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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一齋柳先生諡狀

아베베1 2013. 10. 10. 16:35

定齋先生文集卷之三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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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諡狀
眞一齋柳先生諡狀 a_298_11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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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諱崇祖。字宗孝。姓柳氏。其先完山人。始祖諱濕。贈掌令。積慶于家。五子一壻。俱捷文科第二。諱克恕。寶文閣直提學贈吏曹參議。生諱濱。同太宗司馬榜。直提學贈吏曹參判。卽先生曾祖也。祖諱敬孫。中部令贈吏曹參議。考諱之盛。典牲署令贈吏曹參判。妣安東權氏。鷄林君珣之後。直長得之女。贈貞夫人。以景泰三年壬申二月初二日。生先298_112b生。幼而不好弄。孝友天至。未嘗違忤。才思俊逸。有一名宰。試以詩句。卽應曰。朝朝戶戶炊煙起。夜夜家家犬吠無。旣長。脫然有志於古人之學。恥爲雕篆。見益進。業日精。成化壬辰。中進士試。戊戌。丁內艱。執喪過制。廬墓三年。晨夕上墓哀省。風雨不廢。服旣闋。遊泮宮。周旋師友資養。十八年。學問益廣。經史子集。靡不淹貫。尤邃於易。以極天人性命理數之原。以至禮記節文度數之詳。悉加究覈。手制渾天儀。推步日月星辰躔度節氣。無不脗合。三舍翕然推服。名動儒林。再魁館試。擢己酉文科。薦授藝文館撿閱。師儒李克增298_112c啓。柳崇祖官雖卑。其學行可爲師表。請令兼帶成均館。訓誨諸生。上從之。時有命選精於天文者。監修欽敬閣。先生與領中樞金應箕。掌其事。辛亥。陞待敎。壬子。陞奉敎。癸丑。遷司書。又遷司諫院正言。一日與右相許琮。入侍經筵。許奏宰相臺諫。務要和同。朝廷乃安。先生抗言。宰相臺諫。相可否。爭是非。非爲乖亂。正欲引君當道。不求合理。惟務和同。非國家之福也。許深愧服。朝廷議平定船價。論者不一。先生引大明律以奏之。成廟以爲然。猶未決曰。此永久利害也。命赴京者質正以來。及歸。如先生言。上歎298_112d其懸合。命施行之。甲寅。拜吏曹佐郞。丁巳。出爲忠淸都事。戊午。爲直講。尋丁外憂。哀毁如前喪。太學生闔齋來吊。辛酉。除弘文館副校理。又選國家經費詳定員。以方設局擇人也。尋爲忠翊府都事。又爲吏曹正郞。壬戌。移戶曹正郞。癸亥。拜司藝。轉掌令。廢主政亂。實兆此時。先生倡議同僚。疏論主失十餘條。切直不撓。一日。主出幸。還宮時徑由書雲峴。先生諫曰。君子行不由徑。况人君乎。一事不由於正。萬念從而不正。主大怒。左遷授護軍。甲子。還拜司藝。俄而禍起。先生坐前事。杖竄原州。乙丑。更逮禁獄。命加拷掠。問前298_113a發不由徑之言者爲誰。先生對曰。崇祖也。禍且不測。有救者。還配前所。丙寅。中廟改玉。萬化惟新。首開經筵。以待端明之士。於是。三公交薦。先生召拜。爲弘文館副應敎。每進對。論說懇懇。以盡帝王出治之要。諸講官。皆自以莫及也。陞典翰。又特命。超授掌隷院判決事。葢廢朝以來。詞訟煩興。本院冤鬱尤多。選其能裁決故也。三公啓。柳崇祖。學術高明。經幄。不可無此人。乃命換工曹參議。兼帶經筵官。葢異數也。是歲廢主卒。上議葬儀及停朝市定墓直等事。大臣啓葬宜用王子禮。停朝市。定墓直不298_113b可。先生上箚曰。前王得罪宗社。固不得祔祀宗廟。而喪葬之禮。不宜若是也。葬用陵儀。別立廟主。訃聞上國。情之至。義之盡也。柳洵,柳順汀等言。崇祖曲說。不可施行。柳子光請付有司。上不從。只遞經筵官。大司憲李繼孟言。崇祖盡言無隱。不可遞其官。上遂命燕山墓。自所在官。俗節致祭。置守墓三人。丁卯。授成均館大司成。三公又啓性理之學。不可絶其傳。請選年少文臣。就柳崇祖受業。上可之。辛未。上視學。謁先聖。御明倫堂。橫經問難。分命諸臣。進講四書二經。先生首講大學。反復推說明德298_113c新民之方。寓以規諷。上爲之傾心聽納。仍賜學田百結。明日。先生率諸生。詣闕上表陳謝。進所撰大學十箴,性理淵源等書。上覽而嘉之。卽命刊行。進階嘉善。幷賜金帶表裏。先生再三固辭。敎曰。卿久掌成均。作成人才。以助余治。功在可賞。其勿辭。復敎曰。予聞儒生多聚于學。其選可用者以聞。先生以趙文正公光祖應命。六月。以病辭。太學生上章請留。上亦不許。旣而出拜黃海道觀察使。三公同經筵官啓。近將進講周易。柳崇祖不宜外授。乃改同知中樞府事。仍命與金應箕。同諸儒臣。討298_113d論易禮記性理大全等書。以備進講。壬申二月初三日。以疾卒。享年六十一。訃聞。上嗟悼。賜賻棺槨有加。朝廷搢紳與大學諸生。皆奔走來哭曰。斯文喪矣。太學生有食素哀之。如親屬者。是年五月庚申。葬于驪州府南文谷先隴之下。會天雨。諸生冒雨。哭送郊外。無後者。配驪州閔氏。監察亨孫女。繼配順天朴氏。習讀季孫女。生一男應台。參奉。一女河益粹。內禁衛。應台嗣男炯。參奉。炯男瀾。直長。其登科宦者。玄孫仁儉僉正。仁培贈承旨。五世孫終立察訪。方立贈參判。亨立生員。貞立縣監。經立掌令。英立府使。六世298_114a孫宗澤同知。宗林進士。宗彬郡守。宗儒生員。七世孫義華進士。益華生員。晩華生員。八世孫燧生員。十世孫養南正言。十一世孫星紀生員。先生稟性剛方。行己廉直。不喜聲色。不撓威勢。事親愛敬俱摯。寢無私室。雖職務煩劇。不廢定省。兄弟之間。人無間言。宗族窮甚者。極力調救。居官淸愼。自奉甚約。捐館之日。無以爲斂。討論墳典。幽深精博。剖決庶務。詳明敏達。自在諸生時。以經明行修。爲衆所推。釋褐之初。己以訓誨後進。兼管成均。仕進。專以論思啓沃委任之。然亦以才諝利用。數被選。監修敬閣。則以精於天文也。詳298_114b定經費。則以審於制用也。超授掌隷院。則以能於平決也。以至議定船價。亦懸合而卒從其言。葢所謂用無不周者。而臨事盡言。又得事君不欺之道。駁前席和同之對。則相君服其忠直。論書雲徑由之失。則廢主嫌其批鱗。又論主失十條。而禍胎萌於不測矣。再逮禁獄。何問嚴急。而抗言不忌。曾不少貶。及新化方暢。鮮有以舊主爲念。而議葬之箚。道得人不敢言。其忠盛矣。然此皆各一節事耳。最其不由師承。深造自得。嘗以方言諺解諸經。殆與章句集註。同其功用。又能獨觀昭曠之原。論性命之妙。則有契於朱子理發298_114c氣發之旨。語平治之要。則必本於誠意正心之工。其進言於上曰。理動氣挾。四端之情。氣動理隨。七情之萌。又曰。物之理不外於吾心。而知之致。在於物之格也。家之則。足法於國。而國之敎。先成於家也。爲惡於獨者。以爲人未知也。而善惡之顯見。嚴於十手之所指也。平天下者。以爲地廣難平也。而天下之心。亦我之心也。正吾心之矩以絜之。則吾之好惡。同於天下而無不平矣。是其愛君澤民之心。陳善納誨之意。今猶可想見。而所學之深。所守之正。斷可知矣。方其聖明視學。環橋觀聽之盛。表箋進御。魚水共得之298_114d歡。若可以陶鑄至治。而惜乎其遽以訃聞也。葢當國初。運際昌明。而儒術猶未顯行。倡言導之。未見其人也。而先生獨以格致誠正之學自爲。而勉於上。則其擔得一世之望。固已超在羣儒之首。以是三公請命年少文臣受業。以不絶理學之傳。諺解之作。又至今爲經生學者所傳習。而論薦人才。又得趙文正。上以贊聖朝之一治。下以啓羣賢之紹述。則其有功於斯世斯文。實有不可誣者矣。獨恨夫世代寖遠。遺文散逸。世之學者。殆無以詳考而實識之。然所撰十箴淵源等書。不獨被聖朝之知於當時。而逮298_115a至孝廟。因道臣柳淰印進。至有格言至論之褒。正考以諺解出於先生。稱爲巨儒。列聖之曠感。夫豈偶然也哉。又按洪恥齋仁佑。撰其先碣云。經傳則就質於柳大司成崇祖。子史則就質於金慕齋安國。退陶先生誌之曰。時柳公崇祖。尹公倬。前後居大司成。公出講師友。入受庭訓。又曰。我究厥由。師友堂堂。泮水泱泱。經訓皇皇。夫稱述後人。必本於先生。益驗大賢一言之重。爲有以也。嘗竊慨念。吾先祖檜軒先生。以文章節行。爲當世所服。而先生實爲兄。孫駱峯遺逸齋諸賢。與爲同堂之親。則家學淵源之正。葢可298_115b想像。而今無以考矣。迺者。嶺之儒士。以先生應國法儒賢及節義表著者。雖非正二品。特許賜諡之典。蹕路上言。以至入啓。議易名之典。後孫星璣。來請狀其本末。欲以轉聞於太常。謹忘其僭猥。掇輯以備太史之採錄。以成謚狀云。


동문선 제12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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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유명조선국 증 충근 익대 신덕 수의 협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진양부원군 하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義政府事晉陽府院君河公神道碑銘) 幷序


변계량(卞季良)

영락 11년 임진년 겨울 10월에, 의정부 좌정승 진산(晉山) 호정 선생(浩亭先生)이 계량(季良)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나의 선고(先考)께서는 덕을 심으시고는 스스로 그 열매를 먹지 않고 복록을 후인에게 넘기었습니다. 그리하여 소자(小子) 내가 두 번이나 공신들의 회맹(會盟)에서 피를 마시었으며, 벼슬은 모든 신료들의 우두머리에 있습니다. 또 은전을 입어 삼대(三代)에 소급하여 봉증(封贈)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워 후세의 자손들에게 보여 선대(先代) 분묘의 소재를 알게 하여, 감히 혹시 잘못 전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니, 그렇다면 마땅히 글월이 있어야 할 것인데 아직 못하였으니, 그대는 글을 지어주게.” 하므로, 계량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여 보니, 공(公)의 성은 하씨(河氏)이고, 휘는 윤린(允潾)이며, 자는 소개(所開)이니, 진양(晉陽)의 대족(大族)이다. 선대에 좌사낭중(左司郞中) 휘 공진(拱辰)이라고 하는 이가 있었다. 고려의 현종조(顯宗朝)에 공이 있어서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증직을 받았다. 증조고의 휘는 부심(富深)인데, 급제하였으나 숨어서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조고(祖考)의 휘는 식(湜)인데, 증(贈)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 진원군(晉原君)이다. 고(考)의 휘는 시원(恃源)이니, 증(贈) 순충 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정승 판병조사(議政府右政丞判兵曹事) 진강부원군(晋康府院君)이다. 승봉랑(承奉郞)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 정(鄭) 휘 균(均)의 딸에게 장가들어, 원(元) 나라 지치(至治) 신유년 4월 정사일에 공(公)을 낳았다.
나이 일곱 살 때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울고 부르짖어 슬픔을 다함이 마치 성인과 같았다. 경오년에 처음으로 취학(就學)하였다. 계유년에 그 고을의 장자(長者)인 증 숭록대부 의정부 찬성사 강공(姜公) 휘 승유(承裕)가 공에게 말하기를, “선대에서 나라에 공이 있는 자는 그의 후손이 반드시 창성하는 것이다.” 하고, 자기의 딸을 공의 아내로 주었다. 찬성은 성품이 엄격하여 공이 아버지처럼 섬겼다. 지정(至正) 갑신년에 처음으로 충목왕(忠穆王)의 조정에 벼슬하여 식일도감록사(式日都監錄事)가 되었다. 정해년 봄에 강씨(姜氏)가 길몽을 꾸고 난 뒤에 임신하여 겨울 12월에 아들을 낳으니, 지금의 정승공(政丞公)이다. 기축년에 선관 승(膳官丞)에 제수되고, 임진년에는 승진하여 선관 영(膳官令)이 되었으며, 병신년에는 문하 녹사(門下錄事)로 천관(遷官)되었다. 고려의 말기에 국가의 창고가 텅 비어서 문하부(門下府)의 아침 저녁 식사의 비용을 녹사에게 일임시켜 풍족하고 조촐하게 하라는 책무를 담당시키니, 녹사된 자는 대개 녹사직이 해면되기를 비는 자가 많았는데, 공은 심력을 다하여 헤아려 장만하고, 조금도 어려워하는 빛이 없으므로 부관(府官)이 칭찬하였다. 무술년에 선덕랑(宣德郞) 북부 영(北部令)에 임명되었다. 경자년에는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으므로 벼슬에서 물러나와 복제(服制)를 마쳤다.
계묘년에는 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가 되니, 위계(位階)는 조봉랑(朝奉郞)이었다. 그때가 바로 공민왕 13년이다. 위왕(僞王 덕흥군(德興君))과 첩목아(帖木兒 첩목아불화(帖木兒不花)이니 곧 최유(崔濡)이다)가 몽고와 중국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나라에 침입하였으므로, 각 도의 우리 군사들이 서북(西北)에 모이니, 위왕(僞王)이 패주하였다. 그 장수들이 왕래하는 길이 다 숙주(肅州)를 거치게 되었는데, 공이 그들을 대접하기를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그 해는 흉년이어서 돌아오는 군사들이 굶주려서 얼굴에 부황 빛이 나는 자가 많았다. 공이 봉록을 감액하여 그것의 여분과 또 고을 사람 중 저축이 있는 자에게 권유하여, 서로 도와서 구제함으로써 보전하여 살게 한 바가 많았다. 정사를 하는데 인(仁)과 서(恕)를 근본으로 삼아 가혹한 세금이 없어지고 형벌이 줄어드니 아전과 백성들이 덕을 입었다. 그가 교체되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 을사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을에 정승공이 과거에 급제하고 다음 해에 사관(史官)이 되니, 공이 말하기를, “조정에 벼슬하는 아들이 있고, 나는 늙었으니 다시 벼슬하고 싶지 않다.” 하고, 고을의 부로(父老)들과 함께 금강사(金剛社)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한가히 노닐면서 세월을 보내었다. 그때 왜구가 한창 치성하였다. 공이 족인(族人)에게 이르기를, “우리 고을은 서쪽과 남쪽이 바닷가에 있어서 섬의 왜구가 해마다 오기만 하면 서쪽과 남쪽 사람들이 먼저 그 해를 입는다. 형세가 반드시 읍리(邑里)에 미치게 될 것이니, 마땅히 북촌(北村)으로 이사하여 그 칼날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정사년 가을에 가족을 이끌고 가서 동곡(桐谷)에 집을 마련하였더니, 다음 해 가을에 왜구가 과연 읍리에 들어와서 온 경내가 소란하고 어지럽게 되어 겁박과 약탈을 당한 자가 많았다. 공은 동곡에서 강성현(江城縣)의 산성(山城)으로 들어가서 온 집안이 홀로 안전하게 되니, 고을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정승공이 그때 대사성이 되어 있었는데, 재상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섬 오랑캐가 자주 오는데 늙은 어버이가 그때마다 산성에 들어가게 되어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지금의 순흥 부사(順興府使)는 선비입니다. 바라건대, 저 자신이 물러나고 그를 대사성에 대신 임명한 뒤, 저의 부친을 순흥 부사에 임명하여 안전함을 얻게 하소서.” 하였다. 재상이 그의 말을 의롭게 여겨 경신년 봄에 공에게 부사(府使)를 제수하니, 위계는 봉익대부(奉翊大夫)였다. 이보다 앞서 공은 일찍이 첨설관(添設官)을 받고 누차 전임하여 봉익대부 예의 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 부사가 되니, 그 자급(資級)이 같았다고 한다. 부임한 뒤에는 인자한 정사를 베풀어서 백성들이 바야흐로 사모하고 즐겨하였는데, 병이 들었다. 9월 24일에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 60이고 아들도 또한 성장하였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소. 하물며 인생의 길고 짧음은 천명 아님이 없어서, 모두 결국은 다함에 돌아가는 것이고 다만 선후가 있을 뿐이니 상심하지 마시오.” 하고, 말을 마치자 곧 숨이 끊어졌다. 정승공이 영구(靈柩)를 모시고 진양(晉陽)에 돌아가 그 해 12월 갑신일에 동방동(桐房洞) 감산(坎山)의 북쪽에 장사하니,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의 묘와의 거리는 불과 몇 보이다.
과거에 정승공이 아버지의 병 기별을 듣고 약을 준비하여 길을 배나 빨리 달려 2일 만에 도착하였으나, 임종에 미치지 못하였다. 가슴을 치고 땅을 구르며 매우 슬퍼하여, 밤낮을 빈소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관(棺)은 전목(全木)을 쓰고 곽(槨)은 일곱 치 두께로 하였으며, 모든 상장(喪葬)의 용구(用具)는 일체 《주자가례》에 의거하고 불교의 법식은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국조(國朝) 무인년에 이르러, 정승공의 정사(定社)의 공으로, 공에게 충근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문하우정승 판병조사(門下右政丞判兵曹事) 진양백(晉陽伯)을 추증(追贈) 하였으며, 임오년에는 좌명(佐命)의 공으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을 가증(加贈)하였다.
공은 자품이 후덕하고 신중하며 몸가짐이 청렴하고 간결하여, 망녕된 말을 하지 않고 또한 농담도 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가산(家産)을 경영하는 데 뜻을 둔 일이 없었다.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서 나왔으며, 족친(族親)간에 친목하고 향당(鄕黨)에 화순하여 항상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공의 선고(先考)가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백부(伯父)가 노비와 땅을 고루 분배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아우와 조카가 관가에 고소하고자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어찌 감히 숙부와 송사를 다툰단 말이냐.” 하며, 힘껏 말렸다. 백부가 죽자 아우와 조카가 전에 소송하려고 하던 말을 강경히 주장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종형제 간에 서로 소송하는 일도 또한 옳지 않다.” 하였다. 공이 죽은 뒤에 종형제가 서로 소송하여서 드디어 분재(分財)하게 되었다. 정승공은 받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우리 선고께서 하지 않으셨던 바인데, 내가 감히 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 아들들에게 주기를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여러 아들들이 받는 것은 곧 내가 받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강씨(姜氏)는 집안을 잘 다스렸으며, 행동은 예와 법을 따랐다. 효도로써 어버이를 받들고, 화순함으로써 남편을 섬겼다. 자손을 가르치는 데는 엄격하면서도 너그러웠으며, 족친과 인척들을 대우하는데는 은혜스럽고도 두루하였다. 을해년 여름에 병으로 눕자, 정승공이 그때 중추원사(中樞院事)로 있었는데, 휴가를 청하여 역말을 달려 3일 만에 도착하여 약을 먼저 맛보고 올리니, 강씨는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다.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아서 흡족하게 너의 영광스러운 봉양을 받았으니, 약을 먹고 살기를 구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공이 울며 권하니, 7월 4일 정승공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늙고 젊음에 달려 있지 않다. 너와 너의 맏누이가 모두 무사할 때에 이제 내가 먼저 가니, 어찌 스스로 다행하지 않겠느냐. 구태여 여러 가지 약을 강권할 필요는 없다.” 하고, 이튿날 죽었다. 향년 76세였다. 9월 병오일에 공의 묘(墓) 남쪽 몇 보 쯤 되는 곳에 부장(附葬)하였다. 무인년에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아들은 휘 윤(崙)이니, 분충장의동덕정사좌명공신(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 수문전대제학 영경연서운관사 감춘추관사 세자부(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修文殿大提學領經筵書雲觀事監春秋館事世子傅)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이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 성산 이씨(星山李氏) 휘 인미(仁美)의 딸에게 장가들어, 병술년에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하였다. 딸은 정순대부(貞順大夫) 연안부사(延安府使) 유극서(柳克恕)에게 시집갔다.
정승의 아들은 이름을 구(久)라고 하며, 중군도총제부 도총제(中軍都摠制府都摠制)의 벼슬에 있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終德)에게 시집가고, 차녀(次女)는 좌군도총제부 총제(左軍都摠制府摠制) 이승간(李承幹)에게 시집갔다. 서남(庶男)이 셋이 있으니, 첫째는 이름을 연(延)이라고 하며, 의흥시위사 대호군(義興侍衛司大護軍)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서녀(庶女)가 셋 있으니, 첫째는 지곡산군사(知谷山郡事) 김질(金秩)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중군 사직(中軍司直) 장희걸(張希傑)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어리다. 여서(女婿) 유 연안부사(柳延安府使)의 아들은 이름을 정(汀)이라고 한다. 통덕랑(通德郞) 형조 정랑(刑曹正郞)이다.
내가 생각해 보니, 정승공의 도덕과 문장의 아름다움과, 명망과 지위와 공훈과 사업의 성대함은 그에 비길 사람이 없다. 진실로 일찍이 그 발원의 오래됨이 있는 것이다. 아, 진양공(晉陽公)의 선을 쌓고 덕을 이룸은 마땅히 그 응보를 누려야 할 것인데, 그것을 자신의 몸에 향유하지 아니한 것은, 어찌 하늘이 장차 그 보답을 크게 하기 위하여 늦춘 것이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착한 일을 하면 보답 없는 것이 없다.” 하였다더니, 나는 진양공에게서 그것을 징험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천만년에 이르기까지 그 끼치신 덕택의 오래감과 남은 경사의 영원함이 또 다함이 있겠는가. 아, 거룩하도다.
명(銘)에 이르기를,

흐름이 긴 내는 / 有流斯張
그 원천이 깊고 / 維畜其源
가지가 무성한 나무는 / 有枝斯茂
그 뿌리가 튼튼한 것이다 / 維固其根
훌륭하도다. 하씨 집안이여 / 懿哉河氏
진실로 덕 높은 가문이로다 / 實維德門
우뚝이 높은 선조 좌사낭중은 / 卓彼左司
뛰어나게 나라에 공훈이 있었으며 / 克有殊勳
적선함이 두터워서 / 乃厚其積
후손의 복을 열었도다 / 以啓後昆
인후하신 진양공은 / 振振晉陽
부지런히 덕을 닦았네 / 維德是勤
인륜을 중히 여겨 지친간의 소송을 막으니 / 厚倫息訟
그 의로움에 사람들이 감복하고 / 人服其義
왜란을 미리 알고 집을 옮겨 피난하니 / 移家避寇
그 선견지명을 사람들이 탄복했네 / 人服其智
인자한 그의 정치 두 고을에 베푸시니 / 惠于二州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모하여 의지하였네 / 民慕怙恃
어질고 의롭고 지혜까지 있었으니 / 仁義且智
높은 벼슬 밝은 기쁨 누려 마땅하건마는 / 顯融是宜
거두어 물러나가 시골집에 살면서 / 歛而家居
끝내 나아가지 않았네 / 竟莫以施
당신의 착하심에 하늘이 복 주시어 / 天錫爾類
영명하고 어진 아들을 낳았네 / 克生英賢
성주의 지우를 받아 / 遇我聖主
우리 조선 도우시니 / 以相朝鮮
안위의 국가 정세를 / 安危呼吸
담소하며 지적하였네 / 談笑指陳
차분히 낭묘 위에 앉으시니 / 從容廊廟
백 가지 제도가 새롭게 되었네 / 百度維新
그 무게 태산같고 / 泰山其重
그의 도량 바다같아 / 滄海其容
훈덕의 으뜸이며 / 勳德之魁
유학의 종장일세 / 斯文之宗
임금이 이르시기를 정승은 / 王曰政丞
나와 덕이 같으니 / 實予同德
정사와 좌명에 / 定社佐命
그의 큰 공 아름답다 하셨네 / 予懋丕績
삼대에 걸쳐서 관작을 추증하니 / 追爵三世
그들의 위계가 모두 다 높도다 / 並峻其秩
훈호를 이미 주고 품계도 정해 주어 / 旣勳而階
영의정부사 대광보국숭록대부로 높이고 / 領府維崇
비위에도 작을 추증하여 / 錫之妣爵
진한국대부인을 봉하였네 / 辰國是封
잠덕이 크게 나타나니 / 不顯潛德
죽었으나 살아 있네 / 雖死猶生
진산은 드높고 / 晉山峩峩
진수는 서늘한데 / 晉水泠泠
저 무덤자리 우러러보니 / 瞻彼坎麓
길한 기운 가득하다 / 維吉之叢
고위와 비위를 / 維考維妣
함께 그 속에 장사하였네 / 俱葬于中
면면한 남은 경사 / 緜緜餘慶
끝이 어찌 있으리요 / 曷其有終
비석에 병을 새겨 / 刻銘窮碑
영원한 후세에 알리노니 / 以告無期
이것을 밝게 보는 후손들이 / 昭玆來裔
누군들 공의 공덕 생각하지 않겠는가 / 孰不公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