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5세 연촌공 휘 덕지

나의 공부방 (연촌공과 연촌공 후손관련 자료 저의 직계 ,방계)

아베베1 2012. 10. 28. 15:17



역사기록물 > 국조인물고

조정립 [ 趙正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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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본글 출처

    조정립의 묘갈명(墓碣銘)

  • 저자

    조경(趙絅)

  • 본관

    횡성(橫城)

  • 이명

    : 여직(汝直)
    : 송호(松湖)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34 휴일(休逸)

명리(名利)에 담담하게 물러나는 선비를 어찌 쉽게 얻겠는가? 한(漢)나라 때에는 소광(疏廣)과 소수(疏受)가 있었고 진(晉)나라 때에는 도 원량(陶元亮, 도 연명(陶淵明, 도잠(陶潛)))이 있었고 송(宋)나라 때에는 전약수(錢若水)가 있었으며, 후대로 내려와 명(明)나라 때에는 설 경헌(薛敬軒, 설선(薛瑄))과 오 강재(吳康齋, 오여필(吳與弼)) 같은 몇몇 사람들이 있었을 따름이다. 우리나라에는 영묘(英廟, 세종) 때에 최덕지(崔德之)와 어변갑(魚變甲)이 있었고 목묘(穆廟, 선조) 때에는 또 직제학(直提學) 조 여직공(趙汝直公, 조정립)이 있었다고 하는데, 직제학은 담담하게 물러난 시기가 가장 빨랐고 그 만난 시대가 가장 어려웠다. 옛날 사람들도 능히 한창 벼슬할 나이에 근력(筋力)을 거두고 중흥(中興)한 시기에 벼슬을 그만두기를 직제학처럼 해낸 자가 있었는지를 알지 못하겠다. 독론(篤論)하는 선비들이 모두 말하기를, 직학은 그 명철함이 두 소씨(疏氏)와 나란히 달리고 그 학문의 정고(貞固)함이 경헌(敬軒)ㆍ강재(康齋)와 어깨를 견주니, 최덕지와 어변갑은 훌륭하다고 여길 것이 못된다고 한다.

직제학이 세상을 떠난 뒤에 문인과 지구(知舊)들이 서로 논의하여 말하기를, “어질기가 우리 직학 같고 학문이 우리 직학 같은 사람이 명리(名利)에서 몸을 빼고 천인(千仞)의 위험에서 옷을 털고 떠나기를 우리 직제학처럼 해낸 자가 없는데도, 그 언론과 풍채가 의(義)로써 진퇴(進退)하고 관직을 역임한 차서(次序)와 그 가세(家世)며 돈후한 성품의 드러낼 만한 것들로 하여금 나날이 민몰되어가고 칭송됨이 없도록 그냥 놔두면, 평소에 직제학을 따라 유학(遊學)한 자들이 어떻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마침내 서로 집안에 있는 옛 책들을 열람하여 직제학이 저술한 약간 편과 권득기(權得己)공이 지은 행장(行狀)을 찾아내어 편지 한 통을 써서 직제학의 구씨(舅氏)인 참찬(參贊) 김수현(金壽賢)공에게 부쳐주어 나에게 부탁하기를, “그대는 태사(太史)로 있는데도 나의 생질(甥姪)인 여직(汝直)의 일을 논재(論載)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참찬이 세상을 떠났고 나는 또 이리저리 낭패를 겪어 그 관직을 잃은 지가 지금까지 20년이 되었다. 올해 겨울에 직제학의 손자인 조덕훈(趙德薰)이 평원(平原)으로부터 그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 묘소의 나무가 아름드리도 더 되게 자랐는데, 집사(執事)께서는 김 참찬(金參贊, 김수현)의 부탁을 잊으셨습니까? 감히 참찬의 정령(精靈)에 빙자하여 우리 할아버지의 묘문(墓文)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나 조경(趙絅)이 이에 그 말을 듣고 슬픈 마음으로 이르기를, “처음에 불녕(不佞)이 낭료(郎僚)로서 참찬공을 모시었고 또 이웃에 살면서 사이좋게 지냈으므로 내가 직제학을 경모(景慕)함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서 아침저녁으로 직제학에 관한 일을 입이 마르도록 말해준 것이 한두 얘기에 그치지 않았는데, 도리어 불녕의 지금 나이가 매우 늙었으니, 어떻게 이미 바닥난 정신을 불러 일으켜 대군자(大君子)의 성덕(盛德)을 만분의 일이나마 형용할 수 있으리오? 그대는 조금 진정하여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돌아가서 나의 노병(老病)이 조금 차도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오.”라고 하였다.

가장(家狀)을 살펴보건대, 공은 휘(諱)가 정립(正立)이고, 여직(汝直)은 그의 자(字)이며, 호(號)는 송호(松湖)이고, 본관(本貫)은 횡성(橫城)이다. 횡성 조씨(橫城趙氏)는 고려 때 한림 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조욱(趙昱)으로부터 현달하였고, 그 후대에 시중(侍中)을 지낸 조승린(趙承藺), 태학사(太學士)를 지낸 조윤익(趙潤益), 복야(僕射)를 지낸 조시언(趙時彦), 시중(侍中)을 지낸 문경공(文景公) 조영인(趙永仁), 태위(太尉)를 지낸 문정공(文正公) 조중(趙仲), 참정(參政)을 지낸 광정공(光定公) 조계순(趙季珣)이 훈현(勳賢)과 상업(相業)으로써 당시에 명성을 빛냈으며, 그로부터 4대를 전하여 좌윤(左尹)을 지낸 조홍도(趙弘道)에 이르러 아조(我朝)에 들어왔다. 공의 증조(曾祖)는 조준(趙俊)으로 평양 서윤(平壤庶尹)을 지냈고, 할아버지는 조응세(趙應世)로 제용감 부정(濟用監副正)을 지냈다. 아버지는 조진(趙進)으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를 지냈고 풍산(豐山) 좌통례(左通禮) 김진(金鎭)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이것이 공의 세보(世譜)이다. 김 부인(金夫人)은 얌전하고 현숙 명철하여 부덕(婦德)을 갖추었으니 어진 아들을 낳은 것이 그 까닭이 있었으며, 가정(嘉靖) 경신년(庚申年, 1560년 명종 15년) 10월 9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장난이나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침착하고 차분하여 보는 자들이 기이하게 여겼으며, 성장하게 되어서는 남들보다 뛰어나 숙성(夙成)하였다. 만력(萬曆)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뽑혀 들어가 정자(正字)를 거쳐 박사(博士)에 이르렀으며,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전적(典籍)에 승진하여 기성(騎省, 병조)의 낭관(郎官)에 전임되었고 미원(薇院,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에 임명된 것이 두 번이었다.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는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거쳐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가서 수찬(修撰)ㆍ지제교(知製敎)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전부 원외(銓部員外, 이조 정람임)를 지냈다. 그 당시 좌이(佐貳)가 결원(缺員)이었는바, 전장(銓長, 이조 판서를 말함)이 후보로 의망(擬望)한 자가 그 적임자가 아니었으므로 공은 불가하다고 쟁집(爭執)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시의(時議)와 어긋나게 되었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체직되어 전적(典籍)에 붙여졌고,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에는 교리(校理)와 직강(直講)을 역임하였으며 또 분서(粉署, 청현직(淸顯職)을 이름)로 돌아갔다가 세자시강원 보덕[春坊輔德]에 승진하여 사간(司諫)으로 천전(遷轉)되었다. 그해 가을 7월에 사성(司成)으로서 집의(執義)를 겸대하여 중국의 경사(京師, 북경임)에 사행(使行)하였고,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에는 안변 부사(安邊府使)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지 않았으며, 부친상을 당하여 복제(服制)를 마친 뒤에 사예(司藝)에 제수되고 부응교(副應敎)로 옮기었다.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사인(舍人)으로 옮겼다가 이듬해에 체직되어 직강(直講)이 되었다. 이 당시에 당로(當路)에게 호되게 밉보여 공 이부(孔吏部, 남제(南齊)의 공치규(孔稚珪))처럼 조정에 있고 싶지 않은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년)부터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까지 혹은 중서(中書)로서 혹은 응교(應敎)로서 혹은 전한(典翰)으로 임명을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마지막에는 진정소(陳情疏)를 올렸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중승(中丞)에 임명되자 또 사양하였고, 얼마 뒤에 목묘(穆廟, 선조)의 승하(昇遐)를 당하여 공은 분곡(奔哭)하였고 예(禮)를 마친 뒤에 즉시 물러나왔다. 광해군(光海君) 초에 사간(司諫)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8조(條)의 상소를 올렸는데, 대체로 수천 마디나 되었다. 그 대요(大要)는, 상례(喪禮)를 극진히 치르고 대비(大妃)에게 효도를 다하고 동기(同氣)에게 은의(恩義)를 다하고 어진 재상을 대우하고 병전(秉銓, 전조(銓曹)의 판서(判書)를 말함)을 잘 선택하고 군자(君子)를 친애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라는 것이었으며, 또 학문(學問)과 조존(操存)의 방도를 권하였는데, 하는 말마다 중도에 들어맞았으니, 가령 광해군이 척연(惕然)하게 그 열 가지 중에 한두 가지라도 채용했더라면 어찌 군도(君道)를 잃는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그 뒤에 응교(應敎)ㆍ집의(執義)ㆍ보덕(輔德)으로 부른 것이 여러 번이었으나, 공은 나아오지 않았다.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에 사성(司成)으로 개임(改任)되었다가 집의(執義)로 옮기었고, 또 전한(典翰)과 직제학(直提學)에 제수되었으나 심질(心疾)이 크게 발병하였다는 핑계로 사양하였고 다른 말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공은 이미 광해군이 위태로워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점친 까닭이었다.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에 중승(中丞)과 춘방(春坊)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나아오지 않았고,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광해가 공이 분문(奔問)하지 않은 것으로 의심하였으므로, 공은 즉시 서울에서 견책(譴責)을 기다렸는데, 또 직제학(直提學)에 제수하였다. 공은 이에 상로(霜露)를 쐬어 병이 점차 위독해지어 숙사(肅謝)를 하지 못하였고, 12월에 서울에 있는 집의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은 53세였다. 이것이 공이 역임한 관직과 행업(行業)이다. 이듬해인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 3월에 원주(原州) 법천리(法川里)에 장사지냈다가 뒤에 지관(地官)의 말에 따라 손곡리(蓀谷里)의 사향(巳向) 자리로 천장(遷葬)하였다.

오호(嗚呼)라, 세상에 공을 논하는 자들이 단지 공이 용퇴(勇退)한 것만을 고상하게 여길 뿐이고 공이 섬기는 임금에게 절의를 다한 것은 알지 못하며, 단지 공이 청렴하고 결백하게 절조를 지킨 것만 알 뿐이고 공이 학문에 부지런하여 죽을 때까지 마치 하루처럼 똑같이 한 것은 알지 못한다. 공은 사람됨이 홍의(弘毅) 독실(篤實)하고 문장(文章)을 잘하였다. 17, 18세 때에야 비로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배우겠다고 청하여, 성의와 공경의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배움에 자기 몸을 맡겼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공부하면서 기름을 태우면서 밤을 이었으며, 조존(操存)ㆍ성찰(省察)과 불괴옥루(不愧屋漏)를 정문 제일침(頂門第一鍼)으로 삼았다. 집에 들어가서는 그 부형(父兄)을 섬기고 자매(姉妹)와 처노(妻奴) 사이의 처신함에 있어서 각기 그 방도가 적절하였고, 밖에 나가서는 군상(君上)을 섬기고 붕우(朋友)와 교제함에 있어서 옳은 도리를 견지(堅持)하였으며, 털끝만큼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 도(道)에 나아간 것이 성숙해지자 음양도(陰陽圖)ㆍ성정도(性情圖)ㆍ도기도(道器圖)의 세 도(圖)를 저술하였는데, 그 설(說)이 한 구(句), 한 자(字)도 염계(濂溪, 송대(宋代)의 주돈이(周敦頤)를 말함)와 양정(兩程, 송대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를 말함)의 학설을 근본으로 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거의 윤 화정(尹和靖, 화정은 송대(宋代) 윤돈(尹焞)의 호)이 성인(聖人)의 말에 대하여 듣는 대로 순조롭게 이해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과 똑같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 밖에 아들을 가르친 얘기를 말하자면, ≪소학(小學)≫과 사서(四書)로써 근식(根食)에 관개(灌漑)하고 실제에 힘을 쓰는 바탕으로 삼았고, 독서하여 치지(致知)하는 방법이 치밀하여 새어나가지 않았다. 그 중부(仲父)인 연천공(漣川公, 연천 현감 조인(趙遴))을 마치 선엄(先嚴,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름)을 섬기듯이 한결같이 모시었으며, 연천공이 역학(易學)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공이 가정에서 그에게 질의(質疑)한 것들도 많았다고 한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공과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공과 더불어 도의(道義)로써 교제하였고 구암에게는 왕래하며 학문을 논한 것도 한번이 아니었다. 권득기(權得己)공은 나이가 공보다 조금 뒤지지만 고절(苦節)과 취미(臭味)가 똑같았다. 공은 여색(女色)을 멀리하라는 경계를 매우 엄격하게 지켰고, 주량[酒戶]이 매우 컸는데 평생 동안 남들은 그가 술잔을 잡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가 혼조(昏朝, 광해조를 말함) 때에 이르러 인륜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하기를 한참 동안 하더니 이윽고 술을 가져오라고 명하여 밤새도록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는바, 집안의 자제(子弟)들이 그때서야 공의 주량을 알게 되었다.

공은 표리(表裏)가 순일(純一)하여 낯빛이 평화롭고 기도(器度)가 맑았으므로, 사람들이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공을 친애하고 공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성(臺省, 사헌부와 사간원)에 출입한 20여 년 동안에 세상의 비난을 자아내는 일은 감히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작연(皭然)하여 진흙 구덩이에 있어도 검게 물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수신 제가(修身齊家)의 학문을 강명(講明)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하였으니, 어찌 이 세상의 생민(生民)들에게 뜻이 없는 사람이었겠는가? 슬프게도 품은 감정을 제거하지 않고서 단지 담박하게 물러난 것만으로 공을 평가하는 것은, 어찌 사람들이 식견이 얕은 장부(丈夫)로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옛사람에게 찾아본다면 (명나라) 설 경헌(薛敬軒, 설선(薛瑄))과 오 강재(吳康齋, 오여필(吳與弼))에 필적(匹敵)할 만한 분이다.”라고 하였으니, 후세의 군자(君子)는 반드시 제대로 분별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채 중랑(蔡中郞)1)이 말하기를, “나는 곽 유도(郭有道,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인 곽태(郭泰)를 말함)의 비문(碑文)에 대해서만큼은 부끄러운 바가 없다.”고 하였는데, 내가 비록 글재주가 없으되 간혹 사대부(士大夫)의 공덕(功德)을 명(銘)하면서 대부분 부끄러운 낯빛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유독 공의 묘갈(墓碣)에 있어서는 부끄러운 바가 없다.

공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는데, 초배(初配)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선공감 정(繕工監正) 유영서(柳永緖)의 딸로, 1남 2녀를 낳아 아들 조집(趙㠍)은 종묘서 영(宗廟署令)이고, 딸은 사인(士人) 박명호(朴明鎬)와 감사(監司) 정언황(丁彦璜)에게 각각 시집갔다. 계배(繼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모관(某官) 모(某)의 딸인데, 자녀가 없다. 삼배(三配)는 윤씨(尹氏)로 모관(某官) 모(某)의 딸인데, 2녀를 낳아 사인(士人) 이광규(李光圭)와 이개(李)에게 각각 시집갔다. 조집의 초취(初娶)는 감사(監司) 이욱(李稶)의 딸인데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조덕훈(趙德薰)과 조덕윤(趙德潤)이고 사위는 노사겸(盧思兼)이다. 재실(再室)은 김원립(金爰立)의 딸인데 2녀를 낳아 장녀는 신득열(辛得說)에게 시집갔다. 정시한(丁時翰)은 생원(生員)으로 감사 정언황의 소생이고, 이재아(李在雅)와 이재하(李在夏)는 이광규의 소생이며, 이보한(李保翰)과 이보윤(李保胤)은 이개의 소생이다. 조덕훈은 아들과 딸이 각각 3명인데, 아들은 조광(趙洸)ㆍ조황(趙況)ㆍ조형(趙泂)이고, 장녀는 유장한(柳長漢)에게 시집갔다. 조덕윤은 5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이위(李煒)에게 시집갔다. 정시한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정도원(丁道元)은 진사(進士)이고 정도겸(丁道謙)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인데 모두 요절하였고, 그 다음은 정도진(丁道震)이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노사겸은 3남 2녀를 낳았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자는 많아서 기재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싹트지 않았을 때 분명히 살펴서 선(善)을 알고 물러났으니, 훌륭하도다. 선생은 한 가지 아름다움으로 규정할 수 없네.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고 공경과 의리로써 협지(夾持)하였네. 싸라기를 먹으면서도 안무(按撫)하고 구조하였으니 그 뜻을 남들이 어찌 엿보겠는가? 어째서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어째서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였을까? 그 허물을 어디로 돌려야 하나 어찌 저 하늘을 탓하리오? 사람들이 우러러도 비춰주지 않고 맑은 바람만 솔솔 불어오네.

각주

1) 채 중랑(蔡中郞) :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을 말함. 그는 고사(高士)인 곽태(郭泰)가 죽자 비명(碑銘)을 짓고서 “내가 이제껏 여러 사람들의 비문(碑文)을 지어 왔는데, 곽 유도(郭有道)의 비문만큼은 남들에게 부끄러운 바가 없다.”고 말하였음.

 

 

최덕지 [ 崔德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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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본글 출처

    최덕지의 유사(遺事)

  • 이명

    : 연촌 우수(煙村迂叟)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33 휴일(休逸)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더러 당(唐)나라 청하(淸河)에서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하는데, 완산을 지금 풍속에서 객산(客山)이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조선조로 들어와 참의(參議) 최담(崔霮)이 최광지(崔匡之)ㆍ최직지(崔直之)ㆍ최득지(崔得之)ㆍ최덕지(崔德之) 등 아들 네 명을 두었는데, 공이 그중 가장 막내이다. 공은 스스로 호를 연촌 우수(煙村迂叟)라고 지었다. 우리 태종(太宗) 5년(1405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국(史局)에 뽑혀 들어가 옥당(玉堂)과 대각(臺閣)을 역임하고 누차 고을을 맡았는데, 모두 치적을 이루었다. 일찍이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있다가 영암(靈巖) 영보촌(永保村)으로 물러가 살면서 그 누대(樓臺)의 편액을 ‘존양(存養)’이라고 하였다.

문종(文宗) 원년(1451년)에 부름을 받아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임명되었고 그 이듬해 겨울에 늙음을 고하고 귀향하였는데, 그때 조정에서 같이 벼슬한 사람 중에 시를 지어 송별하며 그 뜻을 고상하게 여긴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 후 나이 72세에 세상을 떠났다. 신미년(辛未年, 1451년 문종 원년)과 계유년(癸酉年, 1453년 단종 원년) 사이에 나라에 연고가 많았으므로 선생이 물러난 것이 정말로 사전에 기미를 살펴보고 몸을 보존하려는 사람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세상에서는 그 명철한 지혜를 일컬었다. 조정에서 공을 선현(先賢)으로 기록하고 그의 자손을 채용하였다. 그리고 한 고장의 사람들이 공을 위해 서원(書院)을 건립하였는데, 그 또한 ‘존양’으로 편액을 삼았다.

 

 

소유자

전주 최씨 문중

  •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594호

  • 문화재 지정일

    1975년 5월 16일

  • 목차

    1. 정의
    2. 내용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최덕지(崔德之)를 그린 초상화 원본 및 그 유지본.

    내용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최덕지(崔德之)를 그린 초상화 원본 및 그 유지본. 비단 바탕에 설채(設彩). 세로 74㎝, 가로 53㎝. 보물 제594호.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전주 최씨 문중(門中) 소장. ≪연촌유사 烟村遺事≫에 의하면 최덕지 영정은 원래 3본이 있었다 한다.

    그 중 1본은 생시진상(生時眞像)으로서 존양루(存養樓) 옛터 근방 영당(影堂)에 봉안하였으며, 나머지 2본 중 1본은 녹동서원(鹿洞書院)에, 1본은 주암사(舟巖祠)에 봉안하였다 한다. 현재는 원본·이모본(移模本) 및 유지본(油紙本)이 전라남도전주 최씨 문중에 보존되어 오고 있다. 그 중 원본·유지본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원본의 작품상 특색을 살펴보면, 우선 화폭은 가운데에서 연결된 연폭(連幅)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의 연폭 형식은 대부분이 3폭이다. 그래서 얼굴 부분이 들어가는 중폭(中幅)이 가장 크며, 양옆으로 두개의 소폭이 결봉되는 방식인 데 비하여 이 최덕지상의 연폭 형식은 특이하다. 인물의 복장으로 인하여 초상화가 더욱 주목된다.

    모자는 감투형에서 평량자형(平凉子型 : 패랭이)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도기적 형태로서 최덕지가 생존하였던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한 형식을 보여 준다. 이러한 입제(笠制)는 곧 발립(鈸笠)의 형태이며, 포제(袍制)는 일색복(一色服)으로서 고려 말로부터 전승되어 온 원나라의 영향이 조선 초까지 그대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최덕지상의 차림새는 여말선초의 선비의 한거(閒居)하는 모습에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에 나타난 안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 화상은 만년기의 상이다. 안면 및 옷주름 처리에서 모두 사실에 비중을 둔 핍진(逼眞)에의 기도가 엿보인다. 발립은 반투명으로 속의 상투 부분이 검게 비치고 있으며, 안색은 전반적으로 갈색계의 색조를 띠고 있다. 눈썹은 담묵으로 칠한 위에 그 털을 한 올 한 올 방향이 밑으로 숙여지게 표시하였다. 숱 많은 눈썹의 성격이 살아 있다.

    짙은 눈썹과는 대조적으로 작은 눈매에서는 실제 눈에서 느낄 수 있는 생기 찬 명상적 눈빛을 보여 준다. 그러나 회화사적 흥미를 끄는 것은 비화법(鼻畫法)이다. 최덕지라는 인물의 코 형태는 주먹코이다. 조선 초기 초상화의 대부분이 8, 9분면의 취세에도 코를 거의 옆모습으로 나타냈다. 이에 비해서 이 화상은 코 처리에서 사상에 바탕을 둔 시각적 진실을 보여 준다.

    안면 처리를 세밀히 살펴보면, 이른바 법령(法令 : 코 가장자리에서 입 양쪽 끝으로 이르는 부분) 및 뺨에 고심세(高深勢 : 높고 낮은 형세)가 표현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 부위에는 안색보다 짙은 갈색으로 음영 처리가 되어 있고, 원공(귀의 圓文) 역시 그러하다. 바로 이 점이 개채(改彩)를 의심하게 한다.

    ≪연촌유사≫에 의하여 이에 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초상화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시에 나주 묘산(墓山)에 묻었다가 왜구가 물러가고 수년 후 파보니 그대로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개장의 필요가 있었던 듯 ≪연촌유사≫에는 ‘화상개장찬문(畫像改粧贊文)’이 수록되어 있다.

    1610년(광해군 2년) 4월에 개장하여 덕진교(德津橋)로 옮긴 것이 1635년(인조 13년) 2월이라 하니, 그간의 시일이 오래 경과한 사유가 분명하지 않으나 개장 후 종손가에 환안한 것은 확인된다. 따라서 개장 때 개채가 가능하다. 이 개채로 인하여 원본이 손상되기보다 오히려 취(趣)가 더욱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이 화상은 안면 및 시선은 좌안7분면이다. 하지만 몸체는 정면으로 많이 돌이켜져 있기 때문에 자연히 오른쪽 어깨와 팔이 그 시각에 맞도록 돌려져 있다. 그것이 인물의 표현상 대칭성에서 벗어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일면 표현적 특색으로 변질되어 있다. 또한 발 부분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손이 나와 있는 점이 그 뒤의 조선시대의 초상화와는 다른 특색을 보인다. 역시 고려시대 초상화의 한 연장임을 말해 준다.

    최덕지상을 그린 화사(畫師)는 알 수 없지만 세밀한 관찰력과 직관의 소지자였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신천익(愼天翊)의 화상찬이 말해 주듯이 이미 당대에도 그 우수함이 널리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여말선초의 초상화가 희귀한 시점에서 그 상용 형식·복색·필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동시에 초상 예술의 본령이 사형(寫形)을 넘어 사심(寫心)이 있음을 대변해 주는 가작 중 하나이다.

     

     

    원생몽유록 [ 元生夢遊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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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칭

      원자허전(元子虛傳)

    • 구분

      한문소설

    • 저자

      임제(林悌)

    • 창작연대

      조선중기

    • 수록책명

      조야첨재(朝野僉載), 장릉지(莊陵誌), 남추강집(南秋江集), 관란유고(觀瀾遺稿), 백호문집(白湖文集)

    조선 중기 때의 문인 임제(林悌)가 지은 한문소설. <원자허전(元子虛傳)>이라고도 부른다. 이 작품은 임제의 <화사(花史)>와 합철된 단 권 필사본 이외에 《조야첨재(朝野僉載)》 권8에 수록된 본문, <육신전(六臣傳), 일명 육문정튱졀녹>에 수록된 국역본 등이 현존하는 필사본이다. 그밖에 인간본(印刊本)으로 《장릉지(莊陵誌)》∙ 《남추강집(南秋江集)》∙ 《관란유고(觀瀾遺稿)》∙ 《백호문집(白湖文集)》 등에 수록된 것들이 전한다.
    작자에 대해서는 김시습(金時習) ∙ 원호(元昊)를 주장하는 이설이 있었으나, 《해월문집(海月文集)》의 기록에 의하여 임제임이 확정되었다. 작품의 제작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작품 말미의 연기(年記)로 추정하건대 1568년으로 보인다. 황여일(黃汝一)은 이 글에 발(跋)과 제시(題詩)를 붙이고 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주인공 원자허(元子虛)가 강개한 선비로 야(野)에 묻혀 살아가던 어느날 밤, 꿈에 죽은 사람들이 사는 영계로 우연히 가게 되어 그곳에서 복건자(幅巾者, 南孝溫)의 마중을 받아 왕(단종)과 다섯 신하가 있는 정자로 가서 이들과 어울려 고금의 흥망사를 의론한다. 마음이 격하여 있던 복건자는 요(堯) ∙ 순(舜) ∙ 탕(湯) ∙ 무(武)의 네 성군을 적시(賊視)하는 발언을 한다. 이들은 선양(禪讓)을 빙자해서 찬탈의 선례를 남겼다는 것이다.
    왕은 이에 이를 빙자하는 자가 나쁠뿐이지, 결코 성군을 탓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일동은 술을 마시며 지난 일들을 시로 읊어 회한을 토로한다. 왕의 노래를 시작으로 신하들이 차례로 음영하고 마지막으로 자허는 감정에 복받쳐서 눈물을 흘리며 시 한 수를 읊으니 일동이 듣고 비감에 젖게 된다.
    이때 씩씩한 장부(兪應孚에 해당)가 자리로 뛰어들어와 왕에게 인사하고 썩은 선비들과는 대사를 이룰 수가 없다며 칼을 뽑아 춤추며 큰 소리로 노래한다.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며 비바람이 치고 우레가 한번 울리자 자허가 꿈에서 깨어나는 이야기이다.

    작중인물 복건자에 대하여 통설과는 달리 최덕지(崔德之)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많은 문헌에서 남효온이 인정되고 있다. 폐주 단종과 사육신의 억울한 경우를 드러내어 은연 중 세조 찬탈을 비판하고 있는 바, 이는 당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금기된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필사된 형태로 문집에 실리지 못한 채 전해온 것이다. 그러나 독자층은 일반사대부 외에도 국역본의 존재에서 보듯 부녀자층까지 확산되고 있다. 이는 금기시된 내용이기는 하나 불의를 미워하고 약자를 동정하는 인지 상정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숙종은 이 글을 친히 읽고 복건자의 발언 중 '적(賊)'자만을 고쳐 세상에 읽히는 것을 묵인하였다. 이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문제삼은것은 인간사의 부조리한 면이다. 이 점은 황여일의 발문에서도 드러나 있다.
    한국소설사상 몽유록계통의 소설이 본작품에 이르러 비로소 역사적 · 사회적 주제를 띤 본격소설로 되었으며, 보다 수준 높은 몽자소설(夢字小設) 전개를 촉진시켰다.

    출처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이응백ㆍ김원경ㆍ김선풍 교수 감수, 한국사전연구사

     

     

    최덕지 초상 및 유지 초본

    참고문헌

    烟村遺事
    韓國의 肖像畵(趙善美, 悅話堂, 1983)
    朝鮮王朝時代의 肖像硏究(趙善美, 弘益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80.1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96.1.5,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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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본글 출처

      최충성의 집발(集跋)

    • 저자

      박세채(朴世采)

    • 이명

      : 필경(弼卿)
      : 산당(山堂)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40 사자(士子)

    산당 서객(山堂書客) 최공(崔公)의 휘는 충성(忠成)이요, 자는 필경(弼卿)이며 완산부(完山府) 사람이다. 연촌 선생(烟村先生) 최덕지(崔德之)의 손자이고, 한훤당 선생(寒暄堂先生, 김굉필(金宏弼)) 김공(金公)의 문인이다.

    공은 성화(成化)ㆍ홍치(弘治) 때를 당하여 호남의 광주(光州)에 거주하였다. 천성이 고결하고 티가 없었으며 오직 산당(山堂)에서 독서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고 낮밤으로 이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호(號)로 하였다. 어려서부터 배워 문장이 되었고, 제자 백가(諸子百家)의 글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붓을 대면 곧 수백 천언(數百千言)을 깊고 두텁게 마음대로 구사하였으며, 아울러 박사가(博士家)의 업(業)에 종사하였다. 서울에서 김 선생을 붙쫓게 되면서 비로소 배움의 대요(大要)를 듣게 되었고, 이적(李勣)ㆍ윤신(尹信)과 명성이 같았다. 이에 성정(性情)ㆍ이기(理氣)의 심오한 뜻에 마음을 기울여 더욱 인륜(人倫)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침을 위주로 하니, 한 때의 사우(士友)가 다투어 추앙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이 일찍이 호남을 순안(巡按)할 때 공이 글을 올려 불무(佛巫)의 폐단을 강력히 말하고 서둘러 물리치기를 청하니 점필재 선생이 예(禮)를 더하여 대우하였다.

    공은 산당에 노닌 지 오래되어 무릇 나라 안 삼각(三角)ㆍ백악(白岳)ㆍ천마(天磨)ㆍ성거(聖居)ㆍ서석(瑞石)ㆍ두류(頭流) 등 여러 명산을 모두 도보로 발섭(跋涉)하였는데, 그 자취가 두루 몇 차례, 혹 두 서너 번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풍병(風病)을 얻어 신해년(辛亥年, 1491년 성종 22년)에 이르러 더욱 위독해져 곧 졸(卒)하였다. 나이 34세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처사(處士)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공과 친했으므로 뒤에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을 짓고 이에 공의 이름을 뒤에 넣었다. 그리고 영암(靈岩)의 사자(士子)들이 또 이른바 ‘존양사(存養祠)’에 공을 배향(配享)하니, 곧 연촌 선생(烟村先生) 단독으로 향사하는 곳이었다.

    나는 일찍이 공의 유고(遺稿)가 아직 있다는 것을 듣고서 사람을 놓아 보자고 하였는데, 그런지 얼마 뒤 공의 후손 모(某)가 같은 일가 최방언(崔邦彦)씨를 인연해서 그 편차(編次)를 정리하고 그 끝의 발(跋)을 청하였다. 더구나 지금 병화(兵火)를 겪은 뒤라 점필재ㆍ한훤당 사제(師弟) 사이의 일이 거의 모두 없어져 공의 한 글자, 한 마디 말이 더욱 귀중하다. 이에 감히 사양치 않고 위와 같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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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본글 출처

      최득수의 묘지명(墓誌銘)

    • 저자

      조익(趙翼)

    • 이명

      : 덕수(德叟)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41 사자(士子)

    우리 옛날 집이 어의동(於義洞)에 있었는데, 바로 성안 동쪽이었다. 같은 동에 최씨(崔氏)가 살고 있었는데, 두 집의 대문이 서로 연달아 있었다. 두 가문의 자손이 그 동에서 가장 많고 한 곳에 모여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문의 어른이나 어린이들이 나이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항상 서로 오가며 살았으므로 그 친밀함이 골육지친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고 난 뒤로 두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집이 모두 폐허가 되어버렸으므로 비록 뒤에 서울로 올라와 벼슬을 한 사람이 있어도 모두 다른 동에 붙여 살았다. 그러나 서로 만날 경우에는 대뜸 반가워하여 마치 먼 곳에 사는 친척을 만난 것처럼 하였다.

    최 처사(崔處士)는 나의 할아버지뻘이었고 그의 아들 3명 중에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나의 숙부뻘이었으며 막내아들 최응형(崔應亨)은 나보다 세 살 적었으므로 나의 어렸을 때 벗이었다.

    최 처사가 임진왜란 때 80여 세가 된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을 가다가 삭령(朔寧)에 이르러 병이 나 죽었다. 그러자 임시로 산중에다 초빈(草殯)을 해놓고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울부짖으며 곡하다가 왜적이 이르자 혼백(魂帛)을 상자에 넣어 등에 지고 숲 속에 숨어 있었다. 왜적이 수색하다가 그 상자를 보고 기이한 보배가 있는 줄로 알고 최 처사를 해치려고 하다가 그 상자를 열어보니, 혼백이 들어 있었다. 왜적도 감동하여 살길을 일러주면서 가도록 하였다. 그 이듬해 가을에 이르러 금천(衿川)의 선영에다 반장(返葬)한 다음 묘소 곁에다 상막(喪幕)을 지어놓고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하루도 떠나지 않았다.

    그때 전란을 겪고 난 뒤였으므로 백성들이 굶주리다 못해 도적이 되어 살인과 약탈이 계속되었고 심지어는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였는데, 경기도가 더욱더 심하였다. 그런데 처사는 두려워하지 않고 혼자 상막을 지키며 산중에서 떠나지 않았다. 처사가 곡읍하며 슬퍼함과 야윈 형상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의 둘째 아들 최응선(崔應善)이 날마다 땔나무를 성안으로 지고 가 팔아 쌀을 사서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에 죽거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아! 사람의 자식으로 그 누가 부모가 없겠는가마는 효도를 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이때 처사도 아우와 조카들이 있었는데, 모두 선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유독 처사만 그렇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행실이 천성으로 타고났지 애써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뒤숭숭한 난리를 당하여 사생을 기약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독실히 하였으니, 평소에 효도하고 우애한 것은 모두 말할 것조차도 없다.

    그 뒤에 처사가 영암(靈巖)에서 살았는데, 호남(湖南) 사람들이 그 사실을 써서 감사에게 고하고 감사가 이를 조정에 아뢰니, 포상으로 관직을 주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처사가 양주(楊州)에서 살 때 양주 사람들이 또 감사에게 말하여 조정에 아뢰자 복호(復戶)해 줄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용산(龍山)에서 살 때 용산 사람들이 또 예조(禮曹)에 글을 올렸다가 이상의 포상이 모두 예조에 의해 폐기되었다.

    처사의 이름은 득수(得壽)이고 자는 덕수(德叟)이다. 병진년(丙辰年, 1616년 광해군 8년) 아무 월일에 아무 곳에서 세상을 떠나 아무 연월일에 양주(楊州) 금정리(金正里) 유좌 묘향(酉坐卯向)의 묏자리에 묻히었는데, 향년 72세였다. 아버지 최언청(崔彥淸)은 봉사(奉事)이고, 할아버지 최호문(崔浩文)은 아무 벼슬이고, 증조 최지성(崔智成)은 현감(縣監)이고, 그의 선조는 전주(全州) 사람이다. 5세조 최덕지(崔德之)는 세조조(世祖朝) 때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영암으로 돌아가 여생을 끝마쳤다. 할머니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문묘(文廟)에 배향된 증 우의정(贈右議政)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의 딸이었으니, 처사의 선행이 실로 그 근본이 있는 것이다. 처사가 청송 심씨(靑松沈氏)에게 장가들었다. 큰아들은 최응성(崔應聖)이고, 둘째 아들 최응선(崔應善)은 웅천 현감(熊川縣監)이고, 셋째 아들 최응형(崔應亨)은 지금 소촌 찰방(召村察訪)으로 있다.

    나의 기억에 임진년(壬辰年)에 최씨와 우리집 양가(兩家)가 같이 도성을 나와 우리집 동문(東門)의 외택(外宅)에서 자고 그 이튿날 통곡을 하며 이별하였다. 내가 그때 동자의 나이로 집 주변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자 처사가 나를 붙잡고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다행히 각자 죽음을 면하여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에 용산에서 처사를 뵈었는데, 그때 최응형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처사는 평생 동안 성실하여 거짓이 없었는데, 그의 모습을 보면 순수하게 선하여 털끝만큼도 사특한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사가 세상을 떠난 지 지금 20여 년이 되었다. 최응성 어른이 나에게 처사의 행적을 써달라고 부탁하기에 정중히 승낙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예로부터 지극한 행실은 세상에 필적할 사람이 없었도다. 정말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지 어찌 무엇을 구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그렇게 한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저절로 존경하며 사모한 것이었도다. 그 또한 어찌 외모로 꾸민 것이겠는가? 그러한 성품을 똑같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도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사람들은 이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단 말인가? 임금님이 정문을 세워주라고 명한 것은 그때 잠시에 지나지 않았도다. 이에 선한 사람으로 하여금 결국 초야에서 늙게 하였으니, 공에게 있어 무엇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세상을 한탄할 뿐이도다. 오직 하늘은 그렇지 않아 그 보답이 헛되지 않을 것이도다. 그것을 기대할 바는 후손에게 있지 않은가 싶도다.

    참고
    출처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최탁 [ 崔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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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본글 출처

      최탁의 묘갈명(墓碣銘)

    • 저자

      송시열(宋時烈)

    • 이명

      : 사정(士精)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31 문관(文官)

    나의 종형 야은공(野隱公) 송시영(宋時榮)은 꼿꼿함을 지키며, 오직 최탁(崔琢)공 자(字) 사정(士精)과 사귀었다. 매양 관무(官務)의 여가에는 단정히 앉아 상대하며 종일 차마 떠나지 못했다. 야은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정은 그 재능과 품격ㆍ문벌(門閥)로 보아 명예 있는 지위를 넘보았다면 무슨 벼슬인들 해내지 못할까만 스스로 믿고 의심치 않으며 그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사람이 알아주는 바가 되지 않았음은 이러해서였으나 또한 이러함으로 해서 알아주는 이가 있었다. 그 후 공의 행적은 더욱 기구하여 퇴고(推敲)와 첨삭(添削)에 고심하며 어정거리다가 세상을 마쳤으며 야은공은 순절(殉節)하여 사망하였다. 아, 세상 사람은 끝내 공을 모르고 있으나 공을 아는 자는 오직 군자인(君子人)일 뿐이다. 어(語)에 이르기를,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다만 그 벗을 보라.” 하였으니, 이는 실제의 말이다.

    공은 전주(全州) 사람이다. 상조(上祖)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가 고려(高麗)에 벼슬하여 관작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본조(本朝)의 최덕지(崔德之)는 맑은 명성과 곧은 도로써 권람(權擥)ㆍ한명회(韓明澮) 때를 맞이하여 낌새를 보고 늙음을 들어 물러났고, 증조 최언청(崔彦淸)은 벼슬이 봉사(奉事)요 어진 행실이 있었으며 여러 대가 한 집에 살았다. 조부 최희수(崔希壽)는 내리 일곱 고을을 맡았고 안동 판관(安東判官)이 되어 관장(官長)이 나이 적음을 보고 허리를 굽힐 수 없다 하여 돌아갔는데 세상에서 고고(孤高)하다 하였다. 아버지 최응화(崔應和)는 현감(縣監)을 지냈는데, 장자(長者)의 기풍이 있다고 사계(沙溪) 노선생(老先生)이 칭찬하였다. 어머니 윤씨(尹氏)는 사직(司直) 윤경우(尹慶祐)의 딸이다.

    공은 젊어서부터 농을 좋아하지 않았고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나이 20세에 생원(生員)에 입격하였는데, 광해군(光海君) 때 혼란하자 과장(科場)을 사절하여 나아가려 아니하였고 동료들과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의 간사함을 논하였다. 이어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은 지 10여 년이었는데, 인묘(仁廟)가 즉위하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동방(同榜)에 꺼리는 자가 있어 그 연유로 승문원(承文院)의 선발을 저지하였고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ㆍ박사(博士)를 지내면서 봉상시 봉사(奉常寺奉事)를 겸하였다. 혹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가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승진하였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했다가 외직에 나가 황간 현감(黃澗縣監)이 되자, 조정의 관원들이 떠남을 애석히 여겼는데, 공이 말하기를, “평탄하고 험한 일을 가리지 않음은 신하의 직분이다.” 하였다.

    공의 나이 40세 때에 현감공(縣監公)이 몰하였다. 공은 모부인(母夫人)을 받들고 고을로 나아가 한 마음으로 봉공(奉公)하였으나, 상관에 아첨하지 않다가 마침내 파직되어 돌아왔다. 그 뒤 형조 정랑을 거쳐 인제 현감(麟蹄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어버이 병환으로 나아가지 못해 체직되었고 마침내 상(喪)을 당하였는데, 공은 이때 늙기 시작하였으나 복제(服制)의 수행에 게으름이 없었다. 복을 마치자 전적(典籍)ㆍ호조 좌랑을 거쳐 또 나가 보령 현감(保寧縣監)이 되었는데, 백성을 해하는 토호(土豪)를 형벌로 매를 쳐 죽였다가 이로 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당로자(當路者)가 그 굳세고 과감함에 감복하여 곧바로 병조 정랑에 직배(直拜)하니, 대체로 청선(淸選)에 두려는 것이었으나 또 시기하는 자가 저지하였다. 영광(靈光)은 사람이 많고 업무가 많았으나 본래 암읍(巖邑, 산으로 둘러 싸인 고을)이라 일컬었는데, 공은 또 이에 차출되어 보내졌으나 얼마 아니되어 병으로 사양하고 돌아왔으며, 지난 일의 죄가 논해져 춘천(春川)에 유배되었다가 두어 달만에 풀리어 돌아왔다.

    임진년(壬辰年, 1652년 효종 3년) 정월 2일 졸하니 나이는 66세였다. 공은 어버이 섬김에 효성스러웠고 모부인을 모시게 한 종에게는 더 두터이 대우하였으며, 제사는 정결을 주로 하였다. 검소한 몸가짐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가족들은 크고 작은 일에 늘 부지런하고 힘을 다하여 자급자족하였다. 그러므로 남에게 구차스러운 일이 없었고 세상의 영리에 내닫는 자를 보면 자신이 더럽혀 질 것처럼 하였다.

    영인(令人) 채씨(蔡氏)는 선교랑(宣敎郞) 채충익(蔡忠益)의 딸이요, 고옥(古玉) 정작(鄭碏)공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도서(圖書) 보기를 좋아하였는데, 고옥이 사랑하여 교육하며 말하기를, “네가 남자가 아닌 것이 한이다.” 하였다. 고옥이 몰(歿)하자 영인은 3년을 소식(蔬食)하며 끝까지 전(奠)을 올렸고 출가하게 되자 극히 부도(婦道)를 행하였으며, 제사에 더욱 삼갔고 시향(時享) 때에 더욱 정결히 하여 제물(祭物)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종일 즐거워하지 않았다. 매양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행장(行狀)을 읽었고, 그 기일(忌日)을 당해서는 반드시 눈물을 흘렸으니 어찌 마음에 감동한 바가 있지 않고서이겠는가? 인조ㆍ효묘(孝廟)가 승하하자 오래도록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자녀들이 연로함을 들어 강권하면 말하기를, “여자는 유독 신자(臣子)가 아니란 말이냐?” 하였다. 만년에 우리말로 번역된 ≪여계(女誡)≫를 손수 써 자손에게 주어 길이 가훈(家訓)으로 삼게 하였다. 나이 78세에 졸(卒)하니 숭정(崇禎) 을사년(乙巳年, 1665년 현종 6년)이었고, 양주(楊州) 양정리(養正里)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들 최세영(崔世榮)은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나아갔고, 다음 생원(生員) 최세장(崔世章)은 재능이 있었으나 나이가 짧았다. 손자에 최방언(崔邦彦)ㆍ최방신(崔邦藎)ㆍ최방현(崔邦顯)과 딸로 송이석(宋彛錫)ㆍ허평(許玶)의 처가 된 이는 맏이가 낳았고, 최방준(崔邦儁)ㆍ최방식(崔邦式)과 딸로 이중욱(李重郁)ㆍ김우화(金遇華)의 처가 된 이는 둘째가 낳았다. 증손은 모두 약간이다.

    내가 야은공(野隱公)을 따랐으므로 공을 안 지 오래이다. 병자년ㆍ정축년의 난 뒤에 나는 황간(黃澗)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밤낮으로 붙쫓으며 세상의 변화를 말하고 의분(義奮)에 북받쳐 탄식하였는데, 하루는 벽에 쓴 글을 가리키며, “이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호) 상국(相國)이 의(義)를 택할 때의 말이다.” 하였다. 그 내용에 ‘날 저문 강 입구에 신의 힘 어쩔 수 없습니다.[日暮江頭 臣力無何]’라고 되어 있었다. 공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인신(人臣)의 의리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 현재 천지는 뒤집혀 윤상(倫常)이 없어졌다. 우리들은 인간 세상에 스스로 설 수 없다.” 하였다. 이어 야은공에게 미쳐 말하기를, “당시에 자신을 지키는 것을 보고 그 수양(修養)이 있음을 알았다.” 하였다. 아, 공과 야은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지기(知己)라 하겠다. 지금 40년이 지나 세상의 도의는 더욱 추락하여 상국의 사당(祠堂)에 오랑캐의 연호로 제를 올리게 되었으나 그 사람은 크게 한 때의 존중하는 바 되었으니, 공이 있었더라면 다시 무어라 하겠는가? 구원(九原)은 일으킬 수 없으니 아, 슬픈 일이다. 최방언은 학문과 덕행이 있는데 어버이 명으로 와서 나에게 명(銘)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저들은 빨리 달리는데 나는 중지하였으니, 그러므로 자신은 뒤에 있고 남은 앞섰네. 행적은 비록 곤궁하였으나 마음은 형통하였으니, 이점이 바로 현명함이라네.

    참고
    출처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신입 [ 申砬 ]

    글자크기
    • 원본글 출처

      신입의 묘갈명(墓碣銘)

    • 저자

      송시열(宋時烈)

    • 이명

      : 입지(立之)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54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도순변사(都巡邊使) 신입(申砬)공이 김여물(金汝岉)공과 함께 왕명(王命)을 받고 왜적(倭賊)을 방어(防禦)하다가 충주(忠州) 달천(達川)에서 전사(戰死)하였다. 이때 (임금이나 백성 할 것 없이) 상하 모두가 공을 간성(干城)처럼 믿고 있었던 터라, 이 소식이 알려지자 임금은 곧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공이 북쪽 오랑캐 니탕개(尼湯介)를 쳐서 그들의 소굴(巢窟)을 쓸어 없앴으므로 그 용명(勇名)이 천하(天下)에 떨쳤더니, 이에 이르러 왜적(倭賊)이 온 나라를 들어 침구(侵寇)해 와서 장차 중국(中國)을 충돌(衝突)하려고 하니 그 병력(兵力)은 대략 60만이나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태평(太平)을 누린 지가 오래 되어 크고 작은 벼슬아치들이 안일(安逸)과 희락(嬉樂)만을 일삼았는데, 오직 문열공(文烈公)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왜적이 반드시 침입할 것을 알고 그들을 방어(防禦)할 계책을 임금에게 올렸지만 모두들 미친 짓이라고 지목할 뿐이었다. 그런데 형세(形勢)가 급박해지자 당시의 정승이 공을 파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난색을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나의 손톱과 어금니 같은 사람인데, 이러한 때에 어찌 보낼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굳이 청하기를 마지않으므로, 공을 불러서 물으니, 공은 (출전(出戰)하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이때 제도(諸道)에서 징발(徵發)한 군사(軍士)가 모두 아직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도하(都下)의 무사(武士)와 일없이 노는 사람들을 모아 군병(軍兵)으로 삼았는데, 삼의사(三醫司)의 관원까지도 여기에 들었고 무고(武庫)에서 병기(兵器)를 내고 또 조신(朝臣)들은 각각 전마(戰馬)를 내도록 명했었다. 김여물(金汝岉)공은 마침 어떠한 일로 옥(獄)에 갇혀 있었는데, 공이 자신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함께 떠나게 할 것을 청하였다. 공이 출발하려고 할 때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친히 상방 보검(尙方寶劍)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 이하 모든 장병(將兵)들을 이 칼로써 지휘(指揮)하여 임무를 다하라.” 하고, 또 중로(中路)에서 병졸(兵卒)을 모으게 했는데, 충주(忠州)에 이르니 군중(群衆)은 수천 인에 불과하고 이일(李鎰)은 상주(尙州)로부터 패주(敗走)해 왔다.

    공이 처음에는 이일(李鎰)을 목베어 조리돌리려 하다가 그를 가석히 여기어 중지하고는 이어 왜적들을 막아낼 계책을 물으니, 이일(李鎰)이 대답하되, “병력(兵力)의 차이가 너무도 크므로 여기서 대적(對敵)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후퇴해서 서울을 지키는 것이 가장 옳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꾸짖으며 말하기를, “그대가 감히 다시 아군(我軍)을 교란시키려고 하는가? 다만 앞으로나마 공(功)을 세워 충성을 맹세하라.” 하고 드디어 그를 선봉(先鋒)으로 삼았다.

    이때 김여물(金汝岉)공이 먼저 조령(鳥嶺)에 의거하기를 청하니, 공은 왜적들이 이미 조령(鳥嶺) 밑에까지 육박해 있을 것으로 추산(推算)하고 이어 말하기를, “지금 떠났다가 조령(鳥嶺)까지 당도하지 못하고 서로 부딪치게 되면 사태(事態)는 위급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군(我軍)은 모두 훈련(訓鍊)되지 못한 병정(兵丁)인데다 또한 평소에 어루만져 친근히 따르던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사지(死地)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그들의 도움을 바랄 수가 없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달천(達川)을 배후(背後)에 두고 진(陣)을 쳤었다. 대개 공은 평지(平地)에서 기병(騎兵)을 급히 몰아 그들을 짓밟음으로써 소수(少數)의 병력(兵力)으로 많은 적군을 쳐부수려고 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왜적들은 벌써 조령(鳥嶺)을 넘어와서 산과 들에 가득 차니, 검광(劍光)은 햇빛을 가리고 포격(砲擊)은 땅을 뒤흔들었다. 공이 제군(諸軍)을 지휘하여 진격(進擊)하면서 두 번이나 친히 적진(敵陣)을 뚫으려고 했으나 견고하여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적들은 먼저 이미 아군(我軍)의 우측을 포위하고 동쪽 서쪽에서 협공(挾攻)하니, 그 형세는 마치 태산이 내리누르는 듯하였다. 이에 공은 다시 탄금대(彈琴臺)로 되돌아와서 김여물(金汝岉)공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남아답게 죽을 뿐이요. 대의(大義)에 있어 구차하게 살 수는 없소.” 하자, 김공(金公)은 말하기를, “내 또한 공을 따르리다.” 하였다. 마침내 김공(金公)에게 장계(狀啓)를 초하여 휘하를 시켜 이를 서둘러 임금에게 올리게 한 다음, 함께 적진(敵陣)에 육박(肉迫)하여 십수인(十數人)을 쳐서 죽이고 끝내 김공(金公)과 더불어 강물에 빠져 죽었다.

    공은 평산(平山) 사람으로 자(字)는 입지(立之)요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장절공이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위한 순의(殉義)는 한 고조(漢高祖) 때의 기신(紀信)과 같았고1) 지금토록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오대조 신개(申槩)는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 때의 정승으로 시호(諡號)를 문희(文僖)라 했으며, 고조(高祖) 신자준(申自準)은 관찰사(觀察使)요, 증조(曾祖) 신말평(申末平)은 전첨(典籤)으로 참찬(參贊)에 추증(追贈)되었고, 조부(祖父) 신상(申鏛)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중종조(中宗朝) 명신(名臣)이었다. 아버지 생원(生員) 신화국(申華國)은 영의정(領議政) 평주 부원군(平洲府院君)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윤씨(尹氏)는 첨정(僉正) 윤회정(尹懷正)의 딸인데 가정(嘉靖)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원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이 22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다음 선전관(宣傳官) 겸 비변랑(備邊郞)을 거쳐서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 경력(經歷)을 역임(歷任)하고 외직(外職)으로 나가 진주 판관(晉州判官)이 되었다. 이때 양응정(梁應鼎)공이 진주 목사(晉州牧使)가 되어 공에게 이르기를, “공은 큰 그릇인데 학문(學問)하지 않으면 아니되리다.” 하였는데, 공이 드디어 책을 들고 나아가 사제(師弟)의 예(禮)를 행하니, 양공(梁公)이 더욱 기이하게 여기었다.

    몇 군데 관직(官職)을 거치는 동안 조정(朝廷)에서는 바야흐로 북쪽 오랑캐들의 침구(侵寇)를 근심했는데, 공이 연이어 경원 부사(慶源府使)와 경흥 부사(慶興府使)를 역임하고 마침내 온성 부사(穩城府使)가 되었을 적에는 본부(本府)에 예속(隸屬)되었던 번호(藩胡)들이 모두 공의 위엄(威嚴)과 신망(信望)에 복종하여 함부로 준동하지 못하였다. 이때 오랑캐 추장(酋長) 니탕개(尼湯介)가 율보리(栗甫里) 등 수만(數萬)의 오랑캐들과 함께 반란(叛亂)을 일으키어 여러 곳 진보(鎭堡)를 소란케 하자 여러 장수들이 차례로 패전(敗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공이 병사(兵士)를 거느리고 달려가 이를 구원하매, 공이 가는 곳마다 오랑캐들이 형세를 바라보고는 도망쳐 버렸다. 또 한번은 두만강(豆滿江)을 건너가 곧장 그들의 소굴을 소탕할 적에 한 노파(老婆)가 있어 그 딸을 데리고 와서 살려 주기를 빌었는데, 그 딸의 용색(容色)이 아주 빼어나게 예뻤다. 공은 이를 베어버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이러한 우물(尤物)을 남겨 두면 반드시 사람에게 해독(害毒)을 끼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이 절도사(節度使)로 있으면서 매양 공의 용략(勇略)을 탄복하더니, 승전(勝戰)의 소식을 조정에 아뢰어 북병사(北兵使)로 승진케 함으로써 그의 공로(功勞)를 포상(褒賞)했는데, 오래지 않아 끝내 니탕개(尼湯介)를 붙잡아 목베었다.

    공이 오랫동안 북쪽에서 지냈으므로 체직(遞職)하고 돌아가 편모(偏母)를 뵙게 해 주기를 상소하였으나, 임금은 현직(現職)을 그대로 띤 채 귀녕(歸寧)하기를 특명(特命)하면서 직위(職位) 바꾸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한편, 임금이 친히 교외(郊外)까지 나가서 공을 맞이하였다. 이때 공의 전포(戰袍)에 핏자국이 있음을 보고는 더욱 극진히 위로하며 즉시 어의(御衣)를 벗어 공에게 입히었으며, 또한 임지(任地)로 돌아갈 적에도 교외에 나가서 전송(餞送)하고 은사(恩賜)를 더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경(卿)의 자녀(子女)가 몇인가?” 묻고 혼인(婚姻)하기를 언약하더니, 뒤에 공의 장녀(長女)로 (왕자인)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의 부인(夫人)을 삼았다.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이배(移拜)되었다가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는데, 조정으로 돌아오는 날 그를 보려고 모여든 도성 사람들이 모두 부복(俯伏)하여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였다. 판한성(判漢城)으로서 여러 부서(部署)의 일을 겸관(兼管)하고 또한 병조 판서(兵曹判書)의 물망(物望)에 오르기도 하더니, 이듬해 만력(萬曆) 20년(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그해 4월 28일에 전몰(戰歿)했다.

    공은 자모(姿貌)가 단정 엄숙하고 희노(喜怒)를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평소에 마음가짐이 차분하고 정돈되어 마치 경서(經書)를 익히는 서생(書生)이나 학문(學問)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진(陣)에 임하여 적(敵)을 대할 적에는 비록 좌우(左右)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라도 또한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었고, 감히 엿볼 수조차 없었다. 부하를 통솔하되 은의(恩義)를 중히 여겨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적은 것이라도 나누어 먹고 병든 사람이 있으면 몸소 친히 위문하니, 이래서 병사(兵士)들이 모두가 기꺼이 복종하매 울연(蔚然)히 옛날 명장(名將)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대개 장절공(壯節公, 신숭겸) 이래로 대대로 명인(名人)들이 있어 오다가 공의 형제(兄弟)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고 하겠는바, 공의 중형(仲兄) 신급(申礏)이 유생(儒生)으로서 일찍이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 이이(李珥))을 위하여 소장(疏章)을 올려서 도리(道理)를 밝히고 이어서 군소배(群小輩)의 헐뜯음을 물리쳤을 적에는 임금이 비답하되, “그대의 말이 곧도다. 그대의 아우 입(砬)이 진충 보국(盡忠報國)하여 힘껏 변성(邊城)을 지켰으므로 오랑캐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었는데, 그대가 또 항소(抗疏)하여 간사한 무리들을 물리치는구나. 어쩌면 이렇게도 한 집안에서 충의지사(忠義之士)가 함께 나올 수 있겠는가?” 하였다. 뒷날 공의 아우 신할(申硈)은 병사(兵使)로서 임진(臨津)에서 왜적들과 싸우다가 또한 순절(殉節)했고, 신급은 이때 음직(蔭職)을 지내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던 중에 급작스레 적을 만나자 어머니가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졌고 신급도 몸을 던져 죽었으니, 이 한 집안의 충효(忠孝)야말로 뛰어난 것이라고 하겠다.

    공은 항상 신의(信義)와 풍절(風節)을 굳게 간직했었는데,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이 북쪽 변방의 일로써 법망(法網)에 걸려서 귀양 가 죽으니 공이 매양 분개하고 그 억울한 정상을 드러내었으므로,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은 그것을 가시(歌詩)로 읊기까지 하였다. 또 공이 일찍이 정승 정언신(鄭彦信)의 관하(管下)가 된 적이 있었더니, 정 정승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연좌(連坐)하여 장류(杖流)되자 남들은 감히 그 집에 찾아가지 못했으되 공은 홀로 자주 드나들면서 그의 부인(夫人)에게 문후(問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장차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와 인빈(仁嬪) 김씨(金氏)) 모자(母子)를 죽이려 한다는 간신들의 헐뜯음을 입었을 적에는 임금이 크게 의혹하고 노여워하여 어느날 이 사실을 공에게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신(臣)은 청컨대 백구(百口)로써 그를 보장하겠습니다. 이것은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참소해서 죽이려고 한 것에 불과합니다. 정철(鄭澈)이 비록 도량은 편협하더라도 신이 가만히 그의 심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탄탕(坦蕩)한 군자(君子)입니다.” 하였다. 그러기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매양 공을 칭찬하되 (보통 사람으로서는) 공을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공의 전 부인(前夫人) 이씨(李氏)는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계배(繼配) 최씨(崔氏)는 무인(武人) 최필신(崔弼臣)의 딸이요 고(故) 만록공(晩麓公) 최덕지(崔德之)의 후손(後孫)인데 마음가짐이 인자(仁慈)했으며, 성남(城南)의 옛집에서 홀로 지내며 여러 자식들을 가르치며 길렀는데 임금은 항상 불쌍히 여긴 나머지 조석(朝夕)의 어선(御膳)을 물린 후에 그것을 내리어 보내 주기까지 하였다.

    공의 아들은 신경진(申景禛)과 신경유(申景)와 신경인(申景禋)이요, 2녀 중 장녀(長女)는 곧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의 부인(夫人)이며 다음은 이대엽(李大燁)의 처(妻)이다. 이경진이 뒤에 김여물(金汝岉)공의 아들 김유(金瑬)와 함께 정사(靖社)를 협모(協謀)하여 인조 대왕(仁祖大王)을 익대(翊戴)함으로써 중흥(中興)의 위적(偉績)을 이룩하고 마침내 영의정(領議政)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이 되었는데 그 위질(位秩)에 따라 공에게 (영의정(領議政) 평양 부원군(平陽府院君)을) 추증했으며, 두 아우들도 함께 훈맹(勳盟)에 참여했는데 둘째 아우 (신경유는) 동평군(東平君)에, 막내아우 (신경인은)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졌다. 신경진의 장남 신준(申埈)도 또한 정사 공신(靖社功臣)으로 평흥군(平興君)에 봉해졌는데 벼슬은 판서(判書)요, 차남 신해(申垓)는 돈녕 도정(敦寧都正)이다. 사위는 별제(別提) 유우엽(柳于燁)과 진사(進士) 박천구(朴天球)이다. 신경유의 아들 신담(申墰)은 판관(判官)이요, 사위는 감사 이석달(李碩達)이다. 신경인의 계자(繼子)는 신해(申垓)요, 사위는 문과(文科) 출신으로 정(正)인 이경과(李慶果)이다.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의) 계자(繼子)는 평운군(平雲君) 이구(李俅)요, 사위는 전적(典籍) 안홍량(安弘量)이다.

    공이 왜적을 방어(防禦)하려고 출병(出兵)할 적에 함께 떠나고자 했던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의 정승이 평소 공을 좋아하지 않았던지라 이를 저지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 어찌 상공(相公)으로서 (출진(出陣)하는 장수와) 서로 틈나게 해야 할 때입니까? 옛날 형가2)(荊軻)가 연(燕)나라 태자(太子) 단(丹)에게 못 견디어 함께 갈 사람을 기다릴 겨를이 없이 앞질러 출발한 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까? 이것을 평론(評論)하는 이들은 형가(荊軻)를 일러 일을 소홀히 하여 그르쳤다고 하나, 한 자 여덟 치밖에 안 되는 비수(匕首) 하나로 어찌 능히 호랑이 같은 진(秦)나라를 당적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당시에 훈련(訓鍊)되지 못한 오합지졸(烏合之卒) 수천(數千)으로써 수십만(數十萬)의 억척스러운 왜적들을 급작스레 만나게 된 것인데, 옛날 맹자(孟子)는 비록 막대기를 가지고도 진(秦)나라나 초(楚)나라의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병기(兵器)를 쳐부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긴 하지만, 또한 적은 수(數)로 많은 수를 대적(對敵)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는 것이다. 장차 장수와 정승이 서로 호응하지 않고서 능히 성공한 사례란 자고(自古)로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설사 공이 (충주) 달천(達川)의 싸움에서 패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끝내는 이순신(李舜臣)과 김덕령(金德齡) 같은 화(禍)를 모면할 수 있었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육도(六韜) 기정(奇正)을 번갈아 쓰는 거야 오랑캐와 왜적이 무엇이 다르랴? 한결같은 굳은 절개 넘어지는 가운데서도 변함 없어 끝내는 그 뜻도 직분도 빼앗기지 않았네. (광주(廣州) 땅) 대떠미(대석(大石)) 무덤이여 공의 옷과 신 간직된 곳이라네. 남한산(南漢山) 뒤에 버티고 강물은 곁을 감도네. 천추 만세(千秋萬世)의 분한(憤恨)이야 길이길이 함께 하련만, 후예(後裔)들 번창하고 훌륭함이여 여경(餘慶)도 그지없으리라.

    각주

    1) 한 고조(漢高祖)가 항우(項羽)에게 형양(滎陽)에서 포위되었을 때 기신(紀信)이 고조로 위장하고 초군(楚軍)에 투항한 틈을 타서 고조가 그 모위망을 탈출할 수 있었던 일. 여기서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공산(公山)에서 견훤(甄萱)과 싸우다가 포위당해 형세가 위급하게 되자 신숭겸(申崇謙)이 김낙(金樂) 등과 역전(力戰)하여 전사함으로써 왕건을 위기에서 모면하게 한 일을 비유한 것임.
    2) 형가(荊軻) :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제(齊)나라 사람. 연(燕)나라 태자(太子) 단(丹)의 심부름으로 비수(匕首)를 끼고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죽이러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게 죽음을 당하였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