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 18현 우계 성혼

파산(坡山) 성 선생(成先生) 묘지명 파산 (성수침)

아베베1 2012. 4. 24. 06:27

파산 선생은  해동 18현 이신 우계 성혼 선생님의 부친 되시는 분이시다 본관이 창량인 이시다  

고봉 선생은 행주인 기대승 선생이시다  

 

고봉집 제3권

 [비명(碑銘)]
파산(坡山) 성 선생(成先生) 묘지명


선생의 휘는 수침(守琛)이요, 자는 중옥(仲玉)이며, 성은 성씨(成氏)로 창녕인(昌寧人)이다. 6세조 여완(汝完)은 우리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 공신에 책록(策錄)되고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증조는 득식(得識)으로 한성 부윤을 지냈고, 조고인 충달(忠達)은 김포 현령(金浦縣令)이었는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세순(世純)으로 수(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시호는 사숙(思肅)이며, 모친은 정부인 김씨로 부사(府使) 김극니(金克怩)의 따님이고, 좌의정 김국광(金國光)의 손녀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서 의젓하여 어른과 같았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종족들이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차츰 자라자 책을 읽을 줄 알아 대의를 통달하였고, 항상 공부를 더하여 일취월장하였다. 정덕(正德) 갑술년(1514, 중종9)에 부친상을 당하자 파주(坡州)의 향양리(向陽里)에 여묘(廬墓)하고 애훼(哀毁)하기를 예(禮)보다 더하였으며, 대상(大祥) 때까지도 죽을 먹었다. 하루에 세 번씩 상식(上食)을 올렸는데 반드시 몸소 불을 때어 장만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묘역을 청소하고 향을 사르며 절하고 무릎 꿇어 비록 추운 겨울과 무더운 여름철이라도 그치지 않았다. 삼년상을 마친 다음, 기일(忌日)을 만나면 추모하여 더욱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정암(靜庵) 조공(趙公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이 당시 조정에서는 장차 지극한 정치를 일으키려 하여 개혁하고 시설하는 바가 많았는바 조공은 특별히 중종의 총애를 받았고 당시 서로 종유하던 선비로서 또한 명성이 너무 난 자들이 있으니, 선생은 이것을 걱정하였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이들이 모두 죄를 얻어 혹은 죽고 혹은 쫓겨나서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였다. 선생은 세상과 더불어 부앙(俯仰)할 수 없음을 스스로 헤아리고는 문을 닫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집이 백악산(白嶽山) 아래에 있었는데 소나무 숲 사이에 서실을 짓고는 ‘청송당(聽松堂)’이라 편액하였으며, 날로 성현의 경전을 외워 진리를 탐구함으로 낙을 삼고 외물(外物)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가정(嘉靖) 신축년(1541, 중종36)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처가의 옛 전장(田莊)이 파산 아래 우계(牛溪)의 위에 있었는데, 선생은 마침내 그리로 가서 집터를 정하고 사니 장차 종신할 계획이었다. 농토가 적고 토지가 척박하여 식량이 혹 떨어지는데도 태연히 처하였고, 어버이를 봉양함에 있어서는 자미(滋味)를 극진히 장만하였다.
임자년(1552, 명종7)에 다시 유일로 천거되어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에 제수되자, 선생은 남들에게 말하기를 “내 병들어서 벼슬할 수 없음은 이미 결판난 일이다. 그러나 성상의 은혜를 사례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즉시 서울로 들어갔다. 그 후 예산 현감(禮山縣監)에 제수되고 다시 토산 현감(兎山縣監)으로 바뀌자 모두 사은숙배하였으며, 다시 적성 현감(積城縣監)으로 교체되었는데 마침 병이 나서 미처 사은하지 못하였다. 이때 모부인이 병환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시골로 돌아가 시탕(侍湯)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자 몸이 수척하여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사당의 제사는 예로부터 법도가 있어 왔는데, 오직 묘제(墓祭)만은 풍속에 자녀들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명절날에 제사를 지내고 임시로 제수를 마련해 보내어서 정성스럽지 못하고 정결하지 못한 점이 많았으며, 세대가 점점 멀어지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있었다. 선생은 이에 묘제법(墓祭法)을 만들고 묘전(墓田)과 노비를 충분히 장만하였으며, 묘 아래에 제각(祭閣)을 짓되 범백(凡百)을 다 구비하였고, 친히 계획을 세워 완벽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고 책을 만들어서 오래 제사할 수 있는 계책을 세웠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지나치게 후한 것이니, 뒤에 이대로 계속하기가 어려워서 결국은 제사를 폐지하고 해이해지게 될까 두렵다.”고 하자, 선생은 말씀하기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 어찌 앞으로 폐지되고 해이해질 것을 미리 염려하여 내 스스로 경홀히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한 방에는 가득히 도서를 쌓아 놓고 고요히 홀로 거처하며, 인간의 일을 사절하여 당세에 전혀 뜻이 없는 듯하였으나 사방의 풍토와 인정, 사변을 두루 알지 않음이 없었으며, 세상을 염려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일찍이 느끼는 바가 있어 《맹자(孟子)》의 호선우어천하장(好善優於天下章)인부족여적야장(人不足與適也章)을 들어 세 번 반복해 읽고 말씀하기를 “아, 슬프다. 누가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 임금님께 아뢸 자가 있겠는가.” 하고, 아들을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이 글을 볼 때마다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하였다.
선생은 나이가 더욱 많아지고 덕이 더욱 높았는데, 자처하기를 더욱 겸손히 하여 남이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뒤로 물러나서 감당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파산청은(坡山淸隱)이라 불렀고, 뒤에는 우계한민(牛溪閑民)이라 호를 고치고서 말씀하기를 “나는 청은(淸隱)이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경신년(1560, 명종15)에 다시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당시 영상인 상공 진(尙公震)은 선생의 젊었을 때 친구였는데, 상공은 편지를 보내오기를 “이번의 은혜는 성상의 마음에서 직접 나온 것이니 빨리 와서 사은하라.” 하였다. 선생은 답장에서 말하기를 “옛날 문립(文立)은 정경(程瓊)을 천거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의 나이가 80세에 가까웠고 본래의 성품이 겸손하여 다시 당세에 대한 바람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공은 나를 천거하였으니, 나를 아는 자가 아닐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상공은 다시 편지를 보내어 출사할 것을 권했으나 선생은 끝내 나가지 않았다. 선생은 72세에 병으로 별세하니, 갑자년(1564) 1월 15일이었다.
선생은 타고난 천품이 지극히 높아 일반인들보다 크게 뛰어났으며, 세상 사람들이 급급히 여기는 것을 초개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장엄하며, 덕기(德器)가 성대하여 바라보면 어진 분임을 알 수 있었다. 학문은 성(誠) 공부를 위주로 하여 자신에게 돌이켜 실천하기를 힘쓰고 가벼이 남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형제들과 더불어 우애가 매우 도타워 백형의 댁이 곤궁하자 술과 음식을 계속 대 주었으며, 친척 중에 빈궁하여 제때에 혼인시키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물자를 주어 보조하였다.
음식은 좋아하는 바가 없고 의복은 다만 몸을 가리는 것만을 취하여 일체의 세상 재미에 담박하였다. 동서를 왕래하는 선비들이 많이 선생 댁을 찾아갔고 사방의 선비들도 또한 문하에서 공부한 자가 많았는데, 선생의 접견을 받은 자들은 마치 온화한 봄바람 속에 있는 것처럼 느꼈으며, 그 말씀을 들어 보면 온화하고 순수 평이하여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그 유익함을 얻었다. 평소 일을 처리할 때에는 모를 드러내지 않았으나, 의리로 결단함에 이르러서는 엄격하여 범할 수 없었다. 필찰(筆札)을 잘하여 소산(蕭散)하고 노경(老硬)해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니, 서법(書法)을 평하는 자들은 당대의 제일로 추존하였다.
선생이 별세하자 원근에서 부음을 듣고 모두들 애석해하기를 착한 사람이 별세하였다고 하였다. 집에 쌓아 놓은 곡식이 없어서 장차 전답을 팔아 장례에 쓰려고 하였는데, 마침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전 적성 현감 성모는 처음에 유일로 본직(本職)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문을 닫고 학문을 탐구하며 옛 도리를 힘써 행했습니다. 나이 72세에 끝내 곤궁하다가 죽었으니, 이는 한 나라의 착한 선비요 당대의 일민(逸民)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의 상례와 장례에 마땅히 구휼하는 은전을 내려서 국가에서 어진 이를 높이는 뜻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를 윤허하고 경기 관찰사로 하여금 쌀과 콩을 적절히 지급하도록 하였으며, 아울러 역군(役軍)을 조발하게 해서 그해 4월 계유일 향양리(向陽里)에 있는 선영의 옆에 안장하게 하였다.
선생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관(判官) 윤사원(尹士元)의 따님이요 참판 윤해(尹垓)의 손녀였는데, 온화하고 유순하며 남편을 잘 받들어서 부도(婦道)를 다하였다. 선생보다 2년 앞서 별세하였는데,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혼(渾)으로 조행이 있어서 선대의 가업을 잘 계승하며, 딸은 직강(直講) 민사도(閔思道)에게 출가하여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인 성기(成己)는 일찍 별세하였고, 다음은 성장(成章)ㆍ성헌(成憲)인데, 모두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딸은 윤면(尹勉)에게 출가하였다. 혼은 군수 신여량(申汝樑)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으니, 문엄(文淹)과 문부(文溥)로 모두 어리다.
선생이 별세한 후 2년에 상은 특명으로 차례를 뛰어넘어 증직하여 마침내 선생에게 사헌부 집의를 추증하니 품계는 중직대부(中直大夫)였다.
내 적이 선생이 마음을 세우고 행동하신 아름다운 자취를 보니, 진실로 일반인들이 따를 수 없는 점이 있었다. 통하면서도 세속에 휘말리지 않았고 지조를 지키면서도 좁지 않았으며 일에 시행하면 훌륭한 실적이 있었으니, 독행(篤行)하는 군자라 이를 만하였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아 선비로서 세상에 자중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 嗚呼士不自重於世者久矣
그리하여 이름만 도둑질하고 실제 행실은 없어 / 名於盜而實於疚
분분히 세상과 서로 부딪친다네 / 紛紛與世而相掊
드높으신 선생께서는 / 嶷嶷先生
덕이 높았는데 / 惟德之崇
이러한 덕을 소유하고도 써 보지 못하고 / 有而不試
도를 안고 그대로 별세하였으니 / 抱道而終
아 선생은 자중하신 분이라고 이를 만하다 / 嗚呼其可謂自重者與
자중하신 분이라고 이를 만하다 / 其可謂自重者與


 

[주D-001]내……일이다 : 원문은 ‘吾之病不能仕 業已失矣’인데, 한국문집총간 26집에 실린 《청송집(聽松集)》 권2 부록(附錄) 〈묘지명(墓誌銘)〉에 근거하여 ‘失’을 ‘決’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호선우어천하장(好善優於天下章) : 《맹자》〈고자 하(告子下)〉 제13장으로, 정치가가 선(善)을 좋아하면 천하를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주D-003]인부족여적야장(人不足與適也章) : 《맹자》〈이루 상(離婁上)〉 제20장으로, 신하는 군주의 잘못된 인재 등용과 실정(失政)을 일일이 탓하여 바로잡을 수는 없으니, 오직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아 인의(仁義)의 도리에 뜻을 두게 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주D-004]상공 진(尙公震) : 1493∼1564. 상진(尙震)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목천(木川)이다. 자는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ㆍ향일당(嚮日堂)ㆍ범허정(泛虛亭)이며,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지춘추관사로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영의정을 지냈다.
[주D-005]문립(文立)은……않았으니 : 문립은 진(晉)나라 때 임강(臨江) 출신으로 촉한(蜀漢) 시절 태학(太學)에서 《모시(毛詩)》와 삼례(三禮)를 공부하였으며 당시의 대학자인 초주(譙周)를 사사하여 공자(孔子) 문하(門下)의 안회(顔回)와 같다는 평을 얻었다. 촉한에서 상서(尙書)를 지낸 건위군(犍爲郡) 출신의 정경(程瓊)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그의 나이가 80에 가깝다 하여 끝내 추천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공정한 처사에 감복하였다. 《晉書 卷91 文立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