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5세 연촌공 휘 덕지

도순변사(都巡邊使) 증(贈) 영의정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신공(

아베베1 2009. 1. 8. 15:21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73권  
 묘갈명(墓碣銘)
도순변사(都巡邊使) 증(贈) 영의정(領議政)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신공(申公) 묘갈명 병서(幷序)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도순변사(都巡邊使) 신공 립(申公砬)이 김공 여물(金公汝岉)과 함께 왕명으로 적을 방어하다가 충주(忠州) 달천(達川)에서 전사하였다. 그때 상하 모두가 공을 간성(干城)처럼 믿었다가 그 패보가 이르자 상은 곧 서울을 떠났다. 이보다 앞서 공이 북녘 오랑캐 이탕개(尼湯介)를 정벌하여 그의 소굴을 소탕하였으므로 이름이 오랑캐 사이에 떨쳤던바, 이때 와서 왜적들이 대대적으로 몰려와 곧바로 중국을 침범할 양으로 무리가 60만이나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너나없이 안일에 젖어 있었는데, 오직 문열공(文烈公) 중봉(重峯) 조헌(趙憲)만이 적이 틀림없이 침범해 올 것을 미리 알고 왜적 방어책을 올렸으나 그때는 모두 미치광이로 지목하고 말았었다. 일이 다급해지자 당시 재상이 공을 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난색을 보이며 이르기를,
“그는 나를 호위하는 신하인데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를 보낸단 말인가.”
하였다. 계속하여 청하자 상이 공을 불러 물으니 공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때 제도(諸道)의 군대를 모집하였으나 모두 이르지 않으므로 부득이 도하(都下)의 무사(武士)들과 한유(閒遊)하던 사람들을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하였는데 삼의사(三醫司)까지 끼일 정도였다. 무고(武庫)에서 병기를 꺼내고 또 조신(朝臣)들에게 각기 전마(戰馬)를 내어 주도록 명하였다. 때마침 김공(金公)이 사건으로 옥(獄)에 갇히게 되어 공이 갈 것을 자청하였다. 공이 출발할 즈음 상이 인견(引見)하시고 손수 상방보검(尙方寶劍)을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 이하 모든 사람들을 이 상방검(尙方劍)으로 다스리라.”
하고, 또 다니면서 군대를 모으게 하였다. 공이 충주에 이르렀을 때는 군중이 겨우 몇 천 명뿐이었는데, 이일(李鎰)이 상주(尙州)에서 패하고 도망쳐 왔으므로 공이 처음에는 그의 목을 베어 군중에 조리돌리려다가 그를 아끼는 뜻에서 그만두고 계책을 물었더니, 이일은 말하기를,
“적병과 아군의 숫자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니 물러가 서울을 지키는 것만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공이 꾸짖기를,
“그대가 감히 우리 군대까지 동요시킬 셈인가. 앞으로 공을 세워 지난 잘못을 씻으라.”
하고는, 그로 하여금 선봉(先鋒)을 맡게 하였다. 그때 김공은 먼저 새재[鳥嶺]를 점거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공은 적들이 이미 재 밑까지 왔으리라 생각되어 말하기를,
“재까지 가기 전에 적과 마주치면 사태가 급할 뿐만 아니라 현재 아군은 모두 백도(白徒)이고 더구나 평소 훈련을 한 처지도 아니므로, 사지(死地)에다 몰아넣지 않고서는 힘을 다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달천(達川)을 한계로 배수진을 쳤다. 이는 평지에서 기마병으로 격돌하는 것이 적은 수로 많은 적을 무찌르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적은 이미 세재를 넘어 산과 들을 휩쓸면서 포성(砲聲)은 지축을 울렸고 번쩍이는 칼날은 햇빛이 무색할 정도였다. 공은 군중을 지휘하여 진격을 명하고서 두 번씩이나 직접 적진 돌파를 시도했으나 적진은 강하여 깨지지 않았고, 적이 먼저 포위망을 펴 아군의 오른편을 차단하고는 마치 산이 짓누르듯이 동서에서 협공해 왔다. 이에 공은 발길을 돌려 탄금대(彈琴臺)로 돌아와 김공에게 말하기를,
“남아답게 죽을 뿐,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는 일이요.”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김공 역시,
“나도 공의 뒤를 따르겠소.”
하고, 김공이 쓴 장계(狀啓)를 휘하(麾下)를 불러 부탁하고는 그 길로 달려가 둘이 함께 적진에 육박하여 10여 명의 적을 무찌른 다음 서로 안고 강물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공은 평산인(平山人)으로 자는 입지(立之)인데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손이다. 장절공은 고려 태조(太祖)에게 마치 한 고조(漢高祖)에 대한 기신(紀信) 같은 존재였고, 지금도 숭의전(崇義殿)에 배식(配食)되고 있다. 5대조 개(槩)는 세종대왕(世宗大王) 때 상신(相臣)으로 시호가 문희(文僖)이고, 고조 자준(自準)은 관찰사(觀察使)이며, 증조 말평(末平)은 전첨(典籤)으로 참찬(參贊)에 추증되었다. 조부 상(鏛)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중종조(中宗朝)의 명신이며, 아버지 화국(華國)은 생원(生員)인데 영의정 평주부원군(領議政平洲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윤씨(尹氏)는 첨정(僉正) 회정(懷貞)의 딸이다.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1)에 공을 낳았다. 나이 22세에 무과(武科)에 합격한 후 선전관 겸 비변랑(宣傳官兼備邊郞)에서 출발하여 도총부(都摠府) 도사(都事)ㆍ경력(經歷)을 거쳐 진주 판관(晉州判官)이 되었다. 그때 양공 응정(梁公應鼎)이 목사(牧使)로 있으면서 말하기를,
“공은 대기(大器)인데 글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하여, 공은 그때부터 책을 끼고 그에게 가 배우면서 그를 스승으로 대하였고, 양공은 이러한 공을 더욱 기특히 여겼다. 그로부터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나라에서는 북변(北邊)을 근심하게 되어 공이 경원(慶源)ㆍ경흥(慶興)을 연거푸 지키다가 마침내 온성 부사(穩城府使)가 되었다. 그때 본부(本府)에 예속되어 있는 번방 호족들이 공의 위신(威信)에 복종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러자 호족(胡族)의 추장 이탕개(尼湯介)가 율보리(栗甫里)의 호족 수만 명과 함께 반기를 들고 일어나 제진(諸鎭)을 침략하므로 제장(諸將)이 차례로 패배하였다. 공이 곧 군대를 이끌고 응원에 나섰는데, 공이 가는 곳이면 적들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놀라 도망하였다. 또 한번은 강을 건너가 바로 그들 여막(廬幕)을 소탕하였는데, 어떤 노파가 자기 딸을 앞세워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었다. 그 딸은 인물이 절색이었다. 공은 곧 그 딸의 목을 베게 하고 이르기를,
“이런 미인을 남겨 두면 뒤에 반드시 사람을 해칠 것이다.”
하였다. 그때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이 절도사(節度使)로서 공의 용기와 지략에 감탄하여 첩보를 올리니 나라에서 공을 북병사(北兵使)로 승진시켜 그의 공로를 치하하였고, 얼마 후에는 끝내 이탕개를 잡아 목을 베었다. 공이 북쪽에 너무 오래 있어 체직(遞職)하고 돌아와 편모(偏母)를 찾아뵐 것을 상소하였다. 상은 체직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관직을 띤 채로 귀령(歸寧)하게 하고, 상이 친히 교외까지 나가 공을 맞이하였으며, 전포(戰袍)에 핏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는 위로하면서 입고 있던 어의(御衣)를 벗어 입게 하였다. 돌아갈 때에도 상(上)이 교외까지 나가 보내면서 많은 물건을 내렸다.
상이 일찍이 ‘경(卿)은 자녀(子女)가 몇이나 되는가?’ 하고 묻고 혼인을 약속했는데, 후에 공의 맏딸이 신성군 후(信城君珝)의 부인이 되었다. 평안 병사(平安兵使)에 이배(移拜)되었다가 들어와 한성 판윤(漢城判尹)이 되었는데, 환조(還朝)하던 날 도하의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을 하면서 엎드린 채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판윤으로 있으면서 다른 사무까지 겸하여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언젠가는 공에게 본병(本兵)을 맡기려고 했던 때문이다. 다음해가 바로 만력(萬曆) 20년인 임진년(1592, 선조25)이었는데, 이해 4월 28일 공은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공은 모습이 단정 근엄하고 희노(喜怒)를 표정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보통 때는 정연하고 단아(端雅)하며 조심스러워 마치 공부하는 학도 같았다. 그러나 진(陣)에 나가 적과 마주치면 좌우의 가까운 사람도 무서워 떨지 않을 수가 없었고, 또 감히 넘볼 수 없었다. 그러나 부하를 은혜로 대하여 맛있는 것은 남을 주고 적은 것도 나누어 먹었으며, 병든 자는 반드시 직접 가서 위문하였다. 그래서 사졸들이 모두 그의 부하 되기를 즐겨하여 휼륭한 옛 명장(名將)의 풍도가 있었다. 대체로 장절공(壯節公) 시절부터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어 오다가 공의 형제 때 와서 더욱 번성하였다.
공의 중형(仲兄) 급(礏)이 제생(諸生)으로서 일찍이 율곡 이 선생을 위하여 글월을 올려 억울함을 신원하고 이어 군소(群小)들의 붕참(朋讒)을 배격하였는데, 상이 비답(批答) 내리기를,
“네 말이 곧구나. 네 아우 입(砬)은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하고 힘을 다해 변성(邊城)을 지키므로 오랑캐들이 감히 접근을 못하였는데, 너는 또 항소(抗疏)로써 간사한 무리들을 배격하는구나. 어떻게 한 집에서 이렇듯 충(忠)과 의(義)가 함께 날 수 있단 말이냐.”
하였다.
그후 공의 아우 할(硈)도 병사(兵使)로 임진(臨津)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급은 그때 음사(蔭仕)로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어머니가 낭떠러지 밑으로 몸을 던지자 급도 뒤따라 투신하였다. 한집안의 충효(忠孝)가 높고 높다 하겠다.
공은 언제나 신의(信義)와 풍절(風節)로써 자신을 지켜 이청강(李淸江)이 북사(北事) 때문에 법에 걸려 귀양 가 죽을 때도 공은 그것을 억울하게 여겨 그의 억울한 정상을 드러내었고,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은 그 사실을 가시(歌詩)로 읊기까지 하였다. 언젠가 공이 상국 정언신(鄭彦信)의 관하(管下)가 된 일이 있었는데 급기야 정 상국이 정여립(鄭汝立)의 옥(獄)에 연루되어 장류(杖流)되었다. 남들은 감히 그의 집을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공만은 자주 그 집에 가 정중하게 그의 부인을 위안하였고, 또 송강 정철이 신성군(信城君) 모자(母子)를 죽이려고 한다는 간신(奸臣)의 모함 때문에 상에게 큰 의혹을 사고 있었는데, 하루는 상이 공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 공은 아뢰기를,
“신이 1백 명의 목숨을 걸고 보장하겠습니다. 그것은 그를 싫어하는 자들이 그를 참소(讒訴)하여 죽이려는 짓에 불과합니다. 정철이 비록 도량은 편협(偏狹)하지만 신이 그의 심사(心事)를 볼 때 참으로 진실한 군자(君子)입니다.”
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그 때문에 언제나 공을 가리켜 따라 갈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공의 전부인 이씨(李氏)는 아들이 없었고, 계비 최씨(崔氏)는 무인(武人) 필신(弼臣)의 딸인데, 고(故) 만록공(晩鹿公) 최덕지(崔德之)의 후손으로 마음가짐이 인자하였다.
홀로 되어 성남(城南) 옛집에 살면서 아비 없는 자식들을 교양하였다. 상이 항상 돌보아 주면서 심지어 아침저녁 어선(御膳)까지 내려 보냈다. 아들은 경진(景禛)ㆍ경유(景裕)ㆍ경인(景禋)이 있고, 딸은 둘인데 맏이는 곧 신성군 부인이요, 끝은 이대엽(李大燁)에게 시집갔다. 경진이 뒤에 김공 여물(金公汝岉)의 아들 유(瑬)와 함께 정사(靖社)를 협모(協謨)하여 인조대왕(仁祖大王)을 추대함으로써 위대한 중흥(中興)의 업적을 남기고 마침내 영의정(領議政)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이 되었으며, 공에게도 그와 질(秩)이 같은 관작이 추증되었다. 두 아우들도 정사에 참여했던 공로로 둘째는 동평군(東平君), 끝은 동성군(東城君)이 되었다.
경진의 아들 준(埈)도 정사에 참여한 공로로 평흥군(平興君)에 봉하여지고 벼슬은 판서(判書)였다. 해(垓)는 도정(都正)이고, 딸은 각각 별제(別提) 유우엽(柳于曄)과 진사(進士) 박천구(朴天球)에게 시집갔다. 경유의 아들 담(墰)은 판관(判官)이고, 딸은 감사(監司) 이석달(李碩達)에게 시집갔다. 경인은 해(垓)를 계자(繼子)로 맞아들였고, 딸은 문과(文科)에 급제한 정(正)인 이경과(李慶果)에게 시집갔으며, 신성군(信城君)의 계자는 평운군 구(平雲君俅)이고, 딸은 전적(典籍) 안홍량(安弘量)에게 시집갔다. 공이 군대를 이끌고 왜적을 막으러 갈 때에 함께 가고자 하는 자가 두 명 있었는데 당시 재상이 평소 공을 좋아하지 않아 그것을 막았다. 그때 공이 말하기를,
“지금이 상공(相公)께서 사이가 좋고 나쁜 것을 따질 때입니까. 옛날 형가(荊軻)가 연(燕) 나라 태자 단(丹)의 심부름에 쫓겨 함께 가야 할 사람을 기다리지 못하고 떠났던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말하는 자들은 형가를 소탈(疏脫)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한 자 여덟 치밖에 안 되는 비수(匕首) 한 자루로 어떻게 호랑(虎狼) 같은 진(秦) 나라를 대항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그때 훈련도 제대로 안 된 수천 명의 오합지졸을 이끌고 수십만에 달하는 기세 당당한 사나운 적과 갑자기 마주쳤던 것이다. 옛날 맹자(孟子)가 비록 진(秦)ㆍ초(楚)의 강적을 매로 종아리 칠 수도 있다는 말을 하였지만, 또 적은 수로는 많은 수를 당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장수와 재상이 뜻이 서로 맞지 않은 상태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일은 예부터 있지 않았다. 공이 설사 달천(達川)에서의 패배가 없었더라도 이순신(李舜臣)ㆍ김덕령(金德齡)이 당했던 화를 끝까지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인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육도 기정을 번갈아 쓰는 것이야 / 六韜奇正之相隨用
오랑캐나 왜적이 다를 게 무엇인가 / 豈異於胡與夷也
한가닥 절의는 전패 중에도 변함없어 / 一節顚沛而無貳
끝내 뜻과 직분을 빼앗기지 않았네 / 終不奪其志與帥也
큰 비가 서 있는 무덤이여 / 大石之塋
옷과 신이 묻혀 있는 곳이라네 / 衣履所藏
우뚝 솟은 남한의 뒤 / 南漢峙後兮
곁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네 / 江水在傍
천추만세토록 / 千秋萬世兮
그 분한 가시지 않으리 / 憤恨俱長
자손들 번창하고 훌륭함이여 / 後承昌大兮
그 여경 영원하리 / 餘慶無疆

[주D-001]삼의사(三醫司) : 의료를 맡은 세 관사, 즉 내의원(內醫院)ㆍ전의감(典醫監)ㆍ혜민서(惠民署)를 말한다.
[주D-002]한 고조(漢高祖)에 …… 기신(紀信) : 왕의 위기를 대신하여 죽은 일이다. 한 고조가 항우(項羽)에게 형양(滎陽)에서 포위되었을 때 기신이 고조로 위장하고 초군(楚軍)에 투항한 틈을 타서 고조가 그 포위망을 탈출할 수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공산(公山)에서 견훤(甄萱)과 싸우다가 포위당해 형세가 위급하게 되자 신숭겸(申崇謙)이 김낙(金樂) 등과 역전(力戰)하여 전사함으로써 왕건을 위기에서 모면하게 한 일과 같다는 말이다.
[주D-003]숭의전(崇義殿) : 조선 때 고려 태조(太祖)와 7왕을 제사 지내던 사당이다. 조선 태조(太祖)는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미산면(眉山面)에다 사당을 세우고 고려 태조와 그 밖의 혜종ㆍ정종ㆍ광종ㆍ경종ㆍ성종ㆍ목종ㆍ현종의 7왕을 모셨다.
[주D-004]북사(北事) : 1583년 이제신(李濟臣)이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있을 때 호족(胡族)의 추장 이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 경원(慶源)ㆍ아산(阿山)ㆍ안원(安原) 등지를 함락하였던 일을 말한다. 그때 그 패전으로 이제신은 파직되어 인산진(麟山鎭)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주D-005]형가(刑軻) : 옛 중국 전국(戰國) 시대의 제(齊) 나라 사람. 연(燕) 태자(太子) 단(丹)의 심부름으로 비수(匕首)를 끼고 진(秦) 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죽이러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게 죽음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