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생육신/생육신 추강 남효은

생육신 추강 남효은 관련 자료

아베베1 2011. 10. 10. 10:34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 주봉 시선대 만장봉의  모습이다   

 

 

 

추강 남효은 생육신의 한분이시다  어릴적 남추강이 노닐던 학가정 주변에서 놀았던 기억이 남는다 

지금도 나의 고향에는 정자가 존재하고 있다 .    

개인적으로는 문성공 고려문화시중 7세손 산당공 휘 충성 선조님(방조)의 스승 되시는 분이기도 하시다 

사우명행록에 그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남효온(南孝溫)

 

조선 성종(成宗) 때의 학자.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함.

 

시대: 조선전기  연도: 1454-1492

 

 

 

金陵集卷之十六 宜寧南公轍元平著

 墓碣
秋江先生南公墓碣銘 a_272_306c


正宗六年。原州儒生。以故直提學元昊狀。請謚于朝。下該曹議。仍命公與金時習,成耼壽,李孟專,趙旅等。幷贈職賜謚。公與五人。世稱端宗生六臣。與死六臣其事雖異。而爲其舊主盡節。不應貢擧。不仕272_306d或逃隱。其義一也。正宗在宥。凡前代忠良之士。咸得伸枉。貤褒擧動。事事得宜。而是擧尤大慰人望。朝野聳聽。或有流涕者。公諱孝溫。字伯恭。學者稱秋江先生。南氏世居宜寧。其先有諱在議政府領議政。謚忠景。配享太祖廟庭。曾祖諱簡直提學。以淸名著于時。祖諱俊司憲府監察。考諱恮生員。妣李氏。公生於景泰甲戌。爲人淸明豪邁。在羣輩中。超然有高士風。性喜酒。時時劇飮大醉。好爲危言詭論。以觸忌諱。一日。母恭人有憂戒語。公自是絶不復飮。作止酒賦以自警。其後朋友勸之。亦不飮也。甫弱冠。已有求道272_307a志。負笈從佔畢齋金先生門。得聞性理之學。先生不名公而號之曰。老夫非子之師。子乃老夫之友也。光廟三年。公上書請復昭陵。自昭陵廢。人皆囚舌。不敢出一言。公至是抗論之。固大駭當世矣。都承旨任士洪言此非人臣所敢議。倡議力排。領議政鄭昌孫。曾與廢陵之議。亦沮之。時人皆目之爲狂生。公益悲憤嫉俗。慟哭入山澤中。或終日不返。嘗著六臣傳。門生故舊懼及禍。競止之。公笑曰。吾豈畏一死而終沒忠臣之名乎。傳卒行于時。旣而移家江湖間。躬耕讀書。暇則戴篛笠手釣竿。與漁人樵子。混跡以272_307b行。仰見白日在天。歎曰。人生也直。人不可欺。天可欺乎。庚子中司馬。遂不赴擧。其友金悅卿謂之曰。我則受先王厚恩。不仕宜也。子則異於是。其爲世道。可一出矣。公曰。復昭陵後應試。亦未晩也。悅卿亦不復言。公少從事學問。輔以師友。與朱溪正深源,安興公子挺。皆友善。結爲竹林羽士。砥礪名行。爲一時士類領袖。搢紳章甫道東南者。無不禮於其門。文章簡潔好自言其志。有文集四編傳于世。公著鬼神論。言絀伸幽明之理。後我使至日本。其國人至今誦之。問何以得此論。則其傳已久。今不記云。公卒時年纔二272_307c十九。葬于高陽大壯里之原。配尹氏。郡守壎女。一男忠世。燕山甲子。史禍作。佔畢門徒以黨錮死者。亡慮百餘人。追論公言昭陵事。掘其塚戮之。忠世亦坐死無嗣。中宗卽位。始復昭陵。雪公寃。贈承政院左承旨。高陽,宜寧,長興諸郡。幷立祠俎豆之。正宗又命加贈資憲大夫吏曹判書。賜謚文貞。聖朝所以褒忠奬節者。猗歟盛哉。公以一布衣。終其所樹立。僅有復昭陵一疏。然推其志。雖謂之軒天地耀日月可也。議者謂公與在朝任言責者有異。或言佔畢旣仕於光陵。不當作某文字。其時翰林書之272_307d史草以貽禍非也。是皆不究經權本末之論也。當甲子之禍。士大夫膏鈇鍖夷九族者。項背相望。世皆惴惴然指讀書爲禍胎。而君臣大倫之與天地相經緯者。獨賴而不墜。其誰之功也。士當觀大節與其事之是非正否。二公之仕與不仕。當言與不當言。不必論也。况其義人得而言者乎。自東京白馬之事。已有激成出位之論。拘文牽法。曲訾傍議者。不可勝數。韓子言小人好議論而不樂成人之美。嗚呼。此本朝士禍大關係人。彼後生輩其可得而議之哉。且禪代之際。自古難言之。是時在廷諸臣。相率首鼠喙伏。甚者272_308a受顧命反眼。略不知恥者非一二也。公固知天命有歸。而猶欲以一身搘拄綱常。始旣爲箕子之狂。豫讓之行。終至發塚剖棺。臠胔剔骸。瓜蔓株拏。禍延朋族而不自知悔。公可謂盡心矣。公之歿今三百年。墓事多闕。宗人謀欲樹碣。屬公轍爲文。余謂生六臣與死六臣。其事具載史官。他日必有可攷者。特於總論詳言之。以竢後之君子。銘曰。
公歿卅紀後嗣絶。有隤者墳榛且閼。鼯跳豽號風颲颲。噫孰知爲先生之圽。淸明在躬。狂不爲垢。名在于人。菑不爲咎。天柱折兮山崩。螮蝀翳兮日薄蝕。衆昏272_308b矇而墨㦿。我獨察察。不蒙世之湯鑊。刻銘于石。表玆貞士。毋犂而耕。其封而梓。彼高四尺。先生攸里。

속동문선 제6권
 오언율시(五言律詩)
여 우인 유 소격서동(與友人遊昭格署洞)


남효은(南孝溫)

깊숙한 골짜기의 구름이 나는 곳에 / 幽洞雲生處
시내는 흘러 밤낮으로 찧는다 / 溪流日夕春
꽃이 밝으매 산길이 익숙하고 / 花明山路熟
사람이 끊겼으매 돌문이 무거워라 / 人斷石門重
푸른 연 산봉우리 새는 지나 날고 / 鳥度靑蓮嶂
비스듬한 소나무 용이 누웠다 / 龍頹韋偃松
일찍부터 구경하는 버릇으로 / 從來爲眼癖
지팡이 짚는 수고 생각하지 않았다 / 不計費扶笻


 속동문선 제12권
 서(書)
답 남추강 서(答南秋江書)


김종직(金宗直)

추강(秋江) 족하(足下)여, 내가 호남(湖南)에서 서울에 온 지가 거의 반 년인데, 이상하게도 추강의 편지가 한 번도 오지 아니하였으니, 정녕 추강이 지난 해에 호남ㆍ영남을 두루 노닐며 진한(辰韓)ㆍ변한(弁韓)의 유적을 남김없이 다 보았으니, 지금은 추강이 반드시 철령(鐵嶺) 이북이나 혹은 패강(浿江) 이서에 있어, 두만강을 거슬러 물길(勿吉)ㆍ읍루(挹婁)의 옛터를 바라보며, 마자(馬訾)에서 배를 타고 국내성(國內城)ㆍ환도성(丸都城)의 지역을 찾아서 방황하고 지체하여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다지도 소식이 없을 수 있을까 하던 중, 오늘 새벽에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나더니 문득 깨끗한 종이에 간정한 해서(楷書)로 써서 마치 공고(公孤 삼공(三公)ㆍ삼고(三孤)를 말한 것임)의 문에 보내는 것 같은 편지를 얻어 펴본즉 바로 우리 추강의 편지였소.
아, 추강이여, 나를 어찌 그리 박대하십니까. 나는 쇠퇴한 증세가 날로 심하여 변폭(邊幅)을 수식하지 않은 지가 오래였는데, 어떻게 군자의 헛된 칭찬을 감당하리오. 자술(自述)한 만사(輓詞) 네 편을 편지 외편에 실었기에, 세 번 읽고서야 비로소 추강이 멀리 노닌 것이 아니라,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이 되는 것은 거년 가을ㆍ겨울 이래 나도 역시 병이 들어 10일이면 9일은 누워 있었으므로 한 번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선 이 만사를 보니 족히 도연명(陶淵明)ㆍ진소유(秦少游)를 이어받았다 할 만하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또 족히 우리 추강의 수명이 한량 없음을 알 수 있소. 저 두 사람의 노래는 모두 목숨이 끊어질 임시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도연맹은 세상을 달관하고 진소유는 인생을 슬퍼하는 것 등으로 그치고, 다시 여운을 남긴 맛이 없는데, 우리 추강은 세상의 여섯 가지 액을 슬퍼한 것 같지만 마침내는, “36년을 지나는 동안에, 언제나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다.” 하였으니, 그 자찬이 매우 깊다 하겠고, 또 못내 이 세상을 잊지 못하는 생각이 있으니, 이를 어찌 갑자기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사람의 소리라 하겠습니까. 추강 같은 이에 대해서는 이수(二竪 병의 이칭)가 제 아무리 육신을 괴롭힐망정 어찌 능히 그 수명을 조종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대수(大數)가 조석에 박두했단 말은 녹명(祿命)을 따지는 것과 근사하니, 추강으로서 마땅히 믿을 바 아닌 듯싶습니다.
나는 일찍이 듣건대, 옛사람은 흔히 미리 자기 묻힐 자리를 만들어 놓은 일이 있었다 하고, 또 일찍이 보니, 시골 노인이 스스로 관을 만들고 의금(衣衾) 염습(斂襲)의 물건까지도 빠짐없이 다 준비하고, 항상 그 관속에 누워도 보며 죽도록 그렇게 하였는데, 이는 다만 미리 준비해 둔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더러는 은연히 오래 살기를 기양(祈穰)하는 것이라고 비웃는 자도 있습니다. 지금 추강의 자만시(自挽詩)도 이런 유가 아닙니까. 이 말은 농담입니다.
정월이라 일기가 따뜻하여 온갖 물건이 소생하는데, 자친을 위하여 심중히 몸조심하시기를 빌며 갖추지 못합니다.


 

[주D-001]변폭(邊幅)을 수식 : 겉치레 꾸미는 것을 말한다. 공손(公孫)이 쫓아가서 국사(國士)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변폭(邊幅)을 수식하여 우형(偶形)같이 앉았다 하였고, 그 주석에 포백(布帛)의 변폭을 다듬은 것과 같다 하였다.《後漢書 馬援傳》
[주D-002]자술(自述)한 만사(輓詞) : 자기가 죽을 것을 미리 각오하고 자기 스스로가 만장(輓章)을 짓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에 진(晋) 나라 도연명(陶淵明)과 송(宋) 나라 진소유(秦少游)도 지었던 것이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10대 조비(祖妣)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파평 윤씨(坡平尹氏) 묘표(墓表)


조선조에 영의정을 지내고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충경(忠景)인 구정(龜亭) 남공(南公) 휘 재(在)의 원배(元配)인 변한국대부인 파평 윤씨의 묘는 바로 장단부(長湍府) 북쪽에서 40리가 좀 넘는 전재궁리(田齋宮里)에 있으니, 바로 송도(松都)의 동대문 밖에서 10리가 채 못 되는 가까운 천수원(天壽院) 뒤 골짜기 자좌(子坐)의 산이다.
성화(成化) 연간에 증손 칭(偁)이 송도 판관(松都判官)으로 있으면서 표석을 세웠는데 이제는 글자가 마멸되었다. 숭정 기원후 두 번째 되는 무진년(1688, 숙종 14)에 칭의 8대손 익훈(益熏)이 승지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와 부사(府使)가 되어 묘소 앞에는 상석(床石)을 설치하고 뒤에는 담장을 둘러쳤으며 왼쪽에 새로 비석을 세우고 글을 새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인의 10대조 관(瓘)은 시중이고, 고조 보(珤)는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이고, 증조 암(諳)은 소부윤(少府尹)이고, 조고 해(侅)는 대광 전서(大匡典書)이고, 선고 호(虎)는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낸 정후공(靖厚公)이며 선비는 지선주사(知善州事) 이원후(李元厚)의 따님이다. 남씨의 옛집은 송도의 태평관(太平館) 동쪽에 있었는데, 미처 한양으로 이사하기 전에 부인이 별세하였으므로 이곳에 장례하였다. 얼마 후 부군인 구정공(龜亭公)을 건원릉 밖 주동(注洞)의 산에 배장(陪葬)하였으므로 부장(祔葬)하지 못하였다.
부인은 2남을 길렀는데, 장남 경문(景文)은 병조 의랑이고 차남은 경무(景武)이다. 손자에 좌의정 지(智), 직제학 간(簡), 의산군(宜山君) 휘(暉)와 증손에 의령군(宜寧君) 윤(倫), 참판 의(儀)와 현손에 판서 이(怡), 정랑 제(悌), 대사간 율(慄), 승지 흔(忻)이 현달한 자이다. 후세에 명망과 지위가 세상에 알려진 자로는 의성위(宜城尉) 치원(致元), 의천위(宜川尉) 섭원(爕元), 참판 세웅(世雄)ㆍ세준(世準)ㆍ세건(世健), 절도사 효원(孝元), 추강거사(秋江居士) 효온(孝溫), 판윤(判尹) 효의(孝義)ㆍ치근(致勤), 참판 응운(應雲), 참의 응룡(應龍), 승지 언순(彦純), 부윤(府尹) 언경(彦經), 좌의정으로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해진 이웅(以雄), 참판 이신(以信), 의춘군(宜春君) 이흥(以興), 판서 이공(以恭)ㆍ선(銑), 참지(參知) 두첨(斗瞻), 참판 두병(斗柄)ㆍ노성(老星), 판서 이성(二星), 관찰사 훤(翧)이 있으며, 현재 문신의 적에 올라 조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자로는 정언 유성(有星), 장령 필성(弼星), 대제학 용익(龍翼), 교리 치훈(致熏), 좌랑 지훈(至熏)ㆍ언창(彦昌)이 있다.
구정공은 개국 공신 1등으로 불천위의 사당에 모셔지고 부인이 배향되었는데, 11대손 반(磐)이 실로 제사를 주관한다. 부인이 남기신 규범과 교훈을 세대가 멀어서 증거할 곳이 없어 기록할 수 없으므로 이제 그 세계(世系)와 자손 및 남은 경사가 무궁함을 기록해서 앞에 근원이 넉넉하면 뒤에 흐름이 풍부함을 증명하는 바이다.
10대손 영의정 구만은 삼가 기록하고 아울러 쓰다.
무진년(1688, 숙종 14)에 부사 익훈(益熏)이 비석을 장만하여 글자를 새기려 하였는데, 마침 체직하고 돌아와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갑술년(1694)에 9대손 필성(弼星)이 전직 승지로 나와 부사가 되어서 을해년(1695) 7월에 비로소 비석을 다듬어서 글자를 새겨 묘소 왼쪽에 세웠다.


 

약천집 제19권
 비(碑)
노량진(露梁津)에 있는 육신묘비(六臣墓碑) 무자년(1708, 숙종 34)


옛날 단종대왕(端宗大王)이 왕위를 선양했을 적에 충신과 열사들이 단종을 위하여 전후로 목숨을 바친 자가 많았는데,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병자육신전(丙子六臣傳)》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그러므로 단종 때의 일을 언급할 적에 사람들이 반드시 육신이라고 칭하였다.
경성(京城)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되는 한강 너머 노량진 강가에 다섯 기(基)의 묘소가 있으니, 각각 짧은 비갈에 박씨지묘(朴氏之墓), 유씨지묘(兪氏之墓), 이씨지묘(李氏之墓), 성씨지묘(成氏之墓), 성씨지묘(成氏之墓)라고만 표시하고 그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는 여섯 성씨 중에 네 개만 있고 두 개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육신의 묘라고 전해온 것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성씨(成氏)의 묘가 둘이 있는 것은 총관(摠管)과 승지(承旨) 부자가 함께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하씨(河氏)의 묘는 영남(嶺南)의 선산(善山)에 있고 유씨(柳氏)의 묘만 유독 소재지가 전해지지 않는다. 짐작컨대 육신이 죽을 적에 그 종족(宗族)이 망하여 없어져 의인(義人)이 시신을 거두어서 묻었으나,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무릅쓰고 주선하였으니 형편상 어렵고 쉬움이 혹 차이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혹은 고향에 시신을 모셔다 장례하기도 하고, 혹은 끝내 시신을 땅에 묻지 못했는가 보다.
또 듣자하니 총관의 묘소가 또 홍주(洪州)의 고향에 있다고 하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형벌을 받은 뒤에 지체(肢體)를 각각 하나씩 묻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라고 한다. 만일 이 말이 과연 맞는다면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천추에 눈물을 자아내게 할 만하다. 또 이곳에 성씨의 묘가 둘이 있는 것은 근래 노인들이 귀와 눈으로 실제 접한 것이고 전해 오는 말을 근거할 수 있으나, 어느 해인가 권세 있는 귀인이 강가에 별장을 지으면서 부근의 묘소에 있는 비갈을 모두 제거하였다. 권세 있는 귀인이 실세한 뒤에 어떤 사람이 예전의 비갈이 쓰러지고 부서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세웠으나 미처 다시 세우기 전에 나중에 쓴 무덤들이 그 사이에 많이 섞여 있어서 성씨의 한 묘소를 혼동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고, 또 그 비갈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성씨의 묘소인 줄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당초에 네 성의 신하를 장례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에 있었는데 연도가 오래되어 혹 성씨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 슬프다. 육신이 죽을 때에 살아남은 자손들이 없고 오직 박씨만이 유복의 손자가 있어 이름이 노예에 뒤섞여서 수사(收司)를 면하였다. 몇 대가 지난 뒤에야 조정에서 비로소 충성을 가엾게 여겨 녹용하였다.
6세손 익찬(翊贊) 숭고(崇古)에 이르러 생각하기를 “노량진의 묘소는 비록 근거할 만한 문적이 없어 의심하고 있으나 다섯 비갈에 네 성씨가 있으니, 이것이 충분히 증거가 될 수 있다. 또 어찌 성씨만 있고 이름이 없다 하여 믿지 않고 돌보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옛 봉분을 더 쌓고 새 비갈을 세웠으며, 또 상공(相公) 허목(許穆)에게 비문을 요청하니, 이름하기를 ‘육신의총비문(六臣疑塚碑文)’이라 하였으나 미처 비석에 새기지 못하였다.
금상(今上) 5년 기미에 성상이 노량진에서 열무하실 적에 여러 공경(公卿)들의 아룀을 따라 강 건너에서 묘를 바라보시고는 한탄하고 감회를 일으키시어 묘역에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도록 명하였다. 중외의 많은 선비들이 이에 분발되어서 묘소 곁에 사우를 창건하고 육신을 나란히 제향하였다. 17년 신미에 상이 장릉(章陵)에 전알(展謁)하러 가실 적에 연(輦)이 묘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성상은 또다시 관직을 회복하고 치제하게 하였으며 이어서 ‘민절(愍節)’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아, 이보다 전에는 이른바 육신의 묘라는 것이 다만 구릉의 한 줌 흙더미이고 부식된 한 조각의 빗돌이어서 강가의 늙은이와 나루터의 아전들이 오갈 적에 은밀히 이곳을 가리키며 말로 서로 전했었는데, 이제는 이 사실이 공경의 아룀에 올랐으며 성상이 두 번이나 보시고 융숭한 예를 내리셨다. 그리하여 이미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으라는 은혜로운 명령이 있었고, 또 사우를 세워 제향하고 관직과 품계를 다시 회복하였으며, 제사를 특별히 내려주고 화려한 편액을 밝게 게시하였다.
조정에서 표창함이 이와 같이 빛나고 드러났는데도 마침내 슬픈 마음을 일으키는 유허(遺墟)에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두어서 충성스런 혼과 굳센 넋으로 하여금 황폐한 풀과 차가운 연기와 도깨비들이 떼 지어 울부짖는 가운데 길이 매몰되게 한다면, 당시 의사들이 봉분을 쌓고 비갈을 세운 고달픈 마음을 저버림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오늘날 성조(聖朝)에서 충신을 표창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보기 드문 은전을 헛되게 함에 가깝지 않겠는가. 박공(朴公)의 영혼 또한 어찌 ‘내 다행히 남은 혈손(血孫)이 있다.’고 말씀하시겠는가.
숭고의 손자인 청안 현감(淸安縣監) 경여(慶餘)가 이를 깊이 염려하고 여러 어른들과 상의하여 이 일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해서 신도(神道)에 비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에게 와서 명문(銘文)을 부탁하므로 나는 늙고 혼몽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에 나는 생각하기를, “그렇다. 노량의 묘소가 육신의 무덤이 됨은 믿을 만하고 의심할 수 없음이 참으로 그대 조고의 유의(遺意)와 같다. 저 옛날 장릉의 지위와 칭호가 회복되지 않았을 때에는 오히려 기휘(忌諱)하는 바가 있어서 감히 끝까지 말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조정에서 육신에 대하여 흔쾌히 권장해 주어서 풍성(風聲)을 길이 세울 뿐만 아니라 장릉을 복위한 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노량의 묘소에 있어서만 유독 의심스러워 신빙할 수 없다 해서 단단한 돌을 깎아 사실을 기록하여 옛날에 어두운 것을 제거하고 새로 드러냄을 이루어 지금에 밝혀서 장구한 후세에 분명히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그 일을 차례로 쓰고 명한다.

서호의 남쪽 강안에 / 西湖南岸
옹기종기 무덤 있는데 / 有墓纍纍
각각 표시한 글이 있어 / 各有其表
다섯 비갈에 네 성씨가 적혀 있네 / 五碣四氏
예로부터 전해 오기를 / 傳道自古
육신이 묻힌 곳이라 하는데 / 六臣所閟
성씨는 여섯이나 / 其氏有六
이곳에 네 개만 갖추어졌네 / 此具其四
화가 일어나던 때에 / 禍發之際
의를 사모하여 묻은 것이니 / 事出慕義
그 이름을 쓰지 않음은 / 不書其名
까닭 있어서임을 아노라 / 知有所以
어이하여 후세 사람들은 / 云何後人
여기에 의심을 하는가 / 有疑于是
비록 문적이 없어서이나 / 雖緣無籍
실은 기휘함을 염려해서라오 / 實慮有忌
다행히 성조를 만나 / 幸會聖朝
성상의 마음에 감동함이 있으니 / 有感天意
충절을 표창함이 / 褒忠獎節
지극하지 않음이 없네 / 靡有不至
백일의 광채가 / 白日之光
깊은 땅속까지 통하여 / 洞徹九地
넓은 도량과 큰 은덕 / 曠度大德
형용하여 말할 수 없어라 / 不可擬議
옛날에 기휘하던 것 / 昔者所諱
이제는 모두 피함이 없다오 / 今悉無避
생각건대 차례로 표시한 글 / 言念列表
저와 같이 없어지지 않았고 / 不泐如彼
또 봉분하고 나무를 심어 / 又加封植
이와 같이 훌륭하니 / 其盛若此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을 / 人之然疑
이제는 끝낼 수 있으리라 / 汔可已已
취금헌(醉琴軒)은 후손이 있어 / 醉琴有後
함께 육신(六臣)의 제사를 주관하네 / 並主六祀
전하여 육세에 이르러서 / 傳至六世
무너진 묘소를 수리하고 / 曾修墓圮
또 비문을 기술하였으나 / 且述碑文
아직도 곧바로 쓰지 못하였는데 / 猶靳直致
지난해에 이르러 / 爰及頃年
장릉을 복위하였다오 / 莊陵復位
무덤을 높여 새로 만든 듯하고 / 崇岡若新
여러 석물을 다 구비하니 / 象設咸備
군주와 신하는 일체인데 / 一體君臣
일이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 事豈有異
이곳에 묻혀 있는 넋을 받듦은 / 奉玆降魄
더욱 의심할 것이 없도다 / 尤宜無貳
분명히 글을 새겨서 / 明言顯刻
천 년에 길이 보이노니 / 用視千禩
부디 영령들이여 / 庶幾英靈
끝까지 이곳에 모이소서 / 終焉此萃


 

[주D-001]총관(摠管)과 승지(承旨) 부자 : 총관은 아버지인 성승(成勝), 승지는 그의 아들인 성삼문(成三問)을 가리킨다.
[주D-002]수사(收司) : 법을 맡은 기관에 체포됨을 이른다.
[주D-003]취금헌(醉琴軒) : 박팽년(朴彭年)의 호이다.

 

청장관전서 제59권
 앙엽기 6(盎葉記六)
국조명신언행록(國朝名臣言行錄)


송성명(宋成明)이 엮은 《국조명신언행록》이 아직 간행은 되지 않았지만 이제 그 목록을 적어 본다.
전집(前集) ○ 제1권 : 조준(趙浚) 송당(松堂)ㆍ남재(南在) 귀정(龜亭)ㆍ심덕부(沈德符)ㆍ성석린(成石磷) 독곡(獨谷)ㆍ민제(閔霽) 어은(漁隱)ㆍ조인옥(趙仁沃)
○ 제2권 : 하륜(河崙) 호정(浩亭)ㆍ권근(權近) 양촌(陽村)ㆍ조영무(趙英茂)ㆍ유정현(柳廷顯)ㆍ한상경(韓尙敬) 신재(信齋)ㆍ박은(朴訔) 조은(釣隱)ㆍ이원(李原) 용헌(容軒)ㆍ유관(柳觀) 하정(夏亭)ㆍ이직(李稷) 형재(亨齋)ㆍ이래(李來)ㆍ함부림(咸傅霖) 난계(蘭溪)
○ 제3권 : 황희(黃喜) 방촌(厖村)ㆍ맹사성(孟思誠)ㆍ조연(趙涓)ㆍ변계량(卞季良) 춘정(春亭)ㆍ허조(許稠)ㆍ조말생(趙末生) 두곡(杜谷)ㆍ한상덕(韓尙德)ㆍ이맹균(李孟畇)ㆍ이종무(李從茂)ㆍ최윤덕(崔潤德)
○ 제4권 : 노한(盧閈)ㆍ신개(申槩) 인재(寅齋)ㆍ하연(河演) 경재(敬齋)ㆍ권홍(權弘)ㆍ윤상(尹祥)ㆍ박안신(朴安信)ㆍ윤회(尹淮)ㆍ남지(南智)ㆍ허성(許誠)ㆍ박연(朴堧)ㆍ어변갑(魚變甲)ㆍ정척(鄭陟) 정암(整庵)ㆍ안지(安止) 고은(皐隱)ㆍ김구(金鉤)ㆍ김반(金泮) 송정(松亭)ㆍ김말(金末)ㆍ정갑손(鄭甲孫)ㆍ최치운(崔致雲)
○ 제5권 : 정인지(鄭麟趾) 학역재(學易齋)ㆍ한확(韓確)ㆍ김숙자(金叔滋)ㆍ이맹전(李孟專)ㆍ 이변(李邊)ㆍ기처(奇處)ㆍ강석덕(姜碩德) 완역재(玩易齋)ㆍ신석조(辛碩祖) 연빙당(淵氷堂)ㆍ유의손(柳義孫)ㆍ권채(權採) 매헌(梅軒)ㆍ남수문(南秀文)ㆍ정창손(鄭昌孫)ㆍ이계전(李季甸)ㆍ어효첨(魚孝瞻)ㆍ구치관(具致寬)ㆍ황수신(黃守身) 나부(懦夫)ㆍ최항(崔恒) 태허정(太虛亭)ㆍ박원형(朴元亨) 만절당(晩節堂)
○ 제6권 : 신숙주(申叔舟) 보한재(保閑齋)ㆍ권남(權擥)ㆍ한명회(韓明澮)ㆍ윤자운(尹子雲) 낙한정(樂閒亭)ㆍ이석형(李石亨) 저헌(樗軒)ㆍ김수온(金守溫) 괴애(乖崖)ㆍ양성지(梁誠之) 눌재(訥齋)ㆍ이예(李芮)ㆍ강희안(姜希顔) 인재(仁齋)ㆍ홍일동(洪逸童) 마천(麻川)
○ 제7권 : 서거정(徐居正) 사가정(四佳亭)ㆍ강희맹(姜希孟) 사숙재(私淑齋)ㆍ임수겸(林守謙) 갈곡(葛谷)ㆍ성임(成任) 안재(安齋)ㆍ이극배(李克培)ㆍ한계희(韓繼禧)ㆍ홍응(洪應)ㆍ노사신(盧思愼)ㆍ이약동(李約東)ㆍ이파(李坡)ㆍ성간(成侃)ㆍ손순효(孫舜孝) 물재(勿齋)ㆍ윤효손(尹孝孫)ㆍ어유소(魚有沼)
○ 제8권 : 허종(許琮) 상우당(尙友堂)ㆍ어세겸(魚世謙)ㆍ어세공(魚世恭)ㆍ정난종(鄭蘭宗) 허백당(虛白堂)ㆍ이종생(李從生)ㆍ이덕량(李德良)ㆍ성현(成俔) 용재(慵齋)ㆍ유순(柳洵) 노포(老圃)ㆍ이륙(李陸) 청파(靑坡)ㆍ허침(許琛)ㆍ노공필(盧公弼) 국일(菊逸)ㆍ안침(安琛)ㆍ채수(蔡壽)ㆍ이손(李蓀)ㆍ권경우(權景祐)ㆍ김흔(金訢) 안락당(顔樂堂)ㆍ유호인(兪好仁) 뇌계(㵢溪)
○ 제9권 : 김수동(金壽童)ㆍ송일(宋軼)ㆍ김응기(金應箕)ㆍ이집(李諿)ㆍ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ㆍ정광필(鄭光弼)ㆍ신용개(申用漑) 인락당(仁樂堂)
○ 제10권 : 임유겸(任由謙)ㆍ성세순(成世純)ㆍ조원기(趙元紀)ㆍ성몽정(成夢井)ㆍ이사균(李思鈞) 눌헌(訥軒)ㆍ이현보(李賢輔) 농암(聾巖)ㆍ박상(朴祥) 눌재(訥齋)ㆍ우맹선(禹孟善)ㆍ허굉(許硡)ㆍ이자(李耔) 음애(陰厓)ㆍ홍언필(洪彦弼) 묵재(黙齋)ㆍ권벌(權橃)ㆍ성세창(成世昌) 돈재(遯齋)ㆍ임추(任樞)
○ 제11권 : 신광한(申光漢) 기재(企齋)ㆍ소세양(蘇世讓) 양곡(陽谷)ㆍ심연원(沈連源) 보암(保庵)ㆍ상진(尙震) 범허정(泛虛亭)ㆍ정옥형(丁玉亨)ㆍ임권(任權)ㆍ안현(安玹)ㆍ장언량(張彦良)ㆍ심광언(沈光彦) 둔암(鈍庵)ㆍ조광원(曺光遠)ㆍ오겸(吳謙)ㆍ이윤경(李潤慶)
○ 제12권 : 이준경(李浚慶) 동고(東皐)ㆍ홍섬(洪暹) 인재(忍齋)ㆍ권철(權轍)ㆍ임호신(任虎臣)ㆍ조언수(趙彦秀)ㆍ조사수(趙士秀) 송강(松岡)ㆍ민기(閔箕) 관물재(觀物齋)ㆍ이탁(李鐸)ㆍ심달원(沈達源) 효창(曉窓)ㆍ이택(李澤)ㆍ남치근(南致勤)ㆍ장필무(張弼武)
후집(後集) ○ 제1권 : 백인걸(白仁傑) 휴암(休庵)ㆍ정유길(鄭惟吉) 임당(林塘)ㆍ노수신(盧守愼) 소재(蘇齋)ㆍ정종영(鄭宗榮) 항재(恒齋)ㆍ이준민(李俊民) 신암(新菴)
○ 제2권 : 박순(朴淳) 사암(思庵)ㆍ김계휘(金繼輝) 황강(黃岡)ㆍ박응남(朴應男) 퇴암(退庵)ㆍ이후백(李後白) 청련(靑蓮)ㆍ정탁(鄭琢) 약포(藥圃)ㆍ정지연(鄭芝衍) 남봉(南峯)
○ 제3권 : 황정욱(黃廷彧) 지천(芝川)ㆍ구사맹(具思孟) 팔곡(八谷)ㆍ윤두수(尹斗壽) 오음(梧陰)ㆍ윤근수(尹根壽) 월정(月汀)ㆍ신응시(辛應時) 백록(白麓)ㆍ구봉령(具鳳齡) 백담(柏潭)ㆍ이산해(李山海) 아계(鵝溪)
○ 제4권 : 정철(鄭澈) 송강(松江)ㆍ홍성민(洪聖民) 졸옹(拙翁)ㆍ이해수(李海壽) 약포(藥圃)ㆍ배삼익(裵三益) 임연(臨淵)ㆍ김명원(金命元) 주은(酒隱)ㆍ이제신(李濟臣) 청강(淸江)ㆍ변협(邊協)
○ 제5권 : 유성룡(柳成龍) 서애(西厓)ㆍ이산보(李山甫) 명곡(鳴谷)ㆍ이정암(李廷馣) 월천(月川)
○ 제6권 : 김성일(金誠一) 학봉(鶴峯)ㆍ권율(權慄)ㆍ이순신(李舜臣)
○ 제7권 : 이원익(李元翼) 오리(梧里)ㆍ정곤수(鄭崑壽) 백곡(柏谷)ㆍ심희수(沈喜壽) 일송(一松)ㆍ유근(柳根) 서경(西埛)ㆍ윤기(尹祁) 간보(艮輔)ㆍ한응인(韓應寅)ㆍ홍이상(洪履祥) 모당(慕堂)
○ 제8권 : 이덕형(李德馨) 한음(漢陰)ㆍ이항복(李恒福) 백사(白沙)ㆍ장운익(張雲翼)ㆍ오억령(吳億齡) 만취(晩翠)ㆍ이호민(李好閔) 오봉(五峯)ㆍ박동현(朴東賢) 활당(活塘)ㆍ나급(羅級)
○ 제9권 : 한준겸(韓浚謙) 유천(柳川)ㆍ구성(具宬) 초당(艸塘)ㆍ서성(徐渻) 약봉(藥峯)ㆍ이수광(李睟光) 지봉(芝峯)ㆍ정엽(鄭曄) 수몽(守夢)ㆍ정경세(鄭經世) 우복(愚伏)
○ 제10권 : 신흠(申欽) 상촌(象村)ㆍ황신(黃愼) 추포(秋浦)ㆍ오윤겸(吳允謙) 추탄(楸灘)
○ 제11권 : 김상용(金尙容) 선원(仙源)ㆍ이정귀(李廷龜) 월사(月沙)ㆍ박동량(朴東亮) 오창(梧囱)
○ 제12권 : 김류(金瑬) 북저(北渚)ㆍ이귀(李貴) 묵재(黙齋)
○ 제13권 : 홍서봉(洪瑞鳳) 학곡(鶴谷)ㆍ신경진(申景禛)ㆍ이서(李曙)ㆍ구인후(具仁垕) 유포(柳浦)ㆍ장만(張晩)ㆍ이시발(李時發)ㆍ유행(柳珩)ㆍ정충신(鄭忠信)
○ 제14권 : 김상헌(金尙憲) 청음(淸陰)ㆍ정온(鄭蘊) 동계(桐溪)ㆍ윤황(尹煌) 팔송(八松)ㆍ이안눌(李安訥) 동악(東岳)
○ 제15권 : 최명길(崔鳴吉) 지천(遲川)ㆍ장유(張維) 계곡(谿谷)
○ 제16권 : 조익(趙翼) 포저(浦渚)ㆍ김시양(金時讓) 하담(荷潭)ㆍ이경직(李景稷) 석문(石門)
○ 제17권 : 이경여(李敬輿) 백강(白江)ㆍ이무(李楘) 송교(松郊)
○ 제18권 : 임숙영(任叔英) 소암(疏菴)ㆍ민응형(閔應亨)ㆍ유백증(兪伯曾) 취헌(翠軒)ㆍ강석기(姜碩基) 월당(月塘)ㆍ신익성(申翊聖) 낙전당(樂全堂)ㆍ이명한(李明漢) 백주(白洲)ㆍ김육(金堉) 잠곡(潛谷)
외집(外集) ○ 제1권 : 김굉필(金宏弼) 한훤당(寒暄堂)ㆍ정여창(鄭汝昌) 일두(壹蠹)ㆍ정붕(鄭鵬) 신당(新堂)ㆍ박영(朴英) 송당(松堂)ㆍ유우(柳藕) 서봉(西峯)ㆍ김안국(金安國) 모재(慕齋)
○ 제2권 : 조광조(趙光祖) 정암(靜庵)ㆍ김정국(金正國) 사재(思齋)ㆍ조성(趙晟) 양심당(養心堂)ㆍ조욱(趙昱) 보진암(葆眞庵)
○ 제3권 : 이언적(李彦迪) 회재(晦齋)ㆍ채세영(蔡世英) 임진(任眞)ㆍ박소(朴紹) 야천(冶川)ㆍ성운(成運) 대곡(大谷)ㆍ홍인우(洪仁祐) 치재(恥齋)
○ 제4권 : 이황(李滉) 퇴계(退溪)ㆍ성수침(成守琛) 청송(聽松)
○ 제5권 : 서경덕(徐敬德) 화담(花潭)ㆍ유희춘(柳希春) 미암(眉巖)ㆍ이항(李恒) 일재(一齋)ㆍ성제원(成悌元) 동주(東洲)ㆍ이중호(李仲虎) 이소재(履素齋)ㆍ기대승(奇大升) 고봉(高峯)
○ 제6권 : 조식(曺植) 남명(南冥)ㆍ장현광(張顯光) 여헌(旅軒)ㆍ김장생(金長生) 사계(沙溪)
○ 제7권 : 송인(宋寅) 이암(頤庵)ㆍ서기(徐起) 고청(孤靑)ㆍ이지남(李至男) 영응(永膺)ㆍ김근공(金謹恭) 척암(惕菴)ㆍ정지운(鄭之耘) 추만(秋巒)ㆍ민순(閔純) 행촌(杏村)ㆍ한호(韓濩) 석봉(石峯)ㆍ박민헌(朴民獻) 슬한재(瑟僩齋)ㆍ남언경(南彦經) 동강(東岡)ㆍ박지화(朴枝華) 수암(守庵)
○ 제8권 : 김우옹(金宇顒) 동강(東岡)ㆍ오건(吳健) 덕계(德溪)ㆍ최영경(崔永慶) 수우당(守愚堂)
○ 제9권 : 김인후(金麟厚) 하서(河西)ㆍ조호익(曺好益) 지산(芝山)ㆍ황준량(黃俊良) 금계(錦溪)
○ 제10권 : 조헌(趙憲) 중봉(重峯)ㆍ정구(鄭逑) 한강(寒岡)
○ 제11권 : 조목(趙穆) 월천(月川)ㆍ이정(李楨) 귀암(龜巖)ㆍ남치리(南致利) 분지(賁趾)ㆍ권호문(權好文) 가암(柯巖)ㆍ권춘란(權春蘭) 해곡(海谷)ㆍ박형(朴浻) 정산(鼎山)ㆍ송익필(宋翼弼) 귀봉(龜峯)
○ 제12권 : 이이(李珥) 율곡(栗谷)
○ 제13권 : 성혼(成渾) 우계(牛溪)
별집(別集) ○ 제1권 : 김종서(金宗瑞) 절재(節齋)ㆍ박순(朴淳)ㆍ정본(鄭苯)ㆍ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ㆍ김시습(金時習) 동봉(東峯)ㆍ권절(權節) 율정(栗亭)ㆍ조려(趙旅) 어계(漁溪)
○ 제2권 : 김종직(金宗直) 점필재(佔畢齋)ㆍ조위(曺偉) 매계(梅溪)ㆍ최보(崔溥) 금남(錦南)ㆍ김일손(金馹孫) 탁영(濯纓)ㆍ이종준(李宗準) 용헌(慵軒)ㆍ무풍부정총(茂豐副正摠) 서호주인(西湖主人)ㆍ박한주(朴漢柱) 우졸자(迂拙子)ㆍ이계맹(李繼孟) 묵암(墨巖)ㆍ이목(李穆)ㆍ임희재(任熙載) 물암(勿庵)ㆍ허반(許磐)
○ 제3권 : 윤필상(尹弼商)ㆍ홍귀달(洪貴達) 함허당(涵虛堂)ㆍ성준(成浚)ㆍ표연말(表沿沫) 남계(藍溪)ㆍ조지서(趙之瑞)ㆍ정성근(鄭誠勤)ㆍ주계정 심원(朱溪正深源) 성광(醒狂)ㆍ정희량(鄭希良) 허암(虛菴)ㆍ김천령(金千齡)ㆍ박은(朴誾) 읍취헌(挹翠軒)ㆍ권달수(權達手) 동계(桐溪)ㆍ이원(李黿) 재사당(再思堂)
○ 제4권 : 안당(安瑭)ㆍ김정(金淨) 충암(沖庵)ㆍ김식(金湜)ㆍ한충(韓忠) 송재(松齋)ㆍ기준(奇遵) 복재(服齋)
○ 제5권 : 이장곤(李長坤) 금헌(琴軒)ㆍ유운(柳雲)ㆍ김구(金絿) 자암(自庵)ㆍ박세희(朴世熹) 도원재(道源齋)ㆍ박훈(朴薰) 강수(江叟)ㆍ이연ⲽ(李延慶) 탄수(灘叟)ㆍ정완(鄭浣)ㆍ김대유(金大有) 삼족당(三足堂)ㆍ경세인(慶世仁) 경재(敬齋)
○ 제6권 : 유관(柳灌) 송암(松庵)ㆍ유인숙(柳仁淑) 정수(靜叟)ㆍ송인수(宋麟壽) 규암(圭庵)ㆍ박광우(朴光佑) 필재(蓽齋)ㆍ정희등(鄭希登)ㆍ송희규(宋希圭)ㆍ이림(李霖)ㆍ나식(羅湜) 장음정(長吟亭)ㆍ이약빙(李若氷) 준암(樽巖)ㆍ이해(李瀣)ㆍ임형수(林亨秀) 금호(錦湖)ㆍ임억령(林億齡) 석천(石川)ㆍ정황(丁瑝) 유헌(游軒)ㆍ이담(李湛) 정존재(靜存齋)ㆍ민기문(閔起文) 역암(櫟菴)ㆍ김난상(金鸞祥)ㆍ김저(金䃴)ㆍ윤결(尹潔) 취부(醉夫)
○ 제7권 : 고경명(高敬命) 제봉(霽峯)ㆍ송상현(宋象賢) 천곡(泉谷)ㆍ김천일(金千鎰)ㆍ이정란(李廷鸞)ㆍ조종도(趙宗道) 대소헌(大笑軒)ㆍ김여물(金汝岉)ㆍ유극량(劉克良)ㆍ황진(黃進)ㆍ원호(元豪)
○ 제8권 : 박진(朴晉)ㆍ곽재우(郭再祐) 망우당(忘憂堂)ㆍ김덕령(金德齡)ㆍ정문부(鄭文孚) 농포(農圃)ㆍ김시민(金時敏)ㆍ정담(鄭湛)ㆍ이대원(李大源)
○ 제9권 : 김덕함(金德涵) 성옹(醒翁)ㆍ정홍익(鄭弘翼) 휴옹(休翁)ㆍ귀천군 수(龜川郡睟)ㆍ금산군 성윤(錦山郡誠胤)ㆍ정택뢰(鄭澤雷)ㆍ조직(趙溭) 입재(立齋)
○ 제10권 : 김응하(金應河)ㆍ남이흥(南以興)ㆍ이중로(李重老)ㆍ김준(金浚)ㆍ김양언(金良彦)ㆍ이희건(李希建)
○ 제11권 : 홍명구(洪命耈)ㆍ최진립(崔震立)ㆍ임경업(林慶業)ㆍ이상길(李尙吉)ㆍ심현(沈誢)ㆍ이시직(李時稷) 죽창(竹囱)ㆍ윤계(尹棨)ㆍ홍익한(洪翼漢) 화포(花浦)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속집(續集) ○ 제1권 : 최덕지(崔德之) 연촌(煙村)ㆍ남효온(南孝溫) 추강(秋江)ㆍ최수성(崔壽城) 원정(猿亭)ㆍ정렴(鄭磏) 북창(北囱)ㆍ이몽규(李夢奎) 천휴(天休)ㆍ양사언(楊士彦) 봉래(蓬萊)ㆍ이지함(李之菡) 토정(土亭)ㆍ이의건(李義健) 동은(峒隱)ㆍ성윤해(成允諧) 판곡(板谷)ㆍ성로(成輅) 석전(石田)ㆍ문위(文緯) 모계(茅溪)ㆍ최명룡(崔命龍) 석계(石溪)ㆍ안방준(安邦俊) 우산(牛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