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 18현 우계 성혼

우계 연보 보유 (우계 성혼)

아베베1 2011. 12. 25. 10:23

  우계 성혼 선생은 해동 18현 이시며 본관 이 창령인 이시다

 

  ☞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 최고봉의 모습이다 (자운봉 선인봉 만장봉의 모습 2011.12. 24. 담았다) 

 

우계연보보유 제2권

잡록(雜錄) 상 선배(先輩)의 문자 중에 비록 위의 세 조항에 관계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선생의 사우(師友) 간의 교제(交際)와 언행(言行)과 출처(出處)에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별도로 뽑아 잡록을 만들었다.


율곡(栗谷)이 장차 대사간(大司諫)으로 부르는 명에 달려가려 할 적에 눈이 내리는 가운데 소를 타고 우계(牛溪)를 방문하여 작별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해는 저무는데 백설이 산에 가득하니 / 歲云暮矣雪滿山
들 오솔길 교목 사이로 가늘게 나뉘어져 있네 / 野逕細分喬林間
소를 탄 채 어깨 움츠리고 어느 곳으로 가는가 / 騎牛聳肩向何之
나는 우계 가의 친구를 그리워한다오 / 我懷美人牛溪灣
사립문 저녁에 두드리며 청순(淸純)한 분에게 읍하니 / 柴扉晚叩揖淸癯
작은 방에 누더기 걸치고 포단에 의지해 있네 / 小室擁褐依蒲團
고요한 긴긴밤 잠 못 이루고 앉아 있으니 / 寥寥永夜坐無寐
반벽에 붉은 등불 그림자 가물거리노라 / 半壁淸熒燈影殘
인하여 반생에 이별이 많음 슬퍼하고 / 因悲半生別離足
다시 천산에 행로가 어려움 생각하노라 / 更念千山行路難
담소한 뒤에 뒤척이다가 새벽닭이 우니 / 談餘展轉曉雞鳴
고개 들어 바라보매 창문에는 차가운 달빛 가득하네 / 擧目滿窓霜月寒
하였다. -《율곡집(栗谷集)》-

임진년(1592, 선조25) 10월 24일에 나는 동궁(東宮)을 뵙고 물러 나와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서생이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 날 언제인가 / 書生報國知何日
난세에 표류하니 눈물이 수건을 적시노라 / 亂世飄零淚濕巾
빙설이 하늘에 가득한데 돌아갈 길 머니 / 氷雪滿天歸路遠
몸 굽혀 수고로움 다하며 이내 몸 잊는다오 / 鞠躬盡瘁且忘身
하였다. -《임계일기(壬癸日記)》. 이하 같음-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7)에 내 일찍이 은산현(殷山縣)을 지나갔었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 10월에 이르러 성천(成川)에서 행조(行朝)로 달려갈 적에 다시 이 고을을 지나게 되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사십일 년이 참으로 한바탕 꿈 같으니 / 四十一年眞一夢
쇠잔한 목숨 표류하여 지금 다시 이곳에 이르렀네 / 殘生飄泊又如今
태평한 어느 날 파산 아래에 누워 / 太平何日坡山下
시냇물 소리 들으며 깊은 밤에 이를는지 / 臥聽溪聲到夜深
하였다.

석담(石潭)에 있을 때에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외로운 소나무 스스로 세한과 같기를 기약하니 / 孤松自與歲寒期
드높은 풍미 어찌 봄철에 우로가 내릴 때를 논할까 / 風味寧論雨露時
우뚝이 서서 여러 초목과 다름 혐의치 않으니 / 獨立不嫌違衆卉
동산에 가득한 도리화들 서로 시기하지 마오 / 滿園桃李莫相疑
하였다.

석담에서 어떤 사람의 시에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지인의 마음 본래 하늘과 같은데 / 至人心跡本同天
작은 지혜 구구하게 한쪽에 집착하네 / 小智區區滯一邊
높은 벼슬에 질곡당한다고 부질없이 말하니 / 謾說軒裳爲桎梏
성시가 바로 임천임을 그 누가 알까 / 誰知城市卽林泉
배는 급한 물살 만나면 노를 돌리기 어렵고 / 舟逢急水難回棹
말은 먼 길을 달리려면 채찍을 맞아야 하네 / 馬在長塗合受鞭
정성과 공경 참으로 용이하게 할 수 없으니 / 誠敬固非容易做
그대의 아름다운 시구 외며 그러한가 묻노라 / 誦君佳句問其然
하였다. -선생이 친필로 원운(元韻)을 쓰고 그 아래에 이 율시(律詩)를 썼는데, 마지막 구(句)에 말한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히 화답한 시이다.

을미년(1595, 선조28)에 한관(韓瓘)에게 답한 편지의 끝에 손수 절구(絶句) 한 수를 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상제는 낳아주기를 좋아하여 만민을 기르니 / 上帝好生育萬民
우리나라에 태평한 봄이 돌아왔단 말 들었노라 / 新聞東國太平春
봄바람에 반갑게 향리로 돌아와 / 春風好與還鄕里
밭 갈고 우물 파며 장차 풍년을 즐기는 사람 되리라 / 耕鑿將爲樂歲人
하였다. -이해에 선생이 연안(延安)에서 파산(坡山)으로 돌아왔다.

성우계(成牛溪)가 사암(思菴 박순(朴淳))을 위해 지은 만시(挽詩)에 이르기를,
세상 밖 구름 낀 산 깊고 또 깊으니 / 世外雲山深復深
시냇가 초가집 이미 찾기 어렵네 / 溪邊草屋已難尋
배견와 위에 삼경의 달빛 / 拜鵑窩上三更月
응당 선생의 일편단심 비추리라 / 應照先生一片心
하였으니, 이는 사암을 잘 애도했다고 이를 만하다. -《상촌집(象村集)》 ○ 살펴보건대, 허균(許筠) 또한 이 시를 평하여 당(唐)나라 시인(詩人)의 격조(格調)가 있다고 말하였으나, 허균의 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므로 기록하지 않는다.

성우계가 어떤 사람에게 준 시에 이르기를,
한 지역 물 맑고 구름 낀 가운데에 밭 갈고 우물 파니 / 一區耕鑿水雲中
만사에 무심한 백발의 늙은이라오 / 萬事無心白髮翁
산새들 지저귀는 소리에 잠 깨어 / 睡起數聲山鳥語
청려장 짚고 산보하며 꽃들 구경하네 / 杖藜閑步遶花叢
하였는데, 시인의 체제(體制)와 격조가 매우 높으니, 이는 이른바 ‘글을 통해 도(道)를 깨달았다’는 것일 것이다. -《시평(詩評)》 ○ 살펴보건대, ‘글을 통해 도를 깨달았다’는 것은 뒤집어 말한 것으로, ‘도를 통해 시(詩)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만사(挽詞)에 이르기를,
급히 용만으로 달려가던 날에 / 急赴龍灣日
치안을 위하여 몇 번이나 글을 올렸던가 / 治安幾抗章
소금과 매실처럼 처음에는 합하였는데 / 鹽梅初有契
패금에 끝내 손상당하였다오 / 貝錦竟成傷

다만 용납되기 어려웠으나 / 只是難容與
어찌 마음에 물러가 은둔할 것을 결단하였겠는가 / 何心決退藏
이제 모두 영원히 끝났으니 / 于今長已矣
세도가 자연 황량하여라 / 世道自荒涼
창생들 참으로 복이 없으니 / 蒼生也無福
대낮에도 산문(山門)이 닫혀 있네 / 白日閉山扃
시례는 가학을 전수받았고 / 詩禮傳家學
풍류는 참으로 모범이 되었다네 / 風流極典刑
간당들의 공격으로 이름이 빛났었고 / 光華奸黨籍
소미성 나타났다 다시 숨었네 / 隱見少微星
원숭이와 학 이제 누구를 주인 삼을까 / 猿鶴今誰主
빈 산속에 깊이 슬퍼하노라 / 深悲虛翠屛
하였다. -《오음집(梧陰集)》-

우계를 아득히 생각하여 두 수(首)의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운림에 한가로이 사시는 분 볼 수 없으니 / 雲林不見考槃人
안개 속의 달 적막한 물가에 아득하네 / 煙月蒼蒼寂寞濱
무숙의 뜰 앞에 풀 묵어 있고 / 茂叔庭前惟沒草
자릉의 대 위에 누가 낚싯줄 드리우나 / 子陵臺上孰垂綸
순후한 풍도는 이미 높은 종적을 따라 떠나갔고 / 淳風已逐高蹤去
야박한 풍속은 다시 난세를 따라 새롭구나 / 薄俗還隨亂世新
구정과 일사 그 누가 우러르고 사모하는가 / 九鼎一絲誰景仰
길이 늙은이의 눈물 흘러 수건 적시게 하네 / 長令老淚漫沾巾
하였고, 또,
해내에 평생 동안 친한 벗 / 海內平生友
덕스러운 음성 구천(九泉)에 막혔네 / 泉臺阻德音
우계에 깨끗한 달 아름답고 / 牛溪淸月好
파산에 저녁 구름 깊어라 / 坡岫暮雲深
지난날의 좋은 말씀 이젠 길이 들을 수 없고 / 永訣他時語
오늘날의 이 마음 막다른 길목에 서 있는 듯하네 / 窮途此日心
산림이 다시금 적막하니 / 山林還寂寞
일을 회상함에 홀로 옷깃 적시노라 / 撫事獨沾襟
하였다. -《동은집(峒隱集)》 ○ 선생이 산월(山月)의 시(詩)를 읊어 동로(峒老)와 작별하였다.

성우계를 추억하여 지은 시에 이르기를,
신야가 있은 지 천년의 뒤에 / 莘野千年後
산림의 처사(處士) 몇 사람이나 있었던가 / 山林有幾人
봉황의 새끼는 원래 오색을 갖추고 / 鳳雛元五色
형산의 박옥은 작은 하자도 없다오 / 荊璞絶纖塵

순주는 사람을 만나면 취하게 하고 / 醇酒逢人醉
지란이 있는 곳은 절로 향기롭네 / 芝蘭在處薰
파산은 곡구와 같고 / 坡山猶谷口
우포는 바로 하수의 근원이라오 / 牛浦卽河源

문도(門徒)는 삼천 명이나 되고 / 徒弟三千盛
명성은 일대에 높았도다 / 聲名一代尊
국가의 위태로운 일 추념하니 / 追思邦杌隉
말하려 함에 코가 시큰해지누나 / 欲說鼻酸辛
세상의 의논은 사견을 따르는데 / 世議循私見
공정한 마음으로 윤리(倫理)를 바로잡았네 / 公心急正倫
조정에 간쟁하여 큰 노여움 돌리고 / 廷爭回盛怒
정직한 도로 어진 군주 섬겼다오 / 直道事仁君
밝은 태양에 정성이 통하고 / 白日精誠貫
깨끗한 가을처럼 기상이 새로워라 / 淸秋氣像新
한마디 말로 사직을 붙들고 / 一言扶社稷
필마로 산중의 집에 돌아왔네 / 匹馬返山門
문 밖에는 솔바람 세차게 불어오고 / 戶外松風急
뜰 앞에는 들 사슴들 뛰노누나 / 階前野鹿馴
한가로이 지내며 세월을 보내니 / 優游聊卒歲
적막하게 봄을 몇번 보냈는가 / 寂寞幾經春
훼방과 칭찬은 타년의 일인데 / 毁譽他年了
부침(浮沈)하는 말로는 그대로 이어지네 / 升沈末路因
푸른 꼴 가지고 배우러 가려는 뜻 저버렸고 / 靑篘孤負笈
백수에 서글피 흰 구름 바라보노라 / 白首悵停雲
미천한 이 몸 한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우니 / 並世慚微末
평소에 의논을 나누지 못했다네 / 平生阻惠論
이제 유명을 달리하니 / 幽明今已矣
오직 뼈에 사무치도록 은혜를 생각하노라 / 鏤骨但含恩
하였다. -《사류재집(四留齋集)》 ○ 이정암(李廷馣)이 일본(日本)과 화의(和議)할 것을 요청하였다가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탄핵을 받아 장차 중한 형벌을 입게 되었는데, 선생이 구원하였기 때문에 시와 제문에 언급한 것이다.

파주(坡州)를 지나면서 선생을 그리워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몸을 굽혀 나오니 사람들 다투어 비웃었고 / 跡屈人爭笑
의리가 높으니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 義高誰得知
인심은 저 지경에 들어가고 / 人心入于彼
천도는 여기에 이르렀네 / 天道至於斯
계당의 길 적막하고 / 寂寞溪堂路
산월의 시 처량해라 / 凄涼山月詩
가을바람에 눈물 줄줄 흘리니 / 秋風滿眼淚
비단 나의 사사로운 정 때문이 아니라오 / 不獨爲吾私
하였다. -《석주집(石洲集)》-

만취(晚翠) 오억령(吳億齡) 형제의 선부인(先夫人)은 우계 선생의 재종매(再從妹)였다. 선부인이 언문 간찰(諺文簡札)을 선생에게 올려 파산에 가르침을 청하자, 선생은 이들을 한집안의 자제로 대하여 창랑(滄浪 성문준(成文濬))과 똑같이 여기고 간격이 없었으므로, 만취 형제 또한 독실한 마음으로 선생을 사모하였다.
혼조(昏朝 광해군) 때에 만취가 작은 배를 타고 시냇가 옛집으로 창랑을 방문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초가집 옛터 남았으나 / 白屋遺基在
청산은 옛 자취 아니로세 / 靑山舊迹非
작은 배로 눈물 뿌리며 방문하니 / 扁舟揮淚過
강 비는 저녁에 부슬부슬 내리누나 / 江雨暮霏霏
하였으니, 무한히 서글퍼 하고 사모하는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신명규(申命圭)의 기록 ○ 《파문록(坡門錄)》에 만취 형제를 기록했었는데,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가 기록한 글에는 처음에는 썼다가 마침내 삭제하였으니, 뜻이 있는 듯하므로 이것을 그대로 따랐다.

명재(明齋 윤증(尹拯))가 파산서원(坡山書院)에서 자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적벽에 배 띄워 화석정 바라보고 / 浮舟赤壁望花亭
우포에 돌아오니 산 달 밝게 비추네 / 牛浦歸來山月晴
옥 같은 빛과 금 같은 소리 어제 일과 같으니 / 玉色金聲如昨日
진세의 혼 아직도 한때나마 깨어 있네 / 塵魂猶得片時醒
하였다. 또 서실(書室)에서 자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계산에 오대를 내려온 가업이요 / 溪山五世業
백년 동안 거문고 타고 글 읽은 고향이라오 / 絃誦百年鄕
옛집 아직도 훼손됨이 없으니 / 舊屋猶無恙
어진 손자 유업을 잘 계승하네 / 賢孫乃肯堂
시서는 서가에 가득하고 / 詩書瞻滿架
관동들 엄연히 행렬을 이루었네 / 童冠儼成行
올바른 학문 이제 힘써야 하니 / 正學今當勉
안정의 마지막 장 음미하노라 / 顔亭味卒章
하였다. -《명재집(明齋集)》-

계사년(1593, 선조26) 5월 20일에 선생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봉심(奉審)하기 위하여 오신다는 말을 듣고 시냇가에 가서 기다렸다가 뵈었는데, 선생의 얼굴빛은 전과 같았으나 수염과 귀밑머리는 휠씬 더 센 모습이셨다.
강진승 자소(姜晉昇子昭)가 선생을 모시고 왔다. 이날 선생은 신주(神主)를 꺼내어 서실(書室)에 봉안하고 제사하였다. 또 병란(兵亂)에 죽은 친구 등 서로 아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동안 타향에 표류하느라 아직까지 신위(神位)를 만들어 곡하지 못했으나 이제 옛집으로 돌아왔으니 그들을 위하여 곡할 만하다 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분의(分義)의 경중과 교제한 정의(情誼)의 친소에 따라 신위의 고하(高下)를 정하고 각기 지방(紙牓)을 쓴 다음 간략히 술과 떡을 장만하여 올리고 곡하였으니, 첫 번째 자리는 바로 나랏일을 위해 죽어 충절을 다한 조여식(趙汝式 조헌(趙憲))이었다. -남궁명(南宮蓂)의 일기(日記)-

계사년 12월에 내가 석담(石潭)에 머물고 있었는데, 윤 해평(尹海平 윤근수(尹根壽))이 요동(遼東)에 들어가면서 해주(海州)를 지나다가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는데 뜻이 간곡하였으며, 재령(載寧)에 도착하여 또다시 편지를 보내오고 목면(木綿) 몇 필과 종이 몇 묶음을 보내왔다.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여 매우 중요한 사명(使命)을 받았고, 또 자신에 대한 걱정이 많아 친구에게까지 마음을 쓸 여가가 없었을 듯한데도 성의가 이와 같으니, 그의 지극한 마음에 감탄하는 바이다. -《임계일기(壬癸日記)》. 이하 같음-

문학(文學) 유응문(柳應文)이 멀리서 찾아와 방문하였다. 유군은 마음이 바르고 한결같으며 어지럽지 않아 말이 간략하고 온당하였으며, 세속의 부화(浮華)함을 숭상하지 않았다. 또 내가 늙고 병든 몸으로 타향에 나그네 신세가 되어 산골짝에 외로이 사는 것을 염려하여 매우 지극히 돌보아 주었으니, 참으로 감사하다.

갑오년(1594, 선조27) 9월에 용산(龍山)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니, 승지(承旨) 오대년(吳大年)과 세마(洗馬) 오백령(吳百齡)이 찾아와 작별하였다. 오 승지는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10리가 넘는 거리를 두 번이나 찾아왔으니, 참으로 지극한 마음씨이다.

을미년(1595, 선조28) 1월 18일에 오음(梧陰) 윤 정승이 교동(喬桐)에서 각산(角山)까지 배를 타고 온 다음 찾아와서 밤새도록 담소하고, 다음 날 아침 또다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작별할 때에 돌아보고 그리워하는 정이 지극하였다. 상사(上舍) 윤훤(尹暄)이 모시고 와서 조용히 문장을 논하고 떠나갔다.

난리 중에 가지고 간 서책은 《청송선생사실(聽松先生事實)》, 《청송당시권(聽松堂詩卷)》, 《청송당서법(聽松堂書法)》, 《선우첩(鮮于帖)》, 《설제여한도(雪霽餘寒圖)》, 《왕형공절구첩(王荊公絶句帖)》, 《두율오언첩(杜律五言帖)》 -모두 청송이 손수 쓴 것이다.- 및 《율곡야사(栗谷野史)》 네 책뿐이었다. -《율곡야사》는 몇 본(本)이 있었는데, 하나는 직접 가지고 갔고, 하나는 파산(坡山)의 땅속에 묻었고, 하나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에게 주었다. ○ 《두율오언백수(杜律五言百首)》는 바로 조백운(曺白雲)의 집안에서 맡긴 것이니, 속집(續集)의 제첩문(題帖文)에 이 내용이 보인다.

우계서실(牛溪書室)은 바로 우리 묵암(默庵) 선생이 도(道)를 강론하시던 곳이다. 선생이 30세가 되기 이전부터 선생의 훌륭한 풍모(風貌)를 들은 자들이 이미 배울 만한 스승임을 알고는 원근을 막론하고 앞 다투어 배우러 찾아왔는데, 선생은 기꺼이 이들을 가르치시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거주하시는 집 동쪽 귀퉁이에 서실을 지어 배우러 오는 자들을 대하니, 방이 겨우 세 칸이었다. 서실이 완성되자 ‘우계서실’이라 편액(扁額)하고, 또 손수 서실의 규칙 22개 조항을 만들어 서실의 의칙(儀則)으로 삼았으니, 지금 문집 가운데에 보이는 것이 이것이다.
서실을 지을 적에 선생은 직접 규모를 만드셨고, 이곳에서 시서(詩書)를 익히고 예악(禮樂)을 강론하여 제자들을 가르친 지가 지금 24년이 되었다. 임진왜란 뒤에 또 병자호란을 겪었으나 훼손됨이 없이 우뚝이 솟아 있어서 신명(神明)이 수호하여 지키는 듯하니, 이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명재집(明齋集)》의 서실중수기(書室重修記)-

명재(明齋)가 남계(南溪)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우계 선생에 대한 기록 중 책을 보신 내용과 비단옷에 관한 말씀은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니, 마땅히 삭제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남계가 답하기를, “두 조항은 보존해도 무방할 듯한데, 만약 잘못 전해진 것으로 의심된다면 삭제하는 것도 좋겠다.” 하였다. -《남계집(南溪集)》-
《율곡별집(栗谷別集)》을 살펴보면, “율곡이 선생에게 묻기를 ‘형이 책을 보실 때에 몇 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7, 8행(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나 역시 10여 행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였다. 또 율곡이 접반사(接伴使)가 되어서 의주(義州)를 향해 서쪽으로 갈 때에 선생을 방문하자, 선생이 율곡에게 이르기를 ‘형의 비단옷이 어쩌면 이리도 화려합니까?’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감히 사치하려는 것이 아니라, 명나라 사신을 예우함에 있어 이처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두 분이 밤에 함께 잠을 잤는데, 선생이 율곡의 이불도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는 농담하기를 ‘이것도 명나라 사신을 예우하는 도구입니까?’ 하니, 율곡이 웃고 사례하였다.” 하였다. 남계가 이 두 조항을 기록하였는데, 명재가 삭제하도록 한 것이다.

선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옛날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이 찬(撰)한 것이 있었는데, 뒤에 사림(士林)들이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사론(士論)은 계곡이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지은 것을 하자로 여겨 쓰지 않았으니, 회천(懷川) 송시열(宋時烈)이 특히 이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다시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에게 청하여 고쳐서 짓고 김신재(金愼齋 김집(金集))가 썼으며, 또 묘표(墓表)는 신재가 짓고 외손인 윤동토(尹童土 윤순거(尹舜擧))가 썼다. -글은 모두 원보(元譜)에 보인다.- 부인 신씨(申氏)는 별도로 장단(長湍)에 장례하였는데, 묘표는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짓고 판서(判書) 김좌명(金佐明)이 썼다. -글은 아래에 부록(附錄)한다.

명(明)나라 만력(萬曆) 26년(1598, 선조31) 무술에 우계 선생이 파주의 우계에서 별세하자, 이해 8월 모일에 향양리(向陽里)에 있는 청송 선생의 묘소 뒤에 장례하였으며, 18년 뒤인 을묘년(1615, 광해군7)에 부인 신씨(申氏)가 별세하니 향년이 85세였다. 풍수가(風水家)들이 연운(年運)이 맞지 않는다고 말하므로, 위재(韋齋)와 축씨(祝氏)의 고사(故事)를 따라 장단의 성탄(城灘) 남쪽에 장례하니, 향양리와 수십 리의 거리였다.
신씨는 고령(高靈)의 망족(望族)으로, 좌의정 용개(用漑)의 증손이고 판결사(判決事) 한(瀚)의 손녀이고 첨정(僉正) 여량(汝樑)의 따님이며, 비(妣)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영의정 광필(光弼)의 손녀이고 주부(主簿) 노겸(勞謙)의 따님이다. 부인은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26)에 출생하였는데, 선생의 배필이 되어 예법을 어김이 없었다. 선생의 관작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자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고, 좌의정에 추증되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봉(追封)되었다.
사림들이 재물을 모아 비석을 마련해서 선생의 신도비를 향양리에 있는 묘소 밖에 세웠는데, 부인의 묘소는 다른 지역에 별도로 있기 때문에 자손의 이름을 표석(表石) 뒤에 기록하였다.

우계 선생의 연보는 옛날 창랑공(滄浪公)이 지은 초본(草本)이 있었으나 소략하여 구비되지 못했는데, 선생이 서적을 널리 참고하고 첨삭(添削)을 가하여 책을 이루었으며, 또 묘비(墓碑), 묘지(墓誌)와 행장, 제문과 축문 등을 모아 부록을 만들고, 또 변무(辨誣)하고 신원(伸冤)하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원하는 등의 상소문을 모아 후록(後錄)을 만들어서 율곡 선생 연보와 합하여 한 질(帙)로 만들었다. 뒤에 이것을 강릉(江陵)의 송담서원(松潭書院)에서 간행하였고, 또 연보후설(年譜後說)을 만들어 우계 선생의 출처(出處)와 어묵(語默), 진퇴(進退)의 대절(大節)을 밝혔다. -노서연보(魯西年譜)-

광해군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사림들이 선생의 유문(遺文)을 간행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장계곡(張谿谷)이 중외에 통문(通文)을 돌렸는데, 머리말에 이르기를, “아래의 글은 재력을 모아 우계 성 선생의 문집을 간행해서 도맥(道脈)을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호서(湖西) 지방은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를 유사(有司)로 삼고, 호남(湖南) 지방은 안우산(安牛山 안방준(安邦俊))을 유사로 삼는다. 음기(陰氣)가 쌓여 비색(否塞)한 때를 당하여 이미 율곡을 위해 묘비를 경영하여 세웠고, 또 선생을 위해 유집을 간행하려 하니, 당시 선비들의 기개가 늠름하여 꺾을 수 없음을 상상하여 볼 수 있는바, 이는 몇 년이 안 되어 양(陽)이 다시 회복될 조짐일 것이다.” 하였다. 그 후 문집을 호남의 임실현(任實縣)에서 간행하였고 속집(續集)을 충청 감영에서 간행한 다음 판각(板刻)을 이산(尼山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보관하였다. -문집은 창랑공(滄浪公)이 문하의 여러분들과 편집하였고, 속집은 노서공(魯西公)이 누락된 문자들을 수습하여 편집하였다.


 

[주C-001]세 조항 : 우계연보보유 권1의 내용을 덕행(德行), 출처(出處), 답문(答問)으로 분류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1]행조(行朝) : 행재소(行在所)의 조정을 이른다. 행재소는 임금이 멀리 거둥하여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인데, 당시 선조(宣祖)는 의주(義州) 즉 용만(龍灣)에 피난해 있었다.
[주D-002]외로운 …… 기약하니 : 세한(歲寒)은 한 해가 저물어 추워지는 것으로, 공자(孔子)는 “한 해가 저물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하였는데, 이는 곤궁함을 당하여도 변치 않는 지사(志士)의 지조를 비유한 것이다.
[주D-003]지인(至人) : 성인(聖人)보다도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인물을 말한다.
[주D-004]배견와(拜鵑窩) : 영평(永平)에 있었던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서실 이름이다.
[주D-005]만사(挽詞) :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가 우계를 위하여 지은 만사이다.
[주D-006]소금과 …… 손상당하였다오 : 소금과 매실은 모두 양념으로, 옛날 은(殷)나라의 고종(高宗)인 무정(武丁)이 현신(賢臣)인 부열(傅說)을 얻어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훈계한 글에 “내가 국을 조리하거든 너는 소금과 매실이 되어라.[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인데, 이후로 군주와 신하가 서로 뜻이 합함을 비유하게 되었다. 패금(貝錦)은 자개 무늬의 비단으로, 비슷한 것을 부연하여 남을 모함함을 뜻하는데, 《시경(詩經)》 소아(小雅) 항백(巷伯)에 “조금 문채가 나는 것으로 자개 무늬의 비단을 이루도다. 저 남을 모함하는 자여 또한 너무 심하구나.[萋兮斐兮 成是貝錦 彼譖人者 亦已太甚]”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07]소미성(少微星) …… 숨었네 : 소미성은 처사성(處士星)으로, 이 별이 희미해지면 처사가 죽는다 하므로 말한 것이다.
[주D-008]무숙(茂叔)의 …… 있고 : 무숙은 북송(北宋)의 학자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자(字)로, 일찍이 뜰 앞에 자라는 풀도 생의(生意)가 있다 하여 제거하지 않았는바, 우계를 염계에 비유하고 우계가 별세한 뒤로는 풀을 돌보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한 말이다.
[주D-009]자릉(子陵)의 …… 드리우나 : 자릉은 후한(後漢) 초기의 고사(高士)인 엄광(嚴光)의 자로, 소년 시절 동문수학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황제가 되어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불렀으나 끝내 세상에 나가 벼슬하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에 은둔하여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는바, 이 역시 우계를 엄광에 비유하여 다시 낚시질할 은사가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주D-010]구정(九鼎)과 일사(一絲) : 구정은 옛날 하(夏)나라의 우왕(禹王)이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 주조한 솥으로 매우 귀중함을 뜻하고, 일사는 실 한 오라기로 매우 하찮음을 뜻하는바, 곧 의리를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가볍게 여김을 말한 것이다.
[주D-011]신야(莘野) : 신(莘)나라의 뜰로, 옛날 여기에서 농사지으며 살았던 이윤(伊尹)을 가리킨 것이다.
[주D-012]봉황(鳳凰)의 …… 없다오 : 형산(荊山)은 초(楚)나라에 있는 산이며, 박옥(璞玉)은 돌 속에 들어 있는 옥으로 춘추 시대 변화(卞和)가 발견한 화씨벽(和氏璧)을 이르는바, 청송(聽松)의 아들인 우계가 원래 봉황새나 화씨벽처럼 아름다운 자질과 깨끗함을 갖추었음을 말한 것이다.
[주D-013]파산(坡山)은 …… 근원이라오 : 곡구(谷口)는 중국의 지명으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순화현(淳化縣) 서북쪽에 있었는데, 전한(前漢) 말기 고사(高士)인 정박(鄭朴)이 일찍이 이곳에 은거(隱居)하였으며, 하수(河水)는 하분(河汾)을 가리킨 것으로 보이는데, 수(隋)나라 말기 문중자(文中子)인 왕통(王通)이 은거하여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여기서는 우계가 살던 파산(坡山)은 곧 정박이 은거한 곡구와 같고, 우포(牛浦) 곧 우계(牛溪) 역시 왕통이 강학한 하분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주D-014]푸른 꼴[靑蒭] : 생추(生蒭)와 같은 말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에 “생추 한 묶음 가지고 가니, 그분 옥처럼 아름답네.[生蒭一束 其人如玉]” 하였다. 이는 현자(賢者)가 타고 다니는 흰 망아지를 먹이는 신선한 풀을 말한 것인데, 후세에는 현자를 사모하는 뜻으로 많이 사용된다.
[주D-015]안정(顔亭)의 마지막 장(章) : 안정은 북송(北宋)의 정이천(程伊川)이 지은 안락정명(安樂亭銘)을 가리킨다. 안락정은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살던 옛터에 지은 정자인데, 그 명(銘)의 마지막 장에 “우물을 차마 버려둘 수 없으며 땅을 차마 황폐하게 내버려 둘 수 없네. 아, 올바른 그의 학문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水不忍廢 地不忍荒 嗚呼正學 其何可忘]” 하였다. 당시 윤증(尹拯)이 파산(坡山)에 이르러 우계서당(牛溪書堂)에 유숙하였는데, 때마침 서당의 중수(重修)가 끝나자 시를 지어 “올바른 학문 이제 힘써야 하니 안정의 마지막 장 깊이 음미하네.[正學今當勉 顔亭味卒章]” 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주D-016]선릉(宣陵)과 정릉(靖陵) : 선릉은 성종(成宗)과 성종의 계비(繼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이고 정릉은 중종(中宗)의 능인데,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선조 25년(1592) 4월에 왜적에 의하여 파헤쳐지고 재궁(梓宮)이 불탔으며, 일부 유골과 수의(壽衣)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유골에 대하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등은 능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으나, 우계 등은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하여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주D-017]제첩문(題帖文) : 이 글은 《국역우계집》 권2에 ‘선고의 서첩 뒤에 쓰다[書先考書帖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D-018]위재(韋齋)와 축씨(祝氏)의 고사(故事) : 위재는 주자(朱子)의 부친인 주송(朱松)의 호이고 축씨는 주자의 모친인데, 주자가 두 분을 따로따로 장례한 일을 말한 것이다.

우계연보보유 제2권
잡록(雜錄) 하 이 편은 오로지 변론(辨論)하여 바로잡은 내용이다.


안민학(安敏學)이 처음 최영경(崔永慶)을 방문하고서 그의 인품이 특이하다고 느껴 성혼(成渾)에게 말하였다. 성혼이 도성에 들어가서 직접 찾아가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에 맨다리의 작은 계집종이 나와 응접하였다. 문에 들어가니 방초(芳草)가 뜰에 가득하였으며 잠시 후 최영경이 나왔는데, 삼베옷에 찢어진 신으로 매우 빈한한 차림이었으나 그 용모가 엄중하여 범할 수가 없었다. 서로 앉아서 말하였는데 한 점의 속된 태도가 없었으므로, 성혼이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백인걸(白仁傑)에게 말하기를, “제가 최모(崔某)를 만나 보고 돌아올 때에 갑자기 청풍(淸風)이 소매에 가득함을 느꼈습니다.” 하니, 백인걸이 크게 놀라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이후로 최영경의 이름이 사림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경연일기(經筵日記)》-

최영경(崔永慶)과 정인홍(鄭仁弘)이 모두 우계와 율곡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최영경의 명성이 드러난 것은 오로지 우계 때문이었다. 그 후 자주 파산에 왕래하였는데, 뒤에 잘못되어 정인홍에게 붙고 우계를 배반하였으며, 이발(李潑) 등과 친하게 지내고 율곡을 훼방하다가 마침내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스스로 빠졌으니, 애석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 정인홍이 지은 최영경의 행장에 “공은 성모(成某)와 친분이 있었다. 성모가 파산에서 도성으로 들어오자 공이 장차 방문하려 하였는데, 어떤 친구가 성모의 집에서 돌아와 이르기를 ‘성모가 심 동지(沈同知 심의겸(沈義謙))와 말을 나누면서 문을 지키는 자에게 경계하여 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하자, 공은 급히 돌아오고 다시 가지 않았다.” 하였는데, 이는 실로 정인홍이 날조한 말이다.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분당(分黨)이 이미 을해년(1575, 선조8)에 시작되었으나 사축(司畜)과 정인홍이 정축년(1577, 선조10) 이전에는 파산에 왕래하였으니, 그렇다면 우계를 의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심의겸이 권력을 잡은 것은 을해년 이전에 있었고, 을해년에 심 대비(沈大妃)가 별세한 뒤에 심의겸은 이미 세력을 잃었다. 가령 우계가 심의겸과 서로 친했다 하더라도 사축이 어찌 을해년 이전에는 의심하고 비방하지 않다가 도리어 정축년 이후에 의심하고 비방하였겠는가. 정축년 이후에 비로소 우계가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하찮게 여긴 일로 서로 막힘을 면치 못하였으니, 사축이 우계를 의심하고 비방한 것은 대개 자기 스승에게 아첨하고 좋아하는 사사로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인홍이 실체가 없는 말을 날조하여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현혹시켰으니, 이는 바로 이발 등이 현인을 무함한 것과 똑같은 행적인바, 애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노서집(魯西集)》의 논최영경서(論崔永慶書). 이하 같음-

최영경과 정인홍이 정축년 이전에는 실로 일찍이 우계를 멀리하지 않았는데, 양홍주(梁弘澍)가 말을 잘못 전함으로 인하여 비로소 의심하고 비방하는 단서가 생겼다. 그리하여 계미년(1583, 선조16) 이후에는 마침내 어그러져 멀어졌으며, 정인홍은 끝내 양홍주의 일 때문에 우계에게 감정과 분노를 품어 온갖 무함과 공격을 다하였다.
○ 양홍주는 바로 정인홍의 처제(妻弟)였다. 정인홍이 양홍주와 원한을 맺어 서로 해치려 하자, 우계가 이것을 듣고 말씀하기를, “양홍주가 설령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정인홍이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였다. 양홍주가 우계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그의 아들 황(榥)이 우계에게 수학하였으므로, 우계에 대한 정인홍의 분노가 특별히 심하였다.

최영경전(崔永慶傳)에 이르기를, “최영경이 평상시 성모(成某)와 교분이 두터웠는데, 성모가 정철(鄭澈)과 서로 결탁하자, 최영경은 언제나 정철을 형편없는 소인이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성모와의 교분도 끝까지 가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정여립의 옥사가 정철 때문에 일어났고, 성모 또한 협조한 일이 없지 않다고 의심하였다. 그 후 논하는 자들은 성모가 정철을 사주하여 최영경을 죽이고 아울러 그 관작까지 빼앗게 하였다고 말한다.” 하였다.

최영경전은 바로 유서애(柳西厓 유성룡(柳成龍))가 찬한 것이다. 서애는 계미년(1583, 선조16) 이래로 은밀히 간악한 무리의 뿌리가 되었으나, 그 기미를 깊이 감추어 일찍이 스스로 손을 댄 적이 없으니,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상소문에 이른 바 ‘머리를 드러냈다가 곧바로 머리를 감춘다’는 비판은 실로 그의 정상을 안 말이라고 하겠다. 이 전(傳)은 또한 남의 말에 가탁하여 사사로이 억측함이 정인홍의 행위보다 심하니, 남의 나쁜 버릇을 전습(傳習)하여 지금까지 강경하게 행동하는 저 후생들을 어찌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참으로 애통해할 만한 일이다. -명재(明齋)의 변(辨)-

우계 성모가 젊어서부터 큰 명망이 있어 유일(遺逸)로 부름을 받아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왕량(王良)처럼 설설(屑屑)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사관(史官)이 쓰기를, “몸은 초야에 있으면서 멀리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다.” 하였다.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할 적에 우계는 대가가 지나가는 길가에 가까이 살고 있었으나 맞이하여 뵙지 않았고, 대가가 서쪽 변방에 머물러 있으면서 불렀으나 달려가지 않았으며, 금상(今上 광해군)이 세자였을 적에 이천(伊川)에서 군대를 진무(鎭撫)하면서 부르고 역마를 보내어 빨리 달려오라고 재촉하였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는데, 이해 겨울 명나라 군대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오자, 비로소 행재소(行在所)로 달려왔다. 이에 선조(宣祖)가 전교(傳敎)하기를, “내 경(卿)의 집 문 앞을 지나왔는데도 경이 나와서 보지 않았으니, 내 경에게 죄를 지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 행재소로 오니 매우 부끄럽다.” 하니, 성모는 황공하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성모는 마침내 이 때문에 죄를 얻어 추후에 삭탈관직을 당했는데, 그의 무리들은 이것을 그르다고 말하지 않고, 심지어는 말하기를, “우계가 빈사(賓師)의 지위에 있었으니, 성상이 마땅히 찾아와 뵈어야지 우계가 맞이하여 뵈올 예(禮)는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때에 성상이 종묘사직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니, 따를 만한 의리가 없다.” 하니 아, 붕당(朋黨)이 사람의 옳고 그름을 매몰함이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하담야승(荷潭野乘)》. 이하 같음-

이 기록에 이른 바 ‘멀리서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다’는 것은 바로 계미년(1583, 선조16) 양사(兩司)의 계사(啓辭)에 “몸을 산야에 의탁하면서 조정의 정령(政令)과 인물의 진퇴에 대해 미리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니, 이는 바로 공문중(孔文仲)이 정이천(程伊川)을 모함한 말이다. ‘설설(屑屑)하다’는 말은 군자의 진퇴는 진실로 일반인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굳이 장황하게 변론할 필요가 없다. 오직 임진년의 일에 대해서는 정인홍 이후에 날조하여 모함해서 못하는 소리가 없었으나 그래도 이러한 정도의 말들은 없었으니, 어떤 사람이 또 어디에서 이처럼 근거 없는 말을 듣고서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른바 ‘대가가 서쪽 변방에 머물면서 불렀으나 달려가지 않았다’는 것도 날조한 빈말이다. 이홍로(李弘老)의 참소가 먹혀들어 선조는 끝내 부르는 명을 내리지 않았으며, 성천(成川)의 행조(行朝)로 달려간 것이 이미 임진년 초겨울이었는데, 심지어는 ‘명군(明軍)이 압록강을 건너와서야 비로소 행재소로 달려갔다’고 말하였는바, 이는 그 뜻이 은연중 우계가 처음에는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버렸다가 회복할 형세가 있음을 본 뒤에야 비로소 달려간 것처럼 꾸며서 말한 것이니, 그 마음씀이 더욱 교묘하고 참혹하다. 성상께서 전교를 내리신 것은 바로 갑오년(1594, 선조27)에 도성으로 돌아온 뒤의 일이요, ‘이제 행재소로 오니 매우 부끄럽다[今來行在深用赧然]’는 여덟 글자도 성상의 전교 중에 없는 내용이다. 저들이 교묘히 비방하고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과장함이 마침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면서 도리어 남에게 붕당을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후생들이 생전에 속임을 당하여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고 자손에게 전하여 그치지 않고 있으니, 이 또한 슬퍼할 만한 일이다. -명재의 변. 이하 같음-

최징사(崔徵士) 영경(永慶)은 율곡, 우계와 교분이 매우 두터웠는데, 뒤에 의논이 갈리어 서로 틈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기축년(1589, 선조22)에 옥중에서 말라 죽었다. 징사(徵士)가 처음 옥에서 나오자, 우계가 아들을 보내어 쌀을 보내 주면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러한 화를 만났는가?” 하니, 징사가 말하기를, “다만 너의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 때문에 재차 국문(鞫問)하는 화를 당하였다.

우계가 아들을 보내어 위문하자, 징사가 이리이리 말했다는 것은 처음에 정인홍이 날조한 말에서 나온 것인데, 전술(傳述)하여 이에 이르자 하나의 공안(公案)처럼 여겼으니, 소인이 화를 끼침이 심하다고 하겠다. 이 일은 선인(先人)께서 매우 자세히 변론하였으므로, 이제 다시 덧붙이지 않는다.

송강장초(松江狀草)에 이르기를, “기축년 10월에 공(公)이 고양(高陽)에 있으면서 역모(逆謀)의 변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보내어 나를 부르면서 ‘내 사은숙배하려고 한다.’ 하였다. 내가 말씀드리기를 ‘지금 사은숙배하는 것은 행적이 시기를 틈타는 듯합니다.’ 하니, 공이 말씀하기를 ‘역적이 군부(君父)를 해치려 하니, 내가 중신(重臣)으로서 변고를 보고도 나아가지 않으면 신하의 의리에 어떠하겠는가. 자네의 말은 혐의를 피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 함께 서울로 들어왔다. 그 후 우계와 제공(諸公)들이 모두 사은숙배할 것을 권하였으므로, 공은 3, 4일 후에 대궐에 들어가 숙배하였다.” 하였다. -《사계집(沙溪集)》. 이하 같음-

삼가 살펴보건대, 파산서적(坡山書蹟)에 기축년 10월 12일 동은(峒隱)이 우계에게 답한 편지가 있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송강의 진퇴는 이미 사은숙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고, 금일 오후에 차자(箚子)를 소매에 넣고 대궐로 달려갔습니다.”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계의 편지 가운데에 사은숙배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한다고 답한 것이니, 우계가 송강에게 사은숙배하도록 권했다는 말과 서로 어긋난다.
○ 우계가 사은숙배하지 말라고 권한 것은 진퇴의 큰 절개를 위주로 한 것이요, 또한 이해를 따져 혐의를 피하기 위한 계책이 아님이 분명한데, 송강장초와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의 상소문에는 모두 “우계가 도성에 들어가도록 권했다.”고 말하였으니, 가령 참으로 송강이 도성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데 들어갔다면, 비록 우계가 들어가도록 권하였다고 핑계 대더라도 어찌 재앙을 요행으로 면하려 하였다는 비방을 면할 수 있겠는가. 기옹의 상소문과 송강장초의 기사는 혹 전술(傳述)의 오류에서 기인한 것인가? -《노서집》의 송장변(松狀辨). 이하 같음-

송강장초에 이르기를, “공이 추관(推官)이 되었을 때에 내가 새벽에 공이 계신 곳으로 갔더니, 공이 말씀하기를 ‘정여립(鄭汝立)을 황해도 도사(都事)와 김제 군수(金堤郡守)로 의망(擬望)한 전관(銓官)을 규찰하여 바로잡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이조에서 어떻게 역적의 실상을 미리 알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는 재삼 불가함을 논하였는데, 공은 말씀하기를 ‘이는 바로 우계가 주장한 것이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비록 우계의 말씀이라도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있다가 정언(正言) 황신(黃愼)이 이조를 논박하자, 성상이 노하여 공을 배척하고 황신을 고산 현감(高山縣監)으로 좌천시켰다.” 하였다.
○ 내가 송강을 만나 보던 날 저녁에 송구봉(宋龜峯 송익필(宋翼弼))이 이산해(李山海)를 찾아가 만나 보고 돌아와 나에게 말씀하기를, “이 정승이 시름에 잠겨 장차 죽을상을 하고 있으므로 내가 괴이하게 여겨서 물었더니, 이 정승이 말하기를 ‘내 장차 죽을 것이다. 계함(季涵 정철(鄭澈))은 그렇지 않은데, 한 장자(長者 우계)가 반드시 나를 죽이려고 한다.’ 했다.” 하였다. 이산해가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정여립을 김제 군수와 황해도 도사에 모두 첫 번째로 의망하자, 우계는 이것을 그르다 하여 이산해를 논핵하려 하였다. 송강은 이것을 불가하다 하고 우계는 반드시 논핵하려고 하였는데, 좌중에 있던 이희참(李希參)이 이 말을 듣고는 즉시 이산해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니, 이산해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화를 면할 것을 도모하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마침 건저(建儲)의 의논이 있자, 이산해가 이것을 가지고 송강과 우계를 모함할 계책으로 삼아 후궁(後宮)을 통하여 참소하니, 성상의 뜻이 크게 송강을 의심하게 되었다.

정용안(鄭龍安)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 기축, 경인, 신묘 3년 동안의 조보(朝報)를 살펴보면, 황 정언(黃正言 황신(黃愼))이 고산 현감으로 좌천된 것은 홍성민(洪聖民)을 구원하고 이산해를 배척하였기 때문이니, 전관(銓官)을 탄핵했다가 외임(外任)으로 전보(轉補)되었다는 말과 서로 어긋난다.
○ 또 살펴보건대 이양원(李陽元)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정여립을 황해도 도사로 의망하였고, 이산해가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정여립을 김제 군수로 의망하였다. 그러므로 기축년 11월에 양천회(梁千會)가 올린 상소문에 이미 “정여립이 해서(海西)의 막좌(幕佐)에 의망되기를 도모했다.”는 말을 아뢰었는데, 이로 인하여 이양원이 상소하고 대죄(待罪)하였으나 성상의 비답에 이양원을 위로하고 타일렀으며, 경인년 4월 초하루에 사간원에서 전관(銓官)들이 정여립을 의망한 잘못을 논죄하여 당상관과 낭청을 모두 파직할 것을 청하였는데, 성상이 윤허하지 않자 재차 아뢰고 정지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이산해가 황해도 도사와 김제 군수에 모두 정여립을 첫 번째로 의망하였기 때문에 우계가 비난하여 논죄하려 했다는 말과 서로 어긋난다.
○ 우계가 가령 이산해를 미워하여 황신으로 하여금 논죄하게 하였다면 곧바로 이산해의 죄를 배척했어야 옳다. 그런데 범범하게 전관이라고 지적하였으니, 전관은 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산해를 함정에 빠뜨리고자 두 사람을 아울러 논죄한 셈이니, 어찌 이러할 리가 있겠는가. 그 죄에 따라 사람을 다스리는 자는 비록 혹 지나치게 무겁게 처벌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큰 착오에는 이르지 않으나, 만일 그 사람을 미워하여 그에게 죄줄 방법을 찾는다면 비록 지극히 작은 죄목으로 지극히 악한 사람에게 죄를 가한다 하더라도 실로 군자의 마음씀이 아니니, 황공(黃公)도 이러한 짓은 차마 하지 않았을 터인데, 하물며 우계가 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지혜가 밝은 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이희참(李希參)이 비록 우계, 송강과 친하였으나 실로 이산해의 6촌 친족이니, 과연 이 사람이 우계를 위하는 자였다면 반드시 이 비밀스러운 의논을 이산해에게 전달하지 않았을 것이고, 과연 이산해를 위하는 자였다면 반드시 은밀히 의논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니, 우계가 송강과 의논한 것을 이희참이 전달했다는 것은 구구절절이 의심할 만하다. 송강장초 가운데에 실려 있는 연월(年月)과 사실은 착오가 있고 잘못된 부분이 많으니, 예컨대 이성중(李誠中)을 특별히 충청도 관찰사로 제수한 것은 신묘년(1591) 봄이었는데, 경인년(1590) 여름이라고 기록한 따위가 그것이다. 송강과 구봉과 이희참의 말은 또한 혹 전해 들은 것의 선후에 따라 착오가 있는가 보다. 노선생(老先生)이 이 송강장초를 기록한 것이 신유년(1621, 광해군13) 가을이었는데, 정기옹(鄭畸翁 정홍명(鄭弘溟))이 노선생과 함께 거처했다 하니, 수십 년 전의 일이라서 잘 몰랐을 수도 있고 혹은 기옹이 덧붙인 말일 수도 있다. 기옹이 듣고 본 것은 실로 진실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다.

송강장초에 이르기를, “황신(黃愼)과 성문준(成文濬)은 이 화(禍)가 일어난 것이 전적으로 우계가 황신을 시켜 이조를 논박하게 한 데서 연유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저들과 함께 제공(諸公)의 실수를 일일이 열거하며 공격하여 저들의 뜻에 영합하였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기축년(1589, 선조22) 12월 14일에 정암수(丁巖壽) 등이 상소하여 이산해 등을 배척하자, 성상은 정암수 등을 하옥하도록 명하였다. 15일에 조중봉(趙重峯)과 양산숙(梁山璹)이 모두 상소하여 이산해 등을 배척하자, 성상은 준엄한 비답을 내리기를, “이 사람들만이 유독 정철(鄭澈)을 칭찬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간사한 귀신인 조헌(趙憲)은 다시 마천령(磨天嶺)을 넘어 멀리 유배 가고 싶은 것인가.” 하였으며, 또 전교하기를, “조헌의 상소문은 사노(私奴)인 송익필(宋翼弼)이 지시하여 사주한 것이다.” 하고는 가두어 엄중히 다스리도록 명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이산해가 왼쪽 배로 들어간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닌 것이다. 송강이 구봉을 집에 머물게 하면서 중봉을 사주하였다는 참소가 이미 기축년 겨울에 일어났으니, 그렇다면 화가 일어난 것이 전적으로 황신이 전관(銓官)을 논죄한 데서 연유했다는 말과 서로 어긋난다.
○ 기축년 역옥(逆獄)을 다스릴 적에 이발(李潑)과 백유양(白惟讓) 등 역적의 공초(供招)에 여러 번 거명된 자들을 성상이 모두 형신(刑訊)하였고, 기타 간악한 무리들을 높이고 추종한 자들도 성상이 또한 반드시 죄를 내렸다. 그러므로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가 갑신년(1584, 선조17) 겨울 정여립을 추천한 일로 인하여 양사(兩司)가 함께 준엄하게 논죄함으로써 마침내 파직의 벌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사간원에서 전관(銓官)을 탄핵하는 것은 또한 이러한 규례를 따른 것일 뿐이다.
황신의 논죄가 도리에 합당한지의 여부는 원래 논할 필요가 없거니와, 만약 우계가 황신을 시켜 논죄하게 하였다고 말한다면 사실이 아닐 듯하다. 옛날 송(宋)나라 주광정(朱光庭)이 소식(蘇軾)을 탄핵하자, 소식의 당(黨)에서는 “이천(伊川)이 사주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공문중(孔文仲)이 이천을 탄핵하여 “뜻과 기운으로 대간(臺諫)을 부린다.”고 하였으니, 어찌 이천이 주광정을 사주하여 소식을 공격하게 하였겠는가. 우계가 황신을 시켜 전관을 논죄하게 하였다는 말도 이와 같을 것이다. -회천(懷川)이 찬한 구봉의 묘갈문을 보면 “이산해가 원한을 품고서 대내(大內)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갇히게 되었다.” 하였으니, 이산해가 은밀하게 송강을 모함한 지가 오래되었다.

일찍이 신재(愼齋 김집(金集))를 모시고 파산연보(坡山年譜)를 편수(編修)하고 교감(校勘)할 때에, 신재가 《계갑록(癸甲錄)》의 기축년과 경인년의 일을 보시다가 양천회(梁千會)의 상소문과 이양원(李陽元)이 대죄(待罪)한 계사(啓辭)를 보신 다음, 크게 놀라 말씀하기를, “이 일이 이미 황신이 전관을 탄핵하기 이전에 일어났구나.” 하시고는, 인하여 송강장초 가운데 한 단락의 내용을 가리켜 말씀하기를, “‘전적으로’라는 전(專) 자와 ‘황신을 시켰다’라는 사(使) 자는 과연 글자를 잘못 놓은 실수를 면치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재가 송강장초 등의 글에 대하여 이미 실제와 다른 단서를 발견하였다면 전에 들었던 말씀을 고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재는 파산의 사적(事蹟)에 대해 처음에는 잘못 알고 있는 상황을 면치 못하였으나, 파산연보를 살펴본 뒤에 깨달은 것이 많았다. ○ 《노서집(魯西集)》의 여회천서(與懷川書). 이하 같음-

경술(1610, 광해군2) 연간에 우계를 신원(伸冤)한 일은 파산 문하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힘쓴 것이었으며, 창랑(滄浪)과 추포(秋浦 황신(黃愼))가 가장 의심과 비방을 많이 받은 것도 그 이유가 있습니다. 신영천(申靈川 신응구(申應榘))의 상소문은 창랑이 가감한 것인데, 간당(奸黨)이라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송강을 함께 신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등 여러 분들의 의논이 이것을 불가하다 한 것입니다. 추포는 여러 번 상소문을 올려 스승의 억울함을 신원해 줄 것을 청하였고, 또 이공 덕형(李公德馨)에게 부탁하였으나 유독 이이첨(李爾瞻) 등만은 실로 조율(調律)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추포와 한사앙(韓士仰)이 옛날 친분을 가지고 그의 뜻에 맞추려고 계획했을 뿐이니, 만약 송강의 잘못을 일일이 나열하여 이이첨에게 영합하였다고 말한다면 실제가 아닙니다.

선사(先師)께서 일찍이 문인들과 경도(經道)와 권도(權道)의 일을 강론하다가 말씀하시기를, “권도는 가볍게 말할 수 없다. 우계가 임진년(1592)에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의 변고가 일어난 뒤를 당하여 국외(局外)의 사람으로서 갑자기 화의(和議)를 주장하다가 선조(宣祖)의 무한한 죄책을 받았으니, 만약 율곡이었다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율곡이 계셨으면 마땅히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하였더니, 선사는 한동안 속으로 되뇌시다가 말씀하시기를, “당시에는 특별히 기이한 계책이 없고, 오직 지성으로 명(明)나라 장수에게 간곡히 기원하여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가지 말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을 근거한다면 선사 또한 우계의 주장이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임을 아신 것이다. -《우암집(尤庵集)》의 사계유사(沙溪遺事)-

사옹(沙翁 김장생(金長生))의 문집이 정묘년(1687, 숙종13)에 간행되었으니, 그렇다면 유사(遺事)는 나중에 지은 문자임을 알 수 있다. 사옹이 설령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하더라도 이는 자로(子路)가 공자(孔子)의 처사를 좋아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일로서 우계에게 해가 되지 않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단서를 가지고 부연하여 선정(先正)을 흠잡는 근거로 만든 것은 절대로 사옹의 뜻이 아니다. 더구나 이 조항에 말씀한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본래의 취지를 잃은 듯하다.
고양겸(顧養謙)의 자문(咨文)은 화의를 주장한 것이 아니요 바로 왜적에게 항복을 받자는 것이었으며, 선생이 상주(上奏)한 것도 화의를 주장한 것이 아니요 바로 고양겸의 지시를 다소 따라서 명나라 조정의 뜻을 저촉함으로써 그들의 노여움을 격발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당시에 선조가 꾸짖은 것은 근본 원인이 따로 있었는데, 다만 주본(奏本)을 빙자하여 노여움을 발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모두 사옹이 몸소 보고 마음으로 헤아리신 것이니, 그렇다면 갑자기 단언하기를 ‘화의를 주장하다가 죄책을 받았다’고 말씀하시거나 또 ‘율곡이었다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단정하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을 듯하다.
그리고 그 아래 단락에 거듭 말할 때에 한동안 속으로 되뇌시다가 대답하셨다는 내용도 ‘지성으로 간곡히 기원한다’고 한 데 불과하여 어투가 매우 모순된다. 당시에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과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등 여러 분들이 성심으로 국가를 위하여 명나라 장수에게 간곡히 기원한 것이 실로 신포서(申包胥)에게 뒤지지 않았는데, 끝내 청원을 얻지 못했던 것은 명나라 조정의 입장에서 논한다면 왜적에게 항복을 받고 병란(兵亂)을 종식시키는 것이 진실로 편의한 계책이었기 때문이니, 지성으로 간곡히 기원한다는 것은 논할 만한 것이 아닐 듯하다.
그리고 ‘국외인(局外人)’이라는 세 글자에 있어서도 말이 또 온당치 못하다. 나랏일이 매우 위급하고 낭패스런 때를 당하여 직접 성상의 하문을 받고 대답한 것이니, 대번에 국내(局內)와 국외(局外)로 구분하는 것은 우계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나의 생각에는, 율곡이 만약 살아 계셨다면 주본에 대한 의논이 우계와 다름이 없으셨을 듯하다. 율곡은 평소 시세를 알고 변화에 통달하여 식견이 매우 뛰어났으니, 계미년(1583, 선조16) 북쪽 변방의 일을 조처하신 것을 가지고서도 상상하여 알 수 있다. 가령 우계가 나라 형편이 이와 같이 위태로운 모습을 보고도 국외의 사람이라고 자처하여 우선 큰소리를 쳐서 위로는 성상의 뜻에 순종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가렸다면, 이는 다만 문자를 편의대로 이용하여 일신의 안위만을 도모한 것일 뿐이니, 선생이 어찌 이러한 일을 하였겠는가.
○ 또 살펴보건대 유서애(柳西厓)가 조월천(趙月川)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계사년과 갑오년에 인민들이 서로 잡아먹어서 당장 국가를 보전하기 어려웠는데, 스스로의 힘으로 도모할 수 없기에 밖으로는 명나라 조정의 기미(羈縻)의 계책을 따라 적의 형세를 다소 늦추고 안으로는 전수(戰守)의 대비를 닦아 서서히 후일을 도모하였습니다.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오늘날 나라를 도모하는 방책도 이와 같이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화의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서책 사이에서 좋지 못한 제목을 찾아내어 서로 모욕하고 더럽히니, 이는 마땅히 웃으면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해 보면 당시의 사세가 매우 위급하였음을 상상할 수 있으며, 서애가 실로 왜적과의 화의를 주장하였는데도 성상의 마음이 서애에게는 깊이 노여워하지 않고 또 그의 말을 따른 반면 유독 우계에게만 꾸짖음과 책망을 많이 한 것은, 이홍로(李弘老)의 참소가 먼저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농와잡록(農窩雜錄)》-

회천(懷川)이 이희조(李喜朝)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보내온 편지에 ‘우계의 손자가 이번 상소에 참여했다.’ 하니, -명촌(明村) 나양좌(羅良佐)가 정묘년(1687, 숙종13)에 올린 상소문에 성공 지선(成公至善)이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계의 손자이기 때문에 이 상소에 기꺼이 참여했다.’고 여기는바, 그 일을 이야기하자면 매우 장황합니다. 문원(文元 김장생(金長生)) 선생은 젊어서부터 일찍이 ‘율곡과 우계가 이와 같이 동등하겠는가.’ 하셨으므로, 이 때문에 크게 파주(坡州 우계)에게 노여움을 샀으며, 임진년(1592, 선조25) 이후에 이르러 또 의심할 만한 점이 없지 않았고, 또 일찍이 송강이 죄를 얻은 뒤에 우계 문하의 여러 분들이 자못 정인홍(鄭仁弘)에게 붙어서 우계를 배척하는 것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기 위해 오로지 송강을 허물하자, 문원 선생이 크게 배척을 가하셨으니, 송강의 행록(行錄)에 쓴 것이 매우 준엄합니다. 그 근원이 이와 같으니, 말류(末流)가 오늘날에 이처럼 성함을 어찌 이상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우암집》. 이하 같음-

사계는 율곡을 사사(師事)하였으니 우계에 대하여 진실로 간격이 없지 못하나, 어찌 파주에게 크게 노여움을 산 일이 있겠는가. 비록 우계의 여러 문하생들도 사계를 혐의하고 노여워하는 뜻이 없었는데, 하물며 우계의 마음에 어찌 털끝만치라도 피차를 따지는 생각이 있었겠는가. 우계가 우동계(禹東溪 우복룡(禹伏龍))와 말씀하신 것을 보면 후학들로 하여금 반드시 율곡을 찾아뵙게 하였고, 두 현인의 문인들로서 두 문하에 모두 왕래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어찌 그런 일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생각을 가지셨겠는가. 이 또한 후인들이 서로 시기하고 이기려는 좁은 소견으로 선현을 헤아린 것인 듯하다. -명재의 변-

회천이 이희조에게 또 말하기를, “또 큰 곡절이 있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초기에 특진관(特進官) 유순익(柳舜翼)이 경연에서 첫 번째로 율곡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요청하자, 해주(海州)의 유생(儒生)인 윤홍민(尹弘敏)이 와서 문원 선생을 뵙고 말하기를 ‘소생들이 율곡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고자 하여 왔습니다.’ 하니, 선생은 ‘좋은 일이다.’ 하였습니다. 얼마 후 다시 뵙자, 선생이 말씀하기를 ‘너희들이 하던 일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오 판서(吳判書 오윤겸(吳允謙))가 소생들의 의논을 듣고 즉시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댁으로 찾아가서 「오늘날 우계도 함께 종사하게 하지 않으면 이후에는 도모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는데, 월사가 소생들을 불러 「오 판서와 뜻을 같이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선생은 한탄하기를 ‘일이 장차 이루어지지 못하겠구나.’ 하였습니다. 그 후 을해년(1635, 인조13)에 나의 종형(從兄)이 성균관에서 발론(發論)하자,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은 율곡만을 종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판서 이정백(李靜伯 이홍연(李弘淵))은 우계도 아울러 종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종형이, 이렇게 되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집에 있는 사람들끼리 장차 크게 좋지 못한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동춘에게 상의하니, 동춘은 ‘이와 같이 큰일을 어찌 사문(斯文)의 장자(長者)에게 여쭙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즉시 사람을 연산(連山)으로 보냈는데, 신재(愼齋)가 답하기를 ‘우계가 율곡에 비하여 차이가 있으나, 이미 종사한 선현들에 비한다면 어찌 대번에 그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의논이 마침내 결정되었습니다. 이 뒤로 우계 문하의 사계 문하에 대한 원한이 상당히 풀렸으나, 본색이 간간이 노출되어 약간의 서로 다른 의사가 없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종사할 것을 처음 발의했을 때의 곡절은 나 또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해주 유생인 윤홍민이 상소하기 전에 이미 정수몽(鄭守夢 정엽(鄭曄))이 경연(經筵)에서 주청하며 우계도 함께 거론하였으니, 이것이 당시 사문의 정론(定論)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사리로 추측하건대,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사문의 얼마나 중대한 의논인가. 사계와 수몽 등 여러 선생들이 모두 조정에 계셨으니, 반드시 여러 의논이 하나로 귀결된 뒤에 발의했을 것이다. 그런만큼 해주 유생이 어찌 한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에 배향하는 것처럼 혼자 판단하여 상소하였겠는가. 가령 해주 유생이 율곡만 종사하자는 의논을 하였다 하더라도 당시 사림들이 월사보다는 사계와 수몽을 더 추존(推尊)하였으니, 추탄(楸灘 오윤겸)도 반드시 먼저 사계와 수몽을 찾아가 이동(異同)을 상의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사사로이 월사에게 부탁하여 월사가 홀로 해주 유생을 불러 말했을 리가 있겠는가.
또 사계는 해주 유생과 동문(同門)이요 생질(甥姪)이었으니, 반드시 그와 상의하고 지도하여 십분 정당하게 하기를 기약해서 큰 의논이 완성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가 처음 왔을 때 만나 보고는 범연히 좋다고 말하고, 다시 뵈러 오자 또 ‘일하는 것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범연히 물으며, 우계도 아울러 종사하자는 말을 듣고서는 또 범연히 탄식하면서 ‘일이 장차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남에게 맡겨 두고 방관하는 것처럼 할 따름이었겠는가. 스승에 대한 의리에 있어 비록 작은 일이라도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문묘에 종사하는 큰일을 다만 범연히 대응하였겠는가. 이것은 회천이 젊었을 때의 일이니, 잘못 전해 들은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율곡과 우계 두 현인을 함께 종사하자는 의논은 이미 인조반정 초기인 사계와 수몽이 조정에 계실 때에 정해졌으니, 을해년에 이르러 어찌 딴 의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미 말하기를, “동춘은 율곡만을 종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동춘이 ‘어찌 사문의 장자에게 여쭙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하였으니, 동춘이 율곡만을 종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할 당시에 어찌 먼저 장자에게 여쭙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것인 줄을 몰랐겠는가. 그렇다면 강력히 주장했다는 말도 또한 사실이 아닌 듯하다.
○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사문의 큰일로 자연 사림의 공공(公共)의 의논이니, 어찌 그 사이에 은혜와 원망, 기쁨과 유감을 둘 수 있겠는가. ‘파문(坡門)’이니 ‘계문(溪門)’이니 한 것은 다만 송강의 일로 인하여 두 문하에 조금 어긋나는 점이 있어서 정의(情意)가 막힌 상태를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인(先人)이 평소에 반드시 사실에 근거하여 피차간의 오해를 풀어 주어 서로의 반목을 화합시키고 의논을 공정히 하여 백세(百世)의 공안(公案)을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당시 사우(師友) 간에도 충분히 의논하여 의견의 일치를 거의 보았었는데, 지금 마침내 저와 같이 말하고 있으니, 선인의 평소 지극한 정성이 모두 허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림의 불행인 셈이다. 이른바 ‘본색이 간간이 노출되었다’는 것과 ‘다소 이러한 의사가 없지 않았다’는 등의 말은 모두 억측에서 나온 것이다. -명재의 변-

회천(懷川)의 상소문에 아뢰기를, “신(臣)의 스승 김장생(金長生)이 젊었을 적에 이이(李珥)를 높이고 친애함이 옛날 증자(曾子)가 공자(孔子)에게 한 것보다도 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이와 성혼(成渾) 두 현자에 대하여 차등을 두어 보는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 후 성혼의 학문이 더욱 닦여지고 도가 더욱 높아지자, 또한 예전과는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혼은 국가가 당장 망하게 될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 부득이 명나라 장수의 말대로 권도(權道)를 따라 일을 이룰 방법을 청하였다가 선조(宣祖)의 노여움과 책망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명나라 장수의 말은 바로 화의(和議)입니다. 신의 스승은 이르기를 ‘변(變)은 쉽게 대처할 수가 없으니, 권도는 성인이 아니면 쓸 수가 없다. 그런데 성혼이 쉽게 생각하고 말씀을 올려 성상의 노여움을 범하였으니, 만약 이이가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성혼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성혼의 자손과 문인들은 선사(先師 김장생(金長生))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차등을 두어 보는 뜻에 불평하였으며, 또 신의 스승이 그 자손과 문인을 지나치게 배척한 말에 노하여, 전전(輾轉)하여 서로 격해지니, 이것이 우계와 사계 두 문하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된 근본 원인이니, 오늘날 성지선(成至善)이 신을 공격하는 것은 이치와 형세상 당연합니다. 신이 이희조(李喜朝)에게 답한 뜻은 다만 이와 같을 뿐이었으니, 어찌 세상의 무리들이 이것을 가지고 신이 성혼을 무함하고 비방했다 하여 신에게 불측(不測)한 죄를 뒤집어씌울 줄을 헤아렸겠습니까. 대저 선사가 일찍이 말씀하기를 ‘주자(朱子)가, 문왕(文王)의 지극한 덕(德)이 태백(泰伯)의 온전함만 못하다고 논하였으니, 이는 군신(君臣)의 예(禮)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선사가 성혼을 높인 것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한데도 오히려 경도(經道)와 권도(權道)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은, 《춘추(春秋)》의 복수(復讐)하는 의리를 조금이나마 보존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만약 신을 배척하여 ‘그 스승의 말은 비록 이와 같다 하더라도 저 사람이 어찌 감히 공공연히 그 말을 하고 다닌단 말인가.’라고 한다면, 신은 장차 그들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그 죄를 인정할 것입니다.” 하였다. -《우암집》 ○ 이희조와의 문답이 나온 뒤에 사림의 의논이 더욱 격해져서 관학(館學)에서 장차 상소문을 올려 변무(辨誣)하려 하자, 명재가 강력히 저지하였고, 회천은 상소문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다.

임진년 운운한 것은 바로 갑오년(1594, 선조27)에 우계가 올린 주본(奏本)의 의논을 가리킨 것이다. 이 말은 선인(先人)이 지은 우계연보후설(牛溪年譜後說)에 자세히 변론하였으니, 상고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화의라는 것은 정강(靖康)과 건염(建炎) 연간에 송(宋)나라가 금(金)나라에 대해서 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니요, 바로 명나라 조정에서 왜적이 정성을 바치도록 허락한 것이며, 이른바 선조가 매우 노여워하여 책망했다는 것은 이 의논 때문에 저촉하여 거스른 것이 아니요, 바로 성상의 노여움은 우계에 대한 중상모략이 쌓인 데에서 연유한 것인데 다만 이 일을 계기로 드러났을 뿐이다. 지금 범연히 화의라고 가리켜 말해서 원수를 잊고 원한을 풀어 버린 죄목을 우계에게 돌리려 하고, 매번 선조가 매우 노여워하여 배척했다는 말을 제시하여 이것으로써 죄를 얻은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게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입을 놀려 말하지 못하게 하니, 또한 그 의도가 불순한 면을 볼 수 있다. -명재의 변. 이하 같음-

화(和)라는 한 글자는 우계의 말씀이 아니요 우계의 뜻도 아니었으니, 우계가 추포(秋浦)와 영천(靈川) 등 여러 분에게 답한 편지에 자세히 보인다. 이제 억지로 화의 주장을 우계가 한 것으로 돌리려 하고, 또 자기의 뜻으로 사계의 말씀 밖에 있는 뜻을 말하여 《춘추》의 의리를 거스른 죄로써 우계를 꾸짖으려 하니, 이와 같으면서 털끝만치라도 우계를 흠잡고 훼방할 뜻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문원공의 권도와 경도에 대한 말씀은 이 내용이 일찍이 문자 사이에 보인 적이 없고, 또 신재(愼齋) 선생이 논하지 않았으며, 지금 다만 회천의 상소문에 보이는데, 이제 문원공의 말씀이라고 변론한다면 문원공에게 미안하지 않겠는가. 이제 다만 마땅히 말하기를, “송모(宋某)의 상소문에 《춘추》의 의리라고 말한 것은 어떠한 것인가? 《춘추》의 의리를 조금 보존한다는 것은 바로 회천이 문원공의 말씀 밖에 있는 뜻을 나타낸 것이요, 문원공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때 당인(黨人)들이 율곡과 우계를 문묘에서 출향(黜享)하면서 회천의 상소문을 인용하여 무함하니,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가 사림의 변론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그러므로 명재가 이 글을 보낸 것이니, 문집에 보인다.

회천의 뜻은 전부터 이와 같았으나 예전에는 다만 ‘의심스럽고 감히 알지는 못한다’고 말했을 뿐이며, 또 자기 견해만을 말할 따름이고 일찍이 사계를 끌어대어 말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성내는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말뜻이 자신도 모르게 어그러졌고, 이때부터 비로소 사계에게 책임을 돌렸으니, 이것이 사의(私意)를 쓴 부분이 되는 것이다.
○ 선현이 대처한 의리는 다만 후세의 주자(朱子)를 기다릴 뿐이니, 원래 회천의 말에 따라 가벼워지고 무거워질 성격이 아니다. -《명재집》의 여나명촌서(與羅明村書). 이하 같음-

보내온 편지에 “후일에 저들이 이것을 덧붙여 우계를 헐뜯고 비방하는 한 단락을 삼는다면, 그때에 상대하여 변론하기가 무력할 것 같다.” 하였는데, 어찌 그러하겠소. 그때에 바로 저들과 회천의 말까지 아울러 한번 변론하면 바야흐로 정당하고 힘이 있을 것이오.
이설(異說)이 나옴으로 인하여 변론하는 것은 선현을 위하여 변무(辨誣)하는 사론(士論)이니, 오늘날 회천의 말만 꼬집어 변론하는 것은 선현을 위하여 변무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회천을 공격하는 편론(偏論)이오. 기사년(1689, 숙종15)에 이현령(李玄齡)이 상소문을 올려 변무할 때에 마땅히 회천의 상소문에 있는 말까지 아울러 변론했어야 할 것이나, 그 당시 회천이 막 죄를 지어 벌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말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오. 사원(士元 박태보(朴泰輔))이 지은 상소문 -출향(黜享)할 때에 유생들을 대신하여 지은 상소문이다.- 중에 대략 언급하고 다 변론하지 않은 것도 또한 이 때문이었소. 사론과 편론의 구분이 이와 같으니, 이미 편론이 된다면 비록 바르더라도 바르지 못한 것이오. -정축년간에 회천의 편지가 또 나오자, 이것을 변론하자는 의논이 다시 일어났는데, 명재(明齋)가 명촌(明村)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강력히 저지하였다.

회천이 김수흥(金壽興)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내가 동보(同甫 이희조(李喜朝))에게 준 편지에 우계의 일을 말한 것이 두 가지이니, 그중에 하나는 율곡과 우계가 이와 같이 대등하냐는 것이고, 하나는 임진년 이후의 일에 대한 것이었소. 이것은 권변(權變)의 방도를 범연히 논하여 우계의 일을 간략히 언급한 것인바, 바로 주자(朱子)가 의리의 지극한 곳을 논하면서 문왕(文王)이 무왕(武王)보다 높고 태백(泰伯)이 또 문왕보다 높다고 말씀한 것과 같으니, 이 어찌 우계를 배척하려는 뜻이었겠소. 또 윤안성(尹安性)의 시(詩)는 바로 그 일을 풍자한 것인데, 지금 태학사(太學士 남용익(南龍翼)을 가리킴)가 《기아(箕雅)》에 이 시를 수록하였으니, 이와 같은 일에 만약 노여워한다면 장차 그 노여움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오.” 하였다. -무진년(1688, 숙종14)

문왕에 대한 말은, 회천이 무진년에 보낸 편지에는 스스로 자신의 뜻을 가지고 신장(伸張)하였고, 기사년(1689, 숙종15)에 올린 상소문에는 또 사옹(沙翁)의 말씀이라고 길게 인용하여 부연하였다. 이렇게 같은 말을 두 번 사용하면서 편리한 대로 해석하여 스스로 앞뒤가 다름을 헤아리지 못하였으니, 이는 사옹을 끌어대어 《춘추》의 의리를 보존하려 한다는 말을 하려고 한 것에 불과한바, 이미 사옹의 어법(語法)에 어그러진 점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윤안성의 ‘이릉의 송백이 가지가 자라지 않는다[二陵松柏不生枝]’는 시는 바로 병오년(1606, 선조39)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낼 때에 여우길(呂祐吉)과 작별한 말이다. 병오년의 일은 참으로 화의를 주장한 것이니, 이는 참으로 원수를 잊은 것이다. 윤안성의 시는 이 때문에 지은 것이라서 사건이 크게 다른데, 이제 그것을 취하여 갑오년 우계의 주본(奏本)을 비판하는 시로 만들어, 후생들이 알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는 속인 것이다. 남의 것을 빌어 제멋대로 비방하면서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리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현인을 무함하는 억울함을 변명한다고 하니, 이 노인의 의도를 참으로 알 수 없다. -《농와잡록》-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말씀하기를, “임진왜란 때 우계가 처음에 만약 국난에 달려갔다면 필경 위태로운 일이 없었을 듯하다. 다만 이천(伊川)에서 세자(世子)가 부른 것은 뜻밖이었으니, 이미 분조(分朝)의 부름에 달려갔다면 대조(大朝)에 들어간 것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부득이한 일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도 면하지 못한 것이다. 대체로 이홍로(李弘老)의 참소가 시종 행해진 것은 실로 우계가 이천의 부름에 달려간 데에서 연유하였고, 심지어는 대가가 정주(定州)에 머물던 때에 어보(御寶)를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윤두수(尹斗壽))에게 맡겨서 처치하도록 위임한 일도 있었으니, 성상(聖上)의 진노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였다. -《노서집》의 청음어록(淸陰語錄). 이하 같음-

또 말씀하기를, “고양겸(顧養謙)의 자문(咨文) 한 조항은 당시에 내가 조정의 의논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말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글을 상고하여 비로소 모두 알게 되었다. 당초 명나라 조정의 의논은 절반은 압록강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절반은 군대를 출동하여 조선을 구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 등 여러 사람들이 실로 조선을 구원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여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전쟁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어 중국이 피폐해지자, 여러 사람들은 석성 등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 그러므로 장수와 정승들이 마침내 전쟁을 중지하고 왜적들에게 항복을 받으려는 계책으로 미봉하려 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의리상 왜적과 화친할 수 없었으나 이미 싸울 만한 힘이 없고 또 지킬 수도 없었으며, 다만 중국의 장수와 정승에게 의뢰하여 실낱같은 운명을 연장하려 하였으니, 명나라의 장수와 정승의 뜻을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므로 고양겸의 자문이 오자, 대소 관료들은 모두들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성상만은 이를 어렵게 여겼으니, 삼사(三司)에서 화의를 공박한 의논은 성상의 뜻에 따라 격렬하게 일어난 것에 불과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황추포(黃秋浦)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한음(漢陰)과 조용히 우계 선생이 무함을 당한 내용을 언급하다가 지금의 공론은 상공(相公)께서 신원(伸冤)하는 조처를 취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자, 한음은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매우 옳으니, 내가 만약 말할 기회를 얻으면 마땅히 강력히 아뢰겠다.’ 하였다. 그러다가 폐조(廢朝 광해군) 초년에 한음이 헌의(獻議)하기를 ‘이발(李潑)과 백유양(白惟讓), 성모(成某)를 일체 신원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경중과 고하가 이처럼 어그러지게 되었으니, 공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얻기가 실로 어렵다.”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재삼 생각해 보건대, 우계 선생의 비문(碑文)에 임진년의 일에 대한 사항을 기술하여 의리의 올바른 의논을 후인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보여 주어야 한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왕촉(王蠋)과 강만리(江萬里)의 비유는 정인홍(鄭仁弘)에게 공격을 받았는데, 사람들이 감히 그의 잘못을 지적하지 못하였습니다. 우계가 왕촉과 강만리를 인용하여 스스로 비유한 것은 이미 기축년 이전에 있었던 일인데, 기축년의 사변(事變) 때에 사람들이 혹 국변(國變)에 달려가야만 한다고 하였기에, 우계가 왕촉과 강만리의 일을 가지고 비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조 참의로 부름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조정에 들어갔으니, 이는 평소에 정한 의리가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하였더니, 선생은 그렇다고 하였다.

서애가 일찍이 말하기를,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처음으로 정계함(鄭季涵 정철(鄭澈))과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 위에서 서로 만났는데, 계함이 말하기를 ‘이현(而見 유성룡(柳成龍)) 또한 내가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여 죽였다고 여기는가?’ 하므로, 나는 의심할 만한 몇 가지 일을 지적하였다. 그러자 계함이 일어나 백상루 기둥에 등을 대고 서서 한탄하면서 차고 있던 비단 주머니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호원(浩原 성혼)의 편지가 아직도 이 속에 들어 있다. 아직도 이 속에 들어 있다.’ 하였으니, 이 일로 본다면 우계가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였다는 말은 실상이 아닌 듯하다.” 하였다. -《서애어록(西厓語錄)》-

신축년(1601, 선조34)에 간관(諫官)이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인 죄를 장차 우계에게까지 미치게 하려 하였다. 이때 오직 익지(益之)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자(字)이다.- 가 큰소리로 말하기를, “당초에 송옹(松翁 정철)이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였다는 것도 이미 이해하기 어려운 말인데, 이제 마침내 우계가 모함하여 죽였다고 하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일이 있단 말인가.” 하였다. -《백사집(白沙集)》-

김우옹(金宇顒) 등이 성모(成某)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여 심지어는 “반드시 왕법(王法)을 일찌감치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뜻은 성모에게 무거운 죄를 내리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때를 틈타 비방하고 배척하는 자들이 죽을힘을 다해 몰아붙였다. 이때 이이첨(李爾瞻) 등은 유성룡 등과 대립하여 서로 배척하였다. 이이첨 등이 제창(提唱)하여 말하기를, “화의를 주장한 자는 유성룡인데 도리어 성모더러 화의를 주장했다 하니, 유성룡은 진실로 간사한 사람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의 무리들이 감히 제멋대로 성모를 공격하지 못하였다. -《조야첨재(朝野僉載)》-

부제학 정홍익(鄭弘翼)이 신축년에 정언(正言)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안주(安州)에서 달려올 때에 삼사(三司)에서 성우계를 매우 맹렬히 공격하였다. 혹자가 그에게 묻기를, “자네가 지금 조정에 들어가면 어떻게 이 일을 대처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이번에 올 적에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을 서경(西京 평양)에서 찾아뵙고 이 일을 물었는데, 완평은 현재의 의논을 매우 불가하다고 하였으니, 어찌 옳지 않은 것을 이 노인이 말씀하였겠는가. 내 뜻은 결정되었다.” 하고는 사은숙배한 뒤에 즉시 홀로 아뢰어 이견(異見)을 주장하였다. 이에 의논이 떠들썩하게 일어나서 그를 단천(端川)의 채은관(採銀官)으로 축출하였다. -《구당집(久堂集)》의 기문(記聞)-

광해군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참찬관(參贊官) 송영구(宋英耈)가 아뢰기를, “신은 어려서 성모(成某)에게 수학하였는데, 성모는 깊은 산속에서 마음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가지고 스스로 지조를 지켰으며, 학문이 고명하고 실천이 독실하여 유림의 추중(推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죄를 입어 아직도 신원되지 못하였으니, 신은 항상 걱정하고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은 군주와 부모와 스승 때문에 사는 것이니, 섬기기를 한결같이 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경연(經筵)에서 죽을죄를 무릅쓰고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광해군은 답하기를, “일이 선왕조(先王朝)에 관계되므로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추포공(秋浦公)이 인하여 아뢰기를, “신은 죽은 스승의 심사(心事)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죄의 명목이 실제와는 크게 가깝지 않으므로 지극히 원통하고 지극히 애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벼슬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마침내 군주를 잊고 당(黨)을 비호한다는 죄목을 입기까지 하였습니다. 사대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명예와 절개인데, 성모가 현재 죄인의 명부에 있다면 신의 죄가 아직도 신의 몸에 있는 것이니, 어찌 구차히 관직을 차지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또 송영구의 말로 인하여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하였다. -《추포집(秋浦集)》-

어리석고 몽매한 신은 어릴 때부터 이이와 성혼의 글을 보고 익혀서 성현이 서로 전수한 학문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종신토록 연구하고 우러르는 자료로 삼았는데, 이제 마침내 사람들의 무함과 훼방을 당하여 문묘의 종사하는 대열에서 배척을 당하였으니, 이는 연원(淵源)이 끊기고 뿌리가 뽑힌 것입니다. 신의 종적이 어찌 다시 세상에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명재집》의 경오년 소(疏)-

동인(東人)들이 우계가 최영경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허물하니, 이는 편당(偏黨)의 사견(私見)에서 연유된 것이다. 송강도 본래 최영경을 얽어 죽이려는 뜻이 없었는데, 하물며 우계이겠는가. 당초 최영경이 옥에 갇히자, 송강이 전후에 걸쳐 구원하고 해명한 계사(啓辭)가 분명하게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 있는데, 감정을 품고 돌을 던지는 무리들이 성상의 뜻이 불쾌해하는 틈을 타서 도리어 최영경이 죽은 것을 송강의 죄안(罪案)으로 단정하고 있다.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문서가 흩어져 없어지자, 분명한 계사가 있었는데도 최영경을 무함했다고 지목하여 우계까지 함께 함정 속에 떠밀어 넣어서 수놈이 선창하면 암놈이 화답하듯이 하면서 죽을힘을 다해 몰아붙이니, 또한 가소롭지 않은가.
또 우계는 유사(有司)로서 직책을 담당한 분이 아니었고, 송강의 친한 친구로서 송강에게 편지를 보내어 최영경을 구원해 줄 것을 권하였다. 그런데 보내온 편지에 우계의 명망이 매우 중하여 최영경을 구원할 수 있었다고 말한 것은, 우계가 상소문을 올리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고 여겼기 때문인가? 우계는 이미 유사가 아니었고, 역옥(逆獄)은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비록 최영경의 무죄를 분명히 알았다 하더라도 어찌 경솔하게 결말이 나기 전에 구원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우계가 송강에게 편지를 보내어 구원해 주기를 권한 일에 대해 송강의 계사와 마찬가지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한다면,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사계집(沙溪集)》의 답황종해서(答黃宗海書)-

박약기(朴躍起)가 묻기를, “우계 선생이 최 사축(崔司畜)을 구원하기 위하여 송강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이 있었는데, 우계의 자제가 송강을 위하여 이 편지를 내놓지 않았다 하니, 사실입니까?” 하기에, 내가 전후의 곡절을 들어 전해 들은 말의 잘못을 바로잡고 이르기를, “세속의 의논은 모두 우계가 글을 올려 최영경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의심하는데, 그대의 뜻에는 어떠한가?” 하니, 박약기가 말하기를, “이미 물러난 사람이 비록 이보다 더 큰일이 있다 한들 어찌 글을 올릴 리가 있겠습니까. 세속의 의논은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박약기의 의논은 실로 사성(思誠 권시(權諰))과 같으니, 이는 모두 가정에서 얻어 안 것인가? -《노서집(魯西集)》-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유사(遺事)를 보면, 공은 성모가 정인홍에게 무함당하는 것을 애통하게 여겨 ‘우계 선생이 마침내 어찌 이러한 곤액을 당한단 말인가.’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고(故) 상신(相臣)인 이원익(李元翼)의 연보(年譜)에 이르기를 “이때 국난에 달려가지 않았다고 성모를 비방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원익은 대답하기를 ‘군주가 등용해 주지 않으면 물러나 들에서 농사지을 것이요, 혹 불행하여 나라가 망하고 군주가 죽으면 군자가 이에 대처하는 도리가 따로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큰 절개를 비방해서는 안 된다.’ 하고, 인하여 왕촉(王蠋)과 강만리(江萬里)의 일을 들어 증명했다.” 하였습니다. -경기 유생 유상(柳相)의 소-

어떤 사람이 우계와 율곡 두 분에 대해 정우복(鄭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 묻자, 정우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전부터 시회(時晦 정엽(鄭曄)) -수몽(守夢)- 와 여익(汝益 오윤겸(吳允謙)) -추탄(楸灘)- 과 친한데, 이들은 참으로 한 세상의 호걸스러운 선비이다. 내 삼가 듣건대, 두 공이 몸을 바쳐 우계와 율곡에게 수학하여 높이고 믿음이 매우 돈독하다 하니, 그렇다면 우계와 율곡의 어짊을 따라서 알 수 있다.” 하였다. -《남계집(南溪集)》-

우복(愚伏)이 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그 사람을 모르거든 그 벗을 보라’ 하였으니, 나는 오여익(吳汝益)과 정시회(鄭時晦)를 본 뒤에 우계와 율곡을 훼방할 수 없음을 알았노라.” 하였다. -《명재집(明齋集)》의 신백원(申白原)의 묘지문(墓誌文) ○ 우복이 처음에는 우계와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하였으며, 송강을 나쁜 기운을 타고난 인물에 견주기까지 했었는데, 말년에는 이전의 소견을 고쳐서 이와 같이 말하였다.

처음에 율곡 이 문성공(李文成公)과 우계 성 문간공(成文簡公)은 덕이 같아 함께 조정에 나아갔었는데, 중간에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에게 시기를 받았고, 뒤에는 큰 옥사로 인하여 문간공을 헐뜯음이 더욱 심하여 추후에 관작을 삭탈할 것을 논하기까지 하였다. 이때 공(公)의 조부(祖父)인 대간공(大諫公) -이효원(李效元)- 이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이 의논에 참여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의 교유(交遊)와 견문(見聞)을 알 수 있다.
공이 성균관에 들어가 율곡과 우계 두 선생의 유문(遺文)을 빌려 보고 문득 조부에게 묻기를, “그 시(詩)를 외고 그 책을 읽으면서 그 인물을 알지 못한다면 되겠습니까. 이제 우계와 율곡 두 선생의 책이 함께 있는데, 그 언행과 출처가 모두 옛 철인(哲人)에 부합하니, 그렇게 대단하게 무함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조부의 평소 의논과 같지 않은 듯합니다.” 하고는, 한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개진(開陳)해서 오랫동안 계속하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에 대간공이 크게 뉘우치고 깨달아서 한결같이 공의 말씀을 따랐는바, 사대부들 사이에 아름다운 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보다 앞서 잠야(潛冶) 박공 지계(朴公知誡)도 부형들의 말을 따라 때로 두 선생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했었는데, 잠야가 스스로 학문에 힘쓸 줄을 알게 되자, 두 선생을 사법(師法)으로 삼고 그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군자들은 “이 두 가지 일이 진실로 서로 비슷하나, 공이 성취한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남계집》의 이공의길지문(李公義吉誌文)-

신묘년(1651, 효종2)에 파산(坡山)에 가서 옛날부터 보관되어 있던 서적을 보고 일기에 쓰기를 “옛 자취를 펼쳐 보니 속된 눈을 씻은 듯하고, 유서(遺書)를 살펴보니 딱 들어맞는 거북점을 얻은 듯하다.” 하였다. 우계 선생이 임진년에 병란을 피한 한 조항이 사림들 사이에 와전(訛傳)되는 상황을 면치 못하였는데, 선생은 의리로써 추측하여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알았으나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우계가 직접 써서 전국로(全國老)에게 준 편지를 보고 돌아와 신재(愼齋 김집(金集))에게 질정하여 지난날 마음에 간직하였던 의심을 풀었으니, 일기에서 말씀한 것은 바로 이러한 내용을 가리킨 것이다. -노서연보(魯西年譜)-

살펴보건대, 이보다 앞서 당인(黨人)들은 우계 선생이 이미 상이 도성을 떠나기 이전에 깊은 산골짝으로 피해 들어갔다고 하였는데, 사림들이 잘못된 말을 그대로 전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자가 없었다. 그러다가 전국로에게 답한 편지를 보니, “나는 애당초 감히 병란을 피할 계책을 하지 못하였고, 혹시라도 대가가 서경(西京 평양)으로 옮겨 행차하시면 나도 안협(安峽)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노옹(魯翁)이 본 글이 바로 이것이니, 그 편지가 지금 《우계속집(牛溪續集)》에 실려 있다.

병신년(1596, 선조29) 5월에 유 정승(柳政丞 유성룡(柳成龍))을 찾아가 만나 보고 난리에 격조했던 회포를 말하였으며, 인하여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두 능의 일을 언급하였다. 이때 유 정승이 우계를 사정없이 공격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기 소견을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병통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만약 대감께서 우계의 처지에 있었다면 대감의 말씀도 반드시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하자, 불쾌해하는 기색이 곧바로 얼굴에 나타났다. 이렇게 그의 속이 좁고 편협하니, 참으로 애석하다. -《동계일기(東溪日記)》-

서애가 정릉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동지(同知) 송찬(宋贊)이 먼저 들어가 봉심(奉審)하였다.……성모(成某)는 묵묵히 응답하지 않고 있다가 들어가 봉심한 지 얼마되지 않아 즉시 나와서, 홀로 대신(大臣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앞에 와서 성난 얼굴로 말하기를 ‘비록 신체가 보통 사람과 같다고 하나 이와 같은 점을 볼 수 없었고, 비록 얼굴이 위쪽은 풍후하고 아래쪽은 쪽 빠졌다 하나 이와 같은 점을 볼 수 없었다.’ 하고는, 송찬의 말을 일일이 들어서 하나하나 공박하였다. 그리하여 다만 ‘이와 같은 점을 보지 못했다[不見如是]’라는 네 글자를 가지고 그 말을 모두 어지럽혔으며, 말을 끝내자마자 유유히 물러갔으므로, 좌중에서는 서로들 얼굴만 쳐다보고 성모를 두려워하여 다시 변론하지 못하고 자리를 파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성모에게 쏠렸었다.……” 하였다.
서애는 또 허장(虛葬)한 일 등과 이 오봉(李五峯 이호민(李好閔))이 경연(經筵)에서 아뢴 일을 기록하고 결론짓기를 “비통함이 뼈에 사무친다. 그때의 일을 자세히 기록해서 신자(臣子)의 지극한 원통함을 붙이는 바이다.” 하였다. -《서애잡록(西厓雜錄)》-

살펴보건대, 선릉과 정릉의 일에 대한 본말은 《계갑록(癸甲錄)》과 연보(年譜)에 자세히 보인다. 서애는 체찰사(體察使)로서 먼저 능(陵)에 변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군관(軍官)을 시켜 시체를 거두어 모시게 하였으니, 이는 그가 능의 진짜 시체라고 여긴 것이고, 또 스스로 이것을 자신의 공(功)이라고 여기는 뜻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우계 선생은 신중히 결정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으므로, 서애가 이 때문에 자못 선생을 헐뜯은 것이다. 병신년 4월에 오봉 이호민이 서애의 지시를 받고 재변(災變)으로 인하여 다시 이 일을 논하면서 심지어는 ‘송찬이 상의(商議)할 때를 당하여 한 재신(宰臣)이 크게 불가하다고 말한 탓에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하였으니, 재신은 바로 우계 선생을 가리킨 것인데, 본래 이 일은 실제와 매우 다르다. -우계 선생이 약포(藥圃) 이해수(李海壽)에게 보낸 편지에 대략 말씀하기를, “함께 들어갔던 제공(諸公)들이 모두 묵묵히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나왔으니, 내가 어떻게 소견이 같고 다른 줄을 알아서 불가함을 반드시 말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송공 찬(宋公贊)도 알고 있다.” 하였다. ○ 봉심할 때에 대신(大臣)이 많은 관원들로 하여금 각기 소견을 자세히 써서 바치게 하였으므로 선생도 물러 나와 의논을 올린 것이다. 제공들이 애당초 대면하여 같고 다름을 의논한 일이 없는 것은 연보에 자세히 나와 있다.- 《서애잡록(西厓雜錄)》에 기록된 내용으로 말하면 더욱 비슷하지도 않다. 송공(宋公)이 의논을 올릴 적에 이미 스스로 의심스럽다는 주장을 하였고, 종실(宗室)인 부안정(扶安正)과 영원수(永原守)는 직접 일을 맡았던 사람으로 또한 증빙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더구나 당시에 봉심한 여러 신하들은 두세 사람 이외에는 모두 우계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로, 김응남(金應南)과 이괵(李) 같은 자는 선생과 상대하여 탑전(榻前)에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배척하고 공격하였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중대한 일에 있어 조정의 신하들이 마침내 겁을 먹고 선생에게 쏠려서 한마디 논쟁도 벌이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그랬을 리가 없다.
또 당시에 우계 선생은 상하(上下)의 사람들과 교분이 없어서 주장이 먹혀들지 않았고, 서애는 대신의 지위에 있어서 몸소 국정을 담당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뼈에 사무치는 지극한 원통함으로 여겼다면 이렇게 중대한 일에 대해 한번 차자(箚子)를 올려 공격하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오봉(李五峯)이 아뢴 뒤에 의논을 올릴 때에는 또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고 말하고, 사사로이 기록한 글에는 마침내 도리어 장황하게 애통하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대신이 국가를 생각하는 정성이란 말인가. 서애가 비록 두 능의 일 때문에 선생의 의견을 배척하고 억제하였으나 봉심할 때에 이미 참여하여 듣지 못하였으니, 그의 말이 결코 이처럼 과장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기록은 후생의 무리들이 견강부회하여 덧붙인 글에서 나온 것인 듯한데, 지금 영남(嶺南)에서는 서애의 의논이라고 전하면서 이것을 근거하여 우계를 공격하고 배척하고 있다. 그 전말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한갓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만 하니, 도리어 가소로운 일이다. -당시에 최흥원(崔興源), 심수경(沈守慶), 이덕형(李德馨), 이헌국(李憲國), 이제민(李齊閔) 등 10여 명이 헌의할 적에 모두 시신이 진짜가 아닌 듯하다고 의심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세상에 《운암잡록(雲巖雜錄)》이라는 책이 전해지는데 유서애가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 동서 분당(東西分黨)할 때의 일을 논하면서 오로지 우계와 율곡 두 분과 송강을 공격하고, 우계 선생에 대해서는 날조함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별세할 때의 일에 대해서는 조작한 말이 도리에 크게 어긋났는바, 자못 정인홍(鄭仁弘)의 무리도 말하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내가 생각건대 이것은 서애의 말이 아니니, 바로 매성유(梅聖兪)가 지었다는 벽운하(碧雲騢)와 같은 종류일 것이다. 서애는 갑신년(1584, 선조17) 율곡이 별세하던 날을 당하여 축수(祝壽)하는 자리를 파하였고, 임진년 이후에는 더욱 율곡을 추존하고 복종함이 지극하였으니, 어찌 말년에 이처럼 거짓된 글을 만들어서 심지어 산에 들어갔을 때에 의암(倚巖)이라고 호(號)를 고쳤다고 하기까지 하였겠는가. -율곡이 승려가 되어 산중에 들어갔을 때에 스스로 의암(義庵)이라고 호하였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의암(倚巖)이라고 바꾸어 써서 교묘히 승려 이름에 가깝게 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정릉의 일은 우계와 서애가 진실로 서로 비방하고 배척하였으나, 화의(和議)를 주장한 주본(奏本)의 일은 실로 서애가 주장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애는 여러 번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배척과 삼사(三司)의 논박을 받고서 또한 일찍이 그 사세를 밝혀 변론하였으니, 어찌 이것을 가지고 도리어 우계에게 떠넘길 수 있겠는가.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결코 이것은 서애 문하의 연소배들이 스승의 몇 마디 말씀을 주워 모아 망녕되이 자기의 의견을 덧붙여 우계와 율곡 두 분을 무함하느라 도리어 그 스승을 무함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또 우계가 별세하실 때의 내용은 위 글의 《서애잡록》에 말한 바와 서로 유사하여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다. 그렇다면 또한 굳이 이러한 말을 거듭 기록할 이유가 없으니, 똑같은 투식의 무함하는 글임을 알 수 있다. 혹 후생으로서 보는 자가 진위(眞僞)에 현혹될까 염려되므로 대략 여기에 변론하는 바이다.

정승 원두표(元斗杓)가 일찍이 말하기를,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가, 우계 선생이 여색(女色)을 실수한 일을 논하여 이르기를 ‘선생이 일찍이 창가에 쓰시기를 모년 모월일이라 하였으므로 어떤 손님이 이것을 보고 묻자, 우계는 「이날 우연히 모시는 계집종과 사통(私通)하였으니, 진짜를 어지럽힐 병폐가 있을까 염려되므로 기록했다.」고 대답하였다. 그 후 그 계집종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문잠(文潛)이라 했다.’ 하였다.” 하였다. -《남계집(南溪集)》-

살펴보건대, 남계(南溪)의 이 기록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내가 일찍이 노서(魯西) 선생이 가정에서 들은 것을 기록하신 내용을 보니, 여기에 이르기를, “임진왜란 때 우계 선생의 가솔들이 나누어 피난하였다. 창랑공(滄浪公)은 단신으로 선생의 명을 받들어 모친인 신 부인(申夫人)을 모시고 왜적을 피하여 용천(龍川)으로 갔다. 선생은 홀로 성천(成川)의 부름에 달려갔기 때문에 음식을 장만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일을 보살필 사람이 없었는데, 이때 문잠(文潛)의 어미가 열입곱 살의 나이 어린 계집종으로 성품이 꽤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여 선생을 따라갔다. 그리하여 용만(龍灣)과 영유(永柔), 정주(定州)와 해주(海州)에서 가시는 곳마다 매우 부지런히 일하여 정성을 다하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돌아와 연안(延安)의 각산(角山)에 우거하였는데, 이때 자녀들이 처음 와서 안후(安候)를 살폈으나 왜란이 아직 평정되지 못하여 중외(中外)가 짐을 지고 다시 피난해야 할 우려가 있었다. 온 집안에서는 계집종이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여 자녀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 것을 가상히 여겨 그 은덕(恩德)에 보답하려고 하였으며, 또 끝까지 선생을 따라가게 하여 간호하게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창랑공이 편지로 모친인 신 부인에게 여쭙고, 또 두 매씨(妹氏)인 남궁 부인(南宮夫人)과 팔송 부인(八松夫人)으로 하여금 선생에게 거두어 기를 것을 간곡히 청하게 하니, 얼마 후에야 선생이 웃으며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을미년(1595)에 문잠이 출생하였다. 그러므로 문잠의 별권(別券)에 그 내용을 자세히 기재하였다.……” 하였다.
전말(顚末)이 이와 같으니, 애당초 선생이 여색을 실수한 것이 아니다. 또 문잠이 출생했을 때에 그 어미가 이미 선생을 모시는 첩이 되었으니, 어찌 진짜를 어지럽힐까 우려하여 정을 통한 날짜를 창가 벽에 써 놓았겠는가. 잠야가 말씀한 것은 전하여 들은 말에 착오가 생긴 것이거나 혹은 당인(黨人)들이 거짓으로 지어낸 것일 터인데, 남계가 경솔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 것이 매우 온당치 못하니, 이것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처음 나뉜 것은 비록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서로 반목한 데에서 연유하였으나, 실제로는 심 청양(沈靑陽 심의겸(沈義謙))이 선묘(宣廟)의 원구(元舅 장인)로서 궁중에서 죄를 얻자, -이 사실은 대략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상소문에 보인다.- 동인들이 이 기미를 알고는 심의겸의 당이라 하여 서인들을 몰아붙여 모함하였다. 서인들은 비록 그 원인을 알고 있었으나, 또한 차마 죄 없이 심의겸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선조 때를 당하여 서인들이 하루도 조정에서 편안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은 전적으로 여기에 연유한 것인데, 신묘년(1591, 선조24)에 또 김공량(金公諒)의 모함까지 더하여 마침내 하늘에 닿을 듯한 화를 이루었으니, 아, 참혹하다.
계미년(1583, 선조16)의 화는 율곡에게서 시작되어 우계와 송강에게 화가 집중되었고, 신묘년의 화는 송강에게서 시작되어 우계에게 집중되었으니, 을유년(1585, 선조18)의 화는 계미년의 여파이고, 갑오년(1594, 선조27)과 임인년(1602, 선조35)의 화는 신묘년의 남은 불씨였다. 그리하여 한때의 선비들이 모두 이로 인해 화를 당하였는데, 율곡은 다만 일찍 별세하여 화를 면했을 뿐이다. 그러나 계미년과 을유년은 분쟁이 조정에 있고 심 청양을 함정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화가 적었던 반면, 신묘년 이후에는 참소하는 말로 간사하게 군주의 신임을 얻어 김공량을 매개로 삼았기 때문에 그 화가 컸으니, 우계와 송강이 기묘년의 전철(前轍)을 밟아 거의 화를 면치 못할 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송강이 건저(建儲)의 의논을 할 때에 조정에서는 모두 광해군(光海君)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으나, 이산해(李山海)는 김공량 -인빈(仁嬪)의 동생- 과 결탁하여 성상의 뜻이 신성군(信城君) -인빈의 아들- 에게 있음을 간파하고는 은밀히 참소와 이간질을 자행하였으며, 또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르기를, “송강이 장차 먼저 건저를 청하려 하니, 인빈 모자(母子)에게 불리할 것이다.” 하고, “우계가 또 근본이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성상이 마침내 크게 송강을 의심하여 은밀히 신성군의 장인인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으로 하여금 신성군의 집을 호위하게 하였는데, 송강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마침내 건저의 의논을 올리니, 성상이 매우 노여워하였다.
간사한 무리들이 이로 인해 화의 기틀을 격발하여 송강의 무리가 귀양 가고 그 여파가 이미 우계에게까지 미쳤다. 홍여순(洪汝諄)이 또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여 죽였다는 것으로 송강의 죄를 삼았으나, 실제로는 건저를 주장한 것이 죄가 되었고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였다는 것은 명분에 불과하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이홍로(李弘老)가 참소하여 구구절절이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하여 첫 번째로는 불행하게도 김지(金漬)가 세자에게 보위(寶位)를 전하자는 상소문을 올리고 또 선생을 장수로 삼자고 청하였으며, 두 번째로는 불행하게도 선생이 이천(伊川)의 부름을 받아 세자에게로 돌아갔다는 참소가 있었고, 세 번째로는 불행하게도 선생이 성천(成川)에서 의주(義州)로 들어갔는데 또 내선(內禪)을 도모한다는 모함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김지의 상소문에 은근히 집중시킨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조의 ‘경(卿)이 바로 의병장’이라는 비답과 ‘세자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느냐?’라는 물음이 있었으니, -이상 여러 말은 연보(年譜)에 자세히 보인다.- 이는 모두 송강의 건저하자는 의논이 빌미가 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이와 같았는데도 용만(龍灣)의 대각(臺閣)들은 시세를 알지 못하고 마침내 이산해를 귀양 보내고 김공량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다. 이에 성상의 뜻은 모두 우계와 송강이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고, 우계가 행조(行朝)에 올린 두 번의 차자 가운데에 궁중이 엄하지 않다는 간언(諫言)이 있어 더욱 성상의 기휘(忌諱)를 저촉하였다. 이 때문에 성상은 일찍이 노여움을 마음속에서 잊지 못하였는데, 다만 국세(國勢)가 매우 위급한 탓에 이것을 나타내지 못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갑오년(1594, 선조27)에 환도(還都)한 뒤에 송강은 사후(死後)에 처벌을 받아 삭탈관직당하였고, 우계는 주본(奏本)에 대한 책망을 당해 이것을 빙자하여 죄로 삼아서 성상의 전교가 심상치 않았으니, 김청음(金淸陰)의 이른바 ‘이홍로의 참소가 시종 행해진 것은 실로 선생이 이천에 있던 세자의 부름에 달려갔기 때문’이라는 것과, 명재(明齋)의 이른바 ‘성상의 노여움은 우계에 대한 중상모략이 쌓이고 쌓인 데서 연유하였는데, 다만 이 일에 나타났을 뿐이다.’라는 것이 모두 실상이다.
당인(黨人)들은 마침내 또 우계가 사주하여 최영경을 죽였다는 것으로 우계에게 죄를 돌렸으니, 우계와 송강의 죄목이 일관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당인들이 송강을 논죄할 적에 최영경을 죽인 것을 명분으로 삼고 건저를 말하지 않으며, 선조가 우계를 배척할 때에 주본을 명분으로 삼고 선위(禪位)를 도모한 일을 말하지 않아서, 상하가 서로 은폐하여 마음은 동쪽에 있으면서 목소리는 서쪽에서 내곤 하였다. 그러므로 우계와 송강의 죄가 모두 건저에 근원하였으나 그 죄목이 드러나지 않았다.
신축년(1601, 선조34)에 이르러 정인홍의 무리들이 우계를 끝없이 무함하고 헐뜯었으나, 주본의 일은 그들 또한 선조가 격분하여 낸 전교임을 알았기 때문에 아뢰는 말에 언급하지 않았으며, 최영경의 일은 선조 또한 당인들이 근거 없이 날조한 말인 줄을 알았기 때문에 전지(傳旨)에서 삭제하게 한 것이었다. 이것을 근거해 본다면, 우계에게 죄목을 붙일 구실이 없자, 동쪽에 번쩍 서쪽에 번쩍 하면서 이리저리 날조하여 ‘간당과 무리가 되어 군주를 버렸다’는 죄목을 어렵게 만들어 내어, 말하지 않은 것을 죄안(罪案)으로 삼아 사문(斯文)의 화가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으니, 아, 슬프다. 이는 모두 연보(年譜)와 제가(諸家)들의 기술에 섞여 나오나, 흩어져 나와 통일되지 못해서 후생들이 혹 본말을 모르므로, 한 통(通)의 말을 만들어서 여기에 드러내는 바이다.

또 살펴보건대, 제가(諸家)들이 말하기를, “이산해(李山海)의 참소가 이미 먹혀들자, 선조는 인빈(仁嬪)의 자녀가 끝내 서인들에게서 보호받지 못할 것을 깊이 염려하여 무릇 혼인하고 시집보낼 적에 모두 서인 측에 의탁하였다. 그리하여 네 옹주(翁主)를 오음(梧陰), 상촌(象村), 약봉(藥峯), 금계(錦溪)의 집에 시집보내었고, 장릉(章陵)의 배필을 정할 적에도 구팔곡(具八谷)의 집으로 하였으니, 서인의 당을 통렬히 미워하는 선조의 마음으로 볼 때 자녀들을 반드시 서인에게 시집보내고 장가들게 한 것은 간당(奸黨)의 참소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하루는 성상이 신공(申公 신립(申砬))에게 유언비어의 허실(虛實)을 은밀히 묻자, 신공은 백 명을 보호해 주어 송강이 이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그 후 인빈이 일찍이 여러 부마(駙馬)들에게 잔치를 베풀 적에, 담론하는 사이에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가 우연히 복수한다는 말을 언급하자, 인빈이 한탄하기를, “내 끝내 깊은 원한을 갚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여러 부마들이 인빈께서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있느냐고 묻자, 답하기를, “정철이 나의 자녀들을 모두 죽이려고 하였으니, 이는 나의 원수이다.” 하였다. 여러 부마들이 모두 오싹해져서 돌아와 그 집안에 이 사실을 전하였다 한다. 그렇다면 송강의 한 무리가 참형을 면한 것도 다행이라 할 것이다.
우계가 끝내 송강과 같이 화를 당하게 된 것은, 선조가 우계를 송강의 근본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성상의 하교에 이르기를, “성혼은 한때 여러 소인배들의 소굴 주인이 되었다.” 하여 반드시 송강의 죄를 우계에게까지 뻗치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이산해의 참소에 근원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계의 비문(碑文) 가운데에 이른 바 ‘요행히 서로 결탁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반드시 선생에게까지 아울러 화를 미치게 하려고 하였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만약 이것을 안다면, 갑오년의 주본을 배척한 것과 선생이 별세한 뒤인 임인년에 삭탈관직한 죄안(罪案)이 모두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상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모두 덧붙여 귀신과 물여우처럼 사람을 음해하는 소인들의 형상을 드러내는 바이다.


 

[주D-001]사축(司畜) : 사축서(司畜署)의 종6품 벼슬이다. 여기서는 사축에 제수되었던 최영경(崔永慶)을 가리킨다. 이후에도 사축, 혹은 최 사축(崔司畜)은 모두 최영경을 가리키는 것임을 밝혀 둔다.
[주D-002]왕량(王良)처럼 설설(屑屑)하다는 비난 : 왕량은 후한(後漢) 초기의 명사이다. 설설은 빈번하게 왕래함을 이른다. 당시 왕량이 자주 조정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높은 벼슬을 하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자, 그의 친구가 “그대는 조정에 나아가서 충언(忠言)을 하거나 기이한 계책을 세우지도 못하면서 무엇 하러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가?” 하고 비웃은 일이 있으므로 성혼을 왕량과 같다고 비판한 것이다.
[주D-003]공문중(孔文仲)이 …… 말이다 : 공문중은 북송(北宋) 때 사람으로, 성질이 강직하여 왕안석(王安石)의 청묘법(靑苗法)을 반대하였으며 동파(東坡) 소식(蘇軾)과 친하였다. 당시 동파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자, 동파와 사이가 나쁜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대간을 사주하여 동파를 탄핵하게 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주D-004]선인(先人) : 여기서는 윤증(尹拯)의 부친인 윤선거(尹宣擧)를 가리킨다.
[주D-005]송강장초(松江狀草) : 원제(原題)는 송강정문청공행록(松江鄭文淸公行錄)으로, 김장생(金長生)이 기록한 것이다.《沙溪先生全集 卷9》
[주D-006]공이 : 여기에서 ‘공’은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가리킨다.
[주D-007]내가 : 여기에서 ‘나’는 송강장초를 지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기리킨다.
[주D-008]건저(建儲)의 의논 : 건저는 저군(儲君) 곧 세자(世子)를 책봉(冊封)함을 이른다. 당시 선조(宣祖)는 왕비에게서 낳은 아들이 없고 후궁 소생의 광해군(光海君)이 인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세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송강 정철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인빈(仁嬪) 김씨(金氏)를 사랑하여 그녀가 낳은 순성군(順城君)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으므로 정철을 미워하게 되었다.
[주D-009]왼쪽 배로 들어간 것 : 간신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군주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쁜 짓을 자행함을 이른다. 《주역》 명이괘(明夷卦) 육사(六四)에 “왼쪽 배로 들어가 밝음을 상실한 군주의 마음을 얻는다.[入于左腹 獲明夷之心]” 하였는바, 왼쪽은 은벽(隱僻)한 곳으로, 곧 간사하게 군주의 신임을 얻는 것을 말한다.
[주D-010]국외(局外)의 사람 : 일을 담당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는바, 일을 담당한 자를 당국자(當局者)라 칭하는 데에서 생긴 말이다.
[주D-011]자로(子路)가 …… 않은 것 : 자로는 공자의 제자인 중유(仲由)의 자(字)이다. 위(衛)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인 남자(南子)는 평소 음행(淫行)이 있었는데, 공자가 위나라에 이르자, 남자는 공자를 만나 볼 것을 요구하였다. 공자가 부득이하여 남자를 만나자, 자로가 기뻐하지 않았다.《論語 雍也》
[주D-012]고양겸(顧養謙) : 고양겸은 당시 명나라의 흠차방해어왜 병부좌시랑 도어사(欽差防海禦倭兵部左侍郞都御史)로 경략(經略)의 임무를 띠고 우리나라에 온 인물이다.
[주D-013]신포서(申包胥) :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충신으로, 초나라가 오(吳)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진(秦)나라에 원병(援兵)을 요청하러 갔었다. 그러나 진나라가 곧바로 구원하려 하지 않자, 진나라 조정에 서서 며칠 동안 슬피 울며 간곡히 청한 결과, 진나라 조정에서 그의 충성에 감동되어 원병을 보냄으로써 오군(吳軍)을 물리칠 수 있었다.
[주D-014]기미(羈縻)의 계책 : 기미는 외국을 자국(自國)의 속국(屬國)으로 붙들어 두는 것으로, 곧 명나라가 왜국의 항복을 받고 화의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5]사문(斯文)의 장자(長者) : 당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영수 격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가리킨 말이다.
[주D-016]정강(靖康)과 건염(建炎) : 정강은 북송 흠종(北宋欽宗)의 연호(年號)이고, 건염은 남송 고종(南宋高宗)의 연호이다. 북송은 정강 2년(1127)에 금군(金軍)의 침공을 받고 도성인 변경(汴京)이 함락되었으며, 흠종과 부왕(父王)인 휘종(徽宗)이 금나라로 끌려가 변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고종이 즉위하였는데, 당시 화의를 주장하는 간신 진회(秦檜) 등의 말을 듣고 송나라는 끝내 금나라에게 굴복하였다.
[주D-017]내가 : 여기에서 ‘나’는 《노서집(魯西集)》의 저자인 윤선거(尹宣擧)를 가리킨다. 이하 출전이 《노서집》인 단락에 나오는 ‘나’는 이와 같다.
[주D-018]왕촉(王蠋)과 강만리(江萬里)의 비유 : 왕촉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충신이고, 강만리는 남송(南宋) 말기의 충신이다. 왕촉은 제나라 민왕(湣王)이 자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도(無道)한 짓을 자행하므로 초야에 은둔해 있었는데, 연군(燕軍)이 제나라를 침공하고 자신을 데려가려 하자, “충신은 두 군주를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받들지 않는다.” 하고 자결하였다. 강만리는 도종(度宗) 때 좌승상(左丞相)이 되었으나 간신 가사도(賈似道)의 미움을 받고 은퇴해 있었는데, 원군(元軍)이 쳐들어오자 물에 빠져 자결하였다. 이들은 모두 당시 조정에 있지 않고 초야에 은둔해 있었기 때문에 비유한 것이다.
[주D-019]기축년의 사변(事變) : 선조 22년(1589)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謀叛) 사건을 가리킨다.
[주D-020]이공의길지문(李公義吉誌文) : 이 글이 《남계집(南溪集)》 권3에는 경릉참봉이공묘갈명(敬陵參奉李公墓碣銘)으로 실려 있다.
[주D-021]선생 : 여기에서 선생은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를 가리킨다.
[주D-022]매성유(梅聖兪)가 …… 것이다 : 성유는 북송 때의 시인(詩人)인 매요신(梅堯臣)의 자이다. 벽운하(碧雲騢)는 원래 명마(名馬)의 이름인데, 당시 조정의 명재상인 범중엄(范仲淹)을 비방하는 내용의 책 이름이다. 이 책은 당시 매요신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위태(魏泰)라는 사람이 범중엄을 모함하기 위하여 매요신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 한다.
[주D-023]진짜를 …… 기록했다 : 계집종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을 경우 자신과 잠자리를 함께한 날짜를 계산하여 자신의 자식임을 확인함을 의미한다.
[주D-024]내가 : 여기에서 ‘나’는 우계연보보유를 편간한 윤광소(尹光紹)를 가리킨다.
[주D-025]남궁 부인(南宮夫人)과 팔송 부인(八松夫人) : 남궁 부인은 남궁명(南宮蓂)에게 출가한 우계의 첫째 따님을 이르며, 팔송은 윤황(尹煌)의 호로, 곧 윤황에게 출가한 둘째 따님을 이른다.
[주D-026]내선(內禪) : 안에서 선위(禪位)한다는 뜻으로, 곧 선조(宣祖)가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에게 선위함을 이른다.
[주D-027]네 옹주(翁主)를 …… 시집보내었고 : 오음(梧陰)은 윤두수(尹斗壽)의 호이고, 상촌(象村)은 신흠(申欽)의 호이고, 약봉(藥峯)은 서성(徐渻)의 호이고, 금계(錦溪)는 박동량(朴東亮)의 봉호(封號)이다. 선조(宣祖)의 첫째 딸인 정신옹주(貞愼翁主)는 서성의 아들인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인 정혜옹주(貞惠翁主)는 윤두수의 아들인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에게 출가하였고, 셋째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는 신흠의 아들인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에게 출가하였고,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는 박동량의 아들인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에게 출가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서인(西人)이었다.
[주D-028]장릉(章陵)의 …… 하였으니 : 장릉은 원종(元宗)의 능호(陵號)이다.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처음에는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었는데, 아들인 인조(仁祖)가 즉위함에 따라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팔곡(八谷)은 구사맹(具思孟)의 호로, 정원군의 장인이었는데, 뒤에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딸 역시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되었으며, 자신도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우계연보부록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좌의정 김상헌(金尙憲)]


선생은 휘가 혼(渾)이고 자가 호원(浩原)이며 성이 성씨(成氏)이니, 창녕인(昌寧人)이다. 선고 휘 수침(守琛)은 은거하고 도학(道學)을 강명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는데, 별세하자 사헌부 집의에 추증하니, 세상에서 청송(聽松) 선생이라 칭한다. 조고 휘 세순(世純)은 지중추부사로 시호가 사숙공(思肅公)이며, 증조 휘 충달(忠達)은 현령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성씨(成氏)는 고려 때 유명한 성씨(姓氏)가 되었는데, 중윤(中尹) 인보(仁輔)로부터 더욱 크게 현달하였다. 4대를 전하여 여완(汝完)에 이르러 본조(本朝)에 들어와 부원군(府院君)이 되었으며, 석인(石因)을 낳으니 예조 판서였고, 억(抑)을 낳으니 좌찬성이었고, 득식(得識)을 낳으니 한성부윤이었으니, 선생에게 고조가 되신다. 대대로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유명한 분과 덕망 있는 분을 탄생하였다. 선비(先妣)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인데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30) 6월 25일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천품이 독실하고 민첩하여 저절로 도에 가까웠으며 거처하는 집을 묵암(默庵)이라 호하여 스스로 경계하였다. 처음 청송이 조정암(趙靜庵)의 문하에 종유하여 올바른 학문을 얻어들었는데, 선생은 가정에서 배워 도를 들음이 매우 빨랐다. 일찍이 한 번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병환 때문에 복시(覆試)에 응시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평소 조정암과 이퇴계(李退溪)를 높이고 사모하였으며 위로 거슬러 올라가 고정(考亭)을 표준으로 삼았다. 이때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또한 도학으로 자임(自任)하여 서로 함께 의리를 강명하여 조예(造詣)가 더욱 깊으니, 한 시대의 선비들이 모두 귀의하여 우계(牛溪) 선생이라 칭하였다. 얼마 후 도신(道臣)이 학행이 탁월하다고 아뢰어 두 차례나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6품직으로 뛰어올라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배우러 와서 따르는 자들이 더욱 많으니, 선생은 이들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서실의(書室儀)를 게시하여 제생들로 하여금 따라서 행할 바를 알게 하였다. 산서(散署)의 서장(署長)과 여러 시원(寺院)의 관료와 부장관, 공조의 좌랑과 정랑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며, 그 사이에 소명을 받고 한 번 경성(京城)에 갔다가 상소문을 올리고 즉시 돌아온 적도 있다. 사헌부의 관원에 제수된 것은 지평으로 부른 것이 열 번 남짓이었고 장령으로 부른 것이 두 번이었으며, 편안한 수레로 길에 오르도록 명하기까지 하였으나 모두 굳이 사양하고 봉사(封事)를 올려 선을 따르고 학문을 주장하는 방도를 아뢰었다.
선생은 성품이 겸손하고 신중하여 이렇게 관직에 제수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나 그 실제는 자연 엄폐할 수가 없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많이 성상께 아뢰었다. 성상은 이 문성공에게 묻기를, “성모의 어짊을 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으나 다만 그의 재주가 어떠한가?” 하니, 이 문성공은 대답하기를, “홀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임무를 담당할 수 있는지는 신이 감히 알 수 없으나, 사람됨이 선(善)을 좋아하니 선을 좋아하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도 충분합니다. 다만 병이 많아 사무가 많은 부서를 맡기기가 어려우니, 한가로운 부서에 두어서 경연(經筵)에 입시하게 하면 반드시 성상의 덕을 돕고 유익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신사년(1581, 선조14) 종묘서 영에 임명하였는데 부르는 뜻이 정성스럽고 간곡하였다. 선생이 병을 무릅쓰고 서울에 들어오자, 성상은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고 약물을 하사한 다음 편전(便殿)에서 인견하여 치도(治道)의 요체를 물었다. 이에 대답하기를, “임금은 반드시 먼저 몸과 마음을 수습하여 마음과 기운을 항상 맑게 하면 근본이 서서 의리가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짐은 일정함이 없어서 오직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진 보필을 얻고 훌륭한 인재를 널리 수합하여 여러 지위에 두면 훌륭한 정치와 교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오늘날 조정의 인재는 어떠한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몸을 용납하여 지위만 보전하려는 자가 많고 임금을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는 자가 적으니, 이는 우려할 만합니다.” 하였다. 또 백성을 구제할 계책을 묻자, 대답하기를,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고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 주어야 하니, 이는 인심을 굳게 결속시켜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물러 나와 글을 올려 다시 이 내용을 지극히 말하였으나 상은 상소문을 오랫동안 내려 보내지 않았다. 승정원과 옥당에서 이 상소를 대신들에게 보일 것을 청하자, 비답하기를, “상소문 중에 학문을 논한 일 등은 내 마땅히 살펴야 하겠으나 다만 국가의 제도를 모두 변경하려 하였으니, 이는 또한 행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뒤에 인대(引對)할 때에 다시 예전의 말씀을 거듭 아뢰었다.
선생은 일찍이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이 연산군 때에 모두 파괴되고 어지러워졌는데 아직도 다 개혁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이것을 변통하여야 비로소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시세가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위태로운 정국을 바꾸어 편안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요, 옛 법도를 모두 바꾸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 문성공과 서로 의견이 합하여 또한 여러 번 이것을 개진하였으나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상이 선생이 녹봉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특별히 쌀과 콩을 하사하자, 선생은 간곡히 사양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구휼하면 받는 것은 옛날의 도이다.” 하니, 선생은 부득이 받아서 모두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대신이 선왕조(先王朝)의 고사(故事)를 따라 경연직을 겸임하게 하여 입시하게 할 것을 청하자, 상은 허락하지 않고 다시 위급함을 구원하라는 명을 내렸다. 선생은 사양하고 받지 않고는 여러 번 상소하여 물러날 것을 청하고 교외로 나가 명을 기다렸다. 상은 어찰(御札)로 소환하고 인견하여 머물 것을 권고하였으나 선생은 더욱 강력히 간청하였다. 이에 상은 비로소 잠시 돌아갔다가 겨울을 나고 서울로 올라올 것을 허락하였다. 집의와 여러 시(寺)의 정(正)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다음 해 봄에 이 문성공이 병조의 장관(長官)이 되어 선생에게 경륜하는 일을 맡길 만하다고 천거하자, 상은 특별히 병조 참지를 제수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병조 판서가 바로 그대의 친구인데 그대를 참지로 발탁하였으니, 어찌 뜻이 없겠는가. 마음을 함께하고 덕을 함께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일이다.” 하였다. 부르는 명을 여러 번 내리자, 선생은 억지로 서울에 들어갔는데 옮겨 이조 참의를 제수하고 은대(銀帶)를 하사하였다. 선생이 세 번 상소하여 사직하자, 본직(本職)을 체직하도록 허락하고는 그대로 경연에 입시하고 물러나 돌아갈 계책을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 문성공이 정사를 담당하여 중외의 촉망을 받고 있어서 실로 국운을 만회할 기미가 있었으나 소인배들이 틈을 타 논죄하고 탄핵하여 지위에 편안히 있지 못하고 떠나가게 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그들의 모함과 날조를 밝히자, 소인배들은 더욱 노여워하여 선생까지 함께 탄핵하였다. 선생이 당일로 도성을 나와 파산(坡山)으로 돌아오니, 이에 태학생(太學生) 및 호남(湖南)과 해서(海西)의 유생 수백천 명이 글을 올려 구원하였다. 이에 상은 칭찬하여 답하고, 또 하교하기를, “만일 군자라면 당(黨)이 있음을 걱정하지 않으니, 나는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하고는 마침내 간당(奸黨) 중에 심한 자를 배척하여 쫓아내고 특별히 이 문성공을 총재(冢宰)로 임명한 다음 다시 선생을 이조 참의로 불렀다. 얼마 후 이조 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섯 번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선생은 들어가 사은하였다.
갑신년(1584, 선조17) 1월 이 문성공이 별세하자, 선생은 도가 행해지지 못할 줄을 알고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 연달아 글을 올려 해직을 요청하니, 상은 비답하기를, “새로 어진 재상을 잃어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안하지 못하다. 현재 경과 함께 국사를 다스릴 것을 도모하니, 이 어찌 물러나겠다고 아뢸 때이겠는가.” 하였다. 몇 달 있다가 휴가를 받아 분황(焚黃)할 것을 청하자, 상은 하교하기를, “성모가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지키며 은거하여 지조를 지켰는데, 내가 여러 차례 부름으로 인하여 마음을 바꾸어 왔다. 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는데 이제 해가 저물어 가니, 마땅히 지방의 수령으로 하여금 안부를 묻게 하라.” 하였다.
다음 해에 국(局)을 설치하고 《소학(小學)》을 교정(校正)하였는데, 선생을 부를 것을 청하자 이를 윤허하였다.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세 번 사은만 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 문성공이 별세하자 세상일이 크게 변하였다. 여러 소인배들이 점점 등용되어 더욱 옛 원한을 갚으려 하였다. 이들은 선생이 다시 기용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추악한 말로 모함하여 비방하니, 선생은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 겨울에 다시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상이 하교하기를, “국가에 큰 변고가 있으니, 경(卿)이 물러나 산중에 있어서는 안 된다.” 하였으므로 선생은 마침내 조정으로 달려갔다.
상이 직언(直言)을 구하므로 마침내 상소문을 초하여 앞서 말했던 백성을 잘 길러 나라를 보전할 계책을 아뢰려 하였는데, 마침 큰 병이 나서 다음 해 여름에야 비로소 이 상소문을 올리고는 인하여 시골로 돌아갈 것을 청하고 돌아왔다. 태학의 여러 생도들이 선생을 머물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답하지 않았다. 행상(倖相)이 궁중(宮中)과 결탁하여 유언비어를 선동하고 날조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24) 봄에 사화(士禍)가 일어났는데, 이에 관련되어 귀양 가거나 폄출(貶黜)당한 자는 모두 선생의 친구들이었다. 여러 소인배들이 이때를 틈타 기어이 선생까지 함께 몰아넣으려 하니, 선생은 더욱 스스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구(倭寇)가 깊이 쳐들어오자, 상이 장차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려 한다는 말씀을 듣고는 도성으로 들어가 국난(國難)에 달려가려 하였으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본래 산야에서 일어나 붕당을 한다는 죄목을 입어서 불원간에 장차 죄를 받을 것이니, 국가에 비록 위급한 일이 있으나 의리상 감히 가볍게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 대가가 만약 서쪽으로 행차하시게 되면 마땅히 길가에서 곡하며 맞이할 것이니, 만일 성상의 고문(顧問)을 입는다면 대가를 따라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오직 물러나 구학(溝壑)에서 죽을 뿐이다.’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하룻밤 사이에 대가가 갑자기 출발하니, 선생이 거주하는 곳은 큰길과 수십 리의 거리였다. 대가가 임진 나루를 건너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이미 강나루에 배가 끊겨 통행하지 못하였고, 왜병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선생은 마침내 통곡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산중으로 피난하였다. 광해군이 이천(伊川)에 머물면서 글을 내려 불렀으나 병환이 심하여 즉시 가지 못하고 차자(箚子)를 올려 군무(軍務)를 아뢰었다. 광해군이 편의대로 검찰사(檢察使)를 제수하고 말을 보내어 재촉하여 불렀다. 이때 왜적이 산골짝으로 두루 들어와 더욱 노략질과 살인을 자행하였다. 광해군이 급히 성천(成川)으로 옮기니, 선생은 어렵사리 성천에 도착하여 광해군을 뵙고 즉시 의주(義州)에 있는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도중에 참찬에 제수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며, 다시 대사헌으로 바뀌었다.
선생은 상소하여 자신의 죄를 논열(論列)하고 인하여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군량(軍糧)을 모으는 등의 계책을 아뢰었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적국(敵國)의 외환(外患)을 전적으로 천운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옛날 제왕들은 변고를 만나면 혹 조서(詔書)를 내려 자책하여 존호(尊號)를 삭제하고 혹 나라를 그르친 신하들을 처벌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는 뜻을 분명히 알게 해서 국가의 흥복(興復)을 도모하였습니다. 이제 마땅히 큰 뜻을 분발하시어 통렬히 자책하며,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일과 궁인(宮人)들이 정사에 관여하는 단서를 끊고, 정직한 선비를 등용하여 이목(耳目)의 임무를 맡기신다면 인심이 크게 기뻐하고 복종하여 원수인 왜적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보는 자들은 화의 싹이 이 상소문에 있을 줄을 알았다.
명나라 주사(主事)인 원황(袁黃)이 찬획(贊畫)으로 와서는 편지를 보내어 학문을 논하면서 오로지 아호(鵝湖)를 주장하고 낙민(洛閩)을 배척하였다. 그는 평소 뜻이 높고 거만하였으므로 제공(諸公)들은 그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아 답장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그리하여 선생에게 맡겨 답서를 쓰게 하자, 선생은 “소방(小邦)은 황조(皇朝)에서 반포해 준 경서 전주(經書傳註)와 성리(性理)에 관한 책들을 외고 익혀서 이 학설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원황은 다시 논란하지 못하였다. 여러 번 참찬과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산반(散班)에 나아갔다.
왜적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도굴하자, 명을 받들고 재신(宰臣)들과 봉심(奉審)하였는데, 일을 생각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결정할 적에 모두 선생을 추존하였다. 선생은 해주(海州)에 복명(復命)하였다. 대가가 도성으로 돌아왔으나 선생은 병 때문에 남아서 중전(中殿)을 호위하였다. 호서(湖西)의 토적(土賊)이 크게 일어나자, 선생은 병환을 무릅쓰고 상경하여 글을 올려 대죄하였는데, 성상의 어찰(御札)에 변란(變亂)의 초기의 일을 들어, 말씀한 내용이 매우 준엄하였다. 처음 상이 서쪽으로 파천할 때에 임진 나루에 이르러서 이홍로(李弘老)에게 “성모의 집이 먼가 가까운가?” 하고 물으니, 이홍로는 본래 행상(倖相)의 문객(門客)이었는데, 길가에 있는 정자와 집을 아무렇게나 가리키며 “저곳이 성모의 집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와서 나를 만나 보지 않는가?” 하니, 이홍로는 아뢰기를, “이런 위급한 때에 어찌 그가 기꺼이 와서 뵙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의주에 있을 적에 선생이 분조(分朝)에서 행재소로 달려온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모함하는 말을 올리기를, “성모가 이번에 오는 것은 세자를 위하여 내선(內禪)을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상은 이미 여러 번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므로 이때에 이러한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감히 스스로 변론하지 못하고 중한 처벌을 내리기를 원하였는데, 상은 다시 위로하여 타이르는 말씀을 내렸으나 선생이 진달(陳達)한 것을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적이 영남의 10여 개 고을을 점거하고 소굴로 삼으니, 명군(明軍)은 오랜 전쟁에 지치고 피로하여 나아가 점령하지 못하였다. 일을 맡은 명나라의 여러 신하들은 뒷일을 잘할 계책이 없으므로 왜적이 화친을 청한다고 핑계 대니, 황제에게 올린 일 중에 황제를 속이고 은폐한 사실이 많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글을 올려 그 내용을 고발하자, 이 때문에 총독(摠督) 고양겸(顧養謙)은 크게 원한을 품고 자문(咨文)을 보내어 우리나라로 하여금 자신의 뜻에 따라 상주(上奏)하게 하였다. 상은 그들의 협박을 받고는 진실로 이미 그렇게 하겠다고 허락하였으나 우선 이 일을 의정부에 회부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정승 유성룡(柳成龍)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뜻을 굽혀 고양겸의 자문을 따르려고 하여 선생과 함께 들어가 상께 대답하기로 약속하였다. 선생은 ‘우리가 국가를 회복할 수 있는 큰 계책은 오직 중국 장상(將相)들의 마음을 잃지 않는 데에 달려 있으니, 그들의 뜻에 다소 부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상의 앞에 이르러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인데, 상이 매우 불쾌해하니, 유 정승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다가 그대로 물러 나왔다. 조정에서는 마침내 고양겸의 지시에 따라 황제에게 글을 아뢰었으나 상의 뜻은 화의를 주장했다 하여 선생을 허물하였다. 삼사에서 서로 글을 올려 화의를 배척하니, 이는 그 의도가 선생에게 있었다. 선생은 마침내 죄를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정유년(1597, 선조30) 가을에 다시 왜적이 쳐들어오니, 도성이 위급하였다. 친구들이 대부분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국난에 달려갈 것을 권하였으나 선생은 나아가기 어려운 의리를 가지고 답하였으니, 이 내용은 본집(本集)에 자세히 보인다. 선생의 출처(出處)는 한결같이 도의(道義)를 따라 혹 부르는 명이 있어도 가지 않은 경우가 있었으나 일찍이 부르는 명이 없이 스스로 간 적이 없었다.
무술년(1598, 선조31) 여름에 병환이 위독하자, 아들 문준(文濬)에게 유명(遺命)하기를, “내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어 마음속의 일을 밝히지 못하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삼베옷을 입히고 종이 이불로 염습하여 소달구지에 싣고 고향에 돌아가 장례할 것이며, 묘 앞의 비석에 ‘창녕성모지묘(昌寧成某之墓)’라고만 써서 자손들로 하여금 나의 무덤이 있는 곳을 알게 하면 된다.” 하였다. 6월 6일에 파산서실(坡山書室)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4세였다. 이해 모월 모일에 파산의 향양리(向陽里)에 있는 유향(酉向)의 산 청송 선생의 묘소 뒤에 장례하였다. 선생이 별세한 뒤에도 소인배들은 원수처럼 여기고 미워하기를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신축년에 정인홍(鄭仁弘)은 자기의 무리들을 사주하여 상소하여 선생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여 죽였다고 무함(誣陷)하고 비방하게 하였다.
경인년에 최영경은 도신(道臣)의 은밀한 장계로 인하여 체포되었는데, 이때 선생은 조정에서 이미 물러 나와 있었다. 선생이 정승 정철(鄭澈)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가 평소 효도하고 우애하였으니 이러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자, 정 정승은 궁중에 들어가 선생의 말씀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에 성상의 뜻이 풀려 석방되었는데, 뒤에 탄핵(彈劾)하는 글을 만나 다시 옥에 갇혔다가 죽었다. 이때 여러 소인들은 도리어 선생이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였다고 말하니, 선조는 어필로 ‘모함하여 죽였다[搆殺]’는 두 글자를 삭제하였으나 끝내 관작을 추탈(追奪)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유림(儒林)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오공 윤겸(吳公允謙)과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선생이 무함을 받은 내용을 아뢰었다. 상은 또한 평소에 선생이 대유(大儒)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즉시 관작을 복구하도록 명하였으며, 얼마 후 의정부 좌의정을 추증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제생들은 파산에 서원을 세워 청송 선생과 함께 제향하고 있다. 나는 늦게 태어나서 비록 미처 수업하지는 못하였으나 어릴 때부터 선생을 태산처럼 우러러 사모하였다. 삼가 선배와 장자(長者)에게 들으니, 선생은 효성이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청송 선생이 일찍이 병환이 위독하자,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약에 섞어 올려서 몇 달 동안의 수명을 연장하였으며,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고 상례(喪禮)의 절문(節文)을 모두 《소학》과 《가례(家禮)》를 따라 행하였다.
선생은 평소 몸을 수렴하고 단속하여 말씀과 행실이 모두 모범이 될 만하였다. 학문과 실천에 있어서는 후학들이 엿보고 측량할 수 있는 바가 아니나 기상이 장중하면서도 편안하고 온화하여 바라보면 사람들이 도덕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율곡과 사단 칠정(四端七情)의 이기(理氣) 선후(先後)에 대한 내용을 논변하여 왕복한 편지가 수천만 자에 달하는데, 선유(先儒)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내용이 많다. 율곡은 일찍이 칭찬하기를, “견해의 도달한 경지는 내 다소 나은 점이 있으나 조행(操行)의 독실하고 확고함은 내가 미치지 못한다.” 하였으며, 선생 또한 말씀하기를, “율곡은 참으로 나의 스승이다.” 하였다. 선생은 평소 책을 읽고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일삼았으며, 저술하고 글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집 안에 문집 약간 권이 보관되어 있으니, 행여 후세에 덕(德)을 아는 선비를 기다리고 의심하지 않는다.
아, 선생은 스스로 산림(山林)을 지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우리 선조(宣祖)의 특별한 은혜를 입고 덕이 같은 현자가 서로 추존하므로 부득이 세상에 나왔는데, 평소의 포부를 펴지 못하고 여러 모함하는 말들이 집중되어 끝내 낭패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현명한 군주가 선(善)을 좋아하고 현자를 좋아하는 정성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입히려던 본래의 뜻이 행해지지 못하게 되었으니, 도가 장차 폐지되는 것이 천명이라는 말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유현(儒賢)이 훌륭한 세상을 만남은 예로부터 보기가 드물었다. 우리 조선조에 기묘년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시기였으나 간신들이 모함하여 사림의 지극한 애통함이 되었는데, 선생이 만난 환경이 불행히도 이와 같았는바, 다만 화를 당함에 다소 경중(輕重)이 있을 뿐이다. 옛말에 ‘하늘의 인자하지 못함이 심하다’ 하였는데, 이 또한 이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는가 보다. 그러나 도맥(道脈)을 잇고 올바른 학문을 전수하여 드높이 백세(百世)의 훌륭한 스승이 되었으니, 등용되고 버려지며 훼방하고 칭찬함에 따라 더 보태지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군수 여량(汝樑)의 따님인데 2남 2녀를 낳았다. 문영(文泳)은 일찍 죽었고 차남 문준(文濬)은 현감이며, 장녀는 별좌(別坐) 남궁명(南宮蓂)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대사간 윤황(尹煌)에게 출가하였으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문잠(文潛)이다. 문준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역(櫟)이고 다음은 익(杙)과 직(㮨)이며, 딸은 세 명을 두었다. 남궁명은 2남 3녀를 두었고 윤황은 5남 2녀를 두었는데, 내외의 손자가 매우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도가 천하에 있어 / 道在天下
드러나고 은미함이 시기가 있네 / 顯微有幾
훌륭하신 청송 선생이여 / 思皇聽松
일찍 훌륭한 스승을 얻으셨네 / 早自得師
선생은 이를 이어 / 先生接之
올바른 학문을 들었다오 / 正學是聞
마음을 가라앉히고 힘써 구하여 / 潛心力求
하늘이 사문을 도왔네 / 天與斯文
덕은 반드시 이웃이 있으니 / 德必有隣
군자와 함께하였다오 / 君子同人
정밀하고 엄격하고 치밀하며 / 精嚴縝密
고명하고 통달하였네 / 高朗洞達
이기의 묘함을 연구하고 / 妙窮理氣
사단 칠정을 논하였다오 / 商論四七
은미함을 개발하고 지극한 경지에 나아가 / 發微造極
과녁을 깨뜨리고 얼음처럼 풀렸네 / 的破氷釋
이미 선현의 밝음을 이었고 / 旣紹前明
또한 후생들의 몽매함을 열어 주었다오 / 亦啓後蒙
구고에 명성이 알려지니 / 九皐聖聞
하물며 자기가 사는 고을에 있어서랴 / 矧惟在邦
비록 맞이하여 등대함을 입었으나 / 雖被延登
때가 매우 어려웠네 / 孔艱厥時
아, 저 거짓말하는 간신들이여 / 嗟彼奸罔
참소하는 말로 비방하고 속였네 / 讒言詆欺
무릎에 올려놓을 듯 못에 빠뜨릴 듯 하니 / 加膝墜淵
옛 현자들이 탄식한 바라오 / 昔賢所歎
사람이 죽고 도가 버려지니 / 人亡道廢
어찌 천운이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 孰云匪天
운수가 다하면 이치가 돌아와 / 數窮理復
고리를 따라 돌 듯하니 / 若循環然
선생의 도가 / 先生之道
이제 빛난다오 / 於今有光
소자는 뜻은 크나 소략하여 / 小子狂簡
참람하게 명문(銘文)을 지었네 / 僭述銘章
큰 묘에 비석을 세워 / 碑于大隧
무궁한 후세에 밝히노라 / 用昭無疆


[주D-001]행상(倖相) : 군주의 총애를 받는 정승이란 뜻인데,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주D-002]아호(鵝湖)를 …… 배척하였다 : 아호는 산 이름으로, 강서성(江西省) 연산현(鉛山縣) 북쪽에 있다. 송나라 때 주자(朱子)가 육구연(陸九淵) 형제와 이곳의 아호사(鵝湖寺)에서 만나 서로 자신의 학문을 논변하였는바, 아호는 육상산(陸象山)을, 낙민은 정주(程朱)를 가리킨다.
[주D-003]구고(九皐) : 깊은 웅덩이를 이른다.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에서 우니 그 소리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 하였는데, 선비가 시골에서 학문을 쌓고 수행하여 명성이 임금에게 알려지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4]무릎에 …… 하니 : 사랑하여 나오게 하고자 할 때에는 장차 무릎에 올려놓을 듯이 하다가 미워하여 물러가게 하고자 할 때에는 장차 연못에 빠뜨릴 듯이 하여 애증(愛憎)을 마음대로 하여 법도를 넘음을 이른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위정자들은 사람을 나오게 할 때에는 장차 무릎에 올려놓을 듯이 하다가 사람을 물러가게 할 때에는 장차 못에 빠뜨릴 듯이 한다.[今之君子 進人若將加諸膝 退人若將隊諸淵]”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