 재배하는 것에 대하여 《가례》에는 “주인이 곡하고 재배하고 자리로 돌아가 곡을 멈춘다.” 하였으며, 《가례의절(家禮儀節)》에는 “주인 이하가 모두 곡하다가 조금 뒤에 곡을 그치면 주인이 홀로 절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하였으니, 이 부분은 마땅히 《가례의절》을 따라 행해도 될 듯합니다.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에도 모두 모사 위에 술을 세 번 붓습니다. 삼헌에 대하여 《가례》에서 “초헌에 주인이 곡하고 재배한다.” 하였는데, 아헌에 대해서는 예가 초헌과 같다고 하였고, 종헌에 대해서는 예가 아헌과 같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아헌과 종헌에는 다만 술잔을 올린 사람이 곡하는 것입니다. ○ “주인 이하가 모두 나가면 축관이 합문한다.[主人以下皆出 祝闔門]”는 내용 아래에 분주(分註)하기를 “주인은 문의 동쪽에 서서 서향(西向)하고, 부인은 문의 서쪽에 서서 동향(東向)하니, 시제(時祭)의 예에도 그렇다.”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제사 지낼 때에는 북향하는 위치를 하고 있다가 합문한 뒤에는 좌우에서 모시는 위치를 하여 동서로 서로 향할 뿐입니다. 합문한 뒤에는 존장(尊長)이 다른 곳에서 휴식해도 되니, 그렇다면 제사하여 북향하고 있을 때보다는 그 예가 다소 느슨한 것입니다.

또 답하기를, “소상 뒤에 입는 심의(深衣)와 띠를 숙헌은 ‘또한 다소 줄임이 있어야 하고 그대로 옛 물건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가는 삼베를 사용하여 만들거나 조금 마전한 삼베로 만들어서 입는 것이 또한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답하기를, “소상날에 조석곡(朝夕哭)을 행하는 것이 어찌 의리에 해롭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소상 뒤에 상식을 올리는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곡하고 절하는 한 가지 절차가 없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하였다. ○ 소상 뒤에 슬픔이 지극하면 여막(廬幕) 가운데에서 곡하는 것도 괜찮으니, 궤연에서 곡하는 것이 어찌 의리에 해롭겠습니까. 감히 궤연에서는 곡하지 못하고 묘소에서만 곡한다면 이것이 무슨 의리이겠습니까.

또 답하기를, “소상 뒤에 희생(犧牲)을 사용하는 것은 계속할 수 없을 듯하고 주현(州縣)의 관원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도 온당치 못할 듯하니, 스스로 시속의 음식을 장만하여 올릴 것이요, 고기는 푸줏간에서 장만하되 잡는 것을 직접 본 싱싱하고 깨끗한 고기를 취하여 사용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또 답하기를, “밀과(蜜果)를 저희 집에서는 단지 한 종류만 사용하되 그릇에 가득히 담아 올리고 있습니다. 한 종류를 여러 그릇에 올림은 온당치 못할 듯하니, 마땅히 한 그릇에 올리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무릇 밀가루에 기름과 꿀을 섞어 만든 유과(油果)는 똑같이 한 종류이다.

또 답하기를, “생신제(生辰祭)를 다른 장소에서 별도로 제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고, 여러 신위(神位)에 두루 올리는 것도 온당치 못하니, 만약 예법대로 제사를 그만두지 못한다면 차라리 중원(中原)의 선배들의 별도로 제사하는 법을 따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위당(魏堂)의 《가례회성(家禮會成)》에 생신제에 대한 의식이 있는데 기제(忌祭)와 똑같다.

구봉(龜峯)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나는 이제 중한 복(服)을 입고 있으니, 예문(禮文)으로 헤아려 보건대 마땅히 학업을 폐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온 집 안에 항상 바깥손님들이 와 있어서 빈주(賓主) 사이가 되니,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졸곡(卒哭) 전에는 우선 바깥사랑채에 기거하고 있는 제군(諸君)들을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하니,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구봉서첩(龜峯書帖)》. 이하 같음-

또 편지에 이르기를, “생질녀(甥姪女)의 상을 당하였는데 지난달 28일에 죽었습니다. 나는 그다음날 부음(訃音)을 들었고 이달 3일에 삼베옷과 삼베 띠를 입었습니다. 대체로 오복(五服) 중에 대공(大功) 이하의 달수는 부음을 들은 날로부터 계산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성복(成服)한 날로부터 계산하여야 합니까?” 하였다. -구봉은 답하기를, “마땅히 죽은 달을 기준으로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또 답하기를, “묘제에 대한 예는 저의 소견과 아주 부합됩니다. 내가 종형(宗兄)께 글을 올려 조고(祖考)의 묘소에 제물을 올릴 것을 청하였으나 종형은 제사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조상의 선영이 한 산에 있는데, 조고의 묘소에는 제사하지 않고 선친(先親)의 묘소에만 제사하는 것도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모두 감히 제사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편지에 이르기를, “저희 집에서는 다섯 가지 과일을 사용하고 포(脯)와 해(醢)와 채소가 각기 두 그릇이며 탕(湯)이 세 가지여서 모두 스물다섯 그릇인데, 혹 지나치게 풍성하여 검소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삼가 진설도(陳設圖)를 만들어 올립니다.” 하였다.

또 편지에 이르기를, “계함(季涵 정철(鄭澈))이 상례에 유회(油灰)를 사용하려고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기름은 햇볕이 들어야 마르고 비를 맞으면 습해지는데, 열 길의 깊은 땅속에 어찌 햇볕이 들어 기름이 마를 리가 있겠습니까. 《가례》에도 유회를 사용하였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였다. -구봉은 답하기를, “유회는 이미 고례(古禮)가 아니니, 사용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이세붕(李世鵬)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종자(宗子)가 죽고 다른 후손이 없다면 마땅히 주부(主婦)가 그 제사를 받들도록 하여야 하고 사판(祠版 신주)에 아내가 봉사(奉祀)한다고 쓰기를 주자(朱子)의 이른바 망국(亡國)의 칭호와 같이 하여 망부(亡夫)라고 써야 하니, 어찌 친속(親屬) 관계를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절대로 신(神)이 의지할 곳이 없게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문집(文集) 초본(草本). 이하 같음-

한관(韓瓘)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대상(大祥) 전에 상식하고 곡하는 것은 예에 근거하여 말한다면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그러나 이미 신주를 내와 상식하면서 곡하지 않는 것도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예경(禮經)은 성인이 만드신 것으로 정(情)과 예(禮)에 모두 알맞게 한 것인데, 후세에는 예를 따르지 않고 중도(中道)에 지나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이 난처한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미 풍속이 되어 상식을 철폐할 수 없다면 다시는 바로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는 부재모상(父在母喪)의 대상 뒤를 말한 것인 듯하다.

이청강(李淸江)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보내 주신 물건은 감사하게 받았으며 뒤이어 놀라움과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서책과 종이와 먹은 진실로 서생들이 매우 좋아하는 물건이며, 진귀한 해산물도 산중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니, 삼가 이미 절하고 받아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남여(籃輿)와 우산(雨傘)은 더욱 좋아하는 것들이니, 앞으로는 산중과 물가를 두루 돌아다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패(吉貝)와 장요(長腰)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인년에 제가 서울에 가서 법률을 배웠는데, 이는 국가에서 탐관오리들을 조사하는 것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극진하게 미루어 보면 쌀 한 말과 베 한 단(端) 이상은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모두 법에 저촉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후로 더욱 경계하여 주현(州縣)의 선물 중에 쌀과 삼베가 있으면 모두 사절하여 되돌려 보냈습니다. 이 때문에 이번에 보내 주신 길패 다섯 단과 쌀 한 섬으로 얻은 두 단을 삼가 봉함(封緘)하여 영윤(令胤)이 계신 곳에 돌려주게 하였습니다. 이는 작은 청렴이고 하찮은 일을 삼가는 것으로, 마른 고기는 이로 끊지 않는 것을 따지는 따위라 할 것입니다. 또한 심히 부끄러운 줄 아오나 스스로 한정하고 절제해서 소인의 욕망을 막고자 하는 것이니, 바라건대 저의 고집스러움을 웃어넘기고 허물하지 마십시오. 또 영윤에게 청하여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하였다. -아래 두 편지와 함께 《청강가첩(淸江家帖)》에 실려 있다.

이수준(李壽俊)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내 들으니 상주가 죽(粥)을 먹는 것을 거상(居喪)의 큰 예절로 여긴다 하니, 어쩌면 그리도 견해가 지나칩니까. 성인이 예를 만들 적에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의 알맞음을 참작하여 당연한 도리를 다하셨으니, 후세에 어떤 사람이 감히 성인의 예를 부족하다고 여겨 마음대로 고쳐 멋대로 행한단 말입니까. 하물며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것은 몸에 편안할 수가 없기 때문에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모두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요, 단지 고기를 먹는 것만을 차마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사람들은 충분히 밥을 먹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도 반드시 죽을 먹으려고 한다면 이는 집상(執喪)을 실정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 공자(孔子) 문하의 훌륭한 제자가 어머니의 상(喪)에 5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이윽고 그는 후회하기를 ‘부모의 상에 나의 실제의 정(情)을 쓰지 않는다면 어디에 나의 실제의 정을 쓰겠는가.’ 하였습니다. 실제의 정을 찾아보면 3일이 지날 경우 죽을 먹을 수가 있는데, 5일에 이르렀다면 이는 실제의 정보다 지나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부모의 상에 죽을 먹은 것은 지극히 애통해하는 마음이 있어 밥을 먹어도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밥을 먹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도 반드시 죽을 먹는다면 이는 실정대로 하지 않고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성인의 예보다 더하기를 바란다면 어찌 심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여 고치시기를 지극히 축원합니다. 보내 주신 편지의 감실(龕室) 네 개를 만든다는 말에 대해서는 설명을 다 하자면 너무 깁니다. 대저 당시 국가의 제도 역시 세 개의 감실을 사용하였으나 《가례》에 반드시 네 개를 사용한 까닭은 후한 것을 따른 것입니다. 주자가 이르기를 ‘옛날에는 각기 별묘(別廟)에 높여 제향하였기 때문에 사당을 넷으로 만드는 것이 온당치 못하나 지금은 국가나 사가(私家)의 사당이 모두 한 집에 방만 달리하고 있으니, 별묘를 만들어 높이는 것과는 달라 후한 것을 따라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람들이 《가례》를 따르는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 《가례》에 제기(祭器)는 옛것을 사용하지 않고 사사로운 그릇을 사용함은 시속을 따른 것이니, 옛날에 쓰던 작(爵)을 폐지하고 잔(盞)을 쓰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의리입니다.

이춘영(李春英)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이몽응(李夢應)의 담제(禫祭)가 이미 지났으니 매우 서글프오. 이 사람이 별세할 때에 나에게 부탁한 편지 한 통이 있었으나 불타 없어져 받아 보지 못하였으니, 나는 언제나 이것을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서글퍼지고 애통하오. 삼가 중윤(仲胤) -청강(淸江)의 아들 수준(壽俊)이다- 을 보니, 사람됨이 역량과 기백이 있고 의지가 굳세며 일을 주관할 만한 기국이 있어서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생각건대 원대하게 성취할 만한 그릇인 듯하오. 그러나 그의 재주는 일을 주관하고 두루 주선하여 기력을 운용하는 데에 소장(所長)이 있었는데, 그의 선친이 깊이 바라던 것은 학문에 힘쓰고 책을 읽어서 의리를 깊이 연구하고 조행(操行)을 닦으며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 요약하는 등의 사업이었으니, 그렇다면 다소 거칠고 호걸스러운 기미(氣味)를 지니고 있는 그가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조심하여 절실하고 치밀한 공부를 정밀하게 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까 염려되오. 사람들은 마땅히 자신의 기품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아서 유여(有餘)한 것은 덜어 내고 부족한 것은 보완하여야 하니, 이렇게 한 뒤에야 비로소 서로 이루어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오. 만약 자신의 장점만 좋아하고 먼저 그 부족한 점을 보충하지 않는다면 장점은 더욱 자라나고 부족한 점은 더욱 부족해져서 병폐가 더욱 깊어져 끝내는 장점마저도 함께 병통이 될 것이니, 바라건대 그대는 한번 가서 그를 만나 보고 나의 이러한 뜻을 자세히 말하여 주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고 겸허한 마음으로 학문에 유익함을 구해서 한결같이 서책에 힘을 쏟고 각고의 노력을 하여 통렬히 스스로 닦고 세워서 큰 사업을 하게 하여 그 나머지 세속의 일을 주관하고 도모하는 일은 우선 일체 정지하여 자신이 이치를 앎이 분명하고 취향과 절조가 확립되기를 기다린 뒤에 나아가게 하여도 괜찮을 것이오. 그는 지금 나이가 그리 많지 않으니, 이제 부지런히 힘쓰고 스스로 노력한다면 그의 뛰어난 기국으로 어떤 학문인들 밝히지 못하며 어떤 일인들 할 수 없겠소. 내 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려고 하나 이곳이 너무 분분하여 감히 편지를 보낼 수 없기에 그대에게 말하여 도모하게 하는 것이오. 붕우 간의 의리가 매우 깊으니, 부디 소홀히 하지 마오.” 하였다. -을유년(1585, 선조18)-

심예겸(沈禮謙)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적막한 물가로 돌아오자, 차가운 시내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작은 집이 한적하여 개연(慨然)히 잘못을 뉘우치고 몸을 지키려는 뜻이 있으니, 하늘이 이 몸에게 몇 년의 수명을 연장해 주어 대강 이 마음을 이루게 할는지 모르겠소. 부디 존군(尊君)은 나의 이러한 생각을 살피고 한 번 찾아 주기 바라오. 기다리겠소.” 하였다. -《파산간독》. 이하 같음-

또 답하기를, “보내온 편지에 구설(口舌)이 분분하여 저 장초(萇楚)를 부러워한다는 말이 있기까지 하니, 어쩌면 스스로 괴로워함이 이와 같단 말이오. 근일엔 천명에 맡기고 분수대로 생활하여 영대(靈臺)에 누를 끼치지 않는지 모르겠소. 나는 매양 남들의 비웃음과 꾸짖는 말이 적지 않았으나 자못 이것을 개의치 않고 다만 스스로 수렴(收斂)하는 공부가 미진하여 이처럼 더러운 모욕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할 뿐이오.” 하였다.

또 답하기를, “구설이 많다는 내용은 사람으로 하여금 장탄식을 하게 하오. 이치가 밝아지면 마음이 조용해져 일을 봄이 통철하고 의리를 판단함이 밝게 드러나서 곧바로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을 것이니,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목을 자르고 자신의 가슴에 구멍을 뚫는다 하더라도 사양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남들의 비웃음과 꾸짖음이겠소. 여생을 마치기 전에 혹시라도 소소한 의리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아 이와 같은 경지를 얻고 죽기를 나는 참으로 간절히 소망한다오.” 하였다.

또 답하기를, “보내온 편지를 보니 서운함을 이기지 못하겠소. 옛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행할 수 없다 하여 곧바로 자신을 탄핵하는 글을 올리는 계책을 한 자가 있었으나, 오늘날에 있어서 자신의 정성을 다하는 도리는 먼저 윗사람을 설득하고 아랫사람을 가르쳐 마음을 다해 열어 주고 구제해서 곤궁에 빠진 백성들로 하여금 조금의 은택이라도 입게 하여야 하니, 이것이 바로 학문을 행하는 길이오. 다시 바라건대 깊이 헤아리는 것이 어떻겠소.” 하였다.

최계조(崔繼祖)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언제나 생각건대 그대는 뜻이 있으나 다 채우지 못하여 서책을 공부하는 것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는 듯하니,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어찌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소. 부디 바라건대 벽산서실(碧山書室)에 조용히 거처하면서 서책을 보고 완색(玩索)하여 고요하고 전일(專一)하게 공부에 최선을 다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소.” 하였다.

양황(梁榥)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문장을 짓는 것은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니나 지엽적인 문자에만 흐르고 올바른 의리로써 요약하지 않는다면 그 문장은 부황(浮荒)한 것이 되고 말 것이오.” 하니, 양황의 답서에 이르기를, “선생께서 간곡히 문제를 제기하기만 하고 완전히 말씀해 주지 아니하여, 오랫동안 읊고 생각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하려고 하시니, 선생이 인재를 기르기를 좋아하시는 뜻이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하였다. -《양씨가록(梁氏家錄)》-

하곡(霞谷) 정운룡(鄭雲龍)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삼가 바라건대 존형은 고요히 의리를 살펴보아 참으로 종사하는 바가 있어서 분명히 마음을 쓰는 곳이 있게 하시오. 이렇게 한다면 천하의 즐거운 일 중에 오직 이것이 유독 클 것이오.” 하였다. -아래 편지와 함께 《오산록(鰲山錄)》에 보이나 문집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초록(抄錄)하였다.

또 답하기를, “1년이 절반이나 지나가 이제 또 가을이 되었소. 천리 멀리에서 편지를 부친 것이 두 번이니, 반복하여 읽어 보고 매우 감탄하였소. 편지에 운운한 것은 나처럼 비루(鄙陋)한 자가 어찌 감히 함께 의논하여 무익하게 논란할 수 있는 것이겠소. 삼가 생각건대 존형은 정(靜) 공부를 위주로 하여 마음을 잡아 지키고 완색(玩索)하는 공부를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시오. 이렇게 하면 의미가 깊이 진전되어 저절로 친밀(親密)하고 묵묵히 합치되는 경지에 이를 것이니, 어찌 굳이 언어로 왕복하여 도움을 줄 것이 있겠소. 소년 시절의 패기는 쉽게 소멸되고 시들게 마련이오. 우러러 생각건대 존형은 더 늙어 숨기고 겸손하여야 비로소 진실한 마음이 되어 온 천하의 사물에 동요당하지 않을 것이니, 더욱 원대한 학업을 힘써 독실히 수양하고 진수(進修)하기를 바랄 뿐이오.” 하였다.

중봉(重峯)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날씨가 추운 깊은 산골짝에 외인(外人)들은 오지 않고 초가집 처마의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솜옷을 입고 있음에 봄이 돌아온 듯하니, 이는 바로 가난하고 병든 자의 아름다운 취미인데, 이 취미가 또한 무궁하오. 나는 내 몸만 사사로이 아낀 탓에 감히 세도(世道)에 대한 걱정을 할 수가 없으니, 이 죄가 또한 크오. 그러나 근심해도 어찌 할 방법은 없고 근심만 끝이 없으니, 어쩌겠소. 존형께서 상소하려던 일은 생각건대 지금은 그 계획을 중지했을 것이니, 진실로 기쁘고 축하드리오. 이처럼 바꿀 것이었으면서 어찌 분분하게 1년 동안 한갓 끝없이 원한을 일으키고 비웃음과 꾸짖음을 받으며 위태로움과 화만을 더하였던 것이오. 존형의 일 처리가 엉성하다는 것을 이 일에서 이미 남김없이 징험(徵驗)하였으니, 한스럽고 탄식할 만하오. 이는 단지 이해(利害)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오. 의리는 무궁하고 사람의 소견은 편벽되기 쉬우니 -원문 빠짐- 반드시 정당한 것이 아니오. 산림(山林)에서는 해가 기니, 바라건대 형은 다시 사서(四書)를 취하여 -원문 빠짐- 읽어서 옛날에 배운 것을 익히고 새로운 지식을 얻어 올바른 지식과 견해를 배양(培養)해서 나의 -원문 빠짐- 기르기 바라오.” 하였다. -이 편지는 원문에 빠진 부분이 많아 원집(元集)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주워 모아 기록하였다. ○ 《파산간독》. 이하 같음-

변이중(邊以中)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계함(季涵)은 말년에 덕을 상실하여 평소의 행실을 스스로 훼손하였소. 나는 오래전부터 의당 이러한 일이 있을 줄을 알았으나 너무 늦었으니,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소. 옛사람은 군신 간에 한번 교제하여 뜻이 맞으면 생사를 불문하고 간격이 없었는데 율곡은 이와 같지 못하였으니, 이는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오. 애통하여 눈물만 흘릴 뿐이오.” 하였다. -을유년-

아들 문준(文濬)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군자가 재물을 씀에 있어서는 능히 남에게 베풀어 주더라도 망녕되이 베풀지 아니하여, 의리상 재물을 써야 할 경우에는 쓰고 쓰지 말아야 할 경우에는 망녕되이 쓰지 않아야 하니, 이것이 재물을 쓰는 방도이다. 나는 재물을 씀에 있어 스스로 의리에 근거해서 절도로 삼고자 한다. 그리하여 집에 거처할 때에는 밭을 갈고 농사에 힘써서 식량이 떨어지지 않게 할 뿐, 이 밖에는 한 푼이나 한 치도 더 축재(蓄財)할 뜻이 없으니, 이것을 지금 너에게 알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답하기를, “네가 나아가 벼슬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본사(本司)의 하인들을 사절하여 물건을 조금이라도 받지 말며, 조보(朝報) 같은 것도 받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구봉(龜峯)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손님이 ‘승려가 어느 산에 가서 자고 돌아오지 않는가.[僧到何山宿未回]’라고 한 형의 시구를 읊으니, 나는 이 시가 진세를 깨끗이 초월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하여 한가로운 가운데 때때로 아름다운 시편을 읊어 나의 청광(淸曠)한 기운을 유발하려고 하니, 또한 누추한 제 집의 한가하고 적막한 취미를 한번 읊어 산중에 부쳐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또 편지에 이르기를, “듣건대 담양 사군(潭陽使君)이 한가로이 놀며 하찮은 사무를 직접 다스리지 않는다 하니, 관직을 맡아 마음을 다하는 것은 군자의 대절(大節)입니다. 이에 노형(老兄)께 여쭈어 외인의 말을 전달하게 하니, 이는 비록 비천한 이 몸이 함부로 발설하는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이나 남에게 정성을 다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 사군(使君)이 나를 매우 친하게 대하므로 이에 대략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송강(松江)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별지(別紙)의 내용은 길게 탄식할 만합니다. 이미 대신(大臣)으로 반열(班列)에 끼었다면 어찌 알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오늘은 여러 계책이 모두 거행되어서 장점을 따라 시행하여 국사를 이루도록 하여야 할 터인데, 저 사람의 성질과 역량이 다만 이와 같으니 어쩌겠습니까. 존형의 일을 다시 생각해 보니, 빈청(賓廳)에 대신이 없으면 나가지 않을 수 없고 나가서 큰일을 만나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으나, 그 나머지는 굳이 나갈 것이 없고 나가시더라도 굳이 오랫동안 앉아 있을 것이 없으니, 피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의주(義州)에서 탄핵한 글에 ‘군주의 세력이 고단하고 약하다[主勢孤弱]’는 네 글자를 항상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또 답하기를, “나는 백유항(白惟恒)과 이경진(李景震)이 굶주리고 곤궁하여 거의 죽게 된 상황을 보고는 차마 그냥 둘 수가 없어 받들어 아뢴 것이었는데, 김군(金君)과 이군(李君)이 벼슬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는 곧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후로는 비록 백유항과 이경진 같은 자라 하더라도 감히 청하지 않겠습니다. 경인년에는 노형이 일찍이 한 사람도 간청하여 벼슬을 시킨 적이 없는데도 화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권세를 멀리 피함이 경인년보다 더욱 심한데도 친구가 큰 벼슬에 오르자 도리화(桃李花)가 문에 가득하다면 이 비루한 사람이 두려운 마음을 품는 것은 또한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수안 군수(遂安郡守)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율곡의 부인을 이제 장차 석담(石潭)에 영원히 장례하기 위해 조청(造淸)과 꿀을 얻어 제수를 장만하려 합니다. 나는 집안의 형편에 맞추어 제수를 장만할 것을 권하였으나 고사(孤嗣)가 서자(庶子)로 집안을 이어서 자못 너무 검소하게 될까 염려하니, 이는 또한 인정상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가엾게 여겨 살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우복룡(禹伏龍)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내 삼가 살펴보건대 세상이 혼란하고 전란이 일어나 주현(州縣)의 관원들이 진흙 길에 분주하여 그 노고와 피곤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매양 죄를 지고 물러나 엎드려 있어서 몸으로 직접 조그마한 공이라도 바쳐 여러 대부(大夫)들의 힘을 돕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고 있었는데, 지극히 생각해 주시어 특별히 사람을 보내 위문하고 은혜로이 쌀과 어물을 내려 주시니, 이는 참으로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나는 평소 밭을 가꾸고 자력으로 생활하여 주현의 수령들에게 쌀이나 밀가루 등의 선물을 받지 않고 살아왔는데, 죽을 무렵에 거듭 곤궁한 신세가 되어 주는 것을 받아 굶주림을 모면하는 것을 도리어 다행으로 여기니, 소인(小人)의 넘침을 이제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부끄럽고 감사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무술년 중춘-

성진선(成晉善)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뜻밖에 재앙을 만나 집이 불에 타서 서책과 의복과 양식이 모두 연기를 따라 사라져 온갖 인연이 모두 공허하게 되었으니, 매일 것이 없다고 이를 만합니다. 다만 백발의 늙은이가 아직도 여관방에 머물러 산골짝 가운데에서 방황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소롭습니다.” 하였다. -무술년-

한관(韓瓘)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하문(下問)하신 신주(神主)의 독(櫝)에 관한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례》에는 다만 창문이 두 개인 독이 있어 고(考)와 비(妣)를 함께 한 자리에 모셨는데, 영락(永樂) 연간에 만든 《성리대전(性理大全)》 가례도(家禮圖)에 이르러 주식(主式 신주를 만드는 격식)의 구별이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날의 신주독(神主櫝)인데, 창문이 두 개인 독은 지금 세속에서 장(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례》에 기제(忌祭)에는 한 위(位)만 설치하니, 좌식(坐式)이 또한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좌식을 《성리대전》에 따라 각각 신주 하나를 넣을 만하게 만드는 것이 도리에 무방할 듯하며, 각각 좌식을 설치한다면 장을 만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소학(小學)》은 바로 주자(朱子)가 편찬한 것이므로 주자의 말씀과 행실이 이 가운데에 편입되지 않았으니, 진실로 한스러울 만합니다. 신(臣) 한교(韓嶠)는 일찍이 이 문제를 가지고 스승인 성혼(成渾)에게 질문하여 주자의 말씀과 행실 중에 가장 관련이 있는 것을 뽑아 한 책 -《소학중편(小學重編)》- 을 만들었으니, 이는 모두 격언(格言)과 지론(至論)으로 세교(世敎)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정사(精寫)하도록 명하시어 참고하여 보소서. -《사계집(沙溪集)》의 소(疏)-

우리나라 학자들의 병통은 바로 이치를 연구하지 않고 예법으로 스스로 지키는 것을 힘써서 법도를 철저히 지켜 단지 외면을 제재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직 이것만을 지켜 몸을 잡아 지키는 법칙으로 삼으니, 실리(實理)의 근본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끝내 훌륭한 소견이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성군 호원(成君浩原)에게 말하였더니, 호원은 곧 탄복하였습니다. -《율곡집(栗谷集)》의 서(書)-

옛날 선비 한 사람이 율곡의 덕과 의리를 흠모하여 문하에 가서 배알하였더니, 율곡이 술에 취하여 누워서 예의로 접대하지 않았다. 그 선비가 율곡을 찾아간 것을 깊이 뉘우치고 돌아와 우계에게 말하자, 우계는 말씀하기를, “이 친구가 결코 그럴 리가 없으니, 당일에 혹 성상께서 내온(內醞 궁중에서 빚은 귀중한 술)을 하사한 일이 있었는가?” 하고는 사람을 시켜 탐문하게 하였더니, 과연 그러한 일이 있었다. 이것으로 볼 때, 우계와 율곡은 마음으로 깊이 사귄 벗이라 이를 만하다. -권구(權絿)가 기록한 《명재어록(明齋語錄)》-

윤월정(尹月汀 윤근수(尹根壽))이 이르기를, “내가 우계를 만날 때마다 우계는 항상 나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쉴 것을 권하곤 하였는데, 나는 번번이 돌아갈 만한 농토가 없다고 답하였다. 이에 우계는 말씀하기를 ‘비록 돌아갈 만한 곳이 없더라도 용맹하게 결단하고 돌아간다면 또한 가난한 대로 살아가며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속담에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칠 리야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격언이다.’ 하였다. 나는 부끄러워 사례하였을 뿐인데, 어찌 나이 60이 넘도록 아직도 벼슬을 탐하고 연연해하여 물러가지 못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언제나 이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진다.” 하였다. -《월정만필(月汀漫筆)》-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일찍이 우계를 찾아뵈었더니, 우계는 한음에게 ‘이해시비(利害是非)’ 네 글자를 제시하며 말씀하기를, “천하에는 다만 이 네 가지가 있으니, 요컨대 이해를 버리고 시비를 택하여야만 비로소 군자(君子)가 될 수 있다.” 하였다. 한음은 그 말씀에 깊이 감동하였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세상의 변고에 좌절당하지 않았다. -《택당별집(澤堂別集)》-

사문(斯文) 강찬(姜燦)이 일찍이 나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옛날 우계 선생을 모시고 있었는데, 선생께서 이르시기를 ‘군은 민인백(閔仁伯)을 아는가?’ 하기에, 안다고 대답하였더니, 선생은 말씀하기를 ‘시종 변하지 않을 자는 민생(閔生)일 것이다.’ 하셨다.” 하였다.
내가 갑술년 봄에 책 상자를 지고 우계로 찾아가 공부할 것을 청하였더니, 선생은 병 때문에 사양하였다. 내가 매우 간곡히 요청하자, 선생은 마침내 말씀하기를, “만약 사제 간의 예의를 차린다면 내가 감당할 수 없으나 만약 혹 의심스러운 것을 질문하고 논한다면 자네가 유익하지 않으면 내가 유익할 것이다.” 하였다.
내가 겨우 몇 달을 머물다가 일이 있어 돌아오려 하자, 선생은 가르쳐 주시기를, “사람이 젊었을 때에 학문을 강론하고 도(道)를 찾아서 근본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으로는 처자식의 얽매임에 빠지고 밖으로는 영리(榮利)를 사모함에 동요되어, 장차 의지로 기운을 통솔하지 못해서 능히 스스로 수립하지 못하여 곧 일생을 헛되이 보낼 것이다. 그대는 나이가 이제 23세이니, 지금 만약 힘쓰지 않는다면 나중에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나는 감동하여 이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물러 나왔다. 그리하여 비록 가난 때문에 구차히 벼슬하여 녹을 받고 있으나 한순간도 스승의 가르침을 가슴속에 간직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이제 강 사문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의리를 잊고 세속에서 좋아하는 것을 따를 수 없다. -《태천일기(苔泉日記)》-

우계 성공(成公)이 대대로 파산(坡山)에 살면서 두문불출하고 병을 조리하여 실천이 더욱 독실하였다. 말년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왔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산중으로 돌아가니, 이는 어떤 일을 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 임천(林泉)에 은거하려 한 것이었다.
병자년(1576, 선조9)에 내가 찾아가 방문하였더니, 선생은 세교(世交)로 대우하였다. 내가 학문하는 방법을 물었더니, 선생은 주자(朱子)의 행궁 주차(行宮奏箚)를 보여 주면서 말씀하기를, “이 차자(箚子)는 단지 군주의 법이 될 뿐만 아니라 배우는 자가 마땅히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니, 학문하는 차례가 모두 여기에 들어 있다.” 하였다. 내가 또다시 학문하는 요점을 묻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고요함을 지키는 것이다. 송(宋)나라 때에 두오랑(杜五郞)이라는 자는 30년 동안 문밖을 나가지 아니하였다. 독우(督郵)가 찾아가서 묻자, 그는 뜰 앞의 뽕나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나무를 처음 심었을 때에 내가 바람 쐬기 위하여 한번 나가 배회했을 뿐이다.’ 하니, 독우는 탄식하고 떠나갔다. 이는 비록 노씨(老氏)의 부류이나 한 가지만을 주장하는 공부는 법으로 삼을 만하다.” 하였다. -《서포일록(西浦日錄)》. 이하 같음-

무자년(1588, 선조21) 가을에 내가 우계를 방문하니, 우계가 말씀하기를, “지난번 송강(松江)이 나를 찾아왔으므로 내가 그에게 경계하기를 ‘지나치게 술을 마시면 건강을 해치니, 부디 이전처럼 술을 마시지 마오.’ 하였더니, 송강은 대답하기를 ‘내 이제 술을 끊었소.’ 하였다. 나는 기뻐하여 그에게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 시에 ‘술 맛을 잊으면 한가로운 맛이 깊으니, 만향정 위에 앉아 마음을 본다.[酒味忘來閑味深 晚香亭上坐觀心]’ 했다.” 하였다. 그 후에 내가 송강을 뵙고 우계의 말씀을 전하였더니, 송강은 대답하기를, “내 이제 술을 끊었으니, 호원(浩原)의 말씀이 옳다.” 하였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일찍이 우계 선생을 모시고 밥을 먹을 적에 밥 속의 악미(惡米 앵미)를 골라내었더니, 선생이 그 이유를 물으셨다. 나는 대답하기를, “악(惡)이라고 이름한 것을 싫어하여 어릴 때부터 먹지 않았습니다.” 하니, 선생은 나의 뜻을 가상히 여기셨다. 선생은 후일 자리에 있는 손님에게 말씀하기를, “안 아무개는 나에게 배우는 자가 아니요, 바로 나를 일깨워 주는 자이다. 밥 속의 악미도 오히려 입에 넣지 않으니, 마음속에 숭상하는 바를 이로써 알 수 있다.” 하시니, 그 손님이 탄복하였다. -《우산언행록(牛山言行錄)》. 이하 같음-

우산이 말하기를, “율곡 선생의 일기(日記 《석담일기(石潭日記)》)가 있었는데, 우계 선생이 주묵(朱墨)을 갈아 점을 찍어 놓았는바, 비록 자제와 문생이라도 엿보지 못하게 하였다. 우계 선생은 일찍이 말씀하기를 ‘이 책은 실로 동방에 일찍이 없던 책이니, 율옹(栗翁)의 다른 문자는 비록 전해지지 않더라도 오직 이 책만은 반드시 전해져 후세로 하여금 우리 동방에 이와 같은 인물이 있고 이와 같은 도학(道學)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면 다시 유감이 없을 것이다.’ 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묘년에 내가 문하로부터 하직하고 돌아갈 적에 우계 선생은 《석담일기》 한 질을 나에게 주시며 말씀하기를 ‘근간에 세상일을 보니 오래지 않아 장차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다. 경기 지방은 반드시 외지보다 몇 갑절이나 더 심한 병화(兵禍)를 입을 것이니, 그대는 부디 이 책을 가져다가 후세에 전하기를 도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나는 받아서 돌아와 잘 보관하였다. 을축년에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가 역사를 편찬하는 임무를 맡았으므로 내가 이 책을 보여 주었더니, 사계(沙溪)는 ‘일찍 세상에 내놓는 것은 좋지 않다.’ 하였다.” 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때 창랑(滄浪)이 우계의 명을 받들어 송강을 찾아가 안후(安候)를 여쭈었는데, 곧바로 조정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 후 송강은 유배지에서 시를 지어 창랑에게 사례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막막한 북쪽 하늘 눈 내리는데 / 漠漠胡天雪
쓸쓸한 초나라 나그네 혼이라오 / 蕭蕭楚客魂
노년에 크게 낭패하니 / 殘年大狼狽
그대의 말 따르지 않은 것 후회스럽네 / 悔不用君言
하였다. -《창랑행장(滄浪行狀)》-

선생은 일찍이 송강에게 이르기를, “내 어찌 공(公)이 하루아침에 일을 처리함이 도리어 심공(沈公)만 못할 줄을 알았겠습니까. 내 이제야 비로소 장석지(張釋之)를 가벼이 의논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때 정승(政丞) 심수경(沈守慶)이 대신 위관(委官)이 되어 자못 논쟁을 하고 굽히지 않았으므로 선생이 심 정승을 훌륭하게 여겨 이로써 송강을 타이르신 것이었습니다. -창랑여월정서(滄浪與月汀書)-

송강이 옥사를 다스릴 적에 항상 술기운이 있어 관을 삐딱하게 썼으며, 말소리가 빠르고 사나웠다. 추포(秋浦)가 국청(鞫廳)으로부터 우계 선생을 찾아와 아뢰기를, “위관(委官)이 항상 술에 취하여 예의를 잃어서 사람들의 말을 야기하니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다. 우계는 즉시 작은 종이에 글을 써서 송강을 부르니, 송강이 달려왔다. 선생은 말씀하기를, “이 친구의 말에 의하면 형이 실수가 많다 하니, 어찌 술을 절제하지 않는가.” 하니, 송강은 즉시 자리를 피하며 사과하였다. -추포연보(秋浦年譜)-

경인년(1590, 선조23) 봄에 최삼봉(崔三峯)에 대한 말이 매우 시끄러웠다. 우계 선생은 문인인 황신(黃愼)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최영경(崔永慶)의 사람됨을 아는가?” 하였다. 황신이 대답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더니, 선생은 말씀하기를, “최영경이 집 안에 거처할 적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였으며 또 기절(氣節)이 있으니, 비록 병통이 많이 있으나 그의 장점은 숭상할 만하다. 근래에 근거 없는 말이 떠도는데 지극히 이치에 닿지 않으니, 혹 이런 말을 발설하는 자가 있거든 절대로 부화뇌동하지 말라.” 하였다. 그 후 과연 완석(完席)에서 그 얘기를 하는 자가 있자 황신은 “성명(聖明)한 세상에서 근거 없는 말로 사람을 죄주어서는 안 된다.” 하니, 사간(司諫) 유근(柳根)이 그 말이 옳다.” 하여 이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추포집(秋浦集)》-

우계가 일찍이 나에게 말씀하기를, “곽의직(郭宜直) -이름이 희온(希溫)이니 청송(聽松)에게 수업하였다.- 은 사람됨이 선량하고 문리(文理)가 통달하여 해석하기 어려운 고문(古文)을 한 번 보면 즉시 알았다. 우리들은 그가 원대하게 성취할 것이라고 기약하였는데, 불행히 병으로 학문을 그만두니 매우 애석하다.” 하였다. -《서포일록(西浦日錄)》 ○ 곽의직이 일찍이 파산(坡山) 꼭대기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우계 선생이 그의 시(詩)에 화답하였다.

안습지(安習之)가 말하기를, “남명(南冥) 선생의 문인인 하천주(河天澍)는 성품이 강하고 굳세며 순박하고 심중(深重)하여 기질이 매우 고명하므로 남명이 평소에 크게 기대하고 인정하였는데, 지금 중병을 앓고 있는데도 매우 가난하여 치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는 그를 사모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고 또 병에 걸린 것을 한탄하였다. -일기(日記) 초본(草本)-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이 우계를 뵙고 묻기를,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총계당(叢桂堂) -지승(之升)- 의 시를 이와 같이 칭찬하십니까?” 하니, 우계 선생은 말씀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다만 정공(鄭公)의 시만 알고 그의 학술의 정미함과 역량의 웅대함을 알지 못하니, 하늘이 만약 그의 수명을 연장해 주었다면 문장과 덕업의 성취됨을 어찌 측량할 수 있겠는가. 비록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왕경략(王景略)에게 비하더라도 많이 뒤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나는 우계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총계당의 인품을 알았다. -《현곡집(玄谷集)》-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시를 잘하기로 세상에 유명하였다. 계미년에 성우계가 이조 참판으로 있을 때에 그와 말해 보고는 크게 장려하고 감탄하여 탈속(脫俗)한 운치가 있다고 말씀하였다. 우계는 그가 훌륭한 재주를 간직한 채 세상에 묻혀 있음을 아깝게 여겨 마침내 이끌어 영록(瀛錄)에 천거하였는데, 얼마 안 있다가 병으로 별세하니 애석하다. -《제호시화(霽湖詩話)》-

조중봉(趙重峯)이 파주 교수(坡州敎授)가 되어 항상 우계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주역(周易)》의 의심스러운 뜻을 질문하니, 우계 선생은 존경할 만한 친구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벼슬이 바뀌어 하직하고 떠나갔다. -《중봉집》-

정해년(1587, 선조20) 2월 19일에 조여식(趙汝式 조헌(趙憲))의 아들인 완도(完堵)가 부친의 편지를 받들고 왔다. 내가 그 부친의 근황을 세세히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옥천(沃川) 북평(北坪)의 깊은 산속으로 7, 8리 들어간 곳에 들어가 초가집 몇 칸을 짓고는 계모(繼母)를 받들고 살며 몸소 쟁기 자루를 잡고 산전(山田)을 개간하였는데, 채 100묘(畝)가 못 됩니다.” 하였다. 완도는 스스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었다고 말하였는데, 문리가 또한 넉넉하니 대견스러웠다. -일기(日記)-

신만퇴(申晚退 신응구(申應榘))가 18세에 우계 선생을 뵈오니, 선생이 그의 뜻을 물으셨다. 신응구가 대답하기를,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종사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선생은 크게 칭찬하고 항상 말씀하기를, “이 사람의 충신(忠信)을 이루 다 쓸 수 없다.” 하시면서 원대하게 성취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만퇴유사(晚退遺事)》-

성 문간공(成文簡公)이 가정에 전해 오는 올바른 학문으로 우계에서 교수하여 성취시킨 제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부자(夫子)가 말씀한 ‘문인들이 더욱 친하게 지낸다’는 분과 같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오직 고령(高靈) 신공(申公 신응구)이 가장 선배였다. -《청음집(淸陰集)》의 만퇴갈(晚退碣)-

송강(松江)이 서쪽으로 유배 가던 날 우계가 임진(臨津) 나루에 나와 작별하였는데 창랑공(滄浪公)이 따라왔다. 송강은 우계에게 이르기를, “공론(公論)이 공의 영윤(令胤)이 공보다 낫다고 말한다.” 하니, 우계는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기를,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은 내가 미칠 수 없다.” 하였다. -《창랑행장(滄浪行狀)》-

황추포(黃秋浦)가 우계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선생으로부터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하루는 공이 설죽(雪竹)을 읊으니, 선생은 이 글을 벽 위에 써 붙이고 칭찬하기를, “시 속에 높은 뜻이 있어 원대한 경지에 도달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하였다. 당시에 추포는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일컬어져 성문(成門)의 두 선비라고들 하였다. -추포연보(秋浦年譜)-

오추탄(吳楸灘)이 처음 우계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자, 선생은 그의 지조와 행실을 소중히 여겨 사람들에게 말씀하기를, “오 아무개는 혼란한 나라에서도 살 수 있다.” 하였다. -추탄연보(楸灘年譜)-
또 말씀하기를, “오군(吳君)의 지조와 식견을 쉽게 얻을 수 없다.” 하였다.

풍담(楓潭) 권극중(權克中)이 우계의 서재에 머물면서 배울 것을 청하자, 선생은 그에게 가르치기를, “자네가 과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종사하려 한다면 우선 뜻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 장차 돌아가려 하자, 또다시 가르치기를, “나이가 젊은 선비는 비록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하더라도 분명하게 공부하는 사람이 드무니, 부디 그대는 ‘마음을 진실하게 하고 공부에 각고하라.[眞實心地 刻苦工夫]’는 여덟 자를 가지고 힘쓰라.” 하였다. -《풍담록(楓潭錄)》-

무인년(1578, 선조11) 9월에 영구(英耉) 송인수(宋仁叟)가 찾아오니, 그는 문장을 꽤 잘하였고 학문을 흠모하는 뜻이 있었다. -일기(日記)-

감찰(監察) 윤기삼(尹起三)이 와서 수학하려 하니, 선생은 말씀하기를, “지금 세상에 사표(師表)로는 율곡만 한 분이 없으니, 그대는 어찌 그 문하에 가서 진학하는 방법을 도모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에 윤기삼은 즉시 율곡에게 찾아가 배웠다. -윤공가장(尹公家狀)-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19세에 처음 우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으로 섬기려 하니, 이때 선생은 당화(黨禍)에 연루되어 문도들을 사절하였다. 처음 가서 명함을 바치자, 선생은 답하기를, “나는 질병으로 폐인이 되어서 문을 닫고 일을 살펴보지 않은 지가 오래니, 공은 어찌하여 멀리 찾아왔는가? 비록 서로 만나 보려고 하나 질병 때문에 만나 볼 수가 없다.” 하였다. 안공(安公)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손님을 사절하심을 소자가 알고 있으나 이제 문정(門庭)에 이르렀으니, 스승과 제자의 정분이 이미 정해졌습니다. 비록 베개와 자리 앞에서 뵙더라도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선생은 굳이 사양하였다. 공이 물러가 서원에서 유숙하였다가 다음 날 새벽 두 손을 모으고 문밖에 서서 해가 저물도록 물러가지 않으니, 선생은 그의 정성이 독실함을 기뻐하여 비로소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인하여 머물면서 수업하니, 선생은 그를 매우 소중히 여겨 손수 치당 호씨(致堂胡氏 호인(胡寅))의 구방심설(求放心說)을 써서 주었는데, 공은 평생토록 가슴속에 명심하였다. -《우산언행록》-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8세에 우계 선생에게 나아가 배우니, 선생은 자식처럼 대하였다. 그리하여 항상 말씀하기를, “이 아이가 후일 크게 성취함을 이루 측량할 수 없다.” 하였다. -《동춘당집(同春堂集)》의 이공(李公) 시장(諡狀)-

계미년(1583, 선조16) 8월에 율곡에 가서 권결 유청(權潔幼淸)을 만나 보고 함께 유숙하니, 그는 바로 숙헌(叔獻)의 젊었을 적 친구였다. 이 사람은 효도하고 공경하는 행실이 있고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하며 간략하고 고요하여 선을 좋아하고 올바름을 숭상하니, 유속(流俗)의 선비가 아니었다. 숙헌은 그를 매우 허여하였다. -일기 초본. 이하 같음-

10월에 이중고(李仲高) -영(嶸)- 의 아들 인룡(人龍)은 아홉 살 먹은 아이였는데, 그의 조모가 나를 찾아와 뵙게 하니, 나는 그를 대하고 슬피 탄식하였다. 이 아이는 의젓함이 성인(成人)과 같으니, 반드시 범상한 아이가 아닐 것이다. 용모가 빼어나고 훌륭하니, 하늘이 반드시 그에게 장수를 누리게 하여 그 후손을 번창하게 할 것이다.

병술년(1586, 선조19) 7월에 나주(羅州)의 선비인 양산숙(梁山璹)이 찾아와서 5, 6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나는 서로 말해 보고서 그가 학문에 뜻을 둔 선비인 줄 알았는데 그는 공부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친구 중에 훌륭한 자를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김광운(金光運)은 학문에 대한 의지가 대단하고, 담양(潭陽)의 김언욱(金彦勖)은 학문에 전일하게 정진하는 것이 가장 뛰어나며, 송제민(宋濟民)은 지기(志氣)가 맑고 높은데, 이토정(李土亭 이지함(李之菡))에게 배우려고 서당을 세우고 벗들을 모아 그곳에서 독서한다.” 하였다.

정해년(1587, 선조20) 5월에 신군망(辛君望 신응시(辛應時)) -백록(白麓)- 의 아들인 정자(正字) 신경진(辛慶晉)이 지나는 길에 방문하였는데, 나이는 갑인생이고 자(字)는 용석(用錫)이다. 그는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는 한편 풍채가 순후하니, 참으로 어진 선비이다.

8월에 전(前) 평안 도사(平安都事) 심원하(沈源河)가 멀리 궁벽한 골짝을 찾아왔다. 내가 맞이하여 인사하는 사이에 나이를 물어보니, 경자생으로 나와 동년배였는데, 사람됨이 질박하고 순실하여 꾸밈이 없어서 때에 따라 세력에 붙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이가 많았으나 높은 자리에 오르는 데에 태연하여 스스로 한산직(閑散職)을 분수로 여기니, 참으로 반갑고 소중하게 여길 만한 인물이었다.

무자년(1588, 선조21) 3월에 임전 관보(任錪寬甫)가 찾아왔는데, 사람됨이 매우 삼가고 조심하였으며 말소리가 간곡하였다. 또 들으니, 그는 뜻을 세워 성현의 책을 읽어서 문견이 많고 학문을 사모하는 선사(善士)라고들 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 6월에 별좌(別坐)인 김휘 유회(金輝幼晦)가 찾아오니, 내가 그의 이름을 들은 지가 이미 오래이므로 맞이하여 절하고 구면인 것처럼 반나절 동안 정답게 말을 나누고 작별하였다. 그는 문견이 많고 담론을 잘하니, 세속의 무리가 아니었다.

9월에 전라도 고창(高敞)의 선비인 안지(安祉)가 지나는 길에 방문하였는데, 이 사람은 성품이 순후할 뿐만 아니라 말소리와 위의(威儀)에 자못 조심하고 삼가는 모양이 있었다. 그의 스승과 벗을 물어보니, 같은 군(郡)에 하서(河西) 선생의 문인인 변성온(卞成溫)이라는 자가 살고 있는데 그는 병을 앓아 깊숙하게 은거하면서 고요한 가운데에 책을 보고 있으며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있으므로 그 사람에게 수학한다고 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24) 12월에 변언시(邊彦時)가 찾아왔는데, 그의 아들은 변경윤(邊慶胤)으로 18세에 별시(別試)에 합격하여 재주 있고 준걸스러운 선비라 하였다. 정경우(鄭慶遇) -운룡(雲龍)- 의 아들은 이름이 성일(聖一)인데, 약관(弱冠)의 나이에 학문에 힘쓰고 뜻을 지극하게 하여 인품이 매우 고매하므로 장성(長城)의 후생 중에 빼어난 사람이라 하였다.

성우계 선생이 항상 문인들에게 말씀하기를, “내 이인기(李麟奇)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만나 보지 못했다.” 하였다. 뒤에 선생이 이조 참판으로 부름을 받고 서울에 이르렀다. 문인 중에 이공(李公)과 잘 아는 자가 함께 찾아가 선생을 뵙고자 하였으나 이공은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내가 원하는 바이나 다만 지금은 불가하니, 후일에 마땅히 우계로 찾아가 배알하겠다.” 하였다. 선생은 이 말씀을 듣고 더욱 그를 어질게 여겼다. -《청음집》의 이갈(李碣)-

약봉(藥峯) 서성(徐渻)이 준수하고 의젓하고 엄격하며 책을 좋아하고 박학하니, 우계와 율곡 두 선생이 모두 보고 훌륭한 인물로 여겼다. -《청음집》의 서장(徐狀)-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은 여러 책을 두루 섭렵하고 높은 뜻으로 도를 구하였는데, 임진년에 행재소(行在所)로 달려왔다. 우계 선생은 그와 말씀해 보고 감탄하기를, “우리 도를 이어 갈 사람이 있다.” 하였다. -《사계집(沙溪集)》의 최지(崔誌)-

남곽(南郭) 박동열(朴東說)이 말년에 용만(龍灣)에서 문하에 올랐는데, 선생은 그를 만나 보고 말씀하기를, “이는 말세의 인물이 아니니, 비록 삼공(三公)의 지위에 두더라도 과분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남계집(南溪集)》의 박지(朴誌)-

임진년(1592, 선조25) 11월에 내가 행재소로 달려가니, 응교(應敎) 이유징(李幼澄)이 찾아왔다. 그는 병조(兵曹)의 여러 군사들의 괴롭고 편안함이 균등하지 않음을 말하였으며, 군정(軍政)의 색목(色目)을 모두 암기하고 병조의 연혁(沿革)과 입번(立番)한 군사들의 많고 적음에도 모두 통달하였다.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고 당세의 일에 뜻을 두고 있으니, 참으로 정사를 잘하고 일을 수립할 인재이다. 참으로 소중히 여길 만하고 소중히 여길 만하다. -《임계일기(壬癸日記)》. 이하 같음-

이유청(李幼淸)은 별좌(別坐) 공저(公著)의 아들인데 총명하여 세상의 사무에 통달하니, 또한 인재이다.

지평(持平) 신흠(申欽)이 찾아왔다. 그는 자(字)가 경숙(敬叔)이고 병인생인데 영걸스러운 의표가 대견스러웠다.

신상촌(申象村)의 편지에 이르기를, “이틀 동안 선생의 말씀을 들었는데 가르쳐 주시는 데에 있어 거듭 간곡하게 하시니, 스스로 돌아봄에 아무 지식이 없어서 비록 깨닫지 못하였으나 말씀하여 북돋워 주고 유익하게 해 주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지라 감격하여 뼈에 새겼습니다. 어떻게 보답하겠습니까. 비루하고 용렬한 이 몸을 버리지 않고 시종 권면해 주시니, 감히 경건한 마음으로 종사하여 편달해 주신 지극한 뜻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파산간독》-

계사년(1593, 선조26) 5월에 명령을 받들고 정릉(靖陵)을 봉심(奉審)하느라 삼등(三登)에 이르러 태수(太守) 이계(李)를 만나 보니, 백발에 몸이 바짝 야위었고 풍도(風度)가 드높아 대장부의 기상이 있었다. 내 일찍이 이공(李公)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을 보고서 그가 문장을 잘 엮는 줄을 알았는데, 이번 걸음에 그를 만나서 자못 공경을 다하고 작별하였다.

수안(遂安)에 이르니 부안도정(扶安都正)이 찾아왔다. 그는 나이가 77세였는데, 또한 정릉을 봉심하기 위하여 왔다. 다음 날 또 방문하여 나에게 심(心)ㆍ성(性)ㆍ정(情)을 물었다. 종실(宗室)의 귀척(貴戚)이 연로한데도 문학을 담론함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소중히 여길 만하다.

해주(海州)에 이르니 상주(喪主)인 김류(金瑬)가 본주(本州)를 지나가므로 내가 가서 조문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용모와 말소리를 들어 보니 큰 그릇인 듯하여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잠시 대하고 갈 길이 바빠 떠나니, 매우 아쉬웠다.

내 일찍이 이해장 거원(李海長巨源)이 우봉(牛峯)에 사는데 효성이 지극하고 순수하고 독실하여 어버이를 섬기기를 옛사람과 같이 한다는 말을 듣고는 항상 그를 흠모하였는데, 어제 사람을 보내어 물었더니 찾아와 만나 보았다. 얼굴을 대하고 말을 나누어 보았는데 인물이 순박하고 예스러워 꾸밈이 없으니, 충직하고 진실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갑오년(1594, 선조27) 1월에 김선경(金善慶) -흥우(興宇)- 이 그의 아우 흥제(興悌) -정축생- 와 그의 아들 진윤(震胤) -경진생- 을 데리고 찾아왔다. 또 흥제와 진윤의 시(詩)를 보여 주었는데 내용이 모두 좋았고, 진윤은 15세에 문리가 크게 통달하고 시의 내용이 청원(淸遠)하여 매우 기이한 지취(旨趣)가 있으니, 기이한 동자라고 이를 만하였다. -살펴보건대, 진윤은 곧 잠곡(潛谷) 김육(金堉)이다.

9월에 양대림(梁大霖)의 아들 양황(梁榥)이 찾아왔다. 그의 시문(詩文)과 부(賦)ㆍ표(表)를 보니, 참으로 큰 솜씨였다. 기국(氣局)이 범상치 않고 문장과 학술로 스스로 힘쓰니, 보통 사람이 아니었는바, 기뻐할 만하였다.

10월에 배천(白川)의 사촌(沙村)에 사는 진사(進士) 신경효 사술(辛慶孝士述)이 자신의 글을 가지고 와서 만나 보기를 청했으므로 그와 만나 말을 나누어 보니, 용모가 깨끗하고 말이 간략하여 선비의 풍도가 있었다. 그의 글을 보니, 내용과 뜻이 자못 아름답고 문구 또한 고아하여 궁벽한 시골의 속되고 낮은 무리가 아닌 듯하였다. 자못 그를 사랑하여 여기에 쓰는 바이다.

미록촌(麋鹿村)에 사는 김섬(金暹)이 지나는 길에 방문하였는데, 용모가 매우 아름다워 그의 얼굴만을 보고 그가 좋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일찍이 들으니, 이 사람은 한 지방의 선사(善士)로서 사람들이 모두 존경한다고 하였다.

인물을 논함은 비록 답문한 것은 아니나 또한 수작(酬酌)의 나머지이고 답문의 시작이므로 함께 붙이는 바이다.


[주D-001]청음집(淸陰集)의 중봉비명(重峯碑銘) : 이 글이 《청음집》 권28에는 고(故) 의병장(義兵將) 증(贈) 이조 판서(吏曹判書)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 신도비명(神道碑銘)으로 실려 있다.
[주D-002]여성(礪城) :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어떤 분을 지칭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하지 않다. 아래에 율곡과 우계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송익필(宋翼弼)을 은근히 가리킨 것으로 추측되나 확실한 근거가 없다.
[주D-003]이청강(李淸江)에게 …… 이르기를 : 원문의 이 부분 두주(頭註)에는 ‘이하는 새로 증보한 것이다[以下新增]’라는 내용이 있다.
[주D-004]길패(吉貝)와 장요(長腰) : 길패는 길(吉) 자 모양의 수가 새겨진 비단이며, 장요는 쌀의 이름이다.
[주D-005]마른 …… 따위 :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젖은 고기는 이로 끊고 마른 고기는 이로 끊지 않는다.[濡肉齒決 乾肉不齒決]”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소소한 예를 따지는 것을 이른다.
[주D-006]장초(萇楚)를 부러워한다는 말 : 장초는 일명 양도(羊桃)로, 복숭아나무와 비슷하나 열매는 쓴맛이 강하다. 《시경》 회풍(檜風) 습유장초(隰有萇楚)에 “습지에 장초가 있으니 그 가지가 야들야들하다. 잎이 윤택하니 너의 지각이 없음을 부러워한다.[隰有萇楚 猗儺其枝 夭之沃沃 樂子之無知]” 하였는데, 이는 정사가 번거롭고 부역이 무거워 사람들이 그 고통을 견뎌 내지 못하므로 지각이 없어 걱정이 없는 초목만도 못함을 한탄한 것이라 한다. 원문에 장초(萇草)로 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았다.
[주D-007]도리화(桃李花)가 문에 가득하다면 : 도리화는 복숭아꽃과 오얏꽃으로, 자신이 가르친 제자나 이끌어 준 후배를 비유하는바, 곧 이들이 벼슬길에 많이 발탁됨을 이른다.
[주D-008]고사(孤嗣) : 큰 상주로, 율곡의 아들인 이경림(李景臨)을 가리킨다.
[주D-009]소인(小人)의 넘침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진실로 궁한 것이니, 소인은 궁하면 넘친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10]완석(完席) : 완의석(完議席)의 준말로 원의석(圓議席)이라고도 하는바, 사헌부 관원들이 좌기(坐起)할 때에 죽 둘러앉아서 의논하는 자리를 이른다.
[주D-011]왕경략(王景略) : 경략은 왕맹(王猛)의 자이다.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동진(東晉) 때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을 도와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명재상이 되었다.
[주D-012]영록(瀛錄) : 영선(瀛選)과 같은 말로, 홍문관의 관원에 선발된 것을 이른다.
[주D-013]부자(夫子)가 …… 분 : 부자는 공자(孔子)를 가리키며, 문인들이 더욱 친하게 지낸다는 분이란 안회(顔回)를 가리킨다. 공자는 일찍이 네 명의 훌륭한 제자가 있음을 밝히고 안회를 칭찬하여 “내 안회를 얻음으로부터 문인들이 더욱 친하게 지낸다.”라고 말씀하였다. 네 명의 제자란 안회와 자공(子貢), 자장(子張), 자로(子路)를 가리킨다.《世說新語 品藻》 《尙書大傳》
[주D-014]청음집(淸陰集)의 만퇴갈(晚退碣) : 이 글이 《청음집》 권32에는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신공(申公) 묘갈명(墓碣銘)으로 실려 있다.
[주D-015]청음집의 이갈(李碣) : 이 글이 《청음집》 권30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송계 이공(松溪李公) 묘갈명(墓碣銘)으로 실려 있다.
[주D-016]청음집의 서장(徐狀) : 이 글이 《청음집》 권37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공(徐公) 행장(行狀)으로 실려 있다.
[주D-017]사계집(沙溪集)의 최지(崔誌) : 이 글이 《사계유고(沙溪遺稿)》 권6에는 석계처사(石溪處士) 최군(崔君) 묘갈명(墓碣銘)으로 실려 있다.
[주D-018]남계집(南溪集)의 박지(朴誌) : 이 글이 《남계집》 권72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증(贈) 이조 참판(吏曹參判) 박공(朴公) 비음기(碑陰記)로 실려 있다.

 

우계연보보유 제2권
잡록(雜錄) 상 선배(先輩)의 문자 중에 비록 위의 세 조항에 관계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선생의 사우(師友) 간의 교제(交際)와 언행(言行)과 출처(出處)에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별도로 뽑아 잡록을 만들었다.


율곡(栗谷)이 장차 대사간(大司諫)으로 부르는 명에 달려가려 할 적에 눈이 내리는 가운데 소를 타고 우계(牛溪)를 방문하여 작별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해는 저무는데 백설이 산에 가득하니 / 歲云暮矣雪滿山
들 오솔길 교목 사이로 가늘게 나뉘어져 있네 / 野逕細分喬林間
소를 탄 채 어깨 움츠리고 어느 곳으로 가는가 / 騎牛聳肩向何之
나는 우계 가의 친구를 그리워한다오 / 我懷美人牛溪灣
사립문 저녁에 두드리며 청순(淸純)한 분에게 읍하니 / 柴扉晚叩揖淸癯
작은 방에 누더기 걸치고 포단에 의지해 있네 / 小室擁褐依蒲團
고요한 긴긴밤 잠 못 이루고 앉아 있으니 / 寥寥永夜坐無寐
반벽에 붉은 등불 그림자 가물거리노라 / 半壁淸熒燈影殘
인하여 반생에 이별이 많음 슬퍼하고 / 因悲半生別離足
다시 천산에 행로가 어려움 생각하노라 / 更念千山行路難
담소한 뒤에 뒤척이다가 새벽닭이 우니 / 談餘展轉曉雞鳴
고개 들어 바라보매 창문에는 차가운 달빛 가득하네 / 擧目滿窓霜月寒
하였다. -《율곡집(栗谷集)》-

임진년(1592, 선조25) 10월 24일에 나는 동궁(東宮)을 뵙고 물러 나와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서생이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 날 언제인가 / 書生報國知何日
난세에 표류하니 눈물이 수건을 적시노라 / 亂世飄零淚濕巾
빙설이 하늘에 가득한데 돌아갈 길 머니 / 氷雪滿天歸路遠
몸 굽혀 수고로움 다하며 이내 몸 잊는다오 / 鞠躬盡瘁且忘身
하였다. -《임계일기(壬癸日記)》. 이하 같음-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7)에 내 일찍이 은산현(殷山縣)을 지나갔었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 10월에 이르러 성천(成川)에서 행조(行朝)로 달려갈 적에 다시 이 고을을 지나게 되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사십일 년이 참으로 한바탕 꿈 같으니 / 四十一年眞一夢
쇠잔한 목숨 표류하여 지금 다시 이곳에 이르렀네 / 殘生飄泊又如今
태평한 어느 날 파산 아래에 누워 / 太平何日坡山下
시냇물 소리 들으며 깊은 밤에 이를는지 / 臥聽溪聲到夜深
하였다.

석담(石潭)에 있을 때에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외로운 소나무 스스로 세한과 같기를 기약하니 / 孤松自與歲寒期
드높은 풍미 어찌 봄철에 우로가 내릴 때를 논할까 / 風味寧論雨露時
우뚝이 서서 여러 초목과 다름 혐의치 않으니 / 獨立不嫌違衆卉
동산에 가득한 도리화들 서로 시기하지 마오 / 滿園桃李莫相疑
하였다.

석담에서 어떤 사람의 시에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지인의 마음 본래 하늘과 같은데 / 至人心跡本同天
작은 지혜 구구하게 한쪽에 집착하네 / 小智區區滯一邊
높은 벼슬에 질곡당한다고 부질없이 말하니 / 謾說軒裳爲桎梏
성시가 바로 임천임을 그 누가 알까 / 誰知城市卽林泉
배는 급한 물살 만나면 노를 돌리기 어렵고 / 舟逢急水難回棹
말은 먼 길을 달리려면 채찍을 맞아야 하네 / 馬在長塗合受鞭
정성과 공경 참으로 용이하게 할 수 없으니 / 誠敬固非容易做
그대의 아름다운 시구 외며 그러한가 묻노라 / 誦君佳句問其然
하였다. -선생이 친필로 원운(元韻)을 쓰고 그 아래에 이 율시(律詩)를 썼는데, 마지막 구(句)에 말한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히 화답한 시이다.

을미년(1595, 선조28)에 한관(韓瓘)에게 답한 편지의 끝에 손수 절구(絶句) 한 수를 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상제는 낳아주기를 좋아하여 만민을 기르니 / 上帝好生育萬民
우리나라에 태평한 봄이 돌아왔단 말 들었노라 / 新聞東國太平春
봄바람에 반갑게 향리로 돌아와 / 春風好與還鄕里
밭 갈고 우물 파며 장차 풍년을 즐기는 사람 되리라 / 耕鑿將爲樂歲人
하였다. -이해에 선생이 연안(延安)에서 파산(坡山)으로 돌아왔다.

성우계(成牛溪)가 사암(思菴 박순(朴淳))을 위해 지은 만시(挽詩)에 이르기를,
세상 밖 구름 낀 산 깊고 또 깊으니 / 世外雲山深復深
시냇가 초가집 이미 찾기 어렵네 / 溪邊草屋已難尋
배견와 위에 삼경의 달빛 / 拜鵑窩上三更月
응당 선생의 일편단심 비추리라 / 應照先生一片心
하였으니, 이는 사암을 잘 애도했다고 이를 만하다. -《상촌집(象村集)》 ○ 살펴보건대, 허균(許筠) 또한 이 시를 평하여 당(唐)나라 시인(詩人)의 격조(格調)가 있다고 말하였으나, 허균의 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므로 기록하지 않는다.

성우계가 어떤 사람에게 준 시에 이르기를,
한 지역 물 맑고 구름 낀 가운데에 밭 갈고 우물 파니 / 一區耕鑿水雲中
만사에 무심한 백발의 늙은이라오 / 萬事無心白髮翁
산새들 지저귀는 소리에 잠 깨어 / 睡起數聲山鳥語
청려장 짚고 산보하며 꽃들 구경하네 / 杖藜閑步遶花叢
하였는데, 시인의 체제(體制)와 격조가 매우 높으니, 이는 이른바 ‘글을 통해 도(道)를 깨달았다’는 것일 것이다. -《시평(詩評)》 ○ 살펴보건대, ‘글을 통해 도를 깨달았다’는 것은 뒤집어 말한 것으로, ‘도를 통해 시(詩)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만사(挽詞)에 이르기를,
급히 용만으로 달려가던 날에 / 急赴龍灣日
치안을 위하여 몇 번이나 글을 올렸던가 / 治安幾抗章
소금과 매실처럼 처음에는 합하였는데 / 鹽梅初有契
패금에 끝내 손상당하였다오 / 貝錦竟成傷

다만 용납되기 어려웠으나 / 只是難容與
어찌 마음에 물러가 은둔할 것을 결단하였겠는가 / 何心決退藏
이제 모두 영원히 끝났으니 / 于今長已矣
세도가 자연 황량하여라 / 世道自荒涼
창생들 참으로 복이 없으니 / 蒼生也無福
대낮에도 산문(山門)이 닫혀 있네 / 白日閉山扃
시례는 가학을 전수받았고 / 詩禮傳家學
풍류는 참으로 모범이 되었다네 / 風流極典刑
간당들의 공격으로 이름이 빛났었고 / 光華奸黨籍
소미성 나타났다 다시 숨었네 / 隱見少微星
원숭이와 학 이제 누구를 주인 삼을까 / 猿鶴今誰主
빈 산속에 깊이 슬퍼하노라 / 深悲虛翠屛
하였다. -《오음집(梧陰集)》-

우계를 아득히 생각하여 두 수(首)의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운림에 한가로이 사시는 분 볼 수 없으니 / 雲林不見考槃人
안개 속의 달 적막한 물가에 아득하네 / 煙月蒼蒼寂寞濱
무숙의 뜰 앞에 풀 묵어 있고 / 茂叔庭前惟沒草
자릉의 대 위에 누가 낚싯줄 드리우나 / 子陵臺上孰垂綸
순후한 풍도는 이미 높은 종적을 따라 떠나갔고 / 淳風已逐高蹤去
야박한 풍속은 다시 난세를 따라 새롭구나 / 薄俗還隨亂世新
구정과 일사 그 누가 우러르고 사모하는가 / 九鼎一絲誰景仰
길이 늙은이의 눈물 흘러 수건 적시게 하네 / 長令老淚漫沾巾
하였고, 또,
해내에 평생 동안 친한 벗 / 海內平生友
덕스러운 음성 구천(九泉)에 막혔네 / 泉臺阻德音
우계에 깨끗한 달 아름답고 / 牛溪淸月好
파산에 저녁 구름 깊어라 / 坡岫暮雲深
지난날의 좋은 말씀 이젠 길이 들을 수 없고 / 永訣他時語
오늘날의 이 마음 막다른 길목에 서 있는 듯하네 / 窮途此日心
산림이 다시금 적막하니 / 山林還寂寞
일을 회상함에 홀로 옷깃 적시노라 / 撫事獨沾襟
하였다. -《동은집(峒隱集)》 ○ 선생이 산월(山月)의 시(詩)를 읊어 동로(峒老)와 작별하였다.

성우계를 추억하여 지은 시에 이르기를,
신야가 있은 지 천년의 뒤에 / 莘野千年後
산림의 처사(處士) 몇 사람이나 있었던가 / 山林有幾人
봉황의 새끼는 원래 오색을 갖추고 / 鳳雛元五色
형산의 박옥은 작은 하자도 없다오 / 荊璞絶纖塵

순주는 사람을 만나면 취하게 하고 / 醇酒逢人醉
지란이 있는 곳은 절로 향기롭네 / 芝蘭在處薰
파산은 곡구와 같고 / 坡山猶谷口
우포는 바로 하수의 근원이라오 / 牛浦卽河源

문도(門徒)는 삼천 명이나 되고 / 徒弟三千盛
명성은 일대에 높았도다 / 聲名一代尊
국가의 위태로운 일 추념하니 / 追思邦杌隉
말하려 함에 코가 시큰해지누나 / 欲說鼻酸辛
세상의 의논은 사견을 따르는데 / 世議循私見
공정한 마음으로 윤리(倫理)를 바로잡았네 / 公心急正倫
조정에 간쟁하여 큰 노여움 돌리고 / 廷爭回盛怒
정직한 도로 어진 군주 섬겼다오 / 直道事仁君
밝은 태양에 정성이 통하고 / 白日精誠貫
깨끗한 가을처럼 기상이 새로워라 / 淸秋氣像新
한마디 말로 사직을 붙들고 / 一言扶社稷
필마로 산중의 집에 돌아왔네 / 匹馬返山門
문 밖에는 솔바람 세차게 불어오고 / 戶外松風急
뜰 앞에는 들 사슴들 뛰노누나 / 階前野鹿馴
한가로이 지내며 세월을 보내니 / 優游聊卒歲
적막하게 봄을 몇번 보냈는가 / 寂寞幾經春
훼방과 칭찬은 타년의 일인데 / 毁譽他年了
부침(浮沈)하는 말로는 그대로 이어지네 / 升沈末路因
푸른 꼴 가지고 배우러 가려는 뜻 저버렸고 / 靑篘孤負笈
백수에 서글피 흰 구름 바라보노라 / 白首悵停雲
미천한 이 몸 한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우니 / 並世慚微末
평소에 의논을 나누지 못했다네 / 平生阻惠論
이제 유명을 달리하니 / 幽明今已矣
오직 뼈에 사무치도록 은혜를 생각하노라 / 鏤骨但含恩
하였다. -《사류재집(四留齋集)》 ○ 이정암(李廷馣)이 일본(日本)과 화의(和議)할 것을 요청하였다가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탄핵을 받아 장차 중한 형벌을 입게 되었는데, 선생이 구원하였기 때문에 시와 제문에 언급한 것이다.

파주(坡州)를 지나면서 선생을 그리워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몸을 굽혀 나오니 사람들 다투어 비웃었고 / 跡屈人爭笑
의리가 높으니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 義高誰得知
인심은 저 지경에 들어가고 / 人心入于彼
천도는 여기에 이르렀네 / 天道至於斯
계당의 길 적막하고 / 寂寞溪堂路
산월의 시 처량해라 / 凄涼山月詩
가을바람에 눈물 줄줄 흘리니 / 秋風滿眼淚
비단 나의 사사로운 정 때문이 아니라오 / 不獨爲吾私
하였다. -《석주집(石洲集)》-

만취(晚翠) 오억령(吳億齡) 형제의 선부인(先夫人)은 우계 선생의 재종매(再從妹)였다. 선부인이 언문 간찰(諺文簡札)을 선생에게 올려 파산에 가르침을 청하자, 선생은 이들을 한집안의 자제로 대하여 창랑(滄浪 성문준(成文濬))과 똑같이 여기고 간격이 없었으므로, 만취 형제 또한 독실한 마음으로 선생을 사모하였다.
혼조(昏朝 광해군) 때에 만취가 작은 배를 타고 시냇가 옛집으로 창랑을 방문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초가집 옛터 남았으나 / 白屋遺基在
청산은 옛 자취 아니로세 / 靑山舊迹非
작은 배로 눈물 뿌리며 방문하니 / 扁舟揮淚過
강 비는 저녁에 부슬부슬 내리누나 / 江雨暮霏霏
하였으니, 무한히 서글퍼 하고 사모하는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신명규(申命圭)의 기록 ○ 《파문록(坡門錄)》에 만취 형제를 기록했었는데,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가 기록한 글에는 처음에는 썼다가 마침내 삭제하였으니, 뜻이 있는 듯하므로 이것을 그대로 따랐다.

명재(明齋 윤증(尹拯))가 파산서원(坡山書院)에서 자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적벽에 배 띄워 화석정 바라보고 / 浮舟赤壁望花亭
우포에 돌아오니 산 달 밝게 비추네 / 牛浦歸來山月晴
옥 같은 빛과 금 같은 소리 어제 일과 같으니 / 玉色金聲如昨日
진세의 혼 아직도 한때나마 깨어 있네 / 塵魂猶得片時醒
하였다. 또 서실(書室)에서 자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계산에 오대를 내려온 가업이요 / 溪山五世業
백년 동안 거문고 타고 글 읽은 고향이라오 / 絃誦百年鄕
옛집 아직도 훼손됨이 없으니 / 舊屋猶無恙
어진 손자 유업을 잘 계승하네 / 賢孫乃肯堂
시서는 서가에 가득하고 / 詩書瞻滿架
관동들 엄연히 행렬을 이루었네 / 童冠儼成行
올바른 학문 이제 힘써야 하니 / 正學今當勉
안정의 마지막 장 음미하노라 / 顔亭味卒章
하였다. -《명재집(明齋集)》-

계사년(1593, 선조26) 5월 20일에 선생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봉심(奉審)하기 위하여 오신다는 말을 듣고 시냇가에 가서 기다렸다가 뵈었는데, 선생의 얼굴빛은 전과 같았으나 수염과 귀밑머리는 휠씬 더 센 모습이셨다.
강진승 자소(姜晉昇子昭)가 선생을 모시고 왔다. 이날 선생은 신주(神主)를 꺼내어 서실(書室)에 봉안하고 제사하였다. 또 병란(兵亂)에 죽은 친구 등 서로 아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동안 타향에 표류하느라 아직까지 신위(神位)를 만들어 곡하지 못했으나 이제 옛집으로 돌아왔으니 그들을 위하여 곡할 만하다 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분의(分義)의 경중과 교제한 정의(情誼)의 친소에 따라 신위의 고하(高下)를 정하고 각기 지방(紙牓)을 쓴 다음 간략히 술과 떡을 장만하여 올리고 곡하였으니, 첫 번째 자리는 바로 나랏일을 위해 죽어 충절을 다한 조여식(趙汝式 조헌(趙憲))이었다. -남궁명(南宮蓂)의 일기(日記)-

계사년 12월에 내가 석담(石潭)에 머물고 있었는데, 윤 해평(尹海平 윤근수(尹根壽))이 요동(遼東)에 들어가면서 해주(海州)를 지나다가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는데 뜻이 간곡하였으며, 재령(載寧)에 도착하여 또다시 편지를 보내오고 목면(木綿) 몇 필과 종이 몇 묶음을 보내왔다.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여 매우 중요한 사명(使命)을 받았고, 또 자신에 대한 걱정이 많아 친구에게까지 마음을 쓸 여가가 없었을 듯한데도 성의가 이와 같으니, 그의 지극한 마음에 감탄하는 바이다. -《임계일기(壬癸日記)》. 이하 같음-

문학(文學) 유응문(柳應文)이 멀리서 찾아와 방문하였다. 유군은 마음이 바르고 한결같으며 어지럽지 않아 말이 간략하고 온당하였으며, 세속의 부화(浮華)함을 숭상하지 않았다. 또 내가 늙고 병든 몸으로 타향에 나그네 신세가 되어 산골짝에 외로이 사는 것을 염려하여 매우 지극히 돌보아 주었으니, 참으로 감사하다.

갑오년(1594, 선조27) 9월에 용산(龍山)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니, 승지(承旨) 오대년(吳大年)과 세마(洗馬) 오백령(吳百齡)이 찾아와 작별하였다. 오 승지는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10리가 넘는 거리를 두 번이나 찾아왔으니, 참으로 지극한 마음씨이다.

을미년(1595, 선조28) 1월 18일에 오음(梧陰) 윤 정승이 교동(喬桐)에서 각산(角山)까지 배를 타고 온 다음 찾아와서 밤새도록 담소하고, 다음 날 아침 또다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작별할 때에 돌아보고 그리워하는 정이 지극하였다. 상사(上舍) 윤훤(尹暄)이 모시고 와서 조용히 문장을 논하고 떠나갔다.

난리 중에 가지고 간 서책은 《청송선생사실(聽松先生事實)》, 《청송당시권(聽松堂詩卷)》, 《청송당서법(聽松堂書法)》, 《선우첩(鮮于帖)》, 《설제여한도(雪霽餘寒圖)》, 《왕형공절구첩(王荊公絶句帖)》, 《두율오언첩(杜律五言帖)》 -모두 청송이 손수 쓴 것이다.- 및 《율곡야사(栗谷野史)》 네 책뿐이었다. -《율곡야사》는 몇 본(本)이 있었는데, 하나는 직접 가지고 갔고, 하나는 파산(坡山)의 땅속에 묻었고, 하나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에게 주었다. ○ 《두율오언백수(杜律五言百首)》는 바로 조백운(曺白雲)의 집안에서 맡긴 것이니, 속집(續集)의 제첩문(題帖文)에 이 내용이 보인다.

우계서실(牛溪書室)은 바로 우리 묵암(默庵) 선생이 도(道)를 강론하시던 곳이다. 선생이 30세가 되기 이전부터 선생의 훌륭한 풍모(風貌)를 들은 자들이 이미 배울 만한 스승임을 알고는 원근을 막론하고 앞 다투어 배우러 찾아왔는데, 선생은 기꺼이 이들을 가르치시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거주하시는 집 동쪽 귀퉁이에 서실을 지어 배우러 오는 자들을 대하니, 방이 겨우 세 칸이었다. 서실이 완성되자 ‘우계서실’이라 편액(扁額)하고, 또 손수 서실의 규칙 22개 조항을 만들어 서실의 의칙(儀則)으로 삼았으니, 지금 문집 가운데에 보이는 것이 이것이다.
서실을 지을 적에 선생은 직접 규모를 만드셨고, 이곳에서 시서(詩書)를 익히고 예악(禮樂)을 강론하여 제자들을 가르친 지가 지금 24년이 되었다. 임진왜란 뒤에 또 병자호란을 겪었으나 훼손됨이 없이 우뚝이 솟아 있어서 신명(神明)이 수호하여 지키는 듯하니, 이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명재집(明齋集)》의 서실중수기(書室重修記)-

명재(明齋)가 남계(南溪)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우계 선생에 대한 기록 중 책을 보신 내용과 비단옷에 관한 말씀은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니, 마땅히 삭제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남계가 답하기를, “두 조항은 보존해도 무방할 듯한데, 만약 잘못 전해진 것으로 의심된다면 삭제하는 것도 좋겠다.” 하였다. -《남계집(南溪集)》-
《율곡별집(栗谷別集)》을 살펴보면, “율곡이 선생에게 묻기를 ‘형이 책을 보실 때에 몇 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7, 8행(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나 역시 10여 행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였다. 또 율곡이 접반사(接伴使)가 되어서 의주(義州)를 향해 서쪽으로 갈 때에 선생을 방문하자, 선생이 율곡에게 이르기를 ‘형의 비단옷이 어쩌면 이리도 화려합니까?’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감히 사치하려는 것이 아니라, 명나라 사신을 예우함에 있어 이처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두 분이 밤에 함께 잠을 잤는데, 선생이 율곡의 이불도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는 농담하기를 ‘이것도 명나라 사신을 예우하는 도구입니까?’ 하니, 율곡이 웃고 사례하였다.” 하였다. 남계가 이 두 조항을 기록하였는데, 명재가 삭제하도록 한 것이다.

선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옛날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이 찬(撰)한 것이 있었는데, 뒤에 사림(士林)들이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사론(士論)은 계곡이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지은 것을 하자로 여겨 쓰지 않았으니, 회천(懷川) 송시열(宋時烈)이 특히 이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다시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에게 청하여 고쳐서 짓고 김신재(金愼齋 김집(金集))가 썼으며, 또 묘표(墓表)는 신재가 짓고 외손인 윤동토(尹童土 윤순거(尹舜擧))가 썼다. -글은 모두 원보(元譜)에 보인다.- 부인 신씨(申氏)는 별도로 장단(長湍)에 장례하였는데, 묘표는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짓고 판서(判書) 김좌명(金佐明)이 썼다. -글은 아래에 부록(附錄)한다.

명(明)나라 만력(萬曆) 26년(1598, 선조31) 무술에 우계 선생이 파주의 우계에서 별세하자, 이해 8월 모일에 향양리(向陽里)에 있는 청송 선생의 묘소 뒤에 장례하였으며, 18년 뒤인 을묘년(1615, 광해군7)에 부인 신씨(申氏)가 별세하니 향년이 85세였다. 풍수가(風水家)들이 연운(年運)이 맞지 않는다고 말하므로, 위재(韋齋)와 축씨(祝氏)의 고사(故事)를 따라 장단의 성탄(城灘) 남쪽에 장례하니, 향양리와 수십 리의 거리였다.
신씨는 고령(高靈)의 망족(望族)으로, 좌의정 용개(用漑)의 증손이고 판결사(判決事) 한(瀚)의 손녀이고 첨정(僉正) 여량(汝樑)의 따님이며, 비(妣)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영의정 광필(光弼)의 손녀이고 주부(主簿) 노겸(勞謙)의 따님이다. 부인은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26)에 출생하였는데, 선생의 배필이 되어 예법을 어김이 없었다. 선생의 관작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자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고, 좌의정에 추증되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봉(追封)되었다.
사림들이 재물을 모아 비석을 마련해서 선생의 신도비를 향양리에 있는 묘소 밖에 세웠는데, 부인의 묘소는 다른 지역에 별도로 있기 때문에 자손의 이름을 표석(表石) 뒤에 기록하였다.

우계 선생의 연보는 옛날 창랑공(滄浪公)이 지은 초본(草本)이 있었으나 소략하여 구비되지 못했는데, 선생이 서적을 널리 참고하고 첨삭(添削)을 가하여 책을 이루었으며, 또 묘비(墓碑), 묘지(墓誌)와 행장, 제문과 축문 등을 모아 부록을 만들고, 또 변무(辨誣)하고 신원(伸冤)하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원하는 등의 상소문을 모아 후록(後錄)을 만들어서 율곡 선생 연보와 합하여 한 질(帙)로 만들었다. 뒤에 이것을 강릉(江陵)의 송담서원(松潭書院)에서 간행하였고, 또 연보후설(年譜後說)을 만들어 우계 선생의 출처(出處)와 어묵(語默), 진퇴(進退)의 대절(大節)을 밝혔다. -노서연보(魯西年譜)-

광해군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사림들이 선생의 유문(遺文)을 간행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장계곡(張谿谷)이 중외에 통문(通文)을 돌렸는데, 머리말에 이르기를, “아래의 글은 재력을 모아 우계 성 선생의 문집을 간행해서 도맥(道脈)을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호서(湖西) 지방은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를 유사(有司)로 삼고, 호남(湖南) 지방은 안우산(安牛山 안방준(安邦俊))을 유사로 삼는다. 음기(陰氣)가 쌓여 비색(否塞)한 때를 당하여 이미 율곡을 위해 묘비를 경영하여 세웠고, 또 선생을 위해 유집을 간행하려 하니, 당시 선비들의 기개가 늠름하여 꺾을 수 없음을 상상하여 볼 수 있는바, 이는 몇 년이 안 되어 양(陽)이 다시 회복될 조짐일 것이다.” 하였다. 그 후 문집을 호남의 임실현(任實縣)에서 간행하였고 속집(續集)을 충청 감영에서 간행한 다음 판각(板刻)을 이산(尼山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보관하였다. -문집은 창랑공(滄浪公)이 문하의 여러분들과 편집하였고, 속집은 노서공(魯西公)이 누락된 문자들을 수습하여 편집하였다.


 

[주C-001]세 조항 : 우계연보보유 권1의 내용을 덕행(德行), 출처(出處), 답문(答問)으로 분류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1]행조(行朝) : 행재소(行在所)의 조정을 이른다. 행재소는 임금이 멀리 거둥하여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인데, 당시 선조(宣祖)는 의주(義州) 즉 용만(龍灣)에 피난해 있었다.
[주D-002]외로운 …… 기약하니 : 세한(歲寒)은 한 해가 저물어 추워지는 것으로, 공자(孔子)는 “한 해가 저물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하였는데, 이는 곤궁함을 당하여도 변치 않는 지사(志士)의 지조를 비유한 것이다.
[주D-003]지인(至人) : 성인(聖人)보다도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인물을 말한다.
[주D-004]배견와(拜鵑窩) : 영평(永平)에 있었던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서실 이름이다.
[주D-005]만사(挽詞) :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가 우계를 위하여 지은 만사이다.
[주D-006]소금과 …… 손상당하였다오 : 소금과 매실은 모두 양념으로, 옛날 은(殷)나라의 고종(高宗)인 무정(武丁)이 현신(賢臣)인 부열(傅說)을 얻어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훈계한 글에 “내가 국을 조리하거든 너는 소금과 매실이 되어라.[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인데, 이후로 군주와 신하가 서로 뜻이 합함을 비유하게 되었다. 패금(貝錦)은 자개 무늬의 비단으로, 비슷한 것을 부연하여 남을 모함함을 뜻하는데, 《시경(詩經)》 소아(小雅) 항백(巷伯)에 “조금 문채가 나는 것으로 자개 무늬의 비단을 이루도다. 저 남을 모함하는 자여 또한 너무 심하구나.[萋兮斐兮 成是貝錦 彼譖人者 亦已太甚]”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07]소미성(少微星) …… 숨었네 : 소미성은 처사성(處士星)으로, 이 별이 희미해지면 처사가 죽는다 하므로 말한 것이다.
[주D-008]무숙(茂叔)의 …… 있고 : 무숙은 북송(北宋)의 학자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자(字)로, 일찍이 뜰 앞에 자라는 풀도 생의(生意)가 있다 하여 제거하지 않았는바, 우계를 염계에 비유하고 우계가 별세한 뒤로는 풀을 돌보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한 말이다.
[주D-009]자릉(子陵)의 …… 드리우나 : 자릉은 후한(後漢) 초기의 고사(高士)인 엄광(嚴光)의 자로, 소년 시절 동문수학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황제가 되어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불렀으나 끝내 세상에 나가 벼슬하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에 은둔하여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는바, 이 역시 우계를 엄광에 비유하여 다시 낚시질할 은사가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주D-010]구정(九鼎)과 일사(一絲) : 구정은 옛날 하(夏)나라의 우왕(禹王)이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 주조한 솥으로 매우 귀중함을 뜻하고, 일사는 실 한 오라기로 매우 하찮음을 뜻하는바, 곧 의리를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가볍게 여김을 말한 것이다.
[주D-011]신야(莘野) : 신(莘)나라의 뜰로, 옛날 여기에서 농사지으며 살았던 이윤(伊尹)을 가리킨 것이다.
[주D-012]봉황(鳳凰)의 …… 없다오 : 형산(荊山)은 초(楚)나라에 있는 산이며, 박옥(璞玉)은 돌 속에 들어 있는 옥으로 춘추 시대 변화(卞和)가 발견한 화씨벽(和氏璧)을 이르는바, 청송(聽松)의 아들인 우계가 원래 봉황새나 화씨벽처럼 아름다운 자질과 깨끗함을 갖추었음을 말한 것이다.
[주D-013]파산(坡山)은 …… 근원이라오 : 곡구(谷口)는 중국의 지명으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순화현(淳化縣) 서북쪽에 있었는데, 전한(前漢) 말기 고사(高士)인 정박(鄭朴)이 일찍이 이곳에 은거(隱居)하였으며, 하수(河水)는 하분(河汾)을 가리킨 것으로 보이는데, 수(隋)나라 말기 문중자(文中子)인 왕통(王通)이 은거하여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여기서는 우계가 살던 파산(坡山)은 곧 정박이 은거한 곡구와 같고, 우포(牛浦) 곧 우계(牛溪) 역시 왕통이 강학한 하분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주D-014]푸른 꼴[靑蒭] : 생추(生蒭)와 같은 말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에 “생추 한 묶음 가지고 가니, 그분 옥처럼 아름답네.[生蒭一束 其人如玉]” 하였다. 이는 현자(賢者)가 타고 다니는 흰 망아지를 먹이는 신선한 풀을 말한 것인데, 후세에는 현자를 사모하는 뜻으로 많이 사용된다.
[주D-015]안정(顔亭)의 마지막 장(章) : 안정은 북송(北宋)의 정이천(程伊川)이 지은 안락정명(安樂亭銘)을 가리킨다. 안락정은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살던 옛터에 지은 정자인데, 그 명(銘)의 마지막 장에 “우물을 차마 버려둘 수 없으며 땅을 차마 황폐하게 내버려 둘 수 없네. 아, 올바른 그의 학문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水不忍廢 地不忍荒 嗚呼正學 其何可忘]” 하였다. 당시 윤증(尹拯)이 파산(坡山)에 이르러 우계서당(牛溪書堂)에 유숙하였는데, 때마침 서당의 중수(重修)가 끝나자 시를 지어 “올바른 학문 이제 힘써야 하니 안정의 마지막 장 깊이 음미하네.[正學今當勉 顔亭味卒章]” 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주D-016]선릉(宣陵)과 정릉(靖陵) : 선릉은 성종(成宗)과 성종의 계비(繼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이고 정릉은 중종(中宗)의 능인데,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선조 25년(1592) 4월에 왜적에 의하여 파헤쳐지고 재궁(梓宮)이 불탔으며, 일부 유골과 수의(壽衣)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유골에 대하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등은 능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으나, 우계 등은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하여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주D-017]제첩문(題帖文) : 이 글은 《국역우계집》 권2에 ‘선고의 서첩 뒤에 쓰다[書先考書帖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D-018]위재(韋齋)와 축씨(祝氏)의 고사(故事) : 위재는 주자(朱子)의 부친인 주송(朱松)의 호이고 축씨는 주자의 모친인데, 주자가 두 분을 따로따로 장례한 일을 말한 것이다.

 

우계연보보유 제2권
잡록(雜錄) 하 이 편은 오로지 변론(辨論)하여 바로잡은 내용이다.


안민학(安敏學)이 처음 최영경(崔永慶)을 방문하고서 그의 인품이 특이하다고 느껴 성혼(成渾)에게 말하였다. 성혼이 도성에 들어가서 직접 찾아가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에 맨다리의 작은 계집종이 나와 응접하였다. 문에 들어가니 방초(芳草)가 뜰에 가득하였으며 잠시 후 최영경이 나왔는데, 삼베옷에 찢어진 신으로 매우 빈한한 차림이었으나 그 용모가 엄중하여 범할 수가 없었다. 서로 앉아서 말하였는데 한 점의 속된 태도가 없었으므로, 성혼이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백인걸(白仁傑)에게 말하기를, “제가 최모(崔某)를 만나 보고 돌아올 때에 갑자기 청풍(淸風)이 소매에 가득함을 느꼈습니다.” 하니, 백인걸이 크게 놀라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이후로 최영경의 이름이 사림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경연일기(經筵日記)》-

최영경(崔永慶)과 정인홍(鄭仁弘)이 모두 우계와 율곡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최영경의 명성이 드러난 것은 오로지 우계 때문이었다. 그 후 자주 파산에 왕래하였는데, 뒤에 잘못되어 정인홍에게 붙고 우계를 배반하였으며, 이발(李潑) 등과 친하게 지내고 율곡을 훼방하다가 마침내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스스로 빠졌으니, 애석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 정인홍이 지은 최영경의 행장에 “공은 성모(成某)와 친분이 있었다. 성모가 파산에서 도성으로 들어오자 공이 장차 방문하려 하였는데, 어떤 친구가 성모의 집에서 돌아와 이르기를 ‘성모가 심 동지(沈同知 심의겸(沈義謙))와 말을 나누면서 문을 지키는 자에게 경계하여 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하자, 공은 급히 돌아오고 다시 가지 않았다.” 하였는데, 이는 실로 정인홍이 날조한 말이다.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분당(分黨)이 이미 을해년(1575, 선조8)에 시작되었으나 사축(司畜)과 정인홍이 정축년(1577, 선조10) 이전에는 파산에 왕래하였으니, 그렇다면 우계를 의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심의겸이 권력을 잡은 것은 을해년 이전에 있었고, 을해년에 심 대비(沈大妃)가 별세한 뒤에 심의겸은 이미 세력을 잃었다. 가령 우계가 심의겸과 서로 친했다 하더라도 사축이 어찌 을해년 이전에는 의심하고 비방하지 않다가 도리어 정축년 이후에 의심하고 비방하였겠는가. 정축년 이후에 비로소 우계가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하찮게 여긴 일로 서로 막힘을 면치 못하였으니, 사축이 우계를 의심하고 비방한 것은 대개 자기 스승에게 아첨하고 좋아하는 사사로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인홍이 실체가 없는 말을 날조하여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현혹시켰으니, 이는 바로 이발 등이 현인을 무함한 것과 똑같은 행적인바, 애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노서집(魯西集)》의 논최영경서(論崔永慶書). 이하 같음-

최영경과 정인홍이 정축년 이전에는 실로 일찍이 우계를 멀리하지 않았는데, 양홍주(梁弘澍)가 말을 잘못 전함으로 인하여 비로소 의심하고 비방하는 단서가 생겼다. 그리하여 계미년(1583, 선조16) 이후에는 마침내 어그러져 멀어졌으며, 정인홍은 끝내 양홍주의 일 때문에 우계에게 감정과 분노를 품어 온갖 무함과 공격을 다하였다.
○ 양홍주는 바로 정인홍의 처제(妻弟)였다. 정인홍이 양홍주와 원한을 맺어 서로 해치려 하자, 우계가 이것을 듣고 말씀하기를, “양홍주가 설령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정인홍이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였다. 양홍주가 우계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그의 아들 황(榥)이 우계에게 수학하였으므로, 우계에 대한 정인홍의 분노가 특별히 심하였다.

최영경전(崔永慶傳)에 이르기를, “최영경이 평상시 성모(成某)와 교분이 두터웠는데, 성모가 정철(鄭澈)과 서로 결탁하자, 최영경은 언제나 정철을 형편없는 소인이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성모와의 교분도 끝까지 가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정여립의 옥사가 정철 때문에 일어났고, 성모 또한 협조한 일이 없지 않다고 의심하였다. 그 후 논하는 자들은 성모가 정철을 사주하여 최영경을 죽이고 아울러 그 관작까지 빼앗게 하였다고 말한다.” 하였다.

최영경전은 바로 유서애(柳西厓 유성룡(柳成龍))가 찬한 것이다. 서애는 계미년(1583, 선조16) 이래로 은밀히 간악한 무리의 뿌리가 되었으나, 그 기미를 깊이 감추어 일찍이 스스로 손을 댄 적이 없으니,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상소문에 이른 바 ‘머리를 드러냈다가 곧바로 머리를 감춘다’는 비판은 실로 그의 정상을 안 말이라고 하겠다. 이 전(傳)은 또한 남의 말에 가탁하여 사사로이 억측함이 정인홍의 행위보다 심하니, 남의 나쁜 버릇을 전습(傳習)하여 지금까지 강경하게 행동하는 저 후생들을 어찌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참으로 애통해할 만한 일이다. -명재(明齋)의 변(辨)-

우계 성모가 젊어서부터 큰 명망이 있어 유일(遺逸)로 부름을 받아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왕량(王良)처럼 설설(屑屑)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사관(史官)이 쓰기를, “몸은 초야에 있으면서 멀리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다.” 하였다.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할 적에 우계는 대가가 지나가는 길가에 가까이 살고 있었으나 맞이하여 뵙지 않았고, 대가가 서쪽 변방에 머물러 있으면서 불렀으나 달려가지 않았으며, 금상(今上 광해군)이 세자였을 적에 이천(伊川)에서 군대를 진무(鎭撫)하면서 부르고 역마를 보내어 빨리 달려오라고 재촉하였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는데, 이해 겨울 명나라 군대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오자, 비로소 행재소(行在所)로 달려왔다. 이에 선조(宣祖)가 전교(傳敎)하기를, “내 경(卿)의 집 문 앞을 지나왔는데도 경이 나와서 보지 않았으니, 내 경에게 죄를 지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 행재소로 오니 매우 부끄럽다.” 하니, 성모는 황공하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성모는 마침내 이 때문에 죄를 얻어 추후에 삭탈관직을 당했는데, 그의 무리들은 이것을 그르다고 말하지 않고, 심지어는 말하기를, “우계가 빈사(賓師)의 지위에 있었으니, 성상이 마땅히 찾아와 뵈어야지 우계가 맞이하여 뵈올 예(禮)는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때에 성상이 종묘사직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니, 따를 만한 의리가 없다.” 하니 아, 붕당(朋黨)이 사람의 옳고 그름을 매몰함이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하담야승(荷潭野乘)》. 이하 같음-

이 기록에 이른 바 ‘멀리서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다’는 것은 바로 계미년(1583, 선조16) 양사(兩司)의 계사(啓辭)에 “몸을 산야에 의탁하면서 조정의 정령(政令)과 인물의 진퇴에 대해 미리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니, 이는 바로 공문중(孔文仲)이 정이천(程伊川)을 모함한 말이다. ‘설설(屑屑)하다’는 말은 군자의 진퇴는 진실로 일반인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굳이 장황하게 변론할 필요가 없다. 오직 임진년의 일에 대해서는 정인홍 이후에 날조하여 모함해서 못하는 소리가 없었으나 그래도 이러한 정도의 말들은 없었으니, 어떤 사람이 또 어디에서 이처럼 근거 없는 말을 듣고서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른바 ‘대가가 서쪽 변방에 머물면서 불렀으나 달려가지 않았다’는 것도 날조한 빈말이다. 이홍로(李弘老)의 참소가 먹혀들어 선조는 끝내 부르는 명을 내리지 않았으며, 성천(成川)의 행조(行朝)로 달려간 것이 이미 임진년 초겨울이었는데, 심지어는 ‘명군(明軍)이 압록강을 건너와서야 비로소 행재소로 달려갔다’고 말하였는바, 이는 그 뜻이 은연중 우계가 처음에는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버렸다가 회복할 형세가 있음을 본 뒤에야 비로소 달려간 것처럼 꾸며서 말한 것이니, 그 마음씀이 더욱 교묘하고 참혹하다. 성상께서 전교를 내리신 것은 바로 갑오년(1594, 선조27)에 도성으로 돌아온 뒤의 일이요, ‘이제 행재소로 오니 매우 부끄럽다[今來行在深用赧然]’는 여덟 글자도 성상의 전교 중에 없는 내용이다. 저들이 교묘히 비방하고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과장함이 마침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면서 도리어 남에게 붕당을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후생들이 생전에 속임을 당하여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고 자손에게 전하여 그치지 않고 있으니, 이 또한 슬퍼할 만한 일이다. -명재의 변. 이하 같음-

최징사(崔徵士) 영경(永慶)은 율곡, 우계와 교분이 매우 두터웠는데, 뒤에 의논이 갈리어 서로 틈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기축년(1589, 선조22)에 옥중에서 말라 죽었다. 징사(徵士)가 처음 옥에서 나오자, 우계가 아들을 보내어 쌀을 보내 주면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러한 화를 만났는가?” 하니, 징사가 말하기를, “다만 너의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 때문에 재차 국문(鞫問)하는 화를 당하였다.

우계가 아들을 보내어 위문하자, 징사가 이리이리 말했다는 것은 처음에 정인홍이 날조한 말에서 나온 것인데, 전술(傳述)하여 이에 이르자 하나의 공안(公案)처럼 여겼으니, 소인이 화를 끼침이 심하다고 하겠다. 이 일은 선인(先人)께서 매우 자세히 변론하였으므로, 이제 다시 덧붙이지 않는다.

송강장초(松江狀草)에 이르기를, “기축년 10월에 공(公)이 고양(高陽)에 있으면서 역모(逆謀)의 변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보내어 나를 부르면서 ‘내 사은숙배하려고 한다.’ 하였다. 내가 말씀드리기를 ‘지금 사은숙배하는 것은 행적이 시기를 틈타는 듯합니다.’ 하니, 공이 말씀하기를 ‘역적이 군부(君父)를 해치려 하니, 내가 중신(重臣)으로서 변고를 보고도 나아가지 않으면 신하의 의리에 어떠하겠는가. 자네의 말은 혐의를 피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 함께 서울로 들어왔다. 그 후 우계와 제공(諸公)들이 모두 사은숙배할 것을 권하였으므로, 공은 3, 4일 후에 대궐에 들어가 숙배하였다.” 하였다. -《사계집(沙溪集)》. 이하 같음-

삼가 살펴보건대, 파산서적(坡山書蹟)에 기축년 10월 12일 동은(峒隱)이 우계에게 답한 편지가 있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송강의 진퇴는 이미 사은숙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고, 금일 오후에 차자(箚子)를 소매에 넣고 대궐로 달려갔습니다.”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계의 편지 가운데에 사은숙배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한다고 답한 것이니, 우계가 송강에게 사은숙배하도록 권했다는 말과 서로 어긋난다.
○ 우계가 사은숙배하지 말라고 권한 것은 진퇴의 큰 절개를 위주로 한 것이요, 또한 이해를 따져 혐의를 피하기 위한 계책이 아님이 분명한데, 송강장초와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의 상소문에는 모두 “우계가 도성에 들어가도록 권했다.”고 말하였으니, 가령 참으로 송강이 도성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데 들어갔다면, 비록 우계가 들어가도록 권하였다고 핑계 대더라도 어찌 재앙을 요행으로 면하려 하였다는 비방을 면할 수 있겠는가. 기옹의 상소문과 송강장초의 기사는 혹 전술(傳述)의 오류에서 기인한 것인가? -《노서집》의 송장변(松狀辨). 이하 같음-

송강장초에 이르기를, “공이 추관(推官)이 되었을 때에 내가 새벽에 공이 계신 곳으로 갔더니, 공이 말씀하기를 ‘정여립(鄭汝立)을 황해도 도사(都事)와 김제 군수(金堤郡守)로 의망(擬望)한 전관(銓官)을 규찰하여 바로잡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이조에서 어떻게 역적의 실상을 미리 알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는 재삼 불가함을 논하였는데, 공은 말씀하기를 ‘이는 바로 우계가 주장한 것이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비록 우계의 말씀이라도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있다가 정언(正言) 황신(黃愼)이 이조를 논박하자, 성상이 노하여 공을 배척하고 황신을 고산 현감(高山縣監)으로 좌천시켰다.” 하였다.
○ 내가 송강을 만나 보던 날 저녁에 송구봉(宋龜峯 송익필(宋翼弼))이 이산해(李山海)를 찾아가 만나 보고 돌아와 나에게 말씀하기를, “이 정승이 시름에 잠겨 장차 죽을상을 하고 있으므로 내가 괴이하게 여겨서 물었더니, 이 정승이 말하기를 ‘내 장차 죽을 것이다. 계함(季涵 정철(鄭澈))은 그렇지 않은데, 한 장자(長者 우계)가 반드시 나를 죽이려고 한다.’ 했다.” 하였다. 이산해가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정여립을 김제 군수와 황해도 도사에 모두 첫 번째로 의망하자, 우계는 이것을 그르다 하여 이산해를 논핵하려 하였다. 송강은 이것을 불가하다 하고 우계는 반드시 논핵하려고 하였는데, 좌중에 있던 이희참(李希參)이 이 말을 듣고는 즉시 이산해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니, 이산해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화를 면할 것을 도모하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마침 건저(建儲)의 의논이 있자, 이산해가 이것을 가지고 송강과 우계를 모함할 계책으로 삼아 후궁(後宮)을 통하여 참소하니, 성상의 뜻이 크게 송강을 의심하게 되었다.

정용안(鄭龍安)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 기축, 경인, 신묘 3년 동안의 조보(朝報)를 살펴보면, 황 정언(黃正言 황신(黃愼))이 고산 현감으로 좌천된 것은 홍성민(洪聖民)을 구원하고 이산해를 배척하였기 때문이니, 전관(銓官)을 탄핵했다가 외임(外任)으로 전보(轉補)되었다는 말과 서로 어긋난다.
○ 또 살펴보건대 이양원(李陽元)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정여립을 황해도 도사로 의망하였고, 이산해가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정여립을 김제 군수로 의망하였다. 그러므로 기축년 11월에 양천회(梁千會)가 올린 상소문에 이미 “정여립이 해서(海西)의 막좌(幕佐)에 의망되기를 도모했다.”는 말을 아뢰었는데, 이로 인하여 이양원이 상소하고 대죄(待罪)하였으나 성상의 비답에 이양원을 위로하고 타일렀으며, 경인년 4월 초하루에 사간원에서 전관(銓官)들이 정여립을 의망한 잘못을 논죄하여 당상관과 낭청을 모두 파직할 것을 청하였는데, 성상이 윤허하지 않자 재차 아뢰고 정지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이산해가 황해도 도사와 김제 군수에 모두 정여립을 첫 번째로 의망하였기 때문에 우계가 비난하여 논죄하려 했다는 말과 서로 어긋난다.
○ 우계가 가령 이산해를 미워하여 황신으로 하여금 논죄하게 하였다면 곧바로 이산해의 죄를 배척했어야 옳다. 그런데 범범하게 전관이라고 지적하였으니, 전관은 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산해를 함정에 빠뜨리고자 두 사람을 아울러 논죄한 셈이니, 어찌 이러할 리가 있겠는가. 그 죄에 따라 사람을 다스리는 자는 비록 혹 지나치게 무겁게 처벌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큰 착오에는 이르지 않으나, 만일 그 사람을 미워하여 그에게 죄줄 방법을 찾는다면 비록 지극히 작은 죄목으로 지극히 악한 사람에게 죄를 가한다 하더라도 실로 군자의 마음씀이 아니니, 황공(黃公)도 이러한 짓은 차마 하지 않았을 터인데, 하물며 우계가 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지혜가 밝은 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이희참(李希參)이 비록 우계, 송강과 친하였으나 실로 이산해의 6촌 친족이니, 과연 이 사람이 우계를 위하는 자였다면 반드시 이 비밀스러운 의논을 이산해에게 전달하지 않았을 것이고, 과연 이산해를 위하는 자였다면 반드시 은밀히 의논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니, 우계가 송강과 의논한 것을 이희참이 전달했다는 것은 구구절절이 의심할 만하다. 송강장초 가운데에 실려 있는 연월(年月)과 사실은 착오가 있고 잘못된 부분이 많으니, 예컨대 이성중(李誠中)을 특별히 충청도 관찰사로 제수한 것은 신묘년(1591) 봄이었는데, 경인년(1590) 여름이라고 기록한 따위가 그것이다. 송강과 구봉과 이희참의 말은 또한 혹 전해 들은 것의 선후에 따라 착오가 있는가 보다. 노선생(老先生)이 이 송강장초를 기록한 것이 신유년(1621, 광해군13) 가을이었는데, 정기옹(鄭畸翁 정홍명(鄭弘溟))이 노선생과 함께 거처했다 하니, 수십 년 전의 일이라서 잘 몰랐을 수도 있고 혹은 기옹이 덧붙인 말일 수도 있다. 기옹이 듣고 본 것은 실로 진실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다.

송강장초에 이르기를, “황신(黃愼)과 성문준(成文濬)은 이 화(禍)가 일어난 것이 전적으로 우계가 황신을 시켜 이조를 논박하게 한 데서 연유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저들과 함께 제공(諸公)의 실수를 일일이 열거하며 공격하여 저들의 뜻에 영합하였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기축년(1589, 선조22) 12월 14일에 정암수(丁巖壽) 등이 상소하여 이산해 등을 배척하자, 성상은 정암수 등을 하옥하도록 명하였다. 15일에 조중봉(趙重峯)과 양산숙(梁山璹)이 모두 상소하여 이산해 등을 배척하자, 성상은 준엄한 비답을 내리기를, “이 사람들만이 유독 정철(鄭澈)을 칭찬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간사한 귀신인 조헌(趙憲)은 다시 마천령(磨天嶺)을 넘어 멀리 유배 가고 싶은 것인가.” 하였으며, 또 전교하기를, “조헌의 상소문은 사노(私奴)인 송익필(宋翼弼)이 지시하여 사주한 것이다.” 하고는 가두어 엄중히 다스리도록 명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이산해가 왼쪽 배로 들어간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닌 것이다. 송강이 구봉을 집에 머물게 하면서 중봉을 사주하였다는 참소가 이미 기축년 겨울에 일어났으니, 그렇다면 화가 일어난 것이 전적으로 황신이 전관(銓官)을 논죄한 데서 연유했다는 말과 서로 어긋난다.
○ 기축년 역옥(逆獄)을 다스릴 적에 이발(李潑)과 백유양(白惟讓) 등 역적의 공초(供招)에 여러 번 거명된 자들을 성상이 모두 형신(刑訊)하였고, 기타 간악한 무리들을 높이고 추종한 자들도 성상이 또한 반드시 죄를 내렸다. 그러므로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가 갑신년(1584, 선조17) 겨울 정여립을 추천한 일로 인하여 양사(兩司)가 함께 준엄하게 논죄함으로써 마침내 파직의 벌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사간원에서 전관(銓官)을 탄핵하는 것은 또한 이러한 규례를 따른 것일 뿐이다.
황신의 논죄가 도리에 합당한지의 여부는 원래 논할 필요가 없거니와, 만약 우계가 황신을 시켜 논죄하게 하였다고 말한다면 사실이 아닐 듯하다. 옛날 송(宋)나라 주광정(朱光庭)이 소식(蘇軾)을 탄핵하자, 소식의 당(黨)에서는 “이천(伊川)이 사주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공문중(孔文仲)이 이천을 탄핵하여 “뜻과 기운으로 대간(臺諫)을 부린다.”고 하였으니, 어찌 이천이 주광정을 사주하여 소식을 공격하게 하였겠는가. 우계가 황신을 시켜 전관을 논죄하게 하였다는 말도 이와 같을 것이다. -회천(懷川)이 찬한 구봉의 묘갈문을 보면 “이산해가 원한을 품고서 대내(大內)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갇히게 되었다.” 하였으니, 이산해가 은밀하게 송강을 모함한 지가 오래되었다.

일찍이 신재(愼齋 김집(金集))를 모시고 파산연보(坡山年譜)를 편수(編修)하고 교감(校勘)할 때에, 신재가 《계갑록(癸甲錄)》의 기축년과 경인년의 일을 보시다가 양천회(梁千會)의 상소문과 이양원(李陽元)이 대죄(待罪)한 계사(啓辭)를 보신 다음, 크게 놀라 말씀하기를, “이 일이 이미 황신이 전관을 탄핵하기 이전에 일어났구나.” 하시고는, 인하여 송강장초 가운데 한 단락의 내용을 가리켜 말씀하기를, “‘전적으로’라는 전(專) 자와 ‘황신을 시켰다’라는 사(使) 자는 과연 글자를 잘못 놓은 실수를 면치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재가 송강장초 등의 글에 대하여 이미 실제와 다른 단서를 발견하였다면 전에 들었던 말씀을 고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재는 파산의 사적(事蹟)에 대해 처음에는 잘못 알고 있는 상황을 면치 못하였으나, 파산연보를 살펴본 뒤에 깨달은 것이 많았다. ○ 《노서집(魯西集)》의 여회천서(與懷川書). 이하 같음-

경술(1610, 광해군2) 연간에 우계를 신원(伸冤)한 일은 파산 문하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힘쓴 것이었으며, 창랑(滄浪)과 추포(秋浦 황신(黃愼))가 가장 의심과 비방을 많이 받은 것도 그 이유가 있습니다. 신영천(申靈川 신응구(申應榘))의 상소문은 창랑이 가감한 것인데, 간당(奸黨)이라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송강을 함께 신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등 여러 분들의 의논이 이것을 불가하다 한 것입니다. 추포는 여러 번 상소문을 올려 스승의 억울함을 신원해 줄 것을 청하였고, 또 이공 덕형(李公德馨)에게 부탁하였으나 유독 이이첨(李爾瞻) 등만은 실로 조율(調律)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추포와 한사앙(韓士仰)이 옛날 친분을 가지고 그의 뜻에 맞추려고 계획했을 뿐이니, 만약 송강의 잘못을 일일이 나열하여 이이첨에게 영합하였다고 말한다면 실제가 아닙니다.

선사(先師)께서 일찍이 문인들과 경도(經道)와 권도(權道)의 일을 강론하다가 말씀하시기를, “권도는 가볍게 말할 수 없다. 우계가 임진년(1592)에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의 변고가 일어난 뒤를 당하여 국외(局外)의 사람으로서 갑자기 화의(和議)를 주장하다가 선조(宣祖)의 무한한 죄책을 받았으니, 만약 율곡이었다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율곡이 계셨으면 마땅히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하였더니, 선사는 한동안 속으로 되뇌시다가 말씀하시기를, “당시에는 특별히 기이한 계책이 없고, 오직 지성으로 명(明)나라 장수에게 간곡히 기원하여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가지 말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을 근거한다면 선사 또한 우계의 주장이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임을 아신 것이다. -《우암집(尤庵集)》의 사계유사(沙溪遺事)-

사옹(沙翁 김장생(金長生))의 문집이 정묘년(1687, 숙종13)에 간행되었으니, 그렇다면 유사(遺事)는 나중에 지은 문자임을 알 수 있다. 사옹이 설령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하더라도 이는 자로(子路)가 공자(孔子)의 처사를 좋아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일로서 우계에게 해가 되지 않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단서를 가지고 부연하여 선정(先正)을 흠잡는 근거로 만든 것은 절대로 사옹의 뜻이 아니다. 더구나 이 조항에 말씀한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본래의 취지를 잃은 듯하다.
고양겸(顧養謙)의 자문(咨文)은 화의를 주장한 것이 아니요 바로 왜적에게 항복을 받자는 것이었으며, 선생이 상주(上奏)한 것도 화의를 주장한 것이 아니요 바로 고양겸의 지시를 다소 따라서 명나라 조정의 뜻을 저촉함으로써 그들의 노여움을 격발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당시에 선조가 꾸짖은 것은 근본 원인이 따로 있었는데, 다만 주본(奏本)을 빙자하여 노여움을 발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모두 사옹이 몸소 보고 마음으로 헤아리신 것이니, 그렇다면 갑자기 단언하기를 ‘화의를 주장하다가 죄책을 받았다’고 말씀하시거나 또 ‘율곡이었다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단정하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을 듯하다.
그리고 그 아래 단락에 거듭 말할 때에 한동안 속으로 되뇌시다가 대답하셨다는 내용도 ‘지성으로 간곡히 기원한다’고 한 데 불과하여 어투가 매우 모순된다. 당시에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과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등 여러 분들이 성심으로 국가를 위하여 명나라 장수에게 간곡히 기원한 것이 실로 신포서(申包胥)에게 뒤지지 않았는데, 끝내 청원을 얻지 못했던 것은 명나라 조정의 입장에서 논한다면 왜적에게 항복을 받고 병란(兵亂)을 종식시키는 것이 진실로 편의한 계책이었기 때문이니, 지성으로 간곡히 기원한다는 것은 논할 만한 것이 아닐 듯하다.
그리고 ‘국외인(局外人)’이라는 세 글자에 있어서도 말이 또 온당치 못하다. 나랏일이 매우 위급하고 낭패스런 때를 당하여 직접 성상의 하문을 받고 대답한 것이니, 대번에 국내(局內)와 국외(局外)로 구분하는 것은 우계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나의 생각에는, 율곡이 만약 살아 계셨다면 주본에 대한 의논이 우계와 다름이 없으셨을 듯하다. 율곡은 평소 시세를 알고 변화에 통달하여 식견이 매우 뛰어났으니, 계미년(1583, 선조16) 북쪽 변방의 일을 조처하신 것을 가지고서도 상상하여 알 수 있다. 가령 우계가 나라 형편이 이와 같이 위태로운 모습을 보고도 국외의 사람이라고 자처하여 우선 큰소리를 쳐서 위로는 성상의 뜻에 순종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가렸다면, 이는 다만 문자를 편의대로 이용하여 일신의 안위만을 도모한 것일 뿐이니, 선생이 어찌 이러한 일을 하였겠는가.
○ 또 살펴보건대 유서애(柳西厓)가 조월천(趙月川)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계사년과 갑오년에 인민들이 서로 잡아먹어서 당장 국가를 보전하기 어려웠는데, 스스로의 힘으로 도모할 수 없기에 밖으로는 명나라 조정의 기미(羈縻)의 계책을 따라 적의 형세를 다소 늦추고 안으로는 전수(戰守)의 대비를 닦아 서서히 후일을 도모하였습니다.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오늘날 나라를 도모하는 방책도 이와 같이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화의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서책 사이에서 좋지 못한 제목을 찾아내어 서로 모욕하고 더럽히니, 이는 마땅히 웃으면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해 보면 당시의 사세가 매우 위급하였음을 상상할 수 있으며, 서애가 실로 왜적과의 화의를 주장하였는데도 성상의 마음이 서애에게는 깊이 노여워하지 않고 또 그의 말을 따른 반면 유독 우계에게만 꾸짖음과 책망을 많이 한 것은, 이홍로(李弘老)의 참소가 먼저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농와잡록(農窩雜錄)》-

회천(懷川)이 이희조(李喜朝)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보내온 편지에 ‘우계의 손자가 이번 상소에 참여했다.’ 하니, -명촌(明村) 나양좌(羅良佐)가 정묘년(1687, 숙종13)에 올린 상소문에 성공 지선(成公至善)이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계의 손자이기 때문에 이 상소에 기꺼이 참여했다.’고 여기는바, 그 일을 이야기하자면 매우 장황합니다. 문원(文元 김장생(金長生)) 선생은 젊어서부터 일찍이 ‘율곡과 우계가 이와 같이 동등하겠는가.’ 하셨으므로, 이 때문에 크게 파주(坡州 우계)에게 노여움을 샀으며, 임진년(1592, 선조25) 이후에 이르러 또 의심할 만한 점이 없지 않았고, 또 일찍이 송강이 죄를 얻은 뒤에 우계 문하의 여러 분들이 자못 정인홍(鄭仁弘)에게 붙어서 우계를 배척하는 것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기 위해 오로지 송강을 허물하자, 문원 선생이 크게 배척을 가하셨으니, 송강의 행록(行錄)에 쓴 것이 매우 준엄합니다. 그 근원이 이와 같으니, 말류(末流)가 오늘날에 이처럼 성함을 어찌 이상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우암집》. 이하 같음-

사계는 율곡을 사사(師事)하였으니 우계에 대하여 진실로 간격이 없지 못하나, 어찌 파주에게 크게 노여움을 산 일이 있겠는가. 비록 우계의 여러 문하생들도 사계를 혐의하고 노여워하는 뜻이 없었는데, 하물며 우계의 마음에 어찌 털끝만치라도 피차를 따지는 생각이 있었겠는가. 우계가 우동계(禹東溪 우복룡(禹伏龍))와 말씀하신 것을 보면 후학들로 하여금 반드시 율곡을 찾아뵙게 하였고, 두 현인의 문인들로서 두 문하에 모두 왕래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어찌 그런 일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생각을 가지셨겠는가. 이 또한 후인들이 서로 시기하고 이기려는 좁은 소견으로 선현을 헤아린 것인 듯하다. -명재의 변-

회천이 이희조에게 또 말하기를, “또 큰 곡절이 있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초기에 특진관(特進官) 유순익(柳舜翼)이 경연에서 첫 번째로 율곡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요청하자, 해주(海州)의 유생(儒生)인 윤홍민(尹弘敏)이 와서 문원 선생을 뵙고 말하기를 ‘소생들이 율곡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고자 하여 왔습니다.’ 하니, 선생은 ‘좋은 일이다.’ 하였습니다. 얼마 후 다시 뵙자, 선생이 말씀하기를 ‘너희들이 하던 일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오 판서(吳判書 오윤겸(吳允謙))가 소생들의 의논을 듣고 즉시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댁으로 찾아가서 「오늘날 우계도 함께 종사하게 하지 않으면 이후에는 도모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는데, 월사가 소생들을 불러 「오 판서와 뜻을 같이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선생은 한탄하기를 ‘일이 장차 이루어지지 못하겠구나.’ 하였습니다. 그 후 을해년(1635, 인조13)에 나의 종형(從兄)이 성균관에서 발론(發論)하자,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은 율곡만을 종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판서 이정백(李靜伯 이홍연(李弘淵))은 우계도 아울러 종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종형이, 이렇게 되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집에 있는 사람들끼리 장차 크게 좋지 못한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동춘에게 상의하니, 동춘은 ‘이와 같이 큰일을 어찌 사문(斯文)의 장자(長者)에게 여쭙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즉시 사람을 연산(連山)으로 보냈는데, 신재(愼齋)가 답하기를 ‘우계가 율곡에 비하여 차이가 있으나, 이미 종사한 선현들에 비한다면 어찌 대번에 그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의논이 마침내 결정되었습니다. 이 뒤로 우계 문하의 사계 문하에 대한 원한이 상당히 풀렸으나, 본색이 간간이 노출되어 약간의 서로 다른 의사가 없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종사할 것을 처음 발의했을 때의 곡절은 나 또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해주 유생인 윤홍민이 상소하기 전에 이미 정수몽(鄭守夢 정엽(鄭曄))이 경연(經筵)에서 주청하며 우계도 함께 거론하였으니, 이것이 당시 사문의 정론(定論)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사리로 추측하건대,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사문의 얼마나 중대한 의논인가. 사계와 수몽 등 여러 선생들이 모두 조정에 계셨으니, 반드시 여러 의논이 하나로 귀결된 뒤에 발의했을 것이다. 그런만큼 해주 유생이 어찌 한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에 배향하는 것처럼 혼자 판단하여 상소하였겠는가. 가령 해주 유생이 율곡만 종사하자는 의논을 하였다 하더라도 당시 사림들이 월사보다는 사계와 수몽을 더 추존(推尊)하였으니, 추탄(楸灘 오윤겸)도 반드시 먼저 사계와 수몽을 찾아가 이동(異同)을 상의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사사로이 월사에게 부탁하여 월사가 홀로 해주 유생을 불러 말했을 리가 있겠는가.
또 사계는 해주 유생과 동문(同門)이요 생질(甥姪)이었으니, 반드시 그와 상의하고 지도하여 십분 정당하게 하기를 기약해서 큰 의논이 완성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가 처음 왔을 때 만나 보고는 범연히 좋다고 말하고, 다시 뵈러 오자 또 ‘일하는 것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범연히 물으며, 우계도 아울러 종사하자는 말을 듣고서는 또 범연히 탄식하면서 ‘일이 장차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남에게 맡겨 두고 방관하는 것처럼 할 따름이었겠는가. 스승에 대한 의리에 있어 비록 작은 일이라도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문묘에 종사하는 큰일을 다만 범연히 대응하였겠는가. 이것은 회천이 젊었을 때의 일이니, 잘못 전해 들은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율곡과 우계 두 현인을 함께 종사하자는 의논은 이미 인조반정 초기인 사계와 수몽이 조정에 계실 때에 정해졌으니, 을해년에 이르러 어찌 딴 의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미 말하기를, “동춘은 율곡만을 종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동춘이 ‘어찌 사문의 장자에게 여쭙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하였으니, 동춘이 율곡만을 종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할 당시에 어찌 먼저 장자에게 여쭙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것인 줄을 몰랐겠는가. 그렇다면 강력히 주장했다는 말도 또한 사실이 아닌 듯하다.
○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사문의 큰일로 자연 사림의 공공(公共)의 의논이니, 어찌 그 사이에 은혜와 원망, 기쁨과 유감을 둘 수 있겠는가. ‘파문(坡門)’이니 ‘계문(溪門)’이니 한 것은 다만 송강의 일로 인하여 두 문하에 조금 어긋나는 점이 있어서 정의(情意)가 막힌 상태를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인(先人)이 평소에 반드시 사실에 근거하여 피차간의 오해를 풀어 주어 서로의 반목을 화합시키고 의논을 공정히 하여 백세(百世)의 공안(公案)을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당시 사우(師友) 간에도 충분히 의논하여 의견의 일치를 거의 보았었는데, 지금 마침내 저와 같이 말하고 있으니, 선인의 평소 지극한 정성이 모두 허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림의 불행인 셈이다. 이른바 ‘본색이 간간이 노출되었다’는 것과 ‘다소 이러한 의사가 없지 않았다’는 등의 말은 모두 억측에서 나온 것이다. -명재의 변-

회천(懷川)의 상소문에 아뢰기를, “신(臣)의 스승 김장생(金長生)이 젊었을 적에 이이(李珥)를 높이고 친애함이 옛날 증자(曾子)가 공자(孔子)에게 한 것보다도 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이와 성혼(成渾) 두 현자에 대하여 차등을 두어 보는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 후 성혼의 학문이 더욱 닦여지고 도가 더욱 높아지자, 또한 예전과는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혼은 국가가 당장 망하게 될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 부득이 명나라 장수의 말대로 권도(權道)를 따라 일을 이룰 방법을 청하였다가 선조(宣祖)의 노여움과 책망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명나라 장수의 말은 바로 화의(和議)입니다. 신의 스승은 이르기를 ‘변(變)은 쉽게 대처할 수가 없으니, 권도는 성인이 아니면 쓸 수가 없다. 그런데 성혼이 쉽게 생각하고 말씀을 올려 성상의 노여움을 범하였으니, 만약 이이가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성혼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성혼의 자손과 문인들은 선사(先師 김장생(金長生))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차등을 두어 보는 뜻에 불평하였으며, 또 신의 스승이 그 자손과 문인을 지나치게 배척한 말에 노하여, 전전(輾轉)하여 서로 격해지니, 이것이 우계와 사계 두 문하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된 근본 원인이니, 오늘날 성지선(成至善)이 신을 공격하는 것은 이치와 형세상 당연합니다. 신이 이희조(李喜朝)에게 답한 뜻은 다만 이와 같을 뿐이었으니, 어찌 세상의 무리들이 이것을 가지고 신이 성혼을 무함하고 비방했다 하여 신에게 불측(不測)한 죄를 뒤집어씌울 줄을 헤아렸겠습니까. 대저 선사가 일찍이 말씀하기를 ‘주자(朱子)가, 문왕(文王)의 지극한 덕(德)이 태백(泰伯)의 온전함만 못하다고 논하였으니, 이는 군신(君臣)의 예(禮)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선사가 성혼을 높인 것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한데도 오히려 경도(經道)와 권도(權道)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은, 《춘추(春秋)》의 복수(復讐)하는 의리를 조금이나마 보존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만약 신을 배척하여 ‘그 스승의 말은 비록 이와 같다 하더라도 저 사람이 어찌 감히 공공연히 그 말을 하고 다닌단 말인가.’라고 한다면, 신은 장차 그들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그 죄를 인정할 것입니다.” 하였다. -《우암집》 ○ 이희조와의 문답이 나온 뒤에 사림의 의논이 더욱 격해져서 관학(館學)에서 장차 상소문을 올려 변무(辨誣)하려 하자, 명재가 강력히 저지하였고, 회천은 상소문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다.

임진년 운운한 것은 바로 갑오년(1594, 선조27)에 우계가 올린 주본(奏本)의 의논을 가리킨 것이다. 이 말은 선인(先人)이 지은 우계연보후설(牛溪年譜後說)에 자세히 변론하였으니, 상고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화의라는 것은 정강(靖康)과 건염(建炎) 연간에 송(宋)나라가 금(金)나라에 대해서 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니요, 바로 명나라 조정에서 왜적이 정성을 바치도록 허락한 것이며, 이른바 선조가 매우 노여워하여 책망했다는 것은 이 의논 때문에 저촉하여 거스른 것이 아니요, 바로 성상의 노여움은 우계에 대한 중상모략이 쌓인 데에서 연유한 것인데 다만 이 일을 계기로 드러났을 뿐이다. 지금 범연히 화의라고 가리켜 말해서 원수를 잊고 원한을 풀어 버린 죄목을 우계에게 돌리려 하고, 매번 선조가 매우 노여워하여 배척했다는 말을 제시하여 이것으로써 죄를 얻은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게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입을 놀려 말하지 못하게 하니, 또한 그 의도가 불순한 면을 볼 수 있다. -명재의 변. 이하 같음-

화(和)라는 한 글자는 우계의 말씀이 아니요 우계의 뜻도 아니었으니, 우계가 추포(秋浦)와 영천(靈川) 등 여러 분에게 답한 편지에 자세히 보인다. 이제 억지로 화의 주장을 우계가 한 것으로 돌리려 하고, 또 자기의 뜻으로 사계의 말씀 밖에 있는 뜻을 말하여 《춘추》의 의리를 거스른 죄로써 우계를 꾸짖으려 하니, 이와 같으면서 털끝만치라도 우계를 흠잡고 훼방할 뜻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문원공의 권도와 경도에 대한 말씀은 이 내용이 일찍이 문자 사이에 보인 적이 없고, 또 신재(愼齋) 선생이 논하지 않았으며, 지금 다만 회천의 상소문에 보이는데, 이제 문원공의 말씀이라고 변론한다면 문원공에게 미안하지 않겠는가. 이제 다만 마땅히 말하기를, “송모(宋某)의 상소문에 《춘추》의 의리라고 말한 것은 어떠한 것인가? 《춘추》의 의리를 조금 보존한다는 것은 바로 회천이 문원공의 말씀 밖에 있는 뜻을 나타낸 것이요, 문원공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때 당인(黨人)들이 율곡과 우계를 문묘에서 출향(黜享)하면서 회천의 상소문을 인용하여 무함하니,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가 사림의 변론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그러므로 명재가 이 글을 보낸 것이니, 문집에 보인다.

회천의 뜻은 전부터 이와 같았으나 예전에는 다만 ‘의심스럽고 감히 알지는 못한다’고 말했을 뿐이며, 또 자기 견해만을 말할 따름이고 일찍이 사계를 끌어대어 말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성내는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말뜻이 자신도 모르게 어그러졌고, 이때부터 비로소 사계에게 책임을 돌렸으니, 이것이 사의(私意)를 쓴 부분이 되는 것이다.
○ 선현이 대처한 의리는 다만 후세의 주자(朱子)를 기다릴 뿐이니, 원래 회천의 말에 따라 가벼워지고 무거워질 성격이 아니다. -《명재집》의 여나명촌서(與羅明村書). 이하 같음-

보내온 편지에 “후일에 저들이 이것을 덧붙여 우계를 헐뜯고 비방하는 한 단락을 삼는다면, 그때에 상대하여 변론하기가 무력할 것 같다.” 하였는데, 어찌 그러하겠소. 그때에 바로 저들과 회천의 말까지 아울러 한번 변론하면 바야흐로 정당하고 힘이 있을 것이오.
이설(異說)이 나옴으로 인하여 변론하는 것은 선현을 위하여 변무(辨誣)하는 사론(士論)이니, 오늘날 회천의 말만 꼬집어 변론하는 것은 선현을 위하여 변무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회천을 공격하는 편론(偏論)이오. 기사년(1689, 숙종15)에 이현령(李玄齡)이 상소문을 올려 변무할 때에 마땅히 회천의 상소문에 있는 말까지 아울러 변론했어야 할 것이나, 그 당시 회천이 막 죄를 지어 벌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말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오. 사원(士元 박태보(朴泰輔))이 지은 상소문 -출향(黜享)할 때에 유생들을 대신하여 지은 상소문이다.- 중에 대략 언급하고 다 변론하지 않은 것도 또한 이 때문이었소. 사론과 편론의 구분이 이와 같으니, 이미 편론이 된다면 비록 바르더라도 바르지 못한 것이오. -정축년간에 회천의 편지가 또 나오자, 이것을 변론하자는 의논이 다시 일어났는데, 명재(明齋)가 명촌(明村)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강력히 저지하였다.

회천이 김수흥(金壽興)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내가 동보(同甫 이희조(李喜朝))에게 준 편지에 우계의 일을 말한 것이 두 가지이니, 그중에 하나는 율곡과 우계가 이와 같이 대등하냐는 것이고, 하나는 임진년 이후의 일에 대한 것이었소. 이것은 권변(權變)의 방도를 범연히 논하여 우계의 일을 간략히 언급한 것인바, 바로 주자(朱子)가 의리의 지극한 곳을 논하면서 문왕(文王)이 무왕(武王)보다 높고 태백(泰伯)이 또 문왕보다 높다고 말씀한 것과 같으니, 이 어찌 우계를 배척하려는 뜻이었겠소. 또 윤안성(尹安性)의 시(詩)는 바로 그 일을 풍자한 것인데, 지금 태학사(太學士 남용익(南龍翼)을 가리킴)가 《기아(箕雅)》에 이 시를 수록하였으니, 이와 같은 일에 만약 노여워한다면 장차 그 노여움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오.” 하였다. -무진년(1688, 숙종14)

문왕에 대한 말은, 회천이 무진년에 보낸 편지에는 스스로 자신의 뜻을 가지고 신장(伸張)하였고, 기사년(1689, 숙종15)에 올린 상소문에는 또 사옹(沙翁)의 말씀이라고 길게 인용하여 부연하였다. 이렇게 같은 말을 두 번 사용하면서 편리한 대로 해석하여 스스로 앞뒤가 다름을 헤아리지 못하였으니, 이는 사옹을 끌어대어 《춘추》의 의리를 보존하려 한다는 말을 하려고 한 것에 불과한바, 이미 사옹의 어법(語法)에 어그러진 점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윤안성의 ‘이릉의 송백이 가지가 자라지 않는다[二陵松柏不生枝]’는 시는 바로 병오년(1606, 선조39)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낼 때에 여우길(呂祐吉)과 작별한 말이다. 병오년의 일은 참으로 화의를 주장한 것이니, 이는 참으로 원수를 잊은 것이다. 윤안성의 시는 이 때문에 지은 것이라서 사건이 크게 다른데, 이제 그것을 취하여 갑오년 우계의 주본(奏本)을 비판하는 시로 만들어, 후생들이 알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는 속인 것이다. 남의 것을 빌어 제멋대로 비방하면서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리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현인을 무함하는 억울함을 변명한다고 하니, 이 노인의 의도를 참으로 알 수 없다. -《농와잡록》-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말씀하기를, “임진왜란 때 우계가 처음에 만약 국난에 달려갔다면 필경 위태로운 일이 없었을 듯하다. 다만 이천(伊川)에서 세자(世子)가 부른 것은 뜻밖이었으니, 이미 분조(分朝)의 부름에 달려갔다면 대조(大朝)에 들어간 것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부득이한 일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도 면하지 못한 것이다. 대체로 이홍로(李弘老)의 참소가 시종 행해진 것은 실로 우계가 이천의 부름에 달려간 데에서 연유하였고, 심지어는 대가가 정주(定州)에 머물던 때에 어보(御寶)를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윤두수(尹斗壽))에게 맡겨서 처치하도록 위임한 일도 있었으니, 성상(聖上)의 진노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였다. -《노서집》의 청음어록(淸陰語錄). 이하 같음-

또 말씀하기를, “고양겸(顧養謙)의 자문(咨文) 한 조항은 당시에 내가 조정의 의논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말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글을 상고하여 비로소 모두 알게 되었다. 당초 명나라 조정의 의논은 절반은 압록강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절반은 군대를 출동하여 조선을 구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 등 여러 사람들이 실로 조선을 구원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여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전쟁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어 중국이 피폐해지자, 여러 사람들은 석성 등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 그러므로 장수와 정승들이 마침내 전쟁을 중지하고 왜적들에게 항복을 받으려는 계책으로 미봉하려 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의리상 왜적과 화친할 수 없었으나 이미 싸울 만한 힘이 없고 또 지킬 수도 없었으며, 다만 중국의 장수와 정승에게 의뢰하여 실낱같은 운명을 연장하려 하였으니, 명나라의 장수와 정승의 뜻을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므로 고양겸의 자문이 오자, 대소 관료들은 모두들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성상만은 이를 어렵게 여겼으니, 삼사(三司)에서 화의를 공박한 의논은 성상의 뜻에 따라 격렬하게 일어난 것에 불과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황추포(黃秋浦)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한음(漢陰)과 조용히 우계 선생이 무함을 당한 내용을 언급하다가 지금의 공론은 상공(相公)께서 신원(伸冤)하는 조처를 취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자, 한음은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매우 옳으니, 내가 만약 말할 기회를 얻으면 마땅히 강력히 아뢰겠다.’ 하였다. 그러다가 폐조(廢朝 광해군) 초년에 한음이 헌의(獻議)하기를 ‘이발(李潑)과 백유양(白惟讓), 성모(成某)를 일체 신원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경중과 고하가 이처럼 어그러지게 되었으니, 공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얻기가 실로 어렵다.”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재삼 생각해 보건대, 우계 선생의 비문(碑文)에 임진년의 일에 대한 사항을 기술하여 의리의 올바른 의논을 후인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보여 주어야 한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왕촉(王蠋)과 강만리(江萬里)의 비유는 정인홍(鄭仁弘)에게 공격을 받았는데, 사람들이 감히 그의 잘못을 지적하지 못하였습니다. 우계가 왕촉과 강만리를 인용하여 스스로 비유한 것은 이미 기축년 이전에 있었던 일인데, 기축년의 사변(事變) 때에 사람들이 혹 국변(國變)에 달려가야만 한다고 하였기에, 우계가 왕촉과 강만리의 일을 가지고 비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조 참의로 부름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조정에 들어갔으니, 이는 평소에 정한 의리가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하였더니, 선생은 그렇다고 하였다.

서애가 일찍이 말하기를,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처음으로 정계함(鄭季涵 정철(鄭澈))과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 위에서 서로 만났는데, 계함이 말하기를 ‘이현(而見 유성룡(柳成龍)) 또한 내가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여 죽였다고 여기는가?’ 하므로, 나는 의심할 만한 몇 가지 일을 지적하였다. 그러자 계함이 일어나 백상루 기둥에 등을 대고 서서 한탄하면서 차고 있던 비단 주머니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호원(浩原 성혼)의 편지가 아직도 이 속에 들어 있다. 아직도 이 속에 들어 있다.’ 하였으니, 이 일로 본다면 우계가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였다는 말은 실상이 아닌 듯하다.” 하였다. -《서애어록(西厓語錄)》-

신축년(1601, 선조34)에 간관(諫官)이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인 죄를 장차 우계에게까지 미치게 하려 하였다. 이때 오직 익지(益之)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자(字)이다.- 가 큰소리로 말하기를, “당초에 송옹(松翁 정철)이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였다는 것도 이미 이해하기 어려운 말인데, 이제 마침내 우계가 모함하여 죽였다고 하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일이 있단 말인가.” 하였다. -《백사집(白沙集)》-

김우옹(金宇顒) 등이 성모(成某)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여 심지어는 “반드시 왕법(王法)을 일찌감치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뜻은 성모에게 무거운 죄를 내리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때를 틈타 비방하고 배척하는 자들이 죽을힘을 다해 몰아붙였다. 이때 이이첨(李爾瞻) 등은 유성룡 등과 대립하여 서로 배척하였다. 이이첨 등이 제창(提唱)하여 말하기를, “화의를 주장한 자는 유성룡인데 도리어 성모더러 화의를 주장했다 하니, 유성룡은 진실로 간사한 사람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의 무리들이 감히 제멋대로 성모를 공격하지 못하였다. -《조야첨재(朝野僉載)》-

부제학 정홍익(鄭弘翼)이 신축년에 정언(正言)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안주(安州)에서 달려올 때에 삼사(三司)에서 성우계를 매우 맹렬히 공격하였다. 혹자가 그에게 묻기를, “자네가 지금 조정에 들어가면 어떻게 이 일을 대처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이번에 올 적에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을 서경(西京 평양)에서 찾아뵙고 이 일을 물었는데, 완평은 현재의 의논을 매우 불가하다고 하였으니, 어찌 옳지 않은 것을 이 노인이 말씀하였겠는가. 내 뜻은 결정되었다.” 하고는 사은숙배한 뒤에 즉시 홀로 아뢰어 이견(異見)을 주장하였다. 이에 의논이 떠들썩하게 일어나서 그를 단천(端川)의 채은관(採銀官)으로 축출하였다. -《구당집(久堂集)》의 기문(記聞)-

광해군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참찬관(參贊官) 송영구(宋英耈)가 아뢰기를, “신은 어려서 성모(成某)에게 수학하였는데, 성모는 깊은 산속에서 마음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가지고 스스로 지조를 지켰으며, 학문이 고명하고 실천이 독실하여 유림의 추중(推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죄를 입어 아직도 신원되지 못하였으니, 신은 항상 걱정하고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은 군주와 부모와 스승 때문에 사는 것이니, 섬기기를 한결같이 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경연(經筵)에서 죽을죄를 무릅쓰고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광해군은 답하기를, “일이 선왕조(先王朝)에 관계되므로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추포공(秋浦公)이 인하여 아뢰기를, “신은 죽은 스승의 심사(心事)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죄의 명목이 실제와는 크게 가깝지 않으므로 지극히 원통하고 지극히 애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벼슬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마침내 군주를 잊고 당(黨)을 비호한다는 죄목을 입기까지 하였습니다. 사대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명예와 절개인데, 성모가 현재 죄인의 명부에 있다면 신의 죄가 아직도 신의 몸에 있는 것이니, 어찌 구차히 관직을 차지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또 송영구의 말로 인하여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하였다. -《추포집(秋浦集)》-

어리석고 몽매한 신은 어릴 때부터 이이와 성혼의 글을 보고 익혀서 성현이 서로 전수한 학문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종신토록 연구하고 우러르는 자료로 삼았는데, 이제 마침내 사람들의 무함과 훼방을 당하여 문묘의 종사하는 대열에서 배척을 당하였으니, 이는 연원(淵源)이 끊기고 뿌리가 뽑힌 것입니다. 신의 종적이 어찌 다시 세상에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명재집》의 경오년 소(疏)-

동인(東人)들이 우계가 최영경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허물하니, 이는 편당(偏黨)의 사견(私見)에서 연유된 것이다. 송강도 본래 최영경을 얽어 죽이려는 뜻이 없었는데, 하물며 우계이겠는가. 당초 최영경이 옥에 갇히자, 송강이 전후에 걸쳐 구원하고 해명한 계사(啓辭)가 분명하게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 있는데, 감정을 품고 돌을 던지는 무리들이 성상의 뜻이 불쾌해하는 틈을 타서 도리어 최영경이 죽은 것을 송강의 죄안(罪案)으로 단정하고 있다.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문서가 흩어져 없어지자, 분명한 계사가 있었는데도 최영경을 무함했다고 지목하여 우계까지 함께 함정 속에 떠밀어 넣어서 수놈이 선창하면 암놈이 화답하듯이 하면서 죽을힘을 다해 몰아붙이니, 또한 가소롭지 않은가.
또 우계는 유사(有司)로서 직책을 담당한 분이 아니었고, 송강의 친한 친구로서 송강에게 편지를 보내어 최영경을 구원해 줄 것을 권하였다. 그런데 보내온 편지에 우계의 명망이 매우 중하여 최영경을 구원할 수 있었다고 말한 것은, 우계가 상소문을 올리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고 여겼기 때문인가? 우계는 이미 유사가 아니었고, 역옥(逆獄)은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비록 최영경의 무죄를 분명히 알았다 하더라도 어찌 경솔하게 결말이 나기 전에 구원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우계가 송강에게 편지를 보내어 구원해 주기를 권한 일에 대해 송강의 계사와 마찬가지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한다면,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사계집(沙溪集)》의 답황종해서(答黃宗海書)-

박약기(朴躍起)가 묻기를, “우계 선생이 최 사축(崔司畜)을 구원하기 위하여 송강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이 있었는데, 우계의 자제가 송강을 위하여 이 편지를 내놓지 않았다 하니, 사실입니까?” 하기에, 내가 전후의 곡절을 들어 전해 들은 말의 잘못을 바로잡고 이르기를, “세속의 의논은 모두 우계가 글을 올려 최영경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의심하는데, 그대의 뜻에는 어떠한가?” 하니, 박약기가 말하기를, “이미 물러난 사람이 비록 이보다 더 큰일이 있다 한들 어찌 글을 올릴 리가 있겠습니까. 세속의 의논은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박약기의 의논은 실로 사성(思誠 권시(權諰))과 같으니, 이는 모두 가정에서 얻어 안 것인가? -《노서집(魯西集)》-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유사(遺事)를 보면, 공은 성모가 정인홍에게 무함당하는 것을 애통하게 여겨 ‘우계 선생이 마침내 어찌 이러한 곤액을 당한단 말인가.’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고(故) 상신(相臣)인 이원익(李元翼)의 연보(年譜)에 이르기를 “이때 국난에 달려가지 않았다고 성모를 비방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원익은 대답하기를 ‘군주가 등용해 주지 않으면 물러나 들에서 농사지을 것이요, 혹 불행하여 나라가 망하고 군주가 죽으면 군자가 이에 대처하는 도리가 따로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큰 절개를 비방해서는 안 된다.’ 하고, 인하여 왕촉(王蠋)과 강만리(江萬里)의 일을 들어 증명했다.” 하였습니다. -경기 유생 유상(柳相)의 소-

어떤 사람이 우계와 율곡 두 분에 대해 정우복(鄭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 묻자, 정우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전부터 시회(時晦 정엽(鄭曄)) -수몽(守夢)- 와 여익(汝益 오윤겸(吳允謙)) -추탄(楸灘)- 과 친한데, 이들은 참으로 한 세상의 호걸스러운 선비이다. 내 삼가 듣건대, 두 공이 몸을 바쳐 우계와 율곡에게 수학하여 높이고 믿음이 매우 돈독하다 하니, 그렇다면 우계와 율곡의 어짊을 따라서 알 수 있다.” 하였다. -《남계집(南溪集)》-

우복(愚伏)이 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그 사람을 모르거든 그 벗을 보라’ 하였으니, 나는 오여익(吳汝益)과 정시회(鄭時晦)를 본 뒤에 우계와 율곡을 훼방할 수 없음을 알았노라.” 하였다. -《명재집(明齋集)》의 신백원(申白原)의 묘지문(墓誌文) ○ 우복이 처음에는 우계와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하였으며, 송강을 나쁜 기운을 타고난 인물에 견주기까지 했었는데, 말년에는 이전의 소견을 고쳐서 이와 같이 말하였다.

처음에 율곡 이 문성공(李文成公)과 우계 성 문간공(成文簡公)은 덕이 같아 함께 조정에 나아갔었는데, 중간에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에게 시기를 받았고, 뒤에는 큰 옥사로 인하여 문간공을 헐뜯음이 더욱 심하여 추후에 관작을 삭탈할 것을 논하기까지 하였다. 이때 공(公)의 조부(祖父)인 대간공(大諫公) -이효원(李效元)- 이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이 의논에 참여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의 교유(交遊)와 견문(見聞)을 알 수 있다.
공이 성균관에 들어가 율곡과 우계 두 선생의 유문(遺文)을 빌려 보고 문득 조부에게 묻기를, “그 시(詩)를 외고 그 책을 읽으면서 그 인물을 알지 못한다면 되겠습니까. 이제 우계와 율곡 두 선생의 책이 함께 있는데, 그 언행과 출처가 모두 옛 철인(哲人)에 부합하니, 그렇게 대단하게 무함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조부의 평소 의논과 같지 않은 듯합니다.” 하고는, 한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개진(開陳)해서 오랫동안 계속하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에 대간공이 크게 뉘우치고 깨달아서 한결같이 공의 말씀을 따랐는바, 사대부들 사이에 아름다운 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보다 앞서 잠야(潛冶) 박공 지계(朴公知誡)도 부형들의 말을 따라 때로 두 선생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했었는데, 잠야가 스스로 학문에 힘쓸 줄을 알게 되자, 두 선생을 사법(師法)으로 삼고 그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군자들은 “이 두 가지 일이 진실로 서로 비슷하나, 공이 성취한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남계집》의 이공의길지문(李公義吉誌文)-

신묘년(1651, 효종2)에 파산(坡山)에 가서 옛날부터 보관되어 있던 서적을 보고 일기에 쓰기를 “옛 자취를 펼쳐 보니 속된 눈을 씻은 듯하고, 유서(遺書)를 살펴보니 딱 들어맞는 거북점을 얻은 듯하다.” 하였다. 우계 선생이 임진년에 병란을 피한 한 조항이 사림들 사이에 와전(訛傳)되는 상황을 면치 못하였는데, 선생은 의리로써 추측하여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알았으나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우계가 직접 써서 전국로(全國老)에게 준 편지를 보고 돌아와 신재(愼齋 김집(金集))에게 질정하여 지난날 마음에 간직하였던 의심을 풀었으니, 일기에서 말씀한 것은 바로 이러한 내용을 가리킨 것이다. -노서연보(魯西年譜)-

살펴보건대, 이보다 앞서 당인(黨人)들은 우계 선생이 이미 상이 도성을 떠나기 이전에 깊은 산골짝으로 피해 들어갔다고 하였는데, 사림들이 잘못된 말을 그대로 전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자가 없었다. 그러다가 전국로에게 답한 편지를 보니, “나는 애당초 감히 병란을 피할 계책을 하지 못하였고, 혹시라도 대가가 서경(西京 평양)으로 옮겨 행차하시면 나도 안협(安峽)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노옹(魯翁)이 본 글이 바로 이것이니, 그 편지가 지금 《우계속집(牛溪續集)》에 실려 있다.

병신년(1596, 선조29) 5월에 유 정승(柳政丞 유성룡(柳成龍))을 찾아가 만나 보고 난리에 격조했던 회포를 말하였으며, 인하여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두 능의 일을 언급하였다. 이때 유 정승이 우계를 사정없이 공격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기 소견을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병통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만약 대감께서 우계의 처지에 있었다면 대감의 말씀도 반드시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하자, 불쾌해하는 기색이 곧바로 얼굴에 나타났다. 이렇게 그의 속이 좁고 편협하니, 참으로 애석하다. -《동계일기(東溪日記)》-

서애가 정릉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동지(同知) 송찬(宋贊)이 먼저 들어가 봉심(奉審)하였다.……성모(成某)는 묵묵히 응답하지 않고 있다가 들어가 봉심한 지 얼마되지 않아 즉시 나와서, 홀로 대신(大臣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앞에 와서 성난 얼굴로 말하기를 ‘비록 신체가 보통 사람과 같다고 하나 이와 같은 점을 볼 수 없었고, 비록 얼굴이 위쪽은 풍후하고 아래쪽은 쪽 빠졌다 하나 이와 같은 점을 볼 수 없었다.’ 하고는, 송찬의 말을 일일이 들어서 하나하나 공박하였다. 그리하여 다만 ‘이와 같은 점을 보지 못했다[不見如是]’라는 네 글자를 가지고 그 말을 모두 어지럽혔으며, 말을 끝내자마자 유유히 물러갔으므로, 좌중에서는 서로들 얼굴만 쳐다보고 성모를 두려워하여 다시 변론하지 못하고 자리를 파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성모에게 쏠렸었다.……” 하였다.
서애는 또 허장(虛葬)한 일 등과 이 오봉(李五峯 이호민(李好閔))이 경연(經筵)에서 아뢴 일을 기록하고 결론짓기를 “비통함이 뼈에 사무친다. 그때의 일을 자세히 기록해서 신자(臣子)의 지극한 원통함을 붙이는 바이다.” 하였다. -《서애잡록(西厓雜錄)》-

살펴보건대, 선릉과 정릉의 일에 대한 본말은 《계갑록(癸甲錄)》과 연보(年譜)에 자세히 보인다. 서애는 체찰사(體察使)로서 먼저 능(陵)에 변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군관(軍官)을 시켜 시체를 거두어 모시게 하였으니, 이는 그가 능의 진짜 시체라고 여긴 것이고, 또 스스로 이것을 자신의 공(功)이라고 여기는 뜻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우계 선생은 신중히 결정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으므로, 서애가 이 때문에 자못 선생을 헐뜯은 것이다. 병신년 4월에 오봉 이호민이 서애의 지시를 받고 재변(災變)으로 인하여 다시 이 일을 논하면서 심지어는 ‘송찬이 상의(商議)할 때를 당하여 한 재신(宰臣)이 크게 불가하다고 말한 탓에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하였으니, 재신은 바로 우계 선생을 가리킨 것인데, 본래 이 일은 실제와 매우 다르다. -우계 선생이 약포(藥圃) 이해수(李海壽)에게 보낸 편지에 대략 말씀하기를, “함께 들어갔던 제공(諸公)들이 모두 묵묵히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나왔으니, 내가 어떻게 소견이 같고 다른 줄을 알아서 불가함을 반드시 말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송공 찬(宋公贊)도 알고 있다.” 하였다. ○ 봉심할 때에 대신(大臣)이 많은 관원들로 하여금 각기 소견을 자세히 써서 바치게 하였으므로 선생도 물러 나와 의논을 올린 것이다. 제공들이 애당초 대면하여 같고 다름을 의논한 일이 없는 것은 연보에 자세히 나와 있다.- 《서애잡록(西厓雜錄)》에 기록된 내용으로 말하면 더욱 비슷하지도 않다. 송공(宋公)이 의논을 올릴 적에 이미 스스로 의심스럽다는 주장을 하였고, 종실(宗室)인 부안정(扶安正)과 영원수(永原守)는 직접 일을 맡았던 사람으로 또한 증빙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더구나 당시에 봉심한 여러 신하들은 두세 사람 이외에는 모두 우계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로, 김응남(金應南)과 이괵(李) 같은 자는 선생과 상대하여 탑전(榻前)에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배척하고 공격하였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중대한 일에 있어 조정의 신하들이 마침내 겁을 먹고 선생에게 쏠려서 한마디 논쟁도 벌이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그랬을 리가 없다.
또 당시에 우계 선생은 상하(上下)의 사람들과 교분이 없어서 주장이 먹혀들지 않았고, 서애는 대신의 지위에 있어서 몸소 국정을 담당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뼈에 사무치는 지극한 원통함으로 여겼다면 이렇게 중대한 일에 대해 한번 차자(箚子)를 올려 공격하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오봉(李五峯)이 아뢴 뒤에 의논을 올릴 때에는 또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고 말하고, 사사로이 기록한 글에는 마침내 도리어 장황하게 애통하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대신이 국가를 생각하는 정성이란 말인가. 서애가 비록 두 능의 일 때문에 선생의 의견을 배척하고 억제하였으나 봉심할 때에 이미 참여하여 듣지 못하였으니, 그의 말이 결코 이처럼 과장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기록은 후생의 무리들이 견강부회하여 덧붙인 글에서 나온 것인 듯한데, 지금 영남(嶺南)에서는 서애의 의논이라고 전하면서 이것을 근거하여 우계를 공격하고 배척하고 있다. 그 전말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한갓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만 하니, 도리어 가소로운 일이다. -당시에 최흥원(崔興源), 심수경(沈守慶), 이덕형(李德馨), 이헌국(李憲國), 이제민(李齊閔) 등 10여 명이 헌의할 적에 모두 시신이 진짜가 아닌 듯하다고 의심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세상에 《운암잡록(雲巖雜錄)》이라는 책이 전해지는데 유서애가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 동서 분당(東西分黨)할 때의 일을 논하면서 오로지 우계와 율곡 두 분과 송강을 공격하고, 우계 선생에 대해서는 날조함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별세할 때의 일에 대해서는 조작한 말이 도리에 크게 어긋났는바, 자못 정인홍(鄭仁弘)의 무리도 말하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내가 생각건대 이것은 서애의 말이 아니니, 바로 매성유(梅聖兪)가 지었다는 벽운하(碧雲騢)와 같은 종류일 것이다. 서애는 갑신년(1584, 선조17) 율곡이 별세하던 날을 당하여 축수(祝壽)하는 자리를 파하였고, 임진년 이후에는 더욱 율곡을 추존하고 복종함이 지극하였으니, 어찌 말년에 이처럼 거짓된 글을 만들어서 심지어 산에 들어갔을 때에 의암(倚巖)이라고 호(號)를 고쳤다고 하기까지 하였겠는가. -율곡이 승려가 되어 산중에 들어갔을 때에 스스로 의암(義庵)이라고 호하였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의암(倚巖)이라고 바꾸어 써서 교묘히 승려 이름에 가깝게 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정릉의 일은 우계와 서애가 진실로 서로 비방하고 배척하였으나, 화의(和議)를 주장한 주본(奏本)의 일은 실로 서애가 주장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애는 여러 번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배척과 삼사(三司)의 논박을 받고서 또한 일찍이 그 사세를 밝혀 변론하였으니, 어찌 이것을 가지고 도리어 우계에게 떠넘길 수 있겠는가.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결코 이것은 서애 문하의 연소배들이 스승의 몇 마디 말씀을 주워 모아 망녕되이 자기의 의견을 덧붙여 우계와 율곡 두 분을 무함하느라 도리어 그 스승을 무함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또 우계가 별세하실 때의 내용은 위 글의 《서애잡록》에 말한 바와 서로 유사하여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다. 그렇다면 또한 굳이 이러한 말을 거듭 기록할 이유가 없으니, 똑같은 투식의 무함하는 글임을 알 수 있다. 혹 후생으로서 보는 자가 진위(眞僞)에 현혹될까 염려되므로 대략 여기에 변론하는 바이다.

정승 원두표(元斗杓)가 일찍이 말하기를,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가, 우계 선생이 여색(女色)을 실수한 일을 논하여 이르기를 ‘선생이 일찍이 창가에 쓰시기를 모년 모월일이라 하였으므로 어떤 손님이 이것을 보고 묻자, 우계는 「이날 우연히 모시는 계집종과 사통(私通)하였으니, 진짜를 어지럽힐 병폐가 있을까 염려되므로 기록했다.」고 대답하였다. 그 후 그 계집종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문잠(文潛)이라 했다.’ 하였다.” 하였다. -《남계집(南溪集)》-

살펴보건대, 남계(南溪)의 이 기록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내가 일찍이 노서(魯西) 선생이 가정에서 들은 것을 기록하신 내용을 보니, 여기에 이르기를, “임진왜란 때 우계 선생의 가솔들이 나누어 피난하였다. 창랑공(滄浪公)은 단신으로 선생의 명을 받들어 모친인 신 부인(申夫人)을 모시고 왜적을 피하여 용천(龍川)으로 갔다. 선생은 홀로 성천(成川)의 부름에 달려갔기 때문에 음식을 장만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일을 보살필 사람이 없었는데, 이때 문잠(文潛)의 어미가 열입곱 살의 나이 어린 계집종으로 성품이 꽤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여 선생을 따라갔다. 그리하여 용만(龍灣)과 영유(永柔), 정주(定州)와 해주(海州)에서 가시는 곳마다 매우 부지런히 일하여 정성을 다하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돌아와 연안(延安)의 각산(角山)에 우거하였는데, 이때 자녀들이 처음 와서 안후(安候)를 살폈으나 왜란이 아직 평정되지 못하여 중외(中外)가 짐을 지고 다시 피난해야 할 우려가 있었다. 온 집안에서는 계집종이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여 자녀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 것을 가상히 여겨 그 은덕(恩德)에 보답하려고 하였으며, 또 끝까지 선생을 따라가게 하여 간호하게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창랑공이 편지로 모친인 신 부인에게 여쭙고, 또 두 매씨(妹氏)인 남궁 부인(南宮夫人)과 팔송 부인(八松夫人)으로 하여금 선생에게 거두어 기를 것을 간곡히 청하게 하니, 얼마 후에야 선생이 웃으며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을미년(1595)에 문잠이 출생하였다. 그러므로 문잠의 별권(別券)에 그 내용을 자세히 기재하였다.……” 하였다.
전말(顚末)이 이와 같으니, 애당초 선생이 여색을 실수한 것이 아니다. 또 문잠이 출생했을 때에 그 어미가 이미 선생을 모시는 첩이 되었으니, 어찌 진짜를 어지럽힐까 우려하여 정을 통한 날짜를 창가 벽에 써 놓았겠는가. 잠야가 말씀한 것은 전하여 들은 말에 착오가 생긴 것이거나 혹은 당인(黨人)들이 거짓으로 지어낸 것일 터인데, 남계가 경솔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 것이 매우 온당치 못하니, 이것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처음 나뉜 것은 비록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서로 반목한 데에서 연유하였으나, 실제로는 심 청양(沈靑陽 심의겸(沈義謙))이 선묘(宣廟)의 원구(元舅 장인)로서 궁중에서 죄를 얻자, -이 사실은 대략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상소문에 보인다.- 동인들이 이 기미를 알고는 심의겸의 당이라 하여 서인들을 몰아붙여 모함하였다. 서인들은 비록 그 원인을 알고 있었으나, 또한 차마 죄 없이 심의겸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선조 때를 당하여 서인들이 하루도 조정에서 편안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은 전적으로 여기에 연유한 것인데, 신묘년(1591, 선조24)에 또 김공량(金公諒)의 모함까지 더하여 마침내 하늘에 닿을 듯한 화를 이루었으니, 아, 참혹하다.
계미년(1583, 선조16)의 화는 율곡에게서 시작되어 우계와 송강에게 화가 집중되었고, 신묘년의 화는 송강에게서 시작되어 우계에게 집중되었으니, 을유년(1585, 선조18)의 화는 계미년의 여파이고, 갑오년(1594, 선조27)과 임인년(1602, 선조35)의 화는 신묘년의 남은 불씨였다. 그리하여 한때의 선비들이 모두 이로 인해 화를 당하였는데, 율곡은 다만 일찍 별세하여 화를 면했을 뿐이다. 그러나 계미년과 을유년은 분쟁이 조정에 있고 심 청양을 함정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화가 적었던 반면, 신묘년 이후에는 참소하는 말로 간사하게 군주의 신임을 얻어 김공량을 매개로 삼았기 때문에 그 화가 컸으니, 우계와 송강이 기묘년의 전철(前轍)을 밟아 거의 화를 면치 못할 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송강이 건저(建儲)의 의논을 할 때에 조정에서는 모두 광해군(光海君)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으나, 이산해(李山海)는 김공량 -인빈(仁嬪)의 동생- 과 결탁하여 성상의 뜻이 신성군(信城君) -인빈의 아들- 에게 있음을 간파하고는 은밀히 참소와 이간질을 자행하였으며, 또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르기를, “송강이 장차 먼저 건저를 청하려 하니, 인빈 모자(母子)에게 불리할 것이다.” 하고, “우계가 또 근본이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성상이 마침내 크게 송강을 의심하여 은밀히 신성군의 장인인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으로 하여금 신성군의 집을 호위하게 하였는데, 송강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마침내 건저의 의논을 올리니, 성상이 매우 노여워하였다.
간사한 무리들이 이로 인해 화의 기틀을 격발하여 송강의 무리가 귀양 가고 그 여파가 이미 우계에게까지 미쳤다. 홍여순(洪汝諄)이 또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여 죽였다는 것으로 송강의 죄를 삼았으나, 실제로는 건저를 주장한 것이 죄가 되었고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였다는 것은 명분에 불과하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이홍로(李弘老)가 참소하여 구구절절이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하여 첫 번째로는 불행하게도 김지(金漬)가 세자에게 보위(寶位)를 전하자는 상소문을 올리고 또 선생을 장수로 삼자고 청하였으며, 두 번째로는 불행하게도 선생이 이천(伊川)의 부름을 받아 세자에게로 돌아갔다는 참소가 있었고, 세 번째로는 불행하게도 선생이 성천(成川)에서 의주(義州)로 들어갔는데 또 내선(內禪)을 도모한다는 모함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김지의 상소문에 은근히 집중시킨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조의 ‘경(卿)이 바로 의병장’이라는 비답과 ‘세자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느냐?’라는 물음이 있었으니, -이상 여러 말은 연보(年譜)에 자세히 보인다.- 이는 모두 송강의 건저하자는 의논이 빌미가 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이와 같았는데도 용만(龍灣)의 대각(臺閣)들은 시세를 알지 못하고 마침내 이산해를 귀양 보내고 김공량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다. 이에 성상의 뜻은 모두 우계와 송강이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고, 우계가 행조(行朝)에 올린 두 번의 차자 가운데에 궁중이 엄하지 않다는 간언(諫言)이 있어 더욱 성상의 기휘(忌諱)를 저촉하였다. 이 때문에 성상은 일찍이 노여움을 마음속에서 잊지 못하였는데, 다만 국세(國勢)가 매우 위급한 탓에 이것을 나타내지 못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갑오년(1594, 선조27)에 환도(還都)한 뒤에 송강은 사후(死後)에 처벌을 받아 삭탈관직당하였고, 우계는 주본(奏本)에 대한 책망을 당해 이것을 빙자하여 죄로 삼아서 성상의 전교가 심상치 않았으니, 김청음(金淸陰)의 이른바 ‘이홍로의 참소가 시종 행해진 것은 실로 선생이 이천에 있던 세자의 부름에 달려갔기 때문’이라는 것과, 명재(明齋)의 이른바 ‘성상의 노여움은 우계에 대한 중상모략이 쌓이고 쌓인 데서 연유하였는데, 다만 이 일에 나타났을 뿐이다.’라는 것이 모두 실상이다.
당인(黨人)들은 마침내 또 우계가 사주하여 최영경을 죽였다는 것으로 우계에게 죄를 돌렸으니, 우계와 송강의 죄목이 일관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당인들이 송강을 논죄할 적에 최영경을 죽인 것을 명분으로 삼고 건저를 말하지 않으며, 선조가 우계를 배척할 때에 주본을 명분으로 삼고 선위(禪位)를 도모한 일을 말하지 않아서, 상하가 서로 은폐하여 마음은 동쪽에 있으면서 목소리는 서쪽에서 내곤 하였다. 그러므로 우계와 송강의 죄가 모두 건저에 근원하였으나 그 죄목이 드러나지 않았다.
신축년(1601, 선조34)에 이르러 정인홍의 무리들이 우계를 끝없이 무함하고 헐뜯었으나, 주본의 일은 그들 또한 선조가 격분하여 낸 전교임을 알았기 때문에 아뢰는 말에 언급하지 않았으며, 최영경의 일은 선조 또한 당인들이 근거 없이 날조한 말인 줄을 알았기 때문에 전지(傳旨)에서 삭제하게 한 것이었다. 이것을 근거해 본다면, 우계에게 죄목을 붙일 구실이 없자, 동쪽에 번쩍 서쪽에 번쩍 하면서 이리저리 날조하여 ‘간당과 무리가 되어 군주를 버렸다’는 죄목을 어렵게 만들어 내어, 말하지 않은 것을 죄안(罪案)으로 삼아 사문(斯文)의 화가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으니, 아, 슬프다. 이는 모두 연보(年譜)와 제가(諸家)들의 기술에 섞여 나오나, 흩어져 나와 통일되지 못해서 후생들이 혹 본말을 모르므로, 한 통(通)의 말을 만들어서 여기에 드러내는 바이다.

또 살펴보건대, 제가(諸家)들이 말하기를, “이산해(李山海)의 참소가 이미 먹혀들자, 선조는 인빈(仁嬪)의 자녀가 끝내 서인들에게서 보호받지 못할 것을 깊이 염려하여 무릇 혼인하고 시집보낼 적에 모두 서인 측에 의탁하였다. 그리하여 네 옹주(翁主)를 오음(梧陰), 상촌(象村), 약봉(藥峯), 금계(錦溪)의 집에 시집보내었고, 장릉(章陵)의 배필을 정할 적에도 구팔곡(具八谷)의 집으로 하였으니, 서인의 당을 통렬히 미워하는 선조의 마음으로 볼 때 자녀들을 반드시 서인에게 시집보내고 장가들게 한 것은 간당(奸黨)의 참소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하루는 성상이 신공(申公 신립(申砬))에게 유언비어의 허실(虛實)을 은밀히 묻자, 신공은 백 명을 보호해 주어 송강이 이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그 후 인빈이 일찍이 여러 부마(駙馬)들에게 잔치를 베풀 적에, 담론하는 사이에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가 우연히 복수한다는 말을 언급하자, 인빈이 한탄하기를, “내 끝내 깊은 원한을 갚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여러 부마들이 인빈께서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있느냐고 묻자, 답하기를, “정철이 나의 자녀들을 모두 죽이려고 하였으니, 이는 나의 원수이다.” 하였다. 여러 부마들이 모두 오싹해져서 돌아와 그 집안에 이 사실을 전하였다 한다. 그렇다면 송강의 한 무리가 참형을 면한 것도 다행이라 할 것이다.
우계가 끝내 송강과 같이 화를 당하게 된 것은, 선조가 우계를 송강의 근본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성상의 하교에 이르기를, “성혼은 한때 여러 소인배들의 소굴 주인이 되었다.” 하여 반드시 송강의 죄를 우계에게까지 뻗치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이산해의 참소에 근원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계의 비문(碑文) 가운데에 이른 바 ‘요행히 서로 결탁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반드시 선생에게까지 아울러 화를 미치게 하려고 하였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만약 이것을 안다면, 갑오년의 주본을 배척한 것과 선생이 별세한 뒤인 임인년에 삭탈관직한 죄안(罪案)이 모두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상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모두 덧붙여 귀신과 물여우처럼 사람을 음해하는 소인들의 형상을 드러내는 바이다.


[주D-001]사축(司畜) : 사축서(司畜署)의 종6품 벼슬이다. 여기서는 사축에 제수되었던 최영경(崔永慶)을 가리킨다. 이후에도 사축, 혹은 최 사축(崔司畜)은 모두 최영경을 가리키는 것임을 밝혀 둔다.
[주D-002]왕량(王良)처럼 설설(屑屑)하다는 비난 : 왕량은 후한(後漢) 초기의 명사이다. 설설은 빈번하게 왕래함을 이른다. 당시 왕량이 자주 조정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높은 벼슬을 하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자, 그의 친구가 “그대는 조정에 나아가서 충언(忠言)을 하거나 기이한 계책을 세우지도 못하면서 무엇 하러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가?” 하고 비웃은 일이 있으므로 성혼을 왕량과 같다고 비판한 것이다.
[주D-003]공문중(孔文仲)이 …… 말이다 : 공문중은 북송(北宋) 때 사람으로, 성질이 강직하여 왕안석(王安石)의 청묘법(靑苗法)을 반대하였으며 동파(東坡) 소식(蘇軾)과 친하였다. 당시 동파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자, 동파와 사이가 나쁜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대간을 사주하여 동파를 탄핵하게 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주D-004]선인(先人) : 여기서는 윤증(尹拯)의 부친인 윤선거(尹宣擧)를 가리킨다.
[주D-005]송강장초(松江狀草) : 원제(原題)는 송강정문청공행록(松江鄭文淸公行錄)으로, 김장생(金長生)이 기록한 것이다.《沙溪先生全集 卷9》
[주D-006]공이 : 여기에서 ‘공’은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가리킨다.
[주D-007]내가 : 여기에서 ‘나’는 송강장초를 지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기리킨다.
[주D-008]건저(建儲)의 의논 : 건저는 저군(儲君) 곧 세자(世子)를 책봉(冊封)함을 이른다. 당시 선조(宣祖)는 왕비에게서 낳은 아들이 없고 후궁 소생의 광해군(光海君)이 인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세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송강 정철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인빈(仁嬪) 김씨(金氏)를 사랑하여 그녀가 낳은 순성군(順城君)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으므로 정철을 미워하게 되었다.
[주D-009]왼쪽 배로 들어간 것 : 간신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군주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쁜 짓을 자행함을 이른다. 《주역》 명이괘(明夷卦) 육사(六四)에 “왼쪽 배로 들어가 밝음을 상실한 군주의 마음을 얻는다.[入于左腹 獲明夷之心]” 하였는바, 왼쪽은 은벽(隱僻)한 곳으로, 곧 간사하게 군주의 신임을 얻는 것을 말한다.
[주D-010]국외(局外)의 사람 : 일을 담당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는바, 일을 담당한 자를 당국자(當局者)라 칭하는 데에서 생긴 말이다.
[주D-011]자로(子路)가 …… 않은 것 : 자로는 공자의 제자인 중유(仲由)의 자(字)이다. 위(衛)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인 남자(南子)는 평소 음행(淫行)이 있었는데, 공자가 위나라에 이르자, 남자는 공자를 만나 볼 것을 요구하였다. 공자가 부득이하여 남자를 만나자, 자로가 기뻐하지 않았다.《論語 雍也》
[주D-012]고양겸(顧養謙) : 고양겸은 당시 명나라의 흠차방해어왜 병부좌시랑 도어사(欽差防海禦倭兵部左侍郞都御史)로 경략(經略)의 임무를 띠고 우리나라에 온 인물이다.
[주D-013]신포서(申包胥) :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충신으로, 초나라가 오(吳)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진(秦)나라에 원병(援兵)을 요청하러 갔었다. 그러나 진나라가 곧바로 구원하려 하지 않자, 진나라 조정에 서서 며칠 동안 슬피 울며 간곡히 청한 결과, 진나라 조정에서 그의 충성에 감동되어 원병을 보냄으로써 오군(吳軍)을 물리칠 수 있었다.
[주D-014]기미(羈縻)의 계책 : 기미는 외국을 자국(自國)의 속국(屬國)으로 붙들어 두는 것으로, 곧 명나라가 왜국의 항복을 받고 화의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5]사문(斯文)의 장자(長者) : 당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영수 격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가리킨 말이다.
[주D-016]정강(靖康)과 건염(建炎) : 정강은 북송 흠종(北宋欽宗)의 연호(年號)이고, 건염은 남송 고종(南宋高宗)의 연호이다. 북송은 정강 2년(1127)에 금군(金軍)의 침공을 받고 도성인 변경(汴京)이 함락되었으며, 흠종과 부왕(父王)인 휘종(徽宗)이 금나라로 끌려가 변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고종이 즉위하였는데, 당시 화의를 주장하는 간신 진회(秦檜) 등의 말을 듣고 송나라는 끝내 금나라에게 굴복하였다.
[주D-017]내가 : 여기에서 ‘나’는 《노서집(魯西集)》의 저자인 윤선거(尹宣擧)를 가리킨다. 이하 출전이 《노서집》인 단락에 나오는 ‘나’는 이와 같다.
[주D-018]왕촉(王蠋)과 강만리(江萬里)의 비유 : 왕촉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충신이고, 강만리는 남송(南宋) 말기의 충신이다. 왕촉은 제나라 민왕(湣王)이 자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도(無道)한 짓을 자행하므로 초야에 은둔해 있었는데, 연군(燕軍)이 제나라를 침공하고 자신을 데려가려 하자, “충신은 두 군주를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받들지 않는다.” 하고 자결하였다. 강만리는 도종(度宗) 때 좌승상(左丞相)이 되었으나 간신 가사도(賈似道)의 미움을 받고 은퇴해 있었는데, 원군(元軍)이 쳐들어오자 물에 빠져 자결하였다. 이들은 모두 당시 조정에 있지 않고 초야에 은둔해 있었기 때문에 비유한 것이다.
[주D-019]기축년의 사변(事變) : 선조 22년(1589)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謀叛) 사건을 가리킨다.
[주D-020]이공의길지문(李公義吉誌文) : 이 글이 《남계집(南溪集)》 권3에는 경릉참봉이공묘갈명(敬陵參奉李公墓碣銘)으로 실려 있다.
[주D-021]선생 : 여기에서 선생은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를 가리킨다.
[주D-022]매성유(梅聖兪)가 …… 것이다 : 성유는 북송 때의 시인(詩人)인 매요신(梅堯臣)의 자이다. 벽운하(碧雲騢)는 원래 명마(名馬)의 이름인데, 당시 조정의 명재상인 범중엄(范仲淹)을 비방하는 내용의 책 이름이다. 이 책은 당시 매요신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위태(魏泰)라는 사람이 범중엄을 모함하기 위하여 매요신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 한다.
[주D-023]진짜를 …… 기록했다 : 계집종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을 경우 자신과 잠자리를 함께한 날짜를 계산하여 자신의 자식임을 확인함을 의미한다.
[주D-024]내가 : 여기에서 ‘나’는 우계연보보유를 편간한 윤광소(尹光紹)를 가리킨다.
[주D-025]남궁 부인(南宮夫人)과 팔송 부인(八松夫人) : 남궁 부인은 남궁명(南宮蓂)에게 출가한 우계의 첫째 따님을 이르며, 팔송은 윤황(尹煌)의 호로, 곧 윤황에게 출가한 둘째 따님을 이른다.
[주D-026]내선(內禪) : 안에서 선위(禪位)한다는 뜻으로, 곧 선조(宣祖)가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에게 선위함을 이른다.
[주D-027]네 옹주(翁主)를 …… 시집보내었고 : 오음(梧陰)은 윤두수(尹斗壽)의 호이고, 상촌(象村)은 신흠(申欽)의 호이고, 약봉(藥峯)은 서성(徐渻)의 호이고, 금계(錦溪)는 박동량(朴東亮)의 봉호(封號)이다. 선조(宣祖)의 첫째 딸인 정신옹주(貞愼翁主)는 서성의 아들인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인 정혜옹주(貞惠翁主)는 윤두수의 아들인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에게 출가하였고, 셋째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는 신흠의 아들인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에게 출가하였고,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는 박동량의 아들인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에게 출가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서인(西人)이었다.
[주D-028]장릉(章陵)의 …… 하였으니 : 장릉은 원종(元宗)의 능호(陵號)이다.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처음에는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었는데, 아들인 인조(仁祖)가 즉위함에 따라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팔곡(八谷)은 구사맹(具思孟)의 호로, 정원군의 장인이었는데, 뒤에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딸 역시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되었으며, 자신도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우계연보보유 제4권
연보후설(年譜後說) 신독재(愼獨齋)에게 여쭈어 수정(修訂)하였다. [노서공(魯西公)]


[문] 군자가 혹은 세상에 진출하고 혹은 은둔하며 혹은 말하고 혹은 침묵하는 데에 모두 각기 당연한 법칙이 있는데, 선생의 도는 아직 밝게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 알지 못하고 함부로 지껄이는 자들에 대해서는 진실로 굳이 말할 것이 없지만, 이른바 선생을 안다는 자들도 정(精)하지 못하고 자세하지 못한 병통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으로 선배들의 말씀과 행실에도 오히려 도리에 벗어난 부분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 해로움은 매우 심할 것입니다. 제가 그대와 함께 이것을 밝게 변론하고 자세히 말하여 당연한 법칙을 구명(究明)하려 하는 바입니다.
[답] 우계와 율곡(栗谷) 두 현자가 한 세상에 함께 태어나시어 뜻이 같고 도가 같아서 모든 행동을 옛사람을 표준으로 삼았다. -율곡의 출처는 명도(明道)가 온공(溫公)의 임무를 담당한 것과 같고, 선생의 출처는 한결같이 이천(伊川)을 따랐는데 만난 시의(時義)도 대략 같다.
○ 이천(伊川) 선생의 연보(年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가우(嘉祐) 4년(1059, 문종13) 진사(進士)에 응시하고는 다시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는데, 치평(治平)과 희령(煕寧) 연간에 근신(近臣)들이 여러 번 천거하였으나 이천 선생은 스스로 학문이 부족하다 하여 벼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원풍(元豐) 8년(1085, 선종2)에 고 황후(高皇后)가 처음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자, 사마광(司馬光)과 여공저(呂公著) 등은 이천 선생의 훌륭한 행실을 조정에 올렸다. 그리하여 원우(元祐) 원년(1086, 선종3) 3월에 부름에 달려가 숭정전 설서(崇政殿說書)가 되었는데, 재직한 지 여러 달이 되었으나 녹(祿)을 말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호부(戶部)로 하여금 특별히 녹봉을 지급하게 하였다. -선생의 계미년(1583, 선조16) 이전이 이와 같다.- 9월에 사마광이 별세하였는데, -율곡이 갑신년(1584, 선조17)에 별세한 것과 같다.- 2년(1087, 선종4) 7월에 공문중(孔文仲) 등에게 비방을 당하고 떠나갔다. 7년(1092, 선종9)에 직비각(直祕閣)과 판서경국자감(判西京國子監)에 제수되었는데, 소철(蘇轍)에게 배척을 당하자, 사직하는 글을 올리면서 유자(儒者)의 진퇴하는 도리를 지극히 논하였다가 또다시 동돈일(董敦逸)에게 탄핵을 받았다. -선생의 갑신년 이후가 이와 같다.- 8년(1093, 선종10)에 고 황후가 승하하고 철종(哲宗)이 친정(親政)을 하자, 직비각과 판서경국자감에 제수하는 명이 다시 내려졌으나 또다시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이때 양외(楊畏)가 소술(紹述)의 의논을 주장하여 간신인 장돈(章惇)과 여혜경(呂惠卿)이 다시 등용되어 사마광과 여공저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였다.- 소성(紹聖) 초년(1094, 선종11)에 당론(黨論) 때문에 추방당하여 전리(田里)로 돌아왔고, 4년(1097, 숙종2)에 부주(涪州)로 유배되었다. -말하는 자들이 사마광과 함께 서로 도와 악행을 하였다고 논죄하였다.- 원부(元符) 3년(1100, 숙종5)에 휘종(徽宗)이 즉위하자, 이천은 사면을 받아 낙양(洛陽)으로 돌아와서 다시 판서경국자감이 되어 봉직하였다. -이때 장돈과 채경(蔡京)은 죄를 받아 배척되고, 원우 연간의 재상인 사마광과 여공저 등은 관직이 복구되었다.- 문인 윤언명(尹彦明)이 이것을 매우 의심하자, 이천은 말씀하기를 ‘성상이 처음 즉위하여 내가 첫 번째로 큰 은혜를 입었으니,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거룩하신 뜻을 우러러 받들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벼슬할 수 없음은 이미 결정되었다.’ 하였다. -선생의 기축년(1589, 선조22) 이후가 이와 같다.- 숭녕(崇寧) 2년(1103, 숙종8)에 범치허(范致虛) 등의 탄핵한 글에 ‘간당(奸黨)의 천거로 벼슬을 얻었으니, 비록 일찍이 죄와 벌을 밝게 바로잡았으나 다시 서용(敍用)함은 너무 우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글을 지어 조정을 비방하였다.’ 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마침내 학도들을 모두 축출하고 다시 당적(黨籍)에 편입시켰다. 5년(1106, 예종1)에 다시 선의랑(宣義郞)에 제수되어 치사(致仕)하였고, 대관(大觀) 2년(1108, 예종3)에 집에서 별세하였는데, 낙양 사람들은 당적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장례에 회장(會葬)하는 자가 없었다.” -선생의 신묘년(1591, 선조24) 이후가 이와 같다.
○ 출처(出處)의 올바름과 어묵(語默)의 마땅함이 오현(五賢) 이래로 율곡과 우계 두 현자와 같은 분이 없는데, 불행히 조정이 분열되는 즈음을 당하여 좋아하고 미워함과 은혜와 원수가 모두 공정함에서 나오지 못하고,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견해만 주장하여 허실(虛實)이 서로 뒤섞이고 시비가 제대로 가려지지 않으니, 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율곡 선생은 계미년의 풍파(風波)만을 당하였을 뿐이어서 공론이 혹 거의 정해졌지만 우계 선생은 또 기축년의 변고를 당하였기 때문에 논하는 자들이 실로 많이 의혹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이제 이것을 분별하여 밝히려고 한다면 달리 찾을 만한 것이 없고 다만 선생의 연보(年譜)를 가지고 그 시(始)와 종(終)을 살펴본다면 출처와 어묵의 절도를 거의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의 사실이 비록 연보에 실려 있으나 시사(時事)의 전말은 《계갑록(癸甲錄)》에 더 자세히 기재되어 있으니, 송나라 역사를 가지고 참고해 본다면 계미년은 원우 연간과 같고 을유년(1585, 선조18)은 소성 연간과 같으며, 기축년은 원부 연간과 같고 신묘년은 숭녕 연간과 같으니, 율곡과 우계 두 현자의 도를 알려고 하는 자는 깊이 상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선생이 전후에 걸쳐 관직에 제수되었을 적에 상이 반드시 특별히 불렀으나 선생은 모두 겸손함을 지켜 굳이 사양하다가 을해년(1575, 선조8)에 이르러 처음 나왔으니, 평생 동안 군주의 부르시는 명에 응하여 나아간 것이 모두 다섯 차례일 뿐이다. 신사년(1581, 선조14)에 도성에 들어간 것은 공경하는 예(禮)가 지극하기 때문이었고, 계미년에 들어간 것은 율곡과 덕이 같기 때문이었으며, 기축년에 들어간 것은 성상의 마음이 깨달았기 때문이었고, 성천(成川)으로 달려간 것은 국란(國亂)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세자(世子)가 부르지 않았다면 또한 달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성천에서 의주(義州)로 달려갔던 것은 이미 분조(分朝)에 나아갔으면 의리상 마땅히 대조(大朝)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으니, 만약 성천에 가지 않았다면 의주에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미 나아간 뒤라 하더라도 의리에 옳지 않은 것이 있으면 곧 스스로 몸을 이끌어 물러나곤 하였다. 신사년에 물러난 것은 예우는 매우 정성스러웠으나 말과 계책이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갑신년에 물러난 것은 훌륭한 분이 별세하여 군자의 도가 사라졌기 때문이었고, 경인년(1590, 선조23)에 물러난 것은 예우가 소홀하고 건의한 것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갑오년(1594, 선조27)에 물러난 것은 모함하는 말이 매우 심하여 이에 현혹당했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국난(國難)에 달려가지 않았던 것은 부르는 명령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윤해창(尹海昌)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만일 관직을 제수하고 부르는 명이 있지 않다면 어찌 감히 대궐 아래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시종 나아가고 물러난 절도를 살펴보면 은혜로운 부름이 거듭 내려서 부득이한 뒤에야 나아갔다. 그러므로 부르는 명령이 있는데도 가지 않은 경우는 많이 있었으나 일찍이 부르는 명령이 없는데도 스스로 간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 선생이 전후에 걸쳐 올린 상소 중에 진정(陳情)하여 사직한 것을 제외하면, 별도로 진언(進言)하기 위한 상소문을 모두 여섯 차례 올렸을 뿐이다. 기묘년(1579, 선조12)에 상소를 올린 것은 선(善)이 사라지고 악(惡)이 자랄까 우려하였기 때문이었고, -이때 율곡이 상소하였다가 성상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이 《석담유고(石潭遺稿)》에 보인다.- 신사년(1581, 선조14)에는 군주와 백성을 위한 계책에 대해 상소하였고, 계미년(1583, 선조16)의 상소문은 치란(治亂)이 정해지는 계기를 논한 것이었고, 경인년(1590, 선조23)에 상소를 올린 것은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기 때문이었고, 임진년의 차자(箚子)는 국가를 흥복(興復)하기 위한 도모였고, -이천이 학교(學校) 때문에 상소하였었는데, 선생은 성천에서 올린 편의계사(便宜啓辭)를 올렸고 의주에서 시무차자(時務箚子)를 올렸으니, 분조와 대조에 진언한 것은 똑같은 의리이다.- 갑오년의 차자는 지난날의 잘못을 징계하여 앞으로 조심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그러나 비록 조정에 있을 때라도 의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또한 말씀하지 않았다. 신사년에 정인홍(鄭仁弘)이 정송강(鄭松江)을 논죄하여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최영경(崔永慶)의 무리가 모두 시끄럽게 떠들어 대었는데 -율곡이 이때 대사헌이 되어 조정하는 의논을 하였는바, 《석담유고》에 보인다.- 선생은 부름을 받고 서울에 있으면서 전후에 걸쳐 모두 일곱 번 상소문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한마디 말씀도 언급한 것이 없었다. 갑신년에 율곡이 별세하자, 상은 우계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심희수(沈喜壽)가 율곡의 처자식을 구휼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박사암(朴思菴)이 관직을 추증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계갑록》에 보인다.- 그런데 이때 선생은 미처 산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나 이에 대해 한 말씀도 언급하지 않았다. 기축년의 역옥(逆獄)에 사대부들이 관련되었는데, 선생은 부름을 받고 도성에 들어갔으나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삼가 선생이 말씀하고 침묵한 절도를 살펴보면 다만 말씀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만 세상을 바로잡고 백성을 보호하며, 군주를 높이고 국가를 흥복시키기 위한 계책에 대해 말씀하였을 뿐이요, 일찍이 수시로 일마다 크고 작음을 구분하지 않고 번거롭게 아뢴 적이 없었다. 무릇 진퇴(進退)와 어묵(語默)에 대한 의논은 다만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취에 근거하여 이와 같이 조목조목 나열하였을 뿐이다. 선생의 처의(處義)의 가부와 벼슬하거나 은둔한 데 대한 말로 전할 수 없는 은미한 말씀과 깊은 뜻은 연소한 후생들이 측량하여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문] 을유년 이후에 성상의 마음이 아득히 멀어지니,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이미 알았습니다. 기축년의 변고에는 비록 부르는 명령이 있었으나 용이하게 도성에 들어갔으니, 무슨 의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마땅히 나아가지 않아야 할 때에 나아간 것입니다. 설혹 잠시 나갔더라도 곧바로 물러나기를 청했어야 할 터인데, 그대로 머물러 겨울과 봄을 넘겼으니, 어찌하여 이처럼 오랫동안 체류하였단 말입니까. 임진년의 변고는 기축년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비록 부르는 명령이 없더라도 진실로 국난(國難)에 달려갔어야 옳을 터인데, 선생이 끝내 나아가지 않은 것은 또한 무슨 의리입니까? 이는 마땅히 나아가야 할 때에 나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또 이미 난리의 초기에 달려가지 않았다면 서쪽으로 파천할 때에 마침내 대가를 맞이하여 통곡하려 하였다는 것은 서로 맞지 않는 듯합니다.
[답] 선생이 기축년에 나간 것에 대하여 제자들의 의논도 서로 달랐다. 선생을 아는 자들은 가표(賈彪)가 도성에 간 것과 같다 하고, 알지 못하는 자들은 송강(松江)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동경(東京)의 당고(黨錮)의 화(禍)에 여러 군자들이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임을 당하였으니, 가표가 서쪽으로 간 것은 분란(紛亂)을 풀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으로 말하면 당고에 비할 바가 아니니, 선생이 나아간 것이 어찌 이 때문이었겠는가. 갑신년 율곡이 별세하자, 송강이 국정(國政)을 담당하여 선생과 함께 국사를 다스리려고 하였는데, 선생은 머리를 흔들고 산으로 돌아왔으니, -이귀(李貴)가 정해년에 올린 상소문에 보인다.- 기축년에 이르러 마침내 대번에 송강을 위하여 나아갔겠는가. 이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은 떠나가고 나아가는 즈음에 도가 옳고 의리가 옳으면 혐의와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결단하여 행하였으니, 계미년에 다시 도성에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을유년 이후에는 음기(陰氣)가 치성해서 대도(大道)가 거의 끊어지게 되었는데,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은 비로소 깨닫고는 마침내 계미년에 불렀던 것처럼 두 번이나 부르셨으니, 선생이 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정자(程子)가 서경국자감(西京國子監)의 관직에 나아갔던 것과 바로 똑같은 도리이다. 또 조정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머문 것은 본래의 뜻이 아니었으나 나아가면 사양하고 물러나는 데에도 번번이 한 철이나 몇 달을 허비하기 마련이니, 이는 형편상 당연한 것이다. 앞과 뒤를 참고해 보면 을해년에 들어갔을 때에는 4개월 만에 돌아왔고, 신사년에 들어갔을 때에는 12개월 만에 돌아왔고, 계미년에 들어갔을 때에는 전후에 걸쳐 16개월 만에 돌아왔고, 기축년에 들어갔을 때에는 7개월 만에 돌아왔고, 임진년 행차에는 2년 뒤에 돌아왔으니, 선생이 오래 머물고 빨리 떠난 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도리가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경인년 봄에는 큰 병환이 계속되어 거의 생명이 위태롭다가 겨우 소생하여 사세가 또한 이러하였는데도 다른 때에 비하여 오히려 빨리 물러났다. 그런데도 그대는 이것을 더디다고 여기는가.
○ 임진년의 난리 때에 문하 제자들의 의논은 선생이 조정에 달려가야 한다고 하였으나 선생은 끝내 달려가지 않았으니, 일반인들은 이것을 측량하여 알 수가 없다. 혹자는 이르기를, “당시 대죄(待罪)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고, 혹자는 이르기를, “장차 뒤따라가려고 하였는데 길이 막혀 미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선생의 뜻은 정해진 바가 있었으니, 예컨대 양구산(楊龜山), 윤화정(尹和靖), 호 문정(胡文定) 세 현자가 이미 행한 법칙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 양구산은 정강(靖康) 원년(1126, 인종4)에 국자 좨주(國子祭酒)로 정사를 말하다가 비방을 당하고 치사(致仕)하였는데, 건염(建炎) 원년(1127, 인종5)에 공부 시랑(工部侍郞)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정사를 논하였으며, 2년(1128, 인종6)에 늙고 병들었다 하여 떠날 것을 요청하였다. 뒤에 묘유(苗劉)의 변고와 황제가 여러 번 파천할 때에 모두 국난에 달려가지 않다가 소흥(紹興) 5년(1135, 인종13)에 집에서 별세하였다.
○ 윤화정은 정강 원년에 부름을 받고 경사(京師)에 이르러 호(號)를 받고 돌아왔다. 소흥 7년(1137, 인종15)에 숭정전 설서(崇政殿說書)로 부름을 받았으며, 8년(1138, 인종16)에 예부 시랑에 제수되었다가 9년(1139, 인종17)에 벼슬을 하직하고 떠나갔다. 전후로 금(金)나라 군대가 남쪽으로 침략했을 때에 한 번도 국난에 달려가지 않다가 12년(1142, 인종20)에 집에서 별세하였다.
○ 호 문정은 정강 원년에 태상 소경(太常少卿)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달려가 정사를 말하고 지통주(知通州)가 되었으며, 건염 원년에 부름을 받고 급사중(給事中)이 되었으나 사양하여 피하고 가지 않았으니, 이는 간신 황잠선(黃潛善)이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년에 장준(張浚)이 공(公)이 크게 쓸 만한 인물이라고 천거하여 또다시 급사중으로 부르고 어찰(御札)을 내려 재촉하였다. 공은, 건강(建康)은 동남(東南) 지방의 도회(都會)인바 황제가 이미 이곳에 와 있고 우대함이 이와 같다 하여 분발하는 마음을 품고 조정에 들어가려 하였는데, 지주(池州)에 이르러 황제가 오월(吳越) 지방으로 행차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양구산과 윤화정은 부르면 오고 부르지 않으면 오지 않았으며, 호 문정은 전에는 비록 불렀으나 가지 않고 뒤에는 중도에 돌아왔으니, 이 세 현자의 일을 아울러 살펴본다면 양구산과 윤화정은 지위가 시랑(侍郞)에 이르렀으니, 벼슬이 높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도 일찍이 국난에 달려가지 않은 것은 무슨 의리인가? 호 문정은 지주와 오월이 거리가 가깝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도 따라가지 않은 것은 무슨 의리인가? 세 현자의 진퇴의 의리를 안다면 선생이 평소 정한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촉(王蠋)과 강만리(江萬里)의 일을 선생이 스스로 끌어다가 비유한 것에서도 선생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 강만리는 도종(度宗) 원년(1265, 원종6)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제수되었는데 2년(1266, 원종7)에 가사도(賈似道)에게 시기를 받자, 네 번 상소하여 사당(祠堂)을 지키는 관원으로 녹(祿)을 받을 것을 청원하고 나가서 담주(潭州)를 맡았으며, 5년(1269, 원종10)에 또다시 참지정사를 제수받고 얼마 후 좌승상에 임명되었다. 6년(1270, 원종11)에 양번(襄樊) 지방을 구원할 것을 청하였으나 가사도가 응답하지 않자, 마침내 강력히 떠날 것을 요청하여 나가서 양주(楊州)를 맡았는데, 6년이 지나 지수정(止水亭)에서 별세하였다. -왕촉의 일은 상고할 곳이 없다. 강만리의 평생의 진퇴는 실로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 왕촉과 강만리는 본래 조정에 있다가 물러간 자이고 산야(山野)의 징사(徵士)가 아니었으나, 선생이 스스로 세 현자를 이끌어 비유하지 않고 다만 왕촉과 강만리로 비유하였던 것은 유자(儒者)로 자처하지 않으려고 해서였으니, 이는 스스로를 중히 여기지 않는 겸손함에서 나온 것이다.
선생은 밖에 있으면 들어가지 않아야 하는 의리를 평소 마음속에 정하고는 대죄(待罪)하여 감히 나아갈 수 없다는 뜻으로 범연히 사람들에게 말씀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말씀을 들은 자들도 진실로 깊이 알고 얕게 아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이른바 ‘부르지 않아도 마땅히 달려가야 한다’는 말은 도리를 아는 말이 아니다. 군자가 이 세상에서 장차 도를 행하려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면 순도(殉道)와 순신(殉身)을 한결같이 의리에 따라 결정해야 할 뿐이다. 옛사람 중에는 진실로 스승의 도를 지킨 자가 있고 벗의 도리를 지킨 자가 있었다. 비록 후세 사람들에 대해 말하더라도 도를 지키면서 물러나 은둔한 자가 있었고 출신(出身)하여 군주를 섬긴 자가 있었으니, 오직 한 가지 방도만으로 찾으려고 한다면 곤란하다.
문로공(文潞公)은 대신(大臣)으로서 더욱 공손하였고, 이천(伊川)은 포의(布衣)로서 자중 자애하였으며, 사마 온공(司馬溫公)은 신종(神宗)의 상(喪)에 부르지 않았는데도 들어갔고, 이천은 고 황후(高皇后)의 상에 불렀는데도 달려가지 않았다. 남송(南宋) 이후에 분연히 일어나 충절을 바친 충신과 열사들이 어찌 한두 명뿐이겠는가. 그러나 제현(諸賢)의 진퇴를 보면 소명을 기다리지 않고 나아간 분은 없었다. 선생은 본래 산야에 있는 몸이어서 원래 늘 조정에서 벼슬하던 분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인순왕후(仁順王后)와 인성왕후(仁聖王后)의 국상(國喪)에 모두 들어가 임곡(臨哭)하지 않았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당하여 또한 곧바로 달려가지 않은 것이니, 선생이 자처한 것은 한결같이 선현을 본받았으니, 여기에는 또한 반드시 그럴 만한 도리가 있을 것이다. 대저 부르는 명은 실로 나아가고 은둔하는 큰 한계이다. 부르는 명이 비록 내렸더라도 의리에 옳지 않은 점이 있으면 혹 굳이 나아가지 않으며, 만약 부르는 명이 애당초 내리지 않았다면 비록 스스로 나아가려 하더라도 방법이 없으니, 시세의 완급(緩急)은 논할 것이 못 된다. 대도(大道)가 밝아지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세상의 논자들은 대부분 의리에 어둡고 형세를 따르며, 세속의 견해를 가지고 유현(儒賢)을 논함을 면치 못하여, 반드시 한 조목으로 똑같이 측량하려 하니, 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대가를 맞이하여 곡하려던 계획은 당시 상황에서 행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평소의 의리로 보면 부르는 명이 없으면 스스로 달려갈 수가 없으나, 다만 대가가 파주(坡州)의 길을 지나가시니 정리상(情理上) 차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이처럼 곡하고 맞이할 계책을 세웠던 것이다. -곡하고 맞이하려던 계획은 대가가 파주를 지나갔기 때문이니, 만약 대가가 파주를 지나가지 않았다면 곡하며 맞이하려는 계획은 없었을 듯하다.- 또 어찌 전후의 행동이 크게 다르다고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대가가 갑자기 지나가서 미처 들어 알지 못하였으니, 미처 맞이하여 곡하지 못한 것은 형세이며, 이미 맞이하여 곡하지 못하였다면 병을 무릅쓰고 산협(山峽)으로 들어간 것 또한 형세이다. 그런데 이홍로(李弘老)는 “기꺼이 나와 맞이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정인홍(鄭仁弘)은 “먼저 스스로 멀리 피해갔다.”고 말하여 소인들의 모함하는 말이 끝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변명하려 하는 자들은 선생이 평소에 정하신 의리를 살피지 못하고, 마침내 이르기를, “선생이 실로 추후에 달려가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이루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만약 반드시 고삐를 잡고 떠나가려 하였다면 비록 임진 나루가 끊어졌더라도 어찌 달리 건너갈 방법이 없었겠는가.- 행장(行狀)에서도 이렇게 말하였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월사(月沙)가 지은 행장이니, 연보의 하권(下卷)에 보인다.
또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선생의 출처가 크게 의심과 비방을 받은 것은 그 빌미가 소인들이 송강을 미워하는 데에 있었는데, 이것을 창도(倡導)하여 이룬 자는 정인홍이다. 선생이 신묘년(1591, 선조24)에 송강이 유배갈 적에 임진 나루에 나가 작별하였으니, 이는 일반적인 인사(人事)라고 할 수 있다. 애당초 비방할 만한 단서가 아닌데, 갑오년에 성상이 엄한 전지(傳旨)를 내린 뒤에는 여러 사람들이 크게 떠들어서 마침내 말하기를, “기축년에는 달려가고 임진년에는 달려가지 않았으며, 벗이 지나가면 나와서 작별하고 군주가 지나가면 나오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다가 신축년(1601, 선조34)에 이르러 정인홍이 처음으로 ‘군주를 버리고 국가를 저버렸다’는 말로 지목하였는데, 먼저 문경호(文景虎)로 하여금 상소하게 하고 뒤이어 스스로 차자를 올려서 -이 차자는 《계갑록》에 보인다.- 왕촉과 강만리와 비견할 수 없으며 나아가고 물러감에 의리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간사한 말을 창도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의혹하게 하였는데, 수십 년 동안에 정인홍의 의논이 국중(國中)에 유행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선생을 존모(尊慕)할 줄 아는 자들도 의혹하는 마음이 없지 못하여 “기축년에 나아갔다면 임진년에도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선생이 전후에 걸쳐 나아가고 물러난 것은 실로 이천과 똑같다. 이천이 비각(祕閣)의 벼슬을 사양한 것은 장돈(章惇)과 여혜경(呂惠卿) 등이 다시 등용되었기 때문이었고, 서경국자감의 관직에 나아간 것은 장돈과 채경(蔡京) 등이 배척을 받아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선생이 기축년에 나아간 것은 간당(奸黨)들이 배척을 받아 축출되었고 은혜로운 부름이 거듭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임진년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은혜로운 부름이 내리지 않고 권간(權奸)들이 국정을 담당하였기 때문이었다.
우계 선생의 출처의 의리가 세상에서 크게 꺼리는 문제가 되어 다시 밝힐 수 없게 되었으니, 애통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대개 정인홍이 선생을 강력히 비방한 것은 단지 양홍주(梁弘澍) 때문이 아니요, -양홍주의 일은 최 사축(崔司畜)을 논한 일에 보인다.- 또 최영경 때문이 아니다. -박성(朴惺)의 상소문은 우계와 율곡 두 현자를 추악하게 비방하고 선생이 최영경을 죽였다고 무함하여 문경호의 상소와 똑같은 뜻이었으니, 이는 모두 정인홍이 사주(使嗾)한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장차 우계와 율곡을 억제하고 자신을 높이며, 회재(晦齋)와 퇴계(退溪)를 낮추고 남명(南冥)을 높이려고 한 것이니, 흉악하고 교활하여 음해하려 한 계책이 비단 편당(偏黨)하여 상대방을 전복시키고 알력하는 자의 행위일 뿐만이 아니었다. 이때 만일 정인홍의 계책이 이루어졌다면 회재와 퇴계, 우계와 율곡의 횡액을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영경은 일찍이 선생이 남명을 경시하고 퇴계를 높인다고 비방하였으니, 이 내용이 본집(本集)에 보인다. 최영경의 의논은 바로 정인홍의 의논이다. 정인홍이 지은 최영경의 행장에는 오로지 우계와 율곡을 무함하였고 끝부분에는 마침내 이정(李楨)과 황준량(黃俊良)을 들어 공격하였으니, 후일 퇴계를 공격한 수단이 이때에 이미 나타난 것이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정인홍을 처형할 적에 한 사람도 그가 평소 속이고 무함한 내용을 발명하여 조정에서 드러내어 분명하게 물리친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다만 그 몸만 처벌하고 그 의논을 처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인홍은 비록 죽었으나 그 의논은 죽지 아니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그의 말에 빠져서 반복하고 고질이 되어 을해년(1635, 인조13)에 이르러 극도에 달한 것이다. 이제 그대가 들은 내용도 정인홍의 말이 해독을 끼친 것이다.

[문] 출처의 의리에 대해서는 이미 분명한 가르침을 들었으나, 말씀하고 침묵하는 절차에도 아직 의심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계미년의 풍파는 애당초 이처럼 심하지 않았는데 선생의 상소문이 이것을 격발(激發)시켰으며, 세 사람을 귀양 보낸 조처가 이로 인하여 큰 사건을 이루었으니, 이는 마땅히 침묵하여야 할 때에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축년의 옥사는 지극히 엄하고 급하였는데, 선생이 한 번 말씀하면 이것을 풀어 줄 수 있었으나 선생은 도성에 들어간 날에 즉시 상소문을 올려 말씀하지 않았으니, 이는 마땅히 말씀하여야 할 때에 침묵을 지킨 것입니다. 한쪽 사람들이 원망하고 비방하는 것은 비록 굳이 따질 것이 없으나 군자의 대처하는 의리가 진실로 이와 같단 말입니까?
[답] 좋은 질문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변론하려고 하던 것이다. 아, 계미년에 군주의 예우는 천재일시(千載一時)라 할 수 있었다. 선묘(宣廟)께서 의지하고 도움을 바란 것은 무슨 일이었으며, 율곡이 담당한 것은 어떠한 임무였는가? 소인들이 이것을 질투하여 백방으로 참소하고 모함해서 대현으로 하여금 기어이 넘어지고 쓰러져 떠나가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음양(陰陽)의 소장(消長), 세도(世道)의 오륭(汚隆), 현사(賢邪)의 진퇴(進退), 국가의 치란(治亂)이 달린 일이다. 그런데 온 세상 사람들이 어두워서 이것을 두려워할 줄 몰랐으니, 그렇다면 선생이 상소문을 비록 올리지 않으려 하나 될 수 있었겠는가.
또 이른바 풍파를 격발시켰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때에 삼사(三司)에서 율곡을 가리켜 왕안석(王安石)과 같은 간신이라 배척하여 조정을 떠나가게 해서 -《계갑록》에 보인다.- 풍파가 이미 크게 일어났다. 혼탁한 물결이 제멋대로 흘러 형세가 장차 하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선생의 상소문은 바로 이것을 진정시키려 한 것이요, 격발시킨 것이 아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율곡이 설혹 요직을 맡았다 하더라도 모함하는 사람이 끼어 있으면 도를 행하려는 뜻을 이루기 어려워 끝내 반드시 기묘사화(己卯士禍)와 같은 화가 있었을 것이다. 선생의 이때는 바로 돈괘(遯卦)를 만나 상소문을 불태운 것에 부합하여 기미를 보고 떠나간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이 옳을 듯하다. 그러나 군자의 뜻은 의리를 바르게 하고 도를 밝힐 뿐이니, 이해와 성패는 계교할 바가 아니다.
○ 기축년 옥사에 이른 바 엄하고 급하였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아마도 이발(李潑) 등의 죽음을 말하는 것인가? 이발 등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처음 나오자, 상은 멀리 유배하라고만 명령하였다. -기축년 10월 2일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에 이산해(李山海), 정언신(鄭彦信) 등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이발과 백유양(白惟讓) 등은 역변에 대한 고변이 올라온 지가 한 달이 넘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오로지 정여립을 비호하고 반역을 도모한 내용을 엄폐하려고만 하였다. 이에 공론이 크게 일어나 11월 3일에 양천회(梁千會) 등이 비로소 상소하였고, 4일에는 백유함(白惟咸)이 상소하여 이발 등이 역적을 비호한 내용을 논하였다. 7일 대각(臺閣)에서는 정언지(鄭彦智)와 정언신 등을 탄핵하여 파면할 것을 논하였다. 그러나 상은 이때까지도 죄를 주지 않다가 11일에 역적 정여립의 조카인 정즙(鄭緝)의 초사(招辭)에 이발, 이길(李洁), 백유양, 정언지, 정언신, 홍종록(洪宗祿)이 연관되자, 상은 마침내 친히 국문(鞫問)하였다. 그러나 모두 멀리 유배하는 데에 그쳤다.- 그리하여 여러 번 공초에 나온 뒤에야 잡아다가 형벌하였다. -12월 12일에 낙안(樂安) 향교(鄕校)의 교생(校生)인 선홍복(宣弘福)의 공초에 또 이발, 이길, 백유양을 말하였고, 다른 역적들의 공초에도 모두 이들을 끌어다 대었다. 상은 마침내 크게 의심하고는 다시 잡아들이도록 명하여 이들이 모두 곤장을 맞아 죽었다.- 그리하여 평소에 정여립을 높이고 권장한 자들을 모두 죄주고 -정여립의 문서 중에 제천문(祭天文)이 있었는데, 군상(君上)의 잘못을 열거하였는바, 말이 지극히 흉악하고 도리에 위배되었다. 상은 진노하여 정여립과 친한 자들을 모두 연좌시켜 처벌하였다. 그리하여 김우옹(金宇顒), 윤기신(尹起莘), 유몽정(柳夢井), 정개청(鄭介淸)이 모두 유배되었다.- 그 나머지 사대부들은 비록 공초에 관련된 자가 있더라도 완전히 석방하였으며, -예컨대 정창연(鄭昌衍)은 정즙의 공초에 이름이 나왔으나 상이 곧바로 석방한 따위이다.- 과격한 대론(臺論)을 억제하고 -12월 6일 헌납 백유함, 정언 황혁(黃赫) 등이 홍여순(洪汝諄)을 논죄하여 ‘탐욕스럽고 불초하여 조정의 한 적(賊)’이라고 말하였다. 상은 이산해에게 전교하기를, “정여립과 사귄 사람들을 논죄하는 것은 진실로 옳으나 근일의 기상은 여러 사람에게 파급되는 조짐이 있는 듯하니, 과격한 의논을 억제하라.” 하고는 황혁을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상소문에 과격하게 말한 자들을 준엄하게 책하였으니, -12월 14일에 정암수(丁巖壽) 등이 글을 올려 시배(時輩)들의 잘못을 비난하자, 상은 이산해, 유성룡을 위유(慰諭)하고 정암수 등 10명을 하옥시키라고 명하였으며, 특별히 유성룡을 이조 판서로 임명하였으니, 이는 정암수에게 배척당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옥사(獄事)가 애당초 대단히 엄하고 급한 실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이 어찌 대번에 상소문을 올릴 수 있었겠는가. -설사 당시 옥사를 다스릴 적에 다소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처벌의 경중을 아뢰는 것은 유사(有司)가 해야 할 일이니, 자기 지위를 벗어나 상소문을 올리는 것은 선생이 중도(中道)에 처하는 도리가 아니다.
대개 역옥(逆獄)은 무고(誣告)가 아니고, 간당(奸黨)은 사류(士類)가 아니다. 군자가 처의(處義)함에 있어서는 실로 그에 합당한 도리가 있으니, 내 우선 분명히 말하겠다. 옛날 송(宋)나라 원우(元祐) 연간에 당파가 나뉠 적에 주광정(朱光庭)이 소식(蘇軾)을 탄핵하고 공문중(孔文仲)이 이천(伊川)을 공격하였는데, 당시에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이것을 편파적인 의논으로 돌렸었다. 그러다가 후에 주자(朱子)가 곧바로 촉당(蜀黨)을 간당이라고 칭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마음에 공사(公私)의 구별과 도에 사정(邪正)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뒤에 촉당을 장돈(章惇)과 채경(蔡京)처럼 심하게 대하지 않는 까닭은 이들이 모두 장돈과 채경의 화를 당했기 때문이다. 만약 장돈과 채경이 그때에 나오지 않았다면 촉당은 바로 장돈과 채경의 무리일 뿐이다. 가령 형서(邢恕)가 역적을 모의하였는데 장돈과 채경이 이에 연관되었다면, 장돈과 채경을 억울하다고 하여 그를 아까워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때에 이천이 만약 은혜로운 부름을 받았다면 과연 소인들에게 미움받는 것을 혐의하여 감히 나아가지 않았겠는가? 이미 나아간 뒤에는 과연 장돈과 채경을 위하여 글을 올려서 그들을 구원하였겠는가? 반드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을유년에 간당들은 정여립을 높이고 믿어 유종(儒宗)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성스럽고 현명하신 군주가 위에 계시어 유종을 해치려던 계획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도(世道)와 사문(斯文)의 화를 논한다면 어찌 송나라 소성(紹聖) 연간의 여러 간신들과 다르겠는가. 정여립이 역적을 모의하였을 때에 이발 등이 연관됨을 면치 못했다면 공초에 관련된 자가 신문을 당하고 악한 자들과 한 당이 된 자들이 유배 가는 것은 모두 다 소인들이 스스로 화를 부른 것이다.
선생이 이 당시에 나갈 때에 이미 피할 만한 혐의가 없었으니, 어떻게 상소하여 이들을 풀어 줄 수가 있겠는가. 불행히 신묘년(1591, 선조24)의 화는 숭녕(崇寧) 연간에 신법당(新法黨)의 잔당들이 도리어 원우(元祐)ㆍ원부(元符) 연간의 현자들을 죄준 것처럼 간사한 말이 제멋대로 행해져서 속이고 과장함이 끝이 없었다. 그리하여 역적을 역적이 아니라 하고 간신을 간신이 아니라 하였으며, 옥사의 빌미가 편파적인 의논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 말을 들은 자들은 내용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는 선생은 의당 특별히 상소문을 올려 계미년에 율곡을 위해서 한 것처럼 변론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행장에서는 경인년 봉사(封事) 가운데에 다시 삭제한 일부분을 수록하여 반드시 풀어 주려고 한 이치를 증명하려 하였으니, 애석함을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경인년 봉사의 주된 뜻은 실로 백성을 길러 나라를 보전하려는 데에 있었다. 옥사를 가혹하게 하지 말고 형벌을 신중하게 하자는 조항의 내용은 대신을 죽이지 않고 화가 사대부에게 많이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을 조정의 아름다운 일로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상소문의 끝부분에 이러한 내용을 초하였으나 또한 때가 늦었다 하여 다시 삭제하였는데, 행장에서는 이것을 특별히 들추어 말해서 마치 참으로 상주(上奏)하려 한 것처럼 하였으니, 이는 본지를 크게 잃은 것이다.- 이제 그대 역시 사람들의 말에 가려져 마침내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 소인을 두려워할 줄만 알고 군자를 두려워할 줄은 모르기 때문이다.

[문] 말하고 침묵하는 절도는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송강이 옥사를 처리할 적에 하필 선생이 여기에 참여하여 들어서 한쪽 사람들의 비방을 불렀단 말입니까?
[답] 이것은 그렇지 않다. 선생이 도성에 들어가신 것이 이미 당연한 일이라면 옥사에 참여하여 들은 것은 의심할 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생은 송강과 이미 정분(情分)이 두터웠으니, 송강이 묻는데 어찌 대답하지 않으실 수 있으며, 선생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또한 어찌 말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음에 대답하고 경계하는 말씀을 해 주어 송강의 사업이 실로 볼만한 것이 많았다. -예컨대 정언신 등을 구원한 일이니, 연보에 보인다.- 이것을 가지고 선생을 흠잡는다면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원망과 비방이 몰려온 것 때문에 선생의 행동에 의심을 품는다면 이는 크게 옳지 않으니, 내 근본을 따져 일일이 말하겠다.
선생이 비방을 들은 것은 실로 율곡에게서 시작되었고 송강에게서 시작되지 않았으며, 송강의 화는 실로 계미년의 건저(建儲)에서 조짐하였고 기축년의 옥사에서 조짐하지 않았다. 변간소(辨奸疏) 하나를 가리켜 붕당을 한다고 비난하고, 세 사람을 귀양 보내는 일을 도와 결단한 것을 지목하여 소인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비방을 야기하고 화를 초래한 시초이다. 정여립이 처음에는 강학한다는 명목으로 우계와 율곡을 속이고는 뒤에는 배반하여 이발 등에게 붙어서 도리어 두 현자를 해쳤으니, 사람들은 모두 정여립이 극악무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이발 등은 정여립이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여 곧 제일의 인물이라고 칭하였으며, -갑신년 겨울에 정여립이 이발, 백유양, 김우옹과 함께 정승 노수신(盧守愼)의 천거에 올랐다.- 성상이 형서(邢恕)와 같다고 배척하여 정여립의 반복하는 행적이 분명하게 드러났는데도 비호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을유년에 서익(徐益)과 이경진(李景震) 등이 상소문을 올려 정여립이 율곡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들어 번복하는 내용을 폭로하자, 상은 말씀하기를, “정여립은 지금의 형서이다.” 하였다. 승정원에서는 아뢰기를, “정여립이 뒤에 이모(李某)에게 절교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였다. 《계갑록》에 보인다.- 기축년에 역변이 올라오자 소인들은 마침내 이것을 율곡의 문인들이 모함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심지어는 고변(告變)한 자를 처벌하고 원흉을 석방하려고 하기까지 하였으며, -정언신은 국청(鞫廳)에서 고변한 자를 신문하려고 하였으며, 탑전(榻前)에서 정여립을 변호하고 구원하였다. 그리고 백진민(白振民)은 관학(舘學)의 상소한 자들을 거론하려 한 등의 일이니, 《계갑록》에 보인다.- 이윽고 반역한 형상이 탄로나 소인들이 스스로 패망하였으니, 비유하면 독약인 오훼(烏喙)를 먹다가 스스로 중독된 것과 같다.
소인들은 현자를 무함하고 악한 자들과 붕당을 한 것이 스스로의 화근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하지 않고 도리어 송강을 질시하여 원망이 선생에게까지 미쳤다. -11월 8일에 송강이 우상에 임명되었고 26일에 선생이 부름을 받고 도성에 들어갔다.- 악한 자와 같은 무리가 된 죄를 면하려 하였고 아울러 정여립까지도 신원(伸冤)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옥(逆獄)을 사화(士禍)라 하고 송강이 분풀이를 하였다고 해서 법에 연좌된 자들은 -예컨대 한백겸(韓百謙)이 이진길(李震吉)의 시신을 거두다가 연좌된 것과 같은 따위이다.- 모두 송강이 얽어 죄에 빠뜨린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다만 무식한 자들이 이렇게 말할 뿐만 아니라 유식한 자들까지도 이렇게 말하며, 다만 입으로 말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 감히 이것을 책에 썼으며, -예컨대 한음(漢陰)의 유고(遺稿) 중에 임해군(臨海君)의 일을 논하며 말하기를, “정적(鄭賊)이 실정을 다 말하지 않고 도망하였으니, 이 옥사의 통쾌함이 기축년보다 낫다.”고 한 따위이다.- 다만 이것을 사사로이 전할 뿐만 아니라 -예컨대 《동각잡기(東閣雜記)》에, “기축년의 역옥은 다만 도(逃) 자를 가지고 정여립을 죄주고, 적도(賊徒)들이 나와 자복했음은 말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마침내 이것을 국사(國史)에 기재하기까지 하였다. -예컨대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정여립이 반역한 내용을 기재하지 않은 따위이다.- 그리하여 흑백(黑白)과 사정(邪正)이 서로 뒤바뀌게 하려고 하였으니, 어찌 저들이 이것을 알지 못해서 이렇게 하였겠는가.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자기들의 말을 펴서 후세를 속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송강이 옥사를 다스리는 일을 맡지 않았다면 모르거니와 이미 옥사를 다스리는 일을 맡았다면 비록 사람을 살린 실제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을 모함했다는 명목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요, 선생이 송강과 친하지 않았다면 모르거니와 이미 송강과 친했다면 비록 파산에 있었더라도 원망과 비방이 또한 반드시 미쳤을 것이다.
최영경의 옥사는 선생이 이미 물러난 뒤에 있었는데, -경인년 5월에 선생이 파산(坡山)으로 돌아왔는데 한 달이 지난 뒤에 홍여순(洪汝諄)이 장계를 올려 최영경이 체포되었다.- 소인들은 오히려 감히 ‘모함하여 죽였다’는 명목을 선생에게 가하였으니, 이 또한 서울에 있으면서 참여하여 들었기 때문이겠는가. 이에 대해 논하건대, 소인들의 원망과 비방이 더하고 덜함을 굳이 말할 것이 없고, 선생의 거조(擧措)의 잘잘못을 굳이 변론할 것이 없다. 다만 계미년과 기축년의 일을 가지고 앞뒤를 참고하여 본다면 선생의 도가 저절로 분명해진다. 성상의 마음이 깨달음을 논한다면 기축년에 부른 것은 계미년에 부른 것과 마찬가지이고, 소인의 정상을 논한다면 기축년의 간사함은 또한 계미년의 간악함과 같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의리를 논한다면 계미년에 혐의와 어려움을 피하지 않은 것은 또한 기축년에 혐의와 어려움을 피하지 않은 것과 같고, 말하고 침묵하는 도리를 논한다면 계미년에 상소문을 올려 간당(奸黨)들을 배척한 것은 또한 기축년에 간당들을 비호하는 상소를 하지 않은 것과 같으며, 비방의 가볍고 무거움을 논한다면 기축년에 간사한 자들과 당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계미년에 외척인 심의겸(沈義謙)과 당이 되었다고 말한 것과 다름이 없으며, 화(禍)의 크고 작음을 논한다면 신묘년에는 군주가 다만 싫어하고 박대함을 보였을 뿐이니, 을유년에 천부(天府)에 이름을 쓴 것에 견줄 수가 없다. -이 일은 모두 《계갑록》에 보인다.- 그렇다면 기축년에 조정에 나간 것은 계미년과 다름이 없는데, 계미년의 비방이 기축년보다 더 심하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미년의 일을 비판하지 않고 마침내 기축년의 일을 비판하였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아마도 계미년은 율곡이 정권을 맡았고 기축년은 송강이 정권을 맡았으니, 선생이 율곡과 일을 함께 하면 가(可)하다고 여기고 송강과 함께 일을 하면 불가하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선생의 도는 그렇지 않다. 계미년에 나아간 것은 율곡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도를 행할 만하면 나아가는 의리 때문이었으니, 도를 행할 만하였으므로 율곡이 배척을 당하면 선생이 구원해 주었고 율곡이 이미 별세하시자 선생이 마침내 물러난 것이다. 그리고 기축년에 나아간 것은 송강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교제가 예에 맞으면 나아가는 의리 때문이었으니, 교제가 예에 맞았으므로 예모(禮貌)가 이미 쇠하자 선생이 마침내 물러나시어 송강이 비록 조정에 있더라도 선생이 머물지 않은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관찰한다면 정분(情分)의 친함과 의논의 통함은 선생이 율곡과 송강에게 있어서 차이가 없을 듯하고, 진퇴의 도리는 한결같이 의리에 맞는지만을 살펴 따랐을 뿐이니, 그 사이에 율곡과 송강을 어찌 구분하였겠는가.

[문] 이발(李潑)은 한편의 명류(名流)였습니다. 또한 일찍이 율곡과 우계 두 현자를 높이고 믿었으니, 뒤에 비록 잘못 당파에 들어갔으나 간당으로 지목하여 정여립과 한 조항에 넣은 것은 너무 원통하지 않습니까? 최영경은 고상한 처사였습니다. 선생이 이미 ‘효도하고 공경하며 깨끗이 수행한다’고 인정하였는데, 그가 화를 당할 적에 끝내 한 번 상소하여 그를 위해 해명하지 않았던 것은 어째서입니까?
[답] 이발은 문학이 뛰어나고 명성이 있어 실로 후배들의 영수(領袖)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경세제민(經世濟民)에 대해서는 이모(李某)를 허여하고 도학(道學)에 있어서는 성모(成某)를 추존한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그 마음이 또한 어둡지 않다고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계미년 이후에는 간사한 의논을 하는 자들의 종주가 되었단 말인가. 을유년의 계사(啓辭)에서는 -이 계사는 《계갑록》에 보인다.- 음흉하게 해치고 교활하게 속였으니 정여립이 탑전에서 올린 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여립의 말은 《계갑록》 중에 있는 을유년에 올린 이경진의 상소문에 자세히 보인다.- 심지어는 두 현자의 죄를 열거하여 죄명을 천부(天府)에 쓰기까지 하였으니, 당비(黨碑)와 학금(學禁)의 행위를 이발 등이 몸소 저지른 것이다. 공문중(孔文仲)과 임률(林栗) 등이 한 번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배척하자, 곧 만세의 죄인이 되었다.
이발이 두 현자를 배척하기 전에는 그래도 명류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미 두 현자를 배척한 뒤에는 그 심술의 간사하고 편벽됨이 정여립과 차이가 없으니, -정해년 이귀(李貴)가 상소하자, 이발은 여러 말을 늘어놓아 변명하였다. 이에 상은 하교하기를, “대저 신하들은 번복하는 태도가 없어야 한다.” 하였다.- 간사한 무리 중의 괴수라는 명칭이 진실로 당연하다. 천고(千古)의 부월(鈇銊)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다만 거듭 역옥(逆獄)에 걸려 실정이 다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를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의론을 펴서 끝내 관작을 회복시키기에 이르렀으니, 괴이하지 않은가. -신묘년에 홍여순(洪汝諄) 등이 송강을 논죄하여 유배 보내고, 갑오년에는 김우옹(金宇顒)이 송강을 논죄하여 삭탈관직하였으나 이발 등에 대해서는 끝내 감히 신원(伸冤)을 청하지 못하였는데, 정미년에 한호(韓浩)라는 자가 처음으로 감히 신원을 요청하자, 선조(宣祖)는 엄하게 책망하였다. 경술년에 삼사(三司)에서 이발 등을 신원할 것을 청하자, 광해군 또한 준엄하게 배척하기를, “기축년의 옥사는 내 이미 잘 안다. 이발 등이 역적질을 하다가 죽었으니, 실로 스스로 취한 것이다. 백유양(白惟讓)이 역적 정여립과 주고받은 편지에 신하로서 감히 말할 수 없는 내용이 있었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후세 사람들이 그 실상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는 한갓 신원하라고만 말하니, 내 삼가 비웃는다.” 하였다. 정승 이원익(李元翼)은 의논하기를, “기축년의 일이 일어났을 때에 신이 임무를 받고 외지에 있어서 백유양의 편지에 있는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오나, 이발 등이 교유(交遊)를 신중히 하지 않은 죄로 지극한 화에 빠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하였고, 정승 이항복(李恒福)의 의논에는, “이발 등이 평소 역신(逆臣)을 이끌어 등용하였으니, 연루되어 죽은 것은 형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이 당시 국청(鞫廳)에서 의논하여 아뢴 한 조항을 기억하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진신(搢紳)의 사이에 한 명의 정여립이 나온 것도 이미 큰 변고이니, 어찌 두 명의 정여립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니,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일반 신하와 어찌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자처하는 방도는 머리를 숙이고 죽기를 청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백유양의 편지에 말한 내용은 대체로 성상의 분부와 같습니다. 이 때문에 신은 일찍이 아뢰기를, ‘백유양은 역적의 이름은 없앨 수 있으나 관직을 복구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갑자년에 송강을 신원할 것을 요청하였을 때에 영상 이원익은 의견을 올리기를, “정철을 신원하자는 의논은 제가 저지하고 싶은 뜻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죄를 받은 백유양 등을 함께 신원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고, 우상 신흠(申欽)은 아뢰기를, “이발 등이 죄를 받을 적에 가산을 적몰(籍沒)한 것은 너무 지나쳤습니다.” 하였다. 상은 백유양은 신원하지 말고 이발만을 신원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하여 이발은 마침내 송강과 함께 관작이 회복되었으니, 진실로 놀랄 만한 일이다. 이발 등은 역적의 이름은 없앨 수 있으나 관작을 회복시켜서는 안 된다.
최영경은 남명(南冥) 문하에 출입하여 초탈하여 세속적인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기풍이 있었다. 그러므로 초년에는 선생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는데, 뒤에는 마침내 이발과 정여립, 정인홍 등과 서로 붙어서 마침내 도리어 율곡을 비방하고 헐뜯었으니, -조중봉(趙重峯)이 병술년에 올린 상소문에 보인다.- 낭패하여 자신을 그르친 것이 극에 달하였다. 선생이 비록 친구 간의 정으로 대우하여 기개가 높다고 칭하였으나 -송강과 박여룡(朴汝龍)에게 답한 편지이니, 연보에 보인다.- 사림의 공론이 불학무식(不學無識)하다고 단정한 것은 참으로 올바른 의논이다. 처사(處士)라는 두 글자를 어찌 함부로 최영경에게 쓸 수 있겠는가. 기축년 옥사로 말하면 당시 역적들의 공초(供招)에 실로 길삼봉(吉三峯)이 최삼봉(崔三峯)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백사(白沙)의 기록에 보인다.- 삼봉이 이미 최영경의 호가 아니라면 곧 최영경을 가리켜 삼봉이라고 한 것은 진실로 터무니없는 말이다. -당시의 근거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삼봉을 날조하여 길(吉)을 최(崔)로 만들었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말이다. -정인홍이 지은 최영경의 행장이다.- 역적들의 공초가 사방에 전파되어서 멀고 가까운 지역에서 떠들어 대어 마침내 영남과 호남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가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최영경을 잡아 가두었으니, -전라 감사 홍여순(洪汝諄)은 한편으로는 치계(馳啓)하고, 한편으로는 경상 병사(慶尙兵使) 양사형(梁士瑩)에게 공문을 보내어 최영경을 잡아 가두게 하였다.- 당시에 최영경에 대한 의심이 어떠하였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선생은 사람들이 의심하는 가운데에서 그를 보증하고 밝히기 곤란한 처지에 있는 그를 위하여 입증하여 처음에는 정언 황신(黃愼)에게 말씀하였고 -이 내용이 연보에 보인다.- 또 담양 부사(潭陽府使) 김여물(金汝岉)에게 말씀하였으며, -경인년 여름에 김공 여물이 남쪽 지방에서 와서 상소하여 최영경이 삼봉임을 증명하려 하였는데, 선생의 한 말씀을 듣고는 몸소 찾아와 자세히 물었다. 선생이 말씀하기를, “최영경이 비록 병통이 있으나 어찌 군신 간의 의리를 모르는 자이겠는가.”라고 하니, 김여물은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그에게 딴마음이 없음을 보증하실 수 있습니까?” 하였다. 선생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김여물은 마침내 상소문을 올리지 않았다.- 또 정송강에게 편지를 보내었고 아들을 보내어 위문하였으며 초상에 쌀을 보내어 부의(賻儀)하였으니, -모두 연보에 보인다.- 젊었을 때의 뜻과 행실을 생각하여 군부(君父)를 시해하는 일은 의리상 따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증한 것이다. -선생이 최영경을 논한 내용에 ‘책을 읽지 아니하여 식견이 부족하고, 말년에 방탕하고 전도(顚倒)되어 지키는 바를 파괴하였다’는 등의 말씀이 있는데, 선생의 행장에는 다만 ‘효도하고 공경하며 깨끗이 수행하였다’고 하여 그를 칭찬하고 구원하여 풀어 준 말씀만 뽑아 놓아서 마치 그의 평생을 다 허여한 듯한 부분이 있으니, 이는 본지를 잃은 듯하다.- 이는 최영경이 선생을 만나 끝내 후세의 비판을 면한 것이다. 선생이 최영경을 위해 한 일이 이미 많았다. 그러나 초야에 있으면서 특별히 상소하는 것은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최영경을 위하여 이것을 바란단 말인가.

[문] 선생이 최영경을 이와 같이 후대하였는데, 정인홍이 지은 최영경의 행장에는 이른바 최영경이 성모(成某 성문준을 가리킴)에게 답할 적에 “내가 너의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답] 이는 최영경의 말이 아니고 바로 정인홍이 거짓으로 지어낸 말이다. 최영경이 처음 석방되었을 때에 선생은 아들에게 위로하는 말을 전하게 하여 “우리들은 옛 교분이 아직 끊기지 않았으니, 죽기 전에 한 번 서로 만나 보고 싶으나 기대할 수가 없다.” 하자, 최영경은 사례하며 선생의 자제에게 이르기를, “나 또한 다시 너의 아버지를 만나 보고 죽으려 하나 어찌 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진실을 전한 말이다. 최영경이 감옥에 갇혀 대질당할 때에 역적과 편지를 왕래한 사실을 수긍하지 않은 까닭에 장차 심문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송강이 선생의 말씀으로 인하여 곡진하게 구원하여 풀어 주려 하였다. -이 내용이 연보에 보인다.- 이러한 때에 선생의 위문을 받고 선생의 자제를 대하였다면 마땅히 기를 꺾고 사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니, 원망하는 말을 어찌 대번에 입에서 낼 수 있겠는가. 이 한 가지 일을 근거해 보면 행장 전편(全篇)이 터무니없는 거짓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성상의 하교가 지극히 엄하여 대론(臺論)이 함께 나오게 되자, -《계갑록》에 보인다.- 최영경이 다시 옥에 갇혀 공초한 내용이 황란(慌亂)하였으니, -이 말이 백사의 기록에 보인다.- 이는 굳이 책망할 것이 못 된다. -선생이 박여룡(朴汝龍)에게 답한 편지에 ‘최영경이 전도되고 착란하여 그 행위를 굳이 책망할 것이 못 된다.’는 등의 말씀이 있으니, 연보에 보인다.- 대체로 최영경의 행장 한 편은 실로 정인홍이 터무니없는 말을 날조하여 선생을 모함하려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그가 가리켜 인용한 것이 대체로 형체가 없고 조리가 없는 말이요, 또 부연하고 꾸며서 실정을 어지럽혔으니, 요컨대 당시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후세의 귀를 막으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온 세상 사람들이 어두워서 그에게 속임을 당하고도 깨닫지 못하니, 애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문] 송강이 양천경(梁千頃)을 사주해서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였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선생이 송강과 절교하지 않았다 하여 의심하는 것은 또한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답] 이 부분이 바로 송강을 논하기 좋은 곳이다. 송강이 충성스럽고 청백하며 강직하고 지조가 있음은 율곡이 인정한 바이니, 악한 사람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것이 바로 그의 평소 성품이었다. 계미년에 이미 저와 같은 원한을 맺었었는데, 기축년에 옥사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자 선한 사람을 좋게 여기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예컨대 정개청(鄭介淸)이 일찍이 박사암(朴思菴)을 사사하였다가 뒤에 마침내 배반하였는데, 기축년 옥사 때에 배절의론(排節義論)을 추문(推問)하자 정개청이 이것은 주자(朱子)의 말씀이라고 대답하니, 정송강은 큰소리로 꾸짖기를, “네 어찌 주자를 안단 말인가. 주자도 배사(背師)에 대한 말씀을 했단 말인가.” 한 일과, 또 송강이 일찍이 말씀하기를, “정개청은 배반하지 않은 정여립이요, 정여립은 이미 배반한 정개청이다.”라고 한 일 등이다.- 취중에 말씀을 함부로 하여 마치 마음속에 있는 원한을 시원하게 푼 듯한 부분이 있었다. -예컨대 최영경이 계미년 이후에 항상 말하기를, “박순(朴淳)과 정철을 반드시 효시(梟示)한 뒤에야 정사를 제대로 할 수 있다.” 하였다. 그러다가 최영경이 처음 국문을 당하게 되자 이때 송강이 취중에 손으로 자기 목을 그으며 말하기를, “저분이 나의 머리를 이처럼 자르려 하였다.” 한 일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으니, 그가 궁중에 들어가 아뢰어 구원하고 풀어 준 실상을 어떤 사람이 알아주고 믿겠는가. -송강이 이발을 구원하여 아뢰기를, “조정의 사대부들이 역적과 사귀고 친한 것은 그를 좋아하여 그의 악함을 알지 못한 것에 불과하니, 천하에 어찌 두 정여립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백유양을 구원하여 아뢰기를, “경악(經幄)에서 한 명의 정여립이 나온 것도 이미 큰 변고이니, 어찌 두 명의 정여립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정언신을 구원하여 아뢰기를, “송나라는 일찍이 한 명의 대신도 죽이지 않았으니, 충후(忠厚)함을 숭상할 만합니다.” 하였으며, 최영경을 구원하여 아뢰기를, “집에 있을 때에 효도하고 우애하여 영남 지방의 사론(士論)도 지극히 추존하고 복종합니다.” 하였다. 또 익명시(匿名詩)를 추문할 때에 그의 작품이 아님을 밝혔다. 이는 모두 《계갑록》에 보인다.- 그러다가 경인년에 건저(建儲)의 의논이 있었는데, 이것이 신묘년(1591, 선조24)의 화를 빚어내게 되었다. -《계갑록》에 자세히 보인다.- 그리하여 송강의 죄상을 제기한 것은 모두 성상의 뜻에서 나왔으니,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다만 성상의 뜻을 받들어 송강을 논죄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성상이 송강을 깊이 죄책하였으나 그 죄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고 아랫사람들은 송강에게 원한을 쌓았으나 공격할 구실을 찾아내지 못하였는데, 마침내 최영경의 일을 가지고 말하였으니, 이는 송강이 건저의 일로 죄를 얻었는데, 선비를 죽였다고 명분을 삼은 것이다.
이에 최영경의 일에 대한 의논이 크게 한때에 펴졌으니, 홍여순은 자신이 장계를 올린 책임을 면하려 하여 마침내 삼봉에 관한 말이 양천경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핑계 대었다. -홍여순은 양천경을 끌어대고 스스로 빠져나가려 하였다. 그러므로 성상의 말씀에 “양천경이 이미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입에 올렸다면 전라 감사가 들은 대로 장계한 것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양천경을 잡아다가 엄하게 심문할 것을 요청하여 반드시 송강을 끌어들인 뒤에 그만두려 하였으니, 어린아이도 무함임을 알 수 있다. -홍여순 등이 송강을 논죄한 계사(啓辭)에 이른 바 유생을 꾀어서 상소하게 하였다는 말은 계미년 김우옹이 올린 차자에 이미 이런 내용이 있었다. 전후로 송강의 죄목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나 이 몇 마디 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그렇다면 양천경을 사주했다는 말은 바로 터무니없는 말로 사람들을 속이는 옛 태도인 것이다. 《계갑록》에 자세히 보인다.- 이후로 선비를 죽였다는 말이 국시(國是)로 정해져서 사람들이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니, 상하의 의논이 모두 선생이 송강과 절교하지 않았다 하여 의심하는 것이다. -선조의 비답에 “정철이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인 뒤에도 성모(成某)는 그와 절교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하였으므로 여러 소인배들이 구실로 삼았다. 《계갑록》에 보인다.- 끝내는 정인홍이 감히 선생에게 선비를 죽였다는 죄명을 옮겨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연소한 후생들이 그 말을 익숙히 듣고는 선생의 교제에 대하여 의아해함을 면치 못하니, 참으로 가소롭다. 그대가 만약 진실로 송강이 악한 사람을 미워하는 꼿꼿한 선비이고 최영경이 정송강을 죄주는 좋은 낚싯밥이며, 신묘년 사화가 기축년 옥사(獄事)를 다스린 잘못 때문이 아니고 양천경을 잡아다가 심문한 것이 홍여순이 스스로 화를 모면하려는 계책이었으며, 선생이 송강을 시켜서 처사(處士)를 죽였다는 말이 정인홍이 날조한 것임을 안다면 다시 의심할 만한 내용이 없을 것이다.

[문] 그대의 말씀과 같다면 선생에 대한 논의는 결정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말들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답] 세도(世道)가 상실되고 의리가 어두워져서 사람들이 유현(儒賢)의 학술을 알지 못하고 오직 편당(偏黨)하는 의논만 안다. 그리하여 유현을 끌어다가 편당에 넣고 편당을 끌어다가 유현에 붙여서, 크고 작음을 분변하지 못하고 공(公)과 사(私)가 서로 어지러워졌다. 그러므로 편벽되고 방탕한 말들이 이 사이에 멋대로 유행해서 율곡과 우계 두 현자의 도가 세상에 크게 밝혀지지 못한 것이다. 일찍이 호 문정(胡文定)이 아뢴 글을 보니, 이르기를 “사마광(司馬光)과 여공저(呂公著)가 첫 번째로 처사 정이(程頤)를 천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포위(布韋)의 선비를 천거하여 높이 강연(講筵)에 두었는데, 숭녕(崇寧) 연간에 이를 크게 막고 금하였습니다. 그 뒤 정이의 문인들이 차츰 등용되었으나 그 사이에 이익과 녹봉에 뜻을 둔 자들이 그의 말씀에 가탁하여 자신의 계책을 펴고자 해서 하락(河洛)의 학문이 거의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중병(仲幷)은 이천의 학문이 근일에 성행한다고 말하나 신은 이천의 학문이 끊기지 않음은 가느다란 실낱과 같다고 여기오니, 어찌 그의 말을 귀로 듣고 입으로 내는 것을 가지고 그의 학문이 성행한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오늘날의 일도 이와 비슷하다. 대도(大道)가 이미 어두워지자, 진실과 거짓이 서로 뒤섞이니, 공자(孔子)의 학문을 하는 자들도 잘못 듣고 깊이 살피지 못하고는 마침내 ‘군자도 반드시 완전한 군자가 되지 못하고 소인도 반드시 완전한 소인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니, 옳고 그름을 누가 바로잡아 주며 제멋대로 떠드는 의논이 어느 때에나 정해지겠는가. 낙학(洛學)에 대한 금지가 효종(孝宗) 때에 이르러서도 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주자(朱子)와 장남헌(張南軒) 같은 여러 현자들도 오히려 당시의 간사한 말을 그치게 하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의논이 정해짐이 어찌 쉽겠는가. 반드시 백년 후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문] 선생이 갑오년에 한 번 나간 일에 대해서도 오히려 의혹이 없지 못합니다. 그런데 선생이 해주(海州)에 있을 때에 이미 체직되었다면 그대로 물러났어야 옳을 터인데, 부르는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도성에 들어간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리고 주본(奏本)을 논한 한 가지 일도 시비가 있으니, 나아가고 물러나며 말하고 침묵하는 도리에 끝내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답] 해주에서 서울로 들어간 일은 선생 스스로 자세히 말씀하였다. 난리가 아직 평정되지 못하여 감히 곧바로 물러날 수 없으므로 봄이 되면 몸소 대궐 아래에 나아가서 물러날 것을 요청하고 물러나려 한 것이 바로 선생의 뜻이었다. 전후에 친우들에게 보낸 편지를 한 번 살펴본다면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갑오년 봄에 이공 해수(李公海壽)에게 보낸 세 차례의 편지이니, 본집에 보인다.- 선생이 의주(義州)에서 정주(定州)로 오고 정주에서 영유(永柔)로, 영유에서 해주로, 해주에서 서울로 들어온 것은 본래 똑같은 걸음이었다. 모두 뒤에 처져 나중에 이르렀는데, 다만 이 갑오년에 도성에 들어간 것이 더 지체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혹 의아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어찌 알지 못하고 이렇게 하였겠는가. 이때에 중전(中殿)이 막 해주에 머물고 계시므로 선생이 남아서 호위하였으니, 그렇다면 이는 아직도 조정에 있는 것이다. 조정에 있다면 어찌 임금의 부름을 기다려 나아가겠는가. 옛날 분조(分朝)가 이천(伊川)에 머물고 있을 때에 선생이 세자의 명령에 달려갔으니, 이는 이미 조정에 선 것이다. 조정에 섰다면 대조(大朝)에 달려가 문안하는 것은 또한 임금의 부름을 기다릴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갑오년에 한성(漢城)으로 달려온 것과 임진년에 의주로 들어간 것은 똑같은 의리이다. 다만 임진년에는 군주를 버렸다는 참소가 있어서 사람들이 도성에 들어가는 것을 좋게 여겼으므로 다시는 물러나야 함을 말하지 않았고, 갑오년에는 주본(奏本)을 논한 일에 대한 비방이 있어서 사람들이 조정에 들어가는 것을 걱정하였으므로 마침내 도리어 나아간 일을 비판하는 것이니, 이는 한갓 지엽적인 훼방과 칭찬을 따를 줄만 알고, 의리의 근본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주본을 논한 일로 말하면 선생이 전후에 걸쳐서 변론한 것이 자세하게 남아 있으며 -추포(秋浦) 황신(黃愼)에게 답한 두 통의 편지이니, 본집에 보인다.- 당시의 사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계갑록》에 보인다.- 왜적이 요청한 강화(講和)를 허락하는 일은 저들에게 항복을 받는 것이요 중국에서 하는 일이었다. 명나라 군대가 뒤에서 압박하고 심유경(沈惟敬)이 중간에 있었는데, 왜적들이 스스로 국왕을 봉해 줄 것을 청하고 공물을 바치겠다고 하였다면 이는 항복을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싸움도 명나라 장상(將相)들의 일이요, 화친도 명나라 장상들의 일이어서 우리나라가 이렇다 저렇다 할 수가 없었으니, 그렇다면 중국에서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군문(軍門)에서 반드시 이기기를 힘쓰지 않고 왜적을 봉해 주기만을 힘써 청한 것은 비록 한스러우나 또한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가 스스로 힘을 헤아리지 않고 곧바로 명나라 장상들을 황제에게 일러바쳐 고 총독(顧摠督)이 마침내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까지 하였다. -계사년 겨울에 김수(金晬)가 사신으로 갔을 적에 명나라 장상들이 황제를 속이고 은폐하는 내용을 아뢰자, 명나라 장상들은 크게 유감으로 생각하여 심지어는 조선의 군주와 신하가 교활하고 간사하여 은덕을 원한으로 갚는다는 등의 말을 하기까지 하였다. ○ 갑오년 2월 총독 고양겸(顧養謙)이 요동(遼東)에 있으면서 우리 사신인 허욱(許頊)을 막아 도성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참장(參將) 호택(胡澤)을 보내어 다음과 같은 자문(咨文)을 보내었다. “왜노(倭奴)가 이유 없이 그대의 나라를 침략하여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왕경(王京)과 개성과 평양 세 도회(都會)를 점거하고 그대의 토지와 인민의 8, 9할을 점유하였으며 그대의 왕자와 배신(陪臣)들을 사로잡아갔다. 이에 황상(皇上)이 크게 노하시고 군대를 일으키시어 한 번 싸워 평양을 격파하고 다시 진격하여 개성을 얻으니, 왜노들은 끝내 왕경으로 도망하여 잡아갔던 왕자와 배신들을 송환하였으며, 2000여 리의 땅을 수복하였다. 여기에 쓰인 내탕금(內帑金)이 적지 않고 군사와 말이 죽은 것도 적지 않다. 우리 조정에서 속국(屬國)을 대함에 은혜와 의리가 이처럼 지극하며 황상의 망극한 은혜가 또한 이미 지나치시다. 이제는 이미 군량을 다시 운반할 수 없고 병력을 다시 사용할 수가 없다. 왜노들 또한 우리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항복할 것을 청하며 또 국왕을 봉해 주면 공물을 바칠 것을 청원하였다. 천조(天朝)에서는 마땅히 저들을 봉해 주고 공물을 바칠 것을 허락하여, 포용하여 외신(外臣)을 삼아서 왜적을 몰아내어 모두 바다를 건너가게 하고 다시는 그대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게 할 것이니, 분란을 해결하고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은 그대 나라의 장구한 계책을 위해서이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양식이 다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니, 무엇을 믿고 또다시 병력을 요청한단 말인가. 우리는 이미 병력과 군량을 그대의 나라에 줄 수가 없고, 또 왜노에게 봉해 주고 공물을 받는 것을 끊을 경우 왜노들은 반드시 그대의 나라에 노여워하여 그대의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니, 어찌 일찍 스스로 이에 대한 계책을 세우지 않는가. 옛날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곤욕을 당할 적에 어찌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고기를 씹어 먹고 싶지 않았겠는가마는 우선 치욕을 참으면서 기다려 자신은 신하가 되고 아내는 또 첩이 되었다. 그대의 나라가 왜노를 위해 중국에 신첩으로 삼아 달라고 청하여 스스로 화를 늦추고 서서히 도모한다면 이는 월왕 구천의 군신들이 행했던 계책보다 나은 것이다. 이것을 만일 참지 못한다면 고집스러운 소장부(小丈夫)의 소견일 뿐이요, 복수하고 치욕을 씻는 영웅의 일이 아니다. 그대가 왜노를 위해 봉해 주고 공물을 바치도록 우리 조정에 요청하라. 만약 황제의 허락을 얻는다면 왜노는 반드시 더욱 중국에 감사할 것이요 또 조선에게도 고맙게 생각하여 반드시 전쟁을 그만두고 떠나갈 것이니, 왜노가 떠나가거든 그대 나라의 군신들이 마침내 노심초사하고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옛날 구천이 복수했던 것처럼 하라. 이렇게 한다면 천도(天道)는 반드시 돌아오는 법이니, 어찌 왜노에게 보복할 날이 없겠는가.”- 만약 이것을 따르려고 한다면 화친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어 사람들이 비난할 것이요,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명나라 장상들을 격노시켜 사세가 진실로 위급하게 되었을 것이다. -계사년 12월에 보내온 황제의 칙서(勅書)에 이르기를, “짐은, 조선의 국왕이 비록 외번(外藩)이라고 칭하나 조회 오고 빙문(聘問)하는 예문(禮文) 이외에는 원래 왕에게 한 명의 병사와 한 가지 부역도 번거롭게 요구한 일이 없었다. 오늘날의 일은 다만 대의(大義)로 분발하여 조선의 쇠약함을 불쌍히 여겨서 보전해 주려는 것이니, 진실로 조선국왕이 짐에게 은덕을 바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대군이 우선 철수할 것이니, 왕은 지금 도성에 가서 나라를 잘 다스려라. 한 자나 한 치의 땅도 짐은 관여하지 않겠다. 만일 또다시 우리가 국경을 넘어가 구원해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 그대가 이것을 믿고 대비하지 않는다면 당(堂) 위에 앉아 밑에 불을 지르고는 따뜻하다고 여기는 화가 장차 다시 미칠 것이다. 만약 갑자기 다른 변고가 있다면 짐은 왕을 위하여 도모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이미 신신당부하여 옛사람이 와신상담한 의리를 가지고 권고하는 것이니, 지금 왜적의 침략이 조금 덜하니, 국가의 모습을 다시 펼 수 있는 때이다. 이제부터는 국가가 보전되고 망하며 다스려지고 혼란한 관건이 모두 왕에게 달려 있고 짐에게 달려 있지 않으니, 경계하고 삼가라.” 하였다. 그러고는 인하여 세자에게 명해서 호부(戶部)와 병부(兵部)의 관리들과 협동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머물면서 군무(軍務)를 총리(總理)하게 하였다. 갑오년 정월에 유정(劉綎) 등의 군대가 영남에서 모두 철수하여 돌아갔다.- 이는 당시 조정의 계책이 이미 명나라에 진주(陳奏)하기로 허락하였으나 그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영상 유성룡이 차자를 올려 고양겸의 뜻을 따를 것을 청하자, 상은 호택을 대면하여 진주할 것을 허락하였으며, 선생이 등대(登對)하자 상은 주본(奏本)의 큰 요지를 물었는바, 이 일이 연보에 보인다.- 선생은 화친은 중국에 달려 있고 우리나라는 관여하지 않으니 그렇다면 대의에 이미 손상될 것이 없으며, 명나라 조정에 왜적의 항복을 받아 줄 것을 요청하는 일은 원수인 왜적에 애걸하는 것과는 다르니 사리에 또한 불가할 것이 없다고 여겼으니, 진대(進對)한 뜻이 이와 같을 뿐이다. -당시에 준엄하게 논하는 자들은 고양겸의 자문을 결코 따를 수 없으니,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면 차라리 요동으로 건너갈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왜적을 봉해 주기를 청하는 일은 불가하지만 주본의 내용 가운데에 고양겸의 자문을 자세히 기재하고 형편을 분명히 아뢰어서 명나라 장상들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은 의리에 무방하다고 여겼으니, 연보에 자세히 보인다.- 권한이 우리에게 있으면 화친이고, 권한이 적에게 있으면 항복이니, 전연(澶淵)의 맹약은 권한이 자신에게 있었고 정강(靖康)의 맹약은 권한이 적국에게 있었다. 명나라 조정이 왜적의 항복을 받아들여 주(周)나라 선왕(宣王)의 계책으로 전연의 일을 행한다면 설령 우리나라가 그 사이에 낀다 하더라도 어찌 건염(建炎) 연간의 나약한 군신과 똑같이 취급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화친하는 일이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못하느냐 하는 논쟁으로 말하면 따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화친이 만약 의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비록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해로움이 없는 것이요, 만약 의리에 위배된다면 비록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해로움이 있는 것이니, 성패와 이해는 원래 굳이 논할 것이 못 된다. 다만 의리의 옳고 그름을 밝힐 뿐이다.
○ 혹자는 말하기를, “명나라 장상(將相)들이 화친에 기대어 적을 급히 공격하지 않다가 끝내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초래하였으니, 만약 황제의 인자함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는 어육(魚肉)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상서(尙書) 석성(石星) 등은 애당초 조선을 구원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서 ‘후퇴하여 압록강을 지키자’는 의논을 물리치고는 4만 명의 군대를 징발하여 삼경(三京)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피폐해지자 허물을 잡힐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심유경(沈惟敬)의 말을 따라 화친하는 일로 적을 물리치려고 하였던 것이니, 이는 모두 우리나라를 위하여 계획한 것이다. 그러므로 왜적과 약속한 세 가지 조항에 ‘다만 봉해 주기만을 요구하고 공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였고, 또 ‘한 명의 왜병(倭兵)도 부산(釜山)에 남아 있지 않는다’ 하였고, 또 ‘영원히 조선을 침략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석 상서의 본심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화친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천자가 크게 노하고는 특별히 12만 군대를 징발하여 기필코 왜적을 섬멸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우리의 위급함을 도와주려 해서가 아니요 풍신수길(豐臣秀吉)의 행실을 괘씸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관백(關白)이 명나라 조정의 큰 은혜를 저버리고 관리와 군사들을 살해하며 조선에 큰 해독을 끼쳤다 하여, 석성을 하옥시키고는 다시 군대와 군량을 징발하여 일념으로 왜적을 토벌하였다.- 지금 이미 지나간 자취를 가지고 살펴본다면 갑오년에는 전쟁을 중단하고 정유년에는 크게 토벌하여, 한 번은 회유하고 한 번은 위엄을 보였는데, 이는 시종 우리나라에 은덕을 베푼 것이었으니, 싸우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면서 한갓 화친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어리석게 굴어 끝내 멸망에 이른 자와 비교한다면 큰 차이가 있다.
○ 혹자는 또 말하기를, “선생이 이때에 만세(萬世)에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의논을 고집하지 않고 마침내 목전의 고식지계(姑息之計)를 주장하였으니,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국정을 담당한 자에게 동요된 것이 아닌가.” 하는데, 이는 또 그렇지 않다. 선생이 애당초 올바른 의리를 버린 것이 아니요, 또한 이해(利害)의 사사로움에 미혹된 것이 아니다. 다만 명나라 장상들을 격노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선생이 황추포(黃秋浦)에게 답한 편지에 -주본의 일을 논한 편지로 본집에 보인다.- “당초 통화(通和)할 적에 우리나라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았으니, 이제 우리로 하여금 왜적과 동맹하게 한다면 대의를 지켜 죽음을 무릅쓰고 사양하여야 하는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하였으니, 진실로 만일 선생이 병신년의 일을 담당하였다면 끝내 반드시 대의를 지켜 사신을 보내라는 심유경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병신년에 명나라의 두 사신이 일본으로 향하자, 평행장(平行長)은 심유경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조선의 사신을 청하여 함께 가라.” 하였으니, 이는 대마도(對馬島)를 위한 것이었다. 심유경이 자신의 조카인 심무시(沈懋時)를 보내어 사신을 보낼 것을 강력하게 청하자, 조정에서는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다가 명나라 사신이 일본에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황신(黃愼)을 정사(正使)로 임명하여 뒤따라 보냈다. 《계갑록》에 자세히 보인다.- 추포 또한 이 의리를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왜국(倭國)에 사신 갔을 때에 선생에게 글을 올려 지난날의 견해가 잘못이었음을 사죄하였다. -황신의 편지에, “지금의 사세는 자연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고명(高明)께서 오래전에 이미 먼저 실정을 아셨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종전에 함부로 비방한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추포는 처음에는 화의가 반드시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화친하는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선생의 답서에 책망하고 깨우쳤으니, -편지는 본집에 보이는바, 그 내용은 대략 이르기를, “보내온 편지에 이리이리 말하였는데, 이는 미진한 점이 있다. 당초 나의 망녕된 의논인들 어찌 이것을 옳다고 여겼겠는가. 애당초 내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위급함을 다소 풀려고 한 적이 없다. 원컨대 그대가 조정에 돌아온 뒤에 상소를 올려서 나라가 반드시 멸망하게 된 형세를 통렬히 아뢰고는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고 지킬 계책을 하도록 요청할 것이요, 한갓 고식지계를 다행으로 여기지 말라.” 하였다. 추포가 일본에서 돌아온 뒤에 상소하여 군대를 징발하여 대마도를 소탕해서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만대(萬代)에 걸쳐 반드시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의논이니, 목전의 고식지계를 일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선배들이 중도(中道)에 대처한 의리는 진실로 후생들이 쉽게 측량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임진년 이전에는 권간(權奸)들이 국정을 담당하여 안팎에서 결탁하고 안일에 빠져 ‘화친을 믿을 수 있고 적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하며 중봉(重峯)의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자들은 참으로 죄인이다. 그러나 갑오년의 일로 말하면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명나라 조정에서 한 것이니, 이 어찌 국정을 담당한 자의 잘못이겠는가. -계사년 4월에 정승 유성룡이 동파(東坡)에 있었는데 이때 왜적이 용산(龍山)에 있는 주사(舟師)에 글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유 정승은 이 편지를 받고는 명나라 장수 사대수(査大受)에게 보였으며,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에게 달려가 보고하였다. 이 제독은 마침내 심유경에게 화친하는 일을 시작하게 하였으니, 만약 유 정승을 허물한다면 마땅히 이 일을 허물해야 할 것이다. 고양겸의 자문에 대해서는 유 정승도 어쩔 수가 없었다.- 병오년(1606, 선조39)에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우호(友好)를 청한 일은, 비록 저들의 사신인 의지(義智)와 현소(玄蘇) 등을 묶어서 저들에게 되돌려 보낸다 하더라도 오히려 우리의 분한 마음을 조금도 씻을 수가 없었는데, 도리어 마침내 이유 없이 통신(通信)하여 정상적인 교린(交隣)을 하듯이 하였다. 그리하여 의지와 현소의 발자취가 동래(東萊)와 부산(釜山)에 이어지게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갑오년에 국정을 담당한 자들의 수치스러운 일이다.


[주D-001]공문중(孔文仲) : 북송(北宋) 때 사람으로 성질이 완강하여 왕안석(王安石)의 청묘법(靑苗法)을 반대하였으며, 동파(東坡) 소식(蘇軾)과 친하였다. 당시 소식이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자, 소식과 사이가 나쁜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대간을 사주하여 소식을 탄핵하게 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주D-002]소술(紹述)의 의논 : 송 철종(宋哲宗) 때 장돈(章惇)이 정권을 잡은 뒤 신종(新宗) 때 추진하다가 고 태후(高太后)에 의해 폐기되었던 신법(新法)을 계승할 것을 주장하여 복구한 사실을 가리킨다.《宋史 卷471 章惇列傳》
[주D-003]선생을 …… 하고 : 가표(賈彪)는 후한 환제(後漢桓帝) 때 사람이다. 당시 이응(李膺), 범방(范滂) 등의 명사가 붕당(朋黨)을 한다는 죄목으로 잡혀가자, 아무도 감히 이들을 위하여 말해 주는 자가 없었다. 이에 가표는 “내가 서쪽으로 가지 않으면 큰 화를 풀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도성인 낙양(洛陽)에 들어가서 성문교위(城門校尉) 두무(竇武)와 상서(尙書) 최서(崔諝) 등을 설득하여 황제에게 글을 올리게 하였다. 그 결과 이에 연루된 명사들이 대부분 석방되었다.《後漢書 卷67 黨錮列傳 賈彪》
[주D-004]동경(東京)의 당고(黨錮)의 화(禍) : 동경은 낙양(洛陽)으로 후한(後漢)의 도성이었다. 당고의 화는 영제(靈帝) 때에 환관(宦官)들의 모함으로 인해 이응(李膺) 등의 명사들에게 붕당했다는 죄목을 가하여 처형한 일을 가리킨다.
[주D-005]묘유(苗劉)의 변고 : 묘유는 묘부(苗傅)와 유예(劉豫)를 가리킨다. 묘부는 고종(高宗) 때 황제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인사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다음 황제를 위협하여 태후(太后)가 수렴청정하도록 강요하였으며, 유예는 지제남부(知濟南府)로 있었는데 금군(金軍)에게 항복하고 금나라의 힘으로 대제황제(大齊皇帝)가 되고 여러 번 남송(南宋)을 침공하였다.
[주D-006]순도(殉道)와 순신(殉身)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에는 출세하여 도가 내 몸을 따르게 하고,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은둔하여 내 몸이 도를 따르게 한다.[天下有道 以道殉身 天下無道 以身殉道]” 하였다.
[주D-007]문로공(文潞公) : 북송(北宋) 때 명재상인 문언박(文彦博)을 가리키는바, 그가 노국공(潞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주D-008]월사(月沙)가 …… 보인다 : 성혼의 연보는 연보와 연보부록으로 구성되어 있고, 월사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행장은 연보부록에 실려 있다.
[주D-009]이정(李楨)과 …… 공격하였으니 : 《내암집(來庵集)》 권12 수우당 최공 행장(守愚堂崔公行狀)에, 도를 배우는 것을 가탁하여 명리(名利)를 취하는 사례로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일컬어지던 이정과 황준량을 거론한 것을 가리킨다.
[주D-010]세 사람을 …… 조처 : 세 사람은 송응개(宋應漑), 박근원(朴謹元), 허봉(許篈)을 가리킨다. 이들은 선조 16년(1583) 율곡과 우계가 붕당을 한다고 탄핵하다가 각각 회령(會寧), 강계(江界), 갑산(甲山)에 귀양 갔는데, 세상에서 이를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칭하였다.
[주D-011]돈괘(遯卦)를 …… 불태운 것 : 남송 영종(南宋寧宗) 경원(慶元) 원년(1195) 2월에 간신인 한탁주(韓侂胄)가 승상(丞相) 조여우(趙汝愚)를 모함하여 축출하고 주자(朱子) 등의 도학파를 위학(僞學)이라고 배척하였다. 위학이란 곧 탐욕을 부리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사람의 진정이지 청렴결백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었다. 대부시 승(大府寺丞)으로 있던 여조검(呂祖儉)이 조여우를 변호하다가 소주(韶州)로 유배 가자, 주자는 자신이 여러 조정의 은혜를 받았으며 또 아직도 신하의 반열에 있으므로 침묵할 수 없다하여, 수만 자에 이르는 장문(長文)의 상소문을 초(草)하여 간신들이 군주의 총명을 가리는 병폐를 극언하였다. 이에 자제와 문생들이 ‘화를 부르게 될 것’이라 하여 번갈아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는데, 마침 채원정(蔡元定)이 들어와 《주역》으로 점을 쳐서 결정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괘(卦)를 뽑아 돈괘(遯卦)의 초육효(初六爻)를 얻으니, “초육은 돈(遯)의 꼬리라 위태로우니, 가는 바를 두지 말라.[初六遯尾 厲 勿用有攸往]” 하였다. 이에 주자는 상소문을 불태우고 스스로 돈옹(遯翁)이라 호하여 세상에 깊이 은둔할 뜻을 나타내었다.《朱子大全附錄 卷4 年譜》
[주D-012]촉당(蜀黨) : 낙당(洛黨)과 대칭되는 말로, 북송 철종(北宋哲宗) 때에 동파(東坡) 소식(蘇軾)은 촉 지방 출신이고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낙양에 거주하였는데,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이에 두 사람을 지지하는 세력 간에 당쟁이 일어났는데, 동파를 지지하는 측을 촉당, 이천을 지지하는 측을 낙당이라 하였다.
[주D-013]형서(邢恕) : 정이천(程伊川)의 문인으로, 스승을 저버리고 모함한 인물이다.
[주D-014]유종(儒宗) : 유학의 종장(宗匠)이라는 뜻으로 큰 유학자를 이르는데, 여기서는 성혼을 가리킨 것이다.
[주D-015]천부(天府)에 …… 쓴 것 : 천부는 조정의 귀중한 물건이나 금령(禁令)을 보관하는 창고이다. 이것은 경연 석상에서 선조가 신하들과 대화하면서 이이와 성혼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를 사관(史官)에게 기록하게 한 일을 가리킨다.
[주D-016]당비(黨碑)와 학금(學禁)의 행위 : 당비는 당인비(黨人碑)로, 북송 휘종(北宋徽宗) 때에 간신 채경(蔡京) 등이 원우(元祐) 연간의 명신인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 소식(蘇軾), 정이(程頤) 등에게 붕당을 하였다는 죄목을 씌워 309명의 이름을 새겨 태학의 단례문(端禮門) 앞에 세운 비석인데, 당적비(黨籍碑)라고도 하였다. 학금은 위학금(僞學禁)을 이르는데, 남송 영종(南宋寧宗) 때에 간신 한탁주(韓侂胄)가 주자(朱子)와 그의 문생들에게 위선의 학문을 한다는 죄명을 씌워 금고(禁錮)한 일을 가리킨다.
[주D-017]배절의론(排節義論)을 …… 대답하니 : 배절의론은 절의를 배척하는 의론이다. 동한(東漢) 때에는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선비들이 조정의 인물을 평론하고 정사를 비판하였다. 이에 정권을 잡고 있는 대신과 환관들에게 미움을 받아 명사로 알려진 이응(李膺)ㆍ범방(范滂) 등이 당고(黨錮)의 화(禍)에 걸리니, 여기에 연루되어 죽거나 금고당한 자가 무수히 많았으며, 결국 이로 말미암아 국가가 멸망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주자(朱子)가 일찍이 비판한 적이 있었는데, 정개청 역시 주자의 이 글을 보고 동한의 절의의 병폐를 심하게 말하였다. 이때 정개청의 반대파들이 이것을 일컬어 배절의론이라고 몰아붙이자, 정개청은 이는 주자의 말씀이라고 항변한 것이다.《愚得錄 卷3 庚寅五月獄中供辭》
[주D-018]건저(建儲)의 의논 : 건저는 저군(儲君) 곧 세자(世子)를 책봉(冊封)함을 이른다. 당시 선조(宣祖)는 왕비에게서 낳은 아들이 없고 후궁 소생의 광해군(光海君)이 인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세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송강 정철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인빈(仁嬪) 김씨(金氏)를 사랑하여 그녀가 낳은 순성군(順城君)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으므로 정철을 미워하게 되었다.
[주D-019]포위(布韋)의 선비 : 베와 숙피(熟皮)로 만든 옷을 입는 처사(處士)를 이른다.
[주D-020]중병(仲幷) : 강도(江都) 사람으로 자가 미성(彌性)인데, 소흥(紹興) 연간에 진사에 급제하고 벼슬이 광록 승(光祿丞)에 이르렀는바,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주D-021]낙학(洛學) : 정이천(程伊川)의 학문을 이른다. 이천이 하남(河南)의 낙양(洛陽)에 살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주D-022]전연(澶淵)의 …… 있었고 : 전연은 옛날 호백(湖泊)의 이름으로 옛터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복양시(濮陽市) 서쪽에 있었는바, 춘추 시대에는 위(衛)나라 땅이었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20년 조에 “양공이 진후(晉侯)와 제후(齊侯), 송공(宋公), 위후(衛侯) 등과 만나 전연에서 맹약하였다.” 하였는바, 당시 제나라가 진나라와 화해하기 위하여 한 맹약이었다.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당시 《춘추》의 당사국인 노나라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주D-023]정강(靖康)의 맹약 : 정강은 북송 흠종(北宋欽宗)의 연호로, 정강 2년(1127)에 금나라와 굴욕적인 맹약을 맺은 사실을 가리킨다. 북송은 정강 2년(1127)에 금군(金軍)의 침공을 받고 도성인 변경(汴京)이 함락되었으며, 흠종과 부왕(父王)인 휘종(徽宗)이 금나라로 끌려가 변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고종이 즉위하였는데, 당시 화의를 주장하는 간신 진회(秦檜) 등의 말을 듣고 송나라는 끝내 금나라에게 굴복하였다.
[주D-024]주(周)나라 선왕(宣王)의 계책 : 오랑캐를 끝까지 토벌하지 않고 약간만 공격함을 이른다. 《시경》 소아(小雅) 유월(六月)에 “잠깐 험윤을 정벌한다.[薄伐獫狁]” 하였는바, 험윤은 흉노족(匈奴族)으로, 이들이 주나라의 서울인 호경(鎬京)을 침범하자, 선왕(宣王)이 장군인 윤길보(尹吉甫)에게 정벌하도록 명하여 윤길보가 이들을 쫓아내고 돌아오자, 이것을 기려 읊은 내용이라 한다.
[주D-025]국정을 담당한 자 :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을 가리킨 것으로, 일부에서는 성혼이 유성룡의 말에 넘어가 화의를 주장했다 하였다.

우계연보
 [세계도(世系圖)]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 세계도(世系圖)



1세 인보(仁輔) -성씨(成氏)는 계통(系統)이 창녕(昌寧)에서 나왔다. 공은 호장(戶長) 중윤(中尹)이다.
2세 송국(松國) -시중(侍中)으로 묘소가 창녕의 우두산(牛頭山)에 있다.
3세 공필(公弼)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 판서(版圖判書)에 진봉(進封)되었다.
4세 군미(君美) -봉상대부(奉常大夫) 판도 총랑(版圖摠郞)이다.
5세 여완(汝完) -초명(初名)은 한광(漢匡)이며 이헌(怡軒)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지원(至元) 병자년(1336, 충숙왕 복위 5)에 급제하여 벼슬이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이르고 시호가 문정(文靖)이다. 홍무(洪武) 정축년(1397, 태조6) 1월에 별세하니, 향년이 89세였다. 묘소가 포천현(抱川縣) 왕방산(王方山) 아래 계류촌(溪流村) 묘덕암동(妙德庵洞)에 있다. ○ 배위는 금성 나씨(錦城羅氏)로 경안택주(慶安宅主)에 봉해졌는데,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 지신사(密直司知申事) 천부(天富)의 따님이다. ○ 세 아들이 모두 급제하였는데, 장자 석린(石璘)은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고 시호가 문경(文景)이며, 차자 석용(石瑢)은 벼슬이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고 시호가 문숙(文肅)이며, 다음은 석인(石因)이다.
6세 석인(石因) -자는 자유(子由)이며 상곡(桑谷)이라 자호하였다. 벼슬이 예조 판서에 이르고 시호가 정평(靖平)이다. ○ 초명은 석인(石珚)이었는데, 국왕의 휘(諱)를 피하여 인(因) 자로 고쳤다.
7세 억(抑) -좌찬성(左贊成)이다.
8세 득식(得識) -좌윤(左尹)이다.
9세 충달(忠達) -김포 현령(金浦縣令)으로 판서에 추증되었다.
10세 세순(世純) -자는 태순(太純)이다.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고 시호가 사숙(思肅)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묘비명(墓碑銘)을 찬(撰)하였으며, 묘소는 파주(坡州) 향양리(向陽里)에 있다. ○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사복시 정(司僕寺正) 극니(克怩)의 따님이고 좌의정 국광(國光)의 손녀이다.
11세 수근(守瑾) -참봉(參奉)이다.
11세 수침(守琛) -자는 중옥(仲玉)이고 호는 청송(聽松)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숙배(肅拜)하지 않았다. 갑자년(1444, 세종26) 1월에 별세하니, 향년이 72세였다. 특별히 집의(執義)를 추증하였으며, 뒤에 판서를 더 추증하였다. 묘소는 향양리에 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묘갈명(墓碣銘)을 찬하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묘지명을 찬하고, 율곡 선생이 행장(行狀)을 찬하였다. ○ 배위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판관(判官) 사원(士元)의 따님이고 참판 해(垓)의 손녀이다.
11세 수종(守琮) -자는 숙옥(叔玉)인데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하였다. 일찍이 급제하였으나 당인(黨人)의 죄를 입어 이름이 삭제되었다가 별세한 뒤에 다시 과첩(科牒)을 받았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묘에 쓰기를 절효(節孝)라 하였다.
11세 수영(守瑛) -부정(副正)이다.
12세 혼(渾) -바로 선생으로 사실(事實)이 연보(年譜)와 행장(行狀)에 상세히 보인다.
13세 문준(文濬) -자는 중심(仲深)이고 호는 창랑(滄浪)인데,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사포(司圃)에 제수되고 벼슬이 영동 현감(永同縣監)에 이르렀다.
13세 문잠(文潛) -선생의 측실(側室) 아들인데 아들 백(栢)을 낳았다.
14세 역(櫟) -자는 자구(子久)인데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이다.
14세 익(杙) -절효(節孝)의 손자 문개(文漑)에게 출후(出後)하였다. 자는 자천(子賤)인데 금화사 별좌(禁火司別坐)이다.
14세 직(㮨) -자는 자교(子喬)이다.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으로 80세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네 아들을 낳았다.
15세 희주(熙胄) -여섯 아들을 낳았다.
15세 희적(熙績) -현령으로 두 아들을 낳았다.
15세 희주(熙胄) -출후하였다.
15세 희집(熙緝) -출후하였다.


[주C-001]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 세계도(世系圖) : 세계도의 성격을 살려서 도표화하고 원문의 소주(小註)는 별도로 번역하여 세계도 아래에 첨부하였다. 단 출후(出後)한 사실은 세계도에도 반영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계집 제1권
 시(詩)
율곡과 함께 시냇가에 앉아서


높은 나무 시냇가에 둘러 있으니 / 溪上圍高樹
맑은 그늘 낚시터에 흩어지네 / 淸陰散釣磯
흐르는 냇물은 원래 쉬지 않고 / 川流元不息
물고기와 갈매기는 절로 기심(機心)을 잊는다오 / 魚鳥自忘機
풀 가에는 풍광이 연하고 / 草際風光嫩
이끼 낀 냇가에는 들길이 가늘구나 / 苔邊野逕微
한가로운 사람 손에 책을 펴 보며 / 閑人書在手
서로 마주하여 돌아갈 줄 모르네 / 相對淡忘歸


 

[주D-001]기심(機心) : 기회를 틈타 남을 해롭게 하고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이른다.

 

 

우계집 제1권
 시(詩)
율곡에 대한 만사 갑신년(1584) 봄


벼슬 없는 것이 어찌 좋지 않으랴 / 無官豈不好
몸이 한가롭고 또 책을 읽을 수 있다네 / 身閑且讀書
산과 들이 어찌 넓지 않으랴 / 山野豈不寬
한가로이 내 집에 살 수 있다네 / 居然着吾廬
어이하여 서울을 떠났다가 다시 와서 / 云胡去復來
말년의 길 주저하였나 / 末路仍躊躇
지사도 성공하기 어려우니 -왕개보(王介甫)의 시에, “지사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성공하기 어렵고 중간 정도의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도 세상을 따르면 공명을 이룬다.” 하였다. / 志士亦少成
하늘의 마음 끝내 어떠한가 / 天心竟何如
대도가 마침내 어두워지니 / 大道終晦蝕
생민들 농토를 잃은 듯하네 / 生民失菑畬
기심(機心) 없음이 뛰어난 지혜이니 / 無機是獨智
공교로운 생각은 도리어 시끄럽기만 하다오 / 用巧還紛挐
가슴에 서린 한 다 말할 수 없으니 / 有恨不可窮
나의 노랫소리 어이 이처럼 슬픈가 / 有歌何太歔
-유(有) 자가 어떤 본에는 아(我) 자로 되어 있다.
인생살이 참으로 괴로우니 / 方知有生苦
하늘로 돌아감이 즐거운 것 비로소 알겠네 / 樂哉歸太虛
모름지기 구천(九泉) 아래에서 만나 / 會須泉下逢
우리들의 뜻 천추에 길이 이루리라 / 千秋長遂初


 

[주D-001]왕개보(王介甫) : 송나라의 문장가이고 정치가인 왕안석(王安石)으로 개보는 그의 자이고, 호는 반산(半山)이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높은 지식과 학문으로 신종(神宗) 때에 재상이 되고 형국공(荊國公)에 봉해졌으나 청묘법(靑苗法) 등의 신법(新法)을 시행하다가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