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 양정제공 휘 방언/휘 방언 미백 묘표

한수재선생문집 연보에 기록된 양정제공 관련기사

아베베1 2013. 11. 25. 19:43

 

 

 

 
한수재선생문집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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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보(年譜)]
기사년(1689) 선생의 나이 49세

1월 20일(무자) 흥농(興農)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차의(箚疑)를 품정(稟定)하였다.
이때 효묘(孝廟)의 어찰을 봉진(封進)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우암 선생이 마침 병이 심하여 선생으로 하여금 대신 어찰을 봉진하면서 함께 올리는 상소문을 기초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원자(元子)의 위호(位號)에 대한 일로 입시했던 여러 신하가 다 죄를 입자 우암 선생이 상소하여 여러 신하들이 다른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논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잇따라 삭출(削黜) 원찬(遠竄)의 명이 내렸다. 그러므로 소를 끝내 올리지 못하였다.


2월 9일(정미) 우암 선생을 제주(濟州)에 천극하라는 명이 내리니 선생이 모시고 흥농을 출발하였다.
11일(기유) 여산(礪山)에서 유숙하였다.
우암 선생이 차의의 서문(序文)을 엮어 선생에게 주며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차의를 그대와 중화(仲和 김창협(金昌協))가 헤아려 수정하여 고쳐라.”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의심나는 곳은 마땅히 문목(問目)을 올려 여쭙겠습니다.” 하자,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그럴 필요 없다. 나의 노쇠함이 심하여 비록 스스로 처리한 것도 매양 잘못 교감되었음을 걱정하였다. 그대 두 사람이 직접 상의하여 소세(梳洗)하면 무슨 의난처(疑難處)가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작은 곳은 삼가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마는 관계가 중대하여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곳에 이르러서는 감히 갖추어 여쭙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우암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중화와 편안히 지내며 강론(講論)하는 것을 기필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동보(同甫 이희조(李喜朝))가 꽤나 자상하고 세밀하니 함께 상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13일(신해) 금구(金溝)에서 유숙하였다.
우암 선생이 묻기를 “윤휴의 죄 중에 어떤 것이 가장 큰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주자를 깔보고 업신여긴 것이 가장 크다고 할까요?” 하자, 우암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그렇다. 사람이 진실로 성현을 업신여긴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하고서, 또 선생에게 이르기를 “여러 벗들은 흩어져 돌아가더라도 그대는 나와 함께 며칠 더 가야 하겠다. 내가 그대에게 조용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였다.
14일(임자) 태인(泰仁)에서 유숙하였다.
하루를 머물렀다. 닭이 울자 일어났는데,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율곡 선생의 수적(手蹟)이 매우 많고 석담일기(石潭日記) 같은 유 또 사계 선생(沙溪先生 김장생(金長生))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이공(李公)과 율곡의 비문을 산정할 때 왕복한 글 및 행장의 초본을 신재(愼齋 김집(金集))가 모아서 깊이 간직하였다가 말년에 나에게 전수한 것도 있는데, 이것을 모두 치도(致道 권상하(權尙夏))에게 부탁하고자 한다. 나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실로 미안한 점이 있다. 그러나 치도는 이것을 힘써 지켜, 설혹 율곡 자손이 가져가겠다고 해도 이것은 여느 물건과는 다르니 주어서는 안 된다. 내가 당초에는 박화숙(朴和叔)과 함께 이것을 지키려고 했었지만 지금 화숙이 저 모양이니 어쩌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오늘날 소생(小生)인들 어찌 무사히 집에 있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럴 경우 장차 이 물건을 어느 곳에 맡겨 두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 그대의 윤자(胤子) 상사(上舍 진사(進士))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고, 또 그대의 집이 궁벽한 곳에 있으니 보존하는 데 별 걱정이 없을 것이다. 후일에 주손(疇孫 우암의 손자 주석(疇錫))이 살아서 돌아오거든 그와 더불어 함께 지키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정전서(二程全書)》의 분류에 대해 그대와 범례를 의정하려고 정본(淨本)을 화양(華陽)에 가져다 두었으니 돌아갈 때에 가지고 가서 수정하라. 그리고 《근사록(近思錄)》 및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실려 있는 것은 주자설(朱子說)과 섭씨주(葉氏註)를 아울러 채집(採集)하여 본조(本條) 밑에 재록(載錄)하는 것도 좋을 듯하니 잘 헤아려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주자어류》를 소절(小節)로 분류한 것이 흥계(興溪)의 서가(書架) 위에 있으니 역시 가지고 가서 검교(檢校)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퇴계서(退溪書)》의 차의(箚疑)를 시작하여 겨우 1권을 끝냈으니 치도가 그 일을 마쳐 나의 뜻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선생이 사양하니,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가 이 일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니 부디 힘써 하라.”
하였다.
16일(갑인) 우암 선생과 작별하였다.
우암 선생은 정읍(井邑)으로 떠나고, 선생은 회정(回程)하여 전주(全州)에서 유숙하였다.
17일(을묘) 여산(礪山)에서 유숙하였다.
문곡(文谷) 김 상공 수항(金相公壽恒)의 적행(謫行 귀양 가는 행차)이 장차 이른다는 말을 듣고 머물러 기다렸다. 18일(정사)에 김공을 만나 담화를 나누고 작별하였다.
28일(병인) 집으로 돌아왔다.

4월 25일(신묘) 우암 선생을 나국(拿鞠)하라는 명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비를 무릅쓰고 해상(海上)을 향해 출발하였다.
아들 욱(煜)이 수행하였다.

5월 7일(임인) 여산 문수사(文殊寺)에 머물렀다.
서울 소식을 탐지하기 위하여 머물렀다.
18일(계축) 이사안(李師顔)이 와서 우암 선생이 도중(島中)에서 보내신 고결서(告訣書)를 전하였다.
고결서는 다음과 같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것이 성인의 밝은 교훈인데, 나는 80여 세가 되도록 끝내 듣지 못하고 죽어 하늘이 부여한 막중한 임무를 저버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이네. 또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 있네. 나는 한평생 《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를 읽었네. 그런데 그 가운데 의심스러운 것이 없지 않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 곳도 있으므로 초록해서 대략의 해설을 붙여 동지들과 상의하여 역시 후인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였는데 애석하게도 성취하지 못하였네. 돌아보건대 이 세상에 이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으로는 오직 그대와 중화(仲和)뿐이니, 모름지기 동보(同甫)ㆍ여구(汝九 이기홍(李箕洪))ㆍ미백(美伯 최방언(崔邦彦)) 및 기타 함께 일할 만한 사람들과 협동해서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주 선생(朱先生)께서 일찍이 절실하고 긴요한 한 말씀으로 문인들을 가르쳐 말하기를 ‘다만 《맹자》의 도성선(道性善)ㆍ구방심(求放心) 두 장만을 취하여 힘쓰는 곳으로 삼으라.’고 하였고, 또 임종할 때 문인들에게 ‘직(直)’ 한 자를 전수하며 말하기를 ‘천지가 만물을 내는 소이(所以)와 성인이 만사를 응대하는 소이가 직(直)일 뿐이다.’ 하였네. 이는 대개 공자께서 ‘사람이 생존하는 것은 직인데 직하지 못하면서도 생존하는 것은 요행으로 면하는 것뿐이다.[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 하셨고, 맹자가 전성(前聖)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호연장(浩然章)에도 역시 ‘직’ 한 자로 양기(養氣)의 요체(要體)를 삼았기 때문일 것이네. 주자가 또 큰 영웅도 반드시 전긍 이림(戰兢履臨)으로부터 만들어진다고 하였으니 성인이 전수한 심법(心法)을 결단코 알 수 있네. 전일에도 깊이 강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힘써 행하지 못하여 상인(常人)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참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족히 경계가 될 만하기에 감히 고하는 바이네. 이 밖의 일들도 천만번 노력하기 바라네. 서로 만나 결별하지 못하는 한이 그대나 내가 어찌 다르겠는가. 피곤함이 심하여 스스로 글을 쓸 수가 없어 대략 이와 같이 입으로 불렀네.”
또 다음과 같은 별지(別紙)가 있었다.
“현묘조 때 호서의 한 선비가 상소하여 만력황제(萬曆皇帝 명 나라 신종(神宗))의 사당 세우기를 청하였는데, 그때 이론하는 자들이 ‘존귀하신 천자를 편방(偏邦)에서 제사 지낼 수 없고, 또 그 제사 의식도 정하기가 어렵다.’는 말로 핑계하였네. 나 역시 그때 그 건의가 끝내 행해질 수 없음을 알고서 다만 ‘이때에 이런 말이 나오니 그 사람의 뜻이 가상하다. 가상히 여기는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만 말하였으나, 또 따르지 않았으므로 마음속으로 항상 개연히 여겨 왔네. 그 뒤 화양동의 석탑(石塔)에 숭정황제(崇禎皇帝 명 나라 의종(毅宗))의 어필을 새기고 나서 또 조각돌에 새겨 환장암(煥章菴)에 간직해 두었는데, 또 문곡(文谷)의 애사(哀詞)가 있었으므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항상 환장암 뒤편 왼쪽에 한 채의 사우(祠宇)를 세우고 위패에 ‘만력신종황제(萬曆神宗皇帝)’, ‘숭정의종황제(崇禎毅宗皇帝)’라고 써서 봄가을로 무이신례(武夷神禮)에 따라 건어(乾魚)로써 제사를 올리는 동시에 술은 서실(書室) 텃밭에서 나는 곡식으로 정결하게 빚고 오직 축사만은 성대하게 칭송하고자 하였네. 이 일을 마음속으로 경영한 지 오래였는데 이루지도 못하고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보다 큰 한이 어디 있겠는가.
존귀한 천자를 편방에서 제사 지낼 수 없다는 것은 실로 무식한 말이네. 당 나라 때 초소왕(楚昭王)의 사당에 유민(遺民)들이 사사로이 제사를 올렸기 때문에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그래도 국민들 옛 덕을 사모해서 한 칸 띳집에서 소왕을 제사하네.[猶有國人戀舊德 一間茅屋祭昭王]’ 하였고, 남헌(南軒 장식(張栻))이 일찍이 태수로 있는 주에 우제(虞帝)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낸 것을 주자가 글에 드러내 밝혔으니, 이것이 의거할 만한 전거가 아니겠는가. 문곡(文谷)의 시 역시 화운(和韻)할 사람이 화운해 짓게 하여 종이를 잇대어 붙여 큰 두루마리로 만들어서 환장암 안에 간직해 두는 것도 한 가지 일일 것이네. ‘비례부동(非禮不動)’ 네 글자는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가지고 온 것이고 돌조각에 새긴 것은 이택지(李擇之)가 모각(摹刻)한 것이네. 이 일을 김(金)ㆍ민(閔)ㆍ이(李) 등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성사했으면 좋겠네. 이 일은 공력이 크게 드는 것이 아니어서 성사하기가 어렵지 않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 해도 이미 주자와 남헌(南軒)의 고사(故事)가 있으니 저상(沮喪)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처음에는 효묘(孝廟)를 배향(配享)하려고 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것은 사체에 미안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반드시 대죄(大罪)로 여길 것이므로 감히 마음도 먹지 못하였네. 해마다 제관(祭官)은 충현 송공(忠顯宋公)의 자손이 본주(本州)에 살고 있으니 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지만, 그 밖에 홍(洪)ㆍ변(卞) 제군도 좋네. 일찍이 《이정전서(二程全書)》를 베끼는 일을 계획할 적에 그대가 아무 안사(按使)를 단치(斷置)했던 것은 의리가 매우 정밀하였는데, 이 일을 더욱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네. 신종황제를 기리는 데는 위덕(威德)을 주로 삼되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사람이 은덕을 입은 것을 보태고, 의종황제는 나라가 망하면 임금이 죽는 정도(正道)를 주로 삼아야 하네.”

6월 2일(정묘) 우암 선생이 돌아오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남쪽을 향해 출발하였다.
삼례(參禮)에서 유숙하였다.
6일(신미) 장성(長城) 읍내에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압송해 온 금부랑(禁府郞)의 방금(防禁)이 매우 엄하였으므로 어두워진 뒤에 비로소 들어가서 배알하고 닭이 울자 나왔다.
7일(임신) 우암 선생을 모시고 출발하여 천원역(川原驛)에 도착해서 후명(後命 유배 죄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것)이 내린 것을 들었다.
서쪽에서 오는 금부랑의 노문(路文 지방 출장 관원의 공문서)을 접하고 후명이 내렸다는 것을 알고는 밤에 비를 무릅쓰고 정읍(井邑)에 도착하였다.
8일(계유) 우암 선생이 정읍에서 명을 받았다. 선생이 유명에 따라 치상(治喪)하였다.
이날은 방금(防禁)이 조금 풀렸으므로 선생과 김만준(金萬埈)이 함께 들어가서 배알하였는데, 우암 선생은 숨이 거의 끊어지려 하여 경각을 지탱하지 못할 것 같았다. 눈을 떠 선생을 보고서는 손을 잡고 분부하기를,
“내가 일찍이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기를 바랐는데, 지금 나이 80이 넘도록 끝내 듣지 못하고 죽는 것이 바로 나의 한이네. 이 시대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니, 나는 웃으며 땅속으로 들어갈 것이네. 이후로는 오직 치도(致道)만 믿겠네.”
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후사(後事)에는 무슨 예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따르게나. 그러나 대체는 《가례(家禮)》를 주로 삼고 《가례》에 미비된 곳은 《상례비요》를 참작해 쓰게나.”
하였다. 또 묻기를,
“선생님의 지금 처지가 평소와 다른데 공복(公服)을 사용해야 합니까?”
하니, 우암 선생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간혹 조정에 나아가기는 하였으나 그때마다 다른 사람의 공복을 빌려 입었고 일찍이 스스로 공복을 만든 일이 없었네.”
하고, 또 말하기를,
“심의(深衣)를 쓰는 것이 마땅하네.”
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그 다음에는 어떤 옷을 사용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주자께서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로이 계실 때 상의하상(上衣下裳)의 옷을 입으셨네. 그러므로 나도 이 제도를 모방하여 옷을 만들어 두었으니 집안사람에게 물어 찾아 쓰게나.”
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그 다음은 어떤 옷을 사용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난삼(幱衫)이네. 이것은 황명(皇明) 태조(太祖) 때에 숭상하던 옷이니 이것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네.”
하고, 또 말하기를,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의 학을 주로 삼고, 사업은 효묘(孝廟)께서 하고자 하신 뜻을 주로 삼아야 하네.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여 비록 큰일을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항상 ‘인통함원 박부득이(忍痛含寃迫不得已)’라는 여덟 자를 가슴속에 간직하여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전수(傳守)하여 잃지 말아야 할 것이네.”
하고, 또 말하기를,
“주자의 학문은 치지(致知)ㆍ존양(存養 존심(存心) 양성(養性))ㆍ실천(實踐)ㆍ확충(擴充)인데, 그 시종을 관통하는 것은 경(敬)이네. 면재(勉齋 황간(黃榦))가 지은 주자 행장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네.”
하고, 또 말하기를,
“천지가 만물을 내는 소이(所以)와 성인이 만사를 응대하는 소이가 직(直)일 뿐이므로 공자 맹자 이후로 서로 전하신 것은 오직 이 하나의 직자뿐이었네.”
하고, 또 말하기를,
“옛사람이 소릉(昭陵)을 복위(復位)하기에 앞서 어째서 정릉(貞陵)의 복위를 청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네. 내가 조정에 들어가서 한 일이 오직 정릉을 복위시킨 한 가지 일뿐이었네만, 이로 인해 거의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네.”
하였다. 이어 권이진(權以鎭)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말을 들으니 몽조(夢兆)가 참으로 이상하네.”
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그 꿈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대개 정릉 추복(追復)의 의논이 일어났을 때 정릉 곁에 사는 늙은이의 꿈에 한 부인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한 대인(大人)의 신구(伸救)에 힘입어 장차 태묘(太廟)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나는 그 사람의 화를 구제해 줄 수 없으니 통한스럽다.” 했다 한다. 우암 선생이 또 말하기를,
“만약 정상적인 때라면 내가 어찌 태조의 추시(追諡)를 우선으로 삼았겠는가. 다만 오늘날 존주(尊周)의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혀서 거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가 이에 대해 마음을 다했던 것이네. 박화숙(朴和叔)의 생각이 나와 다르기는 하였지만 이는 참으로 얻기 쉬운 벗이 아니네. 우연히 이 일에 있어서만 이러했을 뿐이네.”
하였다.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금부의 관리들이 들어왔으므로 선생이 물러 나왔다. 이날 우암 선생께서 명을 받으니, 선생이 한결같이 유명(遺命)에 따라 상을 치루었다.
11일(병자) 성복(成服)하고 가마기제(加麻期制)를 행하였다.
김공 만준(金公萬埈)이 입을 복(服)에 대해 의심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전에 사계 선생(沙溪先生)의 상에 동춘 선생이 우암 선생에게 입을 복에 대해 의논하자,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사계 선생께서 평소 우리들을 보신 것이 어찌 중문(仲文)보다 지나쳤겠습니까. 중문이 이미 기복(期服)을 입었으니 우리의 복도 마땅히 중문과 같아야 합니다.’고 하였으니, 오늘 우리의 복제(服制)도 이 예(例)를 준용(準用)하여 서구(叙九)와 같이 입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중문은 바로 사계 선생의 손자 창주공(滄洲公) 익희(益煕)의 자(字)이고, 서구는 바로 우암 선생의 손자 교리공(校理公) 주석(疇錫)의 자이다.
12일(정축) 상례 행차를 따라 정읍을 출발하였다.
15일(경진) 흥농(興農) 옛집에 도착하였다. 성빈(成殯)하는 것을 살폈다.
28일(계사) 집으로 돌아왔다.

7월 7일(신축) 회덕(懷德)을 향해 출발하였다.
역로(歷路)에 글을 지어 가지고 동춘 선생 묘소(墓所)에 고하였다.
10일(갑진) 흥농에 도착하여 우암 선생 영연(靈筵)에 곡하였다.
14일(무신) 수원(水原) 만의(萬義)로 가서 임시로 장사 지낼 곳을 살펴보았다.
17일(신해) 제문(祭文)을 지어 곡하며 전(奠)을 올렸다.
18일(임자) 회장(會葬)하였다.
계공(季公) 및 욱(煜)도 모두 따라갔다.
19일(계축) 흥농으로 반우(返虞)하였다. 영연에 하직하고 돌아왔다.
역로에 갈천(葛川)에 들러 누이 박씨 부(朴氏婦)의 무덤에 성묘하였다.
20일(갑인) 궁촌(宮村)에 도착하였다.
선생의 손아래 처남 이 상국 유(李相國濡)가 이때 궁촌에 있었다.
21일(을묘) 평구(平丘)로 가서 귀양 가는 노봉(老峯) 민 상공 정중(閔相公鼎重)과 작별하였다. 곡운(谷雲) 김공 수증(金公壽增)을 방문하고, 청음(淸陰) 김 선생(金先生)의 묘소에 참배하고 또 문곡(文谷) 김 상공(金相公)의 영연에 곡하였다.
이공 희조(李公喜朝)가 와서 만났다. 하룻밤을 묵고 돌아왔다.
22일(병진) 해천(蠏川) 외가(外家)의 선산(先山)에 참배하였다.
25일(기미) 집으로 돌아왔다.

11월 연풍(延豐) 온천(溫泉)에 가서 목욕하였다.

[주D-001]남헌(南軒)이 …… 밝혔으니 : 장식(張栻)이 계림군(桂林郡)의 태수(太守)가 되어 우제묘(虞帝廟)를 세우자, 주자가 정강부우제묘비(靜江府虞帝廟碑)를 쓰고, 또 영신(迎神)ㆍ송신(送神)의 악사(樂詞)를 지어 주었다. 《朱子大全 卷1 詞, 卷88 碑》
[주D-002]충현 송공(忠顯宋公) :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를 모시고 강화(江華)로 갔다가 이듬해 성이 포위되자 벗 이시직(李時稷) 등과 함께 자결한 송시영(宋時榮)이다. 충현은 그의 시호이며 송시열의 종형임.
[주D-003]가마기제(加麻期制) : 문인이 스승의 상에 심상을 입는 표시로 삼베 헝겊을 겉에 붙이고 기년 동안 심상을 입는 제도.
[주D-004]반우(返虞) : 장사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뽕나무로 신주를 만들어 놓고서 안신제(安神祭)를 지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