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 18현 우계 성혼

우계 선생 신도비명(牛溪先生神道碑銘) 병서

아베베1 2013. 9. 21. 18:51

 

 

 

 

 
계곡선생집 제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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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9수(首)
우계 선생 신도비명(牛溪先生神道碑銘) 병서

만력(萬曆) 26년(1598, 선조 31)에 우계 선생(牛溪先生)이 작고하였다. 그 뒤 4년이 지나 정인홍(鄭仁弘)이 선생에 대해 무함을 가하였는데, 또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공의(公議)가 비로소 정해지면서 관직을 추증(追贈)하고 역명(易名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하는 의전(儀典)이 차례로 거행되었다. 이에 군자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우세했다가 드디어는 하늘이 이기는 이치가 밝게도 징험되었도다. 사람은 세력으로 하고 하늘은 이치에 따르는 법, 세력이 행해짐은 한때이지만 이치의 밝음은 백세에 뻗치도다. 이처럼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행을 권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이윽고 선생의 풍도를 사모하는 공경대부와 사인(士人)들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선생의 도가 이제 크게 펴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묘도(墓道)에 아직도 드러내 새기는 일을 하지 못했으니, 이는 선생의 덕을 드러내고 후세를 인도하는 방도가 못 된다.”
하고, 마침내 서로 재물을 모아 비석을 마련한 뒤 그 명사(銘詞)를 나에게 부탁해 왔다. 이에 내가 고루(固陋)하다는 이유로 누차 사양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생의 휘(諱)는 모(某)요 자(字)는 호원(浩原)이요 자호(自號)는 묵암(默庵)으로서, 우계(牛溪)라고 하는 호는 학자들이 선생을 일컫는 호칭이다.
성씨(成氏)는 본래 창녕(昌寧)으로부터 비롯된다. 비조(鼻祖)인 인보(仁輔)는 고려 때 중윤(中尹)의 관직에 이르렀고, 6대조 석연(石䂩)은 아조(我朝)에서 벼슬하여 예조 판서가 되었다. 증조 휘 충달(忠達)은 현령으로 판서를 증직받았고, 조부 휘 세순(世純)은 지중추부사로 시호(諡號)가 사숙(思肅)이다.
부친 휘 수침(守琛)은 유속(流俗)을 높이 초월한 절조(節操)의 소유자로서 은거하여 도를 강론하였는데, 세상에서 청송 선생(聽松先生)이라고 불렸다.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죽어서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는데, 파평 윤씨(坡平尹氏)를 배필로 삼아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 30)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동유(童儒) 시절부터 자질이 영민하여 공부를 잘하였다. 17세에 사마(司馬) 양시(兩試 진사시와 생원시임)에 응시하였다가 병으로 복시(覆試)에 나아가지 못했는데, 마침내 과거 시험 보는 일을 포기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온 마음을 쏟은 결과, 겨우 약관(弱冠)의 나이에 배움과 실천면에서 모두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동배들로부터 크게 추복(推服)을 받았다.
청송(聽松)이 일찍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선생이 2번이나 허벅다리 살을 베어 약에 타서 드리기도 하였으며, 급기야 상(喪)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묘(廬墓) 생활을 하였다.
선묘(宣廟) 초년에 방백이 탁월한 학행(學行)의 소유자로 선생을 조정에 천거하여 2번이나 참봉을 제수받았고 잇따라 6품으로 훌쩍 뛰어올랐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또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제수받았을 때는 사은(謝恩)하는 일을 마치고 나서 곧바로 시골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원근(遠近) 지역의 학자들이 날로 찾아오자 선생이 가르쳐 인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서실(書室)의 내규(內規)를 지어 제생(諸生)에게 행동 규범을 제시하였다.
그 뒤로 장원(掌苑), 사지(司紙)와 주부, 판관, 첨정과 공조의 좌랑ㆍ정랑을 차례로 제수받았으며, 대직(臺職)으로 부름을 받은 것으로 말하면 지평이 10여 차례, 장령이 2번이나 되었는데, 심지어는 마여(馬轝)를 내주면서 타고 오게까지 하였으나 모두 고사(固辭)하고 응하지 않았다.
상이 일찍이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에게 문의하기를,
“성혼(成渾)이 어질다는 것은 내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만, 그의 재주는 어떠한가?”
하니, 문성이 대답하기를,
“그에게 독자적으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임무를 맡길 수 있다고 한다면 신이 감히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사람됨이 선(善)을 좋아하니, 선을 좋아하면 천하를 넉넉하게 해 줄 수 있는 법입니다. 다만 그는 병이 잘 걸리는 허약한 체질이라서 복잡한 임무는 견뎌내지 못할 것이니, 한가한 부서에 놔 두고서 자주 경악(經幄)에 입시(入侍)하게 한다면 분명히 성덕(聖德)을 보익(輔益)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신사년에 종묘서 영(宗廟署令)에 임명하면서 간절히 부르자 선생이 병을 무릅쓰고 상경하였다. 이에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살피게 하는 동시에 약이(藥餌)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인견(引見)하여 치도(治道)의 요체에 대해서 자문을 구하니, 선생이 답변드리기를,
“인군(人君)은 반드시 몸과 마음을 수렴(收斂)하여 지기(志氣)가 늘 맑아지도록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근본이 확립되면서 의리가 밝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치란(治亂)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서 단지 인주(人主)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긴 하나 반드시 훌륭하게 보좌할 수 있는 정승을 얻어서 널리 인재를 거두어 각종 직위에 배치시키도록 한 뒤에야 정치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현재 조정을 보면 무사 안일주의로 자리만 보존하려는 신하들이 많은 반면, 임금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하려는 인사들은 보기 드무니 이것이 가장 걱정됩니다.”
하였다. 또 상이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과 관련하여 그 대책을 물으니, 선생이 답변드리기를,
“세입(稅入)을 헤아려 지출을 하되 위의 비용을 덜어서 아래 보태 준다면 그 은혜가 백성의 마음을 결속시켜 천명(天命)을 길이 받드는 기초가 마련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윽고 다시 봉사(封事 임금만 보도록 봉해서 올리는 상소문)를 올려 조금 전에 아뢰었던 내용을 부연하여 강력하게 개진하였다. 그런데 그 상소문을 오래도록 안에만 놔 두고 있자 정원이 선시(宣示)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소한 내용 가운데 가령 학문을 논한 대목 등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마땅히 성찰을 할 것이다마는, 나라의 제도를 모조리 경장(更張)하려고 하는 것은 또한 행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 제도가 연산(燕山)에 의해서 온통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공물(貢物)의 진상(進上)을 중하게 늘렸던 일이 아직껏 다 개혁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를 변통하지 않는다면 좋은 정치를 이루어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상이 이 점을 상당히 난처하게 여긴 것이었다. 그 뒤에 인대(引對)하는 기회에 또다시 그 주장을 펼쳤었는데, 당시 이 문성공의 뜻도 선생과 합치되어 누차 이를 언급하곤 하였으나, 끝내 행해지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선생은 서울에 있을 때 녹봉(祿俸)을 받지 않았다. 상이 이 말을 듣고 특별히 미두(米豆)를 하사하였는데, 선생이 사양을 하자, 상이 이르기를,
“부족한 것을 도와줄 때는 받는 것이 옛날의 도이다.”
하였으므로, 선생이 곡물을 받은 뒤에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풍처창 수(豐儲倉守)와 전설사 수(典設司守)로 옮겨졌다. 대신이 계청(啓請)하여 직질(職秩)을 높여 주고 경연 참찬관을 겸하게 하였는데, 상이 한직(閑職)에 몸담으면서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선생이 몇 차례나 상소를 올려 물러가게 해 줄 것을 청하면서 교외에 나가 명을 기다리자, 상이 하교하여 소환한 뒤 인견(引見)하여 극력 만류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더욱 간절하게 퇴직을 청하자 상이 비로소 우선 돌아가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 뒤 누차 사헌부 집의와 제시(諸寺)의 정(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미년 봄에 특별히 병조 참지에 제수하면서 몇 번이나 소명(召命)을 내리자 선생이 마지못해 입경(入京)하였다. 얼마 있다가 이조 참의로 옮겨지고 은대(銀帶)를 하사받았는데, 선생이 3차례나 상소하여 사직한 끝에 허락을 받고 명에 의하여 경연에만 입시하였다.
문성공이 당시 조정에 있으면서 중외(中外)의 촉망을 한 몸에 받았는데 선묘(宣廟) 역시 바야흐로 융숭하게 관심을 기울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군소배들이 어떻게든 해치려고 들면서 하찮은 일들을 주워 모아 공을 탄핵하자 선생이 상소하여 그 무망(誣罔)을 변박(辨駁)하였는데, 군소배들이 더욱 노여워한 나머지 마침내 선생까지 싸잡아 탄핵하였으므로 선생이 그날로 파산(坡山 파주(坡州))에 돌아왔다.
이에 태학생 4백 70인과 호남 및 해서(海西)의 유생 수백 인이 서로 잇따라 항장(抗章)을 올리면서 사정(邪正)을 가려 진달드리자, 상이 포답(褒答)을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진정 군자이기만 하다면 당(黨)이 있다고 해서 걱정할 것이 없다. 나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당에 끼고 싶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군소배들을 모조리 축출한 뒤 다시 이조 참의로 선생을 불렀는데, 선생이 누차 사직하여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조정에 나와 명에 숙배(肅拜)하였다. 뒤이어 참관으로 승진되자 5차례나 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문성공이 죽자 선생이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져 잇따라 상소하여 물러갈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이제 막 어진 재상을 잃어 나의 잠자리가 편안치 못한데, 이러한 때에 나랏일을 함께 다스려 나갈 이를 찾는다면 경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다가 몇 개월이 지나서 분황(焚黃 추증된 선조의 무덤 앞에서 관고(官誥)의 부본(副本)을 불사르는 것)하는 일로 휴가를 청해 돌아가게 되었는데, 상이 본도(本道)에 명하여 장리(長吏)를 보내 안부를 묻고 음식을 하사하게 하였다. 그 뒤 찬집청(纂集廳)을 설치할 때 선생을 당상으로 부르면서 3번이나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문성공이 죽고 나자 상황이 크게 변한 가운데 군소배들이 차츰 조정에 진출하면서 더욱 옛날의 원한을 심화시켜 나갔는데, 선생이 다시 기용(起用)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추악한 말로 무함하며 헐뜯자 선생이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하였다.
기축년 겨울에 다시 이조 참관에 임명되자 간절히 사양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발각되자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긴 만큼 경이 물러나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으므로, 선생이 마침내 조정에 나아왔다.
당시 역변(逆變)이 진신(搢紳) 사이에서 나온 관계로 연루자(連累者)들이 점점 늘어만 갔는데, 선생이 평반(平反 변통을 해서 죄를 경감해 주는 것)의 의논을 극력 주장하는 한편 상소를 하여 옥사(獄事)를 완화시킬 것과 형(刑)을 신중히 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역괴(逆魁)와 같은 종족이었던 어떤 상신(相臣) 하나가 진대(進對)하다 잘못 말하자 논자들이 기망죄(欺罔罪)를 적용하려고 하였는데, 선생이 극력 말하며 변호한 결과 대죄(大罪)를 면하게 해 준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임금의 총애를 받는 정승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화(禍)를 일으킬 조짐이 명백해지자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는데, 태학의 제생(諸生)이 상소하여 만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뒤로는 선생을 부르는 명이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최영경(崔永慶)이 사람들의 입에 올라 옥에 갇히는 몸이 되자 선생이 정상철(鄭相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에 정상이 입대(入對)하여 영경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극력 아뢰었으므로 상의 노여움이 조금 풀어졌다. 그 뒤 신묘사화(辛卯士禍)가 일어났을 때는 이에 연루되어 유배당한 사람들이 모두 선생의 지고(知故)들이었는데, 군소배들이 화심(禍心)을 늘 간직하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선생까지도 화망(禍網)에 몰아넣으려 하였다.
이듬해 왜구(倭寇)가 깊이 쳐들어옴에 따라 상이 장차 서쪽으로 피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선생이 뛰어들어 국난(國難)을 구하려 하다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본디 산야(山野)에서 일어난 몸으로 현재 당파를 형성하고 있다는 지목을 받는 가운데 밤낮으로 죄를 기다리고 있는 처지이니, 나라가 비록 위급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의리상 감히 경솔하게 직접 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승여(乘輿)가 만약 서쪽 지방으로 떠나게 될 경우 길옆에서 곡하며 맞는 것이 마땅할 것이니, 그때 자문을 구하시는 은혜를 받게 되면 마땅히 대가(大駕)를 따를 것이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오직 물러가 구렁에 빠져 죽을 따름이다.’ 하고 자제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상이 거연(遽然)히 도성을 떠날 계책을 결정하게 되었다. 선생의 집은 관로(官路)로부터 20리쯤 떨어져 있었는데, 거가(車駕)가 이미 임진(臨津)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는 부랴부랴 그 뒤를 쫓아가려고 하였으나, 임진강 나루를 건너는 길이 이미 끊어진 데가 난병(亂兵)이 벌써 길들을 막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통곡을 하면서 병든 몸을 이끌고 산속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광해(光海)가 세자의 신분으로 이천(伊川)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을 내려 선생을 불렀는데, 병이 심해져 나아가지 못한 채 상차(上箚)하여 16개 조목의 일을 개진하였다. 그러자 광해가 편의대로 선생을 검찰사(檢察使)에 임명한 뒤 잇따라 2번이나 불렀으므로 선생이 병을 무릅쓰고 소명(召命)에 응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행재(行在)에 달려가서 상소를 하며 선장(選將), 치병(治兵), 취량(聚糧) 등의 3가지 계책을 논하고, 인하여 또 말하기를,
“적국(敵國)에 의한 외환(外患)을 하늘의 운수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 제왕이 변고를 당하게 되면, 혹 조서를 내려 자기의 죄로 돌리면서 존호(尊號)를 삭제해 버리기도 하였고, 혹 나라를 그르친 신하를 죄줌으로써 사방에 사과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역시 큰 뜻을 분발하여 통렬하게 자신을 경책(警責)하는 동시에 근습(近習)들이 궁중과 교통(交通)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폐단을 근절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한 인사들을 등용하여 이목(耳目)의 역할을 맡긴다면, 인심(人心)이 열복(悅服)하고 구적(仇賊)도 소멸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상소가 나오자 사람들이 이를 보고는 장차 화의 씨앗이 여기에서 비롯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명(明) 나라의 찬획(贊畫) 원황(袁黃)이 글을 보내 학문을 논하면서 정주학(程朱學)을 집중 공격해 왔다. 이에 제공(諸公)이 대론(對論)을 벌이는 것을 난처하게 여기면서 선생에게 답변을 작성해 주도록 부탁하였는데, 선생이 말은 겸손하면서도 이치는 바르게 논리를 전개해 나가자 원황이 다시는 논란을 벌이지 못하였다.
전후에 걸쳐 몇 차례나 참찬과 도헌(都憲)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사양하고 산반(散班)에 몸을 담았다. 왜적이 선릉(宣陵 성종(成宗)의 능)과 정릉(靖陵 중종(中宗)의 능)을 파헤치자 선생이 명을 받들고 봉심(奉審)하면서 온당하게 변고에 대처한 뒤 해주(海州)의 행궁(行宮)에서 복명(復命)하였다. 그러다가 대가가 환도(還都)할 때에는 선생이 남아서 중전(中殿)을 호위하였는데, 호서(湖西)의 적이 일어나자 선생이 마침내 도성으로 향하였다.
처음에 임진왜란을 당해 서쪽으로 피난을 떠날 때, 상이 임진(臨津)에 이르러서 하문하기를,
“성혼의 집이 여기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하였는데, 간인(奸人) 이홍로(李弘老)가 가까운 대안(對岸)의 자그마한 촌락을 아무렇게나 가리키면서 대답하기를,
“바로 저기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다시 하문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와서 나를 보지 않는단 말인가?”
하자, 홍로가 대답하기를,
“이런 때를 당하여 그가 어찌 기꺼이 찾아와 뵈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그 뒤 선생이 분조(分朝)에서 행재(行在)로 달려오자 홍로가 또 참소하여 말하기를,
“성혼이 이곳에 온 목적은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도록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일단 그런 이야기를 누차 들어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대죄(待罪)하자, 하교를 하여 변란 초기의 일까지 소급해 거론하였는데, 그 사지(辭旨)가 준열하고 엄하였다.
이에 선생이 황공한 나머지 감히 해명하지 못한 채 무거운 처벌을 내려 줄 것을 청하자 상이 너그럽게 답하긴 하였으나, 그 뒤 참찬 겸 비국 제조로서 선생이 진달하며 건의해도 대부분 들어주지 않았다.
왜적이 영남 지방의 10여 군(郡)에다 참호를 파고는 버티고 있었는데, 중국 군대 역시 피로에 지친 나머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때 총독(摠督) 고양겸(顧養謙)이 동쪽의 일을 전담하면서, 우리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강화(講和)하자는 왜적의 요구를 우선 들어주고 뒷날을 도모하려고 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먼저 중국 조정에 상주(上奏)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묘당에서는 스스로 생각해도 왜적을 물리칠 계책이 궁했으므로 고양겸의 자문대로 따르려 하였으나, 군의(群議)는 매우 강력하게 화의(和議)를 공격하고 나섰다.
그런 중에서도 유독 이공 정암(李公廷馣)만은 호남을 순찰하면서 건의하기를 ‘우선 강화를 허락함으로써 적의 마음을 느슨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당시 나랏일을 맡고 있던 유상 성룡(柳相成龍) 역시 이 주장에 동의하여 선생과 약조를 한 뒤 함께 입대(入對)하였다.
이에 상이 고양겸의 자문을 들어줄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 하문을 하자, 선생이 답변드리기를,
“우리나라가 일단 독자적으로 전수책(戰守策)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절제(節制)하는 권한이 모두 고양겸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 그가 하는 말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정암으로 말하면 충의(忠義)의 대절(大節)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말한 것이 나라를 걱정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심각하게 죄를 따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엄청나게 노여워하였는데, 이때 유상(柳相)은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만 물러나오고 말았다. 이에 삼사(三司)가 번갈아 소장을 올려 화의를 배척하였는데, 그 의도가 선생에게 있었으므로 선생이 인구(引咎)하고 사직을 청한 뒤 시골로 돌아왔다.
무술년 여름에 병이 위독해지자 먼저 아들 문준(文濬)에게 명을 내리기를,
“내가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은 몸으로 심사(心事)를 명백하게 밝히지 못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옷은 포의(布衣)로 하고 염(斂)은 지금(紙衾 종이 이불)으로 할 것이며, 띠풀을 엮어 관(棺)을 덮고 소가 끄는 수레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 그러면 충분하다.”
하였다. 그러고 나서 6월 6일에 이르러 파산서실(坡山書室)에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을 의미함)하였는데, 향년 64세였다. 이해 모월 모일에 파주(坡州) 향양리(向陽里)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내었다.
선생이 죽고 난 뒤에도 군소배들이 미워하는 감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인홍이 일단 자기 패거리를 사주하여 무함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자, 권세를 좌우하는 자가 이에 따라 멋대로 헐뜯고 짓밟은 결과 마침내 선생의 관직이 추탈(追奪)되고 말았는데, 이로 인하여 유림(儒林)의 기운이 크게 저상(沮喪)되었다.
금상(今上)께서 대위(大位)에 오르시자 오공 윤겸(吳公允謙)과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선생이 무함을 당하게 된 시말(始末)을 아뢰어 설명드렸는데, 상 역시 평소 선생이 대유(大儒)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즉시 복관(復官)을 명하고, 뒤이어 의정부 좌의정의 증직과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에 제생(諸生)이 파산(坡山)에 서원을 건립한 뒤 청송 선생을 함께 모시고 선생의 향사(享祀)를 받들게 되었다.
나는 세상에 늦게 태어나 선생의 문하에서 직접 수업받을 기회는 없었으나 다행히 여러 노선생들로부터 그 서론(緖論)에 대해 나름대로 들을 수가 있었다. 청송(聽松)의 학문은 대체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에게서 나왔는데 선생이 이른 나이에 가정에서 이에 대해 훈도를 받았고, 또 일찍이 퇴도(退陶 이황(李滉))를 존경하며 사숙(私淑)하였으니, 그 학문은 고정(考亭 주희(朱熹))을 준칙(準則)으로 삼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도를 강명(講明)하고 실천하는 데에 모든 공력을 쏟았는데, 특히 마음의 본원(本源)을 밝혀 단속하는 데에 더욱더 독실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평소의 언동(言動)이나 집안을 다스리는 의법(儀法)으로부터 상제(喪祭)의 절문(節文)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소학(小學)》과 《가례(家禮)》에 있는 대로 행해 나갔다. 이렇듯 한결같이 성(誠)과 경(敬)에 근본을 두고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닦아 기른 결과, 덕기(德器)가 확고하게 형성되었으므로 누구든 선생을 바라보기만 해도 도를 소유한 군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젊어서 율곡과 교분을 맺고서 이택(麗澤)의 도움을 주고받았다. 일찍이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선후(理氣先後)의 설을 함께 논하면서 수천 만 언(言)의 서신을 왕복하였는데, 그중에는 선유(先儒)들이 미처 드러내 밝히지 못한 내용도 많이 있었다. 율곡이 언젠가 공을 일컬어 말하기를,
“가령 견해의 심천(深淺)을 굳이 논한다면 내가 조금 나을지 모르지만 마음속에 확고히 간직하고 실천하는 면에 있어서는 내가 따라갈 수가 없다.”
하였다. 선생의 문장을 보아도 경술(經術)에 본원(本源)을 둔 가운데 명쾌하고 통창(通暢)하며 전아(典雅)하기 그지없었는데, 지금 문집 몇 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본래 은거하면서 덕을 닦으려고 하였을 뿐 세상을 담당할 뜻은 당초부터 없었는데, 급기야 명성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선묘(宣廟)의 특별한 은총을 크게 입어 불차지위(不次之位 순서를 무시하고 특별히 발탁하는 것)의 대우를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조정에 몸담고 있었던 시간을 모두 합쳐 보면 1년도 채 차지 않았다. 율곡을 위해서 한 번 해명해 준 것이 마침내 군소배들의 미움을 받게 된 나머지 결국은 그들의 중상모략에 걸려 지업(志業)을 제대로 펴 보지 못했으니, 아마도 운명적으로 도가 폐해지려는 때였던 모양이다. 이 말이 맞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령 선생이 죽은 뒤에 포숭(褒崇)하는 일이 행해져 조금 사문(斯文)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하더라도 세도(世道)가 교상(交喪)하게 된 일에 대해서야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군수 여량(汝樑)의 딸로서 모두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문영(文泳)은 일찍 죽었고 차남 문준(文濬)은 현감이며, 장녀는 별좌(別坐) 남궁명(南宮蓂)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부윤 윤황(尹煌)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의 아들로 모(某)가 있다. 문준은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역(櫟)이고 차남은 익(杙)이고 그 다음은 직(㮨)이며, 딸이 세 사람 있다. 남궁명은 3남을 두었고, 윤황은 5남을 두었다. 외손으로 남녀가 매우 많으나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사문에 복을 내리사 / 天胙斯文
철인이 한꺼번에 나게 했도다 / 幷生哲人
우계(牛溪)와 율곡(栗谷) / 坡山石潭
유덕군자(有德君子) 반드시 지기(知己) 있는 법 / 德則有隣
송 나라 때 주회암(朱晦庵)과 장남헌(張南軒)처럼 / 擬宋朱張
서로들 인덕(仁德)으로 도와줬다오 / 相輔以仁
도와 기의 오묘한 관계 / 道器之妙
성과 정의 미묘한 속성 / 性情之微
체와 용의 근원 하나이어니 / 體用一源
둘로 나뉘면 결별이라오 / 二之則離
자세히 따져 묻고 분명히 해명하여 / 審問明辨
의심할 여지없이 회통했나니 / 會通無疑
숨겨졌던 내용들 확충시키고 / 旣擴前秘
제기될 의문점 해소했도다 / 亦徹來蔽
숨고 나온 것은 무슨 마음이었던가 / 隱見何心
오직 의리 입각한 행동이었지 / 惟義之比
근실한 우리 선생 / 釁釁先生
완덕(完德) 속에 갖추고서 정도를 걸었도다 / 含章履貞
몹시도 어려웠던 시대를 만나 / 遭時孔囏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형통했지 / 身困心亨
사람들은 내 마음 안 알아줘도 / 人莫我知
하늘만은 속일 수가 결코 없는 법 / 天不容欺
사람들이 우세하여 액운당하다 / 人勝而阨
하늘의 뜻 정해짐에 회복되었네 / 天定乃復
일단 회복되고 나자 / 亦旣復矣
발산되는 빛 / 不顯其光
백세 뒤에라도 / 百世以俟
남긴 글 휘황하리 / 遺文煒煌
도덕 군자 끝까지 왜곡된다면 / 道而終詘
선인(善人)들 어떻게 북돋우리요 / 善者曷勗
후대의 학자들 부탁하노니 / 凡厥來學
나의 이 비명(碑銘) 잘 살피시기를 / 鑑此鑱石

[주D-001]사람이 …… 이치 : 난세(亂世)에는 악인이 위세를 떨치다가도 천운(天運)이 순환하여 하늘이 본래의 힘을 발휘하게 되면 악인이 망하면서 정상화된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오자서전(伍子胥傳)에 “사람의 무리가 많으면 하늘을 이길 때도 있지만 하늘이 정해지면 또한 사람을 무너뜨리는 법이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이라고 하였다.
[주D-002]이택(麗澤)의 도움 : 이택은 서로 붙어 있는 두 개의 연못이라는 뜻으로서, 붕우간에 서로 도움을 주며 학문을 토론하고 덕을 닦아 나가는 것을 말한다. 《周易 兌 象辭》
[주D-003]세도(世道)가 …… 일 : 《장자(莊子)》 선성(繕性)에 “세상은 도를 잃고 도는 세상을 잃었으니, 세상과 도가 서로 잃어버린 것이라 하겠다.[世喪道矣 道喪世矣 世與道 交相喪也]”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