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관련 공부자료/새 카테고리4

공부자료 대학

아베베1 2013. 4. 25. 16:56

 

 

 

 

 

 

 

思辨錄[一]
확대원래대로축소
 大學
[經一章]

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
在止於至善,言明德新民,皆必求至於至善然後乃已,學之道在是,其苟焉者與中道而廢者,非止於至善者也,不得謂之學也。○註以明德新民至善三者,爲一書之綱領,誠如此是明德爲一事,新民爲一事,至善又自爲一事,今明德新民旣各自爲一事矣,至善又可得以自爲一事乎,註言明德新民皆當止於至善,然則捨明德新民而更無所謂一段至善者,可見,且有綱必有目,未有無其目而獨有其綱,綱所以挈衆目,目旣不存,綱安所設,故此書爲明德之目五,爲新民之目三,而及求其爲止至善之目者,則終不可以得,以此知此書之爲綱者二而已,若夫止至善,乃所以致明德新民之功,則其不可離之,使別爲一綱領明矣。
知止而后有定,定而后能靜,靜而后能安,安而后能慮,慮而后能得。
此一節,開示學者至明切,蓋謂今所以欲使人知爲學大綱本領之如此者,人欲有爲,必須知何事之當爲,與爲事所當止,然後,志有所向而意有所定,志意定然後,心無躁擾不安之患,心安然後,乃能思度所以爲此事者,思度然後,乃能審得其所以爲者必如何而後可也,然則學者其可以不知道之所在而立爲吾之標準乎。○竊詳註意,以知止爲知無不止,能得爲行無不得,故曰安而后能慮,非顏子不能去得,雖甚近,然只是難進,又曰知止,如射之於的,得止,是已中的,然則顏子尙未得爲中的,此書雖曰大人之學,然乃所以訓十五以上初學之士者,貝恐不當於發敎之初,遽以此詔之,得無迷亂疑惑而不得其所謂乎,況定之能靜,靜之能安,安而能慮,自今人驗之於心,乃少時俄頃之事,非積漸用功而後始可能者耶,此一節之意,蓋如有人居窮北而欲避沍寒則就暖,其所當爲也欲就暖,當向南,向南,當止於洛,洛者,寒暖之中,旣知宜向南而當止於洛則其志便定,無欲東欲西欲趙欲魏之計,此心自覺安帖,乃有以思度其裝齎經由,旣思度,乃得其裝齎多少當幾何,經由先後當何從矣,由是而言,避寒就暖者爲學之謂也,向南者,明德新民之謂也,止洛者,止至善之謂也,如此則其所以開發初學者,不已明白親切而無疑晦難曉之憂乎。
物有本末,事有終始,知所先後,則近道矣。
旣知道之所在,以爲學之標準,則心安慮審,可以有得矣,又當知物之本末事之終始,以何者爲本始而宜先,何者爲末終而宜後,然後能行之有序,不倍於道,不然則顚倒謬亂而失其所以爲學矣,物者如下文曰天下曰國曰家曰身曰心曰意曰知曰物,是也,事者,如其曰平曰治曰齊曰修曰正曰誠曰致曰格,是也,此一節引發下兩節之意,其所以開示者,至此而益明切矣。○註以此爲結上兩節,竊恐其未然,詳下文兩段所言,其所以辨先後示次第,使學者曉然不迷緩急之宜者,不翅丁寧明白,正承此段而指說含蓄未發之意,其下兩段,又申復此段,以結中間兩段,則不但文義首尾上下貫徹,亦見其開導誘掖,纖悉懇至,不憚其言語之覶縷者,其非爲上文兩節可知,註,又以明德新民爲本末,如是,明德新民未免於混而爲物,恐非經之本旨,蓋在明德新民,則德與民爲物,而明與新爲事,理有不容混而爲一者,下文雖云皆以修身爲本,似與明德無分,然,此則乃總說事物以結上文,語意自別,卽觀其下段其本亂而末治者否,亦可以明矣,今若於指事指物毫縷分析之處,使學者而不免於混之,則無亦妨於察理辨義之功乎。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欲治其國者,先齊其家,欲齊其家者,先修其身,欲修其身者,先正其心,欲正其心者,先誠其意,欲誠其意者,先致其知,致知在格物。
卽末而探其本,由終而原其始,則所先可見矣,求以至曰致格,則也,正也,有物必有則,物之有格,所以求其則而期得乎正也,蓋言欲使吾之知,能至乎是事之所當而處之無不盡則,其要唯在乎尋索是物之則而得其正也,不言欲致知先格物,而曰致知在格物者,格物,所以致知,其事一故也。○註,訓格爲至,訓物爲事,皆恐未當,格雖有以至爲義者,但若於格物而謂格爲至,則至物云者,便不成語,若易爲至事,理亦不顯,終未見其得,註,爲是之故而又添一窮字,以提綴其語,然格又不見有窮至之義,且物之與事,固當有辨,不容混合,如天下國家,是爲物,不得爲事,平治齊,是爲事不得爲物,是皆竊所疑者,故輒敢妄論,以待通識。
物格而後,知至,知至而後,意誠,意誠而後,心正,心正而後,身修,身修而後,家齊,家齊而後,國治,國治而後,天下平。
本立,末斯生,始得,終乃成,則所後,可見矣,得所致曰至,求物之則而得其正,然後吾之知,能至乎事之所當而可以無所疑矣,知事之所當而無所疑然後,意乃得以誠,蓋事者,所以理夫物也,知以辨事之宜,意以行事之實,未有物不得其則而知當乎辨,知不當其辨而意誠於行者也,此兩節,反覆詳言本末終始之次第,欲使學者知其先後之辨而於明德新民之功,循循漸進,無躐等凌節之失矣。○註言物格者,物理之極處,無不到也,知至者,吾心之所知,無不盡也,知旣盡則意可得而實矣,若如此旨,其所謂誠者,乃盡性盡物可以贊化育而與天地參矣,夫理無不到知無不盡,而誠能盡性盡物贊化育參天地,則此聖人之極功而學之能事畢矣,又何事乎正心修身,又何論乎齊家治國,中庸闡明蘊奧其視大學,固有深淺之殊,然其示人,初未嘗不親近切當使之易曉,故若行遠自邇升高自卑及柯則不遠之喩,皆童孺之知所可及焉者,況此大學,乃爲初學入德之門,則其所言,當有以益加親切,而今則不然,開口指說,以爲萬里初程投足一步之地者,乃在於聖人之極功,曾不開示以切已易明之理,使曳一踵,謹躡一級,躡一級,又進一級,旣使無邈焉難及之歎,又使無躐越凌跨之失者,抑獨何哉,今傳文缺落,其所以爲格致之說者,固已無所可考矣,然且據所發明誠正之義以參之,則亦有審其不然者矣,其誠意之說,曰毋自欺,曰愼其獨,言毋欺也則以惡惡臭好好色爲證,言愼獨也則以小人閒居爲不善見君子而厭然揜之則人如見其肺肝爲證,此之爲義不已坦易切近乎,此又豈是指曉理無不到知無不盡以上人語耶,且只此便可謂之盡性盡物乎,若由此而致其功,雖盡性盡物,可也,若以此爲已到盡性盡物之地,則誠恐不可,其正心之說則曰心有所忿懥恐懼好樂憂患則皆不得其正,又曰心不在焉視不見聽不聞食不知其味,此皆初學之所能識者,其非所以語夫能盡性盡物可以贊化育參天地以上人者,亦已明矣,何獨於格物,而曰物理極處必須無不盡也,不然則不足謂之格於知至而曰吾心之所知必須無不盡也,不然則不足謂之至也,蓋大學之意,本欲學者隨事隨物用其格致之功,使吾之知,當是事是物而審其所處,則意之所發而施於其間者,自無不實也,而朱夫子所以取格致之義者,似異於此,所以不憚僭論以取謬妄之罪云。○問物未格,意亦當誠否,朱子曰固然,豈可說物未格,意便不用誠,但知未至時,雖欲誠意,其道無由,所以要致知,按旣言意雖欲誠,其道無由,則設令勉强用誠,此意所存,終是不誠,蓋誠不可强,强便非誠,若不能誠,亦止爲僞,故中庸曰不誠無物,無物,庸非僞乎,誠之與僞,較爭於毫釐之間,而爲善惡之判,卽朱子所謂人鬼關者,可謂言切而旨明矣,今乃謂理未能無不到,知未能無不盡之前,其所爲皆不免於不誠,則是爲僞而已,爲鬼而已,人之日用無非父子君臣大經大倫之間,而其半生修爲,未免隔閡鬼關黽勉爲僞,以待一朝豁然貫通使衆物之表裏精粗無不到,吾心之全軆大用無不明然後,事君得誠其忠,事父得誠其孝,則推之於理,終有所不然者矣,惻隱羞惡之端,皆是誠之發見於外,彼見赤子之入井而怵편001 者不可謂非誠,則又豈必待盡格天下之物,盡致吾心之知而後能此耶,且傳曰如惡惡臭如好好色,此亦豈謂夫盡惡天下之惡臭盡好天下之好色耶,今有人見一惡臭顰蹙不堪,見一好色慕悅特深,又可謂之非其誠耶,經之意,蓋謂隨物而格,以致其知,使吾之知,當一物一事之間,審其善惡如惡臭好色,則意之好惡,自無不誠焉耳。○註云物格知至則知所止矣,意誠以下則皆得所止之序矣,按朱子前說,旣以知止之後其進於能得之地,爲最難,譬之挽弓,到臨滿時分外難開,謂如顏子亦尙在未得之中,推是則顏子平生尙在不誠之中,不知其所以居陋巷不改其樂者,亦果爲何事也,彼非誠有所得耶,且焉有衆理昭晳心軆大明,而尙墮在鬼關,言行所發,皆涉不誠者耶。
自天子以至於庶人,壹是皆以修身爲本。
其本亂而末治者否矣,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未之有也。
此兩節又申復第三節本末之義,以結上文兩節之意,言本末則爲終始者,亦在其中矣。
上經一章


 

 

 

 

 

사변록(Ⅰ)

확대원래대로축소
 대학(大學)

[경(經)1장]


《대학》의 도(道)는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新民] 하는 데 있으며, 지선(至善)에 그치는 데 있다.
지선에 그치는 데 있다는 것은, 명덕을 밝히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 모두 지선에 이르기를 반드시 구한 뒤에야 끝남을 말한 것이다. 학문의 도가 여기 있으니, 구차하게 하는 자와 중도에서 그만두는 자는 지선에 그치는 자가 아니므로 학문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주(註)에 명덕을 밝히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 지선에 그치는 것의 세 가지를 《대학》 한 책의 강령(綱領)으로 삼았으니, 진실로 이와 같다면 명덕을 밝히는 것이 한 가지 일이 되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한 가지 일이 되며, 지선에 그치는 것이 또 따로 한 가지 일이 된다. 지금 명덕을 밝히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 이미 각기 한 가지 일이 되었는데, 지선에 그치는 것이 또 따로 한 가지 일이 될 수 있겠는가. 주에, “명덕을 밝히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 모두 마땅히 지선에 그쳐야만 된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명덕을 밝히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버리고는 이른바 따로 지선이란 것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강령이 있으면 반드시 조목이 있게 마련이니, 조목도 없으면서 홀로 그 강령만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강령은 여러 조목을 맺는 것이니, 조목이 있지 않은데 강령만 어찌 설치되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에 명덕을 밝히는 조목이 다섯이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조목이 셋이 있으나, 지선에 그치는 조목은 마침내 찾아볼 수 없으니, 이로써 이 책의 강령이 둘뿐인 것을 알겠다. 지선에 그치는 것은 곧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공효(功效)를 이루는 것이니, 그것을 분리해서 별도로 하나의 강령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 명백하다.
그칠 데를 알아야만 정(定)함이 있으며, 정해져야만 동요되지 않으며, 동요되지 않아야만 편안하게 되고, 편안하여야만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여야만 얻게 되는 것이다.
이 한 절(節)은 배우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바가 매우 명백하고 친절하다. 대개 지금 사람들로 하여금 학문하는 대강과 본령(本領)이 이와 같은 것을 알게 한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자 하면 반드시 어떤 일을 마땅히 해야 하는지와 또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마땅히 그칠 데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뜻[志]이 지향(指向)하는 바가 있고 생각[意]이 정해지는 바가 있게 된다. 뜻과 생각이 정해져야만 마음속에 조급하거나 동요하는 불안한 걱정이 없게 되고, 마음이 편안해야만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생각하여야만 그 하는 바가 반드시 어떠해야만 함을 살필 수 있다. 그렇다면 배우는 사람들이 어찌 도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고 나의 표준을 세울 수 있겠는가.
○ 주(註)의 뜻을 살펴보면, ‘그칠 데를 아는 것[知止]’으로써 ‘앎이 그치지 않은 데가 없는 것[知無不止]’을 인정하고, ‘얻는 것[能得]’으로써 ‘행(行)이 얻지 않은 것이 없음[行無不得]’을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편안하여야만 생각하게 되는 것[安而後能慮]’은 안자(顔子)가 아니면 되지 않을 것이니, 얻는 것[得]은 비록 가깝지마는 다만 나아가기가 어려운 것이라 하였다. 또 “그칠 데를 아는 것[知止]은 과녁을 향해 쏘는 것과 같고, 그칠 데를 얻은 것[得止]은 이미 과녁에 맞은 것과 같다.” 했으니, 그렇다면 안자도 오히려 과녁에 맞추지는 못한 것이다. 이 책이 비록 대인(大人)의 학(學)이라고 하지마는 15세 이상의 처음 배우는 선비에게 가르치는 것이니, 아마 가르치는 시초에 바로 이로써 보여 준다면 어찌 혼란스럽고 의혹(疑惑)되어, 그 이르는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정(定)해져야만 동요되지 않고, 동요되지 않아야만 편안하고, 편안한 뒤에 생각하게 되는 것은, 지금 사람이 자기 마음에 징험해 보더라도 이것은 곧 젊을 때 잠깐 동안의 일이고, 공부를 점차 쌓아 나간 뒤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한 절(節)의 뜻은, 만약 어떤 사람이 북극(北極)에 살면서 심한 추위를 피하려고 한다면, 따뜻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따뜻한 곳에 나아가려고 한다면 당연히 남쪽을 향해야 하고, 남쪽을 향해 간다면 당연히 낙수(洛水)에 이르게 될 것이니, 낙수는 춥고 따뜻한 중간 지점이다. 이미 남쪽을 향하여 가서 당연히 낙수에 그칠 줄을 알게 되면, 그 뜻은 문득 정해져서 동쪽으로 가려고 하거나 서쪽으로 가려고 하거나, 조(趙) 나라로 가려고 하거나 위(魏) 나라로 가려고 하는 계획이 없어져, 이 마음은 저절로 편안함을 깨닫게 되어 그제야 그 행장(行裝)을 꾸릴 것과 경유(經由)할 곳을 생각하게 된다. 이미 생각하게 되면 그제야 행장은 얼마나 꾸려야 되며, 경유할 곳은 어디를 먼저 가고 어디를 뒤에 가야 할지를 알게 된다. 이로써 말한다면 추운 곳을 피하고 따뜻한 곳에 나아가는 것은 학문하는 것을 말한 것이요, 남쪽을 향하여 가는 것은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말한 것이며, 낙수에 그치는 것은 지선에 그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처음 배우는 자를 가르쳐 이해시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고 친절하여, 의심이 나서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 걱정은 없지 않겠는가.
물(物)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事]에는 시초와 종말이 있으니,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알면 도(道)에 가까워질 것이다.
이미 도가 존재하는 바를 알아서 학문하는 표준으로 삼는다면, 마음이 편안하고 생각이 치밀해져서 얻는 것이 있게 된다. 또 마땅히 물(物)의 근본과 말단, 일의 종말과 시초를 알되, 어느 것은 근본과 시초가 되므로 마땅히 그것을 먼저 해야 하고, 또 어느 것은 말단과 종말이 되므로 마땅히 그것을 뒤에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행해야만 차례가 있어서 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례가 바뀌고 본말이 서로 어긋나서 학문하는 표준을 잃게 된다. 물이란 것은 아래 글의 천하(天下)ㆍ나라[國]ㆍ집[家]ㆍ몸[身]ㆍ마음[心]ㆍ뜻[意]ㆍ앎[知]ㆍ물(物)이라 하는 것이 그것이요, 일[事]이란 것은 평(平)ㆍ치(治)ㆍ제(齊)ㆍ수(修)ㆍ정(正)ㆍ성(誠)ㆍ치(致)ㆍ격(格)이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한 절(節)은 아래 두 절의 뜻을 끌어내어 발명했으니, 배우는 사람에게 가르쳐 보인 것이 이에 이르러 더욱 명백하고 친절하다.
○ 주(註)에는 이것으로써 위의 두 절의 뜻을 맺었다고 하나 아마 그렇지 않은 듯하다. 아래 글의 두 단락에 말한 바를 자세히 보면, 그 선후를 분별하고 차례를 지시하여 배우는 자로 하여금 늦게 하고 빨리 해야 할 적당한 점을 환하게 알아 미혹되지 않게 한 것이, 자상하고 명백할 뿐 아니라, 이 단락을 이어받아 함축(含蓄)하여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뜻을 가리켜 말하였다. 그 아래의 두 단락은 또 이 단락을 거듭 되풀이하여 중간의 두 단락을 끝맺었으니, 단지 글 뜻의 처음과 끝, 위나 아래가 서로 통할 뿐 아니라, 또한 배우는 자를 깨우쳐 인도하고 이끌어 도와주는 것이 매우 세세하고 간절하여, 자세하게 말하기를 수고롭게 여기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으니, 위의 글의 두 절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주에는 또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근본과 말단으로 삼았으니, 이와 같다면 명덕을 밝히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서로 혼동되어 물(物)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 아마 경(經)의 본뜻이 아닐 것이다.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어서는 덕(德)과 백성[民]은 물이 되고, 밝히는 것과 새롭게 하는 것은 일[事]이 되므로, 이치상 서로 혼합되어 하나가 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아래 글에 비록, “모두 몸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하여, 명덕을 밝히는 것과 구분이 없는 듯하나, 이것은 일과 물을 통틀어 설명하여, 위의 글을 끝맺음한 것이므로 말의 뜻이 저절로 구별이 된다. 곧 그 아래 단락의,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말단이 다스려진 일은 없다.”는 것을 보아도 또한 명백하다. 지금 만약 일을 가르치고 물을 가르쳐 세밀히 분석하는 곳에 배우는 자로 하여금 혼동하는 것을 면치 못하게 하면, 또한 어찌 이치를 살피고 뜻[義]을 분별하는 공부에 방해되지 않겠는가.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려고 하는 이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렸고, 그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이는 먼저 그 집안을 다스렸으며, 그 집안을 다스리려고 하는 이는 먼저 그 몸을 닦았고, 그 몸을 닦으려고 하는 이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였으며,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고 하는 이는 먼저 그 뜻을 성실하게 하였고, 그 뜻을 성실하게 하려고 하는 이는 먼저 그 앎을 이루었으니, 앎을 이루는 것은 물(物)을 궁구(窮究)하는 데 있다.
말단에 나아가서 그 근본을 탐구하고, 종말로 인하여 그 시초를 미루어보면 먼저 할 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구해서 이르는 것을 치(致)라 하고, 격(格)은 법칙이며 바로잡는 것이다. 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는 것인데 물에 격이 있다는 것은 그 법칙을 구하여 바른 것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대개 나의 앎을 이 일의 당연한 데까지 이르게 하여 이에 대한 처응(處應)을 지극히 하지 않은 것이 없게 하는 것인데, 그 요령은 오직 이 물의 법칙을 찾아서 그 바른 것을 얻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앎을 이루고자 하면 먼저 물을 격(格)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앎을 이루는 것은 물을 격하는 데 있다고 한 것은, 물을 격하는 것이 앎을 이루는 것으로 그 일이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 주에 격(格)을 지(至)로 해석하고 물을 사(事)로 해석한 것은 모두 타당하지 않은 듯하다. 격(格) 자에 비록 지(至)의 뜻이 있긴 하나, 다만 격물(格物)에서 격을 지라고 하여 지물(至物)이라 한다면 문득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을 고쳐 지사(至事)라고 하여도 이치가 또한 나타나지 않으니, 결국 그것이 맞는다고 볼 수 없다. 주에는 이 때문에 또 궁(窮) 자 하나를 더 보태어 그 말을 끌어다 붙였으나, 격(格) 자에는 또 궁구해 이른다[窮至]는 뜻이 있음을 볼 수 없다. 또 물과 일은 당연히 분별해야 될 것이며 서로 혼동할 수 없는 것이다. 천하(天下)ㆍ국가(國家)라고 하는 것은 물이므로 일이 될 수 없으며, 평(平)ㆍ치(治)ㆍ제(齊)라고 하는 것은 일이므로 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의심이 나는 것이므로 감히 망령된 이론을 내놓으면서 통달한 학식을 기다린다.
물(物)이 격(格)하여야만 앎이 이르고, 앎이 이르러야만 뜻이 성실하게 되며, 뜻이 성실해져야만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되어야만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아져야만 집안이 다스려지고, 집안이 다스려져야만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져야만 천하가 태평해지게 된다.
근본이 서야 말단이 나타나고, 시초가 제대로 되야 종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니, 뒤에 할 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른 바를 얻은 것을 지(至)라고 하는데 물의 법칙을 구하여 그 바른 것을 얻어야만, 나의 앎이 일의 마땅한 데에 이르게 되어 의심이 없게 될 것이고 일의 마땅한 것을 알아서 의심이 없어져야만 뜻이 성실하게 되니, 대개 일이란 것은 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지(知)로써 일의 마땅한 것을 분별하고 뜻[意]으로써 일의 실상을 행하는 것인데, 물이 그 법칙을 얻지 못하고도 마땅하게 분별할 줄 안다든가, 앎이 마땅하게 분별할 줄을 모르면서 뜻이 행하는 데에서 성실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두 절은 근본과 말단, 시초와 종말의 차례를 되풀이하고 상세히 말하여,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지를 분별하여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공부에 있어서 차례차례 점점 나아가 차례를 뛰어넘고 절차를 무시하는 실수가 없게 한 것이다.
○ 주에 물격(物格)이라 한 것은 사물의 이치의 지극한 곳까지 이르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요, 지지(知至)란 것은 내 맘의 아는 바가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앎을 다하였다면 뜻이 성실해질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만약 이 뜻과 같다면 그 이른바 성(誠)이란 것은, 사람의 성(性)을 다하고 물(物)의 성을 다하여 천지의 화육(化育)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대체로 이치가 도달하지 않는 것이 없고, 앎이 다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진실로 능히 사람의 성을 다하고 물의 성을 다하여, 천지의 화육(化育)에 참여하게 된다면, 이것은 성인의 지극한 공과(功果)이고 학문의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니, 다시 어찌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것을 일삼을 필요가 있겠으며,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중용(中庸)》에는 학문의 깊은 부분을 천명하였으므로 《대학》과 비교해 보면 진실로 깊고 얕은 차이가 있으나, 그 사람을 가르치는 점에 있어서는 애초에 친근하고 자리에 꼭 들어맞아 이해하기 쉽도록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먼 곳을 가려면 가까운 곳에서 출발하고,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 출발하며, 도끼 자루를 가지고 도끼 자루를 베는[伐] 법칙이 먼 데 있지 않다는 비유는, 모두 어린아이들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이 《대학》은 곧 초학자(初學者)가 덕(德)에 들어가는 문(門)이 되는 것이니, 그 말한 바가 마땅히 더욱 친절해야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렇지 않고 입을 열어 말을 하되, 만 리(萬里) 길의 첫 길에 한 걸음을 떼어 놓는 자리가 곧 성인의 지극한 공과에 속한다고 하여 일찍이 자기에게 절실하고 알기 쉬운 이치를 가르쳐 보여서, 한 발자국을 떼어 조심스럽게 한 계단을 밟고 한 계단을 밟은 뒤에 또 한 계단을 오르도록 하여 이미 까마득하여 따라가기 어렵다는 탄식이 없게 하지 않고 또 차례를 뛰어넘는 실수가 없도록 하지 않은 것은 문득 무슨 이유일까. 지금 전(傳)의 글은 빠져 없어서 그 격물 치치(格物致知)의 설명은 더 이상 상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또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뜻을 발명한 것에 의거(依據)하여 참고해 보면 또한 그렇지 않은 점을 살필 수 있다. 그 성의의 설에는 자기를 속이지 말라 하였고, 그 혼자서 있는 때를 삼가라고 하였다.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것을 말할 적에는, 나쁜 냄새를 싫어하고 좋은 빛깔을 좋아하는 것을 증거로 삼고, 그 혼자서 있는 때를 삼가는 것을 말한 적에는 소인이 일없이 있을 때에는 좋지 못한 짓을 하다가, 군자를 보고 난 뒤에는 슬쩍 그 좋지 못한 일을 가리우지만, 남은 그 속[肺肝]을 들여다보듯 한다는 것을 증거로 삼았으니, 이 뜻이 너무나 평이(平易)하고 절실한 것이 아닌가. 이것이 또 어찌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고, 앎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는 수준 이상(以上)의 사람에게 가르쳐 알린 말이겠는가. 또 이것이 문득 사람의 성을 다하고 물의 성을 다했다고 이르겠는가. 만약 이로 말미암아 그 공부를 이룬다면 비록 사람의 성(性)을 다하고 물의 성을 다했다 해도 되겠지마는, 만약 이것으로써 이미 사람의 성을 다하고 물의 성을 다한 마당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아마 옳지 못할 것이다. 그 정심(正心)설에는 말하기를, “마음에 분하고 성나는 것,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있으면, 다 마음의 바름을 얻지 못한다.” 하였고, 또,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며,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것은 모두 초학자가 능히 아는 바이니, 그것이 사람의 성을 다하고 물의 성을 다하여, 천지의 화육(化育)에 참여할 수 있는 이상의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한 것이 또한 명백하다. 어찌 유독 격물(格物)에 대해 말하기를, 물(物)의 이치의 지극한 곳까지 반드시 다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격(格)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으며, 지지(知至)에 대해 내 마음의 아는 바가 반드시 다하지 않음이 없어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지(至)라고 할 수 없다고 하겠는가. 대개 《대학》의 뜻은 본래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물(事物)에 따라, 그 격물 치지의 공부를 써서 나의 앎을 이 일과 이 물에 대하여 그 처응(處應)할 바를 살피게 함이니, 그렇게 하면 뜻이 펴져서 그 사이에 실시되는 것이 저절로 성실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부자(朱夫子)의 격물 치지의 뜻을 취한 것이 이와 다른 듯하므로, 내가 참람된 의논을 꺼리지 않고 그릇되고 망령된 죄를 얻게 되는 것이다.
○ 묻기를, “물(物)이 아직 격(格)해지지 않았는데 뜻이 또한 성실해질 수 있겠습니까.” 하니,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진실로 그렇지마는, 어찌 물이 궁구해지지 않았다고 해서 뜻이 문득 성실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앎이 이르지 않을 때는 비록 뜻을 성실히 하려고 해도 말미암을 방도가 없으니, 반드시 앎을 이루어야 되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이미 뜻이 성실해도 그 말미암을 길이 없다고 하면, 설령 억지로 성실하고자 해도 이 뜻이 담고 있는 바로 보면 끝내 성실하지 못할 것이다. 대개 성실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억지로 하면 문득 성실한 것이 아니다. 만약 능히 성실하지 못하다면 또한 거짓을 하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중용》에, “성실하지 않으면 물이 없다.” 했으니, 물이 없다면 어찌 거짓이 아니겠는가. 성실과 거짓은 매우 근소한 차이로 다투다, 선(善)과 악(惡)으로 판가름나니, 곧 주자(朱子)가 이른바 사람과 귀신의 관문이라 한 것은 말이 간절하고 뜻이 명백하다 할 수 있다. 지금 이른바 이치가 능히 이르지 않은 것이 없고 앎이 능히 다하지 않은 것이 없기 이전에는, 그 하는 일이 모두 성실하지 못한 것을 면치 못한다고 하면, 이것은 거짓이 될 뿐이고 귀신이 될 뿐이다. 사람의 일상이 부자(父子)ㆍ군신(君臣) 관계의 큰 법과 인륜이 아닌 것이 없는데, 그 반평생의 닦는 일도 귀신의 관문에 막혀서 힘써 거짓을 행하는 것을 면치 못하다가, 하루아침에 확 트이는 경지에 이르러 모든 사물의 겉[表]과 속[裏], 정밀하고 성긴 면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게 되고, 내 마음의 온전한 본체(本體)와 커다란 작용이 밝혀지지 않는 것이 없게 되기를 기다린 뒤에야 임금을 섬기는 데 충성을 다할 수 있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도를 다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치에 미루어 보아도 결국 그렇지 않은 바가 있을 것이다. 남을 불쌍히 여기고 자신의 옳지 않음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않음을 미워하는 마음의 발단은 모두 성(誠)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저 갓난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은 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또한 어찌 반드시 천하의 사물을 다 궁구하고 내 마음의 앎을 다 극진히 하는 것을 기다려야만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또 전(傳)에, “나쁜 냄새를 싫어하듯이 하며 좋은 빛깔을 좋아하듯이 하라.” 했으니, 이것 또한 어찌 천하의 나쁜 냄새를 다 싫어하고 천하의 좋은 빛깔을 다 좋아하는 것을 말한 것이겠는가. 지금 어떤 사람이 한 가지 나쁜 냄새를 맡고 얼굴을 찡그리며 견디지 못하고, 한 가지 좋은 빛깔을 보고 몹시 기뻐한다면 또한 그것이 성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경(經)의 뜻은 대개 물(物)을 따라 바로잡아 그 앎을 이루게 하여, 나의 앎으로 하여금 한 가지 물과 한 가지 일 사이에서 그 선과 악을 살피되, 나쁜 냄새를 싫어하고 좋은 빛깔을 좋아하듯 한다면, 뜻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스스로 성실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임을 말한 것이다.
○ 주에, “물(物)이 격(格)하여지고 앎이 이르게 되면 그칠 바를 알게 되는 것이니, 의성(意誠) 이하는 모두 그칠 바의 차례를 얻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주자(朱子)의 앞의 말은 이미 그칠 바를 안 뒤에도 그 능히 얻는 경지에 나아가는 것을 가장 어려운 것으로 여기어, 이를 활 당기는 데 비유하되 팽팽하게 당겨진 때에 이르면, 그 이상은 활이 더 열리기 어려운 것이라 하고, 안자(顔子) 같은 이도 또한 오히려 얻지 못한 위치에 있다고 하였다. 이를 미루어 보면 안자도 한평생에 오히려 성실하지 못한 가운데 있었던 것이니, 그렇다면 그가 누추한 곳에 살면서도 그 즐김을 바꾸지 아니한 것이 또한 과연 무슨 일이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가 진실로 얻은 바가 있지 않았던 것인가. 또 어찌해서 모든 이치를 밝게 알고 마음의 본체가 크게 밝으면서도 오히려 귀신의 관문에 떨어져 있어서 말과 행실로 드러나는 것이 모두 성실하지 못한 점이 있는 이가 있는가.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다 몸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 근본이 어지럽고도 말단이 다스려지는 법은 없으니, 그 후(厚)히 할 사람에게를 박(薄)하게 하고서, 그 박하게 할 사람에게 후히 하는 이는 없다.
이 두 절은 또 제3절 본말(本末)의 뜻을 되풀이하여 위의 글 두 절의 뜻을 끝맺은 것이다. 근본과 말단을 말한다면 시초와 종말도 또한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상(以上)은 경(經)1장이다.


 

[주D-001]《대학》의 도(道) : 노(路)ㆍ이(理)ㆍ술(術) 등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종전의 여러 주해에는 이 도(道)를, “학(學)의 방법이다.”고 풀이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의의(意義), 또는 이념(理念)으로서의 지향할 바가 길이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주D-002]백성을 새롭게[新民] : 《대학(大學)》 고본(古本)의 ‘친민(親民)’을 ‘신민(新民)’ 으로 보는 것은 정자(程子)에서 비롯하였고, 주자(朱子)도 이 견해를 따랐다.
[주D-003]주(註) : 《대학 장구(大學章句)》의 주자의 주해를 말한다. 이 뒤에 나오는 것도 이와 같다.


 

 

 

思辨錄[一]
확대원래대로축소
 大學
[傳首章]

康誥,曰克明德。
此以明學之爲道,唯在於能明其德也。
太甲曰顧諟天之明命。
顧,反顧也,此,言人若欲明其德,唯在於反顧其身,以得夫天之所以與我者,夫天以五常之德賦與於人,自其端之發見於外者而察之,亦可見其赫然以明也,但人患不顧而求之於身耳,苟知反顧則向所謂德者,卽有以審其爲吾性之所本有,因以修之,何憂其不明乎。○註,以顧爲常目在之,朱子曰如一物在此,唯恐人偸去,兩眼常常覰在此,按以此爲義固美矣,但如此則是已認得自身所受之天命而守之不捨,唯恐其暫失者,此乃以上人工夫,非所以指示初學入德第一門路之意也。
帝典,曰克明峻德。
又恐學者雖能反顧而有得,克致其明,若復安於卑小則無以充其所受而進於至善之地,故引此以明其不可但已而必期至於大也。
皆自明也。
上傳首章,釋明明德。


 

사변록(Ⅰ)
확대원래대로축소
 대학(大學)
[전수장]


강고(康誥)에는 덕(德)을 잘 밝히라 하였다.
이것은 학문이 도(道)가 되는 것은 오직 그 덕을 밝히는 데 있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태갑(太甲)에는, “이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다보라.” 하였다.
고(顧)는 돌이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만약 그 덕을 밝히려고 하면, 오직 그 자신을 돌이켜 보아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을 얻는 데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하늘은 오상(五常)의 덕을 사람에게 부여했으니, 그 실마리가 겉에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살펴보아도 또한 그것이 환하게 밝은 것임을 볼 수 있다. 다만 걱정되는 점은 사람이 돌이켜 보고도 자기 몸에 구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진실로 돌이켜 볼 줄을 안다면 전에 이른바 덕이란 것도 곧 나의 천성(天性)에 본래 있는 것임을 살펴서 닦으면 어찌 밝아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는가.
○ 주(註)에는 고(顧)를 항상 지켜보는 것이라 하였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한 가지 물건이 이곳에 있으면 남이 알아 훔쳐 갈까 두려워하여 두 눈으로 늘 이곳에 있는가를 보고 있는 것과 같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로써 뜻을 취하는 것이 진실로 훌륭하기는 하나 다만 이와 같이 되면, 이는 벌써 자신이 받은 하늘의 명을 인정하고 그것을 지켜서 놓지 않으며 잠시라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등인(上等人)의 공부이고, 처음 배우는 사람이 덕(德)으로 들어가는 첫째 문로(門路)를 지시하는 뜻은 아닌 것이다.
제전(帝典)에는, “큰 덕을 능히 밝힌다.”고 하였다.
또 배우는 사람이 비록 반성하여 얻는 것이 있어서, 능히 그 덕을 밝혔다 해도 만약 다시 낮고 작은 것에만 만족하여, 그가 하늘에서 받은 바를 확충(擴充)시켜 지선(至善)의 경지에 나아가지 못할까 염려했기 때문에, 이 글을 인용하여 다만 중지해서는 안 되고 기필코 큰 데까지 이르러야만 된다는 것을 밝혔다.
모두 스스로 밝힌 것이다.
이상은 전(傳)의 첫 장으로, 명덕(明德)을 밝힘을 해석한 것이다.


 

 

 

 

思辨錄[一]
확대원래대로축소
 大學
[傳二章]

湯之盤銘,曰苟日新,日日新,又日新。
言在上者能導民於善而民漸趍善,是爲日新,上卽國民之向新,新之又新而益新之,必使其舊惡盡去而無不新之民也,蓋湯以沐浴之能滌去舊垢而潔新其軆,有似於人之自修能去舊惡而新其德,故銘之於盤,以自警於心,而爲傳者,又取以爲新民之喩,上之所以新其民者,其不可苟如此,彼自足於小康之治者,未聞夫大學之道而不能盡其責者也。
康誥,曰作新民。
旣新其民而民能己自新者,則必有以鼓舞振作,使民知勸而樂於爲善,善而不勸,爲善者怠,民怠於善,雖欲新之,有不可得矣,故爵祿慶賞所以勸善,卽作之之謂也,洪範曰凡厥正人,旣富方穀,于其無好德,汝雖錫之福,其作汝用咎,正此意也,蓋新民之要,莫過於斯。
詩,曰周雖舊邦,其命維新。
言文王能新其民而民無有不新,國雖舊,民卽新,故天之命文王也亦新,蓋王者能成新民之功,方盡爲君之道,於斯之時而億兆之衆無不願戴己者,所以天命其人爲億兆之主,不然則雖匹夫匹婦之不獲,亦不得爲盡其所受之責,而天命去就,不可知也。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
此一簡,當屬下章之末,爲止至善之結語,舊本恐誤,故今去之,然此章之末,亦當有所云以結新民之義而見闕矣。
上傳二章,釋新民。


 

사변록(Ⅰ)
확대원래대로축소
 대학(大學)
[전2장]


탕왕(湯王)의 반명(盤銘)에, “진실로 하루 동안을 새롭게 할 수 있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 하였다.
위에 있는 사람이 능히 백성을 선(善)한 데로 인도하여 백성이 점차 선한 데로 나아가는 것이 곧 날로 새롭게 되는 것이다. 윗사람은 곧 백성이 새롭게 향하는 데로 나아가 이를 새롭게 하고 더욱 새롭게 하여, 반드시 그 이전의 악(惡)을 모두 버리게 해서 새롭지 않은 백성이 없게 하는 것이다. 대개 탕왕은 목욕을 하여서 능히 묵은 때를 모두 씻어 버리고 그 몸을 깨끗이 새롭게 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자기 몸을 닦아서 능히 이전의 죄악을 버리고 그 덕을 새롭게 하는 것과 같은 점이 있기 때문에, 목욕하는 그릇에 글을 새겨서 이로써 스스로의 마음에 경계했던 것인데, 전(傳)을 지은 이는 또 이것을 취하여 백성을 새롭게 하는 비유로 삼았다. 윗사람이 그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됨이 이와 같은데, 조금 안정된 정치에 스스로 만족하는 자는 《대학》의 도를 듣지 못하여 능히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강고(康誥)에, “새로운 백성을 진작(振作)시켜라.” 하였다.
이미 그 백성을 새롭게 하여 백성이 능히 스스로 새롭게 되면, 반드시 그들을 고무(鼓舞), 진작(振作)시켜 백성으로 하여금 권장할 줄을 알아서 선을 행하는 데 즐기도록 하게 할 것이다. 선을 권장하지 않으면 선을 행하는 사람이 게을러지게 되고, 백성이 선을 행하는 데 게을러지면 비록 새롭게 하려고 해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벼슬과 상을 주는 것은 선을 권장하는 것이니, 곧 진작하는 것을 말한다. 홍범(洪範)에, “그 정인(正人)을 이미 부(富)하게 해야만 좋으니, 그 덕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네가 비록 그에게 복을 주더라도 네가 허물 있는 사람을 쓴 것이 될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이 바로 이 뜻이다. 대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령은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시경(詩經)》에,
주 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 周雖舊邦
그 국운(國運)은 새롭다 / 其命維新
하였다.
문왕(文王)이 능히 그 백성을 새롭게 하여 백성이 새롭게 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나라는 비록 오래되었지만 백성은 새롭게 되었으므로, 하늘이 문왕에게 명한 것이 또한 새롭다는 것이다. 대개 왕자는 능히 백성을 새롭게 하는 공을 이루어야만 임금된 도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 있어서 억조(億兆)의 민중이 그를 떠받들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은, 하늘이 그 사람을 명하여 억조 민중의 임금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일반 사람이 제 뜻을 얻지 못했더라도 또한 그 하늘에서 받은 바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되고, 천명(天命)의 소재(所在)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극(極)을 쓰지 않는 것이 없다.
이 한 장(章)은 마땅히 아래 장의 끝에 속하여 지선에 그친다는 끝맺음이 되어야 될 것이다. 구본(舊本)이 아마 틀린 듯하므로 지금 이를 버린다. 그러나 이 장의 끝에 또한 마땅히 말을 두어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뜻을 끝맺음했어야 하는 데 빠졌다.
이상은 전2장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해석한 것이다.


 

 

 

思辨錄[一]
확대원래대로축소
 大學
[傳三章]

詩云邦畿千里,維民所止。
言邦畿爲民所止,以明至善爲明德新民之所當止也。
詩云緡蠻黃鳥,止于丘隅,子曰於止,知其所止,可以人而不如鳥乎。
人不可以不如鳥則欲明德欲新民者,亦當求所當止而止也。
詩云穆穆文王,於緝煕敬止,爲人君,止於仁,爲人臣,止於敬,爲人子,止於孝,爲人父,止於慈,與國人交,止於信。
敬止,敬其所止,言文王,修德不怠,其德益明而猶必敬其所當止,則於止爲得矣,君止仁臣止敬子止孝父止慈與人交止信,此天下之至善而備於文王之一身,學者苟能師文王則其自治治人,必有以盡其道矣。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
其所以處君臣父子朋友之間者,必求止於至善而後已則於明德新民之功,可見其無所不用其極也,學者其可以少忽也哉。○此一簡,舊脫在上章之末,今詳文義,恐當在此,故正之。
詩云瞻彼淇澳,菉竹猗猗,有斐君子,如切如磋,如琢如磨,瑟兮僴兮,赫兮喧兮,有斐君子,終不可諠兮,如切如磋者,道學也,如琢如磨者,自修也,瑟兮僴兮者,恂慄也,赫兮喧兮者,威儀也,有斐君子終不可諠兮者,道盛德至善,民之不能忘也。
詩云於戱,前王不忘,君子賢其賢而親其親,小人樂其樂而利其利,此以沒世不忘也。
按章末君子無所不用其極一簡,舊本旣誤屬上章之末,此章結語遂缺,而此兩段,本當在第十章,又脫誤失所在,誠意章下,上段,言上之自治其德,下段,言下之不忘君惠,其間,又有所謂至善云者,故朱夫子乃取以爲釋止至善之義而引置於此,然推以傳文義例,有可明其不然者,傳第一章釋明德之義,則皆引明字,第二章釋新民之義,則皆引新字,此章又釋止至善之義,又皆引止字,而此兩段獨無,此其一驗也,第一章第二章,連引明字新字,皆止於三段,此章上所引止字,亦已得三段,而其所引語意,首尾已明,此又一驗,蓋有不暇待於此兩段以備其義者,故去之,移置於傳十章云。
上傳三章,釋止於至善。
自傳一章至此,舊本誤在沒世不忘之下,朱子正之。


 사변록(Ⅰ)
확대원래대로축소
 대학(大學)
[전3장]


《시경(詩經)》에,
하였다.
서울 지방이 백성들의 그치는 곳이란 것을 말하여, 지선(至善)이 명덕(明德)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 마땅히 그쳐야 할 데임을 밝히었다.
《시경(詩經)》에,
하였다. 이에 대하여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새도 그치는 데 있어서 그칠 곳을 알거늘, 사람으로서 새만 못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람으로서 새만 못해서는 아니 될 것이니, 명덕을 밝히려 하고 백성을 새롭게 하려는 이는 또한 마땅히 그쳐야 할 데를 구하여 그쳐야 될 것이다.
《시경(詩經)》에,
남의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그치었고,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그치었으며, 남의 아들이 되어서는 효(孝)에 그치었고, 남의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慈)에 그치었으며, 나라 사람들과 사귀는 데 있어서는 신(信)에 그치었다 하였다.
공경하여 그친다는 것은 그치는 데를 공경하는 것이니, 문왕이 덕을 닦는데 게으르지 않았으므로, 그 덕이 더욱 밝아졌는데도 오히려 반드시 그칠데를 공경하였으니, 그치는 데 있어서 얻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임금은 인(仁)에 그치고, 신하는 경(敬)에 그치고, 아들은 효(孝)에 그치고, 아비는 자(慈)에 그치며, 남과 사귀는 데 있어서는 신(信)에 그치는 것이니, 이는 천하의 지선이 문왕의 한 몸에 갖추어졌던 것이다. 배우는 이가 진실로 능히 문왕을 본받는다면 자기 몸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나 남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나 반드시 그 도리를 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극(極)을 쓰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임금과 신하, 아비와 아들, 벗과 벗의 관계에 대처하는 것을 반드시 지선에 그치기를 구하고야 만다면,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공부에 그 극(極)을 쓰지 않는 것이 없음을 볼 수 있으니, 배우는 이가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 이 한 구절은 옛날에는 탈락되어 위 장의 끝에 있었으나, 이제 글 뜻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아마 마땅히 여기 있어야 하므로 이를 바로잡은 것이다.
《시경(詩經)》에,
하였다.
자른 듯하고 간 듯하다는 것은 학문을 말한 것이요, 쪼은 듯하고 간 듯하다는 것은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며, 엄밀하고 굳세다는 것은 마음으로 조심한다는 것이요, 빛나고 성대(盛大)하다는 것은 위엄 있는 몸차림이며, 우아한 군자를 내내 잊을 수 없다는 것은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을 백성들이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에,
군자는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고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고, 소인은 즐거운 것을 즐겁게 여기고, 이로운 것을 이롭게 여기니, 이 때문에 세상을 떠났는데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이 장의 끝 ‘군자무소불용기극(君子無所不用其極)’이란 한 구절은 구본(舊本)에 이미 잘못되어 위 장의 끝에 속해 있었으므로, 이 장의 끝맺는 말이 드디어 빠져 버렸으며, 이 두 단락은 본래 마땅히 제10장에 있어야 될 것인데, 또 탈락되어 있을 곳을 잃고 성의장(誠意章) 아래에 있게 되었다. 위의 단락은 윗사람이 자신의 덕 닦는 것을 말하였고, 아래 단락은 아랫사람이 임금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것을 말하였다. 그 사이에 이른바 지선이란 것이 있는 까닭으로, 주자(朱子)는 이에 이를 취하여 지선에 그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여기에 끌어다 두었다. 그러나 전(傳)의 글의 예(例)로써 미루어 본다면, 그렇지 않은 것을 밝혀 낼 수가 있다. 전(傳)의 제1장에 명덕(明德)의 뜻을 해석할 적에는 모두 명(明) 자를 인용하였고, 제2장에 신민(新民)을 해석할 적에는 모두 신(新) 자를 인용하였으며, 이 장에 또 지지선(止至善)의 뜻을 해석할 적에는 또 모두 지(止) 자를 인용하면서, 이 두 단락만은 유독 없으니, 이것이 그 한 가지 증거이다. 제1장과 제2장에 명(明) 자와 신(新) 자를 잇달아 인용하면서 모두 세 단락에 그치고, 이 장의 위에 인용한 지(止) 자도 또한 이미 세 단락이 되고, 그 인용한 말 뜻도 처음과 끝이 이미 명백하니, 이것이 또한 한 가지 증거이다. 대개 이 두 단락을 기다려 그 뜻을 갖출 필요가 없으므로, 이를 떼어다가 전(傳) 10장에 옮겨 둔다.
이상은 전3장이다. 지선(至善)에 그침을 해석한 것이다.
전1장으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 구본(舊本)에는 잘못되어 ‘몰세불망(沒世不忘)’의 아래에 있었는데, 주자가 이를 바로잡았다.


 

[주D-001]서울[京幾] …… 곳이다 : 《시경》 상송(商頌) 현조편(玄鳥篇)에 보인다.
[주D-002]우는 …… 있구나 : 《시경》 소아(小雅) 민만편(緡蠻篇)에 보인다.
[주D-003]깊고도 …… 그치었다 : 《시경》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에 보인다.
[주D-004]저 기수 …… 없도다 : 《시경》 위풍(衛風) 기욱편(淇澳篇)에 보인다.
[주D-005]아 …… 못하리로다 : 《시경》 주송(周頌) 열문편(烈文篇)에 보인다.


 

 

 

 

 思辨錄[一]
확대원래대로축소
 大學
[傳四章]

子曰聽訟吾猶人也必也使無訟乎無情者不得盡其辭大畏民志此謂知本。
上傳四章,釋本末,章上下,疑亦有闕文。
此章,舊本,誤在止於信下,蓋間脫一簡而然耳

사변록(Ⅰ)
확대원래대로축소
 대학(大學)
[전4장]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송사(訟事)를 들어 결단하는 일은 나도 남보다 못하지 않으나, 반드시 송사를 없게 하도록 할 것이다.” 하였다. 실상(實狀)이 없는 사람이 허망한 말을 다할 수 없도록 함은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두렵게 한 까닭이니, 이를 근본을 안다고 이른다.
이상은 전4장인데, 근본과 말단을 해석한 것이다. 장의 위와 아래에 빠진 글이 있는 듯하다.
이 장은 구본에는 잘못되어 ‘지어신(止於信)’ 아래에 있었는데, 대개 중간에 한 구절이 탈락(脫落)되어 그렇게 된 것이다.
이를 지본(知本)이라고 이른다. - 연문(衍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