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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증(贈)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 행(行)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도관찰사 김공 성일(金公誠一)의 신도비명 병서

아베베1 2013. 9. 1. 16:41

 

 

 

 

 

 

 

우복집 제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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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증(贈)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 행(行)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도관찰사 김공 성일(金公誠一)의 신도비명 병서


공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휘는 성일(誠一)이고, 자는 사순(士純)이고, 자호(自號)는 학봉(鶴峯)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 부(傅)에게 석(錫)이란 아들이 있어 의성군(義城君)에 봉하여졌으므로 후손들이 이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그 뒤에 용비(龍庇)라는 분이 있어서 벼슬이 태자첨사(太子詹事)에 이르렀는데, 백성들에게 공덕이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공은 이분의 후손이다. 고조는 휘가 한계(漢啓)로,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를 지냈으며, 명망이 높았는데, 광묘(光廟 세조(世祖))가 선위(禪位)를 받자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서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증조는 휘가 만근(萬謹)으로,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이고,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증직(贈職)되었다. 조고는 휘가 예범(禮範)으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선고는 휘가 진(璡)으로,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조비(祖妣)는 영해 신씨(寧海申氏)로, 숙부인(淑夫人)에 증직되었으며, 비(妣)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이상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됨으로 인해서 증직된 것이다.
공은 예닐곱 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아홉 살 적에 정부인 민씨(閔氏)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슬퍼하고 애모함이 어른과 같았다. 큰형님인 극일(克一)이 홍원(洪原)의 임소(任所)에 있을 적에 일찍이 그곳에 따라가 있었는데, 하루는 성중에 불이 났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달려가서 아문(衙門)의 불을 끄기에 바빴는데, 공만은 홀로 전패(殿牌)를 손에 받들고서 깨끗한 곳으로 피하니, 보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약관의 나이에 동생 복일(復一)과 더불어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상서(尙書)》를 읽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학문을 한다고 하면서 녹봉에만 뜻을 두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은 오늘날의 유종(儒宗)이니, 어찌 가서 가르침을 청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판서공에게 편지를 보내 허락해 주기를 청하니, 판서공이 기뻐하면서 허락하였다. 이에 곧장 걸어서 가 퇴계 선생을 뵈었다. 퇴계 선생에게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설 및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제도에 대해서 물어본 다음 물러 나와서 동생과 더불어 반복하여 연구하면서 직접 그림을 그려 보기도 하면서 강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퇴계 선생이 그 정성스럽고 독실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어떤 사람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민첩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므로, 그와 더불어 학문을 함께 하노라면 몹시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면서, 몹시 크게 기대하였다.
임술년(1562, 명종17)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요승(妖僧) 보우(普雨)의 말에 빠져서 아무런 까닭 없이 희릉(禧陵)을 천장(遷葬)하고 정릉(靖陵)의 묏자리를 새로 잡으려고 하였는데, 이 당시에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온 조정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공은 다섯 가지 불가한 점이 있다는 내용으로 상소를 기초하였는데, 말투가 꼿꼿하고 강직하여 조금도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판서공(判書公)이 직분을 벗어난 상소라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극력 저지하여 끝내 올리지 못하였다.
갑자년(1564, 명종19)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으며, 무진년(1568, 선조1)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으로 옮겨졌다. 상소를 올려 노산(魯山)의 묘를 봉식(封植)할 것과 사육신(死六臣)의 관작(官爵)을 회복할 것을 청하였으며, 임금의 덕과 당시의 폐단에 대해서까지 아울러 언급하였다. 그 뒤에 노산군의 능을 봉식하고 사육신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한 것은 대개 공이 발론(發論)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계유년(1573, 선조6)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이때 소경대왕(昭敬大王)이 바야흐로 정신을 가다듬어서 다스리기를 구하여 날마다 유신(儒臣)들과 더불어 치도(治道)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어느 날 중간쯤 되는 임금이 되기에도 부끄럽다고 탄식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요 임금이나 순 임금 같은 임금입니다.” 하였는데, 공은 아뢰기를, “요 임금이나 순 임금이 될 수도 있고, 걸(桀)이나 주(紂)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천부적인 자질이 영특하고 뛰어나시니 요순을 닮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 고집하는 병통이 있으신데, 걸주가 망한 까닭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자, 상이 얼굴빛을 고쳤다.
공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적에 김규(金戣)가 아부하는 태도를 짓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비루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규가 사간(司諫)이 되자 동료들이 장차 그와 더불어 회좌(會坐)하고자 하였다. 이에 공은 곧장 대궐에 나아가 김규를 직접 대놓고 배척하니 조정이 숙연해졌다. 얼마 있다가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옮겨졌으며,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겨졌다.
을해년(1575, 선조8)에 병조 정랑에 올랐다. 병자년(1576)에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며, 오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정축년(1577) 봄에 서장관(書狀官)으로서 경사(京師)에 갔는데, 우리나라가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할 수 있었던 데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겨울에 이조 정랑에 올랐다. 무인년(1578)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제수되었다. 일찍이 탑전(榻前)에서 조정 신하들이 뇌물을 받는 폐단에 대해 극력 진달하자, 상이 큰 소리로 누가 그런 짓을 했느냐고 캐물었다. 이에 공이 낱낱이 들어 아뢰자,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목을 움츠렸다.
기묘년(1579, 선조12)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옮겨졌는데, 강직한 태도로 흔들리지 않았다. 이때 하원군(河原君) 이정(李珵)이 왕실의 의친(懿親)으로서 임금의 총애만을 믿고 범법하는데도 그것을 금지시키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공이 그 집 종을 잡아다가 묶어 놓고는 엄하게 국문하면서 조금도 용서치 않았다. 상이 경연 석상에서 묻기를, “근래에 염치가 날로 없어지는 것은 어째서 그런가?” 하니, 공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대신으로 있는 자도 뇌물 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니 낮은 관원들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노수신(盧守愼)이 자리를 피해 앉으면서 아뢰기를, “신의 집안사람 가운데 변장(邊將)이 된 자가 있는데, 신이 노모를 모시고 있다는 이유로 갖옷 한 벌을 부쳐 왔으므로, 신이 물리치지 못하고 받았는바, 김성일이 이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바른말을 하고 대신이 허물을 인책하니, 둘 다 잘했다.” 하였다. 공은 평소에 노수신과는 사이가 좋게 지냈는데, 노수신이 나와서 사례하기를, “옛날의 도의를 오늘날에 다시 볼 수가 있었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능히 그렇게 하겠는가.” 하였다.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으로 옮겨졌다가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올랐다. 의정부의 옛 풍습이 노래와 계집을 불러 노는 걸 숭상하였는데, 비록 묵중한 선비라고 불리는 사람조차도 대부분 이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공은 몸가짐을 잘 가져서 끝내 거기에 물들지 않았다. 가을에 명을 받들어 북관(北關)을 순시하였는데, 탐관오리 가운데에는 공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인수(印綬)를 끌러 놓고 떠나가는 자도 있었다.
경진년(1580, 선조13)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치고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제수되었다.
계미년(1583)에 사인(舍人)으로서 황해도 지방을 순시하였다. 돌아와 복명(復命)하기도 전에 특별히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다. 나주는 아주 번화한 고을이라서 민정(民情)이 막힐까 염려하여 북 하나를 문에다가 설치하고는 백성들 가운데 원통한 사연이 있는 자는 와서 두드리라고 명하였는데, 백성들이 이로 인해 자신들의 뜻을 다 말할 수 있었다. 나주 고을은 본디 선비가 많았으나 이들이 모여서 공부할 만한 곳이 없었다. 이에 공은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터를 잡은 다음 서원을 창건하고, 그 뒷편에 사우(祠宇)를 세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재(一蠹齋)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 다섯 선생을 향사(享祀)하여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스승으로 받들어 존경할 바를 알게 하였다. 그리고 공무를 보는 틈틈이 그곳으로 달려가 경서(經書)의 뜻을 강론하였으며, 근태(勤怠)에 따라 고과(考課)하였다.
사직단(社稷壇)에 불이 나서 재각(齋閣)과 주방(廚房)이 모두 타 버리자, 고을 사람들이 속히 새로 지은 다음 감사에게는 보고하지 말라고 청하니, 공이 이르기를, “죄가 있는데도 이를 숨기는 것은 죄를 더 보태는 것이다.” 하고는, 자신의 죄에 대해 자책하는 글을 올리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무자년(1588, 선조21)에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제수되었으며, 봉상시 정(奉常寺正)과 예빈시 정(禮賓寺正)으로 옮겨졌다.
기축년(1589)에 일본 사람 평수길(平秀吉)이 원씨(源氏)를 쳐 없애고 대신 관백(關白)이 되어 그의 심복인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 등을 파견하여 와서 통호(通好)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통신사(通信使)를 보낼 것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적들의 정세를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공은 집사람에게 이르기를, “속히 행장을 꾸리라. 내가 반드시 가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공이 부사(副使)에 충원되어 가게 되었다.
다음 해인 경인년(1590, 선조23) 여름에 배를 타고 가 대양(大洋)에 들어섰을 때 태풍이 크게 불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겁을 내면서 울부짖었다. 그런데도 공은 홀로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였을 적에 평의지 등이 국분사(國分寺)를 유람하기를 청하여 사신 일행이 모두 갔는데, 현소가 중당(中堂)에 앉은 채로 영접하였으며, 평의지는 나중에 오면서 가마를 탄 채 섬돌을 지나서 올라왔다. 이에 공이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에게 이르기를, “저들이 감히 우리를 능멸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그들과 더불어 이대로 앉아서 술잔을 주고받는다면, 이것은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고는 곧바로 일어나 나와 관소(館所)로 돌아오자,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도 뒤따라 나왔다. 평의지가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역관(譯官) 진세운(陳世雲)이 병이 나서 나간 것이라고 고하였다. 공이 그 사실을 듣고는 왜사(倭使)가 보는 자리에서 진세운을 곤장 친 다음 이르기를, “이 대마도는 대대로 우리나라의 은혜를 받아 우리나라의 동쪽 울타리가 되었는바, 우리나라 사신이 오면 길을 갈 때는 뒤에서 호위하고, 만나 볼 적에는 앞에서 절하는 것이 바로 저들의 분수이다. 그런데 너는 전례(典禮)를 인용해 답하여 저들의 오만스러움을 꺾지 못하고는 도리어 말을 꾸며대어 저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자 평의지가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면서 가마를 메고 갔던 자에게 죄를 돌려 그의 목을 벤 다음, 엎드린 채 들어와서 사죄하였다. 이에 공이 충순(忠順)의 도리를 힘쓰라고 면려한 다음 보냈다. 이로부터 왜인들이 공의 절의(節義)에 굴복하여 감히 오만스럽게 굴지 못했다.
계빈(界濱)에 도착하였을 때 서해도(西海島)의 왜인이 사람을 시켜서 예물과 음식물을 보내왔는데, 그가 보낸 글 가운데 ‘조선 사신이 와서 조회하였다.〔朝鮮使臣來朝〕’는 말이 있었다. 이를 알지 못하고 그 음식을 받았다가 나중에 이를 깨닫고서 물어보니, 이미 여러 종자(從者)들에게 나누어 준 뒤였다. 이에 공이 황윤길과 허성에게 고하기를, “장차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짐승과 같은 자들과 어찌 따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나라를 욕되게 하는 음식을 받아먹는다면, 그 수치스러움은 혀를 차면서 주거나 발로 차서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것보다도 더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받는단 말입니까? 저들이 보낸 음식을 보니 모두 저자에서 사 온 것들입니다. 지금 만약 저들이 보내온 수효대로 사다가 되돌려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 주인이 말을 실수하였다. 이미 그것을 알았으니 그대로 받을 수가 없다. 너는 돌아가서 너희 주인에게 그렇게 고하라.’라고 한다면, 말이 엄하고 의리가 발라서 치욕을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즉시 그렇게 하자, 심부름 온 사람이 말하기를, “저희들은 소인인지라 한자(漢字)를 모르므로 이곳에 와서 남의 손을 빌려서 글을 쓴 것입니다. 말을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실로 저희 주인은 모르는 일입니다. 글을 다시 고쳐 써서 올리겠으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면서, 사과하여 마지않았으므로 마침내 내버려 두었다.
왜국의 도성에 들어섰을 때 황윤길 등이 편복(便服)을 입은 채 들어갔다. 이에 공이 이르기를, “사신이 예복을 입는 것은 왕명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다른 나라의 도성에 들어가면서도 편복을 입고 들어가서야 되겠습니까.” 하면서, 세 번이나 거듭 말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날 왜도(倭都)의 사녀(士女)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보면서 공에 대해서만은 두 손을 교차해 공경하는 예를 표했으나, 그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힐끗 보고는 그만이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이 비로소 후회하였다.
이보다 앞서 우리 조정에서는 관백(關白)을 국왕으로 잘못 알아 국서(國書)에 서로 대등한 예로 썼으며, 사신이 상견(相見)할 때의 의식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지시해 준 바가 없었는데, 이곳에 이르러서야 관백이 국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에 공이 일행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은 당에 올라 기둥 밖에서 절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허성이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일본은 우리나라의 여국(與國)입니다. 그리고 일본을 맡아 다스리는 자는 소위 천황(天皇)이라는 사람입니다. 관백이란 자는 그의 대신(大臣)일 뿐입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그러한 실정을 모르고 국왕이라고 하면서 우리 임금과 대등한 신분으로 대우했으니, 심하게 우리 자신을 낮춘 것입니다. 지금 이미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으니 비록 전례가 없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예법에 의거하여 분명하게 따져 상견하는 예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더구나 이전에 왔던 사신들이 모두 위에 올라가서 절하였는데 우리들만이 어찌 유독 스스로를 굽혀서 나라를 욕되게 하는 죄를 불러올 수 있겠습니까.” 하니, 허성이 말하기를, “국서에 곧장 어휘(御諱)를 쓰고서 수길(秀吉)을 국왕이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런데 신하 된 자가 어찌 감히 대등한 예를 행하여, 아래에서 절하는 예를 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국서를 이미 고칠 수가 없으니 아무리 당 위에 올라가 절한다고 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당초에 조정에서 잘 알지 못하여서 이런 지나친 예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비록 국서를 고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사신이 서로 만나 보는 예는 전례대로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찌 이것을 가지고 고집해서 말을 하면서 관백을 국왕으로 여겨 반드시 뜰 아래서 절하는 예를 행해 거짓 천황의 배신(陪臣)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겨서야 되겠습니까. 관백이 사신을 존중해서 당 위에 올라가서 만나 보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 임금을 왜국의 거짓 천황과 대등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히 스스로를 우리 국왕과 대등하게 여기지 않아 사신을 높이 받든다면 이는 우리 조정을 높이 받드는 것이니 또한 옳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허성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말하였다가 저들이 따라 준다면 좋겠지만, 저들이 만약 ‘우리나라 사신도 이미 귀국 뜰에서 절하였다. 그러니 어찌 서로 다르게 해서야 되겠는가.’ 할 경우에는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게 됩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사람의 임금이 없는 법입니다. 일본의 소위 천황이 이미 국왕으로 되어 있으니 관백은 아무리 존귀하다고 하더라도 신하일 뿐입니다. 그러니 사신이 소위 천황을 만나 볼 적에는 뜰에서 뵙는 것이 예이지만, 관백을 뜰에서 만나 보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지금 관백이 뜰에서 절하여 뵙는 예를 받는다면 이것은 천황으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뜻을 가지고 간절하게 타이른다면 저들이 반드시 굴복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또 조용히 현소에게 묻기를, “귀국의 여러 전(殿)이 관백을 뵐 때 뜰 아래에서 절을 합니까, 당 위에서 절을 합니까?” 하자, 현소가 대답하기를, “관백은 여러 전과 똑같이 천황의 신하인데, 어찌 뜰 아래에서 절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공이 이르기를, “전부터 우리나라 사신들도 모두 기둥 바깥에서 예를 행하였습니다.” 하자, 현소가 말하기를, “참으로 옳습니다.” 하였다. 공은 대개 현소 등이 이미 우리나라에 왔을 때 뜰 아래에서 절을 했으니, 혹시라도 그에 비기어서 하고자 할까 염려되었으므로 미리 슬쩍 떠보아서 그렇게 하는 길을 막은 것이다. 그 뒤에 마침내 공이 말한 대로 예를 행하였다.
이때 수길이 관동(關東) 지방을 순시하고서 이미 돌아와 있었다. 평의지가 와서 말하기를, “내일 관백이 일찍 천궁(天宮)에 갈 것이니, 사신이 관광(觀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공이 이르기를, “왕명이 아직 관소에 있으니 사신 된 의리에 있어서 사사로이 나다니기가 곤란합니다.” 하였다. 평의지가 굳이 청하였으나 끝끝내 사양하였다. 왜승(倭僧)이 와서 ‘관광을 하라고 청한 것은 실은 관백의 뜻으로서, 만약 따르지 않으면 후회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말하자, 일행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는데도 공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그 뒤로 수길이 몇 달 동안을 질질 끌면서 국서를 제때에 받지 않고는 뜬 말로 선동하여 구류당하는 수치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때 어떤 자가 와서 말하기를, “민부 경(民部卿) 법인(法印)과 산구전(山口殿) 현량(玄亮)은 관백의 심복인데 지금 마침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환심을 사 일이 성사되기를 도모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자, 황윤길이 그럴듯하다고 여겨 예물로 바치는 폐백이라고 핑계 대고는 후하게 뇌물을 주어 도모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이르기를, “손님과 주인 사이에는 과연 예물로 바치는 폐백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왕명을 전한 뒤에 준다면 예물이 되겠지만, 지금 준다면 뇌물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주(聖主)의 밝은 명령을 받들고 와서는 위엄과 덕화를 선양해 왜인들로 하여금 조대(朝臺) 아래에서 이마를 조아리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도리어 뇌물을 주어 아첨을 한다면, 이는 임금의 명을 몹시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죽더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황윤길이 그 말에 굴복하였다.
이미 왕명을 전한 뒤 수길이 사람을 시켜 와서 말하기를, “서계(書契)는 짓는 대로 뒤따라 보낼 것이니, 사신은 계빈(界濱)에 가서 기다리라.” 하자, 공이 이르기를, “국서를 받지 않았으니 이는 사신의 일을 아직 마치지 못한 것으로, 지레 나가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계빈 땅은 100리 밖에 있습니다. 설혹 서로 따질 일이 있을 경우에는 장차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였다. 그러나 일행들이 모두 호구(虎口)를 벗어나는 것만을 다행으로 여겨 수레를 몰아 지레 떠났는데, 공이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계빈으로 돌아와 수십 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서계(書契)가 왔는데, 서계의 말투가 매우 패만스러웠다. 심지어는 ‘전하(殿下)’를 ‘각하(閣下)’라 하고, ‘예폐(禮幣)’를 ‘방물(方物)’이라 하였으며, 또 ‘한 번 뛰어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겠다. 귀국은 앞장서서 입조하라.〔一超直入大明國 貴國先驅入朝〕’는 따위의 말이 있었다. 공은 이를 즉각 물리치고 받지 않은 다음 글을 보내어 현소(玄蘇)에게 이르기를, “서계를 고치지 않으면 사신은 이 자리에서 죽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현소가 거짓으로 ‘대명국에 입조한다’는 뜻이라고 해명하면서 단지 ‘각하’와 ‘방물’ 등 몇 글자만을 고쳤다. 이에 공이 다시 글을 보내 서계에 있는 말을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각 구절마다 분석하여 얼버무리는 현소의 말을 깨뜨렸다.
공은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예의를 중하게 여겨서 귀국과 우호를 통한 지 200년이 되었으나, 일찍이 무례한 말을 가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귀국도 알 것입니다. 이번에 귀국에서 포로로 잡아간 우리나라 백성을 돌려보내고 우리나라를 침범한 무리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서 옛날처럼 수교하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우리 전하께서는 신의가 있는 것을 가상하게 여기시어 특별히 사신을 보내셨으니, 이는 실로 두 나라 사이의 성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귀국의 서계에는 그런 일에 대하여 감사해하는 뜻은 생략해 버리고, 도리어 귀국의 위세를 장황하게 떠벌리면서 과시하고자 하였는바, 위로는 대명국을 엿보고 옆으로는 이웃 나라를 업신여겨 제멋대로 위협하는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예로써 이웃 나라를 사귐에 있어서 어찌 이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는데, 현소가 그 글을 보고는 몹시 칭탄하면서도 오히려 이전의 속이는 말을 고집하였다.
황윤길 등은 변고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강하게 다투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이르기를, “만약 ‘입조’라는 두 글자를 고치지 않는다면 우리 조정이 왜놈의 속국(屬國)으로 되고, 온 나라의 관원들이 죄다 그들의 배신(陪臣)이 되는 것이니, 또한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송(宋)나라 고종(高宗)은 이미 금(金)나라를 신하로서 섬기는 상황이었는데도 ‘조유(詔諭)’한다는 것으로 이름을 삼자, 호담암(胡澹庵)은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속국으로 된 조정에서 구차스럽게 살아남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당당한 우리나라로서 오랑캐와 이웃이 되었는데, ‘입조’라는 수치스러운 말을 달갑게 받아들이면서 죽음으로써 다투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였다. 그러자 황윤길이 말하기를, “현소의 답이 이와 같으니, 우선은 그의 말을 믿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공은 이 말을 빌려서 뒷날에 자신을 해명할 바탕으로 삼으려는 것입니까?” 하였다. 허성이 말하기를, “돌아가서 보고한 뒤에는 조정에서 나름대로 처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사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아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대부(大夫)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국경을 나선 뒤에는 사직을 편케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일이면 재량껏 처리하는 것이 옛날의 도입니다. 하물며 나라를 욕되게 하는 이런 말은 죽음으로써 다투어 고치기를 청하더라도 어찌 제멋대로 처리한 죄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일신의 이해만을 염려하여 벌벌 떨면서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는 이에 ‘우리들이 알 바가 아니다.’ 하면서, 치욕스러운 서계를 가지고 가서 임금께 바친단 말입니까?”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현소에게 답서를 보냈으며, 또 선위사(宣慰使) 평행장(平行長)에게 글을 보내어 반복하여 논변하면서 반드시 고치고야 말 것으로 기필하였다. 그러자 일행들이 모두 사단(事端)을 일으킬까 두려워 서로 선동하였으며, 황윤길이 정사로서 절제권을 행사하면서 일의 대부분을 저지하였다. 이에 공은 그 글을 바다 속에 던져 버린 뒤에 시를 지어서 울분을 쏟았는데, 그 시 가운데 ‘물속의 어룡은 응당 글자 알아보리.〔水底魚龍應識字〕’란 구절이 있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풍속에 관한 한 조항이 근거도 없는 데서 주워 모은 것이라 대부분 비루하고 속되며 내용이 틀린 것들이었으므로 공이 일찍이 이를 병통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왜승(倭僧) 종진(宗陳)이 마침 이 책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다. 이에 공은 국내에서 현재 통행하는 예절과 풍속을 거론하며 각 조목마다 평론하고 변증해서 잘못된 것임을 밝혀 《조선국풍속고이(朝鮮國風俗考異)》라는 책 한 권을 만들어 주었다.
행차가 돌아올 적에는 여러 추장(酋長)들이 각각 선물을 보내왔는데, 모든 선물을 관소(館所)의 중들에게 나눠 주어 터럭만큼도 자신에게 허물이 있게 하지 않았다.
신묘년(1591, 선조24) 봄에 돌아와서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행낭이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으며, 오직 석창포(石菖蒲)와 종려나무의 분재만 몇 개 있을 뿐이었다. 안동(安東)을 지나면서도 집에는 들르지 않은 채 조정으로 곧장 올라갔다.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서 복명하였으며,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특별히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되었다가 부제학(副提學)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이에 가장 먼저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이 무고를 입어 죽은 상황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논계하였는데, 얼마 뒤에 최영경의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러자 뭇사람들이 아주 통쾌하게 여겼으며, 공 역시도 임금이 자신을 알아주는 데 감격하여 어려운 일을 책하고 착한 일을 말할 것으로 자임하였다.
공은 여러 차례 차자(箚子)를 올려 수천 마디의 말을 하면서 시사(時事)에 대해 극언하였는데, 하늘의 재앙이 일어나는 까닭,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는 까닭, 정치의 교화가 무너지는 까닭, 국가의 재정이 부족해지는 까닭 등에 대해 하나하나 지적하여 진달하면서 숨김없이 다 말하였다. 그러면서 특히 내치(內治)를 엄하게 하여 교화의 근원을 맑게 하는 데 정성을 쏟아, 궁방(宮房)의 폐단과 척리(戚里)들의 못된 버릇에서부터 세자(世子)를 세우고 왕자(王子)들을 가르치는 일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기휘하거나 피하지 않은 채 모두 다 말하였다. 그런데 차자가 올라갈 적마다 말이 더욱더 꿋꿋하고 간절하였으므로 사방 사람들이 서로 전해 외웠으며, 정론(正論)이라고 칭찬하면서 경하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좌우에 있는 권귀(權貴)들은 공을 몹시 미워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겨졌다가 얼마 뒤에 체차되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조정에서는 왜적이 쳐들어올까 염려하고 있었는데, 영남 지방이 가장 먼저 침입을 받을 것이므로 군무(軍務)를 잘 아는 무변(武弁)을 천거하여 곤수(閫帥)에 의망(擬望)하였다. 그러자 상이 특별히 공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이에 공은 명을 받자마자 곧바로 출발하였다. 충주(忠州)에 이르렀을 때 왜적들의 배가 바다를 뒤덮고 건너와 부산(釜山)과 동래(東萊)가 잇달아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밤낮없이 달려가 곧장 본영(本營)으로 가려고 하였다.
의령(宜寧)에 이르렀을 적에 휘하의 장사(將士)들이 서로 더불어 모의하기를, “왜적들이 깊이 쳐들어왔으니 곧장 갈 경우에는 위험할 것인바, 진주(晉州)를 경유하여 함안(咸安)으로 나가 왜적들의 형세를 살펴보느니만 못하다. 그런데 병사(兵使)는 결코 우리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니, 다른 말로 핑계 대어야 한다.” 하였다. 그러고는 공의 둘째 아들 역(湙)에게 부탁하여 들어가서 ‘정진(鼎津)은 강물이 불어났고 배가 없으니 진주로 가는 것이 편하다’고 고하게 하였다. 공이 군교(軍校) 김옥(金玉)을 시켜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김옥이 돌아와서 속이는 말로 보고하자 공이 이르기를, “일이 급하니 길을 돌아서 가서는 안 된다.” 하고는, 곧장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갔는데, 정진에 도착해서 보니 배가 있었다. 이에 곧바로 김옥과 역을 끌어내어 참수하려고 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린 채 그러지 말라고 하고, 김옥도 또한 앞장서서 싸워 속죄(贖罪)하기를 원하였으므로 용서해 주었다.
병영에 도착하기 30리 전에서 전 병사(兵使) 조대곤(曺大坤)을 만났다. 조대곤은 진(鎭)을 버리고 물러나 있다가 도망치려고 하던 차였다. 그런데 뜻밖에 공이 도착하였으므로,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맞이하면서 병사의 인(印)을 교부하고는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가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준엄한 말로 꾸짖기를, “장군은 지척에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면서도 김해(金海)를 왜적에게 내주었으니, 군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다. 더구나 대대로 녹을 먹은 신하이며 경험이 많은 장수로서 이런 때를 당하여 의리상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그때 마침 그의 편비(褊裨)가 뒤늦게 와서는 말하기를, “본영(本營)이 이미 함락되었습니다.” 하였는데, 공은 그 말이 거짓임을 알아채고는 그의 죄를 따지면서 이르기를, “너는 병사의 휘하로서 성을 지키고 있다가 왜적을 향하여 화살 한 발 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와서 현혹시키는 말을 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목 베어서 조리돌리니, 조대곤이 넋을 잃었다.
이튿날 정탐하던 군사가 왜적들이 바짝 다가왔다고 보고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왜적과의 거리가 몇 리나 되는가?” 하니, 답하기를, “5리입니다.” 하자, 곧바로 정예 군사를 뽑도록 하였다. 잠시 뒤에 은색 투구에 금빛 가면을 쓴 왜적 두 명이 칼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나오자, 장사들이 모두 다리를 벌벌 떨었다. 그런데도 공은 승상(繩床)에 걸터앉은 채 군사들로 하여금 동요치 말게 하였다. 그러자 왜적들이 우리 군사들이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의심하여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미리 뽑아 놓은 수십 명의 군사로 하여금 돌격하게 하면서 영을 내리기를, “즉시 말을 타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목을 베겠다.” 하고는, 김옥의 이름을 부르면서 소리치기를, “너는 오늘 앞장서지 않을 건가?” 하니, 수십 명이 한꺼번에 돌진하였다. 몇 리를 뒤쫓아 가다가 매복하고 있던 왜적을 만나 오랫동안 싸웠는데, 군교(軍校) 이숭인(李崇仁)이 금빛 가면을 쓰고 도전해 오던 왜적을 활로 쏘아 쓰러뜨리자, 나머지 왜적들이 모두 달아났다. 이에 왜적의 수급 둘을 베고 좋은 말과 금 안장과 보검 등을 노획하여 돌아왔다.
왜적들이 상륙한 이후로 열진(列鎭)이 토붕와해되어 적의 예봉(銳鋒)에 맞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공이 적은 병력을 가지고 왜적들의 예봉을 꺾으니 이로부터 군사들의 마음이 점점 진작되어 왜적들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드디어 이숭인을 올려 보내어 수급을 바치면서 이 사실을 치계하였다.
처음에 공이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중외가 흉흉하여 마치 조석 간도 보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공은 외적이 침입해 오기도 전에 나라 안이 먼저 무너질까 염려하여 이를 진정시키는 말을 하였으며, 옥당에 있으면서 올린 차자에서도 아뢰기를, “오늘날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섬 오랑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심에 있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근본을 추구하는 의론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변경에서 올라오는 보고가 날로 급하고 서울이 크게 놀라 동요하였으므로, 상이 뒤늦게 공의 말을 허물하여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좌의정 유성룡(柳成龍)과 대관(臺官)들이 구명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이숭인이 도착하자, 상이 재신(宰臣)들에게 이르기를, “김성일의 장계에 ‘한 번 죽어 나라의 은혜를 갚겠다.’라는 말이 있는데, 김성일이 과연 그렇게 하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김성일이 살펴본 바는 혹 모자랄지라도 충성심은 남음이 있으니, 그 말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임을 신이 책임지겠습니다.” 하였으며, 왕세자도 또한 극력 구원하였으므로, 상의 노여움이 이에 풀렸으며, 곧바로 초유사(招諭使)의 직임을 제수하였다.
공이 처음에 국문받으라는 명을 받고 올라가다가 직산(稷山)에 이르렀을 때 선전관(宣傳官)이 빨리 달려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는 따라가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통곡하였는데도 공은 얼굴빛을 변치 않은 채 뒷일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선전관이 도착한 뒤에 보니 초유사에 제수하는 은혜로운 명이었다.
공이 남쪽으로 내려와 함양(咸陽)에 도착해서 보니 열읍(列邑)은 이미 텅 비었고 사민(士民)들은 모두 조수(鳥獸)처럼 달아나 숨어 있었다. 이에 공은 그 자리에서 초유문(招諭文)을 지어 유시하였는데, 충의(忠義)가 격동하고 말투가 강개하여 보는 자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김면(金沔)은 거창(居昌)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정인홍(鄭仁弘)은 합천(陜川)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 나머지 향병(鄕兵)을 끌어모아 왜적을 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나선 자들이 곳곳에서 떼 지어 일어나 일로(一路)를 바람처럼 휩쓸었다.
곽재우(郭再祐)는 변란이 일어난 처음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는 자기 집 재산을 흩어서 군사들을 먹였는데, 군량을 계속해서 댈 수 없을 경우에는 빈 고을의 창고 곡식을 가져다가 군사들을 먹였으므로, 인근 고을의 수령들이 곽재우를 가리켜 토적(土賊)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의병들의 마음이 모두 저상되었으며, 곽재우도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알고는 팽개치고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던 차에 공이 이르러서 글을 보내어 격려하고 권장하자, 사기가 다시금 떨쳐졌다.
공은 진주(晉州)가 호남(湖南)의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이므로 왜적들이 반드시 빼앗으려 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판관(判官) 김시민(金時敏)에게 영을 내려 군사들을 끌어모으게 해 수천 명을 얻은 다음,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무기를 수선하게 하였으며, 성첩(城堞)을 헤아려서 대오를 나누어 사수(死守)할 계획을 하였다. 얼마 뒤에 김면이 우현(牛峴)을 지키고 있다가 여러 왜적들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있음을 듣고는 드디어 그곳으로 달려갔다. 공이 이르자 인근 고을의 군사들이 모두 모여들어 힘을 합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니, 왜적들이 퇴각하였다.
창원(昌原)에 있던 왜적들이 공이 진주를 떠나 진주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진해(鎭海)에 있는 왜적과 함께 힘을 합쳐 쳐들어왔다. 공은 단성(丹城)에 이르러 함양(咸陽) 등 네 고을의 군사를 모두 동원해 구원하게 하였으며, 김시민에게 신칙하여 굳건히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곽재우 역시 이보다 앞서 성안에 들어가 있게 하였으므로 군세(軍勢)가 자못 성하였다. 이에 왜적들이 남강(南江)에 이르러서는 감히 다가오지 못하였다. 공이 뒤이어서 이르자 여러 장수들이 더욱더 공의 명령을 따랐으므로 왜적들이 패주하여 드디어 사천(泗川), 진해(鎭海), 고성(固城) 등 여러 고을을 회복하였다. 또 곽재우 등으로 하여금 현풍(玄風), 창녕(昌寧), 영산(靈山) 세 고을의 왜적들을 격퇴하게 하였으므로, 낙동강의 좌우가 이로부터 비로소 서로 통하였다.
당초에 관찰사 김수(金睟)가 조처하는 일이 조급하고 요란하여 뭇사람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서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군병을 다시 편성하였는데, 의병장에게 예속되어 있던 군사들을 대부분 빼앗아 간 탓에 사람들의 노여움이 더욱 격해졌다. 이에 곽재우가 격문(檄文)을 보내고는 김수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수가 군사를 풀어 자신을 방비한 다음 곽재우가 발호(跋扈)한다고 아뢰어, 일이 장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공은 곽재우에게 글을 보내어 의리로써 깨우치니, 곽재우가 크게 깨닫고는 즉시 왜적에게 포위되어 있던 진주로 달려가 구원하였다. 공이 또 김수를 조정해서 그로 하여금 유감을 풀고 함께 일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조정에서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곽재우를 패역(悖逆)으로 몰아 처형할 경우 형벌을 잘못 시행해서 온 도내의 인심을 잃을까 염려하였다. 이에 즉시 사유를 갖추어 치계해서 드디어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이해 가을에 행조(行朝)에서 공을 경상좌도 관찰사로 삼았다. 그러자 사민(士民)들이 길을 막고는 말하기를, “공이 떠나고 나면 의병들이 흩어져서 영남을 보존할 수가 없게 됩니다. 공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사민들이 이미 공을 억지로 머물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험한 길을 뚫고서 행재소(行在所)로 가 진소(陳疏)하니, 경상우도 관찰사로 바꾸어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창원에 있는 왜적들이 부산과 김해에 있는 여러 왜적들과 합세하여 진주에서의 패배를 갚으려고 하였다. 이때 김시민(金時敏)이 이미 진주 목사로 승진되었으므로 공은 목숨을 바쳐서 나라의 은혜를 갚으라는 뜻으로 격려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명을 전하여 힘을 합하여 방어하거나 강가에서 군세(軍勢)를 과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결사대(決死隊)를 모집해 활과 화살을 많이 싸 들고 밤중을 틈타 성안으로 숨어 들어가게 하였으며, 장수와 사졸들을 격려해 죽음으로써 지키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들 감동하여 떨쳐 일어났으며, 김시민이 또 많은 방략(方略)을 써서 방어하였다. 이에 왜적들이 7일 밤낮을 계속해서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한 채 시체를 쌓아 놓고 불태워 버린 다음 도망쳤다.
겨울에 상이 공의 공적을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제수하였다. 공은 곤수(閫帥)의 임무를 맡은 이래로 군무(軍務)를 처리함에 있어서 노심초사하면서 밤낮으로 쉬지 않았는데, 공문서를 작성하고 결정을 내림에 있어 아무리 자질구레한 것이더라도 반드시 친히 살펴보았다.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번거롭게 한다고 간하자, 공이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우리들의 잘못이다. 죽어도 속죄할 수가 없는데, 수고로운 것을 어찌 감히 꺼리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병란과 흉년이 있은 뒤끝에 역질(疫疾)마저 만연하여 죽는 백성들이 줄을 이었으므로 달려가 이들을 진구(賑救)하느라 더욱더 초췌해졌으며, 심지어는 밥을 먹을 적에 문득 숟가락을 떨구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나라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몸을 보중하기를 청하니, 공이 이르기를, “저절로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아서 그러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방문을 닫아걸고 공무를 보아서 역질 기운을 피할 것을 청하니, 공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약을 물리치고 먹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내 병은 약을 먹고 나을 병이 아니다.” 하였다.
그때 아들 역(湙)이 옆방에서 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는데, 한 번도 병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또 측실 부인이 근처에 와 살고 있으면서 여종을 보내어 병문안을 하자, 공은 손을 저어 내보내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오직 나라를 걱정하는 한 생각만을 마음속에서 잊지 않았다. 비록 이미 혼미하여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가느다란 목소리로 꿈결처럼 하는 말들이 모두 나랏일에 관한 것들이었다.
계사년(1593, 선조26) 4월에 진주의 공관(公館)에서 졸(卒)하니, 나이가 56세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에 진주성이 함락되어 낙동강 오른쪽도 모두 무너졌다. 아,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공의 친구인 박성(朴惺)과 이로(李魯)는 처음부터 항상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공과 더불어 생활을 같이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초상 치르는 것을 주관하여 지리산(智異山) 기슭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큰아들 집(潗)이 사잇길을 통해 남쪽으로 와 산속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12월에 안동부(安東府) 북쪽의 가수천(嘉樹川)에 있는 오향(午向)의 언덕에 귀장(歸葬)하였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조정에서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공(錄功)하고 한 자급을 올렸으며, 이조 참판을 추증하였다.
공은 천부적인 자질이 영특하고 시원시원하였으며, 성품이 강하고 방정하였다. 강개하고 격앙(激昂)하여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어서는 더욱더 스스로 분발하고 가다듬어서 몸가짐을 단속하고 뜻을 독실하게 하는 데에 힘을 썼다.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평생에 걸쳐 얻은 한마디 말은, ‘나의 허물을 공격하는 자는 나의 스승이다.〔攻吾過者 乃吾師〕’라는 말이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무자기(毋自欺)’ 세 글자는 모름지기 종신토록 가슴속에 새겨 두어야 한다.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함에 있어서 한 번이라도 성실치 못하면 모두가 거짓인 것이다.” 하였다. 또 ‘관홍(寬弘)’이라는 두 글자를 벽 위에다가 크게 써 붙여 놓고는 가죽을 차고 다니는 뜻을 붙였다.
염락(濂洛)의 여러 책들에 이르러서는 좋아하지 않는 책이 없었으나, 특히 퇴계 이 선생이 절요(節要)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좋아하였는데, 마음을 가라앉혀 음미하면서 침식까지 잊을 정도였으며,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실천하여 몸가짐의 표준으로 삼았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나아간 바가 날이 갈수록 평탄하고 신실해져서 다시는 모난 기상이 없이 진실하게 되었으며, 쌓은 것이 갈수록 심후해지고 발하는 것이 갈수록 밝게 빛났다.
일에 임하여 실행함에 있어서는 오직 의리에 있어서 어떠하냐만 보았는바, 의리에 있어서 행해야 할 바이면 주저하지 않고 담당해 행하였으며, 이해와 화복은 도외시한 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험하고 어려운 지경에 처해서 살고 죽는 것이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달려 있더라도 겁내지 않고 흔들리지 않은 채 정신과 기백을 더욱더 가다듬었다. 그리하여 종시 수립한 것이 우뚝하여 다른 사람이 능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증자(曾子)가 이른 바 “대절(大節)에 임하여서도 빼앗을 수 없다.”라고 한 것이나, 소씨(蘇氏)가 이른 바, “충성은 임금의 노여움을 범하고 용기는 삼군(三軍)의 군사를 빼앗는다.”라고 한 것은, 천하의 큰 용기가 있는 자가 아니면 누가 능히 여기에 참여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은 여기에 거의 부끄러움이 없었다.
마음을 세움에 이르러서는 공평하고 관대하게 하기를 위주로 하였고, 논의를 함에 있어서는 편당(偏黨)을 짓는 것을 경계하였다. 바야흐로 조정의 의론이 분열되어 각자 서로 배척하였는데도 공은 홀로 이르기를, “자기와 당파가 다른 자라고 해서 모두 다 소인은 아니며, 자기와 당파가 같다고 해서 어찌 모두 군자이겠는가.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따지지 말고 어진가 어질지 않은가만을 보아 취하고 버릴 뿐이다.” 하니, 국론(國論)이 이로써 정해졌다.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서는 제생(諸生)들을 불러 타이르기를, “배우는 자가 힘쓸 것은 오직 글을 읽고 도를 강론하여 마음을 닦고 자신을 깨끗이 하는 것일 뿐, 조정의 시비는 관여할 바가 아니다. 만약 자신의 본분을 돌아보지 않은 채 성균관 안에서 서로 시사에 대해 떠들어 댈 경우, 군자에게 버림을 받을 것으로, 나라에서 인재를 기르는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지성으로 가르치면서 부박하고 조급한 풍조를 진정시키자, 선비들의 습속이 일변하였다. 세상에서 공에 대해 논하는 자들이 한갓 공의 정직하고 굳건한 면을 흠모하기만 할 뿐, 마음속에 간직한 바가 관대하고 공평하며 측은해함이 이와 같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 공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항상 선부인(先夫人)을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통한으로 여겼다. 이에 학문을 배우러 가거나 벼슬살이를 하러 가는 때를 제외하고는 판서공(判書公)의 곁을 잠시도 떠난 적이 없이 공경하면서 봉양하는 도리를 다하였다. 판서공의 나이가 81세가 되어 병이 오래가자, 여러 형제들과 더불어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직접 약과 음식을 맛보았다. 초상을 치름에 있어 슬픔을 다하였으니, 빈(殯)을 하기 전에는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으며,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우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이미 장사를 지내고는 묘 곁에서 여묘살이를 하면서 최질(衰絰)을 벗은 적이 없었으며 집안일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었다.
공은 친족 간의 우애가 독실하였다. 판서공이, 공이 가산(家産)을 일구기를 힘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별도로 노비를 떼어 주자, 굳이 사양하면서 가난한 형제들에게 양보하였다. 큰누이가 남편을 잃고 통곡하다가 몸이 상해 죽자 고아가 된 두 어린아이들이 외가에 와서 살았다. 이에 공은 가르치고 기르기를 모두 지극하게 해 자기 자식과 차별을 두지 않았다. 한 누이동생이 가난하여 가산이 없는 탓에 밥을 지을 여종이 없자 여종을 떼어 주었으며, 얼숙(孼叔)이 밥을 직접 지어서 먹자 그에게도 여종을 떼어 주었다. 또 종제(從弟)들이 어려서 고아가 되어 의탁할 데가 없게 되자, 정성껏 돌보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였다. 내외의 여러 친족들 가운데 스스로 먹고살 수 없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다 떼어 주면서 돌보아 주었다. 그러면서 집안의 재산이 다 없어져도 괘념치 않았다.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엄하여 법도가 있었다. 매번 초하루와 보름이면 자제들로 하여금 순서대로 서서 참배(參拜)하게 하여 한결같이 사마공(司馬公)의 《가의(家儀)》와 같게 하였으며, 노비들 역시 정조(正朝)에 절하게 하였다. 이에 온 집안의 크고 작은 사람들이 모두 예로써 어른을 섬길 줄 알아 집안이 질서가 있었다. 그리고 봉선의(奉先儀) 및 길흉경조(吉凶慶弔)에 관한 의식(儀式)을 저술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설을 근본으로 삼고 여러 유신(儒臣)들의 의론을 참고하여, 예속(禮俗)이 서로 맞고 정문(情文)이 모두 갖추어지게 한 다음, 자제들로 하여금 이를 배워 행하도록 하였다.
청성산(靑城山)의 낙동강 강물을 굽어볼 수 있는 곳에다가 집을 짓고 석문정사(石門精舍)라고 편액(扁額)을 내건 다음, 그 안에 단정히 앉아 있으매 뜻을 얻은 즐거움이 무럭무럭 생겨났다. 후생들 가운데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되풀이하여 설명하고 온 마음을 다 기울여 본말(本末)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 주었는데, 매번 의(義)와 이(利)를 판별하는 것을 첫 번째 의리로 삼았다. 일찍이 여러 아들들에게 검(劍)을 나누어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이 나쁜 생각이 일어날 때를 만나면 이 칼로 단번에 잘라 버리기 바란다.” 하였다.
공은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 험하고 어려운 글을 짓기를 일삼지 않아 평이하고 아름다웠다. 이에 글을 읽는 자들이 어질고 의로운 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공이 저술한 소차(疏箚)나 시문(詩文)은 모두 병화(兵火)에 없어졌으며, 지금은 단지 유고(遺稿) 몇 권과 《해사록(海槎錄)》 세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고을의 선비들이 공이 살던 곳인 임하현(臨河縣)의 서쪽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향사(享祀)를 올렸으며, 뒤에는 여강(廬江)에 있는 퇴계 이 선생의 사당에 배향(配享)하였다.
공의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권씨(權氏)는 본이 안동(安東)으로,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권행(權幸)의 후손이며, 산계(散階)에 있었던 권덕봉(權德鳳)의 따님이다. 정숙한 덕이 있어 공을 섬긴 40년 동안에 공경하고 삼가기를 하루같이 하였으며, 무슨 일인가를 할 적에는 반드시 의리에 있어서 불가한 점은 없는가를 따지면서, 헤아려 보고 여쭤 본 다음에 행하였다. 공이 죽은 뒤 30년 동안을 예법(禮法)으로써 문호(門戶)를 지켜 어머니로서의 도를 크게 얻었다. 공과 같은 해인 무술년(1538, 중종33)에 태어나 85세의 수를 누리고 죽어 공의 묘 왼쪽에 부장(祔葬)되었다.
아들 셋을 두었다. 장남 집(潗)은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이고, 나머지 두 아들은 역(湙)과 굉(浤)이다. 딸은 셋을 두었다. 장녀는 장사랑(將仕郞) 홍수약(洪守約)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경주 부윤(慶州府尹) 권태일(權泰一)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김영조(金榮祖)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의 아들은 넷인데, 잠(潛), 심(深), 침(沈), 명(溟)이며, 딸은 둘로 장녀는 이사첨(李士瞻)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정연종(鄭連宗)에게 시집갔다. 집은 아들 넷을 낳았는데, 시추(是樞)는 생원(生員)이고, 시권(是權)은 진사(進士)이고, 아래는 시강(是杠)과 시절(是梲)이다. 딸은 넷으로, 장녀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오여벌(吳汝橃)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김연조(金延祖)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권상충(權尙忠)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김석중(金錫重)에게 시집갔다. 역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권태정(權泰精)에게 시집갔으며, 측실 아들은 시가(是榎)이다. 굉은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시절을 후사로 삼았으며, 딸은 둘로, 장녀는 생원 김응조(金應祖)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진사 신열도(申悅道)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손(孫)과 증손(曾孫)은 남녀를 합하여 모두 100여 명이다.
세마(洗馬) 집(潗)이, 한강(寒岡 정구(鄭逑))이 찬한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 주면서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되어 무덤 가의 나무가 이미 굵어졌는데도 묘비를 세우지 못하고 있기에 불초한 제가 항상 두렵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지금 다행히도 행적을 서술한 글이 한강 어른의 손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 이를 근거로 하여 묘비명을 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나는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부탁하였으므로, 드디어 행장을 상고해 그 가운데에서 중요한 것만을 추려서 쓴 다음, 이어 명(銘)을 지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성께서 남겨 놓은 말이 있으니 / 先聖有言
굳센 사람 보지 못했다 하셨네 / 未見剛者
옛날에도 그런 사람 드물었거늘 / 在古鮮能
더군다나 세도 나쁜 오늘날에랴 / 況今愈下
열렬하고 열렬했던 공 생각하니 / 烈烈惟公
강건함은 하늘에서 타고난 거네 / 强矯天出
공이 품은 뜻과 기개 의연하여서 / 志氣毅然
그 누구도 굴복시킬 수가 없었네 / 物莫能屈
홀 단정히 들고 조정에 있을 때엔 / 端笏治朝
그 곧음은 화살과도 같이 곧았네 / 其直如矢
어떤 때는 벼락치듯 천둥 울리어 / 或震之霆
비창을 잃게 하지 아니하였네
/ 不喪其匕
고관들을 법대로 다 처리했나니 / 法行于貴
누가 감히 공의 바름 범하였겠나 / 孰敢干正
마치 범이 큰길 나와 포효를 하매 / 若虎在逵
여우 따위 멀리 숨는 거와 같았네 / 狐狸遠屛
깃발 활짝 펼치고서 바다 건넘에 / 張旜過海
사신 부절 손에 굳게 잡고 갔다네 / 龍節在手
양후를 붙잡아서 묶어 놓고는 / 約束陽侯
육지 가듯 거센 풍랑 속을 갔다네 / 平陸鯨颶
섬 오랑캐 마음 몹시 교활하여서 / 蠻奴孔狡
갖가지로 우리 측을 시험하였네 / 嘗我萬方
우리들을 모욕하고 위협하면서 / 侮我惴我
제멋대로 방자하게 날뛰었다네 / 肆厥跳踉
공께서는 그들 보길 하찮게 여겨 / 公視若無
털끝조차 흔들리지 아니하였네 / 不動毛髮
의기 떨쳐 꾸짖는 말 몹시 엄하매 / 義奮言厲
흉악한 저 오랑캐들 혼 다 나갔네 / 兇醜氣奪
평탄한 건 끝내 험함 되는 법이라 / 無平不陂
전란으로 나라 모두 쪼개어졌네 / 國刳於兵
온 나라가 순식간에 궤멸되어서 / 滄海橫潰
땅과 하늘 무너지고 기울어졌네 / 地墊天傾
공께서는 황하수의 지주가 되어 / 公爲砥柱
우뚝하니 동남쪽을 지키었다네 / 屹然東南
칼 잡고서 피눈물을 주룩 흘리며 / 仗劍沫血
이 병란을 평정하길 맹서하였네 / 誓亂是戡
기운과 힘 고갈되고 다 빠진 탓에 / 氣殫力竭
중간에서 몸 병들어 죽고 말았네 / 中道而斃
어찌하여 지니신 덕 굳건했는데 / 何德之剛
목숨은 또 그렇게도 연약하였나 / 而命之脆
지난날에 공이 겪은 온갖 어려움 / 公昔百艱
그게 어찌 하늘이 공 막은 거겠나 / 天豈公阨
뜨건 불로 옥을 활활 불태우면서 / 烈火燒玉
공의 덕을 시험하여 본 거였었네 / 乃以試德
어찌하여 좀 더 오래 살게 하여서 / 胡不少延
큰 임무를 맡겨 주지 아니하였나 / 降之大任
누린 복록 적었지만 이름 높으니 / 嗇祿豐名
하늘의 뜻 분명하게 알 수가 있네 / 天意則審
안동이라 가수천의 이 언덕에는 / 嘉樹之原
공의 무덤 봉긋하니 솟아 있다네 / 宰如其阡
공의 몸은 여기 이곳 남아 있지만 / 公形在此
공의 기백 푸른 하늘 위에 있다네 / 公氣在天


 

[주D-001]선기옥형(璿璣玉衡) : 혼천의(渾天儀)라고도 한다. 해ㆍ달ㆍ별의 천상(天象)을 그려서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기계인데, 사각(四脚)의 틀 위에 올려 놓고 회전시키면서 관측하도록 되어 있다.
[주D-002]사가독서(賜暇讀書) : 장래가 촉망되는 관원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글을 읽게 하는 제도이다. 세종 8년(1426)에 처음으로 실시하였는데, 이때에는 집이나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그 뒤 성종 때 마포(麻浦)의 한강 가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하였고, 중종 때에는 동대문 근처의 정업원(淨業院)을 독서당으로 만들었다가 중종 12년(1517)에 두모포의 정자를 고쳐서 독서당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고 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한강의 별영(別營)을 독서당으로 삼았다.
[주D-003]호담암(胡澹庵) : 송(宋)나라 사람인 호전(胡銓)으로, 자가 방형(邦衡)이고 호가 담암이며, 담재노인(澹齋老人)이라고도 한다. 고종(高宗)을 섬겨 벼슬이 공부시랑(工部侍郞)에 이르렀으며, 상소문을 짓는 데 아주 뛰어나 왕륜(王倫), 진회(秦檜) 등을 논박한 상소문이 있다. 또한 금(金)나라와의 화의(和議)에 반대하여 “만약 화의가 성사된다면 소조정(小朝廷)이 되는 것이니, 소조정에서 구차하게 살아남기보다는 차라리 물에 빠져 죽겠다.”라고 하였다. 저서로는 《담암집(澹庵集)》이 있다.
[주D-004]가죽을 …… 뜻 : 성질이 조급한 자가 부드러운 가죽을 차고 다니면서 자신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한(漢)나라의 서문표(西門豹)가 성질이 몹시 급하였으므로 가죽을 차고 다니면서 자신의 성질을 누그러뜨렸다. 《韓非子 觀行》
[주D-005]염락(濂洛)의 여러 책 : 주자(周子)와 정자(程子)의 성리학에 관한 책들을 말한다. 염은 염계(濂溪)로 송나라의 성리학자인 주돈이(周敦頤)가 살던 곳이고, 낙은 낙양(洛陽)으로 정이(程頤)가 살던 곳이다.
[주D-006]산계(散階) : 이름만 있고 직무는 없는 벼슬의 품계이다.
[주D-007]어떤 …… 아니하였네 : 교령(敎令)이 엄명하여 종묘의 제사를 폐하지 않게 하였다는 뜻이다. 비창(匕鬯)은 종묘에 제사 지낼 때 쓰는 제기(祭器)이다. 《주역》 진괘(震卦)에, “천둥소리가 백 리 밖까지 들리니 비창을 잃지 않았도다.〔震驚百里 不喪匕鬯〕” 하였다.
[주D-008]양후(陽侯) : 고대의 전설 속에 나오는 파도 신의 이름이다.
[주D-009]지주(砥柱) : 삼문협(三門峽)을 통해 흐르는 황하의 한복판에 있는 산 이름으로, 황하의 거센 물결에도 굳건하게 서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난세(亂世)에 절조를 지킨다는 뜻으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