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생육신/생육신 추강 남효은

육신전(六臣傳) j

아베베1 2012. 1. 17. 00:05

 

 

 

추강집 제8권

속록(續錄)○전(傳)
육신전(六臣傳)



박팽년(朴彭年)

자가 인수(仁叟)이고, 세종조에 급제하였다. -선덕(宣德) 임자년(1432, 세종14)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갑인년(1434)에 친시(親試)에 급제하고, 정통(正統) 정묘년(1447, 세종29)에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성삼문(成三問) 등과 더불어 일찍이 집현전(集賢殿)에서 벼슬살이하며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다.
을해년(1455, 세조1)에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았다. 박팽년은 왕실의 일이 끝내 구제될 수 없음을 알고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임하여 스스로 떨어져 죽으려 하였다. 성삼문이 굳이 말리며 말하기를 “지금 왕위는 비록 옮겨 갔지만 아직 상왕(上王)이 계시니, 우리들이 죽지 않아야 장차 뒷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한다면 그때 죽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니, 오늘의 죽음은 국가에 무익한 것이오.” 하니, 박팽년이 그 말을 따랐다.
얼마 뒤에 외지로 나가서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조정에 일을 아뢸 때에 신(臣)이라 일컫지 않고 단지 ‘아무 관직의 아무개’라고만 적었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다음 해에 조정에 들어와서 형조 참판이 되었다. 성삼문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 및 유응부(兪應孚),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김질(金礩), 권자신(權自愼) 등과 더불어 상왕의 복위를 도모하였다. 그때에 명나라 사신이 왔기에 세조가 상왕과 함께 사신을 청하여 창덕궁(昌德宮)에서 연회를 베풀려고 하였다. 박팽년 등이 모의하기를 “성승 및 유응부를 별운검(別雲劍)으로 삼아 연회를 베푸는 날에 거사하고, 성문을 닫아 측근을 제거하고 상왕을 다시 세우자.” 하였다.
모의가 이미 결정되었으나 마침 그날 임금이 운검(雲劍)을 그만두도록 명하였고, 세자 또한 병 때문에 따라 나오지 못하였다. 유응부가 그래도 거사하려고 하니, 박팽년과 성삼문이 굳이 말리며 말하기를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공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여기서 거사하였다가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 경복궁에서 군사를 일으킨다면 성패를 알 수 없게 될 것이니, 다른 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유응부가 말하기를 “일이란 신속함을 귀하게 여기니, 만약 지체한다면 누설될까 두렵소. 지금 세자가 비록 오지 않았지만 측근들이 모두 여기에 있소. 오늘 만약 이들을 모두 죽이고 상왕을 호위하여 호령한다면 이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이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하였다. 박팽년과 성삼문이 굳이 불가하다고 하며 말하기를 “만전의 계책이 아닙니다.” 하여 드디어 그만두었다.
김질이 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줄 알고 급히 달려가서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모의하기를, “오늘 세자가 수가(隨駕)하지 아니하고, 특히 운검을 그만두도록 한 것은 하늘의 뜻이니, 먼저 고발하여 요행히 살아나는 편이 낫겠습니다.” 하였다. 정창손이 즉시 김질과 함께 급히 예궐(詣闕)하여 변고를 고하기를 “신은 실로 알지 못하였고, 김질이 홀로 참여한 것입니다. 김질의 죄는 응당 만번 죽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김질과 정창손을 용서하고 박팽년 등을 잡아들였다.
공사(供辭)에서 자복(自服)하자 임금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은밀히 유시(諭示)하기를 “그대가 나에게 돌아와서 처음의 모의를 숨긴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박팽년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고, 임금을 일컬을 때에 반드시 ‘나리’라 하였다. 임금이 그 입을 닥치도록 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나에게 신하라고 일컬었으니, 지금 비록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 하니, 대답하기를 “저는 상왕의 신하이니, 어찌 나리의 신하가 되겠습니까. 일찍이 충청 감사로 있던 1년 동안에 무릇 장계와 문서에 일찍이 신하라고 일컬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사람을 시켜 그 계목(啓目)을 살펴보게 했더니, 과연 신하라는 글자가 하나도 없었다.
아우 박대년(朴大年)과 아들 박헌(朴憲)이 모두 죽었고, 아내는 관비(官婢)가 되어 수절하며 평생을 마쳤다. 박헌은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또한 정직하였다.
처형당할 때에 주위 사람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나를 난신(亂臣)이라 하지 말라.” 하였다. 김명중(金命重)이 당시 금부랑(禁府郞)이었다. 사사로이 박팽년에게 이르기를 “공은 어찌하여 이러한 화가 있게 하였습니까?” 하니, 탄식하며 말하기를 “마음이 평안하지 않아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박팽년은 성품이 침착하고 과묵하였다. 《소학》으로 몸을 단속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의관을 흩뜨리지 않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문장은 충담(沖澹)하였고, 필법은 종왕(鍾王)을 사모하였다.
세조가 영의정이 되어 부중(府中)에서 연회를 베풀 때에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 구슬픈 풍악 울리니 / 廟堂深處動哀絲
세상만사 이제는 도무지 모르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푸른 버들가지에 봄바람 솔솔 불고 / 柳綠東風吹細細
밝게 핀 꽃 속에 봄날 정히 길구나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대업은 금궤에서 뽑아내고 / 先王大業抽金櫃
성상의 홍은은 옥 술잔에 넘쳐나네 / 聖主鴻恩倒玉巵
즐기지 않는다고 어찌 늘 즐겁지 않으랴 / 不樂何爲長不樂
태평성대엔 노래하며 취하고 배부르리라 / 賡歌醉飽太平時
하였다. 세조가 이 시를 애송하여 현판에 수를 놓아 부중의 벽 위에 걸도록 하였다.

성삼문(成三問)

자가 근보(謹甫)이고, 세종조에 급제하였다.-선덕(宣德) 을묘년(1435, 세종17)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무오년(1438)에 식년시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에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였다.- 항상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모시며 계옥(啓沃)한 것이 넓고 많았다.
세종이 만년에 묵은 병이 있어 여러 차례 온천에 거둥하였다. 항상 성삼문 및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이개(李塏) 등으로 하여금 편복(便服) 차림으로 어가 앞에 있으면서 고문에 응하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영예롭게 여겼다.
계유년(1453, 단종1)에 세조가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집현전(集賢殿)의 여러 신하에게 모두 정난 공신(靖難功臣)의 칭호를 내려 주니, 성삼문이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여러 공신들이 번갈아 가며 연회를 베풀었으나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다.
을해년(1455)에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을 때에 성삼문이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하니, 세조가 막 부복(俯伏)하여 사양하다가 머리를 들어 이를 눈여겨보았다.
이듬해 병자년(1456, 세조2)에 그의 아버지 성승 및 박팽년 등과 함께 상왕의 복위를 도모하고 명나라 사신을 청하여 연회하는 날에 거사하기로 기약하였다. 집현전에 모여 의논할 때에 성삼문이 묻기를 “신숙주는 나와 사이가 좋지만 죄가 중하여 죽이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무사로 하여금 각각 죽일 사람을 맡게 하였는데, 형조 정랑(刑曹正郞) 윤영손(尹鈴孫)이 신숙주를 맡았다. 마침 그날 운검을 그만두게 하여 모의가 중지되었으나 윤영손이 이를 알지 못했다. 신숙주가 편방(便房)에 나아가서 머리를 감을 때에 윤영손이 칼을 어루만지며 앞으로 나아가니, 성삼문이 눈짓하여 중지시켰다.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세조가 친히 국문하면서 꾸짖기를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였는가?” 하니, 성삼문이 소리치며 말하기를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을 뿐입니다. 천하에 그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제 마음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이거늘 어찌 배반이라 하십니까. 나리는 평소에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끌어댔는데 주공에게 또한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삼문이 이렇게 한 것은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세조가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선위를 받던 당초에는 어찌 저지하지 않고 곧 나에게 의지하다가 지금에야 나를 배반하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형세상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진실로 나아가서 금지할 수 없음을 알고는 물러나서 한번 죽으려고 했지만, 공연한 죽음은 무익한 것입니다. 참고서 오늘에 이르렀던 것은 뒷일을 도모하려 했던 것뿐입니다.”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그대는 나의 녹(祿)을 먹지 않았던가. 녹을 먹으면서 배반하는 것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다. 명분으로는 상왕을 복위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신을 위하려는 것이다.”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상왕이 계시거늘 나리가 어찌 저를 신하라고 하겠습니까. 또 나리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만약 믿지 못하겠거든 저의 가산(家産)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 하였다. 세조가 매우 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쇠를 달구어 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자르도록 했으나, 안색의 변화 없이 천천히 말하기를 “나리의 형벌이 혹독하기도 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신숙주가 임금 앞에 있었다. 성삼문이 꾸짖기를 “나와 자네가 집현전에 있을 때에 세종께서 날마다 왕손(王孫)을 안고서 거닐고 산보하다가 여러 유신(儒臣)에게 이르시기를 ‘과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 경들은 부디 이 아이를 보호하라.’ 하셨네. 그 말씀이 아직 귀에 남아 있거늘 자네는 이를 잊었단 말인가. 자네의 악행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 하였다.
제학(提學) 강희안(姜希顔)이 공사(供辭)에 연루되었는데 고문을 당해도 자복하지 않았다. 임금이 묻기를 “강희안도 함께 모의했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강희안은 실로 알지 못합니다. 나리가 명사(名士)를 모두 죽이시니, 의당 이 사람을 남겨 두었다가 쓰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강희안이 이로 인하여 모면할 수 있었다.
성삼문이 수레에 실려 문을 나올 때에 안색이 태연자약하였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서 태평성대를 이루어라. 삼문은 돌아가 지하에서 옛 임금을 뵙겠다.” 하였고, 감형관(監刑官) 김명중(金命重)에게 웃으며 말하기를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였다.
죽은 뒤에 그의 가산을 적몰(籍沒)해 보니, 을해년(1455, 세조1) 이후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 두고서 ‘어느 달의 녹’이라 적어 놓았다. 집안에 남은 것이 없었고, 잠자는 방에는 오직 거적자리만 있을 뿐이었다.
아들 다섯이 있었다. 장남은 성원(成元)이다. 아내는 관비가 되어 절개를 온전히 하였다.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에 성승이 도총관(都摠管)으로서 입직하다가 선위한다는 사실을 듣고 승정원으로 종을 보내어 여러 번 물었으나 성삼문이 대답하지 않고 오랫동안 있었다. 성삼문이 일어나서 측간에 가다가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일이 끝났구나.” 하였다. 종이 이를 성승에게 아뢰니, 성승 또한 크게 탄식하고 말을 재촉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종이 가만히 그를 쳐다보니, 샘물처럼 눈물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즉시 병들었다고 아뢰고 방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집안사람 또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오직 성삼문이 오면 좌우 사람들을 물리치고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성삼문은 사람됨이 해학적이고 자유분방하며 농담하기를 좋아했다. 일상생활에 절도가 없어 겉으로는 지키는 바가 없는 듯하였지만 안으로는 지조가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뜻을 갖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임금의 음식 먹고 임금의 옷 입으니 / 食君之食衣君衣
평소의 뜻을 평생에 어김없기 바라노라 / 素志平生莫願違
한 번 죽어 진실로 충의가 있음을 아니 / 一死固知忠義在
현릉의 송백이 꿈속에서 어른거리네 / 顯陵松柏夢依依

이개(李塏)

자가 청보(淸甫)이다. -또 다른 자는 백고(伯高)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증손이고, 이종선(李種善)의 손자이다. 문장에 능한 재주를 타고났고, 조부의 풍모가 있었다. -정통(正統) 병진년(1436, 세종18)에 친시(親試)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에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병자년(1456, 세조2)의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국문을 받았다. 박팽년과 성삼문이 대궐 뜰에 묶여서 작형(灼刑)을 당할 때에 이개가 천천히 말하기를 “이것은 무슨 형벌인가?” 하였다. 그는 야위고 약했으나 엄한 형벌 아래서도 낯빛이 변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성삼문과 같은 날 죽었다. 수레에 실려 나갈 때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우 임금의 솥이 무거울 때엔 삶 또한 컸거니와 / 禹鼎重時生亦大
홍모처럼 가벼운 곳엔 죽음이 오히려 영광일세 / 鴻毛輕處死猶榮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다가 성문을 나가니 / 明發不寐出門去
현릉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꿈속에서 푸르네 / 顯陵松柏夢中靑

하위지(河緯地)

자가 천장(天章)이고,-또 다른 자는 중장(仲章)이다.- 세종조에 급제하였다.-선덕(宣德) 을묘년(1435, 세종17)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정통 무오년(1438)에 식년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과묵하며 도리에 어긋난 말이 없었다. 공손하고 예의가 있어 대궐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록 빗물이 고였더라도 길을 피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집현전에 있으면서 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하여 돕고 바로잡은 바가 많았다.
노산(魯山)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았을 때에 여덟 공자(公子)가 강성하니, 민심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였다. 박팽년(朴彭年)이 일찍이 하위지에게 도롱이를 빌리려 하니, 시로써 답하여 보내었다.
남아의 득실이야 고금이 마찬가지이니 / 男兒得失古猶今
머리 위에 분명 밝은 해가 임해 있네 / 頭上分明白日臨
도롱이 보내드림은 응당 뜻이 있으니 / 持贈蓑衣應有意
오호의 안개비 속에 좋게 서로 찾으리 / 五湖煙雨好相尋
이는 시사(時事)를 슬퍼한 것이다.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세조가 영의정이 되자, 조복(朝服)을 모두 팔고 전(前) 사간(司諫)으로서 선산(善山)에 물러가 살았다. 세조가 임금에게 아뢰어 좌사간(左司諫)으로 불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을해년(1455, 세조1)에 세조가 선위를 받은 뒤에 교서를 내려 매우 간곡하게 초치하니 하위지가 부름에 응하였다.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을해년 이후부터의 녹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병자년(1456)의 변란 때에 성삼문 등에게 작형(灼刑)을 가하고 그 차례가 하위지에게 미치자 말하기를 “이미 저에게 반역의 이름을 더하였으니 그 죄는 응당 죽이는 것이거늘 다시 무엇을 묻겠습니까.” 하니, 임금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 작형을 시행하지 않았다. 성삼문 등과 같은 날에 죽었다.
세종이 인재를 배양한 것이 문종 때에 이르러 바야흐로 성대하였다. 당시의 인물을 논한다면 하위지를 으뜸으로 꼽는다.

유성원(柳誠源)

자가 태초(太初)이고, 세종조에 급제하였다.-정통 갑자년(1444, 세종26)에 식년시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에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계유년(1453, 단종1)에 백관들이 세조의 공을 주공(周公)에 견주며 포상하기를 청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조서의 초고를 짓도록 하였다. 여러 학사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유독 유성원만 남아 있다가 협박을 당하여 초고를 지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통곡했으나 집안사람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노산(魯山)이 상왕이 되었을 때에 성균 사예(成均司藝)에 제수되었다.
병자년(1456, 세조2)의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성삼문(成三問)을 잡아갈 때에 유성원이 마침 성균관에 있었다. 제생(諸生)들이 성삼문의 일을 알리자, 즉시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더불어 술을 따라 이별주로 마시고, 사당에 올라가서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았다. 가서 보니 관디(冠帶)도 벗지 않은 채 패도(佩刀)를 뽑아 스스로 목을 찔렀거늘 목숨을 구하려 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그 까닭을 알지 못했더니, 조금 뒤에 관리가 와서는 시체를 가져가서 책형(磔刑)을 가하였다.

유응부(兪應孚)

무인(武人)이다. 씩씩하고 용감하며 활을 잘 쏘았다. 세종과 문종이 모두 사랑하고 중하게 여겨서 지위가 2품에 이르렀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일이 발각되어 대궐 뜰로 잡혀 왔다. 임금이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하려 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신을 청하여 연회하던 날에 일척(一尺)의 검(劍)으로 족하를 폐하고 옛 임금을 복위하려 했으나, 불행히도 간사한 사람에게 고발당했으니 응부(應孚)가 다시 무엇을 하겠습니까. 족하는 속히 나를 죽이시오.” 하였다. 세조가 노하여 꾸짖기를 “그대는 상왕을 명분으로 삼고서 사직을 도모코자 한 것이다.” 하고, 무사로 하여금 살갗을 벗기도록 하며 그 정상(情狀)을 물었으나 죄상을 인정하지 않고, 성삼문(成三問) 등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르기를 ‘서생(書生)과는 함께 모의할 것이 못 된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청하여 연회하던 날에 내가 칼을 시험하려 했으나, 그대들이 굳이 저지하며 말하기를 ‘만전의 계책이 아니다.’ 하여 오늘의 화를 불러들였다. 그대들은 사람이면서 계책이 없으니 어찌 축생과 다르겠는가.” 하고, 임금에게 말하기를 “만약 정상 밖의 일을 듣고자 한다면, 저 더벅머리 유자(儒者)들에게 물어보시오.” 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임금이 더욱 노하여 불에 달군 쇠를 배 아래에 놓아두기를 명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지글거렸으나 낯빛이 변하지 않았다. 천천히 쇠가 식기를 기다렸다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 끝내 죄상을 인정하지 않고 죽었다.
유응부는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무릇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아우 유응신(兪應信)과 함께 모두 활을 쏘아 사냥하는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짐승을 만나 활을 쏘면 맞추지 못함이 없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한 항아리의 곡식도 쌓인 것이 없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일에는 일찍이 넉넉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이 포천(抱川)의 전장(田莊)으로 갔을 때에 형제가 모시고 가다가 말 위에서 몸을 날려 하늘을 향해 활을 쏘니, 기러기가 활시위 소리가 나자마자 떨어지므로 어머니가 크게 기뻐하였다.
신장이 남보다 컸고 용모가 장엄(壯嚴)하며, 청렴하기가 오릉(於陵) 중자(仲子)와 같았다. 재상이 되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렸고, 음식에 고기가 없고 때로 양식이 끊어지기도 하니, 처자식이 원망하고 나무랐다. 그가 죽던 날에 울면서 길 가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살아서는 보호받은 바가 없고 죽어서는 큰 화를 얻게 되었다.” 하였다.
처음 모의할 때에 여러 사람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기를 “권람(權擥)과 한명회(韓明澮)를 죽이는 데에는 이 주먹이면 족하니, 어찌 큰 검을 쓰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함길도 절제사(咸吉道節制使)가 되어 시를 짓기를,
장군이 부절 잡고서 변경 오랑캐 진압하니 / 將軍持節鎭夷邊
변방엔 전쟁 먼지 없고 사졸은 편히 잠자네 / 紫塞無塵士卒眠
빼어난 말 오천 필이 버드나무 아래서 울고 / 駿馬五千嘶柳下
좋은 새매 삼백 마리가 누각 앞에 앉아 있네 / 良鷹三百坐樓前
하였으니, 여기에서 또한 그 기상을 볼 수 있다.
아들은 없고 두 딸이 있다.

태사씨(太史氏)는 말하노라.
누군들 신하가 되지 않겠는가마는 육신(六臣)의 신하 됨은 지극하기도 하다. 누군들 죽음이 있지 않겠는가마는 육신의 죽음은 참으로 장대하다. 살아서는 임금을 사랑하여 신하 된 도리를 다하였고, 죽어서는 임금에게 충성하여 신하 된 절개를 세웠으니, 충분(忠憤)은 백일(白日)을 꿰뚫고 의기(義氣)는 추상(秋霜)보다 늠름하여 백세(百世)의 신하 된 자로 하여금 한 마음으로 임금 섬기는 의리를 알아 절의(節義)를 천금처럼 여기고 목숨을 터럭처럼 여김으로써 인(仁)을 이루고 의(義)를 취하게 하였다. 군자가 말하기를 “은(殷)나라의 삼인(三仁)과 동방의 육신은 행적에 다름이 있으나 도리는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성대하도다, 혜장대왕(惠莊大王)이여. 영의정으로 황각(黃閣)에 있을 때에는 그 공훈이 주공(周公)에 비견되고 왕위에 올라서는 그 덕이 순 임금과 같으셨기에 높고 크며 넓고 원대한 덕을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었으니, 육신이 복종하지 않은 것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백이(伯夷)가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으나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덕이 실추되지 않았고, 엄광(嚴光)이 동강(桐江)에서 낚시질했으나 한나라 광무제(光武帝)의 공이 손상되지 않은 것과 같다.
오호라! 육신으로 하여금 단심(丹心)을 금석(金石)에다 기록하고 백수(白首)를 강호에서 보존하게 했더라면, 상왕의 수명이 연장될 수 있고 세조의 정치가 더욱 융성했을 것이거늘 불행히도 마음이 격동되어 드디어 온 들판을 태우고 말았으니, 슬프도다. 경건히 조사(弔辭)를 짓노라.
세찬 기운 비로소 그치자 / 厲氣初濟
모든 구멍이 막히게 되니
/ 衆竅爲塞
서리와 눈 희게 내렸을 때 / 霜雪皎皎
소나무 홀로 푸르디푸르렀네 / 松獨也碧
뜻있는 신하의 머리카락 / 有臣之首
임금을 사랑하여 희어지니 / 愛君而白
머리는 끊을 수 있으나 / 有頭可截
절개는 굽힐 수 없었네 / 節不可屈
다른 사람이 주는 곡식 / 他人之粟
죽더라도 먹지 않았으니 / 寧死不食
고죽의 맑은 바람이고 / 孤竹淸風
시상의 밝은 달이라네 / 柴桑明月
땅속에 충혼이 계시니 / 土中有鬼
원통한 피 한 움큼 맺혔으리 / 寃血一掬


 

[주D-001]선덕(宣德) : 명나라 선종(宣宗)의 연호이다.
[주D-002]정통(正統)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이다.
[주D-003]공사(供辭) :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한 말이다.
[주D-004]종왕(鍾王) : 서법(書法)의 명인인 위(魏)나라 종요(鍾繇)와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킨다.
[주D-005]계옥(啓沃) : 신하가 자기의 식견으로 임금을 잘 계도(啓導)하는 것이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그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나의 마음을 적시라.〔啓乃心 沃朕心〕”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書經 說命上》
[주D-006]왕손(王孫) : 단종을 가리킨다.
[주D-007]현릉(顯陵) : 문종(文宗)과 그의 비(妃)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의 능이다.
[주D-008]정통(正統)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이다.
[주D-009]우(禹) 임금의……영광일세 : 국가의 정통성이 확고했을 때에는 살아 있는 의미가 컸으나 정통성이 무너진 지금 절의를 위해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스럽다는 것이다. 우 임금의 솥이란 하(夏)나라 우 임금이 주조한 아홉 개의 솥으로, 하상주(夏商周) 삼대(三代)에 서로 전하며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배로 여겼다. 홍모(鴻毛)는 큰기러기의 털이다. 《경행록(景行錄)》에 이르기를 “대장부는 선을 보는 것이 밝기 때문에 명분과 절의를 태산보다 중하게 여기고, 마음을 쓰는 것이 정밀하기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을 기러기 털보다 가볍게 여긴다.〔大丈夫 見善明 故重名節於泰山 用心精 故輕死生於鴻毛〕” 하였다.
[주D-010]노산(魯山) : 단종을 가리킨다.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던 단종은 사육신의 거사가 실패로 끝난 뒤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주D-011]오호(五湖)의……찾으리 :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기를 서로 기약한다는 말이다. 오호는 오월(吳越) 지방에 있는 호수로, 은둔하는 곳을 가리킨다. 춘추 시대 월(越)나라 범려(范蠡)가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보좌하여 오(吳)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가벼운 배를 타고서 오호에 숨은 것에서 유래한다. 《國語 越語下》
[주D-012]오릉(於陵) 중자(仲子) : 오릉은 지명이고, 중자는 전국 시대 제(齊)나라 사람 진중자(陳仲子)이다. 그는 매우 청렴하여, 세가(世家)의 집안에 태어났고 형이 합(蓋) 땅에서 받는 녹이 만종(萬鍾)이 되었으나 불의한 녹이라 하여 먹지 않으며 오릉 땅에서 몸소 신을 짜고 아내가 길쌈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주D-013]삼인(三仁) : 은나라 말기의 충신인 미자(微子), 비간(比干), 기자(箕子)를 가리킨다. 《논어》〈미자(微子)〉에 “미자는 떠나가고, 기자는 종이 되고,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은나라에 세 명의 어진 분이 있었다.〔殷有三仁焉〕’ 하였다” 하였다.
[주D-014]혜장대왕(惠莊大王) : 혜장은 세조의 시호이다.
[주D-015]황각(黃閣) : 삼공(三公)의 정청(政廳)으로, 의정부의 별칭이다.
[주D-016]백이(伯夷)가……먹었으나 : 백이는 은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할 때에 동생 숙제(叔齊)와 함께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서 만류했으나 듣지 않자, 주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서산(西山), 즉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 먹으며 숨어 살다가 굶어 죽었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주D-017]엄광(嚴光)이 동강(桐江)에서 낚시질했으나 : 엄광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고사(高士)이다. 광무제가 즉위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여 동강에서 낚시질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주D-018]세찬……되니 : 세조의 왕위 찬탈이라는 폭풍이 그친 뒤에 모든 사람이 입을 닫고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다. 《장자》〈제물론(齊物論)〉에 “매서운 바람이 그치면 모든 구멍이 비어서 고요해진다.〔厲風濟則衆竅爲虛〕” 하였다.
[주D-019]시상(柴桑) :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은거하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