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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최공 문성공 13세손 낙남공 휘 산휘 관련자료

아베베1 2013. 8. 31. 12:21

 

 안렴사공파

 처사   휘 심     문성공 11세손 (묘갈명 )        

 인제공 휘 현    문성공 12세손

 낙남공 휘 산휘 문성공 13세손  

 

 

 

 

 


여헌선생문집 제12권
 비명(碑銘) 묘갈(墓碣) 묘지(墓誌)
처사 최공(崔公)의 묘갈명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시호가 문성공(文成公)인 최아(崔阿)는 전주인(全州人)이다. 그 후손에 택(澤)이란 분이 있었는데 처음으로 영남의 사천(泗川)으로 이거(移居)하였다. 3대에 휘 수지(水智)란 분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그쳤는데, 손자인 좌윤(左尹) 응룡(應龍)의 귀함으로 인하여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승지는 뒤에 해평 김씨(海平金氏)에게 장가드니, 바로 고려 때 벽상공신(壁上功臣)인 훤술(萱述)의 후손이며 교도(敎導)인 유사(由舍)의 따님이었다. 인하여 강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문헌의 유풍을 좋아하여 마침내 고을의 아래 마을에 터를 정하여 거주하였다.
김씨 소생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이회(以淮)인바 음직으로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에 보임되었다. 주부는 성산 이씨(星山李氏)에게 장가들어 치운(致雲)을 낳았는바, 재주가 있었으나 이름을 이루지 못하고 장사랑(將仕郞) 참봉(參奉)을 받았다. 참봉은 김해 허씨(金海許氏) 생원(生員) 유(裕)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았으니, 공이 바로 둘째 아들이다.
공은 휘가 심(深)이고 자가 모(某)이다. 어려서 백씨(伯氏)인 진사 해(海)를 따라 유학(遊學)하니, 더불어 사귄 벗이 모두 상주(尙州), 성주(星州), 선산(善山)의 유명한 선비들이었다. 이 때 상사(上舍 진사를 가리킴) 노수함(盧守諴)이 성리잠명(性理箴銘) 한 책을 초(抄)하여 써 주니, 공은 항상 이것을 외고 그치지 않았다.
공은 학문할 적에 널리 섭렵함을 힘쓰지 않고 오직 사서(四書)에 전공하여 겨울 밤이면 언제나 얼음이 언 샘물을 깨서 차가운 물로 세수하고 양치질하여 졸음을 깨곤 하였는데,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것이 병의 근원이 되어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이미 고질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두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급히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마침내 고요히 거처하여 병을 요양하는 것으로 뜻을 삼았다.
김진락당(金眞樂堂)이 욕심을 끊고 희노(喜怒)를 삼가며 언어를 적게 한다는 등의 긴요한 법을 듣고 공은 이것을 스스로 지켰다. 친구들이 때로 찾아오면 공은 방으로 이끌고 들어가 대략 한훤(寒暄 안부를 가리킴)을 펼 뿐이었으며, 혹 동네 사람이나 친족들이 굳이 초청하면 비록 억지로 가더라도 하루 종일 앉아 있고 말씀하지 않았으며 자리에 시끄럽게 떠드는 자가 있으면 눈을 감고 졸곤하였다. 사람 중에 도리가 아닌 것으로 와서 침해하는 자가 있으면 더불어 따지지 아니하여 마침내 청렴하고 꼿꼿한 지조를 지켰다.
이웃에 어린아이들이 수업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조용히 인도하여 스스로 이해하게 하고 잡기(雜技)와 장난과 해학(諧謔)을 금하였다. 혹 이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준엄하게 끊으며 말씀하기를, “네 이미 스스로 포기하고 또 함께 배우는 자들을 방해하니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였다.
공은 성품이 자상(慈祥)하고 고요하여 세상의 재미에 담박하였으며, 공손하고 신중하고 과묵하여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가로이 수양한 지 40여 년에 시종여일(始終如一)하였는데 병세가 또한 차츰 감하여 이빨과 머리가 빠지지 않고 정신이 소모되지 않아 항상 깨어 있는 뜻이 있었다.
송산(松山)에 집터를 정하고는 스스로 송암(松庵)이라 호하고 문밖을 나가지 아니하여 천수(天壽)를 마쳤다. 공은 정덕(正德) 임신년(1512,중종7)에 출생하여 만력(萬曆) 기축년(1589,선조22)에 별세하니, 향년이 78세였다.
공이 가정에서 자제들을 훈계한 내용을 기록한 책을 살펴보면 평소 때에 따르고 일에 따라 항상 마음을 일깨워 경계하고 권면(勸勉)한 것이 모두 옛 성현의 착실하고 긴요한 말씀이었으며, 시속에서 부형들이 자제들을 가르치고 인도한 것이 아니었다. 임종할 때에 이르러서도 다른 가르침은 없었고 다만 “거처하기를 공손히 하고 일을 잡기를 공경히 하고 사람 대하기를 충성스럽게 하여야 하니, 이것을 비록 오랑캐 나라에 가더라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으로 거듭 당부할 뿐이었다. 이것을 아울러 관찰해 보면 공은 아마도 은군자(隱君子)의 무리일 것이다.
공은 먼저 동래 정씨(東萊鄭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일찍 죽었고, 뒤이어 덕양 기씨(德陽奇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또한 일찍 죽었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으나 후사(後嗣)가 없음을 서글퍼하여 마침내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선비인 지원(智源)의 따님에게 삼취(三娶)하니, 바로 정언(正言) 맹전(孟專)의 증손이었다. 정언은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으로 눈이 멀었다고 칭탁하고 벼슬하지 않았는바, 이 의리는 세상에 함께 전해 온다.
이씨 부인 또한 자상하고 인자하여 비록 종들이라도 함부로 꾸짖지 아니하여 어루만지고 구휼함을 극진히 하였으며 이웃과 친족들을 후대하고 화목하여, 가산의 있고 없음으로 베푸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별세했을 때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겼으니, 참으로 공의 배필이라 할 것이다. 신미년(1571,선조4)에 나이 48세로 별세하니, 공의 2남 1녀는 모두 이씨 부인의 소생이다.
장남 흔(昕)은 일찍 죽었고 차남 현(晛)이 실로 가정 교훈을 이어받았는바, 상상(上庠 성균관을 가리킴)에 오를 때에 공이 생존하여 이것을 보았다. 그 후 병오년(1606,선조39)에 문과에 급제하여 얼마 후 정언(正言)으로 있다가 견책을 당하여 현재 집에 있다. 딸은 충의위(忠義衛) 이경록(李景祿)에게 출가하였다. 정언은 의성 김씨(義城金氏) 부사(府使) 복일(復一)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아들은 산휘(山輝)인데 현재 학업을 부지런히 힘쓰고 있다. 산휘는 강릉 주씨(江陵朱氏)로 무과 급제하여 봉사(奉事)인 응방(應邦)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았으니, 인박(因博), 인후(因厚), 인적(因積)이고 한 딸은 어리다. 충의는 세 아들을 낳았으니, 원근(遠根), 원수(遠樹), 원지(遠枝)인데 큰아들과 막내아들은 요절하였고 원수는 안동 고씨(安東高氏)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공의 묘소는 처음에 묵어평(默語坪)에 있었고 이씨 부인의 묘소는 오리동(梧里洞)에 있었는데, 을묘년에 함께 옮겨 상림산(上林山) 계좌 정향(癸坐丁向)의 언덕에 장례하였으며, 그 후 몇 년 만에 비갈을 세웠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종적을 감추고 병을 요양하였으나 / 藏踪養病
실은 덕을 기른 것이었네 / 實惟養德
세상의 분화함에 뜻하지 않고 / 絶意紛華
한결같이 담박함에 뜻하였네 / 一味淡泊
사람들과 다투지 않아 / 不與人爭
치욕을 멀리하였으니 / 能遠恥辱
편안히 한 것은 분수였고 / 所安者分
터전으로 쌓은 것은 복받는 일이었네 / 所基者福
간곡한 가훈을 / 丁寧家訓
참되고 간절하게 경계하였네 / 眞切警勅
반드시 성인의 격언을 인용하니 / 動引格言
모두 몸과 마음을 바루는 약석이었네 / 無非藥石
뜻을 잇는 훌륭한 아들 있어 / 繼志有嗣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마음 받들어 지킨다오 / 奉持兢惕
비석을 새겨 후세에 보이니 / 鐫示來後
영원히 훌륭한 모범이 되리라 / 宜永作式


 


 

 

 

 
 묵재일기 1(黙齋日記一)
치역론변 (治逆論辨)

○ 계해년(1623, 인조 1) 5월. 폐인 지(祬 광해군의 아들)가 땅을 파고 도망쳐 나간 변고가 있었는데, 공은 판의금(判義禁)으로서 그 옥사를 다스렸다. 아뢰기를,
“폐인이 전하에게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으니, 임금의 명을 피해 도망친 것은 마땅히 처치가 있어야 하겠으며, 또한 나라에 군림한 것과는 명분과 지위가 같지 않으니, 의리로 따져도 결코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빨리 대신과 삼사에게 명하여 자전의 뜻을 따라 받들어 화근을 끊어버리옵소서.”
하였다.
○ 6월 5일. 공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합사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폐인 부자에게 대우한 것이 지극히 후하다 하겠는데, 지(祬)가 스스로 원한을 품어 땅을 파고 도망쳐 나왔으므로, 전일 묘당ㆍ재신ㆍ삼사가 똑같이 죄주라고 청하였습니다. 그 후에 성상의 불쌍히 여기시는 하교가 계시자, 한 간관이 갑자기 의견을 바꾸어 인피했습니다. 이로 인해 양사에서 모두 그 말을 번복하여 부산하게 사퇴하게 된 것입니다.
대간이 일을 의논하는 데는 오직 각자의 소견을 아뢸 뿐인데, 어찌 오늘은 모두 옳고 내일은 모두 잘못된 것이었겠습니까? 전하께서 간곡히 용서하는 것은 비록 지극한 은의(恩義)라고 할지라도 모든 신하가 큰 의리로 결단하기를 청하는 것이 어찌 왕법의 마땅한 바가 아니겠습니까. 속히 공론을 따라 여러 의심을 해소시키고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하옵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겠소.”
하였다.
이때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은의를 온전하게 할 것을 힘껏 주장하는 까닭에, 옥당에서 속히 따르라는 장계를 하지 않으므로, 공은 양사를 인솔하고 피혐하였다. 그래서 정경세는 인혐하여 들어가고, 옥당에서 처치하기를, ‘의친(議親)한다는 의논은 사정(事情)에 오활하며, 대의가 있는 일에는 사정(私情)은 스스로 끊어진다.’는 것으로 말하고 양사를 아울러 파직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때에 이명(李溟)은 황해 감사로서 이름이 통문(通文) 중에 나왔으므로 잡혀 와서 형을 받게 되었는데, 추안이 이미 내리자, 공은 아뢰기를,
“이명의 사람됨은 폐모론이 바야흐로 일어나던 날, 이항복을 구제하다가 거듭 탄핵을 당하였고, 또 정온(鄭蘊)을 사주하였다는 것으로써 흉적에게 미움을 받아 삭출까지 되었습니다. 최기(崔沂)가 원통하게 죽은 것은 국인(國人)이 분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 형 이충(李冲)이 그 첩을 위해 최기의 전답을 사서 경기의 농장으로 삼았는데, 그 형이 죽은 후에 이명은 접답을 최기의 아내에게 돌려주어 의지하고 보전할 자료로 삼게 했습니다. 이명의 마음가짐이 대개 이와 같은데, 불행히 오늘날에 강화옥사에 연루되었습니다.
폐인의 여비 막덕(莫德)이 가진 서간의 안팎에 혹은 ‘해서순상(海西巡相)’이라고 쓰이기도 하고, 혹은 ‘황해감영(黃海監營)’이라고 쓰이기도 하였으며, 그 편지의 말단에는 ‘서경 병로(西坰病老)……’라고 쓰였는데, 이 말은 막덕이 스스로 조작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이미 막덕이 스스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면, 그 편지는 위조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편지가 위조한 것이 분명하다면 이명의 죄 없음은 자연 밝게 나타나고, 폐인이 명경(名卿)의 별호를 빌어서 그 흉계를 꾸몄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듯합니다.
이명의 본정(本情)으로 말하더라도 이명은 폐조에서 10년동안이나 버림을 받다가 그 말기에 겨우 황해 감사를 얻었으며, 우리 성조(聖朝)에서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별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없었으니, 신은 이리저리 생각해도 이명이 폐인과 더불어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은 도저히 인정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국청의 모든 신하의 소견도 다른 것이 없지 않으나 옥사를 다스리는 정규에 구애되어 감히 쉽게 아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혼자 죽음을 무릅쓰고 무리한 말을 올리니 황공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명은 역적 이름을 입었으니, 추관으로서는 감히 경솔히 의논할 수 없소. 그러나 아직 형추하지 말고 내일을 기다려 처리하오.”
하였다. 공은 또 차자를 올려 사직하기를,
“신은 예전 국청에서 큰 옥사에 있어서 사체를 돌보지 않고 편견을 고집하여 당돌하게 독계(獨啓)하여 전해오는 옛 규칙을 손상시켰으므로 위에서, 이명은 역적 이름을 입었으니 추관으로서는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하교하셨으니, 신은 놀랍고 두려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저 신의 소견은 전일 아뢴 바와 같기에 다시는 국청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양하지 말고 들어와서 참여하오.”
하였다. 이때에 유응시(柳應時)의 고변으로 인해 역옥이 크게 일어났는데, 기자헌(奇自獻)의 아들 준격(俊格) 또한 역모에 가담하였다. 공은 대사헌으로서 국청에 있었는데, 기자헌이 무오년(1618, 광해군 10) 수의(收議)에 절조를 세운 공으로써 그 자손에게 10대까지 죄를 용서해 주라는 말로 발론하고, 또 탑전에서 아뢰었다. 당시 의논은 공더러 역적을 구원한다고 배척했다. 공은 기자헌의 윤리를 붙잡은 공을 낱낱이 들어 차자를 지어서 장차 올리려 하였는데, 올리지는 못하였다.
○ 7월. 특명으로 공에게 이상(二相 찬성)을 제수하였다. 대개 양사에서 기자헌을 죄주라는 의논이 바야흐로 벌어졌는데, 공과는 소견이 맞지 않아, 대각(臺閣)에 오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특명이 내려진 것이다.
○ 10월. 역변이 또 일어났는데, 이유림(李有林)의 구초(口招)에 ‘장차 인성군(仁城君 선조의 일곱째 아들 공(珙))을 추대한다.’고 하였으나, 상은 특별히 묻지 말라고 명하였다. 공은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인성군은 일찍이 폐조가 수의할 때에는 시역하자는 의논을 올렸고, 정청(庭請)하던 날에는 종척(宗戚)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지금 또 숙부로 자칭하면서 대간을 꾸짖고 욕보이는 한편 모든 역적과 서로 통하여 비밀리 반역을 모의하였으니, 모자의 윤리와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끊었으니 용서할 수 없는 죄인데, 또 추대했다는 것마저 묻지 말라는 하교가 계시니, 장차 종묘사직에 헤아릴 수 없는 화를 열어놓게 되었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아뢰었으나 상은 비답하지 않았다. 공은 물러나와 두 차례나 정고(呈告)하였더니, 비답하기를,
“지금은 가벼운 병으로써 정고할 때가 아니니, 경은 직무를 살피시오.”
하였다. 세 번째 정고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할 사람으로서 이 어렵고 걱정스러운 시기에 세 차례나 정고하니, 나는 마음에 서운하오. 경은 모름지기 사직하지 말고 빨리 조리한 다음 출사하여 나의 소망에 부응하오.”
하였다.
같은 달 27일. 공은 ‘광해군은 한 나라에 군림을 하였어도 모후를 유폐했다고 하여, 폐위해서 강도에 안치시켰는데, 하물며 인성군은 왕자로서 군모(君母)를 시해하라고 청하였으니, 그 죄가 광해군보다 더한데, 더욱이 왕으로 추대한다는 설이 역적의 구초에 낭자하였으니, 죄없는 사람처럼 서울에 편히 쉬도록 할 수 없다.’고 여겨, 바로 차자를 올려 죄주기를 청하였다. 그 대략에,
“인성군이 대비와는 의리로 보면 임금과 신하이고, 그 친속으로 보면 어머니와 자식입니다. 이미 시역의 뜻으로써 의논을 올리고, 또 종척 수백 명을 거느리고 매일 전정(殿庭)을 메워 장황하고 흉악한 말로써 꼭 폐위하고야 말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주상께서 반정하고 대비께서 복위하던 날에는 마땅히 몸소 큰 도끼를 쥐고 대궐 아래서 명을 청하고 물의(物議)를 기다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버젓이 큰소리로 외치기를 죄없는 사람처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임금께 고하는 말까지도 숙부로 자처하고, 또 대간을 꾸짖고 욕하면서 서로 힐난하기를, 가까운 전례에 의하여 대비를 폐위한다는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대비를 폐위하고자 하였던 자가 누구인데 이에 감히 말을 일으킵니까? 그 교만하고 패악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간은 임금 보기를 제 몸만도 못하게 여기는가 하면 제 몸이 인성군에게 수모받은 것만을 분하게 생각하고 성상을 번거롭게 하여 수십 일 동안이나 논계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정지까지 하니, 대간이 일을 논하는 체통이 어찌 이러합니까.
무릇 국옥(鞫獄)의 체통은 오직 그 사실을 밝히고 진위를 분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추대한다는 말이 이미 역적의 구초(口招)에서 나왔으니, 끝까지 묻고 확실히 분변하여 만약 역적의 무리가 그의 이름을 이용하기 위해 속여서 아뢰었다면 마땅히 속히 그 죄를 놓아주어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속여서 아뢰는 행위가 성상의 아래에서는 행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하며, 만일 불행히 참으로 반역한 자취가 있다면 마땅히 정상을 살펴서 법률로 결단하여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간사한 꾀가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추대한다는 초사(招辭)를 덮어두고 묻지 않는다면 비록 죄없이 무고를 입었더라도 그 죄가 의심과 믿음의 중간에 있어서 스스로 밝혀낼 수 없을 것이니, 왕자된 자로서 어찌 그 마음에 편하겠습니까? 전하께서 광해군의 고질화된 폐단을 바로잡으려 한 것은 후일의 무궁한 걱정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16장으로 된 흉서에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칭 대장이라 하고 또 위조 인장을 찍었으니, 반드시 흉악한 큰 괴수가 서울 안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천조(天朝)의 사관(査官)이 조만간에 올 것이고, 오랑캐는 흉한 칼날을 번쩍이면서 침략을 노리고 있는데, 만약 이때에 죄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사관이 당도하거나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한다면, 반역하는 무리가 시기를 타서 내응하여 큰 난리를 일으킬 것입니다.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경지에 이른다면 전하께서 아무리 친속에 대한 은의를 보전하려 하여도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언책(言責)의 자리에 있지도 않고 국문하는 반열에 참여도 않으면서 이렇게 번잡한 말을 올리는 것은 일부러 준절한 의논을 해서 죄없는 왕자를 모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추대에 대한 것을 묻지 말라는 전하의 하교가 오늘날 옥사를 다스리는 체통도 아닐 뿐더러, 또한 후세에 난을 일으키는 조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신은 탑전에서 이미 아뢰고도 또 잊지 못하여 그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아! 삼사의 관원은 누가 전하의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입을 다물고 혀를 매놓은 듯이 감히 말을 못하고 한갓 자질구레한 일만 여러 가지로 들어서 책임만을 면하려 하는 것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신은 지난번에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대사헌 서성(徐渻)을 보고 논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써 두세 번 되풀이했으나, 서성은 우두커니 귀를 막은 듯이 한 말도 내지 않았습니다. 서성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삼사가 모두 그러했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만, 삼사에 과연 전하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자가 있습니까?
신은 의거하던 날 큰 의리를 들어 처치하지 못하고, 대사헌이 된 뒤에 비로소 그 수의(收議)를 보았습니다. 신이 대석(臺席)에서 여러번 이야기했는데, 동료들이 ‘폐세자(廢世子) 지(祬)와 아울러 의논할 수 없다.’ 하니, 신은 그 결과를 기다린 후에 논계하려고 했었으나, 마침 다른 직책으로 옮기게 되어 그대로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청컨대 당초에 의리를 밝게 보지 못한 신의 죄를 먼저 다스리고 다음으로 오늘날 입을 다물고 묵묵히 관망만 하는 삼사의 죄를 다스려서 신하가 되어 임금을 잊고 의리를 망각하는 폐단을 막으소서.”
하였으나, 상은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비망기에,
“우찬성 이귀가 아뢴 차자는 말이 극히 해괴하므로 내가 매우 괴이하게 여긴다. 이 다음에도 만일 이와 같은 상소를 올리면 정원은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그래서 삼사는 모두 피혐하여 대죄하니, 옥당이 상소하기를,
“지금은 대죄하는 중이므로 감히 처치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은 빨리 처치하라고 명하였다.
○ 갑자년(1624, 인조 2) 1월. 공은 우찬성으로 있었는데, 역변이 또 일어났다. 윤의립(尹義立)의 서얼 조카 인발(仁發) 등이 과거 공부를 한다고 핑계하고 인성의 집 근처에 모여서 이괄과 더불어 서로 통했다. 이우(李佑)와 문회(文晦)가 그 모의를 알고 장차 고변하려 할 즈음에, 인발이 그 일이 누설될 줄 알고 죽은 시체를 구해 얼굴 가죽을 벗긴 다음 이부현(梨府峴)에 두고는 인발의 시체라고 핑계대고 도망쳐 자취를 없앨 계획을 하였다. 문회 등이 훈신(勳臣)들에게 고변했으나, 발표하기를 어렵게 여겼다. 공은
“신하로서 이미 이 말을 들었으면, 고변했다는 비난을 들을지라도 화가 종묘사직에 박두하였는데, 혐의를 피해 덮어둘 수 없다.”
하고 문회 등을 머물러 두고, 군관을 발송하여 끌어댄 정찬(鄭燦)ㆍ정방열(鄭邦說)ㆍ한흔(韓訢)ㆍ한준철(韓浚哲) 등을 먼저 체포하였다.
그날 밤에 모든 훈신을 공의 집으로 불러모으고 또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을 청하니, 병으로 오지 못하고 그 아들 회일(會一)만을 보냈다. 그래서 여러 공들과 함께 그 말을 들은 다음 고변하게 하고, 또 여러 대장과 더불어 각자 군관을 거느리고 궐하(闕下)를 호위하였다.
이때에 날마다 추국을 하였으나 모든 역적들이 형장을 참고 항복하지 않았다. 그때 추관이 무고라고 여겨서 고변한 자 한흔을 죽이고, 또 문회와 이우 등을 아울러 죽여서 옥사를 뒤집을 계획을 하려고 했다. 공이 ‘옥사를 다스리는 초기에 고변한 자를 먼저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탑전에서 힘껏 아뢰어 죽이지를 못했다. 일이 점점 만연되어 기자헌(奇自獻) 등 30여 인이 체포되었고, 이괄의 아비도 끌려나왔다. 그런데 국청에서는 그 아들 전(栴)만을 잡기를 청하고, 이괄은 묻지 않았다. 공은 생각에, ‘이괄은 한 나라의 군병을 통솔하는 대장인데, 이제 역적이란 죄명으로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하면서, 그 아비는 강한 군병을 거느리고 외방에 있게 하니, 만약 반역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사랑하는 아들을 묶어 보내고 머리를 숙이면서 명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니, 그 관직을 갈고 아울러 잡아오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러다가 만약 일이 억울하거나 그릇되었다면, 도로 그 맡았던 관직에 다시 보직토록 함이 가하다.’고 여겨, 곧 이런 뜻으로 탑전에서 힘껏 아뢰되 심지어는 다투기까지 하였는데, 상께서는 너무 체면을 잃었다는 이유로 특명하여 추고하게 했다.
김원량(金元亮)은 본디 이괄과 서로 친하다. 이 때문에 여러 공들에게 힘껏 구명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공에게 편지하여, 이괄의 사정을 밝혔는데, 심지어는 당초에 인성군을 세우려고 의논한 일을 들어 바르다고 하고, 또 그 아들의 재주와 행실을 몹시 칭찬하면서 원통한 실상을 낱낱이 진술하고는 앞으로 사생을 같이 하고자 한다고까지 하였으나, 공은 끝내 듣지 않았다.
그런데 이괄이 마침내 선전관을 죽이고 한명련(韓明璉)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였다. 이괄이 반역했다는 글이 이르자, 조정과 시골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상은 즉시 공을 불러 인견하고 이르기를,
“경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이 후회되오. 경의 생각은 지금 적의 형세가 어떻다고 생각하시오.”
하니, 공은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원수(元帥)의 군사가 이미 황주(黃州)에서 패하였고, 관서(關西)의 병력이 이미 적을 소멸시키지 못했으니, 해서(海西)의 병력 역시 반드시 막아낼 수 없을 것이며, 해서가 또 실패한다면 경기의 병력도 결코 당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성안에 또 내응하는 사람이 많으니, 뜻밖의 변란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날을 위해서 계획한다면, 먼저 종묘사직과 대비ㆍ제전(諸殿)을 받들어 강도에 옮겨 모시고, 사대부의 가속으로서 피난하는 자 또한 금하지 말 것이며, 전하께서는 친히 삼군(三軍)을 독려하여 시기를 보아 적을 소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은 크게 옳다고 여겨 대신에게 물어보고 장차 거행하려 했었는데, 한쪽 의논에 저지를 당해 마침내 거행되지 못했다. 이때 김원량은 오히려 이괄이 반란하지 않았다고 하여, 스스로 가서 달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옥에 있는 여러 죄수를 국문할 겨를이 없다고 여러 논의가 내어다 베기를 청하니, 상은 윤허하였다. 공은 생각에, ‘시국이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죄없는 이를 한 사람이라도 죽이는 것은 왕자(王者)가 하지 않는 것이니, 그 원정(元情)을 받아서 처리해야 한다.’고 여겨, 탑전에서 아뢰고 힘껏 다투었으나 그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기자헌 등 38인이 일시에 처형되었다. 또 김원량은 일찍이 이괄이 서쪽으로 떠날 때에, 영변 판관을 시켜달라고 요청하고, 이제 또 빨리 가서 구원하기를 도모하였더니, 그가 모의함을 미리 알았다고 하여, 옥에 가두었다가 죽이기에 이르렀으며, 훈적(勳籍)도 깎아버렸다.
이때 적의 군사가 점점 다가왔는데, 도원수(都元帥)는 뒤에 있고 양서(兩西)의 여러 고을은 모두 풍문을 듣고 흩어졌다. 이중로(李重老) 등도 대탄(大灘)에서 함몰되므로 다시 믿을 곳이 없었다. 오직 이서(李曙)가 수천 명 군사를 거느리고 청석동(靑石洞)에 둔치고 있고, 이흥립(李興立)이 수원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임진강 상류를 수비할 뿐이었다.
상은, 공에게 강탄에 가서 점검하고 오라고 명하였다. 공이 조정을 떠날 때에 하교하기를,
“절제(節制)하는 곳이 많아서 모든 장수를 다 독려할 수 없으니, 빨리 점검하고 오도록 하시오.”
하였다.
○ 2월 7일. 공은 파주(坡州)를 향하여 떠났다. 벽제(碧蹄)에 이르니, 송도가 함락되어 파발의 길이 이미 끊어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날 저녁에 파주에 이르니, 최명길이 총독 부사(摠督府使)로서 앞서 송도로 갔었는데 적에게 쫓겨 겨우 몸만 빠져나와 밤중에 도로 파주에 이르렀다. 그는 공에게 이르기를,
“군사 없는 두 장수가 한 곳에 머물러 보았자 성패에 유익이 없을 것이니 종사관(從事官) 이식(李植)만 머물러 나와 일하도록 하고, 대감은 직책이 어영(御營)이니 빨리 가서 왕을 호위하여 예상 밖의 걱정에 대비하는 것이 옳겠소.”
하였다. 공은 강탄의 수비가 허술한데, 적병이 이미 임박했다는 말을 듣고, 아들 이시방을 보내 계달(啓達)하여 서울을 떠날 계획을 빨리 정하도록 하였다. 시방이 이날 정오에 대궐로 빨리 나아가 청대(請對)하니, 상은 곧 인견하고 적의 형세를 하문하였다. 이시방은 공의 말한 내용을 갖추 아뢰었다.
공은 또 막하인(幕下人) 한교(韓嶠)와 최무(崔茂) 등을 이흥립과 박효립(朴孝立)의 진중에 보내서 먼저 그 허실을 알아보니, 이흥립은 40리 밖에 진치고 있었으므로, 공은 먼저 임진으로 향하였는데, 길에서 한교를 만나 함께 갔다. 5리쯤 갔는데, 박효립이 사람을 시켜 급히 기별하기를.
“강탄을 지키던 군사가 이미 흩어져서 어찌할 수 없으니, 후퇴하여 산성을 지키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공은 최명길과 더불어 벽제 고개에 이르렀다. 최명길이 공에게 이르기를,
“대감은 직책이 어영으로 이번 길의 임무가 적간(摘奸)뿐이니, 빨리 돌아가서 호위해야 하고, 나는 명색이 총독이라 하면서 모든 장수를 독려하지 못했으니, 도로 경성으로 들어갈 수 없소. 마땅히 원수의 군중으로 나아가 전투를 독려하여 적을 격파해야 하겠소.”
하고, 드디어 되돌아갔다. 이때 적병은 이미 임진강을 건넜다. 공은 필마로 하고, 급히 궐하에 이르니 날이 벌써 깜깜하였다. 상은 공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편전으로 끌어들여 공의 손을 잡고,
“내가 경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이런 변란을 만났소. 계책을 장차 어떻게 해야 하오?”
하였다. 공은 70이 가까운 나이로 하루에 수백 리 길을 달려왔으니, 기운이 다해서 소리를 내어 대답할 수 없었다. 상은 내관(內官)에게 밥을 차려오게 하여 어전에서 먹게 하였다. 공은 아뢰기를,
“일이 이미 급박합니다. 반드시 오늘 저녁에 한강을 건너 적의 칼날을 피해야 합니다.”
하니, 상은 이날 밤 3경에 자전을 받들고 성을 떠났다. 이때에 영광 군수 원두표(元斗杓)와 금구 현령(金溝縣令) 이격(李格) 등이 각각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난리를 구하기 위해 왔다. 상은 도감군(都監軍)과 원두표 및 이격의 군사를 인솔하고 남쪽으로 내려갈 계획을 정하였다. 상이 한강에 도착하니, 시위하는 신하가 먼저 대비를 받들고 나왔는데, 밤이 깊고 급한 까닭에 향할 곳을 알지 못하여 잘못 강도로 가는 길로 향했다. 상은 오랫동안 강위에 멈추어서 받들고 오기를 기다려서 강을 건넜다.
이때에 여러 왕자가 다 따라왔는데, 역적 제(瑅)만은 간 곳이 없었다. 서울 안의 남녀가 물밀듯이 길을 메워 달려왔는데, 나룻배는 몹시 적고 적은 뒤를 쫓았다. 상은 모래톱에 멈추어서 여러 관원과 호위하는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렸다. 하늘은 이미 새벽이 되어가 사람은 모두 배가 고팠다. 종관(從官)이 간신히 쌀죽을 얻어 바쳤다. 아침에 과천에 이르니, 호남의 근왕병이 점점 모여서 꽤 군대의 모양을 이루었다. 사근현(沙斤峴)에 이르니, 날은 벌써 저물었다. 자전은 환후가 생겨서 오랫동안 멈추었다가 떠났는데, 밤중이 거의 되어서야 비로소 수원에 이르렀다. 이때 상 또한 편찮아 김자점ㆍ심명세(沈命世) 등이 직접 약과 미음을 올렸다. 이튿날 심기원을 한남 원수(漢南元帥)로 삼아 경기 각 고을의 군사를 모아서 적의 예봉을 막으라고 하고, 신경진은 도감병을 거느리고 뒤를 막도록 하였다.
이때 대가(大駕)가 한강을 건넌 지 2일이었는데, 적은 도성에 들어왔다. 명련(明璉)은 날쌘 기병으로서 바로 대가를 추격하려 하였으나, 이괄이 정지시켰다. 마침내 강을 건너지 않은 이괄은 역적 제(瑅)로서 임금을 삼고 장차 육조를 설치하려 하였다. 상이 공주(公州)에 이르니, 이괄은 안령(鞍嶺)에서 패배하고 이천(利川)으로 달아나다가 그 부하 기익헌(奇益獻)에게 베이게 되었다. 그리고 역적 제는 온 집안이 도망쳐 나가다가 한교에서 잡혀 결박되어 수부(帥府)에 송치되었다. 장만(張晩)과 이시발(李時發) 등은 구류시키고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려 하였는데, 심기원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미 절제의 명을 받았으니, 역적의 괴수를 잡았으면 마땅히 스스로 처치해야 하오. 어찌 반드시 조정이 환도(還都)하기를 기다려서 하늘의 베임을 늦추겠소.”
하고, 즉시 신경진과 더불어 군사의 위엄을 성대하게 차리고 베었다.
이때 대사헌 정엽(鄭曄) 등은 공이 한교ㆍ박효립과 소문만 듣고 도망쳤다는 것으로써 관직을 파하도록 청했다. 상은 비답하기를,
“도망친 장수를 어찌 파직에만 그치겠소. 오늘날 일을 논의하는 것이 그리도 구차한가.”
하였다. 옥당이 양사가 주객과 경중을 분변하지 못한다는 것으로써 아울러 체차하기를 청하자, 상은 윤허하였다. 대사간 장유 등은 아뢰기를,
“어영사(御營使) 이귀는 이미 강위에 가서 군사를 점검하라는 명을 받았으면, 모든 장수를 독려하여 힘껏 지켜서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한데, 적의 칼날이 이르기도 전에 먼저 스스로 도망쳐 천연의 요새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백의(白衣)로 호종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은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그래서 옥당 윤황(尹煌)ㆍ이목(李楘) 등이 차차를 올렸는데, 강탄의 실패로써 공에게 죄를 돌리며,
“종묘사직이 몽진(蒙塵)하고 임금의 수레가 도성을 떠나게 하였으니, 군문에서 효시(梟示)해도 귀신과 사람의 통분함을 쾌하게 못할 것인데, 양사에서 한교와 박효립 등에게만 형률로 죄주기를 청하였으니, 논의의 미약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귀도 한교ㆍ박효립과 함께 법률에 의거하여 죄를 정하여, 군률을 엄숙하게 하고 왕법을 바로잡도록 하옵소서.”
하니, 상은 비답하기를,
“무릇 죄는 각기 경중이 있는 것인데, 오늘날 의논은 경중을 분변하지 않고 아울러 무거운 법전만 시행하고자 하니, 그 뜻의 소재를 알지 못하겠다. 이 다음에는 이와 같은 의논을 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가 피혐하니, 비답하기를,
“옥당이 훈신을 모함한 말을 어찌 따질 것인가? 지금은 사퇴할 때가 아니니 사피하지 말라.”
하였다. 환도할 때에 미쳐서 전교하기를,
“이귀를 전일에 대간의 아뢴 대로 백의로 대가를 호종하게 하였는데 그는 당초에 군사를 거느린 장수가 아니었고, 지금은 또 대사면을 거쳤으니, 그대로 군관을 거느리고 호위하여 서울로 올라가라고 말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이귀에게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을 제수하라.”
하였다. 숙배한 다음 인견하였다. 때에 양사가 심기원과 신경진이 왕자를 제 마음대로 죽였다는 것으로써 잡아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차자를 올리기를,
“천하의 죄약은 반역보다 큰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마다 벨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역적 제(瑅)는 역적 이괄의 내응이 되어 천위(天位)를 빼앗으려 도모하였고 적이 패한 후에도 오히려 모든 장수에게 옹위되어 온 집안이 도망쳐 나갔습니다. 신하된 분수와 의리로써 잡히기만 하면, 위로 군부(君父)께 고하고 아래로 상사(上司)에게 고함을 기다리지 않고 죽이는 것이 옳습니다. 한교가 군신의 대의를 알지 못하여 잡은 지 수일 후에야 안사함(安士諴)과 더불어 수부(帥府)로 압송시켰으니, 그 사이에 혹 뜻밖의 변고가 있었다면 아무리 한교를 죄준다 하더라도 그 분함을 씻을 수 없었을 것인데, 다행히 한남 원수(漢南元帥) 심기원 등이 의리를 떨쳐서 제거하였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조금 낫게 하였던 것입니다. 한교는 한 노망한 신하이니 책망할 필요조차도 없거니와, 삼사에 이르러서는 전하의 신하가 되어 전기에 토벌하지 못하고 혹은 파직하거나 혹은 귀양보내기를 청하다가 마침내 잡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양사는 오히려 잡지 못한 신하를 죄주기를 청하지 않고 도리어 심기원 등을 잡아 국문하라고 청하였으니, 군부의 대의를 안다고 하겠습니까?
요사이 조정의 신하들은 비록 역적을 성토하는 큰일이라도 왕자에 관계되면 감히 묻지 못합니다. 《주례》예 ‘무릇 공족(公族)으로서 큰 죄가 있으면, 임금이 세 번 용서한 후에도 사구(司寇)는 왕명을 듣지 않고 처단한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역적 제(瑅)가 범한 죄는 공족으로서 큰 죄가 있는 정도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심기원 등이 처치한 행위는 옛 법으로 헤아려 보아도 틀림이 없고 대의로 참작해 보아도 잘못이 없습니다. 삼사가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청하는 것은 신하로서 역적을 성토하는 의리가 너무나도 없습니다. 청컨대, 일을 밝게 보지 못한 한교의 잘못을 먼저 다스리고 다음으로 임금을 잊고 역적을 봐주는 양사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다 알았소. 그러나 경의 말이 지나치오.”
하였다.
같은 달 19일. 공은 연석에 들어가 옥사를 다스리는 데에 체통을 잃었다는 것으로써 대신ㆍ중신과 더불어 크게 서로 다투며 변론하고 충성하지 못함을 배척하였다. 이 때문에 삼사가 모두 혐의를 피해 출사하지 않았다. 이튿날 차자를 올리고 대죄하기를,
“어제 연석에서 옥사를 다스리는 일을 이야기하면서, 충성에서 우러나는 분격한 말이 대신에게 한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고, 또 중신과 더불어 다투어 변론한 말도 미안한 것이 많았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토론하는 법연(法筵)을 분쟁의 장소로 만들었으니, 생각할수록 몸둘 바가 없습니다. 성상의 도량으로 감싸 주시어 비록 죄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신자(臣子)의 마음이 어찌 감히 스스로 편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대죄하지 마오.”
하였다. 이때에 난여(鑾輿)가 대궐로 돌아와서 나라 일은 조금 안정되었는데, 공은 이미 뜻밖의 탄핵을 입은 것이 너무도 참혹하기 때문에 즉시 강사(江舍)로 나아갔다.
25일. 또 정고하니, 비답하기를,
“사퇴할 때가 아니니 사직하지 마시오.”
하였다.
○ 3월 1일. 공은 또 당초에 탄핵을 당한 연유를 열거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이미 효시(梟示)할 죄를 지었으니, 다시 조정에 설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 차자를 묘당에 내려서 경중을 헤아려 처리하도록 하소서. 사직하고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은 원훈(元勳)으로서 사퇴할 때가 아니오. 경은 이 어두운 과인을 힘써 도와서 어렵고 위태로움을 구제하시오.”
하고, 인해 비국에 내렸다. 비국은 곧 회계하기를,
“옥당에서 이귀를 논한 말이 너무 지나쳐서 매우 미안합니다. 그러나 어찌 모함할 마음이야 있었겠습니까? 원훈 중신이 이로써 차자를 올리고 꼭 사퇴하고자 하니, 또한 매우 미안하옵니다. 청컨대, 불러서 직무를 살피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귀는 실상 죽을 죄가 없는데, 논하기를 너무나 박절하게 하였다. 설령 모함할 마음은 없었다고 할지라도 어찌 그르지 않겠는가? 그때 차자를 올린 사람은 체차하라.”
하였다.
이때에 공은 오랫동안 강사에 있었다. 위로부터 소명이 여러번 내리었고, 또 간절한 하교도 받았으나, 비록 성상의 은혜에 감격하여 다시 조정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의논이 배치되어 말이 시행되지 않을 것을 헤아리고 또 나아가기 어렵다는 뜻으로써 차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다 알았소. 경은 곧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고 사직을 보존한 공이 있는 중신인데, 나라의 위태로운 상황에 어찌 차마 앉아서 보고 구제하지 않는가? 경은 빨리 출사하여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시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예조 낭관을 보내서 돈유하여 빨리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이때 서울은 인심이 위태하고 두려워하여 장차 난리가 일어날 징조가 있었다. 공은 호위대장으로써 감히 물러가 있을 수 없는 까닭에 마지못하여 성으로 들어왔다. 또 차자를 올리기를,
“어제 예관을 보내어 돈유하심을 삼가 받들고, 신은 읽기를 마치기도 전에 감격의 눈물이 저도 모르게 떨어집니다. 신은 도리상 의당 빨리 궐문으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서 대죄해야 하나, 또 나아가기 어려운 뜻이 있어 부득이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것입니다. 신하가 임금을 위해 마땅히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해야 하지만, 임금도 신하에게 또한 신하 부리는 예법을 다해야 합니다. 소위 예법을 다한다는 것은 한갓 그 신하에게 겉으로만 예우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들어주고 계책을 써주어 시국의 어려움을 함께 구제하는 것이요, 소위 충성을 다한다는 것은 한갓 임금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만이 아니라, 도리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으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임금과 신하의 의를 범범하게 논한 것뿐입니다. 전하와 신에게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번 말해서 쓰지 않으면 반드시 다시 말하고, 한번 간언해서 듣지 않으면 반드시 다시 간언하여, 기어코 반드시 시행하고 반드시 들어준 다음에 그만두는 것이 이 신의 직분 안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으면 입이 쓰도록 힘껏 말하고 여러번 다투어도 들어주지 않거든 탑전에서 울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도 오히려 그칠 줄을 몰랐으나 성상께서 마침내 깨닫지 못하시니, 조정의 신하들도 저의 미치고 망령됨을 비웃었습니다. 이로써 신의 말이 후일에는 아무리 징험이 있을지라도 눈앞에는 미치지 못해 한갓 신의 몸에 해만 불러들일 뿐, 성패의 수(數)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의 거취는 국가에 경중이 되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하고, 이어 전날 일에 앞서 진언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던 것 열 가지를 거론하여 조목별로 써서 올리니, 비답하기를,
“경의 올린 차자를 보니, 내 얼굴이 부끄럽소. 경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종묘사직에 욕을 끼쳤으니, 오직 나의 허물이오. 경에게 그 무슨 죄가 있겠소. 경은 모름지기 사피하지 말고 더욱 충심을 다하여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오.”
하였다.
이때 무지개가 꿰뚫어 해가 없어지는 변고가 거듭 나타났으며, 또 역적 이괄이 성에 들어올 즈음에 인성군을 추대한다는 말로써 서울 백성들을 효유하고, 종루(鐘樓)에 방(榜)을 써서 걸었기 때문에, 잘못된 말이 선동하여 인심은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오래도록 안정되지 않아 달아나고 놀라 흩어져서 도성 안이 거의 비다시피 되고 나라 형제는 흔들려 아침저녁을 보전할 수 없게 되었다. 공은 또 차자를 올리기를,
“제왕이 세상을 다스릴 적에 반드시 윤리를 먼저 밝힙니다. 그런 뒤에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아들로서 어미를 죽이고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것은 천하의 대악이기에, 친애한다고 용납할 수 없고, 존귀하다고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간은 한 시대의 공론을 주장하는 것인데, 책임만을 면하기 위하여 발론하고, 곧 화가 두렵다는 등의 말로써 그 죄를 용서하고 덮어주었습니다. 아! 예로부터 시역한 사람은 모두 형벌과 화를 두려워하는 데서 연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그 시역한 죄를 용서해 주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모든 역적의 구초(口招)가 전후에 낭자함에 이겠습니까?
인발(仁發) 등 여섯 사람이 과거 공부를 한다고 핑계하여 이웃집에 거처하면서 인성군과 더불어 어두운 밤에 추종했다는 것은 인발이 문회(文晦)에게 말한 것이요, 광해군이 인왕산(仁王山) 밑에 성을 쌓은 것은 바로 인성군이 임금될 조짐이 있어서 한 것이라 한 것은 정방열(鄭邦說)이 이우(李佑)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꿈에 인성군이 대궐에 들어와 왕위에 앉고, 윤안형(尹安亨)이 그 곁에 서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 것은 한준철(韓濬哲)이 윤안형에게 말한 것이요, 거사한 다음에 인성군의 둘째 아들을 세운다고 한 것은 한흔(韓訢)이 김광숙(金光熽)에게 말한 것이며, 인성군이 기자헌과 더불어 사삿집에 서로 모여 몰래 역적 모의를 했다고 한 것은 한준철과 윤안형의 구초입니다. 설사 인성군이 그 사이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혹 역적 이괄이 역적 제(瑅)를 세우는 것과 같은 일이 있으면, 전하께서 비록 친할 사람을 친애하는 의리를 보전하고자 한들 그 뜻대로 되겠습니까.
지난번 국청에서 신의 말을 듣고 추대한다는 사실을 철저히 캐어서 발각되기 전에 잘 처리할 방법을 미리 강구하였더라면 역적 제(瑅)가 어찌 역적 이괄에게 이용당하게 되었겠습니까? 오직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여 전일의 변란을 겪게 된 것이니, 역적 제(瑅)가 죽은 것은 전하께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하니, 상은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은 채 비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보고 나는 매우 놀랐소. 왜 매양 이같은 말을 하여 내 마음을 불안하게 하오. 인성군이 정청(庭請)에 따라 참여한 것은 화를 겁내서 한 것이지, 어찌 그 본정이겠소. 지난번에 역적의 구초에 나온 것도 반드시 흉악한 무리들이 그의 명망을 이용한 계획이었을 것이오. 고금 천하에 어찌 두 사람을 추대하는 이치가 있겠소. 경의 말이 매우 잘못이니, 다음에는 이와 같이 마시오.”
하였다. 공은 생각에, ‘인성군이 여러번 역적의 구초에 나온 것은 비록 혹 명망을 이용한 계획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만일 역적 이괄의 나머지 무리가 변방의 혼란을 이용하여 역적 제를 세우듯이 한다면, 인성군이 비록 미리 알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성상께서 마침내 은의를 온전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궐내에 두어 방비와 보호를 더욱 엄하게 해서, 외인과 서로 통하는 길을 끊었다가, 인심이 점점 정해지고 역적들의 희망이 끊어진 후에 예로써 대우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면 은혜와 의리가 모두 온전할 것이고, 종묘사직을 위하여 걱정을 막는 계획도 지극할 것이다.’고 여겨, 또 이 뜻으로써 차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나의 뜻을 다 알렸는데, 경은 또 이 차자를 올리니, 나는 몹시 놀랍고 이상하게 여기오. 경의 말이 매우 잘못이니, 의혹을 분변하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이에 대사헌 정엽ㆍ대사간 장유 등이 동료를 거느리고 차자를 올려 기회를 먼저 보아 변을 처리하는 도리를 힘껏 아뢰었다. 그런데 정경세가 양사는 의리를 주장하고 옥당은 은혜를 주장한다고 하여, 두 의논으로 나누어 이미 발한 논의를 막아버리고자 하였다.
공은 연석(筵席)에서 힘껏 말하여 물리치고 또 차자를 올리기를,
“전하의 조정에 신 한 사람만 없으면 국가가 자연 편안하고 고요할 것입니다. 어찌 뜻밖의 환란을 근심하십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신이 전리(田里)로 돌아감을 특별히 허락해 주소서. 그리고 위에서 혹 말고삐 잡던 저의 조그만 수고를 생각하시거든, 돈과 비단을 넉넉히 주어서 술과 밥을 먹게 해주시고 노래하는 아이와 아름다운 여색을 더 주어 남은 여생을 즐기도록 하옵소서. 이것이 또한 옛날 제왕이 공신을 보호하던 훌륭한 일입니다.”
하니, 상은 비답하기를,
“경이 올린 차자를 보니, 말이 너무 지나치오. 화합하면서 아부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일이요, 아부하면서 화합하지 않는 것은 소인의 태도인 것이오. 이로써 본다면 옥당의 장관은 군자라고 말할 수 있소. 군부(君父)를 허물없는 곳에 들이고자 하여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니, 또한 착하지 않소. 노래하는 아이와 아름다운 여색을 청한 것은 국가로서 우대하는 도리에는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할 것이나, 임금에게 고하는 말에는 또한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 것이오. 경은 사피하지 말고 더욱 충심을 다하여 어려움을 구제하시오.”
하였다. 공은 또 연석에서, 양사를 힘껏 배척하고 아울러 옥당의 장관을 배척하기를, ‘보좌한다고 핑계하고 다른 의논을 주장하여 먼 장래를 염려하는 계획을 막아버리고자 한다.’ 하여, 간사하고 교묘하게 피한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정경세는 또 차자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고, 대사헌 정엽(鄭曄) 또한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다.
그후에 전한 이준(李埈)이 연석에 들어와 아뢰기를,
“골육을 이간시키는 것은 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조짐입니다. 명철하신 성상의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또 정경세는 이미 간사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차라리 죄를 받을지언정, 이름과 절조는 훼손하지 않으려고 하기에 반드시 조정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은 말이 너무 난잡했다고 공을 나무랐는데, 이조 판서 오윤겸(吳允謙)이 또 아뢰기를,
“근일에 이귀의 말로써 정경세가 혐의를 피해 나오지 않으므로, 선비들 사이에 장차 풍파가 생길 듯하니, 몹시 민망하옵니다.”
하니, 상은 이르기를,
“이귀의 일이 매우 잘못인 듯하오. 임금과 신하 사이에도 반드시 공경으로써 서로 대해야 하는데, 하물며 동류 사이에 어찌 간신(奸臣)이니, 속이는 신하이니 하는 명목을 만들어 지적한단 말인가. 그 말이 매우 해괴하오. 그 사람이 말을 가리지 못하는 까닭에 우선 그만두었지만, 죄를 논하는 것이 좋겠소. 동류 사이에 어찌 교만과 업신여김으로써 위협하고 통제할 수 있겠소.”
하였다. 이준은 아뢰기를,
“신법(新法)이 시행될 적에 왕안석(王安石)도 공론은 굴복시키지 못했고, 금(金) 나라와 화의(和議)가 횡행할 적에 진회(秦檜) 역시 감히 정론은 막지 못하였는데, 어찌 여러 입을 위협하여 부화뇌동하게 하겠습니까?”
하니, 상은 이르기를,
“한 나라의 동일하지 못한 논의를 만약 부화뇌동하게 하려고 힘쓴다면 이것은 매우 자라게 할 수 없는 조짐이다. 사람마다 각자 소견이 있으므로 각각 아뢰도록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이다.”
하였다.
공은 이미 꾸지람과 배척을 당하고 또 임금의 하교가 이와 같음을 받았기 때문에 차자를 올려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정경세와 이준 등은 마음과 자취가 같지 않다는 정상을 낱낱이 거론하였는데, 수만 마디의 말이었다.
상은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다 알았소. 옛 사람이 말하기를, ‘허물이 있는데 고치지 않으면 이것이 허물이 된다.’고 하였소. 경은 이 말을 생각하여 허물 있는 사람이 되지 마시오.”
하였다.
그후에 정경세는 공의 말로 인해 사직 차자를 다섯 차례나 올렸는데, 공더러, ‘자기와 다른 자는 공격하고 배척한다.’ 하고, 이이첨과 한찬남에게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상은 공을 끝내 효유하고 또 대사헌을 제수하였는데, 양사에서 인성군을 잘 처리하라는 의논이 잠깐 일어났다가 곧 정지 되었다. 대개 상은 공이 정경세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데에 뜻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전후의 비답이 이와 같이 엄격하고 준절하였던 것이다.
공은 또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나라 일을 지나치게 염려하여 작년부터 대신ㆍ대간과 변론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말이 과연 생각했던 것과 같기 때문에 또 훗날에 이런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일찍이 탑전에서 인성군을 잘 처리하자는 뜻으로써 말을 냈습니다. 삼공ㆍ여러 재신과 양사 장관들도 모두 옳다고 하여, 같은 말로 죄를 청하였습니다. 양사가 차자를 올린 후에는 홀로 옥당만이 잠잠하게 아무 말이 없었는데, 부제학 정경세가 정고(呈告)하고 나가면서 또 말 한 마디가 없자, 삼공 이하도 모두 바람에 쓰러지듯 따라서 감히 다시 말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신은 항상 그 교묘하게 피하는 것을 분하게 여겼었는데, 정경세의 종전에 한 짓을 상고하여 보니, 그 자취가 간사한 듯하여, 이로써 이미 영상 이원익(李元翼)에게 말하고 또 전하께 아뢰었던 것입니다.
신의 말이 비록 충성과 분개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남을 향하여 말할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 듯하기에, 바야흐로 뉘우치고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정경세도 만약 스스로 반성하여 신이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정엽의 말과 같이 용서한다면 신 또한 지나치게 말한 잘못을 스스로 항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헛되이 여러 말로 ‘신이 권세를 믿고 위협한다.’ 라고 말하여 조목조목 변론하여 그렇지 않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말을 만드는 데에 또한 과격한 말이 없지 않았으나, 이는 신의 한평생 변통이며, 정경세 한 사람으로 인해서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임금께서 말을 듣는 데에는 공사(公私)를 분별할 뿐이온데, 어찌 성상께서 ‘자기와 다른 자는 공격한다.’는 것으로써 간원(諫院)에 하비할 줄을 생각했겠습니까?
신은 보잘것이 없으나, 선현의 문하에 종사하여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대강 들었습니다. 망사(亡師 율곡을 가리킴)가 동ㆍ서 두 글자가 나라를 망친다는 것을 밝게 알고 동ㆍ서를 타파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삼았으나, 마침내 당론의 배척을 당하여 포부를 펴지 못하고 뜻을 품은 채 죽었기 때문에 신은 항상 원통하게 여기고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신의 재주와 덕망은 비록 망사에게 미치지 못하오나, 그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고 동료와 공손으로 협력하는 마음은 망사에게 지지 않기를 스스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다만 전하께서 매양 ‘붕당(朋黨)은 하지 말라.’고 하교하시나, 신은 임금께서 사람을 쓰는 데는 그 사람의 선(善)과 악(惡)을 보아서 진퇴시킬 뿐이라 생각됩니다. 선하면 그 부류를 묻지 말고 쓸 것이며, 악하면 그 부류를 묻지 말고 물리쳐야 합니다. 그 등용하고 물리침이 한결같이 공정하고 사사로움을 없게 하면 수년만 행해도 자연 선한 자가 저절로 한 부류가 될 것이며, 악한 자는 자연 물러나게 될 것인데, 붕당을 없애기가 어렵다고 어찌 걱정하겠습니까? 주자가 ‘임금을 끌어 당(黨)을 삼는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임금이 만약 붕당으로써 신하들을 범범하게 의심한다면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기회를 노리고 틈을 타서 성상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선류(善類)를 저격하여 일망타진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청류백만(淸流白馬)의 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옵니다. 신이 걱정하는 것은 실상 여기에서 나온 것인데,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하여 마침내 성상의 ‘자기와 다른 자는 공격한다.’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모두가 신이 전하를 섬기 는데 정성껏 하지 못했던 소치입니다. 누구를 허물하겠습니까?
정경세가 지난번 여러 차례 차자를 올려 신을 여지없이 공격하여 이이첨과 한찬남에게 비유하기까지 하고, 이준이 또 정경세를 신구(伸救)하여 신을 왕안석과 진회에게 비유했으니, 어찌 신의 과격한 것을 공격하면서 도리어 자신이 과격한 데에 빠집니까. 이로써 본다면 당(黨)을 두둔하는 폐단이 참으로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하신 성상께서는 신의 위급한 정경을 불쌍히 여겨 직명을 삭제해 주옵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의 뜻을 알겠소. 경이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내 어찌 모르겠으며, 정경세가 과격하게 비유한 것도 어찌 모르겠소. 다만 먼저 한 말이 비유한 말보다 더 심한 까닭에 그르다고 않은 것이오. 경의 ‘망사(亡師)와 같기를 스스로 기대한다.’는 말은 진실로 아름다운 뜻이니, 내 가상하게 여기오. 대저 불평한 말은 과격함을 면하기 어려우니, 경은 정경세와 서로 따지지 말고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서 같은 마음으로 어려움을 구제하오. 한때의 분한 마음으로 평생 품은 뜻을 저버린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소. 원훈 중신으로서 문을 닫고 고요히 지낼 때가 아니니, 사직하지 말고 붕당을 깨뜨리려던 그 뜻을 다시 사려서 나의 소망에 부응하오.”
하였다.
공은 인해 사직 상소를 올렸는데, 그 사연 중에, ‘위아래로 죄를 지어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다.’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비답하기를,
“경이 허물을 알고 있으니, 내 몹시 가상하게 여기오. 무슨 죄를 지은 일이 있겠소? 경은 모름지기 사직하지 말고 더욱 충심을 다하여 어려움과 위태로움을 함께 구제하오.”
하였다. 공은 사직하기로 결심하고 잇달아 세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리고, 또 차자를 올리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에는 한갓 추종하여 받들어 순종하는 것만으로써 공손을 삼는 것이 아닙니다. 염치 일체를 돌아보고 조가(朝家)의 체면을 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번에 허물을 고치라는 하교를 받고 아무리 스스로 고치려 하여도 옛 병통을 고치기가 어려워서 일에 임하면 꼭 발병하고 맙니다. 이것이 계속된다면 마침내 쌓이는 미움이 날로 깊고, 저지르는 죄가 더욱 무거울 것이니, 전하께서 비록 신을 용서하고자 하더라도 또한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퇴 이외에 다시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하물며 두 시종 신하(정경세ㆍ이준)가, 신의 말이 과격함을 참혹하게도 비유한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러 사흉(四凶 여기에서는 이이첨ㆍ한찬남ㆍ왕안석ㆍ진회를 말함)의 죄가 모두 신의 몸에 모였으니, 비록 전하의 감싸주심을 입어 머리와 목은 보전하였으나 스스로 보전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어찌 성상의 하교를 본받아 더욱 충심을 다하여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소. 경은 나의 뜻을 본받아 사직하기를 고하지 말고빨리 출사하오.”
하였다.
○ 6월 18일. 특명으로 공에게 찬성을 제수하였다. 공은 또, ‘말을 하여도 쓰이지 못하고 부당하게 나쁜 이름만 입으니, 조정에 서기가 어렵다.’는 뜻으로써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다.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다 알았소. 경은 사직하지 마시오.”
하였다. 당초 역적 이괄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이괄의 머리를 벤 자는 부원군에 봉작하고 천금을 준다.’는 것으로써 상금을 걸었다. 이괄이 패해 달아날 때에, 기익헌(奇益獻)과 이수백(李守白) 등이 이괄을 베어 올렸는데, 대간은 이전의 죄목을 들어 목베라고 청하였다. 공은 ‘약속을 어길 수 없다.’는 뜻으로써 탑전에서 힘껏 다투어, 부원군을 봉하고 천금을 줄 것을 청하였다. 상은, ‘기익헌이 목을 베어 올린 것이 이미 패한 후에 있었다.’는 것으로써 죽음만을 면해 주었는데, 그후에 또 이름이 고변서에 나온 것으로 멀리 귀양보냈다. 공은 차자를 올려 선조(先朝) 때 임억명(林億明)의 일을 들어 증거까지 대고, 또 이우(李佑)ㆍ문회(文晦)ㆍ김광숙(金光熽) 등의 일이 나기 전에 고변한 공로를 기록하기를 청하였다. 상은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다 알았소. 경의 식견과 염려가 깊고 먼 것을 가상하게 여기오. 다만 ‘변란이 일어나던 초기에 이괄의 목을 베어 올리면 군(君)으로 봉하고 천금을 준다고 약속한 것이나, 형세가 궁해서 도망칠 곳이 없는 상황을 말한 것이 아니고, 도성에 이르기 이전에 말한 것이오. 이 무리가 목베어 올린 공은 이미 그가 패한 후였으니 죽음을 면한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어찌 녹공(錄功)할 이치가 있을 것이오? 그러나 묘당과 더불어 의논해 처리하겠소.”
하였다.
그후에 이우 등 3인은 진무(振武)의 공(功)에 참여했는데, 기익헌 등은 참여하지 못했다. 공은 또 아뢰기를,
“신이 이수백 등의 일로써 두세 번 차자를 올렸는데도 윤허를 받지 못하니, 신은 진실로 민망하고 답답하옵니다. 지난 선왕조(先王朝)에 있어서는 서림(徐林)이 대간의 계사로 인해 비록 삭훈은 당했으나, 특명으로 동지(同知)를 제수하여 그대로 녹을 받았습니다. 지금 전례대로 죽음을 용서해 주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니, 상은 이르기를,
“나도 일찍이 잊지는 않았으니, 마땅히 처치하는 일이 있을 것이오.”
하였다.
○ 8월. 공이 대궐에 들어가 청대(請對)하니, 상은 비답하기를,
“나도 인견하고 싶어하였는데, 근래에 일이 많아서 그러지 못했소.”
하고, 즉시 인견하였다. 공은 입계(入啓)하기를,
“지금 성상께서 위에 계시고 여러 어진이가 조정에 가득한데, 나라 형세의 어지러움과 인심의 흉흉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니, 이것은 신이 천정을 쳐다보고 길이 한숨 쉬면서 침식을 모두 폐하는 이유입니다. 근래에 투서(投書)의 변고가 한두 번이 아니니, 이는 비록 사람마다 의심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흉악하고 간사한 무리가 도성 안에 잠복하여 그 흉한 계책을 멋대로 부리는 것입니다.”
하니, 상은 이르기를,
“익명서가 아무리 흉악하고 참혹하지만 국가에서 어찌 찾아내어 치죄할 수 있겠소.”
하므로, 공은 아뢰기를,
“이것은 익명서 부류가 아닙니다. 성상의 하교가 비록 이와 같으나, 신하의 나라 근심하는 정성에서 어찌 먼 훗날을 염려하는 계책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 11월. 홍구(弘耈)의 옥사가 또 일어나니, 도성이 진동하고 놀랐다. 공은 병 때문에 대궐에 나아가지 못하여 곧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다. 그러자 상은,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여 조섭하시오.”
하였다. 이때 윤장(允章) 등 모든 역적의 구초가 모두 ‘인성군을 추대한다.’ 하였는데, 그 흉한 모의가 음험하고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삼사가 죄를 청하는 말은 다만 여러번 역적의 구초에 나왔다는 일만 논하고 군모(君母)를 죽이려고 하였다는 죄에는 언급하지 않았다.
공은 병중에 울분을 견딜 수 없어서 그 옥사를 다스림에 체통을 잃는 것을 낱낱이 들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생각하건대, 일이 일어나기 전에 잘 처리하지 않는다면, ‘하루저녁을 편히 잤더니, 진(秦) 나라 군사가 또 이르렀다.’는 말에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하였다. 이때 서울에는 말이 퍼져서 인심이 위태하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흉악한 무리가 곳곳에서 투서했는데, 단서를 잡을 수 없으므로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현상금을 걸어 괴수를 고하게 하고, 모든 대장 또한 군관을 시켜 정찰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그런데 한쪽의 의논은 현상금을 걸고 사찰하는 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징조라고 하였다. 정경세ㆍ최현(崔晛) 등은 매양 연석에서 파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최현은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또 모든 대장 군관을 파해 없애라고 청하여 아뢰기를,
“천 명, 백 명이 떼를 지어 사택을 호위합니다.”
하고, 심지어는 ‘집에 감추어둔 창과 갑옷은 거두지 말고 불태우게 하라.’는 말까지 하니, 공은 또 차자를 올리기를,
“최현은 이름이 역적의 구초에 나오고, 국청에서 국문하기를 청하고, 연신(筵臣)이 죄주기를 청했으니, 몸소 부월(斧鉞)에 엎드려서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한데, 곧 상소문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고 훈신을 공격하였으니, 모의를 알면서 고발하지 않은 법률로 논하여 왕법을 바르게 하옵소서.”
하였다. 이는 대개 역적 김원(金愿)의 구초에서 일찍이 역모를 한다고 최현에게 고했는데, 최현이 즉시 고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다 알았소. 최현은 반성하지 않고, 상소문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니 매우 외람되오. 그러나 본심은 충직할 뿐인데, 어찌 역모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을 리가 있겠소. 경이 말이 또한 지나치니, 실정 밖의 말로써 남의 죄를 논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이때 삼사가 인성군을 논하였으나 오래도록 윤허를 받지 못했는데, 묘당은 정청(庭請)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공은 연석에서 좌상ㆍ우상과 더불어 힘껏 다투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승평(昇平 김류) 및 여러 훈신과 상의하여 궐내로 모이기를 약속하고, 장차 훈신을 인솔하여 합문에 엎드려 죄주기를 청하기로 했었다. 먼저 이 뜻으로써 우상에게 편지를 보내니,
“좌상과 더불어 상의하여 모든 훈신의 반열에 따르겠소.”
답하였다. 공은 또 이 뜻으로써 승평에게 통하니, 이때에 국청에 있다가 그 문답한 말을 편지로 보냈는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좌상이 ‘근일 훈부(勳府)에서 인성군에게 죄주기를 청하는 거조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가?’ 하기에, 있다고 대답하고, 좌상이 ‘대감은 어떻게 할 참인가?’ 하기에, ‘내 어찌 딴 뜻이 있겠는가.’ 하였더니, 좌상은, ‘그런즉 우리도 마땅히 해야 하지.’ 하고, 우상은, ‘미리 그 정한 날짜를 알고 싶다……’ 하더니, 이제 대감의 편지를 보니, 과연 ‘그렇군. 그날 국청이 파하지 않더라도 감히 나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삼공 또한 2품 이상의 관원을 인솔하고 빈청에 모여 아뢰었는데, 성상의 하교가 간절하고 측은하다고 하여, 사흘만 아뢰고 정지시키려 하였다. 공은 공회(公會)에서 큰 소리로 배척하여 말하기를,
“우상의 머리를 베어야 하오.”
하고, 또 우상에게 편지를 보내 준절하게 책망하였다. 그리고 이 뜻으로써 차자를 올리고 대죄하니,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소. 경이 만일 잘못이 있으면 공손히 조정 시비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우상은 공의 말로 인하여 정고(呈告)하고 나오지 않았으며, 잇달아 사직 차자를 올리니, 좌상 또한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다. 상은 비답하기를,
“조정에서 대신을 모욕하는 처사에 대하여는 해당한 법률이 있는데, 경등이 그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지 않고 도리어 사직 차자를 올리니, 체면이 이로부터 손상될까 나는 두렵게 여기오. 경은 사직하지 말고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 무너진 기강을 엄숙하게 잡으시오.”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대신은 한 사람의 아래에만 처하여 지위가 여러 관원과 아주 다르기에 조정에서 예로써 대우하는 것이 곧 군부(君父)를 공경하는 것이 되는데, 찬성 이귀가 여러 사람이 모인 공회에서 상신(相臣)을 꾸짖고 욕하되 쌍스럽고 패만한 말이 조금도 꺼림이 없었다고 하니, 선현을 법받는다는 사람으로서 하는 행실이 이와 같다면, 그 외에 공을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여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것을 장차 금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느냐. 일이 해괴하여 그 폐단은 자라나게 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공신을 시종 보전하는 도리겠느냐. 그 군부를 가볍게 보고 조정을 업신여기는 것은 나라에 법이 있으므로 내가 감히 사사로움을 쓸 수 없다. 이 뜻을 양사에 말하여 공론에 따라 죄를 정하라.”
하였다. 그래서 양사가 공을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는 것으로 논하니, 상은 윤허하였다.
○ 을축년(1625, 인조 3) 2월 4일. 상은 특명으로 공을 서용하고, 전례대로 부원군을 제수하였다. 공이 사정을 아뢰고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의 마음을 다 알았소. 허물이 있더라도 고치면 오히려 허물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오. 경은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말고 나의 소망에 부응하도록 빨리 출사하시오.”
하였다. 공은 세 차례나 아뢰었는데도 또 특별히 부르는 명이 있기 때문에 곧 소명에 응할 수 없다는 뜻으로써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원훈 중신으로서 훈신을 거느리고 훈부(勳府)에 앉아 역적을 성토하던 날, 대신이 역적을 두둔한 잘못을 준절히 책망하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대신을 모욕한 것이어서 개인적인 죄로써 논하는 것입니까? 신은 반복 생각해도 그 허물이 제 자신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 소위 허물이란 것이 나라에는 도움이 있으나, 저 자신에는 도움이 없는데, 전하께서 반드시 신에게 허물을 고치라고 하시는 것을 신은 실로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몸을 잊고 원망을 모두 맡으며 일에 임해 바로 앞장서는 것이 신의 평생 허물이나, 선묘조(宣廟朝)로부터 오늘날까지 고치지 못하였는데, 이제 갑자기 세속을 따라 움직여 말년의 계획을 하고자 한다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즉 전하께서 신을 부르는 것은 나라를 병들게 할 뿐이며, 신이 나아가기를 구하는 것도 제 몸만 이롭게 하는 데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비록 한 허물을 짊어진 망령한 신이 없더라도, 조정에 가득한 관원이 모두 허물 없는 정직한 사람인데 전하께서 이들과 나라를 다스린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반드시 어리석은 신을 억지로 끌어들여 매양 조정 사이에 풍파만 일으키려 하십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소. 사직하지 마오.”
하였다.
○ 3월 25일. 주강(晝講)에 면대하였다. 공은 아뢰기를,
“죄인 공(珙 인성군)은 수의(收議)한 결과 극히 흉패하기 때문에 신이 전후에 대의를 들어 여러 차례 죄를 청했는데, 이는 인륜과 기강을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더구나 여러번 역적의 구초에 나와 현저하게 역적을 모의한 형상이 있으므로, 삼사에서 죄를 청한 지 여러 달이 되었은즉, 전하께서 여론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전지 안에, ‘전 인성군 공(前仁城君珙)’이라고 일컬은 것은 크게 잘못된 죄안입니다. 그런데 정원(政院)에서도 논계하지 않고 예사로 전지를 받았으니, 신하로서 역적을 성토하는 대의를 매우 잃은 것입니다. 또 하교에, ‘추대한다는 등의 말은 승전(承傳)을 받들 때에는 깎아버리라.’ 하셨습니다. 대간에서 역적이 추대한다는 것으로써 여러 달을 다투어 변론하였는데, 승전을 받들 때에 이르러 이 조항을 깎아버렸으니, 홍이 비록 시역(弑逆)을 청한 죄는 없다고 하더라도 역적 모의한 사실이 이미 일곱 역적의 구초에 나타났고, 역적 이괄이 또 추대한다는 것으로써 종루 거리에 방(榜)을 걸었으니, 미리 나라를 배반하려고 모의한 죄가 밝게 나타난 것은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원에서도 추대에 관한 한 조항을 깎아버렸으니 더욱 무리한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 이성구(李聖求)는 아뢰기를,
“여러 달동안 논의하여 고집하다가 겨우 윤허를 얻었으므로 감격한 나머지 작은 곡절은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하므로, 공은 아뢰기를,
“이 일은 실상 역적을 성토하는 큰 의리와 관계되는 것인데, 이로써 작은 곡절이라 하는 것이 가당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전 인성(前仁城)’이라고 일컬은 것은 비록 ‘허물을 보면 그 인(仁)을 안다.’는 것이기는 하나, 아래에서 또 ‘전 인성’이라 일컬었으니 크게 괴이한 일인데, 사람이 괴이하게 생각할 줄 알지 못하니 지극히 한심하옵니다. 전하께서 이미 금부도사에게 잡아 가도록 시키고, 또 경기 감사에게 모시고 가도록 시키시어, 감사와 도사가 동시에 함께 나가게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약 감사가 역적을 성토하는 대의를 알았다면, 비록 임금의 명령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명을 받들어 모시고 가겠습니까? 식견이 밝지 못함이 이토록 심하니 맹 해괴하다 하겠습니다.
광해군이 비록 한 나라의 임금이었는데도, 별장만을 정해서 보냈는데, 공(珙)에게도 이와 같이 하였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또 들으니, 강원 감사를 시켜서 때마다 나아가 문안하도록 한다고 하는데, 일찍이 경기 감사가 광해군에게 나아가 문안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홀로 공(珙)에게는 감사를 시켜서 문안하도록 함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상은 이르기를,
“나는 이런 일이 없소. 경은 자세히 듣지도 않고 이같은 말을 하오?”
했다. 공은 아뢰기를,
“신은 나라를 위해서 아뢴 것이니, 비록 잘못 듣고 아뢴다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반드시 깊이 허물할 것이 아닙니다. 광해군이 강도(江都)로 갈 때에는 말을 타지 않았는데, 공(珙)은 말을 타고 가도록 하였으니, 또한 남이 듣고 해괴하게 여깁니다.”
하니, 상은 이르기를,
“비록 말을 태웠다 하더라도 뭐 해로울 것이 있겠소.”
하자, 공은 아뢰기를,
“만약 공(珙)이 죄가 있다 하여 귀양을 보낸다면, 이처럼 법을 어겨서는 아니됩니다. 전하께서 만약 사사로운 은혜로써 별도로 대우하는 것은 괜찮지만 왕법이 지극히 엄하니, 전하의 사사로운 은혜로 법을 업신여길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와 같이 하신다면 신하들도 사사로운 은혜로써 법을 업신여길 것입니다. 전하께서 무엇으로써 금지시키고 억누를 것입니까?
신은 강사(江舍)에 있을 때에, 전하께서 이러한 지나친 거조(擧措)가 있었는데도 삼사에는 한 사람도 아뢰는 자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신이 대의를 들어서 편지 한 장을 지어서 대사헌 홍서봉(洪瑞鳳)ㆍ집의 엄성(嚴惺)에게 보냈더니, 홍서봉은 휴가를 받아 시골로 내려갔고, 엄성은 회답하기를, ‘공이 벌써 떠나갔으니 감히 지난 일을 다시 논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 신은 강가에서 서울로 들어와서 들으니, 나만갑(羅萬甲)이 이 말을 대강 아뢰었다고 하기에, 신은 일찍이 연석(筵席)에 들어가 아뢰고 싶었으나, 매양 공(珙)의 일에 신이 혼자서 너무 심히 했던 까닭에,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사삿집에서는 머리를 모으고 서로 의논하면서도 탑전에서는 감히 입도 벌리지 못하기 때문에 대의를 들어서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또 정온(鄭蘊)을 특히 대사간으로 삼은 것은, 신이 전하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정온은 역적 정인홍의 제자로, 정온과 정인홍은 악한 짓을 같이 하여 권세를 부리고 방자한 형상을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정온이 정인홍을 위해서 상소문을 올렸으며, 또 임해(臨海)와 영경(永慶)에게 죄를 주라고 청하여 정훈(正勳)에까지 참여했습니다. 또 영창대군을 죽이라는 의논에 참여하다가 친구의 책망을 당한 다음, 상소문을 올려 죄를 입었습니다. 허물 고친 일을 높여주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신이 이조 참판이 되었을 때에 첫머리로 간관의 망(望)에 주의(注擬)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그 상소문이 없었다면 정온은 마침내 악한 사람을 두둔했다는 죄를 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번에는 그 허물 고친 행동이 높일 만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전하의 신하로서 왕자를 구제하였다는 이름을 얻기 위하여 곧 전하께 향하여 말하기를, ‘군덕(君德)의 잘못이 전일과 어떠하며, 윤리의 문란함이 전일과 어떠합니까? 하루라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라는 등의 말로, 임금을 마구 모욕하였습니다. 신이 정온의 계사(啓辭)를 보고 내국(內局)에 들어가 좌상 윤방(尹昉)ㆍ도승지 정경세(鄭經世)와 좌석을 같이하고 말하기를, ‘어제 정온의 계사를 보니, 임금을 여지없이 모욕하였으니, 반드시 형률에 따라 정온을 죄준 다음이라야 국시(國是)가 정해질 것이다.’ 하니, 윤방은 말하기를, ‘대감의 심병(心病)이 병중에 더욱 더해졌군.’ 하므로, 신은, ‘이 증세에 전염된 자가 많이 있었다면 나라 일이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정온의 죄를 청하자는 편지 하나를 얽어 우상 신흠(申欽)에게 보냈더니, 신흠이 말려 정지하였는데, 정온이 시골로 내겨갔기 때문에 죄를 청하지 못했습니다. 전하의 신하가 된 자로서 어찌 정온과 더불어 동료가 되고도 마음에 달게 여겨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까? 전에 임숙영(任叔英)이 신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백이(伯夷)에 대한 말은 반드시 깊이 따질 필요가 없다. 성상을 무왕(武王)이라 한 것이 뭐 해롭겠느냐?’ 하기에, 신은 말하기를, ‘옛날 백이는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기 때문에 천년 뒤에도 오직 백이 하나 뿐인 것이다. 이제 지평(持平)이 백이가 된다면 백이 되기가 뭐 어렵겠는가? 만약 주(紂)의 악이 광해군과 같았다면 백이도 반드시 말을 끌어 잡고 간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니, 임숙영은 ‘식견이 밝지 못해 곧 망발을 했다.’ 하고, 말없이 물러갔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식견이 밝지 못한 임숙영과 정온같은 부류가 감히 이런 등의 의논을 제창하기 때문에, 역적 무리가 이것을 빙자하는 것이 없지 않으므로,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부득이 위엄과 무력으로써 진정시켰던 것입니다. 신이 매양 연석에 들어올 적에는 입을 다물고 말을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만, 말을 하면 문득 임금의 안색을 범할 정도로 심하여 마침내 허물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반드시 수년 동안 심병(心病)을 치료한 다음에야 티끌만큼이라도 전하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여깁니다. 그러므로 신이 근일 조정 의논에 참여하지 못하겠으니, 비변 당상ㆍ호위대장ㆍ내국 제조 등 직함을 모두 해직해 주옵소서.”
하고, 오랫동안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상은 답하지 않았다.
당초 이괄의 변란이 일어날 때에 38인의 죽음에 대해서 공은 힘껏 다투었으나 그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 재변을 만나 구언(求言)하기에, 공은 신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 곧 상소하기를,
“임금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인(仁)을 본받아서, 만물로 하여금 모두 각기 잘 살도록 하여, 한 사물이라도 천지 사이에서 원한을 품지 않게 한 다음이라야 임금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옥사를 다스리는 일에 더욱 뜻을 두시어 비록 역옥에 관계된 것이라도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삼가시어 오직 한 사람이라도 잘못 걸릴까 걱정하시어 매양 석방시키는 날을 당하면 여러번 죄를 씻어주시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누구인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역적 이괄이 배반했다는 통보가 도성에 들어오던 날에, 옥에 갇혔던 38인이 모두 여러 역적의 구초에 나왔고, 그 실상과 형적이 내응에 관계가 된 것이 많았으며, 역적의 경보가 급박하여 상하가 모두 겨를이 없어 모든 의논이, ‘빨리 처단하지 않으면 화가 장차 헤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 처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사세가 비록 부득이한 경우에서 나왔으나 그중에는 옥과 돌이 함께 타버리는 원통함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그 당시 국문한 후에 죄를 정하자고 힘껏 청했는데, 다른 의논에 저지되어 정지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한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대신으로 하여금 그 죄안을 찾아내어 공론에 따라 명백히 조사하고 분변하여, 원한을 품은 자로 하여금 성상의 아래에서 신원이 되도록 하시면 천재지변이 없어지고 인심도 감동될 것이며, 그 하늘에 빌어 나라의 명맥을 길이 연장하는 아름다움도 반드시 여기에서 기초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살아서 죄를 입은 자는 차례로 석방되는데, 원한을 품고 죽은 자는 신원할 길이 없습니다. 왕자(王者)의 정사가 어찌 살고 죽음으로써 간격을 둘 수 있습니까? 신은 마음에 항상 원통하게 여겼으나, 일찍이 말을 하지 못한 것은 역옥에 관계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구언(求言)하는 날을 당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아뢰옵니다.”
하였다. 상은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다 알았소. 경의 말이 옳으니, 내 마땅히 의논해서 처리하겠소.”
하였는데, 그후에 모두 신원되었다.
목성선(睦性善)ㆍ유석(柳碩) 등이 상소하기를,
“인성군의 배반한 형상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귀양가게 된 것은 훈신(勳臣)이 사람들을 꾀어 모함하게 하여 옥사를 이루었습니다. 그 해가 이괄의 변란보다 더 심하므로 국가가 장차 망하게 될 것이며, 천재지변도 실상 이로 말미암았습니다.”
하였다. 상은 곧 그 상소문을 대신에게 내려 묻고, 인해 석방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므로 공은 연석에서 아뢰기를,
“목성선 등이 어긋나고 망령된 말을 제창하여 위로 성상을 현혹시키고 아래로 훈신을 모함하니, 그 죄를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물러가 또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에,
“목성선 등이 논한 내용은 극히 이치에 어긋나는데, 전하께서 지나치게 높이고 권장하여 대신에게까지 묻고 갑자기 석방시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윤리에 죄를 얻고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한 죄인을 버젓이 도성으로 들어오도록 하는데도 삼사의 많은 관원에는 대의(大義)를 들어서 다투고 분변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군신과 부자의 의리를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법을 따지고 죄를 논하여 윤리를 바로잡을 수 없으나, 결코 성안으로 되돌아와서 흉악한 무리의 기화(奇貨)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혹 전일의 논의에 따라 궐내에 들여다 두거나, 혹 교동(喬桐)으로 옮겨서 한쪽으로는 보전하는 도리를 다하고, 한쪽으로는 간사한 무리들의 모의를 막으시옵소서.”
하니, 상은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서(李曙) 이하 모든 대장이 목성선 등의 소로써 상소하여 변명하고 사직하니, 상은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다 알았소. 제왕의 지위란 하늘이 실상 명한 것이기에 사람마다 가지는 것이 아니오. 후주(後周)의 세종이 호걸을 시기하여 죽였으나 곁에 있던 송 태조는 시종 태연하였고, 송 태조는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지만, 가깝고 먼 데가 모두 복종하여 천하가 무사하였소. 폐조(廢朝) 때에 기찰이 지극히 엄하고 세밀하였으나, 내가 보존하였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소.
이로써 본다면 하늘을 거스르고 일을 도모하는 자는 한갓 그 죽음을 청할 뿐이요, 국가에 무슨 관계가 있겠소. 그러나 《서경》에 이르기를, ‘천명(天命)은 일정하지 않다.’ 하고, 《시경》에 이르기를, ‘큰 명은 지키기 쉽지 않다.’ 하였으니, 한갓 천명만 믿고 나쁜 짓을 고치지 않은 자는 걸(桀)과 주(紂)이고, 천명은 받들어서 더욱 그 덕을 닦은 자는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니, 이로써 말하면 천명이란 믿기만 할 수도 없고 또한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오. 다만 그 덕을 닦고 닦지 않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오. 이런 까닭에 흉악한 무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의 덕이 닦이지 않음을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싫어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듣지 못함이 싫을 뿐이오. 아! 경등이 어찌 한 털끝만치라도 모함할 뜻이 있겠소. 조심스럽게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마침내 실정 밖의 헐뜯음을 면하지 못했으니, 나 또한 깊이 한탄하는 바이오. 경등은 모름지기 사직한다는 말을 하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하여 직무를 보살피오.”
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 4) 11월 2일. 공은 또 차자를 올리기를.
“광해군 때, 역적 유생 하인준(河仁俊) 등이 호씨(胡氏)의 ‘무후(武后)를 베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상소하기를, ‘비록 죽이더라도 되고, 베더라도 된다.’ 하였는데, 공(珙)이 감히 이 소에 수의(收議)에서 이르기를, ‘삼가 유생의 상소를 보니, 대개가 군부(君父)를 위한 충성이요, 종묘사직을 편하게 할 큰 계책입니다. 하물며 신은 종신의 반열에 있는 한 사람으로 나라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며 죽고 삶을 같이 하는 자인데 그 마음이 어찌 초야(草野)의 선비에 뒤지겠습니까? 오직 묘당에서 공론을 따라 종묘사직을 편하게 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하였으니, 인 것은 공(珙)이 하인준 등의 상소를 초야의 공론이라고 하여, 군모(君母)를 시해하여 광해군에게 아첨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거의(擧擬)하던 초기에 신등은 공(珙)의 수의가 이같이 음흉하고 참혹한 것을 알고, 전하께서 즉위하기 전에 먼저 이이첨과 공(珙)을 죽여 윤리를 밝혀서 귀신과 사람의 원통을 쾌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바쁜 중에 과연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이 대사헌이 된 후에 법률에 의거하여 죄주기를 청했으나, 그 상소문을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으며, 그후에도 두 차례나 올렸는데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습니다.
광해군은 비록 한 나라의 임금으로 있었으되, 모후(母后)를 유폐하였다는 것으로써 폐위되어 강도에 안치시켰거늘, 공(珙)은 왕자로서 군모를 시해하고자 했는데, 그 죄가 어찌 밖으로 물리치는 데만 그칠 뿐이겠습니까? 어미를 폐하고 어미를 시해한 죄를 유독 한 나라의 임금 노릇한 사람에게만 시행하고, 마침내 한 왕자에게는 시행하지 않는다면, 그 형벌의 적용이 심하게 잘못되니, 당초 신등이 대의를 들어 윤리를 밝히겠다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신은 듣건대, 태종조(太宗朝)에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세자가 되었을 때에 태종께서, 세종에게 성덕(聖德)이 있음을 알고 바꾸어 세울 뜻이 있었습니다. 이때 황희(黃喜)ㆍ이숙번(李叔蕃) 등이 훈로상신(勳老相臣)으로서 그 의논을 간언하여 정지시켰습니다.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 태종은 양녕대군은 광주(廣州)에 위리(圍籬)시키고 황희ㆍ이숙번 등은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습니다.
성종조에서도 귀성군 준(龜城君浚)은 세조조에서 큰 공이 있는 자인데, 어떤 사람이 고변하기를, ‘아무개가 아무개의 집에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여, 마침내 그 옥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비록 귀성군이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 대간(臺諫)은 기미를 막으려고 여러 달 논핵을 견지하여 마침내 귀성군을 먼 지방으로 내쳐 버렸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큰 계획을 하는 자는 먼 앞날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것이 조종께서 이미 행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근일 도깨비같은 목성선과 유석의 무리가 한쪽 괴이한 의논을 받아서, 곧 군모를 시해하려던 공(珙)을 죄가 없다고 하고 도리어 죄를 청한 자에게 임금을 헤아리지 못할 지경으로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이 의논이 한번 나오니, 온 조정은 기세가 꺾여 감히 기운을 내지 못했습니다. 이때 신이 연석에 들어가 목성선 등의 흉악한 꾀와 간사한 계교를 힘껏 아뢰었는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좋게 여기지 않아 지금까지 사사로운 정에 차마 하지 못하여, ‘그 아우 인흥군(仁興君 선조의 12남 영(瑛)임)의 상소문으로 인해 화를 두려워한 것이고 진심이 아니라.’는 등의 말로써 공(珙)의 죄를 용서하고자 하셨습니다. 예로부터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거나 아들로서 아비를 죽인 자는 화를 두려워하는 데에서 많이 나왔으니, 모두 놓아주고 죄주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인흥군은 비록 민망하고 절박한 사정이 있더라도 형의 죄가 이미 강상(綱常)에 관계되었으니, 어찌 감히 공론도 두려워하지 않고 공공연히 석방시키라고 청할 수 있습니까?
가령 이 거조가 있더라도 조정에는 대신이 있고, 여러 재신이 있고, 삼사가 있으니, 놓아줄 만하면 놓아주는 것도 조정의 공론에 있습니다. 어찌 한 집안 사람의 말만 듣고 그 청함을 따르십니까? 성상께서도 오히려 감히 스스로 결단할 수 없다 하여, 곧 ‘공의를 중히 여긴다.’라는 세 글자로써 대신에게 내려 물으셨으니, 대신된 자는 마땅히 대의로써 결단하여 윤리를 밝히고, 국법을 지키는 것으로써 임금 섬기는 큰 절의로 삼아야 할 것인데, 좌상 윤방은 그 회계(回啓)에서 오히려, ‘공의가 지극히 엄하다.’는 것으로써 말하고, 우상 오윤겸은, ‘공의와 사은(私恩) 두 가지를 다 온전하게 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구제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전하의 지극히 어짊을 본받는 데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마침내 의리를 밝게 보지 못한 것이니, 얼마나 탄식할 일입니까?
전하께서 매양 ‘신의 말이 상신을 범한다.’는 것으로 경계하시기에, 신은 성상의 하교를 마음에 새기고 몸에 지니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이 국가 대계와 관계되는데, 어찌 대신이 한 일이라고 해서 군부의 앞에서 힘껏 아뢰지 않아 막대한 기회를 놓치게 하겠습니까? 아! 삼사의 신하는 그 누가 자전(慈殿)의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갓 몸 보전하는 꾀만 알고 역적을 성토하는 의리는 알지 못하여 수일 동안 잠잠하게 한 말도 없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먼저 인흥군이 사사로운 정에 따라서 공의를 멸시한 죄를 다스리고, 다음으로 삼사가 자전을 저버리고 역적을 성토하는 것을 잊은 법률을 바로잡아, 한쪽으로 국법을 중하게 하고 한쪽으로 인륜을 바르게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 정묘년(1627, 인조 5) 10월. 역적 이인거(李仁居)가 횡성(橫城)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가 곧 참형에 처해졌다. 역당(逆黨) 김유(金裕)가 ‘진주(眞主)가 있다.’고 진술하였는데도 국청에서 끝내 문초하지 않았다. 최현(崔晛)이 강원 감사로 있으면서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멸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 대간에서는 다만 최현이 역적을 놓아준 죄만을 논하고, 진주(眞主)가 누구인가를 국문하라는 계(啓)는 하지 않았기에, 공은 연석에서 의리에 의거하여 배척하였다.
대개 공이 주장한 뜻은, 김유는 국문하지 않고 한갓 최현의 죄만 청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사헌 정광적(鄭光績)은 공의 말을 잘못 듣고 피혐하므로, 공은 차자를 올려 변명하였다. 공은 아뢰기를,
“역적의 옥사가 여러번 일어났으나, 추대한다는 말이 나오면 매양 덮어두고 묻지 않으니 잎사귀는 비록 없어졌으나, 큰 뿌리는 오히려 남아있어 달마다 역변이 일어납니다. 지금 만약 김유를 국문하여 죄인을 잡지 않는다면 나라는 나라답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곧 삼사가 임금을 잊고 역적을 두둔한 죄를 준절히 배척하였다.
그래서 양사가 모두 피혐하고 물러가면서 공의 말이 윤리도 없고 차마 들을 수도 없다고 배척하였으며, 옥당에서 양사가 나오도록 청하는 차자에서도 또한 공격하고 욕하는 말이 많았다. 공은 차자를 올려 변명하니, 상은 저촉된 말이 많다 하여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다.
○ 무진년(1628, 인조 6) 1월. 공은 또 김유를 국문하라고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이인거(李仁居)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실상 김유의 ‘진주(眞主)가 있다.’는 말 때문에 일어난 것이니, 김유의 악함은 이인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정 신하들은 국문을 청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괴수 역적을 덮어둔 채 묻지 않으니, ‘목욕하고 성토하기를 청한다.’는 뜻에 부끄러움이 있다 하겠습니다. 최현은 적을 놓아주었다는 죄뿐인데도 옥사가 완결된 뒤에 힘껏 다투고, 김유는 ‘진주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했으니, 그 음흉하고 참혹한 것이 최현에게 비교하여 어떠한데, 옥사가 완결되었다고 핑계하고 끝까지 추문하려고 하지 않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대간은 조그마한 한 역적의 무리에게 무슨 어려움이 있어서 반드시 끝내 덮어두고자 합니까? 한갓 신을 과격하다고 공격할 줄만 알고 다만 피혐하여 책임을 면하려고만 하니, 좋겠습니까?
이인거의 초사(招辭)에, 김유가 ‘진주가 있다.’고 하였다 하고, 진극일(陳克一)은 ‘이인거의 상소문을 김유가 썼다.’ 하고, 김유의 초사에는 또, ‘이인거가 나를 종사관으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그 종사관이 된 연유와 진주가 있다는 말과 상소문을 썼다는 일을 덮어두고 묻지 않을 수 있습니까?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신하의 분의(分義)로써 모역한 자와 더불어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고, 또 역적을 놓아주고 성토하지 않는 대간과 더불어 조정에 같이 설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불행히도 역적의 옥사가 잇달아 일어나는 것은 다른 종류의 역적이 아니고 실상 김유와 한인발(韓仁發)의 남은 것들이니, 성상께서 빨리 결단을 내리시어 춘추시대 정백(鄭伯)의 아우처럼 죄악이 만연되어 도모하기 어렵게 하지 마옵소서.”
하였는데, 상은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다. 이때 역변이 또 죽산(竹山)에서 일어났는데, 다행히 황진(黃縉) 등의 고변을 힘입어 흉당이 처참되었다. 역적의 괴수 효립(孝立)의 초사에, ‘인성군을 추대하기로 했는데, 자전의 밀지다.’고 꾸며대었다. 자전은 ‘엄하게 끝까지 추문하라.’는 것으로써 국청에 하교하였는데, 정원에서 조보(朝報)에 내지 않았으며, 국청 역시 숨기고 내놓지 않고 그 흉악한 공초를 불태워 버렸다.
공은 곧 묘당에 편지하여 그 잘못을 몹시 나무라고, 또 차자를 올려 죄주기를 청하기를,
“반정 초기부터 뜻을 잃은 좋지 못한 무리들로 무도한 짓을 도모한 자는 모두 역적 공(珙)으로써 기화(奇貨)를 삼았습니다. 그 음모와 흉계는 공(珙)이 실상 주장했으니, 오늘날의 역적 모의라는 것도 그 나머지 일입니다. 일찍이 국모를 시해하라고 수의(收議)했으니, 자전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곧 전하의 원수이며, 전하의 원수일 뿐 아니라, 곧 온 나라 신민의 공동 원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상하가 모두 역적을 성토하는 큰 의리는 알지 못하고 도리어 신더러 이치에 어긋나고 윤리가 없다고 합니다.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윤리에 득죄한 역적 괴수의 실상은 신이 올린 차자로 인하여 사방에 전파되었으니, 장차 천지 사이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까닭에 자전을 모함하여 밀지라고 핑계하고, 한쪽으로는 자신의 악을 가리고 한쪽으로는 흉한 무리를 꾀어 모았으니, 그 꾀한 것이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합니다.
그 진술한 가운데에, ‘사양하고 하지 않았다.’는 등의 말로써 본다면, 그 실상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효립의 진술한 내용을 곧 자전께 아뢰어 알린 다음, 흉악한 실상을 끝까지 추문하여 팔도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역적의 괴수가 거짓으로 지어낸 것임을 환히 알도록 하소서. 그러면 그 간사한 꾀와 음흉한 실상이 밝게 드러나 그 자전을 위해 무고를 변명하는 도리 또한 매우 통쾌하고 명백할 것입니다.
신은 알지 못하겠으나, 전하께서 이미 자전께 아뢰고 불태워 버렸습니까? 만약 아뢰지 않고 불태웠다면 자전께서 반드시 전하의 즉시 아뢰지 않은 것을 불쾌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간곡히 용서하는 조그마한 인애(仁愛)에 막혀 이 점을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까 두려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빨리 이 곡절을 자전께 자세히 아뢰고 잘 처리하옵소서.”
하였으나, 상은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다.
공은 ‘역적의 변란이 여러번 일어났는데, 엄하게 다스리지 못하여 혹 고변하는 자가 있어도 도리어 죄를 입고 후한 상은 얻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흉악한 모의를 들었더라도 이름이 사대부면 바로 고발하지 않는다. 황진의 고변 또한 거사하던 날에 있었는데, 한 걸음만 늦었어도 종묘사직의 위태함은 차마 말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니, 고변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어서 흉악한 무리의 모략을 막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 곧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에,
“천하의 근심은 항상 뜻밖에 생기는 것입니다. 난신적자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 까닭에 그 상을 중히 하여 고변하는 길을 열고, 그 형벌을 혹독히 하여 간사한 꾀를 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로부터 제왕들이 사태가 커지기 전에 막고 앞으로 올 일을 생각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광해군 때는 시기하고 의심을 지나치게 하여 여러번 큰 옥사를 일으켰으므로 거짓으로 고변한 자가 서로 잇달아 상을 받았으며, 죄없는 자가 머리를 나란히 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변한 자를 사람마다 이를 갈았는데, 그 고변한 것이 무고이기 때문이요, 참으로 고변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한 것이 아니며, 역적을 다스리는 자를 온 세상이 눈을 흘겨 보았는데, 그 다스리는 대상이 역적이 아니기 때문이요, 참으로 역적을 다스리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십수 년 이래로 온 나라가 역적을 치고 변란을 고한다는 말을 싫어하고 괴로워한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성조(聖朝)에 이르러서도 일마다 서로 반대하기만 힘써서 굽은 것을 바로잡다가 너무 지나쳤다는 결과를 면치 못하여, 사찰하는 것을 공격하고 고한 자를 미워하는 말이 한때 사론(士論)이 된 까닭에, 고변하는 한 가지 일이 세상의 큰 금령이 되었으니, 비록 백주에 대도시에서 흉한 무리가 서로 섞여서 역적 모의를 제멋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장차 감히 고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악행을 같이 모의하던 자 중에서도 비록 스스로 고하고자 하나, 고하면 재앙이 당장에 이르고 악행을 따르면 부귀를 도모할 수 있으니, 부귀를 요행으로 바라는 마음은 사람마다 있는데, 누가 이익을 버리고 의리로 나아가며, 영화를 버리고 욕보는 데로 나아가기를 좋아하겠습니까?
이인거의 변란은 영동(嶺東) 수령과 관서(關西) 기생이 정한 기한보다 앞서 알았고, 효립의 변란 또한 훈신의 집에 투서하여 날짜를 미리 고한 자가 있었는데 감히 말하지 못했으며, 허적(許)과 진극일(陳克一)이 고한 것도 반드시 그 군사를 일으키는 날을 기다렸으니, 아! 참 위태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종묘사직을 도와서 흉악한 모의가 패하여 드러났는데도, 역적 무리가 죽임에 나아간 자는 겨우 수십 명뿐이었습니다. 궁궐을 범하는 역적이 반드시 이같이 수가 적지 않았을 것이니, 이후의 걱정을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왕자(王者)가 옥사를 처리함은 진실로 죽임만을 힘쓰지 않기 때문에, 역적을 다스림에는 반드시 큰 괴수를 먼저 죽이고 근심을 항상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오늘날을 위한 계획은 근본을 굳게 하고 고변하는 길을 열어놓는 두 가지뿐입니다. 화근을 없애라는 조정 신하들의 청함이 이미 있었고, 고변자에게 상을 주라는 녹훈(錄勳)의 명이 있었으니, 이 점은 신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듣건대, ‘오늘날 공을 논하는 데에 허적만 녹훈하고 최산휘(崔山輝)는 논하지 않았다.’ 하니, 신은 불가하다고 여겨집니다. 최산휘가 심명세(沈命世)에게 실상 허적보다 먼저 고하였는데, 심명세가 시론(時論)이 두려워 감히 바로 고하지 못하고 지연시켰으니, 이것은 최산휘의 죄가 아니므로, 비록 허적과 더불어 원훈(元勳)에 아울러 녹훈한다 하더라도 또한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진극일은 이인거의 변란을 먼저 고했으니, 아울러 소무(昭武)에 녹훈하는 것이 좋으며, 문회(文晦)도 일찍이 이괄의 변란을 고했는데, 해도(海島)로 귀양보냈으니, 공으로써 놓아 돌아오게 하는 것이 가합니다. 유응형(柳應泂)ㆍ김인(金仁)ㆍ심일민(沈逸民) 등이 고한 것은 모두 오늘날 역당에 연결된 것이니, 아울러 상을 논하는 것이 가하며, 이시언(李時言)ㆍ성우길(成佑吉)ㆍ한흔(韓昕)은 모두 고변한 자에 속하는데, 형장 밑에서 죽었으니, 지금 그 원통함을 쾌하게 씻어서 장래를 권장하는 것이 가하며, 최현은 바야흐로 사형을 논하는 중에 있지만, 아들의 공으로써 아비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가하며, 또 심적(沁賊)은 이인거를 제갈량(諸葛亮)에게 비유했는데, 이인거의 모의가 역적 공(珙)을 진주(眞主)로 삼았으니, 고발은 선후가 있었으나, 그 실상은 서로 관련되었으니, 합쳐 한가지 훈(勳)으로 만들어서 도감의 폐단을 덜어주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도성 안에는 본디 역적의 집을 파서 못을 만드는 법이 없으니, 역적의 노비와 전택(田宅)은 당연히 공신에게 나눠주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은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소. 차자의 말은 묘당으로 하여금 채택하여 시행하도록 하겠소.”
하였다. 이때 국청의 여러 관원을 모두 녹훈(錄勳)하려 하는데, 최산휘는 겨우 말훈(末勳)에 참여했고, 심명세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공은 묘당에 편지하여, 공을 논하는 데 고르지 못한 것을 극히 나무라고, 또 홍서봉(洪瑞鳳)에게 편지하여 자신만 원훈에 들어가고 공을 정하는 데는 고르게 하지 못한 것이 염치없는 일이라고 나무랐다.
또 이런 뜻으로써 차자를 올리기를,
“오늘날의 공로는 허적ㆍ최산휘ㆍ심명세ㆍ홍서봉이 조금도 차등이 없는데, 홍서봉은 도리어 최산휘의 위에 올랐고, 심명세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니, 실로 그 뜻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또 역적 다스린 자를 녹훈하는 것은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있던 것이 아닙니다. 을사년(1545, 인종 1) 간흉들이 큰 옥사를 일으켜서 선한 선비를 많이 죽이고 자신에게 공을 돌리기 위해 녹공(錄功)하는 것을 처음 만들어냈으므로, 식자는 한심스럽게 여긴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선묘조(宣廟朝)에 있어서 역신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또 잘못된 견해를 따라 녹공하고자 했는데, 그때 대간 강찬(姜燦)이 옳지 못하다고 힘껏 아뢰어 윤허를 받았습니다. 원훈의 아룀으로 마침내 윤허되었으니, 흠전(欠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해조에 이이첨(李爾瞻)의 무리가 임해군과 유영경의 옥사를 얽어 만들고 그때 대간과 국청을 모두 정훈(正勳)으로 녹훈하여, 만세(萬世)의 기롱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상의 조정에 미쳐서 또 전철을 다시 밟고자 함은 무엇입니까?”
하였으나, 상은 궁중에 머물러 두고 답하지 않았다. 이때 양사에서는 공(功)을 논한 것이 고르지 못했다는 것으로써 논계하였고, 사헌부에서는 홍서봉의 훈을 깎으라고 청하였다. 그때 장관 김상헌(金尙憲)이 피혐하는 말에, ‘최산휘의 죄를 청한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홍서봉을 구하고자 하는 데에서 나온 듯하였다. 곧 이에 김상헌에게 편지하여 그 전말을 자세히 말하고, 연유를 갖추어 다시 피혐하게 하니, 김상헌은 깊이 공의 말에 감복하여 회답에서,
“거듭 타일러주신 말씀이 어두운 저를 매우 많이 깨우쳐 주었소. 문득 비뚤어지고 망령된 거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비록 뉘우친들 어찌 하겠소.”
하였다. 그때 집의 권도(權濤)도 공에게 회답했는데 또한 이르기를,
“대감께서 한 번 하신 의논은 말세의 사적인 소굴을 타파하고, 한 맥(脈)의 공도(公道)를 부식시켰습니다. 빨리 문하에 가서 제자가 되고자 하나,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 기사년(1629, 인조 7) 1월. 송광유(宋匡裕)가 윤운구(尹雲衢)의 모역(謀逆)을 고하여 호남 선비가 많이 잡혔다. 사람들은 모두 억울하다고 일컬었으나, 그 옥사가 엄중하여 감히 발언하지 못하였다. 대개 윤운구는 곧 공의 아들 시백의 처남이었는데, 공은 생각에, ‘만약 윤운구와 사돈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허물없이 억울하게 죽음을 그냥 보기만 하고 한 말도 않다면, 「임금 섬기는 데 속이지 말라.」는 도리가 크게 아니라.’고 여겨 곧 차자를 올려 변명하였으나, 상은 답하지 않고, 이어 비망기를 내리기를,
“사실이건 아니건 이미 모역이라고 한다면 신하된 자로서는 소홀히 보아 넘기지 못할 듯한데, 이번에 역적에 대한 치죄가 아이들 장난과 같아 도리어 보통 잡아다가 추문하는 것만도 못하게 하니, 공사(公事)가 매우 해괴한데, 병조 판서 이귀는 또 따라서 차자를 올려 구제하려고 하니, 매우 심하다. 원훈의 하는 행실이 이와 같으니, 나라의 기강이 떨치지 못하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다. 파직하고 추고하여 뒷사람을 경계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지금은 아직 내버려두는 것이니, 정원(政院)은 그리 알라.”
하였다. 그래서 양사는 공(公)이 옥사도 끝나기 전에 차자를 올려 변명했다는 것으로써 파직을 논했는데, 두 차례를 아뢰어서 윤허를 받았다. 공은 ‘다른 사람의 무고로 인해 선비들을 억울하게 죽이는 것은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이니, 비록 엄한 견책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말하지 않고 갈 수 없으며, 또 사헌부 한 사람의 사적인 견해로 한 말을 공격해 깨뜨려야 하겠다.’고 여겨, 진정소를 올렸으나 상은 궁중에 머물러 두고 답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도 공의 말로 인해 또 피혐하였다.
○ 2월 7일. 정사(政事)에서 병조 판서 이귀를 서용한 다음, 직첩을 되돌려주었다. 공은 곧 실정을 아뢰고 사직하니, 상은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의 마음을 알았소.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고, 또 시국이 매우 어려움을 생각하여 다시 사피하지 말고 빨리 행공하오.”
하였다. 이때 감찰 조존중(趙存中)이 또한 윤운구의 억울함을 구하다가 의금부에 구금되었는데, 형장을 쳐서 유배하는 것으로써 죄를 정했었다. 공은 생각에, ‘이 옥사를 구한 것은 나도 조존중과 마찬가지인데, 바야흐로 조존중이 죄를 입고 있는 이때에 의리상 출사하기 어렵다고 여겨 곧 상소하고 대죄하였다. 그리고 이날 인대(引對)하게 되자, 조존중의 무죄를 힘껏 아뢰니, 상은 특별히 형장을 감하라고 명하였다.
공은 또 등대(登對)하여 옥사의 원통하고 억울함을 자세히 아뢰고, 또 대신이 옥사를 완결시키기에 급급하여 말의 근거도 끝까지 캐지 않고 지레 형을 청해서 허물없는 사람을 원통하게 죽이는 잘못을 면대하여 배척하자 삼공은 모두 대죄하였는데, 이로써 공에게 특히 추고를 명하였다.
그후에 대론(臺論)으로 인해 광유(匡裕)는 마침내 반좌(反坐)의 법률을 면치 못하였다. 공은 대신이 대죄하는 것을 미안하게 여겨 두 차례나 차자를 올려 사직하기를 청하니, 상은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행공하오.”
하였다.
○ 경오년(1630, 인조 8) 1월. 북도(北道)로 귀양간 사람 양경홍(梁景鴻) 등이 오랑캐와 통하여 무도한 짓을 비밀리에 도모하였다. 박난영(朴蘭英)이 오랑캐에게 듣고 와서 말하였고, 진명생(陳命生)이 잇달아 고변하므로, 이를 힘입어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옥사를 다스려서 죄인을 잡았다. 공은, ‘고한 자에게 상을 후하게 주어 고변하는 길을 열어서, 흉한 꾀가 자연 없어지도록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 이 두 사람에게 상을 주라는 뜻으로써 차자를 올렸다. 상은 박난영 등에게 전택(田宅)과 노비를 주도록 명하였다. 그때에 종묘의 나무에 벼락이 친 재변이 있었다. 상은 곧 자신을 허물하고 신하에게 직언을 구하니 정온(鄭蘊)이 상소했는데 ‘역적 공(珙)의 관작을 회복시켜서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실지를 삼으라.’고 청한 것이었다. 공은 연석(筵席)에서 정온의 죄를 지극히 배척하고, 또 차자를 올려서 변론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역적 공(珙)이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꾀한 죄는 이미 왕법으로 바로잡았으니, 신하된 자로서 감히 다른 의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국모를 시해하라고 아뢴 행적은 온 나라의 성토일 뿐만 아닙니다. 천하의 자식된 자라면 누가 원수로 생각하고 통분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제 정온은 인륜의 대의는 돌아보지 않고 왕자를 구제하였다는 이름을 얻고자 하여 이에 역적 공(珙)을 복작(復爵)시키는 것으로써 재변을 없애는 근본을 삼으니, 이는 역적 공(珙)을 죄가 없다 하고, 온 조정이 왕자를 얽어서 모함한다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역적 모의한 자가 혹 가까운 친척에서 나오면 혹 별도로 처치한 때도 있었지만, 군모(君母)를 시해하도록 청한 죄를 범한 자에게 어찌 관작을 회복시킬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소. 정온의 상소문에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겠다.’는 데서 나온 것이고, 결코 딴 마음은 없으니, 경은 지나치게 의심하지 마시오.”
하였다.

[주D-001]청류백만(淸流白馬) : 당(唐) 나라 말기에 주전충(朱全忠)이 재상 배추(裵樞) 등 30여 인을 백마역(白馬驛)에서 죽이면서 말하기를, ‘이들이 청류(淸流)라고 자칭하니, 황하(黃河)에 던져서 탁류가 되게 하겠다.’ 하였음.
[주D-002]반좌(反坐) : 무고(誣告) 등으로 남을 죄에 빠지게 한 자에게 사실이 아니면 피해자가 받을 형벌을 동일하게 주는 법률.
 
속잡록 2(續雜錄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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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년 상숭정(崇禎) 원년, 인조 6년(1628년)

1월 1일 천둥이 쳤다.
○ 박난영(朴蘭英)이 호중(胡中)에서 돌아왔다. 오랑캐가 신유년에 심양(瀋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호중(胡中)은 곧 심양을 의미한 것임.
○ 오랑캐 차사 용골대(龍骨大)ㆍ박기내(朴其乃)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일시에 나왔다. 오랑캐의 편지의 대강은 아래와 같다.
우리 나라가 귀국에게 양식을 꼭 빌려야 되는 것은 아니나 근일에 몽고 백성이 다 귀순해 왔으므로 양식을 빌려서 그들을 구제하려는 생각이다. 귀국이 비록 탕진되었다고 핑계대지만 평안도 일대와 황해도 절반이 대병의 출입으로 잠깐 퇴폐된 듯할 뿐이며, 그 나머지 6도는 여전히 편안히 지내고 있으니 준비하기 어려울 리가 무엇 있겠는가. 한결같이 서로 약속한 수효대로 혹은 진강(鎭江)이나 혹은 수로로 수송해 주시오.
3일 죽산(竹山)에 거주하는 전 부사 허적(許)이 변란을 고발하며, 허유(許逌) 등이 이튿날 대궐을 침범할 것이라 하므로, 비변사에서 군사를 내어 고변인(告變人) 허선(許選) 등과 함께 몰래 동남문을 지켰는데, 이날 저녁에 역도들이 패를 갈라 각각의 문으로 들어오다가 모두 포박을 당했다. 최산휘(崔山輝) 역시 유효립(柳孝立) 등의 반역 사실을 고발하므로 도사(都事)를 나누어 보내 모두 잡아다 문초하니, 각 사람들이 모두 시인했다. 진술서에 어떤 이는, “애통해 하는 밀서를 강화에서 받고, 인성군(仁城君)을 시켜 의거를 일으키게 했다.” 하고, 어떤 이는 “자전(慈殿)의 밀지를 받아 인성군에게 전했다.” 하므로, 모두 사형에 처했다.
○ 중외 대소 신민에게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르노라. 국가가 불행하여 역모가 자주 국가 안에서 일어나고, 임금이 의지할 사람이 없어 큰 변이 측근에서 생겼다. 형벌과 법이 밝게 시행되니 경사와 덕택이 널리 흐른다. 나는 조그마한 몸으로 이 어지러운 뒤를 이어 받았다. 모후(母后)를 받들어 위(位)를 회복하니 인륜이 다시 밝아지고, 죄인을 물리쳐 명분을 밝게 하니 대의가 드러났다. 모든 형정(刑政)에 대해서는 매양 관대한 것으로 마음을 썼다. 원래 대역과 원흉이 윤기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면 모두 사랑하여 살려주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어찌 간당의 나머지가 감히 역적 모의를 할 줄 알았으랴. 역적 유효립(柳孝立)ㆍ정심(鄭沁)ㆍ윤계륜(尹繼倫) 등은 올빼미와 같은 본성으로, 날로 비렴(蜚廉)과 악래(惡來) 같은 행위를 하여, 혹은 권간(權奸)에게 붙어 국모를 폐하고 인륜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삼고, 혹은 임금 측근에 줄을 대어 임금의 악을 유도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죄악이 가득 차서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으나 관대하게 처리하여 시골집으로 놓아 보냈는데, 하늘처럼 떠받들 것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주인을 해칠 생각을 품었다. 그래서 귀신도 속일 수 있다 하고, 종묘사직도 넘겨다 볼 수 있다 하여 폐인(廢人)을 사귀어 밀서를 전달하여 서로 호응하고, 왕자와 결탁하여 집안 종을 모아 군사를 만들며, 참위(讖緯)를 칭탁하여 인심을 선동하고, 내시와 통하여 대궐을 엿보고, 역적을 제갈량(諸葛亮)에게 견주고, 괴수를 성인으로 지목했다. 궁중에 독약을 들여보낸 음모는 너무도 참혹한데, 태묘에 불을 지른다는 말은 어찌 차마 들으랴. 계획이 이미 이뤄지고 부서도 대략 정해졌다. 꾀를 내기는 실로 지난 해부터였고, 거사는 내일 아침으로 기약했던 것이다. 위태로운 화가 경각에 박두했는데, 다행히 천지의 말 없는 도움에 힘입어 마침내 기밀을 미리 알아낸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어서 그 음모를 폭로하여 추한 무리가 모두 포박을 당했고, 엄한 형벌을 가해서 정상이 숨김없이 드러났으니 국가에는 떳떳한 법이 있는데 내 어찌 감히 용서하겠느냐. 이미 역적 유효립ㆍ배희도(裴希度)ㆍ허유ㆍ유종선(柳宗善)ㆍ유두립(柳斗立)ㆍ안집중(安集中)ㆍ이우명(李友明)ㆍ정인(鄭遴)ㆍ허규(許逵)ㆍ정진(鄭振)ㆍ조헌립(趙憲立)ㆍ이척(李惕)ㆍ배윤(裴允)ㆍ김응호(金應虎)ㆍ김응표(金應彪)ㆍ김응사(金應獅)ㆍ김세익(金世益)ㆍ김영기(金永起)ㆍ옥석(玉石)ㆍ금남(金男)ㆍ귀희(貴希) 등을 모두 사형에 처하고, 조관을 보내어 태묘(太廟)에 고유했다. 난신(亂臣) 적자(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으랴만 궁흉 극악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다. 이미 신민의 분노를 풀었기로 이에 뇌우(雷雨)의 은혜를 베푼다. 본월 11일 새벽 이전으로……. 아, 순리대로 하면 길하고 거스르면 흉하나니, 이것이 상리(常理)요, 양(陽)은 화평하며 음은 참혹하나니, 지극한 인(仁)이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교시한다…….
○ 최현(崔晛)에 대해서는 그 아들 산휘(山輝)의 공으로 인하여 그 죄를 풀어주고 종성(鍾城)에 안치(安置)하였다. 산휘가 영사공신(寧社功臣)에 참여한 후 8월에 회맹(會盟)할 때 최현도 용서를 받았음.
○ 모문룡 등 차사들이 현재 도성 안에 있으면서 남으로 내려가 강홍립ㆍ박난영이 거느리고 옮겨놓은 사람들을 돌려보내주기를 원하고, 마침 오랑캐 차사도 왔으므로 비변사에서는 뜻밖의 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허락했다. 그래서 그들은 양호(兩湖)로 내려가서 찾아보았으나 각 고을에서는 모두 숨기고 내주지 않았다.
○ 삼사(三司)에서 합동으로 올린 장계는 다음과 같다.
“이공(李珙)의 이름이 지난 날 여러 적의 심문에 누차 나타났으나, 전하께옵서 그 목숨을 보전시키고자 하시고, 여러 신하들도 전하의 뜻에 순종한 것은 진실로 역도들이 다만 이공을 기화로 삼을 줄만 알았을 뿐이옵고, 그 반역 사실이 오늘날처럼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흉도 수십 명이 똑같은 말로 죄를 시인하여 모두 서로 호응한 것으로 문초에 나타났으며, 심지어는 위리안치(圍籬安置)한 폐주에게 편지를 전하여 집안 종들을 징발했다는 말들이 지극히 파다하니, 흉악한 자취가 드러나 불을 보듯이 명확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옵서는 또 곡진히 용서하시겠습니까. 하물며 자전(慈殿)의 밀지(密旨)라고 속여 뭇 간흉을 유혹하고, 내시와 결탁하여 불측한 꾀를 부리려고 했으니, 흉악하고 참혹한 난신적자가 예로부터 많았지만 이공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까. 신 등이 자전의 교서를 받들어 보오니, 말씀하시기를, ‘밀지를 가탁한 죄가 어찌 없을 수 있느냐?’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끝까지 말의 근원을 캐야만 한다.’ 하셨으니, 이공의 죄상이 여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도피할 수 없사옵니다. 청컨대, 난처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빨리 법에 의해 처단하도록 하시옵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을 다 유시하였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합동 장계와 어전에서의 요청이 6월에 이공을 처단한 뒤에야 그쳤음.
○ 자전께서 국청에 언문(諺文) 교지를 내려, 해조(該曹)에서 번역했는데 다음과 같다.
국운이 불행하여 역옥(逆獄)이 여러 번 일어났으나 그중에도 이번 역옥 사건은 더욱더 흉악하여 차마 들을 수도 없다. 계축년 화란은 이이첨과 박승종 두 역적이 인친(姻親)이 되는 데서부터이지만, 병오년에 대군(大君)이 태어난 뒤로 앙심을 품고 있다가 세력을 얻어 선동해서 이이첨과 박승종 두 적으로 대신한 것이요, 유영경 등은 정세가 통하지 않아서 폐모(廢母)의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으므로 외부 사람들은 그 흉계가 다 나타나지 않았다고 여겼던 것인데, 계해년 말에 그 죄를 감하여 그 자손들을 보전시켰으니 망극한 원수를 통쾌하게 갚지 못했기로 오직 천벌을 받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흉역의 화를 자초하였으니, 천도란 밝고 밝은 것이다. 내 부형의 원수를 마지막으로 갚았으니 스스로 다행으로 생각하나 적괴(賊魁) 유효립(柳孝立)이 흉악하고 참혹한 말을 만들어 냈다는 말을 대략 듣고 주상 전하께 물어본즉 그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이 적이 마침내 원망하는 마음을 드러내니 장차 양궁(兩宮)에 난을 일으키겠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유혹하여 흉계를 만들어 내자는 것인가. 밀지를 가탁한 죄상이 어찌 없다고 보겠는가. 이공(李珙)으로 말하면 나에게 죄를 진 사람이고, 폐주 이혼(李琿)은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밀지에 관한 사실은 비록 젖먹이 어린아이라도 의심할 사건이 아니니 말해서 밝힐 것조차 없지만 그 말이 지극히 흉악하니 경들이 끝까지 그 말의 근원을 캐내야 한다.
○ 삼사의 합동 장계는 다음과 같다.
“온 나라의 공론을 들어 역적을 토죄하는 대의를 아뢰옵니다. 자식으로서 모후(母后)를 폐하자고 하였으니 인륜상의 죄인이옵고, 신하로서 역적 모의를 주장했으니 천하의 극악이옵니다. 처음에는 여러 적의 기화가 되고 마침내는 역당의 포주가 되어 안팎으로 서로 호응한 실상이 명약관화일 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자전의 밀지라 가탁하고 흉도를 유혹하여 거사할 날짜까지 약속했으니 화가 불측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흉계가 탄로되어 모든 반역자가 형을 받았으니, 저 하늘에 계신 조상의 영혼이 모르는 속에 도와 전하로 하여금 원흉을 제거하고 위태로움을 돌이켜 편안한 데로 나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전하는 어찌 종묘사직의 대계를 소홀히 하여 《춘추(春秋》의 바른 법을 굽히시와 만세에 형벌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는 기롱을 끼치시고 후일의 무궁한 화를 열어 놓으려 하시나이까. 공의가 엄연히 있사오니 사사 은정으로 덮어주기는 어렵사옵니다.”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 부원수의 서목(書目)에, “탐보를 들으면 달노(㺚奴)의 대군(大軍)이 4일에 중국을 침략하러 들어갔고, 또 진달(眞㺚) 5천 명이 모문룡의 진영에 항복했다 하옵니다.”하였다.
○ 백관의 장계에, “이공의 범죄 사실이 한두 가지가 아니온데 성상의 비호를 입어 목숨을 보전했으니 의당 자기 몸을 돌아보며 살려준 은혜에 감격하여 지난 과오를 거울삼아 고쳐 나가야 할 터이온데, 도리어 흉역을 부려 이에 이르도록 극심하니, 죄악이 가득 차서 천지간에 용납되기 어렵습니다. 어찌 잠시인들 태양 아래 숨을 쉬게 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였다.
○ 허적이 소(疏)를 올리고 사직하니, 답하기를, “지금 당한 역변(逆變)은 전에 없는 흉참인데 네가 고발하여 종묘사직을 위태로운 데서 다시 편안하게 만들었으니, 나는 매우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너는 안심하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 합동 장계에, “삼사가 대궐문에서 부르짖고, 백관이 뜰에 가득 서서 똑같은 말로 하루 세 번씩 부르짖는데, 전하께옵서는 어찌 공론을 물리치고 국가의 대계를 소홀히 하시려 드시옵니까. 이공은 여러 적의 주모자가 되어 폐주(廢主)와 교통하고 안팎으로 결탁했다는 사실이 여러 흉당의 진술에 똑같이 나타났으니, 이런 죄악을 범하고서 어찌 잠시인들 숨을 쉴 수 있겠사옵니까.” 하였다.
○ 임소원(任昭媛)을 잡아 사형에 처했는데, 그는 폐주가 거느리던 사람이다.
○ 합동 장계에, “성상께서 간곡히 처리하려 하시는 것은 사정(私情)이고, 신 등이 반드시 처형해야 한다는 것은 공론이니, 오늘날 다투는 것은 사정이냐 공론이냐 하는 이 두 가지에 달려 있사온즉 여기에 근거를 두고 어느 것이 가벼우며 어느 것이 중한가를 분별해 본다면 국가에서 이공을 처리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울 것은 없을 성싶습니다. 공론은 중하고 사정은 가볍기 때문에 《춘추(春秋)》에서, ‘대의 앞에는 친한 이도 없다.’는 말을 귀하게 여긴 것이옵니다. 이 역적의 경영과 결탁을 더듬어 보면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하니, 성상께옵서 비록 비호하고자 하실지라도 천벌이 지극히 엄하고 또 친속이라도 당연히 끊어야 할 처지에야 어찌하옵니까. 지난 날 성상의 비답에, ‘밤새도록 잠을 들지 못했다.’는 하교가 계심을 뵈올 때 지극한 정에 관계되는 바이오라 어느 누가 감격하지 않으오리까만 아마도 성인의 정당하신 발론은 아닌 듯하옵니다. 이공은 스스로 하늘에 버림을 받고 신명과 사람에게 죄를 얻은 것이 이처럼 극도에 달했으니, 오직 대의로 처단하여 빨리 왕법(王法)을 바로잡으십시오.”하니, 답하기를, “인성군(仁城君)이 전후로 죄가 있는데도 간곡히 용서해 주었으니 목석(木石)이 아닌 바에야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가. 이후로는 반드시 반역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합동 장계에, “이공의 궁흉 극악한 형상은 역력히 드러나서 화가 찰라간에 촉발하게 되었는데, 전하께서는 종묘사직의 위태함을 생각하지 않으시나이까.” 하니, 답하기를, “대의로 처단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못할 바이니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였다.
○ 정온(鄭蘊)의 상소는 다음과 같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대략 탑전(榻前)에 주달하였사오나 성상께서 지척에 계시온지라, 말이 뜻대로 통하지 못하였사옵기에 부득불 신의 말을 부연해야 하겠사옵니다. 신은 친히 성상의 하교를 받자옵고 감격의 눈물이 절로 떨어졌사옵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임금님이 계시는데 그 미덕을 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겠사옵니까. 앞에서 이미 잘못하였으니 뒤에서는 당연히 경계하지 않아도 해야 하옵기로 시험 삼아 전후를 들어 비교하옵건대, 아우와 아저씨 중에 어느 편이 중하옵니까. 영창대군은 어려서 아무런 지식이 없는데 적의 입에서 나왔고, 인성군(仁城君)은 자취가 아무런 의심이 없는데 적의 진술에서 나왔으니, 누구는 원통하고 누구는 원통하지 않사옵니까. 지난날 영창대군을 죽이자고 청한 것과 오늘날 인성군을 죄주자고 청한 것이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 하겠습니까. 만약 의리의 시비와 형적의 허실을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적의 진술에만 따른다면 역옥(逆獄)이 거의 해마다 일어날 것이니, 인성을 비록 제거한다 해도 어찌 제2의 인성이 없사오리까. 선왕의 아들을 슬프게도 다 죽이니, 만약 그렇게 된다면 윤기의 어지러움이 지난날과 무엇이 다르오며, 군덕(君德)의 상실이 지난날과 무엇이 다르오리까. 윤기가 밝아지면 종묘사직이 편안하고, 군덕이 거룩하면 종묘사직이 편안해지지만, 그렇지 않고 윤기를 무너뜨리고 군덕을 상실하면 종묘사직의 위망(危亡)을 그 자리에서 기다릴 것이옵니다. 신은 실로 삼사의 이른바 종묘사직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라는 것이 무엇을 이름인지 모르겠사옵니다. 거울 삼아야 할 것이 멀지 않아 바로 광해에 있으니, 만약 광해조가 비록 혼란(昏亂)한 정사가 있었을지라도 동기간을 죽이지 않고 모후(母后)를 폐하지 않았다면 비록 전하 같으신 지극한 인(仁)과 거룩한 덕으로도 갑자기 이 자리에 계시지는 못했을 것이옵니다.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삼사의 요청이 단지 간사한 자들의 입 놀리는 바탕이 될 뿐이고, 종묘사직의 원대한 계책은 아닙니다. 뒷사람이 오늘을 보는 것이 또한 지금 사람이 옛날을 보는 것과 같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사옵니까. 신의 어리석은 마음으로는 절대 딴생각이 없사옵고, 다만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의 경지로 올려서 임금을 덕으로써 사랑한다는 의리에 의탁하고자 하는 것이옵니다. 오늘 합사(合司)에서 신은 곧장 소견을 진술하였으나 사람됨이 미미하고 말도 천박하여 믿음을 주지 못했사온데, 신이 어찌 감히 저의 소견만 옳다 하며 뻔뻔스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청컨대, 신을 직위에서 파척(罷斥)하도록 명하시옵소서.”이때에 정온은 대사간으로 있었음. 하니, 답하기를, “경의 충직한 언론에 대하여 나는 매우 아름답게 여기노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백관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전하께옵서 사변을 처리하신 데에 세 가지 실책이 있사옵니다. 폐모론(廢母論)과 윤기(倫紀)의 죄는 반정(反正)하신 처음에 특히 형법(刑法)을 왜곡하셨으니 실책의 한 가지이며, 전후의 역모는 모두 이공을 지적한 것인데도 전하께옵서 윤기를 어느 누가 문란하게 하느냐는 패악한 말에 동요되고, 임금을 불측한 지경으로 빠뜨린다는 요사한 말에 현혹되어 겨우 귀양보냈다가 다시 서울로 불러들여 마침내 망극한 화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날 뻔했으니 실책의 한 가지이며, 흉당과 결탁하고 비밀리에 모의하여 강화(江華)에 서신을 통하고 자전(慈殿)의 밀지(密旨)라고 칭탁하여 화가 조석에 일어날 뻔했는데 전하께서는 사정에 끌리시어 다시 용서하고자 하시니, 만약 세 가지 실책에 이르게 된다면 국가의 난을 구원할 길이 어디 있사오리까. 청컨대, 난처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빨리 국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흉당이 거의 다 죄를 받았으니 후환은 없을 것 같다. 경 등은 모름지기 내 뜻을 체찰하여 소란스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 종실(宗室)의 장계에, “이공의 죄악에 대해서는 조신(朝臣)들이 낱낱이 들어 아뢰었사오니, 신 등이 아뢸 필요도 없사오나 종묘사직의 대계는 하루가 급한 것이므로 감히 묵묵히 있을 수 없사와 모두 대궐 아래 모여 한 번 소회를 아뢰기로 하오니 빨리 한 번 윤허를 내려주시옵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부덕으로 인하여 이런 큰 변을 만났는데 종척(宗戚) 여러 경이 또 이 말을 꺼내니 더욱더 놀랍고 민망하다. 법을 왜곡하고 정을 따른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어서이다.” 하였다.
○ 합동 장계는 다음과 같다.
이공의 반역 사실은 심복(心腹)이 실토하고 마각이 다 드러났으니 하루라도 천지 사이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성상께옵서 모르실 리 없사온데, 백관들이 뜰 가득히 서서 날마다 세 번씩 토죄하기를 청하오되 성상께옵서 종시 난처하게 여기시는 것은 다만 차마 못하시는 마음 때문입니다. 차마 못하시는 그 마음은 인(仁)의 발로이오니 진실로 아름다우신 덕이기는 하오나 그 역시 써서는 안 될 곳도 있사옵니다. 갓 생겨난 벌레를 보고 차마 죽이지 못하는 것은 옳지만 독사를 보고 차마 죽이지 못하는 것은 불가하오며, 순진한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것은 옳지만 도적에게 차마 못하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하물며 대역(大逆)이야 사람마다 죽일 수 있는데, 도리어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서야 되겠사옵니까. 신 등이 또 옛 성인의 일로 질정해 보아도 상(象)이 그 형인 순(舜)을 죽이려고 할 그 당시에는 순이 민간에 있는 하나의 홀아비였으므로 순이 친애하는 도리로 그를 대했지만, 관숙(管叔)이 상 나라를 엎고 반역을 하였을 때에는 주공(周公)이 다만 법으로 처단했을 뿐이니, 차마 하지 못한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는 온당치 않습니다. 상체시(常棣詩)는 간곡한 비애가 깃들여 있어 몇 천년이 지난 오늘에 읽어도 눈물이 떨어지는데, 그 당시 차마 못하는 마음이 어찌 간절하지 않았으리요만, 종묘사직의 근심은 크고 형제간의 은혜는 가벼우므로 부득불 정을 억제하고 법을 따른 것입니다. 오늘의 일은 마땅히 주공으로 법을 삼으셔서 더욱 깊이 생각하시어 정을 끊고 법을 따르시옵소서.
○ 자전(慈殿)의 교지가 두 번째 국청에 내리기를, “듣자니, 이공의 반역 사실이 적의 진술에 수없이 나와서 분명히 서로 호응한 일이 있다 하며 밀지(密旨)에 관한 것을 자주 발설한다 하니, 어찌 이와 같은 흉악하고 참혹한 일이 있겠는가. 전자에 내게 한 짓은 인신(人臣)이나 인자(人子)로서 천지간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인데 이공은 차마 했다. 그렇지만 나는 어진 사람의 뜻으로 혈육을 생각했으나 그 무식한 꼴이란 사람으로 볼 수 없어 버렸던 것이다. 주상께서는 인덕이 매우 높으시와 법을 왜곡하고 정을 따르셨는데, 흉역의 진술이 모두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듯 하니, 상담(常談)에 이르기를, ‘효도란 온갖 행실의 근원이다.’ 하였은즉 지난 일을 가지고 본다면 이것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엇인들 차마 할 수 없으랴. 듣건대, 여러 날을 두고 뜰에 모여 주청했으나 아직도 윤허를 받지 못했다 하니, 종묘사직의 대계에 있어서는 구구한 사은을 생각할 수 없다. 경 등은 잘 처리하도록 극구 청하라.” 하였다.
○ 빈청(賓廳)에서 이품 이상이 모여 다음과 같이 장계하였다.
인성군 이공은 일찍이 광해가 폐모(廢母)하던 날에 하인준(河仁俊)의 흉소(凶疏)를 종묘사직을 위한 백년대계라 하면서 초야(草野)의 공론이 그 죄가 인준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이래로 여러 적이 역모를 꾸미는 데는 번번이 이공을 기화로 삼아왔는데 성상께옵서 법을 왜곡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대우를 특별히 하셨는데, 지금 이 역변의 흉악하고 참혹함은 전고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옵니다. 여러 역적의 숨김없는 실토로 보면 이공은 바로 그 주모자였습니다. 민주(閔澍) 형제는 이공과 절친한 사이이고, 김응사(金應獅)는 이공이 친애하고 신임하는 사람이오니, 이로 미루어 보면 이공이 주모자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사옵니다. 역적의 진술에, “인성군이 장정 종 90여 명이 있었는데, 어미의 상(喪)을 보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고, 또 폐주를 복위하자는 일은 인성군이 강력히 주장했고, 폐주의 밀서(密書)는 인성군이 받았고, 폐주를 맞아들여 상왕(上王)을 삼고 인성이 임금이 되기로 했고, 또 내시 배희도(裴希度)를 시켜 장사(壯士) 김취려(金就礪) 등과 결탁하고 그들을 몰래 궁중으로 들여보내 장차 불측한 모의를 실행하기로 했고, 또 동전(東殿) 사약(司鑰) 김응사(金應獅)를 시켜 궁녀 향이(香伊) 등과 결탁하여 독약을 음식에 넣을 작정이었고, 병조 결속리(結束吏) 김응표(金應彪)를 시켜 입직하는 병조 당상(兵曹堂上)을 죽이고 문을 열어 내응하기로 했다.”는 등의 흉악한 말들이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 같았으며, 심지어는 차마 말할 수도 없는 말을 지어내서 온 세상을 속일 계획을 했다는 것이 분명히 유효립(柳孝立)의 진술에서 나왔으니, 앙화를 품은 죄가 하늘에까지 알려졌습니다. 인신(人臣)으로 이러한 죄명을 짊어졌으니 어찌 용서할 수 있겠사옵니까. 빨리 법대로 처단하시옵기를 간청하옵니다.
전교하기를, “나는 전부터 비호하여 되도록 안전을 기하려 했는데 국운이 불행하여 또 이러한 변을 만나게 되니 부끄러움이 그지없어 마음을 가눌 수 없다. 사정은 비록 중하나 공론을 막을 길이 없으니 부득불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은즉 우선 밖으로 내쳐서 틈을 엿보는 길을 끊어버리도록 하라.” 하였다.
종실(宗室)의 장계에, “법이란 것은 조종(祖宗)에서 세워 온 나라와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니, 높으신 임금으로도 경중을 둘 수는 없사옵니다. 천자(天子)의 아버지가 살인을 했더라도 법관은 마땅히 잡아 가둬야 하는데, 하물며 반역이란 천하의 극악인데 어찌 법을 무시하고 사정을 펼 수 있겠사옵니까. 전하께서 전후에 이공을 대우하신 도가 극진하셨는데도 이공의 죄악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으니 지금은 다시 용서하여 후일의 근심을 끼치게 해서는 안 되옵니다. 더구나 요즘은 변방의 근심이 매우 긴박하고 민심이 동요하고 있사오니, 이 일로 백관이 모두 모이고 상하가 서로 견지하여 직무를 폐할 시기가 아니옵니다. 대궐에 있는 신하가 만약 요청을 얻지 못하오면 달이 가고 해가 가도 결코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 금부(禁府)의 장계에, “이공의 반역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사옵니다. 지금 우선 귀양 보내라 하신 전교가 내려 대신(大臣)ㆍ백관ㆍ삼사가 의논한 결과 중죄를 따져 우선 제주(濟州) 정의현(旌義縣)으로 내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보통 재신(宰臣)의 유가 아니오라 본부 도사(都事)가 선전관(宣傳官)을 대동하여 따라 가고, 또 병조로 하여금 별장(別將)을 택하여 압송하게 하며, 지나가는 삼도(三道)에 차사원을 정하여 장관(將官)을 대동하고 군인을 많이 거느려 옹호하게 하며 차례차례로 교부하되, 비상한 단속을 하게 했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장계에 의하여 거행하되 제주는 너무 머니 진도군(珍島郡)에 안치하라.” 하였다.
○ 백관이 뜰에 모여 청하기를, “전하께서 사정에 가려 대의에 어두우십니다. 궁지에 몰린 짐승은 반드시 사람에게 덤비는 법이고, 평원의 불길은 끄기 어렵사오니, 역적 괴수를 없애지 않으면 화근이 여전히 남아 있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 잠복했다가 터지는 법이온데, 귀양보냈다 해서 근심이 없어질 수 있겠사옵니까. 청컨대, 여론에 따라 대의로 처단하시옵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밖에 딴 법을 가하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 하고, 전교하기를, “인성군이 배소(配所)로 갈 때는 중사(中使)와 수직 내관(守直內官)이 내려가고, 도마다 말을 내주도록 금부에 말해서 인성의 처자도 내려 보내 그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망기에, “지금 이 역변은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허적이 듣고서 곧 달려와 고변(告變)해서 종묘사직으로 하여금 위태로웠다가 다시 편안하게 하였으니, 충성이 일월을 꿰뚫고 공이 사직에 있다 할 만하다. 마땅히 진작 공을 기록하여 그 충성을 표창했어야 될 듯하니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결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의 장계에, “흉역 뒤에 안팎으로 호응하여 대궐을 침범할 약속이 그날 밤에 있었는데, 허적이 듣고서 곧장 고발했으니 그 공이 크옵니다. 하교하신 대로 공을 기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장계대로 하라.” 하였다.
○ 부원수의 장계에, “중국 사람이 오랑캐 차사를 노릴 의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 군자정(軍資正) 허적의 상소는 다음과 같다.
신이 어제 소명(召命)을 받자옵고 대궐로 달려 나아가 보니, 신으로 하여금 빈청(賓廳)으로 들어가서 공훈을 감정(勘定)하라 하시옵기에 신이 낭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사옵니다. 생각건대, 신이 불행히도 흉역이 절친한 친족에서 나왔으니 옛날 저 진(秦)ㆍ한(漢)의 법으로 다스린다면 멸족(滅族)을 당할 처지에 있사온데, 성상께옵서 법이 관대하시옵고, 신이 다행히 먼저 고발하여 비록 죄벌을 면하였사오나 어찌 기록할 만한 공이 있사오리까. 만약 공훈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어도 이미 분에 넘치는 일이온데, 하물며 자신이 원훈(元勳)으로서 여러 사람의 공훈을 감정한단 말이옵니까. 신이 비록 불인하나 어찌 버젓이 자처할 수 있사오리까. 신은 허유(許逌)가 군중을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가려 할 적에 신의 아우 허계(許禊)가 신과 밤낮으로 의논하며 침식을 전폐하고 서로 마주보고 눈물만 흘리다 마침내 신이 말하기를, “마땅히 시급히 고발해야 하겠는데 나나 너나 늙고 병든 몸이니 어찌하면 좋으냐?” 했더니, 허계의 말이, “자식 허선(許選)으로 하여금 밤을 새워 달려가게 하면 허유(許逌)가 당도하기 전에 들어갈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의 말에 따라 조카 사위 전 판관 황진(黃縉)을 불러서 허선과 같이 가게 하려고 하니 황진은 제 아비와 의논해야 한다고 하고 드디어 그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아비는 이름이 성원(性元)이온데 나이는 늙었지만 강직한 사람이라서 그 말을 듣자 성내어 꾸짖기를, “국가에 변고가 있어 신하가 달려가 고발할 때는 일각이 급한 것이어늘 너는 어찌하여 집으로 돌아왔느냐?” 하고, 신에게 쫓아 보내어 허유가 군중을 동원했느냐고 묻기에 신은 사실대로 알려주고, 또 편지를 써서 황진에게 전하기를, “만약 허유의 사건이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너와 함께 달갑게 죄를 받을 것이고, 사건이 확실하다면 종묘사직이 네 수고에 힘입어 편안하게 될 것이니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지체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원이 마침내 황진을 달려 보내면서 편지를 써서 한 장은 홍서봉(洪瑞鳳)에게 전하게 하고, 또 한 장은 김유(金瑬)에게 전하게 함과 동시에 산골짜기 샛길로 밤을 새워 달려가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닭이 울 무렵에 삼전도(三田渡)에 당도하여 사람과 말이 몇 번이나 넘어지고서 이후배(李厚培)와 이후원(李厚源)의 집으로 들어가 먼저 후배를 홍서봉의 집으로, 후원을 김유의 집으로 보내고, 또 신이 써 보낸 쪽지를 전달하고서 허선과 황진은 잠시 말을 쉬게 한 다음 함께 홍서봉의 집으로 갔었답니다. 그래서 서봉은 즉시 여러 장상(將相)들에게 이 사실을 통고하고, 김유는 곧 편비(褊裨)와 군졸을 징발하여 한편으로는 계엄태세를 갖추고 한편으로는 포박해 들이니 흉당이 붕괴되고, 허유는 그 아우와 함께 처형되었으므로 그 흉계가 미수에 그쳤던 것이옵니다. 또 두견(斗堅)은 허유의 심복인지라, 허유가 두견으로 하여금 김진성(金振聲)ㆍ김득성(金得聲)ㆍ신서회(申瑞檜)를 모아 장차 모의에 응하자고 하니, 득성은 바로 성원의 서녀(庶女) 사위가 되므로 밤에 찾아가서 사유를 아뢰고 결정 지을 생각이었습니다. 성원이 그 말을 듣고 놀라 발을 구르며 대의를 들어 꾸짖고, 허유의 도당 속에 들어가 그 사실을 알아내게 하는 한편, 홍서봉의 집에 달려가서 허선 등에게 알리게 하였습니다. 두견은 이미 세 사람을 잃어버리고서 이쪽저쪽에 어찌할 바를 몰라 뒤에 따라와 동향을 엿보고 있었으므로 서봉이 사람을 시켜 포박하게 하니, 그 내용을 낱낱이 털어놓았습니다. 서봉이 포박을 풀어주고 김유에게 통하여 이 네 사람을 비변사로 보내어 다시 정원(政院)으로 넘겨 문초를 받게 한 후 그 무기를 회수하고 그 도당을 잡아서 마침내 옥사(獄事)가 성립되었던 것이옵니다. 이것으로 말하오면, 허계와 성원의 힘으로 변고를 고발하게 되었고, 홍서봉과 김유의 힘으로 변고를 막아서 마침내 종식된 것이니, 신이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약간의 쪽지를 써서 일을 주선한 데 불과하오니 다만 손 한 번 움직인 수고이온데 어찌 감히 염치없이 여러 대훈(大勳)의 위에 있는단 말이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빨리 원훈의 칭호를 환수하시고 홍서봉과 김유로 하여금 그간의 공로를 자세히 고찰하여 그 실상을 알게 하시고, 신으로 하여금 분수에 편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답하기를, “네가 원훈이 되어도 조금도 불가한 것이 없으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 영사공신(寧社功臣) 양릉군(陽陵君) 허적 등 32명을 녹훈(錄勳)했다.
○ 이조 참판 홍서봉(洪瑞鳳)의 상소는 다음과 같다.
신은 금월 3일 아침 식전에 허적의 고변장(告變狀)을 보고 급히 사람을 달려 보내어 이서(李曙)에게 전하여 그로 하여금 신경정(申景禎)ㆍ구굉(具宏)ㆍ김자점(金自點)ㆍ김유(金瑬)ㆍ이귀(李貴)에게 두루 보이게 하였사온데, 황진이 뒤에 와서 하는 말이, 이적이 믿고서 거사한 것은 도감 중군(都監中軍) 이계선(李繼先) 때문이라고 하기에 신은 빨리 신경정에게 통하려고 했사오나, 마침 주상께옵서 오랑캐 차사를 접대하시는 시간이오라 대궐 안 출입은 사람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옵기로, 이의배(李義培)를 불러서 쪽지로 신경정에게 통하여 곧 기회를 보아 선처하라고 당부하고서 확실한 회보를 얻지 못하여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하던 참이었습니다. 정오에 김득성(金得聲) 등 네 사람이 황진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적도가 판교(板橋)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성안으로 들어올 계획이므로 저희들이 몸을 빼어 먼저 왔다.” 하옵기로, 신이 비변사에 가서 그 사실을 알려주니, 제신(諸臣)들이 김진성 등으로 하여금 정원에 고발하게 하고, 또 이서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파정(派定)하여 신서회ㆍ두견을 거느리고 남대문 수구문(水口門)에 매복하여 역적들을 잡게 하였던 것이옵니다. 대개는 이에 그칠 따름이오며, 신은 조금도 힘을 들인 일이 없사온데, 빈청(賓廳) 대신이 원훈을 결정하는 마당에 있어 신과 함께 의논해서 결정하자고 요구하옵니다. 그러하오나 신이 어찌 감히 체면 없이 공훈을 결정하는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겠사옵니까.
○ 김유(金瑬)의 차자에, “본월 3일에 신이 비국(備局)에 있다가 허적의 고변장을 받아보고 그것을 신흠(申欽) 등에게 보여주었을 뿐이오며, 조금도 주선한 일이 없사옵니다. 허적이 전후에 신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실로 이해가 가지 않사옵니다. 신은 다행히 성대를 만나 명망과 지위가 이미 극에 달했사오니 다 늙은 인생이 무엇이 부족해서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으오리까. 빨리 성명(成命)을 환수하옵시길 바라옵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 합동 장계에, “이공은 비록 존속(尊屬)이기는 하나 폐세자(廢世子)에 비하면 명예와 지위가 같지 않사옵니다. 담장 밑을 파고 빠져나온 것은 비록 해괴스러운 일이오나 친히 흉도와 약속하고 반역을 도모한 것에 비하면 오히려 가볍사온데, 저쪽은 처단하시고 이쪽은 난처하게 여기시니 전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사옵니다.”하였다.
2월 합동 장계에, “신 등이 이공의 죄악을 들어 곧장 국법대로 하실 것을 청했사오나 성상께서는 더욱 막연히 들으시어 한결같이 거절만 하고 계시옵니다. 이처럼 국사가 다난할 때 밖으로는 강한 되놈이 날뛰어 우리 백성을 유린할 상황이 조석에 임박했사옵고, 안으로는 민심이 흩어져 흉역이 계속 일어나니, 만약 나라에 큰 난리가 있어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않을 적에 흉도들이 틈을 타고 덮친다면 전하께옵서는 어떻게 처리하시렵니까. 빨리 왕법을 바로잡으시와 후회가 없도록 하시옵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법에 따랐으니 죄를 추가하는 것은 차마 못하겠다.” 하였다.
○ 모영(毛營) 접반사(接伴使)의 서목에, “명 나라 장수 서고신(徐孤臣)이 벽동(碧潼) 사람에게 타살되었다.” 하였다.
○ 전 목사 송흥주(宋興周) 등이 도내에 통문(通文)을 돌려 금산사(金山寺)에서 모였다. 그 통문에, “이공의 전후 죄상을 따져 보면 결코 하루도 함께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는 없다. 하늘은 온 천하의 하늘인데도 오히려 함께 살 수가 없는데, 한 조각 호남으로 어찌 일각인들 땅을 빌려주어 흉악하고 추한 자취에 더럽힐 수 있으랴, 이웃 나라에서도 마땅히 토죄(討罪)할 것을 청해야 하거늘, 하물며 한 나라와 한 도내이랴. 어떻게 받아들인단 말이냐…….” 하였다.
○ 합동 장계에, “신 등의 민망한 정상은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자는 것만이 아니옵니다. 하루아침에 큰 화가 일어나 누군들 죽지 않으오리까. 신 등의 심정도 너무 슬프옵니다. 전하께옵서는 어찌 한 역적에게는 차마 하지 못하시면서 조정의 신하들에게만은 차마 하시렵니까.” 하니, 답하기를, “왕친(王親)은 보전하지 않을 수 없는 근심에서이다.” 하였다.
○ 강화 별장의 서목(書目)에, “광해(光海)가 하루에 물과 밥을 한두 숫갈만 들며 기력이 점점 떨어져 항상 통곡만 합니다.” 하였다.
○ 합동 장계에, “혼조(昏朝 광해조를 말한 것)의 여러 간흉이 윤기를 무너뜨리고 나라를 병들게 하여 종묘사직이 위태롭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게 하였사오니, 비록 멸족(滅族)을 당한다 해도 속죄하기 어려우나 반정(反正)하신 후에 특별히 관대하신 은전(恩典)을 베푸셨는데, 지금 그 남은 도당이 진실로 많아서 마음을 고칠 것은 생각지 않고 도리어 원망과 독을 품어 흉악한 말을 만들어 인심을 동요시키고 서로 연결하여 난역을 모의하니, 만약 지금 잘 처리하지 않는다면 화란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옵니다. 청컨대, 역적 이이첨(李爾瞻)ㆍ정조(鄭造)ㆍ윤인(尹訒)ㆍ이위경(李偉卿) 등의 형제나 자손과 박승종(朴承宗)ㆍ유희분(柳希奮)ㆍ정길(鼎吉) 및 역옥(逆獄)에 관련되어 형을 받은 자의 자손에 대해서는 나이가 비록 어리더라도 모두 외딴섬으로 내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배소(配所)에 있는 자도 다시 가시 울타리로 막아 외부인과 교통하지 못하게 하시옵소서.”하니, 장계대로 윤허했다.
○ 이난(李灤)ㆍ박난영(朴蘭英)으로 회답사를 삼아 오랑캐에게 보냈다.
○ 배신(陪臣) 권호(權怙)가 8일에 증산(甑山)에 무사히 당도하여 정박하고 새 황제(皇帝)의 조칙을 받들었는데, 조사(詔使)가 나오지 않았다.
○ 오랑캐 차사가 나올 적에 중국인 네 명이 선천(宣川) 동로참(東路站)에서 피살되었다.
○ 자전(慈殿)의 언문 교지는 다음과 같다.
흉적이 무도하고 흉악한 말을 퍼뜨려 심지어는 영안위(永安尉)와 병조 판서 병조 판서는 이정구(李廷龜)요, 영안위는 이정구의 외손 홍주원(洪柱元)인데, 지금 자전의 부마(駙馬 사위)가 되었음 에게까지 미치고, 내가 쓴 흉악한 편지가 이공(李珙)의 처소에 있다고 한다 하므로 잡아다 문초를 하고 그 편지를 찾아 통렬히 변별하고자 하니, 이 뜻을 부디 국청에서 대전(大殿)께 아뢰어 처리하라. 그는 인륜에 죄를 지어 인심이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밀지를 받았다는 말을 만들어 흉도들의 귀에 들어가 마치 내가 그 죄악을 풀어준 듯이 하고 있으니 어찌 이처럼 통분한 일이 있겠느냐. 대왕께옵서 골육지친을 안보하려는 어진 마음을 지니시어 저놈의 강상(綱常)에 관한 죄과를 다스리지 않으시니 이는 인(仁)으로 잘못되는 격이다. 저놈들은 한 놈도 자식으로서 우애의 정에 돈독한 적이 없으며, 공주(公主)가 10년 동안 유폐되었다가 비로소 밖으로 나가게 되었는데도 이공과 이제(李瑅)는 끝내 가 보지 않고 항상 자기들이 스스로 만든 죄악이기 때문에 가 보지 않는다고 했다. 미망인인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다시 하늘을 보게 되었으니 결코 부형의 원수를 갚을 것이며, 갚은 뒤에는 당연히 죽어 지하에 가서 부형을 위로해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 살아 남아 이러한 뜻밖의 말을 듣게 되니 통분하여 뼈가 녹을 것 같다. 이는 반드시 모진 목숨이 지금까지 버젓이 남아 있어 천지에 미움을 받아서 또 역적들의 입에 오르게 되니, 이공을 만약 잡아오면 국문한 뒤에 차라리 그놈 앞에서 세상을 버리고 싶다. 왕자가 하나도 사람다운 놈이 없으니 금후로는 왕자의 집 문안 편지도 페할 작정이다. 임금이란 나라를 다스리는 데 고뇌하여 매우 근심스러운 일이 있을 것이니 편안히 지내는 나만 못할 것이다. 외친(外親)이 나이 늙었으니 지나간 쓰라림을 다 잊고, 노친의 마음을 위로하며 항상 즐겁게 날을 보낸다. 이밖에 또 무엇을 바라겠느냐. 오직 주상께서 평안하시기만 기원할 따름이다. 비록 꿈속에서라도 어찌 이와 같은 말을 들을 줄 생각이나 했겠느냐. 이공의 죄악에 대해 지금 사형을 하지 않는다면 너무도 온당치 못하다. 경 등은 부디 힘서 청하여 윤허를 받으라. 이 교지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 삼사(三司)와 백관이 장계를 올리기를, “어제 자전의 교지가 또 내려 글 뜻이 엄하고 간절하오며, 35명의 역적이 똑같은 말로 승복했사온데, 전하께옵서는 어찌 종묘사직을 위하지 않으시나이까.” 하니, 답하기를, “방간(芳幹)이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했으나 태종(太宗)께서는 그 도당만 죽이시고 그 목숨은 보전시키셨고, 문종(文宗)께서도 용서하시와 타고난 수명대로 살게 하셨으니, 이는 조종조(祖宗朝)의 미덕으로 오늘도 본받을 만하다. 내가 비록 불초하나 조종을 본받고자 한다.” 하였다.
○ 합동 장계는 다음과 같다.
신 등이 《예기(禮記)》를 상고해 보니, “공(公)의 친족이 죄가 있을 경우에는 유사(有司)가 공에게 아뢰기를, ‘아무개의 죄는 큰 죄에 해당합니다.’ 하면, 공은 용서해 주라 한다. 유사가 또 아뢰기를, ‘큰 죄에 해당합니다.’ 하면, 공은 용서해 주라 한다. 유사가 또 아뢰기를, ‘큰 죄에 해당합니다.’ 하면, 공이 세 번째 용서해 주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 유사는 대답도 하지 않고 가서 교외(郊外)로 나가 전인(甸人)에게 의뢰하여 죄인을 경사(罄死 목매 죽이는 형임)시킨다. 공은 사람을 시켜 쫓아가서 말하기를, ‘기필코 용서해 주라.’ 하는데, 유사는 벌써 늦었다고 대답하고 돌아와 공에게 보고한다. 그러면 공은 소복(素服)을 입고 곡한다.”하였습니다. 죄가 법에 가득 차면 법관도 법을 어길 수 없고, 임금의 힘으로도 법을 굽힐 수 없습니다. 한 번 고하고, 두 번 고하고, 세 번 고하는 것은 공의 지극한 뜻을 체찰하여 감히 주견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옵니다. 경(罄)은 달아맨다는 뜻이고, 전인(甸人)은 교야(郊野)를 관리하는 벼슬아치입니다. 유사가 공을 위해 숨기므로 감히 시조(市朝)에서 매달아 죽이지는 못하고 나가서 전인에게 내주어 매달아 죽이게 한 것입니다. 첫 번째 용서하라 두 번째도 용서하라 세 번째도 용서하라 한 것은 역시 사정 때문에 선뜻 죽이지 못하는 것이고, 사람을 쫓아 보내서 반드시 놓아주라 하였지만 감히 놓아 줄 수 없기 때문에 유사는 벌써 늦었다고 보고한 것이고, 마침내 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소복으로 곡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차마 못하는 것도 해야 할 자리에 해야 하고, 해서는 안 될 자리에 하지 않는다는 것이옵니다. 신 등이 무려 몇 번째 고하고도 아직 전인(甸人)에게 내주어 목을 못 매달았사옵고, 전하께옵서 무려 몇 번째 용서하라 하시고도 기필코 용서하라는 교서를 내리시렵니까. 위아래가 서로 견지하여 고하고 그치고, 용서하라 하고 그친다면 흉역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일후의 화는 오늘보다 더욱 참혹할 것입니다.
○ 오랑캐 차사 고아부(高牙夫)가 회령에 시장을 개척하는 일로 우리 나라에 왔다.
○ 합동 장계를 올렸는데, “이공에게는 차마 못하시면서 종묘사직에는 차마 하시니, 자전께서 훗날 사당에 들어가실 때 어떻게 종묘사직의 영을 위안하며, 전하께서 조석 문안하실 적에 자전이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하시렵니까?” 하였다.
○ 동지사(冬至使) 변응벽(邊應璧)의 장계에, “서장관 윤창립(尹昌立)이 배가 표류되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하였다.
26일 박난영 등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왔다. 용골대(龍骨大)가 오랑캐 상인과 소도리(所道里)를 수호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와 진강(鎭江)에 천여 명이 있으면서 압록강을 건너 시장을 개척하는데, 오랑캐는 종종 성을 내고, 용골대는 온갖 공갈만 하며, 농우(農牛) 3백 마리에 대한 청탁을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 권호(權怙)가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서울에 당도했다. 황제의 조서에, 조선 국왕이 아뢴 글 중에 오랑캐가 침입하였다는 일에 대하여 성지를 내린 것은 다음과 같다.
왕의 주장(奏狀)을 보고 병화를 입은 사실을 알게 되니 짐(朕)의 마음이 매우 측은하다. 오랑캐와 사신을 교환하고 형편에 따라 군사를 응원한 것은 왕의 본의가 아니며, 군신의 대의에 있어서는 해와 별같이 밝아서 왕의 충성심을 짐이 밝게 아는 바이다. 오랑캐의 정상은 헤아릴 수 없고, 탐욕은 한이 없는 것이니 왕은 더욱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뜻을 가다듬어 더욱 엄밀히 방비하라. 짐도 모문룡에게 영을 내려 마음을 다해 오랑캐를 견제하여 왕의 도움이 되게 할 것이니, 피차가 협력하여 최후의 성공이 있기를 바란다. 중국과 속국이 함께 힘을 써서 도모할 것이다. 선대 황제께서 이미 여러 신하를 버리고 승하하셨기로 짐이 황제의 위(位)를 이어 받았으니, 내년을 숭정(崇禎) 원년으로 정하고 따로 조서를 내려 속국에 반포할 것이나, 우선 비답을 내려 왕에게 알게 하는 것이니 예부에서는 그리 알라 하니, 예부에서 짓기를, “조서를 개독(開讀)하였습니다. 천계 7년 8월 24일에 황상(皇上)께옵서 대업을 이어 받아 보위(寶位)에 오르셨기로 조서를 천하에 반포합니다. 천명(天命)이 새로워져 중화(中華)나 외이(外夷)가 모두 떠받듭니다. 조선은 일찍부터 예의의 나라라 일컬어져 본래 충순(忠順)의 직무를 닦아왔습니다. 그래서 전례대로 관원을 선정하여 조칙ㆍ예물 등을 싸 보내어 조선에 가서 펴서 읽게 할 것입니다. 전례에 의하여 국왕에게 저사(紵絲) 10벌, 비단 4단(端)을, 왕비에게 저사 6벌, 비단 2단을 내립니다. 모두 내부(內府) 승운고(承運庫)에서 받아서 싸가지고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더니, 인해 성지(聖旨)를 받자오매, “짐이 새로 즉위하여 조서를 조선에 반포하는 것은 원래 구전(舊典)에 속해 있다. 그 나라가 병화를 입은 뒤에 관리를 선정하여 그곳에 보내면 폐가 많이 될 것이니 예부에서는 다시 참작해 오라.”하시었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삼가 두세 번 읽어보니, 황상께서 만리 밖을 밝게 보시고 이 속국을 생각하시와 차마 교화(敎化)의 밖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또 많은 비용을 부담시키려 하지 않으시니, 참으로 천지와 같으신 마음이시옵니다. 신 등은 편의를 참작해서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한 사람을 선정하여 조서와 예물을 받들어 가지고 등래(登萊)로 나가서 진무사(鎭撫使)에게 교부하면, 진무사가 관리를 선정하여 모 장군에게 교부하고, 모 장군은 다시 관리를 선정하여 받들고 그 나라로 가서 개독(開讀)하게 하겠사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옵서 제정하시와 명령을 내려 주시면 그대로 받들어 시행하겠사옵니다.”하였더니, 천계 7년 10월 1일 성지(聖旨)에 조선국에 보내는 조서ㆍ예물 등은 그 나라 배신(陪臣)에게 주어 가지고 가게 하고, 관리를 선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하였다.
○ 중외 신민에게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로노라. 성인(聖人)이 처음 나서 명성이 중국에 가득하고, 조서가 내려 영화가 동방에 빛났도다. 만물이 모두 우러러보고 팔도가 함께 기뻐한다. 생각건대, 명 나라에 충순하는 것은 진실로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가법이라, 지난날 즉위함으로부터 옛 법을 어김이 없었다. 모든 큰 은전(恩典)이 있게 되면 내복(內服 중국 내의 제후국)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므로 태자가 새로 즉위하자 황제의 조서가 선포되었다. 열 줄의 밝은 글은 먼저 중국에 대한 마음이 돈독함을 추앙했고, 만 리 밖을 환히 내다보아 오랑캐 침략이 치성한 것을 걱정했으며, 잇달아 예물을 내려 돌아오는 배신(陪臣)에게 보내고, 많은 경비를 염려하여 선정한 사신을 철회했다. 먼 나라 사정을 알아주고 아랫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인(仁)을 베풀고, 보내는 것은 후히 하고, 받는 것은 박하게 하는 의(義)를 밝혀서 온 세상이 장차 태평을 누릴 것인데, 우선 한 지방이 특별히 은총을 입었다. 이에 본월 26일 무오에 백관을 거느리고 조서를 맞이한 다음, 관리를 보내어 종묘사직에 두루 아뢰고 여러 신하의 하례를 받았다. 이야말로 온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큰 복이니 마땅히 신민과 더불어 경사를 같이해야 한다. 27일 새벽 이전으로부터……. 아, 5백 년이 되면 성왕(聖王)이 나온다 했으니 인류가 다행히 성대를 만나서 억만년이 지나도 다함이 없으리니 태평은 오늘부터이다.
○ 합동 장계를 올리기를, “죄악이 이공처럼 많은 사람도 형을 면한다면 주공(周公)은 성인이 아닙니다.” 하니, 비답이 내리기를, “지금 이공이 설혹 범죄가 있더라도 그 몸만은 선왕께서 물려주신 몸이다. 내가 차마 죄를 주지 못하는 것도 실상은 이 점에 있다.” 하였다.
3월 2일 밤 2경에 동ㆍ서ㆍ남ㆍ북 사방에 화기(火氣) 같은 것이 있었다.
○ “용만(龍灣)에 사는 오랑캐 상인이 급료(給料)를 주지 않는다고 공갈 협박을 하므로 우선 1백 석만 마련해서 보내 주었습니다.” 하였다. 평안감사의 장계
○ 합동 장계에, “지금 변고가 측근에서 생겨 종묘사직이 기울어질 뻔했는데 전하옵께서는 전혀 살피지 않으시니 만약 풍진의 변고를 만나 불측한 화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방어하시렵니까. 죄인이 제거되지 않으면 자전(慈殿)께서 편안하시지 못할 것이니, 온 나라가 지극히 봉양하고 하루에 세 번씩 문안하는 것은 오히려 말단이옵니다.” 하니, 비답이 내리기를, “흉도(凶徒)들이 점을 쳐보고서 임금이 되기에는 합당하지 않다 하였으니, 흉도에게 버림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장계하기를, “나라 형편이 어떠하옵니까. 민심이 어떠하옵니까. 오랑캐 사신이 자주 오매 변방의 염려는 한두 가지가 아니옵고, 모문룡은 횡포하여, 요망한 말로 공갈 협박하고, 바닷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개미가 편싸움하는 재변이 진도(珍島)에 나타나더니 흉도들이 다시 난을 꾸민다는 설이 과연 재변의 예고에 맞았는데, 전하께옵서는 구중 궁궐에 깊이 계셔서 아시지 못한 것이옵니다. 빨리 처결을 내리시옵소서.” 하였다.
○ 강화(江華) 관청의 종 덕신(德信)이 제 아비를 죽였기로 잡아다가 처형했다. 세태의 변화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할 일이다.
○ 압록강에 쌀 1천 석을 실은 배가 정박했는데, 왕참장(王參將)이 빼앗아 가지고 곧장 신도(薪島)로 향했다.
○ 의주(義州)에서 보고한 서목에, “쌀을 실은 배 9척이 미곶(彌串) 앞 나루에 와서 정박했는데, 중국인에게 빼앗겨서 대여미를 나누어 주지 못하여 백성들의 목숨이 끊어지게 되었고, 농사도 가망 없으니 묘당(廟堂)에서 선처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하였다.
○ 함경 감사의 장계에, “오랑캐 자로(者老)ㆍ중남(仲男) 등이 종자(從者) 50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회령(會寧)에 시장 개척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공갈 협박합니다.” 하였다.
○ 의주에서 올린 장계에, “용만에다 시장을 열었을 때 물건을 판 수량이 겨우 1만 4천여 냥이었습니다.” 하였다.
○ 모문룡의 차사(差使) 모영우(毛永佑)가 강화(講和)에 대한 일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오랑캐 차사와 함께 돌아와서 본영으로 향했다.
○ 인산(麟山)에서 보고를 올리기를, “왕참장(王參將)이 빼앗아 간 배 9척을 떠나보내고 밤 2경에는 포 소리가 바다 어귀에서 크게 진동했으며, 또 도독(都督)이 사람을 보내어 오랑캐 차사를 영접하여 18일에 사포(蛇浦)로 향했는데, 우리 나라 통사(通使) 등을 명 나라 사람들이 몰아서 내보냈다.” 하였다.
○ 모문룡 장수가 배를 타고 압록강 하류에 당도하여 오랑캐 두목을 만나자고 요청하여 달자(㺚子)에게 타일러 데리고 와서 화친하자고 했다. 오랑캐 차사 곡호(曲虎)ㆍ대보내(帶寶乃) 등이 사포에서 돌아오자 왕참장이 친히 길에 나가 영접하는데 지극히 후대하였다. 달노(㺚奴) 7명이 한(汗)의 서신을 가지고 화친을 맺는다 칭탁하고 안주에서 배를 타고 가도(椵島)에 와서 정박했다. 의주에서 운반해 들이는 쌀을 실은 배 3척을 도독이 이미 자기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 나머지 9척도 모두 붙들어 놓았다.
○ 곡호(曲虎)는 그대로 가도에 머물고, 따라온 오랑캐 2명은 모문룡의 차사 두 사람과 함께 심양으로 갔다. 25일에 도독은 군사를 거느리고 진강으로 갔다.
4월 1일 오시에 햇무리가 생겼다. 이튿날 묘시에 또 햇무리가 생겼고, 진시ㆍ사시에도 햇무리가 생겼는데, 두 고리가 달리고 위에는 관(冠)이 있고, 아래는 신이 있고, 안은 붉고 바깥은 푸르며, 흰 무지개가 햇무리를 꿰뚫었다. 5일에 또 햇무리가 생겼고, 그 이튿날 석양까지 햇무리가 있었다.
○ 중국인 이숭복(李崇福)이 군사 30여 명을 거느리고 도독의 차관(差官)이라 자칭하며 곧은 길을 경유하지 않고 산 고을로만 횡행하여 개성부(開城府)로 돌진했다가 이어 서울에 와서 우대해 주지 않는다고 성내며 난리를 일으켰다.
9일 천둥치고 큰 우박이 내렸다.
○ 유격(遊擊) 모영보(毛永寶)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향사(進香使)가 탄 배가 바다를 건너자 양식 콩 7백여 석을 빼앗아 갔다.
○ 회령(會寧)의 오랑캐 상인이 소를 사려고 여러 날을 머무르니, 자로 등이 성이 나서 화물을 거둬가지고 성밖으로 나가 유숙하므로 우선 80명과 말 30필을 들여보내자 자로가 도로 성안으로 들어와 10여 일을 묵고 제 집으로 돌아갔다.
○ 합동 장계에, “신 등이 아뢸 말씀을 이미 다했사온데, 전하의 완강한 거절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시니 신 등이 물러가야 할 것이 네 가지가 있고, 신 등이 물러가지 못할 것이 네 가지가 있사옵니다. 신 등이 고수하는 것은 법이온데, 전하께서 법은 마땅히 지킬 것이 못 된다 하시오면 신 등이 물러갈 것이오며, 신 등이 밝히는 것은 정의이온데, 전하께서 정의를 밝혀서 무엇하냐 하시오면 신 등이 물러갈 것이오며, 신 등이 처단하자는 것은 대역(大逆)이온데, 전하께서 대역은 처단할 것이 없다 하시오면 신 등이 물러갈 것이오며, 신등이 근심하는 바는 종묘사직이온데, 전하께서 종묘사직은 근심할 것이 없다 하시오면 신 등이 물러갈 것이옵니다. 이와 반대로 전하께서 법은 지켜야 하고, 대의는 밝혀야 하고, 대역은 처단해야 하고, 종묘사직은 지켜야 한다 하시오면 신 등이 비록 해가 지나 섬돌 아래에서 말라 죽는 한이 있사옵더라도 끝내 물러갈 날은 없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26일 천둥 치고 큰 우박이 내렸다.
○ 양호(兩湖 충청ㆍ전라) 선비들이 소장을 올려 인성군을 처단할 것을 요청했는데, 비답이 내리기를, “이미 참작하여 처리했으니, 이 밖에 딴 법을 쓰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하였다. 그래서 두 번째 소장을 올리기를, “종묘사직을 잊는 데는 차마 하시면서 이공을 처단하자는 데는 차마 못하시고, 대의를 무시하는 데는 차마 하시면서 은혜를 끊는 데는 차마 못하시니, 전하께옵서 차마 하시는 일은 신 등이 차마 못하는 일이옵니다. 자전으로 말하오면 선조(宣祖)의 정비(正妃)시고, 일국의 국모이신데, 역적 인준(仁俊)이 상소하여 폐할 것을 청하면서, ‘벌을 내려도 가하고 참형을 해도 가하다.’ 하였는데, 이공이 이 상소를 가지고, ‘초야의 공론이며 종묘사직을 위하는 대계이다.’ 하였으니, 이 말이 차마 이공의 입에서 나올 수 있사옵니까. 어미를 죽이자는 놈이 차마 임금을 죽이지 못하겠습니까. 엎드려 청하오니, 빨리 왕법을 바로잡으시옵소서.”하니, 비답이 내리기를, “진실로 소회가 있으면 한 번쯤 상소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기어코 청을 얻고야 말겠다는 것은 제생(諸生)의 처사가 아니다.” 하였다.
○ 양도(兩道)의 유민(遺民)들이 굶주려 죽어 마을이 텅 비었다.
○ 경상 감영(慶尙監營)의 보고에, “진보(眞寶)ㆍ예안(禮安) 등지에 우박이 더욱 심했다.” 하였다.
○ 이때에 무과(武科) 별시(別試)를 보였는데, 응시한 자는 수만 명이었으나 직접 활을 쏘는 자는 절반도 못 되었다. 그들이 복시(覆試)를 보게 되자 모두 하는 말이, “만약 규칙을 완화하지 않으면 큰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했는데, 마침내 개장(開場)하게 되자 서울 무사(武士)들이 모화관(慕華館)에 모여서 크게 외치기를, “이름을 부를 경우에 대답하고 나가는 자는 죽인다.” 하였다. 그러자 황해도 사람 두어 명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가 섰는데, 수만 명의 무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끌어다 마구 치고 포박해서 연못 속에 던졌다. 시관도 금할 수가 없어 연유를 갖추어 장계를 올려서 마침내 그 주범을 적발했는데, 의주의 보충군이었다. 세태의 변천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심스럽다.
○ 모영우(毛永祐)가 오랑캐 차사를 대동하고 29일에 심양에서 나와 가도로 향했다. 모장군이 배를 타고 진강(鎭江)을 경유하여 인산(麟山)에 당도하니 마유격(馬遊擊)이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인산에 주둔하여 기다렸다.
26일 평양ㆍ강서(江西) 등지에서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사발 만하고 작은 것은 달걀 만한데 땅에 세 치 가량 쌓여 하루가 지나도 녹지 않았다. 그래서 밀과 보리가 모두 망쳐졌다.
○ 도주해 온 조해붕(趙海鵬)의 진술에, “앞으로 시장을 개척하는 데는 난처한 점이 많을 것이다. 오랑캐 군사가 영원(寧遠)에 침범했다.” 하였다.
○ 모 장군이 처자(妻子)는 남방 본집으로 보내고, 애첩 한 사람과 어린 아이 두 사람은 섬에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장졸을 거느리고 장자도(獐子島)에 가 머물렀다. 녹도(鹿島)에서 와 정박한 세 척의 배에 실은 쌀을 용만(龍灣)ㆍ의주(義州)ㆍ철산(鐵山)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본부(本府 남원) 아전들의 완악한 행실이란 온 나라에서 으뜸간다. 난리 뒤로는 거칠고 사나움이 날로 심해져 경작(耕作)을 관장한 서기(書記)들이 비록 본래 가지고 있는 전답을 농사짓는 사람에게도 뇌물을 받고서 가감을 마음대로 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므로,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통문(通文)을 돌려 날을 정하여 소장(訴章)을 올리니, 서기 40여 명이 모여서 난동을 부리며 먼저 고을의 늙은이 한(韓)ㆍ홍(洪)씨 등의 집을 공격하고, 다음으로 사핵 도감(査覈都監) 진사(進士) 진성헌(陳聖獻)을 향사당(鄕射堂)에서 마구 쳤다. 그러나 관에서도 금하지 못하고, 고을에서도 성토하지 못하여 마침내 별감 양사의(梁士儀)가 목을 잘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역시 세태의 변천을 볼 수 있다.
○ 도독이 오랑캐 장수와 서로 만날 일이 있어 의주로 나가 대신 장수를 들여보내고 섬으로 돌아왔다.
5월 크게 가물었다. 1일 진시부터 유시까지 햇무리가 졌다.
○ 삼사와 백관이 하루에 세 번씩 아뢰어 왕법(王法)을 빨리 바로잡기를 청하니, 비답이 내리기를, “결코 따를 수 없다.” 하였다.
4일 모 장군이 곡호(曲虎)를 접견하고서 육로를 경유하여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철산(鐵山)으로 돌아왔다. 오랑캐 차사 6명은 인산(麟山)에서 배를 타고 곧장 가도(椵島)로 가고, 보병(步兵) 30여 명은 강을 건너 천가장(千家庄)으로 갔다.
○ 황해 감영의 장계에, “문화(文化) 등지에 우박이 내렸습니다.” 하였다.
○ 공주 감영(公州監營)의 장계에, “8일에 청풍(淸風) 등지에 우박이 내렸습니다.” 하였다. 경상 감영의 장계에, “성주(星州)ㆍ청송(靑松) 등 여러 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어떤 것은 달걀만큼 커서 콩ㆍ밀ㆍ보리ㆍ면화 등이 모두 절단났습니다.” 하였다.
○ 모 장군이 달자(㺚子) 통역관 한 놈을 베고 오랑캐 차사 다섯 명을 감금하여 장차 중국으로 보낼 작정이라고 했다. 평양 감영의 장계
○ 의주 부윤이 다음과 같이 직계(直啓)하였다.
도독(都督 모문룡)이 강변에 당도하였기로 신이 달려가 보니, 도독의 말이, “국왕은 어질고 현명하여 지성으로 대국을 섬기는데 신하들이 뜻을 받들지 못하여 내 말이 시행되지 못함으로써 패전을 초래하게 되었으니 애석하오. 국왕은 나와 마음이 서로 통하는데 좌우 신하들은 그렇지 않으니 나는 매우 한스럽게 여기오. 부윤이 이런 뜻으로 장계를 올리오.” 하며, 말하고 또 말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장군께서 직접 우리 임금께 여쭐 수도 있고, 또 배신(陪臣)에게 분명히 말할 수도 있는데 무엇이 문제이기에 소관(小官)을 시켜 장계를 올리게 하시오?” 하자, 도독이 말하기를, “국왕이 내 말을 듣고 잘 방어할 계책을 하면 변방이 편안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변방이 불안할 것인데 부윤은 어찌 관계되지 않는단 말이오? 더구나 강가에 배가 있으면 적이 몰래 엄습해 올 염려가 있으므로 어제 배를 다 가지고 온 것이오.”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답하기를, “오랑캐와 화친한 것은 형세에 몰려 한 짓인데, 오랑캐 차사가 당도하여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하게 되면 그들의 비위에 거스를 염려가 있지 않겠소?” 하니, 도독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전면에 있으니 당연히 오랑캐 차사를 오지 못하게 할 것이오.” 하였습니다. 신이 백성이 굶주리고 양식은 떨어졌다는 뜻으로 글을 올리니, 도독이 누차 말하기를, “중국에서 곡식이 오면 당연히 배 세 척을 내주겠으니 의심하지 마시오.” 하고, 올린 글월 아래에 친필로 제(題)하였는데 그 사이 앞머리 추서(追書)의 말이 국조(國朝)를 범했사오므로 동문(同文)을 올려 보냈습니다. 도독은 다만 50여 명의 장관(將官)과 가정(家丁)을 데리고 달려서 용만ㆍ철산의 길을 경유하여 섬으로 향해 갔습니다.
○ 경기 감영 장계에, “광주(廣州) 등 35군에 한재(旱災)가 참혹합니다.” 했고, 평양 감영 장계에, “4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밀ㆍ보리가 다 말라 죽었습니다.” 하였다.
○ 삼각산(三角山)ㆍ목멱산(木覓山 남산)ㆍ한강(漢江)에 승지를 보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하고, 이어 향(香)과 축(祝)을 각 도 명산대천에 보내어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
○ 평양 감영 장계에, “도망해 온 김주질사리(金注叱沙里)의 진술에, ‘북도 유원보(柔遠堡) 토병(土兵)이 을축년에 나무를 베기 위하여 강을 건너갔다가 20명이 사로잡히게 되어 그 중 15명은 바로 강홍립(姜弘立)에게로 넘어가고, 나머지 5명은 소도이(所道伊) 처소에 유치당해 있다가 이제야 도망해 왔습니다. 적은 2월경에 서북간으로 군사를 내어 남북(南北) 지방을 노략질해 가지고 왔는데, 남북은 오랑캐 종자도 아니고 중국 종자도 아닙니다. 오랑캐와 중국 사이에 있어 남자는 몽고족(蒙古族)과 비슷하고, 여자는 중국 여자와 비슷합니다. 그것들은 오랑캐 속으로 끌려 와서 절을 짓고 한 곳에서 생활하며, 또 몽고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4월 4일에 한(汗)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장성(長城)에서 차단하고 공격하니, 몽고 군사 선발대가 본 소굴로 달아나거나 중국으로 달아났으며, 진달(眞㺚)도 많이 중국으로 도주해 들어갔습니다. 대소(大小) 오랑캐들 말이 조선에서 화친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겨울쯤에 나간다 하고, 또 정보에 의하면 모문룡 군사가 천가장(千家庄) 근처에 약간의 둔지(屯地)가 있으며, 봉황(鳳凰)ㆍ진강(鎭江)에도 연달아 내왕이 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 의주 부윤이 직계(直啓)하기를, “모(毛)씨 성을 가진 중국 장수 한 사람이 비밀리에 말하기를, ‘도독이 곡호(曲虎)더러 네가 만약 화친을 맺는다면 사로잡힌 중국 사람들도 그대로 돌려보내주지만, 도주해 간 자에 대해서는 목을 베어 오라 하니 강화의 도가 과연 이러하냐? 우리 군사가 봉황성(鳳凰城)에 당도하자 네 군사가 가로 막는 일이 없으므로 네 말에 따라 배를 장자도(獐子島)로 보냈는데, 어제 봉황성의 군사가 오달(五㺚)의 습격을 받아 산으로 올라 도주해 왔다고 책하였소. 그리고 도독은 용천(龍川)에 당도하자 밤에 배에 올라 군사를 거느리고 철산(鐵山)으로 돌아갔는데, 오달의 군사는 이미 중국 군사가 봉황성에 있는 것을 보았으니 아마도 전쟁이 벌어질 염려가 있소.’ 하므로, 신이 묻기를, ‘그렇다면 곡호를 처치하는 것이 어떠하오?’ 하니, 그는, ‘모 장군이 이미 잡아서 가도(椵島)로 끌고 갔으니 다시 호의를 보여 석방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며, 또 도독이 우리 사신과 오랑캐 차사가 오고가는 것을 물색하고 있으니 앞으로 난처한 일이 생길까 염려되오.’ 하였습니다.”하였다.
18일 사시ㆍ오시에 햇무리가 생기고, 2경부터 이튿날 5경까지 달무리가 생겼다.
○ 합계(合啓)에, “이공 같은 큰 역적을 겨우 귀양 보내는 데 그치고 말았으니, 왕법이 너무도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청컨대, 국가의 백년대계를 깊이 생각하시옵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는 종묘사직을 위하여 공론을 따를 수밖에 없다. 아, 슬프다. 골육(骨肉)끼리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항상 통탄했는데, 오늘날 차마 이런 일을 행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이것이 어찌 나의 본심이겠느냐. 원통하고 비참하여 살고 싶지 않다.” 하였다.
○ 전교(傳敎)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광해 때에 역적 하인준(河仁俊)이 상소하여 모후(母后)를 폐하자고 청하면서 호(胡 송 나라의 호안국(胡安國)으로 《춘추전》을 지었음)씨가 저서에서 무후(武后)를 토죄(討罪)한 말을 인용하기를, “벌을 주어도 가하고 베어도 가합니다.” 하니, 광해가 이 소장을 내려 주며 종실(宗室)과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여론을 수렴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공이 의논하기를, “선비의 소장을 보니, 모두 임금을 위하는 충성이고,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백년대계입니다. 빨리 공론에 따라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으며, 금년 정월에 역적 허규(許逵)의 자백한 진술에, “이우명(李友明)이 허유(許逌)에게 묻기를, ‘어떤 인물을 추대해야 하나?’ 하니, 허유는, ‘성인(聖人)을 얻었다.’ 하므로, 제가 묻기를, ‘성인은 누구를 의미하는 말이냐?’ 하니, 대답이, ‘인성군이다.’ 하였습니다.” 하였고, 정심(鄭沁)의 자복한 진술에, “민주(閔澍)가 제천(堤川) 유효립(柳孝立)의 집에 가서 인성군을 세우기로 모의하고, 효립으로 하여금 외부에서 응원하라고 했습니다.” 하였고, 안집중(安執中)의 자백한 진술에, “인거(仁居)가 변고가 나기 전에 정심을 찾아가 보고, ‘제갈량(諸葛亮)과 같은 사람 한 명이 있어 이 일을 계획한다.’ 하였는데, 이는 인거를 지칭한 것이므로, 제가, ‘민주가 나에게 한 말이, 인성은 우리 족속인데 항상 분개한 생각을 품고 있으며, 김응호(金應虎)는 인성(仁城)의 여종의 남편이고 또 가신(家臣)이니, 내관(內官) 배희도(裴希度)와 함께 마땅히 먼저 대궐에 들어가서 대궐 안의 일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고, 김세익(金世益)의 자백한 진술에, “문관 김탁(金鐸)이 말하기를, ‘폐주(廢主)가 복위(復位)되면 인성(仁城)에게 전위한다.’ 했습니다.” 하였고, 유효립의 자백한 진술에, “제가 민주에게 이르기를, ‘인성에게 종 90여 명이 있으니 강화에 있는 폐주의 애통해 하는 편지를 가져다 대신에게 보이고서 거사한다면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했더니, 12월에 민주가 제 집에 와서 말하기를, ‘인성이 이미 자전의 교지를 받았다.’ 했습니다.” 하였으며, 유두립(柳斗立)의 자백한 진술에, “정심이 저에게, ‘옛 임금을 복위하자는 것을 인성이 힘써 주장하므로, 유종선(柳宗善)이 유충립(柳忠立)의 종 득지(得只)를 강화(江華)로 통신하는 길을 만들어 지금도 편지를 보내어 미리 반가운 소식을 알리고, 귀양지에서 편지를 받아 인성에게 전하여, 인성이 그 편지를 받았다.’ 했습니다.” 하였고, 하영남(河永男)의 자백한 진술에, “4일 밤에 종루(鍾樓)에 모여 군사를 몰고 대궐로 들어가 인성을 추대하기로 했습니다.” 하였고, 이효일(李孝一)의 자백한 진술에, “연전에 변란이 일어났을 적에 주상 전하께서 만약 24일에 교외(郊外)로 나가시고 인성이 동행하게 되면 어두운 밤에 거사하려고 했었는데, 전하께서 행차를 연기하시고, 인성이 자전을 따라서 먼저 강도(江都)로 갔기 때문에 이 일이 성립되지 못했습니다.” 하였고, 안우선(安友善)의 자백한 진술에, “사주팔자를 장님 이봉춘(李逢春)에게 물으니, ‘매우 좋다. 정월 3일이 길일(吉日)이다.’ 하므로, 어영장(御營將) 구두산(具斗山)과 도감 중군(都監中軍) 이계선(李繼先)이 내응(內應)이 되고, 민주는 먼저 폐주를 맞아들여 상왕을 삼은 다음 인성에게 전위하기로 했습니다.” 하였고, 이수향(李秀香)의 진술에, “병인년 9월에 원주(原州)로 내려가 정심의 집에 당도하여 중 담화(曇華)와 함께 자는데, 담화의 말이, ‘참기(讖記)에, 「진사년에 인성을 얻는다.」했다.’ 하기에, 제가 유종선에게 묻기를, ‘인성이 뜻대로 되면 광해를 어떻게 처우하겠는가?’ 하니, 종선의 말이, ‘수성궁(壽聖宮)에 거처하게 하고 인성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보낸다.’ 했습니다.” 하였다. 전후에 걸쳐 역적의 진술이 이처럼 야단스럽고, 폐주와 교통하며 자전의 교지라고 가탁한 것은 더욱더 흉악하다. 자전께서 노하시어 두 번째 엄한 전교를 내리셨고, 백관ㆍ삼사ㆍ종척(宗戚)ㆍ경향(京鄕)의 유생이 연달아 상소하여 베기를 청하였으나, 나는 어릴 때부터 왕친(王親)이 보전하기 어려운 것을 통탄하였으며, 옛 글을 읽고 지금 일을 볼 때 길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라 운수가 불행하여 역모의 변고가 자주 일어나 적이 진술에 매양 이공의 이름을 들고 나오는데, 나는 위로 선왕을 생각하고, 아래로 지정(至情)에 끌려 관대하게 용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일이 전날과 달라서 잠재된 자취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아 수개월 내에 큰 옥사가 계속 일어나므로 내가 종묘사직을 위하여 공론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죽음에 자처하도록 하는 것이니 의금부에 하달하라.
○ 금부도사 이인준(李仁俊)을 진도(珍島)로 보내어 이공을 처형했다. 전교하기를, “상사(喪事)를 보살피도록 중사(中使) 1인을 진도에 내려보내니, 상구(喪柩)가 올라올 때에 각별히 호송할 것이며, 그 처자도 말에 태워 올려 보내도록 삼도 감사에게 유시하라.” 하였다. 또 삼사에서 논쟁을 벌여 인성의 처자를 제주(濟州)에 정배시켰다.
○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들어오니 주상께서는 불러 보셨다. 충신이 아뢰기를, “의주 백성이 관에서 배급 받은 종자까지 다 밥해 먹고 한 이랑도 경작한 것이 없어 추수의 가망이 전혀 없으니, 금년 가을이나 겨울에 구휼하지 않으면 모두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 도독이 백미 60석을 인산(麟山)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황해도 24군에 가뭄이 들어 참혹하고, 함경도 전체도 똑같이 가뭄이 들었는데, 그중에도 정평(定平) 등 세 고을과 육진(六鎭)이 더욱 심했다. 두 도 감영의 장계.
○ 의주 보고는 다음과 같다.
20일에 오랑캐 기병 20여 명이 중강(中江)에 당도하여 매우 급하게 사람을 부르므로 곧장 통역관 최막동(崔莫同)에게 가서 무슨 까닭이냐고 물으니, 한(汗)의 서신을 내주며 신으로 하여금 장계를 올리라 하고, 그대로 강변에 머물러 기다리므로 또 막동을 보내어 묻기를, “기증한 백미는 언제 운반해 갈 것이며, 도주해 온 3ㆍ4명을 진작에 잡아 놓았는데 값을 얼마로 정할 것인가?” 하니, 답하기를, “쌀을 수송하는 일은 칸이 일찍이 분부하지 않았고, 도주해 간 사람은 우리 나라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값을 논하겠는가? 마땅히 돌아가서 칸에게 여쭈어 처리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술과 고기와 쌀을 마련해서 보내주었더니 지극히 칭찬하고 감사를 표시했사온데, 그 장수의 이름은 투로세(投老世)라 하옵니다. 그가 대충 곡호(曲虎)의 소식을 묻기에 전월 25일에 지나간 뒤로는 전혀 듣고 아는 것이 없다고 대답하니 고개만 끄덕이고 그쳤습니다. 중국 사람 20여 명이 배를 만들려고 나무를 베기 위하여 강변에 내왕하다가 붙잡혔는데, 오랑캐 장수가 말하기를, “금방 모문룡과 강화를 맺었으니 먼저 살해할 수는 없다.” 하고, 모두 다 돌려보냈습니다. 칸의 서신은 순영(巡營)으로 보내어 전달하게 했사옵니다.
○ 오랑캐 서신은 다음과 같다.
칸은 조선 국왕에게 서신을 올리오. 두 나라가 서로 이웃이 되어 원래 원수가 아니었는데, 기해년에 우리 군사가 동쪽으로 나가 정벌해서 우리 속국을 수복하는데 귀국이 군사를 출동해 길을 차단하는 바람에 마침내 패전하게 되었소. 이는 까닭 없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나 우리 나라는 원한을 품은 바 없이 종전대로 호의를 유지했소. 그 후 올라 국왕(喇國王) 복점태(卜占台)가 여러 번 귀국을 공격하니, 귀국 차관(差官)이 와서 “복점태는 이미 귀국의 사위가 되었으니 군사를 파하도록 해주시오.” 하므로, 곧 그 말에 의거하여 군사를 파하게 하였으니, 이와 같이 혐의를 버리고 난국을 구원해 준 것을 제외하고는 일찍이 무슨 허물이 나에게 있단 말이오? 더구나 남조(南朝 명 나라)가 우리를 치는데 귀국은 두 나라 중간에 있으면서 어찌 시비를 가리지 않고 문득 남조를 도와 우리를 죽이러 왔었소? 그렇지만 다행히 하늘의 도움을 입어 우리 군사가 승리하여 강한 자를 뿌리 뽑고 순한 자를 어루만져 다시 관대함을 베풀고, 사로잡은 관원을 돌려보내어 전일의 호의를 닦으려 했으나 마침내 결론을 못 짓고, 요동(遼東)에 승부를 걸어 요동을 얻자 또 사로잡은 사람을 보내며 화친을 맺고자 했는데, 또 귀국이 달갑게 여기지 않았소. 그리고 모문룡을 용납하여 마음대로 하게 할 뿐 아니라 양식마저 대주어 7년을 기르며, 죄인을 은닉시키는 소굴이 되어 죄악을 고치지 않기에 전쟁을 일으켰는데, 하늘이 도와서 이미 그대 나라를 나에게 주게 하였소. 그래서 그대 군신(君臣)이 섬으로 도망가고 아우를 볼모로 보내어 왕을 대신하기에 다시 관대함을 베풀어 그대 나라를 차지하지 않고 당일로 맹서를 맺고서 바로 군사를 돌이켰으며 볼모도 돌려보냈소. 그리고 기미년에 진중에서 사로잡은 관원을 보낼 적에 왕을 형제의 예로 대접했는데, 이래도 좋게 여기지 않소? 남조에서는 그대 나라를 하국(下國)으로 여겨 대소 관원을 모두 업신여기고, 부녀자를 빼앗아 차지하며, 좋은 말을 빼앗아 타고, 비록 소관이라도 그대 왕과 나란히 앉는데 이래도 좋게 여기오? 그런데 귀국은 마침내 말한 그대로 하지 않아 전일의 편지를 저버리고 성지(城池)를 수리하며 도성에 머무른 사람을 수용하여 다시 남조를 중히 여기고 우리를 멸시하며, 언사를 변경하고 도망간 자를 보내주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도망간 자를 위해 따진 것이 한 차례만이 아니었소. 처음에는 평양에서 맹서를 맺는 날로 기약을 했고, 뒤에는 군사를 돌려 강을 건너가는 날로 기약을 했고, 다시 원창군(原昌君)이 본국으로 돌아가 강을 건너는 날로 기약을 했던 것이오. 이때 귀국의 말이, “의주에 이미 금국(金國) 군사가 있는데 도망한 사람을 어떻게 조사하겠소? 반드시 금국 군사가 물러가 각기 제 나라 경계를 지켜야 하며, 그때에 도주한 사람이 있으면 조사해 보내겠소.” 했는데, 퇴군한 뒤로 도망간 사람들을 으레 보내주어야 했는데도 지금까지 어째서 보내주지 않소? 하물며 전에 도주한 세 사람은 이미 빠져 나갔는데 잘못했다고 여기시오? 예로부터 진중에서 사로잡은 사람은 차지할 수 있지만 이미 화친을 맺고서 다시 도망한 사람을 수용한다면 이 화친은 절대로 두 나라의 대도(大道)를 위한 것이 아니고 다만 죄짓고 도망한 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계획일 뿐이오. 비록 돌려보내지 않을 지라도 이 도망한 사람을 위하여 어찌 두 나라의 대도를 무너뜨리고 성지(城池)를 쳐서 빼앗겠소? 다만 도망간 사람의 주인이 가면 반드시 수효에 의하여 끌어올 것이니, 그 사람들을 신칙하여 역시 많이 잡아 와서는 안 되오. 만약 많이 잡아 온다면 그대들이 어찌 우리가 전일의 맹약을 저버린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리요. 혹시 후일에 우리에게 어찌 일찌감치 말해주지 않았는가 할까 염려되므로 이와 같이 미리 알리는 것이오. 또 우리에게 서신을 보낼 때는 금국(金國)이라 일컫고, 국중(國中)에서 통행하는 것은 오랑캐라 하니, 이는 겉으로는 공경하는 척하며 안으로는 업신여기는 것이오. 더구나 회령(會寧)은 원래 동요하지 않아 옛날과 같은데 지금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도 겉으로는 화친하고 안으로는 욕심을 내는 것이오. 우리는 사람됨이 착한 사람을 만나면 오직 공경심이 부족할까 염려하고, 착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털끝만큼도 양보하지 않소. 그대들 중에 심하게 남을 업신여기는 자는 누구요? 지금 이처럼 곧은 말을 하는 것은 일전에 서신을 내왕하면서 피차간에 불평스러운 일이 있으면 각각 털어놓고 말하자고 했기 때문이오. 그리고 우리 두 나라가 화친을 맺은 것은 바로 하늘이 이뤄준 것인데, 혹시 무너지게 될까 염려되므로 숨김없이 서로 고하는 것이오. 하늘이 남조를 죄주는 데 문득 도와주며, 스스로 중한 죄를 지어 다시 징계하지 않고 그대로 남조를 허락하는 것은 바로 나라를 무너뜨리는 괴이한 짓이오. 영특하고 꿋꿋한 사람은 전쟁에 임해도 몸을 감추고 싸우지 않는데, 화친이 이미 이루어진 것을 어찌하여 다시 무너뜨리려 하오? 또 남조는 귀국을 노예로 대우하니 무슨 잘하는 것이 있으며, 우리는 귀국을 형제로서 대우하니 무슨 잘못이 있소? 마땅히 깊이 생각하시오. 쪽지 진중에서 사로잡은 사람에게는 처첩ㆍ노비(奴婢)ㆍ가산(家産)과 봉양하는 관원을 주며, 두 나라의 화친이 성립되었으므로 약간의 범죄가 있어도 문득 끊어버리지 않겠소. 만약 길러서 좋게 되면 피차간에 이름이 반드시 드날릴 것이오. 또 번거롭게 고함.
6월 6일 햇무리가 지고 연달아 가물었다.
○ 의주 부윤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10일에 오랑캐 차사 중남(仲男)과 박경룡(朴景龍), 통역관 김봉산(金奉山)과 수종한 오랑캐 일곱 명이 칸의 편지를 가지고 나와 강을 건넜는데, 일행을 보호해 온 오랑캐 장수 시란내(時難乃)가 군사를 거느리고 강에 당도하였다가 곧 돌아갔사오며, 또 말하기를, “전일 도주해 간 사람으로 곡호(曲虎)에게 잡힌 세 명과 투로세(投老世)에게 잡힌 일곱 명에 대해 값을 시장에서 매매 가격대로 하되 상품은 소 한 마리ㆍ청포(靑布) 백 필, 중품은 청포 백 필, 하품은 소 한 마리 혹은 청포 6ㆍ70필로 등급을 나누어 값을 치르도록 하라는 칸의 부탁이 있었소.”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당초 개시(開市)할 적에 친속(親屬)이 있는 자는 상ㆍ중품의 값을 치룰 수도 있으나, 중도에서 잡힌 자는 실상 속환(贖還)하기 위해서 온 자가 아니고, 또 친속의 원매자가 없으니 상ㆍ중품의 값은 결코 지급할 수가 없으며, 또 내지(內地)로부터 당연히 준비해 주어야 할 터인데 수중에 때마침 한 필도 없으니 후일 개시할 때에 전일에 약조한 그대로 값을 치르겠소.” 하여, 박경룡과 되풀이하며 힐난을 해서 마침내 한 사람당 청포 65필로 정하여 쌍방이 문서를 작성하고 파했습니다. 신이 듣자오니, 중남의 이번 걸음도 쇄환(刷還)하기 위한 한 가지 일로 왔다 하기에 신이 시란내(時難乃)에게 이르기를, “도주해 온 세 명이 또 잡혀서 유치되었으니 역시 당연히 값을 치러 주어야겠다는 것을 칸 앞에 진술하여 성실한 뜻을 보여주시오.” 하였습니다. 대개 도주해 온 사람을 조사해 돌려보내는 일과 회령의 개시 여부와 전에 온 강홍립ㆍ박난영이 거느린 중국 여자를 찾아서 있고 없음을 자세히 알고, 오신남(吳信男)ㆍ김진(金榗) 등을 일일이 찾아보고 오라고 하였기로 중남 등이 내일 본주를 떠나 서울로 향한다는 것이옵니다.
○ 병조 참의 유백증(兪伯曾)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삼가 아뢰옵니다. 전하께서 난리를 다스리고 세상을 바른 데로 돌리시는 재주로 막혔다 다시 통하는 때를 당하셨으니 백성의 소망이 마치 큰 가뭄에 비를 바라는 것과 같사온데 6년 사이에 두 번째 병란을 겪고, 천심(天心)이 기뻐하지 않아 재앙과 변괴가 자주 일어나며, 요성(妖星)과 괴물이 끊임없이 나타나서 역사에 씌어지고 있사옵고, 가뭄에 대한 걱정도 근자에 없던 일로 금년 농사는 전혀 가망이 없사오니, 어지신 하늘이 어찌 깨우쳐 줌이 없으리요. 난리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는데 또 이런 흉년을 만나 강성한 오랑캐가 틈을 엿보고 갖가지로 공갈하는데, 아무리 강구해 보아도 좋은 계책을 얻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예로부터 나라가 망하는 것은 반드시 임금이 어둡고 신하가 아첨하는 데서 기인되는 법이온데, 지금은 밝으신 임금이 계신데도 세상은 바로잡히지 않고, 권신(權臣)이 없는데도 나랏일은 나날이 잘못되어 가서 위태롭고 어려운 형세가 말세의 혼탁함과 같사옵기로 신은 잠자고 밥먹는 것조차 잊고 밤낮으로 생각하여 그 병의 근원을 찾아냈습니다. 한갓 총명만을 자부하여 강령을 붙들지 못하고 남을 이기기만 좋아하여 공정한 마음으로 사리를 살피지 못하고, 절의를 배양하지 않음으로써 바른 말을 듣는 길은 날로 막히고, 고무시키고 격려시키기 못하면서 인자심만 지나치며, 사정에 얽매여 위엄과 성냄이 중도를 잃고, 명예를 좋아하는 단점을 버리지 않고 일처리를 성실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전하의 병이옵고, 어물어물하여 그대로 넘기며, 태평하고 안일하여 제 몸만 아낄 줄 알고 나랏일을 담당하려 하지 않으며, 한 가지 일을 처리하려 하여도 말썽이 있을까 염려하고, 한 마디 말만 하려 하여도 노염을 살까 염려하여 이리저리 두려워하고 돌아보아, 선악도 분별하지 못하고 시비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신하들의 병이옵니다. 아, 임금의 옷을 입고 임금의 밥을 먹으니 은혜가 이미 지극하고, 발탁되고 등용되었으니 책임도 크다 하겠사온데, 정사의 잘잘못을 보기를 마치 살찐 월(越) 나라 사람이 여윈 진(秦) 나라 사람 보듯이 하니 이 무슨 습속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하물며 지금은 기강이 무너지고 인심이 이반되었사오니, 만약 임금을 원망하는 무리들이 불측한 마음이 없다면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역적의 변고가 그칠 때가 없을까 염려되오니,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옵서는 쓰러져 가는 기업을 이어받으시어 정사에는 은혜와 용서가 많고, 일에는 모두 옛것을 인습하시니 사유(四維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는 땅에 떨어지고 호령은 시행되지 않아 아전들의 농간은 갈수록 고질이 되고, 수령의 토색질은 날로 심하여 백성의 고혈은 이미 다 빠지고, 국가의 창고는 모두 비었으니 어쩔 수 없이 속수무책으로 망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병이 든 사람이 원기가 실낱 같아 사지(四肢)도 움직일 수 없고, 두 눈도 뜰 수 없어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 같사오니 신은 통곡함을 참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옵서 즉위하신 처음에 궁노(宮奴)를 베시고 위훈(僞勳)을 삭제하신 일 등은 성명(聖明)하신 용단에서 나왔사온데, 지금은 그 기운이 꺾이시어 우유부단하시니, 위에서 하시는 일이 이러하온데 아래에서 흥기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옛날 초(楚) 나라 임금이 허리가 가는 여자를 좋아하여 궁녀(宮女)들은 굶어 죽는 일이 많았으며, 성중(城中)에서 상투가 높은 것을 좋아하니 사방에서 한 자를 높였다는 말이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문이 크게 열려 벼슬길이 날로 문란하니, 벼슬을 탐내는 무리들이 염치를 무릅쓰고 달려들어 아첨을 잘 부리면 한 자리를 따게 되고, 조금만 모나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형들은 그 자제에게 입을 다물고 지내라고 경계하고, 친구들끼리도 서로 친함에 빠지지 말라고 권면하며, 군신(君臣) 사이에도 성심성의로 나가지 않으니 이러고야 어찌 천지가 조화되어 비올 때 비가 오고 볕 날 때 볕이 나기를 바라겠습니까. 진실로 큰 뜻을 분발하여 열심히 다스릴 길을 도모하고, 좋아하고 미워함을 밝게 보여주어 대신을 책망하고, 호령을 발동하기를 번개 치고 바람 불듯이 한다면 사람마다 격려하고 분발하여 제 몸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니, 이러고서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아, 오늘날 일은 말할 만한 것이 많사오나 만약 그 본원을 맑게 하지 않는다면 천만 가지 말이 공언에 불가할 따름입니다…….
○ 경룡과 중남이 서울에 당도했는데, 경룡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3월 26일에 진강(鎭江)에서 떠나 4월 3일에 심양에 당도하여 국서를 올리니, 칸의 말이, “새로 연 시장에 물자가 있고 없는 것은 두 나라의 교역(交易)이 있고 없는 것이니, 어찌 빈손으로 돌아올 것을 나무라랴. 다만 사람을 돌려보내는 일만은 당초 그대 나라의 소청에 의하여 남녀를 가려서 보냈던 것인데, 겨우 70여 명만 속환하고 그 나머지는 그저 돌려보내어 중도에서 도주하게 되고, 사망자도 태반이나 되었으니, 이는 속환해 간다고 칭탁하고 유혹해서 달아나게 하는 수작이니 이 무슨 일이오? 또 의주에서 철병한 이후로 도주한 사람들은 일일이 돌려보낸다 하고서 하나도 잡아 보내는 일이 없고, 또 옳다 그르다는 말이 없으니 화친을 맺은 지 몇 년도 못 가서 이 지경으로 약속을 위반한다면 내가 어떻게 그대 나라의 맹약을 믿는단 말이오? 옛날 남조(南朝)가 우리 나라와 더불어 소와 말을 잡아 천지에 제사하고 돌을 세워 맹서문을 새겼으나 변방을 지키는 신하가 침략하므로 우리 이전 칸께서 하늘에 고하고 군사를 출동하였더니, 개(開)ㆍ철(鐵)ㆍ요(遼)ㆍ심(瀋)ㆍ금(金)ㆍ복(復)ㆍ해(海)ㆍ개(蓋)ㆍ광녕 등지 24개의 위(衛)가 일조일석에 모조리 우리 손에 들어왔소. 이는 하늘이 우리를 괴상히 여기지 않고, 남조를 괴상히 여긴 까닭이오. 남조는 그대 나라와 함께 대국이란 이름만 믿고 우리를 초개같이 대우하여 강상(江上)에서 개시하는 날에도 관원이 친히 곤봉을 가지고 우리나라 사람을 때렸다고 하니, 이 무슨 일이오?” 하며, 크게 성내어 말하므로 소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우리 나라 백성의 생활은 다만 농사짓는 것으로 업을 삼아서 1년의 곡식을 얻으면 그것으로 1년을 지내고 있으니, 그 가난한 형상은 지난해 행군하던 날에 대인(大人)들도 직접 목격했을 것이오, 의주에서 평산(平山)까지 오는 동안 얻은 보화가 얼마였소. 그 경우를 상상해 보시면 다 말하지 않아도 분명히 알 것이오. 하물며 약탈을 당한 나머지에 비록 만분의 일이 보존되었다 할지라도 무슨 여유가 있겠소? 부모 처자가 서로 떨어져 있는 자들이 위대하신 칸의 속환해 가라는 기별을 듣고 겨우 백목이나 종이ㆍ명주 등을 준비해 가지고 강상에 와서 속환하려 하면 금인(金人)이 값을 너무 많이 바라고, 한 사람에 대한 값이 소 열 마리ㆍ말 열 마리ㆍ주단ㆍ청포ㆍ목면ㆍ수은(水銀)ㆍ표피(豹皮)ㆍ종이 등속으로 거의 천 냥에 달하는 숫자를 부르고 있으니, 저자에서 속환하려는 자가 상심하고 낙담하여 통곡하고 돌아가는 실정이오. 이는 우리 나라 사람이 본래 속환해 가고자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초에 우리 나라에서 백성이 제 집을 잃어버리고 부모 처자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속환에 대한 문제를 끌어낸 것이며, 칸이 속환을 허락한 것도 인자심에서 나와 그런 것인데, 어찌 속환해 간다고 칭탁하고 유인하여 도망가게 할 리가 있겠소? 우리는 그대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아 성명을 보전하고 있는데, 지금 또 여기 와서 황당한 말로 속여 고한다면 후일에 어떻게 되겠소? 더구나 금국 사람을 마구 때렸다는 말은 절대 그렇지 않소. 이날 금국 사람들이 물건을 잡아 놓고 매매를 막는 지경까지 이르므로 관원이 분히 여겨 곤봉을 가지고 금단할 때에 마침 곤봉 끝에 부딪쳐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이니 부디 용서하고 소소한 잘못을 나무라지 말기 바라오.”하니, 칸이 말하기를, “그대 말이 비록 옳으나 관원이란 자가 친히 곤봉을 휘둘렀으니 스스로 체면을 잃은 것이오. 무슨 억지 말을 하오?” 하였습니다. 4일에 칸은 8명의 장수와 함께 변방을 순행하여 말 먹이는 곳을 살펴본다 칭탁하고, 수백 명의 정예병을 뽑아 대릉하(大陵河)에 당도하여 파발꾼들을 약탈하여 50여 명을 살해하고 돌아왔습니다. 5월 16일에 모진(毛鎭)의 차사가 곡호(曲虎) 등을 거느리고 심양(瀋陽)에 당도하여 잔치 대접을 받고서 20일에 떠났는데, 칸과 8명의 장수가 모여 앉아 소인을 불러 앞으로 나오라 하여 좌우를 물리치고 하는 말이, “요즘 그대 나라의 하는 짓을 보니, 모문룡과 부동하여 우리 나라를 침범할 계획이 있는 듯하니 그대는 속임 없이 바로 말하시오. 만약 거짓말을 하면 그대 목숨이 절단나고 말 것이오. 한 번 죽으면 다시 살 수 있겠소?” 하므로, 소인이 대답하기를, “무슨 의심스러운 일이 있길래 이처럼 목숨을 해치겠다는 말까지 하시오? 아마도 사정을 잘못 듣고 그러는 것이 아니시오?” 하니, 칸이 말하기를, “곡호가 모진에 내왕하는데 그대의 나라 일을 어찌 못 듣겠소? 또 중남의 보고를 보니 회령(會寧)에 개시(開市)할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회령은 예로부터 개시하던 땅인데 지금은 어째서 허락하지 않소? 의주가 그대 나라 땅이라면 회령은 그대 나라 땅이 아니오? 도망한 사람을 잡아 보내지 않고 세월만 끌면서 핑계하기를, ‘각 고을에 명령하여 조사해 내게 했다.’ 하고, 또 ‘부모와 처자식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하니, 그대 나라에서 그대 나라 사람을 보면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겠지만 우리에게야 무슨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겠소? 지난해 맹약을 맺을 적에 성보(城堡)를 수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안주(安州)ㆍ황주(黃州)에서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있으니 이것은 무슨 일이오?”하므로, 소인이 대답하기를, “모문룡 장수가 꾀만 있고 용맹이 없다는 것은 칸도 아는 바이니, 아마도 두 나라에 이간을 붙여 화친의 일을 끊게 하자는 것이 아니겠소? 장수의 꾀는 그대로 곧이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절대로 이간 붙이는 말을 가지고 의심을 품지 마시오. 우리 나라가 먼저 맹약을 파기하고 군사를 내어 남조(南朝)를 돕는다면 단지 내 한 몸만 아니라 박창성(朴昌城)ㆍ오동지(吳同知)가 먼저 그대 나라에서 죽게 될 것이오. 금국이 먼저 맹약을 파기하고 군사를 움직인다면 우리들이 먼저 우리 나라에서 죽게 될 것인데 어찌 두 나라 사이에 황당하고 간사한 꾀를 부리겠소? 이럴 리는 만무하오.” 한즉, 칸이 8명의 장수를 돌아보며, “이 말이 어떠냐?”고 묻자, 대답이, “그 말이 옳으며 또 모문룡 장수가 이간을 붙인 일도 없지 않을 것이니 먼저 조선에 서신을 보내어 답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시험해 보십시오.” 하였습니다. 또 소인이, “회령에 시장을 여는 일은 내가 이 땅에 들어온 뒤의 일이라 조정의 여론이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우리 나라는 지방도 협소하고 물자도 적은데 강상에 시장을 열고, 또 회령에 시장을 열면 말도 안 될까 염려해서 그런 것이지, 그 사이에 무슨 의심스러운 일이 있겠소?” 하니, 칸이 성내며 말하기를, “그대 말은 거짓이오. 이미 강상에 시장을 설치할 것을 허락했는데 어찌 회령에 시장을 설치할 것을 싫어할 까닭이 있겠소?” 하였습니다. 소인이 말하기를, “성지(城池)를 수리한 것은 용골대(龍骨大)가 우리 나라에 있을 때부터 이미 알았소.”하니, 칸이 말하기를, “그대가 우리나라에 머문 지 여러 해가 되어 정상을 잘 알고 일마다 변명하는데 대단히 잘못이오.” 하였습니다. 18일에는 아미라고(阿尾羅古)가 소인을 불러 말하기를, “지난해 화친한 일은 내가 아니면 이루어졌겠소? 내가 대장이 되어 그대 나라로 나가 민생을 살해하지 않고 화친을 맺고서 왔다는 것을 그대 나라 사람이 알까요?” 하므로, 답하기를, “어찌 모를 리가 있겠소?” 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화친을 맺은 그때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대 나라를 위해 진력하고 있다는 것을 역시 알까요? 그대 나라가 좋아하지 않으면 나도 좋아하지 않을 거고, 영원히 좋게 여기면 나 역시 영원히 좋게 여기겠소.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대 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것이 나였기 때문이오. 지금 우리 칸이 그대 나라에 대해 좋게 여기지 않는 말이 많이 있는데 어찌 할까요?” 하므로, 소인은 감사를 표시하고 말하기를, “어제 칸의 말을 들었는데, 우리 나라가 의심스러운 행동을 많이 하고 있다 하니, 매우 염려가 되오. 무슨 일이 이처럼 의심을 사게 되었는지 알 수 없소. 우리 나라의 일은 오로지 왕자(王子)만 믿으니 부디 우리 나라를 위해 끝까지 힘을 다해 주기 바라오. 그러면 왕자의 명성이 크게 드러날 것이오.” 하니, 그의 대답이, “그대는 번거롭게 말하지 마시오. 내가 할 것이니 그대는 요면(要免)의 집에 가되 그 집에서 만약 이 일을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오.” 하였습니다. 요면이란 자는 귀영개(貴永介)의 큰 아들로 그 역시 화친을 힘쓴 자입니다. 그래서 곧장 요면의 집으로 가서 뵈러 왔다 말하고 들어가 면대하여 비밀리에 아미라고가 시킨 대로 말하고, 대답도 아미라고가 가르쳐 준대로 했더니, 그의 말이, “다만 속환해 가는 일을 이행하지 않으면 이로부터 도주한 사람의 수효를 헤아려서 그 숫자대로 그대 나라 사람을 잡아오라고 어제 칸이 말했으니 이 일이 지극히 난처하오. 그대가 돌아가는 즉시 조정에 자세히 아뢰어 빨리 처리해야 하오.” 하였습니다. 이날에 몽고 장수 즉로(卽老)의 아우 마소대주(麻所大主)란 자가 가정(家丁) 50여 명을 거느리고 항복해 왔는데, 이 몽고 장수는 지극히 부유한 자입니다. 그래서 아미라고는 말 2백 필ㆍ소 백 마리ㆍ양 백 마리ㆍ낙타 12마리를 내주고 여자를 서로 교환하여 출가시키고, 10여 일을 머물게 하고 본토로 돌려보냈습니다. 5월 15일에 요면과 네 장수가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영원(寧遠) 근처에 가서 노략질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도의 연대(煙臺)와 성보(城堡)를 다 헐어 부셨으며, 29일에 심양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월 16일에 질관(質官)과 호구(虎口) 두 장수가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몽고 지방으로 가서 약탈하고 4일에 들어왔기로 많이 듣고 본 것을 물어 보았는데, 곡절(曲折)에 대해서는 다 아뢸 수 없습니다. 이번 중남(仲男)이 온 것은 중요한 목적이 오로지 돌려보내는 것과 회령에 시장을 개설하는 것 등입니다만, 칸이 친히 분부한 내용은, “여기서 내보낸 칸의 딸 등을 놓아 보내고, 박규영(朴葵永)ㆍ오신남(吳信男)ㆍ김진(金榗)ㆍ박유건(朴維建)등도 찾아보고 오라. 또 강숙(姜璹)에게 은자(銀子) 30냥과 규영ㆍ신남에게 각각 20냥씩을 면대하여 내주고 표를 받아오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비밀리에 사정을 탐지해 본즉 중국 여자에 대한 일은 실지 상황을 듣고 본 것 같은 감이 있으니 조정에서 미리 알고 선처하시기 바랍니다.
비밀 전교에, “이번 오랑캐 차사 중남이 온 것은 도주해 온 사람을 돌려보내는 일인데, 도주해 온 수효가 도합 3천여 명이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오늘 인대(引對)에 우의정 김유(金瑬)가 아뢰기를, ‘지금 이처럼 중대한 논의에 영의정ㆍ좌의정이 병으로 참여하지 못했사오니, 청컨대, 비국으로 하여금 가서 물어보게 하고 재결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사옵기로, 신 이경직(李景稷)이 영의정과 좌의정에게 가서 물은즉, 영의정은 병이 중하여 인사불성이 되었고, 좌의정은 말하기를, ‘우리 백성이 불행하여 사로잡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해 왔는데, 우리가 또 잡아보냈다가 만약 죽음을 당하게 되면 천리와 인정에 차마 못할일일 뿐만 아니라 천하 후세에 장차 무어라 하겠는가. 이 일만은 비록 큰 화를 당할지라도 결코 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사람을 보내어도 그 사람이 죽지 않을 수도 있으니 오랑캐는 본래 이 일을 중히 여기는 자들이므로, 만약 많은 재물로 속환해 온다 하면 저들이 그 재물이 탐이 나서 받은 사람을 반드시 죽이지 않을 것이다. 과연 죽지만 않는다면 이미 화를 늦추고 또 백성도 보존할 것이니, 진실로 이렇게만 된다면 혹 무방할는지 모른다. 그 수치와 모욕에 있어서는 돌아볼 겨를도 없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중남(仲男)이 말하기를, “전일에 이난(李灤)이 본국으로 들어갈 적에 도망해 온 사람을 잡아 보내겠다고 칸 앞에서 이미 승낙하고 돌아간 지 이미 오래인데 아직까지 아무런 말이 없으며, 이난은 이 일을 조정에 말하지도 않았고, 또 이난이 사 가지고 온 여인은 바로 한윤(韓潤)이 거느린 계집이며, 그 밖에도 잘못한 처사가 한 둘이 아니오.” 하므로, 곧 명령하여 이난을 잡아다 국문했다.
○ 서울 개정동(蓋井洞)에 사는 종 권질동(權叱同)이 그 어미를 때려 죽였기로 잡아다 심문하고 참형에 처했다.
○ 민간에서 굶주리는 꼴이 계(癸)ㆍ갑(甲) 양년과 마찬가지여서 황해도와 평안도에는 도랑에 굶어 죽은 시체가 서로 포개져 있고, 삼남(三南) 지방에서도 죽은 자가 많았다.
○ 모영(毛營) 접반사의 서목(書目)은 다음과 같다.
경(耿)씨 성을 가진 유격장(遊擊將)은 도독(都督)과 친하여 매우 사랑을 받는 사람이온데, 신이 데리고 있는 통역관 유순민(劉舜民)과 전부터 서로 정이 두터운 사이였으므로 어제 가 보니, 유해(劉海)의 아우란 자가 금년 3월에 심양(瀋陽)에서 왔다 하며 순민에게 말하기를, “한윤(韓潤) 등 여섯 명이 번번이 칸에게 권하여 조선을 침략하려 하므로, 우리 형 유해가 큰소리로 말하기를, ‘이미 화친을 맺고, 돌아서자마자 공격을 하면 이는 신의를 잃는 것이오.’ 하니, 칸이 성내고 믿지 않았소. 우리 형은 이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니, 우리 형이 불우하게 된 것은 오로지 그대 나라 때문이오.” 하였습니다. 오랑캐 땅에서 모두 말하기를, “조선에서 시장을 열 것을 약속하고서도 백미ㆍ소ㆍ말 등의 지극히 천한 물건도 매매를 허락하지 않으니 지극히 잘못이다.” 하는데, 마침 아문(衙門)으로부터 들어간 중국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오래 그 지방에 머물러 있었기로 실지 상황을 자세히 아는데, 미곡은 운반해 오기가 어렵고, 소와 말에 있어서는 전일에 우리들이 열 냥을 주면 사던 소가 지금은 30냥을 주고 사려 해도 소가 전혀 없는 데야 어찌하냐?”하니, 오랑캐들도 그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또 중국 사람들이 말하기를, “가을 사이에 오랑캐 군사가 나와서 반드시 배를 내라고 할 것인데 그대 나라에서 허락하겠소?” 하므로, 통역관들이 대답하기를, “일전에 모문룡의 유격이 순민에게 물은 것도 이와 같으므로, 순민의 대답이 지금 예리한 칼이 있으면 배를 갈라 보이겠다 하였는데, 우리들의 마음도 곧 순민의 대답과 같다.” 하였습니다. 이날 이른 아침에 중국 사람이 와서 순민을 보고 하는 말이, “오랑캐 군사가 올 적에는 쌀가루나 쌀을 한 말 정도 밖에 가지고 오지 않으니, 평양 서쪽에서부터 들에 있는 곡물을 없애고 사람도 없게 만들면 아무리 멀리 오고자 하나 올 수가 없을 것이오.” 하였습니다. 8월에 시장 문을 열 적에 우리 쪽 물화(物貨)가 오랑캐의 값에 맞지 않으면 반드시 고집하고 성을 내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들판의 곡식을 없애는 일은 도독 이하기 모두 말하며, 혼(渾) 중군(中軍)이 수본(手本)을 신에게 보내겠다고 했사오며, 의주에 있는 쌀을 운반해 가는 오랑캐를 도독이 중간에서 그를 막고 잡아 죽이려 한다 하오니 반드시 후일에 일이 생길 염려가 있습니다. 도독이 멀리 딴 섬에 있어 이미 정예병을 뽑아 의주로 가게 하였으니, 대장의 명령을 중군이 어길 수는 없을 것 같사옵니다.
○ 비국에서 올린 장계에, “돌려보내는 일을 또 전교에 의하여 본사 낭청(本司郞廳)에 보내어 영상 신흠(申欽)에게 물으니, ‘오늘은 병세가 대단하여 대사를 생각할 수 없다. 내일 만약 차도가 있으면 마땅히 깊이 생각해서 건의하겠다.’ 하였사옵고, 원임 대신 이원익(李元翼)은 현재 금천(衿川)에 있사옵기로 내려주신 교서(敎書)를 곧 낭청에 보냈사온데, 지금은 이미 해가 저물어서 갔다 오지 못하겠사옵기에 아뢰옵이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 금인(金人) 구관당상(句管堂上)의 장계에, “한성(漢城) 차비역관(差備譯官)이 와서 말하기를, 중남(仲男)이 박난영(朴蘭英)의 집을 찾아가니, 그 집에서 술과 고기를 마련하여 대접했는데, 중남의 말이, ‘올 때에 칸이 나에게 곡호(曲虎)가 섬에 있고 없는 것과 북경으로 들여보내고 안 보낸 것을 탐지해 오라 했는데, 잊어버리고 물어보지 못했소.’ 하므로, 난영이 답하기를, ‘역관을 살해했다는 것은 잠깐 들었으나 섬에서 비밀에 붙이니, 곡호에 대한 소식을 자세히 알지 못하오.’ 한즉, 기어이 알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답니다. 역관을 살해했다는 난영의 말에는 어떤 대답도 없었사오니, 창졸간에 나온 일이라 미처 깨닫지 못한 것 같사옵니다. 중남이 내일 또 경룡(景龍)을 찾아가 보고자 하오니 가 보게 해도 되옵니까.”하니, 답하기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 이원익(李元翼)의 헌의(獻議)에, “신은 워낙 늙고 또 병이 들어 조석으로 목숨이 끊어지기만 기다리는 중이온데 어찌 다시 국사를 처리할 수 있사오리까. 쇄환하는 한 가지 일은 일찍이 그 내용을 자상히 알지도 못하온데, 졸지에 물으심을 받으니 아득하여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만약 부득이하시다면 정신(廷臣)의 의논대로 정문익(鄭文翼)이 칸과 약정한 회보를 기다려서 처리하심이 어떨까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장유(張維)의 차자는 다음과 같다.
신은 병이 들어 비국(備局)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옵고, 상신(相臣)의 물음으로 인하여 대략 의견을 진술합니다. 묘당(廟堂)의 계사(啓辭)에, 적이 오기 전에 먼저 백성을 잃는다는 것과 황해도와 평안도의 민심에 대한 의견은 곧 신의 말이온데, 삼가 비답을 보니, 밖에 있는 대신에게 널리 물어서 좋은 꾀를 채택하여 처리하시려는 줄로 알겠사오나, 신의 미련한 소견으로는 오히려 전하께서 물정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시고 경솔히 이 일을 처리하신다면 반드시 후일에 무궁한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쇄환하는 한 가지 일만은 천리나 인정으로나 차마 못하는 바라는 것을 사람치고 누군들 모르오리까만 이해의 관계로 보아 화를 늦추는 계획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옵니다. 가령, 한 번 잡아 보내서 오랑캐의 욕망을 채워 다시 딴 마음을 먹지 않게 한다면 지금 비록 은혜와 애정을 끊어 버리고 나가는 것도 옳겠지만 이 오랑캐가 교활하고 망측하여 욕심이 한없으니 지금 그들의 말을 따라준다면 다음으로 오는 것이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이 될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때가 오더라도 일일이 고분고분 따라야만 합니까. 그렇다면 이해만 앞세우는 말도 궁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나라노릇하는 것은 백성이 근본이 되기 때문이니, 백성을 버리고 나라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저 옛날 평원군(平原君)은 하나의 공자였지만 위제(魏齊)는 평원군을 자기 집에다 숨겨두고 몸소 진(秦) 나라에 잡혀 가서도 오히려 진왕의 말을 따르지 않았는데도 위제를 보냈는데, 하물며 당당한 하나의 국가로서 어찌 차마 추한 오랑캐의 한 마디 말때문에 우리 백성들을 선뜻 버려 범 같은 오랑캐에게 맡긴단 말입니까. 비록 한두 명만 보내도 백이나 천 명을 보내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민심을 잃고 나면 국가의 위망함이 어찌 오랑캐 군사가 남쪽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겠사옵니까. 근자에 중외(中外)의 인심을 살펴보면 흉흉하고 참담하여 차마 볼 수 없는 기색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조그마한 일입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주상 전하께서 친히 결단을 내리시어 쇄환(刷還)을 허락하지 마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 비국에서 올린 장계에, “중남(仲男)이 차비 역관에게 이르기를, ‘너무 오랫동안 지체했으니 빨리 돌아갔으면 한다. 강씨와 박씨의 아내인 두 여자는 칸이 만나보고 오라 했는데 도피했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으니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하며, 오신남(吳信男)ㆍ박유건(朴維建)ㆍ김진(金榗)에 대해서도 모두 보고 오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어떻게 한단 말이오?’ 하므로, 신 등이 대답하기를, ‘오래지 않아서 가게 될 것이니 재촉할 필요가 없으며, 강씨와 박씨의 아내인 두 여자에 대한 일은 전에도 이미 말했고, 또 박난영의 입에 달렸으며, 김진과 박유건은 평안도에 있으니 가는 길에 노상에서 서로 만나 보시오.’ 했으나, 신남만은 매양 오늘 아침에 올라온다고 대답을 했으므로 언제까지나 지체만 할 수 없으니, 비록 옥중에 감금되어 있더라도 잠깐 만나보게 하고 도로 가두는 것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러하오나 왕옥(王獄)이 지극히 엄하오니 어떻게 하오리까.” 하니, 비답이 내리기를 “내일 가보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23일 비국 유사 당상(有司堂上)과 금인(金人) 구관당상(句管堂上) 이귀(李貴), 삼사(三司) 장관이 주상전하를 뵙게 되자, 주상께서 이르기를, “근일에 그 자들의 언어와 기색이 어떻더냐?” 물으시므로, 김유(金瑬)가 아뢰기를, “그 자들이 오게 된 이유는 국서(國書) 중에 있는 일에 불과하며, 기색은 별다른 불평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주상이 또 이르기를, “쇄환에 관한 일은 경룡에게 위임해 보냈다는데 무엇 때문이냐?” 하니, 김유가 아뢰기를, “경룡은 우리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 통정하게 한 것입니다. 칸이 기필코 쇄환(刷還)하려는 것은 한갓 값만 받고자 해서가 아니오라, 그의 욕심은 천하 사람을 다 얻고 싶은 것이니, 우리 나라 사람이 도망갔는데도 찾아 들이지 않으면 천하 사람이 모두 도망해 흩어지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고, 또 호령이 시행되지 않을 것을 염려해서입니다. 이번 경룡이 올 적에 요면(要免) 등이 하늘을 가리키며 맹서하기를, ‘비록 맹서를 변경하는 것은 부당하나 만약 쇄환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군사를 보내 잡아오겠다.’고 했다 하오니, 저돌적인 행동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사옵니까. 저들의 말이, ‘반드시 다 쇄환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소간이라도 들여 보내주면 성실한 태도를 보여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이 일만은 도리상 결코 들어줄 수 없다. 그렇지만 사람마다 각기 소견이 있는 법이니 모든 의논이 어떠하냐?” 하였다. 이에 홍서봉(洪瑞鳳)은 아뢰기를, “삼가 비답을 보오니, 보고 듣는 사람이 누군들 감격하지 않으오리까? 당(唐) 나라 때에 실달(悉怛)이 오랑캐에게 죄를 짓고 와 항복한 자인데, 본국에 잡아 보내서 참형을 입게 하니 당시의 공론이 오히려 불가하다 하였는데, 하물며 도주해 온 우리 나라 사람을 차마 범 같은 오랑캐에게 들여보낸단 말입니까? 지금 만약 잡아 보낸다면 저들이 위엄을 보이고자 하여 남김없이 죽일 터이오니, 어찌 속환해 올 수 있겠사오리까? 저들이 전일에 대장장이를 구할 의사가 있다 하였사오니, 만약 부득이하오면 대장장이 몇 명을 보내서 그 책임을 때우는 것이 옳을 줄 아오며, 도로 돌려 보내는 길은 열어주어서는 아니되옵니다.” 하였고, 이귀(李貴)는 아뢰기를, “이 말은 옳지 않사옵니다. 중남(仲男) 등이 나온 것은 그가 우리 나라 사람이라 통정하기 쉽다고 여겼기 때문에 내보낸 것이니, 우리의 처지로는 마땅히 참작해서 들어주어야 하며, 저들이 만약 우리에게 물화를 받아내기로 한다면 군수(軍需)에 소용된다 하고 청구하더라도 응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저들이 도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은 진중에서 사로잡은 사람들이 도주했는데도 찾아 들이지 않는다면 한갓 위엄이 손상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본받을까 염려되어 이처럼 기필코 찾아 들이겠다는 것이오니 반드시 죽이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대사헌의 말은 당당한 정론이오나 적을 상대하는 데에 있어 이런 정론만을 가지고 나간다면 결국은 성을 등지고 한 번 싸우자는 데에 지나지 않사오며, 만약 성을 등지고 한 번 싸우지 못할 형편이라면 이런 정론은 쓸데없사옵니다. 만약 돌려보내지 않고 적병이 한 번 밀어닥치면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치하오리까? 이미 화친을 맺은 터이오니 이런 말을 듣지 마시고 소신(小臣)에게 전임하시오면 마땅히 오랑캐 소굴에 들어가서 그 뜰 아래 절을 하는 것도 달갑게 여기겠사오며, 다만 종묘사직을 보전하고자 하는 생각뿐입니다.” 하였고, 김유는 아뢰기를, “신 등의 생각에는 돌려보내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트집을 잡아 충돌을 일으킬 후환이 있을까 염려되어 그런 것이고, 대사헌의 말은 비록 돌려보내지 않더라도 적이 어찌 꼭 온다고 걱정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의리도 있고 이해도 있으니 돌려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충돌을 일으킬 후환이 있지만, 고금의 처사를 보면 간혹 이해를 계산하지 않고 의리로써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돌려보내지 말라는 의논은 의리상의 말이고, 비록 돌려보내지 않더라도 걱정이 없다는 것은 그럴 리가 없을 것 같으며, 적이 비록 쳐들어 오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괜찮겠지만 비록 돌려보내지 않더라도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은 요량이 없는 말이다.” 하였다. 김유가 또 아뢰기를, “이번 이난(李灤)이 들어갔을 적에 저쪽에 말하기를, ‘제가 마땅히 돌아가면 돌려보내도록 하겠소.’ 했다 하니, 지극히 통분할 일입니다.” 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만약 그랬다면 어찌 통분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이경직(李景稷)이 아뢰기를, “중남에게 칸이 어째서 편지를 보내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그의 말이 전일에 이미 편지를 보냈으니 지금 또 보낼 필요가 없지 않느냐? 이는 도주해 간 사람과 강씨와 박씨의 아내를 도로 돌려보내는 일로 나왔다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강씨와 박씨의 아내는 소행이 음란하고 패악하여 홍립(弘立)이 죽은 뒤에 오래지 않아서 곧 음란한 여자가 되어 도망갔으니 통탄할 일이오.’ 했으나, 이 말은 들은 척 만 척하며 시종 말하는 것은 도주해 온 사람을 도로 데려가는 일이었습니다. 회령에 시장을 여는 일은 신이 중남에게 이르기를, ‘북도에 재화(財貨)가 없는 것은 너희도 아는 바니, 무슨 사갈 만한 물건이 있소?’ 하니, 중남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이난이 사명을 받들고 남의 나라에 가서 조정의 지휘를 받은 일도 없이 돌려보내는 일을 제 마음대로 경솔히 허락했으니 끌어다 문초를 받게 하옵소서.” 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그 일은 해괴스러우나 우선은 오랑캐가 돌아가지 않았으니 돌아간 뒤에 처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하자, 이목(李楘)이 아뢰기를, “오랑캐놈들이 보는 자리에서 죄를 주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경직은 아뢰기를, “이난이 저쪽에 가서 한윤(韓潤)이 기른 계집 생이(生伊)를 비단 열필, 수은(水銀) 두 근으로 사려고 하니, 한윤이 비단 20필, 수은 세 근으로 사가라 하므로, 이난이 비단 10필 분을 20필로 만들어 샀는데, 칸이 듣고 한윤을 불러 헐값을 받고 사람을 팔았다고 책망하였답니다. 그리고 이난이 들어갔을 적에 지면(紙面)에 호서회답(胡書回答)이라고 썼는데 칸이 보고 크게 노했으며, 또 두 사람을 두들겨 팼기 때문에 저쪽과 틈이 벌어지게 되었답니다.” 하고, 홍서봉은 아뢰기를, “이난의 말 때문에 돌려보내는 사건이 생겼으니 그 죄가 또한 중하지 않사옵니까?” 하고, 정경세(鄭經世)는 아뢰기를, “이난의 일이 지극히 해괴하여 나라를 욕되게 했을 뿐만 아니오라 나랏일도 그르쳤사오니 오랑캐들이 보는 곳에서 처형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이난의 범죄가 이처럼 심한 줄은 나는 몰랐다. 잡아다 문초를 받고 죄를 결정하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박난영(朴蘭英)을 전일 들여 보낼 적에 회피하려고만 했을 뿐 아니라 자못 가증스러운 태도가 있었는데, 지금 들여보내면 어떻겠으며, 오신남도 속죄해서 들여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니, 이경직이 아뢰기를, “사건이 난영과 관계되니 난영을 들여보내는 것이 옳은가 합니다.” 하고, 김유가 아뢰기를, “인물로 따지면 난영은 영리하여 신남보다 낫사옵고, 죄로 따지면 신남 역시 죄가 있사옵니다.” 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난영을 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비국에서 다음과 같이 장계하였다.
“신 등이 도주해 온 사람을 도로 돌려보내는 일로 일찍이 모여서 상의했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우리 백성이 구사일생으로 고국에 돌아왔는데 도로 잡아 보낸다면 정으로나 이치로나 차마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이 만약 국가에 이런 처사가 있었다는 것을 듣게 되면 반드시 놀라 탄식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적이 오기 전에 먼저 실망을 주는 것이므로 또한 작은 염려가 아니다. 이번에 비록 몇 명을 보내더라도 저쪽에서 바라는 것이 이에 그치고 다시 후환이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랴. 결코 경솔히 허락해서는 안 된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비록 부득이하여 끝내는 보내지 않을 수 없을지라도 경룡(景龍) 등의 반드시 죽이지 않는다는 말만 믿고서 경솔히 들여보내서는 안 되니, 전일에 회답한 국서(國書) 내용을 들어 부드러운 말로 또 회답을 하고, 정문익(鄭文翼) 등을 시켜 칸의 마음이 살해할 뜻은 없는지를 탐지한 뒤에 다시 의논해서 들여보내는 것도 불가할 것은 없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의리를 가지고 말하면 단연코 할 수 없지만 이해를 가지고 따지면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다. 경룡 등이 분명히 죽이지 않으리라는 뜻을 보였으나, 그 기색을 살펴보면 저쪽을 위하는 하나의 계교에 벗어나지 않는 것 같은데, 만약 돌려보내도 죽이지 않고 또 속환해 가는 것까지 허락한다면 의주에 머물러 있는 여인 세 명과 사내 몇 명을 돌려보낸다는 명목을 붙여서 들여보내 화를 늦추는 꾀로 삼는 것도 불가할 것은 없다.’ 하였사옵니다. 이상 세 가지 말 중에 이른바, ‘잡아보낼 수 없다.’는 것이 진정 제일의 정론인지라, 당연히 다른 의견은 없어야 할 것이나, 때에 따라 변고에 대처하는 길도 있으니 오늘의 사세로는 정론만 내세울 수도 없을 것 같으며, 세 번째 말도 소견이 없지 않을 것 같으니 그 말대로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일은 매우 중대하니 다시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 평양 감영의 서목(書目)은 다음과 같다.
진달(眞㺚) 두 명ㆍ호녀(胡女) 네 명ㆍ가달(假㒓) 한 명ㆍ중국 차사(差使) 한 명을 압송해서 가도(椵島)로 들어왔기로, 그들에게 들어온 이유를 물으니, 오랑캐가 지난 5월 15일에 대군(大軍)을 일으켜 서쪽으로 나와 광녕(廣寧)에서 싸우다 패배하고 그곳에서 후퇴하여 돌아가면서 처자를 거느리고 모영(毛營)으로 들어왔다 하옵니다. 그래서 오량캐의 정상을 물으니, 지난해 우리 나라로 나올 적에 두 번째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향했으나 연이어 대패를 당해서 다시는 서쪽으로 향할 의사가 없고, 오는 가을이나 겨울 사이에 개시(開市)하는 일로 인해 구연성(九連城)에 주둔했다가 얼음이 얼면 동쪽으로 나와 노략질할 모양이라 하옵니다.
○ 정원(政院)에서 다음과 같이 장계하였다.
오랑캐 나라에서 도주해 돌아온 사람을 도로 돌려보내는 일은 이원익(李元翼)의 의견대로 하도록 결재하셨습니다. 그러나 신 등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이 일은 실로 민심을 동요시키는 자료입니다. 요즘 이 일로 인하여 민간에서 한창 시끄러운데, 가만히 여론을 살펴보면, 약한 자는 안색에만 참담한 기색을 보이고, 강한 자는 말에 노기를 보이고 있으니, 민심의 향배가 결단코 이번 거조에 달린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도 이러하온데 지방이야 어떻겠습니까. 또 약정한 뒤에 돌려보낸다는 말을 듣게 되자 사람들은 조정이 국가에 대한 계획이 치밀하여 마침내는 속환해 온다는 것을 모르고 서로 원망을 하며 허물을 조정으로 돌리니,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은 더욱 경동하여 비록 유식한 사람도 타이르기 어렵게 되었사옵니다. 혹 난리를 다행으로 여기는 무리들이 이때를 타서 선동하면 적이 맹서를 변경하기 전에 민심이 먼저 무너져 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심히 두렵습니다. 지금 저쪽에서 비록 백 번 청하더라도 차라리 이로써 틈이 벌어져 전쟁이 일어날지언정 단연코 돌려보낼 수는 없다는 뜻으로 특별히 교지를 내려 내외에 선유하신다면 인심이 모두 감격하고 기뻐하여 다투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할 것이오니, 이야말로 안위존망(安危存亡)의 큰 기회이니 하루라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바라옵건대, 주상전하는 유의하시옵소서.
○ 오신남(吳信男)이 중남(仲男)을 찾아가 본즉, 안부를 묻는 이외에는 별로 딴말이 없으므로, 신남이, “집이 먼 곳에 있고 또 병마저 들어 곧장 찾아와 보지 못했소.” 하니, 은자 20냥을 내주며, “칸이 보낸 것이오.” 하였다.
○ 비국에서 아뢰기를, “지난해 중남이 강화도에 왔을 때나 그 뒤 서울에 올라왔을 때에 그 형에게 지위가 낮은 벼슬이라도 얻게 해 달라고 청하기로, 그때 바로 장계를 올리니, 장계대로 하라는 비답이 내려 그 뜻을 중남에게 일러주었사온데, 지금 와서 아직까지 성은을 입지 못했다고 누차 말하오니, 그가 사는 근읍에 변장(邊將)으로 제수하여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편인가 합니다. 박경룡도 오랑캐 나라에 출입하여 공로를 세운 것이 박난영과 다름이 없으니 이에 의하여 상을 내려 보답하는 뜻을 보여주십시오.” 하니, 비답이 내리기를, “장계의 사연이 매우 타당하니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 이귀(李貴)의 차자에, “오늘날 나라 형세는 저 월왕(越王) 구천(句賤)의 형세보다 심하니, 만약 시기를 관찰하여 알맞게 처리하지 않으면 반드시 망측한 대환(大患)이 있을 것입니다. 신의 뜻으로는 종묘사직의 백년 대계를 위해서는 우선 의주에 구류되어 있는 사람 몇 명을 보내서 잘 말을 하고 그 사이에 주선하여 우리 나라의 신용을 보여준다면, 저들이 반드시 노여움이 풀어져서 우리 백성을 속환해 줄 것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한갓 정론만 지켜 이 기회를 잃어 저들의 노기를 격동시킨다면 차라리 건의한 자의 말처럼 군사를 내어 곧장 적의 소굴로 쳐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우선 죽일 것인지 죽이지 않을 것인지부터 물어 보고서 나중에 속환한다는 말을 꺼내기로 한다면 이때를 당하여 어떻게 처리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사오며, 또 잡아간 군사를 시켜 일일이 와서 찾아가라 한다면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입니까. 신의 어리석은 꾀로는 이런 경우에 있어 반드시 신의 말을 채용하지 않는 것이 후회가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이 내리기를, “이미 작정한 일이니 다시 변동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여헌선생문집 제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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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묘갈(墓碣) 묘지(墓誌)
처사 박공(朴公)의 묘갈명



공은 휘가 수일(遂一)이고 자가 순백(純伯)이다. 신라에 박씨가 왕 노릇할 적에 여러 공자(公子)를 고을에 나누어 봉하였는데 지금의 경상좌도(慶尙左道)인 밀양(密陽)이 그 중에 하나이니, 공은 바로 그 후예이다. 역사책에 기재되어 전하는 것이 없고 족보 또한 잃어서 공에게 몇 대가 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공의 9대조인 휘 화(華)는 고려조에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을 지냈으며, 중세(中世)에는 용궁(龍宮)에 거주하였다. 6대조 휘 종원(宗元)에 이르러 홍치(弘治 명(明) 나라 효종(孝宗)의 연호) 연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호를 묵재(默齋)라 하였는바, 생원(生員)인 허량(許諒)의 따님에게 장가드니, 허씨는 바로 김해(金海) 수로왕(首露王)의 후손이다. 생원이 선산(善山)의 해평현(海平縣)에 거주하였으므로 공은 장가든 뒤에 이곳으로 가서 거주하니, 바로 지금의 고리방(古里坊)이 그 마을이다.
조고(祖考)는 휘가 운(雲)인데 정덕(正德) 기묘년(1519,중종14)에 진사에 합격하였는바, 용암(龍巖)이 그의 호이다. 스승이 송당(松堂) 박영(朴英)이고 친구가 진락당(眞樂堂) 김취성(金就成)이니, 공의 학문과 덕행은 후학이 의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에 효자비(孝子碑)가 있으니 선조(宣祖) 때에 정려(旌閭)한 것이며, 묘소 아래에 비갈이 있으니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찬(撰)한 것이다. 공의 저서로는 《경행록(景行錄)》, 《자양심학지론(紫陽心學至論)》, 《격몽편(擊蒙篇)》, 《삼후전(三侯傳)》, 《위생방(衛生方)》 등이 있어 가보(家寶)로 전해 온다.
선고(先考)는 휘가 호(灝)인데 가정(嘉靖) 병오년(1546,명종1)에 생원에 합격하였으며, 광릉(廣陵) 이종악(李宗諤)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계축년(1553,명종8) 12월 28일에 공을 낳았다.
공이 겨우 8세 때에 생원공이 갑자기 별세하자, 공은 놀라 울부짖고 가슴을 치면서 세 번이나 땅에 쓰러졌으니, 이 어찌 보통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9세에 용암공(龍巖公)이 입으로 《소학(小學)》을 가르쳐 주니, 공이 모두 통달하여 외웠다. 용암공은 공을 애지중지하며 말씀하기를, “우리 집안의 일을 맡을 자가 이 아이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임술년(1562,명종17)에 용암공이 별세하자 공은 중계부(仲季父)를 따라 여막에 있었는데, 저녁이면 자친(慈親)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새벽이면 문안을 하여 아침저녁으로 폐하지 않았다. 17세에 퇴계 선생을 예안(禮安)으로 찾아가 뵈오니 선생은 크게 장려하고 허여하였으며, 또 소재(蘇齋) 노 상공(盧相公 노수신(盧守愼)을 가리킴)을 상산(商山)으로 찾아가 뵈었으니, 이는 모두 그 뜻이 일찍부터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자년(1576,선조9)에 처음으로 한성(漢城)의 별거(別擧)에 참여하였으나 전시(殿試)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로 다시는 과거 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마침내 자신을 위하는 성인(聖人)의 학문에 힘써 밤이면 혹 상투를 매달아 잠을 깨우면서 뜻을 독실히 하였는데, 모부인(母夫人)이 병이 날까 두려워하여 중지시켰다.
을유년(1585,선조18) 집에 독한 염병이 유행하여 공이 배우자를 잃고 뒤이어 선비(先妣)가 전염되니, 공은 곁을 떠나지 않고 약을 올리고 똥을 맛보아 미리 병세를 징험하였다. 모부인이 별세하자, 공은 곡하고 뛰며 슬퍼하고 훼손하여 쓰러져 기절하였다가 소생하기를 여러 번 하였으며, 삼 년 동안 피눈물을 흘려 거의 상명(喪明)할 지경에 이르렀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때로 모친의 손때가 묻은 물건을 보면 그 때마다 실성 통곡하며 슬피 울부짖으니, 이웃과 집안들은 모두 슬퍼하고 감탄하였다.
임진년(1592,선조25)에 왜란을 만나 산골짝으로 피하여 숨었는데, 공은 비록 창황하여 급박한 상황에 있었으나 만약 기일(忌日)을 만나면 친히 제수를 장만하여 반드시 조상이 계신 듯이 여기는 정성을 지극히 하였다. 이 때 용암의 계부인(繼夫人)인 김씨(金氏)가 아직도 막내 숙부의 집에 있었는데, 공은 받들어 모셔다가 몸소 봉양하여 떳떳한 법을 잃지 않았으며, 별세하자 초상을 치르기를 예(禮)와 같이 하였다.
공의 외가가 왜적의 난리에 몰살하였는데, 공은 서너 초상을 거두어 장례하되 정과 예를 지극히 하였으며,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어루만지고 기르며 말씀하기를, “이 아이가 모름지기 보전되어야 외가의 제사가 끊기지 않는다.” 하였다.
정유년(1597,선조30)에 왜적이 다시 쳐들어 왔다가 패하여 돌아갔는데 이 때 길이 본부(本府)를 경유하였다. 공은 미처 멀리 피난하지 못하고 갑자기 왜적의 흉한 칼날을 만났으나 또한 스스로 혼란하지 않고 계속하여 왜적을 꾸짖다가 마침내 화를 면치 못하고 별세하였으니, 아! 슬프다. 하늘이 선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음이 이에 이른단 말인가.
공은 비록 가정 교훈을 끝까지 받지는 못하였으나 예로부터 여러 대에 걸쳐 쌓아온 선행과 숭상하는 유풍이 가정에 남아 있는 것이 깊고 또 후하였으며 전하여 이어온 것이 유래가 있었으니, 어찌 다만 자품이 아름다웠을 뿐이겠는가. 평소 여러 행실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외인(外人)들이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나 모두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없는 것이었다.
공의 배필은 평양 조씨(平壤趙氏)이니, 곧 선무랑(宣務郞)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인 인복(仁復)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임자년(1552,명종7)에 출생하여 만력(萬曆) 을유년(1585,선조18)에 별세하였다.
4남을 낳았는데, 장남 홍경(弘慶)은 아들이 없어 넷째 아우인 진경(晉慶)의 넷째 아들 율(慄)을 양자로 삼았으며, 딸이 둘인바 장녀는 이진(李)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김이후(金爾後)에게 출가하였다. 이씨 사위는 남녀를 두고 김씨 사위는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차남 형경(亨慶)은 4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인 규(㥣)는 양성(陽城) 이유성(李維聖)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이름이 헌(憲)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장녀는 생원 채이복(蔡以復)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정자(正字) 김하량(金厦樑)과 선비 정별(鄭)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차남 이경(履慶)은 4남 3녀를 두었는바, 아들은 유(愉)와 용(愑)이고 나머지는 어리며, 장녀는 선비 전저(全佇)에게 출가하였는데 일찍 과부가 되었고 나머지는 어리다.
차남 진경(晉慶)은 5남 3녀를 두었는바, 장남인 기(愭)는 해평(海平) 길창선(吉昌善)의 딸에게 장가드니 야은(冶隱)의 후손이며, 3남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다음은 황(愰)인데 부사(府使) 최산휘(崔山輝)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다음은 협(悏)인데 현감 권응생(權應生)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다음은 율(慄)인데 홍경(弘慶)의 양자가 되었는바, 선비 안경엄(安景淹)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으나 어리다. 다음은 서(㥠)이다. 장녀는 선비 임경윤(任景尹)에게 출가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막내아들인 진경(晉慶)은 숭정(崇禎) 7년(1634) 봄에 은혜를 입어 종사랑(從仕郞) 영숭전 참봉(永崇殿參奉)에 제수되었다. 참봉은 일찍이 《통모록(慟慕錄)》을 편수하여 나에게 보여 주고 말하기를, “저희들이 선친을 위하여 돌을 다듬어 비문(碑文)을 새기게 되었으므로 감히 비석의 후면(後面)에 기록해 줄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나는 평소 서로 대하는 정분이 진실로 심상(尋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금 연척(連戚)의 의리가 깊고 또 중하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박씨는 신라의 시조에게서 나왔으니 / 朴出羅祖
실로 하늘이 주신 것이었네 / 寔天攸錫
여러 고을에 나누어 봉하였는데 / 分封列境
밀성군파(密城君派)가 가장 혁혁하다오 / 密派最赫
용암공은 / 曰惟龍巖
일선(一善) 고을에 우뚝 뛰어났네 / 善鄕挺特
훌륭한 스승이 있고 벗이 있어 / 有師有友
숨은 이치 연구하고 토론하였는데 / 窮討隱賾
공은 사손이 되어 / 公爲嗣孫
뜻을 잇고 일을 계승하였네 / 以繼以述
명경당을 지어 / 明鏡肯堂
솔개와 물고기의 묘리를 살폈는데 / 鳶魚妙察
불행히도 난리를 만났으나 / 不幸遭亂
지키는 조집(操執)이 더욱 확고하였네 / 操守愈確
곤궁함에 처하여도 도가 형통하고 / 處困亨道
사변에 임하여도 도리를 따랐는데 / 臨變惠迪
하늘의 뜻을 알기 어려우니 / 天意難知
덕이 있는 이를 돕지 않았네 / 不祐有德
선행을 이미 대대로 쌓았으니 / 善旣世積
후손이 어찌 번창하지 않겠는가 / 後豈無發
후인들은 무엇을 보아야 하나 / 後人何鑑
여기에 세운 이 비석을 보라 / 鑑此竪石


 


 

 

 

연려실기술 제2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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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유효립(柳孝立)의 옥사(獄事)



유효립(柳孝立)이 전 세마(洗馬) 허유(許逌)ㆍ전 좌랑(佐郞) 정심(鄭沁)ㆍ전 전적(典籍) 김탁(金鐸)ㆍ진사 유두립(柳斗立)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고 몰래 도감초관(都監哨官) 윤계륜(尹繼倫) 등과 손을 잡아 내응하게 하였다.
○ 무진년 1월 3일에 죽산(竹山)에 사는 전 부사 허적(許)이 고변하기를, “허유 등이 내일 대궐을 범하기로 약속하였다.”고 하므로 비변사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고변한 사람 허선(許選) 등과 함께 잠복하여 동대문과 남대문을 지키게 하였다. 그날 저녁 역적들이 길을 나누어 두 성으로 들어오다가 모두 잡혔다. 또한 최산휘(崔山輝)가 유효립 등의 반역한 정상을 고발하였으므로 금부도사를 나누어 보내서 모두 잡아 국문하니 자복하였는데 어느 사람은, “강화에서 광해군의 애통한 밀지를 받고서 인성군으로 하여금 의거하게 하였다.” 하였으며, 혹은 “대비의 밀지가 인성군에게 전하여졌다.”고 하였다. 모두 법대로 처단되었다. 《조야기문잡록》
○ 효립은 광해군 때 외척으로서 당상관 승지의 높은 벼슬을 지냈었는데 이때 제천(提川)에서 귀양살면서 몰래 딴 뜻을 품고서 항상 여인의 가마를 타고, 서울에 있는 광해 때의 옛 신하로 새 조정을 원망하는 자들의 집을 왕래하면서 궁중의 시녀와 내시와 대궐문의 수장(守將)까지 통하여 다음날 대궐문을 열고 임금의 침전에 곧장 들어가기로 모의하였다. 그날 허적이 죽산에서 그 역모를 듣고 급히 사람을 시켜 달려가 아뢰게 하였다. 또한 그때 최현이 갇혀 있었으므로, 최현의 아들 산휘가 때마침 의금부 문 밖에 있었는데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가 자기 하인을 시켜 산휘에게 문안하게 하였다. 그 하인은 효립이 예전에 평시에 데리고 다녔었고 그 후에는 명세의 심부름을 하는 자였는데 그 하인이 산휘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내일 조정에 큰 변이 일어날 것이니, 영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니 산휘가 이상히 여겨 급히 명세에게 알려서 고문(拷問)하니 자복하므로 체포하여 대궐에 끌고 갔더니 허적의 고발장이 이미 먼저 도착하였다. 《일월록》
○ 그때 효립이 자기 아들과 무리들을 서울에 들여보내어 내시와 궁녀들과 통하여 4일 밤에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범하기로 약속하였다. 허유가 그 역모에 참여하였는데 허유는 허적(許)의 조카였으므로 허적이 그것을 알고 급히 홍서봉(洪瑞鳳)에게 알렸다. 그때 최현은 인거의 역모를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로 의금부에 갇혀 있었는데, 나졸이 최현의 아들 산휘에게 살짝 말하기를, “오늘 감사께서 출옥하게 될 것입니다.” 하므로 산휘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나졸의 효립의 음모를 말하였다. 이에 산휘가 크게 놀라 급히 심명세에게 가서 말하니 서봉과 명세 등이 아뢰었는데 4일날 저녁 때였다. 조정에서는 크게 놀라 금부도사를 사방에 보내어 체포케 하고 훈련도감의 군사를 동원하여 3대문(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밖에 매복시켜 기다리게 하였는데 허유 등이 무기를 싣고 밤을 타서 성문을 들어오다가 모두 잡혔고, 효립과 그의 사촌 동생 두립(斗立)이 자복하여 목베이였다. 허적 등은 영사공신(寧社功臣)에 녹(錄)하였고 홍서봉ㆍ이산휘도 모두 참여되었다. 《하담록》
○ 이때 허적이 홍서봉에게 고변하는 글을 보내왔는데 홍서봉이 미처 발설하기도 전에 도성 안이 흉흉하였으므로 신흠이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고 급히 대장 신경진(申景禛)ㆍ이서(李曙)를 불러 군사를 충돌시켜 무기를 싣고 들어오는 적을 체포케 하고, 한편으로는 서봉을 재촉하여 그 일을 발설케 하였다. 상촌시장(象村諡狀)
○ 영의정 신흠이 비변사에 있다가 그 보고를 듣고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일이 급하다. 일각이라도 늦어지면 난이 일어나 사전에 수습할 도리가 없을 것이니 모름지기 먼저 체포하고 뒤에 보고함이 옳다.” 하고, 곧 포도대장을 불러 군사를 나누어 보내서 체포케 하였다. 역적의 무리 중 일부는 먼저 도성 안에 들어와 종적을 감추고 있었고, 일부는 무기를 싸가지고 이미 한강을 건너 해가 진 뒤 대궐을 범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 최현은 그의 아들 산휘가 공신에 참여되었으므로 죄가 감하여져서 종성(鍾城)에 안치(安置)되었다. 그 후 8월에 공신들의 회맹제(會盟祭) 때에 사면되었다. 《잡록(雜錄)》 《일월록》
○ 반교문(頒敎文)에 이르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역모가 여러 번 국내에서 일어났다. 무릇 임금에게 거역하는 큰 변이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일어날 뻔하였다. 형벌이 밝게 실시되었으니 경사스러운 은택을 사방으로 펴노라. 내 부족한 몸으로 이 난정의 뒤를 이어서 대비를 받들어 복위시킴으로써 떳떳한 윤기(倫紀)가 밝아졌고, 죄인을 내쫓아 명분을 바르게 하여 이로써 대의가 드러났다. 무릇 형벌을 내릴 때마다 관대히 생각하여 윤기를 범한 원흉이 아니면 똑같이 은혜를 베풀어 곡진히 살려주지 않음이 없었는데 어찌하여 흉악한 무리의 잔당이 감히 역모하리라 생각하였으리오. 역적 유효립ㆍ정심(鄭沁)ㆍ윤계륜(尹繼倫) 등은 천성이 효경(梟獍)과 같아 옛날의 비렴(飛廉)ㆍ악래(惡來) 격이어서, 혹은 권간(權奸)에게 붙어 대비를 폐위하여 윤기를 무너뜨림을 저의 임무로 삼았고, 혹은 외척의 지위에서 임금의 비위를 맞춰 나라를 그르치기를 일로 삼았으니, 악함이 한도를 넘어 죽음을 면할 수 없었으나 관대한 은혜를 거듭 입어 시골에서 편히 살게 하였더니, 하늘이 머리 위에 있음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주인에게만 충성하는 어리석은 개의 마음을 가져, 귀신도 가히 속일 수 있으며 종사를 가히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여서 폐인(廢人 광해(光海))과 연락하여 비밀의 편지를 전하여 서로 응하고 왕자(인성군)와 연락하여 집의 하인들을 모아 군사로 삼았고, 비결(祕訣 참서(讖書))이라 핑계하여 인심을 선동하였으며, 내시와 통하여 궁중을 정탐하였고, 역적을 제갈량(諸葛亮)에 비기며 괴수(魁首)를 가리켜 성인이라 하였다. 궁중에서의 독살 음모는 간악함이 극히 참혹한데 종묘를 불지르겠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있는가. 반역할 계책이 이미 이루어져 있었고 부서가 대략 정하여져 있었으며 음모는 지난해부터 시작되었고 거사할 기일은 그 다음날 아침이였다. 위험스러웠도다. 화가 미침이 경각간에 임박하였으나 다행히 천지신명의 은근한 도움을 입어 드디어 충량(忠良)한 신하가 기미를 미리 알아내어 그 음모를 적발하였으므로 추한 무리가 모두 체포되었으며 엄한 형벌을 가하자 죄상을 즉시 공술하였다. 나라에 일정한 형벌이 있는데 내 어찌 감히 용서하리오. 역적 유효립ㆍ배희도ㆍ허유ㆍ유종선(柳宗善)ㆍ유두립ㆍ안집중(安執中)ㆍ이우명(李友明)ㆍ정린(鄭遴)ㆍ정진(鄭振)ㆍ허규(許逵)ㆍ조헌립(趙憲立)ㆍ이척(李惕)ㆍ배윤(裵允)ㆍ김응호(金應虎)ㆍ김응표(金應彪)ㆍ김응사(金應獅)ㆍ김세익(金世益)ㆍ김영기(金永起)ㆍ옥석(玉石)ㆍ김남(金男)ㆍ귀희(貴希) 등은 모두 법대로 처단하여 형정(刑政)을 바르게 하겠다. ……” 하였다.


 

[주D-001]비렴(飛廉)ㆍ악래(惡來) : 은(殷) 나라의 폭군인 주(紂)의 신하로 주의 모든 죄악을 도운 자이다.11) 진주(眞主) : 새로 일어나는 참다운 임금이란 말로, 여기서는 인성군을 추대하겠다는 말이다.


 

 

 
우복집 제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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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사(啓辭)
헌부(憲府)에 있으면서 외람되이 녹훈(錄勳)된 사람들을 삭제하기를 청하는 계 무진년(1628, 인조6) ○ 상소를 올려 녹훈되기를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가 국기(國忌)가 지난 뒤에 곧바로 공론이 발하여 반드시 삭제되고자 하였는데, 뒤에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한 사람을 상 주어서 천만 사람을 권면할 수 있는 것은 그 상이 그가 세운 공에 합당하여 경하하기에 충분해서입니다. 공이 없는 자가 요행으로 상을 받게 되었을 경우에는 공이 있는 자가 맥이 풀리게 됩니다. 이 때문에 선왕들께서 상을 함부로 주는 것을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더구나 녹훈하는 거조는 또 국가에서 공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 가운데서도 더할 수 없이 큰 은전(恩典)입니다. 그러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그 사이에 지나치거나 거짓스러움이 끼어들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번의 이 역적의 흉악스러운 모의는 하룻밤 사이에 발발할 뻔했는데, 다행히도 상변(上變)이 먼저 들어오는 데 힘입어 국가가 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발고(發告)한 사람의 공로는 비록 땅을 떼어 봉해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외의 사람이 모두 알 수 있을 정도로 현저하게 드러난 사람은 7, 8인에 불과한데, 녹훈된 숫자는 32인이나 되니, 아무런 공이 없으면서 외람되이 녹훈된 자가 대개 4분의 3은 되는 것입니다. 근세에 녹훈이 불공정한 것에 대해서는 의논하는 자들이 팔뚝을 휘두르면서 분통해하고 있으나, 이와 같이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추관(推官)들까지 모두 녹훈된 데에 이르러서는, 이는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권간(權奸)이 마음대로 주무르던 손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법으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기축옥사(己丑獄事) 때의 일은 비록 선왕(先王)의 특명에 의한 것이었지만, 당시 공론을 주관하고 있던 사람들이 극력 간쟁하면서 불가하다고 했습니다. 허적(許) 등이 비록 원훈(元勳)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감히 망녕되이 진달하여 마치 전례가 있는 것처럼 청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중외에서 가장 먼저 고한 몇 명 외에 그 나머지 외람되이 녹훈된 자들을 모두 삭제함으로써, 녹훈하는 법을 중하게 하고 요행으로 얻는 문을 막으소서.
흉악한 역적들이 대궐을 침범할 날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으니, 종사의 위태로움이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용납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신하 된 자의 의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미친 듯이 날뛰면서 온 기운을 다하여 달려 들어와 고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홍서봉(洪瑞鳳)은 이미 아침을 먹기 전에 허적의 편지를 얻어 보았으며, 심명세(沈命世) 역시 대궐 안에서 최산휘(崔山輝)의 보고를 받았는데, 혹 사실(私室)에 묵혀 두거나 혹 바깥으로 나가 모의를 하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고한 자로 하여금 스스로 상변(上變)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군대를 편성하는 것이 너무 늦어지고 사세를 군박스럽게 만들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역적과 마주치고서도 놓치게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훈척(勳戚)의 재신(宰臣)인바, 의리상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해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고변(告變)했다는 이름을 피하려 하다가 하마터면 대사를 그르칠 뻔하게 하였으니, 그 죄를 실로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무슨 상 줄 만한 공이 있겠습니까. 홍서봉과 심명세는 모두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게 하소서. 또한 홍서봉은 훈적(勳籍)에서 삭제하소서.


 

응천일록 3(凝川日錄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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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년 상 (1628, 인조 6)




1월

3일 저녁에 죽산(竹山)에 사는 두 사람이 고변하기를, ‘허유(許逌)가 병사를 일으켜 반역을 꾀하는데, 4일에 대궐을 침범하려 한다.’ 하였다. 들으니, 황진(黃縉)이 그의 서매부(庶妹夫) 김일성(金日聲)과 함께 올라와서 김일성을 시켜 정원에 나와 고변하게 하였다 한다. 죽산에 사는 두 사람이 고변하니, 전교하기를,
“대신ㆍ금부당상ㆍ포도대장ㆍ양사의 장관ㆍ병조 판서를 명초하라.”
하였다. 문사 낭청(問事郞廳)에는 윤평(尹坪)ㆍ박황(朴潢)ㆍ이행원(李行遠)ㆍ이경석(李景奭)이었다.
4일 간밤에 정국하였는데, 죄인 이계선(李繼先)ㆍ윤계륜(尹繼倫)ㆍ김유선(金裕善)ㆍ유양선(柳養善)ㆍ유종선(柳宗善)ㆍ이경항(李慶恒)ㆍ이대기(李大奇)ㆍ김이남(金伊男)ㆍ이학(李鄗)ㆍ영견(永堅)ㆍ구리쇠(仇里金)ㆍ박민(朴民)ㆍ귀희(貴希)ㆍ김극빈(金克鑌)ㆍ득남(得男)ㆍ막내(莫乃)ㆍ임덕발(林德發)ㆍ이신영(李伸英)ㆍ일년(日年)과 고변자 신상회(申尙檜) 등 2인은 잡아 가두어 원정하였고, 수이(守伊)ㆍ영기(永己)ㆍ문손(文孫)ㆍ장덕무(張德武)ㆍ정진(鄭進)은 잡아 가두었고, 귀희는 18번 형문하였던 승복하였고, 이우명(李友明)은 한 차례 형문하였고, 이계선은 한 차례 가형하였고, 또 황진ㆍ허선(許選)ㆍ옥선(玉選)ㆍ두현(杜見)ㆍ허유ㆍ어금금(於今金)은 잡아 가두었다. 죄인 귀희는 군기시 앞길에서 처형하고, 죄인 박민(朴民)ㆍ구리쇠(仇里金)는 놓아 보내었다.
5일 허유의 공초 안에,
“이우명(李友明)이 말하기를, ‘대가(大駕)가 강도에 계실 적에 폐주(廢主)가 정창연(鄭昌衍)ㆍ조정(趙挺)ㆍ김신국(金藎國)ㆍ최관(崔瓘)에게 밀서를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국청에서 품지하였더니, 위에서 나문하지 말라고 하였다. 간밤에 신상회ㆍ두현ㆍ황진ㆍ허선ㆍ옥선을 놓아 보냈는데, 고변한 사람이었다. 윤금이(尹金伊)ㆍ배축(裵丑)ㆍ정린(鄭遴)ㆍ유인(柳訒)ㆍ박천억(朴千億)ㆍ허유(許逌)를 잡아 가두고 원정한 뒤에 허유ㆍ영기(永己)ㆍ정진(鄭進)은 각 한 차례 형문하고, 이계선ㆍ김이남(金伊男)은 각 한 차례 가형하고, 이정철(李廷哲)은 잡아 가두고, 김이남은 승복하여 군기시 앞에서 처형하였음을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고변인 등이 객집에 와 있는데 배고픈 일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안에서 주찬(酒饌)을 먹여야 하겠으니, 불러온 뒤에 알려라.”
하였다. 고변인 4명을 불러다가 차꼬를 풀어주고 술을 하사하였다. 대사헌 이홍주(李弘冑)ㆍ대사간 조익(趙翼)은, 허유(許逌)의 공초에, ‘유인(柳訒)을 찾아보았다……”고 하였는데, 국문하기를 청하지 않았다 하여 인피하다가 체직되었다. 전교하기를,
“고변인 김진성(金振聲) 등을 모두 석방하되 국청에 머물러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대개 국청에 대해서는 양사 장관이 유고하면 차관이 들어와 참여하는 것은 규례인데 다만 전국(停鞫)을 청하고 옛날 규례를 여쭙지 않았으니, 당해 승지도 또한 역옥을 대수롭지 않게 본 죄는 면키 어렵다. 잡아 가두어라.”
하자, 승지 김시국(金蓍國)을 잡아 가두었다. 죄인 이계선ㆍ정진ㆍ영기(永己)는 압사하고, 정인(鄭遴)을 형문하고, 이대기(李大奇)ㆍ이학(李鄗)은 석방하고, 희세(希世)는 잡아 가두었음을 아뢰었다. 죄인 허유ㆍ이우명은 면질한 뒤에 가형하였더니 승복하고, 내관 배희도(裴希道)ㆍ이양(李陽)은 잡아 가두었다.
6일 경기감사의 서목에,
“죽산부(竹山府)에서 올린 허유의 첩(妾) 등을 잡아 가두었다는 것과 허적(許)의 비밀한 상소를 올려 보냅니다.”
하였다. 죄인 허규(許逵)는 잡아 가두고, 희세는 석방하였다. 정국하였는데, 죄인 이계선ㆍ정진ㆍ영기(永己)ㆍ정인(鄭遴)은 가형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고, 이양(李陽)ㆍ윤계륜ㆍ경룡(景龍)ㆍ배축(裴丑)ㆍ장덕무(張德武)ㆍ유진형(柳振亨)ㆍ천남(天男)ㆍ옥성(玉成)은 각 한 차례 형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고, 배축은 승복하였다.
7일 간밤에 죄인 윤계륜을 한 번 형문하고, 이양에 대한 형문을 마치고 난 다음 옥성은 두 번 형문하였더니 모두 승복하였고, 배축은 정인과 면질하고, 허유는 이우명과 면질하였으며, 허규는 가형하였더니 승복하였고, 이계선ㆍ영기ㆍ정진ㆍ정인은 압사하고, 구산두(具山斗)ㆍ민성복(閔聖復)ㆍ정심(鄭沁)ㆍ안집중(安執中)ㆍ남응민(南應敏)은 잡아 가두었으며, 경룡은 가형한 뒤에 압사하고, 유진형(柳振亨)ㆍ천남(天男)은 가형하였으며, 구산두ㆍ정심은 한 차례 형문하였다. 그리고 또 정진ㆍ경룡은 가형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고, 정인은 가형하였더니 승복하였으며, 김추근(金推近)은 잡아 가두었다. 죄인 이양ㆍ옥성(玉成)은 군기시 앞에서 처형하고, 윤계륜ㆍ정심은 면질하였으며, 구산두ㆍ정심은 가형하고, 안집중은 형문하고, 김취려(金就礪)는 잡아 가두었으며, 정심은 여섯 번 가형하였던 승복하였고, 민준(閔濬)은 잡아 가두었으며, 이계선은 화형 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고, 허규ㆍ정인은 처형하였음을 아뢰었다. 정진ㆍ경룡은 가형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고, 영기는 가형하였던 승복하였으며, 정륭(鄭漋)은 잡아 가두었다.
우상 김류(金瑬)의 상소는, ‘신의 본직 및 겸하여 띠고 있는 체찰사의 임무를 갈고, 신을 법관에 회부하여 신의 죄를 의논하여 바로잡으라.’는 것이었는데, 대개 들으니, 정린(鄭遴)이 승복할 때에 우상을 우두머리로 삼았다고 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비답하기를,
“경은 원훈으로 지위와 명망이 함께 중하기 때문에 간적이 이런 흉계를 만들어 모함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려 한 것이니, 그 계교가 흉악하고도 참혹하다고 할 만하다. 경은 모름지기 개의치 말고 나의 지극한 마음을 체찰하여 속히 나와 국청에 참여하라는 내용으로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라.”
하였다.
8일 죄인 김응호(金應虎)ㆍ김응표(金應彪)를 잡아 가두었다. 죄인 배희도(裵希道)는 화형하고, 안집중(安執中)은 가형하였더니 승복하였고, 김취려ㆍ정융은 형문하고, 민준(閔濬)은 형문하였더니 승복하였으며, 배희도를 압슬한 뒤에 김응호ㆍ정이(鄭洱)와 함께 잡아 가두었고, 김추근(金推近)은 석방하였다. 죽산의 죄인 김효립(金孝立)ㆍ조헌립(趙憲立)ㆍ김학(金鶴)을 잡아왔다. 배희도는 승복하였고, 김윤ㆍ유효립ㆍ김응사(金應獅)를 잡아 가두었다. 가도사 최태근(崔太根)ㆍ이기문(李起門)을 잡아 가두었는데, 유효립ㆍ김윤을 기한을 지나 잡아 왔기 때문이다. 죄인 정심은 다시 추고하고, 이계선은 가형하고, 정진은 가형하였더니 승복하였으며 경룡ㆍ구산두ㆍ정융은 가형하고, 나인 업이(業伊)ㆍ향이(香伊)는 잡아 가두고, 김취려ㆍ민준은 가형하고, 안집중ㆍ배윤(裵胤)ㆍ윤계륜ㆍ허유는 압사하였으며, 배희도는 나인 향이ㆍ업이와 면질하고, 김세익(金世益)은 잡아 가두고, 정융은 압사하였다.
9일 간밤에 죄인 유효립ㆍ유양선(柳養善)ㆍ유종선(柳宗善)ㆍ이정철(李庭哲)ㆍ김세익ㆍ김응호는 형문하고, 배희도는 화형하였으며, 김응호는 가형하고, 조정ㆍ유유도(柳有道)는 잡아 왔다. 비망기의 대개에,
“역옥은 사체가 지극히 엄중한 것이기에, ‘내관 가운데 배(裴)가 성을 가진 자가 그대로 궐내에 있는 것이 부당하다.’는 뜻으로 하교하였는데, 내관 신대용(辛大容)과 최언순(崔彦恂)이 두둔하여 구원하는 빛이 뚜렷이 있으니, 모두 잡아다가 추고하라.”
하였다. 죄인 유효립ㆍ유종선ㆍ유양선ㆍ김응호는 가형하고, 정융ㆍ민준ㆍ이정철은 가형하고, 은손(銀孫)ㆍ맛향(唜香)ㆍ조해연(趙海淵)ㆍ김확(金鑊)ㆍ김황(金璜)은 잡아 왔으며, 이유(李濰)는 잡아 오고, 정심은 유효립과 면질시키고, 유종선은 가형하고, 안집중은 조유도와 면질시키고 김세익은 가형하였더니 승복하였으며, 유두립(柳斗立)은 잡아 왔다. 죄인 허유ㆍ윤계륜ㆍ이우명ㆍ배희도ㆍ정심ㆍ김영기(金永己)ㆍ안집중ㆍ정진을 군기시 앞에서 처형하였다. 합사가 아뢰기를,
“인성군 공(仁城君珙)은 여러 역적들의 공초에 나온 적이 전후 한번만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역적 대(濧)와 친히 약속하고 가동(家僮) 90여 명을 내어주었다는 등의 말까지 있었습니다.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밝으신 성상께서 보전해 주고 싶으실지라도 또한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나의 불초함으로 인하여 역적의 변고가 잇달아 일어나니, 내가 실로 부끄럽고 아파서 마음을 잡을 수 없도다. 이번 이 역적의 공초 안에 비록 흉참한 말이 있기는 하나 모두 흉도가 위세를 빌려는 계교이지, 인성이 어찌 참여하였을 리가 있겠는가. 다시는 이 논의를 제기하지 말아서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합사가 아뢰기를,
“김극빈(金克鑌)은, 진작부터 역적의 입에서 나왔으며 따라서 말이 아주 긴절하였으니, 국청의 계사대로 형장을 가해 추문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추국청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죄인 구산두(具山斗)는 압사하고, 이계선ㆍ이응호ㆍ유양선은 가형하였으며, 민준은 압사하고, 김응호는 형문하였으며, 유효립은 세 번 가형하였더니 승복하였고, 경룡은 화형하고, 정융은 압사하였다.
10일 조정ㆍ맛향ㆍ은손은 방송하고, 조헌립은 원정하였더니 승복하였고, 이천성(李天成)ㆍ이귀성(李貴成)ㆍ한유길(韓惟吉)ㆍ이대명(李大明)ㆍ이석과(李碩果)ㆍ이정(李挺)ㆍ이원배(李元培)는 잡아 오고, 경룡(景龍)ㆍ김응호ㆍ민준은 가형하고, 유종선은 승복하였고, 김응사(金應獅)는 가형하였더니 승복하였으며, 유양선은 가형하고, 김극빈은 형문하고, 이계선은 죽었고, 유효립ㆍ김세익은 군기시 앞에서 처형하였음을 아뢰었다. 유두립ㆍ조헌립은 형문하고, 김응호는 압사하고, 오찬(吳燦)ㆍ민굉(閔宏)ㆍ정신(鄭藎)ㆍ박응보(朴應寶)는 잡아 오고, 유두립은 가형하였더니 승복하였고, 김응호는 승복하였고, 구산두(具山斗)는 가형하고 이귀성은 방송하였으며, 정융(鄭漋)은 가형하고, 이정철(李廷哲)은 우선 형장을 가해 추문하는 것을 정지했고, 조헌립(趙憲立)은 가형하고, 유양선은 압사하고, 김극빈은 가형하고, 구산두ㆍ민준은 화형하였다. 옥당의 차자는, ‘인성군(仁城君)에 대하여는 합사의 논의를 쾌히 좇으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적의 공초가 비록 극히 흉참하기는 하나, 모두 위세를 빌려는 말이므로 결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으니, 다시는 시끄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간원의 계는,
“판중추부사 조정(趙挺)은 그가 공초한 말에, ‘옛 임금을 위하여 두 마음을 품었다.’는 말이 있었으니, 그의 속셈을 단연코 알 만하니 절도로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고, 헌부의 계는,
“조정의 공초한 말에, ‘이미 밝으신 성상께 몸을 바쳤으니, 만약 옛 임금을 위해 또 두 마음을 품었다면 죽어도 마음에 달갑겠다.’ 하였으니, 그 말의 뜻을 살펴 보건대, 광해가 윤기에 죄를 지은 사람인 줄을 전혀 모르는 듯함이 있으므로 절도에 위리안치하소서.”
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조정은 앞서 자신이 범한 죄가 없는데 공술한 말에서 실수한 것 때문에 찬출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죄인 조헌립은 가형하고, 유양선은 압사하고, 김극빈은 가형하고, 구산두ㆍ민준은 화형 하였다.
11일 금부가, 최현(崔晛)을 회령(會寧)으로 정배하였음을 아뢰었다. 경기감사의 서목에,
“음죽(陰竹)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민연(閔淵)을 잡아 올려 보냅니다.”
하였다. 죄인 구산두ㆍ김극빈이 죽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유두립의 공초 안에, ‘유충립(柳忠立)의 종이 광해가 위리된 강화의 처소에 늘 왕래하였고, 지난 해 10월의 편지도 제천(堤川)에 겨우 도착하였다.’ 하니, 그 수직(守直)을 삼가지 않은 정상이 극히 놀라우니, 그 때의 내관을 모두 잡아다가 추고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죄인 김취려ㆍ민준ㆍ이유(李濰)ㆍ한유길은 가형하고, 김응표(金應彪)는 가형하였더니 승복하였고, 유양선은 압사하고, 김응호와 민연은 면질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고묘(古廟)할 때에 역적 괴수를 국청에 물었더니, 유효립(柳孝立)이라고 하므로 날을 잡지 않고 왔는데 12일에 고묘진하(告廟陳賀)에 대해 교서를 반포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였는데,
“아뢴대로 하라.”
하였다. 죄인 정석덕(鄭碩德)ㆍ정어(鄭語)ㆍ정운(鄭韵)ㆍ우음산(于音山)ㆍ막금(莫金)을 잡아왔다. 죄인 김응사(金應獅)ㆍ김응호ㆍ김응표ㆍ조헌립ㆍ유두립을 처형하였음을 아뢰었다. 민연은 두 차례 형문하고, 유양선은 압사한 뒤에 화형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12일 간밤에 민연은 압사하고, 우음산은 석방하였다. 전교하기를,
“판중추부사 정창연이 궐문 밖에서 대명한다 하니, 물러가서 조리하도록 승지를 보내어 이르라.”
하였다. 죄인 민준ㆍ이정철이 죽었음을 아뢰었다.
13일 금부의 서록에,
“강화의 광해군이 위리된 처소 안의 나인(內人) 한 사람은 가지고 있던 작은 칼로 스스로 목을 찔러 즉시 죽었고, 임(任)가 성을 가진 사람도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대단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아 떠메고 올라갔습니다.”
하였다. 강화 광해의 나인 애영(愛英)ㆍ인옥(仁玉)을 잡아 가두었다. 죄인 김취려(金就礪)가 죽었다. 죄인 민첩(閔牒)ㆍ민탁립(閔卓立)ㆍ김탁(金鐸)을 잡아 가두었다.
15일 강원 감사의 서목에,
“원주의 죄수 정계(鄭洎)의 아비 대해(大海)가 죽었습니다.”
하였다. 빈청(賓廳)의 2품 이상의 계는, ‘인성군 공(仁城君珙)을 법대로 처치하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흉역의 무리가 이미 다 주벌을 받았으므로, 지금 비록 용서해 줄지라도 다시 무도한 짓을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하니, 경들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체찰하여 다시 번거롭히지 말라.”
하였다. 죄인 이정(李廷)ㆍ한유길(韓惟吉)은 가형하고, 권취성(權就成)은 잡아 왔고, 이유(李濰)는 군기시 앞에서 처형하였음을 아뢰었다. 애영ㆍ인옥은 원정하고, 이정ㆍ한유길은 압사하고, 인옥은 형문하고, 취성은 원정하였다. 죄인 민연(閔淵)이 죽었음을 아뢰었다. 금부가, 김시국ㆍ이행원(李行遠)ㆍ이기행(李起行)ㆍ최대근(崔大根)ㆍ최계훈(崔繼勳)은 용서를 받아 석방하고, 내관 신대용(辛大用)ㆍ최언순(崔彦恂)은 원정하였다.
판부가 내리기를,
“범한 죄가 작지 않으므로 완전히 놓아줄 수는 없을 듯하나, 이미 대사면을 거쳤으니, 형을 면제해 주고 석방하라.”
하였다. 죄인 김탁(金鐸)ㆍ민첩(閔牒)ㆍ서국재(徐國才)ㆍ서진경(徐鎭卿)은 형문하고, 인옥은 가형하였다.
16일 전교하기를,
“명일 광해가 위리 안치된 강화의 적소 안에 나인을 내려 보내야 하니, 금부 도사가 열쇠를 가지고 내려가서 나인을 들여보내주고서 올라오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우의정에게 안심하고 국청에 참여하도록 전교하셨습니다. 그런데 우의정은 역적의 입에 여러 번 나왔다 하여 황공하여, 감히 들어와 참여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라.”
하였다. 또 김탁(金鐸)의 초사에도 나왔다 한다.
간원이 아뢰기를,
“김유(金裕)ㆍ한인발(韓仁發) 등이 ‘진짜 임금은 엄연히 있다.’고 한 말은 역적 인거(仁居)의 초사에서 같이 나왔으니, 한인발을 아울러 잡아다 국문하소서.”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죄인 민첩(閔牒)ㆍ서국재(徐國才)는 처형하고, 죄인 한유길ㆍ이정은 압사하였다. 가도사 김준원(金俊元)이 유희량(柳希亮)을 교형(絞刑)에 처할 일로 거제(巨濟)로 나갔다. 죄인 이부(李溥)를 잡아왔다.
17일 죄인 박영달(朴英達) ㆍ용이(龍伊)는 잡아 가두고, 이정ㆍ한유길ㆍ인옥은 죽었고, 민탁립(閔卓立)은 승복을 받은 뒤에 나이가 차지 않아서 제주로 정배하고, 박영달ㆍ이의(李義)ㆍ경운(景云)ㆍ허용이(許龍伊)ㆍ애영(愛英)ㆍ실이(實伊)는 두 차례 형문하고 경운은 가형하였더니 승복하였으며, 이부(李傅)ㆍ이의ㆍ박귀봉(朴貴奉)ㆍ실이는 압사하고, 애영은 가형하고, 정신(鄭藎)ㆍ민굉(閔宏)ㆍ정석덕(鄭碩德)ㆍ박응보(朴應寶)ㆍ김륜(金崙)은 두 차례 형문하고, 여인길(呂裀吉)은 형문하였다.
강화유수(江華留守)의 서목은,
“수직하는 내관의 전하는 말에, ‘광해가 음식을 먹지 않고 울부짖는다.’ 합니다.”
라는 것이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양지(陽智)의 이후배(李厚培)는 직계(直啓)한 것도 극히 놀랄 만한 일인데, 더구나 역모를 범한 죄인을 신원하려고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외람됨을 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비답하였다.
18일 금부가, 여인길(呂裀吉)이 죽었음을 아뢰었다. 합사의 계는 조정(趙挺)에 관한 것인데, 비답하기를,
“원지에 찬출하라.”
하였다. 죄인 이부ㆍ박영달ㆍ실이ㆍ이의ㆍ애영ㆍ민굉ㆍ정신ㆍ김윤ㆍ정석덕ㆍ임덕발(林德發)ㆍ이곤영(李坤榮)ㆍ용이(龍伊)ㆍ유진형은 가형하고, 애영은 형추(刑推)를 우선 정지하고, 경운(景云)ㆍ이곤영(李坤英)ㆍ임덕발은 처형하고, 이경(李憬)은 잡아 오고, 이의ㆍ실이ㆍ박영달ㆍ정석덕ㆍ박응보ㆍ민굉은 압사하였다.
19일 죄인 김신(金藎)ㆍ김륜(金崙)ㆍ정석덕은 가형하고, 민굉ㆍ박응보는 압사하고, 이보ㆍ이의는 화형하고, 박영달ㆍ용이는 두 차례 가형하고, 한충실(韓忠實)ㆍ유백수(柳柏壽)는 형문하였다.
20일 죄인 애영ㆍ허용이(許龍伊)ㆍ박영달ㆍ민굉ㆍ정석덕ㆍ김윤은 죽었다. 인성군(仁城君)에 관한 종실의 계사에 대하여 비답하기를,
“나의 변변치 못함으로 인하여 이런 전고에 없는 변고를 만났기에 밤낮 부끄럽고 답답하여 마음을 잡을 수 없는데, 종척의 경들이 또 이런 말을 하니 더욱 놀랍고 답답하다. 정을 굽혀 법을 따르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할 바이니, 모름지기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죄인 이의는 가형하였더니 죽었고, 정신은 형추를 정지하고, 박응보ㆍ유진형ㆍ한충길ㆍ실이는 가형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고, 오찬(吳燦)은 방송하고, 일년(一年)ㆍ막내(莫乃)ㆍ금학(今鶴)은 보석하고, 이경(李璟)ㆍ금이(金伊)ㆍ수이(守伊)ㆍ문손(文孫)은 석방하였다.
21일 죄인 박응보(朴應寶)는 죽었고, 실이(實伊)ㆍ유진형(柳振亨)ㆍ한충길(韓忠吉)은 가형하고, 애금이(愛金伊)는 방송하고, 민효백(閔孝伯)ㆍ이남(二男)은 잡아 왔다. 백관과 합사가 세 차례나 계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내가 전부터 인성군을 곡진히 보호하여 편안히 누리게 하려 하였는데, 국운이 불행하여 갑자기 큰 변고를 만나니, 우러러보나 굽어보나 부끄러워서 마음을 잡을 수 없다. 사정(私情)이 중하기는 하나 공의(公議)를 막기 어려우므로 부득이 억지로 좇는 것이니, 지금 우선 내치어 두어 흉도의 엿보는 것을 막게 하라.”
하였다. 합사의 계는, ‘조정을 절도에 안치하라.’는 것이었는데,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죄인 민효백(閔孝伯)은 두 차례 형문하고 압사하였더니 승복하였고, 허적(許)은 잡아 와서 죄의 정상을 물은 뒤에 석방하고, 막동(莫同)은 형문하고, 김경선(金景善)은 잡아 왔다. 제주 목사의 서목은, ‘대정(大靜)에 위리된 죄인 선윤(善胤)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죄인 민효백을 처형하였다. 금부가, 조정(趙挺)을 남해(南海)로 정배하였음을 아뢰었다.
22일 죄인 임성지(任性之)는 잡아 오고, 한충길(韓忠吉)은 죽었고, 막동(莫同)은 가형하였다. 정원의 계는 대개, ‘역적 공(珙)을 내치어 두는 일은 승전(承傳)을 받들도록 전교하였다 하나, 종실과 백관, 삼사가 바야흐로 법대로 하자고 논계하고 있으므로 봉행하지 못하겠다. 감히 아뢴다.’는 것이었는데, 전교하기를,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금부의 계는 대개,
“전교에 운운하시기에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윤 판부사(尹判府事)와 삼공의 의논은, ‘인심이 위태로우므로 한쪽에 아직 내치어 두는 일은 늦출 수 없을 듯하니, 금부로 하여금 급급히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의논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계선(李繼先)ㆍ허유(許逌) 등의 노비와 전답 문서를 해조로 하여금 분별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금부가 아뢰었는데 대개,
“우선 내쳐 두도록 전교하셨기에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백관과 삼사가 바야흐로 법대로 할 것을 논계하고 있으니, 우선 제주 정의현(旌義縣)에 내치어 두게 하되, 이는 보통 재신(宰臣)과는 다르므로 본부의 도사는 선전관과 함께, 그리고 병조로 하여금 별장을 택정(擇定)하여 압송하여 가게 하고, 경기ㆍ충청ㆍ전라도로 하여금 차사원(差使員)을 별도로 정하여 군사를 많이 거느리고 옹호하여 차례차례 교대하게 함이 어떻겠는가?’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제주는 너무 멀므로 진도(珍島)로 내치어 두고, 본군에 정배된 죄인은 모두 다른 도로 이배(移配)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전 인성군이 배소로 갈 적에 중사 및 수직 내관을 마땅히 내려보내어야 하거니와, 일로(一路)에 말을 주어 내려보낼 뜻으로 금부에 말하라.”
하였다. 죄인 막동ㆍ임성지(任性之)는 세 차례 가형한 뒤에 압사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고, 유진형(柳振亨)ㆍ김경선(金景善)은 가형하고, 강순종(强順從)은 원정한 뒤에 석방하였다.
금부 도사 유동휘(柳東輝)ㆍ별장 이원영(李元榮)ㆍ선전관 이윤승(李允升)이 진도로 공(珙)을 압송해 갔다.
23일 죄인 유진형은 죽었고, 임성지ㆍ분동(分同)ㆍ막동은 가형한 뒤에 압사하였다.
24일 정국하였는데, 임성지ㆍ막동은 화형하고, 분동은 두 차례 형문하고, 이남(二男)은 석방하고, 정신(鄭藎)은 물고하였다. 비망기를 내려 이르기를,
“지금 이 흉역의 변고는 천고에 없던 바인데, 허적(許) 등이 듣고는 곧 급히 보고하여 위태한 종사로 하여금 다시 편안해지게 하였으니, 충성은 일월(日月)을 꿰고 공은 종묘사직을 보존하였다고 할 만하므로, 녹훈하여 그 충성을 포상해야 할 듯하다.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대신이 회계하기를,
“흉역의 무리가 안팎으로 서로 응하여 대궐을 침범하려는 시기가 그날 밤이었는데, 허적이 듣고는 즉시 고발하였으니 그 공로가 큽니다. 성상의 전교대로 녹훈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역적 괴수 유효립(柳孝立)의 아들 익선(益善)은 연좌시켜야 하는데, 현재 제천(堤川)에 있으니, 낭청을 내려보내어 교형(絞刑)에 처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여러 아들 가운데 나이가 차지 않은 자는 우선 잡아 가두어두라.”
하였다. 죄인 막동ㆍ임성지를 가형하고 압사하였다. 백관과 합사의 계에 비답하기를,
“예로부터 이러한 변고를 만나는 자는 정과 법을 참작하여 처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국법이 중하기는 하나 사은(私恩)도 너무 폐해서는 안 되오. 이로 미루어보건대, 오늘의 처치는 실로 중도를 얻은 것인데, 경등이 아직도 정지하지 않으니 또한 지나치지 않소? 경등이 해가 넘도록 논란하여 고집하더라도 단연코 좇을 수 없으니, 물러가서 생각해 보오.”
하였다.
26일 죄인 임성지가 죽었다. 대신이 아뢰기를,
“허적(許)이 예궐하여 공훈을 감정하려는데, 적이 말하기를, ‘죽산에 있을 적에 홍서봉(洪瑞鳳)에게 편지를 보내었으므로, 서울에 상변(上變)한 등의 일에 관해서는 서봉이 알 것이니, 반드시 서봉과 함께 의논하여 감정해야 한다.’ 하니, 홍서봉을 명초하여 감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전교하였다. 합사의 계는 대개, ‘인흥군 영(仁興君瑛)을 절도에 안치하라.’는 것과, ‘인성군(仁城君)의 노복을 해조로 하여금 문서를 조사하여 이속시키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논해서는 안 될 것을 가벼이 논한다는 뜻으로 어제 이미 일렀는데, 이제 또 다시 번거롭게 하니, 내가 매우 괴이하게 여긴다. 너희들은 물러가서 깊이 생각해 보고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또 노복에 관해서는 지금은 우선 버려두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죄인 정혁(鄭赫)ㆍ정명(鄭蓂)을 잡아 가두었다. 죄인 구정혁(具廷赫)은 세 차례 형문하고, 정명은 포도청으로 돌려보내고, 구정혁은 압사하였다.
27일 죄인 구정혁을 두 차례 가형한 뒤에 압사하였다.
28일 죄인 유성선(柳性善)은 잡아오고, 구정혁은 가형한 뒤에 압사하였다. 홍서봉ㆍ허적 등의 상소는, ‘녹훈할 적에 국청의 모든 신하들도 아울러 기록하는 규례가 분명히 있으므로 임금의 재가를 바란다.’는 것이었는데, 계(啓) 자를 찍어 내렸다. 간밤에 대신과 원훈이 공훈을 감정하여 봉해 들였다.
29일 공훈을 감정하였는데, 1등에는 허적ㆍ홍서봉이, 2등에는 김류(金瑬)ㆍ신흠(申欽)ㆍ오윤겸(吳允謙)ㆍ황성원(黃性元)ㆍ허계(許禊)ㆍ황진(黃縉)ㆍ허선(許選)ㆍ윤방(尹昉)ㆍ서성(徐渻)ㆍ김자점(金自點)ㆍ한여직(韓汝溭)ㆍ이경직(李景稷)ㆍ이서(李曙)ㆍ신경진(申景禛)이, 3등에는 이후배(李厚培)ㆍ이후원(李厚源)ㆍ이성구(李聖求)ㆍ정경세(鄭經世)ㆍ김상헌(金尙憲)ㆍ윤지(尹墀)ㆍ박황(朴潢)ㆍ이경석(李景奭)ㆍ김광현(金光炫)ㆍ이행원(李行遠)ㆍ김득성(金得聲)ㆍ김진성(金振聲)ㆍ신서회(申瑞檜)ㆍ이의배(李義培)ㆍ최산휘(崔山輝)ㆍ이두견(李斗堅)이었다.
우찬성 이귀의 차자는 대개, ‘고변한 등급으로 말하면 역적 괴수를 고발한 자가 수공(首功)이 되어야 마땅하니, 최산휘(崔山輝)는 역적 괴수 유효립(柳孝立)의 3부자 및 정심(鄭沁)ㆍ윤계륜(尹繼倫)ㆍ이계선(李繼先) 등을 고발하여 모두 승복하였고, 허적은 허유(許逌) 등의 흉모를 고발하였으므로 산휘의 공이 허적보다 못지 않은데, 허적은 원훈이 되었고 산휘는 3등 말단에 겨우 끼었으며, 홍서봉이 도리어 제2의 원공(元功)이 되고 심명세(沈命世)는 산휘로 하여금 고변하게 하였는데도 참여되지 못하였으니, 과연 상(賞)이 그 실정에 맞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역적을 다스린 자가 녹훈되므로 지식층은 한심스럽게 여기는데, 이제 녹공한 것을 살펴보면 고변한 자는 공이 있는데도 도리어 3등에 들어 있고, 벼슬과 직급이 높은 자들이 도리어 그 위에 있으니, 뒷날 고발하는 자가 전혀 없어질 것이므로 빨리 참록된 자를 혁파하여 그들에게 준 노비와 전답을 고발한 자에게 넉넉히 주어 국맥(國脈)을 영원히 가게 하라.’는 것이었다. 죄인 양응남(梁應男)ㆍ구철(具喆)ㆍ구각(具珏)을 잡아 가두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원훈(元勳)이 삼공의 이름을 등급 안에 썼기 때문에 삼공이 혐의쩍고 미안하여 피해 나가서 단자를 바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삼공의 차자는 대개,
“공훈 감정에는 고변할 때의 힘들인 사람들만 책록(冊錄)하는 것이니, 추관도 아울러 책록하라는 명을 급히 정지하소서.”
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경등의 공은 기축옥사(己丑獄事) 때의 추관보다 더 지나니, 오늘 참훈(參勳)된 것은 조금도 불가함이 없소.”
하였다.
30일 죄인 구정혁이 죽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감훈단자(勘勳單子)가 어제 계하되었으나, 아직도 승전을 받들지 못하였는데, 이제 문사낭청(問事郎廳)을 아울러 기록하였기 때문에 함부로 무릅쓴다는 분부가 계셨으니, 승전을 받드는 일을 어떻게 하오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승전을 받드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가도사 김준원(金俊元)이 연좌된 유희량(柳希亮)을 교형(絞刑)에 처하고서 들어왔다.


2월

2일 정원이 아뢰기를,
“추관이 와서 모였으나 형추할 죄인은 없고, 다만 감옥에 갇힌 죄인 23명이 있으니, 추국을 어떻게 하오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정국하였는데, 죄인 김유선(金裕善)ㆍ천립(天立)ㆍ권취성(權就成)ㆍ조해연(趙海淵)ㆍ김해(金諧)ㆍ김확(金鑊)ㆍ이천성(李天成)ㆍ이석과(李碩果) 등은 석방하고, 남응민(南應敏)ㆍ장세철(張世哲)ㆍ정이(鄭洱)ㆍ정계(鄭洎)ㆍ정오(鄭悟)ㆍ구철ㆍ구각ㆍ민성복(閔聖復)ㆍ조유도(趙有道)ㆍ조유항(趙有恒)ㆍ유성선(柳性善)ㆍ이대명(李大鳴)ㆍ유백수(柳柏壽) 등은 정배하고, 윤금(允金)ㆍ천억(千億)은 종을 삼아 정속(定屬)하였다. 금부가 제천군수(堤川郡守) 한필후(韓必厚)를 잡아 왔는데, 그가 유효립(柳孝立)의 아들을 즉시 잡아 가두지 않았으므로 국청에서 추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위에서 잡아다 추고하라고 명하였기 때문이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이번 이 흉참한 역적의 모의는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게 되었는데, 다행히 상변이 먼저 들어와서 나라가 망하지 않게 되었으니, 고발한 자의 공은 땅을 갈라 봉해 줄지라도 아까울 것이 없거니와, 서울과 지방을 통틀어도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나게 알려진 자는 7~8인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데 녹훈된 수효는 32명이나 되니, 그 공도 없이 외람되게 책록된 자가 4분의 3인 것입니다. 추관이 아울러 책록된 데에 이르러서는 을사권간(乙巳權奸)에게서 시작되었고, 기축년의 일도 비록 선왕의 특명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일시의 공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극력 논쟁하여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중외에서 맨 먼저 고발한 몇 사람 이외에 그 나머지 외람되게 책록된 자는 다 지워버려 요행을 바라는 문호를 막으소서. 흉도가 대궐을 침범할 시기가 하룻밤 사이에 닥쳤으니,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은 매우 긴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홍서봉(洪瑞鳳)은 이미 아침 일찍 허적(許)의 편지를 받았고, 심명세(沈命世) 또한 대궐 안에서 최산휘의 보고를 보고서도 저녁에 와서야 고변자로 하여금 스스로 상변하게 하여, 분부가 너무 늦어져서 큰일을 그르칠 뻔하였으므로 그들은 죄를 면하기 어려운데, 무슨 상줄 만한 공이 있겠습니까? 홍서봉ㆍ심명세는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고, 서봉은 훈적(勳籍)에서 지워버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 이 녹훈은 실로 선조(先朝)의 전례에 의해 한 것이므로 조금도 불가함이 없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또 홍서봉 등이 즉시 들어와 고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의 말을 꺼린 데에서 나온 듯하나 잘못한 바가 없지 않으니, 추고하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이번 이 역당을 잡아 죽인 일은 공이 종묘사직에 있는 것이니, 맨 먼저 고발하거나 발각한 자 및 분주히 힘들인 드러나는 사람은 녹훈하지 않을 수 없지만, 혹 잠시 편지를 전하였거나 변고를 들은 뒤에 대단하게 사로잡은 일이 없는 자를 일체 참록(參錄)하는 것은 부당할 듯하오며, 국청의 추관에 이르러서는 기록할 만한 공이 없는데 하물며 역적 괴수의 처형이 늦추어져 하늘의 토죄가 끝나지 않았으니 더 말해 뭐하겠습니까. 청컨대, 역적 괴수가 처형된 뒤에 대신과 원훈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여 감정하게 하되, 그 참록되지 못할 자는 하나하나 자세히 핵실하여 아울러 훈적에서 지워버리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공훈을 책록할 때에 대신과 원훈이 함께 감정하였으므로 함부로 무릅쓴 일이 없었던 듯하다. 그리고 추관이 녹훈에 참여된 것은 전례가 있으니, 또한 불가할 것이 없다.”
하였다.
3일 훈호(勳號)가 낙점(落點)되었는데, ‘갈충효성 병기익명 영사(竭忠效誠炳幾翊命寧社)’라고 한다. 죄인 선금(善金)ㆍ김유(金裕)를 잡아 가두었다.
4일 간밤에 죄인 한인발(韓仁發)ㆍ김유(金裕)ㆍ선금을 세 차례 형문한 뒤에 압사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금부가, 죄인 김경선(金慶先)ㆍ장세철은 길주로, 정계(鄭洎)ㆍ정어(鄭語)는 경흥(慶興)으로, 정오는 남해로, 구철은 거제로, 조유황은 청하(淸河)로, 유백수는 장기(長鬐)로, 이대명은 갑산으로, 윤금은 기장(機張)으로, 남응민(南應敏)은 연일(延日)로, 정이는 김해로, 구각은 웅천으로, 조유도는 경성(鏡城)으로, 민성복(閔聖復)은 옥구(沃溝)로, 유성선은 대정(大靜)으로, 박천억(朴千億)은 언양으로 정배하였다.
5일 충청 감사의 서목에,
“충주목에서 역적 안집중(安執中)의 아비 영세(永世)와 정린(鄭遴)의 아들 세귀(世龜) 등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하였다.
7일강원 감사의 서목에,
“역적 정심(鄭沁)의 아들 진□(振□)ㆍ삼달(三達)ㆍ삼기(三奇) 등을 원주목(原州牧)에 가두었습니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이번 이 역변은 실로 천고에 없던 참혹한 일이었는데, 만약 기미를 알아 상변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종묘사직이 위태로울 뻔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애당초 맨 먼저 고발한 공은 책훈(策勳)의 은전이 없을 수 없지만, 만약 상변, 상서(上書), 또는 고변한 사람이 이미 발한 뒤라면 그 사이에서 비록 주선하여 분주히 힘들인 사람이 있을지라도 모두 신하의 직분으로 마땅히 해야 할 것이므로 다른 상을 베푼다면 가하거니와, 정훈(正勳)에 아울러 기록한 것에 이르러서는 경중이 적당함을 잃어 혼잡함이 막심하다면 여론이 떠들썩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물며 명을 받아 옥사를 다스렸던 신하가 무슨 기록할 만한 공적이 있겠습니까. 비록 선조의 전례가 있다 하더라도 그때도 불가하다는 의논이 있었으니, 오늘날의 일은 반드시 잘못된 규례를 준수할 것은 없습니다. 대신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8일 가도사가 원주의 정심의 아들을 교형에 처할 일로 나갔다. 전교하기를,
“세자빈이 앓고 있는 모든 증세가 나아가고 있다 하니, 의약청(醫藥廳)을 파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었는데 대개,
“도독아문에서 이미 숭정(崇禎)이란 연호를 쓰고 있으니, 우리 나라도 또한 새로운 연호를 행해야 합니다. 서울은 초9일부터, 외방은 문서가 도착되는 날부터 행하도록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윤허하였다.
10일 죄인 김유ㆍ한인발이 죽었다.
11일 강화 별장의 서목에,
“광해가 물에 만 밥을 한두 숟갈 들다가 요즘은 기력이 차츰 다하여 슬피 울고 있습니다.”
하였다.
주문사(奏聞使) 권첩(權怗)의 서목에,
“새 황제가 즉위하여 숭정(崇禎)으로 개원하였는데, 등극조칙(登極詔勅)을 받들고 이달 초여드렛날 증산(甑山) 땅에 당도하였습니다.”
하였다. 천계황제(天啓皇帝)가 지난 해 8월 22일에 붕서하고, 새 황제는 천계(天啓)의 다섯째 아우로서 신왕(信王)에 봉했었고, 나이는 경술생(庚戌生)인데, 8월 24일에 즉위하였다 한다.
12일 합사의 계는 대개, ‘혼조(昏朝)의 모든 간신의 남은 무리들이 실로 번성하고 많은데 나쁜 말을 지어내어 민심을 동요시키고, 혹 뜻을 잃은 자들과 공모하여 난역을 마구 일으키고 있으므로, 만약 지금 처치하지 않으면 국가의 화란이 그칠 때가 없을까 염려되니, 역적 이이첨ㆍ정조ㆍ윤인ㆍ이위경 등의 형제와 자손, 그리고 죄인 박승종ㆍ유희분ㆍ유희발ㆍ정길(鼎吉) 및 전후로 역옥에 관련되어 처형된 자의 자손으로서 비록 나이가 차지 않은 자일지라도 모두 절도에 위리안치하고, 이미 먼 변방에 정배된 자는 그 배소에서 또한 위리시키며, 또 역당 가운데 더욱 친절한 자로 일찍이 정배되었다가 용서를 받아 가까운 곳으로 옮겨졌거나 풀려나 돌아간 자는 다시 원지에 찬출하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3일 금부가 죄인을 추국하였는데, 막동은 형문하였더니 승복하므로 처형하고, 양애선(梁愛善)ㆍ양사립(梁思立)ㆍ윤이현(尹而賢)ㆍ한충남(韓忠男)ㆍ한부립(韓復立)ㆍ한덕남(韓德男)은 석방하였다.
14일 금부가 아뢰기를,
“역적 죄인의 자손 형제를 오부(五部)와 각 관서로 하여금 조사해낸 뒤에 처치하되, 대신ㆍ양사 장관과 의논하여 처리하실 것과 유자신(柳自新)의 사위와 손자도 또한 일체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15일 금부가 아뢰기를,
“역적 죄인의 자손들을 조사해 내기가 쉽지 않으니, 그 가운데 두드러지게 알 수 있는 자만 우선 정배하고, 그 나머지는 드러나는 대로 정배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북도(北道)에도 또한 나누어 정배하고, 자응(自凝)의 아들들도 일체 시행하라.”
하였다. 금부가 또 아뢰기를,
“정배 죄인으로 아직 배소에 있는 자는 모두 관계됨이 중대하므로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사면을 받고 가까운 곳으로 옮겨졌거나 풀려나 돌아간 자는 죄가 위리안치하기 않던 전보다는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나 전례에 먼 변방으로 이배하면 위리안치하였으니, 이번 이 원지에 찬출한 자는 요량하여 정배하고, 그 다음은 원지로 하되 죄에 따라 가하는 것이 마땅할 줄 압니다. 대신의 뜻도 그러하므로 우러러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원지에 찬출된 죄인은 위리안치하고, 가까운 곳에 옮겨진 죄인은 원찬하고, 이미 풀려난 자는 놓아두라.”
하였다.
16일 금부가 아뢰기를,
“유자신의 사위 이덕일(李德一)은 죽은 지 오래되었고, 조국필(趙國弼)은 삼수(三水)로 이배하고, 김시보(金時輔)는 부령(富寧)으로 정배하여 모두 위리하였거니와, 손자는 아마 유자신의 외손인 듯하므로 감히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여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외손들 가운데 나이 장성한 자는 또한 정배하라.”
하였다. 금부가 또 아뢰기를 대개,
“역적 죄인으로 나이가 차지 않은 자 중에는 11~12살 짜리도 있으니, 만약 위리하여 출입을 못하게 금한다면 반드시 말라 죽을 염려가 있을 것이므로 이들은 모두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정배하되, 먼 변방으로 나누어 보내어 한 고을에 2~3인씩 본관의 노비로 정하고 위리안치시키지 않으면, 반드시 모두 온전히 살 수 있어 측은히 여기시는 어진 정사에 큰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계사가 매우 온당하다. 나이가 차지 않은 자는 위리안치하지 말고 그들을 보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위리 죄인을 제주에는 유정립(柳正立)ㆍ박자응(朴自凝)을, 대정(大靜)에는 유시립(柳時立)을, 정의(旌義)에는 유영립(柳英立)을, 거제에는 유명립(柳命立)을, 남해 곡포(曲浦)에는 유후립(柳厚立)을, 평산포(平山浦)에는 유중립(柳中立)을, 거제 지세포(知世浦)에는 유현립(柳顯立)을, 웅천(熊川)에는 박자전(朴自全)을, 남해에는 유정립(柳鼎立)을, 미조항(彌助項)에는 박자천(朴自天)을, 당포(唐浦)에는 박자온(朴自昷)을, 상주포(尙州浦)에는 박동도(朴仝度)를, 가리포(加里浦)에는 이원여(李元輿)를, 흥양(興陽)에는 정석준(鄭碩俊)을, 거제에는 정규(鄭逵)를, 조라포(助羅浦)에는 박영택(朴永澤)을, 서수라(西水羅)에는 민귀달(閔貴達)을, 회령에는 권의(權誼)를, 종성(鍾城)에는 임흥후(任興後)를, 온성(穩城)에는 임취정(任就正)ㆍ최응허(崔應虛)를, 경원(慶源)에는 임기지(任器之)ㆍ이전방(李傳芳)을, 경흥(慶興)에는 유활(柳活)을 정배하였습니다.”
하였다.
명(明) 나라 천자의 교지를 받들었는데, 조선 국왕(朝鮮國王)에게 내린 한 본(本)은 미친 오랑캐의 저돌 등에 관한 것이었고, 또 천자의 교지를 받들었는데 거기에는,
“왕의 주문(奏文)을 보니, 병화(兵禍)를 당한 정황이 짐의 마음을 매우 측은하게 한다. 오랑캐와 통문(通問)하고 왕래하면서 사기(事機)에 맞추어 병화를 늦춘 것은 왕의 본의가 아니다. 군신의 대의에 이르러서는 해와 별처럼 밝았으니, 왕이 충성을 다하고 있음은 짐이 밝게 아는 바이다. 오랑캐의 속셈은 헤아리기 어렵고 오랑캐의 욕심은 만족이 없으니, 왕은 더욱 와신상담하여 방비를 엄히 하라. 짐 또한 모 원수(毛元帥)에게 거듭 당부하여 마음을 다해 적을 견제하여 왕의 보조가 되게 할 것이니, 피차가 협심하여 늦게나마 승리를 거두기 바란다. 중국 조정과 속국이 함께 힘써 도모할지어다. 선황제(先皇帝)께서 이미 승하하셨으므로 짐이 황제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었으니, 명년을 숭정(崇禎) 원년으로 삼고, 조서(詔書)를 만들어 해당 나라에 유시하여 비답보다 먼저 보내어 왕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바이다.”
하였다.
금부가 종을 삼아 멀리 귀양보냈는데, 낙삼(樂三)은 웅천 가덕진(加德鎭)에, 관삼(貫三)은 천성보(天城堡)에, 오삼(五三)은 사량진(蛇梁鎭)에, 이윤경(李允卿)은 남해 평산포(平山浦)에 정배하였는데, 낙삼 등은 이위경(李偉卿)의 아들이다.
17일 금부가, 위리 죄인 조유선(趙裕善)은 미조항(彌助項)으로, 이후재(李厚載)는 가리포(加里浦)로, 이상재(李尙載)는 천성보(天城堡)로 정배하였다. 유자신의 외손들의 정배단자를 올리니, 전교하기를,
“위리안치하지 말라.”
하였다. 강화의 죄인 유식(兪湜) 등을 잡아왔다.
18일 헌부의 계는, ‘시관(試官)에게 접대하는 관공(官供)이 병란으로 인하여 혁파되었다. 그리하여 시관 각자가 밥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과장이 엄숙하지 못하니, 지금부터 별시(別試)에는 해사로 하여금 식사 도구를 간략히 설비하게 하되 풍성하게는 하지 말도록 하고, 또 시관이 거느리는 하인도 1명을 넘지 못하게 하도록 승전을 받들게 하라.’는 것이었다.
19일 금부가 하영남(河永男)을 15번 형문했더니 승복하였으므로 당일로 처형하고, 죄인 이효일(李孝一)은 잡아 가두었다.
20일 금부가 아뢰었는데, 대개,
“대신과 양사 장관에게 의논하였더니, ‘윤이진(尹以震)은 역적 윤인발(尹仁發)의 조카이고, 권여경(權汝慶)은 혼조(昏朝)의 숙의(淑儀)의 아비인데, 모두 이첨과 친절하지 않으므로 이미 석방하였으니, 성상의 전교대로 버려두는 것이 마땅하겠고, 그 나머지 정담(鄭湛) 등 15인은 적당(賊黨)이 권세를 잡았을 때에 모두 대관과 시종신으로 출입하던 무리이므로 경중을 가리기 어렵고, 최흥선(崔興善)은 혼조 때에 남을 종용하여 폐단을 일으켰으므로 원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전대로 정배함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금부가, 추국 죄인 이효일(李孝一)을 형문하였더니 승복하였다.
이정귀(李廷龜)의 상소는, ‘듣건대, 역적의 공초에 언서(諺書)로 전해 보이려 하였다는 말이 있었는데, 신의 이름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고 하니, 법관에 내려 시비를 가려 밝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경전(李慶全)의 상소는,
“요즘 전해 듣건대, 역적 이효일의 공초에, ‘광해의 편지를 신에게 전하려 하였으나 신의 위인이 가벼운 듯하여 전해 보이지 않았다.’ 하는데, 이미 전해 보이지 않았으면 신이 변론할 필요는 없지만, 이름이 흉적의 입에서 나왔으니, 신이 어찌 감히 일각인들 살 수 있겠습니까. 법관에 내려 신의 죄를 바로잡으소서.”
라는 것이었다. 금부가, 죄인 김설(金渫)이 승복했으므로 처형하였음을 아뢰었다.
21일 이정귀의 소에 비답하기를,
“가탁하여 남을 꾀는 흉도의 말은 변명할 것이 없으니, 안심하고 공무를 보오.”
하였다. 이경전의 상소에 비답하기를,
“적의 공초에 경의 이름이 들기는 하였으나 경은 조금도 간섭된 일이 없으니, 안심하고 공무를 보오.”
하였다. 강화 별장 권득수(權得守)를 잡아 가두었다. 전 별제(別提) 조희맹(趙希孟)의 상소는 비밀이었고, 내용은 역적을 토죄하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더니 국청에 봉하하였다. 금부가 김흥조(金興祖)를 잡아 가두었다.
22일 금부가 대신의 뜻으로 아뢰었는데 대개,
“외손도 아울러 연좌시키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지 않고, 광해 때에 최기(崔沂)의 외손을 귀양보내기까지 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것을 그르게 여깁니다. 외손을 연좌시키는 것은 백성들이 듣고 의혹할 뿐 아니라 법전에 관계되므로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최기의 옥사는 오늘날의 일과는 같지 않으니, 최기에게 비교하는 것은 불가할 듯하다. 그러나 대신의 뜻이 이러하니, 굳이 정배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23일 이조가 아뢰기를,
“고변한 사람에게 속히 직을 제수하도록 전교하셨습니다. 그런데 고변인 7명 중에 황진(黃縉)에게는 이미 직을 제수하였으나, 허선(許選)ㆍ최산휘(崔山輝)ㆍ김진성(金振聲), 학생 신서회(申瑞檜)와 김득성(金得聲), 서자 이두견(李斗堅), 사천(私賤) 신양운(新良云)에게는 무슨 직을 제수해야 하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모두 6품의 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백관과 합사가 처음 아뢰니, 비답하기를,
“방간(芳幹)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하자, 태종(太宗)께서 그 당은 죽이고 그는 용서해 주었으며, 태종만 그를 용서해 주셨을 뿐 아니라 세종(世宗)께서도 용서해 주시어 그의 수명대로 마치게 하였으니, 이 어찌 조종조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며, 이 어찌 오늘날 본받을 일이 아니었겠소? 내가 비록 변변치는 못하나 조종을 본받으려 하는데, 경등이 우리 조종조의 옛 규례는 생각하지 않고 멀리 삼대(三代)의 일을 인용하여 날마다 번거롭게 말하니, 만약 경등의 말과 같다면 조종은 본받을 것이 없다는 것이오? 경등은 우리 조종의 일이 주공(周公)보다 더 어짊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이처럼 고집하여 마지않으니, 생각건대 분명 내가 덕이 없어서 진압하여 복종시키지 못한 때문일 것이오. 조용히 생각하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소? 경등은 모름지기 나의 답답하고 절박한 심정을 알아주고, 또 조종조의 변에 처한 도리를 생각하여 속히 정지하오.”
하였다. 삼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옥당과 종실이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의 계는, ‘종묘령(宗廟令) 채형증(蔡衡曾)은 은(銀)을 받아먹은 대간이라 하여 세상의 버림을 받고 있으니, 파직하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채형증에게 비록 운운하는 말이 있기는 하나 그 때 이미 씻어졌고, 종묘령은 또한 청요한 관직은 못 되니, 너무 심한 논의는 하지 말라.”
하였다.
24일 간밤에 추국하였는데, 죄인 안우선(安友善)ㆍ안찬(安璨)ㆍ안관(安瓘)은 형문한 뒤에 압사하였더니 승복하여 처형하였고, 조희일(趙希逸)은 석방하였고, 유식(兪湜)ㆍ끝례(唜禮)는 바른 대로 공초하므로 석방하였고, 돌쇠ㆍ독읍손(禿邑孫)은 형문하였더니 바른 대로 공초하였고, 자금(自今)은 두 차례 형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고, 금개(今介)는 두 차례 형문하였더니 바른 대로 공초하였으며, 김적(金頔)ㆍ김명수(金命壽)는 잡아 가두었다. 금부가 죄인을 도로 원지에 찬출하였는데, 정담(鄭湛)은 유원진(柔遠鎭)으로, 박광선(朴光先)은 명천(明川)으로, 양욱(梁澳)은 가리포(加里浦)로, 박이장(朴以章)은 기장(機張)으로, 임휘지(任徽之)는 순천(順天)으로, 이담명(李澹明)은 명천(明川)으로, 한유상(韓惟翔)은 단천(端川)으로, 임길후(任吉後)는 볼하(乶下)로, 신의립(辛義立)은 이성(利城)으로, 이감여(李堪輿)는 홍원(洪原)으로, 이정(李涏)은 나난(羅暖)으로, 박익장(朴益章)은 정평(定平)으로, 유진정(柳震楨)은 이성(利城)으로, 조존도(趙存道)는 운총(雲寵)으로, 이담(李澹)은 장흥(長興)으로, 곽천호(郭天豪)는 순천(順天)으로, 채승선(蔡承先)은 고원(高原)으로, 이청(李淸)은 갈파지(乫波知)로, 최흥선(崔興善)은 남해로 정배하였다.
25일 금부가, 고개야지(高介也知)ㆍ이봉춘(李逢春)ㆍ노원립(盧元立)ㆍ최여헌(崔汝獻) 등은 잡아 가두고, 이봉춘은 형문하였다.
26일 초토신(草土臣) 김신국(金藎國)의 상소는 대개, ‘진정(陳情)하고 대죄한다.’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경의 정성을 잘 알았소. 경의 이름이 역적의 입에 나오기는 하였으나 경에게는 조금도 관계되는 말이 없으니, 안심하오.”
하였다.
27일 성절 겸동지사(聖節兼冬至使) 변응벽(邊應璧)의 장계에,
“일행이 11월 5일에 북경에 도착하여, 6일과 7일에는 모두 습의(習儀)에 참석하고, 10일에 두 방물(方物)을 조사해 바쳤는데, 모자라는 수가 없어 그대로 바쳤고, 사은 방물(謝恩方物)은 몇 가지 물건이 모자라서 사유를 갖추어 정문(呈文)하여 겨우 완료하게 되었으며, 성절 방물(聖節方物) 가운데 몇 가지 물건을 바칠 일에 대해 예부(禮部)에 물었더니, 예부의 말이 ‘없어지고 남은 것은 바칠 필요가 없다.’ 하고 도로 내어 주었습니다.”
하고,
“전일 표류된 역관(譯官) 정충헌(鄭忠獻)은 구사일생으로 등주에 도착하였으나 서장관이 탄 배는 전혀 소식이 없습니다.”
하고,
“새 황제의 생모를 추숭하여 황태후(皇太后)로 봉하였고, 천자의 생일은 12월 24일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동지사의 장계를 살펴보면, 서장관 윤창립(尹昌立) 등이 탄 배는 부서져 침몰했을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을 듯하니, 아주 참혹하고 측은하다. 전례를 상고하여 휼전(恤典)을 각별히 거행하라.”
하였다. 등극사(登極使)의 장계는 대개,
“서장관 김성발(金聲發)은 중풍(中風)의 증세를 얻어 바다 만 리 길을 결코 건널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속히 처치하게 하옵소서.”
라는 것이었다. 금부가 이호양(李好讓)은 석방하고, 김흥조(金興祖)는 죽었다.
29일 죄인 최습(崔熠)ㆍ최형(崔炯)ㆍ최여헌(崔汝獻)을 형문하였는데 승복하였다.


3월


1일 전교하기를,
“듣건대, 간밤에 대비전(大妃殿) 동북 안팎 담장 사이에 판자를 세우고 나인이 넘어 도망하였다 하는데, 순경위 부장(巡更衛部將)이 와서 말하지 않더냐? 자세히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었는데 대개,
“나인이 도망한 것은 전에 없던 일인데 미처 알아내지 못하였으니, 당해 순라위 부장 및 요령장(搖鈴將)은 추고하고, 수보군사(守堡軍士)는 가두어서 추고하고, 나인은 포도청으로 하여금 잡아오게 하여 끝까지 신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금부가, 위장 황석남(黃錫男), 부장 한찬증(韓纘曾)ㆍ이영제(李英濟)ㆍ강명윤(姜明胤), 봉원(奉瑗)을 잡아 가두었음을 아뢰었다.
2일 평안 감사의 서목에,
“용골대(龍骨大)가 진강(鎭江)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는데 백 가지로 공갈하고 개시(開市)에 관한 일은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으며, 장사하는 오랑캐의 양식도 결코 제급(題給)하기 어렵고, 농우(農牛)를 달라는 요청에 이르러서는 끝내 들어주지 않으니, 어떻게 하오리까? 묘당에서 지휘하기 바랍니다. 도독의 표하 천총(標下千摠) 유유덕(劉惟德)ㆍ김승충(金承忠)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철회하는 것에 대한 자문(咨文)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도독이 요구하는 배는 본도의 영선(營船)을 정제하여 두었는데, 김승충이 병정 3백여 명을 수습하여 평양에 먼저 당도하였으므로 10일 간의 군량 43석을 아울러 실어서 노강(老江)으로 들여보냈습니다.”
하였다.
3일 황해 감사의 서목에,
“천총 유유덕(劉惟德)이 패문(牌文)도 없이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하였다.
4일 유학 임지후(任之後)가 비밀히 상소하였는데 입계하였더니, 전교하기를,
“대신ㆍ금부당상ㆍ양사장관ㆍ포도대장을 모두 명초하라.”
하였다. 금부가, 임지후ㆍ최관ㆍ최시량(崔始量)ㆍ김석부(金碩富)ㆍ이사규(李士珪)ㆍ조정(趙挺)을 잡아 가두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예제(禮制)를 힘써 좇으시어 기년(期年)이 지난 뒤에 담제(禫祭)를 행하셨으니, 이 제사는 주인이 행하는 것이 실로 예절에 마땅합니다. 친제한다는 명을 그만두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힘써 좇겠다.”
하였다.
5일 금부가 민선철(閔宣哲)ㆍ박동기(朴東起)ㆍ이종충(李宗忠)ㆍ윤흠(尹欽)ㆍ목기선(睦嗜善)을 잡아 가두었다. 정국하였는데, 조훈(趙壎)ㆍ조기(趙圻)ㆍ조덕용(趙德容)ㆍ정광택(鄭光澤)은 석방하고, 최관은 다시 추고하고, 최시량ㆍ김석부ㆍ이사규는 임지후와 대질하였다.
6일 금부가, 윤영길(尹永吉)ㆍ장기복(張己卜)은 잡아 가두고, 최여헌ㆍ최형ㆍ최습은 군기시 앞에서 처형하였음을 아뢰었다. 정국하였는데, 죄인 윤흠ㆍ윤영길은 원정한 뒤에 석방하고, 이장형(李長亨)은 석방하고, 이종충ㆍ박동기ㆍ민선철은 두 차례 형문하고 압사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7일 이귀의 차자는 대개, ‘존숭(尊崇)하여 사당에 들여 모시는 것은 임금을 마땅히 삼대(三代) 이상의 임금으로 인도하여야 하니, 이 일은 가벼이 의논할 수 없으나, 예묘(禰廟)를 따로 세우는 일에 이르러는 신명(神明)에 물어보아도 의심할 것이 없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속히 정탈하게 하여 막중한 사전(祀典)이 실례한 중에 더 실례함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의 차자는 ‘청컨대 예관으로 하여금 별묘(別廟)를 세우는 일을 의논하게 하여 성조(聖朝)의 사전을 바르게 하라.’는 것이었다.
8일 간밤에 죄인 박동기(朴東起)ㆍ이종충(李宗忠)은 가형하였더니, 승복하매 처형하였고, 민선철(閔宣哲)은 가형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금부가, 임유후(任有後)ㆍ박문엽(朴文燁)ㆍ박성남(朴性男)ㆍ이시민(李時敏)ㆍ이시항(李時恒)을 잡아 가두었다. 민선철은 가형한 뒤에 압사하고, 박문엽ㆍ박성남은 원정한 뒤에 석방하였다.
9일 간밤에 죄인 최관(崔瓘)ㆍ목서흠(睦敘欽)ㆍ목기선ㆍ노인상(盧仁祥)ㆍ노원립(盧元立)ㆍ정흥길(丁興吉)ㆍ득수(得水)ㆍ김향수(金香守)는 석방하고, 목장흠(睦長欽)은 원정한 뒤에 석방하였다. 금부가, 이승종(李承宗)ㆍ심길원(沈吉元)ㆍ이담(李憺)을 잡아 가두었다. 이귀와 최명길의 차자에 계(啓) 자를 찍어 내렸다.
10일 죄인 민선철(閔宣哲)이 죽었다. 전라도 생원 김동달(金東達)의 상소는 대개, ‘역적 공(珙)은 모후(母后)를 폐한 역적으로 반역의 괴수가 되었으니, 실로 온 천하가 미워하는 극악한 사람이므로 신민으로서는 하루도 한 하늘 밑에서 같이 살 수 없다. 그런데 이제 호남에다 안치시켰으니, 본도의 사람은 의리상 이 역적과 함께 살 수 없다. 급히 국법을 바로잡아 귀신과 사람의 분을 시원하게 하라.’는 것이었는데, 정원에 올렸다.
11일 예조가 아뢰기를,
“이귀ㆍ최명길의 차자에서 말한 별묘(別廟)를 세우는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헌부와 간원의 계는 대개, ‘지금 부묘(祔廟)할 적에 친제하는 것은 우제(虞祭)ㆍ상제(祥祭)ㆍ담제(禫祭)의 예에 의하여 능원군(綾原君)으로 하여금 주제(主祭)하게 하라.’는 것과, ‘해조의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라.’는 것이었는데,
“윤허하지 않는다.”
비답 하였다. 옥당의 차자는, ‘부묘할 적에 주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양사의 논의를 따르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해조가 마련한 것이 실로 정과 예에 합당하니, 결코 고칠 수 없다.”
하였다.
12일 합사가 아뢰기를,
“우(虞)ㆍ상(祥)ㆍ담(禫)ㆍ부(祔)는 삼년상의 시종의 대절(大節)입니다. 능원군이 이미 주제하였는데, 부제(祔祭)에만 위에서 주제하시는 것은 예경(禮經)에 찾아보아도 근거할 만한 것이 전혀 없거니와, 여느 사대부 집에서도 이런 실례(失禮)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임금은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어 백대에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인데, 정을 따라 예를 어기면서 3년 동안 이미 행하던 규례를 가벼이 변경하려 하십니까? 이는 결코 신 등이 합사로 극력 논쟁하되 청한 바를 허락받지 못하면 물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빨리 능원군으로 하여금 주제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예관이 이미 강론하여 결정한 일을 이처럼 번거롭게 말하니 극히 불가하다. 이미 결정한 예절은 결코 고칠 수 없으니, 모름지기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자, 재차 아뢰니, 비답하기를,
“이미 일렀노라.”
하였고, 3차, 4차, 5차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정원의 계는, ‘삼사의 공의를 쾌히 좇아 사전(祀典)을 바르게 하라.’는 것이었는데, 전교하기를,
“제례를 강론하여 정하던 날에는 삼사가 잠자코 한 마디 말이 없다가 오늘날에 와서 저들의 소견을 고집하여 막중한 부제(祔祭)를 진작 설행하지 못하게 하니, 일이 극히 괴이스러울 뿐만 아니라, 실로 그 뜻을 알 수 없도다. 이미 결정된 예절은 다시 고칠 수 없다.”
하였다.
13일 김동달(金東達) 등의 상소에 비답하기를,
“진달한 일은 이미 참작하여 처치하였으니, 이밖에 법을 쓰는 일은 내가 차마 못하는 바이다. 너희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러가서 학업이나 닦으라.”
하였다. 김동달 등이 재차 소를 올렸는데, 입계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소무공신(昭武功臣)을 다시 감정(勘定)하라는 계사에 대해 전계(前啓)대로 하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윤남(李胤男)은 앞의 전교에 의하여 그대로 두오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14일 전교하기를,
“주문사(奏聞使) 권첩(權怗)은 위난할 때에 명을 받고도 조금도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고, 그가 돌아올 적에는 조서를 받들고 와서 반포하였으므로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해조로 하여금 서장(書狀) 이하에게 각별히 논상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국하였는데, 죄인 심길원은 한 차례 형문하였더니, 승복하였고, 이담(李憺)은 보석하고, 이여익(李汝翼)은 석방하였다.
15일 예조가 아뢰기를,
“별묘를 세우는 일에 대하여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해창군(海昌君)과 삼공은, ‘예란 종통(宗統)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전하는 선조대왕의 종통을 바로 이어 종묘의 주사(主祀)가 되었는데, 또 대원군의 제사를 주제한다면 대종가의 종통에 있어서 혐의쩍은 것이 없겠는가? 이제 별묘를 세운다면 전하의 대에는 예묘(禰廟)가 되고, 전하의 후대에는 조묘(祖廟)가 되며, 그 다음 대에는 증조묘(曾祖廟)가 되는 것이다. 조묘ㆍ증조묘가 된다면, 나라 안에 이미 종묘가 있고, 또 조묘가 있는 것이니, 이는 종묘가 둘이 되는 것이다. 일을 할 적에는 반드시 그 마지막을 염려해야 한다. 신 등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대원군의 사우(祠宇)는 높이고 확장하되 별묘의 제도와 같게 하고, 제물은 관공(官供)으로 하고 제사는 능원군이 주장하게 하고, 전하께서는 때로 친제를 행하여 효성을 편다면 종통은 존엄해지고 대원군 또한 백세불천(百世不遷)의 종주가 될 것이다. 신 등은 본디 예학(禮學)에 어두워서 역설을 헌의하니 상재를 바란다.’ 하였고, 판중추부사 정창연(鄭昌衍)은, ‘대죄하고 있기 때문에 헌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지금 이 헌의는 정례에 맞지 않으니, 실로 근거없는 억설인 것이다.”
하였다. 영사공신(寧社功臣)을 다시 감정하였는데, 공훈 1등에는 허적이, 2등에는 홍서봉ㆍ황성원ㆍ허계ㆍ황진ㆍ허선이, 3등에는 김득성ㆍ김진성ㆍ신서희ㆍ최산휘ㆍ이두견이었다.
16일 죄인 고경성(高景星)ㆍ오현(吳鉉)을 잡아 가두고서 안대홍(安大弘)과 함께 각 두 차례씩 형문하고 압사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이조의 계는 대개, ‘권첩 등의 논상에 대하여는 성상의 재가를 바란다.’는 것이었는데, 전교하기를,
“모두 가자하고, 역관 이하는 적어서 아뢰라.”
하였다.
17일 헌부가 아뢰기를,
“영사공신 황성원ㆍ허계의 이름은 고변서(告變書) 안에 들어 있지 않고 또 두드러진 공로도 없는데, 정훈(正勳)의 서열에 추록(追錄)되었으므로, 보고 듣는 이들이 해괴하게 여깁니다. 청하옵건대 지워버리도록 분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과 원훈이 재삼 감정하여 조금도 지나친 일이 없는데, 너희들이 원훈의 말을 믿지 않고 이같이 다시 논하니, 아주 지나치다.”
하였다. 관학유생 신상(申恦) 등의 상소는, ‘원흉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국법이 행해지지 못한다. 공론을 쾌히 좇아 여망에 답하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진달한 일은 정과 법을 참작하여 처치한 것이니, 이밖에 더 법을 가하는 것은 내가 차마 못하는 바이다. 너희들은 번거롭게 여러 말을 하지 말고 물러가 학업이나 닦으라.”
하였다. 옥당의 차자는, ‘예경(禮經)의 본의를 깊이 살피고 이론을 치우쳐 듣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18일 정국하였는데, 죄인 오현(吳鉉)ㆍ안대홍(安大弘)은 두 차례 가형하고, 고경성(高景星)은 죽었다.
19일 죄인 조유도(趙有道)를 원정한 뒤에 석방하였다가 도로 배소로 보냈다.
20일 전일 옥당의 차자에 비답하기를,
“이 일은 대신이 헌의한 뒤로는 별로 다시 의논하라는 적이 없었는데 경등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아 이처럼 번거롭게 하니, 이 또한 경솔하다고 하겠소.”
하였다.
21일 사학의 유생 이시필(李時苾) 등의 상소는 대개, ‘역적 공(珙)을 빨리 명하여 처형하게 하고, 백관이 아직도 복합(伏閤)하지 않으니,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었다. 죄인 임경후(任慶後)를 잡아 가두었다.
22일 의주부윤의 서목에,
“인산(麟山)의 보고에, ‘왕 참장(王參將)이 빼앗아 갔던 배를 도로 보내었다.’ 하고, ‘2경쯤 포 소리가 바다 어귀에서 크게 울렸다.’ 합니다.”
하였다. 사학 유생의 상소에 비답하기를,
“아뢴 일에 대하여는 이미 정을 누르고 법을 썼으니, 이밖에 더 죄를 가하는 것은 내가 실로 차마 못한다. 너희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러가 학업이나 닦으라.”
하였다.
24일 의주부윤의 서목에,
“모 장군(毛將軍)이 써서 준 쪽지를 달자(㺚子)에게 전유하였는데, 받아 온 것은 강화하자는 사연이었습니다.”
하였다.
25일 인견할 때에 상이 이르기를,
“임경업(林慶業)을 발론(發論)한 대간은 대신을 침해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사정을 끼고 가벼이 논하여 관계되지 않는 일을 가지고 대신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 편히 있지 못하게 하였으니, 한갓 일이 놀라울 뿐만 아니라 그 조짐을 키울 수 없다. 발론한 대간을 적발하여 삭출하라.”
하매, 정원이 아뢰었는데 대개,
“위엄을 조금 푸시어 발론한 대간을 삭출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시어 포용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같이 아름답지 못한 버릇은 징치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경등은 구호하지 않는 것이 옳소.”
하였다.
26일 정원이 아뢰기를,
“임경업을 발론한 대간을 본 간원에 물었더니, 대사간 이민구(李敏求)ㆍ헌납 심지원(沈之源)ㆍ정언 오달승(吳達升)과 김종일(金宗一)이 모두 자진하여 고하였으니, 어떻게 하오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이름을 들지 말고 다만 승전을 받드는 것이 옳다.”
하였다. 헌부의 계는, ‘발론한 대간을 삭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간원의 탄핵은 공정한 마음이 아닌 듯하니, 이제 이 벌을 시행하는 것은 옳지 못함이 없다.”
하였다.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의 상소는 대개 ‘신이 우연히 낙안 군수(樂安郡守) 임경업(林慶業)의 세찬 물목(歲饌物目)을 보았더니, 많은 것은 20종이나 되고 적은 것도 5~6 종이나 되었는데, 완평부원군과 해창부원군은 원임인 까닭으로 참여치 않았다. 보덕(輔德) 권도(權濤)가 마침 신의 집에 들렀기에 우연히 언급했던 것인데, 신의 말 때문에 그가 중죄에 빠졌으니, 권도의 죄를 신에게 옮겨 내리라.’는 것이었다. 정원의 계는 대개,
“대간이 유고하여 오랫동안 추국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간원의 허다한 관원들이 바야흐로 대죄하는 중에 있어서 감히 나오지 못하고, 그에 대한 처치의 예도 다르므로 또한 다시 명초하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하오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간원의 관원들이 대죄를 칭탁하고 부르는 명이 문에 임하였는데도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일이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27일 옥당의 차자는, ‘발론한 대간을 삭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는 것이었다. 전교하기를,
“권도(權濤)의 사건은 무심코 저지른 잘못이 아닌 듯한데, 경등이 이같이 구제하려 하니 그 뜻을 알지 못하겠소.”
하였다. 죄인 임경후(任慶後)는 가형한 뒤에 압사하고, 윤흥원(尹興元)은 형문한 뒤에 가형하였는데 승복하였고, 이현(李晛)ㆍ임덕후(任德後)는 잡아 가두었다.
28일 간밤에 죄인 임덕후는 원정한 뒤에 석방하고, 이현은 갑산으로 정배하고, 죄인 임경후는 가형한 뒤에 화형을 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29일 죄인 임경후가 죽었다.


 

[주D-001]을사권간(乙巳權奸) : 명종(明宗) 때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 윤원형(尹元衡) · 이기(李芑) · 정순붕(鄭順朋) 등을 말함.

 

일사기문(逸史記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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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기문(逸史記聞)



찬자 미상

○ 일본의 괴수 평수길(平秀吉 풍신수길(豐臣秀吉))은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찬탈했다. 드디어는 명나라를 침범할 계략으로 현소(玄蘇) 등을 보내서 우리나라에 글을 전하기를 ‘길을 빌리자[假道]’고 말하였다. 그 말씨가 너무도 오만하므로 우리나라는 대의를 들어 그 사신을 물리쳐 끊었다.
○ 임진년(1592, 선조 25) 4월. 수길은 막장 평수가(平秀家) 등을 보내서 정병 20만을 뽑고 평행장(소서행장(小西行長))ㆍ평의지(平義智)ㆍ평조신(平調信 종조신 (宗調信)) 등을 선봉으로 삼아 우리의 8도를 짓밟고 우리의 5묘(廟)를 헐고 우리의 삼경(三京)한성ㆍ개성ㆍ평양을 함락하고 우리의 두 능(陵)선릉(宣陵:성종)과 정릉(靖陵:중종)임을 불태웠다.
다행히도 명나라 천자가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도독 이여송(李如松)으로 남북 관병(南北官兵) 4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나라를 구원하게 하므로 드디어 평양 대첩을 이룩했다. 그리고 정유년(1597, 선조 30) 난리엔 양 경리(楊經理)와 마 도독(麻都督)을 보내어 직산(稷山) 대첩을 이룩했으며, 무술년(1598)엔 군문(軍門 명 나라 관직명) 형개(邢玠)와 경리(經理) 만세덕(萬世德)이 서로(西路)의 제장들을 각각 파견하여, 도독 마귀(麻貴)는 동로(東路)로 들어와 울산에 주둔했고, 도독 동일원(董一元)은 중로(中路)로 들어와 사천(泗川)에 주둔했으며, 도독 유정(劉綎)은 서로 들어와 순천(順川)에 주둔했고, 도독 진인(陳璘)은 뱃길로 들어와 적을 노량(露梁)에서 맞아 싸워 크게 이겼다. 이때 마침 수길이 일본에서 죽자 적들은 군병을 철수하여 모두 돌아갔다.
○ 이에 앞서 대마도 도민들은 배로 화물을 실어다 우리의 쌀과 포목을 바꾸어 감으로써 그 생활을 유지해 왔는데, 병란을 치른 뒤부터 그들은 굶주리고 헐벗어 생활이 곤란케 되었다. 도주(島主) 평의지(平義智)는 연달아 귤지정(橘智正)을 시켜 포로 되었던 남녀를 보내오며 화친을 요청하고 시장을 개통할 것을 애걸하였다.
○ 한편 원가강(源家康 덕천가강(德川家康))은 관백(關白)이 된 뒤 스스로 변명하기를,
“임진ㆍ정유의 변란 때, 나는 관동(關東)에 있어 일찍이 전쟁에 관여한 일이 없었으니, 조선은 나와 원수 될 것이 없으므로 화친하기를 청한다.”
하므로, 우리나라는 승려 송운(松雲) 유유정(兪惟正)을 일본에 보내어 적정을 정탐하고 포로 된 남녀 1천 3백여 명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이를 요동에 있는 각 아문에 자세히 보고하였다.
○ 병오년(1606, 선조 39) 겨울. 일본 국왕 원가강은 수교문(修交文)을 보내어 우호를 통하는 한편, 병란 때 우리의 두 능을 침범한 범인 두 명을 압송해 왔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나이 20여 세로, 임진년엔 5세도 채 못 되는 나이였다.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은 사복시에 삼성(三省) 을 설치하고 그들을 국문, 처형하고는 국치를 씻었노라고 하였으나, 사람들은 다 그 실없음을 비웃었다.
여우길(呂祐吉)ㆍ경섬(慶暹)ㆍ정호관(丁好寬) 등이 회답사(回答使)가 되어 일본에 가게 되자, 참판 윤안성(尹安性)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회답사라 이름 하여 어디로 간단 말인가 / 使名回答去何之
오늘의 이 화친 의의를 모르겠네 / 此日和親意未知
한강에 머리 돌려 강가를 바라보라 / 試向漢江江上望
두 능의 송백 가지도 안 돋았네 / 二陵松栢不生枝
이 시는 장안에 전송되어 식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 만력 35년(1607, 선조 40)은 곧 선조대왕 즉위 41년인데, 가을부터 겨울까지 여러 달 동안 옥후가 편치 못하여 오랫동안 조회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인목왕후(仁穆王后 선조의 계비 김씨)는 손수 언문교서를 써서 빈청(賓廳)에 내리고 세자에게 전위 문제를 논의하라고 유시하였다. 영의정 유영경은 밀계(密啓)를 올려 이를 막는 한편, 원임대신을 배제하여 참여하여 듣지 못하게 하였다.
영창대군 의(㼁)는 이때 겨우 세 살이었으나, 광해(光海)는 동궁에 있은 지 20여 년인데, 사리에 어둡고 괴팍하여 제 마음대로 하므로, 선조는 그가 장차 막중한 짐을 지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매우 걱정한 나머지 폐립(廢立)할 뜻을 갖고 있었다. 유영경이 선조의 이러한 뜻을 받들기 위하여 전위의 하교를 막은 것이었다.
○ 무신년(1608, 선조 41)정월. 전 참판 정인홍(鄭仁弘)의 소장이 영남에서 올라왔다. 그 소장의 사연은 대개, 사직을 위태롭게 도모한다고 유영경을 몹시 공격하였는데, 심지어는 사미원(史彌遠)이 제왕(濟王) 횡(竑)을 임의로 폐한 고사 를 인용,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삼사(三司)는 계를 올려 정인홍을 변방으로 멀리 정배하는 한편, 이이첨ㆍ이경전(李慶全)ㆍ정조(鄭造) 등이 몰래 인홍을 사주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소를 올렸다 하여, 그들도 모두 양계(兩界)로 귀양 보냈다. 상은 또 승정원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제후의 아들은 천자에게 명을 받은 자여야 비로소 세자라 이르거늘 지금 세자는 천자가 봉하였는가? 나라 사람들이 아는가?”
라고 하여, 조야가 크게 놀랐으며 닥쳐올 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더니, 2월 초하루에 선조가 수라를 들고 그날로 폭사했다. 조야는 모두 독약을 넣었을 것 이라고 의심하였으나,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 줄은 역시 알지 못했다. 선조는 임종시에 일곱 사람의 재신에게 유언하기를,
“불선한 내가 왕위에 오른 후로 신민(臣民)에게 죄지음을 깊은 골짜기에 빠지는 것처럼 여겼는데, 홀연히 중병을 얻었소. 무릇 수명이 길고 짧은 것은 수(數)요, 사람이 죽고 삶은 명(命)이오. 마치 밤과 낮을 어길 수 없듯이 성현도 면하지 못하는 것인데, 대체 무슨 말을 또 하겠는가? 다만 대군이 아직 어려서 그의 장성함을 보지 못하니 그것이 근심일 뿐이오. 내가 죽은 뒤,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니, 만의 하나라도 사설(邪說)이 있거든, 바라건대 제공들은 보살펴 붙들어 주오. 감히 이를 부탁하는 바이오.”
하였다. 이른바 일곱 신하는 유영경(柳永慶)ㆍ한응인(韓應寅)ㆍ신흠(申欽)ㆍ한준겸(韓浚謙)ㆍ서성(徐渻)ㆍ박동량(朴東亮)ㆍ허성(許筬)이었다.
○ 15일. 삼사(三司)의 고변으로, 임해군 진(珒)을 진도에 안치하는데, 미처 귀양 가기 전에 교동(喬桐)에 옮겨 안치하였다. 그리고 무장(武將) 박명현(朴命賢)ㆍ고언백(高彦伯)ㆍ민열도(閔說道)ㆍ양학서(楊學瑞) 등이 임해군과 내통하였다 하여 모두 장살(杖殺)되었고, 종실 서흥군(西興君)ㆍ홍산군(鴻山君)ㆍ수산군(守山君)도 모두 여기에 연루되어 장살되었으며, 이 때문에 죽은 궁중 노비들의 수효도 거의 백 명에 이르렀지만, 그 단서는 잡지 못했다.
○ 금군(禁軍) 김위(金渭)는, 임해군의 궁노(宮奴)가 철퇴와 칼을 싸 가지고 들어가는 상황을 목격하였노라고 소를 올려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켰는데, 그는 그 공으로 송산군(松山君)에 봉해졌다. 이 후로 소를 올려 고변하는 자가 잇따라 생겨났다.
○ 한강(寒岡) 정 선생 구(鄭先生逑)는,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처음으로 전은의 설[全恩之說] 을 주장하였는데 사론(士論)이 장하게 여겼으며,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은 영의정으로서 또한 차자를 올려 구명을 호소했지만 광해군은 이를 좇지 않았다.
○ 7월. 명나라 조정은 도사(都司) 엄일괴(嚴一魁)ㆍ만애민(萬愛民)을 보내와서 임해군의 미친병이 사실인가의 여부를 밝게 조사하였는데, 이때 임해군은 교동에서 배를 타고 서강(西江)으로 오면서 거짓 미친 행동을 하여 그들 차관(差官 명나라 사신)에게 보임으로써 듣는 이들을 슬프게 하였다.
이날 임해군은 즉시 배소로 도로 돌아갔으며, 삼공(三公)은 왕대비의 명으로 백관들을 거느리고 차관에게 글을 올려 임해는 왕통을 이어 받을 수 없다는 사리를 극력 진술하였으며, 성균관 유생 신득연(申得淵) 등과 장안 백성 고덕창(高德昌) 등도 교외(郊外)에서 글을 올렸다. 이는 대개 임해군이 젊을 적부터 소행이 어그러져서 크게 인심을 잃은 탓이었다. 때문에 조야에서는 광해가 왕이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오히려 두려워했었는데, 막상 광해가 즉위하니 포학무도하여 그 근심됨이 임해보다 더 심하였다. 선조가 폐립할 뜻을 두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자식을 알기로는 아버지가 제일이란 교훈이 참으로 격언이다. 임해군은 위리 안치된 지 1년이 채 못 되어 별장 이정표(李廷彪)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 경술년(1610, 광해군 2) 겨울에 보인 별시(別試)에, 박자흥(朴自興)ㆍ조길(曹佶)ㆍ허요(許窑)가 급제하고, 변헌(卞獻) 또한 급제하였는데, 말하기 좋아하는 이는 이르기를,
“문중(門中)ㆍ동내(洞內)ㆍ혼가(婚家)의 경사 자리인데, 산승(山僧)은 또 어찌해서 그 사이에 끼었는고.”
하여, 한때 그 말이 성행되어 잠을 막는 이야기거리로 되었다. 이는 곧 박승종(朴承宗)ㆍ이이첨ㆍ정조(鄭造)ㆍ허균(許筠)ㆍ조탁(曺倬)등이 시관이 되어 급제시킨 것이니, 박자흥(朴自興)은 박승종의 아들, 이이첨의 사위, 정조의 가까운 이웃이었으며, 허요는 허균의 조카요, 조길은 조탁의 아우였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 허균은 사정을 썼다고 승복하여 함열(咸悅 지금의 전북 익산군 함열면)에 유배되고, 허요는 삭과(削科)되었다. 까닭에 권석주(權石洲) 권필(權韠)의 호)는 허균을 전별하는 시에서,
가령 과거에 사정을 썼다 하여도 / 假令科第用私情
아들ㆍ사위ㆍ동생보다 조카가 제일 가벼운데 / 子壻弟中姪最輕
유독 허균만이 그 죄를 받으니 / 獨使許筠當此罪
세간에서 공정한 길이란 과연 행키 어려워라 / 世間公道果難行
하였다. 변헌은 또한 승려로서 환속한 사람인데, 대간에서 아뢰어 삭과하였으니, 매우 우습다.
○ 신해년(1611, 광해군 3) 봄. 좌찬성 정인홍이 차자를 올려, 회재(晦齋)ㆍ퇴계(退溪) 두 선생에게 왕자(王子 봉성군 완(鳳城君岏))를 죽이고 창기에 빠진 과실이 있다고 극구 헐뜯었다. 성균관 유생 이목(李楘) 등 5백여 인은 소를 올려 양현(兩賢)을 구해(救解)하는 한편, 인홍이 양현을 무함한 죄를 진술하였다. 광해는 크게 노하여 소두(疏頭) 최유연(崔有淵)ㆍ이민구(李敏求)ㆍ 한필기(韓必起) 3인을 금고하고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그러자 재임(齋任) 등 5명을 비롯한 모든 유생들이 모조리 성균관을 비우고 가버렸다. 이때 성균관 지사(知事) 지봉(芝峯) 이수광(李晬光)은, 유생들을 돈유하라는 명을 받고 성균관에 와서 절구 한 수를 읊조리기를,
거문고 소리 끊어진 독서재 에는 / 絃歌聲斷讀書齋
저녁나절 새 파람만 옛 거리에 메아리 지네 / 向晩東風響古街
보슬비 한 뜰에 방초는 우거지는데 / 微雨一庭芳草合
석양에 말없이 빈 뜰을 내려 오네 / 夕陽無語下空階
하였다. 이때 지평 박여량(朴汝樑)이 그의 스승 정인홍을 위하여 몹시 그 도(道)를 찬양하고 양현을 헐뜯었다. 좌의정으로 있던 오성부원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올린 차자에서,
“조식(曹植)의 문하에 인홍이 없었던들 도가 더욱 높았을 것이고, 인홍의 악함은 여량을 얻어서 죄가 더욱 깊다.”
하였는데, 한때의 명언이 되었다.
○ 임자년(1612, 광해군 4) 2월. 황해도 역적 김세제(金世濟) 일명 경립(敬立)이 봉산 군수(鳳山郡守) 신율(申慄)의 꾀임으로 김직재(金直哉)와 더불어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고백하였다.
○ 김직재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가 된 사람으로, 임진년 난리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적에게 포로 되었을 때 아버지가 적에 의해 삶기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서도 얼굴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 버림을 당하여 사판(仕版)에 끼이지 못한 지가 오래였다. 사대부치고 누가 김직재와 더불어 역적을 공모할 이치가 있겠는가? 그런데 참판 윤안성(尹安性) 부자와 사인(舍人) 정호선(丁好善) 형제들이 다 여기에 연루되어 같은 날 하옥되고, 그 외 평소 자기와 감정이 있는 자를 많이 끌어들였으므로 여러 날 구속되었다. 윤안성ㆍ정호선 등은 석방되었으나 양원(梁榞)ㆍ이호양(李好讓)ㆍ신열(申悅)ㆍ광산령(光山令) 등 수십 인은 그 이름이 김백함(金伯諴)의 초사(招辭)에 나왔으므로 모두 멀리 변방에 유배되었다.
○ 신율은 오히려 옥사가 차차 누그러질까를 겁내어서 유팽석(柳彭石)이란 자를 매수하여 주육을 듬뿍 먹이고 잡아매어 왕옥(王獄)으로 보내면서 신황(信黃)을 잊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이른바 신황이란 자는 신천(信川)에서 귀양 사는 승지 황혁(黃赫)을 말한다. 유팽석은 상경하자 곧바로 황혁의 이름을 들어 모역의 괴수로 만들었으므로, 황혁은 그의 손자 황상(黃裳)과 첩의 소생 황곤건(黃坤健)과 함께 모진 신문을 받고 죽었다.
○ 그의 첩 전춘앵(囀春鶯)은 해주 기생이었다. 그는 노비 수십 식구와 함께 주인의 억울한 사정을 샅샅이 진술하였으나 그 진술이 무분별하여 죽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편지 왕복을 하였다 하여 조수륜(趙守倫) 선생은 신문을 받다가 죽고, 정자(正字) 이덕수(李德洙)는 이산(理山)으로 정배되었으며, 권석주(權石洲) 또한 시안(詩案)이 죄가 되어 곤장을 맞고 정배되었는데, 겨우 동대문을 나서다가 죽었다. 그 시는 이러하다.
궁궐 버들 짙푸르매 꾀꼬리 이리저리 날고 / 宮柳靑靑鶯亂飛
온 성안 오얏 꽃ㆍ복사꽃 봄볕에 아양 떠네 / 滿城桃李媚春暉
온 조정은 모두 태평세월 구가하는데 / 朝家共賀昇平樂
뉘라서 바른 말이 포의에서 나오게 하였나 / 誰遣危言出布衣
○ 포의(布衣)는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인데, 그는 전시(殿試)의 대책문(對策文)에서 시국에 관해 언급하였는데, 그 말이 광해의 비위를 많이 상하게 하였으므로 이에 노한 광해는 곧 그의 이름을 방(榜) 속에서 삭제하였다. 그런데 양사와 삼공이 번갈아 차자를 올리므로 비로소 복과(復科)되었다.
○ 유팽석은 역모에 참여하여 알았다는 이유로 역시 신문을 면치 못하게 되자, 그는 마음에 깊이 뉘우치면서 말하기를,
“신율이 나를 그르쳤구나.”
하였다. 결국 그는 매를 맞아 죽었을 뿐 아니라, 형(刑)이 사후에 뒤쫓아 시행되었다. ‘이상하도다. 가벼이 간악한 사람의 달콤한 말을 믿다가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자신이 빠지게 되면서도 깨닫지 못한 자’라는 말은 바로 팽석을 두고 한 것이다.
○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유자신(柳自新)의 침실 뒷벽에, ‘차군만리행(嗟君萬里行)’이란 구절이 완연히 쓰여 있었다. 자획으로 봐서 한 집안 사람의 글씨도 아니며, 그렇다고 바깥사람의 손이 미칠 곳도 아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광해군이 외딴 섬에 안치되게 된 것은 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또 이이첨의 집에서 빚은 술이 변하여 피가 되었다는 설이 당시 사람들 사이에 파다하게 전해졌다. 이 역시 멸족의 화를 당할 조짐이 벌써 10여 년 전에 미리 보인 것이리라.
○ 계축년(1613, 광해군 5) 4월 28일. 사형수 박응서(朴應犀)의 고변은 이이첨의 꾀에서 비롯되었다. 응서란 자는 사암(思庵) 박순(朴淳)의 서자로서, 서양갑(徐羊甲)ㆍ심우영(沈友英)ㆍ허홍인(許弘仁)ㆍ유인발(柳仁發)ㆍ박치의(朴致毅)ㆍ이경준(李耕俊) 등과 뜻이 합하여 사생을 같이할 벗을 맺었다. 그들은 모두 이름난 집의 서자들로 문예까지 곁들였는데 혹 선학(禪學)에 몰두하기도 하고 때론 병서를 익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평소 오가면서 교분을 둔 자들은 곧 허균ㆍ이재영(李再榮)ㆍ이사호(李士浩) 등의 유였다.
○ 무신년(1608) 봄. 서양갑ㆍ심우영 등은 이경준ㆍ김경손(金慶孫) 등과 연명으로 소를 올려 벼슬길을 터주기를 바랐으나 시행이 되지 않자, 앙심을 품고 돌아가 여강(驪江 한강 상류)에다 토굴을 파고 한집에서 살 계획을 하였으며, 기린도(麒麟島 황해도 옹진(瓮津)에 있는 섬)에 곡식을 쌓아 후일의 관군을 대피할 양식으로 삼았다. 그리고 혹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본뜨기도 했는데, 그 종적이 괴이하고 비밀스러워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 계축년(1613) 봄. 장사꾼 하나가 동래(東萊)에 가서 은(銀)을 무역하여 서울로 올라오다가 조령(鳥嶺)에서 피살되었다. 그 은장수의 종 춘상(春祥)이 뒤를 밟아 여주(驪州)까지 달려와서 드디어 도적들의 거처를 밝혀내고 곧 포도청에 이를 보고하여 비밀리에 체포하고 보니 바로 박응서였다.
○ 광창군(廣昌君) 이이첨은 영창대군이 늘 대비 곁에 있는 것을 매우 못 마땅히 여겨 온갖 간사한 꾀를 내서 대군을 죽이고자 하는 판에 응서의 죄가 참형에 해당함을 듣자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먼저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의 집으로 찾아가 허리 굽혀 절하니, 희길은 이를 피하고 감히 받지 못하면서,
“알 수 없습니다. 영감께서 저에게 절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였다. 이첨은 말하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복상(福相)이 많소. 오래지 않아 반드시 큰 공훈을 세울 것이니 지극히 축하할 만하오.”
하였다. 그리고 밤에 일가인 이의숭(李義崇)을 다시 포도청에 보내어 가만히 응서를 꾀어서 말하기를,
“너의 죄는 참형에 해당한다. 그냥 죽기보다는 차라리 내 말대로 소를 올려 고변하는 것이 어떠냐? 영창(永昌) 추대를 그 종지로 만들고 또 평소에 절친했던 사람과 무사들 중 쟁쟁한 사람들을 끌어넣어 그 일을 사실화시킨다면 비단 죽음만 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훈(正勳) 또한 기록될 것이다.”
하니, 응서는 살 길을 얻었노라 기뻐하며 옥중에서 글을 올리되, 이첨의 지시대로 따랐다.
또 이응준(李應俊)을 끌어넣어 격문을 만들었다 하고, 김경손(金慶孫)ㆍ김평손(金平孫)은 격문을 전하노라 하였다. 그 격문에, ‘참 용이 아직 일어나지 않으니 가짜 여우가 먼저 우는구나[眞龍未起 假狐先鳴]’라는 말이 있는데, 참용은 영창을 가리키고 가짜 여우는 광해를 뜻한 것이라 한다.
○ 서양갑ㆍ심우영ㆍ유인발ㆍ이경준ㆍ김경손 등은 투옥되고, 박치의ㆍ허홍인은 도망하였는데 수일 뒤에 허홍인은 이양백(李養伯)에게 붙들렸고, 박치의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허홍인ㆍ심우영 등이 잇따라 처형되었다. 서양갑은 자기의 어머니가 모진 매를 맞는 것을 보자, 흥분하여 소리를 치기를,
“전하에게 세 가지 큰 죄악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의를 내세워 적(賊)을 친 것이거늘, 어찌해서 반역이라 하옵니까?”
하고는, 부왕을 시역한 것, 형을 죽인 것, 손윗사람을 간음한 것 등을 들어 큰소리로 뜰에서 외쳤다. 사관들은 차마 이것을 사책에 쓰지 못했다고 한다.
○ 5월 초 6일.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ㆍ안악군수(安岳郡守) 김래(金琜)ㆍ 진사 김규(金珪)ㆍ현감 심정세(沈挺世)ㆍ동자(童子) 김선(金瑄) 등이 모조리 하옥되고, 16일 종성 판관(鍾城判官) 정협(鄭俠)의 진술로 걸려든 신상촌(申象村 흠(欽))ㆍ이월사(李月沙 정귀(廷龜))ㆍ김선원(金仙源 상용(尙容))ㆍ한청평(韓淸平 응인(應寅))ㆍ황회원(黃檜原 신(愼))ㆍ한서평(韓西平 준겸(浚謙))ㆍ판서 서성(徐渻)ㆍ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ㆍ남곽(南郭) 박동열(朴東說)ㆍ최 영흥 기남(崔永興起南 영흥은 영흥 부사를 말함)ㆍ김상준(金尙寯)ㆍ안창(安昶)ㆍ조희일(趙希逸)ㆍ조위한(趙緯漢)ㆍ한시일(韓時一) 등이 서소문 바깥에서 심문을 당하니, 곡성이 하늘에 진동하고 기상이 처참하였다.
○ 오성(鰲城 이항복)은 이조 정랑으로 있을 적에 정협을 천거하여 종성 판관으로 삼았기 때문에 스스로 미안하게 여겨 사직을 고하였으며,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영의정으로서 백관들을 거느리고 편전 앞문에 엎드려 영창을 죽이자고 청하였다. 영창의 나이 그때 겨우 아홉 살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였으니, 어찌 당을 지어 반역할 리가 있겠는가? 한음의 덕망은 조야가 모두 머리 숙여 왔었는데, 이날의 처사는 중론이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 고변이 있은 처음에 대관 중에서 맨 먼저 영창을 죄주자고 청한 자는 장령 정호관(丁好寬)이며, 폐모(廢母)를 청한 이는 장령 정조(鄭造)ㆍ윤인(尹訒)이었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으로 폐모를 청한 이는 진사 이위경(李偉卿)인데, 이위경의 소하(疏下)로는 성하연(成夏衍)ㆍ채겸길(蔡謙吉) 등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진사 어몽렴(魚夢濂)ㆍ박자응(朴自) 등과 명륜당에서 서로 힐난하다가 위경 등은 박자응에게 내쫓기어 혜민서에 소청(疏廳)을 차리고 영창대군과 김제남의 죄부터 청한 다음 대비 폐위에까지 언급하였다.
그리고 박자응 등은 성균관을 점거하여 어몽렴을 소두(疏頭)로 삼고 소를 썼는데, 화의 근본을 제거할 것을 주 내용으로 하였다. 이는 곧 영창대군은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김제남도 죽여야 함을 가리킨 말이었다.
○ 이때 서인(西人)으로 불리는 자들은 칠신(七臣)이 구금된 이래로 조정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으며, 남인들은 다만 그 성패를 좌시할 뿐이었다.
한편 대북(大北)은 이이첨이 정조ㆍ윤인ㆍ한찬남(佷纘男) 등과 더불어 원흉인 정인홍을 방패로 삼고, 광해의 사랑을 독차지한 김 상궁(金尙宮)과 결탁, 그를 심복으로 만들어 광해군을 미혹시킨 뒤에 전적으로 폐모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의 당을 많이 만들어 요직에 배치하게 되자, 마을에서 부형을 배반하고 벼슬을 바라는 자들이 날마다 그 문으로 운집하였다. 그들은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의 처형과 모후(母后)의 폐출론을 들어 다투어 소장을 올리고 초야의 공론이라 하였다. 이것은 모두가 이이첨과 허균의 손에서 나왔던 것이다.
○ 소북(小北)인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은 초방(椒房 후비의 궁전)의 지친으로 앞뒤에서 한편이 되어 상대와 맞서는 태세를 이루었는데, 희분은 폐중궁(廢中宮 광해비)의 오라비요, 승종은 세자빈(世子嬪)의 할아비로서 그 세력은 이첨과 좋은 적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창(三昌)이라 불렀으니 즉, 이첨은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이요, 승종은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이요, 희분은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이었기 때문이다. 세자빈의 아비 박자흥(朴自興)도 이첨의 사위였다. 세자빈의 아비와 할아비로서 조정을 제맘대로 움직이는 터였지만, 형상을 숨기고 남을 넘어뜨리는 이이첨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이첨도 군상과의 관련을 굳게 함이 저렇듯 오로지 하였지만, 또한 그들의 사이를 동요하기는 어려웠다. 이첨의 간악 혹독함과 유희분ㆍ박승종의 탐심은 다같이 방자하기 형언할 수 없지만, 유와 박의 재주는 이첨에게 미치지 못하고, 이첨의 재주는 악한 짓을 하는 데는 가장 잘하였다.
○ 박승종이 판의금부사로 있을 때, 폐모하자는 의논을 심히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조직(趙溭) 등이 상소하여 모후(母后)를 구원하다가 오랫동안 갇히게 되었다. 승종이 그들을 백방으로 보호하여 끝까지 심문한 적이 없고 보면, 또한 희분의 유는 아니다. 그런데 그 후 박홍구(朴弘耈)가 재판관이 되자 아뢰어 조직을 심문하였다. 광해군은 을묘년(1615, 광해군 7)에 창덕궁으로 옮겼고 대비는 그대로 서궁(西宮)에 있었다. 그러므로 폐모론이 일어나자 대비전이라 부르지 않고 서궁이라 불렀다. 그러나 조정에 벼슬하는 자들은 모두 대비에게 사은숙배의 예를 오히려 폐지하지 않았는데, 정사년(1617) 겨울, 희분이 병조 판서가 되어 서궁에 숙배하지 않았다. 자전(慈殿)에게 숙배의 예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희분 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폐비하자는 의논을 모아 정청(庭請)한 것도 희분이 부임한 지 5~6일 후였다.
○ 대북 사람들은 그때까지 박승종이 다른 의론을 내세울까 두려워 몇 년간 정청을 발의하지 못하다가 희분의 한 번 거취에 결정되었으니, 통탄할 일이다. 이에 이론이 발의되자, 오성부원군 이항복은 북청(北靑)에 유배되고, 영의정 기자헌은 애초에 유배하기로 결정되었으나 배소에 가지 않았다. 전 승지 정홍익(鄭弘翼)은 종성에 유배되고, 전 목사 이신의(李愼儀)는 회령에 유배되었다. 정언 김덕함(金德諴)은 온성에 유배되고, 정자 김지수(金知粹)는 경원에 유배되었다.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이는 판중추부사 윤방(尹昉)ㆍ전 판서 김상용(金尙容)ㆍ참판 오백령(吳百齡)ㆍ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권(金權)ㆍ동지 오윤겸(吳允謙)ㆍ첨지 이경직(李景稷)ㆍ정랑 박자응(朴自凝) 등이었다.
○ 계축년(1513, 광해군 5) 가을, 유학(幼學) 조경기(趙景起)는 정조ㆍ윤인을 베어서 인륜과 기강을 바로잡기를 청하였고, 갑인년 2월, 사직(司直) 정온(鄭蘊)은 소를 올려, 대비에게 효도할 것, 영창의 호를 추복(追復)할 것, 정조ㆍ윤인ㆍ정호관을 국경 밖으로 추방할 것, 정항(鄭沆)을 효수하여 국민에게 사죄할 것 등을 청하였다.
○ 계축년 가을에 성균관 유생 정복형(鄭復亨)ㆍ권심(權淰)ㆍ이안진(李安眞) 등이 잇달아 소를 올려 정조ㆍ윤인의 폐모하기를 주장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광해는 분연히 말하기를,
“정조ㆍ윤인 등이 가벼이 대론(大論)을 발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시끄러운 싸움터로 만들었으니, 삭직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그러다가 갑인년 겨울, 다시 특명을 내려 정조ㆍ윤인의 관직을 회복시켜 경연에 두게 하였다. 그러자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은 차자를 올려,
“정조와 윤인을 대간에 복귀시킨 것은 곧 모후를 폐출할 조짐이라고 바깥 의논이 자자합니다.”
하였다. 광해는 크게 노하여 곧 사관을 보내어 완평부원군에게 힐문하기를,
“이 말은 반드시 근거가 있는 말일 것이오. 임금을 섬기는 데 속이지 않는 것이 대신의 직분이니, 경은 사실대로 대답하오.”
하였다. 완평부원군은, 길에서 떠도는 말을 들은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광해는 세 차례나 사관을 보내어 반복 힐문하였지만, 완평부원군은 끝내 길에서 흘려 들었다고 대답하였다.
양사(兩司)는 이원익이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서 임금의 악을 수창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여 이내 여강(驪江)으로 추방하였으며, 또 남이공(南以恭)을 전에 이원익이 체찰사로 있을 때 종사(從事)로서 그의 집에 왕래하면서 조정을 비방하였다 하여, 변방에 유배하기를 청하였다.
○ 을묘년(1615) 3월, 진사 홍무적(洪茂績)ㆍ정택뢰(鄭澤雷)ㆍ김효성(金孝誠)은 각기 유생 30여인을 거느리고 잇따라 소장을 올려 정조와 윤인을 죄주기를 청하고 이원익을 구원하다가 무적은 거제에, 택뢰는 남해에, 효성은 진도에 각각 유배되었다.
○ 정미년(1607) 겨울, 선조대왕의 옥후가 편치 못할 때이다. 궁중에 드나드는 무녀(巫女)가 의인왕후(懿仁王后 선조의 비 박씨)의 혼이 옥체에 빌미가 되었다 하여, 궁중에서 유릉(裕陵)으로 사람을 보내어 재앙을 물리치게 한다는 말이 바깥으로 번져 나왔다. 박동량(朴東亮)은 곧 의인왕후와 종남매 간이므로 이 말을 듣자, 김제남이 이를 금지하지 못한다고 통탄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 후 계축년 옥사가 일어나, 말이 원정(元情) 중에 미치게 되어 이로 말미암아 양궁(兩宮) 저주의 옥사가 크게 일게 되었다. 그리하여 궁녀들 중 선조(宣祖)의 사랑을 받던 향이(香伊)ㆍ환이(環伊) 등 4~5인이 사사되고 장님무당 고성(高城)에게도 또한 형이 내려졌다.
○ 김응벽(金應璧)의 공초에 ‘목릉(穆陵 선조능)에도 저주한 곳이 있으니 파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승지 윤중삼(尹重三)과 선공제조 송순(宋諄)을 파견하여 응벽을 감독해서 능을 파게 했는데, 현궁(玄宮)까지 거의 파 들어가자 응벽은 다시, 저주가 이 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릉(成陵 성묘(成墓)즉 광해 어머니 능)에 있다고 하였다. 다시 즉 성릉 으로 가게 하였는데, 수레가 거의 동네 어귀에 이르자 갑자기 자살하였다. 사실 응벽의 생각은 두 능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목숨을 조금이나마 연장시키자는 것이었는데, 광해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흉적의 속임수에 빠져 능침에 욕을 끼치고 선조의 영령을 놀라게 하였으니 통탄할 일이다.
○ 을묘년(1615, 광해군 7) 여름, 유학 조직(趙溭)은 소를 올려, 주상과 대비가 양궁에 따로 있는 것이 옳지 못함을 극력 진술하였다. 그 소 가운데, '천일(天日)을 격리했다. 모후를 유폐했다. 적막한 궁에서 귀신과 더불어 이웃 한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광해는 크게 노하여 승정원에서 조직을 불러들여 묻기를,
“전부터 양궁에 따로 거처한 것은 유독 오늘만이 아니거늘 네가 '유폐'란 말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니, 조직은 대답하기를,
“옛적에 따로 거처한 것은 또한 오늘과 같은 거조가 있어서 그러했습니까?”
하였다. 조직은 곧 구금되어 신문을 당하다가 멀리 외딴섬에 유배되었다.
○ 한음(漢陰)이 계축년에 올린 차자에서 영창대군의 죄를 들어 말한, ‘천천히 방침을 하더라도 어찌 편의한 것이 없으리이까?’라는 것은 명백하지 못한 것 같고 차자의 내용도 긴요한 말이 없으니, 진실로 애석한 일이다. 폐비 때 수의(收議) 중에서 명백하고 정대(正大)하기로는 오성(鰲城 이항복)이 첫째요, 그 다음은 정홍익(鄭弘翼)ㆍ김덕함(金德諴)이었다.
○ 이이첨은 유희분과 박승종을 몹시 꺼려 그들을 넘어뜨릴 음모를 생각함에 극단을 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전 교리 정문익(鄭文翼)은 유희분과 박승종의 심복으로 해주에 있었으므로, 한찬남은 허균과 꾀를 통하여 봉수(烽燧)의 부정을 적발한다고 칭탁한 뒤에, 선전관 유세증(兪世曾)을 해주에 파견, 무뢰한들을 모집하여 그들로 하여금 해주에 고변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어 한 책자를 바쳤는데, 정문익의 이름이 첫줄에 쓰여 있고, 무신 김흠(金欽)ㆍ김선(金瑄) 등 4~5인과 서울에 있는 조사(朝士)들의 이름이 많이 적혀 있었다.
이때 해주 목사 최기(崔沂)는 그 내력을 환히 알았으므로, 의분을 이기지 못하여 고변자를 장살(杖殺)하고 그 책자를 불 속에 던졌다. 한찬남은 최기가 고변자를 죽여서 그 흔적을 없앴다 하여, 그를 의금부로 잡아다가 역적죄를 적용, 장살한 다음 사후에 전형(典刑)을 추시(追施)하였다. 그리고 최기의 아들 최유석(崔有石)과 조카 최유함(崔有涵)ㆍ최유영(崔有泳)은 다 극형을 받았으며, 사위 유찬(柳燦)은 옥중에서 죽고, 외손과 친속들은 변방으로 정배되었다. 또 정문익은 외딴섬으로 유배되고, 해주 사람 김흠 등 수십 인도 죽거나 아니면 유배되었다. 이연평(李延平 연평부원군 이귀(李貴))과 김창일(金昌一)은 최기가 붙들려 올 때 길 옆에 나와 보았다고 하여, 중도 부처되었으며, 유찬의 아들 유시영(柳時榮)과 유찬의 동서 윤훈거(尹勛擧)도 다 장류(杖流)되었다. 최유석의 아내 이씨는 곧 한음의 손녀로, 남편의 원통한 죽음을 슬퍼하다가 약을 마시고 자결하니 사람들은 모두 불쌍히 여겼다.
○ 허균은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아들로, 명문에 태어났고 또 그의 문장은 당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으나, 천성이 요망하고 행실 또한 괴이하였다. 상(喪)을 입는 동안에 기생을 가까이 하는가 하면 참선도 하고 부처도 섬기는 등 보고 들어서 깜짝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만년에 대북에 투신하여 이이첨을 깍듯이 섬겨 폐모론을 담당하였다. 그는 괴상한 무리들을 불러 모아, 낙천군(洛川君) 김개(金闓)ㆍ사간 신광업(辛光業) 등으로 심복을 삼았는데, 그 종적이 간교하고 비밀스러워서 단서를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형에게 죄를 지어 향당(鄕黨)에서 용납되지 않는 하인준(河仁俊)ㆍ황정필(黃廷弼)ㆍ이국량(李國樑)ㆍ서상안(徐尙顔)ㆍ남정엽(南正燁) 같은 자들이 그의 문으로 폭주하여 열 명씩 백 명씩 떼를 지어 다투어 소장을 올려 폐모하기를 주청하였다. 혹 성균관에 근거를 두어 출세의 디딤돌을 삼기도 하고, 미리 과거 제목을 내서 급제의 길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화살에 편지를 묶어 서궁에 쏜 것은 극히 요괴하였으며, 방(榜)을 걸어 남문에 통유한 것은 더욱 참혹하였다.
○ 무오년(1618, 광해군 10) 8월이 되자, 도성이 떠들썩하고 조야가 시끄러워졌다. 내란이 조석 간에 일어난다면서, 이고 진 행렬이 밤낮으로 잇따르고, 달리는 말과 수레는 거리를 메꾸었다. 그 비참한 정경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 장령 한명욱(韓明勖)은 계를 올려, 남문에 방(榜)을 건 것은 필시 하인준이므로 이 자를 엄중히 국문한다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하인준을 국문하니, 그는 허균이 잘 안다고 끌어들였다. 허균을 국문하자, 그는 일일이 진술했는데, 곧 폐비를 칭탁하여 궐내를 범하자는 역모였다. 그리하여 황정필(黃廷弼)ㆍ이국량(李國樑)도 모두 처형되고 김개는 결국 장살되었다. 광해가 망하기 전에 이 무리들이 먼저 처형 되도 매우 통쾌한 일이다. 신광업(辛光業)은 기장(機張)에 유배되었다가 반정 초에 처형되었다.
○ 광해는 음란하고 포학한 것이 날로 심하여져서 널리 후궁을 선발하였으니, 허 숙의(許淑儀)는 부사 허경(許儆)의 딸이요, 윤 숙의는 현감 윤홍업(尹弘業)의 딸이요, 홍 숙의는 군수 홍매(洪邁)의 딸이요, 원 숙의는 수사(水使) 원수신(元守身)의 딸이요, 임 숙원(任淑媛)은 임몽정(任蒙正)의 첩의 딸이요, 정 숙원은 정지한(鄭之罕)의 누이동생이요, 김 상궁은 천한 노비의 딸이요, 이 상궁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 첫 벼슬을 시도하는 음관(蔭官)이나 변장(邊將)ㆍ변수(邊守)를 희망하는 무신이나 감사 또는 수령을 제수 받으려는 문사들은, 남몰래 궁중의 하인을 통하여 다투어 뇌물을 바치었다. 때문에 숙의의 친정집과 상궁의 일가붙이들은 권세가 혁혁하여 문 앞이 항상 붐비었다. 비단 함부로 벼슬자리를 노리는 자와 죽을죄가 면제되기를 바라는 자들만이 달려가서 빌붙는 것이 아니라, 상전을 배반한 노비, 묵은 빚을 받으려는 자들의 소굴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평소 이익을 탐내는 몰염치한 자들은 부귀공명을 누리게 되고, 예의염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이는 몸을 끌고 용감히 물러났다.
○ 광해군 역시 관직을 제수할 때에 바치는 은이 많고 적음을 봐서 그 품계를 높이고 낮추었다. 또 인경궁(仁慶宮)ㆍ경덕궁(景德宮)을 짓기 위해 민가를 철거하여 담장을 넓히었고, 산의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거대한 뗏목이 강에 잇따랐다. 세금을 한정이 없이 징수하여 민력이 고갈되었고, 장정을 자주 징발하는 바람에 중들이 성 안에 가득했다. 이때에 터를 바치거나 돌을 바치거나 은을 바치거나 목재를 바치거나 혹 냇물을 막아 물을 가두거나 혹 숯을 태워 쇠를 불리거나 한 자들은 다 이마에 옥관자(玉貫子)를 붙이는 반열에 서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오행당상(五行堂上)’이라 불렀다. 이충(李沖)은 여러 가지 채소를 헌납하여 호조 판서에 오르고, 한효순(韓孝純)은 산삼을 바치고 갑자기 정승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산삼 각로를 사람들은 다투어 흠모하고 / 山蔘閣老人爭慕
잡채 상서는 세력을 당할 수 없네 / 雜菜尙書勢莫當
○ 식년(式年)에 실시하는 강경과(講經科)를 보면 응시하는 자들이 서서 삼경 중에서 각각 한 대문씩을 미리 외어서 과거 때 배강(背講)하므로 통하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때문에 대북(大北)의 자제라면 글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다 과거에 급제했으므로, ‘일곱 대문을 통하는데 원하는 대로 해준다.[七大文通從自願]’라는 말이 당시에 널리 유행되었다.
○ 누군가 경기 감사로 있을 때 그의 아들이 양근 군수(楊根郡守) 이재영(李再榮)의 대작으로 급제하자, 어떤 이는 시를 이렇게 썼다.
양근 태수 불이 나게 드나들더니 / 揚根太守往來忙
감사댁에 경사 났네 / 方伯家中慶事昌
○ 김충보(金忠輔)는 초명이 김유영(金有永)인데, 그는 최희남(崔希男)의 배반한 종으로 성병사(成兵使)의 계집종 은종(銀從)의 남편이다. 그는 유희분을 배알하고 각 집의 공물(貢物)을 방납(防納)하여 그 이익을 유희분과 나눠 먹었다. 유희분은 그 사람됨을 착하게 여겨 그를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천거하였는데 일자무식이라 하여, 순검사(巡檢使) 권반(權盼)에게 내침을 당하였다. 유희분은 은을 상납하게 하여 통정대부로 승진, 장기 현감(長鬐縣監)에 제배하였다. 몇 해 지나지 않아서 다시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옮겨 조도사(調度使)를 겸한 그는, 여러 읍을 순력하면서 백성들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아 궁궐 건축비로 보조하는 한편, 그 나머지는 유희분에게 바쳤다. 광해군은 몹시 기뻐하여 가선대부로 포상하였다.
은종(銀從)의 아비 언종(彦從)의 묘가 군위(軍威) 땅에 있는데, 김충보가 군위에 도착하여 본현(本縣)을 시켜 요전상(澆奠床 산소에 차리어 놓는 제물)을 갖추어 그 묘에 제사하게 하였다. 향소(鄕所) 이종가(李從可)는 제물을 가지고 가서 묘 밑에 앉아 탄식하기를,
“세상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언종은 사사노비인데, 내 사족(士族)의 자식으로서 언종의 제물 감독관이 될 줄이야 예전엔 미처 생각도 못하였다.”
하고 씁쓸해 하였다. 이 또한 젊은이들에게 한바탕 웃음거리가 되겠기에 여기에 기록한다.
○ 양주(楊州) 대탄(大灘) 근처에 나이 스무 살이 지나도록 장가를 못 든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논밭과 노비를 팔아 조도령(調度令)에게 베를 바치고 통정대부 직첩 한 장을 샀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일러 ‘도령님 첨지[都令主僉知]’라 불렀다.
또 경상도 진해에 처녀 한 사람은, 부모가 다 돌아가자 그 유산을 물려받아 비단과 베를 많이 쌓아 두고 있었는데, 조도사(調度使)가 강제로 처녀에게 숙부인(淑夫人) 직첩을 받게 한 뒤 그의 비단과 베를 빼앗았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아기씨 부인[阿只氏夫人]’이라 불렀다. 세상에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겠다.
○ 정몽필(鄭夢弼)은 이조의 서리 정애남(鄭愛男)의 조카로, 몰래 김 상궁과 통하여 늘 궐내에 있으면서 사람 죽이고 살리기를 하고픈 대로 하였으며, 수령과 변장들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사간 조경 일장(趙絅日章 일장은 조경의 자임)의 종이 주인을 배반하고 정몽필의 집에 들어간 뒤, 주인이 되찾을까 염려하여 백단으로 거짓말을 하였다. 정몽필은 곧 포도청에 부탁하여 군졸을 풀어 일장을 체포, 변소에 감금하고 그를 윽박질러 문권(文券)을 만들어 바치게 한 뒤에 놓아 집으로 돌려보냈다. 반정 뒤에 그는 종루(鐘樓)에서 효수되었다.
○ 노적(奴賊)은 곧 건주위(建州衛 만주에 있는 여진족의 근거지)이다. 무오년(1618, 광해군 10) 봄, 적의 세력은 치열하고, 병마 또한 정예하였다. 그들은 중원을 가리켜 남조(南朝)라 부르는 등 말씨가 매우 불손하여 장차 함부로 날뛸 조짐이 있었다. 이에 천자는 진노하여 양호(楊鎬)를 요동도어사(遼東都御史)로 삼고 이여송(李如松)을 총병(摠兵)으로 삼는 한편, 특히 도독 유정(劉綎)을 보내서 10만 군대를 조발하고 또 우리나라에 명해서 건주(建州)를 협공하게 하여 적의 섬멸을 함께 약속하였다.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았다. 그들은 병졸 2만을 거느리고 행군, 우모령(牛毛嶺) 산채에 도착하자, 유정의 10만 병졸은 적에게 대패하여, 유정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교 유격(喬游擊)은 목을 매어 죽었다. 군병들은 서로 짓밟아 시체는 1백여 리에 깔렸다. 강홍립과 김경서는 장수와 졸병을 친히 거느리고 무장을 푼 다음 적에게 투항하였다.
선천 군수(宣川郡守) 김응하(金應河)는 좌영장(左營將)으로서, 대장의 항복을 보고 그 분함을 이기지 못했는데 심하(深河)에 이르러 버드나무를 의지하고 화살을 뽑아 적 8~9명을 연달아 쏘아 죽였다. 화살이 떨어지자, 그는 칼을 휘둘러 적을 베다가 칼이 부러지니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이러한 이유로 노적(奴賊)은 그 나무를 불러 ‘장군류(將軍柳)’라고 하였다.
○ 신유년(1621) 겨울, 도독 모문룡(毛文龍)이 처음 유격 장군이 되어 임반(林畔)ㆍ용천(龍川) 등지에 주둔하였는데 이때 노적 수천 기(騎)는 얼음을 이용, 압록강을 건너와 밤중에 모 도독의 진영을 불의에 습격하였다. 유격 장군 모문룡은 말을 타고 달아나고 한군(漢軍) 천여 명은 거의 다 죽어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인민들은 한 사람도 노략질당한 사람이 없었다. 이는 대개 광해군이 비밀히 강홍립에게 분부하여 노적에게 투항하게 한 데 대한 보답이었다.
그 후 모문룡은 가도(椵島)에 들어가 자리 잡고 대장기를 세워 대중을 불러 모았으며, 요동 백성을 불러들여 시장을 넓혔다. 군량은 순전히 우리나라에서 가져갔고 물자는 중국에 의지했다. 그리하여 변방을 진압한 혁혁한 큰 공은 없었지만, 때때로 병력을 과시한 조그만 공로는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황제에게 보고함에 이르러서는 사실보다 지나치게 과장함으로써 일약 도독의 지위로 뛰어올라, 분수에 넘치는 개부(開府)의 높은 대접을 받았다. 10년의 영달과 부귀가 하루아침에 원통하게 죽고 마니, 아! 애석하고 애석하다. 그는 원숭환(袁崇煥)에게 참살되었고 원숭환 또한 뒤에 환관에게 피살되었다 한다.
○ 계해년(1623, 인조 1) 반정은 부득이한 거사였다. 광해는 악행이 상주(商紂)보다 심하고 죄는 양광(楊廣)보다 많았으니, 진실로 할 만한 세력만 있다면 누구나 베는 것이 옳았다.
거의 공신(擧義功臣) 1등은, 김유(金瑬)ㆍ이서(李曙)ㆍ신경진(申景禛)ㆍ구굉(具宏)ㆍ김자점(金自點)ㆍ이귀(李貴)ㆍ심기원(沈器遠)ㆍ심명세(沈命世)ㆍ최명길(崔鳴吉)이요, 2등에는 이시백(李時白)ㆍ장유(張維)ㆍ이시방(李時昉)ㆍ김경징(金慶徵)ㆍ심기성(沈器成)ㆍ원두표(元斗杓)ㆍ이해(李澥)ㆍ홍진도(洪振道)ㆍ신경유(申景裕)ㆍ이항(李沆)ㆍ구인후(具仁垕)ㆍ최내길(崔來吉)ㆍ신준(申埈)ㆍ이중로(李重老) 등이며, 3등엔 김연(金鍊)ㆍ이후원(李厚源)ㆍ조흡(趙潝) ㆍ유백증(兪伯曾)ㆍ박정(朴炡)ㆍ유구(柳䪷)ㆍ송영망(宋英望)ㆍ신경식(申景植)ㆍ신해(申垓)ㆍ 홍서봉(洪瑞鳳)ㆍ홍진문(洪振文)ㆍ이의배(李義培)ㆍ이원영(李元榮)ㆍ홍효손(洪孝孫)ㆍ한여복(韓汝復)ㆍ이기축(李起築)ㆍ노수원(盧守元)ㆍ이덕부(李德符)ㆍ이사주(李師周) 등이었다.
○ 반정하던 날, 의거하는 장수들이 제각기 무리를 이끌고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다. 해는 벌써 황혼인데,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서(李曙)의 군사가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 그날 믿는 바는 오직 이서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당황하였다. 주상(主上 인조)이 친히 연서관(延曙館)까지 마중을 나가서야 비로소 모두 합세하여 행군할 수가 있었다. 한밤중에 창의문(彰義門)으로 들어가 선봉이 돈화문(敦化門) 밖으로 돌격, 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면서 관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은 곧 장신(張紳)의 장인으로, 일찍이 양(兩) 대장과 더불어 내응하기로 서로 약속됐기 때문에 훈련도감의 군졸은 한 사람도 나와서 방어하는 자가 없었다. 초관(哨官) 이항(李沆)은 소속 부하를 거느리고 반정 군을 맞아들였으며, 제장들은 주상을 받들어 인정전(仁政殿)에 오르게 했다. 궐내에 입직한 관원들은 앞을 다투어 숙배를 드리는데, 보덕 윤지경(尹知敬)만은 천천히 직소(直所)에서 나오더니 어좌 앞에 서서 말하기를,
“거조(擧措)를 알고 난 후에 절하겠소.”
하였다. 좌우에서 모두,
“이는 종묘사직을 위한 계교요.”
라고 말하자, 지경은 급히 절하였다.
도승지 이덕형(李德泂)은 군사들의 손에 붙들려 들어왔는데, 영문을 몰라 숙배하지 않았다. 좌우에서 칼로 치려고 하니, 연평(延平)이 그를 붙들며, 말하기를,
“이는 곧 반정이요.”
하자, 덕형은 비로소 꿇어 절하였다. 백관ㆍ상하ㆍ군민들은 다 주상을 받들어 보위(寶位)에 앉게 하였다. 아! ‘연서(延署)’라는 참언(讖言)이 이날에 와서 꼭 들어맞았으니, 만사는 다 미리 정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 인정전에 등극한 후에 광해부자의 있는 곳을 알지 못해, 상하는 모두 허둥대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이윽고 어떤 장사꾼이 와서 광해가 뒷담을 넘어 도망해서 지금 자기 집에 숨어 있다고 보고하는가 하면 또 내관인 배(裴)씨는 와서 폐동궁(廢東宮)이 담을 넘어와서 저의 집에 숨어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곧 군병을 풀어 궐내로 태워오는 한편 양 대장은 곧 경운궁(慶運宮)으로 달려가, 문무 백관과 상하 군민이 다 성상(인조)을 추대한다는 뜻을 대비 전에 아뢰고, 어보(御寶)를 바쳐 대비의 처분을 기다렸다. 대비는 곧 어보를 성상에게 돌려 종사와 신민의 주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광해의 불충ㆍ불효함과 백성들에게 포악한 죄를 들어 폐하여 광해군으로 삼아 강화도로 내쳐 안치하고, 폐비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유(柳)씨도 함께 위리 안치했으며, 폐세자는 폐빈 박씨와 함께 위리한 후 별장(別將)을 정해서 지키게 하였다. 상은 음식과 의복을 후하게 보내주고 때때로 내사(內使)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하였다.
○ 반정 때, 종사관 김자점ㆍ심기원ㆍ심명세ㆍ송영망(宋英望)은 다 낭관을 제수하고, 김경징(金慶徵) 역시 좌랑을 제수했다. 김원량(金元亮)에게는 사평(司評)을 제수하여 정훈(正勳)에 기록하고 그 나머지 홍제원 집결에 동참한 자들도 유생ㆍ무사를 막론하고 다 6품 이상을 주어 외직 또는 내직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훈공은 별단에 기록하였다.
○ 군문(軍門)에서 행형 한 명단은, 김 상궁(金尙宮)ㆍ박정길(朴鼎吉)ㆍ한찬남(韓纘男)ㆍ백대형(白大珩)ㆍ박홍도(朴弘道)ㆍ정몽필(鄭夢弼)ㆍ강익(姜翼)ㆍ윤천생(尹天生)이고, 정형한 명단은, 이이첨ㆍ이원엽ㆍ박응서ㆍ이홍엽(李弘燁)ㆍ이익엽(李益燁)ㆍ이위경(李偉卿)ㆍ정조ㆍ윤인ㆍ정인홍(鄭仁弘)ㆍ윤유겸(尹惟兼)ㆍ원종(元悰)과 내관 조귀수(趙龜壽)ㆍ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ㆍ유세증(兪世曾)이고, 베기만 한 명단은, 이정원(李廷元)ㆍ유희분ㆍ유희발(柳希發)ㆍ채겸길(蔡謙吉)ㆍ황덕부(黃德符)ㆍ한정국(韓定國)ㆍ한정국(韓正國)ㆍ한안국(韓安國)ㆍ한희(韓暿)ㆍ한오(韓晤)ㆍ윤삼빙(尹三聘)이다.
○ 반정 이튿날 표신(標信)을 보내어 박엽(朴燁)을 평양에서 베고, 정준(鄭遵)을 의주에서 베었다. 정준은 정조의 아우인데 의주 부윤으로서 당시 의주부에 있었기 때문에 오랑캐에게로 달아날까 염려해서 사사(賜死)한 것이며, 박엽은 뇌물을 많이 바침으로 해서 광해의 총애를 받아 평안 감사가 되었는데, 살인하기를 마치 쑥대 베듯 하여 관서 지방의 백성들에게 원한을 맺은 자였다.
이해 정월 보름날 밤에 박엽은 시인 변헌(卞獻) 등과 더불어 법수교(法水橋) 위에서 달 놀이를 하였는데, 술이 얼큰해지자 절구 한 수를 이렇게 읊었다.
평양 감사 한 대이건만 / 一代關西伯
법수교는 천 년이라네 / 千年法水橋
아마도 오늘밤 저 달이 / 只應今夜月
끝내는 가련한 밤이 되리 / 終作可憐宵
시의 애절함이 그의 평소 작품과는 딴판이다. 그의 죽음의 징조가 이미 이 시에서 보여 진다.
○ 각 도에서 작폐(作弊)한 네 조도사(調度使) 김순(金恂)ㆍ김충보(金忠鞴)ㆍ왕명회(王明恢)ㆍ 지응곤(池應鯤) 등 4명은 각기 현지에서 효수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씻어 주었다. 박종주(朴宗冑)는 대구에서 참했는데, 그는 대북파의 명사로서 남의 논밭과 노비를 빼앗아 영남 사람들의 원망을 산 자이며, 양호(梁護)는 제주에서 효수하고 그의 재산은 몰수하여 호조에 충당했는데, 그는 목사로서 백성을 착취한 자이다.
○ 13일 밤, 경기 감사 박자흥(朴自興)은 탈출 도주하여 양주로 달려갔다.
마침 박안례(朴安禮)가 부사로 있었으므로 자흥은 거기서 군병을 조발하려 하였다. 그런데 반정의 정확한 소식을 듣고는 곧 군사를 해산하고 단기로 도주하여 그의 아버지 박승종과 함께 과천에 있는 어떤 절에서 자결하였다. 그의 옷 속에서 유표(遺表)가 나왔는데, 거기에,
“신 승종 부자가 능히 바로 구원하지 못해서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 났습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조정은 곧 그의 일가붙이들을 시켜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염(斂)하여 초빈(草殯)하게 하였다. 박승종 부자는 혼조(昏朝 광해조)와 가까운 사돈으로서, 그 형세가 장차 보전하기 어렵게 되자 하루아침에 자결하였으니 마땅하다 하겠다.
승종의 거리낌 없는 탐욕과 방종은 사람들이 운운하는 바이지만, 염치라곤 도무지 없고 사치와 탐욕이 극에 달한 유희분(柳希奮) 정도까지에 이르지는 않았다. 또 그에게는 사류들을 아끼는 마음이 있었고, 폐모론이 진작 결정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고 보면, 그에게 공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또 그가 반정 소식을 듣고 표(表)를 남긴 뒤 자결한 것은 곧 그의 마음이 죽고 사는 데 그렇게 구차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아들 자응(自凝)은 정청 때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평소 거처하는 방을 ‘읍백(揖白)’백이란 곧 서방(西方)으로, 이는 곧 서궁(西宮)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이라 이름 한 자인데 유희분의 아들과 함께 유배되었으며, 박승종의 논밭과 노비는 다 적몰되었으니, 송 태종(宋太宗)이 한통(韓通)을 포증(褒贈)한 전례 로 볼 때 성조(聖朝)에 대한 유감이 없지 않다.
○ 6월 초 3일, 강화도에 위리 안치된 폐 세자가 땅을 파고 울타리 바깥으로 도망쳐 나왔다가 순라군졸에게 발각되었다. 이때 연평군 이귀는 도헌(都憲), 이준(李埈)은 집의, 심기원ㆍ김자점은 지평, 윤황(尹惶)은 사간, 김상(金尙)은 정언으로 있었는데, 연평군과 김자점ㆍ심기원은 법대로 처벌할 것을 주장했고, 윤황ㆍ이준ㆍ김상은 전은(全恩)을 주장했다. 이날 이준은 철원 부사로, 윤황은 삭녕 군수(朔寧郡守)로, 김상은 은계 찰방(銀溪察訪)으로 각각 보냈으며, 폐 세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였다. 폐빈 박씨는 이보다 먼저 목을 매어 죽었으며, 폐비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은 이해 가을 스스로 굶어 죽었다.
폐 세자가 울타리 밖으로 나올 때, 그의 소매 속에서 편지 하나가 나왔는데 이는 곧 황해 감사에게 발송하려는 것이었다. 황해 감사 이명(李溟)을 잡아다가 문초하였는데, 연평군의 적극적인 구원으로 곧 석방되었다.
○ 홍제원(弘濟院)에서 진영을 짤 때에 멀리서 온 군졸들은 그 대부분이 유생들과 일정한 직업이 없는 잡탕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웃고 떠들고 소란을 피워 제대로 통솔되지 못하였다. 이때 역적이 된 이괄(李适)이 북병사(北兵使)가 되어 아직 왕께 하직 인사를 드리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 있는데, 김명숙(金明叔)의 부름을 받고 군관들을 거느리고 진중으로 나왔다. 대장은 무신 중에 대장 직을 맡길 만한 사람은 이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 그를 대장에 추존하고 곧 승상(繩床)에 앉힌 뒤 양 대장 이하 모두 그에게 재배하니, 그때서야 군중은 엄숙한 기율이 서는 듯하였다.
뒤에 반정의 공을 논함에 있어, 이흥립(李興立)을 도감대장(都監大將)으로써 내응(內應)한 공이 많다고 하여, 1등 훈(勳)에 기록, 공조 판서를 제수했는데, 이괄의 이름은 3등 훈에 기록 판윤(判尹)을 제수하였으므로, 그는 마음에 원망을 품고 역모의 뜻을 몰래 쌓아오던 중, 마침 조정은 평안남도 국경을 칠 양으로 장만(張晩)을 도원수로 삼아 평양에 주둔케 했으며, 이괄로 부원수 겸 평안도 병사를 삼아 영변(寧邊)에 주둔하게 하였다. 그는 이때 정병 2만을 요청하므로, 조정은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충청ㆍ경상ㆍ전라의 군사에서 뽑아 보내 주었다. 이때 유몽인(柳夢寅)ㆍ이유림(李有林)ㆍ황현(黃鉉) 등이 모역죄로 처형된 뒤라서 도성 안에는 많은 변괴가 있었기 때문에 도감 장관 중 성안에서 사는 이가 거의 10여 가에 이르렀는데, 대장이 영을 순식간에 각 집에 전달한다면 그것은 곧 군병을 일으켜 궁궐을 범하는 일이다. 이것으로 하여 인심이 뒤숭숭해서 아무도 그 전말을 예측할 수 없었다.
○ 갑자년(1624, 인조 2) 정월. 문회(文晦)ㆍ우(李祐) 등이 고변하기를, ‘이괄과 그 아들 이전(李荃)은 모역할 기미가 뚜렷이 있다’고 하자, 승평(昇平 김유(金瑬)) 이하는 무고(誣告)로 여기고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연평군만이 탑전에서 아뢰기를,
“사실이든 거짓이든 고변이 일단 들어 왔으니, 이괄을 체포하여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은 연평에게 이르기를,
“이괄이 어찌 모역할 리가 있겠느냐? 체포하여 국문하자는 이귀의 계청(啓請)을 나는 괴이쩍게 여긴다.”
하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모두 연평의 계청을 그릇된 것으로 여겼는데 문회와 이우 등의 고변이 또한 의심이 없는 듯하므로 금부도사 심대림(沈大臨)과 선전관을 영변(寧邊)에 보내서 이전을 나문(拿問)하게 하였다. 이들이 안주(安州)에 도착하자 그 소식이 벌써 병영에 알려졌다. 이때 이괄은 한명련(韓明璉)명련은 이때 귀성(龜城) 순변사로 있었음에게 공문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군병을 일으켜 급히 자산(慈山)으로 출병케 하고, 자기와 합세해서 서울로 들어가려는 계책을 꾸미는 한편, 관하 여러 장수들을 모아서 아문 바깥에서 군병의 위엄을 보이고 있었다. 도사와 선전관이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이괄은 이들을 잡아 뜰 안으로 끌어들여 칼로 난도질하여 불 속에 던진 다음, 항복해 온 왜병 수백 명으로 선봉을 삼아 그날로 행군하였다. 이들이 안주(安州)를 거치지 않고 자산 길을 택한 것은 그때 도원수가 기성(箕城)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성(山城)에 진을 친 이들은 한명련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때 별장 유순무(柳舜懋) 등 4인은 각기 수백 명씩 인솔하고 밤을 타 도망하여 곧장 원수부(元帥府)로 가서 죄를 내리기를 기다리니, 원수는 믿어 의심치 않고 전날보다 더 낫게 대해 주었다. 명련이 자산에 이르자, 이괄의 군대는 그 위세를 더욱 떨쳤다. 삼남에서 선발한 군병과 본도의 군병이 모두 이괄의 휘하에 들어갔는데, 도원수는 군병 없는 장수로서 다만 남이흥(南以興)과 정충신(鄭忠信)이 인솔하는 군병 수천 명만을 이끌고 적진 뒤에서 서서히 행군하여 황해도 경계로 들어왔다. 아군은 신교(薪橋)에서 크게 패하고 평산(平山)의 저탄(猪灘)에 이르러, 방어사 이중로(李重老)와 평산 부사 이확(李廓)은 역시 적에게 패했다. 이중로는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고 이확은 쌓인 시체 속에서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적병은 곧장 임진강까지 이르는데 마치 무인지경을 들어가듯 하였다.
○ 2월 초 8일. 대가(大駕)는 남으로 옮겼으며, 초 10일 적병은 서울에 입성, 경복궁 옛터에 진을 쳤다. 흥안군(興安君)은 일찍이 이괄의 추대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왕을 뒤따르지 않고 뒤에 처져 서울에 남아 있었다. 이괄은 군병으로 그 궁을 호위하는 한편 거리에 방을 붙여, 성 안 백성들로 하여금 각기 본업에 종사케 하였으며, 또한 성 안에 남아있는 친구들을 불러들여 백관을 배치하여 조정의 형태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동안 세력을 잃었던 사람과 무뢰한들이 잇따라 모여들어 그 수조차 알 수 없었다.
○ 11일. 원수(元帥)는 제장들을 독려, 합전함으로써 마지막 승부를 결정하는데, 남병사(南兵使) 이수일(李守一)ㆍ황해 병사 변흡(邊潝)ㆍ안주 목사 정충신(鄭忠信)ㆍ철산 부사(鐵山府使) 민여검(閔汝儉)ㆍ중군(中軍) 남이흥(南以興)ㆍ별장 유효걸(柳孝傑)과 조시준(趙時俊)ㆍ첨사 이경정(李慶貞) 등이 각기 부하를 거느리고 길마봉 위에 결진, 성 안을 굽어보았으며, 종사관 김기종(金起宗)은 여기저기 왕래하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때 이괄은 저 한신(韓信)이 조(趙) 나라를 칠 때 한 것처럼 군중에 영을 내리기를 ‘적을 섬멸한 뒤에 모여서 밥을 먹자’ 하고, 군사를 내몰아 싸웠다. 그리고 성중 사람들로 하여금 성에 올라 이를 구경하게 하였다. 싸움이 어울린 얼마 뒤 항복한 왜병이 올려보고 쏘는 조총의 화약 연기가 서풍에 날려 자욱한 안개처럼 진중을 가로 덮었다. 그러자 적병들은 눈을 뜰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어, 질서를 잃고 갈팡질팡 방향을 잡지 못하였다. 이를 틈탄 아군은 용기 백배, 총과 활과 돌을 비 오듯 퍼부으니 적은 이를 지탱하지 못해 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성 위에서 관전하던 백성들이 성문을 굳세 닫고 소굴을 소탕하니, 이괄은 항복한 왜병과 친신군관(親信軍官) 얼마만을 거느리고 그길로 삼전포(三田浦)를 건너 이천(利川) 꽃고개로 달려갔다. 그는 마을로 들어가 말도 먹이고 밥도 짓다가 그날밤 군관 이수백(李守白)ㆍ기익헌(奇益獻)에게 참수되어 머리는 행재소(行在所)에 전달되었고,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은 말을 타고 탈주, 오랑캐 땅으로 잠입하였다.
○ 대가(大駕)는 금강을 건너서 공주(公州)에 머물다가 5일 만에 환도하였다. 신경진(申景禛)과 심기원(沈器遠)은 흥안군을 마음대로 죽였다는 죄목으로 수일 동안 갇혔다가 파직 방송되었다.
○ 당초에 금부도사의 장살(戕殺) 장계가 올라오던 날 밤, 그 진위 여부를 변별하지 못한 탓으로 39인이 일시에 참살되었으니, 이는 천고에 일찍이 없었던 변고로 나라의 명맥이 그때 벌써 상했던 것이다. 원통하고 억울함을 이루 다 말하겠는가?
○ 정묘년(1627, 인조 5) 정월. 북쪽 오랑캐 8만여 기가 밤에 의주(義州)를 습격해 왔는데, 이는 강홍립(姜弘立)이 인도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한윤이 오랑캐 땅으로 도망해서 강홍립을 격분시키기를,
“반정 후에 강씨 일문은 모조리 살육되었다.”
하니, 강홍립이 격분하여 오랑캐 추장을 권하여 군사를 일으켜 앞장서서 이들을 인도한 것인데, 강홍립이 거느린 적병 또한 뛰어난 정예 군병이었다. 강홍립 강홍립은 전에 원수로 있을 적에 자봇 민심을 얻었던 탓으로 평안도 백성들은 강홍립이 선봉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싸움도 않고 항복하였다.
의주의 함락은 뜻밖이었으므로, 부윤 이완(李莞)ㆍ판관 최몽량(崔夢亮)의 패전이나 인산첨사(麟山僉使) 김제정(金濟鼎)의 죽음은 괴이할 게 없는 듯하나, 능한(綾漢) 산성의 궤멸, 안주의 패배는 강홍립이 꾀인 소치가 반드시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강홍립은 포로된 김진(金搢)을 통해서 숙부와 형이 생존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비로소 자기가 한윤이 꾀임에 넘어갔음을 알았다고 한다.
○ 정주 목사(定州牧使) 김진은 능한산성에 있다가 적에게 포로 되었고, 평안 병사 남이흥과 안주 목사 김전(金悛)ㆍ영유 현령(永柔縣令) 송도남(宋圖南) 등은 모두 안주로 들어가 성 머리에서 싸움을 독려하다가 성공치 못할 것을 알고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 적병이 승승장구하자, 평안 감사 윤훤(尹暄)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황해 병사 정호서(丁好恕)는 황주성을 포기하였다. 적기(賊騎)가 이미 평산(平山)에 이르니 대가는 강도로 행차하는 한편,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을 보내서 강홍립을 중개로, 강화를 청하였다. 적이 왕자를 인질로 요구하자, 원창군(元昌君)을 왕제(王弟)로 삼고 이홍망(李弘望)을 사신으로 하여, 적의 진영에 보내니 적은 크게 기뻐하여 용골대(龍骨大)ㆍ유덕(劉德) 등을 보내 와서 어전에서 삽혈(歃血)하고 형제 됨을 약속, 하늘을 가리켜 맹세한 뒤 돌아갔다.
○ 이홍망 등이 심양(瀋陽)에 들어가니 적의 추장은 특별히 우대한 뒤 예를 갖춰 돌려보내 왔으며, 이로부터 호국(胡國)의 사신이 뻔질나게 오가고, 주화(主和)ㆍ척화(斥和)의 논란이 다시 일어 조정은 서로 옥신각신하였다. 오늘날의 일은 남송(南宋) 때의 일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이른바 강화를 주장하는 측의 의도는,
“우리의 세력은 약하디 약하여 쇠잔한 병기와 조각난 갑옷으로 곳곳에서 패했다. 종묘사직은 섬에 붙어 있고 만백성들은 모조리 어육(魚肉)이 되었다. 게다가 적의 기병들은 벌써 도성을 육박했는데 저 종택(宗澤)악비(岳飛)한세충(韓世忠)유기(劉錡) 등과 같은 명장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앉아서 죽기보다는 차라리 우선 화친을 허락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단 물러나게 한 뒤에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를 훈련시켜 병력이 조금 강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함이 불가할 것이 없다.”
는 것이다. 이들은 저 왕황(汪黃)진회(秦檜) 등이 어버이를 잊고 원수를 섬겨 국토 회복의 대책을 저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른바 화친을 반대하는 자들의 의도는,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지국으로써 2백 년 동안 명나라를 아버지로 섬겨왔다. 노적(奴賊)은 천조에게 더없는 큰 원수이니, 천조에게 더없는 원수이고 보면, 우리나라에 또한 불공대천의 원수다. 이 불공대천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어 어전(御前)에서 삽혈하였으니,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이러한 욕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
는 것이다. 이들은 그 의논이 당당하고 늠름함이 추상같아서, 저 호담암(胡澹菴)진동(陣東)구양철(毆陽澈) 의 상소에 비해 조금도 못할 것이 없지만, 나라 형편이 어떠함은 알지 못하고 다만 비분강개한 마음만을 품었으니, 한낱 처사(處士)의 큰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10월, 횡성(橫城)의 이인거(李仁居)가 모반, 군사를 모아 충청도로 향하려 했다. 전의현(全義縣)까지 이르렀단 말이 전해지더니, 다시 조금 후에 들리기를 벌써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처형되었다 한다. 이인거는 전 교리 이추(李樞)의 손자로, 젊을 적부터 횡성에 은거하면서 처자와 함께 직접 농사짓기에 힘쓰며 자기의 명성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아 옛 은자(隱者)의 풍이 있었다. 반정 후에 조정이 그에게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을 특별 제수하였는데도 그는 사직소를 올리고 그 직에 나아가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의 절개를 더욱 높게 보고 그의 얼굴을 한 번 보기를 원하였다. 이즈음에 조정이 노적과 더불어 강화했다는 말을 듣고 그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임금 측근의 악을 맑힌다는 명목을 세워 바쁘게 마을로 뛰어다니면서 군인을 모집하기도 하고 때론 관가에 들어가 무기를 빌리기도 하였다. 그가 팔을 걷고 큰소리를 치면 노한 기운이 얼굴에 가득하여 그 당황하고 급급한 모양을 만약 옆 사람에게 보게 한다면 경악할 뿐,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횡성 현감 이탁남(李擢男)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서 곧 원주로 달려가 이를 보고하니 목사 홍보(洪)는 이인거 부자를 체포, 서울로 보내어 모두 형을 받게 하였다.
대개 홍보와 이탁남 등이 역전 끝에 그들을 체포했다는 설도 극히 우습기는 하지만, 설사 고요(皐陶)가 법을 집행한다 하더라도 인거의 죄는 반역이란 이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임금 측근의 악을 맑힌다고 한 자로 전에 이미 왕돈(王敦)환온(桓溫) 등의 무리가 있지 않았는가? 왕돈ㆍ환온은 군왕의 나라를 찬탈한다는 말을 차마 못해서 군왕의 측근을 맑힌다고 명목을 세운 것이니, 역적 치고는 심한 자이다. 이인거의 마음은 처음부터 역모에 뜻을 둔 것은 아니나, 임금 측근의 악을 맑힌다는 것이 곧 역모가 된다는 것을 몰랐으니, 곧 이치를 밝게 살피지 못한 해독이 결국 이러한 극단에까지 이른 것이다. 수십 년을 산중에 은거하면서 읽은 것이 무엇이며, 궁구한 것이 어떤 이치란 말인가?
○ 무진년(1628, 인조 6) 정월. 전 승지 유효립(柳孝立)은 전 세마(洗馬) 허유(許逌)ㆍ전 좌랑 정심(鄭沁)ㆍ전 전적 김탁(金鐸)ㆍ진사 유두립(柳斗立) 등 수십 인과 함께 반역을 모의하여 도감 장관(都監將官) 윤계륜(尹繼倫) 등과 남몰래 결탁 내응을 삼고, 초 3일에 거사하려 했다. 그런데 정랑 허적(許)ㆍ참판 홍서봉(洪瑞鳳)ㆍ유학 최산휘(崔山輝) 등의 고발로 관리 등이 에워싸고 그들을 체포할 때 수레에 무기를 싣고 입성하는 10여 명도 함께 잡았다. 국청을 설치하고 국문하여 모두 처형하였으며, 고발자 들은 공훈이 기록되었다.
○ 을축년(1625). 박홍구(樸弘耈)의 아들 박지장(朴知章)과 그 조카 박성장(朴成章)ㆍ박윤장(朴潤章) 등이 진술한 초사에 그 역모의 형태가 낭자하였으나 이들(유효립 등)만큼 흉악 처참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당인 임취정(任就正) 부자(父子)는 꿋꿋하게 참고 유효립과 함께 모역한 실상을 승복하지 않았으나 그의 조카의 고함에는 숨길 수 없어 끝내는 곤장 밑에서 죽었으니, 그들에게 다행이다. 그리고 평소 그의 집에 드나든 이종충(李從忠)ㆍ윤홍선(尹弘先)등도 역시 모두 죄를 인정하고 죽었다. 이들은 모두 임취정과 함께 공모한 자들이었다.
○ 정축년(1637, 인조 15)정월. 윤운구(尹雲衢)의 억울한 죽음은 송광유(宋匡裕)의 무고에서 연유되었는데, 찰방 조존중(趙存中)은 소를 올려 사실을 말하여 구원하다가 도리어 죄를 얻은 자다. 이러한 일은 근자에 드문 일로서 이미 윤운구가 무고하게 죽는 것을 보고도 자기의 몸은 돌아보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소를 올려 그와 더불어함께 죽음에 나아가고자 하였으니, 이쯤 되면 죽음으로써 벗에게 허락한다는 의리에 조금도 부끄러울 게 없다고 하겠다. 어떤 이는 ‘양숙(養叔 조존중의 자)의 이러한 행동은 윤운구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을 뿐더러 자신에게 해가 있는 일이니만치, 맨손으로 범을 잡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지만, 이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옛적 동경당인(東京黨人)으로 죽은 이들이 모두가 천하의 명현(名賢)들이었기 때문에 도요장군(度遼將軍) 황보규(皇甫規)는 서주(西州)의 호걸로서 그들에게 끼이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곧 소를 올려 함께 죽기를 자청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정은 그의 죄를 묻지 않았고, 후세 사람은 잘못이라 아니하였다. 오늘의 양숙은 황보규보다 한층 더하다. 평생 죽음으로 서로 허락한 친우가 남의 모함에 걸려 역적의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을 받고 있으니, 남은 목숨이 지기 전에 행여 임금의 마음을 돌이킬까 하고 소를 올려 구원을 펴보는 것이 이렇듯 급한데, 어느 겨를에 자신의 보존을 돌보겠는가? 그러다가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와 한 몽둥이 밑에 달갑게 죽을지언정 혼자 세상에 살아 있지 않겠다는 것이 곧 그의 뜻이었다. 아! 양숙의 기절(氣節)이야말로 전국 시대에서조차 흔히 볼 수 없는 의로운 사람이라 하겠다.
○ 경오년(1630, 인조 8). 목릉(穆陵 선조의 능)을 이장한 것은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서 비롯되어 여러 술사(術士)들의 황당한 논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목릉의 재궁(梓宮 임금의 관)에 물이 침범했다는 말이 이미 임금에게 들리게 되었으니, 능지를 옮겨 잡는 것을 어찌 말겠는가? 현궁(玄宮 광중)을 파본 결과 흙은 여전히 건조한 채 물기가 젖어든 기미라곤 보이지 않았으니, 그 뒤 술사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 유흥치(劉興治)가 가도(椵島)의 난을 일으킬 때, 명목은 모 도독(毛都督)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자기의 부귀를 위함이었으니, 천 리 바깥 고도(孤島)에 조정의 호령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심세괴(沈世魁)가 유흥치를 멸하고 대신 그 무리를 통솔했으니, 마치 당 나라의 번진(藩鎭)의 폐해와 유사하였다.
○ 계유년(1633) 여름. 한성부의 못물이 며칠 동안 피처럼 붉었으며, 7월 17일엔 인정전(仁政殿) 안의 기둥이 벼락을 맞은 데가 두세 곳이었다.
○ 을해년(1635) 7월 13일. 비바람이 크게 일어 나무가 꺾어지고 집이 무너졌으며 막 패어난 벼이삭이 거의 말라 죽었다. 목릉(穆陵)의 석물은 바닥에 넘어지고 축대는 무너져서 흡사 파헤친 모양과 같았으며, 건원릉(健元陵 태조의 능)의 수백 년 묵은 교목(喬木)에 벼락이 떨어졌다. 홍서봉(洪瑞鳳)은 예조 판서로서 직접 목릉에 가서 살펴본 뒤 돌아와서 아뢰기를,
“능위가 무너진 것은 곧 비바람에 의해 무너진 것이요 결코 벼락에 맞은 것이 아니옵니다.”
하고, 그때 오정승(오윤겸 (吳允謙))은 영의정으로 있었는데, 역시 살펴보고 돌아와 아뢴 것이 예조 판서와 동일하고, 참봉의 치보와는 딴판이었다. 때문에 참봉 홍유일(洪有一)은 곧 심문 받고 삭직 추방되었다. 당초에 참봉의 보고는,
“능위에 번개불이 대낮 같고 천둥소리가 밤새껏 끊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튿날 살펴보니 능위와 석물이 앞에 진술한 바와 같기에 사실대로 보고합니다.”
라는 것이었다. 원종(元宗)을 태묘(太廟)에 부(祔)하는 일이 겨우 며칠 밖에 남지 않았는데 영의정의 보고에, 그것은 재변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대례(大禮)를 이미 전에 잡아 놓은 날로 행하였다. 몇 달 뒤 홍서봉은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해 12월 초 9일 인렬왕후(仁烈王
后 인조의 비)는 산후(産後)에 승하하였다.
○ 병자년(1636, 인조 14) 3월. 노적이 천자를 참칭하고 용골대(龍骨大)ㆍ마보대(馬保大) 등을 보내었다. 그들은 청군(淸軍) 백여 명과 몽고 병 수십 기를 인솔하고 와서 인렬왕후의 빈소에 치제(致祭)하고자 하였으니, 그 저의는 황제 됨을 자랑하고 싶은 한편, 우리나라가 저희들을 후히 접대하는 것을 몽고에게 보이려고 함에 있었다. 그들이 입성하자, 조정에서 그들을 대하는 예절이 전에 비해 조금 엷었으므로, 그들은 마음이 자못 불만스러운 참이었는데, 사신을 참하고 문서를 불살라 황제의 참칭을 크게 물리치라는 장령 홍익한(洪翼漢)의 상소와 성균관 유생들의 잇따른 소장은 그들의 마음을 한층 의아하게 하였다. 또 그들은 우리의 군사들이 갑옷을 입고 병기를 휴대한 것이 평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보고 서로 돌아보며 크게 놀랐으며 곧장 시가지로 나가니, 아이들은 부서진 기와를 던지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따라 다니었다. 그들은 도성을 벗어나 흩어져 여염집으로 들어가 말을 빼앗아서 거두어 귀로(歸路)로 향하였다. 조정은 그들의 오감에 대해서 방임한 채 다시 묻지 않았다.
한편 위에서는 8도에 유지를 내려 화친을 통렬히 배척하는 뜻을 보였는데, 평안도로 보낸 유지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그들은 그것으로 실증을 삼아 우리나라가 약속을 배신했다고 하여 강물이 얼기만을 고대하였다. 그런데 우리 조정은 이러한 적의 실정도 염탐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변방의 일을 일체 도외시하였다.
○ 11월, 조정은 박노(朴)를 심양(瀋陽)에 보내서 기미책(羈縻策)을 쓰려 하였는데, 이미 그들은 군병을 동원한 뒤였으니, 어찌 이를 막을 수 있었으랴? 박노가 겨우 황주(黃州)에 이르렀을 때 적병들이 벌써 육박해 왔으므로 그는 한 마디 말도 붙여보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14일 벌써 용골대와 마보대가 거느린 수백의 기병은 사현(沙峴 모래내)에 도착했다. 대가(大駕)가 강화로 옮기기 위해 남대문에 채 이르기도 전에 적병이 사현에 있다는 말이 또 들려왔으므로 최명길ㆍ이경직(李景稷)ㆍ신경진(申景禛) 등을 보내어 다시 화친을 요구하였다. 용골대ㆍ마보대 등은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 깊숙이 들어와 화친을 성언(聲言)하였으나 사실은 후원 부대가 이르기 전에 우리의 전투계획을 그르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대가는 수구문(水口門)을 벗어나 겨우 남한산성에 이르렀는데, 이날 아침 일찍이 종묘 사직의 신주와 빈전(嬪殿)은 벌써 강화로 떠났고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平大君), 원임영돈령부사 윤방(尹昉), 영중추부사 김상용(金尙容), 판서 강석기(姜碩期), 판서 이상길(李尙吉), 회은군 덕인(懷恩君德仁), 해숭위(海崇尉 선조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의 남편) 윤신지(尹新之),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 판윤 김경징(金慶徵), 참판 이민구(李敏求)ㆍ여이징(呂爾徵), 승지 한흥일(韓興一), 필선 정백형(鄭百亨)ㆍ윤전(尹銓), 봉상시 정 이시직(李時稷), 익위사 강위빙(姜渭聘), 사복시 주부 송시영(宋時瑩) 등이 그뒤를 따랐다.
체찰사 김유(金瑬)는 그의 아들 김경징으로 검찰사(檢察使)를, 이민구(李敏求)로 부사(副使)를 삼아 강도(江都)의 사무를 주관케 하고, 유수(留守) 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게 하였다.
한편 남한산성에 미처 호종하지 못한 이는 예조 판서 조익(趙翼), 전 참의 심지원(沈之源)ㆍ홍명형(洪命亨), 돈령부 도정 심현(沈誢), 전 장령 송국택(宋國澤)ㆍ이강(李綱), 전 병사 정호서(丁好恕), 부사 한언(韓琂), 전 승지 유성증(兪省曾), 좌랑 유황(兪榥), 교리 윤명은(尹鳴殷)ㆍ박종부(朴宗阜), 좌랑 이행진(李行進), 정자 정태제(鄭泰齊)ㆍ윤양(尹瀁), 전 정자 조희진(趙希進), 현감 윤훈거(尹勛擧), 감찰 최지위(崔地緯)ㆍ이선(李䆄)ㆍ홍처준(洪處俊), 찰방 정언원(丁彦瑗)ㆍ이경선(李慶先)ㆍ전 도사 이공익(李公益)ㆍ이관(李瓘), 전 세마 허국(許國), 직장 심억(沈檍), 현감 윤효생(尹孝生)ㆍ권익경(權益慶), 군수 이돈오(李惇五)ㆍ 윤탄(尹坦), 주부 고진민(高振民), 첨지 이무림(李武林), 전 승지 최유연(崔有淵), 전 정랑 심척(沈惕), 좌랑 임선백(任善伯), 첨지 최보남(崔輔男), 참봉 최노(崔櫓), 전 수사 민인길(閔仁佶), 현령 윤복원(尹復元), 도사 윤인연(尹仁衍), 감역 권억(權嶷), 선성수(宣城守), 위성령(渭城令), 우참찬 박동선(朴東善), 전 참의 이명한(李明漢), 전 승지 이소한(李昭漢), 전 교리 이일상(李一相), 전 정자 이가상(李嘉相), 좌랑 신휼(申恤), 주서 임전(林), 전 도사 이시필(李時苾), 봉사(奉事) 한진하(韓振夏), 종묘 직장 여이홍(呂爾弘), 현령 민광훈(閔光勳), 봉사 지봉수(池鳳壽), 사직 참봉 이진행(李振行), 현감 채충원(蔡忠元), 개성 도사 홍정(洪霆), 수릉관(守陵官) 홍보(洪), 참봉 홍주명(洪柱溟)ㆍ홍주언(洪柱彦)ㆍ이영(李翎)ㆍ조시량(趙時亮), 전 수찬 김설(金卨), 전 익찬 김향(金嚮), 첨정 조척(曹倜), 풍덕 군수 이성연(李聖淵), 고양 군수 권훈(權勛), 교하 현감(交河縣監) 강문성(姜文星), 교리 심동귀(沈東龜), 전 목사 이영식(李永式), 연계령(連溪令)ㆍ낙양령(洛陽令), 전 세마 신익륭(申益隆), 감목관 심핍(沈愊), 전 감찰 이장영(李長英), 정자 이정영(李正英), 경기 도사 목행선(睦行善), 현령 박창(朴敞), 참군 윤강(尹), 참봉 신광일(申光一), 전 창방 안철명(安哲命) 등이었고, 나머지 생원ㆍ진사ㆍ유학ㆍ무신과 전에 삼의사(三醫司)에 벼슬하던 이와 금군(禁軍) 등은 종사(宗社)와 빈전(嬪殿)이 계신다 하여 모두 강화도로 들어갔다.
○ 15일. 적병의 선봉이 남한산성 밑에 진을 쳤는데, 잇따라 들어오는 자가 10만에 달했다.
애석하도다. 용골대와 마보대가 거느렸던 군사는 수백에 불과했으며, 밤낮 2천여 리를 달려온 나머지 추위와 굶주림이 극에 달했었다. 이때 우리는 도감의 포수(砲手)가 4천여 명이요, 어영군(御營軍) 또한 수천 명이었으니, 이 중에 정병 1~2천 명만 뽑더라도 지칠 대로 지친 적의 선봉 수백 명 꺾기는 썩은 나뭇가지 꺾듯 쉬웠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뒤에 도착한 적의 후원 병 들이 어찌 이처럼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겠는가? 묘당에는 이런 계획을 낸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산성은 두 달 동안 포위되었다가 끝내는 임금을 적들에게 내주었으며, 허다한 생령들이 모두 어육이 되었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닌가?
○ 정축년(1637, 인조 15) 정월, 적중에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 강화도로 도망해 와서 다들 말하기를,
“서울에 있는 노적들이 열 명쯤 태울 만한 나룻배 백여 척을 독촉하여 만든다.”
하니, 장신(張紳)은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노적이 아무리 사납다고 하지만 어찌 육지에서 배를 띄우겠는가? 한강에 얼음이 풀린 뒤에 적선이 만약 강을 따라 온다면 우리는 전선(戰船)을 가지고 낱낱이 깨뜨려 침몰시킬 것이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그런데 나룻배가 통할만한 곳은 갑곶(甲串)ㆍ광성(廣城)ㆍ연미정(燕尾亭)ㆍ승천부(昇天府) 네 나루뿐이요, 그 나머지는 물길이 험악하여 쉽사리 배를 띄울 수 없으며, 또 연미정ㆍ승천부ㆍ광성은 서로의 거리가 거의 10리나 되기 때문에 배를 띄우기가 또한 편리하지 못하였다. 갑진(甲津)은 나룻길이 매우 좁아 일위(一葦)로도 건널 수 있을 정도인데 나룻머리 의심스러운 곳 한 군데도 방비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호적 수십 기가 강 언덕에 달려오곤 한 것은 이곳 지형의 사정을 살피는 것이었는데, 강도의 제장들은 전혀 이를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저 ‘천연적인 참호인 강이 여기 있는데 북쪽 군대가 어떻게 날아서 건너온단 말이냐?’라고 하면서 술에 취해 날을 보내는 이도 있었으므로, 진사 김익겸(金益兼)ㆍ윤선거(尹宣擧) 등은 글을 올려 이를 풍자하였는데, 그 가운데 ‘와신상담할 이때에 술잔이라니[嘗薪在卽 杯盤非詩]’란 말이 있었다.
○ 21일 밤. 통진 현감(通津縣監) 김적(金迪)이 치보하기를,
“노적이 배를 운반해서 갑진(甲津) 건너편에 도착한 자가 대략 수만 기나 됩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본 강화부의 병선은 모두 광성(廣城)에 정박되어 있고, 충청 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거느린 선단(船團)은 연미정(燕尾亭)에 있었기 때문에 갑진에 정박된 배라곤 한 척이 없었으며, 변란에 대비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 22일 새벽. 유수 장신(張紳)이 비로소 수군을 거느리고 배에 올라 갑진으로 향했는데 5 리를 채 못 미쳐서 적군이 홍이포(洪夷砲)를 쏘았다. 거위 알 만한 포탄이 날아와 갑진창(甲津倉) 앞에 떨어지는데 이것에 맞은 사람은 모두 가루가 되었다. 유수가 탄 배가 가리산(加里山) 밑에 정박하자, 뒤따르는 모든 배들은 차례로 정박하고 다시 전진하지 못했다. 강진흔(姜晉昕)의 병선도 맨 선두의 배가 포탄에 맞았으므로 강진흔 또한 겁에 질려 움츠리고 감히 출전하지 못하였다.
정포만호(正浦萬戶)가 화살을 무릅쓰고 배를 띄워서 돌진하는 바람에 적신 한 척이 여기에 부딪혀 강 속으로 침몰하였다. 이쪽의 배 한 척이 포탄에 맞아 부서지자, 만호의 배 단독으로는 감당키 어려워서 우군의 배 속으로 달아났다. 결국 갑진 일대는 적선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는 채 적선 수십 척이 멋대로 오갔다. 적병이 물을 건너와 언덕으로 오른 뒤에야 강화 중군(中軍) 황현남(黃顯男)이 겨우 칡뿌리를 캐러 간 자들을 모집, 천 명이 차지 않은 사람 으로써 장신이 전날에 군졸을 풀어 칡뿌리를 캐러 보냈기 때문 비로소 방어 계획을 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힘이 상대가 되지 못하여 몸이 적의 흉악한 예봉에 죽고 군사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 이에 앞서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ㆍ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ㆍ전 승지 유성증(兪省曾) 등은 모두 소모사(召募使)로 나가 각기 수백 명씩 모집해 돌아와서 강변의 요소를 나누어 수비하였는데, 적병이 상륙했다는 말을 듣자, 아무런 계략이 나지 않아 영을 내려 진을 해산한 후 배를 타고 바다로 들기도 하고 피하여 산으로 오르기도 하였다. 대개 소모사의 본래 의도는 그들이 거느린 유생들은 병기를 알지 못하는 자들인 만큼 목적지를 지키고 있으면서 배에 탄 적들을 올라오지 못하게 할 따름이며, 짧은 도검 따위로 접전하는 일은 응당 마음에 기약한 바가 아니었다. 또 갑진의 수비가 깨진 뒤엔 군진을 해산하는 것이 낫다고 한 것은 곧 오합지졸로 모아진 유생들의 손엔 칼 한 자루가 없으니, 적들과 맞싸우는 것은 곧 산으로 계란을 누르는 형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 검찰사(檢察使) 등은 성중으로 들어오지 않고 강안(江岸)에서 배를 타고 달아났다. 적병의 선봉이 성 안으로 육박하자, 승지 한흥일(韓興一)은 성문을 닫고 성안의 남녀들을 규합, 마치 방어계획이라도 세우려는 듯이 하였으니, 이 얼마나 오활(迂濶)한 일인가? 정예병사와 건장한 무부로서도 천연적인 참호인 강을 지키지 못하였는데, 수백이 채 안 되는 힘없는 남녀들로 태반이나 허무러진 성첩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빈전은 사태가 어쩔 수 없음을 이미 알고 두 살 난 원손(元孫)을 부모(傅母)에게 맡겨 환관 한 명과 함께 성을 나가 멀리 피하도록 하니, 송국택(宋國澤)은 자기가 탄 말을 부모에게 주고 자기는 도보로 수행, 한 척의 배를 겨우 얻어 타고 섬으로 피했다.
○ 우참찬 박동선(朴東善)과 참의 심지원(沈之源)은 동문으로 나가 각기 배를 타고 피했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은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마치 방어를 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때 양 대군 봉림대군과 인평대군과 참의 홍명형(洪命亨)ㆍ경력(經歷) 장우한(張遇漢) 등이 앞에 서 있는데, 김상용은 서문루에 싸움을 독려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며, 양 대군을 서문루로 권하여 보냈다. 그리고 경력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너는 관청의 일을 점검해야 되니, 여기에 있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장우한이 가자, 그는 앞에 놓여 있는 화약궤에 불을 붙이게 하니 남문루는 즉시 공중에 날았다. 홍명형(洪命亨)과 김익겸(金益兼) 등도 이 불길에 싸여 죽었다.
○ 판서 이상길(李尙吉)의 농장이 선원촌(仙源村)에 있었는데, 강화로 천도한 이후 그는 연로하므로 국록을 먹지 못한다고 스스로 농장에 있었다. 그는 중대한 일이 아니면 결코 성 안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적기가 상륙했다는 소문을 듣자, 아들 이경(李坰)을 불러 분부하기를,
“너는 마땅히 소모사(召募使)가 되어서 너의 직분을 다해야 한다. 결코 이 늙은 아비는 생각지 말라. 이 아비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벼슬이 정경(正卿)의 지위에 있었으니, 적이 만약 입성한다면 사직과 죽음을 같이하는 것이 곧 나의 직분이다.”
하고, 가사를 정리한 후 성 안으로 들어가 적을 꾸짖고 죽었다. 적도가 성 밖에 결진하면서 즉시 성 안을 도륙하지 않은 것은 성 안에 정병이 많이 있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부터 그들이 우리의 무방비 상태를 알았던들 무엇을 꺼려서 도륙하지 않았겠는가?
○ 구왕자(九王子)는 곧 통역 정명수(鄭命壽)ㆍ김돌시(金乭屎)를 통해 성 안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성을 나와 강화를 청한다면 그것을 허락하겠노라.”
하므로, 곧 경력 장우한을 시켜 쇠고기와 술을 들려 보내서 구왕자 보기를 요구하니, 구왕자는
“수상이 나와야 들어줄 수 있다.”
하였다. 윤방(尹昉)이 나가니, 그들은 다시,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내일 다시 와야 된다.”
고 하였다. 이튿날 다시 가니, 구왕자는 드디어 윤방을 접견하고 다시 승지 한흥일을 불러 강화의 뜻을 비로소 밝혔으며, 그리고 궐내에 들어와 빈전을 동쪽으로 옮기게 하였다가 조금 후에 다시 서쪽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두 번 한 뒤, 그들은 병사들을 풀어 성 안의 재물과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김반(金槃)의 부인 서씨, 장차주(張次周)의 처 김씨, 정백창(鄭百昌)의 부인 한씨, 김유(金瑬)의 부인 유씨, 장유(張維)의 부인 박씨, 김경징(金慶徵)의 부인 박씨, 정효성(鄭孝誠)의 부인, 윤선거(尹宣擧)의 처, 김진표(金震標)의 처 등이 모두 목을 매어 자결하였고, 강석기(姜碩基)ㆍ장신(張紳)의 부인, 장우한(張遇漢)의 처는 궐내로 들어간 덕분에 겨우 화를 면하였으며, 그 외 나이 젊고 인물이 고운 부인들은 다 붙들려 갔다.
○ 구왕자가 거느린 공(空)과 경(耿), 두 적(賊)의 병사들은 또한 경내에 가득 퍼져 곳곳을 뒤져 여자와 명주 및 보물들은 싹 쓸어가지고 돌아갔다. 시체는 쌓여 들판에 깔리고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 이달(정월) 30일, 구왕자는 우리의 빈전과 양 대군을 위시하여 성 안에 남아 있는 대소신서(大小臣庶)들을 강제로 육지로 내보내 모두 남한산성으로 보내어 이들을 산성 안에 과시, 속히 출성하도록 종용하였다.
○ 강화도 촌사(村舍)에 있던 도정(都正) 심현(沈現)은 적기가 입성했다는 소문을 듣자, 곧 조복을 입고 띠를 맨 후 남한산성을 향해서 네 번 절하고는 부인과 함께 목을 매어 죽었으며, 이시직(李時稷)은 절명사(絶命詞)를 지어 아들에게 보내고 친구 송시영(宋時瑩)과 함께 목을 매어 죽었다. 정백형(鄭百亨)의 죽음 또한 옛 사람에 비해 부끄럼이 없는 죽음이었고, 그 외 심척(沈惕)ㆍ강위빙(姜渭聘)ㆍ이돈오(李惇五)ㆍ윤전(尹烇) 등이 모두 난병(亂兵)들에게 죽었으며, 유생과 부녀자 중 효(孝)와 절개를 위해 죽은 자는 이영(李翎)ㆍ김씨ㆍ오(吳)씨 등으로 일일이 다 들 수가 없다.
○ 남한산성이 포위된 지 두 달, 왕사(王事)에 힘쓴 자를 보면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規)는 진작 군대를 이끌고 대가가 입성한 지 며칠 안 되어서 올라왔으나 진을 채 치기도 전에 적기들이 갑자기 닥쳤으므로 그는 광주의 험천(險川)에서 대패, 겨우 몸만 살아났으며, 병사 이의배(李義培)는 어디로 갔는지 끝내 소식이 없었고,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의 군병은 광주(廣州) 광교산(光交山)에서 자멸하였다. 감사 심연(沈演)은 가장 뒤늦게 출병, 자신이 충주에 앉아서 이천(利川)의 쌍령(雙嶺) 싸움을 감독 격려하였고, 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은 군병이 모두 전멸, 몸마저 보존하지 못했으며, 강원 감사 조정호(趙廷虎)는 춘천과 양평 사이에 진주하여 영장(營將) 권정길(權井吉)을 보내어 검단산(黔丹山) 싸움에서 조그만 승리를 거두었으나 끝내는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다. 남도병사 서우갑(徐右甲)ㆍ북도 병사 이항(李沆)은 지평(砥平)ㆍ양근 사이까지 바싹 진군하였으나 끝내 입성하지는 못했다.
○ 한편 산성에서는 시위(侍衛) 신료들이 모두 항오를 짜서 밤낮으로 성첩을 지켰으나 군량이 거의 떨어져서 형세는 궁색하게 되었다. 게다가 또 강화도가 이미 함락되어 빈전과 양 대군이 성 밑에 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아무런 계책이 나오지 않았다. 제장들 중에는 왕에게 출성을 권하는 자도 있었으나 군사들의 마음이 동요될까 두려워 다만 화친을 내세워 강화를 반대하였던 대간 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을 묶어 적진에 보냈을 뿐이고, 정월 30일에 출성을 결심하였다. 이때 판서 김상헌(金尙憲)과 참판 정온(鄭蘊)은 성을 등지고 일전을 감행 사생을 결판하자고 청하다가 관철되지 않자 목 놓아 울다가 자결하려 했는데, 자제들의 만류로 죽지 못했다. 왕이 출성한 뒤 이들은 각기 영남으로 내려갔다. 이들의 정충대절(精忠大節)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지가 온통 비린내 나는 중에서도 오히려 늠름한 생기를 느끼게 하였으니, 사실 이 두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동방의 2백 년 기강을 누가 붙들었겠는가?
○ 홍익한은 서윤(庶尹)으로서 이때 평양에 있었는데, 전에 장령으로 있을 적에 올린 ‘사신을 참하고 문서를 태우라’는 소장으로 인하여, 역시 심양에 잡혀갔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하는 말이 정기가 있고 당당하여 죽을 자리에 죽을 소원을 가지고 털끝만큼도 꺾이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야말로 세상에 헛되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이를 수 없다.
○ 노적의 두목이 포위를 풀고 돌아갈 때, 동궁전과 빈전, 봉림대군과 부인이 심양에 끌려갔고, 삼공(三公) 육경(六卿)의 자제들 또한 볼모로 끌려갔으며, 나이 젊은 부녀자들은 시녀라는 명목으로 역시 선발되어 갔었다. 그 외 약탈된 남녀들은 매겨진 값을 받고서 놓아주기를 마치 노비를 매매하는 예와 흡사히 하였다. 그 극도로 흉악한 그들의 짓은 도리어 먹이를 훔쳐먹는 개나 쥐와 같았으니, 옛 유요(劉曜)석늑(石勒) 의 죄인이다. 아골타(阿骨打).ㆍ홀필렬(忽必烈) 등을 어찌 만분의 1이나 따르겠는가?
○ 이해 겨울, 용골대ㆍ마보대 두 노적은 칙사랍시고 서울에 왔는데 그 소행을 자세히 살펴보매 참으로 개돼지였다. 그들은 여러 다른 호적들과 함께 여곤(餘捆 무대(舞臺)인 듯하나 미상) 위의 광대놀이를 구경하는데 몸을 기울이고 손을 흔들며 그 모양을 흉내 냈다. 그리고 밥을 먹을 적에 밥상머리에 끄떡거리는 모양과 강제로 기생을 데려다 놓고 상하가 번갈아 간음하는 일은 차마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대할 수 없게 하였다. 금나라ㆍ원 나라 사람이 다 이와 같다면 어떻게 중원(中原)에 들어가 임금이 될 리가 있겠는가?
○ 경진년(1640, 인조 18) 겨울, 호적 용골대는 유석(柳烓)과 이규(李碩)의 계사(啓辭)에서 어떤 논을 듣고는 김상헌(金尙憲)의 이름을 자세히 몰라, 오목도(梧木道)와 함께 와서 용만(龍灣)에 주재하고 척화신(斥和臣) 지사양(至斜陽)을 찾았다. 우리나라엔 본래 사양(斜陽)이란 이름이 없다고 대답해도 될 터인에, 도승지 신득연(申得淵)은 김상헌의 이름을 써서 용골대에게 제시하니, 정(正) 조한영(曹漢英)과 유학 채이항(蔡以恒) 등이 잇따라 그들의 이름을 그 옆에 병서(竝書)하려고 하였다. 이항 등이 다 불리어 북송(北送)되자, 조정에서는 청음(淸陰 김상헌)을 의주로 보내어 용골대에게 넘겨주었다. 청음을 심문하기 위해 용골대 앞으로 끌고 들어가자, 청음은 그의 옆에 비스듬히 누웠다. 용골대가 묻기를,
“너는 무엇을 범했는지 낱낱이 말하라.”
하자 청음은,
“나는 알지 못한다. 만약 쭉 지적해서 말한다면 그에 따라 대답하겠다.”
하였다.
“너의 국왕이 출성(出城)할 적에 너는 어찌해서 따르지 않았느냐?”
“내가 늙고 병들어 걸음을 걸을 수 없으므로 따르지 못했다.”
“직명(職名)을 받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
“나의 노병 때문에 조정은 애당초 나에게 직을 제수하지 않았다. 어떤 직을 제수하였는데 내가 받지 않았다고 하느냐?”
라고 대답한 뒤 다시,
“너희는 어디서 이 말을 들었느냐?”
고 되물었다. 용골대는 말하기를,
“네가 국왕에게 수군을 허락하지 말라고 권유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수군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내가 비록 국왕에게 권했지만, 조정은 내 말을 쓰지 않았다. 이는 군신간에 서로 주고받은 말이거늘, 타국인이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니, 오목도(梧木道) 등은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가장 다루기 힘든 늙은이구나.”
하였다. 청음은 조한영ㆍ채이항 등과 심양에 들어가 각기 별실에 구류되고, 신득연역시 구금되었다.
○ 들은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 정축년(1637) 초여름. 동궁전을 모시고 심양에 갔다가 돌아온 무사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홍서윤(洪庶尹 서윤은 익한(翼漢)의 벼슬)의 생사를 여러 호적들에게 캐어물어 보았더니, 그들은 처음엔 살아있다고 다들 말하다가 다시 은밀히 물으니, 그제 서야 벌써 죽었다고 하면서, 말에 항거했기 때문에 죽였다고 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심양에 갈 적마다 널리 물어보았는데 그때마다 그들의 대답은, 당한(當汗) 이 홍모(洪某)를 묶어 앞에다 놓고 무릎을 꿇게 하였으나 끝까지 끓지 않으므로 한(汗)은 전년에 쓴 척화소(斥和疏)를 내 보이면서,
“내가 어찌해서 황제가 될 수 없느냐?”
하니, 홍모는 말하기를,
“너는 명나라의 역적이거늘, 어찌 황제가 될 수 있단 말이냐?”
하니, 한은 대노하여 곧 칼을 뽑아 참살하였다고 한다.
○ 일설에는, 평양(平壤) 사람 가달(假㺚) 이용길(李龍吉)이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홍서윤을 아직도 정표(旌表)하지 않았느냐…… 그가 죽은 날은 초 5일이다.”
하였다고 한다.
홍서윤이 데리고 갔던 종 무작금(茂作金)은 돌아와서 말하기를,
“28일에 상전(上典)께서는 심양의 한 관소(館所)에 갇혀 있었는데, 호국의 박사관(博士官)ㆍ예부랑(禮部郞) 등이 와서 연회를 차려놓고 통역을 통해 7~8번, ‘황제가 보낸 것이니 먹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면서, 먹기를 십분 권하자, 상전은 답하기를, ‘나는 죄인으로 잡혀온 사람이니,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무례한 음식을 먹겠느냐?' 하고, 끝내 젓가락을 들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은 성이 나서 치워버렸다……"
하고, 또 말하기를,
“25일에 용골대가 와서 연유를 묻는다고 역관을 통해 말하기를, ‘너는 무엇 때문에 들어왔느냐?’ 하니, 상전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척화를 제일 먼저 주장한 대간으로 붙들려 왔다……’ 하매, 용골대는 다시 묻기를, ‘너희 나라엔 조정의 관원들이 많은데 척화를 주장한 자가 어찌 너 한 사람뿐이겠는가?’ 하니, 상전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 비록 이런 지경에 이르렀지만,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다른 사람을 핑계하겠느냐?’ 하였다. 그는 재삼 간청해 묻기를, ‘너 외에 반드시 다른 사람이 있을 터이니, 꺼리지 말고 바로 말하라.’ 하니, 상전이, ‘지난해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갔을 적에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끊자고 청한 이는 다만 나 한 사람뿐이었다'고 대답하자, 용골대는 웃으면서 가버렸다.”
고 하였다.
○ 《북행일기(北行日記)》에 홍익한(洪翼漢)의 기사는 이러하다.
○ 정축년(1637) 2월 12일 밤. 유지(有旨) 안의 사의(事意)에 의하여 도사 전벽(田闢)은 증산 현감(甑山縣監) 변대중(邊大中)을 시켜 나에게 차꼬를 채워 평양 두리도(豆里島)로 압송하고, 거기서 다시 금 나라 한(汗)의 진영으로 보내 그의 명을 듣도록 하였다. 이는 곧 지난해 봄에 있었던 척화의 일 때문이었다. 이날 나는 먹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사정을 말하여 차꼬를 풀어줄 것을 애걸했지만, 대중은 들어주지 않았다. 조금 후에 은산 현감(殷山縣監) 이순민(李舜民)이 찾아와 지극히 위로해 주었다. 내가 말하기를,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천한 이 목숨이야 논할 것이 없소. 내 비록 변변치 못한 사람이지만 어찌 한 번 죽는 것쯤을 두려워하겠소. 더구나 군명(君命)이 계시는데 도망한들 장차 어디로 가겠소. 다만 밥을 먹고 길을 뜨도록 이 묶음이나 늦추어 주면 좋겠소. ”
하니, 이순민은 대중을 애써 권유해서 풀어주게 했다. 식사를 하고 나니, 밤은 2경이 되었다. 강을 건너서 밤새도록 달리니 말이 피곤해서 더 갈 수가 없었다. 드디어 어떤 곳에 멈추고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
○ 13일. 새벽에 죽을 먹고 온종일 먹지 않은 채 말을 달렸다. 밤중에야 숙천(肅川) 지경에 도착, 민가에 들어 말도 쉬이고 잠깐 휴식하였다.
○ 14일. 닭이 울자 일어나서 출발했다. 진시에 안주(安州)에 도착하니, 방어사 이준(李俊)은 금나라 한(汗)이 이곳을 지나 이미 멀어졌으니, 형세가 필시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에게 공문을 보내어 조정에 여쭙게 하고, 인하여 변대 중으로 하여금 압송하여 선천 부사에게 넘겨 의주로 보내게 하였다. 이날 오후 안주를 출발하자, 눈이 많이 내렸다. 판관 김통가(金通可)는 쌀과 약과(藥果)를 보내 노자로 쓰게 했다. 박천군(博川郡) 앞에 이르니, 눈은 더욱 쌓이고 밤은 깊어 길을 잃었는데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인가를 찾아 들어가 잠깐 쉬었다.
○ 15일. 첫닭이 울자마자 길을 떠났다. 주인 늙은이가 가는 사유를 듣더니 재삼 안타까워하면서, ‘공강정(控江亭) 앞으로 해서 빙복(氷腹)을 건너라’고 나에게 길을 일러주었다. 이른 아침에 가산군(嘉山郡)에 달려 들어가니, 군수 이탄(李坦)이 정주(定州)로부터 와 있었다. 말 위에서 이별하면서 잠깐 이야기하고 달려 정주에 이르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말에게 먹이를 먹인 뒤에야 능한성(綾漢城)으로 갔다.
○ 16일. 새벽에 능한성을 떠나 말을 달려 오시엔 선천(宣川)의 검산성(劍山城)에 닿았는데, 여기서 변대중은 나를 인계하고 뒤에 처졌다. 집에 보낼 편지를 써서 그것을 이시□(李時□)에게 전하게 하고 곧 말을 빨리 달려 축시에 의주(義州)의 백마산성(白馬山城) 남문 밖에 당도, 공문을 바치어 내가 온 사유를 알렸다.
○ 17일. 여명에 부윤 임경업은 영을 내려 성문을 열었다. 그는 자리로 나를 맞이한 뒤 말하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리오만, 공의 이번 행차는 참으로 남아다운 일이요, 살아서는 능히 대의(大義)를 붙들었고, 죽어서는 청사를 빛낼 터이니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나의 소장 하나로 말미암아 나랏일이 크게 그르쳐졌으니, 어느 틈에 다른 말을 하겠소.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으니, 제발 서둘러서 군명을 지체하지 않게 해 주시오.”
하니, 부윤은 나의 행자(行資)를 묻고 필요한 모든 것을 일체 갖춰 준 뒤, 곧 나를 압송해 갈 사람을 차출했는데, 그는 곧 미곶 첨사(彌串僉使) 장초(張迢)로 가만리(家萬里) 용천(龍泉) 사람이었다. 이날 오후 나는 의주의 옛 성에 나와서 잤다.
○ 18일. 새벽에 길을 떠나는데 강의 얼음은 아직도 단단했다. 구룡만(九龍灣)에서부터 구련성(九連城)을 지나 금석산(金石山)에서 말을 먹이고 계성(桂城)의 각참(覺站)에서 잤다. 이날 저녁 비와 눈이 섞여 내리므로 나무를 가지고 숙소를 만들어 의지하였다.
○ 19일. 봉황성(鳳凰城)을 지나 송참(松站)에서 잤다. 호인(胡人)이 와서 무슨 사명을 띠고 왔느냐를 묻고 또 안주(安州)의 수군에 관한 일과 섬 안의 일도 물었다. 모른다고 대답하니, 그는 곧 가버렸다.
○ 20일. 통원보(通遠堡)까지는 아직 10리를 못 미쳤는데 찬기가 뼈에까지 사무치므로 한 곳에 멈춰 물을 끓여 먹으려는데 호인 넷이 와서 보고는, 목을 매고 멀리 온 까닭을 물었다. 그 연유를 갖춰 말해주니 그들은,
“공이 무슨 죄가 있소. 심양에 도착하면 한(汗)이 곧 석방해서 돌려보낼 것이오.”
하였다.
저녁에 통원보에 당도하여 잠을 잤다. 이 통원보는 압록강에서 2~3일 거리로 전엔 명나라 땅이었는데 지금은 허허 벌판이 되어 산천이 거칠고 초목이 우거지니, 답답한 깊은 숲에 들리는 것이라곤 오직 새소리와 짐승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우리는 한 곳에 머물러 나무를 얽어 움막을 치고 사초(莎草)를 베어 그 위를 덮었다. 그 춥고 고생스러움은 말하지 아니해도 알리라. 밤이 되자 그곳 수보관(守堡官)이 와서 우리의 오는 목적을 묻더니 곧 심양에 보고하였다. 이때부터 우리의 식사를 그때그때 마련해 주었다.
○ 21일. 통원보에서 길을 떠났다. 눈이 온 뒤에 바람이 크게 일었는데 도중에서 배앓이로 무척 괴로웠다. 억지로 길을 걸어 두건보(斗建堡)에서 잤다.
○ 22일. 천주참(川珠站)에서 잤다.
○ 23일. 옛 요동(遼東) 이괘리(梨掛里)에서 잤다. 어떤 노인이 와서 꼬치꼬치 묻고 갔다.
○ 24일. 사아보(沙阿堡)에서 잤다.
○ 25일. 오전에 심양에 도착했다. 용만(龍灣)을 떠난 후 심양에 닿은 것은 9일 만이다. 짐을 들고 싣고 가는 호인들, 포로 되어 가는 남녀, 우마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가다보니, 한 낙타 등에 짐이 가득 실렸는데, 상서원(尙瑞院) 보가(寶家 어보(御寶)를 간수하는 집)가 얹혀 있었다. 너무도 참담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옆 사람은 남의 속도 모르고 위로할 뿐이다. 지내는 참(站)마다 거의가 중화인 으로서 가달(假㺚)이 된 자이며, 위(位)에 있는 진달(眞㺚) 약간 명이 주장하였다. 중화인 들은 묶여진 나를 보고 그 까닭을 알고 나서 한탄하기를,
“참으로 충신이오. 만약 우리 대명(大明) 천자께서 이를 아신다면 얼마나 격려하겠소. 남아가 이쯤 되고 보면 죽어도 빛이 날 터인데 무엇이 한이겠소. 공은 참으로 충신이오.”
하고, 번갈아 위로해 주었다. 통원보에 도착하던 날, 동궁전과 대군을 한(汗)이 데리고 가더라는 소문을 듣고 의주(義州) 여자 난향(蘭香)에게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오는 동안 이르는 곳마다 물으니, 그렇다고도 하고 모른다고도 했다. 필시 믿을 만한 말 일텐데 의지해 물을 데가 없으니, 그저 참통 할 밖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날 용골대가 와서 연유를 묻고 갔다.
○ 26일.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 27일.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 28일. 한이 박사관ㆍ예부관을 관소(館所)에 보내 주연을 베풀고 문답하였다. 박사관이 농을 걸기를,
“이번 길에 미녀를 얻어 돌아왔소.”
했다. 미녀란 곧 북병사 이항(李沆)의 딸이다.
“그녀는 늘 우리 시아버님을 뵙고 싶다고 말한다.”
하고, 이내 크게 웃었다.
○ 29일.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 3월 초 1일. 소식이 없었다.
○ 초 2일. 초 3일. 소식이 없어 쓸쓸히 앉아 율시 한 수를 읊었다.
양지쪽 언덕에 새싹 돋으니 / 陽坡細草坼新胎
우리 안에 갇힌 새 더욱 서러워 / 孤鳥樊籠意轉哀
초나라 풍습인 답청은 마음에도 없으나 / 荊俗踏靑心外事
금성의 벌주 마심은 꿈속에 아련하다 / 錦城浮白夢中來

바람이 모래를 날리니 음산이 움직이고 / 風飜夜石陰山動
눈이 얼음덩이 속에 들어가니 월굴이 열리네 / 雪入靑澌月窟開
실오리 같은 목숨 굶주리며 겨우 부지했지만 / 飢渴僅能聊縷命
평생 처음 오늘에야 눈물 볼을 적시네 / 百年今日淚盈腮
○ 조선의 누신(累臣) 홍익한은 척화에 대한 뜻을 역력히 피력할 수야 있지마는 피차 말이 전혀 익숙해 있지 못하므로 부득이 글로 쓰노라.
“무릇 천하는 모두가 형제가 될 수는 있지마는, 천하에 두 아버지의 아들은 있을 수 없다. 조선은 본래 예의를 서로 숭상하여 왔으며 간하는 신하는 오직 곧은 절개로써 기풍을 삼았다. 지난해 봄에 나는 마침 대간의 소임을 맡았는데, 금나라가 맹세를 변하여 황제라 참칭하니, 내 생각엔 과연 맹세를 변했다면 이는 패륜의 형제요, 황제를 참칭했다면 이는 두 개의 천자라고 여겨졌다. 한 집안에 어찌 패륜의 형제를 두며, 한 세대 안에 어떻게 두 천자가 있겠느냐? 더구나 금나라는 우리 조선과 새로 교린(交隣)의 약속을 하고서 먼저 그것을 배신했고, 명나라는 조선에 대한 옛 부터 보살펴 주는 은혜를 베풀어 그것을 더욱 깊게 맺고 있는데, 깊은 결속의 은혜를 잊고 먼저 배신하는 공약(空約)을 지키란 말인가? 이는 사리에 매우 합당치가 못하다. 때문에 먼저 이 척화의 의견을 세워서 예의를 지키고자 함은 곧 신하된 자의 직분이요,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다만 신하의 직분이란 충과 효를 다하는 것뿐이거늘, 위에 계신 임금과 어버이를 안전하게 모시지 못하여 왕세자와 대군은 다 포로가 되었고, 노모의 생사는 알 길이 없다. 한 상소의 맹랑한 진술로 말미암아 가정과 나라의 화패(禍敗)를 가져왔으니, 충과 효의 도는 모두 말살되었다. 스스로 나의 죄를 생각하니,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다. 만 번 죽임을 당하더라도 달가운 바이다. 내 피로 북[鼓] 틈을 바르고 내 혼이 하늘로 날아 고국에 돌아간다면 이 얼마나 상쾌하겠는가? 이 밖에 다시 할 말은 없다.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할 뿐이다.”


 

[주D-001]유유정(兪惟正) : 유정의 속성은 임(任)씨인데 저자의 오기인 듯함.
[주D-002]삼성(三省) : 인륜에 관계된 사건을 심문할 때 의정부ㆍ의금부ㆍ사헌부 등 삼성(三省)이 합석하여 죄인을 국문하였다.
[주D-003]사미원(史彌遠)이 …… 고사 : 사미원은 송(宋)의 은(鄞) 땅 사람으로, 자는 동숙(同叔). 개희(開禧 1205~1207) 연간에 한탁주(韓侂冑)가 금(金) 나라와 국교를 틈이 가게 했다고 하여 그를 죽이고 영종(寧宗)이 승하한 뒤에 황태자(皇太子) 횡(竑)을 폐위시키고 대신 이종(理宗)을 세웠음.
[주D-004]전은의 설[全恩之說] : 부자나 동기간 등 가까운 사이에는 설령 죄가 있다 하더라도 생명을 해치지 않음으로써 은혜를 은전히 한다는 설.
[주D-005]소두(疏頭) : 연명으로 소를 올릴 때 맨 첫 머리에 이름이 적힌 주동이 되는 사람.
[주D-006]소하(疏下) : 소두(疏頭)의 의견에 찬성하여 소장에 서명한 자.
[주D-007]정청(庭請) : 세자(世子)나 의정(議政)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전에 이르러 큰일을 계품하던 일.
[주D-008]방납(防納) : 이조 때 공물(貢物)을 대신 바치던 일. 이때 토산물이 아닌 공물이 책정된 경우, 구매하여서라도 이를 상납해야 했음.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취리하는 상인 혹은 아전이 중간이익을 취하기 위해 상납을 막고 대납을 하였는데, 이 때문에 방납이란 말이 생겼음.
[주D-009]개부(開府) : 부서(府署)를 개설하여 요속들을 두는 것을 뜻함. 한(漢) 나라 때는 삼공(三公)만이 개부를 하였는데, 위(魏)ㆍ진(晉) 이후로 많아져서 진(晉)의 양호(羊祜)는 형주 도독(荊州都督)으로서 개부하였음. 그리하여 후세에는 도독을 개부라고 칭함.
[주D-010]한통(韓通)을 …… 전례 : 한통은 후주(後周)의 태원(太原) 사람으로 자는 중달(仲達). 처음 후한(後漢) 고조(高祖)의 군교(軍校)가 되었다. 뒤에 후주 태조(太祖)의 심복이 되어 동평장사(同平章事)까지 되었음. 송 태조(宋太祖)가 천자로 추대되었다는 말을 듣고 변을 처리하기 위하여 돌아오다가 군교 왕언승(王彦昇)에게 살해됨. 뒤에 송 태종(宋太宗)이 그를 포증(褒贈)하였음.
[주D-011]승상(繩床) : 걸상과 비슷한 물건. 장방형의 가죽 조각의 두 끝에 네모진 다리를 대어 접고 펴게 만듦. 높은 벼슬아치가 들려 가지고 다니며 길에서 깔고 앉기도 하고 말 탈 때에 디디기도 함.
[주D-012]종택(宗澤) : 송(宋)의 의오(義烏) 사람으로 자는 여림(汝霖). 부원수(副元帥)로 금(金)을 정벌했는데 싸움마다 이겼음. 시호는 충간(忠簡).
[주D-013]악비(岳飛) : 송(宋)의 탕음(湯陰)으로 자는 붕거(鵬擧). 병법에 두루 정통하고 충성심이 두터워 금 나라의 침입에 하남 북로 초토사(河南北路招討使)로서 누차 격파하였음. 그런데 금과 강화를 주장하는 진회(秦檜)의 모략으로 옥사(獄死)함. 시호는 무목(武穆). 후에 충무(忠武)로 고침.
[주D-014]한세충(韓世忠) : 송(宋)의 연안(延安) 사람, 자는 양신(良臣). 용맹이 뛰어난 장수로 선화(宣和 119~125) 연간에 방랍(方臘)을 쳐서 생포한 것을 비롯하여 고종(高宗) 때는 평구좌장군(平寇左將軍)으로서 묘부(苗傅)ㆍ유정언(劉正彦) 등의 반역을 격멸했고, 올출(兀朮)의 침입에는 군사 8천명으로 1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혁혁한 공훈을 세웠음.
[주D-015]유기(劉錡) : 송대(宋代) 사람으로 자는 신숙(信叔). 고종(高宗) 때 농우도호(隴右都護)로서 하인(夏人)과 싸워 여러 차례 이기므로, 하인들은 아이가 울면 ‘유 도호(劉都護)가 온다’고 했다 함. 그리고 올출(兀朮)과 싸워 10에서 7~8할을 죽였으므로 금군(金軍)은 혼이 빠져 유기의 깃발만 보아도 도망쳤다 함. 시호는 무목(武穆).
[주D-016]왕ㆍ황(汪黃) : 송대의 간신 왕백언(汪伯彦)과 황잠선(黃潛善) 가리킴.
[주D-017]진회(秦檜) : 송(宋)의 강녕(江寧) 사람으로 자는 회지(會之). 정강(靖康 1111~1117) 연간에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휘종(徽宗)ㆍ흠종(欽宗)이 금으로 끌려갈 때 포로 되었다가 돌아온 후 승상에 오름. 그 후 금과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이에 반대하는 충신을 모두 거세함.
[주D-018]호담암(胡澹菴) : 담암은 송대 호전(胡銓)의 호, 자는 방형(邦衡). 건염(建炎 1127~1130) 간에 진사가 되고, 추밀원 편수관(樞密院編修官)에 임명되었는데 왕윤(王倫)ㆍ진회(秦檜)ㆍ손근(孫近) 등 3인의 머리를 끊을 것을 상소하였음. 시호는 충간(忠簡).
[주D-019]진동(陳東) : 송의 단양(丹陽) 사람으로 자는 소양(少陽).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소를 올려 채경(蔡京)ㆍ동관(童貫)ㆍ왕보(王黼)ㆍ이언(李彦)ㆍ양사성(梁師成)ㆍ주면(朱勔) 등 6인을 적(賊)으로 단정, 참수를 요구하고, 그 후 이강(李綱)의 유임과 황잠선(黃潛善)ㆍ왕백언(汪伯彦)의 파직을 계속 요구하다가 고종의 노여움을 얻어 구양철(歐陽澈)과 함께 참수됨. 뒤에 비각 수찬(祕閣修撰)에 추증됨.
[주D-020]구양철(歐陽澈) : 송의 숭인(崇仁) 사람으로 자는 덕명(德明)인데, 천성이 강개하였음. 고종이 즉위하자 그는 도보로 행재소로 달려가 당시 대신의 인사문제에 관해 극구 비난하다가 결국 죽음을 당했다.
[주D-021]왕돈(王敦) : 진대(晉代) 사람으로 자는 처중(處中)인데, 두미(杜弢)의 난을 평정한 후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등의 벼슬에 올라 권력이 비대해지니, 진 원제(晉元帝)는 유외(劉隗)를 끌어들여 중신으로 삼았다. 왕돈은 그를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기병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했다. 뒤에 부관참시 되었음.
[주D-022]환온(桓溫) : 진(晉) 환이(桓彝)의 장자로 자는 원자(元子), 명제(明帝) 때 형주자사(荊州刺史)ㆍ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을 역임했음. 뒤에 제(帝) 혁(奕)을 폐위하고 간문제(簡文帝)를 세웠음.
[주D-023]동경당인(東京黨人) : 동한(東漢) 환제(桓帝) 때 환관(宦官)이 득세하므로 이응(李膺) 등이 미워하여 죽였는데, 환관들이 이를 한하여 조정을 비방한다고 무고하여 이응 등 2백여 명이 종신 금고 되었음. 그 후 영제(靈帝) 때 이응 등이 다시 기용되어 환관을 베려다가 실패하여 모두 피살됨.《後漢書 黨錮傳》
[주D-024]황보규(皇甫規) : 동한의 조나(朝那) 사람으로 자는 위명(威明), 연희(延禧 158~166) 연간에 강인(羌人)을 항복받은 공으로 도요장군에 임명되었음. 그때 동경당사(東京黨事)가 일어나 이응 등 현인들이 형을 받게 되자, 그들의 대열에 끼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겨 자신도 연루됨을 상언(上言)하였음.
[주D-025]유요(劉曜) : 전조(前趙) 사람 유연(劉淵)의 족자(族子), 자는 영명(永明). 일찍부터 고아가 되어 유연에게서 자라났으며, 힘이 뛰어나고 총명했음. 진(晉) 태흥(泰興 318~321) 초에 늑준(勒準)을 적벽(赤壁)에서 격파한 뒤 장안에 도읍, 전조를 세웠으나 주색에 빠져 흥청거리다가 후조(後趙)를 세운 석늑(石勒)에게 멸망당하였음.
[주D-026]석늑(石勒) : 본시 갈(羯)족으로 상당(上黨) 무향(武鄕)에 살았음. 자는 세룡(世龍). 14세에 낙양에 내왕하면서 장사를 하다가 뒤에 도적의 두목이 되어 유연(劉淵)의 부하로 들어갔음. 뒤에 반기를 들고 후조(後趙)를 세운 뒤, 유요(劉曜)를 살해하여 전조를 멸망시켰음. 오호 16국 중에서 가장 그 세력이 강했음.
[주D-027]아골타(阿骨打) : 중국 금(金) 나라 태조, 성은 완안(完顔). 여진(女眞) 출신으로 12세기 초에 여진을 통일하고 1115년에 회령(會寧)에 도읍하여 국호를 대금국(大金國)이라 하였음. 뒤에 다시 군사를 이끌고 송(宋)과 요(遼)를 정복하는 도중 죽었음.
[주D-028]홀필렬(忽必烈) : 몽고의 제5대 가한(可汗) 원 세조(元世祖). 수도를 연경(燕京)에 정하고 송(宋)을 쳐서 통일한 후, 멀리 일본ㆍ중앙아시아ㆍ유럽에 쳐들어가서 사상(史上) 공전의 대제국을 건설함.
[주D-029]당한(當汗) : 당저(當宁)와 비슷한 말로, 한(汗)은 곧 오랑캐 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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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箚) 14수(十四首)
양사(兩司)의 관원을 처치(處置)한 차자 무진년(1628, 인조 6)



삼가 아룁니다. 많은 관원들이 일제히 인혐(引嫌)을 하고 물러났습니다. 허적(許)이 고발한 사실이 홍서봉(洪瑞鳳)을 통해서 드러났고 보면, 허적에게 공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한(漢) 나라 곽우(霍禹) 등이 모반(謀反)했을 적에 남자(男子) 장장(張章)이 먼저 음모를 눈치 채고는 기문(期門) 동충(董忠)에게 말을 하였고, 동충은 좌조(左曹) 양운(楊惲)에게 알렸으며, 양운은 시중(侍中) 김안상(金安上)에게 알렸는데, 이 일로 인하여 장장과 동충 등이 모두 봉후(封侯)의 포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허적이 고변(告變)한 글을 가지고 홍서봉이 조정에 알렸다면, 이 일로 녹훈(錄勳)된다고 해도 안 될 것이 없을 듯하니, 간원(諫院)에서 그를 녹훈해야 마땅하다고 한 것은 별로 잘못한 실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최산휘(崔山輝)가 이수향(李秀香)으로부터 역모(逆謀)에 대한 말을 듣고는 김경(金澃)에게 알리면서 심명세(沈命世)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고 보면, 이것은 실로 장장이 동충에게 말한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고발을 지연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는 만큼 죄줄 만한 일이 없을 듯하니, 이에 대해서 논계(論啓)하지 않은 것 역시 안 될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신하가 역모(逆謀)의 변고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 즉시 고발하지 않았다면 물론 죄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변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중대한 일인 만큼 상세히 살피면서 신중하고 면밀하게 대처하는 것 역시 하나의 방도가 될 수도 있으니, 중하게 죄주기에는 부족할 듯합니다.
홍서봉의 잘못은 단지 공로를 논할 때에 균등하게 하지 못한 점에 있을 뿐이요 고발을 지연시킨 데에는 있지 않을 듯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부(憲府)가 명백하게 드러난 잘못을 논하지는 않고, 중하게 죄를 주기에는 부족한 허물을 논하였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원훈(元勳)이 되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괜찮겠지만, 삭훈(削勳)을 청하기까지 한 것은 과격하게 처리한 듯하니, 일을 논하는 체례(體例)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함을 잃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전후(前後)로 들은 것에 착오가 있었다고 스스로 말했고 보면, 일을 논할 때에 사실대로 하지 못한 잘못 역시 면하기 어렵습니다. 대사간 김상헌(金尙憲) 등은 출사(出仕)하게 하고, 대사헌 정경세(鄭經世) 등은 모두 체차(遞差)를 명하소서. 삼가 전하의 결재를 기다립니다.


 

[주D-001]한(漢) 나라 …… 있었습니다 : 곽우(霍禹)는 대장군 곽광(霍光)의 아들로서, 곽광이 죽은 뒤에 작위를 세습하여 위세를 부리다가, 모친이 허 황후(許皇后)를 독살한 사건이 누설되면서 삭직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는, 황제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즉위할 음모를 꾸몄는데, 선제(宣帝) 지절(地節) 4년에 그 일이 탄로나면서 요참(腰斬)을 당하고 멸족(滅族)되었다. 장장(張章)은 장안(長安) 사람인데, 옛날에 관작(官爵)이 없는 성년 남자를 남자(男子)라고 불렀다. 기문(期門)과 좌조(左曹)는 관직 이름이다. 양운(楊惲)은 사마천(司馬遷)의 외손이다. 김안상(金安上)은 김륜(金倫)의 아들이요 김일제(金日磾)의 조카로서, 젊은 나이에 선제의 총애를 받고 시중이 되었는데 이때에 곽씨(霍氏)의 친속들을 궁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공을 세웠다. 장장, 동충, 양운, 김안상 모두 당시에 공로를 인정받아 각각 박성후(博成侯)와 고창후(高昌侯)와 평통후(平通侯)와 도성후(都成侯)에 봉해졌다. 《漢書 卷68 霍光金日磾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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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箚) 14수(十四首)
최산휘(崔山輝)의 일을 논한 차자



삼가 아룁니다. 최산휘는 먼 지방에서 온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의 유생(儒生)입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 죄를 논하면서 사형시켜야 한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가령 그때에 최산휘가 선하지 못한 사람이라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더라면, 이수향(李秀香)으로부터 흉역(凶逆)에 대한 말을 들었을 적에, 비록 그 패거리 속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우선 가만히 앉아서 성패(成敗)의 결과를 관망하며 자기 부친이 죄적(罪籍)에서 빠져나오게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였을 텐데, 그는 이 사실을 급한 마음으로 곧장 보고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가 마음속으로 자기 부친이 처벌을 받는 것은 국법(國法)으로 볼 때에 당연한 것인 만큼 원망할 수 없다고 여겼으리라는 것과, 오직 종사(宗社)의 화란(禍亂)과 군부(君父)의 환란만을 안타깝게 여겼으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충의(忠義)의 정성이야말로 진신(搢紳)의 인사로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기만 하고 아무런 죄책(罪責)도 받지 않은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백 배나 차이가 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니, 특별히 더 예우하고 은총을 내려서 그의 선행을 표창하는 것이 참으로 온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최산휘가 고발한 역적 모두가 그중에서도 수괴(首魁)요 복심(腹心)들이었고 보면, 그의 공이 또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혹자(或者)는 그가 늦게 고발한 것을 죄로 삼기도 합니다마는, 이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대저 최산휘가 이수향의 말을 들은 것은 인정(人定)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 당시에 야간 통행금지가 매우 엄하게 행해졌으므로 인정이 지난 뒤에는 왕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치는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김경(金澃)에게 달려가서 심명세(沈命世)에게 말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곧바로 알린 것이니, 지연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산휘가 심명세에게 말하게 한 것은 심명세로 하여금 위에 진달하게 할 목적에서였습니다. 한(漢) 나라 때에 장장(張章)과 동충(董忠) 등이 곽우(霍禹)를 고발한 일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심명세가 직접 위에 진달하여야 마땅할 것이요 다시 최산휘에게 직접 고발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혹 늦게 고발했다 하더라도 이것은 바로 심명세가 지연시킨 것이지 최산휘가 지연시킨 것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들은 삼가 최산휘가 잘한 일은 가장 크고 죄로 삼을 것은 하나도 없다고 여기는 바입니다.
최산휘가 상변(上變)한 뒤로 양사(兩司)에서 그의 부친인 최현(崔晛)에게 법대로 치죄(治罪)하기를 청하는 논계(論啓)를 정지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최산휘의 공을 아름답게 여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현은 여전히 육진(六鎭)의 최북단 변경의 땅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대저 최현의 죄를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으로 말하면 비록 사형에 처한다 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니, 유배의 형벌로 처벌한 것만도 정상을 참작해서 용서해 준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최산휘의 공로가 그 부친의 죄를 면하게 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고 보면, 아예 사면해 주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삼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대저 국가에서 공신(功臣)을 대우할 적에 그와 함께 대려(帶礪)의 맹세를 하고 그 내용을 철권(鐵券)에 기록하여 공훈(功勳)의 명호(名號)를 내려 주면서 그의 작위를 높여 주고 그의 집안을 부유하게 해 주는 목적은 그 공로를 특별히 총애하여 영구히 복록을 향유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최산휘의 심정으로 말한다면, 비록 관직을 높여 주고 작록을 후하게 해 주는 것이 신하된 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부친의 죄를 면하게 해 주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산휘를 총애하여 대우해 주는 방도로는 그의 부친을 사면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옛날에 순우의(淳于意)가 죄를 지어 형벌을 받게 되었을 적에 제영(緹縈)의 한마디 말을 듣고 한 문제(漢文帝)가 조서를 내려 육형(肉刑)을 없애도록 하였는데, 지금 최산휘의 공로로 말하면 제영의 한마디 말 정도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법(國法)에 공신의 자손은 용서해 주게 되어 있는데, 심지어는 원종(原從)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은택이 지극히 후하다고 말할 만합니다. 대저 몇 세대가 지난 자손까지도 용서해 주는 은택이 미치는 법인데, 하물며 그의 부친이 용서받을 수 없다면 될 말이겠습니까. 최산휘가 자기 부친을 따라 북행(北行)을 하여 변경 지방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며 혈혈단신으로 외롭게 우거하고 있으니, 이는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우대하는 도리가 아닐 듯싶습니다.
지금 최산휘가 다행히 전하의 은택을 입고 조사(朝士)의 명부에 끼일 수 있게 되었으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최현의 죄를 특별히 사면해 주신 다음에 최산휘를 역마(驛馬)로 불러서 부친과 함께 오도록 해 주소서. 그렇게 하면 최산휘의 부자(父子)가 전하의 은총에 감격한 나머지 목숨을 바치더라도 위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뿐만이 아니라, 보고 듣는 사람들마다 모두 감동하면서, 조정이 선행을 한 사람에게는 이처럼 후하게 대우해 준다는 것과 선행을 하면 그 보답이 자기 어버이에게까지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모두 충의에 힘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신들은 최산휘에 대해서는 얼굴을 서로 알 정도의 연분도 전혀 없습니다만, 참으로 그의 선행이 가상하고 그의 공로가 매우 큰 만큼, 조정에서 그를 대우할 때에는 특별히 후하게 우대하여 사람들의 충의를 권장해야 마땅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혹시라도 그를 평범한 신하로 대우할 경우에는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실망하게 될 것 같은 걱정도 들기에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삼가 전하의 결재를 기다립니다.


 

[주D-001]그의 부친 : 최현(崔晛)이다. 인조 5년(1627)에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있으면서 이인거(李仁居)의 변란을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국문(鞠問)을 받았는데, 최산휘가 영사 공신(寧社功臣)이 되자 죄가 감해져서 종성(鍾城)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사면의 은혜를 받았다.
[주D-002]인정(人定) :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기 위하여 종을 치던 일을 말한다. 저녁 이경(二更)에 28수(宿)를 상징하여 28번 큰 종을 치고 성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오경(五更) 삼점(三點)이 되면 삼십삼천(三十三天)의 뜻으로 33번 쇠북을 치고 통행금지를 풀었는데, 이것을 파루(罷漏)라고 하였다.
[주D-003]한(漢) 나라 …… 일 : 곽우(霍禹)는 대장군 곽광(霍光)의 아들로서, 곽광이 죽은 뒤에 작위를 세습하여 위세를 부리다가, 모친이 허 황후(許皇后)를 독살한 사건이 누설되면서 삭직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는, 황제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즉위할 음모를 꾸몄는데, 선제(宣帝) 지절(地節) 4년에 그 일이 탄로나면서 요참(腰斬)을 당하고 멸족(滅族)되었다. 《漢書 卷68 霍光金日磾傳》
[주D-004]대려(帶礪)의 맹세 : 대려는 허리띠와 숫돌이라는 말로, 공신의 영예를 대대로 누리게 해 주겠다는 뜻인데,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개국 공신들을 책봉하면서 “황하가 변하여 허리띠처럼 되고, 태산이 바뀌어 숫돌처럼 될 때까지, 그대들의 나라가 영원히 존속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도록 할 것을 맹세한다.〔使河如帶 泰山若礪 國家永寧 爰及苗裔〕”라고 말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18 高祖功臣侯者年表》
[주D-005]철권(鐵券) : 옛날에 임금이 공신에게 내려 면죄(免罪) 등의 특권을 누리게 한 증명서를 말하는데, 철제(鐵製)의 계권(契券)에 단사(丹砂)로 썼으므로 보통 단사 철권(丹砂鐵券)이라고 부른다.
[주D-006]순우의(淳于意)가 …… 하였는데 : 제영(緹縈)은 한 문제(漢文帝) 때에 제(齊) 나라 태창령(太倉令)이었던 순우의의 딸이다. 부친이 법에 저촉되어 형벌을 받으러 장안(長安)으로 끌려갈 적에 함께 따라가서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육형을 받은 자는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없는 만큼, 비록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되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할 방도가 없어서 끝내 만회하지 못할 것이니, 제 몸을 바쳐 관청의 노비가 됨으로써 부친이 형벌을 면제받고 다시 새롭게 될 수 있게 하기를 원한다.〔死者不可復生 而刑者不可復續 雖欲改過自新 其道莫由 終不可得 妾願人身爲官婢 以贖父刑罪 使得改行自新也〕”라는 내용으로 간절히 호소하며 소를 올리자, 문제가 이에 감동받은 나머지 형법 조항에서 육형(肉刑)을 없애라는 조서를 내린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05 扁鵲倉公列傳》
[주D-007]원종(原從) :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준말이다. 각 등급에 해당되는 정식의 공신 이외에 작은 공이 있는 사람에게도 주는 등외(等外)의 공신을 말하는데, 원종공신(元從功臣)이라고도 한다.

 

 
병자년(1636, 인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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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25일(병신)

흐림. 안동에 머물렀다. 순찰사 심연이 상주(尙州)에서 만나기를 기약하고 먼저 군관을 보냈기에, 내일로 약속하였다. 내 병이 발작하였다. 청송 부사(靑松府使) 최산휘(崔山輝)가 보러 왔다.

 

 

 
 
 
 
 
 
 


 


 

   낙남공 관련  왕조실록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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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3일 (을축)
죽산에 사는 김진성 등이 전 세마 허유 등의 역모 사실을 고변하다

죽산(竹山)에 사는 김진성(金振聲)·김득성(金得聲)·신서회(申瑞檜)·이두견(李斗堅) 등이 정원에 나아와 상변(上變)하기를,
“본 고을에 사는 전 세마(洗馬) 허유(許逌), 유학(幼學) 허정(許珽)·이우명(李友明), 상놈 허사룡(許士龍)·강무생(姜戊生)·정진(鄭進)·이양(李暘), 진사 안집중(安執中) 등이 군사를 모아 모반하여 이미 한강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내응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도감의 중군(中軍)·천총(千摠)·파총(把摠)과 내관(內官) 배희도(裵希度) 등이고, 괴수는 폐조(廢朝) 때에 승지를 지낸 사람입니다. 4일 대궐을 범하기로 약속하였다고 합니다.”
하고, 유학 최산휘(崔山輝)는 상변하기를,
“의금부의 서리인 이수향(李秀香)이 은밀히 신에게 말하기를 ‘나라에 큰 변이 발생 했다. 제천(堤川)으로 귀양가 있는 유효립(柳孝立)과 원주(原州)에 사는 정심(鄭沁)·정자(鄭洎)·정린(鄭遴) 등이 함께 모의하여 거사하기로 했는데 인성군(仁城君)도 참여하여 알고 있다’고 하기에, 신이 ‘그렇다면 어떤 군대를 쓴다고 하던가?’ 하니, 수향이 ‘훈련 도감의 중군인 이계선(李繼先)이 내응하기로 약속하였고 일선위(一善尉) 김극빈(金克嬪)도 동모했다고 한다.’ 했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과 의금부 당상, 양사의 장관, 좌·우포도 대장을 명초(命招)하여 역당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때 전 사예(司藝) 허적(許)이 죽산에 있었는데 허유 등의 반역을 일으킨 사실을 알고서 자기의 조카인 허선(許選)과 조카 사위인 황진(黃縉)을 시켜서 글을 가지고 가서 홍서봉(洪瑞鳳)·김류(金瑬)에게 고하게 하였다. 황진의 아버지 황성원(黃性元)도 일이 일어난 것을 알고 떠나가기를 재촉하였다. 이렇게 되자 김진성 등이 일이 누설된 것을 알고 고발한 것이다. 그 뒤 허적이 또 소장을 올리기를,
“신의 오촌 조카인 전 봉사(奉事) 허유는 본디 광패스럽다고들 하고, 허유의 누이동생의 아들인 이우명은 본디 어리석고 망령되다고 일컬어졌는데 허유는 죽산에 살았고 이우명은 용인(龍仁)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10월경에 우명이 신에게 와서 ‘근래 큰일의 거사를 모의하고 있다.’고 하기에, 신이 나무라면서 말하기를 ‘네가 도로에서 떠드는 근거없는 말을 들은 것이 아닌가? 함부로 말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런데 12월 그믐께에 이웃에서 허유와 우명이 은밀히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그 내용이 구구했습니다. 어떤 이는 ‘어디 사는 누구와 어디 사는 누구 등이 함께 거사하기로 상의했다.’ 하였습니다만, 그들은 모두 중외(中外)에서 뜻을 얻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어서 그 모의가 실제로는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수원(水原)에 사는 중군이 거사하기로 약속했는데 지난번 체직당하였기 때문에 일이 원만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타도(他道)의 병마(兵馬)들도 많이 모여 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대장(大將)들은 황해도에서 오는데 문관인지 무관인지는 불분명하나 품계가 가선 대부인 자가 들어온다.’고 하였고, 어떤 이는 ‘훈련 도감의 군사들도 모두 모의에 참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도감의 장관(將官) 가운데 이이첨의 친속이 있기 때문에 그 군대로 거사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나인 3, 4인이 함께 모의에 참여하여 음식에 독극물을 넣는 일을 행하려 한다.’ 하고, 어떤 이는 ‘내관 가운데 배씨 성을 가진 자는 곧 폐조 때에 은총을 받던 사람인데 지금도 임금의 측근에 있기 때문에 자객들이 하는 일을 하려 하고 있다.’ 하고, 어떤 이는 ‘수십 명의 무리로 하여금 각기 10여 명씩을 데리고 먼저 대궐문 밖 가까운 곳에 나누어 배치시킨 다음 또 사람을 시켜 각기 40명씩을 데리고 여러 대장들의 집을 나누어 지키게 한다. 그러고 나서 나인과 배씨 성을 가진 환관이 임금을 시해하는 불측한 모의를 시행하면 밖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불을 지르며 공격한다. 그러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런 등등의 말은 모두 허유 등이 다른 사람을 유인하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신은 허유의 절친한 친척으로 거주지도 멀지 않은 것은 물론 집을 잇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도 같은 친속이요 또 친속들의 노비이기 때문에 신을 절친하게 여겨 두려워하지 않았고 따라서 숨기는 것이 없었으므로 날마다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달 초하룻날 허유가 협박하여 꾄 원근의 무리들을 불러 모아서 모두에게 식량을 말[斗]로 되어 지급하면서 ‘초나흗날 새벽녘에 거사할 것이니 내일 출발한다.’고 하였습니다만, 신은 전해 들은 소문이라서 허실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초이튿날 닭울녘에 허유가 과연 10여 인을 데리고 먼저 출발하였으며, 그 다음 10여 인이 뒤이어 출발했고 또 그 다음은 8, 9인이 계속해서 떠났습니다.
신이 처음 그들의 흉모를 듣고는 즉시 달려가 고변하려 했으나 증거가 되는 문서를 얻지 못해서 단서를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감히 고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출발하는 데 이르러서는 일이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으므로 즉시 달려가 고변해야 했습니다만 신은 본디 늙고 병든 몸인 데다가 근래 이질(痢疾)을 앓게 되어 변(便)이 때없이 잦아 먼 길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카 허선과 조카 사위인 전 판관 황진을 시켜 급급히 몇 줄의 글을 써서 주야로 달려가 홍서봉 등 몇몇 곳에 알리게 하였고 전해 들은 일들은 모두 허선과 황진으로 하여금 말로 전달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수원 부사(水原府使)의 군관인 허함(許諴)이 말미를 받아 집에 와 있었으므로 그의 아들 허신에게 내용을 기록한 종이를 전해 주고 급히 달려가 부사에게 고하게 했습니다. 부사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면 3일 어둡기 전에 당도할 수 있고 따라서 먼저 경계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뒤 또 들은 소문에 의하면 허유의 노비인 귀희(貴希)의 말에, 자기 어미 종대(終代)의 후살이 남편인 포수(砲手)로 있는 자가 흉모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포수라는 자는 선혜청 뒤에 살고 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서울의 아무아무 공(公) 및 상하가 모두 아무날 거사하기로 약속을 맺었으니 너의 상전도 제때에 올라오면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했으므로 허유가 시기에 맞추어 상경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포수를 잡아다가 국문한다면 그 흉모의 시발(始發)을 알 수가 있겠기에 즉시 사람을 시켜 신의 서찰을 가지고 급히 말을 달려 박난영(朴蘭英)·박입(朴雴) 등에게 알려 그들로 하여금 신경진(申景禛)에게 말하게 했습니다.
허유와 이우명은 일을 만들어 화를 자초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기는 하지만 처지가 미천하고 먼 곳에 거주하고 있는데 어떻게 혼자서 이런 일을 담당하여 모의를 수창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큰 간특한 인물이 배후에 영수(領首)로 있을 것인데 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은 흉도가 신의 가까운 친족 가운데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망극한 마음에 울부짖으면서 즉시 대궐에 나아가 신의 소회를 두루 진달하려고 했습니다만, 미천한 몸의 질병이 극심하여 달려가고는 싶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감히 전말을 기록하여 우선 먼저 소장(疏章)으로 진달합니다.”
하였다. 처음 허적이 허유 등의 흉모에 대해 듣고 나서도 주저하면서 고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의 첩의 권고에 의해 상변했다고 한다.
【원전】 34 집 246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주D-001]인성군(仁城君) : 선조(宣朝)의 일곱째 아들.
[주D-002]일선위(一善尉) : 선조의 딸인 정근 옹주(貞謹翁主)의 남편.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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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2일 (갑오)
녹훈 도감에서 이인거 역모의 공신 책정에 이의를 제기한 이귀의 차자를 처리한 내용

녹훈 도감(錄勳都監)이 아뢰기를,
“삼가 이귀(李貴)의 차자를 살펴보건대 전일 고변한 사람과 진극일(陳克一)·최산휘(崔山輝)의 녹훈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또 말하기를 ‘성우길(成佑吉) 등이 처음에 고변하였으니 추후 죄명을 씻어주는 법전을 내려야 하고 문회(文晦)도 방면시켜야 하며, 역적의 노비는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역변에는 군사를 동원한 경우도 있고 은밀히 모의하다가 발각된 경우도 있는데 이를 발고한 사람을 논상함에 있어서는 위의 두 경우에 따라 그 경중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귀가 고변하는 길을 열기 위해 정성스레 차자를 올려 진달하였는데 유응형(柳應泂)·김인(金仁)·심일민(沈逸民)·진극일(陳克一)은 차자에서 거론한 사람들로서 아울러 녹훈에 참여시켜도 불가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녹훈은 중한 일이어서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여 조처할 수가 없습니다. 성우길·한흔(韓訢)의 실정과 행적에 대해서는 신들이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시 고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논하여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었고, 이시언(李時言)은 그의 아들이 역적 이괄(李适)을 따르다가 복주(伏誅)되었으니 그 아비의 신설(伸雪)을 또한 경솔히 의논하기 어렵고, 문회를 방면시키는 것은 마땅히 은전(恩典)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어서 모두 성상의 재결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노비를 나누어 주는 일은 해관(該官)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문회는 석방하고 진극일은 녹공하라.”
하였다.
【원전】 34 집 255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신분(身分)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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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4일 (병신)
공신 책정에 잘못된 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사간원 관원이 사직을 청하다

대사간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제일 먼저 역변(逆變)을 발고한 것은 허적(許)에게서 나왔지만 직접 대궐에 나아가 발고하지 않고 남에게 서찰을 보내었으니, 허적의 서찰로 인하여 일이 있기 전에 기미를 알린 사람도 공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이 동료들과 상의하여 제일 먼저 발고하고 알린 사람은 녹훈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논급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헌부의 계사를 보건대 제일 먼저 알린 사람은 죄가 있을 뿐 공은 없다고 하면서 훈적에서 삭제시킬 것을 청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이 일을 논함에 있어 착오가 나게 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최산휘(崔山輝)의 아비는 적을 놓아주고 토벌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현재 사죄에 의율(擬律)하고 있으니, 그의 아들된 자로서는 이수향(李秀香)이 역적 모의를 한다는 말을 들었으면 마땅히 사생을 불고하고 즉각 달려와 상변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튿날에야 비로소 사람을 시켜 심명세(沈命世)에게 말로 전하게 하자 심명세가 재삼 채촉하여 즉시 직접 고변하게 하였는데도 최산휘는 고변했다는 이름을 피하기 위해 재삼 미루적거림으로써 수향으로 하여금 기미를 눈치채고 도주하게 하였는가 하면 저녁에 이르러 다른 사람이 상변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마지못해 뒤따라 고변하였으니, 그가 대사(大事)를 그르칠 뻔한 죄는 심명세보다 더합니다. 이제 물의를 듣건대 대간이 즉시 논계하지 않은 것을 그르다고 하니, 신은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파척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사간 최연(崔葕), 헌납 이성신(李省身), 정언 이사상(李士祥)·고부천(高傅川)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답하기를,
“모두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34 집 25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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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4일 (병신)
공신 책정에 잘못된 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사헌부 관원이 사직을 청하다

대사헌 정경세(鄭經世), 장령 김남중(金南重), 지평 이경(李坰)이 아뢰기를,
“신하로서 역변을 알리는 서찰을 얻고서도 덮어두고 발고하지 않는다면 이는 더없이 큰 죄가 되는 것이요, 발고하는 것은 바로 당연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원훈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번에 제일 먼저 역모를 고변한 공은 허적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은 참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일 아뢸 적에 홍서봉이 즉시 들어와 고하지 않은 것에 대해 죄가 있을 뿐 공은 없다고 한 것으로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대사헌 김상헌이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신들이 제일 먼저 역모를 발고한 사람들을 가리켜 죄가 있을 뿐 공은 없다고 했다 하였으니, 일을 논함에 있어 착오를 범한 잘못이 간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들에게 있는 것이 됩니다.
최산휘가 즉시 정원에 달려가 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그가 향생(鄕生)이어서 일을 잘 모른 소치인 것으로 그 정상은 용서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훈척 재신만을 논하고 최산휘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간원이 이미 물의가 이를 그르게 여긴다고 했으니, 하나는 논하고 하나는 논하지 않는 것 역시 신들의 죄입니다. 파척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34 집 25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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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4일 (병신)
공신 책정에 잘못된 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권도가 사직을 청하다

집의 권도(權濤)가 아뢰기를,
“역적이 대궐을 침범한다는 기별은 이것이 어떠한 급보인데, 홍서봉은 편안히 집에서 미루적거리며 기다리고 있으면서 고변했다는 이름을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공이 있다고 한다면 단지 한 장의 편지를 통보한 것뿐인데 이것으로 원훈을 차지한다는 것은 또한 외람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듣건대 심명세는 대궐에 있으면서 그 소식을 듣고서는 밖으로 나아가 모의하고 즉시 들어와 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에는, 신하로서 국가의 위급함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데도 이 두 사람은 자신을 위하는 계책만 함으로써 대사를 그르칠 뻔하였으니 법에 있어 당연히 논해야 된다고 여겼기에 회의 석상에서 발론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심명세가 대궐에 들어왔을 적에 김수(金澃)라는 사람에게서 들은 것을 이조 판서 장유(張維)에게 말하면서 ‘비상한 사태이니 잘 살피게 하라.’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대궐에서 소식을 들었다는 것은 신이 실로 잘못 들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간원이 이 두 가지 사건을 가지고 인피한 사연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홍서봉을 논한 것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스스로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감히 경솔하게 제 잘못으로 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최산휘는 논하지 않고 심명세만 논한 것에 대해서는 일을 논함에 있어 사실과 어긋나게 한 죄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파척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34 집 25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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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22일 (갑인)
허유의 역모를 고변한 이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문제를 논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지금 고변인들에게 직을 제수하라는 명이 계셨으므로 본조가 금부에 물어보았더니, 고변한 사람은 신서회(申瑞檜)·김진성(金振聲)·김득성(金得聲)·황진(黃縉)·허선(許選)·이두견(李斗堅)·최산휘(崔山輝) 등 7인인데 황진은 전에 이미 직을 제수받았고 허선·최산휘·김진성은 학생(學生)이고 신서회·김득성은 서얼이고 이두견은 사천(私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무슨 직을 제수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6품의 실직을 아울러 먼저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34 집 260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신분(身分)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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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14일 (을해)
허적이 다시 녹훈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상소하다

군자 정(軍資正) 허적(許)이 상소하기를,
“신은 녹훈을 감정할 때에 취사(取捨)에 어두워 경중을 잃어서 시끄럽게 물의를 일으켰으니, 어찌 감히 다시 감정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소명을 거두고 단지 묘당으로 하여금 고쳐 감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날에 하교한 뜻은 단지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감정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사양하지 말고 마음 편히 나와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허적이 다시 상소하기를,
“당초 고변할 때에 신은 단지 동생인 허계(許禊)와 비밀히 의논하고는 그의 아들인 허선(許選)을 시켜 달려가서 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성원(黃性元)은 그의 아들인 황진(黃縉)을 보내어 허선과 함께 가게 하고 사위 김득성(金得聲)을 보내어 역적의 형세를 탐지하여 고하게 하였는바, 허계와 성원의 공이 신에 비해 조금도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허선 등이 중간에서 고단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는데 이후배(李厚培)·이후원(李厚源)이 때맞춰 달려와서 홍서봉(洪瑞鳳)과 김류(金瑬)에게 통할 수 있었습니다. 신은 망령되이 그들의 공이 황진이나 허선보나 아래가 아니라고 여겼으므로 경솔하게 녹훈하였습니다.
고변할 때에 황진과 허선이 이후배 형제와 함께 홍서봉의 집에 모였었는데, 김진성(金振聲)·득성(得聖)과 신서회(申瑞檜)도 왔었습니다. 이의배(李義培)를 시켜 신경진(申景禛)·이서(李曙)에게 통보하여 즉시 이계선(李繼先)을 체포하게 하고, 다음으로 군사를 보내어 군기(軍器)를 거두어들여 흉모를 깨뜨림으로써 종사가 다시 안정되게 한 것은 모두 홍서봉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홍서봉을 원훈삼기를 청하고 그와 함께 감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종조부터 추국청의 추관은 모두 녹공하였으므로 신은 감히 홍서봉과 함께 추국청의 신하들을 녹공하도록 여쭌 것입니다. 최산휘(崔山輝)에 이르러서는, 신이 전혀 모르겠기에 대신들에게 물으니, 최산휘의 고변이 가장 늦었다고 하므로 맨 끝에다 쓴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드디어 공론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다시 녹훈을 감정하는 데 참여하여 뭇 비방이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참여하라.”
하였다.
【원전】 34 집 26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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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15일 (병자)
영사 훈적을 다시 감정하다

상이 영사 훈적(寧社勳籍)을 다시 감정하여 허적을 1등으로, 홍서봉·황성원·허계·황진·허선을 2등으로, 김득성·김진성·신서회·최산휘·이두견(李斗堅) 등을 3등으로 하였으며, 이들 11인의 훈호(勳號)는 갈충 효성 병기 익명 영사 공신(竭忠效誠炳幾翊命寧社功臣)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원전】 34 집 26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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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17일 (무인)
허적 등 공신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허적을 초배(超拜)하여 가의 대부(嘉義大夫) 양릉군(陽陵君)으로 삼았다. 이조 참판 홍서봉을 정헌 대부(正憲大夫)에 초배하고, 도사 황진(黃縉), 주부 허선(許選), 학생 황성원·허계, 무학(武學) 김득성(金得聲), 김진성(金振聲), 충익위(忠翊衛) 신서회(申瑞檜), 주부 최산휘(崔山輝), 보인 이두견(李斗堅) 등 9인을 모두 통정 대부에 초자하였는데, 특별 전교가 있어서였다. 최혜길(崔惠吉)을 수찬으로 삼았다.
【원전】 34 집 266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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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8일 (기해)
최산휘가 공신에 오르는 것을 사양하다

부호군 최산휘(崔山輝)가 상소하기를,
“신의 아비 최현(崔晛)이 중한 죄에 빠졌는데, 성상께서 곡진히 용서하시어 끝내 목숨을 보전하게 되니 신 부자는 감읍하여 분골쇄신 충성을 바칠 것만 생각하였습니다. 흉도(凶徒)들의 불측한 말이 마침 신의 귀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대개 신의 아비가 바야흐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갈림길에 있으므로 신이 반드시 화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여겨서 흉계를 알린 것이니, 몹시 통분스럽습니다. 고해온 흉언의 허실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이미 내일 밤에 거사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의심스러워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핑계되고 급급히 달려가 고하지 않아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즉시 김류에게 말하고 그로 하여금 훈신과 재신들에 통보하여 여러 대신과 대장들에게 알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골에 사는 서생이 사체에 어두워 직접 조정에 나아가 고하지 않은 결과 흉도들을 놓쳐 정형(正刑)을 가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더욱 큽니다. 그런데도 외람되이 훈적에 기록되었으니, 속히 삭제하도록 명하시어 적소에서 병든 아비를 귀성(歸省)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는 큰 공이 있어서 이번 공신에 참여한 것이니 무슨 부끄러울 것이 있겠는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34 집 268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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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8일 (기해)
허적이 공신 직을 사양하다

전 정(正) 허적이 상소하기를,
“이귀(李貴)의 차자를 보건대 ‘허적은 집에 있었던 사람이므로 최산휘의 위에 기록되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다시 조사하여 마감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귀의 이 말은 실로 신의 마음에 드는 말이니, 신의 이름을 속히 훈적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시어 외람된 폐단을 없애소서.”
하니, 답하기를,
“예로부터 종적을 알아서 고변하도록 지시한 자는 으레 원공(元功)에 참록되었다. 이귀는 한갓 달려가 고한 공로가 가상하다는 것만 알고 지휘한 공로가 더욱 크다는 것은 몰랐으니, 생각하지 못함이 심하다고 하겠다. 그의 말은 따질 것이 없다.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34 집 269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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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10일 (신축)
이귀가 소무 공신과 영사 공신의 책정에 잘못이 있다고 차자를 올리다

우찬성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소무 공신(昭武功臣)과 영사 공신(寧社功臣) 두 훈적을 감정한 것에 대해 공론이 미심쩍게 여기고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원훈이 감정한 것이라는 핑계로 끝내 고치려 하지 않으시니, 신은 몹시 답답합니다. 신경영(辛慶英)과 이윤남(李胤男)이 공도 없이 녹훈에 참여된 것에 대해 나라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게 여기고 있으니, 홍보(洪靌)가 속인 것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허적에 이르러서는, 역모를 안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황진(黃縉) 등이 고변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에 한 장의 서찰을 써서 황진과 허선(許選)에게 부쳐 보냈습니다. 황진 등은 이미 김진성(金振聲) 등과 군사를 일으킬 날을 약속하고서 고변하려 하였으니, 비록 허적의 서찰이 없더라도 고변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합니다. 허적이 병을 핑계대고 즉시 자신이 고변하지 않고 단지 한 장의 서찰을 부쳐 보냈으니, 법으로 따진다면 역모를 알고서도 고변하지 않은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탑전에서 고변한 자인 최산휘(崔山輝)와 황진을 수공(首功)으로 삼고 김진성 등 5인을 다음으로 삼으며, 허적이 서찰을 부쳐 보낸 공은 그 다음에 기록하여야 한다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고쳐 감정하는 날에는 도리어 허적을 수공으로 삼고 최산휘를 3등의 끝에다 기록하였으며, 또 홍서봉은 허적의 서찰을 본 공으로 2등의 위에다 놓았으며, 황진의 아비 성원을 제3등으로 삼았고 허선의 아비 계를 제4등으로 삼았습니다. 황성원과 허계가 고변한 자의 아비라고는 하나 모두 자기 집에 있으면서 즉시 고변하지 않은 것은 허적과 차이가 없으니, 전도되고 착란됨이 심합니다.
그리고 고변한 자 외에 만약 변을 듣고 주선한 공으로 말한다면 김류(金瑬)와 홍서봉이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김류는 이미 공훈을 사양하여 허락을 얻었으니, 홍서봉도 마땅히 극력 사양하여 공훈을 차지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허적에게 그르친 바가 되어서 끝내 사양하지 않았으니, 염치가 너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황성원과 허계·최현(崔晛)은 모두 고변한 자의 아비이기는 마찬가지인데 황성원과 허계는 봉군(封君)되기까지 이른 반면, 최현만은 훈적에 참록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먼 변방에 쫓겨나 있으니, 어찌하여 공에 보답하는 법의 후하고 박함이 현격하게 다르단 말입니까.
임금이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는 그 말이 옳으냐 그르냐를 보고 취사하는 것이며, 모든 일은 타당함을 얻는 것이 귀하니, 진실로 타당하지 않다면 열 번을 고치더라도 해될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이 그르지 않다고 여긴다면 다시 대신과 원훈으로 하여금 정사 공신(靖社功臣)을 감정할 때와 같이 탑전에서 다시 감정하도록 하소서. 그렇게 되면 성상께서 살펴보는 아래에서 어찌 사정(私情)을 따르는 자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의 간절한 정성을 애처롭게 여기어 속히 다시 사핵하게 하여, 한편으로는 시비를 분명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상벌을 공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두 번 세 번 감정한 일을 이와 같이 가볍게 의논하니, 몹시 타당하지 않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이귀가 매번 녹훈을 감정한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의심하면서 여러 차례 차자를 올리니, 일이 몹시 소란스럽다. 묘당으로 하여금 일일이 회계하여 그의 의심스런 마음을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신흠(申欽)과 김류는 모두 이름이 차자 속에 들어 있어서 감히 회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여러 대신과 원훈이 회의한 다음 품지(稟旨)하여 감정한 것으로, 그때 등급을 정하고 숫자를 가감한 곡절에 대해서는 전후의 차자에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는바, 지금 다시 별도로 의논하기는 곤란합니다. 다만 상께서 전에 감정한 것이 미진하다고 여기시어 다시 고하를 정하고 원수(元數)를 증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는 막중한 일이어서 신 한 사람이 회계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이귀가 따진다는 이유만으로 묘당으로 하여금 그의 의혹을 풀어 주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사체에 있어서 아마도 온당치 못한 점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34 집 269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낙남공 관련 승정원일기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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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10일 (신축)
이귀가 소무 공신과 영사 공신의 책정에 잘못이 있다고 차자를 올리다

우찬성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소무 공신(昭武功臣)과 영사 공신(寧社功臣) 두 훈적을 감정한 것에 대해 공론이 미심쩍게 여기고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원훈이 감정한 것이라는 핑계로 끝내 고치려 하지 않으시니, 신은 몹시 답답합니다. 신경영(辛慶英)과 이윤남(李胤男)이 공도 없이 녹훈에 참여된 것에 대해 나라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게 여기고 있으니, 홍보(洪靌)가 속인 것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허적에 이르러서는, 역모를 안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황진(黃縉) 등이 고변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에 한 장의 서찰을 써서 황진과 허선(許選)에게 부쳐 보냈습니다. 황진 등은 이미 김진성(金振聲) 등과 군사를 일으킬 날을 약속하고서 고변하려 하였으니, 비록 허적의 서찰이 없더라도 고변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합니다. 허적이 병을 핑계대고 즉시 자신이 고변하지 않고 단지 한 장의 서찰을 부쳐 보냈으니, 법으로 따진다면 역모를 알고서도 고변하지 않은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탑전에서 고변한 자인 최산휘(崔山輝)와 황진을 수공(首功)으로 삼고 김진성 등 5인을 다음으로 삼으며, 허적이 서찰을 부쳐 보낸 공은 그 다음에 기록하여야 한다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고쳐 감정하는 날에는 도리어 허적을 수공으로 삼고 최산휘를 3등의 끝에다 기록하였으며, 또 홍서봉은 허적의 서찰을 본 공으로 2등의 위에다 놓았으며, 황진의 아비 성원을 제3등으로 삼았고 허선의 아비 계를 제4등으로 삼았습니다. 황성원과 허계가 고변한 자의 아비라고는 하나 모두 자기 집에 있으면서 즉시 고변하지 않은 것은 허적과 차이가 없으니, 전도되고 착란됨이 심합니다.
그리고 고변한 자 외에 만약 변을 듣고 주선한 공으로 말한다면 김류(金瑬)와 홍서봉이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김류는 이미 공훈을 사양하여 허락을 얻었으니, 홍서봉도 마땅히 극력 사양하여 공훈을 차지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허적에게 그르친 바가 되어서 끝내 사양하지 않았으니, 염치가 너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황성원과 허계·최현(崔晛)은 모두 고변한 자의 아비이기는 마찬가지인데 황성원과 허계는 봉군(封君)되기까지 이른 반면, 최현만은 훈적에 참록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먼 변방에 쫓겨나 있으니, 어찌하여 공에 보답하는 법의 후하고 박함이 현격하게 다르단 말입니까.
임금이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는 그 말이 옳으냐 그르냐를 보고 취사하는 것이며, 모든 일은 타당함을 얻는 것이 귀하니, 진실로 타당하지 않다면 열 번을 고치더라도 해될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이 그르지 않다고 여긴다면 다시 대신과 원훈으로 하여금 정사 공신(靖社功臣)을 감정할 때와 같이 탑전에서 다시 감정하도록 하소서. 그렇게 되면 성상께서 살펴보는 아래에서 어찌 사정(私情)을 따르는 자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의 간절한 정성을 애처롭게 여기어 속히 다시 사핵하게 하여, 한편으로는 시비를 분명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상벌을 공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두 번 세 번 감정한 일을 이와 같이 가볍게 의논하니, 몹시 타당하지 않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이귀가 매번 녹훈을 감정한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의심하면서 여러 차례 차자를 올리니, 일이 몹시 소란스럽다. 묘당으로 하여금 일일이 회계하여 그의 의심스런 마음을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신흠(申欽)과 김류는 모두 이름이 차자 속에 들어 있어서 감히 회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여러 대신과 원훈이 회의한 다음 품지(稟旨)하여 감정한 것으로, 그때 등급을 정하고 숫자를 가감한 곡절에 대해서는 전후의 차자에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는바, 지금 다시 별도로 의논하기는 곤란합니다. 다만 상께서 전에 감정한 것이 미진하다고 여기시어 다시 고하를 정하고 원수(元數)를 증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는 막중한 일이어서 신 한 사람이 회계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이귀가 따진다는 이유만으로 묘당으로 하여금 그의 의혹을 풀어 주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사체에 있어서 아마도 온당치 못한 점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34 집 269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인조 6년 무진(1628, 숭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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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9일(신묘) 맑음
좌목
 06-01-29[03] 훈공을 감정한 명단
훈공을 감정하였는데, 1등은 허적(許), 홍서봉(洪瑞鳳)이고, 2등은 김류(金瑬), 신흠(申欽), 오윤겸(吳允謙), 황성원(黃性元), 허계(許禊), 황진(黃縉), 허선(許選), 윤방(尹昉), 서성(徐渻), 김자점(金自點), 한여직(韓汝稷), 이경직(李景稷), 이서(李曙), 신경진(申景禛)이고, 3등은 이후배(李厚培), 이후원(李厚源), 이성구(李聖求), 정경세(鄭經世), 김상헌(金尙憲), 윤지(尹墀), 박황(朴潢), 이경석(李景奭), 김광현(金光炫), 이행원(李行遠), 김득성(金得聲), 김진성(金振聲), 신서회(申瑞檜), 이의배(李義培), 최산휘(崔山輝), 이두견(李斗堅)이다.


 

 

인조 6년 무진(1628, 숭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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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9일(신묘) 맑음
좌목
 06-01-29[04] 우찬성 이귀가 고변한 최산휘가 3등의 자리에 있는 것을 시정할 것 등을 청하는 차자를 올렸다
우찬성 이귀(李貴)가 올린 차자의 대개는, “고변한 등제(等第)로 말하자면 역적 괴수를 고발한 자가 수공(首功)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최산휘는 역적 괴수 유효립(柳孝立)의 세 부자와 정심(鄭沁), 윤계륜(尹繼倫), 이계선(李繼先) 등을 고발하여 모두 승복을 받았고, 허적은 허유(許逌) 등의 흉악한 모략을 고발한 것이니 최산휘의 공이 허적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허적은 원훈이 되었고 최산휘는 겨우 3등의 말단에 참여하였습니다. 또 홍서봉이 도리어 두 번째 원공(元功)이 되고 심명세(沈命世)는 마지막에 최산휘로 하여금 고변하게 하였는데도 홀로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상(賞)이 그 실정에 맞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역적을 다스린 자가 공훈에 기록되는 것을 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이제 공훈을 기록한 것을 보면 고변하여 공이 있는 자가 도리어 3등에 있고 벼슬과 품계가 높은 자들이 도리어 그 위에 있어 후일 고변하려는 자가 드물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속히 국청(鞫廳)에 참여하여 녹훈된 자를 파하여 그들에게 지급한 노비와 전답을 고변한 자에게 넉넉히 주어 국맥(國脈)이 영원히 이어지도록 하소서.”라는 일이었는데, 입계하였다.


 

 

인조 6년 무진(1628, 숭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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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9일(신묘) 맑음
좌목
 06-01-29[13] 이귀의 차자에서 거론된 유응형 등을 모두 녹훈에 참여시킬 것 등을 청하는 대신의 계
도감 낭청(都監郞廳)이 대신의 뜻으로 아뢰기를,
“삼가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차자를 보니 전일에 고변했던 사람과 진극일(陳克一), 최산휘(崔山輝)의 녹훈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또 말하기를 성우길(成佑吉) 등이 일찍이 고변하였으니 응당 신원하는 은전을 더해 주어야 하고 문회(文晦)도 풀어 주어야 하며 역적의 노비를 공신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역변에는 거병하여 군사를 동원한 경우도 있고 은밀하게 모의하다가 즉시 발각되는 경우도 있으니 고변한 자를 논상(論賞)함에 있어서는 경우에 따라 차이를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귀가 고변하는 길을 터 주고자 하여 부지런히 이렇게 차자를 올리는 뜻도 우연한 것이 아니니 유응형(柳應泂), 김인(金仁), 심일민(沈逸民), 진극일 등 차자에서 거론된 자를 모두 녹훈에 참여시키는 것도 안 될 것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녹훈은 중한 일이어서 감히 아래에서 경솔하게 의논하여 조처할 수가 없습니다. 성우길과 한흔(韓訢)의 정적(情迹)에 대해서는 신들이 비록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당시 고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논죄하여 형장을 맞아 죽었습니다. 또 이시언(李時言)은 그의 아들이 역적 이괄(李适)을 따르다가 처형되었으니 그 아비를 신원하는 일을 또한 가볍게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문회를 풀어 주는 것도 응당 은전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 성상의 재결을 기다립니다. 노비를 나누어 주는 일 같은 것은 신들의 소관이 아닙니다. 해조로 하여금 따로 품지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문회는 풀어 주고 진극일은 녹공(錄功)하라.”
하였다.
- 《충훈부등록》에 의거함 -




 

 

인조 6년 무진(1628, 숭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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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일(갑오) 맑음
좌목
 06-02-02[06] 함부로 녹훈된 자는 모두 삭제할 것 등을 청하는 사헌부의 계
사헌부가, 이인거(李仁居)를 붙잡은 일과 관련한 좌영장(左營將) 신경영(辛慶榮)ㆍ이윤남(李胤男) 등의 녹훈을 삭제하는 일과 홍보(洪)를 추고하는 일로 아뢰고, 새로 아뢰기를,
“이번에 역적의 흉악한 계책이 하룻밤 사이에 행해질 뻔했는데 다행히 상변(上變)이 먼저 들어온 덕에 국가가 망하지 않게 되었으니, 고발한 사람의 공로는 땅을 떼어 봉해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드러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경외(京外)의 사람은 7, 8인에 불과한데 녹훈된 숫자는 32인이나 되니 공이 없이 함부로 녹훈된 자가 4분의 3이나 됩니다. 심지어 추관(推官)까지 아울러 녹훈하는 것은 을사년(1545, 명종 1)의 권간(權奸)이 시작한 폐습(弊習)으로, 기축년(1589, 선조 22)의 옥사(獄事) 때에는 비록 선왕(先王)의 특명에 의한 것이었지만 당시 공론(公論)을 주관하고 있던 사람이 극력 간쟁하면서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경외의 맨 먼저 고발한 자 약간 명 외에 그 나머지 함부로 녹훈된 자는 모두 삭제하여 요행히 녹훈되는 길을 막으소서.
당시는 흉도(凶徒)가 대궐을 범할 시기가 하룻밤 앞으로 임박하였으므로 종묘사직의 위험이 당장 닥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홍서봉(洪瑞鳳)은 이미 조회 전에 허적(許)의 편지를 받았고 심명세(沈命世)도 대궐 안에서 최산휘(崔山輝)의 보고를 받아 보았으면서도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발한 자로 하여금 직접 상변(上變)하게 하여 분부(分付)가 너무 늦어지게 만들어서 대사(大事)를 그르칠 뻔하였으니, 그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무슨 포상할 만한 공이 있겠습니까. 홍서봉, 심명세를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고 홍서봉은 훈적(勳籍)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의 녹훈은 실로 선조(先朝)의 전례에 기준하여 한 것으로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으니,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말라. 그리고 홍서봉 등이 즉시 들어와 고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의 말을 꺼린 데에서 나온 행위인 듯하다. 그렇다면 잘못이 없지 않으니 추고하라. 기타의 일은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인조 6년 무진(1628, 숭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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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4일(병신) 맑음
좌목
 06-02-04[02] 그릇되게 일을 논한 잘못이 있으므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대사간 김상헌의 계에 대해, 사직하지 말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라는 비답
대사간 김상헌(金尙憲)이 피혐한 계사의 대개는 “허적(許)의 편지로 인하여 일이 있기 전에 고발하였으니, 고발한 사람도 공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제 사헌부의 계사를 보건대 제일 먼저 고발한 사람은 죄가 있을 뿐 공은 없다고 하면서 훈적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였으니, 신들이 그릇되게 일을 논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최산휘(崔山輝)는 이수향(李秀香)이 역적 모의를 한다는 말을 듣고도 고변했다는 말을 듣기를 꺼려 재삼 미적거림으로써 이수향으로 하여금 일이 돌아가는 것을 눈치채고 도주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논계하지 않은 것을 잘못된 처사라고 하고 있으니, 체차해 주소서.”라고 한 일이었는데,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물러나 물론(物論)을 기다리라.”
하였다. 사간 최연(崔葕), 헌납 이성신(李省身), 정언 이사상(李士祥)ㆍ고부천(高傅川)도 모두 인피(引避)하였다.
 
인조 6년 무진(1628, 숭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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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4일(병신) 맑음
좌목
 06-02-04[03] 김상헌이 피혐한 사연을 보면 잘못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므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대사헌 정경세 등의 계에 대해, 사직하지 말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라는 비답
대사헌 정경세(鄭經世), 집의 권도(權濤), 장령 김남중(金南重), 지평 이경(李坰)이 인피한 계사의 대개는 “신하로서 역변을 알리는 편지를 받고도 덮어 두고 고발하지 않았다면 이는 더없이 큰 죄인데, 어떻게 갑자기 원훈이 되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어리석은 신은 제일 먼저 역모를 고발한 공은 허적에게만 해당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김상헌이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과연 그 말과 같다면 착오를 범한 잘못이 간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들에게 있는 것이 됩니다. 최산휘가 즉시 정원에 고발하지 않은 것은 그가 향생(鄕生)이어서 일을 잘 모른 소치입니다만, 지금 간원이 이미 사람들이 잘못된 처사라고 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하나는 논하고 하나는 논하지 않은 것은 신들의 죄입니다. 체차해 주소서.”라고 한 일이었는데,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라.”
하였다.

 

인조 6년 무진(1628, 숭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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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4일(을해) 아침에 맑고 저녁에 비 옴
좌목
 06-03-14[11] 감훈의 시말에 대한 허적의 두 번째 상소
허적이 두 번째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삼가 하비(下批)하신 것을 받들어 보니,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나아가 참여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받들고 거듭해 읽노라니, 감격의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습니다. 물의가 저토록 시끄럽거늘 밝으신 성상께서 이토록 돈유(敦諭)하시니, 신은 실로 이도 저도 못한 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감히 송구한 심정을 아뢰어 성상의 마음을 돌리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살펴 주소서.
당초 역적 허유(許逌)가 변고를 일으켰을 때에 온 마을의 친속(親屬)들이 모두 그의 모집에 응하였는데, 신이 처지는 고단(孤單)하고 상황은 황급하였으니, 누구와 함께 모의를 했겠습니까. 겨우 동생인 허계(許禊)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은밀히 논의한 끝에 마침내 그의 아들 허선(許選)으로 하여금 달려가 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성원(黃性元)은 그의 아들 황진(黃縉)을 서둘러 보내어 허선과 함께 가게 하였고, 사위 김득성(金得聲)을 독촉해 보내어 역적의 형세를 탐지해 와서 고하게 하였습니다. 허계와 황성원이 한 일이 조금도 신에게 뒤지지 않는데 짧은 서찰 안에 그들의 성명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신은 조정에 벼슬하여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고 두 사람은 미천한 몸으로 시골에 있어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경황이 없는 때였던 만큼 또한 어찌 훗날 이름을 드러내고 공을 도모하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감훈할 때에 이르러 신의 망녕된 생각에, ‘혐의를 피하는 것은 신하의 소소한 예절이고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국가의 대사이니, 진실로 친하다는 이유로 숨기거나 미천하다는 이유로 버려서는 안 되며, 또한 남의 공로를 빼앗아 오로지 자기의 것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상소를 또한 사실대로 하여 단지 그들의 공로만을 기록하였는데, 그 등급이 황진과 허선의 위에 있었던 것은, 황진과 허선의 행동이 이미 모두 아비의 명령을 받든 것인 만큼 비록 밤낮으로 달려가 그 일을 마무리했다 할지라도 실로 허계와 황성원의 한마디 말에서 나온 것이니, 어떻게 달려간 공로를 가지고 명하여 보낸 아비의 위에 갑자기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인정과 사리로 헤아려 보더라도 모두 감히 할 수 없는 바입니다. 그래서 신은 남의 말을 고려하지 않고 경솔하게 녹훈했던 것이니, 마음대로 한 죄는 만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흉도들이 반역을 일으키기로 한 날짜가 하루 앞에 다가왔으므로 달려가 고해서 미리 방비하도록 하는 것이 한시가 급하였는데, 허선과 황진은 도중에 상황이 난처해져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때 이후배(李厚培)와 이후원(李厚源)이 제때에 달려와 홍서봉(洪瑞鳳)과 김류(金瑬)에게 통보하였습니다. 신의 망녕된 생각에, ‘허선과 황진이 만약 중도에 그만두었다면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지만, 이후배 등이 비록 잠시 서찰을 전한 것이기는 하나 그 공로는 밤낮으로 달려간 허선과 황진보다 못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신은 남의 말을 고려하지 않고 경솔하게 녹훈했던 것이니, 마음대로 한 죄는 만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신은 고변(告變)을 올릴 때에 이미 병 때문에 직접 나아갈 수 없게 되었지만 범범히 남을 보내 상소를 올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허선과 황진으로 하여금 홍서봉과 김류에게 통보하게 한 것이니, 그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 기밀을 은밀히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김류가 당시 대궐 안에 있었으므로 허선, 황진, 이후배, 이후원은 모두 홍서봉의 집에 모였는데 김진성(金振聲), 김득성, 신서회(申瑞檜)도 그곳에 모였습니다. 역적의 실상을 다 파악한 다음 이의배(李義培)로 하여금 대궐 안으로 들어가 신경진(申景禛)과 이서(李曙)에게 통보하게 하였고, 신경진과 이서는 즉시 이계선(李繼先)을 체포하고 잇달아 군병을 동원하여 군기(軍器)와 도당(徒黨)을 제압함으로써 일이 닥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흉모를 깨뜨렸으니, 종사(宗社)가 다시 안정된 것이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그대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모두 잘못되었을 것이니, 이제야 나라가 오히려 살게 되었구나.’라고 하였으니, 홍서봉이 여기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의가 시끄러우니, 신은 실로 괴이하게 생각됩니다. 신이 삼가 다시 생각건대, 대체로 역적을 토벌할 때에 신이 고변을 올린 것은 일의 시작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동요할까 두려웠고, 홍서봉이 모의한 것은 일이 이미 일어난 뒤에 있었으므로 무리들과 함께 하였으니, 누가 그 경중을 자세히 분변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망녕된 생각에, ‘시작한 사람은 나이고 마무리한 사람은 홍서봉이다. 시작은 쉬워도 마무리는 실로 어려운 것이니, 그 공로가 다른 사람들의 위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밖에서 막 왔지만, 홍서봉은 실로 서울에서 토벌하는 공로를 다 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신이 홍서봉을 원훈으로 삼기를 청하고 그와 함께 감훈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남들의 말을 고려하지 않고 경솔하게 처리하였으니, 마음대로 한 죄는 만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조종조의 훈적(勳籍)을 두루 살펴보니, 서울에서 역적을 처벌할 때의 국청의 대신과 추관(推官)들로서 녹훈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이는 체포하고 국문하여 승복을 받는 것이 공로에 있어 싸우고 토벌하여 적을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에 역적을 토죄한 것이 전보다 심했고 승복을 받은 것이 3, 4십 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설령 전례가 없다 하더라도 새로 전례를 만들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는 전례가 있는 경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신의 망녕된 생각에, ‘오직 일의 가부만을 논하였으므로 혹 위에서 명하거나 혹 아래에서 여쭙더라도 모두 의리에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감히 홍서봉과 연명으로 상소하여 전지(傳旨)를 받은 것입니다. 신이 남의 말을 고려하지 않고 경솔하게 여쭈어 녹훈했으니, 망녕되고 외람된 죄는 만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최산휘(崔山輝)의 일에 이르러서는 신이 그 당시에 지방에 있었으므로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감훈할 때에 신이 홍서봉에게 ‘최산휘는 이번 감훈에서 거론해서는 안 될 듯하다.’라고 말하였는데, 홍서봉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즉시 대신에게 ‘최산휘를 어떻게 처리해야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재차 말한 뒤에야 삼공(三公) 가운데 비로소 대답하는 사람이 있어 ‘최산휘가 들어가 고변한 것은 날이 저물 때였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어 말하기를, ‘공초를 받들어 올릴 때에 불로 비추어 볼 만큼 어두웠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망녕된 생각에, ‘최산휘가 들어가 고변한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해 가장 늦었으니, 미리 달려간 사람의 위에 더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홍서봉과 서로 논의하여 말단에 썼던 것입니다. 신이 남의 말을 고려하지 않고 경솔하게 녹훈했으니, 마음대로 한 죄는 만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실로 자질이 형편없고 다른 사람들의 천대와 미움을 사고 있는데, 국가의 막중한 일을 외람되이 맡아서는 취사에 어두워 경중을 잃었습니다. 이에 입이 달린 자들은 모두 욕을 하고 발이 달린 자들은 모두 발을 구르며 공론이 격해지면서 여러 달 논집(論執)하게 만들었습니다. 때를 넘겨서는 안 되는 막중한 상전(賞典)을 지체시켜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심담(心膽)이 모두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사감하는 일에 감히 다시 참여하여 많은 비방들이 다시 일어나게 한단 말입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임금을 섬김에 있어 속이지 말라.’고 하였고, 또한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 감훈할 때에 경솔하게 마음대로 하여 녹훈해서는 안 될 사람을 녹훈했다면 이는 임금을 속인 것이며, 이번에 다시 감훈할 때에 남들의 말을 두려워하여 삭훈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삭훈한다면 이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임금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것은 곧 사대부들이 차마 하지 못하는 바인데, 지금 신으로 하여금 이런 상황을 당하게 하시니, 신은 매우 답답합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공로가 의심스러울 때에는 후한 쪽으로 상을 내린다.’고 하였으니, 이는 성왕(聖王)이 위태로운 정국을 안정시켜 치세를 이룩한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후세에는 그렇지 않아서 위태롭고 혼란한 때에는 발 한 번 들고 손 한 번 든 것과 같은 하찮은 공로도 모두 기록할 만하다고 여기다가 평정된 뒤에는 서로 길으니 짧으니 가벼우니 무거우니 하면서 사람마다 모두 논의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공을 완성하는 자가 없고 상은 제때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공통된 병통인데, 밝으신 성상께서 한 달이 지나도록 윤허하지 않으시다가 지금에야 비로소 마지못해 따르신 이유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성왕의 녹훈을 따르시고 후세의 폐단을 헤아리시어 묘당으로 하여금 혐의를 피함이 없고 공로를 가림이 없도록 해 주소서. 이렇게 참작해 정하는 데에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신이 만번 죽을죄를 지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므로 삼가 대궐 아래에 엎드려 주륙(誅戮)을 기다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매우 간절한 심정을 굽어살피시어 소명(召命)을 환수하심으로써 그 죄를 바로잡고 다시 감훈하는 일에 참여하지 말도록 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너무도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그대의 뜻을 잘 알았다. 그대는 고사(固辭)하지 말고 속히 입참(入參)하라.”
하였다.


[주D-001]그대가 …… 되었구나 : 두보(杜甫)의 북정(北征)에 나오는 시구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양태진(楊太眞)과 양국충(楊國忠)을 죽이자고 맨 먼저 논의를 제기했던 진원례(陳元禮)를 찬양한 내용이다.


월 15일(병자) 흐리기도 하고 맑기도 함
좌목
 06-03-15[10] 다시 감훈한 영사공신 명단
영사 공신(寧社功臣)을 다시 감훈(勘勳)하였는데, 1등은 허적(許)이고, 2등은 홍서봉(洪瑞鳳), 황성원(黃性元), 허계(許禊), 황진(黃縉), 허선(許選)이고, 3등은 김득성(金得聲), 김진성(金振聲), 신서회(申瑞檜), 최산휘(崔山輝), 이두견(李斗堅)이었다.


 

인조 6년 무진(1628, 숭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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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5일(갑진) 맑음
좌목
 06-06-15[09] 역적을 체포할 때 공로가 중한 사람에 대해 보고하는 금부의 계
또 아뢰기를,
“추국청 당상과 역적을 체포할 때 공로가 있는 사람을 서계하는 일로 올린 초기와 관련하여 답하기를, ‘알았다. 그 가운데 공로가 가장 중한 자도 서계하라.’고 답하여 전교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공로가 가장 중한 자는 신들이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 대개는 1월 3일에 허선(許選)ㆍ황진(黃縉) 등이 허적(許)의 편지를 가지고 광주(廣州)에 도착하였는데 사람과 말이 모두 피로해서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후원(李厚源)과 이후배(李厚培)가 교대하여 그 편지를 가지고 하나는 우상 김류(金瑬)에게 전달했고, 하나는 홍서봉(洪瑞鳳)에게 전달했습니다. 김류가 그 편지를 영상 신흠(申欽)에게 보여 주자, 신흠이 즉시 홍서봉ㆍ신경진(申景禛)ㆍ이서(李曙) 등을 불러서 체포하고 막을 계책을 분부하였습니다. 이서ㆍ신경진 등이 즉시 군관과 도감의 군인 등을 보내어 강변과 도성문 밖 적이 오는 중요한 길목에 복병을 두었는데 이 때문에 모든 적을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논해 보면 이후원과 이후배 등이 제때 허적의 밀서를 전해서 역적이 미처 입성하기 전에 먼저 기미를 살펴 대응할 수 있게 하였으니 그 공이 아마 가장 중할 것입니다. 김수(金澃)와 심명세(沈命世) 등은 최산휘(崔山輝)의 말로 인하여 즉시 여러 훈신들에게 달려가 고해서 적들을 제때 체포하게 하였으니 그 공도 작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본부에서 감히 취사할 수 없어 모두 서계합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을 기다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이 초기 중에 첨부한 사람은 단자에 써서 들이라.”
하였다.
- 《의금부등록》에 의거함 -


 

 

인조 6년 무진(1628, 숭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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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28일(정해) 맑음
좌목
 06-07-28[07] 영사 공신 최산휘에게 말을 지급하여 회맹제의 기일에 올라올 수 있도록 하유할 것 등을 청하는 녹훈도감의 계
녹훈도감이 아뢰기를,
“회맹제(會盟祭)의 기일이 머지않습니다. 응당 참여해야 할 인원으로서 공적이거나 사적인 일로 지방에 있는 자는 반드시 내달 20일 이전에 올라와야 기일 전에 서계(誓戒)를 받고 청재(淸齋)에 들어간 다음 제사에 참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사 공신(寧社功臣) 행 호군(行護軍) 최산휘(崔山輝)가 근친(覲親)의 일로 멀리 함경도 회령(會寧)에 가 있으므로 도감에서 이미 감사와 병사에게 행회하여 그들로 하여금 통지하여 올려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기일이 임박하였고 길도 매우 머니 아래에서 행회하는 것만으로는 무리 없이 호송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또 국가에서 훈신(勳臣)을 대우하는 사체도 심상한 것은 아니니 최산휘에게 말을 지급하여 급히 올라오게 하도록 그 도의 감사에게 하유(下諭)해야 할 것입니다. 또 옛 공신(功臣) 가운데 감사, 병사, 수사로서 지방에 있는 자도 많으니 충훈부로 하여금 일일이 초출(抄出)하여 구례대로 하유하여 기일에 맞추어 올라오게 함으로써 때가 닥쳐서도 이르지 못하여 허겁지겁하는 우환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충훈부등록》에 의거함 -


 

 

인조 6년 무진(1628, 숭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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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29일(무자) 맑음
좌목
 06-07-29[08] 영사 공신 최산휘에게 말을 지급하여 회맹제의 기일에 올라올 수 있도록 하유할 것 등을 청하는 녹훈도감의 계
녹훈도감이 아뢰기를,
“회맹제의 기일이 머지않았는데 영사 공신(寧社功臣) 최산휘(崔山輝)가 근친하러 회령에 가 있으니 말을 지급하여 올려 보내도록 감사에게 하유하고, 옛 공신 가운데 감사, 병사, 수사로서 지방에 있는 자를 구례대로 입계하도록 하유하여 기일에 맞추어 올라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조보에 의거함 -


 

인조 6년 무진(1628, 숭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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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28일(병진) 맑음
좌목
 06-08-28[05] 죄인 최현을 아들 최산휘의 공으로 특별히 용서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비망기
비망기에,
“죄인 최현(崔晛)은 식견이 밝지 못하여 적을 놓치고 체포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막중하다. 그러므로 적절히 헤아려 유찬(流竄)의 형전을 시행하였는데, 지금 최산휘(崔山輝)가 국가에 큰 공을 세웠으니 그 자식의 공으로 특별히 용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 8년 신미(1871, 동치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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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3일(임진) 맑음
좌목
 08-05-03[14] 서상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서상돈(徐相敦)ㆍ강문형(姜文馨)을 교리로, 조면호(趙冕鎬)를 장악원 정으로, 박종병(朴宗秉)을 감찰로, 장호근(張皓根)을 전적으로, 김규식(金奎軾)을 서학 교수(西學敎授)로, 권응선(權膺善)을 병조 정랑으로 삼았다. 증 병조판서 어재연(魚在淵)에게 충장(忠壯)의 시호를, 증 이조판서 이정(李)에게 충민(忠愍)의 시호를, 증 이조판서 겸 좨주 박성양(朴成陽)에게 정헌(定憲)의 시호를, 증 병조판서 최강(崔堈)에게 의숙(義肅)의 시호를, 증 병조판서 배명순(裵命純)에게 충숙(忠肅)의 시호를, 증 호조판서 최산휘(崔山輝)에게 효헌(孝憲)의 시호를, 증 이조판서 겸 좨주 김상악(金相岳)에게 문간(文簡)의 시호를, 고 좌참찬 임상원(任相元)에게 효문(孝文)의 시호를, 고 공조 판서 이희경(李熙絅)에게 정무(貞武)의 시호를, 고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에게 숙민(肅愍)의 시호를 내렸다.

 

  낙남공 관련 문집의 내용

 
旅軒先生文集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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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碑銘○墓碣○墓誌
處士朴公墓碣銘 a_060_22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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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遂一。字純伯。新羅朴姓王時。分封諸公子於列邑。今之慶尙左道之密陽。居其一。公其後裔也。史闕載傳。譜亦墮失。未知在公爲幾代也。公之九代祖諱華。爲麗朝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中世居龍宮。至六代諱宗元。弘治進士。號默齋。娶生員許諒女。許乃金海首露王之裔。生員居善山之海平縣。故公旣娶。就而居焉。卽今古里편001。乃其閭也。祖諱雲。卽正德己卯進士。龍巖其號也。師朴松堂英。友金眞樂就成。公060_224b之學問德行。非後學所可得以議焉。閭有孝碑。宣廟朝所旌也。塋下有碣。退溪李先生撰文也。公之著有景行錄,紫陽心學至論,擊蒙編,三侯傳,衛生方等書。傳爲家寶焉。考諱灝。嘉靖丙午。生員。娶廣陵李宗諤女。以癸丑十二月二十八日生公。公甫八歲。生員公暴歿。公驚奔號擗。仆地至三。此豈常兒所能哉。九歲。龍巖公口授小學。公該達佩誦。龍巖愛重之曰。吾家幹蠱。非此兒耶。壬戌。龍巖喪逝。公從仲季父在廬。定省慈闈。晨昏不廢。年十七。往謁李先生于禮安。先生頗奬許之。又往謁穌齋盧相公于商山。此皆其志060_224c早有在也。丙子。初參漢城別擧。不利於殿試。自是不復留意擧業。遂奮爲己之學。夜或懸䯻警睡篤志。母夫人憂疾而止之。乙酉。家熾酷癘。公喪耦後。先妣繼染。公不離侍藥。嘗糞預驗。及其喪也。哭踊哀毁。頓絶獲穌者累焉。泣血三年。幾至喪明。服闋後。時見先妣手澤之物。輒失聲悲號。隣族莫不嗟嘆。壬辰。遭倭變。避竄山谷。雖在蒼黃急遽中。若遇忌辰。親具時羞。必致如在之誠。時龍巖繼夫人金氏尙在季父家。公奉置躳侍。不失常儀。及喪。送終如禮。公之外家。蕩沒於賊亂。公收葬三四喪。極其情禮。攜其孤孩撫養之曰。060_224d此兒須存。外祀不絶矣。丁酉。賊兵再動。及其敗還。徑由本府。公未及遠避。遽遇凶鋒。亦不自亂。罵不絶口。遂不免禍。嗚呼。天不祐善。至於是哉。公雖不得終承庭訓。從前累世所積之善。所尙之風。流在家庭者。深且厚矣。其所傳襲。有所來矣。何獨資稟之美哉。至於平日百行。固非外人所得悉也。而蓋皆恒人所不可及者也。公配乃平壤趙氏。卽宣務郞通禮院引儀仁復女也。生於嘉靖壬子。歿于萬曆乙酉。生四男。長曰弘慶。無子。以第四弟晉慶第四子慄爲後。二女。長適李。次適金爾後。李有男女。金有一男。皆幼。次曰亨060_225a慶。有四男四女。男長曰㥣。娶陽城李維聖女。生二男。曰。餘幼。女長適生員蔡以復。次適正字金廈樑。次適士人鄭。餘未字。次曰履慶。有四男三女。男曰愉,曰愑。餘幼。女長適士人全佇。早孀餘幼。次曰晉慶。有五男三女。男長曰愭。娶海平吉昌善女。冶隱後也。生三男。皆幼。次曰愰。娶府使崔山輝女。生一男一女。皆幼。次曰悏。娶縣監權應。生女。次曰慄。爲弘慶後。娶士人安景淹女。生一男幼。次曰㥠。女長適士人任景尹。生三男一女。季胤晉慶。以崇禎七年春。蒙恩除從仕郞永崇殿參奉。參奉曾修慟慕錄來示。仍曰。某等060_225b爲先人伐石當鐫。敢請錄其陰。顯光不但平日相與之分。固不尋常。况今連家之義。旣深且重。何敢辭焉。銘曰。
朴出羅祖。寔天攸錫。分封列境。密派最赫。曰惟龍巖。善鄕挺特。有師有友。竆討隱賾。公爲嗣孫。以繼以述。明鏡肻堂。鳶魚妙察。不幸遭亂。操守愈確。處困亨道。臨變惠迪。天意難知。不祐有德。善旣世積。後豈無發。後人何鑑。鑑此竪石

 

愚伏先生文集卷之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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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啓辭
憲府請削濫錄勳列啓 戊辰○上疏辭勳。不得請。過國忌後卽以公論發之。期於必免。後竟得請。 a_068_14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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賞一人而千萬人勸者。以其賞當其功而足以爲慶也。無功者僥倖則有功者解體。此先王之所以以賞僭爲戒也。而況錄勳之擧。又是國家賞功莫大之典。何可容一毫濫僞於其間哉。今此逆賊兇慘之謀。垂發於一夜之內。而068_149c幸賴上變先入。國以不亡。告者之功。雖分茅裂土。有不足惜。而中外表表在人耳目者。不過六七人而止。而錄勳之數。乃至於三十二人之多。其無功而濫錄者。蓋肆分之三矣。近世錄勳之不公。議者扼腕。而未有如此之甚者也。至於推官之竝錄。作俑於乙巳權奸把弄之手。不可以爲法。己丑之事。雖出於先王特命。而一時主公論者。極力爭之以爲不可。許䙗等雖曰元勳。何得妄有陳請。有如授例之爲乎。請中外首告者若干人外。其餘冒錄者。盡行削去。以重錄勳之典。以杜僥倖之門。兇逆犯闕之期迫在一夜。則宗社之危。間不容髮。人臣之義。所當狂奔盡氣入告之不暇。而洪瑞鳳旣於朝前得許䙗之書。沈命世亦068_149d於闕中見崔山煇之報。而或遲留私室。或出外謀議。日夕。始令告者自爲上變。以致分部太晩。事勢窘急。昏黑之中。對面失賊。此二人俱以勳戚宰臣。義同休戚。而欲避告變之名。幾誤大事。罪在難免。有何可賞之功乎。請洪瑞鳳,沈命世幷命先罷後推。洪瑞鳳削去勳籍。

 

 浦渚先生集卷之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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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箚 十四首
處置兩司箚 戊辰 a_085_15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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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多官竝引嫌而退。許之告。因洪瑞鳳而發。則不可謂之無功。昔漢霍禹等謀反。男子張章先發覺。以語期門董忠。忠告左曹楊惲。惲告侍中金安上。章與忠等皆得封侯。今以許之書告於朝廷。以是參勳。似無不可。諫院之以爲當錄。別無錯謬之失。至於崔山輝聞秀香之逆謀。告於金澃。使傳言於沈命世。實與張章之語董忠無異。不可謂遲告。似無可罪之085_156b事。不爲論啓。亦無不可。人臣聞逆變。不卽發告。固爲可罪。然上變是何等重事。詳審愼密。亦或一道。似不足深罪。洪瑞鳳之失。只在論功不均。恐不在發告之遲。不論顯然之失。而論其不足深罪之過。且謂不可遽爲元勳則可也。至請削勳。似爲過激。論事之體。未免失當。前後所聞。自謂差誤。則論事失實。在所難免。請大司諫金尙憲等出仕。大司憲鄭經世等竝命遞差。取進止。

 

 

箚 十四首
崔山輝事箚 a_085_16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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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崔山輝以遠方寒士。其父方在獄中。朝廷論罪至於死。使山輝爲不善之人。懷怨懟之心。則聞秀香凶逆之言。雖不入於其黨。亦且坐觀成敗。冀以脫其父於罪籍。乃汲汲告之。是其心以其父之得罪。乃法所當然。不可爲怨。而唯以宗社之禍。君父之難爲悶也。是其忠義之誠。比之搢紳之士受國厚恩。及085_163a無罪責者。可謂百倍。誠宜特加優寵。以奬其善。且山輝所告之賊。皆是其中巨魁腹心。則其功亦豈少哉。或以其遲告爲罪。此則大不然。夫山輝聞秀香之言。在人定之後。其時夜禁甚嚴。人定後不得往來。待聞曉鍾。奔告金澃。使言於沈命世。乃是卽告。不可爲遲也。山輝之使言於沈命世。欲命世上達也。以漢時張章,董忠等告霍禹之事觀之。則命世自當上達。不當還使山輝自告也。然則雖曰遲告。乃命世之遲也。非山輝之遲也。故臣等竊以爲山輝善則最大。而罪則無也。自山輝上變。兩司停其父晛按法之085_163b啓。乃嘉山輝之善也。然晛因流六鎭極邊之地。夫晛之罪。以法言之。則雖死不爲過。流竄之罰。亦以情恕也。然山輝之善。足以免其父之罪。則竊恐赦之爲宜也。夫國家待功臣。與之同帶礪之盟。載鐵券之書。賜功勳之號。尊其爵富其家。所以寵異其善。使享永久之福也。今以山輝之情言之。雖尊官厚祿。極人臣之榮。樂莫如免其父之罪也。然則寵待山輝之道。莫如赦其父也。昔淳于意有罪當刑。緹縈一言。漢文詔除之。今山輝之善。非如緹縈之一言。且國法宥功臣子孫。至於原從亦然。恩澤可謂至厚矣。夫子孫累085_163c世。猶且宥及。況其父而不得免乎。山輝隨父北行。作旅邊陲。孑孑孤寄。恐非所以優待有大功之人也。今山輝幸蒙天恩。得廁朝籍。伏請殿下特赦崔晛之罪。召山輝以馹騎。使與其父偕來。則非但山輝父子感激恩寵。滅身無以仰報。凡在瞻聆。莫不感動。知朝廷待爲善之人如是其厚。而爲善之報。可以及於其親。皆思勉於忠義矣。臣等於山輝。絶無相識之分。誠以其善可嘉。其功甚大。朝廷待之。特宜優厚。以勸人之忠。恐或以庸臣遇之。使人心落莫。不敢不言。取進止

 

 

東溪先生文集卷之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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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附錄
知舊簡札[李延平君 ] b_018_26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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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因一番是非。致令朝著不安。老夫妄作每如是。可笑。鄙言只欲明是非。以壽國脉耳。崔山輝之錄勳高下。本不干涉於鄙生矣。若以常情言之。鶴谷淸陰。皆我向慕情切者也。失一擧措。寧有疎外之018_270a理哉。但欲救其失。而言不得不直耳。且淸陰避嫌。欲罪山輝。果爲無理。玉堂遞憲出院。尤極無謂。昨欲上箚。以明是非。而徐觀諫院處置後爲之。亦未晩也。故姑停矣。頃日景任叔平輩所爭皆公也。以五十年故舊之情。深悶其陷於好名之域。不自覺悟。故鄙書所謂欲拔令兄於千仞深淵云者。爲景任計。可謂勤矣。到今景任輩大覺悟。必感我忠告矣。生之向日庭中所言。欲防後日計也。非欲深罪未覺前事也。鄙意自今以後。勿論彼此。一心協恭。可否相濟。圖治太平。永壽國脉。吾儕事也。願以018_270b此意。傳布於景任如何。倘非尊公。何敢發此口。

 

晩悟先生文集卷之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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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李尙書 b_018_409a
[UCI] G001+KR03-KC.121115.D0.kc_mm_b129_av006_01_016: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018_409b達道妄陳愚見。仰瀆威尊。恭竢譴責之至。乃蒙台慈還賜手敎。禮意勤厚。伏讀三歎。有以見明公位愈高而心愈下也。昨得邸報。自上有伸理寃獄之敎。此正相公將順聖美之時。玆敢略貢所懷。少答盛眷。伏惟垂諒焉。頃於治獄之日。悉用曠蕩之典。歡聲霆震。遠近風動。而不幸逆孼繼起。連累寔繁。自經孝立之變。有司奏讞。專事刻深。逮捕誅竄。殆無虛日。恐非朝家欽恤包容之本意也。相公因此審理。明査罪案。其情跡之疑似不明者。竄配之。已經勘斷者。勿018_409c復鉤覈。務從寬貸。俾無輕罪重律無罪橫罹之患。則豈徒聖上好生之德。洽于民心。相公輔理之道。亦庶乎有得矣。至於前監司崔晛事。論之以迹。原之以情。寃莫甚焉。古之有功者。宥及十世。十世猶且宥之。况以功臣之父。處橫罹之地者乎。今者會盟之日已迫。勳府獻啓。枚擧新舊功臣子孫之在罪籍者。而未聞一言及於崔晛。毋乃拘於體面。不敢任自擧論耶。崔山輝之參勳也。相公亦嘗抗章而力扶之矣。今因聖敎而幷爲論啓疏放。實是審理之所當先。018_409d未知如何。煩溷至此。竢罪竢罪。

 

 
晩悟先生文集卷之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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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李尙書 b_018_40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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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_409b達道妄陳愚見。仰瀆威尊。恭竢譴責之至。乃蒙台慈還賜手敎。禮意勤厚。伏讀三歎。有以見明公位愈高而心愈下也。昨得邸報。自上有伸理寃獄之敎。此正相公將順聖美之時。玆敢略貢所懷。少答盛眷。伏惟垂諒焉。頃於治獄之日。悉用曠蕩之典。歡聲霆震。遠近風動。而不幸逆孼繼起。連累寔繁。自經孝立之變。有司奏讞。專事刻深。逮捕誅竄。殆無虛日。恐非朝家欽恤包容之本意也。相公因此審理。明査罪案。其情跡之疑似不明者。竄配之。已經勘斷者。勿018_409c復鉤覈。務從寬貸。俾無輕罪重律無罪橫罹之患。則豈徒聖上好生之德。洽于民心。相公輔理之道。亦庶乎有得矣。至於前監司崔晛事。論之以迹。原之以情。寃莫甚焉。古之有功者。宥及十世。十世猶且宥之。况以功臣之父。處橫罹之地者乎。今者會盟之日已迫。勳府獻啓。枚擧新舊功臣子孫之在罪籍者。而未聞一言及於崔晛。毋乃拘於體面。不敢任自擧論耶。崔山輝之參勳也。相公亦嘗抗章而力扶之矣。今因聖敎而幷爲論啓疏放。實是審理之所當先。018_409d未知如何。煩溷至此。竢罪竢罪。

 
晩悟先生文集卷之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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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崔訒齋 b_018_40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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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_410a自蒙朝家霈典。嚮風馳慕。殆無虛日。金生來伏聞令駕利度重關。儘所謂嶺海風霜不能病元城者。爲之慶賀千萬。信后有日。不審御者方到何處。幾日當抵都下。而一行大小安穩。無他擾否。達道賤疾近益沈痼。未得前進攀候於路左。瞻望行塵。罪恨徒積。古語云行百里者半九十里。伏願益加衛重。副此遠誠。

 

晩悟先生文集卷之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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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崔重吉 喆○壬寅 b_018_41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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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者辱致情問。敎告諄悉。苟非知之深愛之厚。何以及此。嗟乎。友道之缺絶也久矣。惟吾子能慨然自拔於流俗。以善責人。以道勉人。如僕無似。幸孰大焉。盖其所論。辭高語壯。縱橫奇偉。令人起望洋之歎。然頭緖太多。無端的可據之地。018_411c不幾於大軍之遊騎出太遠而無所歸乎。愚聞之。下學人事。便是上達天理。非人事之外。別有所謂天理。須從日用彝倫上講求探討。自然心地開明。義理昭著。日見其高深遠大而不可窮矣。今於大本切要處。不自實下工夫。厭常而喜新。舍正而求捷。溺心於無用之地。則縱使馳騁性理之窟。出入造化之原。畢竟無益於身心。而誤了一生家計矣。此與南越王黃屋左纛以自娛者。何以異哉。僕之爲此說者。非直謂吾子之有是失。今因盛諭之及。略質愚見如此。未知如018_411d何。如僕何足道哉。少從父師之間。略有所感發興起於心者。而鞭策不嚴。頹懶常勝。迄未能高着眼硬着力。窺得前人用心處。到得前人立脚地。苟非吾子之優游善誘。幾乎枉過了歲月矣。繼自今吾子有以見敎。而僕有以求敎。相與講磨切磋。不遂爲君子之棄而小人之歸。則僕之幸也。吾子之賜也。
 
河陰先生文集卷之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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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汝正 戊辰 b_020_11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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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洛之後。未聞家鄕消息。今且改歲。想惟閤履多慶。遙賀不置。余幸得免恙。昨昨除工部貢外。六鷁功名。堪可笑也。逆獄又大作。非如李仁居之比。極可寒心。逆徒期以今初三犯闕。事將不測。而許,黃縉自竹山來告變。崔山輝,金澃自禁府密通于靑雲君。兩處所告。如合符節。城中大震。逆魁許逌,李友明。已就擒承服。而其類020_114a皆大逆之徒。小亦間之。鄭趙兩原任及金戶判,崔判尹。皆出其招。而自上特命勿問。盛德之至也。延平箚子。以去草必去其根爲語。亂攻兩司。兩司俱避還出。而大槩則仁城未免焉。此外不須言。

 
河陰先生文集卷之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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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附錄
墓碣銘 並序 [韓致應] b_020_19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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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靑松士人申弘佐袖其祖河陰藁數冊。授不佞曰。吾兩家舊有孔李誼。此藁可案而徵。籍以請碣文焉。不佞取閱卷中。載吾祖柳川公葬時事甚詳。有祭文。皆吾家文獻之所未悉者。不佞作而曰。有是哉。先契若此。是役也烏敢辭。乃言曰。公諱楫字汝涉。河陰號也。申氏系平山。麗季有諱賢。國子進善左僕射。恭愍朝。奉使皇明。進金紫階。諡文貞。爲分派之祖。至孫諱得淸。官太僕正。見麗運已訖。始退居寧海。後因爲貫。歷一世入我朝。有諱永錫。以文行授敎導官。諱祉020_191d以孝行除義盈庫副使不就。鶴峯先生稱孝友因心。行高當世。後人卽其居合江上立祠。生諱命昌郡守。卽公五世祖。高祖諱眷副司果。曾祖諱從渭知丑山郡事。朝廷錄孝行案。命賜影幀三梁冠服。追配合江祠。祖諱演習讀官。贈漢城右尹。愚伏先生銘其墓。考諱慶男軍資主簿。以公勳贈左承旨。妣安東權氏。參奉濟世女。以萬曆庚辰。生于外家安東松村里。幼有異質。鶴峯見而大奇之。聰悟絶倫。讀數遍輒誦。已能善屬文。九歲作讀史詩長篇。人以爲天才。嘗一日請授大學。右尹公曰。十五入大學古也。公曰然020_192a則小子未八歲。讀小學何也。右尹公喜而敎之。壬辰黑齒亂起。雖在搶攘奔竄中。每挾冊而讀。日記時事。善惡必書。聞大駕遷松京。侍臣多道亡。書之曰某以近侍亡。時公年十三。五月倭逼近境。右尹公問曰。倭若執而欲害。汝將何爲。對曰死生有命。豈可苟活。寧罵賊而死。右尹公奇之。右尹公有奇疾。時擧家竄山谷。欲溫處調理。無可爲。公徘徊谿磵。得一石窿然如竈堗。試火之其上果煖。遂得調治。人皆異之。時方伯李用純爲倭所廹。竄入安德。欲埋軍器而走。詢諸鄕。公以竗年在席末。慨然對曰。軍器所以禦敵。今賊020_192b近而埋之。非大將之策。况主將先遁。人心果可鎭乎。舍此凾關。何城可守。方伯慚服。戊戌天將留鎭境上。㬥掠日甚。公獨守空家。召集居民。接應天兵。儼有不可犯之狀。唐差官等見而禮之。以紅字書禁亂牌文。糊于大門。以防排突。故所過無不蕩殘。而獨公家免焉。時家有小婢爲楊經略鎬軍官所狎。欲與俱歸。公聞而追及於義城地。直犯棨戟。乃勵聲曰。老爺東征日久。信義服於遐外。乃以異域人物。犯此厲禁。非柔遠之道也。經略停車聽訖。卽杖其軍官。遂脫其小婢還之。父老或難之曰非鄕曲年少書生所及。亂定。作020_192c平倭頌。以替獻芹。己亥省克堂金弘微宰是邑。經亂之餘。以振作人才爲先務。公首被奬拔。一日與仲氏柁及姨兄鄭石門榮邦喟然歎曰。上無嚴師。下無強輔。加以山郡僻陋。誰能作興。乃負笈遊愚伏門。逐日講學于玉成書堂。距栗村可五里許。雖風雪猶不廢往來。每自書堂計步數。如是者累月而終不差一步。其攻苦如此。自是造詣日高。同學諸公皆畏服。甲辰以晦齋先生辨誣事。同諸儒陳疏。宣廟寵答之。設廷試。以慰遠儒。公與焉。五峯李公所贈詩。有吾道南歸後。須起魯諸生之語。乙巳與無住洪公鎬,開湖金020_192d公是柱,松塢鄭公佺。讀書廬江書院。公因曰人當友勝己者。與某某同業。覺有益。是歲遭祖妣喪。過葬或勸之肉。公愀然曰。朞之喪。莫重於祖父母。無故食肉。是忘恩也。丙午捷文科。戊申差三陟敎授。己酉付正字。秋參東堂試官。先是權貴子有侵侮退陶者。遂停擧其人。物論快之。由是見忤遞罷。或曰某也沮之。公笑曰臧氏子。焉能使余不遇乎。辛亥叙付著作不赴。時愚伏爲柳活輩所誣。公憤然草疏將辨之。被愚老力止。不果上。壬子陞典籍。時廢朝政亂。仲氏柁以詩戒之曰直須行當義。何必往非招。及永昌獄起。棄歸020_193a十年。不以片札及洛下。惟與一時諸賢。優游嘯咏。若將終身。亦以奬進後學爲己任。遠近來學者。以數十計。庚申丁母夫人憂。哀毁踰禮。築室于墓傍。日展哭。癸亥仁廟改玉。擢爲求禮倅。未幾當适變。與掌令崔荇謀義兵事。通諭列邑。莫不激感。於是悉發縣中諸色軍。將赴難。適因夫人洪氏喪。以其兵送全州尹權奉一。勸其銳進。致書于水使奇宗獻。急令出屯境上。啓論統營中軍羅允素濫率貽弊之罪。自是公行之過縣。不敢復有恣者。在縣一以淸簡爲政。治爲湖南最。時縣被水害甚。民大飢。發倉以賑之。統制使020_193b具仁垕以流逋數千石。督徵于縣。公論辨不從。仁垕啓罷之。縣人奔訴于道伯請留之。公爲文曉之曰。官之才疏政拙。有何惠澤及民。而乃敢虛張褒頌。狼狽我去留也。遂卽歸。行李蕭然。惟圖書數篋而已。邑民立銅碑以寓去思。丙寅除刑曹佐郞。移拜江原都事。乞覲南歸。丁卯正月。卒聞淸兵犯邊。倍道疾馳四日而達原營。方伯崔訒齋晛領兵赴漢江。以道內事及軍務八條。專委於公。凡繼援運餉等事。隻手勾管。又招募士民。辭旨惻。有足動人。體察使張晩退次臨津。副元帥鄭忠信留陳新溪。羽檄旁午。文移日積。而020_193c公左右策應。不絶糧道。大軍賴以接濟。又徵兵于嶺東。催糧于嶺西。分定差使員。便宜從事。馳到鐵原。與體府從事李公景奭面議兵糧調度。李公一見如舊識。傾心聽之。時賊兵住平山。伊鐵間居民。皆避竄四空。公招來還定。官軍到瑞興告飢。公以百斛越境救之。副元帥致書謝曰。是天贊吾東。及賊退。經用大詘。議開諸道鹽鐵之路。朝廷難其人。啓請公兼從事官。遂廵審嶺東。馳啓土瘠凋弊之狀。多蠲减。東民頌之。戊辰授刑曹正郞兼春秋記注官。時柳孝立獄起。公密贊完海君崔山輝。以告變亂定。錄寧社勳020_193d一等。旋授忠淸都事不就。庚午宰務安。縣有寃獄久不决。天又大旱。公片言折之。卽日雨果下。又擧民瘼之甚者十餘條。報而革之。方伯有百里太古。列邑矜式之褒。每月朔。率邑子勸講學。薦一鄕之有志行孝烈。以樹風聲。乙亥解官歸。丙子聞淸兵犯都城。大駕遷南漢。馳見方伯于聞慶。請以單騎赴難。會龍宮士人擧義。推公爲將。時官軍已盡屬於方伯。義兵無下手處。於是抄士族庶孼有武才者若干人。犒饋將發。聞本道全軍敗䘐於雙嶺。方伯退次木溪。卽以所領兵付參佐權摶。馳進聞慶。與金從事宗一,權司諫020_194a濤,姜修撰大遂。抵書邀方伯。謀再擧。方伯乃以公爲典糧從事兼參謀官。公料理二萬兵二十日糧五千餘石。以遠近便運餉。時新抄官軍相繼而至。無所統屬。公建議以文希聖爲中軍。裵時亮,許東立爲左右兵使。伏于兩嶺間。又言李從事民寏知謀過人。卽使馳赴陳前。於是軍中始有紀律。旋聞南漢不守。以兵糧文簿送方伯。卽發奔問之行。與擧義諸公聯名上章自訟。批以嘉爾爲國之忠爲答。仍授漢城庶尹,刑曹正郞。旋受本道點馬之命。入東萊絶影島。晉州興善島。具陳保存牧人之策。又還舊職。戊寅除成020_194b均司藝。尋以有循良之績。拜公州牧使。辭不赴。己卯授司僕寺正。上察其前後服勤殫竭之誠。特賜表裏廐馬及近思錄一帙。異數也。秋除密陽府使。未及赴。以省覲還。忽病篤考終。九月二十四日也。臨終無他語。惟以無絲毫報國及未得終養爲恨。享年六十。葬龍宮夢美酉向原。會葬者數百人。配缶溪洪氏。司正德祿女。虛白亭貴達玄孫。無育。以從子光夏爲嗣。後配商山金氏。生員繼之女。生二男光旭,光星。光夏無子。系子邦式。孫萬啓俱無後。光旭二男邦允,邦儁。三女朴存道,全萬㝡。南錫明。光星二男邦翊,邦重。020_194c三女趙岑,琴格,曺翼鳳。曾玄以下不盡錄。公以英邁之資。承師友之益。自在弱齡。專意問學。依歸愚老。大被奬許。並遊於西厓寒旅之門。警發亦多。嘗往謁寒岡。寒岡倒屣而迎曰。世多染跡於鄭仁弘。君獨過其門不入。可尙。因出所輯禮說。俾公參攷。旅軒自未冠甚器之。如避世,戒懼臺等處。皆陪遊嘯咏之地也。出身後。一時士大夫延譽甚廣。如漢陰,白沙,五峯,白軒,修庵諸公。皆道義之交。而且於吾先祖柳川公。慕悅甚至。觀於祭文可案。平生嗜書。無所不讀。最喜朱子書。嘗手書陶山講錄。日參互而攷證焉。又要刊行酌020_194d海於方伯沈演。病未遂。又旁通象數卜筮醫藥等書。無不探賾幽隱。篤於人倫。在親側。盡其懽心。嘗於亂時。盡室遘癘。公時年幼。右尹公俾各處。禁其往來。而每乘間潛候。不使知之。居憂三年之內。雖日用節文。一一箚記。無一毫放過處。兄弟甚湛樂。人無間言。律身以廉謹自持。雖歷典郡縣。歸無甔石之儲。或有周之者。據義有未安。雖微細必辭之。曰無處而饋。是貨之也。性好山水。嘗取周房山靑鶴洞以自號。又與李蒼石諸先輩。遊安東紫霞山水石。至今人稱五仙洞。槩其立朝三十年。直道而行。無阿世苟容之意。故經020_195a歷兵亂。勞勩甚多。而往往爲時流所齮齕。卒不得顯庸。顧潦倒於郞潛郡紱之間。此其公議之所深惜者。而若其在關東而策應兵糧。在管餉而請寢大同之捧。在鹽鐵而論九官之凋弊。在務安而有民瘼條救之狀。在點馬而有保護牧子之啓。此其居官施設之粗跡。而何足見公所存之萬一耶。苟使之得位而展布所蘊。則公而利益民國。大而維支世敎。容有旣乎。總而言之。鞠躬盡瘁之蹟。居家孝友之實。皆從學問上推出來。是可以尙論於百世之下。而第其遺稿若干卷。散逸於兵燹。並與文蹟之關係於世者。十亡020_195b八九。尤可恨也。謹取年譜日記。略加撰次。銘曰。
天旣生才。俾也成就。際時艱虞。厥施不究。鞠躬盡瘁。進不苟售。惟其有之。何事於富。迄玆幽潛。慨彼矇陋。久鬱必闡。理固不謬。我銘于石。百世可壽。
崇祿大夫前行兵曹判書兼經筵春秋館事韓致應謹撰。

 

天默先生遺稿卷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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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應製錄○祭文
卒寧社功臣崔山輝致祭祭文 b_021_59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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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_595b惟靈。簪纓世裔。詩禮家聲。早年筮仕。不階科名。歷試郡邑。頗有聲績。慈祥留惠。廉簡自飭。往在戊辰。孽臣謀逆。炳幾先告。克施天戮。功存社稷。名映勳籍。云胡無祿。遽至不淑。言念功載。寤寐泉塗。以子知父。缺缺 無辜。不負忠孝。無愧永錫。沒有餘哀。致禮窀穸。靈其不昧。庶幾歆格。

 

 
魯庵先生文集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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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庵先生年譜 b_027_18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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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宗顯皇帝萬曆二十五年 宣祖大王三十年 丁酉十二月二十七日癸未 寅時。公生于慶州安康縣沙里洞里第。生而有異相。經六七日。終不開眼。家人憂之。適小婢奔過覆水器。公忽開眼。眼光炯明射人。人不敢直視。李夫人大異之。及長眼若明星。夜不燭而能看書寫書。平生嘗瞬養。未嘗瞋視。
二十六年戊戌 公二歲能解語。
二十七年己亥 公三歲○公能解字書。直長公憫其穎悟太早。不與書冊。有兒讀小學。公傍聽而輒多傳誦焉。
三十年壬寅 公六歲○公嘗出遊門外。有老婢遺以茄子。公受而旋置之。婢怪之。以告母夫人。夫人問其故。公答曰吾豈受食於婢子乎。母夫人曰初何受之。公曰以老者所饋也。凡出言027_188b行事。類皆如此。直長公嘗拊背曰大吾家者必此兒也。
三十三年乙巳 公九歲 八月二日。丁直長公憂。公哭擗如成人。勺水不入口。母夫人乃泣諭而強之粥飮曰汝若不歠。吾亦不歠而死矣。汝其不軆吾意乎。公曰母氏先歠。吾亦歠之。母夫人爲公歠之。公亦如之。其執喪守殯。朝夕拜奠之節。無不以至誠行之。遠近見聞者。無不悅服。
三十五年丁未 公十一歲 十月服闋。公哀毁過度如初終時。母夫人改以新服。終辭而不着。
三十六年戊申 公十二歲 春。母夫人使公就學于梧峰申先生。諱之悌。卽直長公姨兄弟也。見公奇偉聦明超出。學子中最器重焉。
三十七年 光海元年 己酉 公十三歲○公受學不朞年。經史子集百家等語。無不貫027_188c穿。潛心於孝經論語。或至忘食。至於進退折旋。敬唯應對。不待指敎而成就。
三十九年辛亥 公十五歲○公學業大進。已知名於世。
四十一年癸丑 公十七歲 春。聘夫人驪州李氏。副正宜澍女。 ○秋捷鄕解。自是擧輒居魁。
四十二年甲寅 公十八歲○李東岳安訥適守慶州。聞公名。請與之同遊兄江。公謝以布衣。不肯赴會。李公益艶服其所守。訪公私第。又次紅桃韻三首。
四十三年乙卯 公十九歲 秋捷庭試初試。遊泮。與諸生講業。衆皆艶服稱東都李杜。
四十四年丙辰 公二十歲○公嘗嗜酒。母夫人責警之。公遂絶飮。不復近口。
四十六年戊午 公二十二歲 謁愚伏鄭先生。先生嘗稱之曰金某027_188d重如山岳。今世難得底人。每見公必禮貌之。
哲宗章皇帝天啓元年辛酉。公二十五歲 謁潛窩李先生。諱命俊。時在盈德謫所。公與荷潭金時讓,沈絡,趙克善諸公講論經學。尤詳於性命理氣之原。先生曰非但學識精明。臨大節而不可奪者。必此人也。
三年 仁祖大王元年 癸亥 公二十七歲。仁廟改玉。初中進士。罷榜。
四年甲子 公二十八歲 八月增廣。俱中司馬兩試。金鶴弘郁,宋同春浚吉,鄭翰林杺同榜兩試。
五年乙丑 公二十九歲 八月中別試壯元。○同月二十八日。授宣務郞成均館典籍。○十月除工曹佐郞不赴。
027_189a六年丙寅 公三十歲 六月。除戶曹佐郞。呈辭下鄕。其後連除典籍禮曹佐郞皆不赴。
七年丁卯 公三十一歲 二月。公聞有胡警。將赴京。至尙州。廵察使金公時讓以朝命留公營下。與之同廵江右。按察軍務。○五月十三日。除禮曹佐郞不赴。○七月謁旅軒張先生于仁同府舍。○十月八日。除良才道察訪不赴。
毅宗皇帝崇禎元年戊辰 公三十二歲 正月二十四日。除刑曹佐郞。○三月六日肅謝。七日除奉訓郞行兵曹佐郞。十三日除司諫院正言。○四月二027_189b十九日。除司諫院正言。呈辭不赴。○七月十二日。除奉直郞。行禮曹佐郞不赴。十三日復除司諫院正言。○八月肅謝。因上疏引避下鄕。時臺諫論一守令厚饋相臣。相臣引避。上以臺諫語侵大臣。特命補外。公上疏畧曰言之過激者。固無害於君。而言之柔順者。非國之福也。是以好過激之言者。其國興。喜柔順之辭者。其國亡。所以興亡者。亦豈好一諫而遽興。惡一諫而遽亡。只是好諫則言路自弘而有開張廣大之益。惡諫則言路自狹而有邪僞壅蔽之患。積此而終必有興亡之判矣。又曰來諫之責。雖在世主。而使之能言者。亦在時相。古之贒相。必引天下之言者以處言地。而惟恐君不改其過。己不聞其失。故唐之裴垍以諫官言時政得失賞之。論者。稱其忠於君而不負相業。盖人臣之諫君父而得罪者。冀幸君之一悟。而身雖被戮。猶且甘心。若夫言相臣而見忤者。常慮其憾恨。而身雖顯揚。不得安意。是故鄙諺曰憎於上典027_189c者生。憎於同班者不得生。此有所傷而甘同比之辭也。世之事君者。或不無患得失之鄙夫。則不以此言爲戒者有幾。如有能言之士。則爲大臣者當擧之於一人。稱之於衆僚曰。某人非揚君之惡。只是愛君之心。某人非疾我之辭。只是憂國之公言。雖過激其誠可嘉云爾。則必將皷舞一世之士。而納君於無過。自底於寡尤。果能此道。雖有好訐者。可無刺擧之隙矣。何必一言未穩。輒自控辭。有若循例避嫌之爲。而坐令言者見斥。以貽疾言之譏耶。大槩出政治者。吾君與吾相之事。而爭政治之得失者。諫官之職也。則爭政治之得失者。不得不擧君相之過勢也。是以君有過。尙且極言不諱。直斥其非。何至於大臣而獨不得言乎。如使臺閣杜口鉗舌。莫敢矯大臣之非。則今之大臣誠贒矣。設或不幸。而後雖有專權亂政之人。誰敢開喙爲殿下一言乎。大臣爲國家遠慮者。必將惕然以懼。以己有過。人得言之爲幸。而所憂者不在於語侵矣。殿下亦委任大臣。責之以協和朝廷。優容臺諫。責之以犯顔勿欺。以昭平明之治。不宜形迹彼此。疑阻大小之情。使臣民解體也。方今懼灾恤隱。027_189d憂勤至矣。而赤子魚喁。覊縻爲事。未獲勝筭。而虜且生心。殿下之廟社生靈。未知將置之何地。此誠爲痛哭流涕者也。 ○八月二十日。除吏曹佐郞不赴。
二年己巳 公三十三歲 四月二十二日。復除禮曹佐郞不赴。○九月除禮曹正郞。○九月肅謝。十五日除兵曹佐郞。○十二月二日。行兵曹正郞。
三年庚午 公三十四歲 二月二十日。特除晉州判官。○四月到任。盡革舊弊十二件。○十月二十三日棄官歸。時兵使李榏多行不法。貽害民間。公一皆沮抑。不得任其所爲。李榏以此懷不平。搆誣於廵使李溟。廵使廵到時。卽誤詰侵困。公秉法不撓。仍遂棄歸。州之男女老少。齊訟于廵使。廵使慙悔。三送褊裨。以謝其失。公不聽歸家。州人立碑以思之。 ○十二月二十一日。027_190a除司憲府持平知製敎。以母夫人病。陳䟽不赴。二十八日聞潛窩先生訃。
四年辛未 公三十五歲 正月五日。除朝散大夫禮曹正郞肅謝。○二月五日。會葬潛窩先生。有輓祭文 ○三月十四日。除司憲府持平。○四月肅謝。不久又進啓乞遞。聖旨申諭。不得已出仕。時許積以告柳孝立之變。策勳爲陽陵君。疏贊追崇之禮。諫院論之。上以侵侮勳宰。殊極酸妄斥。發論臺官引避。於是兩司相繼皆避。玉堂當爲處置。未及之際。公以持平將欲入謝。府吏入來言玉堂明朝當爲處置。處置後入謝如何。公謂府吏曰旣以臺官入來。何可知其事而等待玉堂處置乎。乃入謝。因處置兩司。請並出多官。上特遞發論二人。故遂連上避啓。而遞卽還鄕。 ○子晩昌生。
027_190b五年壬申 公三十六歲 正月四日。丁母夫人李氏憂。公居廬柴毁成疾。幾至不救。 同月十九日。除司憲府持平。朝廷不知有喪。故有是命。
七年甲戌 公三十八歲 正月四日。公自墓廬返家。祔廟之日。卽出居外。以終禫月。○三月服闋。○四月二十八日。拜奉正大夫行成均館典籍不赴。○五月二日。除司憲府持平。行至義城。呈病而歸。○九月十五日。除金郊道察訪不赴。
八年乙亥 公三十九歲 五月三日。行司諫院正言。○六月上京謝恩。與鄭桐溪蘊,趙浦渚翼。陳避謝啓。時仁027_190c城君三子佶,億,健。逮配濟州已屢年。上命放還。兩司請收成命。正言趙壽益極言兩司之非。兩司論壽益以削去仕版。大諫鄭蘊又疏論之。兩司並論鄭蘊以削去仕版。公肅謝之日。爲避啓。畧曰昔淮南王長謀反而死。長之四子。卽今日之佶,億,健也。漢文帝恨惜長之死。而矦其四子。今殿下之屈法伸恩。特宥佶,億,健等。自符漢帝之寬厚。則帝王親親之仁。前後一揆。此盛德事也。聖德如許廣大。宜無一物之不化。使佶,億,健等能率德改行則至矣盡矣。若曰末世之人心不淑。天下之事變無竆。而慮其密邇輦轂。怨毒思亂。則亦豈無善處之方乎。而人有愛君以德。但思將順其美之爲義。而念不及他。則其在執法論事。謂之慮事之不密。違衆之有罪猶可也。其曰護逆曰立節曰救解云者。不亦情外之罪案乎。夫人情不甚相遠。立殿下之朝。浴今日之化。而萬一有利其護逆。以爲立節之地而爲之救解者。則誠天下之大逆大賊極兇極愚耳。此豈人情哉。臣恐自今以後。愛君以德之言。無由至於殿下之前也。大司憲趙翼等皆避之。玉堂請出兩司。兩司又並論公以削去027_190d仕版。公卽日下鄕。三日後兩司停前後啓。○時趙翼,朴守弘爲憲府。李景曾,金等爲諫院。 ○八月與尹無谷絳,鄭東溟斗卿等諸友。修同庚稧案。稧員凡四十人 ○十月除侍講院文學。
九年丙子 公四十歲 二月十二日。除奉正大夫行平安都事。○三月赴謝。○四月到任。○十月受由還第。仍不赴任。○十二月二十二日。北虜犯京。駕幸南漢。公聞變驚倒。起行未十里。有廵察 時沈演爲監司 從事之報。公至比安。見廵關受調發糧餉之任。留比安一日。區處分撥後。馳進聞慶。則廵使督令左右兵使前行。隨到踰嶺。逗遛木溪云。故乃還住龍宮。調度左右各邑糧餉。
十年丁丑 公四十一歲 正月五日。公聞雙嶺敗報。卽戴027_191a星作行。曉達聞慶。時都事成台耉獨在。公卽與台耉同議。調發各邑男丁。爲再擧之圖。而一邊報知廵使。因請廵使速還。 七日廵使還住嶺下。專委公以調兵之事。時尹橚以統制使。由迂路過嶺。權濤以前司諫在廵幕爲客。欲以本道兵屬統制使。廵使將從之。公謂廵使曰新合畏怯之卒。無一戰士。廵使宜與道內士大夫糾合奬率而進。或薄死城下。或倚角爲勢。亦難免望風奔潰不可收拾之患。今與不鍊之白徒。推與客將。則不及踰嶺而散。况廵使受命爲水陸節制之使。而不能勸厲本道將士。同死山城之下。擧此軍屬之人。而退坐不進。於義安乎。廵使遂不用權議。乃以裴時亮,許東立等權差左右兵使。使之將兵前進。權謝之。 ○二月初吉。大駕出城。世子及大君北狩瀋陽。時三學士被執去。宰臣南以䧺,朴潢,朴。宮僚蔡有裕,李行進,李命䧺,鄭雷卿以侍講陪從入去。 七日公聞變痛哭。與參謀官丁彥璜,成以性,027_191b及金應祖,崔山輝,張應一同作奔問之行。由驪江向平邱而進。十八日詣闕呈單。所經道路。虜之撤陣纔數日。閭閻皆空寂無人烟。橫屍交積。觸目傷心。路不可行。夜入空舍。晝食曠野。相與呑聲隕淚。間關進步。城中之人。亦無還入者。坊里一空。一如所經處。時政院設廳于差備門側。天語時聞于外。公不覺悽愴哽咽。乃覓寸紙于下吏。呈肅拜單子。 卽日除成均館直講。二十日除兵曹正郞。○三月除持平。以江都事上疏。玉堂請出。乃呈病下鄕。時以江都失守。方論金慶徵,李敏求等。屢啓不允。公謂不宜舍頭臚而先支末。與正言梁曼容議。明日傳啓後。早會中學。論啓金自點等。曼容欣然諾之。明曉詣闕則曼容不在。遂具由上疏。畧曰金自點受西門重任。以敵遺君父。其罪不容誅也。而不但不卽刑章。乃復置身凈地。徒使將士之臨陣不能死者。遠配邊城。此事固無以厭一國之027_191c人心。而至於前領府事尹昉爲大臣十數年。不能爲有無。則及至今日。雖爲宗社一死。猶未足以贖其罪。顧以宗廟提調。奉殿下之命。受廟社之寄。則護廟社而避兵鋒其職也。事旣蒼黃。雖未及奉避。抑死於廟社其分也。忍使廟社神主。汙衊散失。而逃命苟活。終乃泥首。當此之時。廟社神靈。陟降何所。思之不覺隕淚。且呂爾徵雖不受廟社之寄。以殿下肺腑之臣。視廟社蒙塵爲何事。以王子嬪宮爲奇貨。而獨幸一身之全。罔念大臣之節。夫正月晦日以前。卽殿下在山城之日。則其前之款首敵陣者。皆忘君賣國之人也。臣未知此罪。宜重耶輕耶。嗚乎。廟貌顚倒。神主非舊。則祖宗在天之靈。不能安於陟降。異域風霜。故國無期。則王子嬪宮。未免爲沙漠之寄生。而此數人者或偃仰在室。或仍據華秩。恬無愧怍。未聞有引咎之道。殿下之厚此數人者。爲其能護廟社乎。爲其能保臣節乎。今也置此不論。而堅請金慶徵,李敏求等忘備鳥竄之罪者。抑末也。臣竊以爲不誅金自點則無以慰神人之憤。不罪呂爾徵則無以明君臣之分。而尹昉之得保027_191d首領。則廟社神靈。亦不能無憾於殿下矣。臣昨與梁曼容言及此事。同會議啓。而曼容凌晨下鄕。勢難合啓。是臣不見信於梁曼容。而畢竟致此也。疏旣上。朝廷有悚懼稱之者曰胡澹庵斥和疏。無以加此。玉堂請出。三避猶請出。乃陳疏乞遞不許。再搆疏草。未及上而上親批勉諭。召牌踵門。而謝病下鄕。 ○五月十三日除吏曹正郞不赴。○六月七日。連除吏曹正郞。陳疏不赴。○是月錄弘文。與止庵李行進,權堣同薦。 ○七月十二日。除侍講院司書。時李命䧺以使命還朝。命擇經明行修之人以代之。而公預其選。 ○二十二日。往立巖謁旅軒先生。留止兩日。但講質經義。不言時事。旅翁亦以萬里行役。慰勉甚摯。公竟無幾微見於色。卽辭退。 ○八月六日發行。家人莫不危懼。而公厲聲曰臣子當板蕩之時。效死後已。何懼之有。自摹畫像。遺之于家而促發。 宿玉山書院。時李027_192a道昌,李文遠,李光遠,鄭察訪昆弟及載甫諸人咸集。而終宵團話。送至柴嶺下。 ○二十一日入京謝恩。○九月進發西路。留灣上待使行。○十月上使崔鳴吉副使金南重書狀官李時楳至義州。留三日與之偕行入瀋。公在瀋時。雖虜人獷悍。見公必加敬畏。而每陪世子赴宴。必稱金某來參。相顧失色。 ○十二月晦。重患寒疾。
十一年戊寅 公四十二歲 在瀋陽。○正月疾甚。服藥不效。用鍼灸。
十二年己卯 公四十三歲 在瀋陽。時兼禮房 ○四月十八日。往訣鄭文學雷卿于西郊。時公獨與雷卿留館。以本國所送銀子三千兩。爲宰臣朴,淸譯鄭命守私取費用。請覈命守之罪。反爲二人所搆。雷卿被害。公有拿命。雷卿將刑。027_192b公策馬往訣。命守擧杖橫立。咆哮以擊公所乘。公控轡不動曰死生相別。人之情也。何至於此。遂張眼罵之。命守懾伏。不敢遮路。 ○二十日被拿而還。世子送公于館門外。執手而語曰萬里殊域。所恃者惟汝與鄭文學二人矣。今文學不辜而死。汝亦有拿命而去。予非不知這間有釀禍之人。而彼怒方殷。勢將有莫救之道。是皆予之過也。因垂淚不忍釋手。公亦伏地涕泣。不忍辭退。 ○二十一日。與刑官李應徵,質子李徽祚偕行。八日而至義州。與府尹黃一皓。慨論時事而罷。 ○五月八日。入京宿于城西路傍。柳德甫諸人來見 明朝就理論配。同月到盈德。時李聖基爲都事。以上意密諭曰本州外如延日,興海,永川等地。宜從所願。公曰盈德在先墓下流。願配此邑。遂配于盈德。每歲一往來于墓所。 ○秋與寧海倅趙廷虎。慨論時事及淸虜氣數。
027_192c十七年甲申 公四十八歲 正月初吉。有赦命遂歸。前冬鄭命守來我國。還至平壤。極道本國人心之不淑曰金某罪雖應死。屢經大赦。在本國放宥收叙。有何不可。而人有乘夜見我曰金某赦用爲外職。公何不言之於國王而更罪云云。道臣具鳳瑞啓擧其言。遂放還。
乙酉 公四十九歲 四月。聞昭顯世子喪。北向痛哭。訃聞之日。公哀隕殊甚。家人勸進粥水。公却之曰吾受世子厚恩。至此不死。而鄭文學死於不辜。無以暴斷斷之衷。今又世子早逝。我獨生何爲。况罪累纔放。不得赴哭於班次。寧欲溘然而下從。仍復泣下如注。朞年不進肉饌。雖有至情間吊慰處。必替人行之。 ○十二月。哭子晩昌。時送在釜谷金進士建準家。使之同業。二十五日夜劇賊突入。衆皆慌忙逃匿。晩昌獨坐堂上大叱之。因被傷。二十六日午後竟不救。
027_192d丙戌 公五十歲 春。僦居于古羅墓下。彷徨水石。嘯詠遣懷。
丁亥 公五十一歲 春。移寓省法里。住順元家 ○六月除弘文館校理。未及謝。移拜順天府使。時龍洲趙公絅秉銓。首薦公順天。次薦趙士靜伯嶺南。終薦申望久判全州。○公在府。約會諸生。再行鄕飮禮。別築書齋于鄕校傍。捐廩以供。諸儒讀書。文敎大興。
己丑 公五十三歲 正月呈辭而歸。○同月十八日。淑人李氏卒。○五月仁廟昇遐。九月赴哭因山。○十月除議政府檢詳陞舍人。
庚寅 孝宗大王元年公五十四歲 二月十八日。除尙州027_193a牧使。有除朝辭赴任之命。 ○四月到任○五月聞有臺評棄歸。時州人申碩亨,朴之㕀等。爲牛栗陳疏入京。言於時宰曰牧使侵困疏儒。搆捏罔極。聞者皆怒。譁然相告。持平鄭始成發論劾之。道臣閔應協啓聞無是事。相臣李敬輿言于上曰稱以疏儒。搆誣地主。士習駭矣。因屢箚發明之。嚴批屢下。而命囚發論臺官。令公還任。而公終不赴。 ○二十九日除實錄郞廳。
辛卯 公五十五歲 四月八日。除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五月入京謝恩。陳疏因言鄭雷卿之寃。批曰省疏具悉。鄭雷卿事尙忍言哉。言念及此。不覺隕淚。况予之待爾久矣。爾懇至此引避。獨不念我耶。爾其勿辭。安心調理察職。以副區區之望。 ○六月連除修撰。以病陳疏乞遞。批曰省027_193b疏具悉。爾懇至此。可知實病。予甚驚慮。方遣醫官。察症服藥。安心調理。以待病差後察職。以副予望。 ○七月十一日除三陟府使。○八月到任。時有竊爐者。傔從搜其可疑者欲治之。公微責曰失物小而重被惡名於人則吾所不爲也。終不問之。竊者聞而愧之。乘夜還爐。反請治其罪。公之恩愛弘量。盖人所不及處也。 ○九月受由還鄕。聘夫人豐壤趙氏。士人之女
壬辰 公五十六歲 八月差鄕試官不赴。
癸巳 公五十七歲 七月二十一日。除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子世平生。○十月除副修撰。至比安陳疏不赴。
甲午 公五十八歲 七月九日。行禮賓寺正。○八月謝027_193c恩。○十月拜星州牧使。時李應敎道長新歿。家甚貧窶。公聞而歎曰吾莅茲州。不恤亡友家耶。每月捐廩以周之。
丙申 公六十歲 春棄官歸。道臣以善治褒啓。上特命陞用。許積曰今國家纔經瘡痍。民情未及安頓。邑事多有曠廢。非此人莫可使鎭撫。姑令除外。以爲日後陞用何如。上依允。許積雖與公不無雅分。而因柳孝立策勳時。三司連避中公主論。故深啣之。每公薦用。陰沮萬端。
丁酉 公六十一歲 九月除蔚山府使。時與御史鄭萬和有嫌端棄歸。
己亥 公六十三歲 五月孝廟昇遐。公聞變擧哀後。卽具衰服赴京。至聞慶成服
庚子 顯宗大王元年公六十四歲 春。以邦禮誤失事。疏斥時議。出配平海。邦禮未定。故公與許眉叟作儀禮辨說。連疏以斥之。竟出配平海。
027_193d辛丑 公六十五歲 七月蒙宥放還。
甲辰 公六十八歲 七月除副修撰不赴。○十月除錦山郡守。以屢辭不赴爲未安。遂到任。重修學校。以訓士子。改量田疇。以均賦役。臨事周愼。一於誠敬。案無留牘。庭無滯訟。老而不怠。治理稱第一。
乙巳 公六十九歲 秋以老病辭歸。○送子世平就學於榮川張監役 家。
丙午 公七十歲 春。道儒將追論邦禮。齎䟽叫閽。公以打破軆而不正之說。不甚痛快。更陳疏辨。畧曰禮爲長子斬衰者。以己繼禰承祖。長子爲己後而承己之祖與禰。故其服斬衰。爲其將承祖與禰之重也。故庶子爲長子不爲三年。以己非繼禰承祖之故也。則服長子斬衰之義。豈非爲祖禰之重耶。將承祖禰之重027_194a者。亦爲之斬衰三年。則旣承祖禰之重者。於義當何服。夫所謂雖承重不得三年有四種者。爲己在而將傳祖禰之重者言耳。非爲旣承祖禰之重者言也。未及傳重。已在升降之服。何與於旣已承重者乎。夫未及繼禰承祖而夭者。且爲祖禰之重。父爲之斬衰三年。母爲之齊衰三年。則若父歿母在而次子以父命爲後。繼禰承祖。爲祖宗之主。而其死先於母。則其母之服之也。未知當何服。疏有次嫡承重。亦謂長子之文。則不當爲父在長子之服歟。旣承祖禰之重者。豈不如未及繼禰承重而夭者乎。况天子諸侯之軆統。與士庶自別。記曰太子太丁早卒。次子外丙立二年崩。弟仲壬立四年崩。立與不立。曰崩曰卒。辭意甚嚴。無有論其正庶。則此亦可見軆統之尊重絶異處也。以其國君次子。命立爲世子。未及承統而夭。則國君之服。容有可議。夫旣爲繼軆承統之君。而爲宗廟社稷臣民之主。則何可與未及承統而夭者比論乎。其服反不如未及繼禰承祖之重而先夭長子服。則於義當如何。以我國言之。世宗大王卽次子承統之主也。太宗之視世宗。國人之戴世宗。曾不027_194b如讓寧乎。設使太宗喪。世宗雖勿欲斬衰。獨不念先王之重歟。設使元敬王后以讓寧之故而不服世宗其可乎。禮所謂軆而不正。不得三年。非爲已承重者言也。則士庶家喪禮。亦不可執此爲斷。其何妄加於繼軆承統之國君也哉。四種正不正之正字。乃正統之謂也。正字主意專在正統。則旣承正統之國君。亦可謂之不正歟。追擧未及傳重父在降服之制。敢加於旣承正統之國君而斷然短喪。異哉知禮者之議禮也。君父於臣子。其尊至矣。其貴極矣。而臣子之於君父。不知其爲尊貴之至極。則忘其爲正統之主。議禮之間。乃視未及傳統之庶子。此果臣子之心乎。嫡嫡相承。謂之正軆傳重。雖衆子承重者亦同。經爲長子三秊。非爲第一子也。八大君云云之辯。其亦荒唐之甚矣。臣瞢學昧禮者也。亦何敢曰知而自是己見哉。設以私相疑難而講劘者。來告君前。因欲就正焉。殿下因臣之言而特發明問。難疑於知禮之臣。則必不敢不以正對。若不以臣之言爲誤也。則殿下亦宜蹙然而懼。怛然而傷。懼不正之橫加。傷大禮之莫稅。明發有懷。入廟思哀。命祝史陳辭而027_194c謝過。比先王一洒之。出廟而正坐法宮。責三公以不曾捄正之罪。則豈不於先王有光而新一國之耳目耶。
丁未 公七十一歲 公移居榮川。以子世平屢年遊學於是。故因移居焉。○作講學亭。與張公璶,金鶴沙應祖及隣邑諸友。逐日講論孝經禮經等書。而定家禮祭儀。○亭舍尙在錦江里。
己酉 公七十三歲 除尙衣院正。
庚戌 公七十四歲 十月移葬淑人李氏于安東鷰院谷。有墓誌
甲寅 公七十八歲 公自榮川還住慶州舊居。○八月聞顯廟昇遐。公終日痛哭曰老臣不死。忍見今日。027_194d盛年 顯廟壽三十四 賓天。世子幼冲。時十三歲 國事之終梲駕何地。逮聞上明睿出天。聖德日躋。喜而不寐曰老臣其亦幸而得復覩周成漢昭之生此東國。若得周召之輔則臣民之福也。遂搆疏以陳時弊十三條。病未上徹。疏意以憂國恤民情爲主。自平海歸後。爲時輩所沮。仍退鄕里。然怡然自處。一心憂國。無所悔悶焉。
乙卯 肅宗大王元年公七十九歲 五月十二日。考終于寢。是日雲霧四塞。雷雨大作。公曰是吾歸化之日也。因屛去婦女。不言家事而易簀。○公始生時。家後魚萊山屢日有聲。有虎來跪牎前而鳴。臨終時亦如之。 ○訃聞上令道臣優禮致賻。○十二月二十九日壬午。葬于州南六027_195a十里錢邑坤坐之原。黨塾諸生。操文致祭。會葬者三百餘人。○淑人李氏初葬于州北高羅山直長公墓右。庚戌移葬于安東。公嘗以遠窆爲恨。及公之葬也。遵遺志。自安東返櫬而合兆焉。後淑人趙氏葬也。三位合窆於府北神光面飛鶴山南麓酉坐之原。○自朝家劃給守護卒二名。
是歲閏五月初九日。晝講時。右參贊許穆曰金宗一乃嶺南文臣。而仁祖朝有名譽之人。生時未及大用。此則朝野之所共慨惜。如此之人。不可無表章之典矣。上曰金宗一生時未及收用可惜。特令贈職吏曹。○同月十二日贈職都承旨。啓下之日。領議政許穆箚子云金宗一以經幄之027_195b臣。亦有聲譽。而尙未蒙贈。諸臣陳達。意在慨惜。此等事前已面陳於黈纊之下。而臣今不幸有疾。登對無便。茲敢並陳。更願聖明垂察焉。又上箚曰臣頃者進對。屢陳故臣金宗一事。宗一以舊學士。平生好讜直。見忤於時輩。不復用於朝。臣之所陳者。惜其無罪。專指羣小濁亂之迹云云。在許眉叟文集中

     

 

  형태서지
권수제  訒齋先生文集
판심제  訒齋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78年刊
권책  原集 13卷, 別集 2卷, 拾遺, 年譜, 附錄 합 9책
행자  10행 21자
규격  22×16.2(㎝)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原集ㆍ別集 : 서울대학교 규장각, 年譜ㆍ附錄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규장각 : 古3428-682, 국립중앙도서관 : 한46-가1149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67
 저자
성명  최현(崔晛)
생년  1563년(명종 18)
몰년  1640년(인조 18)
 季昇
 訒齋
본관  全州
시호  定簡
특기사항  金誠一, 鄭逑의 門人. 李潤雨, 盧景任과 교유
 가계도
 崔致雲
 參奉
 崔深
 
 東萊鄭氏
 鄭熙佐의 女
 德陽奇氏
 敎導 奇遇의 女
 星山李氏
 秉節校尉 李智源의 女
 崔昕
 
 崔晛
 
 義城金氏
 府使 金復一의 女
 崔山輝
 府使
 朱應邦의 女
 
 昌寧曺氏
 
 載寧李氏
 
 女
 
 李景祿
 忠義衛

기사전거 : 行狀(李象靖 撰), 崔深墓碣銘(張顯光 撰, 旅軒集 卷12), 崔深言行錄(崔晛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명종 18 1563 계해 嘉靖 42 1 6월 10일, 善山府 海平縣 松山 私第에서 태어나다.
선조 3 1570 경오 隆慶 4 8 杜谷 高應陟에게 수업하다.
선조 4 1571 신미 隆慶 5 9 8월, 모친상을 당하다.
선조 8 1575 을해 萬曆 3 13 金烏書院에서 공부하다.
선조 14 1581 신사 萬曆 9 19 봄, 臨河에서 鶴峯 金誠一을 뵙고 수업을 청하다. ○ 7월, 義城金氏와 혼인하다.
선조 20 1587 정해 萬曆 15 25 2월, 부인 金氏의 상을 당하다.
선조 21 1588 무자 萬曆 16 26 3월, 生員試에 합격하다. ○ 昌寧曺氏와 혼인하다.
선조 22 1589 기축 萬曆 17 27 6월, 부친상을 당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30 봄, 金吾郞에 추천되다. ○ 여름, 왜란이 일어나자 義兵을 일으켜 盧景任을 義兵將으로 삼고 자신은 掌書가 되다. ○ 8월, 義城으로 피난하다. ○ 9월, 右巡察 鶴峯先生에게 편지를 올려 방어책을 논하다. ○ 12월, 부인 曺氏의 상을 당하다.
선조 26 1593 계사 萬曆 21 31 1월, 金谷에서 지내다. ○ 載寧李氏와 혼인하다. ○ 鶴峯先生을 곡하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32 1월, 巡察 韓孝純에게 글을 올려 善山에 屯田을 설치하도록 청하다. ○ 〈琴生異聞錄〉이 완성되다.
선조 28 1595 을미 萬曆 23 33 〈友愛箴〉을 짓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34 1월, 體察使 李元翼에게 편지를 올려 三綱九目을 진달하다.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35 1월, 體府 從事官 金涌에게 편지를 보내 山城에 木柵을 설치할 계책을 논하다. ○ 健齋 朴遂一을 哭하고 先妣 李氏를 上林에 改葬하다.
선조 31 1598 무술 萬曆 26 36 2월, 健元陵 參奉이 되다. ○ 王子師傅에 擬望되다. ○ 南還하여 九條疏를 올리다. ○ 9월, 典牲署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선조 33 1600 경자 萬曆 28 38 1월, 郭再祐에게 편지하여 방어책을 논하다.
선조 36 1603 계묘 萬曆 31 41 4월, 朝命으로 「亂中雜錄」을 撰輯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42 李彥迪을 伸辨하는 疏를 올리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44 9월, 文科에 丙科로 합격하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45 3월, 薦擧로 藝文館 檢閱에 제수되다. ○ 7월,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다. ○ 10월, 「杜谷先生遺集」을 찬수하다.
선조 41 1608 무신 萬曆 36 46 2월, 待敎가 되다. ○ 3월, 說書가 되다. ○ 5월, 정언이 되다. ○ 〈九知銘〉을 짓다. ○ 8월, 冬至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가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47 5월, 張顯光을 찾아 뵙고 「周易」과 「太極圖說」을 강하다. ○ 10월,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길에서 呈狀하여 체차되다. ○ 12월, 不知巖에서 泗水로 가서 寒岡先生을 뵙고 書院入享事와 喪禮諸條를 논하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48 2월, 지평이 되다. ○ 실록청 겸춘추가 되다. ○ 4월, 弘文錄에 들다. ○ 5월, 평안도 암행어사로 나가다. ○ 10월, 體府 從事官이 되다. ○ 12월, 舟師勾管司 從事官에 차임되다.
광해군 3 1611 신해 萬曆 39 49 2월, 辭朝하고 南下하다. ○ 洗兵館에서 統制使 李慶濬과 兵事를 논하다. ○ 6월, 玉山에 이르러 晦齋先生 사당을 배알하다. ○ 11월, 鏡城 判官에 제수되었으나 곧 체직되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50 2월, 실록청 겸춘추가 되다. ○ 3월, 舟師 從事官으로서 兩南 巡撫御史를 겸하다. ○ 10월, 수찬이 되다. ○ 11월, 鳥嶺 主屹山城 巡審御史가 되어 聞慶에 내려가 山城의 형세를 살피다. ○ 부교리가 되다. 비변사의 鳥銃廳 都廳을 겸하다.
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51 3월, 시강원 문학이 되다. ○ 4월, 정언이 되다. ○ 5월, 피혐하고 그날로 富平에 우거하다. ○ 7월, 고향으로 돌아오다. ○ 12월, 金溪에 있으면서 「鶴峯先生言行錄」을 찬집하다.
광해군 6 1614 갑인 萬曆 42 52 1월, 金溪에 머물면서 「鶴峯先生遺集」을 校讎하다. ○ 11월, 「冶隱先生行錄」 및 「杜谷先生遺集」을 校讎하다.
광해군 7 1615 을묘 萬曆 43 53 9월, 부인 李氏의 상을 당하다.
광해군 8 1616 병진 萬曆 44 54 1월, 尋源에 가서 머물다. ○ 9월, 還鄕하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56 〈一善誌〉를 완성하다.
광해군 11 1619 기미 萬曆 47 57 4월, 寒岡을 뵙고 鶴峯 行狀을 考訂하다. ○ 7월, 靑松 椒井에서 無語坪으로 돌아오다.
광해군 12 1620 경신 泰昌 1 58 1월, 寒岡을 哭하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61 3월, 反正이 일어난 뒤 수찬이 되다. ○ 8월, 응교가 되다. 이후 司藝, 사도시 정, 사인, 집의, 응교, 사성, 보덕을 역임하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62 1월, 體府 從事官이 되다. ○ 지제교, 춘추관 편수관이 되다. ○ 사인이 되다. ○ 督戰御史가 되다. ○ 7월, 병조 참지를 거쳐 동부승지가 되다. ○ 10월, 대사간이 되다. ○ 11월, 병조 참지가 되다. ○ 12월, 呈辭하고 還鄕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63 봄, 형조 참의를 거쳐 예조 참의, 대사성, 부제학이 되다. 八務箚를 條陳하다. ○ 대사성 겸 승문원 부제조가 되다.
인조 4 1626 병인 天啓 6 64 2월,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가 되다. ○ 延慰使가 되어 定州에 가다. ○ 8월, 강원도 관찰사가 되다.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65 오랑캐가 平山에 들어오자 漢江을 防守하고 道內에 檄文을 띄워 義兵을 일으키다. ○ 龍骨山城의 義兵將 鄭鳳壽에게 軍需를 보내어 돕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66 會寧에 유배되었다가 특명으로 放還되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68 겨울, 무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으나, 곧 특명으로 석방되다.
인조 10 1632 임신 崇禎 5 70 「東國通鑑」을 저술하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74 12월, 淸兵이 쳐들어오자 고향에서 義兵을 일으키다.
인조 15 1637 정축 崇禎 10 75 1월, 軍旅를 정돈하여 聞慶 杜谷에 진을 치다. ○ 3월, 아들 崔山輝를 哭하다. 張顯光을 곡하다.
인조 18 1640 경진 崇禎 13 78 6월 4일, 金山 鳳溪의 別墅에서 卒하다. ○ 8월, 예조 판서에 贈職되다. ○ 9월, 善山 默語坪으로 返葬되다.
숙종 33 1707 정해 康熙 46 - 4월, 鄕人이 松山에 社를 세워 位版을 봉안하다.
영조 52 1776 병신 乾隆 41 - 9월, 松山社를 昌林洞으로 移建하다. ○ 李象靖이 行狀을 짓다.
정조 2 1778 무술 乾隆 43 - 6대손 崔光璧이 三治堂에서 문집을 간행하다. (崔光璧의 後識)
정조 9 1785 을사 乾隆 50 - 6대손 崔光璧이 續集을 간행하다. (李獻慶의 續集序)

기사전거 : 年譜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이 편찬, 간행된 경위는 6대손 崔光璧이 적은 後識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유고는 家禍로 散佚되고 또 몇 권의 手稿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에 族孫 崔象乾ㆍ崔斗南이 代를 이어 遺稿를 모았으나 책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 후 5대손 崔壽頤 등이 여러 일가에 소장되어 있던 유고를 모아 비로소 草稿를 만들어 成編하고, 權斗寅과 權斗經의 校正을 받았다. 이어 권두인에게 墓碣銘을, 권두경에게 跋文을 받았으나 서문이 없어 간행하지 못하였다. 그 시기는 權斗經의 跋文이 지어진 1718년(숙종 44)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6代孫 崔光璧을 비롯한 族人들이 재차 간행을 도모하여 財源을 마련하고, 이미 만들어진 定稿本을 바탕으로 淨寫하여 李象靖, 蔡濟恭, 丁範祖에게 질정을 받는가 하면 李象靖에게 行狀을, 蔡濟恭에게 神道碑銘과 序文을, 丁範祖에게 墓誌銘과 序文을 부탁하여 받았다. 또한 여러 族人의 집안에서 찾아낸 手本日記 등을 바탕으로 經筵講義 및 年譜를 만들고, 關西錄 1권, 逸稿 2권과 함께 李象靖과 朴孫慶에게 질정을 받았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편차를 마쳐 原集 13권, 別集 2권, 拾遺 1권, 年譜 1권, 附錄 1권 합 18권으로 만들어 1778년(정조 2)에 三治堂에서 목판으로 開刊하고 고을 士林들의 도움을 받아 4개월 만에 완성하였다. 《초간본》 「鏤板考」에 의하면 본집의 판목이 善山의 松山書院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문집 간행이 저자의 세거지인 善山의 族人들에 의해 완료된 뒤 저자가 배향된 松山書院에 판목이 보관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규장각(古3428-682),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149)에 소장되어 있는데, 규장각장본에는 年譜와 附錄이 빠져 있다.
7년 뒤인 1785년(정조 9)에는 또 崔光璧에 의해 續集이 간행되었는데, 朝天錄과 初刊에 누락되었던 詩文을 모아 7권 3책으로 만들어졌고 李獻慶이 序文을 썼다. 《속집》 권1~5는 朝天錄이고, 권6은 朝天 때의 呈文, 狀啓, 中原禁物, 書冊禁物, 中原物價, 所經路呈이며, 권7은 拾遺로 詩, 書, 序, 雜著, 祭文과 附錄이다. 이 속집은 현재 誠庵古書博物館(4-898), 계명대학교 중앙도서관(오811. 081)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78년 간행된 초간본으로, 원집과 별집은 규장각장본이고 연보와 부록은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丁範祖, 蔡濟恭 撰), 跋(權斗經 撰), 後識(崔光璧 撰), 續集序(李獻慶 撰)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原集 13권, 別集 2권 拾遺, 年譜, 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原集은 권수에 1775년에 쓴 丁範祖의 序와 1778년에 쓴 蔡濟恭의 序가 실려 있고, 이어 目錄이 있다.권1은 詩 128題와 敎文 4편이다. 詩는 크게 오언시(28), 칠언시(52), 만시(48)의 차례로 편차되어 있고, 각기 절구, 율시, 고시의 순으로 실려 있다. 여러 곳에 자세한 自序가 실려 있고, 編者註도 달려 있다. 맨 앞에 晦齋先生의 遺宅을 지나며 지은 〈澄心臺〉(1594)와 不知巖에 들러 旅軒先生을 만나 지은 〈次張旅軒韻〉(1617)을 실어 尊師의 의미를 두었다. 1608년 冬至使 書狀官 때 지은 〈過首陽山有感〉과 〈山海亭詠懷〉, 1611년 舟師 從事官으로 全州를 지나며 지은 〈威鳳寺有感〉, 1620년 西厓先生의 꿈을 꾸고 지은 〈記夢見西厓先生〉 등이 있고, 輓詩는 鄭宗溟, 鄭經世, 張顯光, 鄭逑 등에 대한 것이다. 敎文은 1610년 知製敎, 1623년 舍人, 1624년 兵曹 參知로서 지어 올린 교문들이다.권2~5는 疏, 箚子, 啓, 書啓, 狀啓이다. 疏는 1598년 고향에 물러나 있으면서 올린 〈陳時務九條疏〉 이하 15편이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맨 끝에 1624년에 逆賊의 供招에서 이름이 나왔다 하여 올린 〈兵曹參知時原情疏〉가 있다. 箚子는 交河 遷都를 반대하며 올린 4편의 玉堂箚가 앞쪽에 있고, 그 뒤로 玉堂과 司諫院 시절 올린 차가 5편이 있다. 啓는 1613년 正言 시절 올린 避嫌啓부터 1626년 承旨로서 올린 계사까지 8편이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書啓는 1608년 冬至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갔을 때 別單으로 올린 1편이다. 狀啓는 1627년 江原 監司 시절 丁卯胡亂을 당하여 올린 4편이다.권6~7 앞부분은 講義이다. 1608년(선조 41) 4월부터 5월 사이에 행한 書筵講義와 1623년(인조 1) 4월, 5월, 6월, 10월과 1624년 7월부터 9월 사이에 행한 經筵講義에 대한 일기 형식의 글이다. 이는 후손 崔光璧이 手本日記 등을 찾아 정리한 부분이다.권7~9 앞부분은 書 28편이다. 대표적인 서찰로 1592년 9월에 右巡察使 鶴峯 金誠一에게 보낸 편지와 1600년 兵使 郭再祐에게 보낸 편지가 맨 앞쪽에 편차되어 있고, 그 뒤로 다시 왜란 기간 중 金誠一, 朴晉, 韓孝純, 李元翼 등에게 보낸 편지와 1596년 이후 曺友仁, 鄭仁弘, 尹文擧, 朴惺, 金長生, 鄭經世 등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권9~13은 雜著(18), 序(4), 記(7), 跋(5), 箴(1), 銘(1), 箋(2), 祝文(2), 祭文(26), 墓碣(4), 墓誌(6), 行錄(4)이다. 雜著는 앞쪽에 1603년 亂後 事蹟을 찬집할 때 道內에 通文한 글과 1604년 善山의 月巖書院 건립을 위해 一鄕에 통문한 글, 왜란 때 開寧의 義兵을 일으키며 지은 통문이 실려 있고, 檄文, 書, 論, 呈文, 遺書 등 다양한 글이 있다. 跋은 「寒岡集」, 「杜谷集」에 대한 跋 등이며, 祭文은 丹山과 月巖書院 奉安文과 金誠一, 鄭逑, 高應陟 등에 대한 제문이다. 行錄은 先考, 杜谷 高應陟, 鶴峯 金誠一의 言行錄 등이다.別集은 2권으로, 앞에 目錄이 있다.권1은 關西錄이다. 1610년(광해군 2) 平安道 暗行御史 시절 지은 狀啓, 書啓 등을 모아 놓은 것이다. 권2는 書啓와 狀啓이다. 원집에서 누락되었던 3편을 실어 놓았는데, 1612년 巡審御史로서 赤裳山城을 살피고 나서 올린 書啓, 1608년 冬至使 書狀官으로 갔을 때와 1624년 李适의 난을 평정하고 올린 狀啓이다.拾遺는 원집과 별집에 빠진 글들을 다시 모은 것인데, 앞에 目錄이 달려 있고 詩 3수, 書 2편, 事蹟이 실려 있다. 〈嘲鄭仁弘〉 詩와 〈答鄭仁弘書〉 등 鄭仁弘을 배척하였음을 나타내는 글과 〈三仁事蹟〉으로 籠巖 金澍, 丹溪 河緯地, 耕隱 李孟專 등 月巖書院에 봉안된 세 선생의 事蹟이다.끝에 1718년 權斗經이 지은 跋과 1778년 崔光璧이 初刊 때 지은 後識가 있다.그 뒤에 年譜와 附錄으로 李象靖이 지은 行狀(1776), 權斗寅이 지은 墓碣銘(1716), 蔡濟恭이 지은 神道碑銘(1778), 丁範祖가 지은 墓誌銘(1775), 기타 仁祖의 賜祭文, 祭文, 挽詞가 실려 있다.

필자 : 金圻彬

 

 

 
 
 
 
 
 
 

 

 

 

 

문집명 낙남집 (洛南集)(17c)
간략서지 古 819.53-C456n洛南 崔山輝의 문집. 2권 1책.
간략해제 崔山輝의 遺集으로 1926년 그의 9대손 崔炳憲이 편집하여 1927년 炳年에 의하여 목활자본으로 海平(海州)에서 간행되었다. 卷頭에 序文은 없고‚ 卷末에 柳疇睦이 쓴 跋文이 있다. 권1에는 최산휘가 지은 賦 2편‚ 詩 6수‚ 書 8편‚ 疏 4편‚ 呈文 1편‚ 祭文 3편이 실려 있고‚ 권2는 부록으로 그의 행적에 참고가 되는 錄勳敎書·賜祭文·墓誌·墓碣銘·咸陽碑銘·家狀·諡狀·延諡告由文·挽詞·祭文·附靑雲君沈命世原情이 차례로 실려 있다. 이 문집은 정묘호란(1627‚ 인조 5) 직후의 두 역모사건에 관련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점이 특색으로 <頌父寃疏>는 李仁居의 亂(1627‚ 인조 5)을‚ <辭勳疏>·<錄勳敎書>·<附靑雲君沈命世原情>은 柳孝立의 모반사건(1628‚ 인조 6)을 이해하는데 기초자료가 된다. 또한 <請減靑松軍額疏>와 <呈巡營文-代靑松士民作>은 최산휘가 청송부사로 있을 때 올린 것으로‚ 과중한 軍額으로 인해 주민들이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는 폐단을 논하고 있어 16·17세기 軍政연구에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편저자 최산휘 (崔山輝)
저자개요 1585-1637 (선조18-인조15)字: 伯玉‚ 號: 洛南‚ 本貫: 全州‚ 父: 晛‚ 母: 義城 金氏
저자내용 어머니가 세 살 때 돌아가 獨子로 자라났으나 덕행과 문학이 뛰어난 아버지 崔晛의 가르침을 받아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짓고 성품이 강직했다. 1628년(인조 6) 柳孝立의 역모를 고변한 공으로 寧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司贍寺主簿를 初授받았다. 뒤에 通政大夫에 올라 전토와 노비를 하사받았으나 반환하였다. 공훈을 사양하고 이인거의 난에 연루되어 귀양가 있는 아버지 최현을 사면해 줄 것을 호소하였고‚ 청송부사가 되어서는 마을의 실정을 알려 군액을 감축하게 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병자호란 때 종군하고 귀향하던 중 병을 얻어 楓川江舍에서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호는 孝憲이다.
내용제목 洛南集 내용개요 청구기호 古 819.53-C456n
권제 권제목:卷之二(附錄)
제목 없음. 1627(?). 세상이 어지러워 賢者들은 자신의 뜻을 펼칠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난리통에 憂國之士들이 오히려 감옥에 가거나 귀양길에 오름을 한탄한 賦이다. ‘黨錮의 禍’를 언급하고 ‘子有得於炳幾 惜節義之徒尙 致末流之酷禍’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李仁居의 亂’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귀양가 있는 즈음(1627‚ 인조 5)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朱仙鎭 (2)  胡亂의 정황과 당대 士民들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賦이다. 파죽지세로 桂嶺을 넘어 오랑캐에게 설욕하고픈 백성들의 북벌의 마음 가득한데 이를 저버리고 화친하게 된 것을 한탄하고 있다.
贈金進士-瀁‚ 贈李上舍昆季‚ 挽朴進士-弘慶‚ 偶吟二首‚ 挽黃上舍-震龍
上家大人書-五 (4)  아버지께 올린 다섯 통의 편지이다. 아들 爾厚가 두통과 고열이 심했는데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은 일 등 주로 아이들의 건강과 아버지에 대한 안부‚ 그리고 오랑캐의 침범으로 인한 나라의 安危를 염려하고 있다
與金敎官 (7)  고향에 있는 金敎官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寄兒爾博 (7)  1627(?). 고향에 있는 장남 爾博에게 보낸 편지이다. 며느리의 병세를 묻고‚ 鐵原에서 돌아온 아버지께서 疝症(허리 또는 아랫배가 아픈 병)에 걸려 치료하고 있으나 완치되지 않아서 염려스럽다는 내용과 함께 난리통에 오랫동안 떨어져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아래의 <寄兒爾厚>와 함께 丁卯胡亂(1627‚ 인조 5) 당시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寄兒爾厚 (8)  1627(?). 고향에 있는 아들 爾厚에게 보낸 편지이다. 난리로 서로 떨어져 있어 언제 돌아갈지 알 수 없으나‚ 임금님이 還都하면 과거가 있을 것이니 학문에 힘쓰기를 당부하고 있다.
頌父寃疏-丁卯 (8)  1627(인조 5). 최산휘가 아버지 崔晛(1563-1640)을 사면해 달라는 疏이다. 최산휘는 이인거의 난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아버지 최현을 용서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疏에서 밝힌 최현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1) 최현은 강원감사로 橫城縣을 지날 때 이인거(?-1627)의 상도에 어긋난 疏(군사를 일으켜 정묘호란때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 등을 단죄하고 서쪽으로 오랑캐를 치겠다는 내용)를 보고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逆謀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2) 그러나 아무래도 염려가 되어 횡성에서 홍천으로 갈 때‚ 원주목사 洪(1585-1643)와 횡성현감 李擢男(1572-1645)에게 이인거를 譏察하다가 그가 군사를 모으면 즉시 통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3) 다음날 이인거가 모반했다는 횡성현리의 보고를 받고 朝廷에 즉시 啓를 올린 후 군사를 정비하고 막 진격하려는 중에 원주의 병사들이 이미 이인거의 徒黨들을 순식간에 잡아버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문 題下는 戊辰年으로 기록되어 있고‚ 목차 제하는 丁卯年으로 되어 있으나 이인거의 난이 정묘년 9월의 일이므로 목차를 따른다.
辭勳疏-戊辰 (11)  1628. 柳孝立(1579-1628) 등의 逆謀를 고변한 공으로 자신에게 내려진 錄勳을 사양한 疏이다. 먼저 역모를 듣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朝廷에 직접 전하지 못해 兇徒들을 놓치게 되었음에도 勳籍에 오르게 됨을 외람되다고 여겨 錄勳을 사양하면서‚ 귀양가 있는 병든 아버지를 歸省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말미에는 큰 공이 있어 훈적에 오른 것이니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는 批答이 기록되어 있다.
乞歸養疏-戊辰 (12)  1628. 謫所에서 돌아온 병든 아버지가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하므로 자신이 수행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다.
請減靑松軍額疏-乙亥 (13)  1635. 최산휘가 청송부사로 있을 때 청송군의 軍額을 감축해주기를 요청한 疏이다. 청송군은 산중에 둘러싸여 토질이 좋지 않고 사람들도 적은데‚ 군액이 너무 많아 주민들이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는 폐단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呈巡營文-代靑松士民作 (17)  巡營에 청송읍의 어려운 실정을 아뢰고‚ 군액의 폐단을 시정해주기를 바라는 呈文으로 최산휘가 靑松士民을 대신하여 썼다.
祭梅堂權公-旭-文 (18)  효성스럽고 정직했던 權旭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祭文이다.
祭處士崔公文 (19)  處士 崔公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祭文이다.
祭亡子爾博文 (19)  1633. 長男 爾博의 죽음을 원통해하며 지은 祭文이다.
錄勳敎書 (1)  1628. 柳孝立의 逆謀를 고변한 功으로 최산휘를 寧社功臣 3등으로 錄勳하고 노비와 땅을 하사한다는 敎書이다.
賜祭文 (2)  1638. 仁祖가 禮曺正郞 李汝翊을 보내어 내린 祭文이다. 1628년 柳孝立이 逆謀하려는 것을 고변하여 宗廟社稷을 구했음을 칭송하고 있다.
墓誌 (3)  金應祖(1587-1667)가 쓴 墓誌로 崔山輝의 世系와 行蹟‚ 가족관계를 약술하였다.
墓碣銘 (4)  宗孫 斗望의 請으로 權斗寅(1643-1719)이 撰한 것이다. 崔山輝가 柳孝立이 逆謀하려는 것을 고변하여 李仁居의 亂에 죄없이 연루된 아버지 崔晛을 구한 사실‚ 靑松府使로 있을 때 軍額을 감해달라는 상소를 올려 백성들을 구제한 일‚ 병자호란 때의 행적 등을 기록하면서 그가 忠과 孝를 함께 이루었음을 칭송하고 있다.
又 (7)  李獻慶(1719-1791)이 쓴 墓碣銘으로 崔山輝의 家系와 행적‚ 인품을 서술하고 있다.
咸陽碑銘 (9)  최산휘가 함양에서 정치를 잘했음을 기리는 墓碑銘이다.
家狀 (9)  1860. 최산휘의 8대손 璿植이 쓴 家狀이다. 최산휘의 先系와 官歷‚ 業績‚ 後孫‚ 유효립 등이 모반할 때 최산휘가 고변하기까지의 정황 등이 기술되어 있다.
諡狀 (13)  南秉哲(1817-1863)이 家狀에 의거해 撰한 것으로 최산휘의 시호를 청한 글이다. 말미에 1873년(고종 10) 孝憲이라는 諡號가 내려졌음이 추가되어 있다.
延諡告由文 (17)  1873. 최산휘에게 孝憲이라는 시호가 내려질 때 李彙載가 쓴 告由文이다. 최산휘가 忠君孝親을 다했음을 칭송하고‚ 아버지 최현에 이어 아들에게도 시호가 내려짐을 감사하고 있다.
挽詞 (17)  아버지 訒齋公 崔晛과 鄭蘊‚ 蔡裕後‚ 金榮祖‚ 金應祖‚ 張應一‚ 許啓‚ 黃㦿‚ 柳碩‚ 睦行善‚ 洪霶‚ 金壽賢‚ 李㙉‚ 成以性‚ 姜大遂‚ 申悅道‚ 洪柱一‚ 李道長‚ 金宗一‚ 沈東龜‚ 李彦英‚ 李時明‚ 金是振‚ 李烓‚ 金羾‚ 盧亨弼‚ 李道昌‚ 鄭彦宏‚ 李尙彦‚ 李景節‚ 金寧‚ 李崍‚ 申適道‚ 李德圭‚ 李崇彦‚ 申楫‚ 曺希仁‚ 鄭昌詩‚ 秦尙弘‚ 申泳道‚ 李希音‚ 鄭弘緖‚ 趙貫‚ 朴以爀‚ 金揚善‚ 金珩‚ 李遠樹‚ 權尙達‚ 金翧‚ 李英馛‚ 金瀁 등 51명이 지은 挽詞 60편이 실려 있다.
祭文 (34)  崔晛‚ 金?‚ 金羾‚ 朴慶餘‚ 朴晉慶‚ 申悅道‚ 金是振‚ 金瀁‚ 李遠樹‚ 李英馛이 효와 충을 다했던 최산휘의 죽음을 슬퍼하며 쓴 祭文이 실려 있다.
附靑雲君沈命世原情 (46)  1628. 沈命世(1587-1632)가 자신이 유효립 등의 逆謀를 알게 된 경위와 張維(1587-1638)‚ 金自點(1588-1651) 등에게 告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許이 먼저 상소했다는 이유로 처음 역모사실을 듣고 金를 통해 자신에게 알린 최산휘가 勳籍에 빠진 것은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글이다. 이 글을 통해 유효립이 광해군을 복위시키고 仁城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점 등 역모의 성격과 가담범위‚ 사건 정황 등을 상세히 알 수 있다.
跋 (51)  1860. 柳疇睦이 최산휘의 8대손 觀植의 부탁을 받아 쓴 跋文이다. 중도에 손실되어 詩文이 약간이라 안타깝지만 그 내용이 仁義와 忠孝를 다하고 있어‚ 말은 간략해도 뜻이 깊다고 적고 있다.
識 (52)  1926. 9대손 炳憲이 문집의 간행경위와 체재를 적은 識이다. 孝憲公 최산휘의 遺集을 간행하지 못하다가 아버지 冕植‚ 종숙 中植‚ 재종숙 觀植의 소장본을 모아 간행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이어 문집의 체재를 적고 있다. (박경남)


 

 

 

 

 

 


贈竭忠效誠炳幾翊命寧社功臣資憲大夫戶曹判書兼義禁府事完海君行竭忠效誠炳幾翊命寧社功臣通
政大夫靑松都護府使崔山輝諡狀



昔在仁廟戊辰廢孼餘黨謀亂湖境朝夕伺發時則有寧社功臣崔公山輝逆折凶圖陰翳廓淸不佞嘗從太史氏聞者
今按其家狀先是公之考訒齋公非罪罹禍禍將不測以公至諴亦賴而得脫古所謂求中於孝子之門者非歟同時紀勳諸
賢或至大官或加美諡而獨公雖蒙貤贈未及易名識者惜之幸値聖明光御彰善樹義之政爰及窮蔀嶠嶺多士議不
泯猗歟偉哉公字伯玉號洛南系出全州在麗朝有諱曰阿官侍中諡文成寔爲肇祖入我朝有諱龍生慶尙道按察使傳
四世諱水智縣監居善山之海平子孫仍籍焉乃公五世祖也

▼원문보기24b  처음으로
高祖諱以淮主簿曾祖諱致雲參奉祖諱深贈左參贊考諱睍官至副提學文行儀式士林世稱訒齋先生贈禮曹判書
由公顯也加贈左贊成奬儒賢也妣義城金氏府使復一女斬斬有女士行繼妣昌寧曹氏載寧李氏金夫人以萬曆乙酉
八月十五日生公甫五歲夫人違世公自其時襲詩禮訓養剛直性已與流俗異先生長□器之文藝夙就格韻淸古屢
有司竟未大展者蓋不以榮途爲意也丁卯訒齋公不幸抵羅織網久在徽纆公夙夜露地泣血訴天誠可以質鬼神哀可以
減太和戊辰春竟免大禍宥以遠竄是冬孝立等逆獄出由公忠直家國無事公則策勳訒齋公亦遇赦而歸人皆謂孝感攸
致公始旁六品爲司贍寺主簿俄陞通政階繪素之榮錫賚之寵眞情力辭土田藏獲終不取其一焉玆可以見履素節厥後

▼원문보기25a  처음으로
歷職內則僉知中樞外則咸陽靑松屈志下邑蓋爲養也靑是環山邑地确人稀軍不充額上章祛弊減其額盡心字撫遺風
藹然玆亦推仁愛也及至丙子自聞亂日奮忿不遑食榮匹馬奔問行在路梗未及時翌年正月始達于朝拜軍職三月
辭歸道遘疾舁到楓川江舍卒得年五十三朝野聞而咨嗟曰天於我公報施果止於是歟九月葬縣西向卯原時經大亂諸
勳宰皆停禮葬上特命□致賻給丁封墓以竭忠效誠炳幾命寧社勳贈戶曹判書兼如例遣官賜祭異典也配
盈德朱氏參奉應邦女生三男一女男長爾博司果次爾厚爾遠女適朴愰縣監孫曾以下至八世九世子孫多至數十百人
不能盡錄只就其科宦者言之曾孫斗元生員亦孫壽頣進士壽仁生員憼文科典籍五代孫萬柱生員廷柱生員光玉進士

▼원문보기25b  처음으로
光岳生進俱中光璧生員文科兵曹參判光翊進士光稷生員光迪進士蔭仕參奉六代孫綽生員溟羽進士鳳羽文科正言
陽羽生員蔭仕監察成羽生員昇羽進士文科文學舜羽進士七代孫晉行生員雲永進士雲承進士雲錫進士應進士八
代孫鎭華生員允植生□九代孫炳宇生員嗚呼距公之世餘數百年警欬未接典型已□而跡者心之踐也執其跡而徵其
心有不可誣者且散見於國乘野史及當時挽誄者亦可參互焉夫患難危急之際爲親竭力固是子職而至若伏地叫天
經歲如一日無毫髮間斷竟致泣神明回造化則苟非實地上眞箇得力者其孰能之夫如是故移之事君則直誠所到魑魅
自不能逃其形移之莅民則實惠所及疲癃亦莫不遂其生以是守身則其操也貞不以事物經心以是處世則隨遇而安不

▼원문보기26a  처음으로

以喜怒形色推此志世榮悴得喪於公何有哉今其雲仍承先之訓旣繁且衍其非嗇於彼而豊於此者耶折亦百世以俟而顯
晦有時者耶公之孫雲植掇輯遺事將請節惠于朝以不侫職叨文垣屬之移狀辭不獲略述所聞以告太常


崇祿大夫行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原任奎章閣提學宜寧南秉哲謹撰

孝憲[주:玆惠愛親曰孝博聞多能曰憲]

孝敏[주:玆惠愛親曰孝應事有切曰敏]

景憲[주:由義以濟曰景博聞多能曰憲]

 

 


 

 

 

 

 

 

 


 

贈戶曹判書崔山輝諡號望


孝憲[주:慈惠愛親曰孝博聞多能曰憲] 孝敏[주:慈惠愛親曰孝應事有功曰敏]  景憲[주:由義而濟曰景博聞多能曰憲]

연려실기술 제2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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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유효립(柳孝立)의 옥사(獄事)



유효립(柳孝立)이 전 세마(洗馬) 허유(許逌)ㆍ전 좌랑(佐郞) 정심(鄭沁)ㆍ전 전적(典籍) 김탁(金鐸)ㆍ진사 유두립(柳斗立)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고 몰래 도감초관(都監哨官) 윤계륜(尹繼倫) 등과 손을 잡아 내응하게 하였다.
○ 무진년 1월 3일에 죽산(竹山)에 사는 전 부사 허적(許)이 고변하기를, “허유 등이 내일 대궐을 범하기로 약속하였다.”고 하므로 비변사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고변한 사람 허선(許選) 등과 함께 잠복하여 동대문과 남대문을 지키게 하였다. 그날 저녁 역적들이 길을 나누어 두 성으로 들어오다가 모두 잡혔다. 또한 최산휘(崔山輝)가 유효립 등의 반역한 정상을 고발하였으므로 금부도사를 나누어 보내서 모두 잡아 국문하니 자복하였는데 어느 사람은, “강화에서 광해군의 애통한 밀지를 받고서 인성군으로 하여금 의거하게 하였다.” 하였으며, 혹은 “대비의 밀지가 인성군에게 전하여졌다.”고 하였다. 모두 법대로 처단되었다. 《조야기문잡록》
○ 효립은 광해군 때 외척으로서 당상관 승지의 높은 벼슬을 지냈었는데 이때 제천(提川)에서 귀양살면서 몰래 딴 뜻을 품고서 항상 여인의 가마를 타고, 서울에 있는 광해 때의 옛 신하로 새 조정을 원망하는 자들의 집을 왕래하면서 궁중의 시녀와 내시와 대궐문의 수장(守將)까지 통하여 다음날 대궐문을 열고 임금의 침전에 곧장 들어가기로 모의하였다. 그날 허적이 죽산에서 그 역모를 듣고 급히 사람을 시켜 달려가 아뢰게 하였다. 또한 그때 최현이 갇혀 있었으므로, 최현의 아들 산휘가 때마침 의금부 문 밖에 있었는데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가 자기 하인을 시켜 산휘에게 문안하게 하였다. 그 하인은 효립이 예전에 평시에 데리고 다녔었고 그 후에는 명세의 심부름을 하는 자였는데 그 하인이 산휘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내일 조정에 큰 변이 일어날 것이니, 영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니 산휘가 이상히 여겨 급히 명세에게 알려서 고문(拷問)하니 자복하므로 체포하여 대궐에 끌고 갔더니 허적의 고발장이 이미 먼저 도착하였다. 《일월록》
○ 그때 효립이 자기 아들과 무리들을 서울에 들여보내어 내시와 궁녀들과 통하여 4일 밤에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범하기로 약속하였다. 허유가 그 역모에 참여하였는데 허유는 허적(許)의 조카였으므로 허적이 그것을 알고 급히 홍서봉(洪瑞鳳)에게 알렸다. 그때 최현은 인거의 역모를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로 의금부에 갇혀 있었는데, 나졸이 최현의 아들 산휘에게 살짝 말하기를, “오늘 감사께서 출옥하게 될 것입니다.” 하므로 산휘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나졸의 효립의 음모를 말하였다. 이에 산휘가 크게 놀라 급히 심명세에게 가서 말하니 서봉과 명세 등이 아뢰었는데 4일날 저녁 때였다. 조정에서는 크게 놀라 금부도사를 사방에 보내어 체포케 하고 훈련도감의 군사를 동원하여 3대문(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밖에 매복시켜 기다리게 하였는데 허유 등이 무기를 싣고 밤을 타서 성문을 들어오다가 모두 잡혔고, 효립과 그의 사촌 동생 두립(斗立)이 자복하여 목베이였다. 허적 등은 영사공신(寧社功臣)에 녹(錄)하였고 홍서봉ㆍ이산휘도 모두 참여되었다. 《하담록》
○ 이때 허적이 홍서봉에게 고변하는 글을 보내왔는데 홍서봉이 미처 발설하기도 전에 도성 안이 흉흉하였으므로 신흠이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고 급히 대장 신경진(申景禛)ㆍ이서(李曙)를 불러 군사를 충돌시켜 무기를 싣고 들어오는 적을 체포케 하고, 한편으로는 서봉을 재촉하여 그 일을 발설케 하였다. 상촌시장(象村諡狀)
○ 영의정 신흠이 비변사에 있다가 그 보고를 듣고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일이 급하다. 일각이라도 늦어지면 난이 일어나 사전에 수습할 도리가 없을 것이니 모름지기 먼저 체포하고 뒤에 보고함이 옳다.” 하고, 곧 포도대장을 불러 군사를 나누어 보내서 체포케 하였다. 역적의 무리 중 일부는 먼저 도성 안에 들어와 종적을 감추고 있었고, 일부는 무기를 싸가지고 이미 한강을 건너 해가 진 뒤 대궐을 범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 최현은 그의 아들 산휘가 공신에 참여되었으므로 죄가 감하여져서 종성(鍾城)에 안치(安置)되었다. 그 후 8월에 공신들의 회맹제(會盟祭) 때에 사면되었다. 《잡록(雜錄)》 《일월록》
○ 반교문(頒敎文)에 이르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역모가 여러 번 국내에서 일어났다. 무릇 임금에게 거역하는 큰 변이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일어날 뻔하였다. 형벌이 밝게 실시되었으니 경사스러운 은택을 사방으로 펴노라. 내 부족한 몸으로 이 난정의 뒤를 이어서 대비를 받들어 복위시킴으로써 떳떳한 윤기(倫紀)가 밝아졌고, 죄인을 내쫓아 명분을 바르게 하여 이로써 대의가 드러났다. 무릇 형벌을 내릴 때마다 관대히 생각하여 윤기를 범한 원흉이 아니면 똑같이 은혜를 베풀어 곡진히 살려주지 않음이 없었는데 어찌하여 흉악한 무리의 잔당이 감히 역모하리라 생각하였으리오. 역적 유효립ㆍ정심(鄭沁)ㆍ윤계륜(尹繼倫) 등은 천성이 효경(梟獍)과 같아 옛날의 비렴(飛廉)ㆍ악래(惡來) 격이어서, 혹은 권간(權奸)에게 붙어 대비를 폐위하여 윤기를 무너뜨림을 저의 임무로 삼았고, 혹은 외척의 지위에서 임금의 비위를 맞춰 나라를 그르치기를 일로 삼았으니, 악함이 한도를 넘어 죽음을 면할 수 없었으나 관대한 은혜를 거듭 입어 시골에서 편히 살게 하였더니, 하늘이 머리 위에 있음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주인에게만 충성하는 어리석은 개의 마음을 가져, 귀신도 가히 속일 수 있으며 종사를 가히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여서 폐인(廢人 광해(光海))과 연락하여 비밀의 편지를 전하여 서로 응하고 왕자(인성군)와 연락하여 집의 하인들을 모아 군사로 삼았고, 비결(祕訣 참서(讖書))이라 핑계하여 인심을 선동하였으며, 내시와 통하여 궁중을 정탐하였고, 역적을 제갈량(諸葛亮)에 비기며 괴수(魁首)를 가리켜 성인이라 하였다. 궁중에서의 독살 음모는 간악함이 극히 참혹한데 종묘를 불지르겠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있는가. 반역할 계책이 이미 이루어져 있었고 부서가 대략 정하여져 있었으며 음모는 지난해부터 시작되었고 거사할 기일은 그 다음날 아침이였다. 위험스러웠도다. 화가 미침이 경각간에 임박하였으나 다행히 천지신명의 은근한 도움을 입어 드디어 충량(忠良)한 신하가 기미를 미리 알아내어 그 음모를 적발하였으므로 추한 무리가 모두 체포되었으며 엄한 형벌을 가하자 죄상을 즉시 공술하였다. 나라에 일정한 형벌이 있는데 내 어찌 감히 용서하리오. 역적 유효립ㆍ배희도ㆍ허유ㆍ유종선(柳宗善)ㆍ유두립ㆍ안집중(安執中)ㆍ이우명(李友明)ㆍ정린(鄭遴)ㆍ정진(鄭振)ㆍ허규(許逵)ㆍ조헌립(趙憲立)ㆍ이척(李惕)ㆍ배윤(裵允)ㆍ김응호(金應虎)ㆍ김응표(金應彪)ㆍ김응사(金應獅)ㆍ김세익(金世益)ㆍ김영기(金永起)ㆍ옥석(玉石)ㆍ김남(金男)ㆍ귀희(貴希) 등은 모두 법대로 처단하여 형정(刑政)을 바르게 하겠다. ……” 하였다.


[주D-001]비렴(飛廉)ㆍ악래(惡來) : 은(殷) 나라의 폭군인 주(紂)의 신하로 주의 모든 죄악을 도운 자이다.11) 진주(眞主) : 새로 일어나는 참다운 임금이란 말로, 여기서는 인성군을 추대하겠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