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 양정제공 휘 방언/휘 방언 미백 묘표

11대 조고 휘방언 외증조 관련자료

아베베1 2014. 12. 18. 05:45

 

 

 

 

 

 

南溪先生朴文純公文續集卷第二十二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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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表
內資主簿鄭公墓表 十月四日 a_142_502b
 


 

142_502c古玉先生鄭公遺墓在楊州治東六十里許。余嘗過其下拜焉。感歎高風不能去。久之公外曾孫崔邦彥,成至善二君謂余粗知慕公。屬以石表。辭謝不敢當。顧惟今去公世漸遠。前輩無在者。余亦衰甚。遂不敢辭。公諱碏字君敬。其先溫陽人。高麗尙書普天之後。曾大父忠基校理。大父鐸獻納。父順朋嘗任右議政。母李氏鳳陽守終南之女。以嘉靖二十二年六月二十一日生公。天姿恬澹寡欲。常有超然出塵之趣。然其平生倫彝言行。自不違於道理。人皆敬之。少從伯氏北窓先生磏及朴守菴枝華入楓岳洞天。讀道家142_502d書。試金丹修鍊之法。中歲喪耦不再娶。斷欲四十年。人益高之。然公素善聲詩工草隷。間中進士試。旁通醫方風鑑諸術。往往多奇驗。朝廷聞之。選督童蒙敎兼惠民署敎授。陞主內資寺簿。壬丁亂後。監海州牧場。人又謂有不卑小官之風焉。公交游頗廣。未嘗論人過失。最與牛溪成先生,李峒隱義健慕好特篤。晩而喜飮酒。專事麴糱。醉後或放歌。音調淸越。終不爲酒困。蓋有託而逃之者云。萬曆三十一年癸卯七月二十日。在海寓無疾而逝。壽七十有一。人又異之。嗚呼賢哉。有詩稿一冊行于世。配李氏龍川君壽閑之142_503a女。亦國姓也。無子。生一女。適宣敎郞蔡忠益。生四男三女。男則亨後郡守,榮後縣監,鄭後進士,弘後。其曰鄭後者。蓋公所名。仍托以蒸嘗焉。繇此公葬在金門里蔡氏族山傍。李氏墓在掛蘿里先壟爲別葬。公之外裔總若干人。崔,成二君旣與通力。圖所以樹石。又將買田爲歲祭之資。俱可尙也已。是爲古玉先生鄭公墓記

 

 

(序)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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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23수
북창ㆍ고옥 두 선생의 시집 서문[北窓古玉兩先生詩集序]

 


중니(仲尼 공자)께서 일민(逸民)을 논하신 것을 보건대 위아래로 수백년에서 천 년에 걸치는 기간 동안에 거론한 인물이 단지 일곱 사람밖에 되지 않았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드물기만 하였던가. 대저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맑은 풍도야말로 거의 성인의 영역에 들어간다 할 것이고 그 아래에 거론된 자들 역시 언행이 깨끗하고 권도(權道)에 맞는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니, 이런 선발 기준에 합당한 자를 고르기가 그토록 어려웠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로부터 시대를 내려와서는 한(漢) 나라에 엄준(嚴遵)이 있었고 위(魏) 나라에 손등(孫登)이 있었으며 당(唐) 나라에 손사막(孫思邈)장지화(張志和)가 있었는데 이 사람들로 말하면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외물(外物)에 초연했던 만큼 성인의 척도를 가지고 논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홍진(紅塵)을 멀리 벗어나 숨어 살면서 세속의 오염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미묘하고 현통(玄通)한 식견을 소유하였으니, 하나만 아는 유자(儒者)나 향곡(鄕曲)의 선비가 엿볼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라 할 것이다. 따라서 일민(逸民)과 비교해 본다면 아마도 그 다음가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겠다.
내가 나름대로 근대(近代)의 인물들을 살펴보건대 가령 북창 정 선생(北窓鄭先生)이나 그의 아우 고옥(古玉)이야말로 그들의 행적으로 볼 때 옛사람들에 비해서 무슨 손색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북창은 태어날 때부터 영이(靈異)했던 인물로서 삼교(三敎)에 두루 통달했었다. 그가 섭생(攝生)한 것은 도가(道家)와 비슷했고 해오(解悟)한 것은 선가(禪家)와 유사했는데 윤상(倫常)과 행의(行宜)로 말하면 한결같이 우리 유가(儒家)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 방기(方技 의약(醫藥))와 각종 기예에 대해서도 두루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모두가 배워서 터득한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 어버이를 따라 중국에 갈 때 압록강을 건너 중국 사람을 보고는 곧바로 중국말을 하였고, 연경(燕京)에 들어가 외국 사신을 만나서는 곧장 외국말을 하였으며, 일찍이 산에 들어가 마음을 조섭(調攝)할 때는 며칠 사이에 1백 리나 되는 산 아래 동네의 일을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모조리 알아 버렸으니, 아 또한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불행히도 집안의 변고를 만나는 바람에 세상 일에 뜻이 없어져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어두운 방 안에 말 없이 앉아 있다가 40여 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는데, 식자들은 이를 두고 그가 해화(解化)하였다고 하였다. 아, 만약에 선생 같은 분이 세상에 나와서 성인의 문하에 들어가 성명(誠明)의 학문에 그 재질을 다 쏟았더라면 가령 공씨(孔氏 공자)가 칭찬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보다 더 나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고옥은 북창보다 나이가 27세 아래였다. 그의 재질이나 식견은 백씨(伯氏)에 비해 훨씬 못하다 하겠지만 청이(淸夷)하고 충담(冲澹)한 면에서는 도를 터득한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는 시를 읊기를 좋아하였고 초서(草書)와 예서(隷書)에도 능했으며 방약(方藥)과 풍감(風鑑 관상법(觀相法)) 등의 술법에도 두루 통하여 이따금씩 기막힌 징험을 보여 주곤 하였다.
그러다가 집안의 불미스러웠던 죄과(罪過)에 연루된 나머지 세상과의 관계가 서로들 끊어지게 되자 마침내는 술[酒]의 힘을 빌려 도피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공은 어려서부터 백씨와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를 따라 배우면서 금단(金丹 선인(仙人)이 복용하는 불로불사약)의 비밀스러운 요결(要訣)을 통달하였으며 또 중년에 상처(喪妻)한 뒤로는 다시 장가들지 않고 30여 년 동안 금욕생활을 하면서 장수를 누리다가 생을 마쳤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주선(酒仙)이라고 일컬었다.
북창의 유고(遺稿)는 이른바 《삼현주옥(三賢珠玉)》이라는 책 속에 이미 편입(編入)되어 있는데, 고옥의 시는 난리통에 분실된 채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해야 겨우 수백 편에 지나지 않는 실정이다. 그런데 군위(軍威) 고을을 다스리고 있는 채형후(蔡亨後)가 고옥의 외손자인 인연으로 장차 두 선생의 원고를 합쳐 판각(板刻)하려 하면서 나에게 서문을 부탁해 왔다.
내가 생각건대, 옛날의 기인(畸人)이나 일사(逸士)들로 말하면 자기의 휘광(輝光)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은 채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명성이 후세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은 언어로 표현되어 전해오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군평(君平 엄준(嚴遵)의 자(字)임)은 《노자(老子)》를 주해(註解)하였고 사막(思邈)은 방약(方藥)에 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손등(孫登)은 소문산(蘇門山)에서의 몇 마디 말이 전하고 장지화(張志和)는 서새(西塞)의 노래를 한 가락 읊었는데, 이 몇 명의 군자들 입장에서야 물론 이런 것들이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만 이런 자료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후세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면모를 상상이라도 할 수가 있었겠는가.
북창은 시를 다듬는 일 없이 대부분 붓 가는 대로 곧장 써 내려 가면서 자기의 뜻이 표현되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였다. 이에 반해 고옥은 꽤나 시를 손질하였는데 성조(聲調)가 청원(淸遠)하여 당시에 당(唐) 나라 시인의 풍치(風致)를 자아내었다. 그러나 요컨대는 두 선생 모두 시를 통해 후세에 전해질 성격의 인물들은 아니라고 할 것인데, 일단 시가 두 선생에게서 나온 이상 이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북창의 휘(諱)는 염(磏)이요 자(字)는 사결(士潔)이며, 고옥의 휘는 작(碏)이요 자는 군경(君敬)인데, 선조는 온양(溫陽) 사람이라고 한다.


 

[주D-001]중니께서 …… 것 :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백이(伯夷)ㆍ숙제(叔齊)ㆍ우중(虞仲)ㆍ이일(夷逸)ㆍ주장(朱張)ㆍ유하혜(柳下惠)ㆍ소련(少連) 등 7인이 일민으로 거론되어 있다.
[주D-002]언행이 …… 인물 :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공자가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을 평하기를 ‘숨어 살면서 내키는 대로 말을 하였으나 행실은 깨끗함의 기준에 맞았고 그만둔 것은 권도에 맞았다.’ 하였다.” 하였다.
[주D-003]엄준(嚴遵) : 자(字)인 군평(君平)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성도(成都)에서 복서(卜筮)를 일삼았으며 양웅(揚雄)이 그에게 배웠다. 저서에 《노자지휘(老子指揮)》가 있다. 《漢書 卷72》
[주D-004]손등(孫登) : 위(魏)는 진(晉)으로 바로잡아야 할 듯하다. 소문산(蘇門山)에 은거하여 《주역(周易)》에 탐닉하면서 일현금(一絃琴)을 좋아하였으며 완적(阮籍)ㆍ혜강(嵇康)과 왕래하였다. 《晉書 卷94》 《神仙傳 卷6》
[주D-005]손사막(孫思邈) : 백가(百家)의 설에 정통하였으며 태백산(太白山)에 은거하였는데 수 문제(隋文帝)와 당 태종(唐太宗)이 높은 벼슬로 불러도 응하지 않다가 1백여 세의 나이로 죽었다. 저술에 《천금요방(千金要方)》 등이 있다. 《新唐書 卷196》 《舊唐書 卷191》
[주D-006]장지화(張志和) : 16세에 명경과(明經科)에 발탁되어 좌금오위 녹사참군(左金吾衛錄事參軍)으로 있다가 물러나와 연파조도(煙波釣徒)로 자처하였으며 《현진자(玄眞子)》라는 저술을 남겼다. 《新唐書 卷195》
[주D-007]집안의 변고 : 그의 아비 정순붕(鄭順朋)이 임백령(林百齡)ㆍ정언각(鄭彦愨)과 함께 소위 을사 삼간(乙巳三奸)으로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것을 말한다.
[주D-008]군평(君平)은 …… 남겼으며 : 군평은 엄준의 자(字)이다. 성도(成都)에서 복서(卜筮)를 일삼았으며 양웅(揚雄)이 그에게 배웠다. 저서에 《노자지휘(老子指揮)》가 있다. 《漢書 卷72》 사막은 손사막(孫思邈)이다. 백가(百家)의 설에 정통하였으며 태백산(太白山)에 은거하였는데 수 문제(隋文帝)와 당 태종(唐太宗)이 높은 벼슬로 불러도 응하지 않다가 1백여 세의 나이로 죽었다. 저술에 《천금요방(千金要方)》 등이 있다. 《新唐書 卷196》 《舊唐書 卷191》
[주D-009]손등(孫登)은 …… 전하고 : 완적(阮籍)이 일찍이 소문산에서 손등을 만나 종고(終古)에 대해서 함께 상략(商略)하다가 서신(栖神) 도기(道氣)의 술법에 이야기가 미치자 손등이 일체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晉書 阮籍傳》
[주D-010]장지화(張志和)는 …… 읊었는데 : 장지화가 읊은 ‘어부가(漁夫歌)’, 즉 “서새산 앞으로 백로가 날고 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쏘가리가 살졌도다.[西塞山前白鷺飛 桃花流水鱖魚肥]”라는 시구를 말한다

 

 

 

 

기언 제11권 중편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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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사적〔虛庵事〕 세변(世變)에 나온다.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스스로 은둔하여 무명으로 살면서 구차스레 목숨을 보존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니, 어찌 행실을 닦아 이름을 이루려는 선비와 견줄 수 있겠는가. 북창선생열전(北窓先生列傳)을 쓴다.

북창 선생은 성은 정(鄭)이고, 이름은 렴()이며 자는 사결(士潔)이고 북창은 별호이다. 선생의 선조는 백제 탕정현(湯井縣) 사람으로 전대에 현달한 사람이 많았다. 우리 조선조의 예종과 성종 연간에 교리(校理)였던 충기(忠基)와 헌납(獻納)이었던 탁(鐸)이 2대에 걸쳐 현직(顯職)에 있었고, 탁의 아들 순붕(順朋)은 중종, 인종, 명종을 섬겼는데 가장 크게 등용되었으며 선생을 낳았다. 선생의 어머니는 태종의 장왕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의 증손녀이다. 중종 원년 3월 갑신일에 선생이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마음을 가다듬어 신과 통하여 가까이는 한마을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멀리는 사방 오랑캐의 풍속이 전혀 달라 개 짖는 소리나 새 우는 소리처럼 들리는 이방의 말까지 귀신처럼 알았고, 여러 방술(方術)과 백가의 술법 또한 모두 배우지 않고도 깨달았다.
14세에 중국을 유람하였는데, 기이한 기운을 보고서 이곳에 온 유구(琉球) 사람이 선생을 뵙고는 재배하며 “제가 운명을 점쳐 보니, 점괘에 ‘모년 모월 모일에 중국에 가면 진인(眞人)을 만날 것이다.’라고 나왔었습니다. 당신이 참으로 그분이십니다.”라고 말한 다음 배우기를 청하였다. 이에 중국에 온 여러 오랑캐들이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앞 다퉈 달려와 선생을 뵈었는데, 선생이 사방 오랑캐의 여러 언어로 능숙하게 응답하자, 모두들 크게 놀라고 경이로워하며 ‘천인(天人)’이라고 칭송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물었는데, 객사에서 땔감을 베어 오는 품팔이꾼이 앞으로 나와 자세히 보면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이 하였다. 선생이 “너는 무슨 할 말이 있느냐?”라고 묻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선생이 그와 함께 이야기해 보니 그는 음양의 운행과 조화, 기괴한 술법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선생이 “그대는 무슨 연유로 품팔이를 하게 되었는가?”라고 묻자,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저는 틀림없이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자신은 서촉(西蜀) 사람으로 모년에는 모처로 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온갖 일에 이미 신통하여 무궁한 경지에 들어갔으니, 《도덕경(道德經)》의 “방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의 일을 안다.”라는 것이 선생을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선생은 술을 좋아하여 몇 말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성인은 인륜을 중하게 여겼는데 석가와 노자는 마음을 닦아 성불(成佛)하라는 말만 하고 인사에 관한 배움은 없으니 석가와 노자는 대동소이하다고 말하곤 하였다. 선생은 항상 “말은 믿음을 받지 못하고 행동은 인정을 받지 못한다.”라고 탄식하면서 큰 소리로 노래하며 스스로를 희롱하고 세속을 떠나 즐겁게 노닐었지만 자신을 대중과 다르게 생각한 적이 없었고 사람들과 거처할 적에 공자의 학술에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선생의 깨달음은 선가(禪家)와 유사하고 행적은 노자와 유사하였지만 가르칠 때에는 한결같이 성인을 근본으로 삼았다.
내가 그의 자취를 상고해 보니, 19세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선발되었는데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고 양주의 괘라리(掛蘿里)에 거주하였다. 중종 때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 관상감(觀象監)과 혜민서(惠民署)의 교수가 되고 뒤에 포천 현감(抱川縣監)이 되었는데 홀연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서 자취를 감추고 깊이 은둔하여 살다가 10년 뒤에 별세하였으니, 때는 명종 4년으로 향년이 43세였다. 선생은 스승도 없었고 또한 제자도 없었다. 양주 사정산(砂井山)에 북창 선생의 묘가 있다.

북창 선생의 동생 작(碏)은 자가 군경(君敬)이고 별호가 고옥(古玉)이며, 북창 선생보다 27세 아래이다. 청정함을 좋아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련법을 터득하였고, 중년에 아내가 죽자 다시 장가들지 않고 금욕하면서 36년간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관상학에 능통하였는데 신기하게 맞는 경우가 많았다.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쓰고 시 읊는 것을 좋아하여 세상에 이름이 났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선생은 낮에도 그림자가 없다고 전한다. 나는 병길(丙吉)이 “지인(至人)은 그림자가 없다.”라고 말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선생이 바로 지인인가보다. 혹자는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잘하였다고 하니, 상고 시대에 태어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워 스스로 자기 이름을 말한 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어쩌면 그리도 기이한가. 고옥과 같은 분은 세속을 초월한 부류라고 이를 만하다.

동산옹(東山翁)은 태학(太學) 상사생(上舍生)인 정두(鄭斗)로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진주의 동산에 살았기 때문에 후인들이 동산옹이라고 불렀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우며 은둔하여 세상에 자신을 알리려 하지 않았다. 평소 잘못을 숨기고 명예를 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며 사람들과 교유하고 세속을 잘 따랐으므로 기이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토정공(土亭公 이지함(李之菡))이 남쪽 지방을 유람하다가 은사(隱士) 남명(南冥)을 만나 보고 또다시 동산옹을 만나 보았는데, “고매한 선비로구나. 강우(江右)에는 이 사람 하나뿐이다.”라고 하였다. 진주의 부로들이 전하는 말에, 동산옹은 새와 짐승의 소리를 알아들었는데 산속으로 들어가 피리를 불면 새와 짐승들이 와서 따랐다고 하니, 이는 무슨 연유인가.
동산옹이 죽음을 앞두고 “오래지 않아 우리나라에 큰 난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유언하고는 동산의 길섶을 가리키며 “내가 죽거든 여기에 묻어 달라.” 하였다. 이어서 아들에게 말하기를 “모년에 너는 여기에서 죽을 것이니, 네가 죽었을 때는 너를 묻어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묻히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여기에 유해가 남겨지는 게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였다. 임진년에 과연 왜구가 침입하였고, 그의 아들은 여기에서 왜적을 만나 죽었는데 끝내 장례 치러 줄 사람이 없었다. 이에 “기이하구나. 어떻게 미래의 일을 이렇게 귀신처럼 미리 알 수 있었단 말인가.”라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향리의 부로들은 지금까지도 감탄하며 이 이야기를 한다. 내가 진양(晉陽 진주)에 유람 가서 지방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 물어보니, “동산옹은 건장하고 특이하였으며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외물에 가탁하여 스스로 즐겼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문을 읽어 보면, 그의 행적이 공자의 학술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또한 훌륭한 사람이다.


 

[주C-001]세변(世變)에 나온다 : 《기언》 권26 하편 〈세변〉에 내용이 나와 있다.

 

 

 

기옹만필(畸翁漫筆)

 


정홍명(鄭弘溟) 저

율곡 선생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에 대해 말할 때에는,
“기(氣)를 이(理)로 아는 병폐가 좀 있다.”
하고, 《대학》소주(小註) 중 진북계(陳北溪)의 설명에 대해 반박하여 말하기를,
“이(理)와 기(氣)는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은 것이나, 합함이 있지는 않다.”
하였다. 또 들으니, 항상 의논하기를,
“〈태극도설(太極圖說)〉의 ‘묘하게 합하여 엉긴다.’는 것은 주자의 ‘한 덩어리가 되어 간격이 없다.’는 설명만 못하다.”
라고 하였는데, 훗날에 반드시 그 뜻을 알 자가 있을 것이다.
율곡의 사서(四書)의 토와 주석 및 소주(小註)의 평정(評訂)이 극히 정밀하고 자세하여, 후학들을 감발하게 할 만하다. 그런데 애석한 것은 그 일을 경전에까지 미치지 못하였으며, 또 당세에 널리 전포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 자가 보면 버리고 거두지 않는 일이 없다고 기필하지 못하겠다.
○ ‘이(理)와 기(氣)는 선후(先後)가 없다.’는 설은 선유(先儒)들이 이미 다 말하였다. 그런데 전에 보니, 여장(汝章) 권필(權鞸)이 우연히 여기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여장(汝章)은,
“정일두(鄭一蠹 여창(汝昌))가 《중용》첫 장 주의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 또한 부여[賦]한다.’고 한두 글귀를 가지고서, 주자가 선후의 분변을 말하였다 하였으니, 그것은 본뜻을 잘못 안 것이다.”
하였다.
○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심경(心經)》중의, ‘마음이란 붙잡으면 있고 버리면 없으며, 출입함에 일정한 시간이 없고 그 방향을 모른다.’는 구절을 강의하고, 또 다시 범순부(范淳夫 범조우(范祖禹))의 딸이 말한 ‘맹자는 마음이라는 것을 모른다. 마음이 어찌 나고 드는 것이 있겠느냐?’ 한 데 대하여 정자(程子)가 ‘이 여인이 맹자를 알지는 못하지만, 마음은 알았다.’고 칭찬한 것을 들어 말하면서, 맹자와 범녀(范女)의 말이 다른 것은 무엇이냐고 자주 여러 생도들에게 물었었다. 그런데 내가 작은 설명문을 지어서 선생에게 여쭈어 의논하기를,
“대저 사람의 마음이란 방 안의 불빛과 같아서 비록 바깥의 바람에 끌려 움직이게 되어 이리저리 흔들려 안정하기 어렵게 되기는 하지만, 원래 일찍이 다른 물건을 따라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끌려 움직일 때에도 그 자리에 있고 안정될 때에도 역시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서, 사람이 말을 타고 문 밖으로 나가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 존망과 출입이라고 한 것은 다만 감응하여 통하는 묘리를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장자(莊子)가 ‘하루 동안에 두 번씩 사해(四海) 밖을 돌아다닌다.’고 말한 것도, 안에서 밖으로 나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어떠합니까?”
하였었다. 그런데 선생께서 나중에 과연 그것을 옳다고 하였는지 아니라고 하였는지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
○ 사계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성인의 마음은 맑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과 같아서 학자들이 엿보아 측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 나머지 중인(衆人)들은 마음이 달리고 뛰어 오르는 병통이 많으니 반드시 먼저 본체(本體)를 세운 뒤에 발동하는 곳에 따라서 성찰하며, 더 공부하여야만 찾아 잡음이 있을 것이다.”
하고, 언제나 경서(經書)와 강해(講解)에 있어서도 반드시 동(動)과 정(靜)을 겸하여 보는 것을 위주하였다. 거기에서 노선생께서 실지 공부에 힘을 쓴 것이 허술하지 않음을 알겠다.
○ 여윤(汝允) 최명룡(崔命龍)이 말하기를,
“지(志)란 견주어 생각하고 헤아림이 정한 방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발동하게 되면 선도 있고 악도 있다. 때문에 도학에 뜻을 두는 자도 있고, 공명과 부귀에 뜻을 두는 자도 있어서, 사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고 하였다. 여운은 총명이 뛰어나고 경세와 역사를 다 통달하였고, 성품이 온순하고 규모가 문란하지 않았다. 다만 지체가 한미하고 보잘것없기 때문에 지방에 있으면서 나쁜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위욕(危辱)의 지경에 빠져 있다가 나이 겨우 50에 세상을 떠났다.
○ 젊었을 때 해서(海西) 지방을 왕래하면서 석담(石潭)의 사당을 찾아뵈었다. 사당에서 나와 몇몇 선비들과 못가를 거닐었는데, 시내와 산이 아주 아름답고 솟은 돌이 병풍처럼 둘려 있었다.
그 중 율곡 선생 문하에서 배운 선비들이 모두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곳 산수 구곡(九曲)이 완연히 중국 무이(武夷)의 경치와 같다고 여겨 드디어 몇 동지들과 힘을 합하여 주자의 사당을 세웠는데, 산수도 그러하지만 또 평생을 두고 항상 주자를 숭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선생은 풍채가 간결하고 언어가 평탄하여 지방 사람들과 상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젊은이나 어른, 어리석은 이나 지혜로운 이 할 것 없이 모두 환심을 가지게 하였다. 때로는 혹 사색하는 것이 있으면, 잠자코 한참 동안을 있다가도 다시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한다.
○ 일학(一學) 노숙(老宿)은 불문(佛門)의 종사(宗師)이다. 오대산(五臺山)에서 입정(入定)한 지 근 50년이나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말하기를,
“젊어서 율곡을 따라 산놀이를 하였는데, 어떤 곳을 지나다가 돌구멍에서 나오는 작은 샘물이 있어 여러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물을 마셨다. 율곡도 물을 길어오라고 하여 한 모금 마시고는 ‘이 물은 둘도 없는 맛이다.’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은 조금도 특이한 것을 몰랐다. 율곡이 말하기를 ‘대저 물은 맑은 것이 좋은데, 맑으면 무게가 무겁다. 흐린 물은 비록 모래와 진흙이 섞였더라도 무게는 맑은 물을 따르지 못한다.’ 하니, 같이 가던 사람들이 다투어 시험해 보니, 과연 무게가 다른 물의 두 배나 되었다. 마침내 철인(哲人)은 만물의 이치에 모르는 것이 없음이 다 이런 줄을 알았다.”
하였다.
○ 오래 전에 우연히 늙은 중을 만났는데, 그의 말이 용문산(龍門山)에 있을 때에 우계(牛溪 성혼(成渾))선생과 여러 날을 함께 거처하여 그 분의 일상생활을 잘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이 조석으로 무엇을 하던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한 다음 단정히 팔짱을 끼고 바로 앉는다. 오정 때쯤 되면 또 세수를 하고는 머리를 빗고 앉으며 때로는 책을 펴 본다. 생각할 것이 있으면 곧 책을 덮고 엄숙히 말하지 않고 있는데, 바라보면 엄숙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된다.”
하였다.
○ 우계는 집에 거처할 때에도 일처리가 세밀하였다. 이른 아침에 그날 일을 시키는데, 비록 농사짓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하인들에게 반드시 시간과 노력을 계산하여 분부하는데 조금도 차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에 거처할 때에도 집안이 가난하고 궁핍한 적이 없었다.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선생은 평생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 드리고 손님 대접하는 준비는 모두 우계가 마련하였다. 혹 서울 객중에 있을 적에도 매양 친구들이 찾아가면 반드시 술과 고기가 있었는데, 청송은 이것을 원래부터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하였다.
○ 율곡ㆍ우계 및 우리 선인이 함께 진사 이희삼(李希參)의 집에 모였을 적에, 주인 집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석개(石介)가 당시의 이름난 기생으로 자리에 참석하였다. 술을 돌리고 노래를 부르려 하자 우계가 갑자기 일어섰으나 좌중에서 감히 만류하는 이가 없었다. 이는 평생에 음탕한 소리를 듣지 않는 것으로 법을 삼았기 때문이라 한다.
○ 퇴계(退溪)는 남명(南溟 조식(曺植))과 시대가 같고 동갑이며 같은 도에 함께 있었지만 끝내 만나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의 의논이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옛날에 ‘천고의 옛 사람을 벗 삼는다.’ 하였으며 ‘천리 길을 가서 만나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무엇 때문이었던가?
○ 성대곡(成大谷)이 지은 남명의 〈행록(行錄)〉에,
“공이 두류산에 놀 때 한 소년을 만나보고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착한 사람을 원수처럼 보니, 훗날에 만일 뜻을 얻게 된다면 착한 사람들이 화를 입을 것이다.’고 했다 한다.”
하였다. 후인이 그것은 기고봉(奇高峰)을 지목한 것으로 의심하나,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괴이한 일이다.
○ 김하서(金河西 인후(麟厚))는 풍채가 맑고 빼어나며 골격이 기이하여 세속 사람들보다 특출하였다. 젊을 때에 인종(仁宗)에게 인정을 받아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을사년 이후로는 인간사의 생각을 끊어 그 모습이 마른 나무나 식은 재와 같았다.
매년 7월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기일에 앞서 술을 가지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한없이 통곡하였다. 선인(先人)이 평소 깊이 사모하여 시를 지었는데,
해마다 7월이 되면 / 年年七月日
일만 산중에서 통곡하네 / 痛哭萬山中
이라 하였으니, 그 사실을 읊은 것이다.
○ 토정(土亭)의 소설(小說)에,
“악한 범은 사람의 작은 몸을 엿보고 사특한 생각은 사람의 큰 몸을 먹어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악한 범은 무서워하고 사특한 생각은 무서워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였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포천 군수로 있을 때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는데, 그 중 ‘사람을 쓰는 데에는 반드시 그 재주대로 하여야 한다.’는 조목에서는,
“해동청(海東靑)은 천하의 좋은 매이지만 새벽을 알리는 일을 맡게 한다면 늙은 닭만 못하고, 한혈구(汗血駒)는 천하의 좋은 말이지만 쥐를 잡게 한다면 늙은 고양이만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닭으로 사냥을 할 수 있겠으며, 고양이로 수레를 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토정은 행적이 탁월하고 기이하며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천성은 순수하고 어질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선산(先山)이 바다 가까이 있어 백 년 뒤에는 큰 변란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몸소 밭 갈고 소금을 팔면서 노고를 싫어하지 않고 산을 옮겨다 바다를 메울 계획을 하였다.
형이 죽으니 마음으로 3년상을 치르고, 성현의 글을 읽되, 길을 가나 자리에 앉으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외웠다. 학도들과 함께 다닐 때마다 이따금 갑자기 경서와 역사에 대해 물어 혹 잘 대답하지 못하면, 반드시 탄식하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길 다니는 것이 괴롭다고 여겨 글을 외고 읽기를 중지할 것이냐.”
하였다. 다만 토정이 강해(江海)에 떠돌아다니며 방랑 행각을 한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만이 아니라, 구속받는 것을 피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의 아들 산휘(山輝)는 음악을 잘 알기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보고 아는 이들이 신명하다고 말하였다. 상중에 모진 범의 해침을 받아 일찍 죽었다.
○ 조중봉(趙重峰 조헌)은 토정에게 배웠는데, 경서와 역사에 깊이 잠심하여 노력을 남보다 더하였다. 그의 저술한 글을 보면, 앞일을 아는 슬기가 자연히 부합되니, 이것이 이른바 ‘지성(至誠)은 미리 안다.’는 것인가.
중봉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여관에 들었는데, 밤이 깊고 인정(人定)이 된 뒤에도 관솔을 태워 단정히 앉아 책을 읽었다. 옆집에 마침 어떤 선비가 엿보았는데, 손에 들고 보는 책은 《송조명신언행록(宋朝名臣言行錄)》으로 거의 닭이 울게 되어서야 글 읽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중봉은 천문학에 밝았는데, 신묘년(1591, 선조 24) 세모에는 매양 왜구를 근심하여 전후 상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임진년 초봄에 아내가 죽어 장사지내는데, 미처 구덩이를 덮기 전에 문득 매우 놀라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천고(天鼓)가 동하였으니, 반드시 평수길(平秀吉)이 군사를 일으켰다.”
하였다. 그리고 집안 사람과 장례에 참석한 친척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각기 돌아가서 빨리 피난할 준비를 하라. 나는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이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 믿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서 적의 경보가 이르렀다.
중봉은 젊었을 때부터 이씨 집 형제와 친근하게 교제하여 정분이 형제와 같았는데, 만년에 와서 이씨 집 형제가 정적(鄭賊 정여립(鄭汝立)을 말함)과 서로 친근하니, 중봉이 간절히 절교하라고 주의시켰지만, 이씨는 친구 간에 까닭없이 절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중봉은 그들이 끝내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옥천(沃川)에서 도보로 남평(南平) 이씨의 집으로 가서 수일 동안 유숙하면서 여러 가지로 비유하며 타일렀지만, 이씨가 끝내 듣지 않았다. 중봉은 떠나가면서 칼을 뽑아 앉은 자리를 베어 칠언시(七言詩) 한 절구를 써 주며 작별하였는데, 끝 구에,
나는 가고 그대는 머물러 각자 닦을지어다 / 我去君留各自修
하였는데, 그 후로 그만 절교되었다.
○ 사계가 매양 말 위에서 글을 보며 혹 《중용》과 《대학》 등의 글을 항상 외웠다. 내가 젊을 때부터 그분의 집안에 드나들어 모시고 잘 때도 많았는데, 새벽이나 밤에는 반드시 옛글을 마음속으로 반복하여 외우기를 마지않았다. 늘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중용》과 《대학》은 외워 읽기를 수천 번이나 하였지만 역시 더하는 것이 있는 줄은 모르겠다.”
하였다.
○ 《중용》 첫 장의,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에 대한 훈고에서,
“교(敎)는 예악 형정 교화(禮樂刑政敎化) 같은 등속을 말한 것이다.”
하였는데, 계곡(谿谷 장유(張維))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의견을 저술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릇 성현이 남긴 말이나 문장은 마땅히 먼저 받들고 믿어 바탕을 삼아야 할 것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잘 연구하여 그 뜻을 깨달은 뒤에 평해야 할 것인데, 어찌 간단히 자기 생각으로 단정할 수 있으랴. 하물며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는 극히 정밀하여 후학들이 가벼이 의논할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계곡은 끝내 수긍하지 않았다.
사계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유(先儒)들이 학문을 논한 것은 비록 정자와 주자의 말일지라도 이내 그 가부를 알 수 있는데, 문장의 잘못은 시골 학자에게서 나온 것이라도 잘 알 수 없다.”
하였다. 아마도 공부하는 것이 한 곳에만 치우쳐서 다른 데 미칠 겨를이 없기 때문인가?
율곡이 고봉(高峯)과 같은 때에 벼슬하였고, 비록 나이의 차이는 있지만 원래 도학으로도 서로 통할 만하였는데, 끝내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대학》에 대한 논쟁에서 서로 양보하지 않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하는데, 어찌 그래서 그렇겠는가?
퇴계는 고봉을 극히 존중하였는데, 이는 왕복한 서신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선인은 고봉보다 아홉 살 아래요, 소시부터 글을 배우며 선생으로 불렀다. 평상시에 고봉ㆍ윤월정(尹月汀 윤근수)과 함께 호당(湖堂)에 숙직할 때에 고봉이 기세를 올려 율곡에 대해 흠을 잡자, 선인이 조용히 말하기를,
“선생은 이미 이모(李某)와 도의(道義)의 교제를 허락하였으니, 매양 헐뜯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였으나, 고봉은 더욱 분이 풀리지 않았다. 월정의 말임.
월정이 매양 말하기를,
“평상시 고봉 및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ㆍ이산해(李山海)와 같은 당번이 되어 호당에 숙직하였는데, 예전부터 〈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가 벽 위에 걸려 있었다. 고봉과 황강이 우연히 서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산천의 형세와 거리의 원근, 인물의 출처, 주군(州郡)의 연혁을 담론하는데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두어 밤이 새도록 쉬지 않았다. 아성(鵝城 이산해)이 나와서 나에게 ‘우리들이 저 사람과 함께 벼슬하는 것이 어찌 크게 부끄럽지 않은가.’ 하였다.”
하였다.
○ 월정은 박식하고 옛일을 좋아하였다. 늘 나에게 말하기를,
“송 태조(宋太祖)가 끝내는 시역을 당하였다.”
하였는데, 어릴 적에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역사책에 범질(范質)의 충후(忠厚)함을 말하는 대목에 ‘범질이 본조를 위하여 시종 한결같았기 때문에 범질의 생전에는 태후나 어린 임금에게 탈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범질이 죽은 뒤에는 마침내 반드시 해를 당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뒤에 〈언행록(言行錄)〉을 상고하여 보니 정말 그러하였다.
○ 월정이 말하기를,
“전에 고봉이 말한 것을 보니, 어릴 적에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책이 없어 고통이었으며, 역사에 대한 것은 다만 《강목(綱目)》을 본 것으로 만족하게 여기다가, 서울에 와서 남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빌려 보니 생각하는 것이 자연 달라졌다.”
하였다.
○ 《소미통감(少微通鑑)》은 우리 나라에서 숭상하는 책이지만, 자세히 보면 《자치통감》 을 잘라놓았을 뿐만 아니라, 구절의 취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며, 간혹 문리가 접속되지 않는 것도 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들어 본다면, 항우(項羽)의 오강(吳江) 일에 대하여는, 여마동(呂馬童)과 이야기한 근본은 빠뜨렸다가 후에야 잘라 맞추어서 ‘약덕(若德)’이라는 한 구절을 만들었으며, 전천추(田千秋)의 일에 있어서는, 백두옹(白頭翁)의 근본은 전혀 빠뜨리고 다만 ‘고묘(高廟)의 신령이 내게 고하여 주었다.’고만 하였으니, 이는 매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기타 소소한 하자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내용이 정밀하고 자세한 점은 《사략(史略)》만도 훨씬 못하다.
○ 옛날 사람들은 자(字)로 통행하는 이가 많은데, 두 가지 자(字)로 통하는 이는 적었다. 《강목(綱目)》에는 두 가지 자가 번갈아 나오는데, 조적(祖逖)같은 이의 자는 사아(士雅)와 사치(士稚)이니, 어느 것을 따라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세설(世說)》을 찾아보니 사아(士雅)로 와 있었다.
○ 어떤 이가 말하기를,
“소로 밭을 가는 것은 후세에 와서 한 일이다.”
하였는데, 김황강(金黃岡 김계휘)이 말하기를,
“염경(冉耕)의 자가 백우(伯牛)인 것으로 보면 상고 시대에도 역시 소로 밭을 갈았다.”
하니, 세상에서들 모두 명언(名言)이라고 하였다.
○ 역사로 상고해 보면,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그의 아버지인 문왕(文王)보다 14세가 아래인데 그에게 형 백읍고(伯邑考)가 있었으니, 문왕이 일찍 자식을 두었음을 알 수 있으며, 무왕이 9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주공(周公)이 무왕의 어린 아들 성왕(成王)을 업고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으며, 또 성왕의 아우 당숙우한후(唐叔虞韓侯)도 있었으니, 무왕이 자식을 늦게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왕의 후비 읍강(邑姜)의 나이가 무왕보다 몇 살 적었는데, 부인이 노쇠한 후에도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옛날 사람들이 사용한 통운(通韻)을 지금 사람들은 흔히 깨닫지 못하고 협음(叶音)은 더욱 어려워 억지로 풀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東) 자와 침(侵) 자의 음운은 원래가 서로 유사하지 않은 것인데, 협음ㆍ통운으로 쓴 곳이 많다. 《주역》의 소상(小象)에 이런 것이 자못 많으며, 《시전(詩傳)》에도
길보가 송을 지으니 / 吉甫作頌
화목하기 청풍 같네 / 穆如淸風
중산보가 길이 생각하여 / 仲山甫永懷
그 마음을 위로하노라 / 以慰其心
하였다. 이런 것은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사부(詞賦)에 더욱 많은데, 〈장문부(長門賦)〉같은 것은 오로지 이런 체를 사용한 것으로서, 초혼(招魂)ㆍ담담(湛湛)ㆍ강수(江水)의 세 구도 역시 통운으로 운자(韻字)를 단 것이지만 읽는 이들이 살피지 못한 것이 많다.
○ 옛날 사람들은 네 살 때에 사성(四聲)을 가릴 줄 알며, 너덧 살이면 글을 지었는데, 이런 것은 그 신이(神異)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그런 것이었던가? 지금은 서너 살에 말을 다 할 수 있는 아이도 매우 적다. 근세의 청한(淸寒)ㆍ하서(河西) 같은 이들은 모두 신동으로 불려졌지만 그들이 지은 시문의 꾸밈새는 한때의 작가(作家)만 못한 점도 있으니, 이것은 노력의 적고 많음에 따라서 그런 것인가?
○ 옛 사람들의 글에 대한 의논을 지금 역시 다 믿지 못하겠다. 한 문공(韓文公)은 자운(子雲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이 《노자(老子)》와 우열을 다툴 것이 못된다고 하고 후파(侯芭)의 이른바 ‘《주역》보다 낫다.’는 것을 지언(知言)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지나친 것 같다. 유자후(柳子厚)의 한퇴지(韓退之)에 대한 말도 역시 그러하다.
소장공(蕭長公 소식)의 〈사마공신도비(司馬公神道碑)〉와 같은 글은 천고의 걸작이라고 할 만한 것인데, 다만 글 중에서 이세적(李世勣)ㆍ모용소종(慕容紹宗)의 일을 들어 비유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 어릴 적에 윤월정(尹月汀 윤근수)의 문하에 나가 뵈었더니, 마침 환갑 날이 되어 술 자리를 베풀었는데, 최동고(崔東皐 최립)가 상좌에 앉았다. 월정이 묻기를,
“들으니, 영공(令公)은 구양수(歐陽修)의 글이 한창려(韓昌黎)보다 낫다고 한다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니, 동고의 말이,
“진실로 그렇습니다. 천변만화하는 한창려의 글이 자연스럽게 한 가지 문체만을 쓰는 구양공의 글을 따를 수 없소.”
하였다. 또 묻기를,
“명(明) 나라의 글은 누구의 것이 제일 우수하오?”
하니, 동고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잘 읽어보지는 못하였지만, 대개가 부화하고 내용이 없소. 그 중에서 황홍헌(黃洪憲)의 글은 과문(科文)에 가까웠소.”
하매, 월정이 아무 말이 없었다.
○ 동고(東皐)가 또 말하기를,
“유문(유종원(柳宗元)의 글)은 평생 펴보지 않았는데, 전일에 어느 재상이 초록하여 달라고 독촉하여 처음으로 뒤져 보았더니, 전혀 의미가 없었고, 소동파의 여러 작품 같은 것은 더욱 보잘것이 없었다.”
하였다. 그의 큰 소리가 대개 이러한 것이다.
○ 동고는 안하무인이었지만 늘 율곡을 칭찬하기를,
“말을 하면 글이 되며,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누구도 따를 수 없다.”
하였다.
○ 주자가 육상산(陸象山)과 더불어 각각 학도들을 데리고 백록 서원(白鹿書院)에 모여 강의하였는데, 그 발문에 극히 존중하였다. 그런데 태극(太極)에 관해 논쟁하면서는 의견이 서로 어긋나서 친교가 드디어 틀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영구가 지날 때에는 큰 소리로 박수치며 아무렇게 지꺼렸다……하니, 만일 육상산이 죽어서 지각이 있다면 어찌 저승에서도 유감을 품지 않겠는가.
주자는 소동파를 여지없이 배척하였다. 그러나 소동파가 그린 석죽(石竹)에 발문 지은 것을 보면,
“이 늙은이의 얽매임 없는 한 자질과 조촐한 지조는 죽군(竹君)ㆍ석우(石友)와 거의 비슷하다.”
하였으니, 주자가 동파를 인정하는 것 역시 보통이 아니었던 것 같다.
○ 왕양명(王陽明)이 처음 선학(禪學)에 물들었고 중간에는 주자의 학문을 배우다가 또 버리고 선학을 좇았다. 그의 문집 중의,
강학엔 매양 중회(仲晦 주자의 자)가 의심스럽고 / 講學每疑朱仲晦
지리한 것은 정강성 되기를 부끄러워했네 / 支離羞作鄭康成
쨍그렁 비파를 던진 봄바람 속에 / 鏗然舍瑟春風裏
광인이나 증점이 마음에 들어 / 點也雖狂我得情
라는 율시 한 수로써 평소 뜻하는 바를 알겠다.
○ 양명(陽明 왕수인)이 산에서 노닐다가 한 승방(僧房)을 보았는데, 앞 문의 빗장이 굳게 잠겼고 먼지가 무릎 위까지 올라왔다. 그 연고를 물으니, 중의 말이,
“선사(先師)가 세상을 떠날 때에 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기를 ‘한 번 창문을 닫은 다음에는 함부로 열어보지 말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양명이 괴이하게 여기고 바로 앞으로 나가 손으로 방문을 열어보니, 한 늙은 중이 앉은 채로 죽었는데, 얼굴빛이 변함없고 자신의 모습과 다름이 없으며 등에,
삼십 년 전 왕수인 / 三十年前王守仁
문 연 사람이 곧 문 닫을 사람이네 / 開門還是閉門人
이라 쓰여 있어 양명이 깜짝 놀랐다.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 성인은 괴이한 것을 말하지 않지만, 괴이한 것 역시 없는 것은 아니다. 불가(佛家)의 요술하는 것을 믿을 수는 없지만, 침갱(針羹)과 세장(洗臟) 같은 일은 만일 혹시라도 그랬다면 어찌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지 않았겠는가.
○ 정해 연간(1587, 선조 20)에 선인께서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를 찾아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때 소재는 수상이었는데 마침 병으로 집에 있다가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술을 가져오게 하여 같이 들면서 진심으로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공사간의 정으로 보아서 물러갈 수 없다고 하면서 한 절구의 시를 부채에 써 주었다.
언덕 위의 풀은 해마다 늙어지고 / 壟草年年老
뜰 앞의 가시나무 날마다 쇠해지네 / 庭荊日日衰
한 평생 충효로 자임하던 그대 / 平生任忠孝
그걸 가지고 어디로 가려 하시나 / 持此欲何之
평소 책 광우리에 간직해 두었기에 나도 보았다.
○ 퇴계가 남쪽으로 돌아갈 적에 전송하는 사람이 배 위에 가득 찼다. 선인은 공무로 좀 늦어 뒤에 강가로 나갔더니, 배는 벌써 강 가운데로 나갔다. 뱃사람 편에 시 한 절구를 노선생에게 드렸다.
광릉(廣陵)까지 따라 이르렀지만 / 追到廣陵上
타신 그 배 벌써 아득하여라 / 仙舟已杳冥
가을 바람에 수심 가득 안고 / 秋風滿腔思
석양에 홀로 정자에 오르네 / 斜日獨登亭
퇴계가 배 위에서 손을 들어 사례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차운(次韻)하여 붙였었는데, 지금 문집에 실려 있지 않다.
○ 근세 문인들은 선묘조(宣廟朝)에 성대하였다. 시학(詩學)으로는 권석주(權石洲 권필) 같은 이가 있으니, 재주와 생각이 특출한 데 안목이 있는 사람으로서 유고(遺稿)를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석주는 술을 마시면 농담이 많아서 글을 논하는 데 자못 일정하지 않았다. 내가 어느 날 우연히 조용한 기회에 시문의 내용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국초(國初)부터 지금까지 저술을 나보다 낫게 한 사람이 있기는 하나 마음과 보는 눈이 모두 열려서 묘한 이치까지 알아낸 것은 나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의 자부심이 작지 않았던 것이다.
○ 석주(石洲)의 시집은 원래 수효가 많지 않고 내용을 너무 정밀하게 선택하였으니, 지금 세상에 통행하는 시집이 그것이다. 그 집에 간직한 사고(私稿) 중에 석주 자신이 비점(批點)을 찍은 것을 전에 한 번 들쳐보니 볼 만한 것이었는데, 이미 전란 통에 잃어버렸다고 하니, 애석하다.
○ 소시에 체소(體素) 이공(李公)춘영(春英)이 해서(海西)의 중씨(仲氏) 처소에 들렀는데, 과거 공부하는 선비들이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 각자 읽던 책을 가지고 와서 앞에 벌여놓고 좌우에서 묻고 논란하였다. 체소가 술잔을 들고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마치 노련한 법관이 송사 처리하듯 척척 대답하였으니, 역시 유쾌한 일이었다.
○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는 백가서(百家書)를 다 통하여 학식이 매우 풍부하였다. 그러나 유쾌한 기분으로 휘둘러 써두고는 고치지를 아니하고 끝내 어지럽게 쓴 초고를 광주리 속에 던져두고 다시 꺼내보지도 않았다고 하니, 이것은 반드시 후세에 전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 기묘 제현(己卯諸賢)이 요순(堯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을 자기들의 임무로 삼았는데, 당시 선배들이 대부분 그 장래을 염려하였다. 그리고 큰 일을 하는 것이나 현량과(賢良科)를 설립하는 등의 일은 대부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에게서 나왔는데, 여러 어진 이들이 실패하게 된 뒤에는 모재만이 큰 화를 면하여 파직을 당하는 데에 그쳤다.
모재는 젊어서 김안로(金安老)와 친절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김안로가 모재가 서울에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모재가 취한 김에 농담으로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문형을 주관하는 것은 인재가 없어서 그런 것뿐인데 무엇이 귀할 것인가.”
하니, 김안로가 웃고 갔다. 자제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실언이라고 여겨 그가 반드시 매우 유감을 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모재는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안로와 가장 친하여 그 사람됨을 잘 아는데, 반드시 한때의 농담으로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더니, 후에 과연 무사하였다. 김안로가 죽은 뒤에도 모재는 변함없이 철마다 그 집을 돌보아주었다.
○ 기묘년(1519, 중종 14)에 대사성 김식(金湜)이 도망하여 지방으로 나가 있었는데, 밤에 눌재(訥齋) 박상(朴詳)을 광주(光州) 촌가로 찾아가서 함께 자며 여러 간신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세도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세히 말하고 오늘날의 화는 반드시 주상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니, 조만간에 자연히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눌재가 대답하기를,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간악한 계교는 깊고 세밀하니 그렇게 허술하지 않을 것이며, 또 전대의 권신이나 판관들이 임금을 위협하고 견제하는 것과는 비교할 정도가 아니니, 이승에서는 다시 전하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니, 김식은 비로소 실망하고 뉘우쳤다. 이날 새벽에 작별하고 가다가 길가의 다리 아래에서 목매어 죽었다.
○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유배지에 있을 적에, 서울 하인이 밤에 와서 문을 두드리며,
“좋은 소식이 왔습니다. 여러 간신들이 모두 실패하고 어르신께서 소명(召命)을 받게 되었는데, 몇 가지 서신이 여기 있습니다.”
하니,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우선 그대로 두라. 밝은 날에 뜯어 보겠다.”
하고, 예전처럼 코를 골며 잠드니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탄복하였다.
○ 신묘년(1591, 선조 24)에 화가 일어나자, 월정(月汀)은 관직을 삭탈하고 축출하는 데 그쳤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평소 이가(李家)의 나쁜 점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초에 사람을 보내어 자제들을 통하여 말하기를 ‘이때에 한 번만 가서 보면 다른 우려가 없음을 보증하겠다.’ 하였으나, 나는 대답하기를 ‘옛 사람이 사생(死生)과 영욕(榮辱) 때문에 의리를 구차하게 할 수 없다.’ 하였고, 당대의 친구들이 모두 잘못되었는데, 나만 편안한 것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 선인은 평생에 꿈이 반드시 맞았다. 신묘년에 화를 당하여 남양(南陽) 구포(鷗浦)로 나가 살았는데, 새벽녘에 곁에 있는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꿈에 내가 강계 부사(江界府使)가 되었으니 그곳이 유배지가 될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서울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진주로 정배(定配)되었다고 하니, 선인께서 탄식하기를,
“평생에 꿈을 믿었는데, 늙으니 꿈도 맞지 않는다.”
하였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간 지 며칠 만에 대간의 논쟁으로 강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사람이 천금의 구슬을 깨버릴 수는 있지만 가마[釜]가 깨지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한 소공(蘇公)의 이 말을 가지고 세속 사람에게 징험해 보니 거짓말이 아님을 알았다.
○“일이 인정에 가깝지 않은 것은 큰 간특(姦慝)이 되지 않는 것이 드물다.”
하였다. 이것은 노천(老泉)의 변간론(辨姦論)에서 나온 말인데, 선유(先儒)는 공정한 말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왕씨(王氏)ㆍ소씨(蘇氏)의 시비는 누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그 말을 《대학》가운데에,
“후히 대할 자에게 박하게 대하고, 박하게 대할 자에게 후하게 대한다.”
는 것과 서로 참고하여 사람 보는 법을 삼는다면 백의 하나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옛 사람의 이른바,
“신(臣)의 아버지의 청백한 것은 사람이 알까 두려워했고, 신의 청백함은 알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라고 한 것은 공사를 분간하는 데에 정말 격언인 것이다. 말세에 와서 청백하고 좋은 행실이 있다고 하는 자가 흔히 스스로 뽐내고 자랑한 자요, 몸소 실천하는 자는 전혀 형적이 드러나지 않아서 세상이 알 수 없다.
○ 일찍이 옛 사람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으로 사람을 칭찬하는 말로 쓴다는 것을 보고, 혼자 이것이 사람의 무슨 미덕(美德)이 될 것인가 생각하였는데, 세상의 여러 일을 겪은 지금에 와서 보니 대개 금주(金注)에 현혹됨이 많아 비로소 그 말에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 세도에 아부하고 장사 수단으로 교제하는 자를 누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가. 더위와 서늘함의 차례가 바뀌어 영욕(榮辱)이 자리를 바꿀 때에는 평일에 지기(知己)라고 하던 사람들도 문 앞을 지날 때는 목을 움츠리고 한 번도 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우물에 빠지면 돌을 던지는 자도 많다. 이것이 적공(翟公)이 대문에 글을 써 붙인 까닭이요,창려(昌黎)가 유자후(柳子厚)의 묘지(墓誌)를 적은 이유이다.
○ 말세의 사람들은 원래 의리를 아는 자가 적지만 이해를 아는 자도 적다. 일생을 부귀에 뜻을 두어 온갖 계책을 다 쓰며 시세에 따라 아첨하면서 오히려 못 미칠까 염려하던 자들도 나중에 화란을 기어이 만나고, 간혹 분수를 편하게 여기고 본 뜻을 지켜 일하기를 부끄러워하고, 안색을 바로 하여 조정에서 일하면서 꼿꼿하게 지내던 사람도 반드시 모두 함정에 빠지지는 않으니, 이런 것은 불선한 자들의 경계가 된다.
○ 안정된 자는 조급함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일을 이루게 되고, 내실이 없이 과장하는 자는 분쟁만을 일삼기 때문에 끝내는 실효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제 자랑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조용히 할 일만 하는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에 사람을 부릴 때에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여 나중에는 나라를 그르치고 일을 망치게 되는 것이 전후에 잇달았지만 뉘우칠 줄을 모른다. 지금 보아도 이런 경우가 많다.
○ 고금을 통하여 조심하여 복을 누린 자는 있지만, 교만하고서 끝까지 안전한 자는 적다. 이것은 어찌 사람들의 비방이 모이면 귀신의 책망이 따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가 일찍이 왕언방(王彦邦)의 시 가운데,
영화와 은총엔 무심하기 쉽지만 / 榮寵無心易
위태로울 때에 절개 지키기는 어렵네 / 臨危抗節難
라는 두 구를 벽 위에 써 붙였는데, 와서 보는 객들이 대부분 위와 아래 구의 난(難)ㆍ가(易) 두 글자를 서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영예와 명리가 사람의 마음에 깊이 배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박수암(朴守庵 지화(枝華))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스스로 글을 읽고 학문에 힘쓰니 세상에서 많이 칭찬하였다. 임진왜란 때 산골로 피난 갔었다. 하루는 집안 사람들이 그가 간 곳을 몰라 뒤를 밟아 어느 큰 물가에 이르렀는데, 물가에 벗어놓은 옷과 신발을 보고 물에 뜬 시체를 찾아왔다. 옷 속에 이러한 두보의 율시 한 편이 있었다.
임 계신 서울은 구름과 산 밖인데 / 京洛雲山外
소식 전하는 글월 전혀 오지 않네 / 音書靜不來
흰 갈매기 원래 물에서 자는 것이니 / 白鷗元水宿
무슨 일로 남은 슬픔 있으리 / 何事有餘哀
이 역시 회사(懷沙)의 남긴 뜻이 아니겠는가.
○ 조정암(趙靜庵)은 8~9세 때 김한훤(金寒暄 김굉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하루는 한훤을 모시고 있는데, 한훤이 고양이가 포육을 훔쳐가는 것을 여종이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 성을 내어 꾸지람하여 마지않았다. 그 포육은 어머니에게 반찬으로 드리려던 것이었다.
정암이 천천히 말하기를,
“선생님의 어버이를 위하는 정성은 진실로 지극합니다만, 고양이는 그런 것을 모르고 여종들 역시 일부러 범한 것은 아닌데, 선생님이 이로써 너무 화를 내시니 좀 온당치 못할까 합니다.”
하였다. 한훤이 놀라고 탄복하며 말하기를,
“네가 어린아이로 내게 와서 공부하는데 내가 도리어 너에게 배웠다.”
하면서, 종일토록 데리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 천연(天然)은 남쪽의 중인데, 키가 8척이요 담력이 뛰어났다. 일찍이 길을 가다가 지리산을 지나는데 곁에 소위 천왕봉 음사(天王峰淫祠)가 있었다. 이전부터 괴이한 영험으로 알려졌으며 지나는 사람이 만약 경건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몇 걸음을 못 가서 사람과 말이 쓰러져 죽는다 하니, 지나가는 객들이 무서워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천연이 괴이하고 망령된 것이라 하여 팔을 휘두르며 지나갔는데, 별안간 탔던 말이 땅에 넘어졌다. 천연은 매우 성내어 곧 죽은 말을 가져다 사당 가운데에서 도살하여 피로써 사당의 벽을 더럽히고 다시 주먹을 휘둘러 신상(神像)을 쳐부순 다음 불을 놓아 태우고 갔는데, 그 뒤로는 신의 괴이한 영험이 드디어 없어지고 상인이나 길손들이 편안히 지나게 되었다.
퇴계와 고봉이 모두 시를 지었으며, 당시의 명사들이 화답하여 읊은 이가 매우 많았다. 천연은 일찍부터 고봉을 찾아 《주역》을 배워 매우 뜻을 통달하였다. 퇴계와 고봉이 성리(性理)에 대하여 논변하게 되자 천연은 서신을 가지고 왕래하여서 그 사이의 논변하는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다.무신년(1608, 선조 41)에 내가 일이 있어 신천(信川)에 가니, 천연이 듣고서 소를 타고 왔다. 그때 나이 80여 세였는데, 여전히 건강하였다. 옛 일을 말할 때에는 피곤한 기색이 없이 말을 계속하였다. 베개를 가지런히 하고 며칠 밤을 지내며 듣지 못했던 일들을 많이 들었는데, 참으로 방외(方外)의 기걸이었다. 천연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평소 박사암(朴思庵)상공의 알아줌을 받아 항상 영평(永平) 전장(田庄)에 있었는데, 사암은 날마다 대해 주면서 소일하였다. 무자년(1588, 선조 21) 겨울에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전주에 있으면서 인마(人馬)를 보내어 글로 천연을 오라고 하였는데, 천연이 거절하고 가지 않으니, 사암이 그가 이름있는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더욱 귀하게 여겼다.기축년 봄에 역적 정여립이 또 인마를 보내었는데, 서신의 사연이 간곡하며, 또 모시 도포 한 벌을 보내어 뜻을 표하기에 천연이 사암에게 하직하니, 사암은 굳이 머무르라고 하지는 않았다. 천연이 곧 도포를 입고 말을 타고 떠나 하루를 갔는데, 여관에서 밤에 앉아 문득 생각하기를, ‘박 상공이 나를 만류하지 않은 것은 저 사람이 나를 두 번씩이나 오라고 하였으므로 혐의쩍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가면 저 사람과 새로 사귀는 즐거움이 어찌 사암과 비교할 수 있으랴. 그러나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따르는 것은 의리가 아니다.’ 하고, 곧 글을 지어 정여립에게 사례하고 도포를 벗어 돌려보낸 다음 지팡이를 짚고 영평의 전장으로 돌아왔다. 사암이 보고서 이상하게 여기다가, 물어서 실정을 알고 더욱 믿고 사랑하였다. 이 해 겨울에, 정여립의 역모가 드러나니 그때에야 그의 간곡하게 청한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몸이 오싹해짐을 느낀다.”
고 하였다.
○ 권여장(權汝章 권필)이 궁류시(宮柳詩)한 편으로 인하여 임자년(1612, 광해군 4)에 옥에 갇혔다. 옥문을 나와서도 상처가 아파서 곧 귀양길을 떠나지 못하고 흥인문(興仁門) 밖의 민가에 유숙하였다. 하루는 친구들이 와서 문병을 하고 전송하는데 와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장이 누워 있는 방안의 벽을 보니 옛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았다.
때는 바야흐로 청춘이요 날은 저물려는데 / 正是靑春日將暮
복사꽃 어지러이 붉은 비처럼 떨어지누나 / 桃花亂落如紅雨
권하노니 그대여 온종일 진하게 취해 보소 / 勸君終日酩酊醉
술이 많다 해도 유령의 무덤 위엔 이르지 못한다네 / 酒不到劉伶墳上土
대개 이것은 어떤 시골 훈장이 아무렇게나 전에 썼던 것인데, 권(勸) 자를 잘못 권(權) 자로 쓰고, 유영(劉伶)을 잘못 유영(柳聆)으로 써놓았으니, 보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어쩔 줄을 모르고 놀랐다.
좀 있다가 여장이 목마르다고 하면서 술을 찾아서 큰 그릇으로 하나를 마시고는 그만 눈 감고 마니, 이날이 바로 3월 그믐날이었으며, 창 밖의 풍경이 그 시중의 풍경과 같았다. 조물주가 인간의 생사에 대한 처분을 미리 정해 놓았으니, 슬픈 일이다.
○ 고옥(古玉) 정작(鄭碏)과 석전(石田) 성로(成輅)는 모두 나이 40에 상처하였는데, 재취하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종신토록 홀아비로 지냈는데, 마치 선정(禪定)에 든 중 같았다. 오직 술을 매우 좋아하여 잔뜩 취하여 나날을 보내었다. 고옥은 서울의 친구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취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의 시에,
산림이나 성곽 둘 다 의지할 데 없으니 / 山林城郭兩無依
아침에 나가면 언제나 저물어서 취해 돌아온다네 / 朝出常常暮醉歸
라는 것은 그의 사실 행적을 말한 것이다.
석전은 평소 인왕산(仁王山) 아래에 문을 닫고 숨어 있으면서 벼슬을 제수해도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후에는 양화도(楊花渡)강가에 임시 거주하면서, 사위 조영(趙嶸)과 함께 서로 의지하여 지냈는데, 술이 있으면 반드시 취해 쓰러지는 것을 한계로 삼았으며, 하루 아침에 병도 없이 죽었다. 이 두 늙은이는 억제하기 어려운 큰 욕심을 끊으면서도 취향(醉鄕) 밖으로는 뛰어나오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정욕(情慾)과 분수가 앝고 깊음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 윤광계(尹光啓)는 자가 경열(景說), 호는 귤옥(橘屋)인데, 남도의 문사이다. 한평생 시와 술로 즐거움을 삼으며 명예나 이욕에는 담담하였다. 일찍이 벼슬을 따라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인왕봉(仁王峰) 아래에 집을 짓고, 꽃을 심고 약초를 기르면서 조금도 풍진 세상의 기운이 없었다. 날마다 그의 외사촌 정봉(鄭韸)과 이웃에 살며 서로 마주 앉아 술을 들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웃에 술집이 있는데, 날마다 가져다 마시되 값을 묻지 않으며 술집 주인 역시 언제 갚을 것을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쪽에서 오는 배가 미곡을 싣고 강가에 와 닿으면 그때는 쌀을 나누어 술집으로 보내는데 수효를 계산하지 않았다.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문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일찍이 나를 대하여 말하기를,
“서울에 들어온 지 3년 동안에, 친척집 조상(弔喪)으로 의관을 갖추고 나간 적이 겨우 두 번이었다.”
하였다.
○ 옛 친구 정봉(鄭韸)은 자(字)가 상고(尙古)로 사람이 조용하고 깨끗하여 사귈 만하였다. 귤옥(橘屋) 윤광계와 외사촌 형제간이며 일생을 서로 추종하며, 세상을 등진 생활에 날마다 술을 취하도록 마셨다. 윤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상고도 더욱 살 맛을 잃고 병과 술에 잠겨 있다가 나이 겨우 60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시에 사람을 시켜 술을 가져오게 하고, 술을 가져오니 멀건히 보다가 술잔이 작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한평생 이것만을 좋아했는데, 지금 떠나가면서 어찌 한 방울을 마시겠느냐.”
하며, 다시 명하여 큰 술잔을 가져다 둘을 마시고 쓰러져 베개에 누워 가고 말았다.
○ 김영휘(金永暉)는 자는 국서(國舒)요, 집이 광주(光州) 석보촌(石堡村)에 있었는데, 한평생 문을 닫고 양생(養生)하며 매우 수련(修鍊)하는 방법을 좋아하였다. 집 둘레에 구기(枸杞)를 가득 심고, 그 뿌리와 가지로 좁쌀을 쪄서 밥을 지으며, 그 잎과 열매로 나물을 하고 술을 빚어서 항상 먹고 마시며 때로 뜻이 맞는 친구가 오면 문득 내놓고 권하였다. 재주와 학식이 비범하고 언어가 강개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내가 소시적에 함께 놀게 되었는데, 미목(眉目)이 환하여 산택(山澤) 간의 높은 선비의 골격이었으며, 술자리에는 반드시 마음을 털어놓고 못할 말이 없이 하면서, 서로 알기가 늦었다고 하였다. 나이 60이 못되어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영남 사람 곽재우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연히 난리 중에 김영휘를 만나서 양생법을 알았다.” 하였다.
○ 최연복(崔連福)은 자는 경응(景膺)인데, 김영휘(金永暉)와 같은 마을에서 사이좋게 지냈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하여 일생동안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으며, 교제하는 사람은 모두 한 고을의 착한 선비들이었다. 종신토록 《대학》 한 권을 읽었는데, 집주(集註)와 《혹문(或問)》을 아울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문을 닫고 종적을 숨기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이런 사람들은 생전 산골에 거주하여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니, 슬픈 일이다.
○ 홍명원(洪命元)은 자는 낙부(樂夫)요, 익녕(益寧) 홍 정승의 종질(從姪)이다. 기국과 도량이 크고 단정하며 재주와 지혜가 민첩하고 문장도 누구에게 못지 않으니, 사람들이 재상감이라고 기대하였다. 여러 번 주부(州府)를 맡았는데, 치적이 매우 드러났으며 계해년(1623, 인조 1) 초에 경기 감사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 송방조(宋邦祚)는 자는 영숙(永叔)이다. 성질이 준엄하고 결백하여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혼조(昏朝 광해군) 때에 요사한 무리들이 조정에 가득하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머리를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여겼다. 일찍이 우리들 몇 명과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데, 좌중의 담화가 시사(時事)에 모두 근심되는 듯 두려워하였으나, 영숙이 혼자서 분연히 말하기를,
“하늘이 정해지면 사람을 이길 수도 있는데, 사람의 도리가 저렇게 없어졌으니, 여기에 어찌 천도의 극단이 없겠는가. 제군들은 다만 고요히 기다려 보라. 나의 말이 자연 맞게 될 것이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그 말을 들었는데, 이때에 와서 깊이 그의 앞일을 아는 지혜를 탄복하였다. 영숙이 서장관으로 북경에 갈 때에 역관을 구속하여 그 수족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하니, 역관이 매우 괴로워하였는데, 도중에 갑자기 죽었다. 혹은 그에게 독살을 당하였는가 의심한다고 한다.
○ 양응락(梁應洛)은 자는 심원(深源)인데, 문장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으며 장원 급제에 뽑혔지만 벼슬은 낭관에 그치고 세상을 떠났다. 젊었을 때 조인보(趙仁甫)와 서로 친하여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도 서로 떠나는 일이 없었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말이 더듬거리는 듯하였지만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스스로 꿋꿋하여 흔들리지 않고 섞여도 물들지 않는 지조가 있었다. 계곡(谿谷) 장지국(張持國 장유)이 그 묘도문(墓道文)을 지을 적에 그의 평생을 자세히 서술하였다고 한다.
○ 이경탁(李慶倬)은 자는 덕여(德餘)인데, 나보다 열 살이 위이다. 일찍이 집안 대대로 교분이 있는 관계로 아우처럼 나를 보아 정리가 친형제나 같았다. 풍도가 넓으며 재주가 뛰어나 한때 교제하는 이들이 모두 원대한 지위를 기대하였다. 광해군 때에 관서 감사 막하에 좌관(佐官)으로 나가 있으면서 몸을 많이 축내었는데, 하루아침에 객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 겨우 40 남짓 되었다. 나는 외로운 신세로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 이 친구만이 기개가 서로 통하여 종시 막역한 심정이었는데, 존망을 달리한 지 이미 수십 년이 되었다. 이를 생각할 때마다 서글프게 가슴이 아프지 않은 적이 없다.
○ 나는 오랫동안 고질병으로 온갖 일을 다 폐하고, 날마다 피곤하고 수척하여 스스로 견디지 못할 형편이었는데, 좀 뜸하여 우연히 당(唐) 나라 사람의 시집을 가져다 베개에 엎드려 뒤져보니, 한가하고 바쁘며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정경이 감발할 만한 것이 있었고, 또 옛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손을 댄 것을 기뻐하면서 부질없게 약간의 경구(警句)를 기록하여, 때로 혼자 읊으면서 소일하기도 하였다.
○ 청련(靑蓮 이태백(李太白))ㆍ소릉(少陵 두자미(杜子美))ㆍ창려(昌黎 한퇴지(韓退之)) 3대가는 그들의 지은 글이 너무 많아서, 따다 쓰기에 합당하지 못하고, 그 밖의 명가(名家)들의 여러 작품은 그 내용이 화려하려 내가 병중에 생각하는 것과는 서로 가깝지 않고, 귀머거리와 장님이 소리와 빛의 진정한 지경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에, 좋고 나쁜 것을 논할 것 없이 모두 버리고 적지 않는다. 대개 이 《만록(漫錄)》은 남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요, 다만 내가 오랫동안 병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 때로 혹 들쳐보며 번민한 생각을 씻게 된다면 반드시 청량산(淸凉散)을 한 번 복용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계미년 여름에 기옹(畸翁)이 청정헌(淸靖軒)에서 쓴다.


 

[주D-001]진북계(陳北溪)의 설명 : 북계는 송대(宋代)의 학자 진순(陳淳). 대학 첫머리 명명덕(明明德) 소주에서 북계 진씨는 “사람은 나면서 천지(天地)의 이(理)를 가지고 또 천지의 기(氣)를 가졌는데, 이가 기와 합하니 이렇게 하여 허영(虛靈)한 것이다.” 하였다.
[주D-002]을사년 : 조선조 인종 원년(1545)을 말함. 이해 7월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윤임(尹任) 등 많은 인물들이 사형 또는 유배되었음.
[주D-003]한혈구(汗血駒) : 하루 천리를 간다는 좋은 말의 별칭이다. 옛날 중국 한(漢) 나라 장군 이광리(李廣利)가 대완왕(大宛王)의 머리를 베고 그가 타던 좋은 말을 얻었는데, 땀이 피 흐르듯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데서 유래함.
[주D-004]천고(天鼓) : 별 이름. 전란이 일어날 것을 예보하여 뇌성 같은 큰 소리가 들린다고 함.
[주D-005]이씨 집 형제 : 이발(李潑) · 이길(李洁)의 형제를 말한다. 이들은 율곡(栗谷)ㆍ우계(牛溪)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중봉이 절교한 것이며, 이발은 뒤에 정여립(鄭汝立)의 역모(逆謀) 관계로 사형에 처해졌다.
[주D-006]여마동(呂馬童) : 한(漢) 나라 기사마(騎司馬). 항우의 옛날 친구였는데, 항우가 패하여 달아날 때, 여마동을 보고, “한 나라에서 내 머리를 1천 금과 1만 호의 고을로 상을 걸고 구한다고 하니, 내가 그대를 위하여 덕을 베풀겠다.” 하며, 스스로 목 찔러 죽었다고 한다.
[주D-007]전천추(田千秋) : 한 무제(漢武帝) 때의 사람. 위태자(衛太子)가 모함으로 곤경에 빠진 것을 무제에게 호소하여 구해 주고, 후에 정승까지 되었다. 소제(昭帝) 때에는 노년으로 특명을 얻어 조회 때에 작은 수레를 타고 궁궐에 출입하였으므로 거정승(車政丞)의 칭호를 얻었다.
[주D-008]통운(通韻) : 평(平)ㆍ상(上)ㆍ거(去)ㆍ입(入)의 4성(聲)으로 구별하여 모든 글자를 발음에 따라서 동(東)ㆍ동(冬)ㆍ강(江)ㆍ지(支) 이하 1백여 자의 아래에 나누어 두고 발음이 비슷한 글자는 서로 통용하는 것을 통운 또는 협음이라고 한다. 운서(韻書)에서는 협(叶)ㆍ통(通) 자로 표시하였다.
[주D-009]후파(侯芭) : 중국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제자. 양웅이 《법언(法言)》을 지어 《논어(論語)》에 비기고, 태현경을 지어 주역에 비겼는데 후파가 항상 같이 거처하면서 《태현경(太玄經)》과 《법언》을 배웠다.
[주D-010]정강성(鄭康成) : 정강성(鄭康成)은 동한(東漢)시대의 경학가인 정현(鄭玄)인데, 경서 주해를 많이 하였다.
[주D-011]침갱(針羹)과 세장(洗臟) : 요진(姚秦) 때 구마라즙(鳩摩羅什)이란 중이 바늘로서 국을 만든 일이 있다고 하고, 당나라 중 도증(圖證)은 양지수(楊枝水)로서 사람의 장부병(藏腑病)을 씻어 냈다 한다.
[주D-012]사람이 …… 알았다 : 출전(出典)과 의미 미상.
[주D-013]금주(金注) : 《장자(莊子)》에, “도박하는 사람이 기와[瓦] 등속으로 대놓고 하면 지혜가 밝고, 금(金)을 대놓고 하면 지혜가 현혹되어 도리어 어두워진다.” 하였다.
[주D-014]적공(翟公)이 대문에 …… 붙인 까닭이요 : 한 문제(漢文帝) 때 사람. 정위(廷尉)가 되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비위를 맞추다가, 벼슬을 그만두니 한 사람도 찾아오는 자가 없었는데, 다시 정위가 되니 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적공은 분개하여 아래와 같은 글귀를 크게 써서 문에 붙였다.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데에서 친구의 정을 알게 되고, 한 번 부(富)하고 한 번 가난한 데에서 친구의 모습을 알게 되고,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한 데에서는 친구의 정을 알게 된다.” 하였다.
[주D-015]회사(懷沙) : 전국(戰國)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문장의 이름. 굴원이 쫓겨난 뒤에 차라리 물에 빠져 죽어 송장을 모래사장에 드러내기를 생각하였다는 데서 나옴.
[주D-016]유영(劉伶) : 진(晉) 나라 패국(沛國) 사람. 천성이 술을 매우 좋아하여 늘 술 한 병을 가지고 다녔고, 사람에게 삽을 들고 따라다니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죽으면 곧 나를 묻으라.”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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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사열전(淸士列傳)
정고옥(鄭古玉)

 


북창(北窓) 선생의 아우 작(碏)은 자는 군경(君敬), 별호는 고옥(古玉)인데, 북창보다 27세가 적었다. 청정(淸淨)한 것을 좋아하며 금강산에 들어가서 수련(修鍊)하는 도를 배웠다. 중년에 아내가 죽으니 다시 장가들지 않고 정욕을 끊기 36년 만에 세상을 마쳤다. 풍감(風鑑)의 술법을 잘 알아서 신기한 증험이 많았으며, 초서(草書)ㆍ예서(隸書)를 잘 썼고, 시 짓기를 좋아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선생은 낮에도 그림자가 없었다 한다. 내가 듣건대, 병길(丙吉 한(漢) 나라의 명상(名相))의 말에, 지인(至人)은 그림자가 없다고 하더니, 선생은 지인이신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선생은 날 때부터 말을 할 줄 알았다.’ 한다. 먼 옛날에 나면서부터 영통하여 스스로 이름을 말한 자가 있었다고 하더니, 참으로 그랬던가. 어찌 그리도 기이한가. 고옥과 같은 이는 역시 세속의 범주에서 높이 뛰어난 선비라 할 수 있다.


 

[주D-001]풍감(風鑑) : 관상술을 말한다. 《청상잡기(靑箱雜記)》에 “풍감이란 바로 옛적 현인들이 인물을 잘 알아 보아서 훌륭한 인재를 발탁하던 첫째 방법이다.”라고 하였다.
[주D-002]지인(至人) : 영극(靈極)에 도달하여 진여(眞如)를 잃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莊子 天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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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跋)
백씨가 소장하고 있는 정고옥의 소 그림 족자 뒤에 쓰다[書家孟所藏鄭古玉畵牛簇後]

 


우리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능호) 신묘년(1591, 선조24)에 조정에서 이미 옥사 다스린 대신들을 처벌한 다음, 거두어 쓸 사람은 쓰고 버릴 사람은 버리고 하였다. 이때 고옥(古玉) 정작(鄭碏)의 친구로 최씨 성을 가진 이가 남해(南海)가에 살았으므로, 조정에서 명하여 그에게도 한 벼슬을 내리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때 정공이 손수 이 그림을 그려서 최에게 주자, 최가 그 그림을 받고는 마침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이 그림을 보건대, 소가 들판에 있는데 거기에는 풀도 있고 나무도 있다. 소가 나무 그늘에 누웠는데 눈에는 졸리는 기색이 있고 머리에는 얽어맨 것들이 없으니, 대체로 종묘(宗廟)에 쓸 희생도 아니고 또한 쟁기를 지고 끌고 하는 일도 없는 소이다. 정공은 운치 있는 선비였으니, 그가 이 그림을 그릴 적에 뜻을 붙인 것이 참으로 깊었겠거니와, 최군도 이 뜻을 충분히 알고 거취(去就)를 결정하였으니, 그의 뜻 또한 심원했던 것인데, 안타깝게도 그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군이 스스로 영리(榮利)를 멀리할 수 있었으니, 그 또한 사후(死後)의 명성을 기대한 사람도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백씨가 바닷가 사람에게서 이것을 얻었는데, 그 바닷가 사람이 또 그 일을 이와 같이 말하였다. 그 그림은 또 도홍경(陶弘景)의 이우화(二牛畵)와도 서로 비슷한 데가 있으니, 고인과 금인의 취미가 또한 본디 서로 계합된 점이 있는 것이다. 대체로 초야에 있으면서 아무 일이 없는지라, 이 그림을 벽에 걸어놓고 옛사람의 뜻이 느껴져 이에 기록하는 바이다. 목우자(牧牛子)는 쓴다.

 

 

지난해부터 여기에 동봉(東峯)의 영당(影堂)을 경영하였다. 호남의 서 처사(徐處士 서봉령(徐鳳翎))가 듣고서 기뻐하며 선배들이 동봉의 일을 읊은 시 및 내가 지은 장단(長短)의 절구시ㆍ율시ㆍ고시에 차운한 것이 총 7수인데, 깊은 감동을 편 데다 아울러 장려하는 뜻을 담았다. 그 시를 반복하여 읊음에 고무가 되고, 이어서 부끄러워져 문득 이제 화운을 한다. 처사께서 본디 나를 알지 못하는데도 나의 시에 화운해 지어 준 것이 이번이 두 번째이니, 스스로 분에 넘치는 복이라고 생각한다. 8수

 


고사리가 정말 영약이라고 내가 그리 말하노니 / 薇眞靈藥我云然
서산에 불사의 신선이 계심을 보았기 때문이지 / 見有西山不死仙
동봉에게 복련법을 전수하여서 / 傳授東峯服煉法
함께 벽운 창공에 노닐고 있구나 / 相携游戲碧雲天

기상이 신위처럼 유난히 특출하니 / 氣高莘渭獨超然
그대는 백이 숙제와 같은 수준의 신선일레 / 君與夷齊一等仙
유상을 와서 본 이 그 몇이런가마는 / 遺像來瞻人幾許
도리어 저마다 촌심의 충정을 알리라 / 還須各認寸心天
고옥(古玉) 선생 시에 화운하다.

미친 체하며 터뜨린 통곡을 성상이 받아 주셨으니 / 佯狂痛哭聖能容
재단을 더럽힘은 마치 공경치 않은 듯하였지 / 沾汚齋壇似不恭
내가 백년 뒤에 이 사당을 짓는 것은 / 我作祠堂百歲後
명주께서 이 옹 알아주심 드러내고자 함이지 / 擬彰明主識斯翁

세인들은 도연명이 시상에 누운 걸 부러워하는데 / 世憐陶令臥柴桑
더구나 그대는 산사의 승방에 종적을 숨겼네 / 況子逃蹤竺老房
《이소경》을 이어 은거의 뜻 펴야 마땅하지만 / 合續離騷發幽隱
애석하게도 반양에 필적할 문장 솜씨 없구나 / 惜無辭理似班揚
상촌(象村) 상국(相國) 시에 화운하다.

오월 지역은 강산이 훌륭하여 / 吴越江山勝
삼고에다 또한 정자까지 있다네 / 三高亦有亭
그대 위해 누가 뜻을 세워 / 爲君誰刱意
이 푸른 몇 봉우리를 대하게 하나 / 對此數峯靑
현곡(玄谷) 사장(詞丈) 시에 화운하다.

동봉 아래 살면서부터 / 自住東峯下
수석의 빼어남을 더욱 사랑했지 / 尤憐水石奇
이로 인해 청은의 노옹이 / 因懷淸隱老
성명한 시대에 고결하게 은둔함을 사모했노라 / 高遯聖明時
진영엔 남기신 필적이 전하고 / 眞像傳遺筆
새로운 사당은 옛터에 세우네 / 新祠傍故基
못난 내가 품고 있는 이 뜻이 / 區區抱此意
멀리 과분한 시에 부끄럽다오 / 遙愧過情詩
청계도인(淸溪道人) 시에 화운하다.

옛날 현자가 수양산에서 굶주림은 / 昔賢餓首陽
오직 인을 구하기 위해서이지 / 只爲求仁也
청은께서 그 정신 계승하시니 / 淸隱復繼之
천고에 짝할 이 드물어라 / 千載少似者
탕 임금 마음이 스스로 부끄러우니 / 湯心猶自慙
뒷사람에게 빌미를 줄까 해서이지 / 恐爲後人藉
이런 까닭에 세 분의 뜻 중에서도 / 所以三子意
이 일이 유독 확고하지 / 此事獨牢把
백호(白湖)의 〈압구정(狎鷗亭)〉에 화답하여 차운하다.

골짜기에 사당이 새로이 지어지니 / 祠屋新成寄谷中
누군들 그대의 높은 풍모 우러르지 않으랴 / 何人不仰子高風
와룡의 유상에서 전대의 일을 헤아리나니 / 臥龍遺像推前事
중론이 떠들썩한 오늘 동봉 어른을 기다리지 / 衆口紛紜待一翁
〈송유상수찬(誦遺像手贊)〉에 화운하다.


 

[주C-001]동봉(東峯) :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호이다. 서계는 동봉을 존경하여 영당(影堂)을 세웠는데, 이에 대해서는 《서계집》 권8 〈석림암기(石林庵記)〉와 〈매월당(梅月堂) 영당(影堂) 권연문(勸緣文)〉 등에 자세한 전말이 소개되어 있다.
[주D-001]불사(不死)의 신선 : 은(殷)나라 말기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말한다. 처음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칠 적에는 무왕의 말고삐를 끌어당기며 간하였고, 무왕이 끝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차지한 뒤에는 의리상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은거하였다. 그때 “저 서산에 올라가서, 고사리를 캐도다.[登彼西山兮 采其薇矣]”라는 노래를 불렀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여기서는 두 현자가 비록 죽기는 하였으나 그 명성은 천고에 남아 영원하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D-002]복련법(服煉法) : 신선술의 하나로, 연단을 복용하여 불로장생을 꾀하는 방술이다.
[주D-003]신위(莘渭) : 신야(莘野)에서 농사짓다가 탕(湯) 임금의 재상이 되었던 이윤(伊尹)과 위수(渭水)에서 낚시질하다 문왕(文王)의 재상이 된 강 태공(姜太公)을 가리킨다.
[주D-004]고옥(古玉) : 정작(鄭碏, 1533~1603)으로,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경(君敬), 호는 고옥이다. 술과 시를 즐겨 주선(酒仙)의 호칭을 얻었고, 특히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의술에 뛰어나서 1596년(선조29)에는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벼슬은 좌랑(佐郞)에 이르렀다.
[주D-005]반양(班揚) : 한(漢)나라 때 사부(辭賦)로써 매우 명성이 높았던 반고(班固)와 양웅(揚雄)을 합칭한 말이다.
[주D-006]상촌(象村) : 신흠(申欽, 1566~1628)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ㆍ현옹(玄翁)ㆍ방옹(放翁)이다.
[주D-007]삼고(三高) : 오강삼고(吳江三高)를 말한다. 즉 오강 지역에 살았던 세 사람의 고사(高士)를 가리키는 말인데, 전국 시대의 범려(范蠡), 진(晉)나라의 장한(張翰), 당(唐)나라의 육귀몽(陸龜蒙)을 말한다. 뒤에 삼고사(三高祠)를 세워 이들을 기렸다.
[주D-008]정자 : 수홍정(垂虹亭)을 말한다. 오강현(呉江縣) 장교(長橋)에 있는 정자로, 송나라 경력(慶曆) 중엽에 현령 이문(李問)이 건립하였다.
[주D-009]현곡(玄谷) : 조위한(趙緯韓, 1567~1649)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지세(持世), 호는 현곡이다.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글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해학(諧謔)에도 능하였다.
[주D-010]청은(淸隱) : 김시습(金時習)의 별호가 벽산청은(碧山淸隱)이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D-011]청계도인(淸溪道人) : 양대박(梁大樸, 1544~1592)으로, 자는 사진(士眞), 호는 송암(松巖)ㆍ죽암(竹巖)ㆍ하곡(荷谷)과 청계도인이다.
[주D-012]백호(白湖) : 임제(林悌, 1549~1587)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이다.
[주D-013]와룡(臥龍)의 유상(遺像) : 여산(廬山) 와룡담(臥龍潭) 곁에 와룡암(臥龍庵)이라는 암자가 터만 남아 있었다. 주자가 사재(私財) 10만 전(錢)을 덜어서 서원은자(西原隱者) 최가언(崔嘉彦)을 시켜 중수하게 한 뒤, ‘와룡’이라는 이름이 제갈량의 호와 같다 하여 이곳에 제갈량의 화상을 안치하게 했던 고사가 있다. 《晦庵集 卷79 臥龍庵記》 여기서는 수락산 동봉 자락에 동봉(東峯)의 영당을 경영하여 김시습의 화상을 안치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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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문문(詩文門)
정고옥 시(鄭古玉詩)

 


검각산 밖에서 황제라 일컫고 / 劍外稱皇帝
인간에서 자규에 의탁을 했네 / 人間托子規
옛 절이라 배꽃 핀 밝은 달 아래 / 梨花古寺月
울어울어 온 밤을 지새는구려 / 啼到五更時

이는 고옥(古玉) 정작(鄭碏)의 시다. 이 시가 당초에는 아래에 또 두 연구가 있어,

나그네들은 천 년의 눈물을 짓고 / 遊子千年淚
외론 신하는 재배의 시를 썼구려 / 孤臣再拜詩
시름겨운 창자라 한 번 울어 끊길 텐데 / 愁膓一呌斷
어찌하여 저다지도 괴론 슬픔을…… / 何用苦摧悲

하였는데,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잉(剩)이라 지적하자, 정고옥은 즉시 수긍했다 한다.


 

[주C-001]정고옥 시(鄭古玉詩) : 고옥은 중종~선조 때의 학자인 정작(鄭碏)의 호. 그는 술을 즐겨 주선(酒仙)이라 불려졌고, 시와 글씨에도 능했음.
[주D-001]재배(再拜)의 시 : 원문의 “再拜詩”는 두보(杜甫)의 두견시(杜鵑詩)에, “나는 보면 언제나 두 번 절한다, 옛날 임금의 넋을 소중히 여겨서[我見常再拜 重是古帝魂].”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임.
[주D-002]이민성(李民宬) : 선조 때의 문신. 호는 경정(敬亭). 벼슬이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고, 시문과 글씨에 능했으며 직언(直言)을 잘하기로 유명함. 저서에는 《경정집(敬亭集)》ㆍ《조천록(朝天錄)》이 있음.
[주D-003]잉(剩) : 군더더기란 뜻.

 

 

 

 

오언율시(五言律詩)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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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언율시(五言律詩)
고옥(古玉) 정 선생(鄭先生) 작(碏) 을 곡(哭)하다

 


탄식하노니 신선 같은 풍모를 / 歎息神仙表
평소에 늘 꿈속에 그리워했었지 / 平生夢想中
큰 명성에 시의 가치 무거웠고 / 大名詩價重
덧없는 인생에 주로가 비었어라 / 浮世酒壚空
하늘이 우리를 곤궁케 하려 하니 / 天欲窮吾輩
그 누가 이 어른을 아까워했으랴 / 人誰惜此翁
한 번 슬퍼해 눈물 무한히 흘리고 / 一哀無限淚
서풍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노라 / 回首向西風


 

[주C-001]고옥(古玉) 정 선생(鄭先生) : 고옥은 정작(鄭碏 : 1533 ~ 1603)의 호이다. 자는 군경(君敬)이며,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정순붕(鄭順朋)의 아들이자 정렴(鄭)의 동생으로 벼슬은 좌랑(佐郞)에 그쳤다. 학문에 정진하였고 술을 좋아해 주선(酒仙)으로 불렸다. 시명(詩名)이 높았고 글씨에도 뛰어나 초서(草書)와 예서(禮書)를 잘 썼으며, 의학(醫學)에도 밝아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에 참여하였다.
[주D-001]주로(酒壚)가 비었어라 : 노(壚)는 주막에 화덕 모양으로 흙을 쌓아서 술동이를 얹어 놓던 것이다. 오늘날의 목로와 같다. 옛날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던 선술집을 황공주로(黃公酒壚)라 한다.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왕융(王戎)이 상서령(尙書令)이 되어서 황공주로 앞을 지나다가 뒷수레를 탄 사람을 돌아보면서 “내가 옛날 혜강(嵆康)ㆍ완적(阮籍) 등과 함께 이 주점에서 술을 마시면서 죽림(竹林)의 노닒에도 참가했었다. 혜강과 완적이 세상을 떠난 후로 나는 속무(俗務)에 몸이 묶여 지냈으니, 오늘 이곳을 보매 거리는 비록 가까우나 산하가 가로놓인 듯 아득하게 느껴진다.” 하였다. 《世說新語 傷逝》 즉 정작이 세상을 떠나 술집에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행장(行狀)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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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을 지내고 찬성(贊成)에 추증된 고(故) 운계(雲溪) 정공(鄭公)의 행장(行狀)

 


공의 휘(諱)는 뇌경(雷卿)이고, 자(字)는 진백(震伯)이며, 호(號)는 운계(雲溪)이다. 그의 선조는 온양인(溫陽人)으로, 시조(始祖) 정보천(鄭普天)은 고려조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정희공(貞禧公)이다. 이로부터 고려와 조선 양대를 거치면서 고관들이 줄지어 계속 이어졌다. 고조인 정순붕(鄭順朋)은 우리 중종(中宗)과 명종(明宗) 두 임금을 섬겨 좌의정을 지냈으며, 증조인 정담(鄭䃫)은 호가 십죽헌(十竹軒)으로 경기 도사(京畿都事)를 지냈는데, 북창(北窓) 정렴(鄭)의 동생이고, 고옥(古玉) 정작(鄭碏)의 형이다.
조부 정지겸(鄭之謙)은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일찌감치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시골에 은거하여 자신의 뜻을 지켰으며, 고(考) 정환(鄭晥)은 성균 생원(成均生員)으로 일찍 죽었다. 비(妣) 연산 서씨(連山徐氏)는 증 병조 참판 서주(徐澍)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무신년(1608, 선조 41) 7월 4일에 태어나서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에서 성장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어른다운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장성해서는 이모부인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에게 수학하였는데, 문장이 날로 진보하여 약관의 나이에 이름을 사림(士林)에 드날렸다. 성품은 충효스럽고 강개하였으며, 큰 절조가 있었다.
경오년(1630,인조8) 10월에 황자(皇子) 탄생을 축하하는 별시(別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그 때 북저(北渚) 김류(金瑬)와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고관(考官)으로 있으면서 인재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장원으로 전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가 얼마 뒤에 공조와 예조 두 조의 좌랑으로 옮겨졌다. 북저 김류가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일로 인해 공과 함께 북도(北道)로 갔는데, 함경도 관찰사로 있던 윤의립(尹毅立) 공이 공을 보고는 나라의 그릇이라고 칭송하였으며, 김공이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공을 극히 칭송하였다.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이 이 때 이조 판서를 맡고 있으면서 역시 공의 사람됨을 알아보고는 즉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승진시켰다. 공은 선대에 잘못을 저지른 일이 있다는 이유로 자신을 탄핵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시론(時論) 역시 훌륭하게 여겼다. 이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겨졌다가 곧바로 옥당(玉堂)으로 들어가 수찬(修撰), 교리(校理)가 되었는데, 사헌부와 홍문관에 있으면서는 일을 논함에 풍도(風度)가 있었다.
병자년(1636, 인조 14) 봄에 차자를 올려서 오랑캐와 화의(和議)하는 것이 그름을 논하였다. 그 해 겨울에 청 나라 군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인조(仁祖)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는데, 공이 교리로서 호종(扈從)하였다. 이듬해인 정축년 봄에 세자(世子)와 대군(大君)이 볼모로 잡혀 청 나라로 끌려가자 세자를 따르던 관원들이 대부분 따라가지 않기를 도모하였는데, 공은 개연히 따라가기를 청하니, 상이 가상히 여겼다.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따라 가면서 일행의 전곡(錢穀) 수지(收支)를 관장하였는데, 세자가 사사로이 청하는 것이 있어도 그것이 응당 써야 할 것이 아닌 경우에는 공이 고집스럽게 안 된다고 하였다. 동료들 가운데 혹 몸가짐을 근실하게 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공이 조금도 용서치 않고 사정 없이 꾸짖어 경계시켰으며, 어떤 한 재상이 뇌물을 바치고서 오랑캐와 친하게 지내자 공은 침을 뱉으면서 비루하게 여겼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해 겨울에 문안 인사를 드리기 위해 본국 조정으로 돌아왔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청 나라로 가 복명하였다. 기묘년(1639, 인조 17) 봄에 필선(弼善)으로 승진하였는데, 얼마 뒤에 역적 정명수(鄭命壽)의 모함에 걸려들었다.
정명수는 은산(殷山)의 관노(官奴)로 무오년(1618, 광해군 10)에 있었던 건주(建州)의 전역(戰役에 우리 나라의 천한 종인 김돌이(金突伊)와 함께 청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자인데, 성품이 교활하고 탐욕스러웠다. 병자년에 조선말을 해득한다는 이유로 우리 나라로 나왔는데, 그 뒤에 더욱더 청 나라의 총애를 받아 우리 국사(國事)를 전적으로 담당하여 처리하였는데, 임금을 능멸하고 조정 신하들을 욕보이는 등 우리 나라에 해독을 끼치는 일이라면 발벗고 나섰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청 나라 사람이 정명수 등이 우리 나라를 침학한 실상을 고발(告發)하자, 청 나라 황제가 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공이 이 사실을 듣고는 이 기회를 틈타서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 때에 심양(瀋陽) 관소(館所)의 요속(僚屬)과 빈객(賓客)으로는 재상 박노(朴)·신득연(申得淵), 보덕(輔德) 박계영(朴啓榮), 필선(弼善) 신유(申濡), 문학(文學) 공(公), 사서(司書) 김종일(金宗一)·정지화(鄭知和) 등 여러 명이 있어, 모두 이 모의에 참여하였는데, 공이 스스로 이 모의를 주도하였다. 그 해 정월에 김종일과 상의하여 말하기를,
“하리(下吏)들 가운데 충근(忠謹)하여서 이 일을 맡을 만한 자로는 강효원(姜孝元)보다 더 나은 자가 없다.”
하고는, 사람들이 함께 앉은 자리에서 강효원을 불러 이르기를,
“정명수와 김돌이 두 역적이 하는 짓은 네가 알고 있는 바이다. 청 나라 역관(譯官) 하사담(河士淡) 역시 그를 죽이려고 하여 지금 고발하였는데, 청 나라 황제가 정명수를 죽이려고 하고 있으니, 이 시기를 놓칠 수 없다. 이 두 역적을 제거하면 우리 나라의 형세가 높아지고 진헌(進獻)하는 일에도 폐단이 없게 될 것이다. 전에 대간(大諫) 박황(朴潢)과 필선 민응협(閔應協)이 이곳에 있을 때 무오년에 포로로 잡혀 왔던 김애수(金愛守)와 심천로(沈天老) 등을 시켜 청 나라 형부(刑部)에 정문(呈文)을 바치려고 하다가 바치지 못하였는데, 그 때 작성한 정문이 지금 심천로의 처소에 있다. 요즈음 두 역적이 제멋대로 구는 것이 더욱 심하여 진헌하는 배와 감을 각 1천 개씩 훔쳐 먹었고, 최상국(崔相國)이 올 때 가지고 온 은자(銀子) 2백 냥, 역관(譯官) 최득남(崔得男)이 싸 가지고 온 은화(銀貨) 7바리를 전부 빼앗았는데, 그에 관한 문서가 모두 그곳에 있다. 이것은 그를 죽일 만한 죄안(罪案)이니, 너는 심천로 등과 함께 정문하여 그의 간악한 실상을 고발하되, 청 나라 관원이 캐물을 경우, 너는 ‘시강원 관원이 알고 있다.’고만 대답하라. 만약 조사하는 일이 벌어지면 우리 두 사람이 곧장 사실대로 말할 것이니, 너는 조금도 염려하지 말아라.”
하였다. 그러자 강효원이 드디어 개연히 명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며칠 뒤에 심천로 등이 청 나라 형부에 정문을 바치자, 청 나라 관원이 시강원의 관원들을 급히 불러들였다. 이에 김종일이 나아갔다. 청 나라 관원이 정문 안에 있는 내용에 대해 캐묻자, 김종일이 말하기를,
“시강원 관원들은 관장하고 있는 일이 각각 달라서 사서(司書)는 예방(禮房)의 일을 맡고 있고, 문학(文學)은 호방(戶房)의 일을 맡고 있으니, 물화(物貨)의 들고나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이 알고 있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공을 불러 캐묻자, 공이 사실대로 답하였으며, 또 강효원을 불러 캐묻자, 강효원 역시 공의 말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 뒤로도 청 나라 관원이 여러 차례 불러 조사하면서 캐물었으나 대답이 한결같았다. 그 사실을 증명할 만한 문서가 공의 처소에 있었는데, 두 역적이 그 사실을 알고 박노에게 사주하여 그 문서를 불태우게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서 청 나라 관원이 증거할 만한 문서가 있느냐고 물으니, 공이 불태울 때의 상황을 말하면서 이르기를,
“재상 박노와,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이 불태웠다.”
하였다. 박노는 공에게 유감을 품고 있어서 이 틈을 타 공을 중상하려고 하였다. 이에 청 나라 관원이 불러캐묻자, 답하기를,
“그런 일이 없었다. 그가 말한 것은 모두 망녕된 것으로, 이는 두 역관을 해치고자 해서 그런 데 불과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청 나라 관원이 즉시 박노를 석방하고 공과 강효원을 옥에 구금한 다음, 우리 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그 일에 대해 캐물었다. 이에 상이 처음에는 공을 구원해주려고 하였는데, 박노가 치계(馳啓)하여 아뢰기를,
“본국에서 엄하게 죄주기를 청할 경우 혹 풀려날 수도 있지만, 만약 신구(伸救)하려고 할 경우 단지 청 나라의 노여움만 촉발시킬 것입니다.”
하고, 재상으로 있던 최명길(崔鳴吉) 역시 박노의 말을 옳게 여기니, 상이 그 말에 따라서 그런 일이 없다고 회자(回咨)하였다. 남을 모해(謀害)한 자는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되어 청 나라 관원이 사형죄로 판결하려 하자, 세자가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면 다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고 하면서, 공으로 하여금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 화를 늦추라고 하였는데, 공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혼자서만 죄를 뒤집어 썼다.
장차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을 때 재신(宰臣)이 속(贖)하기를 청하자, 정명수가 발끈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그러면 정운계와 강효원이 장차 살아 돌아갈 것이 아닌가.”
하였다. 세자가 친히 청 나라 관부에 나아가 속하기를 청하려고 하여 막 출발하려 하는데, 정명수가 뛰어와서는 길을 막고 소리치기를,
“내 머리를 자른 뒤에나 갈 수 있다.”
하였다. 사서 정지화가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어떤 놈인데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
하자, 정명수가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뭐하는 놈이냐고 물었는데, 나는 정명수다.”
하면서 정지화를 주먹으로 마구 때려 정지화의 갓끈이 끊어지고 옷고름이 풀어졌다. 세자가 공으로 하여금 독약(毒藥)을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하면서 문학 신유(申濡)로 하여금 독약을 구해 주게 하였는데, 독약이 적어서 자살하지 못하였다. 공이 강효원과 옥문(獄門)을 나서 말에 오르자, 재자관(䝴咨官) 이응징(李應徵)과 선전관(宣傳官) 정윤길(鄭胤吉)이 압송해 갔는데, 두 역적이 몰아치기를 몹시 급하게 하였다. 서문(西門) 밖으로 나가 사형장에 도착해서 막 참수(斬首)하려고 하는데, 이응징이 힘껏 다투면서 말하기를,
“조령(朝令)에는 사대부의 경우 교형(絞刑)에 처하게 되어 있으니, 마땅히 본국의 법을 써야 한다.”
하니, 드디어 그 말에 따라 교형에 처하였다. 강효원은 공과 함께 죽을 때 재신을 욕하면서 한 마디도 자신에 대해 변명하지 않아 참으로 훌륭하였으며, 심천로도 마침내 참수당하였는데, 바로 4월 18일이었다. 이날 하늘의 해는 흐리고 음산한 바람이 세차게 부니, 보고 있던 오랑캐들조차도 모두 혀를 끌끌차며 칭찬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박노가 두 역적에게 시신(屍身)을 거두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는데,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비로소 허락하였다. 이에 선전관 박형(朴泂)과 질자(質子) 이열(李悅) 및 공의 가노(家奴)가 시신을 수습하였다. 공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시를 읊은 것이 많이 있다. 세상에 전해지는 것은 두 수의 율시(律詩)가 있는데, 그 하나에,
현우 모두 예로부터 다 함께 죽었거니 / 賢愚終古同歸盡
목숨의 길고 짧음 제맘대로 못하는 법 / 脩短元非力所營
삼십이 년 지난 세월 모두가 꿈이 됨에 / 三十二年成一夢
수천 리 밖 외국 땅서 고혼으로 돌아가네 / 數千里外返孤旌
죽는 날엔 우국충정 눈물 줄줄 흘리고 / 死日尙流憂國淚
살아서는 부모 봉양 제대로 못하였네 / 生時亦闕慰親誠
변방 땅에 이로부터 울어 예는 두견 있어 / 關山自此啼鵑在
남쪽 가는 기럭 좇아 한양 땅 찾아가리 / 倘逐南鴻過漢城
하고, 또 하나에,
나이 어려 고향 떠나 밝은 임금 섬겼음에 / 早離蓬蓽奉明君
옥당 벼슬 한림 벼슬 분수 밖의 은혜였네 / 玉署金鑾分外恩
운명 박해 임금 은혜 보답할 뜻 이루었고 / 命薄可成圖效志
미치광이 성품이라 재앙문에 들어갔네 / 性狂宜入禍殃門
봄이 옴에 만물 모두 생기롭게 싹트는데 / 靑春百物皆生意
바다 밖 천리 땅서 혼백 못 돌아가네 / 滄海千里未返魂
노모와 고아야 부탁할 곳 있거니와 / 老母孤兒猶有托
제현들은 끝끝내 한 원문 1자 빠짐 보존하라 / 諸賢終必一□存
하였다. 또 형벌에 임하여 붓을 달라고 하여 시를 썼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어진 세 분 지난날 요하 가에서 죽었으니 어진 세 분은 삼학사(三學士)를 가리킨다./ 三良昔死遼河濱
지금 나 진백(震伯) 불러 새로 짝을 이뤘으니 공의 자(字)가 진백이다./ 今招阿震添新伴
우리 함께 영위찾아 주인으로 정하세나 / 共訪令威作主人
또 부채에 제(題)하기를,
하였는데, 말투가 여유가 있고 침착하여 평소와 같았다. 자리를 깔라고 하고서 동쪽을 향하여 임금과 부모에게 각각 두 번씩 절하였는바, 여기에서 공이 평소에 함양한 바를 알 수가 있다. 세자와 대군이 몹시 측은해하면서 옷을 벗어서 시신을 감싸고 전(奠)을 올려 제사지내었다. 부음(訃音)이 본국에 도착하자 공을 알고 있거나 알지 못하고 있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흐느껴 울었다.
6월에 내관(內官) 박지영(朴枝榮)에게 명하여 강효원과 함께 반구(返柩)하도록 하였으며, 다음해 8월에 장례(葬禮)를 치렀는데,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조정에서 돌보아 주었으며, 특별히 광주(廣州) 경안(慶安)에 있는 금지 구역인 성묘(成廟)의 태봉(胎峯) 아래 자좌(子坐)의 언덕을 하사하였다. 처음에는 도승지(都承旨)를 추증하고, 다시 이조 참판을 추증하였으며, 그의 집에 월름(月廩)을 보내 주도록 하였다. 효묘(孝廟)께서 각별히 슬픔을 표하였으며, 일찍이 한 공주(公主)를 지정하여 혼인(婚姻)을 시키려고 하는 뜻을 표하였으나, 뒤에 마침내 요절하였다고 한다. 영종(英宗) 계유년(1753, 영조 29)에 찬성(贊成)을 추증하였다.
공의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 윤상형(尹商衡)의 딸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정유악(鄭維岳)이다. 공이 해를 당할 적에 정유악은 겨우 8세였다. 효종(孝宗) 임진년(1652, 효종 3) 가을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자, 상이 불러들여서 만나 보고는 이르기를,
“이 아이가 이와 같이 장성하였구나.”
하면서, 얼굴을 들라고 명하였다. 정유악이 얼굴을 들자, 상이 이르기를,
“너의 모습이 자못 너의 아비와 같다. 너는 더욱더 힘써서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기어이 원대한 뜻을 이루도록 하라.”
하고, 이어 승지 이일상(李一相)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의 아비는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다가 헤아릴 수 없는 화에 빠져들었는데, 사람들이 구하지 못하였으며, 나 역시도 힘이 약해 어떻게 구해 볼 도리가 없었다.”
하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또 승지에게 명하기를,
“조정에서 늠록(廩祿)이 끊어지지 않도록 돌보라.”
하고, 또 이르기를,
“고아가 된 아들과 과부가 된 아내가 살아가기가 필시 어려울 것이니, 해조(該曹)에 말해서 내가 내리는 물품을 제급(題給)하게 하라.”
하고는, 드디어 호피(虎皮) 1장, 백금(白金) 1백 냥, 쌀 10석, 포 10필, 종이 2속(束), 붓 5자루, 먹 5자루를 하사하였으며, 이어 술과 음식을 하사하니, 이 말을 듣는 자들이 모두 감탄하였으며,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다음 해에 정유악을 특별히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제수하였다.
현종(顯宗) 정미년(1667, 현종 8)에 공의 어머니 서 부인(徐夫人)이 죽자 장사지내고 제사지내는 데 필요한 물품을 지급해 주도록 명하였다. 세 조정에서 돌보아 준 은전(恩典)이 지극하고도 극진하였는바, 공은 이에 유감이 없게 되었다.
아, 당시의 일에 몹시 개탄스럽고 한스러운 것이 있다. 박노는 비록 자기 말을 번복하였으나, 여러 관원들은 모두 그 모의에 참여하였은즉, 어찌하여 공이 죽어가는 것을 그대로 서서 본 채 구원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리고 세자가 이미 공에게 여러 사람들을 끌어들이라고 명하였는데도 공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 죄를 뒤집어썼으니, 참으로 어질었다. 여러 관원들이 청 나라 관아로 가서 공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지 못하였던 것은 무엇 때문이며, 또 청 나라 사람들이 자문을 보내면서 역시 두 역적을 의심하였는데, 박노가 치계(馳啓)할 즈음에 미쳐서 시강원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은 또한 어째서인가. 조정에서 회자(回咨)하면서도 역시 말하기를,
“두 역적이 모두 본국의 천예(賤隷)로 임금을 배반한 채 도리어 물어뜯으면서 본국을 침해함이 끝이 없다. 그러나 다만 대국(大國)의 일을 보고 있기 때문에 아뢰어 진달드리고자 하면서도 쥐새끼 한 마리 잡으려다가 장독을 깰까 걱정스러워서 하지 못하였는데, 이번에는 모두 다 말하겠다.”
하면서, 그들의 간사하고 탐욕스러운 짓을 다 말하고, 또 이런 뜻으로 청 나라 황제에게 상주하였다면, 두 역적의 머리가 그 즉시 심양(瀋陽)의 시장 바닥에 내걸렸을 것이다. 재상 최명길은 이런 의리를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아첨하여 굽신거리기만 일삼으면서 박노와 더불어 부화뇌동하여 마침내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로 하여금 오랑캐에게 처형당하고 말게 하였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대저 예로부터 약소 국가는 부득불 대국을 섬기는 일이 있었는데, 이 때를 당해서는 번번이 간사한 자들이 적에게 빌붙어서 본국을 협박하는 경우가 많았는바, 송(宋) 나라가 남도(南渡)한 뒤 우리 나라 고려 말기의 일을 보면 이를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평상시에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법을 만들기를, “본국 사람으로 적의 위세를 끼고 본국을 해치는 자는 먼저 본인을 참수한 뒤 그의 종족(宗族)들을 처형하고, 조상들의 묘를 파헤친 다음 사유를 갖추어서 대국에 보고한다.”고 하면, 역시 조금은 그런 짓을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천하 사람들이 악인(惡人)을 미워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이니, 대국의 입장에 있는 자도 또한 어찌 반적(叛賊)을 용서해 주어 한 나라 사람들의 인심을 잃는 짓을 하겠는가. 그런데 매번 이와 같이 하지는 못한 채 한갓 굽신거리며 섬기기만을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국사를 도모하는 자들은 마땅히 이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강효원은 일개 보잘것없는 소리(小吏)로서 능히 죽음도 겁내지 않은 채 쟁집하면서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니, 당시의 시강원 관원들과 비교해 볼 때 어질고 어리석음이 과연 어떠한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말하기를,
“사대부들이 아전만도 못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고,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은 말하기를,
“저 김 아무개처럼 마음을 쓰는 자는 개[狗]도 그가 먹다 남긴 것은 먹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은 말하기를,
“어떤 한 재상이 정명수의 심복이 되어 임금을 억누르고 역적을 도왔으니, 후세 사람들의 붓과 혀를 어떻게 가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유악은 뒤에 병오년(1666, 현종 7)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정사충(鄭思忠)과 정사효(鄭思孝) 두 아들을 두었는데, 정사충은 진사(進士)가 되었고 정사효는 1697년 중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及第)하였다.
강효원은 죽었을 때의 나이가 37세였는데, 인조(仁祖)께서 그의 죽음을 애처롭게 여겨 땅을 잘 가려서 안장(安葬)하게 하였고, 어미와 아내에게 월름(月廩)으로 쌀 6말[斗], 조기[石魚] 3속(束)을 종신토록 지급하게 하였으며, 어미와 아내의 장사 때에는 관에서 장례를 치르는 데 필요한 모든 물품을 지급해 주었다. 강후정(姜厚精)과 강이정(姜二精)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사천(私賤)이었으므로 상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천(公賤) 2구(口)로 강후정과 그의 아들 강차석(姜次碩)을 속(贖)하게 하였다. 그 뒤에 강효원에게 판결사(判決事)를 추증하였다.
진사공(進士公) 정사충(鄭思忠)의 증손인 정이원(鄭履元)이 그의 내종(內從)인 한경탁(韓儆鐸) 군과 함께 나에게 와서 공의 행장(行狀)을 지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공의 집안은 세화(世禍)에 걸려들어 고아와 과부가 줄지어 나온 탓에 문헌(文獻)이 모두 산일(散逸)되어서 전해지지 않는다. 이에 지금 단지 고산 윤선도, 우암 송시열, 동명 정두경 세 분이 찬(撰)한 비명(碑銘)과 강효원의 가장(家狀) 및 믿을 만한 야사(野史)의 기록을 두루 찾아내어 병을 무릅쓰고 붓을 들어서 글을 지어 역사를 기록하는 자가 채택해 주기를 기다린다.
금상(今上) 13년인 기유년(1789, 정조 13) 9월 하한(下澣)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한산(漢山) 안정복(安鼎福)은 삼가 찬하다.


 

[주D-001]선대에……저지른 일 : 선조인 정순붕(鄭順朋)이 명종 때 윤원형(尹元衡)에게 아부하여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죽인 을사사화와 양재역(良才驛) 벽서 사건(壁書事件)을 빙자하여 봉성군(鳳城君), 이약빙(李若氷) 등을 죽인 정미사화를 말한다.
[주D-002]건주(建州)의 전역(戰役 : 명(明) 나라가 후금(後金)의 건주(建州)를 칠 때 응원하기 위하여 출정(出征)한 일을 말한다. 이 때 강홍립(姜弘立)을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 삼아 2만 명을 거느리고 출정하게 하였는데,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자 강홍립이 청(淸) 나라에 항복하였다. 정명수는 이때 포로로 잡혀 갔다가 청 나라 말을 배워 우리 나라의 사정을 밀고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통역관으로 나와 갖은 행패를 다 부렸다.
[주D-003]삼학사(三學士) : 병자호란 때 청 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하다 척화신(斥和臣)으로 몰려 청 나라에 끌려가 죽은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를 말한다.
[주D-004]변방 땅서……있으리라 : 이 부분이 《연려실기술》 제26권 인조조 고사본말에는 “변방 땅에 떠도는 꿈속 혼이 이웃이 있네.[關塞浮遊夢有隣]”로 되어 있다.
[주D-005]영위 : 정영위(丁令威)를 말한다. 정영위는 요동 사람으로, 신선이 된 뒤 학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성곽은 의구하나 인물은 아니로다.”라는 시를 지었다.
[주D-006]비록 곽자의(郭子儀)와……주겠는가 : 이 말은 《사조문견록(四朝聞見錄)》 악후추봉(岳侯追封)에 나오는 말이다. 곽자의는 당 나라 때의 명장이고, 이임보는 당 나라 때의 간신이다. 언월은 이임보의 당호(堂號)로, 후대에는 권신(權臣)이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를 죽이는 장소의 의미로 쓰였다.

 

 

 

 

명종조 고사본말(明宗朝故事本末)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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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종조 고사본말(明宗朝故事本末)
명종조의 유일(遺逸)

 


임자년(1552)에, 8도에 명하여 유일(재야한 어진 선비)을 천거하게 하니, 성수침(成守琛)ㆍ이희안(李希顔)ㆍ조식(曹植)ㆍ성제원(成悌元)ㆍ조욱(趙昱)은 행실이 뛰어났으므로 6품에 곧장 등용시켰다가 모두 이내 현감을 임명하였다. 수침은 대궐에 와서 사은하고 예산 현감을 주었으나 부임하지 않으니, 조정에서 수침이 노모가 있어 멀리 떠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적성(積城)으로 옮겨 주었으나 또한 가지 않았다.희안은 고령(高靈) 현감으로 가고, 조식은 벼슬을 주어도 가지 않다가 단성(丹城) 현감으로 임명하니 소를 올려 곧은 말을 하고는 부임하지 아니하고, 제원은 보은에 가서 치적이 있었으며, 조욱은 장수에 간 지 얼마 안 되어 을묘왜변을 만나자 버리고 돌아갔다. 《후청쇄어》
○ 말년 병인에 이조에 명하여 육조(六條 지(知)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를 구비한 사람을 가리게 하니, 그 명목은 ‘경전에 밝고 행실이 닦인 것’이었다.
○ 이때에 판서 민기(閔箕)가 아뢰기를 “육조를 구비한다 함은 명칭이 과중하니, 다만 경전에 밝고 행실이 닦였다는 것으로 고쳐서 명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여섯 사람이 천거되니, 이항(李恒)은 태인(泰仁)에 살고 성운(成運)은 보은에, 전 참봉 임훈(林薰)은 산음(山陰)에, 진사 김범(金範)은 상주에, 생원 한수(韓脩)와 참봉 남언경(南彦經)은 서울에 살았는데 글을 내려 부르고, 병으로 못 오는 이는 의원을 보내고 약을 주어 융숭한 뜻을 보였다. 전후하여 오는 이는 곧 불러보고 모두 6품 벼슬을 임명하였다.전에 임자년에 불렀던 유일로 이때(병인년)까지 살아있는 이는 오직 조식 뿐이므로 의논들이, “산림에 있는 어진 이는 조식 같은 이가 없으니, 이번 6명과 함께 불러오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모두 역말을 타고 오게 하여 사정전에 입대시키고 임금이 백성 다스리는 도리를 묻기를, 그 문목(問目)을 두 벌을 써서 하나는 임금의 책상에 두고 한 벌은 부름받은 이에게 주어 묻는 데 따라 대답하게 하였다. 《동각잡기》ㆍ《후청쇄어》
이준경이 차자를 올리니 그 대강은, “지금 사람을 취하는데 명목이 과중하니 반드시 육덕(六德 지ㆍ인ㆍ성ㆍ의ㆍ충ㆍ화)을 구비한 사람으로 기준을 삼으면 성인의 경지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들기가 어려울 것이요, 또한 착한 이를 취하는데 일정한 한계가 없어야 한다는 옛 말씀의 뜻에도 어긋날까 합니다. 비록 백이(伯夷)ㆍ유하혜(柳下惠) 같은 성인보다 한 등급 아래인 사람도 그 덕이 완전히 구비되지 못하고 치우친 데가 있었는데, 하물며 후세의 선비가 어떻게 이 완전한 덕을 갖추겠습니까.예전에 좌웅(左雄)이 하나를 듣고 열을 아는 것으로 표준삼아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치우친 것이라 하였고, 주공(周公)은 한 사람이 다 갖출 것을 바라지 말라는 뜻으로 노(魯) 나라 때에 훈계하였으니, 옛사람의 선비를 뽑던 법을 대체로 알 수 있습니다. 예조에서 아뢴 대로 그 명칭을 고치도록 하소서.” 하였다. 《동고집》
○ 육조를 구비하였다는 사람들이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오는 날에 임금이 삼제학(三提學 대제학ㆍ부제학ㆍ직제학)을 불러 책문으로 시험할 계획을 세워 과거 보이듯이 하려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어질다고 해서 불렀으니, 이렇게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여, 불러보고 말로만 논란하였으니 그 어찰 문목을 보면 전시에서 선비에게 책문하는 체제와 비슷하였다. 《후청쇄어》
○ 임금이 인심ㆍ도심에 관한 학설을 남언경과 한수에게 물었으나 대답하지 못하였다. 《괘일록》
○ 성운이 사직하고 오지 않으므로 여러 번 명을 내렸더니, 최후에 서울에 와 차자만 올리고 사은하지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
○ 전지를 내려 육조가 구비된 이를 구하니, 임금의 뜻은 처음에 왕손의 사부를 삼으려 함이었다. 국조 전례에 다만 왕자사부만 있고 왕손에는 사부가 없었던 것인데,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은 뒤에 임금의 조카인 선조에게 뜻을 두고 특별히 왕손사부를 설치하려 함이었다. 천거된 여섯 사람이 모두 왕손을 가르치기에 맞지 않으므로 왕자사부는 또 다른 사람을 시켰다. 《후청쇄어》

성수침(成守琛)


성수침은, 자는 중옥(仲玉)이며, 호는 청송(聽松)이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이다. 계축년에 나서 신축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을 제수하고, 임자년에 주부를 제수하였으나 매번 나아가지 않고 파평(坡平) 산중에 은거하다가 갑자년에 죽으니, 나이 72세였다. 집의를 증직하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공이 나면서부터 비범하였는데, 어려서 장난을 즐기지 않아 어른과 같았고,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운 아이라 불리었다.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을 죽만 마시고 제수를 친히 장만하였으며 새벽에 일어나서 산소를 쓸고 향을 태우며 절하기를 혹독한 추위와 더위에도 폐하지 않았다.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일찍이 조광조(趙光祖) 문하에 출입하여 모두 명망이 있었으니, 식자들이 영특함은 아우가 낫고, 돈후하고 화하기는 모두 공을 칭찬하였다. 《월정별집(月汀別集)》ㆍ《명신록》
○ 중종 기묘년 당시에 선비들의 명성이 너무 성하므로 공이 근심을 하고, 또 친상을 당한 뒤로 몸이 쇠약하여 세상에 나아가 활동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깨달아 마침내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며 과거 준비도 아니하였다. 집이 북악산 기슭에 있었는데 송림 속에 서당 두어 칸을 지어 ‘청송(聽松)’이라 이름하고 홀로 그 가운데에 거처하면서 학문으로 낙을 삼았다.
○ 태학의 선비들이 공의 거상한 효행을 들어 조정에 아뢰려 하니, 공의 친구 상진이 말리기를, “성수침 형제는 학문에 힘쓰는 선비라 장차 대성할 것이 기대되는데, 한 가지의 착함을 들어 일찍 이름이 세상에 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신축년에 조정에서 유일을 뽑아 쓰려 하니, 김안국(金安國)이 장차 공을 천거하려 하여 홍봉세(洪奉世)에게 묻기를, “자네는 성군의 절친한 친구이니 이 사람의 경지를 논할 수 있겠다.” 하니, 봉세가 말하기를, “자질이 높고 학문이 성취되었으니, ‘죽으므로 도를 잘 지킨다.’는 옛말은 이 사람이 해당할 것이다.” 하였더니, 안국이, “이에 그칠뿐이가.” 하였으니, 그 신망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안국이 비록 실지로 천거하지는 않았으나 조정에서 후릉(厚陵) 참봉을 제수하였다.
○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사은만 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혹 물으면 말하기를, “나는 대대로 벼슬한 신하이니 왕명을 받고 태연히 있을 수는 없지만, 병으로 능히 벼슬을 살지 못할 것만은 이미 결정되었다.” 하였다. 경신년에 특명으로 사지(司紙)를 제수하니, 영상 상진이 편지로 나올 것을 힘써 권하였는데, 공이 답하기를, “예전에 문립(文立)이 정경(程瓊)을 천거하지 않았음은 정경의 천성이 평탄하지 않고 늙어서 다시 세상에 뜻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니, 공은 나를 아는 이가 아닌가.” 하고 마침내 나아가지 않았다.그가 죽으니 원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림이 비었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전 현감 성수침은 병으로 사절하고 벼슬하지 않고 문을 닫고 옛 도를 힘써 행하여 검약하게 몸을 마쳤으니, 참으로 한 나라의 착한 선비요 당대의 일민입니다. 바라건대 그 상장(喪葬)에 특전을 베푸시어 성스러운 조정에서 어진 이를 높이고 노인을 존경하는 뜻을 밝히소서.” 하였다. 임금이 즐거이 좇아서 곽(槨) 한 벌을 주고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쌀과 조를 부의하였으며, 또 사헌부 집의(執義)를 증직하였다. 〈행장〉 《동각잡기》
○ 공이 파주 우계(牛溪)에 집을 정하고, 그 서실을 ‘죽우(竹雨)’라 이름 지었으며, 집 가에 뽕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고 누에를 치지 않으니, 혹 그 까닭을 물으면, “내가 그 아래에서 거닐 적에 푸른 잎은 그늘을 지우고 맑은 바람이 솔솔 불어 오니 이만하면 족하다.” 하였다. 〈행장〉 《해동잡록》
○ 천품이 매우 높아 중후하고 충신하며 키가 크고 골격이 빼어나서 형상이 매우 훌륭하고, 기뻐하고 성냄을 함부로 나타내지 않고, 때에 맞게 말하고 웃으니, 바라보면 엄연히 그 덕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본래 뜻이 담박하여 세속 밖에 멀리 뛰어나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명리를 초개만도 못하게 여겼고, 그 학문은 자신을 반성하여 몸을 닦는 데 힘을 써서 성(誠)으로 주장을 삼고, 일찍이 사람들에게 가벼이 말하지 않았다. 《율곡집》
○ 공이 일찍이 배우는 이에게 말하기를, “도는 큰 길과 같고 성현의 가르침은 해와 별처럼 밝아서 알기에 어렵지 않으나, 요는 힘써 행하여 그 앎을 채우는 데 있으니 말로만 하는 학문은 전혀 일을 이루지 못한다.” 하였다.
○ 그 필법은 아름다움을 구하지 않고 오직 매우 예스럽고 노색창연함을 주로 하며, 득의할 때는 묘하기가 하늘이 빚어낸 것 같았으니, 이는 비록 말단적인 유희이나 그 풍격이 세속에 뛰어남을 짐작하게 한다. 어떤 사람이 그 선조의 비문 글씨를 청하니, 그 글은 이계전(李季甸)이 지은 것이었다. 공이 한참 보다가 말하기를, “자네가 이계전이 한 일을 아는가.” 하니,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공이, “남추강(南秋江)이 지은 〈허후전(許詡傳)〉에 이 사람 일이 적혀 있다.” 하고 다시 말하지 않으니, 그 사람이 그 뜻을 깨닫고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하였다. 〈행장〉
○ 성운(成運)이 속리산 아래에 살며 초당을 짓다가 끝을 못냈더니, 성제원(成悌元)이 보은 현감으로 있으면서 관청의 목수를 보내어 그 일을 마치니, 공이 이를 듣고 사람에게 말하기를, “현감이 관청의 목수를 시켜 사가의 일을 하게 하고, 사가에서도 태연히 이를 받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였다. 그 사람이 주회암(朱晦庵 주희(朱熹)의 호)이 정사를 지을 때에 관청의 도움을 거절한 일을 말하니, 공이, “반드시 그런 온당치 않은 점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옛날 주회암이 정사를 지으려는데 안무사가 이를 듣고 관의 힘으로 세우려 하니, 회암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내가 차라리 정사를 세우지 않겠다.” 하였으니, 공의 이 말이 이 일과 정히 합하나 안무사는 지금의 관찰사이니, 한 도의 주인으로서 한 도의 힘을 움직이어 한 정사를 지음은 참으로 온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수령은 규찰을 맡은 관찰사에 비할 것이 아니니, 그 남은 힘으로 초당 하나 짓는데 도왔다고 의(義)에 해될 것이 무엇이리오. 그러나 공이 의를 편안히 하여 비록 일호의 주고 받는 것이라도 구차한 근심이 있을까 염려하였으니, 이것이 곧 성현이 조심조심하여 사욕을 극복하고 덕을 온전히 하는 일이다. 참으로 보통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니, 후학은 마땅히 공경하여 지켜서 잃지 말아야겠다. 《전언왕행록》
○ 공이 스스로 찬을 짓기를, “그 모습이 말랐으나 그 모양은 또한 옛스럽다. 나이 40세에 아직도 한 포의로다. 처음에 먹은 마음 변하지 않으니, 시종 어김이 없네.” 하였다.
○ 성운이 일세의 인물을 논하면서 청송을 제일이라 하였다. 〈대곡행장(大谷行狀)〉

이희안(李希顔)


이희안은, 자는 우옹(愚翁)이며, 본관은 강양(江陽) 합천(陜川) 이요, 동중추 윤검(允儉)의 아들이다. 유일로 등용되어 전옥서 참봉(典獄署參奉)ㆍ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를 거쳐 벼슬이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에 이르렀다. 기미년에 죽으니 나이 56세였다.
○ 공이 조식(曹植)으로 더불어 지기가 되어 내외를 모두 통하였다. 두 사람이 다 임자년 천거된 유일로, 조식은 여러 번 불러도 응하지 않고 공은 전후로 세 번 벼슬을 하였는데, 조식이 시를 지어 주기를,

산해정(山海亭) 가운데서 꿈을 몇 번이나 꾸었나 / 山海亭中夢幾回
황강(黃江)의 늙은이 머리에 눈이 가득하구나 / 黃江老漢雪盈腮
반생에 세 번 서울에 갔으나 / 半生三度朝天去
군왕의 면목 보지도 못하고 왔구나 / 不見君王面目來

하였으니, 산해는 조식의 정자 이름이요, 황강은 공을 가리키는 것(공이 사는 초계(草溪)에 황강이 있다.)이다. 《후청쇄어》
○ 고령 현감(高靈縣監)이 되었는데 감사 정언각은 사특한 사람이어서 공의 어진 것을 질투하여 매우 위세를 부림으로 공이 벼슬을 버리고 갔더니, 언각이 아뢰어, 치죄할 것을 계청하였다. 호조 판서 조사수(趙士秀) 또한 경연에서 아뢰기를, “수령이 제대로 고을을 다스리지 못하여 국고를 탕갈하고 어찌할 계책이 없으면 곧 벼슬을 버리고 가니, 죄가 대단히 큽니다. 지금 흉년에 백성이 곤궁한데 중앙이나 지방이 다 법을 무시하고 있으니 언각이 청한 대로 이희안을 치죄하소서.” 하였다.장령 유중영(柳仲郢)이 아뢰기를, “모든 탐욕스럽고 백성을 학대하는 수령은 반드시 벼슬을 버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니, 능히 벼슬을 버리는 이는 반드시 탐욕하고 백성을 학대하지는 않습니다. 또 조정에서 선비를 대우함에 있어 마땅히 예절을 숭상하여 염치를 기를 것이요 속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희안이 유일로 등용되었다가 한번 벼슬을 버렸다 하여 중한 벌로 다스리면 조정에서 선비 대우하는 체면을 손상시킬까 염려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장령의 말이 옳으나 판서의 말은 시국을 수습하는 데 적절하니 좇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공이 이 때문에 마침내 폐고되니, 사림에서 애석해 하였다. 《서애집》
○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며 착한 일에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사물에 부지런한 마음은 비할 데가 없었다. 두라면 두는 것은 유하혜(柳下惠) 같고, 통하고 슬기로움은 진동보(陳同父 진량(陳亮)의 자) 같으며, 도학을 보호하는 뜻이 있고, 도를 바라보고도 보지 못한 듯이 여긴 자이다. 재주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겸하여 무예를 닦는 사람 중에 뛰어났으나 끝내 세상에 쓰여지지 못하였다. 조남명(曹南冥)이 지은 묘비
○ 공이 일찍이 조식으로 더불어 두류산에 놀러가서 동쪽 고개에 오르는데 삼가식현(三呵息峴)이라는 고개가 있었다. 공이 홀로 채찍을 흔들며 먼저 올라서 말을 제일 높은 봉에 세우고 말에서 내려 바위에 기대어 부채를 흔드니, 여러 사람은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데 사람과 말이 땀이 비 오듯 하면서 한참만에 당도하였다. 조식이 면전에서 공을 책하기를, “자네는 말의 힘을 믿고 앞으로 나갈 줄만 알지 멈출 줄을 모르는구나. 후일에 바른 일 하는데 능히 남의 앞에 서게 되면 좋지 않겠는가.” 하니, 공이 사과하기를, “내가 벌써 자네의 책망이 있을 것을 짐작하였네. 내가 과연 잘못했네.” 하였다.

조식(曹植)


조식은, 자는 건중(楗中)이며, 호는 남명(南冥)이요, 본관은 창녕이다. 임자년의 유일로 선조 때 여러 번 불렀으나 매번 나가지 않았다. 벼슬이 전첨(典籤)에 그쳤으며, 임신년 5월에 죽었다. 대사간을 증직하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공은 천성이 개결하여 젊어서 과거 준비를 하였으나 즐기는 바가 아니었다. 하루는 성수침을 백악봉 아래로 찾아갔다가 그 세상 일을 끊은 것을 보고 마음에 즐겨하여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하지 않고 지리산 아래에 살았다. 방 안에 단정히 앉아서 졸음이 오면 칼을 어루만지며 자지 않았다. 칼 머리에 명(銘)이 있는데, “안으로 밝은 것은 경이요, 밖으로 끊는 것은 의이다.” 하였다.한가하게 거처하기를 오래하자 깨끗하게 욕심이 없어져 절벽이 우뚝 솟은 기상이 있었으며 주고 받는 것을 구차히 않고 허여함이 적으며, 남의 착함을 들으면 좋아하고 남의 악함을 들으면 미워하여 고을 사람의 착하지 않은 자는 자기를 더럽힐 것같이 보므로 고을 사람이 감히 청탁을 하지 못하였다. 《석담일기》
○ 공의 기품이 높고 지조가 굳어서 유일로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다가, 한번은 서울에 와서 편전에 입대하여 나라 다스리고 학문하는 방법을 극진하게 아뢰니 임금이 칭찬하였다. 뒤에 두류산 백운봉에 들어가서 한 집을 지어 ‘산천재(山天齋)’ 라 이름하고, 드디어 깊이 숨어서 일생을 마쳤다. 〈유사(遺事)〉
○ 임자년에 두 번째 단성 현감(丹城縣監)으로 부르니, 이때는 권간(權奸 윤원형(尹元衡)이 나라 일을 맡아서 문정왕후를 그릇 인도하여 사림이 기운을 잃었을 때라, 비록 공론이라 칭탁하고 유일을 천거하였으나 다만 허식이므로 공이 벼슬에 뜻이 없어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시국의 폐단을 아뢰기를, “정숙하신 대비께서는 다만 깊은 궁중의 한 과부일 뿐이며, 어린 전하께서는 선왕의 외로운 아들에 지나지 않으시니, 백천 가지 재변과 억만의 인심을 어떻게 감당할 것입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음악이 슬프고 옷이 희니,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습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대비에게 욕이 미쳤다 하였다.이때에 상진(尙震)이 좌상이었는데, 이제신(李濟臣)을 시켜 《송사(宋史)》 영종기(英宗紀)를 빼내어 구양수(歐陽脩)가 말한, 자전은 깊은 궁궐의 한 부인이라는 말을 내놓고 변명하기를, “조식이, 옛사람이 임금에게 고한 말을 인용하여 국가의 위태로운 형세를 지극히 말한 것이요, 거만한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 또한 일사(逸士)로 대우하여 결국 죄를 주지 않았다. 《석담일기》ㆍ《후청쇄어》

이황(李滉)이 공의 상소를 보고 사람에게 말하기를, “무릇 상소는 직언을 하여 회피하지 않음을 귀하게 여기나, 모름지기 곡진하고 부드럽게 하여 뜻은 곧으면서 말은 순하게 하여 과격하고 불공한 병통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아래로 신하의 예를 잃지 않고 위로 임금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남명의 상소는 참으로 금세에 얻기 어려운 바이나 말이 지나쳐서 비방하는 데 가까우니 마땅히 임금께서 보시고 노하겠다.” 하였다.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
○ 성수침이 또한 공과 서로 뜻이 같아 친하였다. 이제신이 두 선생께서 서로 허여하고 중히 여기는 뜻을 성혼에게 물으니 혼이 말하기를, “가친이 남명의 단성소(丹城疏)를 보고는 예봉이 너무 드러났다 하고, 말씀하시기를, ‘오랫동안 건중과 떨어져서 그가 크게 진보하여 이미 혼연일체가 되었으리라 여겼더니, 과연 이 말씨와 같다면 아직도 미진함이 있지 않는가.’ 하시었다.” 하였다.
○ 육조를 구비한 사람이라 하여 부름을 받고 입대할 때에 여러 사람은 모두 간략하게 아뢰었으나, 공이 홀로 아뢰기를, “신이 아뢰고자 하는 것은 전하께서 물으신 이외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라.” 하니, 아뢰기를, “20년내로 민생이 날로 흩어져서 촌락이 점차 쇠망하여지니, 이는 신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인하여 임금과 신하 사이에 화평하지 않아서는 안 됨을 말하였다. 임금이 인하여 묻기를, “옛사람이 삼고초려(三顧草廬)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으려 하였음은 무슨 뜻인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공명(孔明)이 생각하기에 감당하지 못할까 하여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공명이 거의 50년을 경영하였으나 겨우 솟발[鼎足] 모양을 만들었고 한 나라를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그 재주를 알 만합니다.” 하였다. 이는 공이 여러 번 불러도 나오지 않으므로 임금이 삼고로 물은 것이고, 공의 대답은 또한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말을 한 것이다. 전첨(典籤)을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고 물러났다. 《후청쇄어》ㆍ《동각잡기》
○ 공은 이항(李恒)과 젊을 때 친구이다. 부름을 받았을 때에 한 곳에 모였는데, 공이 말끝마다 이항을 희롱하기를, “항지(恒之)는 큰 당적이야. 나는 자네의 큰 당에 연루되어 공초에 따라온 격이다.” 하니, 이는 선의의 농담이다. 《후청쇄어》ㆍ《동각잡기》
○ 선조 때에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상소하여 당시 의논의 잘잘못을 진술할 뿐이었다. 임종시에 그 제자에게 말하기를, “후세 사람이 나를 처사라 하면 가할 것이나, 만약 유자(儒者)로 지목한다면 실지가 아니다.” 하였다. 문인이 더 가르침을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경ㆍ의(敬義) 두 글자는 해와 달 같아서 하나라도 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그 첩이 들어가 영결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고 죽었다. 부고가 아뢰어지니 대간과 조신들이 시호를 주어 포장(襃獎)하는 뜻을 보이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전례가 없다고 윤허하지 않고, 부의만을 하사하였다. 그의 문인에 김우옹(金宇顒)ㆍ정인홍(鄭仁弘)ㆍ정구(鄭逑)가 가장 드러났다. 《석담일기》
삼가 상고하건대 공은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준엄하고 깨끗하니, 참으로 일대의 일민(逸民)이다. 다만 그 의논과 저술을 보면 학문에는 실로 본 것이 없고 상소한 글도 경세제민의 계책이 아니니, 비록 세상에 나와서 시행함이 있었더라도 그 능히 정치에 성공함은 기필할 수 없다. 문인 권중(權重)이 공을 ‘도학군자’라고까지 하였는데, 참으로 실지보다 지나치는 말이다.그러나 비록 근대에 처사라는 이들로서 시종 절개를 완전히 지켜서 천 길 절벽처럼 우뚝 서기를 공과 같이 한 이가 별로 없다. 술객(術客) 남사고(南師古)가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올해에 처사성(處士星)이 빛이 없다.” 하더니, 얼마 안 되어 공이 죽으니, 공은 시대에 응하여 태어난 비상한 선비라 할 만하다. 《석담일기》
○ 공이 일찍이 문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허다한 인재를 얻어서 허다한 일을 맡기고, 나는 물러나 앉고 싶으니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내 평생에 다만 하나의 좋은 점이 있으니, 죽더라도 구차히 남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사군자의 대절은 오직 출처를 분명히 하는 한 가지 일에 달렸을 뿐이다.” 하였다. 〈유사〉
○ 항상 쇠방울을 차고 정신을 깨우치며 방울을 ‘성성자(惺惺子)’라 이름하였다. 일찍이 이 방울을 문인에게 주며, “이 물건의 맑은 소리가 깨우침을 주니 사람들이 모두 차면 좋겠다. 내가 이 중한 보배를 주겠으니, 항상 허리에 차고 조금만 동작이 있어도 경계하고 꾸짖어서 매우 공경하고 두려워할 만하니, 이 방울에 죄를 얻지 말라.” 하였다. 제자가 묻기를, “옛사람이 옥을 차던 뜻이 아닙니까.” 하니, 공이, “이것의 뜻이 더 간절하니, 옥을 차는 것과 같은 데 그칠 뿐만이 아니다.” 하였다.
○ 사굴산(闍崛山) 명경대(明鏡臺)에 왕래하며 거처하기 여러 해였는데, 항상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새벽까지 글을 읽으니, 종일토록 고요히 한 소리도 없다가 때때로 손가락으로 책상 건드리는 작은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아직 글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 거처하는 서실에 모두 단청을 하였으니, 이는 밝고 깨끗함을 취해서였다. 문인이, “단청은 선비에게 합당한 것이 아니라.”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부귀한 기상이 있어서이니, 자네들의 빈곤하고 담박한 모양과는 같지 않다.” 하였다.
○ 가수정사(嘉樹精舍)를 짓고 그 당호를 ‘계복(鷄伏)’이라 하니, 함양함이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다는 뜻을 취함이었다.
○ 그 서실의 이름을 ‘뇌룡사(雷龍舍)’라 하니, 이는《장자》의 “송장처럼 가만히 있지만 용의 기상이 나타나고, 못처럼 잠잠하지만 우레소리가 난다.”는 말을 취함이었다. 그 곁에 쓰기를, “뇌성이 나면 깜깜하고 용이 보이면 깊다.” 하였다.
○ 산야에 물러나 있어도 능히 세상 일을 잊지 못해 하였으니, 매양 달이 밝으면 홀로 슬피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눈물을 흘리나 곁에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였다.
○ 일찍이 선비들과 함께 말을 하다가 당시 정치의 잘못과 민생의 곤궁한 데 말이 미치면 팔을 걷어붙이고 목이 메어 눈물까지 흘렸다.
○ 한 선비가 글 재주가 있으나 천성이 음험하였다. 공이 우연히 여럿이 모인 데서 보고 물러나와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 위인이 겉모양은 평탄한 것 같으나 속에 남을 해칠 마음을 품었으니, 만약 높은 지위에 올라 뜻대로 하면 어진 선비가 위태로우리라.” 하였다. 그 뒤에 과연 맞으니 사람들이 그 밝음을 탄복하였다. 〈묘지(墓誌)〉
○ 공이 하종악(河宗嶽)의 아내(진주에 사는 과부)가 음행하였다는 일로 이정(李楨) 귀암(龜巖) 과 의견이 같지 않아서 절교까지 하였는데, 노수신(盧守愼)이 듣고 말하기를, “남명이 평생에 벼슬을 좋아하지 않고 세상 밖에 높이 뛰어났는데, 한 부인의 음행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친구와 절교까지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니, 공이 듣고, “소재(蘇齋)가 전하는 말만 듣고 깊이 나의 본뜻을 알지 못하기에 이런 말을 한다.” 하였다. 《월정만필》 ○ 하(河)는 공의 처남이고 이(李)는 하의 매부이니 공의 동서가 된다.
○ 공이 절의를 숭상하여 깊이 숨어 벼슬하지 않고, 글을 짓는 것도 기걸하고 범상하지 아니하니, 이를테면

청컨대 천석종(千石鐘)을 보시오 / 請看千石鐘
크게 때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 / 非大叩無聲
만고의 천왕봉(天王峯 지리산 최상봉)은 / 萬古天王峯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지 않는다 / 天鳴山不鳴

와 같은 시는, 시로서 호방하고 웅장할 뿐만 아니라, 또한 남명의 자부(自負)가 얕지 않다. 다만 괴상한 것은 한 대를 전하여 제자 정인홍(鄭仁弘)이 많은 살륙을 빚어내어서 백 년의 윤기(倫紀)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나 귀산(龜山)의 육상(陸常)에 대해서와 어떠한가. 《상촌집》

성제원(成悌元) 병인년에 나서 재취하였으나 후사가 없다.


성제원은, 자는 자경(子敬)이며, 호는 동주소선(東洲笑仙)이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니, 대제학 석용(石瑢)의 후손이다. 유일로 천거되어 보은 현감(報恩縣監)이 되고 기미년에 죽으니 나이 54세였다.
○ 나이 열 대여섯에 성인의 학문에 뜻을 두고 유우(柳藕)가 김굉필(金宏弼)의 성리학을 받았다는 것을 듣고, 《대학》을 가지고 가서 배움을 청하자, 유우가 나이 적음을 의심하여 거절하니, 제원이 열 번이나 가서 청하여 비로소 만나 보고, 드디어 마음을 침잠하여 공부하였다.
○ 젊어서 부친을 잃었는데, 힘써 배웠으며, 드높고 꿋꿋하여 매우 뛰어났다. 글을 지음에 넘쳐 흐르는 물 같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의술ㆍ복서ㆍ지리의 말단에 대해서도 섭렵하지 않은 게 없었다. 《전언왕행록》
○ 천성이 호걸스럽고 용기있게 나가고 우뚝하였는데, 주광(酒狂)으로 행세하니, 사람들이 그 포부를 알 수 없었다. 《전언왕행록》
○ 초가집에서 죽을 먹어도 고요히 티끌 속세를 벗어난 기상이 있었다.
○ 공이 일찍이 초정(草亭)에 거하는데 이지함(李之菡)이 찾아와서 함께 신한림(申翰林)의 준미정(遵美亭)에 갔다. 신이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마침 노래를 잘 부르는 한 남자가 있어 노래를 부르게 하자 한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이 갑자기 그치게 하고 그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좌중이 그 까닭을 몰랐는데 공이 말하기를, “소리가 매우 슬프니 상사가 있을 듯하므로 함께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더니, 얼마 후에 들으니 그 사람의 어머니가 먼 곳에 있는데 그날 저녁에 부고가 왔다 하였다. 《노서일기(魯西日記)》
○ 공이 일찍이 명산에 놀다가 서원(西原 청주(淸州)의 옛 이름)을 지나는데 목사가 기생 춘절(春節)을 종행하게 하였다. 공이 이와 함께 원근을 두루 놀아 오랜 시일이 지나고 시종 한 자리에 자면서도 범하지 않았다. 공이 산에 노닐 때에 산수가 맑고 빼어나서 마음에 맞는 곳에 이르면 곧 그림으로 모사하고, 또 시를 지어 화폭 끝에 썼는데, 산에서 내려올 때에는 수십 폭이 되었다. 공이 그 기생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를 범하지 않았어도 사람들은 반드시 나와 관계가 있다 하고 너를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생계는 다만 이 종이에 달렸으니 이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이면 나를 잊지 않는 이가 너를 많이 도와 주리라.” 하였다.왜란 후 경자년에 감찰사 성아무개가 청주 목사와 술자리에서 옛이야기를 하다가, 옆의 사람이 그 기생이 아직도 살았다 하므로 목사가 불렀더니, 나이 이미 팔십여 세였다. 감찰이 바로 공의 형의 손자임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 동주(東洲)의 손자를 볼 줄 몰랐다.” 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비록 당시에 관계는 없었으나 어찌 차마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종신토록 절개를 지키고 시화폭을 첩으로 만들어 이 고을을 지나는 이름난 이에게 보이면 후히 주지 않는 이가 없어 이로써 생활을 하였더니, 난리 중에 그 화첩을 잃었다 하였다. 《노서일기》
○ 성운이 속리산에 숨어 고요하고 담담하게 살며 거문고와 글로 즐겼다. 조식이 일찍이 찾아왔는데, 공이 마침 자리에 있었다. 조식과 공은 비록 초면이나 친하기가 옛 친구 같았으며, 서경덕(徐敬德)과 이지함(李之菡)이 또한 동행하여 와서 함께 수일을 즐겼다. 조식이 떠나려 하자 공이 미리 전별하는 자리를 중도에 베풀고 홀로 따라가 전송하며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기를, “자네나 내가 다 중년으로 각기 다른 곳에 있으니 다시 보기를 어찌 기약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준경이 이를 듣고 탄식하기를, “당시에 응당 덕성(德星)이 하늘에서 움직였으리라.” 하였다. 얼마 후에 공이 죽었다. 《전언왕행록》 〈대곡행장〉
○ 공이 일찍이 한 중과 보름 동안 잠 안 자는 내기를 하였는데, 중은 열 사흘째 되어서 쓰러져서 정신없이 며칠을 자고, 공은 열 다섯 밤을 그대로 새우고 난 뒤에도 잠자고 먹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다. 《전언왕행록》

조욱(趙昱)


조욱은, 자는 경양(景陽)이며, 호는 용문(龍門), 또는 우암(愚庵)이다. 19세에 생원ㆍ진사 양장에 합격하고 임자년에 유일로 천거받아 벼슬이 장수 현감(長水縣監)에 이르렀다.
○ 어려서 뛰어난 천품을 가지고 글을 지으면 번번이 사람을 놀래었다. 나이 겨우 십여 세에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문사가 많이 모여 그에게 시를 짓게 하니, 즉시,

청산은 면면히 섰고 / 靑山面面立
한수는 유유히 흐르네 / 漢水悠悠下
높이 솟고 넘쳐 흐르는 산수 사이에 / 峨洋山水間
그 누가 음을 아는 자인가 / 誰是知音者

하니, 온 좌중이 경탄하였다.
○ 조광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여러 제자 중에 도를 구하는데 독실하기는 조욱만한 이가 없다.” 하더니,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시를 지어 슬퍼하기를,

비와 눈이 섞여 분분하니 어둔 안개가 엉기도다 / 雨雪交紛兮陰霧凝
평평한 길이 험해지니 산이 높이 솟았구나 / 平路險隘兮山崚嶒
하토(下土)는 아득하여 해를 볼 수 없는데 / 下土茫茫兮不見日
봉황새 높이 날아 어디에 의지할까 / 鳳鳥飄飄兮焉可憑
쑥덤불 가시숲인데 만리나 날고 싶다 / 蓬叢棘林兮萬里思飛騰

하니, 이로부터 은거할 뜻이 있었다.
○ 기묘사화에 조광조의 문인들이 옥에 갇혔는데, 공은 나이가 가장 적음으로 해서 화를 면하고, 형 성(晟) 호는 양심당(養心堂) 과 함께 삭녕(朔寧)에 집을 짓고 의리를 강마하다가 뒤에 용문산(龍門山)에 와서 사니, 그 동리를 돈촌(豚村)이라 하였다.
○ 공이 일찍이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을 지나는데 여러 선비가 심원록(尋院錄)에 제명(題名)하기를 청하니, 다만 한 절구를 쓰기를,

나그네 길에 서성거리고 오래 돌아가지 못하니 / 客路棲棲久未還
하늘이 나를 시켜 해서(海西 황해도의 별칭)의 산을 다 보게 하는구나 / 天敎看盡海西山
성명을 서원에 남길 필요가 없으니 / 不須姓字留書院
미쳤다는 이름이 이미 세간에 가득하네 / 嬴得狂名滿世間

하였더니, 여러 선비가 누구인가 몰라 의심하다가 뒤에 비로소 듣고 공임을 알았다.

이항(李恒)


이항은, 자는 항지(恒之)이며, 호는 일재(一齋)요,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기미년에 출생하다. 병인년에 사축(司畜)을 제수하여 역말을 타고 입대하였으며, 임천(林川) 군수가 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직하고 가니, 선조께서 교서를 내려 장령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벼슬이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그쳤으며 《석담일기》에는, “계유년에 3품직을 제수하니 순서를 뛰어서 발탁되었다.” 하였다. 태인(泰仁)에서 죽으니 나이 78세였다.
○ 공이 서울에서 자라다가 태인에 물러가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이 많은데 만약 여러 글을 널리 보려면 정력이 전일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대학》만 가지고 읽으며 생각하여 일평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 공은 자질이 강하며 굳세고, 기상이 웅위하며 호방하여 범상하지 않고, 용력이 뛰어나서 어려서부터 장난할 때에 동리 아이들이 겁내어 굴복하였다. 자라서 놀기를 좋아하며 협기가 있어 만 리를 달리려는 뜻이 있으며, 씨름 활쏘기 말타기가 일시의 으뜸이어서 억센 적과 주인을 배반한 종이 있으면 반드시 가서 제압하였다. 일찍이 무과 준비를 하니, 남치욱(南致勖)ㆍ치근(致勤)ㆍ민응서(閔應瑞) 같은 이도 선생의 지휘를 따랐으며, 사람들이 공을 비록 미치광이로 지목하였지만 또한 그 비상한 사람임을 아는 이가 있었다.나이 이십 팔구 세에 판서인 백부가 불러 꾸짖으니, 깨달아 반성하여 곧 그 놀던 친구를 사절해 보냈다. 마침내 《대학》을 읽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박송당(朴松堂) 영(英)을 좇아 오래 스승으로 모셨으며, 외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하여 일찍이 말 위에서 책을 들고 생각에 잠기다가 갑자기 관원 행차의 벽제(辟除)를 범하여 종은 붙들리고 말만 가는데도 끝내 공은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독실하고 전심함이 이와 같은 게 많았다. 송인수(宋麟壽)가 전라 감사로 갔을 때, 제일 먼저 공을 찾아 도를 강론하고 말하기를, “실천하는 공부는 장횡거(張橫渠 송 나라 도학자로서 예법의 실천으로 이름이 있었다.)보다 못할 게 없다.” 하였다.
○ 공이 백의로 임천 군수가 되니, 조식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이(李) 조대(措大 변변치 못한 선비)가 하루아침에 군수가 되었으니, 어찌 화의 빌미가 되지 않을지 보장하겠는가.” 하였다. 《석담일기》

성운(成運)


성운은, 자는 건숙(健叔)이며, 호는 대곡(大谷)이요, 본관은 창녕이다. 부원군 여완(汝完)의 후손이다. 정사년에 출생하다. 벼슬이 집의ㆍ사섬시 정(司贍寺正)에 그치고, 기묘년에 죽으니 나이 85세였다.
○ 자질이 단정하고 지기가 호탕하였으며, 그 학문은 오로지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데 힘썼으므로 그 말이 법이 있고 그 행동이 떳떳함이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세상에 수용되지 못하였다.
○ 신묘년에 생원ㆍ진사에 합격하였는데 기묘사화가 있은 뒤이므로 유학(儒學)이 땅에 떨어졌다. 공이 시를 지어 슬퍼하고 드디어 속리산으로 가 일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보은(報恩)에서 장가들고 거기에 살았다. 보은의 종곡(鍾谷)에 우거하여 산수를 즐기며 문을 닫고 도를 구하여 조예가 깊었다. 임인년에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공은 나면서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일찍이 세속의 그물을 벗어났다. 그 형 우(禹)가 을사사화에 비명으로 죽으니, 이로부터 더욱 세상에 뜻이 없고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시가 그 인품과 같아서 한가롭고 아담하여 서호처사(西胡處士)의 운치가 있으니, 그 시의 아름다운 구절은, 이를테면

봄옷은 몸에 맞추어 두 소매가 짧고 / 春服稱身雙袖短
옛 거문고가 손에 편하니 일곱 줄이 길구나 / 古琴稱手七絃長
십 년 동안 산중의 약을 다 맛보았으니 / 十年嘗盡山中藥
손이 오면 때로 입에 향기를 맡네 / 客到時聞口齒香

와, 조식을 송별하는 시에,

높은 기러기 홀로 바다 남쪽으로 날아가니 / 冥鴻獨向海南飛
정히 가을 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때로다 / 正値秋風木落時
땅에 가득한 낟알을 닭과 오리가 쪼는데 / 滿地稻梁鷄鶩啄
푸른 구름 하늘 가에 절로 기심(機心)을 잊었네 / 碧雲天末自忘機

와 같은 것이다. 《상촌집(象村集)》
○ 조식이 말하기를, “공이 몸 닦기를 옥과 같이 하여 사람이 무어라 말할 수 없다.” 하였다.
○ 공이 아들이 없으나 스스로 종손이 아니므로 양자를 세우지 않고, 처남 김천부(金天富)의 아들 가기(可幾)를 기르고 가르쳤으며, 또 중형이 을사년에 죽고 딸이 하나 있는데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가기의 아내를 삼고 후사를 부탁하니, 가기가 유언을 받들어 기년복을 입고 그 아들의 대까지 제사 지냈다. 〈대곡행장(大谷行狀)〉
○ 종곡(鍾谷)의 토지와 노비는 본래 자기 처가인 김씨 집에서 온 것이므로 처조카에게 도로 주어 형의 딸과 함께 살게 하였다.
○ 집에서 몇 리 떨어진 곳에 경치가 볼 만한 계곡이 있으므로 그 사이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한가한 때마다 소를 타고 가서 고요히 홀로 앉아 거문고 두어 곡을 타면서 스스로 즐길 뿐이요, 사람이 들으려 하면 타지 않았다. 《석담일기》
○ 본래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경치 보는 데에 취미를 붙여 시에 나타내고, 읊은 다음에는 술을 두서너 순배를 마시어 얼근하면 그치고, 즐겨 근심을 잊어 늙는 줄을 몰랐다. 〈묘지〉
○ 선조 무진년 6월에 처사 성운에게 쌀을 하사하고 또 매(鷹)를 주었으니, 임금이 공의 종시 벼슬을 사양하는 그 풍절(風節)을 높이 여겨 특별히 하사한 것이다. 《조야첨재》
○ 이황이 매양, “건숙의 맑게 숨은 풍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킨다.”고 칭도하였다. 공이 조식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조식은 드높고 뛰어났으며, 공은 순박하고 진실하며 화평함으로 조절하였다. 조식이 매번, “건숙은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같아서 내가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행장〉

한수(韓脩)


한수는, 자는 영숙(永叔)이며, 호는 석봉(石峯)이요,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유일로 천거되어 벼슬이 지평(持平)에 그쳤다. 선조 계유년에 3품직을 제수하고 갑술년에 지평으로 입시하여 임금이 학문의 요긴한 점을 묻는데 능히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웃었다. 이이(李珥)가 임금께 아뢰기를, “착한 사람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 학문과 행실을 겸비한 사람이 있고 행실은 깨끗하면서 학문이 부족한 사람이 있으니, 한수는 곧 행실은 깨끗하면서 학문이 부족한 자입니다. 한 마디 말이 뜻에 맞지 않는다고 착한 선비를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석담일기》

임훈(林薰)


임훈은, 자는 중성(仲成)이며, 호는 자이당(自怡堂)이요, 뒤에 고사옹(枯査翁)이라 고치고 사람들은 갈천 선생(葛川先生)이라 부른다. 경신년에 출생하다. 경자년에 생원에 입격하고, 병인년에 언양 현감을 제수하고 벼슬이 판결사에 이르렀으며, 갑신년에 죽으니 나이 85세였다.
○ 계축년에 홍문관의 천거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을 제수하니 도신(道臣 감사(監司))이 공 형제의 효행을 아뢰어 갑자년에 정문을 명하였다. 병인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역마를 타고 올라와 궁궐에 나아갔다. 임금이 불러 보고 정치하는 도리를 물으니, 공이 아뢰기를, “인군의 정치와 교화는 수신이 제일이니, 오로지 수신의 도에 힘을 써서 마지 않으면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는 도와 학문을 하는 방도는 다른 데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선조 초년에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는데 하직하는 날에 임금의 편전으로 불러 보고 하문하기를, “네가 학행이 있다함을 들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선왕조에 일찍이 한번 불리어 치도를 물으시기에 신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으소서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물음에도 감히 다른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제왕들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것을 말하지 않은 이가 없으나 뚜렷한 효과는 적으니, 그 병통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그 하나는 으레 유자의 말을 보통으로 여겨 더 살피지 않음이요, 그 하나는 스스로 노력하여 쉬지 않는 공부가 없어 마침내 해이하여지기 때문이오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자의 말을 상투적인 말로 알지 마시고 스스로 노력하여 쉬지 않는 공부를 더욱 하소서.” 하였다.
○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을 때에 선조가, “수령으로 맑은 덕이 있는 이를 가리라.” 명하니, 감사가 공을 천거하고, “공이 청렴결백하여 백성들이 그를 지목하기를 ‘얼음 병[氷壺]’이라 합니다.”는 말을 하였다.

남언경(南彦經)


남언경은, 자는 시보(時甫)이며, 호는 동강(東岡)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목사 치욱(致勖)의 아들이요, 무양공(武襄公) 치근(致勤)의 조카이다. 유일로 불리어 벼슬이 부윤(府尹)에 이르렀다.
○ 젊어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좇아 수업하고, 명종 병인년에 이조에서 경학에 밝고 행실이 닦인 사람으로 공과 한수(韓脩)를 천거하니, 임금이 명하여 포의를 입은 그대로 편전에 소대시켜 임금의 뜻에 맞아 참봉을 제수하고 6품에 올렸다. 얼마 뒤 지평 현감(砥平縣監)에 보임되었으나 병으로 돌아갔으며, 기축년에 전주 부윤으로 있다가 물러나 양근(楊根) 영천동(靈川洞)에 돌아와서 죽으니, 나이 67세였다.

김범(金範)


김범은, 자는 덕용(德容)이며, 호는 후계(后溪)요,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부제학 상직(尙直)의 5대 손이다. 임신년에 나서 중종 경자년에 진사의 장원에 올랐고, 유일로 천거되어 특별히 옥과 현감(玉果縣監)을 제수받아 관에서 죽었다.
○ 병인년에 이조에 명하여 6조를 구비한 선비를 가리게 하니, 그 명목은 경학에 밝고 행실이 닦인 자라는 것이다. 추천된 이가 여섯 사람인데 이항ㆍ성운ㆍ임훈ㆍ김범ㆍ한수ㆍ남언경이다. 김범이 조식과 함께 동시에 들어가 알현하였는데 임금이 정치하는 도리를 묻자, 대답하기를, “마음을 기르고 덕을 굳게 잡으며 학문을 강론하고 이치를 밝힘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됩니다.” 하였다. 《대동운옥(大東韻玉)》

정렴(鄭) 붙임 정작(鄭碏)


정렴은, 자는 사결(士潔)이며, 호는 북창(北窓)이요, 본관은 온양이다. 순붕(順朋)의 아들로서, 병인년에 나서 정유년에 진사에 오르고 벼슬이 포천 현감(抱川縣監)에 그쳤으며, 기유년에 죽었다. 나이 44세였다.
○ 공은 맑고 욕심이 적어서 한 점의 찌꺼기도 없으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서 한두 번 글을 읽으면 모두 외었으며, 자라서는 모든 데 통하지 않음이 없어 천문ㆍ지리ㆍ음악ㆍ의약ㆍ복서ㆍ산수ㆍ한어(漢語)를 배우지 않고도 잘하였다. 일찍이 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중국인과 통역 없이 말을 하니 모두 놀라며 말하기를, “천하의 기이한 재주이다.” 하였다. 또한 새와 짐승의 소리를 알아들어서 산속에 살 때에 능히 산 아래 사람이 하는 일을 알고 말하기를, “그 집에서 바야흐로 무슨 일을 한다.” 하여서, 뒤에 알아보니 과연 틀림이 없으니, 이는 그 학문이 선가(禪家) 진단(陳摶)의 유(類)에서 나온 듯하다. 《국조기사》
○ 일찍이 중국에 가니, 마침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이 왔는데 이 또한 이인(異人)이었다. 그가 본국에 있을 때에 역수(易數)로 미루어서 중국에 가면 진인(眞人)을 만날 것을 알고, 오는 길에 물어 찾으며 북경까지 와서 여러 나라 사신이 거처하는 곳을 두루 찾다가 공을 보고 깜짝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절을 하고, 그 행장 속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서,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중국에 들어가 진인을 만나리라.’ 고 쓴 것을 공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진인이라 함은 공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하며, 주역을 가르쳐 달라 청하니, 공이 곧 유구어로 가르쳤다.이에 여러 나라 사신들이 듣고 다투어 와서 공을 만났는데, 공이 각각 그 나라 말로 메아리처럼 대답하니 모두 놀라서, “천인(天人)이시다.” 하였다. 어떤 이가 공에게 묻기를, “세상에 새와 짐승의 소리를 알아듣는 이가 있는데, 다른 나라의 말소리는 곧 새와 짐승의 유이니, 그 말을 알아듣는 것은 혹 될 수 있겠으나 그 말을 함은 이상하지 않은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안 지가 이미 오래이다.” 하였다.공은 삼교(三敎 유교ㆍ불교ㆍ선교)를 관통하였으나 근본은 성학(聖學)으로 돌아와서 그 가르침은 오로지 효제에 힘을 썼으며, 《소학》과《근사록》으로 초학의 길잡이를 삼았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성인의 학문은 인륜을 중히 여기므로 오묘한 곳을 말하지 않았고, 선교나 불교는 오로지 마음을 거두고 성을 깨닫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므로 위로 천리를 통하는 곳은 많으나, 아래로 인사를 배우는 일은 전혀 없으니, 이것이 세 교가 다른 바이다. 《북창집(北窓集)》
○ 32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과거 공부에 힘쓰지 않았으며, 추천으로 장악원 주부 겸 의(醫)ㆍ상(象 천문(天文))ㆍ주(籌 산수(算數))의 삼학(三學) 교수를 제수받았고, 포천 현감을 지냈다. 을사사화에 아버지가 고변할 때에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크게 미움을 받았고, 또 그 아우가 해치려 하므로 이를 피하여 과천 청계산(淸溪山), 양주 괘라리(掛蘿里)에 많이 숨어 있었다. 항상 하인을 시켜 약을 지어 이른 아침에 다려 먹은 뒤에야 말을 하였고, 기유년에 죽으니 나이 44세였다. 《국조기사》
○ 공은 호걸스럽고 기개와 절조가 있었다.
○ 공이 천성이 고기를 즐기지 않고 술을 잘 마시어 두서너 말도 취하지 않았으며, 또 휘파람을 잘 불어 일찍이 금강산 절정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었더니, 소리가 바위 골짜기를 울리므로 중이 놀라 저[笛] 소리로 알았다가 뒤에 공의 휘파람인 것을 알았다. 《북창집》
○ 깊이 숨어 인적을 끊고 연단화후(鍊丹火候)의 법을 닦더니, 하루는 자기의 만가(挽歌)를 짓기를,

일생에 만 권 글을 다 읽고 / 一生讀罷萬卷書
하루에 천 잔 술을 다 마시며 / 一日飮盡千鍾酒
높이 복희(伏羲) 이상의 일을 말하고 / 高談伏羲以上事
세속의 이야기는 애당초 입에 내지도 않는다 / 俗說從來不掛口
안회(顔回)는 30세에 죽어도 아성(亞聖)이라 불렸는데 / 顔回三十稱亞聖
선생의 수명은 어찌 그리 길었는고 / 先生之壽何其久

하고, 마침내 앉아서 죽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나면서 능히 글을 할 줄 알았고, 또 대낮에 그림자가 없었다고 한다.” 하였다. 《북창집》
○ 공의 아우 작(碏)은, 자는 사경(士敬)이며, 호는 고옥(古玉)이요, 공보다 27년이 아래다. 정작도 이인(異人)으로 형을 좇아 수련하는 학문을 배워서 36년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술을 즐기며 시를 잘 지었으며, 또 의학에 깊어서 신통한 효험이 많았다. 나이 70세에 또한 미병(微病)으로 앉아서 죽었다. 《북창집》


 

[주D-001]삼고초려(三顧草廬) : 중국 삼국 시대에 촉(蜀) 나라의 유현덕(劉玄德)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은거하고 있는 초가집을 세 번이나 찾아가서 겨우 만나 군사(軍師)로 삼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2]솟발[鼎足] 모양 : 제갈공명이 유현덕의 촉 나라를 도와 중국을 조조(曹操)의 위(魏) 나라와 손권(孫權)의 오(吳) 나라와 함께 세 나라가 솟발처럼 대치하게 하였다.
[주D-003]성성자(惺惺子) : 성성은 혼미하지 않고 깨우쳐 있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방울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깨우쳐 준다는 것이다.
[주D-004]귀산(龜山) : 양귀산(楊龜山)은 정자(程子)의 문인으로 도학자인데, 그의 제자 육상(陸常)이 후일에 악한 일을 하였다.
[주D-005]그 누가 …… 자인가 : 옛날에 백아(伯牙)가 고산류수곡(高山流水曲)을 타니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듣고, “산은 높고 물은 넓게 출렁이며 흐르는구나.[山峨峨 水洋洋]” 하였으니, 참으로 지음(知音)하는 자였다.
[주D-006]서호처사(西胡處士) : 송(宋) 나라 임포(林逋)의 호로, 그는 서호(西湖)에서 처사로 살면서 매화와 학으로 벗을 삼았다.
[주D-007]진단(陳摶) : 중국 5대말의 도사(道士) 진도남(陳圖南)인데, 신선의 술법과 역리에 정통하였다.
[주D-008]아래로 …… 일 : 《논어》에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아래로 인사를 배워서 위로 천리를 통하다는 말이다.
[주D-009]연단화후(鍊丹火候)의 법 : 신선가(神仙家)의 수양법에 외단(外丹)ㆍ내단(內丹)의 법이 있는데, 외단은 금석물(金石物)로 장생불사하는 약을 만드는 것이다. 약은 불을 때서 만들므로 불 때는 시간을 정하는 것을 화후(火候)라 하고, 내단은 호흡도인(呼吸導引)의 법으로 체내의 단(丹)을 결성시키는 방법인데, 여기에도 그 시간이나 순서를 화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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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경(鄭君敬) 작(碏) 에게 보내다

 


시원한 가을 기운이 점점 생겨나는 요즘 기거(起居)가 한가롭고 여유가 있으신지요? 우러르고 그리워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언제나 한번 찾아가서 뵙고 싶으나 근래에 말을 잘못하여 관직을 사면하였으므로 감히 밖에 나가 사람들을 방문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마음속의 생각을 저버리니,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저는 요즘 비위(脾胃)가 냉해져서 먹은 음식이 내려가지 않으니, 이는 입에 맞는 음식이 없어서이며 혹은 소화가 되지 않는 음식물을 먹은 데서 비롯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깊이 헤아리시어 이에 대한 치료약을 기록하여 보내 주시되 번거롭게 서찰의 격식을 갖추지 말고 간략하게 써서 일을 줄이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갑오년(1594, 선조27) 7월-

청명한 가을 기운이 갑자기 쌀쌀해졌는데, 기거가 한가롭고 편안하신지요? 저는 도성을 떠나오던 날에 달려가 뵙고 싶었으나 외부의 손님이 밤중에 찾아와서 3경(更)이 되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으므로 다음 날 어지럼증이 일어나 뜻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그날 의중(宜仲)을 찾아가 만나 보고 길이 작별하였는데, 의중이 말하기를 “고옥(古玉 정작(鄭碏))이 친히 왕림하여 달여 주신 약을 먹었더니 그날 밤에는 학질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오늘밤에 또 아파오니 걱정스럽다.” 하였습니다.
내 생각에 존형(尊兄)께서 친히 문병하고 약을 달여 주시어 약효가 신통한 것이라고 여겨져 공경하고 탄복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이 노인은 참으로 현자이니, 그가 죽는 것은 너무나 애통하고 애석합니다. 부디 존형께서는 힘을 다하여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찌 비루한 저의 당부를 기다리시겠습니까마는 감히 저의 심정을 아뢰는 것은 정리(情理)상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도성 문을 나왔으니, 다시는 존형의 얼굴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천지 사이에 평생토록 이 한은 영원할 것입니다. 어지럼증이 심하여 대략 이만 줄입니다. -갑오년 8월-

얼음과 눈이 쌓여 있는 깊은 산중에 말을 타고 와서 방문해 주시니, 이 지극한 회포에 감사하여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소매를 붙잡아 이틀 밤을 유숙하시도록 하는 것이 어찌 이 사람의 소원이 아니었겠습니까마는 죄를 지은 몸이라서 감히 거듭 청하지 못하고 사립문 밖에서 전송하였으니, 먼지 날리며 떠나시는 모습을 슬피 바라보매 처절하고 암담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도성 안으로 돌아가신 뒤에 기거가 어떠하신지요? 이로부터 소식이 아득히 끊기어 다시는 뵐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저 각자 여생을 보전하여 때때로 안부를 주고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을미년(1595, 선조28) 12월-

보내 주신 답장을 받고 감사하고 위로되는 마음 갑절이나 더합니다. 이제 시원한 가을인데, 한가로이 수양하는 가운데 만안하신지 우러르고 그리워하는 마음 참으로 간절합니다.
왜적들이 또다시 출동하여 중외(中外)가 놀라고 소요하고 있습니다. 동은(峒隱) 노인은 이미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가서 서로 소식이 끊기고 말았으니, 처절하고 암담한 마음이 절로 일어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지하에서 만난다.” 하였으나 이러한 이치가 없을 듯하니, 죽기 전에 서로 위로하는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말이 아니고는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소식을 전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니, 부디 진중히 몸을 돌보시어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정유년(1597, 선조30)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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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跋) 14수(十四首)
《북창고옥집(北窓古玉集)》 발문

참의(參議) 정후 두경(鄭侯斗卿)이 숙조(叔祖)인 북창(北窓 정렴(鄭))과 고옥(古玉 정작(鄭碏)) 두 분 공(公)의 시집을 나에게 보여 주면서 발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이 일을 계기로 해서 두 분 공의 평생에 걸친 사적(事蹟)을 끝까지 살펴보게 되었는데,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일찍이 없었던 능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즉 북창이 중국에 들어가서는 중국어에 능통하고, 이국(異國)의 사람을 만나면 이국의 언어를 구사하였으며, 산사(山寺)에 있을 때에는 백리나 떨어진 산 아래에서 일어난 일을 훤히 알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내가 일찍이 좌씨(左氏)의 글을 보건대, 개(介)의 갈로(葛盧)가 소 우는 소리를 잘 알아들었다고 하였으며, 정자(程子)의 말 중에도 “촉 땅의 산에 사는 사람이 잡념을 일으키지 않은 지 10년 만에 미래의 일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蜀山人不起念十年 自能前知〕”라는 내용이 있었으므로, 이를 통해서 방외(方外)의 인물 중에는 간혹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불서(佛書)를 보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세간의 일체 성음(聲音)을 잘 알아듣는다고 말하고 있으나, 보살이 이와 같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요, 사람 중에 이와 같은 자가 있다는 말은 또한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은 모두 세상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극소수의 현상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북창이 바로 이와 같았다고 하니, 그가 방외의 학술에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음은 물론이요, 나아가 최고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북창은 천문(天文) · 지리(地理) 등의 잡술(雜術)에 대해서 모두 누구에게 배우지 않고 스스로 터득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단(異端)의 잡학(雜學) 따위야 또 어찌 급급하게 배워야만 잘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아마도 그의 천부적인 자질이 신이(神異)해서 자연히 그렇게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대저 하늘이 뭇사람들을 낼 적에 각자 기운을 품부받게 하는 것이 만 가지로 다르니, 이처럼 월등하게 특이한 자질을 지니게 되는 경우도 간혹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유독 유감스러운 점이 있으니, 그것은 즉 하늘이 이처럼 특이한 기운을 품부받은 사람을 이 세상에 내면서도 그로 하여금 우리 유가(儒家)의 성현의 학문에 종사해서 만세토록 모범이 되게끔 하지는 않고, 오직 이와 같은 방외의 학술에 종사해서 한때의 이목(耳目)을 경동(驚動)시키는 정도로 그치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부귀와 권세는 몸 밖에 있는 물건이니, 사람에게 본디 손해나 이익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여기에 빠져들어 일생 동안 허우적대기만 할 뿐 죽을 때까지 멈출 줄을 모르니 그 속에서 제대로 빠져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북창은 어려서부터 이런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전혀 두지 않고 마치 뜬구름처럼 여겼다. 그러니 이와 같은 것이야 선생에게 있어서는 물론 자질구레한 일이라서 말할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세상 사람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 어찌 까마득하게 높은 경지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북창은 소싯적에 사류(士類)를 도와서 보호하기도 하였는데, 그 공이야말로 결코 후세의 사람들이 모르게 해서는 안 될 가장 큰 절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 그가 자손들에게 훈계한 말을 보면, 한결같이 우리 유가의 행의(行義)와 학술에 입각해서 후세의 사람들을 인도한 것이었다. 이는 그의 천부적인 자질이 워낙 뛰어나서 우연히 이단의 학술에 터득한 점이 있게 되었다고는 하더라도, 그의 마음만은 실로 우리 유가의 정대한 학문을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그와 같은 내용으로 자손들을 훈계한 것이니, 이런 점이야말로 후생들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할 대목이라고 하겠다.
한편 고옥(古玉)으로 말하면, 신이(神異)한 자질 면에서는 북창보다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 가슴속의 생각이 담박해서 티끌로 뒤덮인 세속의 기운이 전혀 없었으니, 요컨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겠다. 그의 시를 보더라도 모두 좋은 시를 짓겠다는 마음을 먹고 지은 것이 아니라 그저 한때의 흥치를 부친 것에 불과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있는 구절들은 왕왕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경지를 보여 주기도 한다. 한가로이 거하면서 시와 노래를 읊조리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맑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나는 평소에 두 분 공이 이인(異人)인 것을 높이 평가해 왔다. 그리고 고옥에 대해서는 내가 소싯적에 한 번 멀리서 그 풍채를 바라보았던 인연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에 정후(鄭侯)의 요청을 받고는 나름대로 느껴지는 점이 있기에 권말에 써서 돌려주게 되었다.
숭정(崇禎) 갑오년(1654, 효종 5)에 짓다.

[주D-001]개(介)의 …… 알아들었다 :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29년 조에, 개(介)나라의 군주인 갈로(葛盧)가 노(魯)나라를 예방해서, 소가 우는 소리를 듣고는 “저 소는 세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모두 제물로 바쳐졌다. 그의 울음 소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는데, 확인해 보니 과연 그렇더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D-002]촉 땅의 …… 있었다 : 《이정유서(二程遺書)》 권6에 나오는 말로, 《중용혹문(中庸或問)》 24장 ‘지성여신(至誠如神)’의 부주(附註)에도 실려 있다. 원문에는 ‘自’가 ‘便’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