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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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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宗六年。原州儒生。以故直提學元昊狀。請謚于朝。下該曹議。仍命公與金時習,成耼壽,李孟專,趙旅等。幷贈職賜謚。公與五人。世稱端宗生六臣。與死六臣其事雖異。而爲其舊主盡節。不應貢擧。不仕或逃隱。其義一也。正宗在宥。凡前代忠良之士。咸得伸枉。貤褒擧動。事事得宜。而是擧尤大慰人望。朝野聳聽。或有流涕者。公諱孝溫。字伯恭。學者稱秋江先生。南氏世居宜寧。其先有諱在議政府領議政。謚忠景。配享太祖廟庭。曾祖諱簡直提學。以淸名著于時。祖諱俊司憲府監察。考諱恮生員。妣李氏。公生於景泰甲戌。爲人淸明豪邁。在羣輩中。超然有高士風。性喜酒。時時劇飮大醉。好爲危言詭論。以觸忌諱。一日。母恭人有憂戒語。公自是絶不復飮。作止酒賦以自警。其後朋友勸之。亦不飮也。甫弱冠。已有求道志。負笈從佔畢齋金先生門。得聞性理之學。先生不名公而號之曰。老夫非子之師。子乃老夫之友也。光廟三年。公上書請復昭陵。自昭陵廢。人皆囚舌。不敢出一言。公至是抗論之。固大駭當世矣。都承旨任士洪言此非人臣所敢議。倡議力排。領議政鄭昌孫。曾與廢陵之議。亦沮之。時人皆目之爲狂生。公益悲憤嫉俗。慟哭入山澤中。或終日不返。嘗著六臣傳。門生故舊懼及禍。競止之。公笑曰。吾豈畏一死而終沒忠臣之名乎。傳卒行于時。旣而移家江湖間。躬耕讀書。暇則戴篛笠手釣竿。與漁人樵子。混跡以行。仰見白日在天。歎曰。人生也直。人不可欺。天可欺乎。庚子中司馬。遂不赴擧。其友金悅卿謂之曰。我則受先王厚恩。不仕宜也。子則異於是。其爲世道。可一出矣。公曰。復昭陵後應試。亦未晩也。悅卿亦不復言。公少從事學問。輔以師友。與朱溪正深源,安興公子挺。皆友善。結爲竹林羽士。砥礪名行。爲一時士類領袖。搢紳章甫道東南者。無不禮於其門。文章簡潔好自言其志。有文集四編傳于世。公著鬼神論。言絀伸幽明之理。後我使至日本。其國人至今誦之。問何以得此論。則其傳已久。今不記云。公卒時年纔二十九。葬于高陽大壯里之原。配尹氏。郡守壎女。一男忠世。燕山甲子。史禍作。佔畢門徒以黨錮死者。亡慮百餘人。追論公言昭陵事。掘其塚戮之。忠世亦坐死無嗣。中宗卽位。始復昭陵。雪公寃。贈承政院左承旨。高陽,宜寧,長興諸郡。幷立祠俎豆之。正宗又命加贈資憲大夫吏曹判書。賜謚文貞。聖朝所以褒忠奬節者。猗歟盛哉。公以一布衣。終其所樹立。僅有復昭陵一疏。然推其志。雖謂之軒天地耀日月可也。議者謂公與在朝任言責者有異。或言佔畢旣仕於光陵。不當作某文字。其時翰林書之史草以貽禍非也。是皆不究經權本末之論也。當甲子之禍。士大夫膏鈇鍖夷九族者。項背相望。世皆惴惴然指讀書爲禍胎。而君臣大倫之與天地相經緯者。獨賴而不墜。其誰之功也。士當觀大節與其事之是非正否。二公之仕與不仕。當言與不當言。不必論也。况其義人得而言者乎。自東京白馬之事。已有激成出位之論。拘文牽法。曲訾傍議者。不可勝數。韓子言小人好議論而不樂成人之美。嗚呼。此本朝士禍大關係人。彼後生輩其可得而議之哉。且禪代之際。自古難言之。是時在廷諸臣。相率首鼠喙伏。甚者受顧命反眼。略不知恥者非一二也。公固知天命有歸。而猶欲以一身搘拄綱常。始旣爲箕子之狂。豫讓之行。終至發塚剖棺。臠胔剔骸。瓜蔓株拏。禍延朋族而不自知悔。公可謂盡心矣。公之歿今三百年。墓事多闕。宗人謀欲樹碣。屬公轍爲文。余謂生六臣與死六臣。其事具載史官。他日必有可攷者。特於總論詳言之。以竢後之君子。銘曰。
公歿卅紀後嗣絶。有隤者墳榛且閼。鼯跳豽號風颲颲。噫孰知爲先生之圽。淸明在躬。狂不爲垢。名在于人。菑不爲咎。天柱折兮山崩。螮蝀翳兮日薄蝕。衆昏矇而墨㦿。我獨察察。不蒙世之湯鑊。刻銘于石。表玆貞士。毋犂而耕。其封而梓。彼高四尺。先生攸里。
公歿卅紀後嗣絶。有隤者墳榛且閼。鼯跳豽號風颲颲。噫孰知爲先生之圽。淸明在躬。狂不爲垢。名在于人。菑不爲咎。天柱折兮山崩。螮蝀翳兮日薄蝕。衆昏矇而墨㦿。我獨察察。不蒙世之湯鑊。刻銘于石。表玆貞士。毋犂而耕。其封而梓。彼高四尺。先生攸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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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율시(五言律詩) | ||||
여 우인 유 소격서동(與友人遊昭格署洞) |
남효은(南孝溫)
깊숙한 골짜기의 구름이 나는 곳에 / 幽洞雲生處
시내는 흘러 밤낮으로 찧는다 / 溪流日夕春
꽃이 밝으매 산길이 익숙하고 / 花明山路熟
사람이 끊겼으매 돌문이 무거워라 / 人斷石門重
푸른 연 산봉우리 새는 지나 날고 / 鳥度靑蓮嶂
비스듬한 소나무 용이 누웠다 / 龍頹韋偃松
일찍부터 구경하는 버릇으로 / 從來爲眼癖
지팡이 짚는 수고 생각하지 않았다 / 不計費扶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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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書) | ||||
답 남추강 서(答南秋江書) |
김종직(金宗直)
추강(秋江) 족하(足下)여, 내가 호남(湖南)에서 서울에 온 지가 거의 반 년인데, 이상하게도 추강의 편지가 한 번도 오지 아니하였으니, 정녕 추강이 지난 해에 호남ㆍ영남을 두루 노닐며 진한(辰韓)ㆍ변한(弁韓)의 유적을 남김없이 다 보았으니, 지금은 추강이 반드시 철령(鐵嶺) 이북이나 혹은 패강(浿江) 이서에 있어, 두만강을 거슬러 물길(勿吉)ㆍ읍루(挹婁)의 옛터를 바라보며, 마자(馬訾)에서 배를 타고 국내성(國內城)ㆍ환도성(丸都城)의 지역을 찾아서 방황하고 지체하여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다지도 소식이 없을 수 있을까 하던 중, 오늘 새벽에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나더니 문득 깨끗한 종이에 간정한 해서(楷書)로 써서 마치 공고(公孤 삼공(三公)ㆍ삼고(三孤)를 말한 것임)의 문에 보내는 것 같은 편지를 얻어 펴본즉 바로 우리 추강의 편지였소.
아, 추강이여, 나를 어찌 그리 박대하십니까. 나는 쇠퇴한 증세가 날로 심하여 변폭(邊幅)을 수식하지 않은 지가 오래였는데, 어떻게 군자의 헛된 칭찬을 감당하리오. 자술(自述)한 만사(輓詞) 네 편을 편지 외편에 실었기에, 세 번 읽고서야 비로소 추강이 멀리 노닌 것이 아니라,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이 되는 것은 거년 가을ㆍ겨울 이래 나도 역시 병이 들어 10일이면 9일은 누워 있었으므로 한 번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선 이 만사를 보니 족히 도연명(陶淵明)ㆍ진소유(秦少游)를 이어받았다 할 만하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또 족히 우리 추강의 수명이 한량 없음을 알 수 있소. 저 두 사람의 노래는 모두 목숨이 끊어질 임시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도연맹은 세상을 달관하고 진소유는 인생을 슬퍼하는 것 등으로 그치고, 다시 여운을 남긴 맛이 없는데, 우리 추강은 세상의 여섯 가지 액을 슬퍼한 것 같지만 마침내는, “36년을 지나는 동안에, 언제나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다.” 하였으니, 그 자찬이 매우 깊다 하겠고, 또 못내 이 세상을 잊지 못하는 생각이 있으니, 이를 어찌 갑자기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사람의 소리라 하겠습니까. 추강 같은 이에 대해서는 이수(二竪 병의 이칭)가 제 아무리 육신을 괴롭힐망정 어찌 능히 그 수명을 조종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대수(大數)가 조석에 박두했단 말은 녹명(祿命)을 따지는 것과 근사하니, 추강으로서 마땅히 믿을 바 아닌 듯싶습니다.
나는 일찍이 듣건대, 옛사람은 흔히 미리 자기 묻힐 자리를 만들어 놓은 일이 있었다 하고, 또 일찍이 보니, 시골 노인이 스스로 관을 만들고 의금(衣衾) 염습(斂襲)의 물건까지도 빠짐없이 다 준비하고, 항상 그 관속에 누워도 보며 죽도록 그렇게 하였는데, 이는 다만 미리 준비해 둔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더러는 은연히 오래 살기를 기양(祈穰)하는 것이라고 비웃는 자도 있습니다. 지금 추강의 자만시(自挽詩)도 이런 유가 아닙니까. 이 말은 농담입니다.
정월이라 일기가 따뜻하여 온갖 물건이 소생하는데, 자친을 위하여 심중히 몸조심하시기를 빌며 갖추지 못합니다.
[주D-001]변폭(邊幅)을 수식 : 겉치레 꾸미는 것을 말한다. 공손(公孫)이 쫓아가서 국사(國士)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변폭(邊幅)을 수식하여 우형(偶形)같이 앉았다 하였고, 그 주석에 포백(布帛)의 변폭을 다듬은 것과 같다 하였다.《後漢書 馬援傳》
[주D-002]자술(自述)한 만사(輓詞) : 자기가 죽을 것을 미리 각오하고 자기 스스로가 만장(輓章)을 짓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에 진(晋) 나라 도연명(陶淵明)과 송(宋) 나라 진소유(秦少游)도 지었던 것이다.
[주D-002]자술(自述)한 만사(輓詞) : 자기가 죽을 것을 미리 각오하고 자기 스스로가 만장(輓章)을 짓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에 진(晋) 나라 도연명(陶淵明)과 송(宋) 나라 진소유(秦少游)도 지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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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승(家乘) | ||||
10대 조비(祖妣)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파평 윤씨(坡平尹氏) 묘표(墓表) |
조선조에 영의정을 지내고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충경(忠景)인 구정(龜亭) 남공(南公) 휘 재(在)의 원배(元配)인 변한국대부인 파평 윤씨의 묘는 바로 장단부(長湍府) 북쪽에서 40리가 좀 넘는 전재궁리(田齋宮里)에 있으니, 바로 송도(松都)의 동대문 밖에서 10리가 채 못 되는 가까운 천수원(天壽院) 뒤 골짜기 자좌(子坐)의 산이다.
성화(成化) 연간에 증손 칭(偁)이 송도 판관(松都判官)으로 있으면서 표석을 세웠는데 이제는 글자가 마멸되었다. 숭정 기원후 두 번째 되는 무진년(1688, 숙종 14)에 칭의 8대손 익훈(益熏)이 승지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와 부사(府使)가 되어 묘소 앞에는 상석(床石)을 설치하고 뒤에는 담장을 둘러쳤으며 왼쪽에 새로 비석을 세우고 글을 새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인의 10대조 관(瓘)은 시중이고, 고조 보(珤)는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이고, 증조 암(諳)은 소부윤(少府尹)이고, 조고 해(侅)는 대광 전서(大匡典書)이고, 선고 호(虎)는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낸 정후공(靖厚公)이며 선비는 지선주사(知善州事) 이원후(李元厚)의 따님이다. 남씨의 옛집은 송도의 태평관(太平館) 동쪽에 있었는데, 미처 한양으로 이사하기 전에 부인이 별세하였으므로 이곳에 장례하였다. 얼마 후 부군인 구정공(龜亭公)을 건원릉 밖 주동(注洞)의 산에 배장(陪葬)하였으므로 부장(祔葬)하지 못하였다.
부인은 2남을 길렀는데, 장남 경문(景文)은 병조 의랑이고 차남은 경무(景武)이다. 손자에 좌의정 지(智), 직제학 간(簡), 의산군(宜山君) 휘(暉)와 증손에 의령군(宜寧君) 윤(倫), 참판 의(儀)와 현손에 판서 이(怡), 정랑 제(悌), 대사간 율(慄), 승지 흔(忻)이 현달한 자이다. 후세에 명망과 지위가 세상에 알려진 자로는 의성위(宜城尉) 치원(致元), 의천위(宜川尉) 섭원(爕元), 참판 세웅(世雄)ㆍ세준(世準)ㆍ세건(世健), 절도사 효원(孝元), 추강거사(秋江居士) 효온(孝溫), 판윤(判尹) 효의(孝義)ㆍ치근(致勤), 참판 응운(應雲), 참의 응룡(應龍), 승지 언순(彦純), 부윤(府尹) 언경(彦經), 좌의정으로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해진 이웅(以雄), 참판 이신(以信), 의춘군(宜春君) 이흥(以興), 판서 이공(以恭)ㆍ선(銑), 참지(參知) 두첨(斗瞻), 참판 두병(斗柄)ㆍ노성(老星), 판서 이성(二星), 관찰사 훤(翧)이 있으며, 현재 문신의 적에 올라 조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자로는 정언 유성(有星), 장령 필성(弼星), 대제학 용익(龍翼), 교리 치훈(致熏), 좌랑 지훈(至熏)ㆍ언창(彦昌)이 있다.
구정공은 개국 공신 1등으로 불천위의 사당에 모셔지고 부인이 배향되었는데, 11대손 반(磐)이 실로 제사를 주관한다. 부인이 남기신 규범과 교훈을 세대가 멀어서 증거할 곳이 없어 기록할 수 없으므로 이제 그 세계(世系)와 자손 및 남은 경사가 무궁함을 기록해서 앞에 근원이 넉넉하면 뒤에 흐름이 풍부함을 증명하는 바이다.
10대손 영의정 구만은 삼가 기록하고 아울러 쓰다.
무진년(1688, 숙종 14)에 부사 익훈(益熏)이 비석을 장만하여 글자를 새기려 하였는데, 마침 체직하고 돌아와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갑술년(1694)에 9대손 필성(弼星)이 전직 승지로 나와 부사가 되어서 을해년(1695) 7월에 비로소 비석을 다듬어서 글자를 새겨 묘소 왼쪽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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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碑) | ||||
노량진(露梁津)에 있는 육신묘비(六臣墓碑) 무자년(1708, 숙종 34) |
옛날 단종대왕(端宗大王)이 왕위를 선양했을 적에 충신과 열사들이 단종을 위하여 전후로 목숨을 바친 자가 많았는데,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병자육신전(丙子六臣傳)》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그러므로 단종 때의 일을 언급할 적에 사람들이 반드시 육신이라고 칭하였다.
경성(京城)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되는 한강 너머 노량진 강가에 다섯 기(基)의 묘소가 있으니, 각각 짧은 비갈에 박씨지묘(朴氏之墓), 유씨지묘(兪氏之墓), 이씨지묘(李氏之墓), 성씨지묘(成氏之墓), 성씨지묘(成氏之墓)라고만 표시하고 그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는 여섯 성씨 중에 네 개만 있고 두 개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육신의 묘라고 전해온 것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성씨(成氏)의 묘가 둘이 있는 것은 총관(摠管)과 승지(承旨) 부자가 함께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하씨(河氏)의 묘는 영남(嶺南)의 선산(善山)에 있고 유씨(柳氏)의 묘만 유독 소재지가 전해지지 않는다. 짐작컨대 육신이 죽을 적에 그 종족(宗族)이 망하여 없어져 의인(義人)이 시신을 거두어서 묻었으나,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무릅쓰고 주선하였으니 형편상 어렵고 쉬움이 혹 차이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혹은 고향에 시신을 모셔다 장례하기도 하고, 혹은 끝내 시신을 땅에 묻지 못했는가 보다.
또 듣자하니 총관의 묘소가 또 홍주(洪州)의 고향에 있다고 하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형벌을 받은 뒤에 지체(肢體)를 각각 하나씩 묻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라고 한다. 만일 이 말이 과연 맞는다면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천추에 눈물을 자아내게 할 만하다. 또 이곳에 성씨의 묘가 둘이 있는 것은 근래 노인들이 귀와 눈으로 실제 접한 것이고 전해 오는 말을 근거할 수 있으나, 어느 해인가 권세 있는 귀인이 강가에 별장을 지으면서 부근의 묘소에 있는 비갈을 모두 제거하였다. 권세 있는 귀인이 실세한 뒤에 어떤 사람이 예전의 비갈이 쓰러지고 부서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세웠으나 미처 다시 세우기 전에 나중에 쓴 무덤들이 그 사이에 많이 섞여 있어서 성씨의 한 묘소를 혼동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고, 또 그 비갈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성씨의 묘소인 줄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당초에 네 성의 신하를 장례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에 있었는데 연도가 오래되어 혹 성씨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 슬프다. 육신이 죽을 때에 살아남은 자손들이 없고 오직 박씨만이 유복의 손자가 있어 이름이 노예에 뒤섞여서 수사(收司)를 면하였다. 몇 대가 지난 뒤에야 조정에서 비로소 충성을 가엾게 여겨 녹용하였다.
6세손 익찬(翊贊) 숭고(崇古)에 이르러 생각하기를 “노량진의 묘소는 비록 근거할 만한 문적이 없어 의심하고 있으나 다섯 비갈에 네 성씨가 있으니, 이것이 충분히 증거가 될 수 있다. 또 어찌 성씨만 있고 이름이 없다 하여 믿지 않고 돌보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옛 봉분을 더 쌓고 새 비갈을 세웠으며, 또 상공(相公) 허목(許穆)에게 비문을 요청하니, 이름하기를 ‘육신의총비문(六臣疑塚碑文)’이라 하였으나 미처 비석에 새기지 못하였다.
금상(今上) 5년 기미에 성상이 노량진에서 열무하실 적에 여러 공경(公卿)들의 아룀을 따라 강 건너에서 묘를 바라보시고는 한탄하고 감회를 일으키시어 묘역에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도록 명하였다. 중외의 많은 선비들이 이에 분발되어서 묘소 곁에 사우를 창건하고 육신을 나란히 제향하였다. 17년 신미에 상이 장릉(章陵)에 전알(展謁)하러 가실 적에 연(輦)이 묘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성상은 또다시 관직을 회복하고 치제하게 하였으며 이어서 ‘민절(愍節)’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아, 이보다 전에는 이른바 육신의 묘라는 것이 다만 구릉의 한 줌 흙더미이고 부식된 한 조각의 빗돌이어서 강가의 늙은이와 나루터의 아전들이 오갈 적에 은밀히 이곳을 가리키며 말로 서로 전했었는데, 이제는 이 사실이 공경의 아룀에 올랐으며 성상이 두 번이나 보시고 융숭한 예를 내리셨다. 그리하여 이미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으라는 은혜로운 명령이 있었고, 또 사우를 세워 제향하고 관직과 품계를 다시 회복하였으며, 제사를 특별히 내려주고 화려한 편액을 밝게 게시하였다.
조정에서 표창함이 이와 같이 빛나고 드러났는데도 마침내 슬픈 마음을 일으키는 유허(遺墟)에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두어서 충성스런 혼과 굳센 넋으로 하여금 황폐한 풀과 차가운 연기와 도깨비들이 떼 지어 울부짖는 가운데 길이 매몰되게 한다면, 당시 의사들이 봉분을 쌓고 비갈을 세운 고달픈 마음을 저버림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오늘날 성조(聖朝)에서 충신을 표창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보기 드문 은전을 헛되게 함에 가깝지 않겠는가. 박공(朴公)의 영혼 또한 어찌 ‘내 다행히 남은 혈손(血孫)이 있다.’고 말씀하시겠는가.
숭고의 손자인 청안 현감(淸安縣監) 경여(慶餘)가 이를 깊이 염려하고 여러 어른들과 상의하여 이 일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해서 신도(神道)에 비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에게 와서 명문(銘文)을 부탁하므로 나는 늙고 혼몽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에 나는 생각하기를, “그렇다. 노량의 묘소가 육신의 무덤이 됨은 믿을 만하고 의심할 수 없음이 참으로 그대 조고의 유의(遺意)와 같다. 저 옛날 장릉의 지위와 칭호가 회복되지 않았을 때에는 오히려 기휘(忌諱)하는 바가 있어서 감히 끝까지 말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조정에서 육신에 대하여 흔쾌히 권장해 주어서 풍성(風聲)을 길이 세울 뿐만 아니라 장릉을 복위한 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노량의 묘소에 있어서만 유독 의심스러워 신빙할 수 없다 해서 단단한 돌을 깎아 사실을 기록하여 옛날에 어두운 것을 제거하고 새로 드러냄을 이루어 지금에 밝혀서 장구한 후세에 분명히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그 일을 차례로 쓰고 명한다.
서호의 남쪽 강안에 / 西湖南岸
옹기종기 무덤 있는데 / 有墓纍纍
각각 표시한 글이 있어 / 各有其表
다섯 비갈에 네 성씨가 적혀 있네 / 五碣四氏
예로부터 전해 오기를 / 傳道自古
육신이 묻힌 곳이라 하는데 / 六臣所閟
성씨는 여섯이나 / 其氏有六
이곳에 네 개만 갖추어졌네 / 此具其四
화가 일어나던 때에 / 禍發之際
의를 사모하여 묻은 것이니 / 事出慕義
그 이름을 쓰지 않음은 / 不書其名
까닭 있어서임을 아노라 / 知有所以
어이하여 후세 사람들은 / 云何後人
여기에 의심을 하는가 / 有疑于是
비록 문적이 없어서이나 / 雖緣無籍
실은 기휘함을 염려해서라오 / 實慮有忌
다행히 성조를 만나 / 幸會聖朝
성상의 마음에 감동함이 있으니 / 有感天意
충절을 표창함이 / 褒忠獎節
지극하지 않음이 없네 / 靡有不至
백일의 광채가 / 白日之光
깊은 땅속까지 통하여 / 洞徹九地
넓은 도량과 큰 은덕 / 曠度大德
형용하여 말할 수 없어라 / 不可擬議
옛날에 기휘하던 것 / 昔者所諱
이제는 모두 피함이 없다오 / 今悉無避
생각건대 차례로 표시한 글 / 言念列表
저와 같이 없어지지 않았고 / 不泐如彼
또 봉분하고 나무를 심어 / 又加封植
이와 같이 훌륭하니 / 其盛若此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을 / 人之然疑
이제는 끝낼 수 있으리라 / 汔可已已
취금헌(醉琴軒)은 후손이 있어 / 醉琴有後
함께 육신(六臣)의 제사를 주관하네 / 並主六祀
전하여 육세에 이르러서 / 傳至六世
무너진 묘소를 수리하고 / 曾修墓圮
또 비문을 기술하였으나 / 且述碑文
아직도 곧바로 쓰지 못하였는데 / 猶靳直致
지난해에 이르러 / 爰及頃年
장릉을 복위하였다오 / 莊陵復位
무덤을 높여 새로 만든 듯하고 / 崇岡若新
여러 석물을 다 구비하니 / 象設咸備
군주와 신하는 일체인데 / 一體君臣
일이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 事豈有異
이곳에 묻혀 있는 넋을 받듦은 / 奉玆降魄
더욱 의심할 것이 없도다 / 尤宜無貳
분명히 글을 새겨서 / 明言顯刻
천 년에 길이 보이노니 / 用視千禩
부디 영령들이여 / 庶幾英靈
끝까지 이곳에 모이소서 / 終焉此萃
[주D-001]총관(摠管)과 승지(承旨) 부자 : 총관은 아버지인 성승(成勝), 승지는 그의 아들인 성삼문(成三問)을 가리킨다.
[주D-002]수사(收司) : 법을 맡은 기관에 체포됨을 이른다.
[주D-003]취금헌(醉琴軒) : 박팽년(朴彭年)의 호이다.
[주D-002]수사(收司) : 법을 맡은 기관에 체포됨을 이른다.
[주D-003]취금헌(醉琴軒) : 박팽년(朴彭年)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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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엽기 6(盎葉記六) | ||||
국조명신언행록(國朝名臣言行錄) |
송성명(宋成明)이 엮은 《국조명신언행록》이 아직 간행은 되지 않았지만 이제 그 목록을 적어 본다.
전집(前集) ○ 제1권 : 조준(趙浚) 송당(松堂)ㆍ남재(南在) 귀정(龜亭)ㆍ심덕부(沈德符)ㆍ성석린(成石磷) 독곡(獨谷)ㆍ민제(閔霽) 어은(漁隱)ㆍ조인옥(趙仁沃)
○ 제2권 : 하륜(河崙) 호정(浩亭)ㆍ권근(權近) 양촌(陽村)ㆍ조영무(趙英茂)ㆍ유정현(柳廷顯)ㆍ한상경(韓尙敬) 신재(信齋)ㆍ박은(朴訔) 조은(釣隱)ㆍ이원(李原) 용헌(容軒)ㆍ유관(柳觀) 하정(夏亭)ㆍ이직(李稷) 형재(亨齋)ㆍ이래(李來)ㆍ함부림(咸傅霖) 난계(蘭溪)
○ 제3권 : 황희(黃喜) 방촌(厖村)ㆍ맹사성(孟思誠)ㆍ조연(趙涓)ㆍ변계량(卞季良) 춘정(春亭)ㆍ허조(許稠)ㆍ조말생(趙末生) 두곡(杜谷)ㆍ한상덕(韓尙德)ㆍ이맹균(李孟畇)ㆍ이종무(李從茂)ㆍ최윤덕(崔潤德)
○ 제4권 : 노한(盧閈)ㆍ신개(申槩) 인재(寅齋)ㆍ하연(河演) 경재(敬齋)ㆍ권홍(權弘)ㆍ윤상(尹祥)ㆍ박안신(朴安信)ㆍ윤회(尹淮)ㆍ남지(南智)ㆍ허성(許誠)ㆍ박연(朴堧)ㆍ어변갑(魚變甲)ㆍ정척(鄭陟) 정암(整庵)ㆍ안지(安止) 고은(皐隱)ㆍ김구(金鉤)ㆍ김반(金泮) 송정(松亭)ㆍ김말(金末)ㆍ정갑손(鄭甲孫)ㆍ최치운(崔致雲)
○ 제5권 : 정인지(鄭麟趾) 학역재(學易齋)ㆍ한확(韓確)ㆍ김숙자(金叔滋)ㆍ이맹전(李孟專)ㆍ 이변(李邊)ㆍ기처(奇處)ㆍ강석덕(姜碩德) 완역재(玩易齋)ㆍ신석조(辛碩祖) 연빙당(淵氷堂)ㆍ유의손(柳義孫)ㆍ권채(權採) 매헌(梅軒)ㆍ남수문(南秀文)ㆍ정창손(鄭昌孫)ㆍ이계전(李季甸)ㆍ어효첨(魚孝瞻)ㆍ구치관(具致寬)ㆍ황수신(黃守身) 나부(懦夫)ㆍ최항(崔恒) 태허정(太虛亭)ㆍ박원형(朴元亨) 만절당(晩節堂)
○ 제6권 : 신숙주(申叔舟) 보한재(保閑齋)ㆍ권남(權擥)ㆍ한명회(韓明澮)ㆍ윤자운(尹子雲) 낙한정(樂閒亭)ㆍ이석형(李石亨) 저헌(樗軒)ㆍ김수온(金守溫) 괴애(乖崖)ㆍ양성지(梁誠之) 눌재(訥齋)ㆍ이예(李芮)ㆍ강희안(姜希顔) 인재(仁齋)ㆍ홍일동(洪逸童) 마천(麻川)
○ 제7권 : 서거정(徐居正) 사가정(四佳亭)ㆍ강희맹(姜希孟) 사숙재(私淑齋)ㆍ임수겸(林守謙) 갈곡(葛谷)ㆍ성임(成任) 안재(安齋)ㆍ이극배(李克培)ㆍ한계희(韓繼禧)ㆍ홍응(洪應)ㆍ노사신(盧思愼)ㆍ이약동(李約東)ㆍ이파(李坡)ㆍ성간(成侃)ㆍ손순효(孫舜孝) 물재(勿齋)ㆍ윤효손(尹孝孫)ㆍ어유소(魚有沼)
○ 제8권 : 허종(許琮) 상우당(尙友堂)ㆍ어세겸(魚世謙)ㆍ어세공(魚世恭)ㆍ정난종(鄭蘭宗) 허백당(虛白堂)ㆍ이종생(李從生)ㆍ이덕량(李德良)ㆍ성현(成俔) 용재(慵齋)ㆍ유순(柳洵) 노포(老圃)ㆍ이륙(李陸) 청파(靑坡)ㆍ허침(許琛)ㆍ노공필(盧公弼) 국일(菊逸)ㆍ안침(安琛)ㆍ채수(蔡壽)ㆍ이손(李蓀)ㆍ권경우(權景祐)ㆍ김흔(金訢) 안락당(顔樂堂)ㆍ유호인(兪好仁) 뇌계(㵢溪)
○ 제9권 : 김수동(金壽童)ㆍ송일(宋軼)ㆍ김응기(金應箕)ㆍ이집(李諿)ㆍ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ㆍ정광필(鄭光弼)ㆍ신용개(申用漑) 인락당(仁樂堂)
○ 제10권 : 임유겸(任由謙)ㆍ성세순(成世純)ㆍ조원기(趙元紀)ㆍ성몽정(成夢井)ㆍ이사균(李思鈞) 눌헌(訥軒)ㆍ이현보(李賢輔) 농암(聾巖)ㆍ박상(朴祥) 눌재(訥齋)ㆍ우맹선(禹孟善)ㆍ허굉(許硡)ㆍ이자(李耔) 음애(陰厓)ㆍ홍언필(洪彦弼) 묵재(黙齋)ㆍ권벌(權橃)ㆍ성세창(成世昌) 돈재(遯齋)ㆍ임추(任樞)
○ 제11권 : 신광한(申光漢) 기재(企齋)ㆍ소세양(蘇世讓) 양곡(陽谷)ㆍ심연원(沈連源) 보암(保庵)ㆍ상진(尙震) 범허정(泛虛亭)ㆍ정옥형(丁玉亨)ㆍ임권(任權)ㆍ안현(安玹)ㆍ장언량(張彦良)ㆍ심광언(沈光彦) 둔암(鈍庵)ㆍ조광원(曺光遠)ㆍ오겸(吳謙)ㆍ이윤경(李潤慶)
○ 제12권 : 이준경(李浚慶) 동고(東皐)ㆍ홍섬(洪暹) 인재(忍齋)ㆍ권철(權轍)ㆍ임호신(任虎臣)ㆍ조언수(趙彦秀)ㆍ조사수(趙士秀) 송강(松岡)ㆍ민기(閔箕) 관물재(觀物齋)ㆍ이탁(李鐸)ㆍ심달원(沈達源) 효창(曉窓)ㆍ이택(李澤)ㆍ남치근(南致勤)ㆍ장필무(張弼武)
후집(後集) ○ 제1권 : 백인걸(白仁傑) 휴암(休庵)ㆍ정유길(鄭惟吉) 임당(林塘)ㆍ노수신(盧守愼) 소재(蘇齋)ㆍ정종영(鄭宗榮) 항재(恒齋)ㆍ이준민(李俊民) 신암(新菴)
○ 제2권 : 박순(朴淳) 사암(思庵)ㆍ김계휘(金繼輝) 황강(黃岡)ㆍ박응남(朴應男) 퇴암(退庵)ㆍ이후백(李後白) 청련(靑蓮)ㆍ정탁(鄭琢) 약포(藥圃)ㆍ정지연(鄭芝衍) 남봉(南峯)
○ 제3권 : 황정욱(黃廷彧) 지천(芝川)ㆍ구사맹(具思孟) 팔곡(八谷)ㆍ윤두수(尹斗壽) 오음(梧陰)ㆍ윤근수(尹根壽) 월정(月汀)ㆍ신응시(辛應時) 백록(白麓)ㆍ구봉령(具鳳齡) 백담(柏潭)ㆍ이산해(李山海) 아계(鵝溪)
○ 제4권 : 정철(鄭澈) 송강(松江)ㆍ홍성민(洪聖民) 졸옹(拙翁)ㆍ이해수(李海壽) 약포(藥圃)ㆍ배삼익(裵三益) 임연(臨淵)ㆍ김명원(金命元) 주은(酒隱)ㆍ이제신(李濟臣) 청강(淸江)ㆍ변협(邊協)
○ 제5권 : 유성룡(柳成龍) 서애(西厓)ㆍ이산보(李山甫) 명곡(鳴谷)ㆍ이정암(李廷馣) 월천(月川)
○ 제6권 : 김성일(金誠一) 학봉(鶴峯)ㆍ권율(權慄)ㆍ이순신(李舜臣)
○ 제7권 : 이원익(李元翼) 오리(梧里)ㆍ정곤수(鄭崑壽) 백곡(柏谷)ㆍ심희수(沈喜壽) 일송(一松)ㆍ유근(柳根) 서경(西埛)ㆍ윤기(尹祁) 간보(艮輔)ㆍ한응인(韓應寅)ㆍ홍이상(洪履祥) 모당(慕堂)
○ 제8권 : 이덕형(李德馨) 한음(漢陰)ㆍ이항복(李恒福) 백사(白沙)ㆍ장운익(張雲翼)ㆍ오억령(吳億齡) 만취(晩翠)ㆍ이호민(李好閔) 오봉(五峯)ㆍ박동현(朴東賢) 활당(活塘)ㆍ나급(羅級)
○ 제9권 : 한준겸(韓浚謙) 유천(柳川)ㆍ구성(具宬) 초당(艸塘)ㆍ서성(徐渻) 약봉(藥峯)ㆍ이수광(李睟光) 지봉(芝峯)ㆍ정엽(鄭曄) 수몽(守夢)ㆍ정경세(鄭經世) 우복(愚伏)
○ 제10권 : 신흠(申欽) 상촌(象村)ㆍ황신(黃愼) 추포(秋浦)ㆍ오윤겸(吳允謙) 추탄(楸灘)
○ 제11권 : 김상용(金尙容) 선원(仙源)ㆍ이정귀(李廷龜) 월사(月沙)ㆍ박동량(朴東亮) 오창(梧囱)
○ 제12권 : 김류(金瑬) 북저(北渚)ㆍ이귀(李貴) 묵재(黙齋)
○ 제13권 : 홍서봉(洪瑞鳳) 학곡(鶴谷)ㆍ신경진(申景禛)ㆍ이서(李曙)ㆍ구인후(具仁垕) 유포(柳浦)ㆍ장만(張晩)ㆍ이시발(李時發)ㆍ유행(柳珩)ㆍ정충신(鄭忠信)
○ 제14권 : 김상헌(金尙憲) 청음(淸陰)ㆍ정온(鄭蘊) 동계(桐溪)ㆍ윤황(尹煌) 팔송(八松)ㆍ이안눌(李安訥) 동악(東岳)
○ 제15권 : 최명길(崔鳴吉) 지천(遲川)ㆍ장유(張維) 계곡(谿谷)
○ 제16권 : 조익(趙翼) 포저(浦渚)ㆍ김시양(金時讓) 하담(荷潭)ㆍ이경직(李景稷) 석문(石門)
○ 제17권 : 이경여(李敬輿) 백강(白江)ㆍ이무(李楘) 송교(松郊)
○ 제18권 : 임숙영(任叔英) 소암(疏菴)ㆍ민응형(閔應亨)ㆍ유백증(兪伯曾) 취헌(翠軒)ㆍ강석기(姜碩基) 월당(月塘)ㆍ신익성(申翊聖) 낙전당(樂全堂)ㆍ이명한(李明漢) 백주(白洲)ㆍ김육(金堉) 잠곡(潛谷)
외집(外集) ○ 제1권 : 김굉필(金宏弼) 한훤당(寒暄堂)ㆍ정여창(鄭汝昌) 일두(壹蠹)ㆍ정붕(鄭鵬) 신당(新堂)ㆍ박영(朴英) 송당(松堂)ㆍ유우(柳藕) 서봉(西峯)ㆍ김안국(金安國) 모재(慕齋)
○ 제2권 : 조광조(趙光祖) 정암(靜庵)ㆍ김정국(金正國) 사재(思齋)ㆍ조성(趙晟) 양심당(養心堂)ㆍ조욱(趙昱) 보진암(葆眞庵)
○ 제3권 : 이언적(李彦迪) 회재(晦齋)ㆍ채세영(蔡世英) 임진(任眞)ㆍ박소(朴紹) 야천(冶川)ㆍ성운(成運) 대곡(大谷)ㆍ홍인우(洪仁祐) 치재(恥齋)
○ 제4권 : 이황(李滉) 퇴계(退溪)ㆍ성수침(成守琛) 청송(聽松)
○ 제5권 : 서경덕(徐敬德) 화담(花潭)ㆍ유희춘(柳希春) 미암(眉巖)ㆍ이항(李恒) 일재(一齋)ㆍ성제원(成悌元) 동주(東洲)ㆍ이중호(李仲虎) 이소재(履素齋)ㆍ기대승(奇大升) 고봉(高峯)
○ 제6권 : 조식(曺植) 남명(南冥)ㆍ장현광(張顯光) 여헌(旅軒)ㆍ김장생(金長生) 사계(沙溪)
○ 제7권 : 송인(宋寅) 이암(頤庵)ㆍ서기(徐起) 고청(孤靑)ㆍ이지남(李至男) 영응(永膺)ㆍ김근공(金謹恭) 척암(惕菴)ㆍ정지운(鄭之耘) 추만(秋巒)ㆍ민순(閔純) 행촌(杏村)ㆍ한호(韓濩) 석봉(石峯)ㆍ박민헌(朴民獻) 슬한재(瑟僩齋)ㆍ남언경(南彦經) 동강(東岡)ㆍ박지화(朴枝華) 수암(守庵)
○ 제8권 : 김우옹(金宇顒) 동강(東岡)ㆍ오건(吳健) 덕계(德溪)ㆍ최영경(崔永慶) 수우당(守愚堂)
○ 제9권 : 김인후(金麟厚) 하서(河西)ㆍ조호익(曺好益) 지산(芝山)ㆍ황준량(黃俊良) 금계(錦溪)
○ 제10권 : 조헌(趙憲) 중봉(重峯)ㆍ정구(鄭逑) 한강(寒岡)
○ 제11권 : 조목(趙穆) 월천(月川)ㆍ이정(李楨) 귀암(龜巖)ㆍ남치리(南致利) 분지(賁趾)ㆍ권호문(權好文) 가암(柯巖)ㆍ권춘란(權春蘭) 해곡(海谷)ㆍ박형(朴浻) 정산(鼎山)ㆍ송익필(宋翼弼) 귀봉(龜峯)
○ 제12권 : 이이(李珥) 율곡(栗谷)
○ 제13권 : 성혼(成渾) 우계(牛溪)
별집(別集) ○ 제1권 : 김종서(金宗瑞) 절재(節齋)ㆍ박순(朴淳)ㆍ정본(鄭苯)ㆍ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ㆍ김시습(金時習) 동봉(東峯)ㆍ권절(權節) 율정(栗亭)ㆍ조려(趙旅) 어계(漁溪)
○ 제2권 : 김종직(金宗直) 점필재(佔畢齋)ㆍ조위(曺偉) 매계(梅溪)ㆍ최보(崔溥) 금남(錦南)ㆍ김일손(金馹孫) 탁영(濯纓)ㆍ이종준(李宗準) 용헌(慵軒)ㆍ무풍부정총(茂豐副正摠) 서호주인(西湖主人)ㆍ박한주(朴漢柱) 우졸자(迂拙子)ㆍ이계맹(李繼孟) 묵암(墨巖)ㆍ이목(李穆)ㆍ임희재(任熙載) 물암(勿庵)ㆍ허반(許磐)
○ 제3권 : 윤필상(尹弼商)ㆍ홍귀달(洪貴達) 함허당(涵虛堂)ㆍ성준(成浚)ㆍ표연말(表沿沫) 남계(藍溪)ㆍ조지서(趙之瑞)ㆍ정성근(鄭誠勤)ㆍ주계정 심원(朱溪正深源) 성광(醒狂)ㆍ정희량(鄭希良) 허암(虛菴)ㆍ김천령(金千齡)ㆍ박은(朴誾) 읍취헌(挹翠軒)ㆍ권달수(權達手) 동계(桐溪)ㆍ이원(李黿) 재사당(再思堂)
○ 제4권 : 안당(安瑭)ㆍ김정(金淨) 충암(沖庵)ㆍ김식(金湜)ㆍ한충(韓忠) 송재(松齋)ㆍ기준(奇遵) 복재(服齋)
○ 제5권 : 이장곤(李長坤) 금헌(琴軒)ㆍ유운(柳雲)ㆍ김구(金絿) 자암(自庵)ㆍ박세희(朴世熹) 도원재(道源齋)ㆍ박훈(朴薰) 강수(江叟)ㆍ이연ⲽ(李延慶) 탄수(灘叟)ㆍ정완(鄭浣)ㆍ김대유(金大有) 삼족당(三足堂)ㆍ경세인(慶世仁) 경재(敬齋)
○ 제6권 : 유관(柳灌) 송암(松庵)ㆍ유인숙(柳仁淑) 정수(靜叟)ㆍ송인수(宋麟壽) 규암(圭庵)ㆍ박광우(朴光佑) 필재(蓽齋)ㆍ정희등(鄭希登)ㆍ송희규(宋希圭)ㆍ이림(李霖)ㆍ나식(羅湜) 장음정(長吟亭)ㆍ이약빙(李若氷) 준암(樽巖)ㆍ이해(李瀣)ㆍ임형수(林亨秀) 금호(錦湖)ㆍ임억령(林億齡) 석천(石川)ㆍ정황(丁瑝) 유헌(游軒)ㆍ이담(李湛) 정존재(靜存齋)ㆍ민기문(閔起文) 역암(櫟菴)ㆍ김난상(金鸞祥)ㆍ김저(金䃴)ㆍ윤결(尹潔) 취부(醉夫)
○ 제7권 : 고경명(高敬命) 제봉(霽峯)ㆍ송상현(宋象賢) 천곡(泉谷)ㆍ김천일(金千鎰)ㆍ이정란(李廷鸞)ㆍ조종도(趙宗道) 대소헌(大笑軒)ㆍ김여물(金汝岉)ㆍ유극량(劉克良)ㆍ황진(黃進)ㆍ원호(元豪)
○ 제8권 : 박진(朴晉)ㆍ곽재우(郭再祐) 망우당(忘憂堂)ㆍ김덕령(金德齡)ㆍ정문부(鄭文孚) 농포(農圃)ㆍ김시민(金時敏)ㆍ정담(鄭湛)ㆍ이대원(李大源)
○ 제9권 : 김덕함(金德涵) 성옹(醒翁)ㆍ정홍익(鄭弘翼) 휴옹(休翁)ㆍ귀천군 수(龜川郡睟)ㆍ금산군 성윤(錦山郡誠胤)ㆍ정택뢰(鄭澤雷)ㆍ조직(趙溭) 입재(立齋)
○ 제10권 : 김응하(金應河)ㆍ남이흥(南以興)ㆍ이중로(李重老)ㆍ김준(金浚)ㆍ김양언(金良彦)ㆍ이희건(李希建)
○ 제11권 : 홍명구(洪命耈)ㆍ최진립(崔震立)ㆍ임경업(林慶業)ㆍ이상길(李尙吉)ㆍ심현(沈誢)ㆍ이시직(李時稷) 죽창(竹囱)ㆍ윤계(尹棨)ㆍ홍익한(洪翼漢) 화포(花浦)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속집(續集) ○ 제1권 : 최덕지(崔德之) 연촌(煙村)ㆍ남효온(南孝溫) 추강(秋江)ㆍ최수성(崔壽城) 원정(猿亭)ㆍ정렴(鄭磏) 북창(北囱)ㆍ이몽규(李夢奎) 천휴(天休)ㆍ양사언(楊士彦) 봉래(蓬萊)ㆍ이지함(李之菡) 토정(土亭)ㆍ이의건(李義健) 동은(峒隱)ㆍ성윤해(成允諧) 판곡(板谷)ㆍ성로(成輅) 석전(石田)ㆍ문위(文緯) 모계(茅溪)ㆍ최명룡(崔命龍) 석계(石溪)ㆍ안방준(安邦俊) 우산(牛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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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냉화(秋江冷話) 초입(抄入) |
남효온(南孝溫) 찬(撰)
○ 병술ㆍ정해년 무렵에 향생(鄕生) 조기종(趙起宗)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낙선방(樂善坊) 제이리(第二里)에 우거하면서 나와 함께 남학(南學 서울 남쪽에 있던 4학의 하나)의 생도로 공부하고 있었다. 그때 조기종은 나이가 어려서 겨우 시문(詩文)의 구두를 깨칠 정도였고 시를 지을 줄은 아직 몰랐다. 하루는 꿈에 어떤 빈 집에 들어가니, 뜰 안이 널찍하고 쓸쓸한데 대추꽃이 새로 피어 있어 첫여름 같았으며, 뜰에는 풀이 갓 돋아나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늦은 봄이었다. 두서너 사람의 서생이 거기에 있었는데, 평소에 아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조기종에게 시를 지으라고 권하니, 조기종은 즉석에서 한 수 짓기를,
나무에는 대추 꽃이 활짝 피었고 / 樹上棗滿開
빈 집에는 사람 없이 쓸쓸하도다 / 空家寂無人
봄바람은 끊임 없이 불어오고 / 春風吹不盡
만리엔 풀빛이 새롭도다 / 萬里草多新
하였다. 깨어난 뒤에도 그 시를 잘 기억하여 한 자도 남김 없이 같이 공부하는 벗에게 말해주고, 또 벽에 써놓고 깊이 그것을 감상하였다. 그리고 나서 다음 달에 조기종은 죽었다.빈 집에는 사람 없이 쓸쓸하도다 / 空家寂無人
봄바람은 끊임 없이 불어오고 / 春風吹不盡
만리엔 풀빛이 새롭도다 / 萬里草多新
○ 《호산노반(湖山老伴)》 1부(部) 1백 14편은 나의 벗 고(故) 자정(子挺)이 지은 책이다. 자정은 세상에 드물게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서, 태어난 지 26년에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백의로 세상을 떠났다. 그 문장이나 몸가짐에 대해서는 내가 지문(誌文 죽은 사람의 성명ㆍ생졸 연월일ㆍ행적ㆍ무덤의 소재 등을 적은 글)에 자세히 적어두었다. 그는 천성이 산야에 묻혀 있기를 좋아하였고, 세상의 번잡하고 화려함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이에 옛 사람의 고율가사(古律歌詞) 중에서 한적하고 가장 감상할 만한 것을 뽑아 모아 그 책을 《호산노반(湖山老伴)》이라 불렀다. 이는 생각건대, 끝내 강산(江山)에서 늙기를 꾀하면서 천고의 옛 사람과 벗하려는 뜻이리라. 아, 자정이 평소에 성정(性情)이 근엄하여 비록 백안(白眼)으로 세속을 대하지는 못했으나 사람을 허여함이 적었다. 그러나 나와의 사귐이 가장 깊었으므로 전부터 내가 병들고 기력이 약하니,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걱정해 주었다. 하루는 나에게 와서 시를 이야기하다가 밤 늦게 돌아갔는데, 날이 밝자 다시 와서 말하기를, “어제 이야기를 주고받았더니 내 마음이 매우 평온해졌소. 그런데 중도에서 문득 그대의 평소 병환을 생각하고, 혼자 말하기를, ‘모(某)가 만약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누구와 함께 나의 회포를 말할까.’ 하고,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돌아갔소.” 하였다. 자정의 이 말이 역력하여 오늘 들은 듯하다. 앓는 자가 살아 있고 튼튼한 이가 죽게 되어 자정의 슬픔이 내게로 옮아와 내가 도리어 자정을 슬퍼할 줄 뜻하였으리오. 자정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겨울 10월에, 이 책을 궤 속에서 뒤져내어 펼쳐보며, 슬퍼함을 마지못한다.
○ 고순(高淳)의 자(字)는 희지(熙之)인데, 일찍이 귀머거리 증세가 있었으나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하루는 시를 읊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돌아간 아버지 중추공(中樞公)이 꿈에 나타나 이런 시 한 수를 들려주었다.
백발이 성성하여 옛 모습 줄어들고 / 華髮蒼蒼減昔年
외로운 몸 쓸쓸히 산턱을 지키네 / 孤身寂寂守山前
백골이 지감 없다 말하지 말라 / 莫言白骨無知感
네 시 읊는 소리에 나는 잠 못 들어 하노라 / 聞汝吟詩我不眠
내가 전날 그 시를 서하였는데 대략 이러하다. “천지에 있는 한 기(氣)는 와서 퍼졌다가 흩어져 되돌아가는데 그 실상은 하나이다. 따라서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기가 각기 자손의 몸에 분산해 있으면서, 그것이 자손에게서 움직임이 있으면 신명(神明)의 밝은 것에 감응(感應)함이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사람이 반드시 곧고 오직 맑아서 슬프게 부모를 다시 보는 것과 같이 한 연후에야 부모의 혼령이 하늘에서 오르내려 늘 좌우에 있게 되는 것이니, 고희지 같은 이는 이른바, 맑은 이라 할 것이다.” 하였다.외로운 몸 쓸쓸히 산턱을 지키네 / 孤身寂寂守山前
백골이 지감 없다 말하지 말라 / 莫言白骨無知感
네 시 읊는 소리에 나는 잠 못 들어 하노라 / 聞汝吟詩我不眠
○ 자정(子挺)이 죽은 뒤 3년이 되는 임인년에, 고순(高淳)이 꿈에 자정을 쓸쓸한 들에서 만나보고 서로 시를 지어 주고받고 하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다. 자정이 백공(伯恭)은 잘 있는가를 묻기에 고순이 말하기를, “이미 절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고 있다.” 하였더니, 자정이 별로 기뻐하지 않고 곧 시 한 수를 지어 생에게 기탁하여 두 사람에게 주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문장과 부귀가 모두 구름 같은데 / 文章富貴摠如雲
무엇 때문에 애써 글읽기에 힘쓰랴 / 何須勞苦讀書勤
돈이 있으면 술을 사 마실 것이요 / 但當有錢沽酒飮
세상 인사는 말할 필요가 없도다 / 世間人事不須云
하였다. 생이 깨어나서 그것을 나에게 적어주었다.무엇 때문에 애써 글읽기에 힘쓰랴 / 何須勞苦讀書勤
돈이 있으면 술을 사 마실 것이요 / 但當有錢沽酒飮
세상 인사는 말할 필요가 없도다 / 世間人事不須云
○ 홍유손(洪裕孫)의 자는 여경(餘慶)이요, 본관은 남양(南陽)인데, 겉으로는 미쳐 실성한 듯하면서 속으로는 석가(釋迦)의 무(無) 자 화두를 잡은 지 10여 년에, 바야흐로 깨달았다. 돌아와서 우리 유서(儒書)를 읽고 크게 기뻐하기를, “이른바 천 리 타향에서 옛 친구를 만난 것 같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만약에 《논어(論語)》를 읽는데 그 첫면의,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만으로서 다른 20편 전부의 주요한 뜻을 모두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처음 앉으면 그 헛기침 소리만 듣고서, 그 사람의 말씨의 아름다움을 지레 짐작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했는데, 성광(醒狂) 백연(伯淵)만이 그것을 믿지 않고, “여경이 무(無) 자를 잡았다는 것은 겉으로 하는 말이다.” 하였다.
○ 자정(子挺)이 이태백(李太白)과 소동파(蘇東坡) 및 고려 이 상국(李相國 규보(奎報))의 시를 신통하지 않게 여겼다. 이종준(李宗準) 중균(仲鈞)이 그 문에 장난삼아 쓰기를, “자정이 태백을 주먹질하고, 자정과 동파는 평소에 알지도 못하고, 자정과 상국은 서로 용납되지 않는다.”하였다. 자정이 그것을 읽고 붓을 들어 여동파매평생(與東坡昧平生)이란 여섯 자만을 지워버렸다. 내가 묻기를, “상국(相國)은 우리 나라 사람이라 그 문장은 본래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청련거사(靑蓮居士 이태백의 호)는 풍아(風雅) 이후의 일인(一人)이었는데 그대가 중균의 ‘주먹질한다.’는 글을 달게 받는 것은, 그러면 청련거사가 동파의 아래란 말인가.” 하니, 자정이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 문종(文宗)이 고려의 왕태조를 위하여 숭의전(崇義殿)을 마전군(麻田郡)에 짓고, 사람을 시켜 왕씨의 후손을 구하게 했으나 얻지 못하였다. 왕숭례(王崇禮)라는 사람이 성명(姓名)을 고치고 평민으로 있었는데, 이웃 사람과 밭을 갈다가 두둑 다툼을 하게 되어 그 이웃 사람이 그를 고하였다. 문종이 곧 그에게 벼슬을 주고 품계(品階)를 삼품(三品)에 올려 숭의전사(崇義殿使)를 시켜 왕태조의 제사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는 우(虞) 나라가 단주(丹朱)를 손님으로 대접하고, 주(周)에서 미자(微子)를 손님으로 대접한 것과 같은 일이다. 계유년의 감시(監試 조선 시대 생원ㆍ진사를 뽑던 과거)에 숭의전 시를 출제하였다.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이르기를
숭의전이 마전에 있는데 / 崇義殿在麻
대대로 그 집을 복호하였도다 / 世世復其家
하였다.대대로 그 집을 복호하였도다 / 世世復其家
○ 고려의 왕씨가 망하자 여러 왕씨를 섬으로 추방했더니, 모신(謀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그들을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니, 죽여버리는 것이 낫다.” 하였다. 그러나 명분 없이 죽이기는 어려우므로, 물에 익숙한 사람으로 하여금 배를 갖추게 하고 여러 왕씨를 꾀어 말하기를, “교서가 지금 내렸는데 여러분을 섬안에 두어 서인을 만들라 하신다.” 하니, 여러 왕씨가 매우 기뻐서 다투어 배에 올랐다. 배가 해안을 떠나자, 뱃사람이 바다 밑으로 잠수해 들어가 그 배에 구멍을 뚫었다. 물이 새어 들어와 배가 반쯤 잠길 때에, 왕씨와 본래부터 잘 아는 중이 해안에서 손을 들어 물에 빠져 들어가는 왕씨를 불렀다. 왕씨가 곧 한 수의 시를 지어 중을 불러 이르기를,
노젓는 한 마디 소리 푸른 물결 밖인데 / 一聲柔櫓滄波外
묻노니 산승이여 너를 어이하리 / 借問山僧柰爾何
하니, 중이 통곡하고 돌아갔다.묻노니 산승이여 너를 어이하리 / 借問山僧柰爾何
○ 세조가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을 명(明) 나라 서울로 보내어 동방에 전해지지 않은 범자(梵字)를 구하게 하였다. 괴애가 명 나라에 들어가 감로사(甘露寺)에 이르니, 그 주지는 중국에서도 이름이 높은 스님인지라. 괴애가 조선의 이름난 선비라는 말을 듣고 미리 의자와 탁자를 마련하고, 붓과 벼루와 아계지(鵝溪紙)를 그 위에 놓아 두었다. 괴애가 문에 들어서니 바람벽에 묵매(墨梅)가 있거늘, 곧 붓을 적시어 기둥 위에 쓰기를,
하였더니, 주지가 뜰 아래 내려가 머리를 조아리고, 대뢰(大牢 나라 제사에 소를 통째로 바치던 일)로써 대접하고, 술과 고기를 갖출 대로 갖추었다. 내가 젊어서 시를 지을 때에 요점(要點)을 괴애 선생에게 물었더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젊은이에게 글짓는 법은 가르칠 만하지만 글씨 쓰는 법은 아주 다르다. 글을 짓는 요령은 먼저 기(氣)를 넓혀야 하고, 글씨를 쓰는 비결은 먼저 마을을 바로잡는 데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처사 권안(權晏)은 선정(禪定)을 닦는 이름난 선비인데, 살고 있는 집이 헐어져 구멍이 수십 군데 뚫려 비가 새고, 바람이 들어와도 손질하지 않았다. 그 아들이 장단(長湍)에 내려가 종들을 부려 농사를 지어 곡식을 매우 많이 거두어들였으나, 권처사는 기뻐하지 않고, “이렇게 농사를 지으면 반드시 부자간의 정의를 상하겠구나.” 하였다.
○ 점필재(佔畢齋) 선생이 시묘살이를 하는 3년 동안, 조석 상식에 곡을 할 때면 지나가는 사람이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홍여경(洪餘慶)이 말하기를, “정성이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더니, 참으로 헛말이 아니로다.” 하였다.
○ 2월 17일 증조모가 꿈에 보이므로 내가 묻기를, “제가 급제하겠습니까.” 하였으나, 대답이 없기에 다시 물으니, “급제하기는 어렵겠다.” 하더니, 이윽고 다시 내게 말하기를, “내가 금년 5월에는 꼭 급제하겠는데, 글짓기는 여러 선비의 으뜸이 되겠으나, 원수진 자가 들어가 시관이 되면, 뽑되 반드시 하제(下第)에 둘 것이다. 이것이 너의 급제가 어려운 까닭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천지 귀신이 위에 있고 곁에서 질정(質正)할 것인데,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어찌 사사로운 생각을 거기에 넣을 수 있겠습니까.” 했더니, 증조모께서 “네 말이 옳다.” 하였다.
○ 대교(待敎) 표연말(表沿沫)의 자는 소유(少遊)인데, 예문관에 봉직하고 있을 때에 한림(翰林)들이 새로 임명된 관원에 대하여 횡포하고, 금육(禁肉 당시 국법으로 먹기를 금한 고기)을 거두어들이고 여악(女樂)을 베풀어 술 마시기를 낙으로 삼고 있었는데, 임금이 알게 되어 표연말도 그 연석에 참석했으므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일이 있은 뒤로는 고을 모임에 금육을 내놓는 사람이 있으면 곧 그 자리를 뜨면서 말하기를, “차마 다시 국법을 범할 수 없다.” 하였다. 부모상을 치를 때에도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다. 점필재 선생이 그때 선산부사(善山府使)였는데 장계를 올려 그의 행적을 천거하니, 임금이 그의 벼슬을 한 등급 올려주었다.
○ 경징군(慶徵君)의 휘(諱)는 연(延)이며, 자는 대유(大有)요,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그의 아버지가 겨울에 병이 들어 생선회가 먹고 싶다고 하므로, 경징군은 얼음을 깨고 그물을 쳤으나 고기를 잡지 못하자 울며 말하기를, “옛 사람은 얼음을 깨뜨려서 고기를 잡았다는데, 지금 나는 그물을 치고도 고기를 못 잡으니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는 것이 막혔도다.” 하면서, 두건과 버선을 훌렁 벗고 얼음 구멍에 서서 하룻밤을 새웠더니 검은 잉어가 잡혔다. 아버지가 또 승검초가 먹고 싶다 하였는데, 그가 울자 승검초가 돌연히 생겨 가져다 드렸더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자 시묘살이를 하는 3년 동안, 죽ㆍ채소ㆍ과일 등의 제사 음식을 한결같이 가례(家禮)대로 하였고, 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시기를 50살이 넘도록 조금도 변함 없이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자 또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와 똑 같이 하였다. 세조[光廟]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금상(今上 성종) 9년에 부름에 응하여 사재 주부(司宰主簿)가 되었는데, 내전으로 불려 들어갔더니, 임금이 묻기를, “듣건대, 경이 집에 있을 때에 얼음을 깨뜨려 고기가 뛰어나오게 했다 하는데, 정말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겨울이라 고기가 없을 때이므로 아버지는 구하지 못하리라 생각하였는데 그물을 치고 매우 조심스럽게 구하여 다행히도 고기를 잡았더니, 아비가 기뻐하며 효성이 신령을 감동시킨 탓이라고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듣고 살피지도 않고 또한 효성이 신령에 응감한 탓이라고들 했습니다. 신의 힘으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경은 책을 얼마나 읽었느냐.” 하므로, “사서이경(四書二經)을 읽었습니다.” 했더니, 임금이 또, “사서이경 중에 어떤 말을 제일의(第一義)로 삼는가.” 하여, 대답하기를, “사서이경 중에 순(舜) 임금의 큰 효도를 칭찬한 대목이 있사온데, 그것이 신이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이고, 또 주공(周公)의 충성을 칭찬한 대목이 있사온데, 이것도 신이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가상히 여기어 오래도록 감탄하였다.
○ 청주(淸州)에 양수척(楊水尺) 3형제가 있었는데, 소행이 남다른 데가 있었다. 경징군(慶徵君)이 도리(道理)로써 어버이를 섬겼다는 말을 듣고는 지난 날의 허물을 버리고 진실하게 아들의 도리를 지켜, 아침 저녁으로 어버이의 안부를 물어서 살피어 지극한 효도를 하였다. 어버이의 상을 당한 날에도 한 잔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고, 시묘살이를 하는 3년 동안에 술이나 과일을 먹지 않았다. 3년상이 끝난 뒤에도 3형제가 함께 살면서 즐거움을 극진히 나누고, 서로 스스로를 경계하면서 말하기를, “다행히 남다른 소행이 있기는 했으나, 이 일을 경 생원이 듣는다면 또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신축년에 가뭄이 들었을 때, 이천(利川)에서 한 강도를 처단했는데, 처형하려 하자 강도가 하늘에 맹세하기를, “나는 어릴 때부터 절도질을 배운 일은 있어도 강도질은 아직 한 일이 없습니다. 내 말이 진실이면 하늘에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윽고 목을 베니, 과연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한 동네의 밭이 다 흙탕물로 덮였다.
○ 경자년에 사족(士族)의 딸 어우동(於宇同)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와 간통한 선비가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말이 생원 이승언(李承彦)에게 미쳐 그도 연루자로 곤장을 맞고 할 수 없이 자백을 했다. 이 생원이 형장을 맞는 자리에 꿇어앉아 하늘에 고하기를, “옛 사람은 한 사나이의 원한이 6월에 서릿발을 날린다고 했는데, 옛날 하늘이나 지금의 하늘이나 같은 하늘입니다. 내 죄는 원통하니 하늘에 어찌 변괴가 없으랴.” 하니, 갑자기 검은 구름이 화악(華嶽)으로부터 일어나 폭우가 쏟아지고, 우박이 뜰에 가득히 날리며, 우레와 벼락치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어 사람을 놀라게 하니, 형리가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미 자백했으므로 시비를 가려 밝혀 줄 수가 없었다.
○ 김괴애가 좌화(坐化)했다고 하니, 동봉(東峯) 김열경(金悅卿)이 웃으며 말하기를, “괴애는 평생에 욕심이 많았으니 반드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설사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귀한 일은 아니다. 증자(曾子)가 죽을 때에 깔고 있던 자리를 바꾸어놓고 죽은 일과, 자로(子路)가 갓끈을 매고 죽었다는 일은 알지만, 그 밖의 것은 나는 모른다.” 하였다. 김열경이 술에 만취하여 길에서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만나 호통치기를, “네 이놈, 물러가라.” 했으나, 정 정승이 못 들은 척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재상의 넓은 도량에 탄복하였다.
○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가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에, 우리 나라에서 붙잡혀 간 임산부가 있었는데, 문충공이 돌아오는 길에 비단을 주고 그 여자를 샀다. 배가 돌아오는 날, 큰 바람이 불어 돛대가 부러져 거의 건널 수가 없게 되자, 한 사공이 말하기를, “아이 밴 여인은 신룡(神龍)이 사랑하는 것이다.” 하니, 사공들이 다투어 그 여인을 잡아 바다에 던지려고 하는 것을, 문충공은 자기 몸으로써 감싸며 말하기를, “고기 뱃속에 함께 장사지낸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 아니냐.” 하였다. 이윽고 건장한 청년이 돛대를 잡아매어 곧 배가 갈 수 있게 되었다.
○ 권경유(權景裕)의 자(字)는 군요(君饒)이고, 유순정(柳順汀)의 자는 지옹(知翁)인데, 젊어서 재주와 명성이 있었다. 일찍이 산방(山房)에서 학문을 익히고 있었는데, 한 소년이 또한 중에게 글을 배우고 있었다. 권경유와 유순정이, “너는 누구냐.”고 묻고, 또 말하기를, “네 얼굴을 보니 예쁘구나. 네 누이도 있느냐.” 하니, 누이 한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의 누이는 본래 나주(羅州) 기생인데 이름은 옥부향(玉膚香), 아명(兒名)은 덕도(德島)이고, 얼굴과 재예(才藝)가 남주(南州)에서 으뜸갔다. 옥부향이 연전에 서울 교방(敎坊)에 뽑혀 들어가 거기에서도 또한 이름이 났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옥부향에 대한 그리운 정을 누를 길이 없어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 두 사람 중에서 먼저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이 옥부향을 차지하기로 하자.”하고, 또 그 소년에게 나주 고향 마을의 꽃ㆍ나무ㆍ시내ㆍ돌 따위에 대하여 캐어물어 마음속에 잘 기억해 두었다.
2ㆍ3년 뒤에 두 사람이 함께 급제하여 유순정은 함경도 평사(評事)가 되고, 권경유는 한림(翰林)이 되었다. 한림이 연석의 가기(歌妓) 중에서 옥부향을 발견하고 그에게, “네가 나를 아느냐.” 하니, 옥부향은 모른다고 하였다. 권경유는 곧 속여 말하기를, “네가 나주에 있을 때에 내가 아직 벼슬하지 못한 선비로서 나주에 들렸는데, 통판(通判) 모(某)가 너를 내 잠자리에 시중들게 하여 네 집에서 며칠 동안 묵고 떠나지 않았느냐. 네 어머니의 이름은 누구, 네 할머니의 이름은 또 누구, 형의 이름은 아무개, 동생의 이름은 또 아무개, 문 앞에 있는 나무는 어떻고, 꽃은 어떻고, 시내는 어떻고 돌은 또 어떻고…… 이렇게 아직도 모두 잊지 않고 있다. 또 네가 나와 작별할 때에 말하기를, ‘제가 다행히 서울 기생이 되고 낭군도 과거에 급제하게 되면 그때야말로 일생에 다시 한 몸이 될 때이지요,’ 한 것을 너는 잊었느냐.” 하니, 옥부향은 이상히 여겨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탄식하기를, “한림의 말씀이 옳습니다. 모습이 그때에 보던 바와는 매우 다르기는 하오나, 꼭 그런 일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하오나 저는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고 장서방, 이서방 사이를 옮아 다니느라고 그대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며, 오래도록 흐느꼈다. 이날 밤 평생의 약속이 이루어졌는데, 선비들 사이에 전하는 말이 모두들 기이한 일이라고 하였다.
○ 성화(成化)ㆍ홍치(弘治) 연간에 한씨(韓氏) 성을 가진 한 서생이 영안(永安)의 도산사(道山寺)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남빛 옷을 입은 한 늙은이가 마을로 쌀을 구걸하러 다니다가 서생을 만나 말하기를, “선비는 무슨 책을 애써 읽고 있소. 나는 평생을 걸식으로 만족하는 사람이오.” 하고는 절구 한 수를 썼는데,
하염없이 사창에 기대 있으니 봄날이 더디고 / 懶倚紗窓春日遲
홍안은 속절없이 늙어 꽃 지는 시절이로다 / 紅顔空老落花時
세상 만사가 모두 이와 같은데 / 世間萬事皆如此
피리 불며 노래 부른들 그 누가 알리 / 叩角謳歌誰得知
하였다. 동국 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좁아서 재주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영달할 수 있는데, 어찌 버려지는 인재가 있다는 탄식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지금 내가 들은 것이 이와 같으니, 내가 아직 듣지 못한 이 늙은이와 같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전야에 묻혀 있으며, 몇 사람이나 시장에서 썩고 있을까. 한씨 서생은 학문이 있고 논의가 독실한 군자로 망령된 말을 하지 않을 자이다. 나를 위하여 이를 말한다.홍안은 속절없이 늙어 꽃 지는 시절이로다 / 紅顔空老落花時
세상 만사가 모두 이와 같은데 / 世間萬事皆如此
피리 불며 노래 부른들 그 누가 알리 / 叩角謳歌誰得知
○ 내가 관서(關西) 상원(祥源) 고을에 나그네로 머무르고 있었을 때, 침실 병풍에 삼소도(三笑圖)라는 제목의 시가 적혀 있었는데,
하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놀라고 또 기뻐했더니, 그곳 군수가 말하기를, “손님이 놀라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관서 2백 일 동안의 여행에서 처음으로 이런 시를 보았는데, 어찌 놀라지 않겠소. 또한 유생(儒生)이 이런 글귀를 보니 백금(百金)을 얻은 것보다도 나은데 어찌 기뻐 날뛰지 않겠소.” 하였다. 곧 그 시를 번안(飜案)하여 한 수 짓기를,
소년이 대년을 모르고 / 小年昧大年
소지가 대지를 모르는구나 / 小知迷大知
시를 쓴자 또한 조대(서생 또는 청빈한 선비를 가리키는 말)이니 / 題詩亦措大
어찌 도연명과 육수정의 어리석음을 알랴 / 安知陶陸癡
하였다. 이에 군수에게 말하기를, “삼소도의 작자는 반드시 나의 친구일 것이오.” 하고, 서울로 올라와 널리 탐문했더니 그것은 역시 중균(中鈞)의 솜씨였다.소지가 대지를 모르는구나 / 小知迷大知
시를 쓴자 또한 조대(서생 또는 청빈한 선비를 가리키는 말)이니 / 題詩亦措大
어찌 도연명과 육수정의 어리석음을 알랴 / 安知陶陸癡
○ 사암(思菴) 유숙(柳淑)의 벽란도(碧瀾渡) 시에 이르기를,
오랜 강호의 기약을 저버리고 / 久負江湖約
홍진에 묻혀 20년이로다 / 紅塵二十年
백구는 반겨서 웃고자 하여 / 白鷗如欲笑
짐짓 누 앞에 다가오는 듯하도다 / 故故近樓前
하였다. 사암은 결국 속세에서의 화[厄]를 면치 못하고, 그 충성과 청렴한 큰 절개가 끝내 대의명분 아래 밝혀지지 못한 채 간사한 도적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말미암아 남모르게 피살되었으니, 아, 슬프도다.홍진에 묻혀 20년이로다 / 紅塵二十年
백구는 반겨서 웃고자 하여 / 白鷗如欲笑
짐짓 누 앞에 다가오는 듯하도다 / 故故近樓前
내 나이 36세에 벽란도를 지나가면서 한 수 짓기를,
얼마 안 되는 벼슬길이요 / 未幾靑雲路
강호에서 40년이로다 / 江湖四十年
사암은 도적의 손에 없어지고 / 思菴終賊手
나는 지금 백구 앞에 서 있도다 / 余在白鷗前
하였는데, 이것은 사암의 시를 번안(飜案)한 것이다.강호에서 40년이로다 / 江湖四十年
사암은 도적의 손에 없어지고 / 思菴終賊手
나는 지금 백구 앞에 서 있도다 / 余在白鷗前
구중인(丘仲仁)의 호는 호은(壺隱)인데, 신선을 좋아하면서 명리를 탐내다가 고죽(孤竹 황해도 해주의 옛 이름)에서 객사하였다. 내가 잠깐 관서지방에 놀러가 성천(成川)의 비류강(沸流江)에 이르렀을 때에, 그의 부고를 듣고 곧 시 4수를 지어 그를 애도하였는데, 첫 수에 이르기를,
호은 선생은 나의 옛 친구 / 壺隱先生我故人
이름 떨친 마흔 한 살 봄에 / 聲名四十一年春
글 재주와 빛나는 인품 사라지고 / 鉛埋永沒胎光斃
묘목만 쓸쓸히 동빈을 가렸도다 / 墓木蕭蕭掩洞賓
하였고, 둘째 수는,이름 떨친 마흔 한 살 봄에 / 聲名四十一年春
글 재주와 빛나는 인품 사라지고 / 鉛埋永沒胎光斃
묘목만 쓸쓸히 동빈을 가렸도다 / 墓木蕭蕭掩洞賓
단약을 배우는 데 이미 고삐 잡는 것을 깨달았고 / 治丹已領執御轡
천태에 약 캐러 갈 기약도 아득하여라 / 採藥天台暗有期
과업에 애썼으나 이제 저승에 갔으니 / 科業剝人今鬼錄
아, 임의 큰 뜻 헛되이 웃음거리 되었도다 / 可憐鴻寶世空嗤
하였다. 자못 호사가들의 웃음거리로 전할 것이다.천태에 약 캐러 갈 기약도 아득하여라 / 採藥天台暗有期
과업에 애썼으나 이제 저승에 갔으니 / 科業剝人今鬼錄
아, 임의 큰 뜻 헛되이 웃음거리 되었도다 / 可憐鴻寶世空嗤
○ 선조(先祖) 구정(龜亭)은 술을 좋아하고 큰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말을 실수하는 일은 전부터 없었다. 손님과 바둑 두기를 좋아하여 종일토록 쉬지 않았는데, 손님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살아있는 사람은 기운이 있으므로 반드시 말을 하게 되고, 말을 하게 되면 말이 조정 일에 미치지 않기가 어렵다. 종일 바둑을 두고 있으면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말을 피할 수가 있다.” 하여, 사람들이 그의 몸과 말을 삼가는 데 탄복하였다.
○ 선조 구정이 마음가짐을 크게 삼갔지만, 외형(外形)은 검속하지 않았다. 하루는 나라에서 금하는 옷을 입고 조회에 나가려 하니, 어떤 이가 집에서 간하기를 불러, “대신도 금복(禁服)을 입으십니까.” 하니, 구정은 깜짝 놀라 계집종을 불러, “내가 조회할 때에는 어떤 옷을 입었더냐.” 하므로, 사람들이 그의 아량이 넓어 의복을 가리지 않고 입는 데 탄복하였다. 윤경회(尹慶會)는 장흥(長興)에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5ㆍ6년 동안에 두 아들을 낳았다. 내가 그 집에 객(客)으로 머물고 있었는데, 하루는 경회가 그의 첩에게 말하기를, “내가 소변보러 가려는데 중문에 문짝이 있느냐 없느냐.” 하였다. 그래서 내가 경회의 인품을 구정과 견주어 보았다.
○ 유시탄(兪豕坦)은 면천(沔川) 사람이다. 책을 끼고 대궐에 들어가서 그가 배운 많은 말들을 늘어놓았는데, 모두가 조정의 허물을 적절하게 맞히었으므로, 선비들이 모여 웃어대었다. 유시탄은 그의 정자를 청풍(淸風)이라 이름하였는데, 그의 친구 박(朴) 아무개가 자기 서재의 이름을 명월(明月)이라 하였다. 그래서 고관들 사이에 우스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유청풍(兪淸風), 박명월(朴明月)을 들추면서 빈정거렸다. 두 사람은 때를 만나지 못해 과거도 못했고, 또 벼슬할 마음을 가지지도 않았었다.
○ 홍균(洪鈞)은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젊어서 무사로 내금위(內禁衛)에 소속되어 있었다. 경태(景泰)ㆍ천순(天順) 무렵에 미치광이가 되어 거리로 다니며 구걸하였는데,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쌀과 술 한 병을 얻어 자루에 넣어서 차면 돌아오고, 차지 않으면 반드시 거리의 부녀에게서 억지로 뺏아서라도 받아 가지고 오되 한 줌에 지나지 않았다. 한 술집을 정해 두고 매일 한 번은 꼭 갔다가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10여 년을 이렇게 지내어 단갈(短褐 굵은 베로 짧게 만든 옷으로 천한 사람이 입는다)이 목덜미를 가리지 못하였는데. 사람들이 단정하지 못한 사람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홍균을 말하였으나, 홍균의 하는 짓에 대한 나의 생각은 아주 다르다. 곧 그는 양생(養生)을 위하여 미치광이 짓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은 글을 읽을 때, 글뜻에 구애되지 않고 대체의 요지를 보고, 중심이 되는 큰 뜻만을 음미할 뿐이었다. 내가 정부원(征夫怨) 10수를 지어 원유산시(元遺山詩)에 화답하였는데, 그 한 편에 이르기를,
풀은 서리에 모두 시들고 달은 하늘에 밝은데 / 百草凋霜月滿空
군마는 해마다 동서를 마구 달리네 / 年年鞍馬任西東
군령도 엄한 들판에 즐비한 막사의 밤이면 / 令嚴萬幕平沙夜
대오가 고각 중에 서로들 손짓하네 / 部伍相招鼓角中
하였더니, 동봉이 보고 실소하면서, “선비, 틀렸소. 군령이 엄한 때에 어떻게 서로 손짓을 할 수 있겠소.” 하고, 《시경》의 소아(小雅) 편을 가지고 나에게 보였는데 그 시에,군마는 해마다 동서를 마구 달리네 / 年年鞍馬任西東
군령도 엄한 들판에 즐비한 막사의 밤이면 / 令嚴萬幕平沙夜
대오가 고각 중에 서로들 손짓하네 / 部伍相招鼓角中
이 사람이 가니 / 之子于征
소문은 있으나 소리는 없도다 / 有聞無聲
진실로 군자여 / 允矣君子
진실로 대성하도다 / 展也大成
한 것이었다. 내가 그 말에 깊이 탄복하고, 돌아와 홍여경(洪餘慶)에게 말했더니 홍여경은 감탄하기를, “동봉의 독서가 가장 좋아, 가장 좋아.” 하였다.소문은 있으나 소리는 없도다 / 有聞無聲
진실로 군자여 / 允矣君子
진실로 대성하도다 / 展也大成
○ 경진년 북정(北征 세조 때에 북쪽의 여진족을 정벌한 일) 때에 문충공 신숙주가 상장(上將)이 되었는데, 하루는 막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 때에 문충공은 군중(軍中)에 영을 내리기를, “여러 사람 가운데 시로써 오늘의 뜻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뽑아서 상객으로 대접할 것이다.” 하였더니, 별시위(別侍衛) 박위겸(朴撝謙)이 곧 읊기를,
10만 정병이 수루를 에워싸고 / 十萬貔貅擁戍樓
달 밝은 변경의 밤에 여우 갖옷이 싸늘하구나 / 夜深邊月冷狐裘
한 마디 긴 피리 소리 어디에서 들려오는고 / 一聲長笛來何處
정부의 시름을 불어서다하는구나 / 吹盡征夫万里愁
하였다. 문충공은 기뻐하여 그를 뽑아서 상객으로 삼았다. 박위겸은 이로 말미암아 이름난 시인이 되었다.달 밝은 변경의 밤에 여우 갖옷이 싸늘하구나 / 夜深邊月冷狐裘
한 마디 긴 피리 소리 어디에서 들려오는고 / 一聲長笛來何處
정부의 시름을 불어서다하는구나 / 吹盡征夫万里愁
○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한강 남쪽에 정자를 짓고 압구(狎鷗)라 이름하였다. 임금을 세운 공로를 한충헌(韓忠獻)에게 비기고, 공을 세웠으나 벼슬에 욕심이 없어 사양하고 물러난다는 말을 들으려고, 장차 사퇴하고 강호에서 늙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실은 벼슬과 국록(國祿)에 미련이 있어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성종이 압구정에 시를 지어 보내니, 조정의 문사(文士)들이 서로 다투어 화운(和韻)한 것이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서 판사(判事) 최경지(崔敬止)의 시가 제일이었다. 그 시에,
임금의 은혜는 은근하며 대접 또한 융숭하니 / 三接殷勤寵渥優
정자는 있어도 놀지 못했도다 / 有亭無計得來遊
가슴 속 서린 기심이 고요하면 / 胸中政使機心靜
벼슬 바다 위에서도 갈매기와 친하리라 / 宦海前頭可狎鷗
하였더니, 한명회가 그것을 싫어하여 현판에 넣어주지 않았다. 뒤에 포의(布衣) 이윤종(李尹宗)이 그 아래로 지나가다가 정자 위에 올라가 쉬면서 장편 대작(長篇大作)을 지었는데, 그 마지막 귀에,정자는 있어도 놀지 못했도다 / 有亭無計得來遊
가슴 속 서린 기심이 고요하면 / 胸中政使機心靜
벼슬 바다 위에서도 갈매기와 친하리라 / 宦海前頭可狎鷗
하였다. 이윤종의 시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최경지의 함축성 있고 부드러우며, 점잖은 시보다 못하다. 내가, “기심(機心)을 잊고 갈매기와 친한다.” 함을 보고 반신반의하였다. 그런데 갑진년에 행주(幸州)에서 농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고기잡기를 할 때 갈밭 사이 썰물진 곳에서 그물질을 하다가 해를 쳐다보니 훤하게 밝았다. 내 마음속으로, “사람이 사는 하늘과 땅 사이에는 사람을 용납할 수 있구나. 이 어찌 속일 수 있으랴.”고, 생각하였다. 내 곁에서 물새들이 매우 의좋게 지저귀며 노는 것을 보고 나는 문득 기심(機心)을 잊었다. 갈매기는 날아 가고 내가 기심을 잊은 것을 믿는 까닭은 곧 기심을 위하기 때문인가. 뒤에 이런 생각이 빌미가 되어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훤하게 비치고 / 日日昭昭於頭上
귀신은 좌우에서 굽어 살핀다 / 鬼神監臨於左右
의 14자를 얻어, 최경지의 서재 명[齋銘] 제 3연으로 삼았다.귀신은 좌우에서 굽어 살핀다 / 鬼神監臨於左右
○ 국오(菊塢 강희맹(姜希孟)의 호) 강경순(姜景醇 강희맹의 자)이 엮은 《진산세고(晉山世稿)》는 참판 김수녕(金壽寧)이 고치고 다듬은 것인데,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여 부조의 시명(詩名)을 후세에 선양(宣揚)했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으로써 효도를 하였다고 하나 나는 그것은 효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사(上舍) 신영희(辛永禧)의 집안에 조부 문희공(文禧公)의 시집이 있었으나, 친구들이 묻기를, “자네 집안의 문집이 간행할 만한가.” 하니 신영희는, “조부께서 비록 문명(文名)이 세상에 으뜸가기는 했으나, 집안 문집에 실은 것으로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소. 전일 한 문하생의 만시(挽詩)에,
서른 둘에 세상을 떠나니 / 三十二而卒
불행함이 안회와 같도다 / 不幸同顔回
한 것이 있는데 이 시 이외에 시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어찌 간행할 수 있겠소.” 하여, 남들은 그것이 불효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효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부가 행한 일을 그대로 말하였으니, 그것이 곧 효도이다. 설사 말을 꾸며 부조(父祖)를 기린들 부조의 넋이 어찌 저승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겠는가.불행함이 안회와 같도다 / 不幸同顔回
○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은 젊을 때부터 재주가 있었다. 그는 만년에 양주(楊州)의 누원(樓院)에 올라가 시 3편을 지었는데, 그 중 한 편에 이르기를,
흔한 산 어디엔들 오두막 못 지으랴 / 有山何處不爲廬
청산과 마주앉아 한 숨 길게 뿜어보네 / 坐對靑山試一噓
벼슬살이 10년에 다 늙었으니 / 簪笏十年成老大
백발로 귀거래를 짓게 하지 말라 / 莫敎霜鬢賦歸歟
하였다. 영천군(永川君) 정(定)의 자는 안지(安止)인데, 이 시를 보고 절하고, 또 비평하기를, “이 시는 몹시 핍진(逼眞)하니, 서(徐)가 아니면 이(李)의 솜씨일 것이다.”라고 써두었다. 당시 서거정(徐居正)과 이승소(李承召)는 시인으로서 제1인자였기 때문에 정(定)이 탄복한 것이다. 그후 다시 누각 아래를 지나가면서 전번에 써놓은 글을 읽으니, 그 아래에 또 써놓은 글이 있었는데, “이 시는 강산의 아취가 있고, 한 점의 속됨도 없으니, 이것은 반드시 세속에 얽매인 속된 선비가 지은 것이 아닐 것이다. 또 천지가 크고 강산이 깊은데 어찌 인재가 없어 꼭 서씨나 이씨를 들추랴. 이 어찌 인재를 하찮게 생각하고 사람을 심히 멸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정(定)이 이 글을 보고 크게 뉘우쳐 앞서 써놓았던 비평문을 지워버렸다. 지금의 《진산세고》에는 3편이 모두 실리지 않았다. 강경순의 문집이 많지 않음이 이와 같다.청산과 마주앉아 한 숨 길게 뿜어보네 / 坐對靑山試一噓
벼슬살이 10년에 다 늙었으니 / 簪笏十年成老大
백발로 귀거래를 짓게 하지 말라 / 莫敎霜鬢賦歸歟
○ 정여창(鄭汝昌)의 자는 백욱(伯勗)인데, 주자(朱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말한, ‘하늘이 음양 오행으로써 만물을 화생(化生)하였다.’는 것만 취하고,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理)가 또한 부여하였다.’는 것은 취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어찌 후기(後氣)의 이(理)가 있겠는가.”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높이 평가했으나 흠이 없을 수 없다. 이른바 이(理)가 기(氣)에 앞서는 것은 이의 체(體)요, 이른바 기가 이에 앞서는 것은 이의 용(用)이다. 만약 사람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모두 모아서 성(性)이라 하고, 인의예지의 끝에서 갈라져 나온 것을 성(性)이라 하지 않으면 옳겠는가. 안시숙(安時叔 시숙은 안우(安遇)의 자)이 묵재선생(黙齋先生) 백연(伯淵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자)에게 묻기를, “어떤 이는 백이(伯夷)를 성자(聖者)라 하고 어떤 이는 생각이 좁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습니까.” 하니, 백연은, “임금과 신하가 자리를 바꿀 때에 대의(大義)를 아는 것은 성자요, 하늘이 버리면 임금이 필부(匹夫)가 되는 이치를 모르면 그것은 생각이 좁은 탓이요, 죽음과 삶이 하나임을 의심하지 않고 대의(大義)를 알아서 편안히 처하면 인(仁)이다.” 하였다.
○ 안시숙은 또, “기(氣)에 이(理)가 있음이 마치 계란에 노른자가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였더니, 백연은, “그렇지 않다. 계란의 노른자는 본래 이(理)ㆍ기(氣)를 가지고 있고, 흰자도 이ㆍ기를 가지고 있다.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요, 보이지 않는 것이 이이다. 나누어지는 것은 이ㆍ기가 아니다.” 하였다.
○ 대유(大猷)는 《소학(小學)》의 가르침으로써 몸을 다스리고, 옛 성인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후진을 불러 정성껏 쇄소(灑掃)의 예(禮)를 집행하여 육례(六禮)를 닦는 학자들이 그의 앞뒤에 가득하였으나, 그를 비방하는 논의가 비등하였다. 백욱(伯勗)이 권하여 말렸으나 대유는 듣지 않고 남에게 말하기를, “중 육행(陸行)이 불법을 가르치는데, 업(業)을 닦는 제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 벗이 그만두라고 말리면서, ‘화를 입을 것이 두렵다.’ 하니, 육행은, ‘먼저 안 사람이 뒤늦게 안 사람을 깨우치고, 먼저 도를 깨달은 사람이 뒤늦게 깨달은 사람을 깨우치는 법이니,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알릴 뿐이다. 화복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내가 어찌 관여하겠는가.’ 하였다고 하니, 육행은 중이라서 취할 것은 없으나, 그의 말은 지극히 공명하다.” 하였다.
○ 양녕대군(讓寧大君) 제(褆)가 주색에 빠져 세자(世子)의 지위를 잃기는 했으나, 천성이 너그럽고 활달하여 평생토록 자기 몸을 잘 보양하였고, 주색과 사냥 이외에는 한 가지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의 아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가 불교를 좋아하여, 불사(佛事)를 하고 양녕을 청하였더니, 양녕이 사냥꾼과 활쏘는 사람을 거느리고, 사냥개와 사냥하는 도구를 가지고 가서, 몰래 토끼와 여우를 잡게 하고, 자기는 가서 불사에 참례하였다. 조금 뒤에 사냥꾼은 짐승을 바치고, 음식 만드는 사람은 구운 고기를 가져오고, 모시는 사람은 술을 올렸다. 효령이 한창 부처에게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는데 양녕은 고기를 씹고 술을 마시면서 태연자약하니, 효령이 정색하고 청하기를, “형님, 오늘은 술을 그만 두시지요.” 하니, 양녕은 웃으면서, “나는 평생에 하늘이 복을 후하게 주시므로 고생을 아니한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 되고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 된다.” 하였으니, 부처란 효령을 가리킨 것인데, 선비들의 공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 천지의 정기(正氣)를 얻은 것이 사람이요, 한 사람의 몸을 맡아 다스리는 것이 마음이며, 사람의 마음이 밖으로 펴나온 것이 말이요, 사람의 말이 가장 알차고 맑은 것이 시(詩)이다. 마음이 바르면 시가 바르고, 마음이 간사하면 시도 간사해진다. 상(商)ㆍ주(周)의 송(頌)과 상간(桑間)의 풍(風)이 그것을 말한다. 태고(太古) 적에 사악(四岳)의 기운이 완전하고, 인물이 성하고 완전하여 나무하면서 노래 부른 것이 〈표매(標梅)〉와 〈격양(擊壤)〉의 노래가 되었고, 규방을 지키며 읊은 것이 〈한광(漢廣)〉과 〈표매〉의 시가 되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시에 공을 들이지 않아도 시는 저절로 정교하고 완전했는데, 그뒤부터 인심이 그릇되고 풍기(風氣)가 온전하지 못해서 풍(風)이 변하여 소(騷)가 되었는데, 그것은 원(怨)에 치우치고, 소가 변하여 오언시가 되었는데 그것은 지리하고, 오언시가 변하여 된 율시(律詩)는 구애됨이 많다. 동한(東漢)에서 위(魏)ㆍ진(晉)ㆍ당(唐)으로 내려오면서 점점 옛날보다 못해졌다.
이태백과 유종원(柳宗元)을 당 나라의 시백(詩伯)으로 치지만, 이태백은 사언시를 생각하고, 유종원은 평회아(平淮雅)를 생각한 것이 오히려 세속을 면하지 못하고 옛날의 아녀자와 비교하여 별로 나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학문과 덕행이 높은 선비들이 시에 많은 공을 들였다. 두시(杜詩)의,
만권 서적을 독파하니 / 讀書破萬卷
글을 쓰매 신이 돕는 듯하다 / 下筆如有神
한 것 같은 것은 구양수(歐陽修)도 삼상(三上)에서 그 시상(詩想)을 얻었고, 당 나라 말기의 선비들은 공을 2ㆍ30년이나 쌓아 비로소 풍아(風雅)와 비슷한 것이 간혹 생겼는데,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정백욱은 주정장주(周程張朱)의 견해가 있고 오경에 정통하면서도 홀로 시를 전공하는 선비를 뽑지 않으면서, “시란 정성(情性)에서 피어나는 것이니, 힘써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냐.” 하였다. 그 뜻은, 비록 시는 못 짓더라도 덕을 갖추고 경서에 능통하면 그만이지, 허물될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지마는, 도대체 이런 생각은 썩은 선비의 소견과 다를 것이 없다.글을 쓰매 신이 돕는 듯하다 / 下筆如有神
옛 12율(律)ㆍ8음(音)ㆍ5성(聲) 같은 것은 마음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고 혈맥을 화창하게 하므로 성현들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알지는 못하는 것이므로 공자가 장홍(長弘)에게 배웠으니, 시가 사람에게 절실함이 또 음률(音律)과 같다.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맑게 하고, 사람을 허심탄회하게 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나쁜 마음을 가지지 않게 하고, 사람에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게 한다. 천지에 넘치는 삼라만상을 모두 파악하여 표현하면서도 옛 사람의 자연과 일체가 된 경지를 얻기가 힘드니, 그러한 시는, 반드시 힘써 생각하고 공을 쌓는 뒤에라야 그 만분의 일에라도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소자(邵子 소강절(邵康節))나 주자(周子 주염계(周濂溪))가 시를 좋아하였고, 주문공(朱文公)도 만년에 두시(杜詩)와 《후산집(后山集)》 읽기를 좋아하여 초(楚) 나라의 소(騷)를 주해하고, 혹은 중과 서로 형산(衡山)의 시를 5일 동안에 백여 편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읊었다. 백욱은 시를 이단시했는데 그렇다면 주자(周子)ㆍ소자가 이단이란 말인가. 회암(晦庵 주자)이 이단이란 말인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 김 선생이 말하기를, “시는 성정을 도야한다.” 했는데 나는 우리 스승의 말씀을 따른다.
[주D-001]남효온(南孝溫) : 단종 2년(1454)~성종 23년(1492).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또는 행우(杏雨),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다. 어려서 사육신의 충성을 보고,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각지를 유랑하다가 병사하였다. 김종직의 제자요, 전에 소릉(昭陵 문종의 비 권씨의 능) 복위를 상소한 일이 있다 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으나, 중종이 위에 오르자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고, 숙종 때에는 함안(咸安)에 서산서원(西山書院)을 세워 다른 생육신과 함께 배향되고, 다시 정종(正宗) 때에는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는 《추강집(秋江集)》ㆍ《추강냉화》ㆍ《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ㆍ《귀신론(鬼神論)》등이 있다.
[주D-002]자정(子挺) : 김시습 등의 친구 안응세(安應世)의 자.
[주D-003]성광(醒狂) 백연(伯淵) :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좌된 태종의 현손(玄孫)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의 호가 성광(醒狂)이며, 자가 백연(伯淵)이다.
[주D-004]미자(微子) : 은(殷) 나라의 충신으로 이름은 계우(啓紆)이며 왕의 서형(庶兄)이다. 기자(箕子)ㆍ비간(比干)과 함께 은 나라의 삼인(三仁)이라고 일컬어진다.
[주D-005]조계(曹溪)에는 황매 : 중국 불교의 선종(禪宗)의 5조(祖) 홍은대사(弘恩大師)는 황매산(黃梅山)에 있었고, 6조 혜능대사(惠能大師)는 조계산(曹溪山)에 있었다. 또 조계선종에 황매선사가 있었다.
[주D-006]성화(成化)ㆍ홍치(弘治) : 성화는 명 나라 헌종(憲宗) 때의 연호(1465~1487)이고, 홍치는 명 나라 효종(孝宗) 때의 연호(1488~1505)이다.
[주D-007]호계(虎溪) : 중국 진(晉) 나라의 혜원법사(慧遠法師)는 여산(盧山)의 동림사(東林寺)에 있으면서, 호계(虎溪) 동림사 앞 골짜기를 한 번도 건넌 일이 없었는데, 어느날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 두 사람의 전송을 나가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를 건너 범의 울음소리를 듣고 비로소 안거금족(安居禁足)의 맹세를 깨뜨렸음을 깨닫고, 세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주D-008]소년(小年)이 …… 모르고 : 《장자(莊子)》에, “소년은 대년을 모른다[小年不知大年].” “소년은 대년에 미치지 못한다[小年不及大年].”는 구절이 있다. 소년은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사내아이 또는 생명이 짧음을 뜻하고, 대년은 그 반대의 뜻이다.
[주D-009]벽란도(碧瀾渡) : 고려 때 예성강(禮成江) 하류에 있던 중요한 나루터로서, 개성으로부터 황해도의 연안(延安) 해주(海州) 방면으로 통하는 큰 길은 이곳을 경유했다. 원래는 국도 개성의 문호를 이룬 예성강항(禮成江港) 안산(岸山)에 사신을 영송(迎送)하기 위하여 세운 벽란정(碧瀾亭)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 위치는 예성강항과 벽란도와는 약간 그 지점을 달리하고 있는 것 같다.
[주D-010]경태(景泰)ㆍ천순(天順) : 경태(景泰)는 명 나라 태종(太宗) 때의 연호로, 세종 32년(1450)~세조 2년(1456)까지이고, 천순(天順)은 명 나라 영종(英宗) 때의 연호로, 세조 3년(1457)~세조 10년(1464)까지이다.
[주D-011]군령(軍令)도 …… 손짓하네 : 두보(杜甫)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모래 벌판에 즐비한 막사에서, 부오가 제각기 보며 손짓하네 / 平沙列萬幕 部伍各見招”
[주D-012]한충헌(韓忠獻) : 송(宋) 나라 정승 한기(韓琦)의 시호가 충헌(忠獻)이다. 한기는 정책(定策 새 임금을 들여 세움)한 공이 있는데, 한명회가 세조와 성종을 들여 세운 공을 한충헌과 비긴다는 것이다.
[주D-013]참으로 …… 원숭이로다 : 목후이관(沐猴而冠)이라는 말에서 인용한 것인데, 옷차림은 훌륭하나 마음이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이다. 옛날 초(楚) 나라의 항우(項羽)가 진(秦) 나라를 무찌르고 유방(劉邦)을 추방하고 부귀를 마음껏 누리게 된 자기는 금의환향(錦衣還鄕)해야 한다고 말하였을 때에, 한생(韓生)이 도시 그런 의관을 할 사람됨이 못 된다고 비꼬아 말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주D-014]사악(四岳) : 중국의 태산(泰山)ㆍ화산(華山)ㆍ형산(衡山)ㆍ항산(恒山)의 사악(四嶽)을 말한다.
[주D-015]삼상(三上) : 문장을 구상하는 데 좋은 기회가 되는 세 곳, 곧 마상(馬上)ㆍ침상(枕上)ㆍ측상(廁上 뒷간)을 말한다. 구양수(歐陽脩)의 〈귀전록(歸田錄)〉에서 나온 말이다.
[주D-016]주정장주(周程張朱) : 성리학의 원조인 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와 정이(程頤)ㆍ장재(張載)ㆍ주희(朱熹) 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성리학을 정주학(程朱學)ㆍ도학(道學)ㆍ주정장주(周程張朱)의 학이라고도 부른다.
[주D-002]자정(子挺) : 김시습 등의 친구 안응세(安應世)의 자.
[주D-003]성광(醒狂) 백연(伯淵) :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좌된 태종의 현손(玄孫)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의 호가 성광(醒狂)이며, 자가 백연(伯淵)이다.
[주D-004]미자(微子) : 은(殷) 나라의 충신으로 이름은 계우(啓紆)이며 왕의 서형(庶兄)이다. 기자(箕子)ㆍ비간(比干)과 함께 은 나라의 삼인(三仁)이라고 일컬어진다.
[주D-005]조계(曹溪)에는 황매 : 중국 불교의 선종(禪宗)의 5조(祖) 홍은대사(弘恩大師)는 황매산(黃梅山)에 있었고, 6조 혜능대사(惠能大師)는 조계산(曹溪山)에 있었다. 또 조계선종에 황매선사가 있었다.
[주D-006]성화(成化)ㆍ홍치(弘治) : 성화는 명 나라 헌종(憲宗) 때의 연호(1465~1487)이고, 홍치는 명 나라 효종(孝宗) 때의 연호(1488~1505)이다.
[주D-007]호계(虎溪) : 중국 진(晉) 나라의 혜원법사(慧遠法師)는 여산(盧山)의 동림사(東林寺)에 있으면서, 호계(虎溪) 동림사 앞 골짜기를 한 번도 건넌 일이 없었는데, 어느날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 두 사람의 전송을 나가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를 건너 범의 울음소리를 듣고 비로소 안거금족(安居禁足)의 맹세를 깨뜨렸음을 깨닫고, 세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주D-008]소년(小年)이 …… 모르고 : 《장자(莊子)》에, “소년은 대년을 모른다[小年不知大年].” “소년은 대년에 미치지 못한다[小年不及大年].”는 구절이 있다. 소년은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사내아이 또는 생명이 짧음을 뜻하고, 대년은 그 반대의 뜻이다.
[주D-009]벽란도(碧瀾渡) : 고려 때 예성강(禮成江) 하류에 있던 중요한 나루터로서, 개성으로부터 황해도의 연안(延安) 해주(海州) 방면으로 통하는 큰 길은 이곳을 경유했다. 원래는 국도 개성의 문호를 이룬 예성강항(禮成江港) 안산(岸山)에 사신을 영송(迎送)하기 위하여 세운 벽란정(碧瀾亭)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 위치는 예성강항과 벽란도와는 약간 그 지점을 달리하고 있는 것 같다.
[주D-010]경태(景泰)ㆍ천순(天順) : 경태(景泰)는 명 나라 태종(太宗) 때의 연호로, 세종 32년(1450)~세조 2년(1456)까지이고, 천순(天順)은 명 나라 영종(英宗) 때의 연호로, 세조 3년(1457)~세조 10년(1464)까지이다.
[주D-011]군령(軍令)도 …… 손짓하네 : 두보(杜甫)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모래 벌판에 즐비한 막사에서, 부오가 제각기 보며 손짓하네 / 平沙列萬幕 部伍各見招”
[주D-012]한충헌(韓忠獻) : 송(宋) 나라 정승 한기(韓琦)의 시호가 충헌(忠獻)이다. 한기는 정책(定策 새 임금을 들여 세움)한 공이 있는데, 한명회가 세조와 성종을 들여 세운 공을 한충헌과 비긴다는 것이다.
[주D-013]참으로 …… 원숭이로다 : 목후이관(沐猴而冠)이라는 말에서 인용한 것인데, 옷차림은 훌륭하나 마음이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이다. 옛날 초(楚) 나라의 항우(項羽)가 진(秦) 나라를 무찌르고 유방(劉邦)을 추방하고 부귀를 마음껏 누리게 된 자기는 금의환향(錦衣還鄕)해야 한다고 말하였을 때에, 한생(韓生)이 도시 그런 의관을 할 사람됨이 못 된다고 비꼬아 말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주D-014]사악(四岳) : 중국의 태산(泰山)ㆍ화산(華山)ㆍ형산(衡山)ㆍ항산(恒山)의 사악(四嶽)을 말한다.
[주D-015]삼상(三上) : 문장을 구상하는 데 좋은 기회가 되는 세 곳, 곧 마상(馬上)ㆍ침상(枕上)ㆍ측상(廁上 뒷간)을 말한다. 구양수(歐陽脩)의 〈귀전록(歸田錄)〉에서 나온 말이다.
[주D-016]주정장주(周程張朱) : 성리학의 원조인 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와 정이(程頤)ㆍ장재(張載)ㆍ주희(朱熹) 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성리학을 정주학(程朱學)ㆍ도학(道學)ㆍ주정장주(周程張朱)의 학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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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舊本) 발문(跋文) |
공은 성이 남씨(南氏), 휘가 효온(孝溫), 자가 백공(伯恭), 자호가 추강거사(秋江居士), 본관이 의령(宜寧)으로, 휘 전(恮)의 아들이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 이씨(李氏)를 섬겨 효자로 소문났다. 사람됨이 충담(沖澹)하고 홍의(弘毅)하며 소탈하고 전아(典雅)하며, 가슴속이 시원스러워서 한 점의 속기(俗氣)도 없었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 수업하였다. 점필재공이 감히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吾秋江〕’이라 하였으니, 존중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시습(金時習), 안응세(安應世) 등의 제현(諸賢)과 더불어 형제처럼 서로 추중(推重)하였다.
성종조에 소를 올려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드디어 이 세상에 뜻을 끊고 유랑함을 일삼아 명승지로 일컬어진 곳은 발걸음이 거의 다 미쳤다.
정통(正統) 갑술년(1454, 단종2)에 태어나서 성화(成化) 임자년(1492, 성종23)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39세이다.
연산조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소릉의 복위를 청했던 상소를 추후에 처벌하여 뜻밖에 부관참시의 재앙을 만나게 되었다. 하나 남은 아들 휘 충세(忠世) 또한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니, 이분이 곧 나 유홍(兪泓)의 외조부이다. 집안사람들이 공의 유고(遺稿)가 다시 재앙의 빌미가 될까 염려하여 모두 불 속에 던져 넣어 현존하는 것이 거의 없으니, 애석하도다.
오호라! 사마천(司馬遷)은 옛날의 훌륭한 사관(史官)이었으나 그 글이 생질 양운(楊惲)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하에 선포되었다. 나 또한 외람되이 외손의 처지인지라, 오직 양운에게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산일(散逸)된 나머지를 수습해 온 지가 몇 해 되었다. 참의(參議) 임보신(任輔臣)이 앞에서 돕고 대사성(大司成) 이충작(李忠綽)이 뒤에서 계속하였고, 사문(斯文) 신호(申濩)와 학관(學官) 권응인(權應仁)이 또 이어서 교정하였다.
시문 총 몇 편으로는 비록 그 유문(遺文)을 다 전할 수 없지만, 또한 한 점의 고기로써 한 솥의 국 맛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니, 나의 오랜 소원이 이에 조금 이루어진 셈이다. 연원(淵源) 있는 학문과 절의에 찬 풍모에 대해서는 국사(國史)에 기록되어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덧붙일 수 있겠는가.
만력(萬曆) 기원 5년 정축년(1577, 선조10) 12월 하한(下澣)에 외증손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 기계(杞溪) 유홍은 삼가 발문을 적는다.
[주D-001]정통(正統)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이다. 경태(景泰)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주D-002]성화(成化) :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홍치(弘治)의 오기인 듯하다.
[주D-003]만력(萬曆) :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이다.
[주D-002]성화(成化) :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홍치(弘治)의 오기인 듯하다.
[주D-003]만력(萬曆) :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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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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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彭年字仁叟。世宗朝登第。宣德壬子。生員。甲寅親試。正統丁卯重試。與成三問等嘗任集賢殿。見重於上。乙亥。光廟受禪。彭年知王事終不濟。臨慶會樓池欲自隕。三問固止之曰。方今神器雖移。而尙有上王。我輩不死。猶且後圖。圖而不成。死亦未晩。今日之死。無益於國家。彭年從之。無何。出爲忠淸道觀察使。啓事於朝。不稱臣。但書曰某官某。朝廷不之知也。翌年。入爲刑曹參判。與三問及三問父勝,兪應孚,河緯地,李塏,柳誠源,金礩,權自愼等。謀復上王。時天使來。光廟欲同上王請宴於昌德宮。彭年等謀曰。以勝及兪應孚爲別雲劍。當宴擧事。閉城門除羽翼。復立上王。謀已定。適於其日。上命罷雲劍。世子亦以疾不從。應孚猶欲擧事。彭年,三問固止之曰。今世子在本宮。公之雲劍不用。天也。若擧事於此。而倘世子聞變。從景福宮動兵。則成敗未可知。不如俟他日。應孚曰。事貴神速。若遲恐泄。今世子雖不來。羽翼皆在此。今日若盡誅之。衛上王號令。千載一時。不可失也。彭年,三問固不可曰。非萬全計也。遂止。金礩知事不成。馳與其妻父鄭昌孫謀曰。今世子不隨駕。特除雲劍。天也。不如先發告。僥倖得生。昌孫卽與礩馳。詣闕上變告曰。臣實不知。礩獨與焉。礩罪當萬死。上特赦礩,昌孫。收彭年等。辭服。上愛其才。密諭曰。汝能歸我。而諱初謀則得生。彭年笑而不答。稱上。必曰進賜。上令齪其口曰。汝旣稱臣於我。今雖不稱。無益也。對曰。我是上王臣。豈爲進賜臣也。曾爲忠淸監司一年。凡於狀牘。未嘗稱臣。使人校其啓目。果無一臣字。弟大年子憲皆死。妻爲官婢。守節終身。憲中生員。亦正直。臨刑。顧謂人曰。毋以我爲亂臣。金命重時爲禁府郞。私謂彭年曰。公何以致有此禍。嘆曰。中心不平。不得不爾。彭年性沈潛寡默。以小學律身。終日端坐。衣冠不解。令人起敬。文章沖澹。筆法慕鍾,王云。光廟爲領議政。宴於府中。彭年有詩曰。廟堂深處動哀絲。萬事如今總不知。柳綠東風吹細細。花明春日正遲遲。先王大業抽金櫃。聖主鴻恩倒玉巵。不樂何爲長不樂。賡歌醉飽太平時。光廟愛賞之命繡板。懸諸府中壁上云。
成三問字謹甫。世宗朝登第。宣德乙卯。生員。戊午式年。丁卯重試。壯元。恒侍經幄。啓沃弘多。英廟晩年有宿疾。屢幸溫泉。常令三問及朴彭年,申叔舟,崔恒,李塏等。便服在駕前。備顧問。一時榮之。癸酉。光廟誅金宗瑞。竝賜集賢諸臣靖難功臣號。三問恥之。諸功臣輪設宴。三問獨不設。乙亥。光廟受禪。三問以禮房承旨。抱國璽慟哭。光廟方俯伏謙讓。擧首諦視之。明年丙子。與其父勝及朴彭年等。謀復上王。期以詔使請宴日擧事。會議於集賢殿。三問曰。申叔舟吾所善。然罪重不可不誅。皆曰然。使武士各主所殺。刑曹正郞尹鈴孫主申叔舟。會其日罷雲劍。謀中止。而鈴孫不之知。方叔舟就便房沐髮。鈴孫按劍而前。三問目止之。及事覺被收。光廟親鞫問叱之曰。若等何爲反我。三問抗聲曰。欲復故主耳。天下誰有不愛其君者乎。我之心。國人皆知之。何謂反耶。進賜平日。動引周公。周公亦有是否。三問之爲此者。天無二日。民無二王故也。光廟頓足曰。受禪之初。曷不沮之。而乃依我。今背我乎。三問曰。勢不能也。吾固知進不能禁。退有一死。然徒死無益。忍而至此者。欲圖後效耳。光廟曰。汝不食我祿乎。食祿而背。反覆人也。名爲復上王。而實欲自爲也。三問曰。上王在。進賜何以臣我哉。且不食進賜祿耳。如不信。籍我家而計之。光廟怒甚。令武士灼鐵穿其脚斷其肱。而顏色不變。徐曰。進賜之刑慘矣。時申叔舟在上前。三問叱之曰。吾與汝在集賢時。世宗日抱王孫。逍遙散步。謂諸儒臣曰。寡人千秋萬歲後。卿等須護此兒。言猶在耳。汝獨忘之耶。不意汝之惡至於此也。提學姜希顏辭連。栲訊不服。上問曰。希顏與謀乎。三問曰。實不知之。進賜盡殺名士。宜留此用之。希顏由是得免。三問車載出門。顏色自若。顧左右曰。若輩佐賢主致太平。三問歸見故主於地下。笑謂監刑官金命重曰。此何事耶。旣死。籍其家。自乙亥以後祿俸。別置一室。書曰某月之祿。家無所餘。寢房惟有苫薦而已。有子五人。長曰元。妻爲官婢全節。方光廟之受禪也。勝以都總管入直。聞禪位事。送奴政院數問。三問不答。久之。三問起如廁。仰天太息曰。事畢矣。奴以白勝。勝亦太息。促馬歸家。奴竊仰視之。逬淚如泉。卽告病。臥一室不起。家人亦不得見面。惟三問來。辟左右與語。三問爲人。詼諧放浪。喜談謔。坐臥無節。外若無持守。內操堅確。有不可奪之志云。有詩曰。食君之食衣君衣。素志平生莫願違。一死固知忠義在。顯陵松柏夢依依。○李塏字淸甫。一字伯高牧隱之曾孫。種善之孫也。生而能文。有祖父風。正統丙辰親試。丁卯重試。 與丙子之謀。事覺就鞫。方彭年,三問繫闕庭灼刑。塏徐曰。此何等刑也。爲人瘦弱。嚴刑之下。顏色不變。人皆壯之。與三問同日死。臨車載。有詩曰。禹鼎重時生亦大。鴻毛輕處死猶榮。明發不寐出門去。顯陵松柏夢中靑。
河緯地字天章。一字仲章世宗朝登第。宣德乙卯。生員。正統戊午式年。壯元。 爲人沈靜寡默。口無擇言。恭而有禮。過闕必下。雖雨潦。不曾避路。嘗在集賢。侍講經幄。多所補正。及魯山幼沖嗣位。八公子強盛。人心危疑。朴彭年嘗借蓑衣於緯地。以詩答寄曰。男兒得失古猶今。頭上分明白日臨。持贈蓑衣應有意。五湖煙雨好相尋。蓋傷時也。及誅金宗瑞。光廟爲首相。盡賣朝服。以前司諫退居善山。光廟白上。以左司諫徵之。上書辭不就。乙亥。光廟受禪。敎書請致至勤。緯地就召。拜禮曹參判。而恥食祿。自乙亥以後別貯一室而不食。及丙子之變。灼刑三問等。次及緯地。曰。旣加我反逆之名。則厥罪應誅。夫復何問。上怒弛。不施灼刑。與三問等同日死。世宗培養人才。至文廟時方盛。論一時人物。推緯地爲首。
柳誠源字太初。世宗朝登第。正統甲子式年。丁卯重試。 癸酉。百官上請褒世祖之功比周公。令集賢殿起詔草。諸學士皆亡去。獨誠源在。爲迫脅起草。出就家慟哭。家人莫知其故。及魯山爲上王。授成均司藝。預丙子之謀。事發拿三問去。誠源時在館。諸生以三問事告之。卽命駕還家。與妻酌酒訣飮。上祠堂久不下。往視之。不脫冠帶。拔佩刀自刎。救之已無及矣。然不知其所以。俄而吏來取屍去。磔之。
兪應孚。武人也。雄勇善射。英廟文廟皆愛重之。位至二品。丙子事發。拿至闕庭。上問曰。汝欲何爲。對曰。當請宴日。欲以一尺劍廢足下復故主。不幸爲奸人所發。應孚復何爲哉。足下速殺我。光廟怒罵曰。汝托名上王。欲圖社稷。令武士剝膚而問情。不服。顧謂三問等曰。人謂書生不足與謀。果然。曩者請宴之日。吾欲試劍。汝輩固止之曰。非萬全計。以致今日之禍。汝等人而無謀。何異畜生。白上曰。如欲聞情外事。問彼豎儒。卽閉口不答。上愈怒。命取灼鐵置腹下。油火竝煎。而顏色不變。徐待鐵冷。取鐵投地曰。此鐵冷。更灼來。終不服而死。應孚性至孝。凡可以慰母心者。無所不爲。與弟應信。俱以射獵名世。遇禽發無不中。家貧無甔石之儲。而養母之具。未嘗不贍。母嘗往抱川田莊。兄弟從行。於馬上翻身仰射。雁應弦而墮。母大喜。身長過人而容貌嚴壯。淸如於陵仲子。爲宰相。而苫席遮房戶。食無肉。有時絶糧。妻子怨罵。死之日。哭謂路人曰。生無所庇。死得大禍。初擧謀時。衆中奮拳曰。誅權攬,韓明澮。此拳足矣。何用大劍。嘗爲咸吉道節制使。有詩曰。將軍持節鎭夷邊。紫塞無塵士卒眠。駿馬五千嘶柳下。良鷹三百坐樓前。此亦可見其氣像云。無子有二女。
太史氏曰。孰不爲臣。至哉六臣之爲臣。孰不有死。大哉六臣之有死。生而愛君。盡爲臣之道。死而忠君。立爲臣之節。忠憤貫乎白日。義氣凜乎秋霜。使百世之爲人臣者。知所以一心事君之義。千金一毛。成仁取義。君子曰。殷三東六。跡有異而道同。盛矣。惠莊大王。其處黃閣。功比周公。曁負畫扆。德侔虞舜。巍巍蕩蕩。無能名焉。六臣不服。有何累哉。伯聖采薇於西山。周王之德不墜。嚴光釣魚於桐江。漢帝之功無損。嗚呼。使六臣寄丹心於金石。保白首於江湖。則上王之壽可延。光廟之治益隆。不幸中心所激。遂陷焦原。哀哉。敬作弔辭曰。厲氣初濟。衆竅爲塞。霜雪皎皎。松獨也碧。有臣之首。愛君而白。有頭可截。節不可屈。他人之粟。寧死不食。孤竹淸風。柴桑明月。土中有鬼。冤血一掬。
成三問字謹甫。世宗朝登第。宣德乙卯。生員。戊午式年。丁卯重試。壯元。恒侍經幄。啓沃弘多。英廟晩年有宿疾。屢幸溫泉。常令三問及朴彭年,申叔舟,崔恒,李塏等。便服在駕前。備顧問。一時榮之。癸酉。光廟誅金宗瑞。竝賜集賢諸臣靖難功臣號。三問恥之。諸功臣輪設宴。三問獨不設。乙亥。光廟受禪。三問以禮房承旨。抱國璽慟哭。光廟方俯伏謙讓。擧首諦視之。明年丙子。與其父勝及朴彭年等。謀復上王。期以詔使請宴日擧事。會議於集賢殿。三問曰。申叔舟吾所善。然罪重不可不誅。皆曰然。使武士各主所殺。刑曹正郞尹鈴孫主申叔舟。會其日罷雲劍。謀中止。而鈴孫不之知。方叔舟就便房沐髮。鈴孫按劍而前。三問目止之。及事覺被收。光廟親鞫問叱之曰。若等何爲反我。三問抗聲曰。欲復故主耳。天下誰有不愛其君者乎。我之心。國人皆知之。何謂反耶。進賜平日。動引周公。周公亦有是否。三問之爲此者。天無二日。民無二王故也。光廟頓足曰。受禪之初。曷不沮之。而乃依我。今背我乎。三問曰。勢不能也。吾固知進不能禁。退有一死。然徒死無益。忍而至此者。欲圖後效耳。光廟曰。汝不食我祿乎。食祿而背。反覆人也。名爲復上王。而實欲自爲也。三問曰。上王在。進賜何以臣我哉。且不食進賜祿耳。如不信。籍我家而計之。光廟怒甚。令武士灼鐵穿其脚斷其肱。而顏色不變。徐曰。進賜之刑慘矣。時申叔舟在上前。三問叱之曰。吾與汝在集賢時。世宗日抱王孫。逍遙散步。謂諸儒臣曰。寡人千秋萬歲後。卿等須護此兒。言猶在耳。汝獨忘之耶。不意汝之惡至於此也。提學姜希顏辭連。栲訊不服。上問曰。希顏與謀乎。三問曰。實不知之。進賜盡殺名士。宜留此用之。希顏由是得免。三問車載出門。顏色自若。顧左右曰。若輩佐賢主致太平。三問歸見故主於地下。笑謂監刑官金命重曰。此何事耶。旣死。籍其家。自乙亥以後祿俸。別置一室。書曰某月之祿。家無所餘。寢房惟有苫薦而已。有子五人。長曰元。妻爲官婢全節。方光廟之受禪也。勝以都總管入直。聞禪位事。送奴政院數問。三問不答。久之。三問起如廁。仰天太息曰。事畢矣。奴以白勝。勝亦太息。促馬歸家。奴竊仰視之。逬淚如泉。卽告病。臥一室不起。家人亦不得見面。惟三問來。辟左右與語。三問爲人。詼諧放浪。喜談謔。坐臥無節。外若無持守。內操堅確。有不可奪之志云。有詩曰。食君之食衣君衣。素志平生莫願違。一死固知忠義在。顯陵松柏夢依依。○李塏字淸甫。一字伯高牧隱之曾孫。種善之孫也。生而能文。有祖父風。正統丙辰親試。丁卯重試。 與丙子之謀。事覺就鞫。方彭年,三問繫闕庭灼刑。塏徐曰。此何等刑也。爲人瘦弱。嚴刑之下。顏色不變。人皆壯之。與三問同日死。臨車載。有詩曰。禹鼎重時生亦大。鴻毛輕處死猶榮。明發不寐出門去。顯陵松柏夢中靑。
河緯地字天章。一字仲章世宗朝登第。宣德乙卯。生員。正統戊午式年。壯元。 爲人沈靜寡默。口無擇言。恭而有禮。過闕必下。雖雨潦。不曾避路。嘗在集賢。侍講經幄。多所補正。及魯山幼沖嗣位。八公子強盛。人心危疑。朴彭年嘗借蓑衣於緯地。以詩答寄曰。男兒得失古猶今。頭上分明白日臨。持贈蓑衣應有意。五湖煙雨好相尋。蓋傷時也。及誅金宗瑞。光廟爲首相。盡賣朝服。以前司諫退居善山。光廟白上。以左司諫徵之。上書辭不就。乙亥。光廟受禪。敎書請致至勤。緯地就召。拜禮曹參判。而恥食祿。自乙亥以後別貯一室而不食。及丙子之變。灼刑三問等。次及緯地。曰。旣加我反逆之名。則厥罪應誅。夫復何問。上怒弛。不施灼刑。與三問等同日死。世宗培養人才。至文廟時方盛。論一時人物。推緯地爲首。
柳誠源字太初。世宗朝登第。正統甲子式年。丁卯重試。 癸酉。百官上請褒世祖之功比周公。令集賢殿起詔草。諸學士皆亡去。獨誠源在。爲迫脅起草。出就家慟哭。家人莫知其故。及魯山爲上王。授成均司藝。預丙子之謀。事發拿三問去。誠源時在館。諸生以三問事告之。卽命駕還家。與妻酌酒訣飮。上祠堂久不下。往視之。不脫冠帶。拔佩刀自刎。救之已無及矣。然不知其所以。俄而吏來取屍去。磔之。
兪應孚。武人也。雄勇善射。英廟文廟皆愛重之。位至二品。丙子事發。拿至闕庭。上問曰。汝欲何爲。對曰。當請宴日。欲以一尺劍廢足下復故主。不幸爲奸人所發。應孚復何爲哉。足下速殺我。光廟怒罵曰。汝托名上王。欲圖社稷。令武士剝膚而問情。不服。顧謂三問等曰。人謂書生不足與謀。果然。曩者請宴之日。吾欲試劍。汝輩固止之曰。非萬全計。以致今日之禍。汝等人而無謀。何異畜生。白上曰。如欲聞情外事。問彼豎儒。卽閉口不答。上愈怒。命取灼鐵置腹下。油火竝煎。而顏色不變。徐待鐵冷。取鐵投地曰。此鐵冷。更灼來。終不服而死。應孚性至孝。凡可以慰母心者。無所不爲。與弟應信。俱以射獵名世。遇禽發無不中。家貧無甔石之儲。而養母之具。未嘗不贍。母嘗往抱川田莊。兄弟從行。於馬上翻身仰射。雁應弦而墮。母大喜。身長過人而容貌嚴壯。淸如於陵仲子。爲宰相。而苫席遮房戶。食無肉。有時絶糧。妻子怨罵。死之日。哭謂路人曰。生無所庇。死得大禍。初擧謀時。衆中奮拳曰。誅權攬,韓明澮。此拳足矣。何用大劍。嘗爲咸吉道節制使。有詩曰。將軍持節鎭夷邊。紫塞無塵士卒眠。駿馬五千嘶柳下。良鷹三百坐樓前。此亦可見其氣像云。無子有二女。
太史氏曰。孰不爲臣。至哉六臣之爲臣。孰不有死。大哉六臣之有死。生而愛君。盡爲臣之道。死而忠君。立爲臣之節。忠憤貫乎白日。義氣凜乎秋霜。使百世之爲人臣者。知所以一心事君之義。千金一毛。成仁取義。君子曰。殷三東六。跡有異而道同。盛矣。惠莊大王。其處黃閣。功比周公。曁負畫扆。德侔虞舜。巍巍蕩蕩。無能名焉。六臣不服。有何累哉。伯聖采薇於西山。周王之德不墜。嚴光釣魚於桐江。漢帝之功無損。嗚呼。使六臣寄丹心於金石。保白首於江湖。則上王之壽可延。光廟之治益隆。不幸中心所激。遂陷焦原。哀哉。敬作弔辭曰。厲氣初濟。衆竅爲塞。霜雪皎皎。松獨也碧。有臣之首。愛君而白。有頭可截。節不可屈。他人之粟。寧死不食。孤竹淸風。柴桑明月。土中有鬼。冤血一掬。
지리산에서 저의 방조이신 휘 산당선생 충성 선조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셨다는 내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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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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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九月二十七日癸亥。發晉州餘沙等村。赴斷俗寺。洞口有廣濟巖門四大字。銘在石面。不知何人所書。入巖門里許。有斷俗寺。隷人之家。杮林竹樹成一村落。中有大伽藍。扁其門曰智異山斷俗寺。門前有皎편001然禪師碑銘。平章事李之茂撰。大金大定十二年壬辰正月日立。寺西。有神行禪師碑銘。皇唐衛尉卿金獻貞撰。元和八年九月日立。寺北。有鑑玄禪師通照之碑。爲人所拔。僧云俗徒所爲也。翰林學士金殷周撰。開寶八年甲戌七月日立。寺內東北隅。有一室。崔文昌讀書之房。寺庭。有梅花二株。前朝政堂文學姜通亭手種。梅樹去四五年前枯死。其曾孫用休先生繼種者。余讀皎편002然碑銘。入與住持聖空語。空乃一庵門人。待余厚。又出見西北二碑。入見用休所種梅。坐於樓上。仰讀用休種梅記。空饋余飯。又飯奴從訖。辭主人下來。至糟淵裸身入浴。水石淸漑。淵北有泉。逬出石面。淸泠異常。余掬手飮之。還出廣濟巖門。越佛嶺。過白雲洞。洞水與德川水合爲苔淵。淵之下流。卽晉州南江。過苔淵。從德川遷上行十餘里。下瞰長川。曠爽快心。行盡洞口入一村。曰壤堂。家家戶戶。鉅竹成林。杮栗掩靄。柴門鷄犬。依然如武陵朱陳然。其右有矢川洞。矢川者。晉州屬縣也。其縣吏希智異山釋敎。仕至戶長記官。則髡髮着緇。遞任則復爲人。遂成古風。官長不能改其俗。日暮。投德山寺。寺在二水交流之墳。竹木周布。其左有水。瀦而復進。白편003龍淵。其右有瀑。落而爲匯。曰婦淵。其深無底。寺主道崇者曾謁匪懈堂。有名禪林。匪懈堂敗。遁跡林泉。見余談論。甚喜。饋余及奴從飯甚備。語及夜半。其徒泂裕,義文,誼化主等皆靑眼待余。是日行四十里。甲子。與道崇,泂裕等歷見左右淵。淵傍竹樹可玩。誼化主饋余飯。飯後道崇使義文從余嚮導。從婦淵而上。行紅樹中。左歷金藏,解會二庵。右歷石上,百王,兜率,內院四庵。東轉一嶺。而入叢竹中。艱難穿過。登檜房嶺而南下。入管葦田。歷盡葦田而入杻林。路甚艱澁。山行四十里入普庵。杮竹繞屋。主僧道淳摘杮子饋余。淳者曾於無字。破義不精。自謂我外無人。掇誦經念佛。坐臥嘗露陰莖。多方設計。欲聚僧徒爲禪林宗者。與余始談小合。更與語。妄說參差。固執回輪之科。夜半。祝我起寢。語言油油。乙丑。發普庵。望見東上院。過文殊,麻田。行樹底川邊。亂石無路。往往聚石爲塔。以表山路。余尋石塔行。忽失法界庵路。又逢山雨。將宿石窟下。雨霽復行。得抵香積庵。庵有一僧。名曰一冏。頗聰明。解禪指。曾於無字。纔破大義。一示余六祖檀經。頗淸靜可愛。是日行四十里。丙寅。與義文及冏師自香積登上峯。雲埋風磨。木無完枝。艸無靑葉。霜嚴地凍。天寒倍於山下。雲梯石竇。僅出一人。余等穿土。及登上峯。見所謂天王者。僧曰。此釋伽母摩倻夫人爲此山神。禍福當世。將來代生彌勒佛者。其言一何遼遠而無文據。余坐堂隅石角。微雲四卷。山海可數。全羅,慶尙二道在我脚底。堂內。有禦侮將軍鄭義門懸板記。友人金大猷等名字書在板上。夕還下香積。往返二十里。十月丁卯朔。留米一斗別一冏。發香積。登少年臺。穿綿竹度鷄足。山行三十里。抵貧鉢庵。庵下有靈神庵。庵後有伽葉殿。世俗所謂有靈驗者。余詳視之。一石頑然。余從伽葉殿後攀枝仰上一山。名曰坐高臺。有上中下三層。余止上中層。心神驚悸。不得加上。臺後有一危石高於坐高臺。余登其石。俯視臺上。亦奇玩也。義文坐臺下。恐懼不得上。是日之西面淸明。倍於曩日。西海及鷄龍諸山。歷歷可辨。須臾。還下貧鉢夕飯。時落日在庵。人寰夜黑。戊辰。發貧鉢。穿靈神。行西山頂樹木中三十里。抵義神庵。庵之西面。盡爲脩竹。杮木雜生竹間。紅實透日。舂廬溷室。亦在竹間。近日所見佳境無此比。殿內。有金佛一軀。西側室。有僧像一軀。余問此何人。僧曰。此義神祖師也。到此修道。道旣半。此山天王勸祖師移住他所。自爲鷦鷯鳥引路。師隨之。及一大岾。化爲鵰。至今名其岾曰鷦鷯鵰云。鵰又引路。至下無住基。師曰。此地幾日成道。鵰曰。三七日。師遲之。師편004又至中無住基。師曰。此地幾日成道。鵰曰。一七日。師又遲之。鵰又至上無住基。不能入。曰。此地可一日成道。非女人所得入。師自入擇地。結幕精盡。改名曰無住祖師。其言甚厖。余於庵前攤飯。穿竹林中涉三大川。登內堂岾。北視鷦鷯鵰岾。南下草莽中行三十里。抵七佛寺。寺本名雲上院。新羅眞平王朝。有沙飧金恭永之子名玉寶高者。荷琴入智異山雲上院。以琴修心五十餘年。作曲三十調。日日彈之。景德王於街亭。翫月賞花。忽聞琴聲。王問樂師安長一名曰聞福。請長一名曰見福者曰。此何聲。二人曰。此非人間所聞。乃玉寶仙人彈琴聲也。王齋戒七日。玉寶至王前奏曲三十調。王大喜。使安長,請長習之。傳於樂府。更於所居寺。設大伽藍。三十七國。皆宗此寺爲願堂。有泂首坐者稍解禪法。爲山中衲子師者爲余云云。己巳。寺有溫法主者示余玉寶事跡。與泂首坐所言同。臨別。泂首坐求余詩。余留一絶。西上金輪庵。有田禪師者延入饋果。又過靑窟。泝一川流而上。迷失路者二。其初行。迷已遠而復。其終。不遠復。越一大岾。到伐艸幕。伐艸幕之上。有新幕一間。有衲子一人。曰雪根。來饋余菹菜鹽醬。是日余足生繭。艱難得步。行三十里。庚午。與雪根,義文登般若峯。俯見峯北有昏黑月落之洞。有草幕一間。雪根所居。又其北中鳳山。卽貧鉢峯之北構也。於岡斷處。有寂照,無住等庵。又其北金鳳山。有金臺庵。峯西有方丈山。山頭有萬福臺。臺東有妙峯庵。臺北有普門庵。一名黃嶺庵。峯南有姑母堂。堂南有牛翻臺。牛翻禪師道場也。峯東有仙人臺。臺東卽雙溪洞也。貧鉢峯當峯之東面。天王峯又當其東北面矣。余西下般若峯之中峯。顧瞻訖。下視牛銅水。水枯而白蟲滿井。非佳玩。是日黃雲回塞。山下所望。只南原而已。日向西。義文催還艸幕。往返二十里。辛未。留米五升別雪根。食後發伐艸幕。過淵嶺登姑母堂。挾右牛翻臺而南下。過寶月,堂窟,極倫等庵。僧云。宋仁宗皇帝愛妃薨逝。夢告於仁宗曰。妾入高麗國智異山南花嚴寺洞地獄。願爲妾作冥福。帝愴然作極倫寺。其言無文據。未足信也。是日行三十里。抵奉天寺。寺在竹林中。樓前長川。行竹底而鳴。佳刹也。是日聞皇帝陟方之奇。住老六空。辛丑年遊山時見於開城甘露寺者。接余樓上。館余禪堂。壬申。滯雨留奉天。坐樓上覓近體一首。帖在樓囱。癸酉。有首坐道敏者自稱善山金氏。見我絶糧。饋米五升。聞崔忠成弼卿,金鍵子虛等在知及庵。使人寒暄。飯後下觀黃芚寺。寺古名花嚴。名僧緣起所創。寺兩傍皆竹林。寺後有金堂。堂後有塔殿。殿最明漑。茶花,鉅竹,石榴,杮木環繞其傍。俯視大野。長川橫跨其下。爲熊淵。中庭有石塔。塔四隅。有四柱戴塔。又有婦人中立頂戴狀。僧曰。此緣起毋爲尼者也。其前有小塔。塔四隅。亦有四柱戴塔。亦有男子中立頂戴仰向於戴塔婦人狀。此緣起也。緣起者。故新羅人。從其母入此山創寺。率弟子千人。精盡話道。禪林號爲祖師。夕。弼卿,子虛訪余焉。有法主雪凝。引宿其房。饋梨杮。夜半明燈。弼卿等講論小學,近思錄。凝雖佛者。曾向兪提學鎭受中庸章句者。聞余輩語。弗拂於耳。達曙談話。甲戌。黃芚非勿禪師饋余飯。弼卿,子虛備酒饌。要余留奉天。空師更請余輩。余與弼卿輩還入奉天。夜觀近思錄。時有知及悟首坐者。聞余輩性情之論。大喜曰。持心省察之功。儒釋無異。乙亥。雪凝使其弟子齎紙。來奉天請詩。余留五字長篇爲別。又別弼卿,子虛二生。弼卿以白鑿四斗爲別。余從黃芚前大路。過求禮鼎頂村。從江邊行過熊淵遷。千山錦綉。水聒聒穿山鳴。步行三十餘里。神氣快暢。至晉州花開洞。棄熊遷泝雙溪水西邊上。左右人家。明如畫屛。自晉州,求禮地境小堠。又步行二十餘里。自西涉東。有兩地石如門。有刻雙溪石門四大字。崔文昌侯手題者也。石門內一二里許。有雙溪寺。余問僧曰。誰是靑鶴洞。義文曰。未及石門三四里。有東邊大洞。洞內有靑鶴庵。疑是古之靑鶴洞也。余惟李仁老詩杖策欲尋靑鶴洞。隔林惟聽白猿啼。樓臺縹緲三山遠。苔蘚依稀四字題。則石門內雙溪寺前。無乃是耶。雙溪寺上佛日庵下。亦有靑鶴淵。此爲靑鶴洞無疑矣。寺前。有光啓三年七月日所建眞鑑禪師碑銘。乃文昌侯奉敎撰竝書及篆額也。師名慧昭。入唐遊學。還國創此寺。祝上念佛終其身。文昌譽其道泰甚。師無乃文字禪耶。不然。文昌何推之如此耶。余讀碑畢。渡木根橋。山僧傳云。文昌手戾木根。引渡溪流。其根漸大。因爲橋。後六百年。爲野火所燒。然猶存黑榦。寺前白菊數叢。四季一樹。余坐歇花間不忍去。寺廚接筒引流。筒端水鳴。寺後有金堂。友人餘慶澄源讀書此房。房前有八詠樓故基。卽文昌侯所居室。今則但有鉅竹數十挺矣。夜宿禪堂。有客僧學乳曾從餘慶遊般若峯者。余與談禪。強要余詩。余贈一絶。丙子。泝流上將十里許。左度一峴。到佛日庵。庵乃慧昭鍊道之所。庵前有靑鶴淵。孤雲嘗遊其上。余要庵僧祖成往尋。路僻不得尋。又上普珠庵。乃普珠禪師舊居。庵因茲得名。有老釋饋余梨杮。還投佛日寓宿。祖成作詩一首贈余。詩韻圓熟。淸曠且密。曾於詩家下功者。要余次韻。余和曰。孤雲歸不駐。靑鶴返何遲。人物無今古。淸寒賈島詩。余觀成才能異常。而有儒家氣象。故云。是日雨雪。丁丑。祖成和余奉天律詩韻。爲余別。余辭成過普珠庵。登佛智嶺。下默溪洞。水石最淸奇。過鼯鼠淵,廣巖淵,龍廻淵。度碑文嶺。抵獅子庵。庵有僧海閒,戒澄迎我。閒乃余少日空門友。不見十餘年。見余靑眼。是時明月中天。鉅竹圍庵。其梢可準人長三四十矣。展談舊懷。夜深乃寢。戊寅。海閒要余強留。余留焉。食後與海閒,戒澄等下觀五臺寺。寺前有前朝國子司業權迪편005水精社記刻在碑石。時大宋紹興八年也。水精一名如意珠。戊子年。盲僧學悅建白奪取。藏其名洛山寺塔中。讀碑訖。入坐樓上。有僧饋余杮子。移時還上獅子庵。己卯。別海閒,戒澄。自丁丑至今朝。余及奴從五人。海閒皆辦給糧餉。過五臺。又過河府尹叔孚宅。宅背山臨流。場圃築前。竹林周布。仲長統所稱樂志篇無異也。步行四十餘里。還至餘沙等村。
[편-001]皎 : 坦
[편-002]皎 : 坦
[편-003]白 : 曰
[편-004]師 : 鵰
[편-005]迪 : 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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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 |
○ 성종은 뜻이 학문에 독실하여 삼시(三時)로 강서(講書)를 하고, 밤이 되면 옥당(玉堂)에서 입직하는 선비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강론하며, 강론이 끝나면 술을 주면서 조용히 고금치란(古今治亂)과 민간의 이해(利害)에 대해 묻곤 하였는데, 언제나 서로 평복으로 대하였으며, 각중(閣中)에는 촛불을 단지 하나만 켤 따름이었다. 신하들이 밤이 깊어서 크게 취하여 나가면 어전(御前)의 촛불을 주어 원(院)에 돌아가게 하였는데, 이는 곧 김연거(金蓮炬)의 유의(遺意)이다. 《용재총화》이하 동
○ 성묘(成廟)는 학문이 깊고 박식하며 문장을 넓고 엄숙했다. 문사(文士)에게 명하여 《동문선(東文選)》,《여지승람(輿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케 하고, 또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책을 인쇄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는데, 이를테면《사기(史記)》ㆍ《좌전춘추(左傳春秋)》ㆍ《전후한서(前後漢書)》ㆍ《진서(晉書)》ㆍ《당서(唐書)》ㆍ《송사(宋史)》ㆍ《원사(元史)》, 그리고 《강목통감(綱目通鑑)》ㆍ《동국통감(東國通鑑)》ㆍ《대학연의(大學衍義)》ㆍ《고문선(古文選)》ㆍ《문한유선(文翰類選)》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구소문집(歐蘇文集)》ㆍ《서경강의(書經講義)》ㆍ《천원발미(天原發微)》ㆍ《주자성서(朱子成書)》ㆍ《자경편(自警編)》ㆍ《두시(杜詩)》ㆍ《왕형공집(王荊公集)》ㆍ《진간재집(陳簡齋集)》같은 것인테, 이것음 모두 내(성현)가 기억하는 바요, 그 밖의 인쇄한 제서(諸書)가 또한 많다. 또 서강중(徐剛中)의 《사가집(四佳集》ㆍ강경순(姜景醇)의 《사숙재집(私淑齋集)》ㆍ신범옹(申泛翁)의 《보한재집(保閑齋集)》을 취집하여 간행하였는데, 다만 이윤보(李胤保)와 우리 문안공(文安公 성임(成任))의 시문(時文)은 산일(散逸)이 되어서 인쇄를 못하였으므로 한스럽다.
○ 선묘(宣廟 성종)는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양성(兩聖 세종ㆍ세조)을 이어받았고 유림을 사랑하고 장려함이 보통 규모에서 멀리 뛰어났으므로, 당시 문장력이 걸출한 선비가 옥서(玉署 홍문관)에 찬란하게 빛났으니, 이를테면, 매계(梅溪 조위)와 삼괴당(三魁堂 신종호)이며, 뇌계(㵢溪 유호인) 그리고 나의 선대인(先大人) 김흔(金訢) 같은 이들은 더욱 많은 은총을 입어서 항상 지은 바를 매월 써서 올리게 하였다. 매계와 뇌계는 모두 부모가 늙었다 하여 외직(外職)을 청하므로, 특별히 쌀과 콩을 주어 그 부모에게 넉넉하도록 하였다. 뇌계가 외직에 가면서 한 시구를 올리기를,
북쪽을 바라보니 군신간이 멀어졌고 / 北望君臣隔
남으로 내려오니 모자가 같이 사네 / 南來子母同
라고 하였는데, 임금이 조용히 감상하며 이르기를, “호인(好人)이 몸은 비록 외방에 있으나, 마음은 군(君)을 잊지 않는구나.” 하고, 또 매계가 상사를 당하였을 때는 제사를 내려 영화롭게 하여 은총이 죽고 산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사람마다 감동해 일어났다. 인재를 고무(鼓舞)하고 사기를 진작함에 있어 진실로 천세에 드물게 볼 수 있는 성사라고 하겠다. 영상 성희안(成希顔)이 홍문관의 정자(正字)로서 상사를 만나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복을 마치자 다시 벼슬을 주니, 전례대로 은명(恩命)을 사례하였다. 임금이 다시 불러 합문(閤門) 밖에 오게 하여 위로하고,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매(鷹) 하나를 팔에 얹어 가지고 와서 하사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노모가 있으니, 공사에서 물러나 틈이 있으면 교외에 가서 사냥하며 자미(滋味)를 봉양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고 하였다. 또 밤에 입대(入對)하니, 주과(酒果)를 하사하셨는데, 공은 소매 속에 감귤을 열두어 개나 넣고는 인하여 취해서 엎드려 인사를 가리지 못하는지라 중관이 업고 나갔는데, 소매 속에 넣은 감귤이 모두 땅에 떨어진 줄도 깨닫지 못하였다. 다음날 임금은 감귤 한 쟁반을 옥당에 보내며 이르기를, “어제 성희안이 귤을 소매에 감춘 것은 그 노친에게 드리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하사한다.” 하였다. 공이 뼈에 새기고,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 하더니, 마침내 정국(靖國)의 거사로 보은하였다. 선묘(宣廟)의 선비를 대우하는 데 지성스러움과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한 식견이 진실로 사람이 충성을 다하게 한 것이었으나, 공은 위태한 것을 개혁(중종반정)하여, 나라를 안정하게 하고 공훈이 사적에 오르니 역시 지우(知遇)를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용천담적기》이하 동남으로 내려오니 모자가 같이 사네 / 南來子母同
○ 문성 양성(文成兩聖 문종ㆍ성종)은 해서(楷書)의 필법에 정밀하였다. 문묘(文廟)는 곧고 단단하고 생동한 진체(眞體 정자로 쓰는 것)는 진인(晉人 왕희지)의 오묘(奧妙)함을 빼앗았지만, 다만 석각(石刻)한 수본(數本)만이 있을 뿐이고, 세상에 전하는 지극한 보배는 귀신이 감추어서 진적(眞跡)은 보기 드무니 아깝도다.
○ 성묘(成廟)의 글씨는 곱고 예쁘고 단아하고 무게가 있어서 자연스레 조송설(趙松雪)의 규도(規度)에 깊이 들어갔다. 임금이 또 가끔 먹 장난에 뜻을 두고 소화(小畫)를 그렸는데, 그것은 모두 하늘이 내려주신 재능으로 별로 모습(模習)조차 아니 하여도 그 오묘함이 옛 법도에 이르렀다. 온갖 정무를 보는 여가에 청연(淸讌)의 자리가 있으면 때때로 한묵(翰墨)과 친하여 간략하게 붓을 휘두르곤 했는데, 한 치 되는 쪽지나 한 자 되는 폭도 세상에 산락(散落)되어 그것을 얻은 사람은 공경하여 애완하여 깊이 싸두는 것이 아름되는 옥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상사생(上舍生) 박원령(朴元秢)은 글씨를 좀 잘 썼는데, 성묘가 이를 보고 가상히 여기며 그 고을에 글을 내리어 지필을 주게 하여 장려하니 영화가 향려(鄕閭)에 빛나서 경동(驚動)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무릇 재예 세기(才藝細技)가 어찌 족히 임금의 기림을 움직였으리오 마는 성능(聖能)하다 하여 그것을 폐하지 아니하였으니, 권장하기를 융성히 함은 이처럼 성심에서 나왔다. 이로 말미암아 문장(文章)ㆍ서화(書畵)ㆍ공기(工技)ㆍ백술(百術)이 그 격려에 힘입어 정진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에 성인의 고무(鼓舞) 전이(轉移)의 계기가 다만 한 번 빈소(嚬笑)하는 순간에 있음을 알았다. 만일 그 성의가 범정(凡情)에서 크게 초월한 것이 아니라면, 비록 백방으로 권칙(勸勅)하더라도 엄정한 정과(正課)를 세움에 있어 다만 소란하여 점차 쇠퇴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찌 사람의 심정을 감동하는 데 이같이 깊음이 있으리오.
○ 성묘(聖廟)는 왕대비(王大妃)를 위하여 날마다 곡연(曲宴)을 베풀고 내수비(內需婢) 5ㆍ6명을 뽑아 속악(俗樂)을 익히게 하였는데, 그중 한 명이 용모가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났다. 그가 항시 성종에게 눈짓을 마지않는지라 성묘가 그것을 보고 그 부모에게 명하여 시집보내게 하고, 다시는 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더니, 이로부터 곡연도 파하게 되었다. 또 성묘는 굳이 볼 일이 없으면 하루 세 차례 경연(經筵)을 열었으며, 또 날마다 세 번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문안드리곤 하였다. 또 종실(宗室)을 데리고 후원(後苑)에서 활을 쏘고 난 뒤에는 종실과 마주 대하고서 반드시 소작(小酌)을 베풀었는데, 거기에는 기악(妓樂)이 따랐으니, 이는 진실로 태평성사(太平盛事)였다. 그러나 어떤 의론하는 자는 혹 연산군(燕山君)이 연락(宴樂)을 탐한 것은 눈과 귀에 익숙해져서 그러하였다 하니, 아까운 일이다. 김흔의《전언왕행록》
○ 궁에서 나온 사람이 있었는데, 상자 속에 거두어둔 절지 찰한(截紙札翰)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에 이르기를,
깊숙한 정자에서 흐르는 물줄기 바라보니 / 幽亭瞰流水
높은 나무는 잔잔한 시냇가에 늘어졌다 / 高樹俯潺湲
화류(대추빛깔의 준마)가 푸른 풀언덕에서 우니 / 驊騮嘶靑草
봄이 푸른 아지랑이 속에 있도다 / 春在翠微間
또,높은 나무는 잔잔한 시냇가에 늘어졌다 / 高樹俯潺湲
화류(대추빛깔의 준마)가 푸른 풀언덕에서 우니 / 驊騮嘶靑草
봄이 푸른 아지랑이 속에 있도다 / 春在翠微間
절벽은 천 길이나 되는 듯 솟았는데 / 絶壁立千仞
솔바람은 불어 마지않네 / 松風鳴未休
난간에 비기고 섰는 무한한 회포 / 憑欄無限意
약속이나 한 듯이 고향 산천에도 가을이 들었으리라 / 依約故山秋
하였다. 또,솔바람은 불어 마지않네 / 松風鳴未休
난간에 비기고 섰는 무한한 회포 / 憑欄無限意
약속이나 한 듯이 고향 산천에도 가을이 들었으리라 / 依約故山秋
새 외를 처음 맛보니 수정같이 산듯하다 / 新瓜初嚼水精寒
형제의 정 친한 것으로 어찌 차마 홀로 보랴 / 兄弟情親忍獨看
또,형제의 정 친한 것으로 어찌 차마 홀로 보랴 / 兄弟情親忍獨看
형에게 묻노니 무엇으로 세월을 보내시오 / 問兄何事送羲娥
멀리 생각하니 양금과 위가일 것이리 / 遙想洋琴與渭歌
또,멀리 생각하니 양금과 위가일 것이리 / 遙想洋琴與渭歌
친척과 모이기를 기약하고 / 期會親戚
아리따운 기생을 맞이했네 / 聘招佳妓
의(義)는 비록 군신이나 / 義雖君臣
은혜로 말하면 형제로세 / 恩則兄弟
라고 하였으니, 보는 자가 성묘가 평소 장난삼아 썼다가 버린 것임을 알겠다. 위에 두 절구는 반드시 그림에 쓴 시일 것인데, 누구의 소작인지 알지 못하겠고, 나머지는 모두 월산대군(月山大君)에게 준 편지 초고이다. 성묘는 매양 월산대군을 내전에 데려다가 곡연(曲宴)을 베풀고, 나가면 편지로 수창(酬唱)한 것을 보내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대개 그 우애가 지극한 것이었다. 《소문쇄록》아리따운 기생을 맞이했네 / 聘招佳妓
의(義)는 비록 군신이나 / 義雖君臣
은혜로 말하면 형제로세 / 恩則兄弟
○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유명한 문사 20명을 골라 경연(經筵)을 겸하고, 모든 문한의 일은 모두 다 위임하였다. 아침 일찍 들어와서 밤늦게 서야 파하였는데, 일관(日官)이 시간을 알린 후에야 나갔으며, 조석 식사는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손님 대접하듯이 하니, 그 융숭하게 대접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다투어 가며 서로 권면하여서 뛰어난 재주 큰 선비가 많이 나와서 문원(文苑)에 유명한 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세조는 병자난(丙子難 사육신사건) 때에 집현전을 파하고, 문신 수십 명을 골라 예문(藝文)이라고 겸칭하며 날마다 불러들여 의논하고 생각을 하였다. 성묘가 즉위하여서는 옛날의 집현전에 의하여 다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본관(本官)으로 경연을 겸하게 하며,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다. 매양 선온(宣醞)을 주고 승지를 불러 모아서 같이 마시게 하였고, 또 많은 노비를 주어 심부름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또 조예(皁隸)들로 하여금 모두 은패(銀牌)를 차게 하였다. 게다가 용산강(龍山江) 가에 별당을 짓고 관관(館官)을 분번(分番)하여 독서하도록 하였고, 또 상사(上巳 3월 3일)와 중양(重陽) 가절에는 주악(奏樂)을 주어 교외에서 유흥으로 즐기게 하였으니, 그 은총과 영광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문(文)으로 이름난 자는 세종 때의 성대함만은 못하였다. 《용재총화》이하 동
○ 신라와 고려 때는 불교를 숭상하여 오로지 불공과 반승(飯僧 중에게 밥 먹이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우리 태종이 비록 사사(寺社) 노비를 혁신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유풍이 오히려 남아 있었다. 으레 공경(公卿)이나 선비의 집이라도 빈소(殯所)에는 중들이 모여 앉아 불경을 읽었는데, 이것을 불석(佛席)이라 하였고, 또 산사에서는 칠칠재(七七齋)를 지내는데, 부자는 다투어 호화스럽고 사치하게 하고, 가난한 집에서도 관례에 의하여 갖추어 베풀므로 물과 곡식을 소모함이 심히 컸었다. 또 친척과 붕료(朋僚)들은 포물(布物)을 가지고 와서 시주하였는데, 이를 식재(食齋)라고 하였다. 또 기일에는 중을 맞이하여 먼저 밥을 먹인 뒤에 혼을 불러 제사지냈는데, 이것을 승재(僧齋)라고 한다. 성묘는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모든 불사에 대해 다 고치면서 그 폐단을 극언하였다. 이로부터 사대부의 집에서는 법과 물의를 두려워하여 비록 상사와 기일을 당하여도 다만 법에 의하여 제사를 행할 뿐이고, 중과 부처를 공양하지 않았다. 그대로 인습하고 폐하지 않는 자는 오직 무뢰한 백성들이었으니, 이들도 멋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또 도승(度僧)의 법을 엄하게 금하여, 주군(州郡)에까지 단속하여 중으로서 첩(牒)이 없는 자는 머리를 길러 속세로 돌아오게 하니, 안팎 사찰이 모두 비게 되었다. 물(物)이 성하면 쇠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 성균관은 교훈을 전장(專掌)하였는데, 국가에서는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고 관관(館官)으로 겸임하게 하여 항상 유생 2백 명을 양성하게 하였는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아뢰어 존경각(尊經閣)을 세워서 많은 경적을 인쇄하여 간직하게 하였으며,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이 아뢰어 전사청(典祀廳)을 짓게 하였고, 나(성현)도 아뢰어 향객청(享客廳)을 건설하게 하였다. 그 후 성전(聖殿)의 동서 행랑과 식당을 모두 짓고, 또 포목 5백 필과 쌀 3백여 석을 주며, 또 학전(學田)을 두어 관중(館中)의 모든 수요를 충당하게 하였다. 이극증이 아뢰기를, “이제 성은을 받아 많은 미포를 받았으니, 주식을 준비하고 조정의 문사 및 제생을 모이게 하여 더욱 사문(斯文 유림)의 성사(盛事)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하니, 성묘가 윤허하는지라, 이에 문사 대회를 명륜당에서 열었는데, 찬품(饌品)이 극히 정결하였다. 승지가 선온(宣醞)과 어주(御廚)의 진미를 주었는데 계속 끊어지지 않았다. 계축년 가을에 성균관에 거둥하여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지내고 물러와 하연대(下輦臺)에 마련한 장전(帳殿)에 앉으니, 문신 재추(宰樞)가 모두 전(殿) 안으로 들어와 모시고 당하관(堂下官) 문신들은 뜰에 열지어 앉았으며, 8도 유생이 구름과 같이 서울에 모였으니, 무려 만여 명이나 되었다. 상하 할 것 없이 모두 꽃을 꽂고 잔치에 참여하였으며, 또 새로 악장(樂章)을 지어 연주하여 흥을 돕고, 각 관청에서 나누어 맡아서 주찬(酒饌)을 설비하게 하고, 임금은 자주 내신(內臣)을 보내어 감독하고 살피게 하니, 사람마다 취하고 배불렀다. 이 같은 일은 옛날부터 들어볼 수 없는 성사였다.
○ 태종이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 원년에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무릇 정치는 반드시 전적(典籍)을 널리 보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 동방은 해외에 있으므로 중국의 서책은 드물게 이르고, 이미 있는 판각은 닳아 없어지기가 쉬우며, 또 천하의 글을 모두 판각으로 하기도 어려우므로 내가 구리로 본떠 주자(鑄字)를 만들어서 글을 얻는 데 따라 인쇄하여 이를 세상에 널리 전하면 진실로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고주(古註)》ㆍ《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좌씨전(左氏傳)》의 자본(字本)으로 주자를 만드니, 이것이 주자의 시초인데, 그 이름을 ‘정해자(丁亥字)’라고 하였다. 세종이 또 경자년에, 주자가 글자가 크고 고르지 못하다고 해서 다시 개주(改鑄)하니, 그 모양이 작으면서 바른지라 이로부터 인쇄하지 않은 서책이 없었는데, 그 이름을 ‘경자자(庚子字)’라고 하였다. 또 갑인년에 위선음즐(爲善陰騭) 등서의 자(字)를 본으로 하여 주자를 만들었는데, 경자자에 비하여 좀 큰 편이나, 자체가 매우 좋았다. 또 세조에게 명하여 《강목(綱目)》의 대자(大字)를 쓰게 하고, 드디어 연(鉛)을 주조하여 주자를 만들어서 강목을 인쇄하였으니, 이것은 지금 이른바 “훈의(訓義)”라는 것이다. 임신 연간에 문종(文宗)이 경자자를 다시 녹여, 안평대군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이것을 ‘임신자(壬申字)’라고 한다. 을해년에 세조가 임신자를 녹여 강희안(姜希顔)에게 명하여 쓰게 하고, 그 이름을 ‘을해자(乙亥字)’라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활용하고 있다. 그 후 을유년에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고자 정난종(鄭蘭宗)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자체가 바르지 못하였다. 그것을 ‘을유자(乙酉字)’라고 하였다. 성종 신묘년에 왕형공(王荊公)과 구양공(歐陽公)의 문집을 자본(字本)으로 한 주자를 만들었는데, 그 자체가 경자자보다 작으면서도 더욱 정밀하였다. 그것을 ‘신묘자(辛卯字)’라고 하였다. 또 중국에서 신판 《강목(綱目)》의 자본을 얻어 주조한 주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계축자(癸丑字)’라고 한다.
○ 성묘가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하면서 그 전지(傳旨)에 이르기를, “윤씨는 그 성질이 본래 흉험(凶險)하며, 인륜에 어긋난 불순한 행실이 많다. 지난번 궁중에 있을 때에 날로 포악함이 심해지고, 이미 삼전(三殿 정희왕후ㆍ소혜왕후ㆍ안순왕후)에 불순히 하였을 뿐 아니라, 방자하게 과인(寡人)의 몸에 흉처(凶處)를 내고, 노예같이 대우하는가 하면, 지나칠 때는 족적(足跡 자손인 듯)을 삭거(削去)하겠다고까지 악담을 한다. 이것은 다만 작은 일이므로 논할 것도 못 된다. 심지어는 역대모후가 어린 아들을 내세우고 정치를 마음대로 한 것을 보고 스스로 기쁨으로 여겨서 항상 독약을 지니고 다니면서 혹 품속에 품고 다니고, 어느 때는 상자에 감추어 두곤 하였는데, 그것은 오직 자기가 꺼려하는 자만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라, 장차 과인의 몸에도 해를 끼치려함이다. 또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니, 이는 무도한 죄이다. 종사(宗社)에 관계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대의(大義)로 차마 끊지 못하고, 다만 서인(庶人)으로 폐하여 그 친정집에 있게 하였던바, 이제 외인(外人)들이 원자(元子)가 점차로 자라남을 봄으로써 전후의 분규되는 일이 대부분 이것으로 말썽이 될 것이다. 비록 당시에 있어서는 깊게 염려할 것이 못 되지만, 후일의 화는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흉험한 성질로써 후일 위복(威福)의 권세를 잡게 되면 원자가 현명하여도 또한 반드시 그 사이에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날로 더욱 방자하여질 것이니, 한(漢)의 여후(呂后)와 당(唐)의 무후(武后)의 화를 머리 들고 기다리게 될 것이다. 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매우 한심스럽다. 이제 만일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일찍 대계를 정하지 못하였다가 국사가 구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후회한들 소용이 없어서 내가 실로 종사의 죄인이 되고 말 것이다. 옛날 구익부인(鉤弋夫人)은 죄가 없어도 한 무제(漢武帝)가 오히려 만세의 계책을 세웠는데, 항차 이같이 흉험하고 또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는 것이겠느냐.” 하고 이에 이달 16일에 그 사제에서 사사(賜死)하였으니, 종사대계(宗社大計)이므로 부득이한 일이었다. 《소문쇄록》이하 동
○ 임인년 10월 4일에 당양공주(唐陽公主)가 죽었는데,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공주가 죽어서는 조시(朝市)를 정지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하루의 조회를 정지하고 홍문관으로 하여금 전사(前事)를 상고하게 하였더니, 홍문관에서 말하기를, “송 나라 장공주(長公主)가 죽었을 때에 5일의 조회를 정지한 일이 있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이같을진대 지금이라고 어찌 그렇게 아니 하리요.” 하고,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다.
○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의 연호) 계유년 5월에 경상 감사가 예조에 공문을 보냈는데, 그에 이르기를, “영해부(寧海府 지금의 경북의 영덕군)에 지화(地火)가 났는데, 낮에는 연기가 나고, 밤에는 화광이 있으며, 나무를 던지면 불이 일어난다. 길이가 8척이요, 넓이가 20척이나 된다.”고 하였는지라, 임금이 홍문관에 명하여, 고사를 상고하게 하니, “진(晉)의 혜제(惠帝) 원희(元熙) 연간에 지연(地燃)이 있었고, 조(趙)의 석호(石虎)와 후진(後秦)의 부견(苻堅) 때에, 그리고 당의 정관(貞觀) 때에 백주(白洲 지금의 황해도 배천)에서 지화가 있었고, 본조에 들어와서 세종 때에 영해(寧海)에서 이 같은 해염이 있었으며, 또 문종 때에는 상주(尙州)에서 지화가 있었다.”고 하는지라, 내신(內臣) 이효지(李孝智)에게 명하여 가서 살피게 하였더니, 불에 탄 석괴(石塊)를 가지고 왔는데, 숯같이 검으며, 불에 넣으면 불꽃이 일어났다.
○ 갑진년 9월에 봉상시(奉常寺)에서 김양경(金良璥)의 시호를 올렸는데, 공위공(恭威公)ㆍ편숙공(褊肅公) 그리고 제극공(齊克公)이라 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물으니, 대답하기를, “김양경은 평소에 마음이 치우친 병통이 있었으므로 시호 역시 그러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김국광(金國光)과 윤계겸(尹繼謙)의 시호를 정할 때에 고치고자 하였으나, 후폐가 있을까 두려워서 고치지 못하였는데, 이제 정직한 사람이 그 붕우들의 사사 청탁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여 모두 그 마음을 편급(偏急)하다고 하며, 조의(朝儀) 또한 쏠리듯 따라가니, 정직으로써 편급의 시호를 얻는 것을 어찌 옳다 하겠는가. 내가 이 시호를 고치고자 하는데, 경들은 어떠하오.” 하니, 정원에서 말하기를,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를 이미 정하였으므로, 고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직한 사람을 어찌 편급하다고 칭호하겠습니까. 대개 편급으로 득명한 자는 그 부당한 일을 가지고 편벽되게 고집부리고 억지로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김양경의 편급한 병통은 생각하건대 공론이 모두 그러한 것 같으니, 이제 만일 고쳐 정하면 후폐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다만 봉상시에서 의진(擬進)한 6자(공위ㆍ편숙ㆍ제극) 중에서 임금께서 정하시는 것이 어떠할까 하나이다.” 하였다. 공숙공(恭肅公)이라고 어필로 써서 내렸으니, 일에 공순하게 하고, 위에 봉공하는 것을 공(恭)이라 하며, 마음가짐이 결단성이 있는 것을 숙(肅)이라고 한다. 갑진년 11월에 봉상시에서 이계손(李繼孫)이 시호를 의진(擬進)하였는데, 장경공(長敬公)과 정헌공(玎憲公)이라 하였다.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장(長)이라 하고, 뜻 이루기를 힘쓰지 아니함을 정(玎)이라고 한다. 김 문간공(金文簡公)이 마침 경연에 있다가 아뢰기를, ”이계손(李繼孫)은 영안도(永安道) 관찰사로 있으면서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여 그 중에서 과거한 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남을 부지런히 가르쳤다는 말은 그에 맞지 않습니다. 회기불권(誨人不倦)은 김구(金鉤)와 김말(金末) 같은 사람에게 타당합니다. 이계손으로 말하면, 감사로 있으면서 학문을 진흥시켰을 뿐이고, 스스로 가르치지는 않았는데, 어찌 이같은 시호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계손은 사람됨이 재상의 체모가 있어서 선인군자(善人君子)입니다만, 장(長) 자를 굳이 쓰지 않더라도, 다른 좋은 시호를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술의불면(述義不勉)도 맞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는 일찍이 죄를 얻어 귀양간 일이 있으므로 정(玎) 자는 불가하나이다.”하니, 임금이 드디어 경헌공(敬憲公)이라고 써서 내렸다.
○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의 연호) 병오년에 직제학(直提學) 김흔(金訢)은 그의 외증조되는 성개(成慨)가 쓴 위징(魏徵)의 십점소(十漸疏)를 드리면서 아울러 규경(規警)을 삼으라는 차자(箚子)를 올렸더니, 임금은 전에 입었던 흰 비단 첩리(帖裏 속옷)와 흑서피(黑黍皮 서는 쥐와 같다.)의 신을 주고, 또 금전지(金箋紙)에 손수 쓴 글을 보냈다. 그 글에 “전번에 보내준 차자와 위징 소축(疏軸)은 깊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위징의 이 말은 실로 만세의 시귀(蓍龜)가 된다. 일찍이 그대의 부친이 그대에게 권면하기를, 위 정승(위징)으로 자부하도록 하였고, 그대가 또 나에게 권하여 당우(唐虞)와 같은 정치를 하라고 하니, 이는 아비는 그 아들을 사랑하고, 신하는 그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내가 비록 현숙하지 못하나, 어찌 그를 감히 잊으리오. 그대의 성의를 가상히 여겨서 상주어 표창하니, 항시 좌우에 두고 스스로 경계하라.”고 하였다. 그 글씨는 혜정(楷正)하나, 굳이 취할 바가 없었으나, 김흔은 공조 참의로, 그 아버지인 김우신(金友臣)은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삼았다.
○ 무신년 2월 6일에 세자(世子) 빈(嬪)을 납궁(納宮)하였는데, 아침부터 풍우가 심하게 이는지라, 그 빈부(嬪父)인 좌참찬(左參贊) 신승선(愼承善)에게 손수 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세속은 혼일(婚日)에 풍우가 있는 것을 꺼린다고 하나, 무릇 바람으로써 동하게 하고, 비로써 윤택히 하여 만물이 자람에 있어 풍우의 공이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전하여 듣는 것이므로 비록 다 기록하지는 못하였지만, 진실로 제왕의 말이로다. 정오부터 날씨가 개고 청명하였다. 충민공(忠敏公) 《잡기》
○ 성묘조에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는 연산군이 부하(負荷 임금의 큰 직무)를 이기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하루는 임금을 어탑(御榻)에 가까이 가서 용상을 어루만지며 청한 것이 있었는데, 대간(臺諫)에서는 죄주기를 청하고, 또 어떤 밀계(密啓)인지 듣고자 하였지만, 임금은 “호색으로 나를 경계한 것일 뿐이다.” 하곤 끝까지 말하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고려 때의 문사는 모두 《시경》과《이소경》으로 학업을 일삼더니, 오직 정포은(鄭圃隱)이 성리학(性理學)을 처음으로 제창하였고, 아조(我朝)에 이르러서 권양촌(權陽村 권근)ㆍ권매헌(權梅軒 권눌) 형제가 능히 경학에 밝고 또 문장에 능하였다. 권양촌은 사서 오경의 구결(口訣)을 정하고 또 《천견록(淺見綠)》과《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어서 유학에 우익(羽翼 보조)한 공이 적지 않다. 그 후임으로 스승된 자는 황현(黃絃)ㆍ윤상(尹祥)ㆍ김구(金鉤)ㆍ김말(金末)ㆍ김반(金泮)이다. 황현의 학문은 잘 들을 수 없고, 윤상은 경전이 가장 정결하며, 작문(作文)도 조금은 할 줄 알았다. 김구와 김말은 경전과 작문이 모두 정밀하였는데, 김말은 고집스러움을 면치 못하고 항시 의논이 있을 때면, 상하를 가리지 않고 다투어 마지않으며, 수업(受業)하는 자도 역시 두 가지를 갖추었다. 두 공(김구ㆍ김말)이 모두 세조의 알아주심을 얻어서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김반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나이 늙어서 치사(致仕)하였는데, 끝내 그 고향에서 아사(餓死)하였다. 또 그 다음을 들어 말하면, 공기(孔頎)ㆍ정자영(鄭自英)ㆍ구종직(丘從直)ㆍ유희익(兪希益)ㆍ유진기(兪鎭頎)인데, 그들은 익살스럽고 말은 잘하나, 작문하는 데는 편지 같은 작은 문구도 한마디 못 지어서 남으로부터 편지를 받고도 회답을 하지 못했다. 하루는 생원 김순명(金順明)이 마침 방에 있다가 말하는 것에 따라 답장을 썼는데, 그 사어(辭語)가 심히 아름다우므로 기(頎)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자네가 나에게서 배웠는데, 자네는 글을 잘 쓰고 나는 글을 쓰지 못하니, 진실로 청(靑)이 쪽풀에서 나왔으나, 쪽풀보다 푸르다는 말이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정자영(鄭自英)은 오경만 잘 알 뿐 아니라, 또한 능히 제사(諸史)를 널리 섭렵하였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구종직은 용모가 매우 출중하여 세조의 발탁을 받아 벼슬이 1품에 이르렀고, 유희익은 그다지 현달하지 못하였으며, 유진기는 고집으로 사리에 불통하였다. 근자에는 노자형(盧自亨)과 이문흥(李文興)이 오랫동안 학관에 있었으므로 성종이 연로하다고 하여 우대하여 당상관으로 승진시켰는데 모두 고향에 가서 죽었다. 《용재총화》
○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는 정자를 한수(漢水) 남쪽에 짓고 그 이름을 압구정(押鷗亭)이라고 하였다. 임금을 옹립한 공을 한 충헌공(韓忠獻公 충헌은 송 나라 명신인 한기(韓琦)의 시호)에게 견주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명예를 얻고자 하였다. 늙었으므로 강호(江湖)로 사퇴하겠다고 말은 하면서도 작록에 미련이 남아 있어 가지 못하더니, 임금이 작별의 시를 지어주니, 조중 문사(朝中文士)가 서로 다투어 화운(和韻)을 하여 수백 편이 되었다. 그중 판사 최경지(崔敬止)의 시가 제일이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세 번 불러 보심이 은근하여 두터운 총애를 받았으니 / 三接慇懃寵渥優
정자가 있어도 돌아가서 쉴 생각 없네 / 有亭無計得來遊
가슴 속에 기심(機心) 고요해지면 / 胸中自有機心靜
벼슬하는 마당에서도 백구는 친할 수 있으리 / 宦海前頭可押鷗
라고 하였더니, 한명회가 미워하여 현판 다는 데 끼워넣지 아니하였다. 《추강냉화》정자가 있어도 돌아가서 쉴 생각 없네 / 有亭無計得來遊
가슴 속에 기심(機心) 고요해지면 / 胸中自有機心靜
벼슬하는 마당에서도 백구는 친할 수 있으리 / 宦海前頭可押鷗
○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은 어릴 때부터 출중 하여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였다. 나이 12ㆍ3세 때에 여러 아이들과 같이 절에 가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야반에 도적이 와서 아이들의 옷과 신발을 도적질해 갔다. 이튿날 여러 아이들은 겁이 나서 모두 흩어졌으나, 허종은 홀로 끄떡도 하지 아니하고 베개를높이하고 길게 누워 붓을 들고 벽에 글을 쓰기를, “내 옷은 탈취해 갈지라도, 내 신은 훔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인데, 옷도 신도 모두 탈취해 갔으니, 내 생각에는 도선생(盜先生)을 위하여 좋지 않게 여기노라.”라고 하여 듣는 자들이 이미 그 바탕이 비범함을 알았다. 《사재척언》
○ 양천군(陽川君) 허종은 생김새가 훤칠하고 풍채가 점잖아서 당시에 대인군자로 추중하였다. 젊어서부터 박식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천문(天文)ㆍ역률(曆律)ㆍ의복(醫卜)의 기술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또 궁마(弓馬)에도 능하였으므로 국가에 대사가 있으면 반드시 공을 원수로 삼았다. 그러나, 가산(家産)은 돌보지 아니하여 사는 집은 겨우 바람과 햇볕을 가릴 정도이면서도 항시 공은 담담하게 여겼다. 《청파극담》
○ 홍치(弘治 명 나라 효종의 연호) 무신년에 시강(侍講) 동월(董越)과 급사(給事) 왕창(王敞)이 효종의 등극 조서를 반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오는데, 허 충정공(許忠貞公)이 원영사(遠迎使)로 의주에 마중갔는데, 양사(兩使)는 잘난 체하며 사람을 업신여기며, 좌우의 집사(執事)가 조금만 실수하면 성내어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 나라의 환관이 아니다. 어찌 이렇게 무례하냐.” 하고 꾸짖었으니, 이는 지난날 봉사자(奉仕者)가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들어가서 환관된 자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허종을 만나니, 공의 큰 키와 단정히 서 있는 자태며 의관이 위연(偉然)함을 보고, 양사는 깜짝 놀라며 서로 눈짓하고 말하기를, “당당한 인품이로다. 이 사람이여.”라고 하더니, 이로부터 엄하고 모난 것이 조금 누그러져서 좌우에서 혹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모두 따지지 않았고, 매양 공을 보면 붙들고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서로 경사(經史)를 토론하면, 밤이 깊어야 파하더니, 하루는 왕 급사(王給事)가 사신으로 촉(蜀)에 간 일이 있다고 말하니, 공이 묻기를, “촉을 가려면 두 길이 있습니다. 곧 육로는 포사(褒斜)에서 들어가고, 수로는 형문(荊門)에서 들어가는데, 공은 어느 길로 들어갔습니까.” 하니, 왕 급사가 답하기를, “강을 타고 들어갔소.” 하는지라, 공이 또 묻기를, “강이 민강(岷江)에서 시작하여 기산(■山)의 동쪽 골짜기에 이르러 물이 극히 험하다가, 이릉(夷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천히 흐른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던가요.” 하였다. 다시 말을 이어, 강이 모모(某某)란 곳에 이르는 강 연안 위아래의 양(襄)ㆍ번(樊)ㆍ형(荊)ㆍ악(鄂) 등지의 수천 리 사이를 산천의 원근과 호구(戶口)의 다과며 고금 영웅들의 뺏고 차지하고 나누어 점령한 것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들어 세니, 양사가 심복하고 공의 손을 잡으며, “만일 가슴속에 만권 서책을 갈무리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와 같겠소.”라고 말하였다. 또 공이 중국 전고(典故)를 물으면 비록 궁중에서 금하는 비결이라도 공을 위하여 모두 말하고 조금도 숨김이 없었다. 양사가 돌아가려고 강에 왔을 때에는 섭섭하여 차마 작별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이 빨리 조회하러 사신 와서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해외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다.” 하였다. 환조하여 진신(縉紳)들에게 떠들고 찬양하며 말하기를, “천상(天上)은 알지 못하는 바이지만, 인간으로서는 짝할 이가 없다.” 하였다. 그 후에 낭중(郞中) 애복(艾璞)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는데, 사람됨이 거만하고 외람되어 경상(卿相) 같은 귀인을 만나도 모두 흘겨보면서 예를 하지 아니하였는데, 국경에 들어와 첫말에 공의 기거(起居)를 묻더니, 공을 본 뒤에는 얼굴빛을 고치고 기색을 화하게 하여 대하고, 영송(迎送)하는 데 자신을 낮추며 대우하는 예법이 심히 정중하였다. 《패관잡기》
○ 이음애(李陰崖 이자)가 상우당(尙友堂 허종) 시집에 발문(跋文)하여 이르기를 “국조의 명신으로 말하면 영릉(英陵 세종) 때는 황희(黃喜)ㆍ허주(許稠)요, 선릉(宣陵 성종) 때는 허공이니, 휘(諱)는 종(琮)이요, 자(字)는 종경(宗卿)이요, 호는 상우당(尙友堂)이다. 처음 벼슬할 때에 불교를 만만(謾謾)히 본다고 역정을 받아 광릉(光陵 세조)이 지나친 위엄으로 눌러서 그 뜻가짐을 시험하고서야 곧 벼슬을 승진시킬 것을 명하였는데, 조용하게 위의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로부터 화려한 명성이 날로 드러나서 순서를 뛰어 재상에 이르렀고, 계급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체격과 용모가 훤칠하고 풍채가 화하고도 엄숙하여, 마치 가을 하늘과 겨울 날씨 같아서,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한 듯하고 가까이 나아가 대하면 온화한 성품이었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을 좋아하여 차분히 상고하고 연구하였으니, 대부분 그가 자득한 것은, 한 푼어치씩 쌓고 한 치 길이씩 덧붙여서 이목(耳目)에 칠한 정도의 자와는 비유가 되지 아니했다. 또한 모든 역사에 통달하였는데, 주문공(朱文公)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20일 만에 끝마치니, 그 정근(精勤)하고 준민(俊敏)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나라 일을 처리한 것이 모두 본받아 법으로 삼을만했다. 선릉(宣陵)에게 지우(知遇)되어 그 덕이 원수(元首 임금)와 비등하여, 들어와서는 고요(皐陶) 기(夔) 같은 명신(名臣)이 되고, 나아가서는 방숙(方叔)과 소호(召虎) 같은 중신(重臣)이 되었다. 기뻐하고 고무되어 대유(大猷 큰 성과)를 기대하였는데, 급작스레 죽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느냐. 그의 시와 문도 그 덕망과 같아서, 깎고 다듬는 일을 일삼지 아니하여서도 혼후(渾厚)하면서 단정하고 정성스러워서 자연히 성률(聲律)에 맞았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다더니,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하였다.《병진정사록》
○ 손 판원(孫判院 손순효)은 삼휴설(三休說)과 사휴설(四休說)을 취합하여 칠휴거사(七休居士)라고 하였다. 사람됨이 순수하고 근실해서 다른 일이 없었으며, 매양 곧은 뜻으로 곧은 행실을 하였으나, 풍속과 강상(綱常)에 관한 일에는 반드시 먼저 뜻을 가다듬었으며, 취하면 호기스런 말이 그치지 않았다. 강원도 감사로 있을 때에 마침 크게 가물어 기우제를 지내도 효과가 없자, 공이 말하기를, “비가 오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수령(守令)의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성심이 하늘을 감동시키면 하늘이 감동하여 반드시 응해 줄 것이다.” 하며, 드디어 재계(齋戒)하고 몸소 나가서 기우제를 지냈더니, 그 날 밤중에 빗소리가 들렸다. 기뻐하여 일어나서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하늘에 감사를 드리겠노라.” 하고, 관복을 입고 뜰 가운데 서서 무수히 하늘에 절하였다. 우세가 점차 급하여, 한 아전이 우산을 가져다가 받치고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높으신 어른 앞에서, 어찌 우산이 필요하랴.” 하고, 명하여 가져가게 하니, 의복이 다 젖어 있었다. 또 경상 감사로 있을 때에는 효자와 열녀문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재배하며, 비록 비가 올지라도 피하지 아니하였는데, 그때에 도사(都事) 이집(李緝)이 도롱이를 두르고 밭에 앉아 있는지라 공이 재배를 마치고 도사에게 말하기를, “족하(足下)는 무엇을 하고 있소.” 하니, 이집이 대답하기를, ”나는 영감(令監)보다 먼저 절하였습니다.” 하므로, 좌우에서 입을 가리고 웃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언젠가 또 평양에 갔을 때에는, 기자묘(箕子廟)를 보고 말에서 내려 우러러 보고 절하며 말하기를,“ 동쪽 사람으로 예의(禮義)의 나라에 살게 된 것은 오로지 태사(太師)의 교훈 때문이었다.” 하였다. 또 한번은 천령(穿嶺)에서 사냥에 배행한 일이 있었는데, 맹호를 포위하자 공이 술에 취하여 나무화살을 뽑아 활에 메고 말을 달려 들어가서 쏘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극력 만류하여 그만두었는데, 하는 일들이 모두 이와 같았다. 항시 임금의 앞에서 충서(忠恕) 두 자를 써서 지성스럽게 진계(陳啓)하니, 성종이 충직하다고 여겨 드디어 크게 등용하였다. 공은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가짐이 더욱 검약하여 매양 술상에는 흑두채(黑豆菜)나 고채(苦菜 씀바귀)가 아니면 송아(松芽) 같은 것으로 안주로 삼았고 오로지 번화한 것은 싫어하였다. 《용재총화》
○ 정포은(鄭圃隱) 문충공(文忠公)의 사당이 예전에는 영천현(永川縣)에 있었다. 손문정(孫文貞) 칠휴공(七休公)이 이 도(경상도)의 안찰사(按察使)로 순찰하여 영천(永川) 군경을 지나다가, 마상에서 술이 취하여 잠이 들어 혼혼(昏昏)히 졸면서 포은촌(圃隱村)을 지나가는데 꿈에 빈발(鬢髮)이 하얗고 의관이 점잖은 한 노인이 희미하게 나타나서 스스로 포은(圃隱)이라 하며 말하기를, “사는 집이 퇴폐하여 풍우를 가리지 못한다.” 하면서 부탁의 뜻이 있는 듯한지라, 칠휴가 놀라 깨어 이상히 여기고 옛 노인에게 물어서 그 고지(古趾)를 찾아서 군민들을 권면하여 사당을 짓게 하였다. 사당이 완성되자 제물을 갖추어 몸소 전을 드리고 낙성식을 하였으며, 스스로 큰 잔을 들어 마시고 취하여 벽에 글을 쓰기를, “문 승상(文承相 남송 말기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과 충의백(忠義伯 포은의 봉호가 충의백임) 두 선생은 간담(肝膽)이 서로 비치도다. 일신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기강을 세웠으니, 천만 세를 두고 경앙(景仰)하여 마지않는도다. 이(利)가 있는 곳을 찾아 고금이 분주하건만, 서리와 같이 맑고 눈같이 희며, 송백(松栢)과 같이 창창(蒼蒼)하도다. 여기에 한 칸 집을 얽어서 풍우를 가리게 하였으니, 공의 영혼이 편안할 때, 내 마음도 편안하도다.” 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충성된 혼과 굳센 넋은 천지간에서 애연(藹然)한 화기로 조화원기(造化元氣)와 같이 흐르나니, 어찌 구구히 사당집의 성하고 헐어진 것으로써 인간에게 청구하는 바가 있으리오마는, 생각건대 이 늙은이의 흉중이 평화하고 아름다우며 평소에 충서(忠恕)로써 마음을 삼았으므로 혹 황홀한 사이에 서로 감통(感通)할 수 었었던 것인가. 《용천담적기》
○ 칠휴가 열읍(列邑)을 안행(按行)하면서 길가에 있는 효자와 열녀의 정문을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전배(展拜)하며 지나는데, 어느 날은 금오산(金烏山) 아래에 있는 길재(吉再) 선생의 고거(故居)에 나아가서 글을 지어 전드리기를, “사당 아래서 우러러 절하니, 생시의 모습이 방불하외다. 오직 오산(烏山)과 낙수(洛水)는 예 같은데, 선생을 생각함이여, 어디 계신지요. 누른 파초 열매와 붉은 여자(荔子 과일 이름)를 전드리니 영령(英靈)이여 흩어지지 않을 것을 바라나이다.” 하였다. 이 늙은이는 문자를 깎고 다듬는 데에 뜻이 없으면서도 흉중에서 나오는 바가 자연히 이와 같았으니, 그 풍개(風槩)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용천담적기》
○ 손물재(孫勿齋 손순효)가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에 가뭄을 만나면 매양 재계하고 정성을 들여서 비를 비는데, 문득 응하여 비가 오면 모르되, 그렇지 아니하면 노(怒)하여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를 너에게 빌었는데, 너는 비를 주지 아니하니, 어찌 된 것이냐.” 하였으니, 신을 노하게 하는 말은 비록 스스로 반성하는 도리는 아니나, 만일 자신이 정성스럽지 아니하였으며, 반드시 능히 이 같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병진정사록》
○ 무릇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에는 정신이 어지럽지 아니하나, 귀화자(歸化者 죽는 자)가 정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면, 진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상(二相) 손순효(孫舜孝)는 항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고통이 없이 죽기를 원한다.” 하더니 하루는, 재상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담화하고는, 새벽에 일어나서 그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의 기운이 불편하니 아이들을 불러오고 속히 밥을 지으라.” 하고, 이어 말하기를, “내가 어릴 때에 책을 끼고 사문(師門)에 다니던 것을 흉내내 보겠다.” 하고는 이에 한 권의 책을 끼고 계단을 두어 차례 오르내리더니, “피곤하다. 내 쉬겠다.” 하고서는, 가만히 베개에 누우니, 집안 식구는 잠들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얼마 후 보니, 숨이 끊어져 있었다. 좋은 소주를 큰 병에 넣어 영석(靈石) 아래 묻어 두라고 전부터 명(命)하여서, 그같이 하였다. 《소문쇄록》
○ 참판(參判) 권경우(權景祐)는 성묘조 때에 감찰로 있으면서 서장관이 되어 중국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다. 그때 역관들이 과대하게 물화를 가져오므로 역로(馹路)가 떠들썩하였다. 그 물화를 부탁한 것은 권귀의 집안과 많이 관련되었는데, 공은 일체를 탐색하여 아뢰게 하되 한 필의 직물이라도 부탁한 자는 모두 조옥(詔獄 의금부)에서 국문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세 품계를 뛰어 승진하게 되었다. 정언이 되어서는 대간을 창도하여 임사홍(任士洪)의 축출을 청하였는데, 말이 매우 강직하였다. 임사홍이 그날 밤에 공의 집에 가서 거짓 모르는 체하고 말하기를, “누가 감히 이런 언론을 하였는가.” 하니, 공이 솔직히 대답하기를, “오직 나라야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소.” 하니, 임사흥은 기가 막히어 감히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홍문관에 있을 때 말하기를, “폐비가 비록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여염(閭閻)집에 함부로 처해 있을 수는 없다.”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너는 음흉하게 세자에게 붙어서 후일의 영화를 바라는 것이로구나.” 하면서, 하옥을 명하고 많이 힐책하니, 공이 조금도 막히지 아니하고 정성을 다하여 역대 임금의 폐비에 대한 일을 끌어다 증거로 진술하니, 그 말이 더욱 개절(剴切)한지라, 임금이 이에 노여움을 풀고 그의 관직만 파하였다. 《패관잡기》
○ 판서 정석견(鄭錫堅)은 시원스러워서 작은 예절에 구애하지 아니하였다. 홍문관은 본래 구사(丘史)가 없고, 다만 선노(選奴) 하나만 있었다. 그러므로 관원들이 출행할 때에는 타사(他司)에서 구사를 빌리는 것이 예(例)로 되어 있는데, 정석견은 응교(應校)가 되어서도 홀로 구사를 빌리지 아니하고, 다만 납패(蠟牌)를 든 조졸(皁卒)이 앞에서 인도하여 가운데서 말을 타고, 그 뒤에 종 하나만 따라가는지라, 길에서 보는 자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비웃으며 말하기를, 산자관원(山字官員 셋만 늘어선 것이 산(山) 자와 같음을 가리킨 말)이라고 하였다. 동료가 희롱하기를, “한 번 구사를 빌리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대의에 어긋나기로 이같이 위엄을 잃느냐.” 하니, 정석견이 웃으며 말하기를, “구사를 빌리는 것은 남의 눈앞의 일이요, 호위하는 자의 많고 적은 것은 등 뒤의 일이다. 보이지도 않는 일을 하기 위하여 남의 앞에서 구차한 말을 하는 것은 내 맹세코 하지 않겠다. 차라리 산자관(山字官)이 될지언정, 남에게 구사를 빌리는 것은 원치 아니한다.” 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대소하였다. 《사재척언》
○ 청성군(淸城君) 한치형(韓致亨)이 형조 판서가 되어서 근무가 심히 성실하여 그 밑에 있는 낭관들이 아침저녁으로 견디지 못하고 매우 괴로워하였다. 그 족질인 한건(韓健)이 정랑으로 있었는데, 어느 날 틈이 있을 때에 문안차 가서 조용히 말하기를, “함종군(咸從君) 어세겸(魚世謙) 같은 이는 비록 늦게 출근하여 일찍이 파하여도 오히려 아무 일이 없는데, 존숙(尊叔)은 어찌 노고를 이렇게 많이 하시나이까.” 하니, 한 청성군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대답하기를, “함종은 도덕과 문장이 모두 우수하여 비록 송사를 결단함에 게으르더라도 취할 바가 있지만, 나와 너는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으니, 다만 직무에 부지런한 것이 좋지 아니하냐. 나의 뜻은 이렇다.” 하니, 한건이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충민공잡기》
○ 강응정(姜應貞)의 자는 공직(公直)이요, 호는 중화재(中和齋)며 은진(恩津)에 살았고, 효행으로 칭찬이 있었다. 일찍이 어머니 병환에 3년 동안 띠를 풀지 아니하고 약은 반드시 친히 맛보고 드리더니, 하루는 꿈에 천신이 뜰에 내려와서 강공직에게 말하기를, “내일 손님이 올 것이니, 반드시 너의 어머니 병을 치료하리라.” 하더니, 이튿날 아침에 과연 한 소년이 와서 이름은 원의(元義)이며 윤왕동(輪王洞)에 산다면서 유숙하기를 청하는지라, 공직이 쉬게 하였다. 어머니 병을 물으니, 소년이 과연 의약을 알므로 소년의 말에 따라 시험하였더니, 15일 만에 병이 나았다. 후일 부모상에 거할 때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행하고, 겨울에도 맨발에 솜옷을 입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나라에서 알게 되자, 정문을 짓고 그 집에는 정역(丁役)을 면하게 하였다. 강공직은 사람됨이 경서를 잘 외우며, 인명(人命)에 대해 추점(推占)을 하였고 또 의술을 알았고, 겸하여 《지리서(地理書)》에도 능통하였다. 소시에 태학(太學)에서 놀며 장안의 준사(俊士)와 함께 주문공의 향약(鄕約) 고사에 따라 아침과 밤에 《소학》을 강론하였는데, 당시의 저명한 선비들이 모두 모였다. 이를테면 김용석(金用石)자는 연숙(鍊叔)ㆍ신종호(申從濩)자는 차소(次韶)ㆍ박연(朴演)자는 문숙(文叔)ㆍ손효조(孫孝祖)자는 무첨(無忝)ㆍ정경조(鄭敬祖)자는 효곤(孝昆)ㆍ권주(權柱)자는 지경(枝卿)ㆍ정석형(丁碩亨)자는 가회(嘉會)ㆍ강백진(康伯珍)자는 자온(子蘊)ㆍ김윤제(金允濟)자는 자주(子舟) 들인데, 이들은 그 우두머리요,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이를 기뻐하지 아니한 자들이 있어 말하되, 소학계 혹은 효자계라고 지칭하며, 부자(夫子)의 사성(四聖)과 십철(十哲)에 비기며 조롱하였다. 공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고향에서 죽을 때까지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남효온 사우명행록》
○ 김굉필(金宏弼)의 자는 대유(大猷)인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에게 수업하였고, 경자년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현풍(玄風)에서 살았다. 행실이 견줄 수 없을 만큼 돈독하여, 평소에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하였고 인정(人定)을 친 후에야 취침하며, 닭이 울면 곧 일어났다. 그리고 정실(正室) 이외에는 여색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손에는 《소학》을 놓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이 혹 국가사를 물으면 반드시 대답하기를 “소학 동자가 어찌 대의(大議)를 알겠냐.”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문학을 배우면서 여전히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여도 《소학》을 읽는 중에 지난날의 잘못을 깨우친다.”라고 하였는데,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 글은 성인을 배우는 근본 터전이니, 노재(魯齊 원 나라의 허형) 후에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으리오.”하였으니, 그를 추중함이 이와 같았다. 30세 후에야 다른 글을 읽었으며, 후진들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곧 이현손(李賢孫) 명양부정(鳴陽副正)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참(朴漢參)ㆍ윤신(尹信)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는데, 그들은 좋은 인재로서 독실한 행실이 또한 그 스승과 같았다. 나이가 더욱 많아지고 도가 더욱 높아지자 세상일을 돌이킬 수 없을 것과,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익히 알고서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기려 하였으나 세상 사람도 역시 알았다. 필재(畢齋) 선생이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아무런 건의하는 일이 없으니, 김대유(金大猷)가 시를 지어 보내기를,
도가 겨울에는 가죽옷을 입고, 여름에는 얼음물을 마시는 데 있다지마는 / 道在冬裘夏飮氷
개면 행하고 비오면 그치는 것이야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 / 霽行潦止豈專能
난초가 만약 속된 것을 따른다면 결국 변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
누가 소만이 밭갈고 말만을 탄다고 믿으리오 / 誰信牛畊馬可乘
라고 하였다. 선생이 화답하기를,개면 행하고 비오면 그치는 것이야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 / 霽行潦止豈專能
난초가 만약 속된 것을 따른다면 결국 변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
누가 소만이 밭갈고 말만을 탄다고 믿으리오 / 誰信牛畊馬可乘
분수 밖에 벼슬을 하여 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을 돕고 세상을 바로잡는 데 내가 어찌 능할쏜가 / 匡君救俗我何能
후배들로 하여금 나의 우졸을 조롱하게 하였으나 / 從敎後輩嘲迂拙
권세와 이익을 구차하게 바라지 아니하네 / 勢利區區不足剩
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말을 싫어해서 지은 글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달리하게 되었다. 정미년에 부상(父喪)을 만나서는 죽을 먹고 곡읍(哭泣)하는 슬픔이 지나쳐서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대유는 《소학》에 의하여 몸가짐을 하며, 옛 성인으로써 준칙을 삼고, 또 후학(後學)을 불러들였는데, 순순(恂恂)히 쇄소(灑掃)하는 예를 지켜 행하고 육예(六藝)의 학을 닦는 제자가 전후에 가득한지라, 비방하는 여론이 바야흐로 비등하니, 정자욱(鄭自勗 정여창)이 그만둘 것을 권하였으나, 대유는 듣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중 행(陸行)은 선교(禪敎)를 베풀고, 제자 천여 명이 학업을 하는데, 그 벗이 만류하며 ‘화환(禍患)이 두렵다.’ 하니, 육행이 답하기를, ‘선지 선각(先知先覺)로 하여금 후지 후각자(後知後覺者)를 깨우쳐 주는 것이니, 내가 아는 것으로써 남에게 일러줄 뿐이다. 화복이 있는 것은 하늘이 하는 것이니, 내가 어찌 관여할 것이리요.’ 하였다. 육행은 비록 중이나, 어찌 취할 말이 없으리오. ” 하였으니, 그 말이 지공(至公)하다고 하겠다. 《추강냉화》임금을 돕고 세상을 바로잡는 데 내가 어찌 능할쏜가 / 匡君救俗我何能
후배들로 하여금 나의 우졸을 조롱하게 하였으나 / 從敎後輩嘲迂拙
권세와 이익을 구차하게 바라지 아니하네 / 勢利區區不足剩
○ 김대유(金大猷)는 성리학에 연원(淵源)을 가지고 근면 독실하여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송묘조 때에 덕행으로 처음 등용되었다가 여러 번 천거되어 형조 좌랑에 추천되었다. 과거 수십 년 전에 나를 책망하기를, “군과 이미 절교를 하고자 하였으나, 인정상 차마 그러지 못하노라.” 하므로,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군이 결단할 것이 아니다.” 하므로, 다시 추궁하여 물은즉, “백공(伯恭 남효온)ㆍ백원(百源 이총)ㆍ정중(正中 이정은)ㆍ문병(文柄 허반)은 모두 진풍(晉風)이 있으니, 진(晉)은 청담(淸淡)이 누(累)가 되어 10년이 가지 않아서 화가 이들에게 있었느니라.” 하므로, 나도 그로부터 맹세하고 다시는 이들과 왕래하지 아니하였더니, 후에 모두 화를 면하지 못했다. 신영희(辛永禧)《사우언행록》
○ 정여창(鄭汝昌)의 자는 자욱(自勗)인데, 일찍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서 3년을 나오지 아니하고 오경(五經)을 연구하여 궁극하고 심오한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사물의 본체와 작용이 근원은 같으나 나누어진 것이 다른 것을 알았으며, 선악이 본성은 같으나 기(氣)가 다름을 알았고, 유석(儒釋)이 도(道)는 같으나 행적(行迹)의 차가 있음을 알았다. 성리학에 잠심하여 성(性)을 깨달으니, 성한 사람이나 미친 사람들까지도 모두 공경하였다. 경자년에 왕이 성균관에 조서를 내려 경전에 밝고 덕행이 있는 유생을 구하라 하니, 관중에서 정자욱(鄭自勗)이 제일이라고 천거하였다.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이 장차 자욱에게 강경을 하도록 하려고 하니, 자욱이 그만 물러났다. 계묘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 부친인 정육을(鄭六乙)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죽었는데, 그때 자욱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상례 치른 일은 알 수 없으나, 후에 모친의 거상에는 전례(典禮)하는 법도와 죽 먹는 것을 일체 《주자가례》에 의하여 지극히 하였다. 경술년에 참의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행이 사림에서 견줄 이가 없다고 천거하여서, 특별히 조정에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으로 삼았는데, 자욱이 상서하여 사면하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포상한지라 이름이 더욱 중하여졌다. 자욱은 사람됨이 성품이 단중(端重)하여,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고, 훈채(葷菜)를 먹지 아니하며, 또 우마육(牛馬肉)을 먹지 아니하였다. 겉으로는 평범한 말을 하지만, 내심은 분명하였다. 젊어서 학관에 있을 때 남과 같이 잠을 자되, 코를 골면서도 잠을 자지 아니하였으나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는데, 어느날 최진국(崔鎭國)에게 발견되었으므로 관중에서 정아무개가 참선(參禪)하고 잠을 안 잔다고 떠들어 대었다. 《사우언행록》
○ 정자욱 선생은 소시 때에 술을 즐겨하였는데, 하루는 벗들과 지나치게 술을 마시고 들판에 넘어져서 밤을 새고 돌아오니, 그 모부인이 꾸짖기를, “네가 이같으니 내가 누구를 믿고 의뢰하겠는가.” 하니, 선생은 깊이 자각하고 그 후로는 임금이 주는 술이나 음복주 이외엔 입에 대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정 선생은 젊어서 두류산(頭流山 지리산) 기슭에 정자를 복축(卜築)하고 만년을 보낼 계획을 하고 있더니, 성묘(成廟)가 소격서 참봉을 주고 부르자 선생은 간곡히 사임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이에 나오게 되었다. 선생은 몸가짐이 심히 엄격하여, 종일토록 단좌하고 있으면서 비록 아주 더운 날이라도 그 처자도 살갗을 본 일이 없었다. 평소에 시짓기를 좋아하지 아니했으므로, 다만 한편의 시가 세상에 전하니, 그 시에 이르기를,
창포는 바람에 날려 가볍고 부드럽게 흔들리는데 / 風蒲獵獵弄泛柔
4월이라 화개에는 이미 보리가 가을이로세 / 四月花開麥已秋
두류산 천봉만학 다 보고서 / 看盡頭流千萬疊
한 척의 조각배로 다시 대강을 흘러 내려가네 / 孤帆又下大江流
라고 하였다. 이 시를 읊으면 흉중(胸中)이 쇄락(洒落)하고 세상의 속된 점이 하나도 없으니, 대개 이 사람의 사람됨을 알겠다. 화개(花開)고을 이름이다.4월이라 화개에는 이미 보리가 가을이로세 / 四月花開麥已秋
두류산 천봉만학 다 보고서 / 看盡頭流千萬疊
한 척의 조각배로 다시 대강을 흘러 내려가네 / 孤帆又下大江流
○ 포은(圃隱 정몽주) 이후에 우리나라 성리학은 실로 김대유(金大猷)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동지(同志)인 정 선생 자욱(自勗)도 성리학을 연구한 사람이다. 김대유는 이(理)에 정밀하고 정자욱은 수(數)에 정밀했는데, 아깝게도 상서로운 때를 만나서 못하여 비명으로 죽었으니, 창창(蒼蒼)한 저 하늘이 그를 어찌 하겠느냐. 중묘조 때에 다 영의정을 증직하였으며, 가묘(家廟)를 세우고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秋江) 또는 행우(杏雨)라고 한다. 재행(才行)이 탁월(卓越)하나 항시 의식(衣食)이 거칠고, 또 조랑말을 타고 다니므로 아동과 부녀자가 서로 따라다니며 손가락질하며 웃곤 하였다. 성질이 술을 즐기었는데, 그 모친의 꾸지람을 듣고서 지주부(止酒賦)라는 글을 짓고 10년을 마시지 아니하더니, 풍병이 나자 다시 마시었다가, 병세가 좀 가라앉자 다시 지주부를 짓고 5년을 마시지 아니하였다. 후에 병세가 위독해지자, 다시 술과 같이 생애하며 벼슬도 하지 아니하고, 그 집에서 세상을 마치었다. 폐조(廢朝)에서는 점필재 문도라고 하여 대유를 처형하였고, 또 소릉(昭陵)의 복위 상소를 하였다 하여 백공의 시체를 능지처참하였다. 옛날 범희문(范希文) 공이 말하되, “충신(忠信)한 분은 하늘이 돕는다고 하였는데, 두 사람은 하늘이 돕지 아니하였으니, 어찌된 이유일까.”《사우언행록》
○ 남추강(南秋江 남효온)은 성품이 강개(慷慨)하였는데, 일찍이 청한자(淸寒子 김시습)를 스승으로 삼고 물질 이외의 세상에 노닐면서 세속과는 아무 상관을 하지 않았다. 나이 18세에 성묘에게 상서하여 소릉의 복위를 청한 일이 있었고, 때로는 시사에 울분하면 무악산(毋岳山)에 올라가서 통곡하고 돌아왔는데, 시사를 논할 때는 위언격론(危言激論)을 가리지 아니하고, 비록 꺼리고 숨기는 일이라도 거리낌이 없는지라, 대유와 자욱이 경계하여 말렸으나,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김ㆍ정 두 공은 성리학에 밝고 모든 조행은《소학》을 법으로 삼으니, 그 하는 바가 실로 남추강과 다르다. 그러나 교분에 있어서는 서로 두터워 진실로 소위 ‘지란동취(芝蘭同臭)’라고 하겠다. 《병진정사록》
○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秋江)이다. 성품이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얽매이지 아니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지절(志節)이 있었다. 일찍이 상서하여 소릉의 복위를 청하였다가 귀양간 일이 있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주계정(朱溪正) 심원(沈源)과 안응세(安應世) 자정(子挺)과 벗이 되었다.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는 동문과 시험에는 나가지 아니하니, 그 자친이 권유하므로 때로는 시험에 나갔으나, 즐겨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끝내 급제하지 못하였다. 홍치(弘治) 임자년에 겨우 39세로 졸하였다. 성화(成化) 기해년에 내가 서울에 불려가 장차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남백공이 나의 시축을 구경하고 나를 한강에까지 전송한 일이 있었다. 이로부터 서로 사이가 좋아서 같이 송도에서 놀며 천마산(天磨山)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집이 고양(高陽)에 있었으므로, 당나귀를 몰아서 서로 찾아 압도(鴨島)에 가서 자면서 갈대로 불을 피우고 물고기와 게를 구워 먹으면서 운자(韻字)를 불러 시 짓는 것으로 밤을 새웠다. 나의 소개로 점필재를 호남에서 보았는데, 전부터 그의 시를 사랑한다면서 고인(古人)에 비교하였다. 그가 죽고 나자 남은 아들 충서(忠恕)가 미친병이 있어서 또 비명으로 죽었다. 나머지는 모두 사위뿐이어서 문집 초고를 모으지 않았다. 《소문쇄록》
○ 한훤(寒暄 김광필) 선생은 좌랑으로 있을 때에 진사 신영희(辛永禧)씨에게 달려가서 말하기를, “오늘 나는 마땅히 그대와 절교를 하겠다. 지금 사기(士氣)를 보면 동한(東漢)의 말과 같아서 어느 때에 무슨 화가 일어날지 모르겠는데, 나는 화가 박두하여 진퇴를 어찌할 도리가 없으나, 그대들은 멀리 고향에 가서 숨어 사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곧 이 자리에서 절교하겠노라. 내 말을 잘 들어 주겠는가.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하면서 다짐하는지라, 신공은 이로 인하여 직산(稷山)으로 내려가서 사산(斜山) 아래로 가서 안정(安亭)이라고 호하였다. 안정은 일찍이 남효온ㆍ홍유손(洪裕孫)과 같이 죽림(竹林) 우사(羽士 신선)를 맺은 일도 있어서 문장행의(文章行義)가 당시 영수였으므로, 남으로 지나는 자는 그 문에 예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경현록》
○ 강국오(姜菊塢) 경순(景醇)은 진산 강씨(晉山姜氏)의 세고(世稿)를 편찬하면서, 김 참판(金參判) 수령(壽寧)과 같이 그 시문을 메우고 고치고 하여 보는 사람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였으며, 부조(父祖)의 시명을 후세에까지 떨쳤다. 사람들은 이것을 효행이라고 하지만 나는 불효라고 생각한다. 또 상사(上舍 생진과(生進科)에 합격한 사람) 신영희(辛永禧)의 집에는 그 조부 문희공(文禧公)의 시집이 있는데, 그 우인이 말하기를, “자네의 가집(家集)을 인쇄하여 세상에 전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신영희가 대답하기를, “나의 조부는 비록 글 잘한다는 명성이 세상에 으뜸이었으나, 가집(家集)에 실려 있는 것은 하나도 전할 것이 없고, 다만 한 문생의 만장 시에 말한, ‘32세에 졸하였으니, 불행한 것 안회(顔回)와 같도다.’ 라고 한 구절 외에 아름다운 시가 없으니, 어찌 가히 간행하겠는가.” 라고 하여서 사람들은 그것을 불효라고 하지만, 나는 효행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부(祖父)의 행예(行藝)를 바른 대로 기술하여야 비로소 효행이라고 할 것이다. 가령 공교한 말과 허식하는 붓을 빌려다가 칭예한다면 그 부모의 영혼이 있을진대, 부끄러운 마음이 명명(冥冥)한 가운데에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추강냉화》
○ 남효온과 신영희는 모두 상사로 현달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그들은 사람됨이 옛 일을 좋아하고 기개가 있으며, 남에게 아부하지 아니하고 세속의 틀에서 벗어났다. 효온의 견흥시(遣興詩)에,
괴생이 안기(安期 예전 신선)와 벗을 삼으니 / 蒯生友安期
세상에서 뛰어난 늙은이인 줄을 알았다 / 知爲不世翁
대초를 어린아이같이 보고 / 豎兒看大楚
패공이라도 개미만하게 여겼다 / 蟻封視沛公
어찌하여 제왕에게 유세하여 / 如何說齊王
큰 공을 세우려 하였던가 / 顧欲作元功
만일 걸구의 변명이 아니었더면 / 若非桀狗辨
거의 대벽(大辟 사형)에 빠지고 말았으리 / 幾陷大辟中
또,세상에서 뛰어난 늙은이인 줄을 알았다 / 知爲不世翁
대초를 어린아이같이 보고 / 豎兒看大楚
패공이라도 개미만하게 여겼다 / 蟻封視沛公
어찌하여 제왕에게 유세하여 / 如何說齊王
큰 공을 세우려 하였던가 / 顧欲作元功
만일 걸구의 변명이 아니었더면 / 若非桀狗辨
거의 대벽(大辟 사형)에 빠지고 말았으리 / 幾陷大辟中
필부인 양왕손은 / 匹夫楊王孫
한 무제 때에 났다 / 生當漢武時
무제가 한창 서북방에서 일할 적에 / 帝方事西北
온 세상이 구치에 힘쓰건만 / 擧世務駈馳
허리띠를 늦추고 만호봉이 되었으나 / 緩帶食萬戶
다만 지리한 것 배웠어라 / 顧乃學支離
평소에 기후를 업신여기더니 / 平生殘祈侯
알몸으로 장사하기 기약대로 하였도다 / 稗葬得如期
또한 무제 때에 났다 / 生當漢武時
무제가 한창 서북방에서 일할 적에 / 帝方事西北
온 세상이 구치에 힘쓰건만 / 擧世務駈馳
허리띠를 늦추고 만호봉이 되었으나 / 緩帶食萬戶
다만 지리한 것 배웠어라 / 顧乃學支離
평소에 기후를 업신여기더니 / 平生殘祈侯
알몸으로 장사하기 기약대로 하였도다 / 稗葬得如期
사종(嗣宗 완적(頑籍))은 망위(亡魏)를 위하여 / 嗣宗爲亡魏
문제(文帝 진 나라 사마소)를 여우같이 여겼다 / 狐媚視文帝
미친 듯이 국생을 좋아하여 / 猖狂引麴生
60일 동안 취하여 끝장보았다 / 六旬托末契
위주(僞主)의 청혼을 물리친 것은 / 却得僞主婚
그 대절이 만세에 빛나리라 / 大節昭萬世
증적(曾賊)이 무례를 꾸짖으니 / 曾賊責無禮
우습구나. 제 생각 못하는 위인 / 可笑不自計
또문제(文帝 진 나라 사마소)를 여우같이 여겼다 / 狐媚視文帝
미친 듯이 국생을 좋아하여 / 猖狂引麴生
60일 동안 취하여 끝장보았다 / 六旬托末契
위주(僞主)의 청혼을 물리친 것은 / 却得僞主婚
그 대절이 만세에 빛나리라 / 大節昭萬世
증적(曾賊)이 무례를 꾸짖으니 / 曾賊責無禮
우습구나. 제 생각 못하는 위인 / 可笑不自計
47회나 올린 상소 / 四十七奏疏
영수(靈修 임금)의 총명을 넓히려 하였건만 / 欲廣靈修聰
마지막 사자론도 / 終然四字論
귓등에 지나는 바람만도 못하였네 / 不啻耳過風
계통의 점친 것 의뢰하여 / 賴用季通筮
말년에는 둔옹이라 호 지었네 / 末路號遯翁
한천에 한 칸 집을 세운 것은 / 寒泉一間舍
꼭 참동계(參同栔 신선되는 글) 정하기에 합당하였네 / 端合訂參同
또영수(靈修 임금)의 총명을 넓히려 하였건만 / 欲廣靈修聰
마지막 사자론도 / 終然四字論
귓등에 지나는 바람만도 못하였네 / 不啻耳過風
계통의 점친 것 의뢰하여 / 賴用季通筮
말년에는 둔옹이라 호 지었네 / 末路號遯翁
한천에 한 칸 집을 세운 것은 / 寒泉一間舍
꼭 참동계(參同栔 신선되는 글) 정하기에 합당하였네 / 端合訂參同
호원이 대송을 몰아내니 / 胡元駈大宋
양경은 황진에 어두웠네 / 兩京迷黃塵
노재 허문정공은 / 魯齊許文正
피발하고 그 신하가 되었다 / 被髮爲其臣
요 순의 도를 가져다가 / 欲將堯舜道
억지로 판옥인을 교화하려 하였건만 / 强敎板屋人
방(方)과 원(圓)은 같이할 수 없는 것이 / 方圓不能周
필경에는 새 백성 이루지 못하였다 / 畢竟無新民
라 하였고 신영희의 우의시(愚意詩)에는,양경은 황진에 어두웠네 / 兩京迷黃塵
노재 허문정공은 / 魯齊許文正
피발하고 그 신하가 되었다 / 被髮爲其臣
요 순의 도를 가져다가 / 欲將堯舜道
억지로 판옥인을 교화하려 하였건만 / 强敎板屋人
방(方)과 원(圓)은 같이할 수 없는 것이 / 方圓不能周
필경에는 새 백성 이루지 못하였다 / 畢竟無新民
남복은 뜰을 소제하고 / 男僕掃庭除
여종은 규당을 쓰네 / 女僕掃閨堂
장부는 변진을 소탕하고자 뜻하는 것 / 丈夫掃邊塵
한 집안에 있지 않다 / 志不在門楣
두옥 아래에 높이 누워 / 高臥斗屋下
내 흉중이 있는 기를 흔드노라 / 掉我胸中旗
야인은 장부가 아니다 / 野人非丈大
장부는 각자 기이하리라 / 大夫各自奇
또여종은 규당을 쓰네 / 女僕掃閨堂
장부는 변진을 소탕하고자 뜻하는 것 / 丈夫掃邊塵
한 집안에 있지 않다 / 志不在門楣
두옥 아래에 높이 누워 / 高臥斗屋下
내 흉중이 있는 기를 흔드노라 / 掉我胸中旗
야인은 장부가 아니다 / 野人非丈大
장부는 각자 기이하리라 / 大夫各自奇
말달려 급한 언덕 내리달려 / 走馬下急坂
매를 불러 높은 구름가로 들어간다 / 呼鷹入雲際
눈이 녹은 곳 찾아 말에서 내리고 / 下馬雪消處
바위에 걸터앉아 조금 쉬자니 / 踞石時少憩
마부는 찬밥을 펼쳐놓고 / 僕夫開冷飯
불 피우고 물 끓인다 / 敲火湯沸細
집은 10리나 남았는데 / 家在十里餘
산허리에 석양이 곱게 비치었네 / 山腰夕陽麗
또,매를 불러 높은 구름가로 들어간다 / 呼鷹入雲際
눈이 녹은 곳 찾아 말에서 내리고 / 下馬雪消處
바위에 걸터앉아 조금 쉬자니 / 踞石時少憩
마부는 찬밥을 펼쳐놓고 / 僕夫開冷飯
불 피우고 물 끓인다 / 敲火湯沸細
집은 10리나 남았는데 / 家在十里餘
산허리에 석양이 곱게 비치었네 / 山腰夕陽麗
꽃까지 꺾어 해진 갓 꽂았으나 / 花枝揷破笠
때묻은 소매 춤추는 팔 위에 펄럭인다 / 垢袂翻舞臂
하였다. 영희는 기개가 있었으나, 세상에는 뜻을 잃었다. 어느 사비(私婢)에게 장가들었다가, 그 상전에게 욕을 보고 화가 나서 세상을 떠났고, 효온도 죽은 뒤에 참화를 만났으니, 어찌 이들의 운명이 이렇게 기박할까. 《소문쇄록》때묻은 소매 춤추는 팔 위에 펄럭인다 / 垢袂翻舞臂
○ 김시습(金時習)은 강릉인(江陵人)이며, 신라의 후예이다. 자는 열경(悅卿)이요, 호는 동봉(東峯)ㆍ벽산청은(碧山淸隱) 또는 청한자(淸寒子)라고도 한다. 세종 을묘생인데, 5세에 능히 글을 지었으므로, 세종이 승정원에 불러서 부시를 짓게 하고, 크게 기이하게 여기어, 그 부친을 불러 이르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라. 내가 장차 크게 쓰리라.” 하였다. 을해년에 광묘가 섭정하자, 사문(沙門)에 들어가서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수락정사(水落精舍)에 거하면서 수도연형(修道煉形)을 하였다. 유생(儒生)을 보면, 말마다 공맹(孔孟)을 칭하고 입으로 불법은 이르지 아니하였다. 사람이 수련(修煉)의 일을 물어도 또한 즐겨 말하지 아니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의 좌화(坐化)한 일을 말하니, 설잠이 말하기를, “예(禮)에 좌화는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의 역책(易簀)과 자로(子路)의 결영(結纓)을 죽음에 있어 귀하게 여긴다. 그리고,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신축 연간에는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글을 지어 그 조부의 제사를 지냈는데, 그 글이 이르기를, “삼가 아룁니다. 제(帝)가 오륜(五倫)을 베풀었사온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먼저가 되고, 3천 가지 죄 중에서 불효가 제일 크다 합니다. 무릇 천지 사이에 살면서 누가 양육의 은혜를 저버리오리까. 그러므로 호랑(虎狼)이 같은 악수(惡獸)며, 수달(豺獺) 같은 미충(微虫)이라도 어버이를 사랑하는 성품을 온전히 할 수가 있고, 또 근본을 알며 갚은 정성을 삼가나이다. 이것은 모두 천리(天理)의 당연함 이어서 물욕(物慾)에 가려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우둔한 소자는 본지(本支)를 이으려고 젊어서는 이단(異端)에 침체되어 미몽(迷懵)하여 강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장차 수도(修道)로써 발탁될 것이요, 황설(謊說)로 윤회(輪回) 같은 것이 없음을 깨달았나이다. 젊어서는 그런대로 수도하였지만, 말년에 바야흐로 뉘우쳐서 이에 예전(禮典)과 성경(聖經)을 상고하고 찾아서 추원(追遠)하는 홍의(弘儀)를 고정(攷定)하였고, 청빈한 활계(活計)로 참작(參酌)하였나이다. 그리하여 간략(簡略)하면서 조촐히 할 것을 힘쓰며, 풍부히 하며 정성스럽게 하나니, 한 무제(漢武帝)는 70세에야 비로소 전천추(田千秋)의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백 세가 되고서야 허노재(許魯齋)의 풍화에 감화되었나이다. 상로(霜露)에 젖음을 느끼고 세월이 감을 근심하니 경황(驚惶)함을 마지아니하며, 탄아(嘆訝)마저 진실로 많습니다. 그저 죄를 속(贖)할 수 있어서 천지의 양제(兩際)에서 용납된다면 혹시나 면목을 가지고 구원(九原)에서 조종(祖宗)을 뵈려고 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임인년 이후부터서는 세상이 쇠하려는 것을 보고 시달려 인간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여염간(閭閻間)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로 남과 더불어 장례원(掌隷院)에서 다투고 송사하였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시중을 지나가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보고, “네 놈도 그만 쉬어라.” 하고 외치니, 정창손이 들은 척도 아니하며 지나갔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위태롭게 여겼으며 일찍이 교유하던 자들도 모두 절교하며 왕래하지 아니하였다. 홀로 시중의 정신병자들과 같이 재미있게 놀고 때로는 술에 취하여 길가에서 거꾸러지는가 하면, 늘 헛웃음을 웃고 하더니, 후일에 설악산(雪岳山) 또는 춘천산(春川山)에 들어가 있으면서 출입이 무상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한계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중(正中 이정은)ㆍ자용(子容 우선언)ㆍ자정(子挺 안응세), 그리고 나남효온이다. 그가 시문을 지은 것이 수만 편인데, 옮겨갈 때에 흩어져서 거의 없어졌고, 간혹 조정의 신하와 유사들이 절취하여 자기 소작으로 만들었다. 《사우명행록》
○ 김시습은 유양양(柳襄陽 유자한)에게 수백 마디 편지를 보냈는데, 그 대략을 말하자면, “나는 난 지 8개월 만에 글자를 보고 알았다. 그리고 친척 할아버지 되는 최치운(崔致雲)이 나의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주었다. 3세 때에 능히 글을 엮었는데, 거기에,
복숭아꽃은 붉고 버들잎은 푸르러 3월이 저물었는데 / 桃紅柳綠三月暮
구슬이 바늘에 꿰인 것은 솔잎에 이슬일세 / 珠貫靑針松葉露
라는 시를 지었다. 5세 때에는 《중용》과《대학》을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읽었는데, 그때 사예(司藝) 조수(趙須)가 자설(字說)을 지어 달라고 명하여 지어준 일도 있다. 정승 허조(許惆)가 나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노자(老字)를 운(韻)으로 시를 지어라.’ 하므로, 내가 그 소리에 응하여서구슬이 바늘에 꿰인 것은 솔잎에 이슬일세 / 珠貫靑針松葉露
늙은 나무가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안 늙었네 / 老木開花心不老
라고 하였더니, 허 정승이 무릎을 치며 탄상하고, ‘이는 이른바 신동이라는 것이다.’ 하였다. 세종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대언사(代言司)로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시험하라고 명하니, 박이창은 자기 무릎 위에 앉히고 벽화 산수도를 가리키면서, ‘네가 저 벽화를 두고 시를 지을 수 있겠느냐.’ 하기로, 내가 응하기를,작은 정자에 배가 매인 집은 누가 사는고 / 小亭舟宅何人在
하였다. 이같이 작문 작시(作文作詩)한 것이 매우 많았다. 세종이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친히 데려다 보고자 하나 사람들이 듣고 해괴히 여길까 두려워한다. 가리고 숨겨 키워서 나이가 들고 학업이 성취함을 기다려서 장차 크게 쓰겠노라.’ 하면서, 물건을 주시고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13세 때에는 대사성 김반(金泮)의 문하에 가서 《논어》ㆍ《맹자》ㆍ《시전》ㆍ《서전》, 그리고 《춘추》를 읽었으며, 또 대사성 윤상(尹祥)에게 가서 《주역》과 《예기》, 그리고 제사(諸史)를 읽었다. 좀 장성하여서는 영달을 기쁘게 여기지 아니하고, 또 친척과 이웃에서 넘치게 칭찬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다가 세상과 내 마음이 서로 어긋나서 곤란하게 되는 차에, 세종과 현릉(顯陵 문종)이 연이어 승하하셨고, 세종 초기에 원로(元老)와 대가들이 모두 귀신의 명부(鬼簿)에 오르고, 다시 이교(異敎 불교)가 크게 일어나 사문(斯文 유교)을 능멸하니, 나의 뜻은 이미 거칠 대로 거칠어졌다. 드디어 중과 짝을 하고 산수를 찾아 놀았으니, 세상 사람이 나를 보고 불교를 좋아한다고 하나, 나는 이도(異道)로써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자 하였으므로, 세조가 전지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모두 나가지 아니하고 몸가짐은 더욱 거칠고 방탕해졌다. 이로부터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하여 나보고 어리석다 하고, 혹은 나를 미치광이라고 하면서, 우마(牛馬)와 같이 대하나, 나는 모두 그에 응해 준다. 이제 성성(聖上)이 등극(登極)하여 어진이를 등용하고 충간(忠諫)을 잘 들으시므로 벼슬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10여 년 전후에 육적(六籍 여섯 가지 경서)을 익숙하게 연구하여 점차 정밀하여졌지만, 여러 번 내 몸과 세상이 서로 어긋나서, 둥근 도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 같고, 옛 친구는 모두 죽고 새 사람은 낯이 익지 아니하니, 누가 나의 본뜻을 알아주리오. 그러므로, 다시 산수간에 방탕하였노라. 이것이 모두 사실이니, 공만은 알아주시오. ”하였다. 《패관잡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평소의 그 심회(心懷)를 세상 사람이 엿볼 수 없다. 그의 시집을 보면, 미궐(薇蕨) 두 자를 잘 사용하였는데, 그 본뜻이 있는 곳은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내(김정국)가 늙은 중을 만나니 많은 현묘한 이치를 들은지라 그가 배운 스승을 물으니, 그가 답하기를, “젊을 때 사미(沙彌)로 있으면서 오세(五歲 김시습의 별칭)를 모시고 섬기었는데, 오세의 저술로 세상에 전하는 것은 겨우 백에 하나나 둘이 될까 합니다.”라고 말하므로, 그 이유를 물으니 그 중이 말하기를, “노승이 중흥사(中興寺)에서 오래도록 모시고 있었는데, 매양 비온 뒤에 산물이 불으면, 백여 장의 종이를 끊어 가지고는 나에게 필연(筆硯)을 들리고 뒤따르게 하여 물결을 따라 내려가 반드시 급류를 찾아 앉아서는, 절구ㆍ율시 또는 오언 고풍(五言古風)을 침음(沈吟)하여 시를 짓되, 조각 종이에 쓰고 물에 흘려 멀리 보내고 나서는, 또다시 써서 흘려 보내고 하기를 밤새도록 하여 조각 종이가 다 없어져야 집에 돌아옵니다. 어느 때는 하루에 백여 수의 시를 지어 읊었습니다.” 하였으니, 이 또한 그의 본뜻을 엿보기 어려운 점이다. 《사재척언》
○ 동봉(東峯)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세상 법규를 털어버리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서는, 그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고쳤다. 남추강(남효혼)과 더불어 세상 밖에 놀면서 미친 듯이 읊조리며 방랑하며 한 세상을 희롱하였다. 세상을 도피하여 불문(佛門)에 들어가서도, 그 계율(戒律)을 지키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이 미친 중으로 지목하였다. 시가(市街)에 지나가면서 어느 때는 한 곳만을 눈여겨보고는 돌아가기를 잊으며, 때로는 우두커니 서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는가 하면, 어느 때는 가로(街路)에서 똥오줌을 누어서 여러 사람이 보는 것도 피하지 아니하며, 또 뭇 아이들이 욕하고 웃으며 다투어 기와 쪽을 조약돌을 던지면서 쫓기도 하였다. 그가 소유한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남들이 가져가고 도둑질하는 대로 맡겨두고 조금도 개의하지 아니하고 있다가, 얼마 뒤에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을 청하니, 그 사람이 좋아하지 아니하는지라 설잠은 관청에 고발하여 면대하여 공술하고, 싸우기를 시끄럽게 하고 시정(市井)에서 싸우듯이 하며, 마침내 승소하고 증서를 받아 품 안에 품고 관문을 나오더니,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크게 웃곤, 급히 증서를 내어 찢어서 개천물에 던졌으니, 그가 사람을 조롱하고 세상을 업신여김이 이와 같았다. 세조가 일찍이 법회(法會)를 내전에서 베풀면서, 설잠도 간선되어 그 회에 참여하였다. 새벽이 되자, 문득 도망쳐 어느 곳으로 갔는지 몰라 사람을 시켜 찾아 보았더니, 가로상에 있는 똥독 속에 빠져 있고, 겨우 얼굴만 보일 정도였다. 한 사미(沙彌)가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쟁쟁(錚錚)한 소리를 내면서 낭랑히 길게 읊으면, 그 소리가 창공에 울리어 처량한 여감(餘感)이 있으므로, 달빛 환한 밤을 만날 때마다 깊은 밤에 홀로 앉아 그 사미에게 이소경(離騷經)을 한 차례 읊게 하곤, 그때마다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젖게 하였다. 성질이 술을 좋아하였는데 취하면, “우리 영묘(세종)를 보지 못하는구나.”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매우 비통한 심정을 풀지 못하였다. 여러 비구(叱丘)들은 항시 신사(神師)로 추대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드리더니, 어느 날은 합사(合辭)하여 청하기를, “저희 제자들은 대사(大師)님을 모신 지 오래오나, 아직까지 일교(一敎)를 해 주시기를 꺼리오니, 대사님은 그 청정한 법안(法眼)을 끝내 누구에게 주시려고 하십니까. 제생들이 나아갈 방향을 헤매고 있으니 저희들의 소원은 금비(金篦)로 긁어내시는 것입니다.” 하고, 청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니, 설잠이, ‘그래라.’ 하고, 크게 법연(法筵)을 열어서 설잠이 몸에 가사와 법의를 갖추고 가부좌를 하니, 중들이 모여들어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벌여 앉아서 귀를 기울이며 들으려고 한지라, 설잠이 말하기를, “소를 한 마리 끌어오라.”고 하였다. 모두들 이유를 헤아리지 못하고 소를 끌어다가 뜰 앞에 매어 두었다. 설잠이 또다시 꼴 한 뭇을 소 뒤에 두라고 하는지라, 그대로 행하니 설잠은 크게 웃으며, “너희들이 법을 듣는다는 것은 이와 같으니라.” 하니, 소란 축류(畜類) 가운데 가장 우둔한 것이니 사람의 미명(迷冥)하고 무식한 자를 시속에서 소 뒤에 꼴을 둔 것이라고 한다. 중들은 낯빛을 붉히며 물러갔다. 근대의 시승(詩僧)을 말하면 설잠이 그 영수(領袖)인데, 그 시가 법도에 맞고 중후하여 중의 티가 없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서 저서(금오신화)를 석실(石室)에 감추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설잠을 아는 이가 있으리라.” 하였다. 그 글은 대개 괴이한 것을 기술하여 우의(寓意)한 것인데, 전등신화(傳燈新話) 등을 본떠서 지은 것이다. 《용천담적기》
○ 심원(深源)의 자는 백연(伯淵)이요, 호는 성광(醒狂), 묵재(黙齊) 또는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고 한다. 태종의 현손이며 나(김정국)와 동년생으로 달과 날이 나보다 뒤졌다. 경서에 밝고 덕행이 있으며 겸하여 의술에 능하였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무당과 불교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평소에도 갓과 띠를 두르고 손에는 책을 놓기 아니하였다. 전강(殿講)에서 사서와 오경을 통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오르고, 주계부정(朱溪副正)의 행직을 받았다. 나이 25세를 전후하여 다섯 차례 치도(治道)를 상소하였는데, 어느 때는 윤허(允許)를 얻고 어느 때는 얻지 못하였다. 또 조정에서 고모부 임사홍(任士洪)의 무도하고 딴 마음이 있음을 논박한 일로 그의 조부에게 미움받아 장단(長湍)으로 귀양가고, 또 이천(伊川)으로 귀양갔었다. 병든 부모를 찾아 보아야겠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글이 간곡하고 지극한지라 윤허를 얻었다. 정미년에는 종친과(宗親科) 시험에서 경사(經史)를 당하여 제1인으로 발탁되니 풍악과 술 그리고 2품을 내렸으나 군(君)에 봉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는 전에 그의 조부에게 불순히 한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명행록》
○ 주계정(朱溪正) 심원은 다만 성리학에만 능숙할 뿐 아니라, 또한 시를 잘 지었다. 비온 뒤 저녁 때 바라보고 지은 시에 이르기를,
한 보지락 봄비에 살구꽃은 지고 / 一犁春雨杏花殘
여기저기 사람들은 맑은 물 속에서 밭갈이하누나 / 處處人耕白水間
홀로 창망한 강해 위에 섰으니 / 獨立蒼茫江海上
서운함을 이기지 못하고, 삼각산만 바라보누나 / 不勝惆悵望三山
하고, 또 운계사(雲溪寺)에 가서 읊기를,여기저기 사람들은 맑은 물 속에서 밭갈이하누나 / 處處人耕白水間
홀로 창망한 강해 위에 섰으니 / 獨立蒼茫江海上
서운함을 이기지 못하고, 삼각산만 바라보누나 / 不勝惆悵望三山
나무 그늘 얼룩지고 돌은 서려 있는데 / 樹陰濃淡石盤陀
휘돌아드는 한 줄기 길은 시냇물 지나간다 / 一逕縈回透澗阿
확확 닥치는 향풍이 코에 스치니 / 陣陣春風通鼻觀
멀리 저 숲 아래 남은 꽃송이 있음을 알겠구나 / 遙知林下有殘花
하였다. 《소문쇄록》휘돌아드는 한 줄기 길은 시냇물 지나간다 / 一逕縈回透澗阿
확확 닥치는 향풍이 코에 스치니 / 陣陣春風通鼻觀
멀리 저 숲 아래 남은 꽃송이 있음을 알겠구나 / 遙知林下有殘花
○ 주계군 심원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성묘조 때에 자기 고모부 되는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알고 상소하여 힘껏 사리를 밝히어 마침내 임사홍을 멀리 귀양보내었다. 연산조 말년 임사홍이 세도를 부릴 적에 드러내어 죽였는데, 중종이 즉위하여서는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기어 작위를 주고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으니, 대개 심원의 의향은, “내가 종친으로서 마땅히 나라와 흥망을 같이할 것이요, 어찌 한 사가(私家)의 고모부를 두둔하겠는가.” 한 것이었다. 상소를 읽으면 늠름한 생기가 떠오른다. 《패관잡기》
○ 정은(貞恩)의 자는 정중(正中)이요, 호는 월호(月湖), 풍곡(風谷) 또는 설창(雪牕)이라고 한다. 수천부정(秀泉副正)을 제수되었는데, 음률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강개히 슬픈 곡조를 타면, 지나가던 행인들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 사람됨이 독후(篤厚)하고 스스로 겸손하며, 학식과 도량이 있었으며 총명하였다. 학문을 할 때에는 먼저 이(理)를 밝히고 난 후에 문(文)을 하므로 스승이 수고롭지 않았으며, 시를 지을 때에는 먼저 격(楁)에 맞추고 난 후에 문사를 꾸미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아니한다. 또 덕(德)을 닦을 때에는 먼저 내심을 가다듬고, 후에 외형을 바르게 하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처신할 때에는 지위가 높은 것으로 사람을 억압하지 아니하여 가장 가난한 선비 같았다. 《사우명행록》
○ 종실인 수천부정 정은은 날마다 시주(詩酒)와 금파(琴琶)로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고, 시문과 음률이 백원(百源 이창)과 이름이 같았다. 김대유(金大猷)의 책망을 듣고 모든 구습을 버리고, 짐짓 속태(俗態)를 꾸미고 두문불출하고 과감히 친구와 왕래를 끊었더니, 과연 홀로 무사히 보존하였다. 참판 김유(金紐)는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솜씨가 시냇가에 피어 있는 매화의 격(格)과 같다고 감탄하였다. 그가 지은 입춘첩시(立春帖詩)에 이르기를,
가늘게 홍전을 오려 소춘에 걸었다 / 細剪紅箋架小春
하고 또 마상(馬上)에서 구두로 시를 읊기를,
뽕나무가 마르니 소가 혀를 토한다 / 桑乾牛吐舌
고 하였으니, 그의 시 짓는 솜씨가 대개 이와 같았다. 《사우언행록》하고 또 마상(馬上)에서 구두로 시를 읊기를,
뽕나무가 마르니 소가 혀를 토한다 / 桑乾牛吐舌
○ 국조(國朝)의 아악(雅樂)으로 말하면, 박연(朴堧) 후에 사족(士族)으로는 칭할 만한 자가 없더니, 성화(成化) 연간에 유추(有秋)임흥(任興) 가 처음 드러나고 이어 정중(正中 이정은)과 백원(百源 이창), 그리고 국문(國聞) 정자지이 한때에 같이 일어나서 구습(舊習)을 일소하였고, 향방을 교화하는데 있어서 위에서 말한 4명이 으뜸이었다. 나(남효온)는 음률을 알지 못하나, 날마다 사자(四子)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곤 하였다. 광대들의 논평을 들으면 대개 다음과 같으니, “유추(有秋)는 마음씨는 평화하면서 그 가락이 저하하고, 국문은 가락은 절묘한데 마음씨가 혹(酷)한 편이다. 또 백원은 웅혼(雄渾)하기는 하나 솜씨가 좀 잡되고, 정중은 곡조는 고상하나 기(氣)가 편벽된다.” 하였다. 내가 정중과 같이 송도(松都)에서 놀 때에 그가 거문고를 타면, 사인(士人)과 기녀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울에 돌아오는 날에 말에 오르기를 머뭇거리니 행인들도 서서 보았다. 백아(伯牙)가 죽은지 천 년 후인 오늘에 이 사람이 아니고 또 누가 있겠는가. 기(氣)가 편벽되다는 말은 지나치지 않다. 백원과 유추는 언제나 악기를 가지고 밤낮으로 연습하나, 정중은 집 안에 풍물(風物)이 없어 여기저기 가는 곳에서 우연히 다른 악기를 가지고도 그의 음률은 순수하였다. 나는 언제나 그 수예(手藝)가 매우 고상함에 감복한다. 그러나 음률을 아는 자는 간혹 조롱하여 말하기를, “정중의 거문고는 백아(伯牙)와 같으나, 때로는 백원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니, 어찌 제세경략(濟世經略)의 재주가 쌓여서 적은 기술에 돌아갔으므로 나오는 것이 편벽된 것이 아니랴. 나는 흐르는 눈물을 견디지 못하였으니, 아 뜻을 펴지 못함이여. 《추강냉화》
○ 현손(賢孫)의 자는 세창(世昌)이요, 신요(神堯 태조 이성계)의 후손으로 벼슬이 명양부정(鳴陽副正)에까지 이르렀다. 예에 맞게 행동하고 몸가짐을 독실히 하였으므로, 김대유(金大猷) 다음으로 꼽는다. 일찍이 관례(冠禮)를 행하려고 하자 대유가 만류하였다. 그 모친의 상사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하였다. 《사우언행록》
○ 종실(宗室) 명양부정은 성품이 조촐하여 속세에서 벗어났고, 글과 시 짓기를 좋아하였으니 그 사람됨과 같았다. 그의 견의시(遣意詩)에 이르기를,
병은 품은 채 세상 일을 멀리하고 / 懷疴謝塵事
종일토록 시편을 뒤적거린다 / 終日檢詩篇
마 넝쿨은 거친 벽을 뚫고 / 藥蔓穿疎壁
거미줄은 짧은 서까래에 쳐 있네 / 蛛絲掛短椽
술병을 기울여 남은 술을 다 마시고 / 傾壺盡餘酒
목침을 높이 베어 나는 솔개를 돌아본다 / 高枕眷飛鳶
가는 곳마다 생업이 있으리마는 / 到處生涯在
어찌 하필 성밭이 소용되리 / 何須負郭田
작은 비에 띠집이 젖었는데 / 小雨茅齋濕
새로 갠 후엔 베개와 자리가 시원하다 / 新晴枕席涼
물이끼는 주춧돌 따라 올라오고 / 水衣緣礎上
뜰풀은 담장보다 더 자라 있네 / 庭草過墻長
이슬이 외꽃을 씻어 깨끗하고 / 露浥苽花淨
바람은 혜엽(蕙葉)의 향기 머금고 있다 / 風含蕙葉香
유연히 낮잠을 깨고 나니 / 悠然午眠破
수풀 위에 석양이 아련하다 / 林杪淡夕陽
하였다. 가을 시에는,종일토록 시편을 뒤적거린다 / 終日檢詩篇
마 넝쿨은 거친 벽을 뚫고 / 藥蔓穿疎壁
거미줄은 짧은 서까래에 쳐 있네 / 蛛絲掛短椽
술병을 기울여 남은 술을 다 마시고 / 傾壺盡餘酒
목침을 높이 베어 나는 솔개를 돌아본다 / 高枕眷飛鳶
가는 곳마다 생업이 있으리마는 / 到處生涯在
어찌 하필 성밭이 소용되리 / 何須負郭田
작은 비에 띠집이 젖었는데 / 小雨茅齋濕
새로 갠 후엔 베개와 자리가 시원하다 / 新晴枕席涼
물이끼는 주춧돌 따라 올라오고 / 水衣緣礎上
뜰풀은 담장보다 더 자라 있네 / 庭草過墻長
이슬이 외꽃을 씻어 깨끗하고 / 露浥苽花淨
바람은 혜엽(蕙葉)의 향기 머금고 있다 / 風含蕙葉香
유연히 낮잠을 깨고 나니 / 悠然午眠破
수풀 위에 석양이 아련하다 / 林杪淡夕陽
하얀 이슬이 내린 뒤라 숲이 깨끗하고 / 白露園林淨
높은 바람에 나뭇잎이 쇠잔하다 / 高風草木衰
술잔을 엎어 죽엽(竹葉 술 이름)을 따르고 / 覆杯流竹葉
물길어 상지(桑枝 차 이름)를 달인다 / 汲井煮桑枝
지는 해에 기러기 변방에 줄지었고 / 落日雁橫塞
가을 창에는 벌레가 실을 토해낸다 / 秋窓虫吐絲
누가 병들고 가난한 사람 가련히 여기겠는가 / 誰憐貧病客
길게 초인사나 읊어보자 / 長吟楚人詞
또,높은 바람에 나뭇잎이 쇠잔하다 / 高風草木衰
술잔을 엎어 죽엽(竹葉 술 이름)을 따르고 / 覆杯流竹葉
물길어 상지(桑枝 차 이름)를 달인다 / 汲井煮桑枝
지는 해에 기러기 변방에 줄지었고 / 落日雁橫塞
가을 창에는 벌레가 실을 토해낸다 / 秋窓虫吐絲
누가 병들고 가난한 사람 가련히 여기겠는가 / 誰憐貧病客
길게 초인사나 읊어보자 / 長吟楚人詞
빈 소반에는 마치채(馬齒菜)가 남아 있고 / 空盤推馬齒
거친 후원에는 계장초(鷄腸草)만 늘어졌네 / 荒苑長鷄腸
수각에서는 청노(靑奴 풀 이름)가 냉냉하나 / 水閣坍奴冷
암전에서는 부비(腐婢 풀 이름)가 향긋하다 / 巖田腐婢春
이끼는 주춧돌에 두루 끼어 있고 / 苺苔侵礎遍
쑥대는 창을 둘러서 자란다 / 蓬艾繞窓長
자소의 잎은 도는 바람 따라 흔들거리고 / 紫蘇葉帶回風響
홍요의 꽃은 되비치는 햇빛에 붉었구나 / 紅蓼花含返照明
시냇가에 새는 비를 맞아 온몸이 젖었고 / 溪禽帶雨全身濕
산감은 서리 맞고 반볼이 붉었네 / 山枾經霜半臉紅
하였다. 항시 수척한 병이 있더니 30이 못 되어 죽었는데, 그가 평소에 읊은 감회시(感懷詩)를 보면, 가히 수하지 못할 징조를 볼 수 있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거친 후원에는 계장초(鷄腸草)만 늘어졌네 / 荒苑長鷄腸
수각에서는 청노(靑奴 풀 이름)가 냉냉하나 / 水閣坍奴冷
암전에서는 부비(腐婢 풀 이름)가 향긋하다 / 巖田腐婢春
이끼는 주춧돌에 두루 끼어 있고 / 苺苔侵礎遍
쑥대는 창을 둘러서 자란다 / 蓬艾繞窓長
자소의 잎은 도는 바람 따라 흔들거리고 / 紫蘇葉帶回風響
홍요의 꽃은 되비치는 햇빛에 붉었구나 / 紅蓼花含返照明
시냇가에 새는 비를 맞아 온몸이 젖었고 / 溪禽帶雨全身濕
산감은 서리 맞고 반볼이 붉었네 / 山枾經霜半臉紅
광음은 번개같이 잠깐인데 / 光陰如電瞥
세월은 나에게 빌려주지 아니하네 / 歲月不貸余
명예를 얻는 것이 비록 때가 있다지마는 / 成名雖及時
필경에는 허공이 돌아가네 / 畢竟空歸虛
형해는 나의 것이 아니니 / 形骸非我有
하루아침 다시 남음이 없으리라 / 一朝無復餘
영화를 어찌 의뢰할까 / 英華豈足賴
천지는 참으로 나그네 집이다 / 天地眞蘧盧
우습구나 저 궁도인이여 / 笑彼窮途人
통곡한들 마침내 무엇하리 / 痛哭終何如
하였다. 《소문쇄록》세월은 나에게 빌려주지 아니하네 / 歲月不貸余
명예를 얻는 것이 비록 때가 있다지마는 / 成名雖及時
필경에는 허공이 돌아가네 / 畢竟空歸虛
형해는 나의 것이 아니니 / 形骸非我有
하루아침 다시 남음이 없으리라 / 一朝無復餘
영화를 어찌 의뢰할까 / 英華豈足賴
천지는 참으로 나그네 집이다 / 天地眞蘧盧
우습구나 저 궁도인이여 / 笑彼窮途人
통곡한들 마침내 무엇하리 / 痛哭終何如
○ 안응세(安應世)의 자는 자정(子挺)이요, 호는 월창(月窓)ㆍ구로주인(鷗鷺主人)ㆍ연파조도(煙波釣徒) 또는 여곽야인(藜藿野人)이라고 한다. 사람됨이 청담쇄락(淸淡洒落)하고 안빈희분(安貧喜分)하여, 공명을 구하지 아니하였고, 선불(仙佛)을 배우지 아니하며, 박혁(博奕)을 즐기지 않았다. 또 시에 능하며 특히 악부(樂府)를 잘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불의의 재물은 집을 돕는 데 그칠 뿐이요, 불의의 음식은 오장을 돕는 데 그칠 뿐이니, 더욱 참견할 것이 못 된다.” 하였으니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개 이와 같았다. 백옥(白玉)에도 티가 있으니 주색을 좋아하였다. 경자년에 진사가 되었고 이해 9월에 죽으니, 나이 26세로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통탄해 마지아니않았다. 《사우언행록》이하 동
○ 안우(安遇)의 자는 시숙(時叔)인데, 효행이 지극하여 고을에서 으뜸이었으며, 그의 부친상에는 일체를 《주자가례》에 따라 행하였다. 점필재에게서 수업하였는데, 얼마 뒤 벼슬할 마음이 없어서 그때부터 점필재와 뜻이 달라졌다. 일찍이 그 고을에서 천거되어 서울에서 행하는 회시(會試)에 간 일이 있는데, 그때 사관(四館 사학(四學))에 있는 연소자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나이 많은 시골 선비들을 매로 때리려고 하니, 시숙이 이르기를, “어찌 부모의 유체(遺體)를 가지고 죄 없이 스스로 훼손하면서 명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하며 들어가지 아니하고 돌아왔다. 그 절조가 가히 동한(東漢)에 견줄 만하다고 하겠다.
○ 유종선(柳從善)은 진주인(晉州人)이며, 자는 여등(如登)인데, 산에서 살면서 스스로 세상과 인연을 끊으니, 친구나 친척이라도 그의 얼굴 보기 드물었다.
○ 우선언(禹善言)의 자는 덕보(德父)요, 호는 풍애(楓崖)이며 단성군(丹城君) 우공(禹貢)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기개가 있고 남에게 얽매이지 아니하였다. 신축년에 남쪽으로 영남에 가서 점필재 선생을 그 여막에서 뵈니, 선생은 기뻐하여, “자를 자용(子容)이라 하라.” 하였다.
○ 최하림(崔河臨)의 자는 진국(鎭國)이요, 호는 태허당(太虛堂)이다. 성품이 공명을 좋아하여 경자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이해 여름에 요승(妖僧) 학조(學祖)가 그의 제자 설의(雪儀)로 하여금 가만히 불상을 돌려 놓게 하고서, 세상 사람에게 말하기를, ‘부처가 스스로 걷는다.’고 하니, 곡식과 비단ㆍ베를 가지고 오는 자가 날로 천의 숫자로 헤아릴 정도였다. 태학(太學)에서 상서하여 다섯 차례나 요승을 죽이라고 청하였으나, 임금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상소문은 대개 최진국의 손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병오년 7월에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32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염장(斂葬)할 수 없었으므로 벗들이 치전(致奠)하여 장사지냈다. 그가 지은 안택기(安宅記)가 세상에 전한다.
○ 고순(高淳)의 자는 희지(熙之)요, 또 진진(眞眞) 또는 태진(太眞)이라고 하며 제주인(濟州人)이다. 귓병이 있어 땅에 글자를 써서 서로 뜻을 통했다. 무술년에 조서에 응하여 시사(時事)를 논하는 상서를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망령하다는 이름을 얻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알리자, 고희지(高熙之)는 듣고 오히려 기쁘게 여기며 스스로 호를 망희지(妄熙之)라 하였다. 여러 선비들 사이 중에서 신덕우(辛德優)와 초면 인사를 하였는데, 선비들은 서로 주고받는 말이 떠들썩하였다. 고희지가 종이에 한 절구를 지었는데, 그에 이르기를,
소각에 봄바람이 고요하니 / 小閣春風靜
청담으로 모두 여흥이 났다 / 淸談摠有餘
귀먹은 나는 아무 재미가 없어 / 聾人無一味
홀로 머리를 숙이고 책을 본다 / 垂首獨看書,
하였는데, 신덕우는 기뻐하며 그 시에 화답하여 이르기를,
세상이 시끄럽고 혼탁하니 / 世聲聒溷濁
분양의 냄새나 다름이 없네 / 糞壤嗟鼻餘
부러워하오, 방로들보다 나은 그대를 부러워하노니 / 羡君勝房老
획 속에 천 권의 글을 숨기고 있네 / 晝隱千卷書
하고, 이후부터 지심(知心)의 벗이 되었다.청담으로 모두 여흥이 났다 / 淸談摠有餘
귀먹은 나는 아무 재미가 없어 / 聾人無一味
홀로 머리를 숙이고 책을 본다 / 垂首獨看書,
하였는데, 신덕우는 기뻐하며 그 시에 화답하여 이르기를,
세상이 시끄럽고 혼탁하니 / 世聲聒溷濁
분양의 냄새나 다름이 없네 / 糞壤嗟鼻餘
부러워하오, 방로들보다 나은 그대를 부러워하노니 / 羡君勝房老
획 속에 천 권의 글을 숨기고 있네 / 晝隱千卷書
○ 고희지(高熙之)는 일찍이 귓병이 있었으나, 성품이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하루는 시를 읊고 취침하였는데, 그의 돌아간 아버지 중추(中樞)-고수종(高守宗)-가 꿈에 나타나, 시를 주며 말하기를,
화발은 창창하여 예보다 줄었는데 / 華髮蒼蒼減昔年
외로운 몸 적적하게 산 앞을 지키고 있네 / 孤身寂寂守山前
백골이라서 지감 없다 말하지 말라 / 莫言白骨無知感
너의 읊는 소리에 나는 잠을 못하노라 / 聞汝吟詩我不眠
하였다. 내(남효온)가 그 시에 서문을 써 주었는데 그 대략에, “천지간의 한 기운은 이르면 펴지고 흩어지면 돌아가나니, 기실은 하나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 그 기(氣)가 여러 자손들의 신상에 흩어져 있다가, 자손이 동하면 그 신명(神明)이 감동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비록 그러하나 사람은 곧고 초연하여 마치 다시 부모의 척강(陟降)하는 거동을 항시 좌우에 모시고 있는 듯이 함을 보게 될 것이니, 고희지 같은 이는 이른바 오직 맑은 자라[淸者]고 할 것이다.” 하였다. 《추강냉화》이하 동외로운 몸 적적하게 산 앞을 지키고 있네 / 孤身寂寂守山前
백골이라서 지감 없다 말하지 말라 / 莫言白骨無知感
너의 읊는 소리에 나는 잠을 못하노라 / 聞汝吟詩我不眠
○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랑캐의 춤을 본받아서 머리를 내두르고 눈을 까며, 어깨를 솟구고 팔을 구부리고 두 다리와 열 손가락을 한꺼번에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구부리고 활을 쏘는 형상을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개가 네 발을 헤매고 다니는 모양을 하기도 한다. 또 곰처럼 구부리고 새처럼 펴기도 하며, 혹은 물러가서 바람 소리를 낸다. 공경대부로부터 사서인(士庶人)이며 창기나 배우 여자에 이르기까지, 음률을 이해하고 몸이 성한 자는 하지 않는 자가 별로 없었다. 그 이름을 호무(胡舞)라고 하는데, 여기에 관현(管絃)을 같이 하면서 즐겼다. 의정부 우찬성인 어유소(魚有沼)는 더욱 잘하여서, 나도 또한 풍류로 해본 일이 있는데, 망우(亡友) 안자정(安子挺)이 그 잘못을 극언하여 비난하기를, “미인(媚人)의 행동과 유만(柔嫚)의 태도는 사람으로 할 바 아니거늘, 하물며 오랑캐는 금수와도 같은데 어찌 내 몸으로 금수 같은 일을 하겠는가.” 하므로, 나는 듣고 퍽 그렇지 않게 여겼는데, 그 후 《한서(漢書)》에서 개차공(蓋次公)의 효단장경 목후사(效檀長卿沐猴辭)를 읽고 난 연후에야 안자정의 말이 정론(正論)임을 알았으며, 이로 인하여 전현(前賢)이나 후현의 법규가 서로 같음을 알았다.
○ 경징(慶徵) 군의 휘는 연(延)이요, 자는 대유(大有)이며, 청주인(淸州人)이다. 겨울에 그의 부친이 병이 나서 어회(魚膾)를 먹고자 하는지라, 군이 얼음을 뚫고 그물을 쳐도 고기를 얻지 못하자, 군이 울며 말하기를,
“옛사람은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은 일이 있었는데, 나는 이제 그물을 치고도 고기를 잡지 못하니, 성감(誠感)이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하고, 버선을 벗고 얼음 구멍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난 후에 검은 잉어를 얻어서 공양했다. 또 시금치를 먹고자 하는지라, 군이 밭에 있는 채근(菜根)을 보고 울부짖으니, 문득 시금치가 나와 그 부친을 봉양하였고, 이어 부친의 병이 나았다. 그 후 부친이 죽자, 3년을 시묘 살면서 죽ㆍ채소ㆍ과일 먹는 것까지 《가례》에 의하였으며, 그의 모친을 섬기기를, 매일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하였는데, 나이 50이 넘어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모친이 죽자 그 부친의 초상 때와 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세조가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가, 주상(성종) 9년, 부름에 응하여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가 되었는데, 어느 날 불려서 내전에 들어가니 임금이 묻기를, “경은 집에 있을 때 얼음을 깨니 고기가 뛰었다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는가.” 하였다. 군이 답하기를, “겨울은 고기가 없는 때라 부친은 잡지 못하리라 하였사온데, 그물을 치고서 애써 구하다가, 다행히 잡았습니다. 부친은 기뻐서 너의 효성에 감동한 까닭이라고 하며, 고을 사람들은 깊은 연유도 살피지 아니하고, 효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나, 신은 실로 그와는 같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임금이 묻기를, “경은 무슨 책을 읽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서》와 《이경》을 읽었습니다.” 하니, 또 묻기를, “사서와 이경 중에서 어느 말이 제일 옳던가.” 하니, “사서 이경 중 《서전》에 순(舜)의 대효를 말하였사온데, 이는 신이 하고자 하는 바이오나 능하지 못하옵고, 또 주공(周公)의 충성을 말하였사온데, 신이 하고자 하오나 능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 오래도록 감탄하였다.
○ 청주(淸州)에 양수척(楊水尺) 3형제가 살면서 소행이 어질지 못하더니, 경징(慶徵) 군이 그의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말을 듣고는 감화하여, 그 나쁜 버릇을 버리고서 온화하고 공손하게 아들의 도리를 행하며, 또 혼정신성하였다. 부모의 초상 때에는 한 모금 물도 입에 대지 아니하고, 또 3년을 시묘살이 하면서 술과 과일을 먹지 아니하였다. 3년상을 마친 뒤에는 3형제가 같이 살면서 우애하는 환심이 극진하였고, 서로 경계하기를, “만일 우리가 좋지 않는 행실을 하여서, 경 생원(경징군)이 그를 들으면 그 또한 부끄럽지 않겠느냐.” 하였다.
○ 생원 유원(兪垣)은 면천인(沔川人)이다. 무신년간에 책을 끼고 궐문에 나가 배운 것 중에서 수천 가지 말을 진술하였는데, 그 말이 모두 조정의 병폐를 간절히 집어 내었다. 그런데, 사림들은 모여서 그저 웃곤 하였다. 유원은 자기가 거처하는 정자를 청풍정(淸風亭)이라 하고, 또 그 벗인 박생(朴生)은 그 재(齋)를 명월재(明月齋)라 편액하였는데, 진신(縉紳)들 사이에서 웃을 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유청풍ㆍ박명월 같다고 조롱하였다. 두 사람은 불우하여 과거 시험을 보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일찍 벼슬에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하었다.
○ 임인년에 개령현(開寧縣) 송방리(松坊里)에 사는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옛 석불을 얻었는데, 이목구비가 모두 없어졌기로 그저 밭 언덕에 두었는데, 우연히 천식을 앓고 있는 어떤 사람이 와서 절하였더니, 병이 좀 나은 것 같은지라 드디어 영험이 있다 하며, 어느 사람은 무슨 빛이 비친다고 하므로, 이웃 여러 고을에서 오랜 병으로 시달리던 자며, 아들이 없는 사람과 아직 장가들지 못한 사람, 노비를 잃은 사람들, 무릇 마음속에 하려고 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기도하면 문득 징험이 있다고 하여, 남녀가 이리저리 돌아가며 미포(米布)와 지전(紙錢)이며, 향촉(香燭)ㆍ화과(花果)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한 중이 와서 향불 올리는 것을 주관하고 시주하는 자가 있어서, 기와집을 짓고 또 큰 절을 지으려 하니, 사족(士族) 부녀(婦女)들이 모두 친히 와서 기도 드리고, 개령 현감(開寧縣監)과 금산(金山) 고을 훈도(訓導) 같은 이들도 와서 자식의 병이 낫기를 빌었고, 혹은 후사를 이을 수 있도록 빌었다. 이때에 금산 군수 이인형(李仁亨)은 이 말을 듣고, 유생과 아전 포졸을 보내어, 그 중을 잡아오게 하고, 시주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게 하였다. 이때 마침 김 문간공(文簡公 점필재)이 응교(應敎)의 명을 사퇴하고 금산에 있었는데, 이인형에게 하시(賀詩)를 주어 이르기를,
채전에 버려두어 몇 봄인지 모르던 것 / 抛擲菜田不記春
함부로 생긴 주먹만한 돌에 어찌 신이 있으리 / 頑然拳石有何神
애초에는 빌어먹는 목거사 같더니 / 初如求食木居土
점차 돈 모으는 토사인이 되었네 / 漸作撞錢土舍人
남녀 몇 집안이나 장차 더럽히려는가 / 男女幾家將汚染
향등은 1리나 그대로 따라 있네 / 香燈一里欲因循
우리 원님 곧은 것 그대로 빈주 원님일세 / 我侯直是邠州守
요호를 격파하고 맑은 세상 만드리라 / 擊破妖孤
하였더니,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어서, “성조(聖朝)에 영웅 있는 줄 이제야 알겠노라.”는 글귀가 있기까지 하였다. 이제 개령의 석불은 요호보다도 더욱 괴상한데도, 누가 감히 쳐서 고혹된 것을 없애지 못하였는데, 명부(明府)가 다른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아전들을 보내어 요수(妖首)를 쫓아 잡아오고, 시주하는 지전(紙錢)을 태워서 우민으로 하여금 환하게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깨닫게 하였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하나의 기특한 일이라 하겠다. 《소문쇄록》함부로 생긴 주먹만한 돌에 어찌 신이 있으리 / 頑然拳石有何神
애초에는 빌어먹는 목거사 같더니 / 初如求食木居土
점차 돈 모으는 토사인이 되었네 / 漸作撞錢土舍人
남녀 몇 집안이나 장차 더럽히려는가 / 男女幾家將汚染
향등은 1리나 그대로 따라 있네 / 香燈一里欲因循
우리 원님 곧은 것 그대로 빈주 원님일세 / 我侯直是邠州守
요호를 격파하고 맑은 세상 만드리라 / 擊破妖孤
○ 응교(應敎) 최보(崔溥)는 나주인(羅州人)이며, 정자(正字) 송흠(宋欽)은 영광인(靈光人)이다. 동시에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함께 말미를 받아 고향에 온 일이 있었다. 그들 본집의 거리가 겨우 15리쯤 되었는데, 하루는 송 정자가 최 응교의 집을 찾아가서 말마디 하다가, 최 응교가 묻기를, “그대는 무슨 말을 타고 왔는가.” 하니, 송 정자가 답하기를, “역마를 타고 왔습니다.”고 하니, 최 응교가 다시 말하기를, “국가에서 준 역마를 자네 집에 매어둔 것과, 자네 집에서 우리 집에 오는 것은 사사일인데, 어찌 역마를 타고 왔는가.” 하며, 최 응교가 조정에 돌아가서 이 일을 알리고 파직시키려고 생각하였다. 송 정자가 응교에게 찾아가서 사과하자, 최 응교는, “자네 같은 연소한 사람들은 앞으로 마땅히 조심하는 것이 좋다.”고 일렀으니, 조종조(祖宗朝 성종) 때에 사대부들이 법을 지키며, 벗들 사이에 선(善)으로 권려하고, 의(義)로써 심복시킴이 이 같았으니, 가히 모든 일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언왕행록》
○ 성종이 승하하던 날에 성중에 있는 사대부며 거족으로서 혼인하는 집이 여러 집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아침을 타서 가고, 어떤 사람은 오시(午時)가 되어서 가며, 어떤 사람은 모르는 체하고 갔었다. 그 후 이 일이 발각되어 이들 모두 벌받게 되었다. 그런데 죽성군(竹城君) 박지번(朴之蕃)은 무인으로 글자를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이때 하루 전날 밤에 아들의 초례를 지내게 되어서 손님과 동료들이 다 모여 있는데, 갑자기 대궐 안에서 상왕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박지번이 이에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병이 위독하니, 어찌 신하로서 차마 혼례(婚禮)를 사사로이 행하리오.” 하고, 드디어 손님들과 동료들을 사절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당시에 어느 논란하는 자가 말하기를, “유림(儒林)이 오히려 무신보다 못하니, 한탄할 일이다.” 하였다. 《용재총화》
[주D-001]김연거(金蓮炬)의 유의(遺意) : 당 나라의 무종(武宗) 때에 한림학사를 지극하게 대접하여 밤 늦도록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숙직실로 돌아갈 때에 황제 방에 있던 금련 촛대를 내시에게 들려서 앞길을 밝혀 주게 한 고사.
[주D-002]조예(皁隸) : 각 관청의 사령들은 보통 검은 옷에 검은 벙거지를 쓰게 되었으므로, 그를 조예 혹은 검은 하인이라고 말한다.
[주D-003]구익부인(鉤弋夫人) : 한 나라 무제(武帝)의 후궁인데, 무제는 장성한 아들이 없이 늦게야 구익부인이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를 후계로 정하고, 후일에 황제의 모친으로 정권에 간여할까 염려하여 사랑하는 구익부인을 사약하여 죽였다.
[주D-004]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대부의 지위에 올랐다는 말. 예전 중국에서는 대부(大夫)의 지위에 있으면, 각자가 빙고(氷庫)를 묻어놓고 겨울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쓰게 되어 있었다.
[주D-005]걸구의 변명 : 괴생은 초한 시대(楚漢時代)의 괴철(蒯徹)이라 하는 웅변가인데, 그는 그때의 한 나라의 대장인 제왕 한신(齊王韓信)을 달래어서 한 나라와 분리하여 독립하기를 권하였으나, 한신이 듣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한신이 실각하여 한 나라 임금에게 죽음을 당한 뒤에 한신을 반역하라고 꾀었다고 괴철을 체포해다가 심문할 적에 괴철의 말이 “걸주의 개가 요 순을 보고도 짖는 것은 요순이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주인이 아니기 때문인데, 나도 내 주인이 아니라서 그랬다. 나도 내 주인인 한신을 위하여 충성할 뿐이었다.”고 답변하여 살려주게 되었다.
[주D-006]증자(曾子)의 역책(易簀) : 증자가 죽을 때에 노(魯) 나라의 정권을 잡은 계손씨(系孫氏)가 보내준 자리[簀]를 의리에 합당하지 않는다 하여 다른 자리로 바꾸어 깔고 죽었다 한다.
[주D-007]자로(子路)의 결영(結纓) : 자로는 위(衛) 나라의 내란에 싸우다가 창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버리지 못한다.” 하고, 끊어진 갓끈을 다시 매고 죽었다 한다.
[주D-008]금비(金篦) : 금으로 만든 칼. 그것으로 눈에 끼어 있는 백태를 긁어낸다고 한다.
[주D-009]초인사 : 전국 말기에 초 나라 사람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이 지은 글. 그 글은 모두 원체가 비대한 것이다.
[주D-002]조예(皁隸) : 각 관청의 사령들은 보통 검은 옷에 검은 벙거지를 쓰게 되었으므로, 그를 조예 혹은 검은 하인이라고 말한다.
[주D-003]구익부인(鉤弋夫人) : 한 나라 무제(武帝)의 후궁인데, 무제는 장성한 아들이 없이 늦게야 구익부인이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를 후계로 정하고, 후일에 황제의 모친으로 정권에 간여할까 염려하여 사랑하는 구익부인을 사약하여 죽였다.
[주D-004]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대부의 지위에 올랐다는 말. 예전 중국에서는 대부(大夫)의 지위에 있으면, 각자가 빙고(氷庫)를 묻어놓고 겨울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쓰게 되어 있었다.
[주D-005]걸구의 변명 : 괴생은 초한 시대(楚漢時代)의 괴철(蒯徹)이라 하는 웅변가인데, 그는 그때의 한 나라의 대장인 제왕 한신(齊王韓信)을 달래어서 한 나라와 분리하여 독립하기를 권하였으나, 한신이 듣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한신이 실각하여 한 나라 임금에게 죽음을 당한 뒤에 한신을 반역하라고 꾀었다고 괴철을 체포해다가 심문할 적에 괴철의 말이 “걸주의 개가 요 순을 보고도 짖는 것은 요순이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주인이 아니기 때문인데, 나도 내 주인이 아니라서 그랬다. 나도 내 주인인 한신을 위하여 충성할 뿐이었다.”고 답변하여 살려주게 되었다.
[주D-006]증자(曾子)의 역책(易簀) : 증자가 죽을 때에 노(魯) 나라의 정권을 잡은 계손씨(系孫氏)가 보내준 자리[簀]를 의리에 합당하지 않는다 하여 다른 자리로 바꾸어 깔고 죽었다 한다.
[주D-007]자로(子路)의 결영(結纓) : 자로는 위(衛) 나라의 내란에 싸우다가 창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버리지 못한다.” 하고, 끊어진 갓끈을 다시 매고 죽었다 한다.
[주D-008]금비(金篦) : 금으로 만든 칼. 그것으로 눈에 끼어 있는 백태를 긁어낸다고 한다.
[주D-009]초인사 : 전국 말기에 초 나라 사람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이 지은 글. 그 글은 모두 원체가 비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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摭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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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馹孫字季雲。金海人。號濯纓子。首露王之裔世。居淸道。受業於金宗直門。丙午。生員壯元。同年甲科。官至吏正。戊午。陵遲處斬。馹孫父孟字子進。嘗夢龍馬之異。生三子。名其子駿孫,騏孫,馹孫。皆以文行名世。俱登第。校理馹孫。眞希世之才。廟堂之器。疏章箚子。汪洋如大海。是非人物。論議國事。如靑天白日。惜乎。廢君忍以能棄市耶。金馹孫。慷慨有大節。魁偉有器局。性簡亢少許可。又文章。汪汪若河海。南止亭衮。挽其遷墓時。備盡濯纓之實蹟。鄭光弼與金馹孫。同受兩南御史之命。偕至龍仁。宿客舍。金慷慨論時事。語多過激。鄭累止之曰。言不可若是。金輒奮曰。士勳亦爲卑下之論。何忍作無節之腐儒耶。
權五福字嚮之。安東人。號睡軒。丙午。司馬。同年文科。校理。湖堂。戊午。與金馹孫同死。有集行于世。文章淸健。筆法勁遒。爲時輩所推重。與馹孫。爲莫逆之交。孫舜孝上泣嶺。改號破怪嶺。睡軒有詩曰。不必貪泉誤隱之。休將文字駭無知。區區破怪還堪怪。泣嶺須刊墮淚碑。公以所製詩橋。求斤削於金濯纓。贈之以詩曰。畫蛇添足休嫌拙。須把風斤斲堊墁。濯纓以書答之曰。吾無風斤。何以斲之嚮之之堊也。遭凶虐罔測之變。碪斧在前而礭乎不亂。從容就盡。其氣節之剛毅。得之天者。爲何如哉。嗚呼。萬事已矣。九原閉矣。獨其咳唾之霏。精華之發。光天射斗。擲地聲金者。猶足以留典刑於髣髴。寓無窮之遐思。彼無道之淫刑。亦安能斬截百世不磨之流芳也哉。以校理乞養。出宰野城三年而被收。年才三十二而絶。公之墓。在果川地。有人遭喪。營窆於公之塚傍。役軍誤拔墳前階砌石。夜夢見紅袍長者。自古墳而來。若有慍色。其人不覺前拜。問其姓名。答云。我則權翰林某也。因指古墳曰。彼吾家也。近有役軍。登踏我館舍。掘拔我階石。使我不安。君何不呵禁。其人亦儒者。素知公事蹟。請曰。公莫是賦項羽不渡烏江者乎。曰。是也。其人唯唯而退。仍爲驚覺。汗出遍身。翌日。躬詣墓前。還補缺處。作文祭之。
權景裕字君饒。安東人。癸卯進士。乙巳。文科。南床,湖堂,校理。與金馹孫同日死。性淸直。不接俗客。落落有諫臣風。以校理乞堤川縣。政淸如水。民愛吏畏。
李穆字仲雍。全州人。畢齋門人。十九。中己酉進士,文科壯元。湖堂。戊午。被禍。甲子禍及泉壤。年二十八。公志氣峻烈。成廟嘗不豫。大妃。使巫女行禱。設淫祀於泮宮之碧松亭。公率諸生。杖其巫而逐之。大妃大怒。俟上疾瘳以告。上召泮長。大加稱賞。特賜酒 武定寶鑑曰。號寒齋。剛直敢言。嘗在太學時。尹弼商。以大臣當國。穆。因天旱。上疏言烹弼商。天乃雨。弼商遇諸道。呼之曰。君必欲食老夫肉耶。穆。昂然不顧而去。成廟己酉。進士,文科。湖堂。禍起。弼商爲堂上。挾前憾。以穆畢齋門徒。搆殺之。
許磐字文柄。陽川人。癸卯。進士。戊午。文科。承文副正字。戊午。被禍。 武定寶鑑曰。秋江集云。磐志於性理之學。恬於進取。欲事事慕古。大猷。服其端雅。嘗言左相洪應曰。世子。國之儲君。萬姓所仰賴。今與宦寺居處。不可云。戊午登第。權知承文正字。
姜謙字謙之。晉州人。詗之子也。庚子。文科。官玉堂。戊午。杖配。甲子極刑。
表沿沫字少游。新昌人。號藍溪。壬辰。文科重試。湖堂。官至同知。戊午。被謫道卒。有文名。所與交遊。皆一時名士。服父喪。一從家禮。畢齋。時爲善山府使。薦其行。命加一資。
洪翰字蘊珍。南陽人。乙巳。文科。官參議。戊午。杖流道卒。性剛直少許可。爲權貴所忤。
鄭汝昌字伯勖。河東人。號一蠹。居咸陽。癸卯。進士。庚戌。文科。官安陰縣監。戊午。杖流鍾城。甲子四月卒。追禍。年五十五。葬咸陽。中廟贈右議政。致祭。宣廟贈諡文獻。萬曆庚戌。從祀文廟。圃隱之後。我東理學。實自金大猷倡。同志者。鄭伯勖其人也。大猷。精於理。伯勖。精於數。俱學於佔畢。惜乎。遭時不祥。隕於非命。蒼蒼者天。謂之何哉。入於智異山中。三年不出。有終老之意。明五經。窮極其蘊。成廟朝求明經修行之士。伯勖居第一。父六乙。死於施愛之亂。時先生年少。居母喪。奠禮之數。饘粥之食。一依家禮。成宗庚戌。尹兢。薦其孝。特召拜昭格署參奉。上書辭免。不允。乃出。名益重。是年文科。由內翰出爲安陰縣監。平生不喜作詩。只有一篇傳於世曰。風蒲泛泛弄輕柔。四月花開麥已秋。看盡頭流千萬疊。孤舟又下大江流。胸次灑落。無一點塵埃。槩可想見矣。性端重沈靜。律身甚嚴。終日端坐。雖盛暑。妻子未見肌肉。不飮醴。不茹葷。不食牛馬肉。外爲常談。內惺惺如也。先生之學。以濂洛爲準的。讀書以窮理爲心。處心以不欺爲主。日用工夫。不出誠敬之外。至於治平之律令格例。不無究其極。求諸治縣。已見其端緖矣。安陰縣。有光風樓,霽月堂。公爲倅時所建而名之。在安陰莅事之暇。選邑中聰明子弟。親加敎誘。日課講讀。學者聞之。自遠方來。春秋行養老禮。著庸學註疏及主客問答。進修雜書。及戊午。禍起。妻子盡投之火中。謫鍾城七年。處之恬然。初定庭爐夫。每使臣入館。公輒執燃火之役甚恭。
茂豐正摠字百源。太宗曾孫。號西湖主人。公能詩善彈琴。搆別墅于楊花渡。具小艇漁網。常自刺。邀詩人騷客。日致好會。書無慮千百篇。嘗與秋江,濯纓。遊佔畢齋之門。一日在野亭鼓琴。殺聲發於音韻。知明日必有拿命。戊午。杖流遠地。
姜景敍字子文。晉州人。號草堂。成廟乙酉。登第。又捷重試。禍起。以佔畢門徒。杖流會寧。後放還。中廟朝。官至左副承旨。有草堂集一帙。後追贈吏判。 武定寶鑑
李守恭字仲平。廣州人。領相克培之孫。成廟戊申。擢壯元科。歷正言,掌令。有諍臣風。禍起謫鍾城。甲子。移光陽賜死。年四十。中廟朝贈都承旨。 武定寶鑑
鄭希良字淳夫。首陽人。號虛庵。生員壯元。乙卯。文科。奉敎。成廟薨。旣成服。率太學諸生。上書言大行作佛事。所言激切。謫西海。尋釋之。是年擢第。在翰林。極言禁中事。性喜酒。濁酒則三大器。燒酒則一大器。但用大椀健倒。善陰陽學易數術。戊午之禍。竄義州。三年移金海。辛酉。蒙放。丁母憂。守墳于高陽。常云。甲子之禍。甚於戊午。我輩亦且不免。一日。步出坡壟間。僮僕尋到則紿遣之。僮旣還則公不在矣。呼隣人四出細踵之。只見南江祖江上流故屨二隻。脫在汀沙。疑必沈江。募水師。或舟或泅遍上下。竟不獲其屍。公之族海平君鄭耆叟。請令郡縣物色之。燕山曰。狂奴逃死。何用尋爲。未幾。甲子禍作。人以爲避跡自晦。未嘗死云。或云。異僧往來西方。曾識希良顏面者。分明認見。或云。長髮爲方士。祕踪往來。加川院壁上題二絶云。鳥窺頹垣穴。僧返夕陽天。山水爲家客。乾坤何處邊。又曰。風雨驚前日。文明負此時。孤筇遊宇宙。嫌鬧幷休詩。金安國見之曰。此必虛庵所作。問之院主。曰。衲衣僧。俄過此書之云。卜者金倫。少時遊妙香山。遇方士名李千年者。從遊得術數之學。及其歸也。以詩贈之曰。八十山中老。三彭已掃除。人閒應不夢。鶴伴意無餘。雪榻蟾光冷。雲窓日影疏。誰知無累鑑。萬古自淸虛。又曰。偸閒一醉是天遊。箇裏江風挽客留。啄木峯高天若近。秀林亭下地疑浮。二娘魂魄千年事。九曲江聲萬古流。胸海久牽塵累擾。丹溪此日洗吾愁。又曰。天地無家山水客。生涯一 缺 意如如。苔痕山路白雲鎖。月影淸冷竹影疏。其詩格高古。筆跡奇健。非尋常方士明矣。倫嘗見千年所錄生年月日時五行甚詳。來京師。有申判事景洸好卜。錄士人達官五行。希良四柱。亦錄於其中。倫見而驚曰。是吾師李千年八字也。以此益信其不死云。李文純公滉。童時讀易于山中。有一老衲在傍。觀其容止非常。往往證正其句讀之訛。文純公疑虛庵。問爾能知易否。僧辭謝。文純公又言易之爲書。深邃難解。僧曰。措大讀易能透無欠。又問爾知鄭虛菴乎。僧曰。未也。文純公又言是鄭某號也。曰。頗聞姓名。亦知其爲人。曰。虛菴遯跡不出可惜。僧曰。不可出也。鄭某守廬不終禮。不孝也。逃君命。不忠也。不孝不忠。罪莫大焉。何面目復出人世乎。俄而辭出。莫知所之。庚申。謫金海。明年春。遭母喪。不得奔喪。常懷哀鬱。無路籲天。聞首露王陵頗神。作哀文以訴之。其夜夢見神人甚偉。眼有重瞳。呼語曰。汝將見放。公覺而誌之。及秋蒙放。
金宏弼字大猷。瑞興人。號寒暄堂。初號蓑翁。庚子。生員。遺逸薦授參奉。戊午。配煕川。庚申。移順天。甲子。被禍。年五十一。中廟贈都承旨。十三年。特贈左議政。致祭。宣廟贈領議政。諡文敬。萬曆庚戌。從祀文廟。公嘗戴草笠。垂蓮子纓。晩年。靜處一室。對案看書。夜深不寐。聞蓮子抵書案有輕輕聲。因知其尙觀書也。甲子。加罪。公聞命。沐浴冠帶之。神色不變。徐以鬚合口曰。不可幷此受傷。公以小學律身。以聖人爲準則。招來後學。敎誨諄諄。學者滿於前後。謗論將騰。伯勖勸止之。公曰。釋陸行。設爲禪敎。考業者千餘人。其友止之曰。禍患可畏。行曰。使先知覺後知。先覺覺後覺。吾所知告人耳。其禍福。天也。行雖緇流。其言可取。倣內則。作家範。制爲儀節。訓示子孫。尤重彝倫。下至婢僕。分別內外職。皆有名號。一蠹宰安陰。公往訪之。一蠹置一金盞。公責之曰。不意公作此器。後必以此誤人。後邑宰。果以此坐贓云。訓諸子嘗曰。言人之惡。如含血噴人。先汚其口。先生居玄風。少豪邁不羈。遨遊市街。鞭笞人物。人見之輒匿。旣長。發憤于學問。從佔畢齋請學。以小學授之。先生眷眷服膺。獨行無比。平居冠帶。而人靜然後就寢。鷄鳴則起。家室之外。未嘗出脚。人或問國家之事。必曰。小學童子。何知。嘗作詩云。業文猶未識天機。小學書中悟昨非。畢齋批云。此乃作聖根基。魯齋後。豈無其人。年三十後。始讀他書。訓後進不倦。如鳴陽正李長吉,李勣,崔忠成,朴漢參,尹信。皆出其門下。佔畢爲吏曹參判。別無建白。公上詩云。道在冬裘夏飮氷。霽行潦止豈專能。蘭如隨俗終當變。誰信牛耕馬可乘。佔畢和云。分外官銜到伐氷。匡君救俗我何能。終敎後輩嘲迂拙。勢利區區不足乘。
曺偉字太虛。昌寧人。號梅溪。文科湖堂。戶參。戊午。杖流義州。移順天。癸亥卒。甲子。禍及泉壤。暴屍三日。太虛。畢齋之妻弟也。成廟命集畢齋所著文。偉以弔義帝文首錄於集。戊午禍。子光讒曰。首錄義帝文。頗有意。燕山大怒。時偉以賀正使朝京。命越江卽斬。一行至遼東始聞之。庶弟伸。聞遼東有善卜者鄒源潔。往問吉凶。其人無他語。只書二句詩曰。千層浪裏翻身出。也須巖下宿三霄。伸回報公曰。初句似是免禍。下句難解云。乃越江。賴李相克均之力救。杖流。病死于順天。葬金山故鄕。甲子。剖棺斬屍。曳置墓前巖下三日。其詩乃驗云。
李黿字浪翁。慶州人。號再思堂。益齋之後。朴彭年之外孫。己酉。登第。官佐郞。戊午。杖流羅州。甲子。被禍。中廟初。贈都承旨。兄弟八人。人比之苟氏八龍。而目公慈明。父李鱗。娶朴彭年女。合巹之日。夢有老翁八人拜請曰。某等將就死。若活湯鑊命。則有以厚報。鱗驚起問之。饔人將以八鱉調羹。卽令放于江流。一鱉逸去。小奚持鉮而捕之。誤斷其項死焉。其夜又夢七人來謝。其後生八子。名龜,鼇,鱉,鼉,黿,鯤,鯨,龍。志其瑞也。皆有才名。浪翁文章行義。爲世所推。死於甲子。其驗如此。至今李氏不食鱉云。公弟鱉。與公泣別于郊。自是不赴擧。常騎牛載酒。携鄕社耆老。或釣或獵。每飮酒涕泣而悲。嘗作詩曰。我欲殺鳴鷄。恐有舜之聖。雖欲不殺之。亦有跖之橫。風雨鳴不已。舜跖冋一聽。善惡各孜孜。不鳴非鷄性。
鄭承祖字述而。慶州人。甲寅。文科。翰林。戊午。杖流。
李宗準字仲均。號慵齋。又號藏六舍人。乙巳。文科。戊午。謫北道。還逮獄被殺。洪貴達救解不得。
李宜茂字▣▣。德水人。司諫。戊午之禍。杖八十。徙三年。
崔溥字淵淵。羅州人。號錦南。文科重試。湖堂,司諫。戊午。杖流。甲子。被禍。成廟朝爲司諫。鄭光弼,南衮。爲左右正言。公題詩契軸。末句曰。後人指點摩挲處。知某也回某也忠。此句雖或偶成。而味其辭意。似專爲二公他日行事而發者。武定寶鑑云。博聞強記。英雄不羈。成廟朝文科重試。爲湖堂。弘文校理。奉使濟州。船爲風所漂。泊于中原浙江寧波府。邊臣疑倭寇將殺。溥應對輒給得免。成廟令上行錄。撰漂海錄以進。官禮賓寺正。禍起被謫。甲子。賜死。
李胄字胄之。固城人。號忘軒。杏村之後。戊申。文科。湖堂,正言。佔畢門人。戊午。杖配。甲子。被刑。嘗爲正言。言事慷慨有節氣。 武定寶鑑云。能文章有氣節。禍起。以佔畢門徒。杖流珍島。甲子。被殺。
朴漢柱字天支。密陽人。號迂拙齋。遊學佔畢門下。成廟乙巳登第。歷正言,獻納。言事直截。出爲醴泉郡守。戊午禍起。杖流碧潼。甲子被殺。中廟初贈都承旨。 武定寶鑑
任煕載字敬輿。豐川人。號勿庵。戊午。文科。承文院正字。以佔畢門徒杖流。煕載。士洪之子。善書。嘗題一絶于屛曰。祖舜宗堯自太平。秦皇何事苦蒼生。不知禍起蕭墻內。虛築防胡萬里城。一日。燕山猝幸士洪家。見其題。問曰。誰所書耶。士洪以實對。主有怒色曰。卿子。不肖人也。欲殺之。卿意何如。士洪跪而對曰。此子性行不順。果如上敎。遂被禍。
康伯珍字子韞。信川人。佔畢齋外甥。丁酉。文科。司諫。戊午。杖流。甲子。被刑。
柳廷秀字國俊。文化人。癸卯。文科。戊午禍起。以掌令極力救之。竟流而卒。子灌。官至右相。
李繼孟字希醇。全義人。號墨巖。癸卯。司馬。成宗己酉。文科。戊午。以承旨杖流靈光。丙寅反正後。卽拜司憲。官至參贊。諡文平。壽六十六。 武定寶鑑云。成廟乙酉。登第。詩文爲佔畢所取。禍起。以畢齋門徒杖流。放還。退居金堤。
李惟淸字直哉。韓山人。塤之子。登文科。戊午。以左相執政。力救佔畢。竄江界。中宗乙卯。拜領相。諡恭僖。 文獻錄
權五福字嚮之。安東人。號睡軒。丙午。司馬。同年文科。校理。湖堂。戊午。與金馹孫同死。有集行于世。文章淸健。筆法勁遒。爲時輩所推重。與馹孫。爲莫逆之交。孫舜孝上泣嶺。改號破怪嶺。睡軒有詩曰。不必貪泉誤隱之。休將文字駭無知。區區破怪還堪怪。泣嶺須刊墮淚碑。公以所製詩橋。求斤削於金濯纓。贈之以詩曰。畫蛇添足休嫌拙。須把風斤斲堊墁。濯纓以書答之曰。吾無風斤。何以斲之嚮之之堊也。遭凶虐罔測之變。碪斧在前而礭乎不亂。從容就盡。其氣節之剛毅。得之天者。爲何如哉。嗚呼。萬事已矣。九原閉矣。獨其咳唾之霏。精華之發。光天射斗。擲地聲金者。猶足以留典刑於髣髴。寓無窮之遐思。彼無道之淫刑。亦安能斬截百世不磨之流芳也哉。以校理乞養。出宰野城三年而被收。年才三十二而絶。公之墓。在果川地。有人遭喪。營窆於公之塚傍。役軍誤拔墳前階砌石。夜夢見紅袍長者。自古墳而來。若有慍色。其人不覺前拜。問其姓名。答云。我則權翰林某也。因指古墳曰。彼吾家也。近有役軍。登踏我館舍。掘拔我階石。使我不安。君何不呵禁。其人亦儒者。素知公事蹟。請曰。公莫是賦項羽不渡烏江者乎。曰。是也。其人唯唯而退。仍爲驚覺。汗出遍身。翌日。躬詣墓前。還補缺處。作文祭之。
權景裕字君饒。安東人。癸卯進士。乙巳。文科。南床,湖堂,校理。與金馹孫同日死。性淸直。不接俗客。落落有諫臣風。以校理乞堤川縣。政淸如水。民愛吏畏。
李穆字仲雍。全州人。畢齋門人。十九。中己酉進士,文科壯元。湖堂。戊午。被禍。甲子禍及泉壤。年二十八。公志氣峻烈。成廟嘗不豫。大妃。使巫女行禱。設淫祀於泮宮之碧松亭。公率諸生。杖其巫而逐之。大妃大怒。俟上疾瘳以告。上召泮長。大加稱賞。特賜酒 武定寶鑑曰。號寒齋。剛直敢言。嘗在太學時。尹弼商。以大臣當國。穆。因天旱。上疏言烹弼商。天乃雨。弼商遇諸道。呼之曰。君必欲食老夫肉耶。穆。昂然不顧而去。成廟己酉。進士,文科。湖堂。禍起。弼商爲堂上。挾前憾。以穆畢齋門徒。搆殺之。
許磐字文柄。陽川人。癸卯。進士。戊午。文科。承文副正字。戊午。被禍。 武定寶鑑曰。秋江集云。磐志於性理之學。恬於進取。欲事事慕古。大猷。服其端雅。嘗言左相洪應曰。世子。國之儲君。萬姓所仰賴。今與宦寺居處。不可云。戊午登第。權知承文正字。
姜謙字謙之。晉州人。詗之子也。庚子。文科。官玉堂。戊午。杖配。甲子極刑。
表沿沫字少游。新昌人。號藍溪。壬辰。文科重試。湖堂。官至同知。戊午。被謫道卒。有文名。所與交遊。皆一時名士。服父喪。一從家禮。畢齋。時爲善山府使。薦其行。命加一資。
洪翰字蘊珍。南陽人。乙巳。文科。官參議。戊午。杖流道卒。性剛直少許可。爲權貴所忤。
鄭汝昌字伯勖。河東人。號一蠹。居咸陽。癸卯。進士。庚戌。文科。官安陰縣監。戊午。杖流鍾城。甲子四月卒。追禍。年五十五。葬咸陽。中廟贈右議政。致祭。宣廟贈諡文獻。萬曆庚戌。從祀文廟。圃隱之後。我東理學。實自金大猷倡。同志者。鄭伯勖其人也。大猷。精於理。伯勖。精於數。俱學於佔畢。惜乎。遭時不祥。隕於非命。蒼蒼者天。謂之何哉。入於智異山中。三年不出。有終老之意。明五經。窮極其蘊。成廟朝求明經修行之士。伯勖居第一。父六乙。死於施愛之亂。時先生年少。居母喪。奠禮之數。饘粥之食。一依家禮。成宗庚戌。尹兢。薦其孝。特召拜昭格署參奉。上書辭免。不允。乃出。名益重。是年文科。由內翰出爲安陰縣監。平生不喜作詩。只有一篇傳於世曰。風蒲泛泛弄輕柔。四月花開麥已秋。看盡頭流千萬疊。孤舟又下大江流。胸次灑落。無一點塵埃。槩可想見矣。性端重沈靜。律身甚嚴。終日端坐。雖盛暑。妻子未見肌肉。不飮醴。不茹葷。不食牛馬肉。外爲常談。內惺惺如也。先生之學。以濂洛爲準的。讀書以窮理爲心。處心以不欺爲主。日用工夫。不出誠敬之外。至於治平之律令格例。不無究其極。求諸治縣。已見其端緖矣。安陰縣。有光風樓,霽月堂。公爲倅時所建而名之。在安陰莅事之暇。選邑中聰明子弟。親加敎誘。日課講讀。學者聞之。自遠方來。春秋行養老禮。著庸學註疏及主客問答。進修雜書。及戊午。禍起。妻子盡投之火中。謫鍾城七年。處之恬然。初定庭爐夫。每使臣入館。公輒執燃火之役甚恭。
茂豐正摠字百源。太宗曾孫。號西湖主人。公能詩善彈琴。搆別墅于楊花渡。具小艇漁網。常自刺。邀詩人騷客。日致好會。書無慮千百篇。嘗與秋江,濯纓。遊佔畢齋之門。一日在野亭鼓琴。殺聲發於音韻。知明日必有拿命。戊午。杖流遠地。
姜景敍字子文。晉州人。號草堂。成廟乙酉。登第。又捷重試。禍起。以佔畢門徒。杖流會寧。後放還。中廟朝。官至左副承旨。有草堂集一帙。後追贈吏判。 武定寶鑑
李守恭字仲平。廣州人。領相克培之孫。成廟戊申。擢壯元科。歷正言,掌令。有諍臣風。禍起謫鍾城。甲子。移光陽賜死。年四十。中廟朝贈都承旨。 武定寶鑑
鄭希良字淳夫。首陽人。號虛庵。生員壯元。乙卯。文科。奉敎。成廟薨。旣成服。率太學諸生。上書言大行作佛事。所言激切。謫西海。尋釋之。是年擢第。在翰林。極言禁中事。性喜酒。濁酒則三大器。燒酒則一大器。但用大椀健倒。善陰陽學易數術。戊午之禍。竄義州。三年移金海。辛酉。蒙放。丁母憂。守墳于高陽。常云。甲子之禍。甚於戊午。我輩亦且不免。一日。步出坡壟間。僮僕尋到則紿遣之。僮旣還則公不在矣。呼隣人四出細踵之。只見南江祖江上流故屨二隻。脫在汀沙。疑必沈江。募水師。或舟或泅遍上下。竟不獲其屍。公之族海平君鄭耆叟。請令郡縣物色之。燕山曰。狂奴逃死。何用尋爲。未幾。甲子禍作。人以爲避跡自晦。未嘗死云。或云。異僧往來西方。曾識希良顏面者。分明認見。或云。長髮爲方士。祕踪往來。加川院壁上題二絶云。鳥窺頹垣穴。僧返夕陽天。山水爲家客。乾坤何處邊。又曰。風雨驚前日。文明負此時。孤筇遊宇宙。嫌鬧幷休詩。金安國見之曰。此必虛庵所作。問之院主。曰。衲衣僧。俄過此書之云。卜者金倫。少時遊妙香山。遇方士名李千年者。從遊得術數之學。及其歸也。以詩贈之曰。八十山中老。三彭已掃除。人閒應不夢。鶴伴意無餘。雪榻蟾光冷。雲窓日影疏。誰知無累鑑。萬古自淸虛。又曰。偸閒一醉是天遊。箇裏江風挽客留。啄木峯高天若近。秀林亭下地疑浮。二娘魂魄千年事。九曲江聲萬古流。胸海久牽塵累擾。丹溪此日洗吾愁。又曰。天地無家山水客。生涯一 缺 意如如。苔痕山路白雲鎖。月影淸冷竹影疏。其詩格高古。筆跡奇健。非尋常方士明矣。倫嘗見千年所錄生年月日時五行甚詳。來京師。有申判事景洸好卜。錄士人達官五行。希良四柱。亦錄於其中。倫見而驚曰。是吾師李千年八字也。以此益信其不死云。李文純公滉。童時讀易于山中。有一老衲在傍。觀其容止非常。往往證正其句讀之訛。文純公疑虛庵。問爾能知易否。僧辭謝。文純公又言易之爲書。深邃難解。僧曰。措大讀易能透無欠。又問爾知鄭虛菴乎。僧曰。未也。文純公又言是鄭某號也。曰。頗聞姓名。亦知其爲人。曰。虛菴遯跡不出可惜。僧曰。不可出也。鄭某守廬不終禮。不孝也。逃君命。不忠也。不孝不忠。罪莫大焉。何面目復出人世乎。俄而辭出。莫知所之。庚申。謫金海。明年春。遭母喪。不得奔喪。常懷哀鬱。無路籲天。聞首露王陵頗神。作哀文以訴之。其夜夢見神人甚偉。眼有重瞳。呼語曰。汝將見放。公覺而誌之。及秋蒙放。
金宏弼字大猷。瑞興人。號寒暄堂。初號蓑翁。庚子。生員。遺逸薦授參奉。戊午。配煕川。庚申。移順天。甲子。被禍。年五十一。中廟贈都承旨。十三年。特贈左議政。致祭。宣廟贈領議政。諡文敬。萬曆庚戌。從祀文廟。公嘗戴草笠。垂蓮子纓。晩年。靜處一室。對案看書。夜深不寐。聞蓮子抵書案有輕輕聲。因知其尙觀書也。甲子。加罪。公聞命。沐浴冠帶之。神色不變。徐以鬚合口曰。不可幷此受傷。公以小學律身。以聖人爲準則。招來後學。敎誨諄諄。學者滿於前後。謗論將騰。伯勖勸止之。公曰。釋陸行。設爲禪敎。考業者千餘人。其友止之曰。禍患可畏。行曰。使先知覺後知。先覺覺後覺。吾所知告人耳。其禍福。天也。行雖緇流。其言可取。倣內則。作家範。制爲儀節。訓示子孫。尤重彝倫。下至婢僕。分別內外職。皆有名號。一蠹宰安陰。公往訪之。一蠹置一金盞。公責之曰。不意公作此器。後必以此誤人。後邑宰。果以此坐贓云。訓諸子嘗曰。言人之惡。如含血噴人。先汚其口。先生居玄風。少豪邁不羈。遨遊市街。鞭笞人物。人見之輒匿。旣長。發憤于學問。從佔畢齋請學。以小學授之。先生眷眷服膺。獨行無比。平居冠帶。而人靜然後就寢。鷄鳴則起。家室之外。未嘗出脚。人或問國家之事。必曰。小學童子。何知。嘗作詩云。業文猶未識天機。小學書中悟昨非。畢齋批云。此乃作聖根基。魯齋後。豈無其人。年三十後。始讀他書。訓後進不倦。如鳴陽正李長吉,李勣,崔忠成,朴漢參,尹信。皆出其門下。佔畢爲吏曹參判。別無建白。公上詩云。道在冬裘夏飮氷。霽行潦止豈專能。蘭如隨俗終當變。誰信牛耕馬可乘。佔畢和云。分外官銜到伐氷。匡君救俗我何能。終敎後輩嘲迂拙。勢利區區不足乘。
曺偉字太虛。昌寧人。號梅溪。文科湖堂。戶參。戊午。杖流義州。移順天。癸亥卒。甲子。禍及泉壤。暴屍三日。太虛。畢齋之妻弟也。成廟命集畢齋所著文。偉以弔義帝文首錄於集。戊午禍。子光讒曰。首錄義帝文。頗有意。燕山大怒。時偉以賀正使朝京。命越江卽斬。一行至遼東始聞之。庶弟伸。聞遼東有善卜者鄒源潔。往問吉凶。其人無他語。只書二句詩曰。千層浪裏翻身出。也須巖下宿三霄。伸回報公曰。初句似是免禍。下句難解云。乃越江。賴李相克均之力救。杖流。病死于順天。葬金山故鄕。甲子。剖棺斬屍。曳置墓前巖下三日。其詩乃驗云。
李黿字浪翁。慶州人。號再思堂。益齋之後。朴彭年之外孫。己酉。登第。官佐郞。戊午。杖流羅州。甲子。被禍。中廟初。贈都承旨。兄弟八人。人比之苟氏八龍。而目公慈明。父李鱗。娶朴彭年女。合巹之日。夢有老翁八人拜請曰。某等將就死。若活湯鑊命。則有以厚報。鱗驚起問之。饔人將以八鱉調羹。卽令放于江流。一鱉逸去。小奚持鉮而捕之。誤斷其項死焉。其夜又夢七人來謝。其後生八子。名龜,鼇,鱉,鼉,黿,鯤,鯨,龍。志其瑞也。皆有才名。浪翁文章行義。爲世所推。死於甲子。其驗如此。至今李氏不食鱉云。公弟鱉。與公泣別于郊。自是不赴擧。常騎牛載酒。携鄕社耆老。或釣或獵。每飮酒涕泣而悲。嘗作詩曰。我欲殺鳴鷄。恐有舜之聖。雖欲不殺之。亦有跖之橫。風雨鳴不已。舜跖冋一聽。善惡各孜孜。不鳴非鷄性。
鄭承祖字述而。慶州人。甲寅。文科。翰林。戊午。杖流。
李宗準字仲均。號慵齋。又號藏六舍人。乙巳。文科。戊午。謫北道。還逮獄被殺。洪貴達救解不得。
李宜茂字▣▣。德水人。司諫。戊午之禍。杖八十。徙三年。
崔溥字淵淵。羅州人。號錦南。文科重試。湖堂,司諫。戊午。杖流。甲子。被禍。成廟朝爲司諫。鄭光弼,南衮。爲左右正言。公題詩契軸。末句曰。後人指點摩挲處。知某也回某也忠。此句雖或偶成。而味其辭意。似專爲二公他日行事而發者。武定寶鑑云。博聞強記。英雄不羈。成廟朝文科重試。爲湖堂。弘文校理。奉使濟州。船爲風所漂。泊于中原浙江寧波府。邊臣疑倭寇將殺。溥應對輒給得免。成廟令上行錄。撰漂海錄以進。官禮賓寺正。禍起被謫。甲子。賜死。
李胄字胄之。固城人。號忘軒。杏村之後。戊申。文科。湖堂,正言。佔畢門人。戊午。杖配。甲子。被刑。嘗爲正言。言事慷慨有節氣。 武定寶鑑云。能文章有氣節。禍起。以佔畢門徒。杖流珍島。甲子。被殺。
朴漢柱字天支。密陽人。號迂拙齋。遊學佔畢門下。成廟乙巳登第。歷正言,獻納。言事直截。出爲醴泉郡守。戊午禍起。杖流碧潼。甲子被殺。中廟初贈都承旨。 武定寶鑑
任煕載字敬輿。豐川人。號勿庵。戊午。文科。承文院正字。以佔畢門徒杖流。煕載。士洪之子。善書。嘗題一絶于屛曰。祖舜宗堯自太平。秦皇何事苦蒼生。不知禍起蕭墻內。虛築防胡萬里城。一日。燕山猝幸士洪家。見其題。問曰。誰所書耶。士洪以實對。主有怒色曰。卿子。不肖人也。欲殺之。卿意何如。士洪跪而對曰。此子性行不順。果如上敎。遂被禍。
康伯珍字子韞。信川人。佔畢齋外甥。丁酉。文科。司諫。戊午。杖流。甲子。被刑。
柳廷秀字國俊。文化人。癸卯。文科。戊午禍起。以掌令極力救之。竟流而卒。子灌。官至右相。
李繼孟字希醇。全義人。號墨巖。癸卯。司馬。成宗己酉。文科。戊午。以承旨杖流靈光。丙寅反正後。卽拜司憲。官至參贊。諡文平。壽六十六。 武定寶鑑云。成廟乙酉。登第。詩文爲佔畢所取。禍起。以畢齋門徒杖流。放還。退居金堤。
李惟淸字直哉。韓山人。塤之子。登文科。戊午。以左相執政。力救佔畢。竄江界。中宗乙卯。拜領相。諡恭僖。 文獻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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