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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병장 망우당 곽재우장군 서장

아베베1 2014. 10. 2. 08:52

 

 

학봉집 제3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장(狀)

 

곽재우(郭再祐)를 신구(伸救)하는 서장(書狀) 임진년(1592, 선조 25)

 


의령(宜寧) 사람 곽재우가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왜적을 친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미 여러 차례 계달드렸습니다. 지금 뜻밖의 변고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데에서 일어났으므로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알지 못하여, 몹시 걱정스럽습니다.
곽재우는 고(故) 통정대부(通政大夫) 곽월(郭越)의 아들이며,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손자 사위로서, 중도에 무학(武學)을 일삼다가 이를 버리고 다시 글을 읽었습니다. 성질은 단순하고 꾸밈이 없으며, 거상(居喪)함에 있어 극진히 슬퍼하여 향곡(鄕曲)에서 자못 효행을 칭송하였습니다.
변란이 처음 일어났을 때 병사(兵使)와 수사(水使)가 서로 잇달아 도주하고 적이 장차 밀양(密陽)을 침범하려 하였는데, 감사 김수(金睟)가 이르기를, “절제(節制)를 맡은 장수가 포위된 성 안에만 있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면서 영산(靈山)으로 물러나 있다가 곧바로 초계(草溪)로 향하자, 곽재우가 분연히 일어나서 말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도망하였는데도 형벌을 내리지 않더니, 지금 또 왜적이 좌도(左道)에서 나오고 있는데 초계로 퇴주하였다. 감사를 베어 죽이는 것이 옳다.” 하면서, 칼을 잡고 길목에서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향리 사람들이 힘써 말리므로 중지하였습니다.
그 뒤에 우병사(右兵使) 조대곤(曺大坤)과 방어사(防禦使), 조방장(助防將), 수령(守令) 등이 한결같이 모두 풍문만 듣고 무너져서 달아난 탓에 수십 일 사이에 적이 대궐에까지 범하였습니다. 그러자 곽재우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의분을 못 이겨 말하기를, “이런 무리들은 왜병을 호위하여 서울로 들어가 군부(君父)에게 화를 끼친 것이니, 모두 베어 죽여야 한다.” 하면서,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항상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다가 하루 아침에 자기 집 재산을 풀어 군사를 모집하였는데, 그의 첩이, “어찌하여 이러한 개죽음을 하려고 합니까.” 하자, 곽재우는 크게 노하여 칼을 빼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아내와 자식의 의복조차도 또한 군졸의 아내들에게 다 내주었으므로 가업(家業)이 이로 인해 탕진되어 굶주림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의 매부인 허언심(許彦深)의 집에 처자식을 맡기고 모집한 장사들을 거느리고 가면서 왜적을 치겠다고 큰소리치자, 향리 사람들이 듣고는 모두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벌써 의령과 초계 두 고을 수령이 모두 싸움에 패하여 관청은 비어 있었으며, 의령의 관고(官庫)는 이미 불에 타 버려서 곽재우의 군사는 식량이 없었습니다. 이에 초계와 신반현(新反縣)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내어 군사에게 먹였는데,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이 도둑이라고 논하여 병사에게 보고하자, 병사가 명을 내려 체포하였습니다. 그러자 응모하였던 자들이 그 말을 듣고는 뿔뿔이 흩어져 가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지방에 도착한 처음에 즉시 글을 보내서 불렀으므로 군위(軍威)를 다시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줄곧 왜적을 쳤는데, 적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먼저 앞장서서 힘차게 돌진하였습니다. 이에 거느린 전사들이 용기 백배하여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당백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싸울 때에는 반드시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철릭(帖裏)을 입고 당상관의 전립(氈笠) 차림을 하고 싸우면서 스스로 칭하기를 ‘홍의천강장군(紅衣天降將軍)’이라 하였습니다. 말을 달려 적진을 유린하였는데, 오고 가는 것이 번쩍번쩍하여 왜적들이 철환(鐵丸)을 일제히 쏘아도 맞히지 못하였습니다.
혹은 말 위에서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서 행군하는 절도로 삼기도 하였으며, 혹은 사람을 시켜 피리도 불고 호루라기도 불게 하여 두려워하는 뜻이 없음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산 숲 속에 의병(疑兵)을 많이 풀어 놓고 피리도 불고 북도 치고 하면서 떠들어 댔으며, 혹은 곳곳에 복병을 숨겨 놓아 고요하기가 사람이 없는 듯하다가 적이 이르면 갑자기 쏴 죽이기도 하였으며, 혹은 왜적의 배를 뒤쫓아서 해안 가를 따라가면서 활을 쏘았습니다.
어느 하루도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겼습니다. 이에 적의 머리를 벤 것이 모든 장수 중에 가장 많았으며, 쏴 죽인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왜적들도 또한 홍의장군이라고 부르면서 감히 해안에 올라와 도둑질을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의령(宜寧)과 삼가(三嘉) 두 고을의 백성들은 모두 생업에 편안하여 농사에 힘써서 오곡의 풍성함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도내의 나머지 성들이 지금까지 보전한 것은 곽재우의 공이 아주 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삼도(三道)의 군사가 수원(水原)에서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는 미친 사람같이 위태로운 말과 망녕된 말을 수없이 지껄여 댔습니다. 순찰사(巡察使)가 비록 편지를 보내어서 공적을 표창하고 계문하여 공(功)을 아뢰었으나, 역시 그의 뜻을 돌리지는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혹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경계하면 반드시 칼을 움켜잡고 성을 냈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또 갑자기 두 차례나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서(檄書)를 보내어 낱낱이 그 죄를 열거하고는 토벌하겠다고 떠들어 댔습니다. 그리고 또 각 고을의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려 토죄하겠다는 뜻을 말하였습니다. 이에 순찰사가 신에게 관문(關文)을 보내어 의령의 관원을 시켜 잡아 가두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곽재우가 실제로 역심(逆心)을 품었다고 한다면 현재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있으니 한 사람의 역사(力士)로는 잡을 수가 없으며, 만약 역심을 품고 있지 않다면 편지 한 장으로도 넉넉히 깨우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에 곧바로 첩자(帖子)를 곽재우에게 보내어 다방면으로 비유해 깨우쳤으며, 김면(金沔)도 또한 글을 보내서 경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곽재우가 곧 마음을 돌이켜 말대로 잘 따랐습니다. 진주(晉州)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는 이에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기로 하여, 3일에 이미 길을 떠나 전진하였습니다.
곽재우는 일개 도민(道民)으로서 감사를 범하려고 하여 죄를 성토하고 격서를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비록 스스로는 나라를 위한 마음에서 분통스러워서 이렇게까지 한 것이라고는 하나, 행적이 난민(亂民)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즉시 토죄하여 제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뒤에 능히 외로운 군사로 용감히 적을 쳤으므로, 도내의 잔민(殘民)들이 간성(干城)과 같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난폭한 말을 하였다고 하여 곧바로 베어 죽이면, 보전하고 있는 남은 성은 적을 막을 계책이 없습니다. 이에 신은 미봉책으로 그의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하는 생각에서 재삼 경계하여 타이른 결과 곽재우도 이미 순응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순찰사(都巡察使)에게 죄를 졌으니, 서로 용납하기가 어려워서 다른 변고를 야기시킬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이 듣건대, 을묘년의 왜변(倭變)이 일어났을 때 전라 감사(全羅監使) 김주(金澍)가 영암(靈巖)에서 다른 고을로 달아났습니다. 그러자 전 수원 부사(水原府使) 윤기(尹祁)가 당시에 유생으로서 포위된 성 안에 있다가 칼을 빼 가지고 베어 죽이려 하였는데, 김주는 성내지 않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여 잘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논자(論者)들이 지금까지도 윤기의 용기를 칭송하고, 김주가 능히 포용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습니다.
곽재우의 일도 비록 미치고 망녕되기는 하나, 그의 마음은 실로 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러니 감사가 만약 김주가 처리한 바와 같이 대처하면 반드시 조용해져서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수(金睟)에게 글을 보내어서 선처하도록 부탁하였으니, 걱정할 만한 변은 없을 듯합니다. 다만 김수가 이미 곽재우를 반적(叛賊)이라고 계문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을 사주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이 일로써 그를 죄준다면 그가 죄에 승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도의 인심을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몹시 마음이 아프고 절박합니다.
곽재우의 충의를 일으켜 분발한 상황과 용감히 적을 친 공은 온 도에 널리 퍼지고 드러나서 아이들이나 군졸들까지도 모두 곽 장군(郭將軍)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용병(用兵)에 뛰어나서 장수의 자격이 있습니다. 만약 그의 미치고 망녕된 데 대한 주벌을 조금만 늦추어 주시면, 끝내 공을 세워 보답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은 불행히도 명을 받든 후에 두 번이나 이런 변을 만났습니다. 신이 4월 중에 호남(湖南) 길로 가다가 운봉현(雲峯縣)에 이르렀는데, 호남 사람들이 순찰사 이광(李洸)이 근왕(勤王)하는 데 늦게 달려갔다는 이유로 토죄하고자 하면서 신에게 비밀히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에 신이 대의로써 그 말을 꺾었으며, 곧장 김수와 상의하여 이광에게 알려 대비하라고 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김수가 말하기를, “근왕하는 데 늦게 달려갔다는 이유로 토죄하려고 하는 것은 의로운 선비라고 이를 것이다. 만약 이 사람들을 베어 죽이면 한 도의 인심이 더욱 격해질 것이다. 이광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그의 말에 따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곽재우의 일이 꼭 저번의 일과 같습니다. 김수가 진실로 호남 사람들을 조처한 의리로써 곽재우를 조처하면 난처한 일이 없을 듯합니다.
신과 김면이 곽재우에게 경계하여 신칙한 글과 곽재우가 보낸 답서를 아울러 등서(謄書)하여 올립니다.


[주D-001]을묘년의 왜변(倭變) : 명종 10년(1555) 5월에 왜구가 전라도에 침입한 변란을 말한다. 이해에 왜구들이 배 60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하여 먼저 영암(靈巖), 달량(達梁)을 점령하고 어란포(於蘭浦), 강진(康津), 진도(珍島) 등을 잇달아 점령하여 갖은 만행을 다 부렸는데, 조정에서는 이윤경(李潤慶), 김경석(金慶錫), 남치훈(南致勳) 등을 파견하여 영암에서 이들을 크게 격파하여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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