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명현록/전주최씨 무과편

임진왜란 공신 증 병조참의 (휘 기필) 관련기사 (문성공 안렴사공파)

아베베1 2010. 7. 30. 12:31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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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중(圭仲)
모산(茅山)
생졸년 ? (?) - 1593 (선조 26)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항일/국방 / 의병 / 의병
과거 및 취재

[상세내용]

최기필(崔琦弼)에 대하여
미상∼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규중(圭仲), 호는 모산(茅山).

천성이 어질고 품행이 발라 일찍이 지방관의 추천을 받아 봉사가 되었다. 진주부관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진주 서쪽 백운동(白雲洞)에 살며, 젊은 유생들과 함께 학문과 도의를 강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항왜구국(抗倭救國)의 대의를 성언(聲言)하며 관군·의군의 적 토벌을 지원하고, 이듬해 적군이 후퇴할 무렵, 가토(加藤淸正) 등이 진주에서의 패전을 복수하려고 많은 군사를 진주로 집결하여 진주성이 위태로워지자 6,063명의 의병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황진(黃進) 등 수성장(守城將)들과 합심, 분전하였다.

그해 6월 성이 함락됨과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뒤에 창렬사(彰烈祠)에 향사되고,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亂中雜錄    嶺南人物考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0권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



동쪽으로 함안군(咸安郡) 경계까지 67리이고, 진해현(鎭海縣) 경계까지 79리이고, 남쪽으로 사천현(泗川縣) 경계까지 28리이고, 고성현(固城縣) 경계까지 66리이고, 서쪽으로 단성현(丹城縣) 경계까지 38리이고, 곤양군(昆陽郡) 경계까지 27리이고, 하동현(河東縣) 경계까지 67리이고, 전라도 광양현(光陽縣) 경계까지 94리이고, 북쪽으로 삼가현(三嘉縣) 경계까지 45리이고, 의령현 경계까지는 40리이고, 단성현 경계까지 4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가 8백 6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거타(居陁)라고도 한다. 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빼앗아서 주(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은 거타주를 분할하여서 진주총관(晉州摠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은 강주(康州)라 고쳤다.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정주(菁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는 또 강주라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는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14년에 진주라 고쳐서 절도사를 설치하고, 정해군(定海軍)이라 칭하며 산남도(山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이 안무사(安撫使)로 고쳤고, 뒤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진양 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시켰는데, 태종(太宗) 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목으로 만들었다. 세조조(世祖朝)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반성현(班城縣) 주의 동쪽 52리에 있다. 고려 현종 때 본주에 내속시켰다. 일명 편월(片月)이고, 창름(倉廩)이 있다. 영선현(永善縣) 주의 동남쪽 48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일선현(一善縣)인데 경덕왕이 상선(尙善)이라 고쳐서 고성군(固城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초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때에 내속시켰다. 악양현(岳陽縣) 주 서쪽 1백 21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소다사현(小多沙縣)이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하동군에 예속시켰던 것인데 고려 현종 때에 내속시켰다.
『신증』 정덕(正德) 무인년에 악양현과 화개현(花開縣)은 진주와 거리가 멀어서, 백성들이 관곡(官穀) 출납에 노고가 많다 하여 여기에다 창(倉)을 설치하였다.
살천부곡(薩川部曲) 주 서쪽 81리에 있다. 부곡의 장(長)은 머리를 깎았는데 승수(僧首)라 부른다. 화개부곡(花開部曲) 합포(陜浦)라 하기도 한다. 주 서쪽 1백 26리에 있다. 부곡의 장은 머리를 깎았는데 승수라 부른다.
【진관】 군 다섯 합천(陜川)ㆍ초계(草溪)ㆍ함양(咸陽)ㆍ곤양(昆陽)ㆍ거창(居昌)이다.
『신증』 거창은 현으로 강등되었다.
현(縣) 여덟 사천(泗川)ㆍ남해(南海)ㆍ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하동ㆍ산음(山陰)ㆍ안음(安陰)ㆍ단성이다.
『신증』 거창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한 사람이다. 【군명】 거열성ㆍ거타ㆍ정주(菁州)ㆍ강주ㆍ진양ㆍ청천(菁川)ㆍ진산(晉山)ㆍ진강(晉康)ㆍ정해군(定海軍).
【성씨】 본주 정(鄭)ㆍ하(河)ㆍ강(姜)ㆍ유(柳)ㆍ소(蘇)ㆍ임(任)ㆍ강(康), 김ㆍ박 모두 내성(來姓)이다. 반성(班城) 형(荊) 형(邢)이라 한 데도 있다. 주(周)ㆍ옥(玉)ㆍ현(玄)ㆍ성(成), 김 속성(續姓)이다. 영선(永善) 양(楊)ㆍ한(韓)ㆍ임(林)ㆍ임(任). 복산(福山) 문(文) 송자(松慈)와 같다. 악양(岳陽) 도(陶)ㆍ오(吳)ㆍ임(任)ㆍ손(孫)ㆍ박, 김 속성(續姓)이다. 화개(花開) 김. 살천(薩川) 박.
【풍속】 습속이 시서(詩書)를 숭상하고, 넉넉하고 화려함을 숭상한다 모두 《지리지(地理志)》에 있다. 여염이 태평하여 밥짓는 연기가 서로 잇따랐다 하륜(河崙)의 〈촉석루기(矗石樓記)〉에 있다. 학문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하연(河演)의 〈사교당기(四敎堂記)〉에 있다. 농부와 누에치는 아낙이 일에 부지런하고 아들과 손자가 효도에 힘을 다한다 하륜의 〈촉석루기〉에 있다.
【형승】 영남 제일이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진양의 시내와 산의 훌륭한 경치는 영남에서 제일이다.” 하였다. 큰 산과 큰 강 이첨(李詹)의 서문에, “인물이 나서 국가에 도움 되게 하는 이는, 큰 산과 큰 강의 성하고 맑은 정기로 된 것이 많다.” 하였다. 동방의 육해(陸海)이다. 예전 사람이 진양을 평하기를, “진양은 동방의 육해이다. 수산물과 토산물을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것이 영남 여러 주의 반이다.” 하였다. 비봉산(飛鳳山)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望晉山)이 남쪽에서 읍한다. 하륜의 〈봉명루기(鳳鳴樓記)〉에, “비봉산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이 남쪽에서 읍한다. 긴 강이 그 사이에 흐르는데 동쪽과 서쪽 여러 산이 구불구불 사방을 둘렀다.” 하였다.
【산천】 비봉산 주 북쪽 1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지리산(智異山) 주 서쪽 1백 리에 있다. 상봉(上峯)을 천왕봉(天王峯)이라 하는데, 남원부(南原府)편에 자세히 적었다. 산 북쪽은 함양군 경계이다.
○ 고려 때에 명사가 이 산에 숨어 살았는데, 지조가 높고 행실이 깨끗하여 세상 일을 간섭하지 않았다. 그때 임금이 듣고 사신을 보내 맞아오려 하니, 사례하기를, “외신(外臣)이 아는 것이 없사오니 왕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 다음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사신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보니 벽에다가, “한 마디 임금의 말씀 골에 들어오니, 이름이 인간에 떨어진 줄 비로소 알았네.”라는 한 구를 적어두고 북쪽 바라지를 통해 도망쳐 버렸다. 후세 사람들은 한유한(韓惟漢)이 아니었던가 의심한다. 《고려사》에, “유한이 여러 대로 서울에 살았으나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최충헌(崔忠獻)이 정사를 제멋대로 하여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난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고, 처자를 이끌고 지리산에 들어가 버렸다. 맑은 수양과 굳은 절조로써 외인과 교제하지 아니하니, 세상에서 그의 풍치를 높게 여겼다. 나라에서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아니하고 깊은 골짜기로 옮겨가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다.
○ 고려 김부의(金富儀)의 시에, “험한 곳을 지나 태화봉(太華峯)에 오를까 의심되더니, 돌아오는 길에 도리어 석양이 붉음을 겁내네. 우연히 왕사(王事)로 인해 세상밖에 노닐지만, 도리어 당년의 양차공(楊次公)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 고려 김돈중(金敦中)의 시에, “오르고 올라 최상봉에 이르러, 진세를 돌아보니 한 조각만하구나. 노을 속에 배회하여 그윽한 정취를 얻었으니, 풍류는 진(晉) 나라 양공(羊公)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네.” 하였다.
○ 고려 중 정명(靜明)이 벗을 전송하는 시에, “그대는 곧 바로 천 봉우리 속에 들어갔다 하니, 몇 겹의 연기와 노을속에 있겠네. 흐르는 물 떨어지는 꽃에 가신 길 아득하니, 다른 해 어느 곳에서 그대 자취 찾을고.”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두류산(頭流山)이 가장 크다. 신선이 표피자리 깔았네. 나무 끝에 두 다리가 날고, 구름 속에 반신(半身)만 내놓네. 사람들은 삼무(三武)에게 곤란 당했음을 기롱하고, 혹은 진(秦) 나라를 피했다고 말하네. 어찌 그윽하게 살 곳이 없어, 풍진 속에 백발이 새로워졌나.”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내 들으니, 백두산이 남으로 와서 바다에 닿아 뿌리가 서리었다네. 멀고 멀리 3천 리에 멧부리가 연했는데, 험한 곳은 모두 관문(關門)으로 되었다네. 구불거리다가 정기가 모여 갑자기 솟아났는데, 천궁(天宮)이 정상에 있어 제사를 누리네. 천궁이 하늘과 한 자도 안 되는 거리여서, 뭇 산을 당기고 뭇 물 삼킨다네. 바람과 구름이 부벼대서 나무가 못 크고, 응달엔 6월에야 눈이 처음 녹는다네. 천태산(天台山)이 4만 8천 장이라지만, 이 산과 견주면 하늘과 땅이로세. 유인(幽人)이 은거하여 이 속을 다니면서 만 구렁 솔바람 소리 모두 다 겪었네. 문득 선부(仙府)를 찾아 옥피리를 부노라니, 그 소리 완연히 봉황 울음 같아라.” 하였다.
○ 이륙(李陸)의 〈유산기(遊山記)〉에, “지리산은 또 두류산이라 칭한다. 영남ㆍ호남 사이에 웅거하여서 높이와 넓이가 몇 백 리인지를 모른다. 목 하나, 부 하나, 군 둘, 현 다섯, 속읍 넷이 산을 둘러 있는데, 동쪽은 진주ㆍ단성이고, 남쪽은 곤양ㆍ하동ㆍ살천ㆍ적량(赤良)ㆍ화개ㆍ악양이며, 서쪽은 남원ㆍ구례ㆍ광양이고, 북쪽은 함양ㆍ산음이다. 높은 봉우리가 둘이 있는데, 동쪽은 천왕봉이고, 서쪽은 반야봉(般若峯)으로서 서로 거리가 백여 리나 되는데, 항상 구름에 가려 있다. 천왕봉에서 조금 내려와서 서쪽에 향적사(香積寺)가 있고, 또 서쪽으로 50리쯤에 가섭대(迦葉臺)가 있다. 대의 남쪽에 영신사(靈神寺)가 있으며, 서쪽으로 20여 리를 내려오면 넓게 트인 땅이 있는데, 편평하고 비옥하여 가로 세로의 넓이가 모두 6ㆍ7리 됨직하다. 간간히 하습(下濕)하여서 곡식 심기에 알맞다. 늙은 잣나무가 하늘에 치솟았으며, 낙엽이 쌓여서 정갱이까지 빠진다. 복판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끝이 없어 완전히 하나의 평야(平野)이다. 빙빙 둘러 남으로 내려오면, 시내를 따라 의신(義神)ㆍ신흥(新興)ㆍ쌍계(雙溪)의 세 절이 있고, 의신사에서 서쪽으로 꺾여서 20리 지점에 칠불사(七佛寺)가 있다. 쌍계사에서 동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불일암(佛日菴)이 있고, 그 나머지 이름난 사찰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몇 절은 모두 널판지로 덮었고, 거주하는 중이 없다. 오직 영신사만이 기와를 사용했으나 거주하는 중은 한두 명에 불과하니, 산세가 아주 험준하여 사람 사는 마을과 서로 닿지 않았으므로, 높은 선사가 아니면 안주하는 자가 드문 것이다. 물의 근원은 영신사 작은 샘물로부터 이 신흥사 앞에 와서는, 벌써 큰 냇물이 되어 섬진강(蟾津江)에 흘러드는데, 여기를 화개동천(花開洞天)이라 한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 천불암(千佛庵)ㆍ법계사(法戒寺)가 있고,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자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임했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져서 매우 맑은 운치가 있는데,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 한다. 또 두 물이 있는데,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하나는 법계사 밑에서 나오며, 살천(薩川)에서 합쳐져 하나로 되어 소남진(召南津) 아래쪽으로 흘러 들어서 진주를 둘러 동쪽으로 가는데, 이것을 정천강(菁川江)이라 한다. 소남진이란 것은 산 북쪽 물이 동쪽을 돌아 오다가 단성현(丹城縣)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인 것이다. 살천촌(薩川村)에서 20여 리를 가면 보암사(普庵寺)가 있다. 살천촌 앞쪽을 내산이라 하고, 바깥쪽을 외산이라 한다. 보암사에서 바로 올라가 빠른 걸음으로 하루 반이면 천왕봉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돌 벼랑이 가파르고 험하여 길을 찾을 수 없고, 또 느티나무와 노송나무가 하늘을 가렸으며, 밑에는 가는 대가 촘촘하고, 간혹 말라 죽은 나무가 천 길 벼랑에 걸쳐 있는데 껍질에는 이끼가 끼어 있다. 또 폭포가 멀리 구름 끝으로부터 그 사이에 내리쏟아 길이를 측량할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발길을 돌리지 못하겠고, 돌아보면 뒤를 볼 수 없다. 수십 개 나무를 베어야 비로소 한 자 넓이의 하늘을 볼 수 있다.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가끔 돌을 주워, 바위 위에 두고 길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벼랑과 골짜기 사이에는 얼음과 눈이 여름을 지나도 녹지 않는다. 6월에 서리가 처음 내리고 7월이면 눈이 오고 8월이면 얼음이 크게 언다. 첫 겨울이 되면 눈이 몹시 와서 골과 구렁이 모두 편평하여지므로 사람이 왕래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산에 사는 사람들이 가을에 들어갔다가 늦은 봄이라야 비로소 산에서 내려온다. 혹 산 아래에는 뇌성과 번개가 크게 치면서 비가 와도, 산 위에는 날씨가 청명하여 한 점 구름도 없기도 하니, 대개 산이 높아서 하늘에 가까우므로 기후가 평지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대체로 산 밑에는 감과 밤나무가 많고, 조금 위에는 모두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 지대를 지나면 삼나무와 노송나무이다. 절반은 말라 죽어서 푸른 것과 흰 것이 서로 섞여져 있으며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맨 위에는 철쭉꽃만 있을 뿐인데, 나무 높이가 한 자 길이가 채 못 된다. 맛있는 나물과 진귀한 과실이 딴 산보다 많아서 산에 가까운 수십 고을이 모두 그 이익을 입는다.”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이 김종직(金宗直)의 〈두류록(頭流錄)〉 끝에 쓴 시에, “위태롭게 높도다. 산이 둥그스름하며 넓게 퍼졌음이여. 아래로 땅을 누르고 위로 하늘에 닿았네. 뿌리가 몇 천 백 리나 서리었는지 내 모르거니와, 우뚝하게 하늘 동남쪽에 중진(重鎭)이로다. 원기가 발설되고 천기가 뱉었다 머금었다 한다. 구름과 연기가 침침하게 중턱을 감췄고, 그윽한 골짜기엔 아름다운 나무가 많다. 처음 숲 기슭을 좇아 참 취미를 찾아서 선경을 샅샅이 깊이 더듬었네. 벼랑에 달린 나는 폭포가 비같이 쏟아지며, 우레처럼 아래로 깊은 못을 진동시킨다. 산이 깊을수록 물이 맑으니, 맑은 그림자가 쪽빛보다 푸르다. 몸이 최고봉에 오르니 뭇 멧부리가 쇠못을 꽂은 것 같구나. 손으로 은하수를 만질 듯 하늘과 가까운데, 하늘 바람이 머리털을 불어 차게 흩날린다. 부상(扶桑)과 약목(若木)은 어디쯤인가. 푸른 바다 만리에 맑은 이내 뜨고 큰 물결이 어지럽게 부딪쳐 신기루 빛이 서로 잠기네. 퇴계(椎髻)와 훼복(卉服)이 바다를 건너 잇따라오니, 성군의 덕화가 멀리 미쳤음을 볼 수 있네. 아래로 보니 수십 주(州)의 인간들이 아득하게 굼틀거리는 어린 누에 같다. 산의 높음은 더할 수 없고, 산 속은 즐겁기도 하다. 흔들거리는 패다(貝多) 잎이고, 펄럭거리는 우발담(優鉢曇) 꽃이라. 아름다운 꽃과 이상한 나무 다투어 피는데, 봄바람이 일렁거리니 향기가 그윽하다. 진기하고 이상한 이름 모를 새가 푸른 날개로 너울너울 춤춘다. 푸른 이끼가 길에 가득하니 속인(俗人)의 발자취 없어지고, 그윽한 바위 끊어진 벼랑에 붙여 감실(龕室) 열렸네. 은은한 절을 우러러보니, 찬란한 단청이 눈부셔라. 당간의 깃발은 아득하게 비치고 종과 북소리 은은하게 들린다. 이 속에 마땅히 은거한 군자 있어, 검푸른 눈동자 푸른 머리털의 팽조(彭祖)ㆍ노자가 많으리라. 구절장(九節杖) 짚고, 부용관(芙蓉冠) 쓰고, 쌍성(雙成 서왕모의 시녀)이 말고삐 끌고 왕모(王母)가 말을 몰리라. 구하(九霞)의 푸른 술을 마시고, 동정(洞庭)의 누런 감자로 안주한다. 영지와 요초가 나날이 자라고, 푸른 이무기 검은 사슴의 잠이 한창이라. 달밤 숲이 침침한데 신령스런 바람소리는 헌원(軒轅)이 풍악을 벌여서 관함(官函)을 두드리는 듯, 고운(孤雲)이 도를 듣고 그 지경에 웅경(熊輕) 조신(鳥伸)의 묘한 법 배운 지 오래였다. 커다란 필적이 푸른 절벽에 비치니, 천재에 미담을 남겼네. 세상 사람은 무엇 때문에 부귀만 생각하고 술에 빠지는가. 그대는 거기에 돌아가 누웠으니, 구름 숲은 본성이 달게 여기던 바이네. 내 지금 속세의 그물에 떨어졌으니, 허덕거림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마음으로는 그대와 함께 소원대로 좋은 땅 가리어 띠 암자 얽고 싶었네. 작은 관록을 탐내어 능히 가지 못하고, 고생스럽게 파리처럼 구하며, 동어(鮦魚)처럼 탐낸다. 한 몸의 마음과 일이 서로 어긋나니, 둥근 자루를 모난 구멍에 끼움과 무엇이 다르랴. 그대는 하늘 위에 학이요, 나는 언덕에 메추라기라. 몸을 기울여 남쪽을 바라보니, 조심하는 마음에 속이 타는 듯하네. 어찌하면 칡덩굴 부여잡고 새삼 덩굴 넘어뜨리며, 상상 꼭대기에서 긴 휘파람 불어 호연한 기운이 천지와 아울러 셋이 될꼬.” 하였다.
청학동(靑鶴洞) 지리산 속에 있다. 주에서는 서쪽으로 1백 47리의 거리이다.
○ 이인로의 《파한집》에, “지리산이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꽃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하게 잇따라서 대방군(帶方郡)에 와서는 수천 리를 서리어 맺히었는데, 산을 둘러 있는 것이 10여 주이다. 한 달이 넘게 걸려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늙은이들이 서로 전해 오는 말에, ‘그 안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여, 엎드려서 몇리를 지나면 넓게 트인 지경에 들어가게 된다. 사방이 모두 옥토여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푸른 학이 그 안에 서식하는 까닭에 이렇게 청학동이라 부른다. 옛날 속세를 피한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 한다. 지난날 나는 최상국(崔相國) 아무와 함께 이 속세를 떠나 길이 숨을 뜻이 있어서 청학동을 찾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장차 대롱[竹籠]에 송아지 두세 마리씩을 담아가지고 들어만 가면, 속세와 서로 상관하지 않아도 되리라.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화개현에 이르러 신흥사에서 유숙하니, 지나는 곳마다 선경 아닌 데가 없었다. 천 바위가 다투어 빼어났고 만 구렁 물이 다투어 흐른다. 대 울타리 초가 지붕에 복숭아꽃이 가렸다 비쳤다 하니,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른바 청학동이란 것은 마침내 찾지 못하였다. 나는 바위에다가 시를 적기를, ‘두류산 멀고 저녁 구름 낮으막한데, 만 구렁 천 바위가 회계(會稽)와 같네. 지팡이 끌며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을 격해서 원숭이 울음소리만 들린다. 누대는 아득히 삼신산이 멀고, 이끼 끼어 네 글자가 쓰인 것이 희미하네. 신선이 있는 곳 그 어디런가. 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이 아득하기만 하네.’ 했다.” 하였다.
○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둥그런 지리산을 바라다 보니 만겹 구름에 항상 침침하여라. 뿌리가 백여 리 서리어 산세가 절로 빼어나니, 뭇 구렁이 감히 겨루지 못한다네. 층층한 멧부리와 가파른 돌벽은 기세가 뒤섞였고, 성긴 소나무와 푸른 잣나무는 차갑게 우거졌다. 시내가 감돌고 골이 굴러 별천지 되었는데, 한 구역 좋은 경치는 참으로 별천지로세. 사람 없어지고 세상 변해도 물은 제대로 흐르며, 초목이 우거져서 동서가 아득하다. 지금도 푸른 학은 홀로 깃드니, 벼랑에 붙은 한 가닥 길이 겨우 통하리. 좋은 밭 비옥한 땅이 편평하기 상과 같은데, 넘어진 담과 무너진 길이 쑥대 속에 묻혔구나. 숲이 깊으니 닭과 개 다니는 것 안 보이고, 해 지니 원숭이 울음만 들린다. 아마도 옛날에 은자가 살던 곳, 사람은 신선되고 산은 비었는가. 신선이 있고 없음은 논할 것 없고, 다만 높은 사람이 속세 벗어났음을 사랑한다. 나도 여기에 집 짓고 숨어서 해마다 요초 캐며 생을 마치고 싶다. 천태산(天台山) 지나간 일은 참으로 허황하고, 무릉도원 유적도 다시 몽롱하다. 장부의 출처를 어찌 구차하게 하랴. 제 몸만 맑게 하고 인륜을 어지럽힘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내 지금 노래 지으매 뜻이 무궁하니, 그날에 시 남긴 늙은이 우습기도 하여라.” 하였다.

옥산(玉山) 주 서쪽 55리에 있다. 우산(牛山) 주 서쪽 65리에 있다. 지리산의 남쪽 기슭인데, 형상이 소가 엎드린 것과 같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고려 때에 장군 강민첨(姜民瞻)이 이 산에다가 우방(牛房)ㆍ모방(茅房)의 두 절을 창건하였는데, 모방에는 민첨의 화상이 남아있다. 망진산(望晉山) 주 남쪽 6리에 있다. 영봉산(靈鳳山) 반성현(班城縣) 동쪽에 있다. 집현산(集賢山) 주 북쪽 40리에 있다. 단성현(丹城縣) 편에도 나왔다. 월아산(月牙山 달엄산) 월아 부곡에 있다. 와룡산(臥龍山) 주 남쪽 60리에 있다. 사천현(泗川縣) 편에도 나왔다. 송대산(松臺山) 주 동쪽 42리에 있다. 바다 주 남쪽 60리에 있다. 흥선도(興善島) 주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남강(南江) 주 남쪽 1리에 있다. 강의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지리산 운봉현(雲峯縣) 경계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오는데, 주 서쪽에서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의령현(宜寧縣) 경계에서 정암진(鼎巖津)이 된다.
○ 최함일(崔咸一)의 시에, “오리들이 쌍쌍으로 물 차고 날며, 영산홍(暎山紅)이 유리 같은 푸른 물에 거꾸로 비친다. 화공이 그려내기 어려운 가지가지 의미는, 서생의 한 수 시에 다 들어가네.” 하였다.

섬진(蟾津) 악양현(岳陽縣) 서쪽에 있는데 주에서는 93리이다. 지리산 서남쪽 물이 구례현 용왕연(龍王淵)과 합쳐서 여기에 와서 섬진이 되며, 동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운당진(雲堂津) 주의 동쪽 15리에 있으니, 남강 하류이다. 소남진(召南津) 주 서쪽 29리에 있으며 단성현 신안진(新安津)의 하류이다. 반룡포(盤龍浦) 주 남쪽 79리에 있으며, 바다 개펄이다. 정천(菁川) 주 서쪽 3리에 있으니, 곧 남강 상류이다. 구라량(仇羅梁) 주 남쪽 60리에 있으며 바닷가 개펄이다. 흥선도에 들어가는 자는 여기를 경유하여야 한다. 금산지(金山池) 주 동쪽 20리에 있다. 부지(釜池) 주 북쪽 3리에 있다. 가차례지(加次禮池) 가차례 부곡에 있다.
『신증』 방어산(防禦山) 반성현 북쪽 15리에 있다. 방아산[帖山]이라고도 하는데, 속음이 비슷하다. 급암(鈒巖) 악양현 강변에 있다. 어선이 항상 여기에 정박한다.
촉석강(矗石江) 누선이 있다.
○ 조위(曺偉)의 시에, “누 밑에 긴 강 백길이 맑은데, 채색 배 비스듬히 끌며 거울 속에 흐른다. 해는 모든 집의 발 그림자를 흔들고, 바람은 10리 피리소리를 전한다. 산 아지랑이는 아른아른 절벽에서 나고, 물빛이 일렁거려 높은 성을 움직이네. 지척의 홍진길에 머리 돌리니, 갈매기 한 마리 가벼이 뜨는 것 부러워라.” 하였다.

강주포(江州浦) 사천현 경계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김양포(金陽浦) 곤양군 경계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토산】 닥종이[楮]ㆍ감ㆍ차 신라 흥덕왕(興德王) 때에 대렴(大廉)이 당(唐) 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오면서 차 종자를 가지고 와서 지리산에 심게 하였더니, 성덕왕(聖德王) 때에 비로소 무성하였다. ○ 하연(河演)의 신다(新茶) 시에, “진지(晉池) 풍미(風味)는 섣달 앞의 봄인데, 지리산 가에 초목이 새롭다. 금가루ㆍ옥 싸라기 달일수록 더욱 좋아, 깨끗한 빛깔과 빼어난 향기 맛이 더욱 진기하다.” 하였다. 대구(大口)ㆍ미역ㆍ잣[海松子]ㆍ청각(靑角)ㆍ해삼ㆍ꿀[蜂蜜]ㆍ전복[鰒]ㆍ생강ㆍ송이[松蕈]ㆍ석류ㆍ은어[銀口魚]ㆍ황어(黃魚)ㆍ옻ㆍ죽전(竹箭) 망진산ㆍ적량(赤良)ㆍ청암(靑巖)ㆍ급암ㆍ영선(永善) 등에서 산출한다. 매실. 『신증』 웅담ㆍ녹용ㆍ오미자ㆍ대ㆍ문어ㆍ낙지[絡締]ㆍ조기[石首魚].
【성곽】 촉석성(矗石城) 주 남쪽 1리에 있다. 석축인데 둘레가 4천 3백 59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성 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셋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 하륜(河崙)의 〈성문기(城門記)〉에, “옛날부터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돌고 도는 것은, 운수의 성하고 쇠함과 인사의 잘하고 못함이 서로 관계되어 그런 것이다. 옛날 사람은 인사를 닦아서 천운에 응하는 까닭에, 혹 도적의 난이 일어나도 마침내 근심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내가 우리 고을의 성에 대해서 느낌이 있다. 내가 총각 적에 여기에서 유학하면서, 매양 허물어진 성의 옛터를 보았으나 그 연대를 알수 없고, 늙은이들에게 물어도 또한 증빙할 수 없었다. 이때에는 여염이 태평하여 밥짓는 연기가 연이었었다. 쥐새끼 같은 해구(海寇)가 가끔 일어났으나, 강주(康州) 길안(吉岸)의 토벌만으로도 족히 꺾어 부술 수 있었고, 합포진(合浦鎭)에서 군사를 나누어 구원하여서 우레처럼 엄하게 바람처럼 날려버렸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 수리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지 않았다. 내가 장성하여 벼슬에 종사한 지 10여 년 이래로, 바다 도적으로서 육지에 올라오는 것이 해마다 심하여 갔다. 정사년 가을에 조정 논의도 변방을 방비하는 것을 중히 여겨, 여러 도에 사신을 보내어 주ㆍ현의 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고을 사람이 옛터에다가 흙으로 쌓았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무너졌다. 사명을 받든 자가 그 책임을 어찌 면하리오. 기미년에 지금 지밀직 배공(裵公)이 강주에 진장(鎭將)으로 와 있으면서, 목사에게 공문을 보내 다시 수축하게 하고, 참좌(參佐)를 보내 공사를 감독하였다. 흙덩이던 것을 돌로 바꿔서 쌓게 하였으나, 공사가 반도 되기 전에 해구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강성군 산성(江城郡山城)이 있어서 한 고을 사람이 의거할 곳이 있었고, 해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이 좁고 지세가 높아서 많은 사람을 수용하지 못하고, 또 주의 치소(治所)에서 거리가 멀므로 갑작스런 사태에 능히 미칠 수 없었다.
해구가 물러간 뒤에 목사 김공이 백성의 뜻에 따라 영을 내리기를, ‘주의 성을 이제는 수축해야겠다.’ 하니, 듣는 자가 다 일을 하기를 원하였다. 장정들이 일을 고르게 하고 몸소 감독하여 며칠 안 되어 일을 끝마쳤다. 성 둘레는 8백 보이고, 높이는 세 길이 넘었다. 성문 셋을 설치하였는데, 서쪽은 의정(義正), 북쪽은 지제(智濟), 남쪽은 예화(禮化)이며, 문 위에는 모두 누를 지었다. 올라서 사면을 돌아보니 정천(菁川)이 서쪽을 둘렀고, 긴 강이 남쪽에 흐르며, 품자(品字)가 동쪽에 벌였고, 세 곳의 못물이 북쪽에 돌아 모인다. 또 성과 못 사이에 참호를 파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와서 꺾이어 또 남쪽으로 가서 강에 이르는데, 형세의 장함이 진실로 성위의 한 사람이 성밖의 백 사람을 당할 만하였다. 성이 완성되자 해적이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여 온 경내가 편안하였다.
아, 처음 시작하는 어려움이 다시 일으키는 어려움보다 못하고, 처음이 있게 하는 어려움이 마침이 있게 하는 어려움만 같지 못한데, 일은 반절이면서 공은 곱절인 것을 내가 김공한테서 보았다. 공의 이름은 중광(仲光)이다. 정사하는 데에 대체를 힘써서 어른의 풍모가 있다. 일찍이 제주 목사로 있었는데 반복하여 복종하지 않던 토속(土俗)이 그의 의(義)에 감복되었다. 조정에 돌아와서는 재상이 되었는데 다스리기 어려운 지방을 잘 다스렸다 하여 이 임명이 있었다. 판관 이군 사충(仕忠)도 단정한 사람으로서 공을 도와 이 성을 완성하였다.” 하였다.

【관방】 적량(赤梁) 주 남쪽 백 13리에 있다. 석성(石城)이 있는데, 둘레가 1천 1백 82척이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한 사람이다.

삼천진(三千鎭) 남쪽 74리에 있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2천 50척이다. 권관(權管)을 두어 방비한다.
【봉수】 대방산 봉수(臺方山烽燧) 주 남쪽 1백 14리에 있다. 남쪽으로 남해현(南海縣) 금산(錦山) 북쪽에 응하고, 북쪽으로 각산(角山)에 응한다. 망진산 봉수(望晉山烽燧) 남쪽으로 사천(泗川) 안점(鞍帖)에 응하고, 북쪽으로 광제산(廣濟山)에 응한다. 각산 봉수(角山烽燧) 주 남쪽 76리 지점에 있다. 남쪽으로 대방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곤양(昆陽) 우산(牛山)에 응하며, 북쪽으로 사천 안점에 응한다. 광제산 봉수(廣濟山烽燧) 주 북쪽 31리에 있다. 남쪽으로 망진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단성 입암산(笠巖山)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하륜의 서문에, “고을 객사가 두 번이나 화재를 만나, 다시 짓지 못한 지가 여러 해였다. 계미년에 지금 판서 광주(廣州) 안공(安公)이 좌사간대부로 있다가 목사가 되어 나갔다. 이에 옛터를 찾아 그전보다 제도를 조금 넓혀서 신축하였는데, 지금 목사 최공과 판관 은군(殷君)이 계승하여 더 수축하였다. 안공의 이름은 노생(魯生)이요, 최공의 이름은 이(迤)이며, 은군의 이름은 여림(汝霖)인데, 무두 훌륭한 관리로서 세상에 명성이 있다.” 하였다.
【누정】 봉명루(鳳鳴樓) 객관 남쪽에 있다. ○ 하륜의 기문에, “객사 남쪽에 예전 누(樓) 3칸이 있는데, 그 밑을 비게 하여 왕래할 수 있도록 한 것을 누문이라 하는데 이름이 없다. 그 곁에는 노목 수십 그루가 벌여 서서 바람을 머금고 햇볕을 가려서 서늘한 기운이 저절로 난다. 관가와 민가와 대숲과 꽃나무가 가렸다 비쳤다 서로 연접하였다. 산빛과 물빛이 그 밖에 비치고 유람하기에 알맞은 것이 실로 깊숙하고 넓게 트인 중간에 있다. 영목사 정헌대부 최공(崔公)이 이 주에 부임하여서는 모든 황폐한 것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에 이르기를, ‘주는 땅이 아주 남쪽이어서 여름 더위가 더욱 심하다. 사신과 빈객이 왕래할 때에 시원한 곳이 있어야 할 터인데, 촉석루는 허물어진 지가 이미 오래이고 또 공해(公廨)에 막혔다. 이 누를 수리하면 공역은 덜하고 일은 편리하겠다.’ 하고, 마침내 공인(工人)을 모아서 농사 여가에 일을 시켰다. 기울어진 것을 바루고 썩은 것을 갈아 넣었으며, 작고 비좁은 것은 더 보태어 늘리고, 단청을 칠하고, 봉명(鳳鳴)이라는 현판을 걸고, 주 사람 전 상주 목사(前尙州牧使)였던 전군(全君) 제(悌)에게 부탁하여 나에게 기문 짓기를 청하였다. 내 적이 생각하니, 봉(鳳)이란 것은 왕자(王者)의 상서이다. 옛날 주(周) 나라가 한창일 때에 봉황이 높은 뫼에서 울었다 한다. 지금 밝은 임금이 위에 계셔 몸소 인의를 행하고, 어진 이에게 맡기고 능한 자를 부리는데, 백성과 가까운 관직(지방관)을 더욱 중하게 여긴다. 최공은 자애하고 인후한 자질로, 외방에 나가 한 주를 맡아서 왕화(王化)를 펴매, 이에 봉명(鳳鳴)으로써 누 이름을 하였으니, 이는 문왕과 무왕의 덕으로써 우리 임금에게 기대하여 행여 봉이 우는 상서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일찍이 들으니, 한(漢) 나라 황패(黃霸)가 영천(穎川)에 태수로 있을 때에, 봉황이 관사에 오고 다스림이 천하 제일이 되었으므로, 조정에 불려들어가 승상이 되어, 공이 당시에 빛나고 명예가 후세에 전해 온다. 이것은 진주 사람이 최공에게 기대하는 것이며, 최공도 또한 스스로 힘씀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푸른 산이 둘러 물가에 임했는데, 우리 고을 좋은 경치 참으로 맑고 기이하네. 영천(穎川)의 치적을 오늘에 기대하고, 아각(阿閣)에 화하게 울던 것은 성한 시대를 상상하네. 대나무가 인가를 가려 보일락말락, 나무는 관도에 깊어 꾸불꾸불. 농옥(弄玉)을 불러 함께 타고 갈까나, 어찌하면 퉁소를 얻어 달 아래에 불까.” 하였다. ○ 박욱(朴彧)의 시에, “산에는 연이은 봉우리 있고 물에는 물가 있네. 진양의 좋은 경치 바라보매 기이하네. 옛 친구 서로 만나 흉금을 터는 곳, 걸각(傑閣)에 함께 올라 술잔 잡을 때로세. 누수(漏水)는 다했는데 시는 못 이루었고, 촛불은 다 타도 흥은 남았네. 우습다. 후령(緱嶺)에서 신선된 이여. 부질없이 퉁소 배워 세상 밖에서 불었네.” 하였다.

촉석루(矗石樓) 촉석성 안에 있다. ○ 하륜의 기문에, “누정(樓亭)을 짓는 것은 정사하는 자의 여사(餘事)이다. 그러나 한 누의 일어남과 황폐한 것으로서 한 고을 인심을 알 수 있고, 한 고을 인심을 인해서 한 시대의 세도를 알 수 있다. 그러하니 어찌 여사라 하여 하찮게 여길 것인가. 내가 이런 말을 한 지 오래였더니, 지금 우리 고을의 촉석루에서 더욱 믿게 되었다. 누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 벼랑 위에 있는데, 내가 소년 시절 여러 번 올랐던 곳이다. 누 제도가 크고 높으며 확 트여서, 굽어 보면 긴 강이 밑에 흐르고, 여러 봉우리가 그 바깥에 벌여 있다. 여염집이 뽕나무와 대나무 사이에 보일락 말락하며, 푸른 석벽과 긴 모래밭이 그 곁에 연하여 있다. 농부와 잠부(蠶婦)가 그 일에 힘을 다하며, 아들과 손자는 효도에 그 힘을 다한다. 새들이 울고 날며, 물고기와 자라가 헤엄치며 자맥질하는 것 같은 것도, 한 구역의 동물로써 제자리를 얻은 것이 모두 볼 만하다. 또 누를 이름한 뜻은, 담암(淡庵) 백 선생(白先生)이 말하기를, ‘강 가운데에 뾰족뾰족한 돌이 있는 까닭으로 누 이름을 촉석이라 한다.’ 하였다. 이 누는 김공이 짓기 시작하였고 안상헌(安常軒)이 두 번째로 완성하였는데, 모두 과거에 장원한 분들인 까닭에 또 장원루(壯元樓)라는 명칭이 있기도 하다. 아름다운 제영(題詠)으로는 면재(勉齋) 정 선생(鄭先生)의 배율(排律) 육운(六韻)과, 상헌(常軒) 안 선생(安先生)의 장구(長句) 사운(四韻)이 있고, 또 운은(耘隱) 걸 선생(傑先生)의 여섯 수 절구가 있으며, 이분들의 운을 화답하여 계승한 이는 급암(及菴) 민 선생(閔先生), 우곡(愚谷) 정 선생(鄭先生), 이재(彝齋) 허선생(許先生) 같은 분이 있다. 모두 아름다운 작품으로서 선배의 풍류와 문채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고려 말기에 온갖 법도가 무너지매, 변방 수비 또한 해이해져서 왜적이 침입하니, 백성이 도탄에 빠졌고 누도 또한 잿더미로 되어 버렸다. 하늘이 성조(聖朝)를 열어 성신(聖神)이 계승하니, 정치 교화가 이미 밝아져서 은택이 나라 안에 젖고 위엄이 해외에 떨치니, 전일에 도둑질하던 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항복하기를 청하여 연달아 공물을 바쳤다. 바닷가 지역에 인구가 다시 빽빽하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이가 술을 잔질하며 서로 경사하기를, ‘오늘날 우리 눈으로 태평세월을 볼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은, ‘나의 다스림이 아직도 흡족하지 못하다.’ 하시어, 매양 교지를 내려 백성의 힘을 부리는 것을 엄금하여, 수령으로서 농사와 학교에 관계되는 일 외에는 감히 한 가지 역사도 마음대로 일으키지 못하였다. 고을 부로(父老) 전 판사 강순(姜順), 전 사간 최복린(崔卜麟) 등이 의논하기를, ‘용두사(龍頭寺)는 이 읍을 설치할 때에 함께 된 것이고, 촉석루는 한 지방 훌륭한 경치였는데 황폐한 지 오래 되었으나 다시 새롭게 하지 못하니, 이것은 우리 고을 사람들의 책임이다.’ 하고, 이에 각자 재물을 추렴하고, 고을 중으로서 용두사에 향을 올리는 단영(端永)에게 그 일을 주간하도록 하였다. 계사년에 판목사 권공충(權公衷)이 판관 박시결(朴施潔)과 함께, 부로의 말을 받아들여 강둑을 수축하되, 백성을 나누어 대(隊)를 만들고 대마다 한 무더기씩 맡겨서 농촌의 여러 해 걱정을 제거하게 하였더니, 열흘이 못 되어서 공역을 마쳤다. 다음에 누를 짓는 역사에 부족한 것을 도와주고, 놀고 있는 자들을 불러 모아서 그 힘을 다하게 하니 가을 9월에 이르러 완성하였다. 높은 누가 비로소 새로워져서 훌륭한 경치가 예전과 같았다. 내 이미 인심과 세도를 오르는 자가 물가에 풀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의 불인(不仁)함으로써 백성의 삶을 해롭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밭에 모종이 한창 자라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자라게 하는 것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급하지 않은 일로써 백성의 농사 때를 빼앗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동산 숲에 열매 맺는 것을 보면 천지가 물을 성숙시키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의(義) 아닌 욕심으로 백성의 이로움을 침노하지 아니하기를 생각하고, 마당에 노적가리가 한창 쌓이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기르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법 아닌 생각으로써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 아니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이 마음을 미루어서 범위를 넓혀서 감히 제몸만이 홀로 즐기지 않고 반드시 백성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사람들도 모두 세도의 화함과 인심의 즐김이 실로 임금의 덕이 깊고 두터운 데에서 근원했다는 것을 알아서, 모두 화봉인(華封人)의 축수를 올리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로들이 간절히 마음 써서 이 누를 다시 일으킨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리오. 나도 치사할 날이 이미 가까우니, 필마(匹馬)로 시골에 돌아와서, 여러 부로와 함께 좋은 시절 좋은 날에 이 누에서 술잔을 들며 시를 읊조려 즐거운 바를 함께 즐기면서 여생을 마치고자 하나니, 부로들은 기다릴지어다.” 하였다.
○ 고려 정을보(鄭乙輔)의 시에, “황학(黃鶴)이라는 이름난 누, 그도 한때이었네. 최공이 일 좋아하여 시를 남겼다. 올라와 놀매 경치는 변함이 없건마는, 시 짓고 읊조리는 풍류는 성쇠가 있어라. 소 먹이는 두덕과 낚시터에는 가을 풀이 얕고, 거위 노니는 돌다리와 해오라기 섰는 물가엔 석양이 더디다. 푸른 산은 사방으로 모두 새그림인데, 분바른 계집 세 줄 서서 옛 노래를 부른다. 옥잔을 주고 받으니 산달이 오르고, 구슬 발을 걷으니 고개에 구름이 드리웠다. 난간에 기대어 머리 돌리니 건곤도 작은 듯, 이제야 우리 고을이 특별히 기이함을 믿노라.” 하였다. ○ 백문보(白文寶)의 시에, “누에 올라 옛날 놀던 때 생각하며, 억지로 강산에 답해 다시 시구를 찾는다. 나라에 어찌 난세를 평정할 현인이 없으리. 술은 나를 흔들어 노쇠한 나이를 비감케 하네. 지경이 맑으니 세속의 자취가 끊기기 쉽고, 좌석이 넓으니 춤추는 소매 휘두르기 어찌 방해되리. 붓에 먹찍어 속절없이 춘초구(春草句)를 짓고, 술잔 멈추며 또 죽지사(竹枝詞)를 부른다. 기생은 다가 앉아서 즐거움이 친밀하고, 사람은 시절과 함께 가기 싫어하네. 이 땅의 높은 정취는 참으로 속세가 아닌 듯, 적성(赤城)과 현포(玄圃)도 기이함을 독차지하지 못하리.” 하였다. ○ 백미견(百彌堅)의 시에, “유람하는 것은 시대 못 만남과는 관계없다. 호수와 산 좋은 경치가 시 읊기를 요구하네. 누구의 눈으로 일찍이 여기 터보아 집 지었나. 내 몸이 평안하여 쇠하지 않았음을 자랑한다. 기둥에 기대니 건곤은 끝난 곳이 없고, 물결을 짜놓은 듯한 발과 장막 반공에 드리웠다. 풍류의 가을 달을 이태백이 읊조렸고, 뱃노래 소리 저문 강에 어부가 노래한다. 얘기하고 웃으며 술 한 잔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갔다가 오는데 사흘 동안을 더디다고 하던가. 무성한 숲, 긴 대나무는 서남쪽 언덕에 있는데, 내 정자가 분수 밖에 기이함을 도리어 두려워하네.” 하였다.
○ 김구경(金久冏)의 시에, “촉석루에 올라서 한참 동안 머무니, 풍경이 나를 흔들어 시 짓고 싶어진다. 영운(靈運)의 뛰어난 재주 내 어찌 미치랴마는, 원룡(元龍)의 호기 온전히 쇠하지 않았다. 맑은 강, 낭떠러지엔 고기가 자주 뛰고, 큰 들판 긴 숲엔 바람이 더디 분다. 금술잔을 대해서 묵은 한을 삭이고, 은필(銀筆)을 가져 새 글을 쓴다. 처음으로 눈을 만나 찬 매화 맹동 같더니, 또 봄을 보니 고운 버들이 드리웠다. 떠나려다 멈칫거리며 다시 바라보니, 눈앞에 보이는 풍경 다 기이하여라.” 하였다. ○ 정이오의 시에, “인간을 굽어보니 고금이 되었건만, 기이한 경치는 올라도 다하지 않네. 서쪽에서 오는 두 줄기 물은 쪽빛이 합쳤고, 남쪽으로 가는 뭇 봉우리는 파란빛이 짙다. 세상 따라 행하고 멈춤은 두공부(杜工部)의 탄식이요, 백성보다 먼저 걱정하고 뒤에 즐김은 범문정(范文正)의 마음이로다. 강을 격한 옛 마을엔 바람과 연기 그대로인데, 서울서는 당년에 몇번이나 월 나라 노래를 읊었던고.” 하였다. ○ “흥했다 폐함이 돌고 돌아 바로 지금을 기다렸음인가. 산 꼭대기에 높은 누각이 반공에 임했네. 산은 들 밖에서 연했다 끊어졌다, 강은 누 앞에서 넓기도 깊기도 하네. 백설양춘곡(白雪陽春曲)은 선녀 같은 기녀의 노래요,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사또의 심사여라. 당시의 옛 일을 아는 이 없어, 고달픈 객이 돌아오며 홀로 읊조린다.” 하였다. 『신증』 허침(許琛)의 시에, “10년의 유람길 세상에 두루 돌았더니, 늦게야 선궁(仙宮) 몇 째 누(樓)에 기댔는고. 술을 많이 마셔 미쳤지 속물이 아니니, 높은 데 올라서 시 짓는 것 곧 맑은 놀음이네. 산에 가득한 소나무 숲엔 피리소리 움직이고, 한밤중 물결 위엔 흰 달이 떴어라. 햇살이 붉은 발에 비치니 봄 잠이 족하여, 제몸이 남쪽 고을에 체류하는 줄 모른다.” 하였다. ○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창망한 호해(湖海)에 가장 명승이라, 하늘이 사신(詞臣)을 보내 이 누에 이르렀네. 막막한 강 언덕 꽃은 밝기가 비단 같고, 겹겹으로 연기 낀 나무 푸름이 흐르는 듯하다. 백년 풍물은 그 누가 구사(驅使)하랴. 한 돛대 술 실은 배는 제대로 남쪽으로 떠다닌다. 지는 해에 유하주(流霞酒) 취해 잠이 달게 든 곳, 일부러 이 몸을 고을에 머물게 한 듯.” 하였다. ○ 이우(李堣)의 시에, “서쪽으로 지리산을 연해 참으로 선경이라, 기이한 경치는 동쪽으로 강북(江北)의 누에 다 있네. 풍경은 영원히 봉악(鳳岳)에 머물러 있고, 번화함도 정천(菁川) 따라 흐르지 않는다. 3년 동안 풍월 두고 시 천 수 지었고, 한 번 웃으니 신세와 이름이 다 헛것인 것을, 대궐 향할 한쌍의 오리가 그리 멀진 않지만, 꿈속에도 묘연하니 중주(中州)가 아득해라.” 하였다.

쌍청당(雙淸堂) 촉석루 서편에 있다.
『신증』 능허당(凌虛堂) 곧 촉석루의 동쪽 누각이다. 조양관(朝陽館) 곧 봉명루의 동쪽 누각인데, 목사 정백붕(鄭百朋)이 건축한 것이다. 청심헌(淸心軒) 능허당 동쪽에 있다. 임경헌(臨鏡軒) 곧 촉석루의 서쪽 누각이다. 목사 이원간(二元幹)이 건축하였다.
【학교】 향교 주 동쪽 3리에 있으며, 사교당(四敎堂)이 있다. ○ 하연(河演)의 기문의 대략에, “우리 고을 학교에는 본래 강당이 없었다. 전 교관 조보인(趙寶仁)이 주 목사에게 의논하여 재목을 준비하였고, 지금 교관 강원량(姜元亮)이 부지런히 감독하여 완성하였다. 이에 당 이름을 사교라 하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 기문을 청하는 것이었다. 진주 고을은 지리산의 영기와 남해의 정기가 빚고 화합한 것으로서, 토지의 비옥함과 인물의 번화함이 딴 고을과 견줄 바가 아니다. 내 일찍이 들으니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이 이 향교에서 배워서 공업이 빛났고, 그 뒤에 인재가 더욱 성하였다 한다. 근래에 문경공(文敬公) 강보(姜寶)군과, 나의 선조 원정공(元正公) 휘(諱) 즙(楫), 어사대부 휘 윤원(允源) 및 정천군(菁川君) 하을지(河乙沚), 참찬 정을보(鄭乙輔)와, 조선 초기 이래로는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 문정공(文正公) 정이오(鄭以吾), 양정공(養正公) 하공복(河敬復)이, 모두 이 향교에서 공부한 뛰어난 분들로서 문과 무로서 모두 당시에 날렸다. 우리 고을의 지기의 신령함과 인물의 걸출한 아름다움은 세상에서 일컫는 바이다. 그러나 반드시 교양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아니다. 지금 여러 학생에게는 평상시 강독하는 데에도 편리함이 있고, 봄 가을 좋은 철을 당하면 성균관에서 과시(課試)하는 방법과 같이하여, 주목(州牧)과 교관(敎官)이 여가 있는 날에 여기에 놀러와서, 혹 책을 펴서 강문(講問)하며, 혹 제목을 내어 시 짓게 하여,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읊조리며 돌아오던 운취와 비슷하며,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즐거움을 즐기며, 역복(棫樸)과 한록(旱麓)의 흥기함이 있다. 비록 그러나 사교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 어찌 이것만을 위한 것이리오. 학문하는 데에는 두 길이 있다. 실제를 힘쓰는 학문이 있고, 명예를 힘쓰는 학문이 있다. 실제를 힘쓰고 외면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爲己] 학문이고, 명예를 힘써서 이름을 따르는 습속에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남을 위한[爲人] 학문이다. 사람이 나서 8세가 되면 모두 소학(小學)에 들어가서, 나아가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받기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먹는 음식과 행동과 언어에 학문 아님이 없다. 근본을 북돋우고 성정을 함양하여 차례를 따라 진보하며, 공부가 성취하기에 미쳐서는 덕성을 높이고 경학을 연마하면, 문장에 뜻을 두지 않아도 그 글이 의리의 근원에서 나오고, 정사에 뜻을 두지 않아도 정사하는 것이 도덕의 작용에서 발하게 된다. 이것은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아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하게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공자의 4교(四敎)라는 것은, 사람을 가르치되, 글을 배우고 행실을 닦으며, 충신(忠信)을 마음에 간직하게 한 것이니, 이 중에 충신이 근본이다. 당(堂)을 이름한 뜻이 깊고 간절하다. 학문하는 길에 무엇이 이보다 더하랴. 여러 학생이 마땅히 마음에 지녀서 나날이 새롭게 할 바이다. 하물며 성조(聖朝)에서 문을 숭상하는 교화로서 하늘이 선비를 많이 내어 편안하게 되는 때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다. ○ 강석덕(姜碩德)의 시에, “10년의 풍속과 교화가 민정에 흡족하니, 봉이 우는 높은 산이 정기를 모았네. 새로 전당(鱣堂 강당)을 여니 학문의 바다가 맑고, 항상 필진(筆陣)을 열어 시성(詩城)을 움직이게 한다. 가을이 깊으니 푸른 대는 바람을 머금어 맑고, 봄이 따뜻하니 청아(菁莪)가 비를 맞아 향기롭다. 성대한 교화로 오늘날에 길한 선비가 많으니,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경서를 궁구하네.” 하였다. ○ 이첨(李詹)이 성진(聖眞 공자의 화상)을 배알하는 시에, “공해(公廨)의 단청이 한 횃불에 없어졌으나, 완악한 도적들도 오히려 문방(文坊)을 보호할 줄 알았네. 10년 동안 교남(嶠南 영남) 풍진 속에, 홀로 의관 갖추고 소왕(素王 공자)을 배알한다.” 하였다.

【역원】 소촌역(召村驛) 주 동쪽 24리에 있으며 역승(驛丞)이 있다. 본도에 속한 역이 열 다섯이 있는데, 상령(常令)ㆍ평거(平居)ㆍ부다(富多)ㆍ지남(知南)ㆍ배둔(背屯)ㆍ송도(松道)ㆍ구허(丘虛)ㆍ관율(官栗)ㆍ문화(文和)ㆍ영창(永昌)ㆍ동계(東溪)ㆍ양포(良浦)ㆍ완사(浣沙)ㆍ오양(烏壤)ㆍ덕신(德新)이다. ○ 승(丞) 1명이다. ○ 정이오의 시에, “역에 나무 그늘 짙고 시냇물 흐르는데, 오랜 나그네 몸 고달파 잠깐 머문다. 말 발굽 남북으로 어느 때나 쉴까나. 강 위 인가에 죽루(竹樓)가 있네.” 하였다. 『신증』 금상(今上) 5년에 승을 없애고 찰방을 두었다.
영창역(永昌驛) 주 남쪽 52리에 있다. 문화역(文和驛) 주 남쪽 60리에 있다. 평거역(平居驛) 주 서쪽 10리에 있다. 정수역(正守驛) 주 서쪽 54리에 있다. 평사역(平沙驛) 주 서쪽 1백 19리에 있다. 소남역(召南驛) 소남진 서쪽에 있다. 안간역(安間驛) 주 북쪽 42리에 있다.
부다역(富多驛) 주 동쪽 59리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바람과 햇빛 맑고 고와서 가을 기운 높은데, 역정(驛程)의 단풍잎이 말 머리에 나부낀다. 전송하고 맞이하는 것은 오직 소나무인데, 길을 끼고 우뚝 서서 허리 굽히기를 부끄러워한다.” 하였다.
개경원(開慶院) 주 동쪽 2리에 있다. ○ 정이오의 기문에, “진주의 진산(鎭山)이 높직하게 구름 위에 솟았으며, 양 기슭이 길게 울퉁불퉁 옆으로 동서로 뻗었다가 다시 서로 감쌌다. 감싼 복판이 널찍하여 사방이 편평한데, 거기에 진주가 위치하였다. 두류산 동남쪽 산 골짜기 물이 모여서 강이 되어 남쪽으로 가로질렀다. 왼쪽으로 감싼 복판에 긴 두덕이 북에서 남으로 와서, 강에서 백 보 되는 곳에서 멈췄는데, 《군지(郡誌)》에서 이른바 옥봉(玉峯)이라 하는 것이다. 그 봉우리가 마치 나그네가 되어 절제를 받지 않는 것 같은 기상이 있으므로, 그곳에다가 원(院)을 짓고 개경(開慶)이라 하였는데, 이는 지기(地氣)를 누르려는 것이었다. 그 남쪽에 강물이 돌아 결(玦) 같고 띠 같으며, 멧부리들은 착잡하게 솟아서 병풍과 장자(障子) 같고, 석벽에 불상 같은 무늬의 그림이 있는데, 고을 사람이 불영암(佛影巖)이라 한다.
원이 처음에는 겹으로 된 누각이 층층으로 솟아나서, 맑은 물결과 푸른 석벽에 빛났던 것이나, 고려 말기에 왜구에게 진주가 함락되니 백성이 텅 비었고, 원에도 화가 미쳤다. 지금 경산 부사(京山府使) 하공(河公) 유종(有宗) 호보(浩甫)는 우리 고을의 효성스럽고 우애있는 군자이다. 일찍이 옛 제택 곁에다가 원 하나를 개설하고, 오가면서 올라다 보며 사정(思亭)의 뜻을 본받고, 또 혜택이 나그네에게도 미쳐서 유숙하는 데에 편리하게 하였는데, 지금 장자원(長者院)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재목과 기와를 모으고 공역을 헤아려 날을 정하는데, 마침 목백(牧伯) 박공 자안(子安)이 부임하여 하공에게 청하기를, ‘개경원이 이 고을에 도움 됨이 가장 크다. 사신이 왕래할 때에 경유하는 곳이고, 수령을 맞이할 때에 휴식하는 곳이다. 또 요충 지대에 해당되므로 나그네들이 잇따라서, 어깨가 맞닿고 소매가 부닥치니, 어찌 다른 역관과 견줄 것이겠는가. 그러니 원을 수리하지 않음은 수령의 허물이다. 그러나 공사(公舍)를 수선하느라고 딴 곳은 돌볼 여가가 없으니, 청컨대 먼저 개경(開慶)에 착수하여, 우리 고을 백성의 힘을 펴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호보가 의롭게 여겨서 허락하고 재목과 기와를 실어 나르며, 옛 제도보다 줄여서 달을 넘겨 완성하였으니, 홍무(洪武) 갑자년이었다. 장엄하고 화려함은 비록 예보다 못하나, 아래위 당과 행랑이 질서 정연하며 산뜻하여 볼 만하였다. 5년 뒤 무진년에 다시 재목과 재력을 갖추어서 장자원을 완성하였으니, 이것은 하공의 본뜻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선양공(單襄公)이 초(楚) 나라에 사신 가면서 진(陳) 나라를 지나다가 그 나라 냇물과 못에 제방과 돌다리가 없어서 길이 막힌 것 같으며, 나그네가 묵을 곳이 없음을 보고, 마침내 그 나라가 반드시 망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대개 성곽ㆍ도로ㆍ여사(旅舍) 등은 모두 삼대(三代) 시대부터 정사를 하는 요체이며, 주관(周官)에는 더욱 여기에 삼가하였다. 인인(仁人)과 군자가 그것이 황폐한 것을 보고는 모두 차마 그대로 두지 못하는 바이다. 이번에 개경원을 중건한 것을 호보는 자신의 공으로 하지 아니하고 목백(牧伯)에게 돌리니, 또한 착한 것을 남과 함께 하는 마음이다. 우리 고을 산수의 아름다움과 산에 오르고 물가에 임하는 즐거움은, 내가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여 허락된다면 마땅히 가서 눈으로 보고 마음에 얻게 될 것이니, 호보는 기다려 주오.” 하였다.

장박지원(長朴只院) 주 동쪽 49리에 있다. 축현원(杻峴院) 주 북쪽 30리에 있다. 분현현(盆峴縣) 주 동쪽 20리에 있다. 가수개원(可樹介院) 주 동쪽 59리에 있다. 섬진원(蟾津院) 섬진 언덕에 있다. 영창원(永昌院) 영창역 곁에 있다. 남제원(南濟院) 주 남쪽 4리에 있다. 어속원(於束院) 주 동쪽 62리에 있다. 추모원(楸母院) 주 서쪽 15리에 있다. 철소원(鐵所院) 주 북쪽 30리에 있다. 서정자원(西亭子院) 주 서쪽 5리에 있다. 소남원(召南院) 소남역 곁에 있다. 구라량원(仇羅梁院) 구라량에 있다. 신원(新院) 주 북쪽 40리에 있다. 차의원(車衣院) 주 북쪽 13리에 있으며 낙빈루(樂賓樓)가 있다. 응제원(應濟院) 주 서쪽 11리에 있다.
『신증』 【교량】 십수교(十水橋) 주 남쪽 28리에 있다. 사천(泗川) 경계이다.
【불우】 단속사(斷俗寺) 지리산 동쪽에 있다. 골 입구에 최치원(崔致遠)이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네 글자를 새긴 돌이 있다. 또 치원의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는데, 뒤에는 중 대감(大鑑)의 영당으로 되었다. 또 신라 병부령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중 신행(神行)의 비명과, 고려 평장사 이지무(李之茂)가 지은 중 대감의 비명과, 한림학사 김은주(金殷舟)가 지은 진정대사(眞定大師)의 비문이 있다.
○ 강회백(姜淮伯)이 과거하기 전에 이 절에서 글을 읽으면서 매화 한 그루를 손수 심었다. 그 뒤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므로, 그 매화나무를 정당매(政堂梅)라 하였다.

불일암(佛日庵) 서쪽으로 쌍계사(雙溪寺)와 10여 리 거리이다. 벼랑과 골짜기가 아주 가파라서 길을 낼 만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절벽 중간을 한 사람이 갈 수 있게 파서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가는 자로서 놀라 땀이 나며 머리 끝이 쭈뼛하지 않는 자가 없다. 암자는 벼랑에 달아 맨 듯한데, 밑이 수백 길이나 된다. 못이 두 곳인데 깊이를 알 수 없으며, 하나는 용추(龍湫), 하나는 학연(鶴淵)이라 한다.
천불암(千佛庵) 천왕봉 밑에 있다. 돌이 집처럼 생긴 것이 있는데, 수십 명을 들일 만하다. 안양사(安養寺) 섬진에서 동쪽으로 고개 셋을 넘어 60리에 이 절이 있다. 오대사(五臺寺)와 함께 훌륭한 절이라 일컫는다. 묵계사(黙契寺) 안양사 앞 냇물을 따라서 북쪽으로 가면 계곡 사이가 매우 험하고 좁은데, 40여 리를 지나 물의 근원까지 이르면 지역이 조금 트이고 토지도 또한 비옥하며 평평하다. 절이 지리산에서 가장 훌륭한 곳에 있다.
영신사(靈神寺) 지리산에 있다. 절 뒤 봉우리에 깎은 듯한 돌이 섰고, 그 꼭대기에 작은 돌이 평상처럼 놓여 있는데 좌고대(坐高臺)라 부른다. 속담에, “능히 그 위에 올라가서 절을 네 번하는 자는 불성을 깨친다.” 한다.
응석사(凝石寺) 집현산(集賢寺)에 있다. 하연(河演)의 조부의 진영(眞影)이 있다. 청곡사(淸谷寺) 달엄산[月牙山] 서쪽에 있다. 법륜사(法輪寺) 달엄산 동쪽에 있다. 향적사(香積寺) 천왕봉 밑에 있는데, 성모묘(聖母廟)의 향화(香火)를 위해서 세운 것이다. 와룡사(臥龍寺) 와룡산에 있다. 고려 현종(顯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놀고 간 곳이다.
오대사(五臺寺) 살천현(薩川縣) 남쪽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다섯 봉우리가 벌여 서서 그 모양이 대 같은데, 절이 그 복판에 있으므로 절 이름으로 되었다. 또 수정사(水精寺)라 하기도 한다. 따오기알 만한 수정주(水精珠)가 있는데, 여의주(如意珠)라 부르며, 은으로 된 끈으로 얽어서 보배로 전해 온다. 절 중의 말에는, “구슬을 반 동이 물에다가 담그면 물이 곧 넘친다.” 한다.
○ 권적(權適)의 기문의 대략에, “절 주지 진억(津億)이 일찍이 동문승(同門僧) 혜약(慧約) 등과 더불어 탄식하기를, ‘출가한 자는 오직 한 가지 해탈만을 기약할 뿐인데, 진실로 이것을 빙자하여 높은 명예와 후한 이를 구한다면, 이것이 어찌 출가한 본심이리오.’ 하고, 이로부터 깊이 숨으려는 뜻이 있었다. 이에 이름난 산에 정사(淨社)를 지어서 동림(東林) 서호(西湖)의 유풍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알맞은 곳이 없었는데, 지리산 오대라는 황폐한 절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지리산은 해동의 큰 진산(鎭山)으로서 높고 깊고 넓고 큰 것이 천하에 견줄 데가 없으며, 오대사는 또 그 산의 남쪽에 있다. 그 산이 일어났다 낮아졌다 한 것이 다섯 겹이어서, 은은하게 대를 쌓아 놓은 듯한 까닭에 그것을 절 이름으로 한 것이다. 천 봉우리가 고리처럼 호위했고, 백 골짜기가 모여들어 현성(賢聖)이 그 속에 숨어 살고 있는 듯하여, 보는 자는 눈이 부시고 마음이 취하였다.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일찍이 남쪽에 갔다가 이곳에 와서 배회하며 두루 돌아보고, ‘여기가 큰 법이 머물 곳이다.’ 하였다. 진억선사(津億禪師)는 이 얘기를 듣고 용기를 내어 가서는 그곳을 발견하였다. 인하여 머물 터를 닦아, 시주를 모집하고, 몸소 목공을 거느리고 도끼를 잡고 빨리 지었는데, 집이 86칸이다. 선사는 수정 하나를 얻어서 아미타불상에 걸어서, 신심을 표명하고, 인하여 수정사(水精社)라 이름하였다. 송 나라 선화(宣和) 5년 계묘 7월에 짓기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 기유(己酉) 10월에 마쳤다. 3일동안 낙성법회를 베풀고, 엄천사(嚴川寺)의 수좌 성선(性宣)을 청해서 경을 설하였다. 임금께서 동남해 안찰 부사 기거사인 지제고 윤언이(尹彦頤)에게 명하여 향을 올리고, 이어 은 2백 냥을 하사하였다. 이로써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 신심이 쏠리어 와서 속인이 폭주하였다.” 하였다.

우방사(牛房寺) 우산에 있다.
지거사(智居寺) 지리산에 있다.
○ 정몽주(鄭夢周)가 주지 각경(覺冏)에게 부친 시에, “남으로 놀아 어느 곳에 시냇소리 듣는고. 지리산이 높고 높아 만 길이나 푸르네. 봄 원(院)에 해 길고 일 없으니, 사미가 와서 묘법연화경 배우리.” 하였다.

화엄사(華嚴寺)ㆍ신흥사(神興寺) 모두 지리산에 있다.
쌍계사(雙溪寺) 지리산에 있다. ○ 세상에 전하기로는, 최치원이 여기에서 글을 읽었다 한다. 뜰에 늙은 괴목(槐木)이 있는데, 거의 백 아름이나 된다. 그 뿌리가 북쪽으로 작은 냇물을 가로질러 서리서리 얽히어 다리 같으므로 절 중이 인해서 다리로 만들었다. 치원이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고을 입구에 돌 두 개가 마주 있어 문 같은데, 동쪽 돌에는 쌍계, 서쪽 돌에는 석문(石門)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또 옛 비가 있는데 비문은 치원이 지은 것이다. ○ 최치원이 이 절에 있으면서 호원상인(顥源上人)에게 부친 시에, “종일토록 머리 숙이고 붓끝을 희롱하니, 사람마다 입 다물어 맘속 말하기 어려워라. 진세를 멀리 떠난 건 비록 즐거우나, 풍정(風情)이 없어지지 않으니 어찌할꼬. 개인 놀 단풍 길에 그림자를 다투고, 비 오는 밤 흰 구름 여울에 소리 연했다. 읊조리는 마음 경치를 대해 얽매임 없으니, 사해의 깊은 기틀 도안(道安)을 생각노라.” 하였다.
영대사(靈臺寺) 지리산에 있다. ○ 정추(鄭樞)의 시에, “이끼 낀 길 지팡이 짚고 굽이굽이 내를 따라 가니, 대숲이 잠겼는데 시냇물 시끄러워 길이 더욱 아득하다. 지는 해 창자 끊어지는 곳, 구름에 연한 높은 나무에 소쩍새 운다.” 하였다.
용암사(龍巖寺) 반성현(班城縣) 영봉산(靈鳳山) 속에 있다. 고려 중 무외(無畏)가 거처하던 곳이다.
○ 고려 박전지(朴全之)의 기문에, “옛날에 도선(道詵)이 말하기를, ‘만약 세 암사(巖寺)를 창립하면 삼한이 통일되어 전쟁은 저절로 그치게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선암(仙巖)ㆍ운암(雲巖)과 이 절을 창건하였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 주 남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주 북쪽에 있다. 성모사(聖母祠) 지리산 천왕봉 꼭대기에 있다. 성모상(聖母像)이 있는데, 이마에 칼 흔적이 있다. 속설에는, “왜구가 우리 태조에게 격파 당해서 궁하게 되자, 천왕이 도우지 않은 탓이라 하며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로 찍고 갔다.” 한다.
강민첨 사(姜民瞻祠) 주 관청 안에 있다. 천희(天禧) 2년에 민첨이 거란 군사와 싸워서 공이 있었으므로, 본주(本州)를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그리하여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제사지낸다.
『신증』 【총묘】 하륜(河崙)묘 주 북쪽 오이방(梧耳方)에 있다.
【고적】 흥선폐현(興善廢縣) 곧 흥선도이다. 본래 고려 유질부곡(有疾部曲)인데 뒤에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쳐서 본 주에 와서 속하였고, 충선왕(忠宣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왜구 때문에 인물이 모두 없어졌다. 지금은 직촌(直村)이다.
○ 원종 10년에 일본이 우리 변경을 침략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여기에 간직하였던 국사(國史)를 진도(珍島)에 옮겼다.

굴촌폐현(屈村廢縣) 주 서쪽 50리에 있다. 신라 때에 본주에 예속되었다. 가차례부곡(加次禮部曲)ㆍ어아부곡(於牙部曲) 모두 주 남쪽 10리에 있다. 침곡부곡(針谷部曲) 주 서쪽 15리에 있다. 율곡부곡(栗谷部曲) 주 서쪽 30리에 있다. 부곡부곡(釜谷部曲) 주 북쪽 5리에 있다. 인담부곡(鱗潭部曲) 영선현에 있으며 주와 30리 거리이다. 송자부곡(松慈部曲) 영선현에 있다. 월아부곡(月牙部曲) 주 동쪽 15리에 있다.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 선천(鐥川)이라는 명칭도 있으며, 주 서쪽 40리에 있다. 송곡향(松谷鄕) 주 남쪽 30리에 있다. 복산향(福山鄕) 영선현에 있다. 벌대소(伐大所) 주 서쪽 40리에 있다. 수곡소(水曲所) 주 서쪽 30리에 있다. 화곡소(火谷所)ㆍ대곡소(大谷所) 모두 주 동쪽 30리에 있다. 수대곡소(水大谷所) 주 남쪽 40리에 있다. 갈곡소(葛谷所) 주 동쪽 20리에 있다.
시중백(侍中柏) 정이오의 시중백 시의 서문에, “시중백이란 것은 개국공신 좌시중(開國功臣左侍中) 배극렴(裵克廉)이 심은 것이다. 지정(至正) 계묘년에 공이 진주에 목사로 와서 일으키고 세운 것이 많았다. 고을에 온 다음 해에 산중에서 어린 잣나무를 옮겨다가 관아 북헌(北軒)에다가 심었다. 그가 임기가 차서 갈려 간 뒤에 진주 백성은 공의 덕을 사모하여 그 나무를 사랑하는 것이 소공(召公)의 감당(甘棠)과 같았다. 대개 잣나무는 절개가 있어 사시를 통하고 천년을 지나도록 지엽이 변하지 않으니, 보통 초목과는 아주 다르다. 누구가 사랑하지 않으랴. 부자(夫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하셨는데, 이는 그 절개를 사랑한 것이다. 공의 사랑하는 바가 성인의 뜻과 같으니, 그의 공이 개국의 으뜸으로 벼슬이 총재(冢宰)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정절(貞節)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음이 마땅하다. 지금 공이 간 지 48년이다. 조그마하던 잣나무가 푸르름이 하늘을 떨치고 뇌우(雷雨)를 밀칠 만큼 되었으니, 그 천연 그대로의 본성을 온전히 한 것이요, 공의 당시 정사 또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절공 이후로 이 고을을 다스린 자가 또 몇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영목사 최공이(崔公迤)가 처음으로 이것을 읊조렸으니, 정절공에게 가만히 합함이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 ‘덥고 싸늘함을 반백 년 겪었으니, 세한(歲寒)의 재목이 제세(濟世)의 현인과 합치되네. 손수 영재(鈴齋) 가에 심은 뜻 알고자 할진대, 맑은 바람을 남겨 후세에 전하세.’ 하였다.” 한다.
암석이서(巖石異書) 우리 태조(太祖)가 잠저에 있을 때에, 중이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지리산 바윗돌 사이에서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 글에는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삼한(三韓)을 바로잡는다.’는 글귀가 있었다. 사람을 시켜 맞아 들이려 한즉, 벌써 가버려서 찾지 못하였다.
남지이조(南池異鳥) 신라 헌덕왕(憲德王) 13년에 헌창(憲昌)이 정주 도독(菁州都督)으로서 웅천(熊川)의 진장(鎭將)으로 옮겨 가서 배반하였다. 이보다 먼저 정주 태수의 청사(廳事) 남쪽 못 가운데에 이상한 새가 있었다. 몸 길이는 5척이나 되며 빛이 검고 머리는 다섯 살쯤 되는 아이 같았다. 주둥이 길이는 한 자 다섯 치이고, 눈은 사람 같으며, 목구멍은 다섯 되들이 그릇만 하였는데 3일 만에 죽었다. 당시 사람이, “헌창이 패망할 조짐이다.” 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구라량폐영(仇羅梁廢營) 각산(角山)에 있다. 예전에는 수군만호가 있었는데 지금은 고성현(固城縣) 사량(蛇梁)으로 옮겼다. 송대산성(松臺山城) 토축(土築)으로 둘레가 4천 73척이었는데 지금은 무너졌다. 성산성(城山城) 하나는 주 동쪽 44리에 있는데 토축이며, 둘레는 2천 8백 14척이고, 하나는 주 서쪽 48리에 있는데 석축이며, 둘레는 9백 77척인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신증』 명진부곡(溟珍部曲) 영선(永善) 동쪽 15리에 있다. 고려 말기에 거제현(巨濟縣) 명진포(溟珍浦) 사람들이 여기에 우거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그들이 본토에 돌아갔으나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 진성부곡(晉城部曲) 주 동서쪽 15리에 있으며 산 꼭대기에 성터가 있다.
【명환】 신라 향영(向榮) 헌덕왕 때에 정주 도독이었는데, 헌창이 자기에게 붙으라고 협박하였으나, 향영은 몸을 빼어 달아나서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지 않았다. 김흔(金昕) 헌덕왕 때에 강주 도독(康州都督)이 되었다. 복세(福世) 신문왕(神文王) 5년에 정주 총관이 되었다. 김암(金巖) 강주 태수였다. 왕봉규(王逢規) 경애왕 때에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였다. 당(唐) 나라 명종(明宗)이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
고려 왕해(王諧) 부사로 있었는데,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감복하였다. 동도 유수로 옮기게 되자 진주 백성은 눈물을 흘리며 유임되기를 원하고, 드디어 간절하게 조정에 청하기를, “우리 왕 사또를 1년 동안만 빌려 주소서.” 하여, 다시 재임되었다. 사람됨이 굳세고 정직하며 청백하여, 모든 계획한 바가 백성을 편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김준(金晙) 사록(司錄)으로 왔다가 청백하므로 여러 번 벼슬이 옮겨져서 좌습유 지제고가 되었다. 임민비(林民庇) 의종조(毅宗朝)에 원이 되었다. 채정(蔡靖) 신종조(神宗朝)에 목사였다. 이행검(李行儉) 고종조(高宗朝)에 사록이었다. 전광재(全光宰) 고종조에 부사였다. 안진(安震) 통판이었다. 이우(李瑀) 재간이 있으므로 나와서 목사가 되었는데 유애(遺愛)가 있었다. 배극렴(裵克廉) 목사였다. 설장수(偰長壽).
본조 최이(崔迤) 영목사로 있었다. 안노생(安魯生)ㆍ조세안(趙世安)ㆍ임인산(林仁山)ㆍ정사(鄭賜)ㆍ안지귀(安知歸)ㆍ이영견(李永肩) 모두 목사였다.
『신증』 손소(孫昭) 목사였으며, 옥사를 잘 처결하고 정사가 너그러워서 백성이 애모하였다. 이우(李堣) 목사였다. 청렴하고 간결함으로 다스렸다.
【인물】 고려 하공진(河拱辰) 현종이 거란군(契丹軍)을 피해서 남쪽으로 간 다음, 공진이 표문을 받들고 거란 진영에 가서 군사를 돌리도록 청하였다. 거란 임금이 허락하고 드디어 공진을 억류하였다. 억류되어서는 내심으로 환국하려고 꾀하면서 겉으로 충성을 표시하니, 거란 임금이 매우 총애하였다. 공진이 좋은 말을 많이 사서 동쪽으로 나오는 길에다 두고서 돌아올 계책을 꾸몄다. 사람이 그의 계책을 고발하여 거란 임금이 공진을 국문하니, 공진이 사실대로 대답하고, 또, “신이 본국에 대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갖지 못하옵는바, 살아서 대국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거란 임금이 의롭게 여겨서 용서하고, 절개를 고쳐 자기에게 충성하라 하였으나, 공진의 언사가 더욱 공손하지 않으니, 마침내 죽였다.
강민첨(姜民瞻) 목종조(穆宗朝)에 과거에 올랐다. 현종(顯宗) 때에는 대장군으로서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이 되어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응양 상장군 주국(鷹揚上將軍柱國)으로 발탁되었다가,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로 전임되었고, 추성치리 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의 호를 받았고, 병부상서로 죽으니,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추증되었다.
강창서(姜彰瑞) 어려서 본주 향교 소속의 생도로서 학업에 힘써서 글을 잘 지으니, 강 남쪽 학자로서는 그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희왕(熙王) 8년 봄에 성시(省試)에 가려는데, 아버지 사호(司戶)가 마침 죄에 걸려 옥에 갇혔다. 고을에 나아가서 방면하기를 청했으나 관원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네가 만약 장원 급제하면 방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옥사를 연기하고 기다렸더니, 과연 장원이 되었다. 금의환향하니, 목백이 막료와 주 아전들을 거느리고 성 밖에 나와서 맞이하고, 그의 집에 가서 크게 잔치를 베풀고 부모에게 술을 권해서 경축하니, 온 경내가 영화롭게 여겼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져서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강인문(姜引文) 박사 계용(啓庸)의 아들이다. 부자가 모두 유학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계용이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간 일이 있었는데, 원(元) 나라 조정에서 일본을 정벌하면서 계용이 길을 안다는 것으로 또 서장관으로 천거되었다. 풍파가 험난하였고 또 교전하던 때이므로 여러 번이나 죽을 뻔하였다. 돌아와서는 다시 벼슬하지 아니하고 자손에게도 선비노릇은 하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까닭에 아들 감찰어사 사첨(師瞻)과 손자 문하시중 창귀(昌貴)가 모두 아전으로서 벼슬길에 나아갔다. 증손 성민(性敏)이 학문을 좋아하여, 다시 선비로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재보(宰輔)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하을지(河乙沚) 충혜왕조(忠惠王朝)에 장원 급제하였고, 벼슬이 계림원수(鷄林元師)에 이르렀다. 하즙(河楫)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러서 진천군(晉川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시호는 원정(元正)이다. 하윤원(河允源) 즙의 아들이다. 충혜왕 말년에 과거에 올랐다. 공민왕조에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서 여러 장수를 따라 경성을 회복하여서 2등 공신이 되었다. 신돈(辛旽)이 정사를 마음대로 할 적에 홀로 아첨하지 않았다. 신우(辛禑) 초년에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그른 줄 알면서 그릇 판결하면 황천이 벌을 내린다.[知非誤斷皇天降罰]”는 여덟 글자를 목판에 써서 헌대(憲臺) 위에 걸어 놓고 일을 보았다. 상주가 되어 시묘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불렀으나 조서가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정을보(鄭乙輔) 상서 공부시랑으로 증직되고, 정천군(菁川君)으로 봉함을 받았으며 글을 잘 지었다. 강기(姜蓍) 나이 19세에 성균시에 합격하였다. 판도판서 문하찬성사를 지냈고,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의 호를 받았고,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함을 받았으며, 시호는 공목(恭穆)이다. 강회백(姜淮伯) 강기의 아들이다. 신우 초년에 과거에 올라 밀직제학을 지냈고, 본조에 들어와서 동북면 도순문사가 되었다. 《통정집(通亭集)》이 있어서 세상에 전한다.
본조 하륜(河崙) 고려 말기 과거에 올라 조정과 외방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경세제민의 재질이 있었다. 우리 태종(太宗)을 도와서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이 되어,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하연(河演) 윤원(允源)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하경복(河敬復)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하한(河漢) 경복의 아들인데, 또한 무용(武勇)으로써 일컬었다. 벼슬이 중추에 이르렀고, 시호는 강장(剛莊)이다.
정이오(鄭以吾) 과거에 올라 벼슬이 도총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시를 잘하여 《교은집(郊隱集)》이 있다. 정척(鄭陟) 향공(鄕貢)으로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지중추원사 수문전 대제학(知中樞院事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고, 시호는 공대(恭戴)이다. 성품이 부지런하고 공손하며 청렴개결로 스스로 지켰으며, 조정의 의례에 건의한 바가 많았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말하기를, “세종(世宗)께서 ‘청직(淸直)’ 두 자로써 경을 칭찬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았다.” 하고, 의복과 말을 하사하였다.
강석덕(姜碩德) 회백의 아들이다. 벼슬이 지돈녕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대민(戴愍)이다. 《완역재집(玩易齋集)》이 있다. 강희안(姜希顔) 석덕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인순부윤(仁順府尹)에 이르렀다. 글을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고, 전서ㆍ예서ㆍ해서ㆍ초서 글씨가 그림과 함께 묘하였다. 강맹경(姜孟卿) 회백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랐으며, 지낸 벼슬은 모두 청요한 관직이었다. 세조조에 좌익(佐翼) 공신으로써 진산 부원군으로 봉함을 받았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강희맹(姜希孟) 희안의 아우이다. 정묘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으로써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벼슬이 의정부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시와 문이 정묘하였고,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이 있다.
하숙산(河叔山) 세조조(世祖朝) 친시에 장원하였다. 벼슬이 낙안 군수(樂安郡守)에 이르렀으며, 뒤에 병으로 인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강자평(姜子平) 정축년 과거에 장원하였다. 두 번이나 승지가 되었고, 벼슬이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아우 자순(子順)은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어 반성위(班城尉)가 되었다.
『신증』 정성근(鄭誠謹) 정척의 아들이며, 사람됨이 충효 정직하였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고, 일찍이 성종(成宗)을 위해 3년 동안을 심상(心喪)하였다. 연산조(燕山朝)에 죽음을 당했다. 아들 주신(舟臣)도 과거에 올랐으나 일찍 죽었다. 하숙부(河叔溥) 경복의 손자이다. 무과에 올라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청렴하고 간결함으로써 일컬었고, 시호는 경절(敬節)이다. 강귀손(姜龜孫) 희맹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유순정(柳順汀) 문무(文武)의 재질이 있었다. 정미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조정과 지방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말기에 성희안(成希顔)ㆍ박원종(朴元宗) 등과 함께 계책을 결단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강혼(姜渾) 일찍 과거에 올랐고, 문장을 잘하였다. 연산조에 승지가 되었다가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진천군으로 봉함을 받았다.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강형(姜詗) 자평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가 연산조 갑자년에 죽음을 당했고, 금상(今上) 초년에 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신증』 【우거】 본조 조숙기(曺淑沂) 과거에 올라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효자】 신라 성각(聖覺) 스스로 거사(居士)라 호하고, 일리현(一利縣) 법정사(法定寺)에 의탁하였다. 뒤에 돌아와서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늙어서 병이 들자 다리 살을 베어 먹였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장사를 지성껏 지냈다. 혜공왕(惠恭王)이 벼 3백 섬을 하사하였다.
고려 정유(鄭愈)ㆍ정손(鄭愻) 모두 지선주사(知善州事) 임덕(任德)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에 아버지를 따라서 하동군(河東郡)에 수자리 사는데, 왜적이 밤에 갑자기 닥쳐 군사들이 다 도망치는데, 임덕은 병들어서 말을 타지 못하였다. 형제가 부축하여 달아나는데 왜적이 뒤쫓아 왔다. 정유가 말을 타고서 두어 놈을 쏘아 죽이니, 왜적이 감히 달려 들지 못하였다. 그 중 한 놈이 칼을 뽑아 들고 돌진하여서 임덕의 뺨을 찌르므로 정손(愻)이 제 몸으로 가로 막으면서 또 네 놈을 베어 죽여, 임덕은 화를 면하였으나 정손은 마침내 적에게 죽었다.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유에게 종부승(宗簿丞)을 제수하였다.
강안명(姜安命)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부모가 매양 이웃 늙은이와 술을 마시고 즐거워하였으므로 안명은 아내와 함께 힘껏 준비하고 어려운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버이가 죽자 예보다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죽은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하였다. 홍무(洪武) 경오년에 정문을 세웠다.
하현부(河玄夫) 벼슬은 사직(司直)이다. 90세 된 어머니가 병이 들자, 똥을 맛보고 종기를 빨았다. 전후에 부모상을 6년 동안 입었다.
여효제(余孝悌)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힘껏 섬겼고, 어머니가 죽은 뒤에 3년 동안을 시묘하였다. 하루는 까마귀가 향안(香案) 위에 있던 사배(砂杯)를 물고 가버렸다. 효제는, “까마귀는 비록 미물이나 반포(反哺)하는 덕이 있는데, 나의 효성이 까마귀와 같지 못하므로 이것을 물고 가게 된 것이다.” 하면서, 깊이 탄식하였다. 꿈에 한 늙은이가, “슬퍼하지 말라. 3일이면 잔을 반드시 찾을 것이다.” 하였다. 기일이 되자 까마귀가 다시 물어다가 향안 위에다 두었다. 이 소문을 들은 자는 모두, “지성스러운 효도가 미물을 감동시킨 것이다.” 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본조 모순(牟恂) 세종조에 과거에 올라 좌사간대부를 지냈다. 일찍이 어머니의 종기를 빨아서 낫게 하였고, 뒤에 또 어머니가 병들자 똥을 맛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군만(君萬) 광대이다. 그 아버지가 밤에 범에게 물려갔다. 군만은 하늘에 통곡하면서 아침 되기를 기다려서 활과 살을 가지고 산에 들어갔다. 범이 다 먹고 양지 바른 곳에 있다가 군만을 보자 울부짖으면서 앞에 와서 먹었던 사지(四肢)를 토하였다. 군만은 살 한 개로 쏘아 죽이고, 칼을 뽑아 범의 배를 갈라서 남은 뼈를 다 거두어서 화장하였다. 득비(得妃) 그 아버지 김계남(金繼南)이 간질을 얻어 4년 동안을 낫지 않았다. 득비는 산 사람 고기를 먹이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제 왼쪽손 넷째 손가락을 잘라서 먹였더니, 그 병이 드디어 나았다. 성화(成火) 8년에 정문을 세웠다.
『신증』 김백산(金白山) 16세 때에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가므로 백산이 낫을 휘두르면서 범을 쳐서 아버지는 죽음을 면하였다. 성종(成宗) 9년에 정문을 세웠다. 박인(朴氤) 아버지가 죽었는데, 마침 연산군 때여서 상복의 기간을 짧게 하는 법이 엄하였다. 그러나 인은 최복(衰服)으로서 시묘살이 3년을 마쳤다. 금상(今上) 4년에 정문을 세웠다. 강응태(姜應台) 아버지가 나쁜 병에 걸렸으므로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먹게 하였더니 병이 나았다. 금상 11년에 정문을 세웠다.
【열녀】 고려 최씨(崔氏) 영암(靈巖) 사인(士人) 인우(仁祐)의 딸인데, 본주 호장(戶長) 정만(鄭滿)에게 시집왔다. 홍무(洪武) 기미년에 왜적이 진주에 침입하여 온 경내가 달아나 숨었다. 이때에 정만은 일이 있어 서울에 갔는데, 왜적이 마을에 마구 쳐들어왔다. 최씨는 30여 세로 자색이 있었다. 네 아들을 안고 산중에 숨었더니, 왜적이 사방으로 나와서 노략질하다가 최씨를 만나 칼을 들이대고 협박하였다. 최씨는 나무를 안고 항거하며 소리질러 꾸짖기를, “나는 죽을 뿐이다. 도적에게 더럽힘을 받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의롭게 죽겠다.” 하며, 꾸짖기를 말지 않으니, 왜적이 마침내 해쳐서 나무 밑에서 죽었다. 왜적이 두 아들을 포로로 잡아 갔고, 셋째 아들 습(習)은 겨우 여섯 살이었는데 시체 곁에서 울부짖고, 젖먹이 아이는 기어가서 젖을 빨아 피가 흥건하게 입으로 들어갔는데 잇따라 죽었다. 10년 뒤 기사년에 도관찰사 장하(張夏)가 조정에 알려서 정문을 세우고, 정습에게는 이역(吏役)을 면제하여 주었다.
『신증』 본조 정씨(鄭氏) 조지서(趙之瑞)의 아내이다. 연산군 을축년에 지서는 죽음을 당하고, 재산은 몰수되고 집에는 못을 팠다. 정씨는 그 곁에다가 초막을 얽고, 지서의 입던 옷을 설치하고, 제전(祭奠)을 드리면서 3년을 마쳤다. 금상 2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유맹상피진(遺氓尙避秦) 이색(李穡)이 융막(戎幕)에 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에, “두류산(頭流山)이 좋다는 말 들었다. 정천(菁川)이 막부 이웃이라지. 다만 공무가 적어지게 되면, 자주 나가서 유람함이 무슨 방해되랴. 괴상한 얘기는 진(晉) 나라 적 일을 듣는 것 같으려니, 남은 백성이 오히려 진 나라를 피하였으리. 그대는 능히 그들의 종적을 알겠는가, 사해는 아직도 한창 풍진이로다.” 하였다.
명성천하희(名城天下稀) 이색의 시에, “기실(記室)은 망년의 벗이요, 이름난 성으로 천하에 드물다. 강루(江樓)엔 서늘함이 좌석에 가득하고, 대숲 속 집에는 푸른 빛이 옷을 적시네. 홍시에 서리가 처음으로 무겁고, 뱅어는 가을이라 한창 살쪘겠네. 맑은 늪이라 응당 아직 끝남이 없으리니, 남쪽으로 바라보며 돌아가는 사람 전송한다.” 하였다. 영대사원운매곡(靈臺寺遠雲埋谷) 이색의 시에, “영대사 머니, 구름이 골을 묻었고, 촉석루 높으니, 나무가 하늘에 닿았네.” 하였다. 수점청산침벽호(數點靑山枕碧湖) 정여령(鄭與齡)의 시에, “두어 점 푸른 산이 푸른 호수 베개했는데, 공(公)은 이것이 진양도(晉陽圖)라 말하네. 물가에 초옥이 그 얼마인가. 그 중에 내 집 있는데 기울었는지 않았는지.” 하였다.
시원우과금단취(柹園雨過今丹脆) 최해(崔瀣)의 시에, “감나무 동산에 비 지나니 금단이 물러졌고, 밤나무 언덕에 서리 내리니 옥 껍질이 얼룩졌다.” 하였다. 진양가려증경처(晉陽佳麗曾經處) 민사평(閔思平)의 시에, “아름다운 진양은 일찍이 지난 곳, 노래하며 피리불던 누대를 꿈속에 자주 드네. 묻노라, 지금엔 지주(地主)가 없다 하는데, 강에 가득한 가을달을 누구에게 맡겼는가.” 하였다. 문무영재생락토(文武英材生樂土) 하연의 시에, “문무의 영재는 낙토에서 나고, 산천 맑은 기운은 이름난 성에 자욱하다.” 하였다. 장천평초풍연호(長川平楚風煙好) 정이오의 시에, “긴 냇물 질펀한 풀밭에 풍연이 좋고, 호탕한 피리와 애절한 거문고 소리에, 세월이 더디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치고, 관찰영(觀察營)을 두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진보】 적량진(赤梁鎭) 흥선도(興善島) 가운데에 있는데, 거리는 주에서 1백 10리, 서쪽 남해로 30리이며, 성의 둘레는 1천 2백 82척이며, 옛날 만호가 있었다. 숙종 14년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 수군동첨절제사 겸 좌조창영운차사(水軍同僉節制使兼左漕倉領運差使)가 있었다.

혁폐 삼천포보(三千浦堡) 남쪽으로 74리, 말문면성(末文面城)이다. 둘레가 2천 50척이며, 권관(權管)을 두었다가 뒤에 사천으로 옮겼고 또 고성(固城)으로 옮겼다. 우수영(右水營) 서남쪽의 남해 가에 옮겼다. 옛날에 만호가 있었고, 뒤에 고성의 사량(蛇梁)에 옮겼다. 각산수(角山戍).
【영아】 우병영(右兵營) 본조 태종 때 창원(昌原)에 설치하여 선조 36년에 촉석산성(矗石山城)에 옮겼는데, 앞은 장강(長江)에 임하였으며, 명승지로 삼았다. 속영(屬營) 진주 우영(右營)ㆍ상주 좌영ㆍ김해 별중영(別中營)이다.
○ 우영 인조 때 설치하였다.
○ 우영장 겸 토포사 1명이다.
○ 속읍은 진주ㆍ거창ㆍ하동ㆍ함양ㆍ곤양(昆陽)ㆍ합천(陜川)ㆍ초계(草溪)ㆍ남해ㆍ사천ㆍ단성(丹城)ㆍ산청(山淸)ㆍ안의(安義)ㆍ의령(宜寧)ㆍ삼가(三嘉)이다.

【관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ㆍ중군(中軍) 곧 병마우후(兵馬虞侯)이다. 심약(審藥)이 각 1인.
【토산】 대나무[竹]ㆍ석이버섯[石蕈]ㆍ오미자ㆍ웅담ㆍ녹용ㆍ백토(白土)ㆍ김ㆍ문어.
【성지】 송대산성(松臺山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73척이다. 영선고현성(永善古縣城) 동쪽으로 44리이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8백 14척이다. 굴촌고현성(屈村古縣城) 서쪽으로 48리이며, 둘레가 9백 77척이다. 진성부곡성(晉城部曲城) 동쪽으로 45리이며, 산위에 옛 터가 있다. 월아산목책(月牙山木柵) 동쪽으로 15리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설치하였는데, 옛 터가 있다. 척산성(尺山城)ㆍ당산성(堂山城)ㆍ신령산성(神靈山城) 이상 세 곳은 왜인이 쌓은 것이다.
【방면】 주내(州內) 군 안에 있다. 조곡(槽谷) 동쪽으로 처음이 2리, 끝이 25리이다. 금산(金山)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대여(大如)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갈곡(葛谷) 위와 같은데 본래 갈곡의 소재지이다. 가주(加住) 위와 같다. 가수개(加樹介)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가좌촌(加佐村)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상사(上寺)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반성(班城) 위와 같다. 오동(於東) 동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용봉(龍鳳) 위와 같다. 양전(良田) 위와 같다. 영이(永爾) 동남쪽으로 끝이 70리이다. 내진(內晉) 동남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외진(外晉) 위와 같다. 말문(末文) 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90리이다.
창선도(昌善島) 곧 흥선도(興善島), 남쪽으로 처음이 1백리, 끝이 1백 20리이다. 적량(赤梁) 흥선도 가운데 있는데, 처음이 1백 10리, 끝이 1백 30리이다. 영이곡(永耳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오읍곡(五邑谷) 위와 같다. 영현(永縣)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70리이다. 성을산(省乙山)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금동오(金洞於)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송곡(松谷) 위와 같다. 소촌(召村)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이곡(耳谷) 위와 같다. 지곡(枝谷)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정촌(鼎村)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섭천(涉川)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나동(奈洞)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가차(加次) 본래 가차례(加次禮) 부곡인데, 서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평거(平居)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4리이다. 신풍(新豐)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부화곡(夫火谷) 위와 같다. 동곡(桐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45리, 끝이 45리이다. 모태곡(毛台谷)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사죽(沙竹)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동물곡(冬勿谷)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성태(省台)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50리이다. 집현(集賢)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명석(鳴石) 북쪽으로 40리이다. 대곡(大谷) 본래 대곡의 소재지였는데,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설매곡(雪梅谷)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비라(非羅)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침곡(針谷) 본래 침곡 부곡이었는데,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40리이다. 원당(元堂) 위와 같다. 이하(籬下)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수곡(水谷) 위와 같다. 단속(斷俗) 서쪽으로 처음이 55리, 끝이 60리이다. 서남(西南) 서쪽으로 35리이다. 정수(正守)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45리이다. 북평(北坪) 위와 같다. 운곡(雲谷)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55리이다. 종화(宗花)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대야(大也) 위와 같다. 본래 대야천(大也川)의 부곡이었는데, 일명 선천(鐥川)이라고도 한다. 청암(靑巖)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1백 30리이다. 가서(加西)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70리이다. 살천(薩川)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1백 20리인데, 일명 시천(矢川)이라고도 한다. 삼장(三壯) 위와 같다. 백곡(柏谷)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70리이다. 금만(金萬) 서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70리이다. 사월(沙月)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진성(晉城)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파지(巴只)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오산(吾山)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대평(大坪)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 오아(於牙) 부곡은 남쪽으로 10리, 율곡(栗谷) 부곡은 서쪽으로 30리, 부곡(釜谷) 부곡은 북쪽으로 5리, 인담(鱗潭) 부곡은 영선(永善)에 있는데, 주에서 30리 거리이다. 송자(松慈) 부곡은 영선에 있으며, 월아(月牙) 부곡은 동쪽으로 15리이다. 명진(溟珍) 부곡은 영선에 있으며 동쪽으로 15리인데, 고려 말에 거제(巨濟) 명진포(溟珍浦) 사람이 여기에 와서 붙어 살다가 본군에 와서 거제로 돌아갔다. 진성(晉城) 부곡은 동쪽으로 45리, 지금의 진성면(晉城面)이며, 송곡향(松谷鄕)은 남쪽으로 30리인데, 지금의 송곡면이다. 복산향(福山鄕)은 영선에 있고, 벌대(伐大)의 소재지는 서쪽으로 40리이며, 수곡(水曲)의 소재지는 서쪽으로 30리인데 지금의 수곡면이다. 화곡(火谷)의 소재지는 동쪽으로 30리이며, 수대곡(水大谷)의 소재지는 남쪽으로 40리이다.
○ 대야천(大也川) 부곡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7년에 남해의 왜인들이 토지를 잃고 임시로 붙어 살던 곳이다.

【진도】 남강진(南江津)ㆍ황류진(黃柳津) 주의 동쪽이다. 운당진(雲堂津) 동쪽으로 10리, 남강진 하류이다. 정천진(菁川津) 서쪽으로 3리, 남강 상류이다. 소남진(召南津) 서쪽으로 29리 단성(丹城) 신안진(新安津) 하류이다. 구라량진(仇羅梁津) 흥선도에 들어가는 자는 이 곳을 경유한다.
【교량】 십수교(十水橋) 남쪽으로 28리, 사천(泗川) 경계이다.
【창고】 읍창ㆍ군향창(軍餉倉)ㆍ제민창(濟民倉) 모두 읍내이다. 가산창(駕山倉) 우조창(右漕倉)이라고 하는데, 남쪽으로 40리 바닷가에 있다. 영조 경진년에 관찰사 조엄(趙曮)이 조정에 아뢰어 설치하여, 진주ㆍ곤양(昆陽)ㆍ하동ㆍ단성ㆍ남해ㆍ사천 및 고성 서북면, 의령 서남면의 전세(田稅)ㆍ대동(大同)을 거두어 수로로 서울에 이르렀다.
○ 진주목사 감봉 적량첨사(晉州牧使監捧赤梁僉使)가 거두어 바쳤다.
별향창(別餉倉)ㆍ통창(統倉) 모두 말문면에 있다. 장암창(場巖倉) 가차례면에 있다. 영현창(永縣倉) 영선 고현에 있다. 반성창(班成倉) 반성 고현에 있다. 북창(北倉) 사상면(寺上面)에 있다. 강창 대산여면(代山如面)에 있다. 서창(西倉) 수곡면(水谷面)에 있다. 별회창(別會倉)ㆍ보군창(補軍倉)ㆍ양무창(養武倉)ㆍ조음포창(助音浦倉)ㆍ유황고(硫黃庫)ㆍ영고(營庫).
【목장】 진주장 흥선도 가운데 있다.
○ 감목관(監牧官) 1명 있다.
【사원】 덕천서원(德川書院) 선조 병자년에 세우고 광해주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조식(曺植) 자는 건중(建中), 호는 남명(南溟)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벼슬은 전첨 증 영의정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최영경(崔永慶) 자는 효원,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며,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벼슬은 지평 증 대사헌이다.
○ 신당서원(新唐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우고,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조지서(趙之瑞) 자는 백부(伯符), 호는 지족당(知足堂)이며 본관은 임천(林川)이다. 연산주 갑자년에 화를 입었으며 벼슬은 응교 증 도승지이다.
○ 은열사(殷烈祠) 고려 현종 신유년에 세우고, 광해주 때 사액하였다. 강민첨(姜民瞻) 본관은 진주인데, 벼슬은 병부상서 증 태자태보 상주국이며, 시호는 은열(殷烈)이다.
○ 창렬사(彰烈祠) 선조조에 세우고 뒤에 사액하였다. 김천일(金千鎰)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이며 본관은 언양이다. 벼슬은 판결사 창의사 증 영의정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황진(黃進) 자는 명보(明甫)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벼슬은 충청 병사 증 좌찬성이며,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최경회(崔慶會)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이며 본관은 해주이다. 벼슬은 경상우병사 증 좌찬성이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장윤(張潤) 자는 명보(明甫)이며, 본관은 목천(木川)이다. 벼슬은 진주 목사 증 병조판서이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이의정(李義精) 벼슬은 현감이다. 이상 5현(賢)은 선조 계사년 6월에 본주에서 전사하였다.
○ 충민사(忠愍祠) 효종 임진년에 세우고 현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김시민(金時敏) 자는 면오(勉吾)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벼슬은 우병사 증 영의정 상락부원군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양산도(梁山濤) 자는 회원(會元)이며, 벼슬은 공조 좌랑 증 좌부승지이다. 김상건(金象乾) 김천일의 법관인데 벼슬은 사포별좌 증 좌부승지이다. 이준민(李俊民) 벼슬은 거제 현령 증 병조 판서이다. 강희열(姜熙說) 의병장이다. 조경향(曺慶享) 벼슬은 진해 현감이다. 최기필(崔琦弼) 벼슬은 판관 증 호조 참의이다. 유사(兪)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의병장인데, 주부에 추증되었다. 이욱(李郁)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생원인데,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강희복(姜熙復) 의병장이다. 장윤형(張胤賢) 벼슬은 수문장 증 호조 좌랑이다. 박승남(朴承男) 벼슬은 판관이다. 하계선(河繼先) 유생인데,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최언량(崔彦亮) 본관은 삭녕(朔寧)이며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고종후(高從厚) 고경명(高敬命)의 아들로 의병 복수장이다. 벼슬은 임피 현령 증 이조 판서이며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이잠(李潛) 무과 출신으로, 적개의병장이다. 이숭인(李崇仁) 본관은 송경(松京)이며 무과 출신으로, 벼슬은 김해 부사 증 호조 판서이다. 성영달(成穎達) 본관은 창녕이며 무과 출신으로 벼슬은 경상 우병사이다. 윤사복(尹思復) 본주의 군관인데 벼슬은 첨정 증 호조 참의이다. 이인민(李仁民) 자는 자원(子元)이며 이준민의 아우이다.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손승선(孫承善) 의병대장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정유경(鄭惟敬) 벼슬은 주부이다. 김태백(金太白) 벼슬은 수문장이다. 박안도(朴安道)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양제(梁齊) 선무랑이었다. 이상은 선조 계사 6월에 본주에서 전사하였다.
【고읍】 굴촌(屈村) 서쪽으로 50리, 본래 신라 현의 땅인데, 경덕왕 16년에 굴촌이라 고쳐 강주(康州)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초에 와서 소속되었다. 문화(文和) 동남쪽으로 60리, 본래 신라의 교화량(蛟火良)이었는데, 경덕왕 16년에 문화라 고쳐 고성군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 때에 와서 소속되었다. 흥선(興善) 흥선도 가운데 있으며, 남쪽으로 70리이다. 본래 고려 유질(有疾)의 부곡이었는데, 현종 때 창선(彰善)이라 고치고 내속되었다. 충선왕(忠宣王)이 흥선이라 고친 뒤에 왜구로 인하여 인물이 흩어져 죽자 인하여 폐해버렸다. 살천(薩川) 서쪽으로 80리, 그 설치를 혁폐하여 마치지 않았다. 뒤에 강등시켜 부곡으로 삼았다. 그 우두머리가 머리를 깎았으므로 중대가리[僧首]라 하였다.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진주성(晉州城)의 함락과 명병(明兵)의 철환(撤還)



계사년 5월 초에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적이 경성(京城)을 버리고 갔다는 것을 듣고 비로소 여송(如松)에게 패문(牌文)을 보내어 적을 추격(追擊)하라고 독촉하였다. 적이 간 지가 이미 수십 일이나 되었는데, 응창은 사람들이 자기가 적을 놓아 주고 쫓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 두려워 짐짓 이러한 조처를 취하여 보인 것이었다.여송은 실상은 적을 두려워하여 길에서 천천히 행진하며 어떤 때는 한 군데서 여러 날씩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겨우 새재[鳥嶺]를 넘었을 때 유경(惟敬)이 왜병의 진영에 있으면서 여송에게 군사를 돌리어 강화(講和)를 완결시키자고 청하니, 여송은 도로 돌아와 경성에 주둔하고, 적도 천천히 물러가는데 우리 군사들은 도로 연변에 좌우로 비키면서 감히 나와 공격하는 이가 없었다.
○ 적이 이미 물러가서는 바닷가에 나누어 주둔하였으니, 울산(蔚山) 서생포(西生浦)로부터 동래(東萊)ㆍ김해(金海)ㆍ웅천(熊川)ㆍ거제(巨濟)에 이르기까지 머리와 꼬리가 서로 잇닿았는데, 16개소의 진지가 모두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서 성을 쌓고 참호를 파는 등 오래 머무를 계획을 하였다. 일설(一說)에는 왜병의 태반이 소굴로 돌아갔는데, 진해(鎭海)ㆍ창원(昌原)으로부터 동래ㆍ부산에 이르는 각 포구와 각 섬의 28부대는 행장(行長)ㆍ의지(義智) 등 5, 6명의 관할이고, 기장(機張)으로부터 울산에 이르는 14부대는 청정(淸正) 등 4, 5명이 거느리었는데, 그들은 모두 군사 만 명씩을 가졌었다고 한다. 여송이 드디어 여러 장수에게 부서를 나누어 유정(劉綎)을 성주(星州)의 팔거현(八莒縣)에 주둔하게 하고, 오유충(吳惟忠)은 선산(善山)의 봉계현(鳳溪縣)에 주둔하게 하고, 이영(李寧)ㆍ조승훈(祖承訓)ㆍ갈봉하(葛逢夏)는 거창(居昌)에 주둔하게 하고,낙상지(駱尙志)와 왕필적(王必廸)은 경주(慶州)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각각 군사 4, 5천 명씩을 거느리고 사면으로 적과 서로 버티고 있으면서 감히 나아가 공격하지 못하였다. 이들의 군량(軍糧)을 충청ㆍ전라도에서 가져갔는데, 험하고 막힌 데를 넘어 다니면서 여러 군영(軍營)에 나누어 주느라고 백성의 힘이 몹시 피곤하였다. 권율(權慄)을 시켜 유정의 군영에 있으면서 군사를 훈련하여 일을 거들어 주게 하고 또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를 파견하여 어기거나 태만함을 감독하게 하였다. 일설에는 유정ㆍ오유충은 각각 군사 4, 5천 명을 거느리고 성주와 대구에 진치고, 왕필적은 상주(尙州)에 진치고, 송대빈(宋大斌)ㆍ사대수(査大受) 낙상지 등은 호남에 내려가 위급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 그때 송응창이 적을 추격할 것을 독촉하였는데도 유정이 영남(嶺南)에 도착하여서 군사를 전진시키려고 하지 아니하므로 응창이 자못 그 미루적거림을 허물하였다. 여송이 정주(定州)로 돌아와 응창을 만나보고 적의 기세가 대단하다고 말하니 응창이 그 말을 믿고 도리어 강화(講和)하고자 하여, 우리나라가 여러 번 진격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사용재(謝用榟)ㆍ서일관(徐一貫)을 보내어 명 나라 조정에서 보낸 사자(使者)처럼 꾸며가지고 적을 타이르는 한편 여송은 유격(遊擊) 주홍모(周弘謨)를 시켜 적의 진영에 가게 하니 이로부터 사람을 보내어 왔다갔다 하는 일이 연속하게 되었다.
○ 처음에 여송이 유경을 시켜 왜에게 바다를 건너 갈 것을 타이르고, 또 서일관(徐一貫)ㆍ사용재(謝用榟)를 시켜 일본의 낭고야[郞古邪 나고야]에 들어가 관백(關白 평수길(平秀吉))을 만나보게 하였다. 유경이 왜장 비탄(飛彈守)ㆍ구대부(久大夫) 등과 더불어 서울에 도착하자 여송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화친하기를 청하나 조선의 두 왕자(王子)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장차 무엇으로 복명(復命)하겠는가.” 하니 비탄수가 즉시 손수 편지를 써주며 부산의 진영에 가서 왕자를 데리고 돌아오게 하였다. 6월에 적이 비로소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과 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 등을 돌려보냈다. 《계갑록(癸甲錄)》
○ 수길은 행장 등이 평양에서 패전하여 모든 왜병이 퇴각하였다는 말을 듣고 심히 성이 나서 새로 군사를 거느리고 비전주(肥前州)의 호실(護室)에 나와 주둔하고 있다가, 유경을 만나 화친을 맺으려 한다는 말을 듣자, 문득 이것으로 우리를 얽어매어 일을 그르쳐 주려는 간계를 품고 두 왕자와 대신들을 돌려보낼 것을 허락하고, 또 소서비탄수(小西飛彈守)를 사자(使者)로 보내어, 유경과 더불어 돌아와 명 나라 조정에 글월을 올리게 하는 한편 군사를 진주로 전진시켜 전년에 패전한 분을 씻겠다고 소리쳤다.
○ 처음에 행장이 유경을 전송하며 말하기를, “관백(關白)이 전년에 진주에서 패하였으므로 여러 장수가 모든 힘을 다하여 그 성을 쳐서 무찌르라고 하는 것을 내가 말리었으나 청정이 듣지 않으니, 일본의 군사가 반드시 진주로 향할 것인즉, 성을 비우고 나와 싸우지 말고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좋을 것이요.” 하니, 유경이 선산(善山)에 이르러서 우리나라 장수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 그때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이 각 도의 장수와 사졸을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였는데 명원은 선산(善山)에, 빈은 의령(宜寧)에 주둔하고,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ㆍ충청 병사 황진(黃進)ㆍ전라 방어사 이복남(李福男)은 각각 소속의 군사를 거느리고 모여들고, 감사 권율(權慄)은 새 군사를 거느리고 운봉(雲峰)은 넘어 모두 창녕ㆍ의령 등 고을에 진을 벌이니 관군과 의명이 모두 모이었다.권율이 거름강[歧江]을 건너 전진하고자 하니 곽재우(郭再祐)ㆍ고언백(高彦伯)이 말하기를, “적의 기세는 한창 치성한데, 우리 군사는 오합지중(烏合之衆)이 많고, 앞길에는 또 군량도 없으니 가볍게 전진할 수는 없다.” 하여 미적미적 결정하지 못하였다. 빈(薲)의 종사관 성호선(成好善)이 홀로 팔을 뽐내며 여러 장수들의 머뭇거림을 꾸짖고 율과 더불어 드디어 강을 건너 전진하여 함안(咸安)에 이르니, 성이 텅 비어서 모든 군사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풋감[靑柿]을 따먹으며 다시 싸울 마음이 없는데, 그 이튿날 적이 김해(金海)로부터 큰 병력으로 쳐들어온다는 보고가 왔다.이에 여러 사람들이 어떤 이는 마땅히 함안을 지켜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물러가 정암나루를 지켜야 한다고 하여, 떠들기만 하고 결정을 짓지 못하다가 적의 총소리가 들리자 모두 겁내어 다투어 성을 나가다가 다리줄[吊橋]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심히 많았으며 도로 정암나루로 건너와서 여러 장수는 모두 각기 흩어져 갔다.
○ 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과 판관(判官) 성수경(成守璟)은 명 나라 장수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일을 하는 임시 파견원(派遣員)으로 상주(尙州)에 있다가 적이 자기 고을로 향하였다는 말을 듣고 창황히 돌아온 지가 겨우 며칠밖에 안 되었었다.
○ 6월 15일에 적장 청정(淸正) 등이 30여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김해와 창원으로부터 물과 육지로 아울러 진군하니 선봉(先鋒)이 이튿날 함안(咸安)에 도착하였다. 그때 이빈ㆍ권율ㆍ선거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함안에 주둔하고 있다가 일시에 무너져 달아나니 그중 미처 도피하지 못한 자 중에는 짓밟히어 죽은 자가 많았다. 적이 함안을 불태워버리니 빈이 의령(宜寧)에 이르러 의논하기를, “흉악한 적이 반드시 진주를 함락시키고야 말 것이다.그렇다면 외로운 군사로는 보전하여 지키기 어려울 것이니 의병을 더 보내어 기세를 도와주는 것이 좋겠다.” 하니 곽재우가 홀로 이에 반대하여 말하기를, “권모(權謀)가 있는 자는 능히 군사를 쓸 줄 알고 지혜 있는 자는 적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이다. 지금 적병은 강성하고 정예하여 천하에 당할 수 없는 기세를 가지고 있는데, 3리(里) 밖에 안 되는 외로운 성을 어찌 능히 지킬 수 있겠는가. 또한 군사가 모두 성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안과 밖이 서로 응원하는 형세를 잃게 될 것이니, 나는 마땅히 밖에 있어서 응원을 하겠다.” 하고 성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이에 우감사(右監司) 김늑(金玏)이 성내어 말하기를, “장군이 대장의 명에 좇지 않으니 군법을 어찌하겠는가.” 하니 재우도 또한 성내어 말하기를, “내 한 몸의 죽고 사는 것은 처음부터 아까울 것이 없소 그러나 백 번 싸워 온 군사들을 어찌 차마 죽을 땅에 버릴 수 있단 말이요.” 하였다. 빈이 드디어 재우에게 정암나루를 맡아 지키게 하였다. 김천일이 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을 불러 창고의 곡식을 계산해 보니 수십만 석이 되었다.모든 장수들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성은 높고 튼튼하며 식량은 갖춰 있고 병기도 충분하니, 여기는 바로 오늘날 목숨을 바칠만한 곳이로다.” 하고, 즉일로 부서를 나누어 김천일과 최경회는 도절제(都節制)가 되고, 황진은 순성장(巡城將)이 되고, 각도의 관병(官兵)ㆍ의병의 장수들은 부대를 정하고 계엄(戒嚴)하여 변에 대비하였다.
○ 18일에 적병이 함안으로 부터 바로 정암나루로 건너오자, 재우는 형세가 서로 대적할 만하지 못하므로 물러났다. 군율ㆍ이빈ㆍ이복남 등은 물러나와 산음(山陰)으로 향하였다가 다시 전라도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적은 의령에 들어가 불지르고 노략질하였다.
○ 19일에 적이 진주로 향해 오는데, 산과 들을 메우고 총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척후병을 나누어 단성(丹城)ㆍ삼가(三嘉)를 향하고, 혹은 곤양(昆陽)ㆍ사천(泗川)을 향하여 응원의 길을 막았다. 선거이(宣居怡)ㆍ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晉州城)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많고 적음이 서로 현격한 차가 있으니 물러가 보전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니 천일이 성내어 꾸짖고 좇지 아니하므로 거이 등은 군사를 이끌고 도로 물러나와 빈(薲) 등과 더불어 함양으로 향하였다. 어떤 이는 운봉(雲峰)이라고 한다.
○ 21일에 적의 선봉 기병 수백 명이 마현(馬峴)에 이르러 군세를 시위하며 말을 달려 돌진하더니 이튿날 적의 대군이 이르렀는데, 그 형세가 바람 앞의 불길보다도 더하여 드디어 성을 포위하였다. 여러 날 동안 적의 기세는 날마다 치성해져서 구원병이 통할 수 없는데 적은 호각을 불어 서로 호응하여 한꺼번에 탄환을 발사하니 어지럽게 성안에 떨어지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아침이 되어서 보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서로 베개하고 있었다. 하루는 경회(慶會)와 천일(千鎰)이 문루에 올라 바라보다가, “구원병이 많이 온다.” 하니, 여럿이 모두 크게 기뻐서 큰북을 치며 다투어 바라보니 멀고 가까운 백 리의 거리는 모두 적병이었다. 이에 천일이 슬피 탄식하기를, “하늘이 만약 정의(正義)를 도와서 우리가 공을 이루고 명 나라에 들어간다면 하란(賀蘭)의 고기를 회치고 구워서 함께 먹을 것이다.” 하였다.
○ 고성(固城) 의병장 최강(崔堈)ㆍ이달(李達)이 진주로 구원을 갔다가 적병의 세력이 지난해와 비교가 안 되므로 손을 대지 못하고 도로 고성으로 향하였다. 함안의 피난민으로 최강을 따라오던 자 3백여 명이 적의 포위를 당하여 거의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강이 말을 타고 달려들어 밤새도록 격전하여 선비와 백성들이 그의 힘으로 안전할 수 있었다. 이를 바라보는 자가 그를 가리켜 천고(千古)의 용장이라고 하였다.
○ 이여송이 낙상지(駱尙志)ㆍ송대빈(宋大斌) 등을 시켜 호남으로부터 나아가 진주를 구원하게 하는 한편 영남에 머물고 있는 장수 유정(劉綎)ㆍ오유충(吳惟忠)을 시켜 힘을 합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군사의 세력이 대적할 수 없으므로 모두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다.
○ 송응창이 행장의 진영에 글을 보내어 도로 들어가라고 책하니, 회답하기를 “일본은 지난 해 진주에서 죽은 자가 심히 많고 또 당신 나라 군사들이 여러 번 일본의 풀 베는 사람을 살해하였으므로, 관백(關白 수길(秀吉))이 명을 내려 진주를 공격하여 성을 무너뜨리고 참호를 메워서 전년의 원한을 씻으라고 한다.” 하였는데, 대개 청정이 이 거사(擧事)를 힘써 주장하여 기어코 진주를 함락시키고야 말려 하므로 유정이 글을 보내어 책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일월록》
○ 그때 진주에는 군사 6만 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전에 비하여 10배나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지킬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늙은 기녀(妓女) 하나가 홀로 근심하므로 천일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전에는 군사는 비록 적었으나 장수와 군사가 서로 사랑하고 명령이 한 군데서 나왔으므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군사를 도맡아 통솔하는 이가 없어 장수는 군사를 알지 못하며 군사는 장수를 익숙히 알지 못하므로 이 때문에 근심합니다.” 하였다. 천일이 요망한 말이라 하여 베어 죽였는데, 수일 후에 성이 함락되었다. 《부계기문》
○ 29일에 적이 진주를 함락시켰다. 창의사 김천일은 그 아들 상건(象乾)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ㆍ충청 병사 황진(黃進) 이상의 세 사람은 진양(晉陽)에 삼충사(三忠祠)를 세웠다.ㆍ전라도의 복수대장(復讐大將) 고종후(高從厚)ㆍ우의병부장(右義兵副將) 고득뢰(高得賚)ㆍ좌의병부장(左義兵副將) 장윤(張潤)ㆍ의병부장(義兵副將) 이잠(李潛)ㆍ영광(靈光) 의병장 심우신(沈友信)ㆍ태인(泰仁) 의병장 민여운(閔汝雲)ㆍ해남(海南) 의병장 임희진(任希進)ㆍ도탄(陶灘) 복병장(伏兵將) 강희보(姜希甫)ㆍ의병장 이계련(李繼璉)ㆍ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ㆍ사천현감 김준민(金俊民)ㆍ남포 현령(藍浦縣令) 송제(宋悌)ㆍ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ㆍ의병장 강희열(姜熙說)ㆍ진해 현령 조경형(曹慶亨)ㆍ판관 최기필(崔琦弼)ㆍ좌랑 양산숙(梁山璹)ㆍ주부(主簿) 유복립(柳復立)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충청도의 수령(守令)으로서 충청 병사(兵使)를 따라 죽은 자로서 기록하지 못한 것이 많다.
○ 그때 천일은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황진(黃進)은 7백 명을 거느리고, 경회(慶會)는 5백 명을 거느리고, 종후(從厚)는 4백 명을 거느리고, 윤(潤)은 3백 명을 거느리고, 계련(繼璉)은 백여 명을 거느리고, 변사정(邊士貞)은 그의 부장(副將) 이잠(李潛)을 보내어 3백 명을 거느리고, 여운(汝雲)은 2백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22일에 적의 대군이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문경원(聞慶院)의 산 중턱과 향교 앞길에 나누어 진을 쳤다.처음 성 안에서 교전하여 30여 명을 쏘아 죽이니 적이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물러가더니, 초저녁 무렵에 또 와서 크게 싸우다가 이경(二更)에 물러가고, 삼경(三更)에 또 왔다가 오경에 물러갔는데, 우리 군사가 쏘아 죽인 것은 그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았다.
○ 24일에는 적이 더 많이 와서 마현(馬峴)과 그 동편 쪽에 진을 치고, 25일에는 적이 동문(東門)에다가 흙을 메워서 큰 언덕을 만들고 거기에 흙집을 짓고서 성안을 굽어보며 총탄을 비 오듯이 쏘므로 황진(黃進)도 또한 성안에 높은 언덕을 마주 쌓았는데, 초저녁 때부터 시작하여 밤을 새우면서 황진이 옷과 전립(戰笠)을 벗고 친히 돌을 져나르니 성 안의 남자ㆍ여자들이 모두 감격하여 울며 힘을 다하여 도와 쌓아서 하룻밤 사이에 마치고 드디어 현자포(玄字砲)를 발사하여 적의 굴을 부숴뜨리니 적도들이 또 고쳐 쌓아 놓았다. 이날 적은 세 번 왔다가 세 번 물러가고 또 네 번 싸워 네 번 물러갔다.
○ 26일에 적이 나무 궤짝을 만들어 생가죽으로 싸서 각자가 짊어지고 이고 하여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와서 자성(子城 본성에 붙여 따로 쌓은 성)을 헐려고 하므로 성안에서 큰돌을 굴려 내리고 화살을 비 오듯이 쏘니 적이 또 물러갔다. 적이 또 동문 밖에다가 큰 나무를 연결하여 놓고 그 위에 판잣집을 설치하고 성안에 불을 놓자 초가집들이 일시에 연소(延燒)하였다.이에 예원(禮元)이 겁이나서 넘어지므로 천일이 예원 대신에 장윤(張潤)을 가목사(假牧使)로 삼았다. 그때 큰 비가 와서 활과 살은 모두 풀어져 늘어지고, 군사도 피로가 겹쳐 힘이 모두 빠져 늘어졌는데 적이 성중에 전단(傳單)을 던져 말하기를, “대국(大國)의 군사도 항복하였는데 너희 나라가 감히 항거하느냐.” 하자 성중에서 답하기를, “우리나라는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울 뿐이다. 더구나 명 나라 군사 30만 명이 지금 곧 추격하여 너희들을 남김없이 무찌를 것이다.” 하니 적이 팔뚝을 걷어붙이며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는 이미 다 물러갔다.”고 하였다. 이날 세 번 싸워 세 번 물러가고 밤에도 네 번 싸워 네 번 물러갔다.
○ 27일에 적이 동ㆍ서쪽의 두 성문 밖에다 다섯 개의 흙 언덕을 쌓아 올리고 연결하여 방책(防柵)을 만들어 성중을 굽어보며 끊임없이 총탄을 발사하여 성 안에는 죽은 자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적이 또 큰 궤짝을 만들어 네 바퀴가 달린 수레로 꾸며서 쇠 갑옷 입은 적병 수십 명이 궤수레를 둘러쓰고 성 밑에 와서 쇠 송곳으로 성을 뚫었다. 힘세기가 군중에서 제일가는 이종인(李宗仁)이 연거푸 적병 5명을 때려죽이니, 나머지가 모두 도망쳐 달아나므로 성중에서 드디어 불더미를 묶어 기름을 부어 가지고 던지니 궤 속의 적병이 모두 타 죽었다. 초저녁에 적이 다시 신북문(新北門)을 침범하였으나 종인이 힘껏 싸워 물리쳤다.
○ 28일 날 샐 무렵에 종인이 지키고 있던 성첩(城堞)에 돌아와 보니 예원이 밤 경비를 잘하지 못해서 적이 몰래 성을 뚫어놓아 곧 무너지게 되었으므로 종인이 크게 성내어 책하였다. 적이 성 아래로 육박해 왔으므로 성중에서는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니 적의 죽은 자가 심히 많았다. 적의 장수 한 명이 탄환에 맞아 죽자 뭇 왜병들이 시체를 끌고 갔다.진(進)이 성 밑을 굽어보면서, “오늘 싸움에 죽은 적이 매우 많아서 천여 명은 되겠다.”고 하는데 한 놈의 적병이 성 밑에 엎드려 있다가 쳐다보고 총을 쏘니 탄환이 나무판자에 빗맞고 튀어서 진의 왼쪽 이마에 맞아서 그만 죽었다. 그때 진(進)과 윤(潤)이 가장 힘써 싸우기로 모든 장수에 으뜸간다고 하여 온 성안이 의지하여 소중히 여기더니, 진이 탄환에 맞아 죽으니 성중이 두려워하였다.
○ 29일에 서예원으로 화진에 대신하여 순성장(巡城將)을 삼았다. 예원이 겁을 먹어 정신을 잃고 전립(戰笠)을 벗어 놓은 체 말을 타고 울며 가니, 경회가 군사들의 마음을 경동시킨다고 하여 곧 목을 베려 하다가 그만 두고, 장윤으로 순성장을 대신 삼았는데 얼마 안 되어 윤 또한 탄환에 맞아 죽었다. 미시(未時)에 동문의 작은 성이 비로 인하여 무너지자 적의 군사가 개미같이 붙어 올라오므로 종인이 친병(親兵 호위병)과 더불어 활과 화살을 버리고, 바로 창과 칼로 적을 치니, 죽은 적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적이 물러가서 다시 서북문에서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자 창의군(창의사 김천일의 군사)들이 무너져 달아나 모두 촉석(矗石樓)에 모였으므로 적이 드디어 성에 올라와 칼을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이를 보자 예원이 먼저 달아나니 모든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고 종인도 탄환에 맞아 죽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천일을 부축하여 물러나 피하게 하였더니, 천일은 꿋꿋이 앉아 움직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여기에서 죽어야 한다.” 하고 드디어 강에 몸을 던져 죽었으며 적은 본성(本城)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들었다.이 때에 죽은 자가 6만여 명이나 되었다. 후일에 김늑(金玏)이 찰방(察訪)으로 하여금 가서 험시(驗視)하게 하였더니, 성 안의 시체는 겨우 천여 명이요, 촉석루에서부터 남강의 북쪽 언덕에 이르기까지에는 쌓인 시체가 서로 겹쳐져 있고, 청천강(菁川江 남강)으로부터 무봉(武峰)에 이르는 5리 사이에는 시체가 강을 덮어 떠내려가고 있었다. 백사가 지은 것으로 《일월록》에 전한다.
○ 이잠(李潛)ㆍ김준민(金俊民) 등은 화살이 이미 다하게 되자 곧 죽창(竹槍)을 가지고 맞대고 치며 싸웠으므로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죽었다. 《난중잡록》 ○《조야기문》에는 죽은 자가 만 명이라고 하였다.
○ 일설에는 적이 며칠을 두고 사람들(우리나라 백성)을 무찔러 죽여도 모두 죽일 수가 없으니 속여 말하기를, “사창(司倉)의 큰 곳간에 피해 들어가는 자는 죽음을 면한다.” 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마침내 창고 안에 들어가니 적이 드디어 불을 질러 모두 태워 죽였다고 한다. 《난중잡록》
○ 일설에는 종인이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면서 싸우다가 남강에 이르러서 왼쪽과 오른쪽 겨드랑에 적병 두 놈을 잡아 끼고는 물에 뛰어들며 크게 부르짖기를,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는다.” 하였다고 한다.
○ 준민이 홀로 말을 달려 거리에서 싸우면서 좌우로 돌격하니 적의 군사들이 이리저리 쓰러졌다. 온종일 달리는데 적의 탄환과 칼이 모두 맞추지 못하였다. 끝내 죽은 곳을 알지 못하였다.
○ 진사 문홍헌(文弘獻)ㆍ정자(正字) 오빈(吳玭)ㆍ참봉 고경형(高敬兄) 등이 모두 따라 죽었다.
○ 성안의 군사와 백성 중에 죽은 자가 6, 7만 명이나 되었고, 장사로서 빠져나온 자는 두서너 명뿐이었는데 정기수(鄭麒壽) 등 두어 사람은 남강으로부터 헤엄쳐 나와 살아 돌아왔다.
○ 천일과 경회와 진 세 사람에게는 모두 찬성(贊成)을, 종인에게는 병조 판서를, 준민에게는 형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 처음에 심유경(沈惟敬)이 부산(釜山)에 들어가 관백(關白)으로부터 항복하는 표문(表文) 2통을 받아왔는데 표문의 문체가 일본 사람의 글이 아니어서 의심하였었다. 지휘(指揮) 이영춘(李英春)이 또 소서비탄수(小西飛彈守)와 함께 명 나라 조정에 돌아가서 행장(行長) 등이 거짓 항복하는 표문으로 속이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데, 또 유경이 막 도착하자 진주가 함락되었으므로 왜적이 화친하겠다는 의사가 성실하지 않다 하여 드디어 소서비를 요동에 억류(抑留)하여 두고 오래도록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 그때 이덕형(李德馨)이 이여송의 접반(接伴使)로 있을 때에, 명 나라의 장수가 적이 거짓으로 화친을 청한다는 속이는 말을 듣고 머뭇머뭇 결정하지 못하고 날자를 미루어 기회를 놓쳤다. 하루는 여송이 적벽도(赤壁圖)를 내 보이므로 덕형이 시를 짓기를,

이기고 지는 것은 한 판 바둑인데 / 勝敗分明一局棋
병가(兵家)에서 가장 꺼리는 것은 머뭇거리며 의심하는 것일세 / 兵家最忌是遲疑
적벽강에서 전에 없던 큰 승전(勝戰)은 / 須知赤壁無前蹟
오직 장군이 책상을 찍을 때에 있었던 줄 알아라
/ 只在將軍斫案時

하였다. 그 말에 풍자가 있었으니 명 나라 장수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지봉유설》
○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을 해임하고 권율을 도원수 제도도 순찰사(都元帥諸道都巡察使)에 임명하였다. 그때 율은 함양(咸陽)에서 물러나와 남원(南原)에 있었는데, 명을 받고 도로 영남으로 향하다가 이빈(李薲)과 선거이(宣居怡) 등 여러 장수들이 함양에서부터 오는 것과 서로 만나 운봉(雲峰)에 머무르면서 대기하였다.
○ 사대수(査大受)가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에서 남원에 이르러 낙상지와 송대빈 두 장수가 진주를 구원하지 않은 것을 국문(鞫問)하였다. 낙상지와 송대빈이 남원으로부터 구례(求禮)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 7월 5일에 적이 전라도를 침공하였다. 고부 군수(古阜郡守) 왕경조(王景祚)와 전 판관 노종령(盧從齡) 등이 무너져 달아났다. 낙상지와 송대빈 두 장수가 물러나와 남원으로 돌아가니 적이 구례의 성과 못을 무너뜨려 뭉개버렸다. 호남의 백성들이 전일에 왜적을 경험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낮은 산이나 얕은 골짜기에서도 오히려 병화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모조리 도륙을 당하였다.
○ 이날 밤에 남원성을 지키던 군사가 일시에 성을 넘어서 흩어졌다.
○ 7일에 적병 수천 명이 성수령(星宿嶺)을 향하였다. 이빈ㆍ홍계남의 군사가 모두 무너졌다. 송대빈이 두골봉(頭骨峰)에 매복하였다가 스스로 천여 명을 거느려 항거하여 물리쳤다. 낙상지ㆍ사대수등이 길을 나누어 따라가 쫓으니 적이 드디어 순자강(鶉子江)을 건너가서 곡성(谷城)의 촌락을 불태웠다. 대빈이 군사와 더불어 돌아와 남원을 지켰다.
○ 8월에 송응창ㆍ이여송이 왜와 더불어 화친을 약속하고 인하여 명 나라 천자에게 아뢰기를, “왜놈들은 이미 모두 바다를 건너가고 다만 한두 진영만이 부산에 머물러 있으면서 명 나라에서 수길(秀吉)을 임금으로 봉해 주는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란을 겪은 나라에 명 나라의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무르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요양(遼陽)에 철환(撤還)하여서 위급에 대비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라는 조서가 내렸다. 유정(劉綎)의 군사 만여 명은 머물러 있어서 우리나라를 지키게 하고 유정을 도독(都督)으로 임명하였다.
○ 문안사가 명 나라 장수를 국경에서 문안하였더니 유황상(劉黃裳)이 회답하기를, “삼도(三都)가 비록 수복되었으나 머물러 지키는 군사가 2만 명도 못 되며 모두가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으니, 어찌 항상 왕국(조선)을 위하여 부산에서 지키고 있겠습니까. 두 왕자가 비록 돌아왔으나 나라 사람들은 그다지 기뻐하는 것 같지 않고 또한 나라에는 한 명의 쓸만한 군사도 없으니 능히 왜병이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다시 서쪽으로 달아나고자 하여도 오히려 임금의 앉은 자리가 오래도록 따뜻할 겨를이 없을까 두렵습니다.밤중에 분향(焚香)하고 고요히 앉아 스스로 마음에 물어보십시오. 장차 무엇으로써 자존(自存)하려 합니까. 이때에 하지 아니하면 마침내 할 수 있는 때가 없을 것입니다. 급히 8도의 40세 이하 20세 이상의 강장한 남자를 매도에 만 명씩 모집하여 유정(劉綎)에게 보내서 그 옷과 갑옷을 주어 부대에 편입하여 날마다 훈련을 받게 하며, 양곡을 저축하고 선척[船隻]을 정비하여 왜병의 오는 것을 대비하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패망하기를 서서 기다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우리 병부(兵部)에서 잠자는 것도 밥 먹는 것도 모두 폐하고 임금을 위하여 왜적이 물러간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임금을 위하여 간절히 근심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보고 말하기를, “유원외(劉員外)의 회답을 보니 비록 거만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가 우리나라를 근심하는 것은 지극하다. 대신들의 근심하는 것이 만약 모든 명 나라의 관원이 우리나라를 근심하는 것과 같다면 우리나라가 떨치지 않는 것을 어찌 근심하리요.” 하였다. 《일월록》
○ 명 나라 선비 제령(齊苓)이 황제에게 상소하여 송응창이 임금을 속이고 군사를 철수한 죄와 왜적이 그냥 주둔하고 있는 사실을 극력 말하였더니 아뢰는 글이 들어가기 전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 왜의 추장(酋長)이 또 명 나라에서 통혼하여 줄 것, 조선의 땅을 베어줄 것, 저를 임금으로 봉해 줄 것, 곤룡포(袞龍袍)를 줄 것 등 일곱 가지 일을 명 나라 조정에 요구하였다.
○ 송응창이 이미 돌아가며 우리나라에서 황진(黃進)을 명 나라에 보내어 적의 정세를 알리고자 하니 응창이 막아서 하지 못하였다.
○ 10월에 김수(金睟)를 보내어 적의 정세를 알리고 명 나라의 장수와 재상들이 속여 엄폐(掩蔽)한 사실을 모두 진술하여 장수와 재상이 과도관(科道官)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원망하여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모두 교활하고 간사하여 은덕을 원수로서 갚으니 인심의 험악하기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너희 나라가 나를 죽일까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 여송의 나이가 30여 세인데 처음 올 때는 얼굴과 모발이 매우 젊었더니 영남에서 돌아왔을 때는 수염에 흰 털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를 위하여 이렇게 반백이 되었다.”고 하였다.
○ 뒤에 임금이, 평양에 사당을 짓고 석성(石星)ㆍ이여송(李如松)을 제사지내며 이여백(李如栢)ㆍ장세작(張世爵)ㆍ양원(陽元)을 배향(配享)하게 하고 무열(武烈)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주D-001]하란(賀蘭) : 당 나라 안록산(安祿山)의 난리 때에 장순(張巡)이 수양(睢陽)을 지켜 싸우다가 군사를 가지고 있는 다른 고을의 하란(賀蘭)에게 구원을 청하였더니, 하란이 거절하여 수양이 함락되고 장순은 죽었다.
[주D-002]적벽강 …… 알아라 : 중국 삼국 시대에 조조(曹操)가 80만 군사를 거느리고 오(吳) 나라에 침입하여 손권(孫權)을 항복하라고 위협할 때에 손권의 신하들 사이에 항복하자는 사람이 많이 있었으므로 손권이 용단을 내려 칼로 책상을 찍으면서, “나더러 조조에게 항복하라는 자가 있다면 이처럼 찍으리라.” 하였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우리나라는 옛날에는 서원이 없었으나 가정(嘉靖 가정은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연간(1542)에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豐基郡守)가 되었을 때에 풍기군의 속현인 순흥(順興)은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본관(本貫)이며, 살았던 옛터이므로 거기에다 그의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선비들이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곧 백운동(白雲洞)이다. 《후청쇄어》
이황(李滉)이 세붕을 이어 군수가 되어, 조정에 건의하여 송(宋) 나라의 고사에 따라 사액(賜額)한 것과 책을 내려줄 것, 토지와 노비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더니, 명종 5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하고, 또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서원에 사액하는 것과 책을 내린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명신록》
○ 주세붕이 황해 감사가 되었을 때에 해주에 문헌당(文憲堂)을 세웠는데 향선생(鄕先生) 문헌공(文獻公) 최충(崔冲)을 모신 것이었다. 사우와 강당(講堂)ㆍ재사(齋舍)가 모두 향교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그리고 유생을 뽑아서 거처하게 하고 경비를 공급하였다. 이로부터 다른 도의 각 고을에서도 서원을 세우는 자가 있었다. 만력 4년 선조 9년 에 이르러서는 백운동서원을 세운 지가 겨우 30여 년밖에 되지 않는데, 모든 지방에서 다투어 본받게 되니 조정에서는 혹 사액과 사서(賜書)한 곳도 있으나, 명현을 모시는 사우이거나 특수한 지방이 아니면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향사도 없으면서 서원을 세운 것이 더욱 많으니 대개 60~70개 소나 되었다. 《후청쇄어》
○ 서원은 송 나라 때에 비롯하여 원(元) 나라의 말기에 성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서원을 창건한 후에 각지에서 계속 건립하게 되었는데, 영천(永川)에는 임고서원(臨皐書院), 함양(咸陽)에는 남계(灆溪)서원, 송도(松都)에는 숭양(崧陽)서원, 성주(星州)에는 천곡(川谷)서원, 해주에는 문헌(文憲)서원, 능성(綾城)에는 쌍봉(雙峯)서원, 양주에는 도봉(道峯)서원, 예안(禮安)에는 도산(陶山)서원, 안동에는 수곡(樹谷)서원, 영천(榮川)에는 이산(伊山)서원, 강릉에는 구산(丘山)서원, 대구에는 획암(畫巖)서원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선대의 학자가 살던 곳이거나, 혹은 왕래한 곳으로 사우(祠宇)를 아울러 세워서 향사하였다. 이외에도 또 많이 있다. 《동각잡기》
○ 각 지방의 향교는 곧 공자묘가 있는 곳이다.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 교육하므로 모든 서원에 비교하면 존비(尊卑)가 있다. 그러나 서원의 선비는 주세붕이 처음 세워 선비 중에서 해액자(解額者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가 거하게 하고, 비록 해액자가 아니라도 반드시 글을 많이 아는 자로서 보충하도록 규율을 세웠으므로, 거기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였다. 향교는 생원ㆍ진사에 합격한 자는 가지 아니하고 대개 용렬한 잡것들이 병역을 피하기 위한 자가 많았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향교를 천하게 보고 서원을 높이고 받들었다. 그러나 무지한 자가 스스로 원유(院儒)를 가탁하여 수령을 깎고 추었으므로 수령 또한 삼가고 두려워하였다. 《후청쇄어》
○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이 이미 창건되었는데, 모든 유생이 가(稼) 가정(稼亭) 이곡(李穀)ㆍ목(牧) 목은(牧隱) 이색(李穡) 부자의 좌차(坐次)가 나란히 되는 것을 의심하여 서울에 있는 자손 이덕형(李德泂)에게 묻고 학식이 높은 여러 선비에게 물었더니 모두 결정하지 못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에게 가서 물었더니, 항복이 말하기를, “옛날에 오기량(吳紀亮)의 아들 즐(騭) 부자가 함께 중서령(中書令)이 되어서 조회 때에는 늘 임금이 운모 병풍(雲母屛風)을 주어 사이에 치고 따로 앉았으니, 이제는 장자(樟子)를 사이에 치고 격좌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드디어 그 말을 따라 장자를 치고 앉게 하였다. 《죽창한화(竹窓閒話)》
목은의 화상이 문헌서원에 있었는데, 권근(權近)이 찬(贊)을 지어서 그 뒤에 쓰기를, “영락 갑오 9월 하한(下澣) 문인 권근 기(記)”라 하였다. 덕산(德山)에 있는 이씨의 옛집에 또 목은의 영당이 있었는데, 그 기문에 정덕(正德) 갑술이라 하였다. 화상이 처음에 두 벌 있었는데, 그 중 한 벌은 치관(豸冠)을 쓰고 서대(犀帶)를 띠며, 붉은 비단 옷을 입고 수염이 반백인 것은 지금서원의 소장본이 그것이다. 영당본은 그것으로부터 전해온 것이며, 한 벌은 야인(野人)의 복색이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원본은 임진병란에 잃어 버렸는데, 뒤에 일본으로 사신 갔던 자가 얻어 왔다. 일본의 노인이 주면서, “이것은 옛날의 귀인 도화(貴人圖畫)”라고 하였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 자손에게 주었는데, 타국으로 돌아다닌 지가 오랜 세월이 되었으므로 깁[生綃]이 찢어져서 그 아래 절반이 없어졌다. 자손이 두 벌을 모사(模寫)하여 한 벌은 태창동(太倉洞) 이 중추(李中樞)의 집에 봉안하고, 한 벌은 구본과 아울러 문헌 사당에 봉안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배천(白川) 문회서원(文會書院)은 선조가 어필로 써서 사액하였더니, 임진년 병란에 편액은 불에 탔는데 숙종이 다시 어필로 액을 써주었다.
○ 홍가신(洪可臣)이 부여 현감(扶餘縣監)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의열서원(義烈書院)을 세우고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ㆍ계백(階伯)ㆍ흥수(興首)와 고려 정언 이존오(李存吾)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날 밤에, 가신의 꿈에 네 사람이 와서 인사를 하고 착한 일에 감동하는 빛이 있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서생(書生)이 집사(執事)로 재사(齋舍)에 갔는데, 이날 밤 또 꿈에 네 사람이 같이 문에 들어오면서 읍을 하고 당에 올라왔다고 한다. 《죽창한화(竹窓閒話)》. 이 일은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서원기(書院記)>에 상세하게 말했다.
광해 때, 평양에 인현서원(仁賢書院)을 세우고 조정에서 향사의 예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하였다. 감사 김신국(金藎國)이 아뢰기를, “향사의 잘못은 김계휘(金繼輝)에게서 시작한 것입니다. 대개 기자(箕子)는 동방의 성군(聖君)으로 이미 국가의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데, 다시 사자(士子)들이 사사로이 향사하는 것은 외람한 것입니다. 팔조(八條)의 교(敎)가 처음 동방에 펴졌으니, 이제 서원을 구도(舊都 평양)에 세우고 많은 선비가 모여서 장수(藏修)하고, 그가 끼친 가르침을 강명(講明)하면 족한 것이요,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염헌집(恬軒集)》
○ 서울의 북쪽에 조계동(曹溪洞)이 있다. 이이첨(李爾瞻)이 조계동의 조자(曹字)가 조식(曹植)의 성자(姓字)와 같은 것을 이유로 사당을 세워서 조식을 향사하려 하여 서원을 짓고, 그 무리를 모아서 제 주구(走狗)들을 길렀다. 임숙영(任叔英)이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조계에 조남명을 향사한다면 공덕리(孔德里)에는 공자를 향사해야 한단 말인가.” 하였다. 계해년 인조반정 후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조식의 서원을 근년에 중흥동(中興洞) 어구에 세웠는데, 요새 들으니 어떤 사람이 모두 헐고 그 위패를 던지기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지극히 해괴한 일입니다. 이 서원은 적괴(賊魁) 이첨이 주장한 것이므로 유식한 사자(士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고, 처음에 창설할 때부터 지금까지 지키는 자는 모두 무뢰한 흉도로서, 서울과 지방에 폐를 끼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었으므로 이제 이런 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서원에 대한 원망은 비록 이첨으로 말미암은 것이나, 조식은 유현(儒賢)인데 어찌 이첨의 개인적인 사람이겠습니까. 인심이 이와 같으니 실로 사림의 욕됨이 되니, 청하옵건대, 소속 고을에 영을 내려, 군인을 많이 정해서 엄숙하게 금단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소암집(踈庵集)》 《월사남궁록(月沙南宮錄)》
○ 효종 때 서필원(徐必遠)의 상소로 인하여 조정에서 비로소 서원에 대해서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기로 의논하였고, 숙종 갑자년에 이르러서는 명을 내려 각 도에 서원을 사사로 세우는 것을 금하였다. 영종 신유년에는 무릇 갑오년 이후에 창설한 것은 모두 훼철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금령을 범하고 사사로 세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필원의 소 결(缺)
○ 영종 신유년 영조 7년 4월에 전교하기를, “갑오년에 법을 정한 후에 조정에 아뢰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사원(祠院)을 세우거나 또는 기설(旣設)된 서원에도 사사로이 추향(追享)한 자는 유현(儒賢)이거나 대신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철거하고, 당시에 그것을 알고 묵인했던 감사는 이미 죽은 자 외에는 모두 파직하고, 수령은 잡아다가 처벌하며, 앞장서서 주창한 유생은 5년 동안 과거에 응하지 못하게 하고, 이후에 아뢰지 않고 세운 사원 및 추향자를 알고도 묵인하는 감사는 잡아다 처벌하며, 수령은 고신(告身)을 빼앗고 삼등을 내리는 율로 다스리게 하고, 유생은 멀리 귀양을 보내라.”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근년에 이 일로써 공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소위 조사한다고 하고 책임 얼버무리기만 일삼으니 실로 잘못된 것입니다. 또 서원 외에 향현사(鄕賢祠)라 일컫고, 혹은 영당(影堂)이라 일컫고서 그 중에 세력이 있는 자면 감사와 수령이 덮어주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이후로는 감히 그 같은 짓을 못하게 하라는 뜻으로 비변사로부터 특별히 공문을 보내 엄하게 단속하고, 또 조사한 보고가 온 후에, 조정에서 다만 훼철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그 영대로 즉시 거행할는지 꼭 알 수 없으니, 여기에 대해서는 각 도의 감사로 하여금 따로 관원을 파견하여 직접 가서 훼철시킨 뒤에 사실대로 보고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하게 하였다.
○ 10월에 정언 어석윤(魚錫胤)의 상소에 비답하기를, “아아, 저 태학에 이미 성묘(聖廟)를 받들었고, 각 도에는 향교(鄕校)가 있는데 막중한 대성(大聖)을 어찌 감히 사사로 서원을 세워 받들 수 있겠느냐. 지명이 비록 같으나 조정에서 명령한 것이 아니니, 변변치 못한 선비들이 또 어찌 감히 마음대로 서원을 세우겠느냐.이 폐단을 버리지 아니하면 태학을 도리어 경하게 보고 사사 원우(院宇)를 중하게 볼 것이며, 나라에서 태학과 향교를 설치한 도리와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하고 성인을 높이는 뜻이 차차 희미해 질 것이니, 태산(泰山)에 제사한 것을 배척한 공자의 말씀을 어찌 과하다 하겠는가. 위패는 거두어 향교에 묻고 화상은 거두어다 각 성전(聖殿)에 받들면, 높이고 중히 여기는 예가 갖추어 지리라.” 하였다.
○ 영종 때 명을 내려 예안(禮安)의 도산서원과 해주의 소현서원의 그림을 그려 올리게 해서 보았다.


경기(京畿)
개성부(開城府) 숭양서원(崧陽書院) 만력 계유년에 세웠으며 선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 태조조에 들어 있다.ㆍ서경덕(徐敬德)ㆍ김상헌(金尙憲) 인조조의 정승ㆍ김육(金堉) 효종조의 정승ㆍ조익(趙翼) 효종조의 정승 ○ 곁에 정몽주 화상이 있다.
화곡서원(花谷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선조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화담이 살았던 옛 터 : 서경덕(徐敬德)ㆍ박순(朴淳) 선조조의 정승ㆍ허엽(許曄) 선조조의 명신ㆍ민순(閔純) 추배(追配)하였다.
오관서원(五冠書院) 신유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상충(朴尙衷) 자는 성부(誠夫)이며 호는 반남(潘南),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보문각(寶文閣) 직제학을 지냄. 목은(牧隱)의 문하생(목은의 문인이란 말의 잘못된 기록임. 목은의 매부로서 나이는 네 살 아래임) : 박세채(朴世采) 숙종조의 정승
숭절서원(崇節書院) 현종 병오년에 세웠으며 숙종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 선조(宣祖) 임진조에 들었다.ㆍ김연광(金鍊光) 호는 송암(松巖)이며 송도(松都)에 살았다. 임진년에 회양(淮陽) 부사로서 사절(死節)하여 예조 참판을 증직하였다.ㆍ유극량 선조 임진조에 들었다.
강화(江華) 충렬사(忠烈祠) 인조 임오년에 세웠으며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상용(金尙容) 인조조의 정승ㆍ이상길(李尙吉)ㆍ이시직(李時稷)ㆍ홍명향(洪命享)ㆍ황선신(黃善身)ㆍ권순장(權順長)ㆍ김겸(金兼) 이상은 동벽(東壁)에 모셨다.ㆍ심현(沈誢)ㆍ윤전(尹烇)ㆍ송시영(宋時榮) 호는 야은(野隱)ㆍ구원일(具元一)ㆍ강흥업(姜興業) 이상은 서벽(西壁)에 모셨다. 모두 강도사절(江都死節)에 상세하다.
서하영당(西河影堂) 갑자년에 세웠다. : 이민(李敏)ㆍ조관빈(趙觀彬)
□□영당(□□影堂) 병술년에 세웠다. : 이인엽(李寅燁)
보명영당(保明影堂) 영종 을축년에 세웠으며 갑곶나루[甲串津]에 있다. : 이성량(李成樑) 명 나라 영원백(寧遠伯)ㆍ이여매(李如梅) 명 나라의 도독(都督). ○ 모두 중국인이다.
양주(楊州) 도봉서원(道峯書院) 만력 계유년에 절터에 세웠으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기묘년의 명신ㆍ송시열(宋時烈)
석실서원(石室書院) 숭정(崇禎) 갑오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김상헌ㆍ김상용ㆍ김수항(金壽恒) 현종조의 정승ㆍ민정중(閔鼎重) 숙종조의 정승ㆍ이단상(李端相)ㆍ김창협(金昌協)
청절사(淸節祠) 병인년에 세웠으며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 김시습(金時習) 단종조에 들었다. 곁에 박세당(朴世堂)의 화상이 있다.
임간서원(臨澗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남을진(南乙珍) 고려 문하부사(門下府事)이며, 호는 사천(沙川)ㆍ조견(趙狷) 태조조에 들어 있다.
파주(坡州) 파산서원(坡山書院)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으며 효종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성수침(成守琛)ㆍ성수종(成守琮)ㆍ백인걸(白仁傑) 선조조의 명신ㆍ성혼(成渾)
자운서원(紫雲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숭정□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선조조의 명신ㆍ김장생(金長生)ㆍ박세채
풍계사우(豊溪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
여주(驪州) 기천서원(沂川書院) 만력 기축년에 세웠는데 임진병란에 불에 타 없어지고, 인조 을축년에 사액하고 기유년에 중건하였다. : 김안국(金安國) 기묘의 명현ㆍ이언적(李彦迪) 명종조의 명현ㆍ홍인우(洪仁祐)ㆍ정엽(鄭曄)ㆍ이원익(李元翼)ㆍ홍명구(洪命耉)ㆍ이식(李植)
고산서원(孤山書院) 숭정(崇禎) 병인년에 세웠으며,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 자는 순경(順卿)이며 호는 석탄(石灘)이요, 본관은 경주이다. 고려 정언(正言)이 되어 신돈(辛旽)을 책하는 상소를 하여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가 죽었다.
광주(廣州) 절현사(節顯祠) 무진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상헌(金尙憲)ㆍ정온(鄭蘊)ㆍ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구암서원(龜巖書院) 정사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집(李集)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는 둔촌(遁村)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벼슬은 고려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이다.ㆍ이양중(李養中) 호는 석탄(石灘)이며 벼슬은 고려 형조 참의ㆍ정성근(鄭誠謹) 갑자화적(甲子禍籍)조에 들었다.ㆍ정엽(鄭曄)ㆍ오윤겸(吳允謙)ㆍ임숙영(任叔英)
수곡서원(秀谷書院) 을축년에 세웠으며,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의건(李義健) 자는 의중(宜仲)이며, 호는 동은(峒隱)이요,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벼슬은 공조 정랑이며 집의를 승직하였다.ㆍ조속(趙涑)ㆍ이후원(李厚源) 효종조의 정승
명고서원(明皐書院) 신축년에 세웠으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익(趙翼)ㆍ조복양(趙復陽)ㆍ조지겸(趙持謙)
수원(水原) 매곡서원(梅谷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는데 갑진년에 불에 탔다. : 송시열(宋時烈) 화상(畫像)이 있다.
남양(南陽) 용백사(龍栢祠) 병오년에 세웠으며 현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한 제갈량(漢諸葛亮)ㆍ송 호안국(宋胡安國)ㆍ윤계(尹棨)
안곡서원(安谷書院) 현종 무신년에 세웠으며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는데, 기유년에 철폐하였다가 경신년에 복구하였다. : 박세훈(朴世勳) 호는 백촌(栢村)이며, 벼슬은 첨정인데 이조 참의를 증직하였다.ㆍ박세희(朴世熹) 기묘의 명현ㆍ홍섬(洪暹) 선조조의 정승
장단(長湍) 임강서원(臨江書院) 인조 계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안유(安裕) 향(珦)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ㆍ이색(李穡) 태조조에 들었다.ㆍ김안국(金安國)ㆍ김정육(金正堉) 모두 기묘의 명현
용인(龍仁) 심곡서원(深谷書院) 효종 경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충렬사(忠烈祠) 만력 병자년에 세웠으며 광해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 현종 신축년에 세웠다. : 조광조ㆍ김식(金湜) 기묘 명현ㆍ김육(金堉)ㆍ남언경(南彦經)ㆍ이제신(李濟臣) 추가하여 배향하였다.
안성(安城) 도기서원(道基書院) 무신년에 세웠으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장생(金長生)
남파서원(南坡書院) 신미년에 세웠다. : 홍우원(洪宇遠)
포천(抱川) 용연서원(龍淵書院) 숙종 병진년에 세웠으며 신미년에 사액하였다. : 이덕형(李德馨) 선조조의 정승ㆍ조경(趙絅)
화산서원(花山書院) 숭정 을해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복 선조조의 정승
김포(金浦) 우저서원(午渚書院) 무자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
지평(砥平) 운계서원(雲鷄書院) 계사년에 세웠고 숙종 갑오년에 ‘용문(龍門)’이라 사액하였다. : 조성(趙晟)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며, 벼슬은 의영 고령(義盈庫令)에 이르렀다.ㆍ조욱(趙昱) 명종조의 유일(遺逸)ㆍ신변(申忭)ㆍ조형생(趙亨生) 호는 둔곡(遯谷)이며, 벼슬은 현감이고 욱(昱)의 손자이다. ○ 위의 두 위[二位]는 처음에 함께 배향[幷亨]하였다가 숙종 갑오년에 전교로 인하여 따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웠다.
교하(交河) 신곡서원(新谷書院) 계해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윤선거(尹宣擧)
풍덕(豐德) 귀암서원(龜岩書院) 을묘년에 세웠으며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이천(利川) 운봉서원(雲峯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서희(徐熙) 호는 복천(福訓)이며 시호는 장위공(章威公)이다. 벼슬은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냈다.ㆍ이관의(李寬義) 호는 율정(栗亭)이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안국(金安國)
금천(衿川) 충현서원(忠賢書院) 효종 갑오년에 세웠으며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강감찬(姜邯贊) 고려 태사(太師)인데 시호는 인헌공(仁憲公)이다.ㆍ서견(徐甄) 태조조에 들었다.ㆍ이원익(李元翼)
□□영당(□□影堂) 인조가 옛터에 집을 짓게 하고 유상(遺像)을 봉안하였다. : 이원익(李元翼)
과천(果川) 민절사(愍節祠) 숙종 신유년에 세웠으며 신미년에 사액하였다. :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모두 단종조에 상세하다.
노강서원(鷺江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박태보(朴泰輔)
호계서원(虎溪書院) 숙종 신유년에 세웠다. : 조종경(趙宗敬) 호는 독암(獨庵)이며 전한(典翰)을 지내고, 승지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종경(宗敬)의 손자이다.
사충서원(四忠書院) 영종 을사년에 세웠다가 정미년에 훼철(毁撤)하고 을해년에 중건하였는데 각각 화상이 있다. :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頤命)ㆍ조태채(趙泰采)ㆍ이건명(李健命)
마전(麻田) 미강서원(嵋江書院) 신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허목(評穆) 숙종 때의 정승
인천(仁川) 학산서원(鶴山書院) : 숙종 임오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단상(李端相)ㆍ이희조(李喜朝) 호는 간암(艮庵)이며 추향하였다. 이조 참판을 지냈고 찬성을 증직하였다.
연천(漣川) 임장서원(臨漳書院) 정해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주자 화상(朱子畫像)
가평(加平) 잠곡서원(潛谷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김육(金堉)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박순(朴淳)ㆍ이의건(李義健)ㆍ김수항(金壽恒)
고양(高陽) 문봉서원(文峯書院) 무진년에 세웠고 기축년에 사액하였다. : 민준(閔純)ㆍ남효온(南孝溫) 갑자화적(甲子禍籍)조에 들었다.ㆍ김정국(金正國)ㆍ기준(奇遵) 기묘 명현ㆍ홍이상(洪履祥)ㆍ정지운(鄭之雲) 자는 정이(靜而)이며 호는 추만(秋巒)이고, 사재(思齋)의 문인이다. 일찍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였다.ㆍ이신의(李愼儀) 선조조의 명신ㆍ이유겸(李有謙) 참의를 지냈으며 호는 만회(晩晦)이다.
통진(通津) 영당(影堂) 기사년에 사액하였다. : 장만(張晩)
양성(陽城) 덕봉서원(德峯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오두인(吳斗寅)


홍충도(洪忠道 충청도의 별칭)
공주(公州) 충현서원(忠賢書院) 만력 신미년에 세웠고 천계(天啓)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존오(李存吾)ㆍ이목(李穆) 무오당적(戊午黨籍)조에 들었다.ㆍ성제원(成悌元) 명종 유일(遺逸)ㆍ조헌(趙憲)ㆍ김장생(金長生)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서기(徐起) 선조 때의 학자
청강서원(滄江書院) 숭정 무진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황신(黃愼)
도산서원(道山書院) 계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권득기(權得己) 호는 만회(晩悔)이며, 예조 좌랑을 지냈는데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다.ㆍ권시(權諰)
부용강영당(芙蓉江影堂)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이만원(李萬元) 호는 이우당(二憂堂)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평안도 관찰사[箕伯]를 지냈다.
청주(淸州) 쌍천서원(雙泉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신식(申湜) 호는 용졸재(用拙齋)이며, 대사헌을 지냈고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퇴계(退溪)의 문인이며 광해조 때 폐모 의논에 불참하였고, 《가례언해(家禮諺解)》를 저술하였다. 효도로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신항서원(莘巷書院) 융경(隆慶) 경오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색(李穡)ㆍ이이(李珥)ㆍ경연(慶延) 자는 징군(徵君)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인데 현감을 지냈으며, 성종 때는 유일(遺逸)로 주부(主簿)를 지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 박훈(朴薰) 기묘 명현ㆍ김정(金淨) 기묘 명현ㆍ한충(韓忠) 기묘 명현ㆍ송인수(宋麟壽) 을사당적(乙巳黨籍)에 들었다.ㆍ송상현(宋象賢)ㆍ이득윤(李得胤) 호는 서계(西溪)이며, 괴산(槐山) 군수를 지냈다.
화양서원(華陽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어필(御筆)로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화양동(華陽洞)에 또 만동묘(萬東廟)가 있는데 계미년에 세웠고, 명 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향사한다.
국계서원(菊溪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박증영(朴增榮) 호는 눌재(訥齋)이며, 교리를 지냈다.ㆍ변경복(卞景福) 호는 백음(栢陰)이다.ㆍ이덕수(李德洙) 호는 이유당(怡愉堂)이며, 대사간을 지냈다.ㆍ이수언(李秀彦) 호는 농계(聾溪)이며, 대사헌을 지냈다.
기암서원(機巖書院) 숙종 기묘년에 세웠다. : 강백년(姜栢年)
송천서원(宋泉書院)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김사렴(金士廉) 벼슬은 안렴사(按廉使)이다.ㆍ최유경(崔有慶) 호는 죽정(竹亭)이며, 참판을 지냈고 시호는 평도공(平度公)이다.ㆍ이정간(李貞幹) 벼슬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고 시호는 효정공(孝靖公)이다.ㆍ박광우(朴光祐) 을사당적조에 들었다.ㆍ이지춘(李之春) 호는 삼우당(三友堂)이며, 장령을 증직하였다.ㆍ조강(趙綱) 호는 모계(慕溪)이며 현감을 지냈고, 승지를 증직하였다.ㆍ이대건(李大建) 이시발(李時發)의 부(父)이다. 호는 오촌(梧村)이며 진사에 급제하고 27세에 죽었다. 사람들이 관중안자(館中顔子)라 하였다. 우상(右相)을 증직하였다.ㆍ이제신(李濟臣)ㆍ최석정(崔錫鼎) 숙종조의 정승ㆍ이인혁(李寅爀) 호는 매산(梅山)이며 사복정(司僕正)을 지냈다. 이상 3인을 추배하였다.
백록서원(白麓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권상(權常) 호는 남강(南岡)이며, 동흥군(東興君)으로 봉하였다. 동지(同知)를 지냈고 영상을 증직하였다.
송곡서원(松谷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변시환(卞時煥) 호는 일공(一筇)이며 흥덕(興德) 현감을 지냈다.
봉계서원(鳳溪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 선조조의 명신ㆍ신송(申誦) 호는 하은(霞隱)이며, 감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신집(申潗) 호는 종산(鍾山)이며 지평(持平)을 증직하였다.
□□영당(□□影堂) 경인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
체화당(棣華堂) : 노계원(盧繼元) 호는 송헌(松軒)이다.ㆍ노후원(盧後元) 호는 국헌(菊軒)이다.ㆍ노종원(盧從元) 호는 매헌(梅軒)이며, 지평을 지냈다.ㆍ노일원(盧一元) 호는 죽헌(竹軒)이다.
표충사(表忠祠) 영종 신해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봉상(李鳳祥) 병사로서 영종 무신년에 순절하였다. 시호는 충민공(忠愍公)이며, 좌찬성을 증직했다.ㆍ남연년(南延年) 영장(營將)이다. 시호는 충장공(忠壯公)이며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홍림(洪霖) 비장(稗將)을 지냈고, 병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충주(忠州) 운곡서원(雲谷書院) 만력 경자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정구(鄭逑)
팔봉서원(八峯書院) 만력 임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자(李耔) 기묘 명현ㆍ이연경(李延慶) 기묘 명현ㆍ김세필(金世弼) 기묘명현ㆍ노수신(盧守愼) 선조조의 정승
누암서원(樓巖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고, 임오년에 사액하였는데 갑진년에 철훼(撤毁)하였다가 을사년에 복구하였다. : 송시열(宋時烈)ㆍ민정중(閔鼎重)ㆍ권상하(權尙夏)
충렬사(忠烈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고 영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임경업(林慶業)
문의(文義) 노봉서원(魯峯書院) 만력 갑인년에 세웠고, 효종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 송인수(宋麟壽)ㆍ정렴(鄭)
검담서원(黔潭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송준길(宋浚吉)
덕천사우(德川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다. : 유희령(柳希齡) 호는 몽암(夢庵)이며 호조참의를 지냈다.ㆍ유흥룡(柳興龍) 호는 숙옹(塾翁)이며 감찰을 증직하였다.ㆍ우신언(禹愼言) 호는 묵재(默齋)이며, 찰방을 지냈다.ㆍ정응창(鄭應昌) 호는 유항(柳巷)이며 공조 좌랑을 증직하였다.
괴산(槐山) 화암서원(花巖書院) 천계 임술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이문건(李文楗) 호는 검재(黔齋)이며 승지를 지냈다.ㆍ노수신(盧守愼)ㆍ김제갑(金悌甲) 목사를 지냈고, 영상을 증직하였다. 호는 의재(毅齋)이다.ㆍ유근(柳根) 광해조의 문형(文衡)ㆍ이신의(李愼儀)ㆍ허후(許詡) 이상(貳相)을 지냈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ㆍ박세무(朴世茂) 헌납을 지냈고,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ㆍ전유형(全有亨) 호는 학송(鶴松)이며 형조 참판을 지냈다.
아산(牙山) 인산서원(仁山書院) 경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조광조(趙光祖)ㆍ정여창(鄭汝昌)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이언적(李彦迪) 명종 명현ㆍ이황ㆍ기준(奇遵)ㆍ이지함(李之菡) 선조 때 사람ㆍ홍가신(洪可臣) 호는 만전(晩全)이며 판서를 지냈다.ㆍ이덕민(李德敏) 처사이며 참봉을 지냈고, 호는 송파(松坡)이다.ㆍ박지계(朴知誡) 4인은 무신년에 추향하였다.
현충사(顯忠祠) 숙종 병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 선조조의 명신ㆍ이완(李莞) 순인의 종자(從子)이다.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냈고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이봉상(李鳳祥)
연기(燕岐) 봉암서원(鳳巖書院) 신묘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한충(韓忠) 기묘 명현ㆍ김장생(金長生)ㆍ송준기ㆍ송시열
제천(堤川) 남당서원(南塘書院) 만력 경진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
영춘(永春) 송파서원(松坡書院) 계축년에 세웠다. : 윤선거(尹宣擧)
보은(報恩) 상현서원(象賢書院) 가정(嘉靖) 기유년에 세웠고 만력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성운(成運) 명종조의 유일(遺逸)ㆍ성제원(成悌元) 명종조의 유일로 보은(報恩) 현감을 지냈다.ㆍ조헌(趙憲) 신유년에 추향하였다.ㆍ송시열 을해년에 추향하였다.
산앙사영당(山仰祠影堂)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ㆍ송시열ㆍ권상하(權尙夏)
단양(丹陽) 단암서원(丹巖書院) 현종 경자년에 세웠고, 숙종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 우탁(禹倬) 고려 때에 좨주(祭酒)를 지냈다. 호는 역동재(易東齋)이며 자는 보안(甫安)이며, 안향(安珦)의 문인이다.ㆍ이황(李滉)
목천(木川) 도동서원(道東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정구(鄭逑)ㆍ김일손(金馹孫) 무오당적에 들었다ㆍ황종해(黃宗海) 호는 오천(杇淺)이다.
홍산(鴻山) 청일서원(淸逸書院) 천계 신유년에 세웠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시습(金時習)
창렬사(彰烈祠) 삼학사(三學士)를 향사하였다.
옥천(沃川) 창주서원(滄洲書院) 만력 무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ㆍ김집(金集)ㆍ송시열ㆍ송준길ㆍ곽은(郭垠) 호는 용촌(龍村)이며 승지를 지냈다. 효종 경인년에 따로 창주사우(滄洲祠宇)를 세워서 향사하였다.
용문영당(龍門影堂) 무인년에 세웠다. : 송시열
호계사우(虎溪祠宇) 숭정(崇禎) 신묘년에 세웠다. : 남수문(南秀文) 호는 경재(敬齋)이며 직제학을 지냈다.
대곡영당(代谷影堂) 계사년에 훼철하였다. : 전팽령(全彭齡) 호는 송정(松亭)이며 감사를 지냈다.
표충사(表忠祠)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ㆍ조완기(趙完基)
신창(新昌) 도봉서원(道峯書院) 경술년에 세웠다. : 조익(趙翼)ㆍ조극선(趙克善) 자는 유선(有善)이며 호는 야곡(冶谷)이다.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웠으며 유일(遺逸)로 장령(掌令)을 지냈고 이조 참의를 증직하였다.
청풍(淸風) 봉강서원(鳳崗書院) 신해년에 세웠으며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 김식(金湜)ㆍ김권(金權)
황강서원(黃江書院) 영종 병오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권상하
연산(連山) 돈암서원(遯巖書院) 숭정 계유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김장생ㆍ김집ㆍ송준길ㆍ송시열
귀산서원(龜山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윤전(尹烇)ㆍ윤순거(尹舜擧)ㆍ윤원거(尹元擧) 자는 백분(伯奮)이며 벼슬은 진선(進善)을 지냈다.
팔현서원(八賢書院) 임오년에 세웠는데, 지금은 액(額)을 충곡(忠谷)이라 한다. : 백제 장군 계백(階伯)ㆍ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ㆍ김익겸(金益兼)
휴정서원(休亭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유무(柳懋) 호는 휴계(休溪)이며 찰방을 지냈다.ㆍ이항길(李恒吉) 호는 과암(果庵)이며 참봉을 지냈다.ㆍ김망(金望) 호는 삼육재(三六齋)이며 현감을 지내고 승지에 증직되었다.ㆍ권□(權□) 호는 반곡(盤谷)이며, 감사를 지내고 영상에 증직되었다.
보령(保寧) 화암서원(花巖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지함(李之函)ㆍ이산보(李山甫)ㆍ이몽규(李夢奎) 호는 천휴당(天休堂)이며, 추향되었다.
홍주(洪州) 녹운서원(綠雲書院) 임자년에 세웠고, 숙종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혜학서원(惠學書院) 숙종 을유년에 세웠고 경종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세귀(李世龜) 호는 양와(養窩)이며, 목사를 지냈다.
용계서원(龍溪書院) 숙종 갑오년에 세웠다. : 윤증(尹拯)
황간(黃澗) 모현서원(慕賢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조위(曺偉)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박영(朴英) 중종조의 명신ㆍ김시창(金始昌) 호는 풍정(嵐亭)이며, 효절(孝節)로써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ㆍ박응훈(朴應勳) 호는 오촌(梧村)이다.ㆍ송시열(宋時烈)
송계서원(松溪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다. : 남지언(南知言) 호는 삼괴당(三槐堂), 참봉을 지냈다.ㆍ박유동(朴惟東) 호는 일석(一石)이며, 참봉을 지냈다.
한천서원(寒天書院) 정유년에 세웠고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서천(舒川) 명곡서원(鳴谷書院) 임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산보(李山甫)ㆍ조헌(趙憲)ㆍ조수륜(趙守倫) 자는 경지(景至)이며, 호는 풍옥헌(風玉軒)이고, 호조 좌랑을 지냈으며,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수륜(守倫)의 아들이며, 추향되었다.
부여(扶餘) 의렬사(義烈祠) 만력 을해년에 세웠고, 선조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성충(成忠) 백제(百濟)의 좌평(佐平)을 지냈다.ㆍ흥수(興首) 백제의 좌평을 지냈다.ㆍ계백(階伯) 백제의 장군ㆍ이존오(李存吾) 고려의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다.ㆍ정택뢰(鄭澤雷) 호는 화강(花岡)이며, 광해조 때 남해(南海)에 귀향갔다. 지평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ㆍ황일호(黃一皓) 호는 지천(芝川)이며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고 찬성에 증직되었다.
부산서원(浮山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숙종 기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집(金集)ㆍ이경여(李敬輿) 인조조의 정승
청안(淸安) 귀계서원(龜溪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이준경(李浚慶) 명종조의 정승ㆍ서사원(徐思遠) 호는 낙재(落齋)이다. 현감을 지냈다.ㆍ박지화(朴枝華) 자는 군실(君實)이며, 호는 수암(守庵)이고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교관(敎官)을 지냈고, 예서(禮書)에 정통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물에 빠져 자결하였다.ㆍ이득철(李得澈) 위에 보라. 호는 신곡(莘谷)이다.ㆍ이당(李瑭) 호는 방촌(芳村)이며 참봉을 지냈고 추배되었다.
□□사우(□□祠宇) 영종 기미년에 세웠다.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며, 단종조의 사람이다.ㆍ이보흠(李甫欽) 본관이 영천(永川)이며, 순흥(順興) 부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영동(永同) 초강서원(草江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박연(朴堧) 호는 난계(蘭溪)이며, 세종조의 명신이다.ㆍ박사종(朴嗣宗) 호는 읍청(挹淸)이며 참봉을 지냈다.ㆍ송방조(宋邦祚) 병조 좌랑을 지냈다.ㆍ송시영 위에 보라ㆍ송시열ㆍ윤황(尹煌)
화암사우(花巖祠宇)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장항(張沆) 호는 눌재(訥齋)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시호는 문현공(文顯公)이다.ㆍ박흥생(朴興生) 호는 국당(菊堂)이며 현령(縣令)을 지냈고 공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장필무(張弼武) 호는 백야(栢冶)이며, 자는 무부(武夫)요, 시호는 양정공(襄貞公)이다. 청렴결백한 장군으로서 절도사를 지냈고,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박인(朴忍) 만호(萬戶)를 지냈다.ㆍ장지현(張知賢) 호는 삼괴당(三槐堂)이며 감찰을 지냈다. 임진왜란에 순절하였는데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필무(弼武)의 아들이다.
회덕(懷德) 숭현사(崇賢祠) 만력 기유년에 옮겨 세웠다. : 정광필(鄭光弼) 중종조의 정승ㆍ김정(金淨)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ㆍ이시직(李時稷)ㆍ송인수(宋麟壽)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영(宋時榮) 이시직과 송시영의 사당은 따로 있다.
정절사(靖節祠) 갑자년에 세웠다. : 송유(宋愉)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ㆍ백팽년(朴彭年)ㆍ송갑조(宋甲祚) 호는 수옹(睡翁)이며, 참봉을 지냈고 영상에 증직되었다.ㆍ송상민(宋尙敏) 호는 석곡(石谷)이며 좌랑을 증직하였다.ㆍ김경여(金慶餘) 부제학을 지냈으며 영상에 증직되었다. 호는 송애(松崖)이며 추배되었다.
종회사영당(宗晦祠影堂)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송시열(宋時烈)
용호사우(龍湖祠宇) 정축년에 세웠다. : 강학년(姜鶴年) 호는 복천(復泉)이며, 장령을 지냈고 대사헌에 증직되었다.ㆍ강세귀(姜世龜) 호는 삼휴당(三休堂)이며, 대사간을 지냈다.
미호서원(渼湖書院)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송규렴(宋奎濂) 호는 제월당(霽月堂)이며 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이성(尼城) 노강서원(魯崗書院) 갑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윤황(尹煌)ㆍ윤문거(尹文擧)ㆍ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
온양(溫陽) 정퇴서원(靜退書院) 기사년에 세웠다. :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맹희도(孟希道) 호는 동포(東浦)이며 수문제학(修文提學)을 지냈다. 사성(思誠)의 부(父)이며, 추향되었다.ㆍ홍가신(洪可臣)
충효사우(忠孝祠宇) 숭정 갑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ㆍ강봉수(姜鳳壽) 호는 창암(窓巖)이며 참찬에 증직되었다.ㆍ조상우(趙相禹) 호는 시암(時庵)이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강백년(姜栢年)ㆍ윤현(尹俔)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며 도사(都事)를 증직하였고, 추향하였다.
면천(沔川) 향현사(鄕賢祠) 병술년에 세웠다. : 이안눌(李安訥)
대흥(大興) 우천향현사(牛泉鄕賢祠) 정해년에 세웠다. : 이약수(李若水) 호는 우천(牛泉)이며 진사에 합격하였고, 기묘 명현이다. ○ 소정방사(蘇定方祠)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청산(靑山) 덕봉서원(德峯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조헌(趙憲)ㆍ송시열(宋時烈)
임천(林川) 칠산서원(七山書院) 정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ㆍ유계(兪棨)
예산(禮山) 덕잠서원(德岑書院) 을유년에 세웠고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김구(金絿) 기묘 명현
집성사영당(集成祠影堂) 기축년에 세웠다. : 주자ㆍ송시열
평택(平澤) 포충사우(褒忠祠宇) 신축년에 세웠고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향현사(鄕賢祠):우남양(禹南陽) 호는 운곡(雲谷)이며, 처사를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
한산(韓山) 문헌서원(文獻書院) 만력 갑오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곡(李穀) 고려조에서 한산군(韓山君)으로 봉하였으며, 호는 가정(稼亭)이다.ㆍ이색(李穡)ㆍ이종학(李種學) 호는 인재(麟齋)이며 제학(提學)을 지냈다.ㆍ이개(李塏)ㆍ이자(李耔)
진천(鎭川) 백원서원(百源書院) 가정(嘉靖) 임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종학(李種學)ㆍ김덕숭(金德崇) 호는 모재(慕齋)이며, 본읍 군수를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이여(李畬) 호는 송광(松匡)이며 문학(文學)을 지냈다.ㆍ이부(李阜) 호는 행원(杏園)이며, 교리를 지냈고 현량과에 합격하였다. 김유신(金庾信) 사당은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지산서원(芝山書院)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석정(崔錫鼎) 숙종조의 정승
서산(瑞山) 성암서원(聖岩書院) 을해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유숙(柳淑) 고려조에서 찬성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고, 자는 순부(純夫)이며, 호는 사암(思庵)이다.ㆍ김홍욱(金弘郁) 호는 학주(鶴洲)이며 판서에 증직되었다.
인정서원(仁政書院) 중간에 폐지하였다가 다시 세웠다. 송곡향현사(松谷鄕賢祠)라고도 한다. : 유방택(柳方澤) 호는 금헌(琴軒)인데 고려조에서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를 지냈다.ㆍ정신보(鄭臣保) 본관은 서산(瑞山)이며 고려조에 인주(麟州) 수령을 지냈다.ㆍ정인경(鄭仁卿) 신보(臣保)의 아들인데, 고려조의 중찬(中贊)을 지냈으며, 시호는 양렬공(襄烈公)이다.ㆍ유백유(柳伯濡) 방택(方澤)의 아들인데 호는 저정(樗亭)이며,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연풍(延豐) 원천사(源泉祠) 기축년에 세웠다. : 이기홍(李箕洪) 호는 직재(直齋)이며 집의(執義)를 지냈다.
해미(海美) □□영당(□□影堂) 임진년에 세웠다. : 남구만(南九萬) 숙종조의 정승
진잠(鎭岑) 집성사(集成祠) 숙종 갑술년에 세웠는데, 각각 화상이 있다. : 주자(朱子)ㆍ송시열(宋時烈)
은진(恩津) 갈산사(葛山祠) 숙종 계사년에 창건하였다. : 강응정(姜應貞) 생원에 합격하였고, 호는 화재(和齋)이다.ㆍ서익(徐益) 호는 만죽헌(萬竹軒)이며, 의주 목사를 지냈다.ㆍ양응춘(楊應春) 호는 도곡(道谷)이며, 현감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금곡사(金谷祠) 무진년에 중건하였다. : 김수남(金秀南) 호는 만치당(萬癡堂)이며, 병조 정랑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비인(庇仁) 청절사(淸節祠) 경인년에 세웠다. : 유기창(兪起昌)ㆍ유여림(兪汝霖) 기창(起昌)의 아들인데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안공(景安公)이다.
전의(全義) 뇌암서원(雷岩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이상(李翔) 본관은 우봉(牛峯)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호는 타우(打愚)이다.
덕산(德山) 회암서원(晦庵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이담(李湛) 호는 정존재(鄭存齋)이며, 부학(副學)을 지냈다.ㆍ조극선(趙克善)
석성(石城) 봉호서원(蓬湖書院)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윤문거(尹文擧)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 소수서원(紹修書院) 가정(嘉靖) 임인년에 세웠고 명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안유(安裕)ㆍ안축(安軸) 자는 당지(當之)이며, 호는 근재(謹齋)요, 본관은 복주(福州)이다.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고,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해졌다.ㆍ안보(安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ㆍ주세붕(周世鵬) 호는 신재(愼齋)이며 참판을 지냈고 예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단계서원(丹溪書院) 효종 임진년에 세웠다. : 김담(金淡)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기영사(耆英祠) 병진년에 세웠다. : 금축(琴軸) 호는 송계(松溪)이며, 진사이다.ㆍ남몽오(南夢鰲) 호는 삼송(三松)이며 진사이다.ㆍ박선장(朴善長) 호는 수서(水西)이며, 도사를 지냈다.ㆍ권호신(權虎臣) 호는 도은(陶隱)이며, 생원이다.
금성단(錦城壇) 영조 임술년에 세웠는데 은액충신신단(恩額忠臣神壇)이다.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
도계견일사(道溪見一祠) 효종 정축년에 세웠다. : 이수형(李秀亨) 호는 도촌(桃村)이며 평시령(平市令)을 지냈다.ㆍ이여빈(李汝馪) 호는 취사(炊沙)이며 전적(典籍)을지냈다.
초계(草溪) 청계서원(淸溪書院) 가정 갑자년에 세웠다. : 이희안(李希顔) 명종조의 유일(遺逸)ㆍ김치원(金致遠) 호는 탁계(濯溪)이며, 찰방을 지냈고, 추향되었다.ㆍ이대기(李大期) 호는 설학(雪壑)이며, 정랑을 지냈다.
송원서원(松原書院) 강희(康熙) 임신년에 세웠다. : 안우(安遇) 호는 노계(蘆溪)이며, 현감을 지냈다.ㆍ노필(盧㻶) 호는 묵재(墨齋)이며, 지평을 지냈다.ㆍ안극가(安克家) 호는 뇌암(磊巖)이며, 현감을 지냈고 추향되었다.ㆍ노극성(盧克誠) 호는 매죽와(梅竹窩)이며 직장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영주(榮州) 이산서원(伊山書院) 가정 무오년에 세웠고, 선조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삼봉서원(三峯書院) 숭정 계미년에 세웠다. : 김이음(金爾音) 호는 삼로(三路)며, 본관은 함창(咸昌)이고, 호조 참판을 지냈다.ㆍ이해(李瀣) 명종조 사람ㆍ김개국(金盖國) 호는 만취(晩翠)이며, 정랑을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ㆍ김융(金隆) 호는 물암(勿巖)이며, 참봉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오계서원(汚溪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다. : 이덕홍(李德弘) 호는 간재(艮齋)이며,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의산서원(義山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다. : 이개립(李介立) 호는 성오당(省吾堂)이며,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김응조(金應祖) 호는 학사(鶴沙)이며 좌윤(左尹)을 지냈다.
장암서원(壯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귀산정사(龜山精舍) 만력 을묘년에 세웠는데, 상현사(象賢祠)라고도 한다. : 김담(金淡)ㆍ박승임(朴承任) 호는 소고(嘯皐)이며 대사간을 지냈다.ㆍ김늑(金玏) 호는 백암(栢巖)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고,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영조(金榮祖) 호는 망와(忘窩)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사계정사(泗溪精舍) 효종 경자년에 세웠다. : 황효공(黃孝恭) 호는 귀암(龜巖)이다.ㆍ나이준(羅以俊) 호는 매헌(梅軒)이며 사간을 지냈다. 병자호란에 진사로서 홀로 성전위판(聖殿位版)을 배행(陪行)하였다.
용궁(龍宮) 삼강서원(三江書院) 숭정 계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이황(李滉)ㆍ유성룡(柳成龍)
소천서원(蘇川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전원발(全元發) 호는 국파(菊坡)이며 고려조에서 병부 상서를 지냈고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마산리사(馬山里社)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는데 완택향사(浣澤鄕社)이다. : 정귀령(鄭龜齡) 호는 삼수(三樹)이며, 현감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정옹(鄭雍) 수찬을 지냈다.ㆍ정사(鄭賜) 직제학을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다.ㆍ정환(鄭渙) 응교를 지냈다.ㆍ정광필(鄭光弼)
기천정사(箕川精舍) 현종 기유년에 세웠다. : 문근(文瑾) 기묘록(己卯錄)에 있다.ㆍ문관(文瓘) 근(瑾)의 아우이며, 호는 옥계(玉溪)고, 승지를 지냈다.ㆍ이구(李搆) 기묘록(己卯錄)에 있다.ㆍ이문흥(李文興) 호는 몽암(夢庵)이며, 대사성을 지냈다.ㆍ안준(安俊) 호는 노포(蘆浦)이며 고려조에서 판봉상(判奉常)을 지냈다.
충효사(忠孝祠) 갑신년에 세웠다. : 반유(潘濡) 찰방에 증직되었다.ㆍ반충(潘沖) 호는 관물당(觀物堂)이다.
용곡리사(龍谷里社) 을축년에 세웠다. : 강응청(姜應淸) 호는 삼산(三山)이며 인의(引儀)를 지냈다.ㆍ강제(姜霽) 호는 백석(白石)이며, 이조좌랑을 지냈다.ㆍ강우(姜䨞) 호는 석봉(石峯)이며, 현감을 지냈다.
개령(開寧) 덕림서원(德林書院) 임진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김종직(金宗直)ㆍ정붕(鄭鵬)ㆍ정경세(鄭經世)
예안(禮安) 도산서원(陶山書院) 만력 갑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조목(趙穆)
역동서원(易東書院) 융경 경오년에 세웠고, 숙종 병술년에 사액하였다. : 우탁(禹倬)
청계서원(淸溪書院) 정미년에 세웠다. : 이식(李埴) 퇴계(退溪)의 아버지이며 진사이다.ㆍ이우(李堣) 호는 송재(松齋), 호조 참판을 지냈다. 퇴계의 숙부이다.ㆍ이해(李瀣)
분강서원(汾江書院) 숙종 기묘년에 세웠다. : 이현보(李賢輔)
향현사(鄕賢祠)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계양(李繼陽) 진사이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퇴계의 조부이다.ㆍ김효려(金孝廬) 진사이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동계정사(東溪精舍) 숙종 기묘에 세웠다. : 금난수(琴蘭秀) 호는 성성재(惺惺齋)이며,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퇴계 문인인데 징역(徵辟)하여도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영양(英陽) 영산서원(英山書院) 효종 신묘년에 세웠고, 숙종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향현사(鄕賢祠) 숙종 기사년에 세웠다. : 남민(南敏) 당(唐)의 안렴사(按廉使)였다. 신라가 영양군(英陽君)으로 봉하고, 의령 남씨(宜寧南氏)의 시조(始祖)로 삼았다. 본래의 성명은 김충(金忠)이며, 천보연간(天寶年間)에 중국 사신으로 왜(倭)에 갔다가 표류(漂流)되어 영해(寧海)에 표착되었다. 남으로부터 왔다 하여 성(姓)을 남(南)으로 하사하였다.
인동(仁同) 동락서원(東洛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장현광(張顯光)
오산서원(吳山書院) 만력 갑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
소암서원(嘯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채몽연(蔡夢硯) 호는 투암(投巖),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채무(蔡楙) 호는 백포(栢浦), 병랑(兵郞)을 지냈다.
현암사(賢巖祠) 임신년에 세웠다. : 장잠(張潛) 호는 죽정(竹亭), 진사이다.
선산(善山) 금오서원(金烏書院)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만력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ㆍ김종직(金宗直)ㆍ정붕(鄭鵬)ㆍ박영(朴英)ㆍ장현광(張顯光)
월암서원(月巖書院) 숭정 무진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주(金澍) 호는 농암(礱巖)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고려조에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ㆍ하위지(河緯地)ㆍ이맹전(李孟專) 단종 때 생육신(生六臣)이다.
낙봉서원(洛峯書院) 숭정 병자년에 세웠다. : 김숙자(金淑滋)ㆍ김취성(金就成) 호는 진락(眞樂), 처사이다.ㆍ박운(朴雲) 호는 용암(龍岩)이며 진사이다.ㆍ김취문(金就文) 호는 구암(久庵), 대사간을 지냈다.ㆍ고응섭(高應涉) 호는 왕곡(枉谷), 사성(司成)을 지냈다.
무동향현사(茂洞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전좌명(田佐命) 호는 성암(性庵), 좌랑을 지냈고, 우상(右相)에 증직되었다.ㆍ이우(李瑀) 호는 옥산(玉山), 이(珥)의 아우이다. 군자정(軍資正)을 지냈다.ㆍ전윤무(田胤武) 호는 가정(檟亭), 현감을 지냈다.
□□영당(□□影堂) 숭정 임오년에 세웠다. : 장현광(張顯光)
칠곡(漆谷) 사양서원(泗陽書院) 효종 신묘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ㆍ이윤우(李潤雨) 호는 석담(石潭), 대사간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군위(軍威) 남계서원(南溪書院) 태창(泰昌) 경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유성룡(柳成龍) ○ 또 김유신 사당이 있고,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칠원(漆原) 덕연서원(德淵書院) 신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주세붕(周世鵬)ㆍ배세적(裵世績) 호는 정곡(靜谷), 현감을 지냈다.ㆍ배석지(裵錫祉) 호는 율리(栗里), 현감을 지냈다.ㆍ황협(黃悏) 호는 독회당(獨悔堂), 처사이다.ㆍ주박(周博) 세붕(世鵬)의 아들. 자는 약지(約之), 호는 귀봉(龜峯), 교리를 지냈다.
동래(東萊) 충렬사(忠烈祠) 을사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ㆍ윤흥신(尹興新) 다대포(多大浦)의 첨사를 지냈다.ㆍ노개방(盧蓋邦)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승지를 증직하였다.
충렬사(忠烈祠) 을축년에 세웠다. : 정발(鄭撥) 부산 첨사를 지냈다.ㆍ조영규(趙英珪) 양산(梁山) 군수이다.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문덕겸(文德謙) 교생(校生)이다.ㆍ김희수(金希壽) 비장(裨將)이다ㆍ송백(宋伯) 호장(戶長)을 지냈다.ㆍ김상(金祥) 부민(府民)이다.ㆍ송봉수(宋鳳壽) 비장을 지냈고, 판관에 증직되었다.ㆍ신여로(申汝櫓) 겸인(傔人)이다. ○ 문 밖에 정포(旌褒)된 이는 상현의 첩 금섬(金蟾)과 발(撥)의 첩 애향(愛香)이다.
함안(咸安) 서산서원(西山書院) 숙종 갑신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이맹전(李孟專)ㆍ조려(趙旅)ㆍ원호(元昊)ㆍ김시습(金時習)ㆍ성담수(成聃壽)ㆍ남효온(南孝溫) 단종 때의 생육신이다.
도림서원(道林書院) 계미년에 세웠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
덕암서원(德巖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다. : 조순성(趙純性) 동지좌중군(同知左中軍)을 지냈다. 태조가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ㆍ박한주(朴漢柱) 정언을 지냈으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무오당적에 들었다. 호는 우졸재(迂拙齋)이다.ㆍ조종도(趙宗道) 호는 대소헌(大笑軒)이다.
송정서원(松亭書院) 임인년에 세웠다. : 조임도(趙任道) 지평에 증직되었다.
영산(靈山) 덕봉서원(德峯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이후경(李厚慶) 호는 외재(畏齋), 현감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이도고(李道攷) 호는 복재(復齋), 처사이다.
도천서원(道泉書院) 을해년에 세웠다. : 신사장(辛斯藏) 호는 곡강(曲江),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ㆍ이중(李中) 예조정랑을 지냈다.ㆍ배학(裵鶴) 호는 임천(林泉), 참봉을 지냈다.
함창(咸昌) 임호서원(臨湖書院) 신미년에 세웠다. : 표연말(表沿沫) 무오당적에 들었다.ㆍ홍귀달(洪貴達) 갑자화적에 들었다.ㆍ채수(蔡壽)ㆍ권달수(權達手)ㆍ채무일(蔡無逸) 호는 휴암(休庵), 헌납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도계정사(陶溪精舍) 경진년에 세웠다. : 유포(柳砲) 호는 가촌(嘉村), 현감을 지냈다.ㆍ유달준(柳達遵) 호는 대암(臺巖), 생원이다.ㆍ이겸(李謙) 호는 수헌(睡軒), 진사이다.ㆍ정윤해(鄭允海) 호는 서귀재(鋤歸齋), 참봉을 지냈다.ㆍ이영갑(李英甲) 호는 야옹(野翁), 도사를 지냈다.
아곡정사(雅谷精舍) 경진년에 세웠다. : 박눌(朴訥) 찰방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남영(南嶸) 호는 고산, 군수를 지냈다.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박성민(朴成敏) 호는 수묵옹(守默翁)이다.ㆍ남근명(南近明) 호는 수운(峀雲),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유종인(柳宗仁) 호는 취미(翠微)이다.ㆍ홍약창(洪約昌) 호는 귀촌(龜村), 임진년에 순절하였다.
언양(彦陽) 반귀서원(磻龜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이언적(李彦迪)ㆍ정구(鄭逑)
양산(梁山) 송담서원(松潭書院)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백수회(白受繪)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충렬사(忠烈祠) 병자년에 세웠다. : 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순절하였다.
경산(慶山) 고산서원(孤山書院) 경오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정경세(鄭經世)
장기(長鬐) 죽림영당(竹林影堂) 을유년에 세웠다. : 송시열
연일(延日) 오천서원(烏川書院) 만력 무자년에 세웠으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습명(鄭襲明) 고려조에서 추밀(樞密)을 지냈으며, 시호는 영양공(榮陽公)이다.ㆍ조몽주(趙夢周)
□□방묘(□□傍廟) 경신년에 세웠다. : 정사도(鄭思道) 호는 설곡(雪谷)이다.ㆍ정철(鄭澈) 선조조의 정승
자인(慈仁) 관란서원(觀瀾書院) 경자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
용계서원(龍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최문병(崔文炳) 호는 성재(省齋), 좌윤을 증직하였다.ㆍ이광후(李光後) 호는 매헌(梅軒)이다.ㆍ이창후(李昌後) 호는 죽헌(竹軒)이다.ㆍ김응명(金應鳴) 호는 취죽당(翠竹堂), 생원이다.
울산(蔚山) 구강서원(鷗江書院) 무오년에 세웠으며,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이언적(李彦迪)
신녕(新寧) 백학서원(白鶴書院) 무오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황준량(黃俊良) 호는 금계(錦溪), 자는 중거(仲擧)이다. 지평(持平)과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지냈다.
귀천서원(龜泉書院) 병인년에 세웠다. : 권수(權銖) 임진 때 사람 ○ 다른 책엔 “명천사(鳴泉祠) 현감 윤명운(尹明運)을 향사한다.”고 되어 있다.
하양(河陽) 금호서원(琴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허조(許稠) 세종조의 정승이다.
밀양(密陽) 예림서원(禮林書院) 만력 정축년에 세웠고 숭정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종직(金宗直)ㆍ박한주(朴漢柱)ㆍ신계성(申季誠) 호는 송계(松溪), 처사이다.
삼강향현사(三江鄕賢祠) 가정 계해년에 세웠다. : 민구령(閔九齡) 호는 욱재(勗齋), 처사다. 다섯 형제가 삼강(三江)에 집을 짓고 살고,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무신[虎臣]이 천랑(薦郞)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ㆍ민구소(閔九韶) 호는 경재(敬齋)이다.ㆍ민구연(閔九淵) 호는 우우재(友于齋)이다.ㆍ민구주(閔九疇) 호는 무명당(無名堂)이다.ㆍ민구서(閔九叙) 호는 삼매당(三梅堂)이다.
중봉충효사(中峯忠孝祠) 정해년에 세웠다. : 손인갑(孫仁甲)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ㆍ노개방(盧盖邦) 교수였다. 임진란 때 함께 죽었다.ㆍ손약해(孫若海) 인갑(仁甲)의 아들이다. 함께 죽었다.ㆍ신동현(申東顯) 호는 매당(梅堂), 판관에 증직되었다.
승려사우(僧侶祠宇) :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休靜)ㆍ홍제당 유정(弘濟堂惟政)ㆍ기허당 영규(奇虛堂靈圭) 모두 임진란 때 의병장이다.
청도(淸道) 자계서원(紫溪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현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김극일(金克一) 호는 절효(節孝), 일손(馹孫)의 아버지이다. 지평을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ㆍ김일손(金馹孫)ㆍ김대유(金大有) 기묘록(己卯錄)에 있다.
남계서원(南溪書院) 숙종 경진년에 세웠다. : 김지대(金之垈) 고려조에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고, 시호는 영헌공(英憲公)이다.
선암서원(仙巖書院) 융경 무진년에 세웠다. : 박하담(朴河淡) 호는 소요당(消遙堂), 생원이다. 효행으로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자는 응청(應淸)이다.
남해(南海) 충렬사(忠烈祠) 숭정 계유년에 세웠으며, 영조 때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
단성(丹城) 도천서원(道川書院) 고려 때 창건하였으며 만력 임자년에 중건(重建)하였다. : 문익점(文益漸)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며, 우문제학(右文提學)을 지냈고,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두릉서원(杜陵書院) 무자년에 이건(移建)하였다. : 권도(權濤) 호는 동계(東溪), 대사간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도정서원(道正書院) 경진년에 세웠다. : 정탁(鄭琢) 선조조의 정승
청곡향현사(淸谷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이천경(李天慶) 호는 신당(新堂), 본관은 벽진(碧珍), 남명(南冥)의 문인이다.
거창(居昌) 도산서원(道山書院) 현종 병신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薀)
완계서원(浣溪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웠으며 숙종 경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식(金湜)
용원사우(龍源祠宇) 병인년에 세웠다. : 문위(文緯) 자는 순부(純夫), 호는 모계(茅溪), 본관은 단성(丹城), 거창(居昌)에 이거(移居)하였다. 남명(南冥)과 덕계(德溪)의 문인이다. 독행(篤行)으로 천거되어 교관(敎官)에 제수되었다.
원천서원(源泉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변벽(卞璧) 호는 귀산(龜山)이다.ㆍ전팔고(全八顧) 호는 원천(源泉)이다.
포충사(褒忠祠) 영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무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술원(李述原) 무신년에 순절(殉節)하였으며,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경충사(景忠祠) 결(缺) : 신명익(愼溟翊) 승지에 증직되었다.
용천향현사(龍泉鄕賢祠) 결(缺) : 형사보(刑士保)ㆍ유자방(柳子芳)ㆍ이계준(李繼俊)ㆍ전팔고(全八顧)ㆍ전팔급(全八及)ㆍ서숙(徐䎘)
성주(星州) 천곡서원(川谷書院) 가정 무오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이천(程伊川)ㆍ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정구(鄭逑)ㆍ장현광(張顯光)
충현사(忠賢祠) 만력 임인년에 세웠다. : 이조년(李兆年)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ㆍ이인복(李仁復)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고,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초은(樵隱),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ㆍ이숭인(李崇仁) 호는 도은(陶隱),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다. 태조조에 들어 있다.ㆍ정곤수(鄭崑壽) 선조조의 명신
향현사(鄕賢祠) 병신년에 세웠다. : 김맹성(金孟性) 호는 지지당(止止堂), 이조 정랑이다.ㆍ도형(都衡) 호는 행정(杏亭)이며 병조 좌랑이다.ㆍ송희규(宋希奎) 을사당적에 들어 있다.ㆍ김희삼(金希參) 호는 칠봉(七峯), 부사를 지냈다.ㆍ홍계현(洪繼玄) 호는 대암(臺巖), 처사이다ㆍ여희림(呂希臨) 지평을 지냈다.
회연서원(檜淵書院) 천계 임술년에 세웠으며 숙종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ㆍ김우옹(金宇顒)ㆍ이윤우(李潤雨)
노강영당(老江影堂) 숙종 신묘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
유계서원(柳溪書院) 숙종 임오년에 세웠다. : 정곤수(鄭崑壽)ㆍ이순(李淳) 호는 야로(野老)이다.ㆍ박찬(朴澯) 호는 설봉(雪峯)이다.
청천서원(晴川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ㆍ김담수(金聃壽) 참봉을 지냈으며 호는 서계(西溪)이다.ㆍ박이장(朴而章)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호는 용담(龍潭)이다.
신계향현사(新溪鄕賢祠)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이승(李承) 호는 청휘당(晴暉堂), 별제(別提)에 증직되었다.
향현사(鄕賢祠) 숭정 경오년에 세웠다. : 송사이(宋師頤) 호는 신연(新淵), 참봉을 지냈다.ㆍ이홍량(李弘量) 호는 육일헌(六一軒), 참봉을 지냈다.ㆍ이홍우(李弘宇) 호는 모재(茅齋), 현감을 지냈다.ㆍ이홍기(李弘器) 호는 용재(容齋), 현감을 지냈다.
안봉영당(安峯影堂) 숭정 을해년에 세웠다. : 이장경(李長庚) 고려조 사람. 농서군공(隴西郡公)ㆍ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봉해졌다.ㆍ이백년(李百年)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ㆍ이천년(李千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ㆍ이만년(李萬年) 시중(侍中)에 추봉되었다.ㆍ이억년(李億年) 문과에 합격하였다.ㆍ이조년(李兆年) 위에 보라.ㆍ이인기(李麟起) 평양 부윤을 지냈다.ㆍ이승경(李承慶) 평장사를 지냈다.ㆍ이포(李褒) 문하시중을 지냈다.ㆍ이원구(李元具) 호는 가정(稼亭), 성산군(星山君)을 봉했다.ㆍ이인복(李仁復) 위에 보라.ㆍ이인임(李仁任) 출향(黜享)되었다.ㆍ이인민(李仁敏)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다.ㆍ이숭인(李崇仁) 앞에 있다.ㆍ이직(李稷) 태조조의 정승ㆍ이제(李濟) 태조조의 명신ㆍ이사후(李師厚) 한성윤(漢城尹)이다.ㆍ이육(李稢) 호는 지강(芝江), 감사를 지냈다.ㆍ이광적(李光廸) 공조 판서를 지냈다.
덕봉충렬사(德峯忠烈祠) 경진년에 세웠다. : 박영서(朴永緖) 갑자년 이괄의 변에 들어 있다.
옥천충렬사(玉川忠烈祠) 을사년에 세웠다. : 이사룡(李士龍) 성주 포수(星州砲手)인데, 청 나라가 명 나라를 칠 때 청 나라에 징발되어 가서 탄환을 빼고 공포를 세 번 쏘다가 발각되어 난작(亂斫) 살해되었다.
안의(安義) 용문서원(龍門書院) 만력 임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임훈(林薰) 명종조의 유일ㆍ임운(林芸) 호는 첨모당(瞻慕堂), 연은전(延恩殿) 참봉을 지냈다.ㆍ정온(鄭薀)
성천서원(星川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송준길(宋浚吉)ㆍ이숙(李䎘) 숙종조의 정승
역천사우(嶧川祠宇) 숭정 을해년에 세웠다. : 정유명(鄭惟明) 호는 역양(嶧陽), 진사이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초계(草溪), 온(蘊)의 아버지이다. 효성이 지극하였다.ㆍ임득번(林得蕃) 호는 석천(石泉), 진사이다. 지평에 증직되었다.
귀연사우(龜淵祠宇) 갑술년에 세웠다. : 신권(愼權) 호는 요수(樂水),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ㆍ성팽년(成彭年) 호는 석곡(石谷), 진사이다. 지평에 증직되었다.
황암사우(黃巖祠宇)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곽준(郭䞭) 《임진록(壬辰錄)》에 들어 있다.ㆍ조종도(趙宗道) 위에 보라.ㆍ정용(鄭庸)ㆍ유개(劉盖) 두 의사(義士)의 사당은 따로 있다.
산청(山淸) 서계서원(西溪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오건(吳健) 선조조의 명신
영해(寧海) 단산서원(丹山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우탁(禹倬)ㆍ이곡(李穀)ㆍ이색(李穡)
인산서원(仁山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이휘일(李徽逸) 참봉
구봉정사(九峯精舍)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박의장(朴毅長) 자는 사강(士剛), 본관은 무안(務安)이다. 병사(兵使)를 지냈으며, 호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경주를 탈환하였고 다섯 번 병사를 지내는 동안 청렴하고 근신하기가 한결 같았다.ㆍ박홍장(朴弘長) 의장(毅長)의 아우, 자는 사임(士任), 목사를 지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적에게 굽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나라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였다.
향현사(鄕賢祠) 숭정 기사년에 세웠는데, 충렬사라고도 한다. : 박종문(朴宗文) 도사를 지냈다.ㆍ정담(鄭湛) 《임진록》에 들어 있다.
도계정사(陶溪精舍) 임진년에 세웠다. : 박선(朴璿) 호는 도와(陶窩), 교관을 지냈다.ㆍ권경(權璟) 호는 대은(臺隱), 지평을 증직하였고, 추향되었다.
함양(咸陽) 남계서원(藍溪書院) 가정 임자년에 세웠으며 만력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薀)ㆍ강익(姜翼) 호는 개암(介庵), 참봉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별사(別祠) 숭정 갑술년에 세웠다. : 유호인(兪好仁) 성종조의 명신
당주서원(溏洲書院) 만력 신사년에 세웠으며 현종 경자년에 사액되었다. : 노진(盧禛) 선조조의 명신
백연서원(栢淵書院) 기유년에 세웠으며 사액되었다. : 최치원(崔致遠) 자는 고운(孤雲), 시호는 문창후(文昌侯)이다.ㆍ김종직(金宗直)
도곡향현사(道谷鄕賢祠) 신사년에 세웠다. : 조승숙(趙承肅) 호는 덕곡(德谷), 고려조에서 부여 감무(扶餘監務)를 지냈다.ㆍ정복주(鄭復周) 호는 죽당(竹堂), 고려조에서 전농사(典農事)를 지냈다.ㆍ노숙동(盧叔同) 호는 송재(松齋), 대사헌을 지냈다. 청백리(淸白吏)이며, 옥계(玉溪)의 증조부이다.ㆍ노우붕(盧友朋) 호는 신고당(信古堂), 참봉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귀천 향현사(龜川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박맹지(朴孟智) 호는 춘당(春塘), 교리이다.ㆍ양관(梁灌) 호는 일로당(逸老堂), 동돈녕(同敦寧)을 지냈다.ㆍ강한(姜漢) 호는 금헌(琴軒), 현감을 지냈다.ㆍ표연말(表沿沫)ㆍ양희(梁喜) 호는 구졸재(九拙齋), 이조 참판을 지냈다.ㆍ하맹보(河孟寶) 호는 우계(愚溪)이다.
영덕(盈德) 신안영당(新安影堂) 임오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
남강서원(南江書院) 천계 신유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흥해(興海) 곡강서원(曲江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廸)ㆍ조경(趙絅)
영천(永川) 임고서원(臨皐書院) 가정 을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장현광(張顯光)
도잠서원(道岑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호익(曺好益) 임진란 때 의병장이다.
도계향사(道溪鄕社)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박인로(朴仁老) 만호이다. 호는 무하옹(无何翁)이다.
입암서원(立巖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장현광(張顯光)ㆍ정사진(鄭四震) 호는 수암(守庵), 세마(洗馬)를 지냈다.
송곡서원(松谷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유방선(柳方善)ㆍ곽순(郭珣)ㆍ이현보(李賢輔)ㆍ심지원(沈之源) 호는 만사(晩沙)이다.
경주(慶州) 서악서원(西岳書院) 가정 신유년에 세웠고 천계 계해년에 사액하였다. : 설총(薛聰) 시호는 홍유후(弘儒侯)이다.ㆍ김유신(金庾信)ㆍ최치원(崔致遠)
옥산서원(玉山書院)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만력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
숭렬사우(崇烈祠宇) 숙종 경진년에 세웠고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최진립(崔震立) 임진란의 여러 장수[諸將]조에 들어 있다.
귀강사우(龜岡祠宇) 경오년에 세웠고 화상이 있다. : 이제현(李齊賢) 호는 익재(益齋), 자는 중사(仲思)이다. 고려조에서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동강사우(東江祠宇)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손중돈(孫仲暾) 호는 우재(愚齋), 이조 판서를 지냈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경절공(景節公)이다.
인산영당(仁山影堂) 기해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 을사년에 조령(朝令)으로 중건하였다.
진주(晉州) 은열사(殷烈祠) 천희(天禧) 신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강민첨(姜民瞻) 병부 상서ㆍ추밀원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은렬공(殷烈公)이다.
덕천서원(德川書院) 임인년에 세웠고 만력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ㆍ최영경(崔永慶) 《기축록(己丑錄)》에 있다.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 임진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김시민(金時敏)ㆍ양산숙(梁山璹) 이하는 동무(東廡)ㆍ김상건(金象乾)ㆍ김준민(金俊民) 거제(巨濟) 사람ㆍ강희열(姜希烈) 의병장이다.ㆍ조경형(曺慶亨) 진해(鎭海) 사람최기필(崔琦弼) 판관을 지냈다.ㆍ유함(兪晗)ㆍ이욱(李郁)ㆍ강희복(姜希復) 의병장이다.ㆍ장윤현(張胤賢)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ㆍ박승남(朴承男) 판관을 지냈다.ㆍ하계선(河繼先)ㆍ최언량(崔彦亮)ㆍ고종후(高從厚) 이하는 서무(西廡)ㆍ이잠(李潛) 의병장이다.ㆍ이종인(李宗仁) 김해사람ㆍ성영달(成穎達) 우후(虞侯)이다.ㆍ장윤(張潤) 사천(泗川) 사람ㆍ윤사복(尹思復) 첨정(僉正)을 지냈다.ㆍ이인민(李仁民)ㆍ손승선(孫承善) 의병대장(義兵代將)이다.ㆍ정유경(鄭維敬) 주부(主簿)를 지냈다.ㆍ김태백(金太白) 수문장을 지냈다.ㆍ박안도(朴安道)ㆍ양제(梁齊) ○ 또 충민사(忠愍祠)가 있는데 김천일과 황진(黃進)과 최경회(崔慶會)와 장윤(張潤)만을 향사한다.
대각사우(大覺祠宇) 만력 경술년에 세웠다. : 하항(河沆) 호는 각재(覺齋), 징사(徵士)다.ㆍ손천우(孫天佑) 처사이다.ㆍ김대명(金大鳴) 군수를 지냈다.ㆍ하응도(河應圖) 현령을 지냈다.ㆍ이정(李瀞) 목사를 지냈으며, 임진년에 왜를 친 공이 있다.ㆍ유종지(柳宗智) 처사이다.ㆍ하수일(河受一) 정랑(正郞)을 지냈다.
종천사우(宗川祠宇) 정사년에 세웠다. : 하홍탁(河弘度) 호는 겸재(謙齋), 진사이다.ㆍ하진(河溍) 호는 태계(台溪), 헌납을 지냈다.ㆍ하연(河演) 시호는 문효공(文孝公), 세종조의 정승
임천사우(臨川祠宇) 을유년에 세웠다. : 이준민(李俊民)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庵),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좌참찬을 지냈으며, 시호는 효익공(孝翼公)이다.ㆍ강응태(姜應台) 수찬을 지냈다.ㆍ하증(河憕) 처사이다.ㆍ한몽삼(韓夢參)
신당서원(新塘書院) 무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지서(趙之瑞)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었다.
정산향현사(鼎山鄕賢祠) 무인년에 세웠다. : 유백온(兪伯溫) 호는 정산(鼎山), 생원이다. : 정온(鄭蘊)ㆍ강숙경(姜叔卿)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하조(河潮) 벼슬은 지평(持平)ㆍ이제신(李濟臣) 처사ㆍ이담(李淡) 처사ㆍ하천주(河天澍) 처사ㆍ진극경(陳克敬) 처사ㆍ박민(朴敏) 승지에 증직되었다.
□□사우 신축년에 세웠다. : 조임도(趙任道) 지평에 증직되었다.
인계향현사(仁溪鄕賢祠) : 최탁 벼슬은 익찬(翊贊)
사천(泗天) 귀계서원(龜溪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정(李禎) 호는 귀암(龜岩)이며, 자는 강이(剛而),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중종 때 괴과(魁科)에 합격하여 부제학을 지냈다. : 김덕함(金德諴) 인조조의 명신
합천(陜川) 이연서원(伊淵書院) 만력 병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
신천서원(新川書院) 천계(天啓) 갑자년에 세웠다. : 하연(河演)ㆍ하우명(河友明) 호는 연당(蓮塘)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효도로써 정문(旌門)이 세워졌다.ㆍ하혼(河渾) 찰방(察訪)ㆍ김유(金紐) 호는 박재(璞齋), 별제(別提)를 지냈다.
용연서원(龍淵書院) 경자년에 세우고 정미년에 사액(賜額)하였다. : 박인(朴絪) 호는 무민당(无悶堂), 참봉이다.ㆍ박소(朴紹) 중종조의 명신(名臣)
명곡향현사(明谷鄕賢祠) 기미년에 세웠다. : 배일장(裴一長)
삼가(三嘉) 용암서원(龍巖書院) 만력(萬曆) 계묘년에 세우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
고암사우(古巖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노흠(盧欽) 호는 입재(立齋), 진사이다.ㆍ이흘(李屹) 호는 노파(蘆坡), 고려 때 세마(洗馬)를 지냈다.ㆍ임진무(林眞懋) 호는 임곡(林谷), 진사이다.
평천서원(平川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정옥량(鄭玉良) 호는 경재(耕齋),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청백리(淸白吏)이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의령(宜寧) 덕곡서원(德谷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창녕(昌寧) 관산서원(冠山書院) 갑오년에 세웠고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
연암향현사(燕巖鄕賢祠) 갑오년에 세웠다. : 이장곤(李長坤) 기묘(己卯)의 명현(名賢)ㆍ성안의(成安義) 호는 부용당(芙蓉堂), 승지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이승언(李承彦) 벼슬은 참군(參軍),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물계(勿溪) 세덕사(世德祠) 기축년에 세웠다. : 성송국(成松國) 고려 시중(侍中)이다.ㆍ성삼문(成三問)ㆍ성제원(成悌元)ㆍ성담수(成聃壽) 호는 문두(文斗)이다.ㆍ성수침(成守琛)ㆍ성수종(成守琮)ㆍ성운(成運)ㆍ성혼(成渾)ㆍ성윤해(成允諧) 호는 판곡(板谷), 현감을 지냈다.
봉화(奉化) 문암서원(文巖書院) 만력(萬曆) 갑진년에 세웠으며 사액(賜額)하였다. : 이황ㆍ조목(趙穆)
문계리사(文溪里社) 갑자년에 세웠다. : 금휘(琴徽) 벼슬은 사온령(司醞令)이다.ㆍ금원정(琴元貞) 호는 농수(聾叟), 진사(進士)이다.ㆍ유종개(柳宗介) 벼슬은 학유(學諭)를 지냈고 참의(參議)에 증직되었다.ㆍ금축(琴軸) 호는 남계(南溪), 참봉이다.
반천리사(盤泉里社) 병진년에 세웠다. : 김중청(金中淸) 호는 구전(苟全), 승지를 지냈다.
현풍(玄風) 도봉서원(道峯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는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구(鄭逑) ○ 서원 곁에 따로 사당이 있다.ㆍ곽승화(郭承華) 진사(進士)ㆍ원개(元凱) 참봉(參奉)ㆍ배신(裴紳) 호는 낙천(洛川), 자는 경여(景餘), 교관(敎官)을 지냈다.ㆍ곽율(郭) 호는 예곡(禮谷), 생원(生員)이다.
예연서원(禮淵書院) 숙종 갑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곽준(郭䞭)ㆍ곽재우(郭再佑)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
송담사우(松潭祠宇)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박성(朴惺) 호는 대암(大庵), 부사(府使)를 지냈다.
청백사(淸白祠)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곽안방(郭安邦) 군수(郡守)ㆍ곽지운(郭之雲) 호는 연일당(燕日堂), 호조 좌랑을 지냈다.
풍기(豐基) 욱양서원(郁陽書院) 현종 임인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황준량(黃俊良)
우곡서원(愚谷書院) 숙종 갑신년에 세웠다. : 유운룡(柳雲龍) 호는 겸암(謙巖), 목사(牧使)를 지냈다.ㆍ황섬(黃暹) 호는 식암(息庵), 대사헌을 지냈다.ㆍ이준(李埈) 호는 창석(蒼石), 부제학(副提學)이다.ㆍ김광엽(金光曄) 호는 죽일(竹日), 응교(應敎)를 지냈다.
예천(醴泉) 정산서원(鼎山書院) 만력(萬曆) 정축년에 세우고 숙종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조목(趙穆)
봉산서원(鳳山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권오복(權五福)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
향현사(鄕賢祠) 숭정(崇禎) 무인년에 세웠다. : 조용(趙庸) 호는 송정(松亭),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ㆍ윤상(尹祥)ㆍ권오복(權五福)ㆍ정총(鄭塚)
고령(高靈) 도암서원(道巖書院) 병오년에 세웠다. : 김면(金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ㆍ이기춘(李起春) 호는 옥산(玉山)이며 처사(處士)이다.
문연서원(文淵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박윤(朴潤) 호는 죽연(竹淵)이다.ㆍ박택(朴澤) 호는 요락당(樂樂堂), 처사이다.ㆍ윤규(尹奎) 호는 월오(月塢), 처사이다.ㆍ박정번(朴廷璠) 호는 학암(鶴巖), 승지를 증직하였다.ㆍ최여계(崔汝契) 호는 매헌(梅軒)이며, 처사이다.
운천서원(雲川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영연사(靈淵祠) 신묘년에 세웠다. : 신덕린(申德麟) 호는 순은(醇隱), 대제학을 지냈다.ㆍ박은(朴誾)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어 있다.ㆍ정사현(鄭師賢) 호는 월담(月潭), 처사(處士)이다.
매림사(梅林祠) 정해년에 세웠다. : 정수강(鄭壽崗) 생원(生員)ㆍ오선기(吳善基) 호는 한계(寒溪), 처사이다.
상주(尙州) 도남서원(道南書院) 만력(萬曆) 병오년에 세웠고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노수신(盧守愼)ㆍ유성룡(柳成龍)ㆍ정경세(鄭經世)
옥성서원(玉城書院) 숭정(崇禎) 임신년에 세웠다. : 김득배(金得培) 호는 난계(蘭溪), 고려 상락군(上洛君)이다.ㆍ신잠(申潛) 기묘년의 명현(名賢)ㆍ김범(金範) 명종 때의 유일(遺逸)이다.ㆍ이전(李琠) 호는 월간(月澗)이며 현감을 지냈다.ㆍ이준(李埈) 전(琠)의 아우이다. 앞에 있다.
근암서원(近嵒書院) 을사년에 세웠다. : 홍언충(洪彦忠)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어 있다.ㆍ이덕형(李德馨)ㆍ김홍민(金弘敏) 호는 사담(沙潭), 전한(典翰)을 지냈다. 범(範)의 아들이며 승지에 증직되었다.ㆍ홍여하(洪汝河) 호는 목재(木齋),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고종후(高從厚)의 외손이다.
속수서원(涑水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다. : 신우(申佑) 안렴사(按廉使)이다.ㆍ손중돈(孫仲暾) 좌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경절공(景節公)이다.ㆍ김우굉(金宇宏) 호는 개암(開巖), 부제학을 지냈다.ㆍ조정(趙靖) 자(字)는 안중(安仲), 호는 금간(黔澗),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봉상정(奉常正)을 지냈으며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백옥동영당(白玉洞影堂) 임진년의 병화(兵火)에 불타고 그 뒤 을해년에 중수했다. : 황희(黃喜)ㆍ김식(金湜) 호는 사서(沙西), 이조 참판을 지냈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ㆍ김충(金冲) 호는 서대(西臺)이다.ㆍ고인계(高仁繼) 호는 월봉(月峯), 벼슬은 사예(司藝)이다.ㆍ송량(宋亮) 호는 우곡(愚谷)이다.
봉산서원(鳳山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웠다. : 노수신(盧守愼)ㆍ심희수(沈喜壽) 선조 때의 정승ㆍ성윤해(成允諧) 호는 판곡(板谷), 현감을 지냈다. 연(連)의 조카이며 사부(師傅)를 제수(除授)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흥암서원(興巖書院) 임오년에 세우고 을유년에 어필(御筆) 사액하였다. : 송준길(宋俊吉)
충렬사(忠烈祠) 기축년에 세웠다. : 권길(權吉) 상주(尙州)의 판관(判官)이다ㆍ김종무(金宗武) 찰방(察訪)ㆍ정기용(鄭起龍)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ㆍ박걸(朴傑) 호장(戶長)을 지냈고, 임진년에 권길과 함께 죽었다. 따로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한다.
연악서원(淵岳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박언성(朴彦誠) 호는 낙지정(樂志亭), 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ㆍ김언건(金彦健) 호는 운정(芸亭), 감찰에 증직되었다.ㆍ강응철(康應哲) 호는 남계(南溪), 찰방이다.
화동서원(化東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운계서원(雲溪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신석번(申碩蕃) 호는 백원(白原), 장령(掌令)을 지냈다.
안동(安東) 호계서원(虎溪書院) 만력(萬曆) 병자년에 세우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
주계서원(周溪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우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구봉령(具鳳齡) 호는 백담(栢潭), 이조 참판을 지냈다.ㆍ권춘란(權春蘭)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이다. 사간을 지냈으며, 퇴계(退溪)와 백담(栢潭)의 문인(門人)이다.
삼계서원(三溪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권벌(權撥) 명종 때의 명신(名臣)
병산서원(屛山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유성룡(柳成龍)ㆍ유진(柳) 성룡(成龍)의 아들이다. 호는 수암(修巖), 참판에 증직되었고 추향(追享)되었다.
도동서원(道東書院) : 우탁(禹倬)
청성서원(靑城書院) : 권호문(權好文) 호는 송암(松巖), 처사(處士)이다. 퇴계의 문인(門人)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 현종 신축년에 세웠다. : 김방경(金方慶) 고려 첨의중찬(僉議中贊)이다.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ㆍ김응조(金應祖) 호는 학사(鶴沙), 참판을 지냈다.ㆍ김구용(金九容) 호는 척약재(惕若齋), 전판교(典判校)를 지냈다.ㆍ김양진(金揚震) 호는 허백당(虛白堂), 참판을 지냈다.
경광서원(鏡光書院)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다. : 배상지(裴尙志) 호는 백죽당(栢竹堂), 고려 사복정(司僕正)이다.ㆍ이종준(李宗準)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ㆍ권우(權宇) 호는 송소(松巢), 이계정사(伊溪精舍)로 옮겨져 독향(獨享)된다.ㆍ장흥효(張興孝) 호는 경당(敬堂), 추향(追享)되었다.
노림서원(魯林書院) 효종 계사년에 세웠다. : 남치리(南致利) 호는 비지(賁趾), 처사이다.
도연서원(道淵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
사빈서원(泗濱書院) 을축년에 세웠다. : 김진(金璡) 호는 청계(靑溪),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성일(誠一)의 아버지이다.ㆍ김극일(金克一) 호는 약봉(藥峯), 사성(司成)을 지냈고, 성일(誠一)의 형이다.ㆍ김수일(金守一) 호는 귀봉(龜峯)이다.ㆍ김명일(金明一) 호는 운암(雲巖), 생원이다.ㆍ김성일(金誠一)ㆍ김부일(金復一) 호는 남악(南岳), 사성을 지냈으며 성일의 아우이다.
덕봉서원(德峯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김용(金涌) 호는 운천(雲川), 병조 참의를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수일(守一)의 아들이다. ○ 묵계정사(默溪精舍)로 이봉(移奉)하였다.
묵계정사(默溪精舍) 병자년에 세웠다. : 옥고(玉沽) 호는 응계(凝溪), 장령(掌令)이다.ㆍ김계행(金係行) 호는 보백당(寶白堂),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ㆍ김용
이계정사(伊溪精舍) : 권우(權宇) 경광서원(鏡光書院)에서 옮겨 모셨다.
백록리사(栢麓里社) 효종 임진년에 세웠다. : 이종준(李宗準)ㆍ이홍준(李弘準) 호는 눌재(訥齋), 진사이다.ㆍ정유일(鄭惟一) 호는 문봉(文峯)이며 대간(大諫)을 지냈다.ㆍ홍준형(洪俊亨) 호는 매헌(梅軒), 참봉이다.ㆍ김성구(金聲久) 감사(監司)를 역임했다. 추향(追享)되었다.ㆍ권두인(權斗寅) 정랑(正郞)을 지냈다. 추향되었다.
대구(大丘) 연경서원(硏經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정구(鄭逑)ㆍ정경세(鄭經世)
향현사(鄕賢祠) 숭정(崇禎) 기묘년에 세웠다. : 김경창(金慶昌) 호는 계동(溪東), 지평(持平)을 지냈다.ㆍ이숙량(李叔樑) 호는 매암(梅庵),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현보(賢輔)의 아들이며, 퇴계의 문인(門人)이다.
이강서원(伊江書院) 숭정 병자년에 세웠다. : 서사원(徐思遠) 호는 낙재(樂齋),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앞에 나왔다.
낙빈서원(洛濱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응부(兪應孚)
표충사(表忠祠) 경술년 때 세웠으며 현종 13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김낙(金樂) 고려 때의 정승ㆍ신원길(申元吉)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향현사(鄕賢祠) 을묘년에 세웠으며 귀암서원(龜巖書院)이라고도 한다. : 서침(徐沉) 호는 귀계(龜溪), 제처사(制處使)로서 환상(還上)의 모곡(耗穀)을 감면해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은공을 갚았다.ㆍ서거정(徐居正)ㆍ서성(徐渻)
상덕사(尙德祠) 기축년에 세웠다. : 이숙(李䎘)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소생시켰으므로 도내 인심이 그에게 쏠렸다.
황청향현사(黃淸鄕賢祠) 갑술년에 세웠다. : 손처눌(孫處訥) 호는 모재(慕齋)이다.
백원향현사(百源鄕賢祠) 임신년에 세웠다. : 서시립(徐時立) 호는 전귀당(全歸堂), 참봉을 지냈으며 호조 정랑에 증직되었다. 효자이다.
남강향현사(南崗鄕賢祠) 갑술년 봄에 세웠다. : 박수춘(朴壽春) 호는 국담(菊潭), 임진왜란때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순절(殉節)하였다.
사양서원(泗陽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ㆍ이윤우(李潤雨)
하동(河東) 영계서원(永溪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정여창(鄭汝昌)ㆍ김성일(金誠一)
청하(淸河) 학산서원(鶴山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
거제(巨濟) 반곡서원(盤谷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ㆍ김진규(金鎭圭) 호는 죽천(竹泉),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창집(金昌集)
김산(金山) 경렴서원(景濂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김종직(金宗直)ㆍ최선문(崔善門) 공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혜공(文惠公), 청백리(淸白吏)이다.ㆍ이약동(李約東)ㆍ조위(曺偉)ㆍ김시창(金始昌) 앞에 나왔다.
진보(眞寶) 봉람서원(鳳覽書院) 만력(萬曆)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김해(金海) 신산서원(新山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는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ㆍ신계성(申季誠)
예암향현사(禮巖鄕賢祠) 무자년에 세웠다. : 조이추(曺爾樞)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창원(昌原) 회원서원(檜原書院) 숭정(崇禎) 갑술년에 세웠는데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ㆍ허목(許穆)
운암향현사(雲巖鄕賢祠) 신사년에 세웠다. : 박신윤(朴身潤) 호는 우곡(愚谷)이다.
의성(義城) 빙계서원(氷溪書院) 가정(嘉靖) 정사년에 세웠으며 선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김안국(金安國)ㆍ이언적(李彦迪)ㆍ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ㆍ장현광(張顯光)
학산충렬사(鶴山忠烈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
진민사(鎭民詞) 정덕(正德) 정축년에 세웠다. : 김용비(金龍庇) 고려조의 태자첨사(太子詹事)이다.
장대서원(藏待書院) 임자년에 세웠다. : 김광수(金光粹) 호는 송은(松隱), 진사이다.ㆍ이민성(李民宬) 호는 경정(敬亭), 승지를 지냈다.ㆍ신원록(申元祿) 호는 매당(梅堂)이다.ㆍ신지제(申之悌) 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梧峯), 승지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아주(鵝州)요, 의성(義城)에 살았다.
충렬사(忠烈祠) : 김홍술(金洪術) 고려조의 장군(將軍)이다.
청송(靑松) 병암서원(屛巖書院)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
송학서원(松鶴書院) 계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ㆍ장현광(張顯光)
문경(聞慶) 소양향현사(瀟陽鄕賢祠) 숙종 계사년에 세웠다. : 김낙춘(金樂春) 호는 인백당(忍百堂)이다.ㆍ정언신(鄭彦信) 선조 때의 정승이다.ㆍ심대부(沈大孚) 호는 가은(嘉隱), 헌납(獻納)을 지냈으며 추향(追享)되었다.ㆍ이심(李襑) 호는 색은(穡隱), 찬성(贊成)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
한천향현사(寒泉鄕賢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안귀손(安貴孫)ㆍ신숙빈(申叔彬) 처사(處士)이다. 개(槩)의 손자이다.ㆍ성만징(成晩徵) 호는 추담(秋潭), 교관(敎官)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고성(固城) 갈천서원(葛川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이암(李嵒) 호는 행촌(杏村),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다.ㆍ노필(盧㻶)ㆍ어득강(魚得江)ㆍ조사석(趙師錫) 숙종 때의 정승
충렬사(忠烈祠) 만력(萬曆) 갑인년에 세웠으며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
유월사(柳月祠) 기축년에 세웠다. : 심광세(沈光世) 호는 휴옹(休翁), 벼슬은 사인(舍人)이다.
비안(比安) 귀천서원(龜川書院) 숙종 기미년에 세웠다. : 박서생(朴瑞生) 호는 율정(栗亭), 대사헌을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이다.ㆍ이우(李瑀)


전라도(全羅道)
임실(任實) 구고사우(九臯祠宇) 경자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박번(朴蕃) 호는 인덕정(仁德亭), 벼슬은 교수(敎授)이다.ㆍ박훈(朴薰) 호는 수심정(收心亭), 진사이다.ㆍ홍붕(洪鵬) 호는 경재(敬齋), 벼슬은 첨정(僉正)이다. 추향되었다.ㆍ이흥순(李興淳) 호는 운암(雲巖),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조평(趙平) 호는 운학(雲壑), 벼슬은 세마(洗馬)이다.
부안(扶安) 도동서원(道洞書院) 가정(嘉靖) 갑오년에 세웠다. : 김구(金坵) 고려 평장사(平章事)이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ㆍ김여맹(金汝孟) 구(坵)의 아들이며 문한학사(文翰學士)이다.ㆍ최수손(崔秀孫) 호는 고궁당(固窮堂), 진사이다.ㆍ성중엄(成重淹) 무오화적(戊午禍籍)ㆍ김석홍(金錫弘) 호는 옹천(瓮泉), 군수(郡守)를 지냈다.ㆍ홍익한(洪翼漢)ㆍ최필성(崔弼成) 수손(秀孫)의 아들이다.ㆍ김계(金啓) 호는 설강(雪江), 참판을 지냈다.
파산서원(巴山書院) 계유년에 세웠는데 지금의 이름은 동림서원(東林書院)이다. : 유형원(柳馨遠) 호는 반계(磻溪)이다.ㆍ유문원(柳文遠) 호는 삼우당(三友堂), 진사이다.ㆍ김서경(金瑞慶) 호는 담계(澹溪)이다.
유천서원(柳川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허진동(許震童) 호는 동상(東湘), 판관(判官)을 지냈다.ㆍ김택삼(金宅三) 호는 농암(礱岩), 벼슬은 주부(主簿)를 지냈다.
청계서원(淸溪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송세정(宋世貞) 호는 도봉(道峯), 진사이다.ㆍ이승간(李承幹) 호는 석호(石湖)이다.
담양(潭陽) 의암서원(義巖書院) 만력(萬曆) 계축년에 세웠다.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유희춘(柳希春) 을사년의 명신(名臣)이다.
귀산서원(龜山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순(宋純)ㆍ송정순(宋廷筍) 호는 물염(勿染), 벼슬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이다.ㆍ김언욱(金彦勗) 호는 서석(瑞石), 벼슬은 사평(司評)을 지냈다.ㆍ김응회(金應會) 호는 청계(淸溪), 벼슬은 별제(別提)를 지냈다.ㆍ이안눌(李安訥)ㆍ나무춘(羅茂春) 호는 구봉(九峯),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송희경(宋希璟) 호는 노송(老松)이며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이다.ㆍ송징(宋徵) 호는 율옹(栗翁), 진사이다.ㆍ김대기(金大器) 호는 만덕(晩德), 처사이다.
익산(益山) 남촌서원(南村書院) 천계(天啓) 계해년에 세웠다. : 이공수(李公遂) 호는 남촌(南村)이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고려 때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해졌다.ㆍ소세량(蘇世良) 호는 곤암(困庵), 대사간을 지냈다.ㆍ소세양(蘇世讓)ㆍ이약해(李若海) 명종조에 들어 있다.ㆍ소동도(蘇東道) 호는 면와(眠窩), 감사를 지냈다.ㆍ소영복(蘇永福) 호는 발영당(發永堂), 진사이다.ㆍ소광진(蘇光震) 호는 후천(后泉), 벼슬은 교리(校理)다.
전주(全州) 화산서원(華山書院) 만력(萬曆)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ㆍ송인수(松麟壽)
서산사우(西山祠宇) 인조 병술년에 세웠다. : 최양(崔瀁) 호는 만육(晩六), 대제학을 지냈다.ㆍ최덕지(崔德之)ㆍ송영구(宋英耈)ㆍ이계맹(李繼孟)ㆍ이흥발(李興浡)ㆍ이기발(李起浡) 호는 서귀(西龜),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인봉사우(麟峯祠宇)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다. : 최명룡(崔命龍) 호는 석계(石溪), 진사이다.ㆍ김동준(金東準) 호는 봉곡(鳳谷), 감찰을 지냈다.
학봉사우(鶴峯祠宇) 현종 기유년에 세웠다. : 이정란(李廷鸞)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ㆍ신중경(申重慶) 호는 금서당(琴書堂)이다.ㆍ이상진(李尙眞) 숙종 때의 정승이다.
진도사우(珍島祠宇) : 노수신(盧守愼)ㆍ이경여(李敬輿)ㆍ정홍익(鄭弘翼)ㆍ김수항(金壽恒)ㆍ남이성(南二星) 호는 의졸(宜拙), 예조 판서를 지냈다.ㆍ신명규(申命圭) 호는 적안(適安), 집의(執義)를 지냈다.ㆍ이민서(李敏叙)ㆍ조태채(趙泰菜)
나주(羅州) 경현서원(景賢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정렬사(旌烈祠)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천일(金千鎰)ㆍ김상건(金象乾)ㆍ양산숙(梁山璹)ㆍ임회(林檜)
월정서원(月井書院) 경자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순(朴淳)
반계서원(潘溪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박상충(朴尙衷)ㆍ박소(朴紹)ㆍ박세채(朴世采)ㆍ박태보(朴泰輔)
미천서원(眉泉書院) 숙종 임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허목(許穆)
죽봉사우(竹峯祠宇) 갑진년에 세웠다. : 유준(柳浚) 호는 사교당(四矯堂), 벼슬은 판관(判官)이다.ㆍ유상운(柳尙運) 숙종 때의 정승이다.
송재사우(松齋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나세찬(羅世纘)ㆍ임형수(林亨秀)
창계서원(滄溪書院) 경인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설재서원(雪齋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정가신(鄭可臣) 호는 설재(雪齋), 벼슬은 중찬(中贊)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ㆍ정식(鄭軾)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다. 가신(可臣)의 5대손이다.ㆍ신장(申檣) 호는 암헌(巖軒)이며 숙주(叔舟)의 아버지이다.
영광사우(榮光祠宇)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이원(李黿)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ㆍ이해(李懈) 호는 모산(茅山), 진사이다.ㆍ이영우(李永祐) 호는 야은(野隱), 진사이다.ㆍ이유경(李有慶) 호는 오풍(五楓), 사부(師傅)를 지냈고 정랑(正郞)에 증직되었다.
서하사우(西河祠宇) 숙종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영당(□□影堂) : 오자치(吳自治) 참판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양평공(襄平公)이다.
장성(長城) 필암서원(筆菴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인후(金麟厚) 인종 때의 명신(名臣)
모암서원(慕巖書院) 전조(前朝) 때 세웠는데 인조 무자년에 중수(重修)하였다. : 서능(徐稜) 고려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절의(節義)와 효도가 지극하였다.ㆍ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다. 앞에 있다.ㆍ조정로(趙廷老) 영규(英圭)의 아들인데 별검(別檢)에 증직되었다.ㆍ최학령(崔鶴齡) 호는 율리(栗里), 진사이다.ㆍ정운룡(鄭雲龍) 호는 하곡(霞谷),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봉암서원(鳳巖書院) 정축년에 세웠다. : 변이중(邊以中) 호는 망암(望庵), 벼슬은 종정(宗正)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변경윤(邊慶胤) 호는 자하(紫霞), 예조 정랑을 지냈으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추산서원(秋山書院) 을유년에 세웠다. : 기건(奇虔)ㆍ기효간(奇孝諫)ㆍ기정익(奇挺翼) 호는 송암(松巖), 참봉이다.
□□영당 임인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 병조 참판을 지냈으며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의성군(義城君)을 봉했고 시호는 양효공(良孝公)이며, 호는 맹암(孟巖)이다.
학림서원(鶴林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ㆍ박희중(朴熙中) 호는 위남(葦南),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다.ㆍ김은(金穩) 호는 학천(鶴川),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다.ㆍ김응두(金應斗) 호는 서천(逝川), 응교(應敎)를 지냈다.ㆍ박준철(朴濬哲) 호는 기양(岐陽), 진사이다.
영광(靈光) 수강서원(壽崗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송흠(宋欽)ㆍ이장영(李長榮) 호는 죽곡(竹谷), 대사간을 지냈다.
용암사우(龍巖祠宇) 임술년에 세웠다. : 윤황(尹煌)ㆍ윤선거(尹宣擧)
장천사우(長川祠宇) 임진년에 세웠다. : 심우신(沈友信)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사절(死節)하였다.ㆍ이제형(李齊衡) 호는 취수헌(醉睡軒), 군수를 지냈다.ㆍ이단석(李端錫) 호는 쌍호(雙壺), 문과 병사(文科兵使)를 지냈다.
용계사우(龍溪祠宇) 임자년에 세웠다. : 강항(姜沆) 임진록(壬辰錄)에 있다.ㆍ윤순거(尹舜擧)
무장영당(畝長影堂) 태종이 화상(畫像)을 내렸다. : 이천우(李天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산사우(栢山祠宇) 경종 계묘년에 세웠다. : 이세필(李世弼)
백산영당(栢山影堂) 임진년에 세웠다. : 이제현(李齊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峯書院)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으며 효종 을미년에 사액하였다. : 박상(朴祥)ㆍ박순(朴淳)ㆍ기대승(奇大升)ㆍ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
포충사(褒忠祠) 만력 신축년에 세웠으며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ㆍ유팽로(柳彭老)ㆍ안영(安瑛)
의열사(義烈祠) 만력 갑진년에 세웠으며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옥(朴光玉) 자는 중수(重粹), 호는 회재(懷齋)이다. 지평(持平)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ㆍ김덕령(金德齡)ㆍ오두인(吳斗寅)
천동사우(泉洞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
경렬사우(景烈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정지(鄭地) 삼도절제사(三道節制使)가 되었으며, 시호는 경렬공(景烈公)이다.ㆍ정충신(鄭忠信)ㆍ김상의(金尙義) 귀성 부사(龜城府使)이다.
운암서원(雲巖書院) 병진년에 세웠다. : 송제민(宋濟民) 호는 해광(海狂), 처사이다.ㆍ권운(權韗)ㆍ송타(宋柁) 호는 화암(禾庵), 진사이다.
태인(泰仁) 남고서원(南皐書院) 만력 정축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李恒)ㆍ김천일(金千鎰)
무성서원(武城書院) 만력 을묘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최치원(崔致遠)ㆍ신잠(申潛)ㆍ정극인(丁克仁) 호는 불우헌(不憂軒), 정언(正言)을 지냈다.ㆍ송세림(宋世琳) 호는 눌암(訥庵), 예조 정랑을 지냈다.ㆍ정언충(鄭彦忠) 호는 묵재(默齋), 참봉을 지냈다.ㆍ김약묵(金若默) 호는 성재(誠齋), 양주(楊州) 목사를 지냈다.ㆍ김관(金灌) 진사
모충사(慕忠祠) 병오년에 세웠다. : 백광언(白光彦) 첨사(僉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덕린(金德麟)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지냈다.
보성(寶城) 정충사(旌忠祠) 숙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 안홍국(安弘國) 보성(寶城) 군수를 지냈으며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용산사우(龍山祠宇) 만력 정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전(朴光前) 호는 죽천(竹川), 벼슬은 익위(翊衛)를 지냈으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퇴계의 문인이다.
대계서원(大溪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으며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안방준(安邦俊)
양산사(梁山祠) 신묘년에 세웠다. : 염세경(廉世慶) 효자(孝子)이다.
무장(茂長) 충현사(忠賢祠) 만력 무신년에 세웠으며 광해군 때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ㆍ유희춘(柳希春)
도암향현사(道巖鄕賢祠) 신미년에 세웠다. : 김질(金質) 호는 영모당(永慕堂), 진사이다.
죽산향현사(竹山鄕賢祠)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오익창(吳益昌) 호는 사호(沙湖), 공조 정랑을 지냈다.
순천(順天) 옥천서원(玉川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웠고, 무진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
정충사(旌忠祠) 계묘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장윤(張潤)
충민사(忠愍祠) 만력 경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ㆍ이억기(李億祺)ㆍ안홍국(安弘國)
지봉서원(芝峯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이수광(李晬光)
겸천서원(謙川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조유(趙瑜) 호는 처곡(處谷), 고려조의 절신(節臣)인데, 태조조(太祖朝)에 들었다.ㆍ조숭문(趙崇文) 유(瑜)의 아들이며,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화를 입었다. 병사(兵使)를 지냈고, 추향되었다.ㆍ조철산(趙哲山) 숭문(崇文)의 아들이요, 성승(成勝)의 사위다. 육신(六臣)의 변에 함께 화(禍)를 입었다.
청사사(靑莎祠) : 정소(鄭沼) 호는 청사(靑莎), 진사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여산(礪山) 죽림서원(竹林書院) :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
향현사(鄕賢祠) 임진년에 세웠다. : 남명한(南溟翰) 호는 취은(醉隱), 주부(主簿)에 증직되었다.ㆍ남두건(南斗健) 호는 경재(敬齋)ㆍ이계맹(李繼孟)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ㆍ이순인(李純仁) 호는 고담(孤潭), 승지를 지냈다.
김제(金堤) 용암서원(龍巖書院) 임자년에 세웠다. : 조간(趙簡) 호는 열헌(悅軒),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ㆍ이계맹(李繼孟)ㆍ나안세(羅安世) 호는 달계(達溪), 교리를 지냈다.ㆍ윤추(尹推) 호는 농은(農隱), 장령을 지냈다.ㆍ이세필(李世弼)ㆍ나응삼(羅應參) 호는 구산(龜山), 처사이다.
백석사우(白石祠宇) 계사년에 세웠다. : 유읍(柳揖) 호는 백석(白石), 벼슬은 자의(諮議)를 지냈으며 지평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임파(臨陂) 봉암서원(鳳岩書院) 경오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집(金集) 앞에 있다.ㆍ김구(金絿)
동복(同福) 도원서원(道源書院) 무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산두(崔山斗)ㆍ정구(鄭逑)ㆍ임억령(林億齡)ㆍ안방준(安邦俊)
금산(錦山) 성곡서원(星谷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김신(金侁) 중국에 가서 참정(參政)을 지냈다.ㆍ윤택(尹澤) 호는 율정(栗亭), 찬성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공민왕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고향인 금주(錦州)에 돌아가 죽었다.ㆍ길재(吉再)ㆍ김정(金淨)ㆍ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
종용사(從容祠) 숭정(崇禎) 갑술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ㆍ고인후(高因厚)ㆍ변응정(邊應井)ㆍ안영(安瑛)ㆍ유팽로(柳彭老)ㆍ이광륜(李光輪)ㆍ조택기(趙宅基)ㆍ한순(韓楯)ㆍ승 영규(僧靈圭)
향현사(鄕賢祠) : 한교(韓皦)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ㆍ이유택(李惟澤) 호는 송곡(松谷), 현감을 지냈다.
반계서원(磻溪書院) : 이유태(李惟泰) 용강서원(龍江書院) :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유계(兪棨) 산천사(山泉祠) : 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ㆍ윤추(尹推) 부이영당(富移影堂) : 길재(吉再)의 네 군데 서원(四院)은 모두 영종 신유년에 철폐(撤廢)하였다.
무안(務安) 송림서원(松林書院) 정해년에 세웠으며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권(金權)ㆍ유계(兪棨)
녹동서원(鹿洞書院) 숭정 경오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최덕지(崔德之)ㆍ최충성(崔忠成) 덕지(德之)의 손자이다. 호는 산당(山堂), 진사이다.ㆍ김수항(金壽恒)ㆍ김창협(金昌協)
죽정사우(竹亭祠宇) 신유년에 세웠다. : 박성건(朴成乾) 호는 오한(五恨), 현감을 지냈다.ㆍ박권(朴權) 호는 고광(孤狂), 벼슬은 정언이다.ㆍ박규정(朴奎精) 호는 수옹(壽翁), 생원이다.ㆍ이만성(李晩成)
서하사(西河祠) 정사년에 세웠다. : 조행립(曺行立)
고부(古阜) 정충사(旌忠祠) 숭정 신미년에 세웠으며 정유년에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ㆍ신호(申浩) 군수를 지냈으며 판서에 증직하였다. 시호는 무장공(武壯公)이다.ㆍ김준(金浚) 목사를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다. 정묘록에 들어 있다.
도계서원(道溪書院) 계축년에 세웠다. : 이희맹(李希孟)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안공(文安公)이다.ㆍ김재(金齋) 호는 오봉(鰲峯), 장령을 지냈다.ㆍ최안(崔安) 호는 모암(慕庵), 직장(直長)을 지냈다.ㆍ김지수(金地粹) 호는 태천(苔川), 승지를 지냈다.ㆍ김제안(金齊顔) 호는 죽헌재(竹軒齋), 민(閔)의 아우이다.
흥양(興陽) 쌍충사(雙忠祠) 임술년에 중건(重建)하였고, 사액하였다. : 이대원(李大源) 벼슬은 녹도 만호(鹿島萬戶)이다. 명조조 을묘왜변에 상세하다.ㆍ정운(鄭運)
정읍(井邑) 충렬사(忠烈祠) 경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
고암서원(考巖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장흥(長興) 예양서원(汭陽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ㆍ남효온(南孝溫)ㆍ김광원(金光遠) 호는 월봉(月峯), 진사이다.ㆍ신잠(申潛)ㆍ유호인(劉好仁) 호는 육방(六放), 진사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
연곡서원(淵谷書院) 무술년에 세웠으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
월천사우(月川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문익점(文益漸)ㆍ문위세(文緯世) 호는 풍암(楓巖), 목사이다.
양강사우(楊江祠宇) 경진년에 세웠다. : 김경추(金景秋) 호는 죽정(竹汀) 또는 송정(松亭)이다.
충렬사우(忠烈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한온(韓薀)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정명세(鄭名世) 호는 독곡(獨谷),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포충사(褒忠祠)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선세강(宣世綱) 호는 매곡(梅谷), 영장(營將)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죽천사우(竹川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위덕의(魏德毅) 호는 청계(聽溪), 병조 좌랑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
감호영당(鑑湖影堂) 숙종 정사년에 세웠다. : 전녹생(田祿生) 호는 야계(壄溪), 벼슬은 고려조의 사인(舍人)이다.ㆍ전유추(田有秋) 호는 송담(松潭)
남평(南平) 봉산서원(蓬山書院) 숭정 경인년에 세웠으며 현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백인걸(白仁傑)
풍산사우(楓山祠宇) 숙종 무오년에 세웠다. : 정준일(鄭遵一) 호는 향북당(向北堂), 참봉이다.ㆍ김만영(金萬英) 호는 남포(南浦), 벼슬은 세마(洗馬)이다.ㆍ임세정(任世鼎) 호는 일신재(日新齋), 지평을 증직하였고, 추향되었다.ㆍ정익신(鄭翊臣) 호는 초심당(草心堂), 참봉이다.
용구사우(龍丘祠宇) 병술년에 세웠다. : 서봉령(徐鳳齡) 호는 용구(龍丘), 참봉이다.ㆍ조상우(趙相愚) 추향되었다.
능주(綾州) 죽수서원(竹樹書院) 융경(隆庚) 경오년에 세웠으며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ㆍ양팽손(梁彭孫)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
포충사우(褒忠祠宇) 만력 을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경회(崔慶會)ㆍ조현(曺顯) 병사(兵使)에 증직되었다.ㆍ문홍헌(文弘獻) 진사인데 지평에 증직되었고 계사년에 전사(戰死)하였다.
도산사우(道山祠宇) 효종 병신년에 세웠다. : 안방준(安邦俊)
용담(龍潭) 삼천서원(三川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고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안자(顔子)ㆍ백정자(伯程子)ㆍ숙정자(叔程子)ㆍ주자(朱子)ㆍ제갈무후(諸葛武侯)
순창(淳昌) 화산서원(花山書院) 만력 정미년에 세웠다. : 신말주(申末舟) 호는 귀래공(歸來公), 형조 참의를 지냈다.ㆍ김정(金錚)ㆍ김인후(金麟厚)ㆍ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남원(南原) 노봉서원(露峯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홍순복(洪順福) 호는 고암(顧庵)이며 진사인데 기묘 명현(己卯名賢)이라 부른다.ㆍ최상중(崔尙重) 호는 미능재(未能齋),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오정길(吳廷吉) 호는 해서(海西), 벼슬은 정자(正字)다.ㆍ최온(崔薀) 호는 폄재(砭齋), 승지를 지냈다.ㆍ최휘지(崔徽之) 호는 오주(鰲州),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현계서원(玄谿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이능간(李凌幹)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ㆍ정염(丁焰) 호는 만헌(晩軒)이며 광주 목사이다.ㆍ변유(邊瑜) 호는 정묵재(靜默齋), 추향되었다.ㆍ정견(丁涀) 호는 육졸(六拙), 추향되었다.
요계서원(蓼溪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김화(金澕) 호는 재간당(在澗堂), 참봉이다.ㆍ이상형(李尙馨) 호는 천묵재(天默齋), 수찬을 지냈고 부제학에 증직되었다.ㆍ김지순(金之純) 호는 담암(澹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ㆍ김지백(金之白) 호는 용암(舂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고암서원(高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진극순(陳克純) 호는 환성당(喚醒堂), 처사이다.ㆍ황신귀(黃信龜) 호는 운계(雲溪), 벼슬은 도사(都事)이다.
영천서원(寧川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안처순(安處順) 호는 사재당(思齋堂), 판관을 지냈다.ㆍ정환(丁煥) 호는 회산(檜山), 벼슬은 도사이다.ㆍ정황(丁熿) 을사록(乙巳錄)에 들어 있다.ㆍ이대유(李大㕀) 호는 활계(活溪), 좌랑을 지냈다.
방산서원(方山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노진(盧禛)ㆍ윤효손(尹孝孫)ㆍ최행(崔荇) 호는 성만(星灣), 좌윤(左尹)을 지냈다.ㆍ이경석(李景奭) 인조 때의 정승
우룡서원(右龍書院) 만력 기묘년에 세웠고 사액되었다. : 노진
충렬사(忠烈祠)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기원(鄭期遠)ㆍ이복남(李福男)ㆍ임현(任鉉)ㆍ김경로(金敬老)ㆍ신호(申灝)ㆍ이덕회(李德恢)ㆍ이원춘(李元春)ㆍ오흥업(吳興業) 추향되었다. 정유왜란 때에 순국했다. 칠충신사(七忠臣祠)라고도 한다.
정충사(旌忠祠) 인조 기축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황진(黃進)ㆍ고득뢰(高得賚) 군수를 지냈으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ㆍ안영(安瑛)
용호영당(龍湖影堂) 영종 갑자년에 세웠다. : 송 여남전(宋呂藍田)ㆍ주자(朱子)
곡성(谷城) 덕양사우(德陽祠宇) 만력 기축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 선조 22년에 세웠고 숙종 21년에 사액하였다.
□□영당 정사년에 세웠다. : 안유(安裕)
강진(康津) 서봉서원(瑞峯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후백(李後白)ㆍ백광훈(白光勳)ㆍ최경창(崔慶昌)
월남영당(月南影堂) : 이의경(李毅敬) 고금도(古今島)의 관왕묘(關王廟)에 진린(陳璘)과 이순신을 배향하였다. 제사조(諸祀條)에 들어 있다.
장수(長水) 창계서원(滄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황희(黃喜)ㆍ황수신(黃守身) 세조 때의 정승ㆍ유호인(兪好仁)ㆍ장응두(張應斗) 호는 송탄(松灘), 생원이다.
옥과(玉果) 영귀서원(詠歸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김인후(金麟厚)ㆍ유팽로(柳彭老)ㆍ이흥발(李興浡)ㆍ신이강(辛二剛) 호는 청파(靑坡)이다.
용안(龍安) □□영당 : 이단하(李端夏)ㆍ이세필(李世弼)
운봉(雲峯) 용암서원(龍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박광옥(朴光玉)ㆍ황일호(黃一皓)ㆍ변사정(邊士貞) 호는 도탄(桃灘), 첨정(僉正)을 지냈다.ㆍ노형필(盧亨弼) 호는 운제(雲堤), 벼슬은 사부(師傅)이다.ㆍ서식(徐湜) 호는 명암(銘巖), 효자(孝子)이다.
창평(昌平) 송강서원(宋江書院) 임오년에 세웠으며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철(鄭澈)
절산사우(節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박이관(朴以寬) 호는 보옹(葆翁), 벼슬은 보덕(輔德)을 지냈다.ㆍ박이홍(朴以弘) 이관(以寬)의 아우이다. 호는 월영(月暎), 진사이다.
내동사우(內洞祠宇) 계해년에 세웠다. : 우유일(禹惟一) 호는 이우당(二友堂), 벼슬은 전적(典籍)이다.
죽림사우(竹林祠宇) 숙종 무자년에 세웠다. : 조수문(曺秀文) 호는 죽림(竹林), 진사이다.ㆍ조호(曺浩) 호는 운곡(雲谷), 수문(秀文)의 아들이다.ㆍ조부(曺溥) 호는 삼청당(三淸堂), 벼슬은 전적이다.
함평(咸平) 기산사우(箕山祠宇)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박정원(朴鼎元) 호는 동호(東湖), 벼슬은 도사다.ㆍ이후정(李后定) 호는 만안(晩安), 응교를 지냈고 기묘년에 절개를 지켰다.
월산사(月山祠) : 이순신(李舜臣)ㆍ이덕일(李德一) 벼슬은 우후(虞侯)이다. 추향되었다.
수산사우(水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증산사우(甑山祠宇) 숙종 임오년에 중건하였다. : 김덕생(金德生) 호는 증산(甑山), 용력(勇力)과 기절(氣節)이 있었고, 벼슬은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태종의 잠저(潛邸) 때 몸바쳐 보호하였다. 뒤에 원통하게 죽었다. 세종 때에 증직되었다.
모평사우(牟平祠宇) : 이유인(李有仁) 호는 파우(破愚), 참봉이다.
금구(金溝) 귀성사우(龜城祠宇)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윤증(尹拯)
육송사우(六松祠宇) 현종 계묘년에 세웠다. : 김관(金瓘)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공양공(恭讓公)이다.ㆍ김승서(金承緖) 호는 귀암(龜巖), 참봉이다.ㆍ송정기(宋廷耆) 호는 죽계(竹溪), 추향되었다.ㆍ김천서(金天瑞)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해남사우(海南祠宇) 경인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ㆍ유형(柳珩)ㆍ이계년(李桂年)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이유길(李有吉)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이 두 사람은 추향되었다.
흥덕(興德) 동산서원(東山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고,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경여(李敬輿)ㆍ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창효사(彰孝祠) 신해년에 세웠다. : 오준(吳浚) 직장(直長)에 증직되었다.
고산(高山) 화산서원(華山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제주(濟州) 귤림서원(橘林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송인수(宋麟壽)ㆍ정온(鄭薀)ㆍ김상헌(金尙憲)ㆍ송시열(宋時烈) 별사(別祠)ㆍ이약동(李約東)ㆍ이회(李禬) 호는 만오(晩悟), 제주 목사를 지냈다.
광양(光陽) 향현사(鄕賢祠)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최산두(崔山斗)
무주(茂朱) 주계영당(朱溪影堂) 영종 을사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
죽계(竹溪) 향현사(鄕賢祠) 계사년에 세웠다. : 김신(金侁) 고려조의 참정(參政)이다.ㆍ장필무(張弼武)
진안(鎭安) 모혜사(慕惠祠) : 이우성(李羽成)ㆍ이현익(李顯益)
화순(和順) 추모영당(追慕影堂) 인조 무자년에 세웠다. : 홍명하(洪命夏)ㆍ홍우익(洪禹翊) 현감


강원도(江原道)
강릉(江陵) 오봉서원(五峯書院) 가정 병진년에 세웠다. : 공자 화상(孔子畫像)
송담서원(松潭書院) 천계(天啓) 갑자년에 세웠고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향현사우(鄕賢祠宇) 순정 갑신년에 세웠다. : 최치원(崔致遠)ㆍ최응현(崔應賢) 호는 수헌(睡軒), 대사헌을 지냈다.ㆍ박수량(朴遂良) 기묘록에 들어 있다.ㆍ최운우(崔雲遇) 호는 도경(蹈景), 횡성(橫城) 현감을 지냈다.ㆍ최수(崔洙)ㆍ박공달(朴公達)ㆍ최수성(崔壽峸)
□□영당 정해년에 세웠다. : 오명준(吳命峻)
원주(原州) 충렬사(忠烈祠) 현종 무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원충갑(元冲甲) 호는 응양(鷹揚), 상호군(上護軍)이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ㆍ김제갑(金悌甲)ㆍ원호(元豪)
도천서원(陶川書院) 숙종 계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허후(許厚)
칠봉서원(七峯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원천석(元天錫)ㆍ원호(元昊)ㆍ정종영(鄭宗榮)ㆍ한백겸(韓百謙) 호는 구암(久庵)
광암향현사(廣巖鄕賢祠) : 정시한(丁時翰) 벼슬은 진선(進善)이다.
□□영당(□□影堂) 병인년에 전교(傳敎)를 내려 세웠다. : 익안대군방의(益安大君芳毅)
춘천(春川) 문암서원(文巖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이정형(李廷馨)ㆍ조경(趙絅)
도포서원(道浦書院) 정축년에 세웠다. : 신숭겸(申崇謙)ㆍ신흠(申欽)ㆍ김경직(金敬直) 호는 우정(憂亭), 벼슬은 사간(司諫)이다.
운곡영당(雲谷影堂) 갑신년에 세웠다. : 김수증(金壽增) 호는 곡운(谷雲), 참판을 지냈다.ㆍ김창흡(金昌翕)
울진(蔚珍) 귀암서원(龜巖書院) 병인년에 세웠다. : 김시습(金時習)
고산서원(孤山書院) 기미년에 세웠다. : 임유후(任有後) 호는 만휴(萬休), 병조 참판을 지냈다.ㆍ오도일(吳道一) 호는 서파(西坡), 반대당의 배척을 받아 본 고을 수령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향현사(鄕賢祠) 임자년에 세웠다. : 남사고(南師古)ㆍ주경안(朱景顔) 효자(孝子)이다. 지평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
몽양재(蒙養齋) 숙종 임진년에 비로소 향사하였다. : 전이석(田爾錫) 효자(孝子)ㆍ주필대(朱必大) 생원(生員)
귀장서당(龜藏書堂) : 전구원(田九畹) 생원
삼척(三陟) 부동사우(府東祠宇) 만력 기묘년에 세웠다. : 김효원(金孝元) 호는 성암(省庵)
용산서원(龍山書院) : 이세필(李世弼)
통천(通川) 휴산사우(休山祠宇) 기사년에 세웠다. 경덕사(景德祠) : 정구(鄭逑) 상렬사(尙烈祠)ㆍ최윤덕(崔潤德)
평해(平海) 명계서원(明溪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황응청(黃應淸)ㆍ황여일(黃汝一) 호는 해월(海月), 공조 참의를 지냈다.
향현사(鄕賢祠) 강희(康熙) 신해년에 세웠다. : 정담(鄭湛) 임진록에 들어 있다.
명고리사(明皐里社) : 김담(金譚) 호는 탁계(卓溪)ㆍ장효갑(張孝甲) 호는 동명(東溟), 벼슬은 첨추(僉樞)이다.ㆍ장온(張薀) 호는 매헌(梅軒), 효자(孝子)이다.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 숙종 을축년에 세웠고 기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 민충소사(愍忠小祠)ㆍ엄흥도(嚴興道)
평창(平昌) 둔계사우(遯溪祠宇) 갑술년에 세웠다. : 곽세익(郭世翼) 호는 둔계(遯溪), 벼슬은 사예(司藝)이다.
이천(伊川) 부서사우(府西祠宇) 을해년에 세웠다. : 박태보(朴泰輔)
철원(鐵原) 포충사(褒忠祠) 을사년에 세웠고 무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응하(金應河)
금화(金化) 충장사(忠壯祠) 병신년에 세웠다. : 원호(元豪)
충렬사(忠烈祠) 경인년에 세웠고 임진년에 사액하였다. : 홍명구(洪命耈)
고성(高城) □□사(□□祠) 경오년에 세웠다. : 조지겸(趙持謙)


황해도(黃海道)
송화(松禾) 도동서원(道東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고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안악(安岳) 취봉서원(鷲峯書院) 만력 기축년에 세웠고 숭정(崇禎)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이(李珥)
황주(黃州) 백록동서원(白麓洞書院) 만력 무자년에 세웠고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
은율(殷栗) 율곡서원(栗谷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고 숙종 신묘년에 옮겨 세웠다. : 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
충효사우(忠孝祠宇) 신묘년에 세웠다. : 박훈(朴薰) 호는 장련(長連)이며 현감을 지냈다.
김천(金川) 도산서원(道山書院) 숙종 임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제현(李齊賢)ㆍ이종학(李種學)ㆍ조석윤(趙錫胤)
민충사(愍忠祠) 갑술년에 세웠고 임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중로(李重老) 좌방어사(左防禦使)이다.ㆍ이성부(李聖符) 우방어사(右防禦使)이다.ㆍ박영신(朴榮臣) 풍천 부사(豐川府使)ㆍ이사주(李師朱) 이천 부사(伊川府使)ㆍ윤정준(尹廷俊) 옹진 현령(瓮津縣令)ㆍ권호원(權浩源) 훈국초관(訓局哨官)ㆍ장면(張緬) 훈국초관ㆍ방흡(方潝) 방어군관(防禦軍官). 갑자년 이괄(李适)의 변조에 상세하다.
평산(平山) 동양서원(東陽書院) 숭정 임오년에 세웠고 숙종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이색(李穡)
구봉서원(九峯書院) 숙종 병자년에 세웠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세채(朴世采)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 고려 때 세웠는데 임진ㆍ정유년의 병화로 불에 탄 것을 병자년에 중건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 고려 때 사람으로 시호는 무공공(武恭公)이며, 철상(鐵像)이 있다.ㆍ유금필(庾黔弼) 고려 때 사람이다. 시호는 충절공(忠節公)이며, 철상이 있다.
재령(載寧) 경현서원(景賢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이
수안(遂安) 용계서원(龍溪書院) 현종조 임인년에 세웠고 숙종조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한(漢) 나라 관녕(管寧)ㆍ이연송(李連松) 고려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졌다.ㆍ강백년(姜栢年)
연안(延安) 비봉서원(飛鳳書院) 융경(隆慶) 경오년에 세웠고 경신년에 사액하다. : 주자(朱子)ㆍ최충(崔冲)ㆍ김굉필(金宏弼)ㆍ성혼(成渾)ㆍ이이(李珥)ㆍ박세채(朴世采)
현충사(顯忠祠) 숭정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이정암(李廷馣)ㆍ신각(申恪)ㆍ송덕윤(宋德潤) 첨사(僉使)ㆍ장응기(張應祺) 군수(郡守)ㆍ김대정(金大鼎) 부사(府使)ㆍ조광정(趙光庭) 생원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해주(海州)에 살았다.
문화(文化) 봉강서원(鳳崗書院) 갑신년에 세웠고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정계사원(程溪書院) 경술년에 세웠고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유관(柳寬) 세종 때의 정승이다.
충효사(忠孝祠) 신묘년에 세웠다. : 유언겸(兪彦謙) 효자(孝子)ㆍ홍진(洪禛) 현령을 지냈는데 병자호란 때 전사하였다.
신천(信川) 정원서원(正院書院) 만력 경진년에 세웠고, 현종 신해년에 중건하였으며, 숙종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해주(海州) 소현서원(紹賢書院) 만력 병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청성묘(淸聖廟)는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문헌서원(文憲書院) 가정(嘉靖) 기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최충(崔冲) 호는 성재(惺齋),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다. 고려 태사(太師)이다. 자는 호연(浩然)이며, 해동부자(海東夫子)로 일컬어진다.ㆍ최유선(崔惟善) 충(冲)의 아들이다. 시호는 문화공(文和公)이며, 추향하였다.
충렬사(忠烈祠) 문헌서원 곁에 따로 세웠다. : 최영유(崔永裕)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고려 때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였을 때 해주 목사로서 인신(印神)을 못에 던지고 물에 빠져 죽었는데 통인(通引)과 통인의 개도 따라 죽었다.
장련(長連) 봉양서원(鳳陽書院) 숭정 을해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박세채(朴世采)
배천(白川) 문회서원(文會書院) 동서양사(東西兩祠)가 있는데 선조의 어필(御筆)로써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조헌(趙憲)ㆍ박세채(朴世采) 이상은 서사(西祠) 4위ㆍ안당(安瑭)ㆍ신응시(辛應時)ㆍ오억령(吳億齡)ㆍ김덕함(金德諴) 이상은 향현동사(鄕賢東祠) 4위
봉산(鳳山) 문정서원(文井書院) 신유년에 세웠고 숙종 계미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ㆍ강석기(姜碩期)
충렬사(忠烈祠) 숙종 무자년에 세웠다. : 김만수(金萬壽) 공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무과 출신으로 부사를 지냈다.ㆍ강찬(姜燦)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김천수(金千壽) 형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백수(金百壽)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구수(金九壽)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광협(金光鋏)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이옹(李蓊) 울진(蔚珍) 현감을 지냈다. 모두 임진 의병이다.
서흥(瑞興) 화곡서원(花谷書院) 병술년에 세웠다. : 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ㆍ김귤(金橘) 호는 검재(儉齋), 이조 참판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강령(康翎) 충렬사(忠烈祠) 인조 계미년에 세웠다. : 유응부(兪應孚) 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ㆍ유빈(柳蘋) 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백현(白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ㆍ정린(鄭麟) 본 고을 현감을 지냈고, 병자호란 때 토산(兔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장연(長淵) 용암서원(龍巖書院) 선조 기축년에 세웠고,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ㆍ이이


평안도(平安道)
안주(安州) 청천서원(淸川書院) 계해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을지문덕(乙支文德)ㆍ최윤덕(崔潤德)ㆍ이원익(李元翼)ㆍ김덕함(金德諴)
충민사(忠愍祠) 신유년에 세웠고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남이흥(南以興) 병사(兵使)ㆍ김준(金浚) 본 고을의 목사이다.ㆍ이상안(李尙安) 강계(江界)ㆍ김상의(金尙毅) 귀성(龜城)ㆍ박명룡(朴命龍) 벼슬은 우후(虞侯)이다.ㆍ이희건(李希建) 용천(龍川)ㆍ장돈(張暾) 죽천(竹川)ㆍ김양언(金良彦) 태천(泰川)ㆍ송덕영(宋德榮) 맹산(孟山)ㆍ김언수(金彦壽)ㆍ한덕문(韓德文)ㆍ송도남(宋圖南) 영유(永柔)ㆍ윤혜(尹惠) 박천(博川)ㆍ함응수(咸應秀)ㆍ양진국(楊晉國)ㆍ임충서(林忠恕) 이들은 정묘년에 순절(殉節)하였다.
강서(江西) 학동서원(鶴洞書院) 계해년에 세웠고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김반(金泮)
강동(江東) 청계서원(淸溪書院) 숙종 신해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조호익(曺好益)ㆍ김육(金堉)
자산(慈山) 의열사(義烈祠) 신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최춘명(崔春命) 벼슬은 고려조에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다.ㆍ홍명구(洪命耈)ㆍ최경후(崔景候) 본 고을 부사이다.ㆍ김지저(金之佇) 판관
□생사(□生祠) 갑신년에 세웠다. : 이세재(李世載) 감사ㆍ정석빈(鄭碩賓) 부사ㆍ김의만(金義萬)ㆍ조익징(趙益徵) 부사
철산(鐵山) 쌍충사(雙忠祠)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원정(李元禎) 고려 때 철주(鐵州) 방어사(防禦使). 백마장군(白馬將軍)으로서 몽고난때 입절(立節)하였다.ㆍ이희적(李希勣) 판관으로 함께 죽었다.
충무사(忠武祠) 숙종 을해년에 세웠다. : 정봉수(鄭鳳壽)ㆍ김여기(金礪器)ㆍ정인수(鄭麟壽)
희천(熙川) 상현서원(象賢書院) 만력 병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
용강(龍岡) 오산서원(鰲山書院) 을미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안국(金安國)ㆍ김정국(金正國)
정주(定州) 봉명서원(鳳鳴書院) 무술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신안서원(新安書院) 임오년에 세웠으며 병신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 화상(朱子畵像)
순안(順安) 성산서원(星山書院) 숭정 정해년에 세웠으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한우신(韓禹臣) 호는 정안(靜安), 추향되었다. 벼슬은 내자정(內資正)이다.
강계(江界) 경현서원(景賢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
성천(成川) 학령서원(鶴翎書院) 숭정 갑술년에 세웠으며,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조호익(曺好益)ㆍ정구(鄭逑)ㆍ박대덕(朴大德) 호는 합강(合江)
쌍충사(雙忠祠) 선조 기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의(鄭顗) 고려조의 중랑장(中郞將)이다.ㆍ최춘명(崔椿命) 고려조의 추밀부사(樞密副使)다.
창성(昌城) 충렬사(忠烈祠) 기해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응하(金應河)
평양(平壤) 충무사(忠武祠) 경술년에 세웠고 숙종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을지문덕(乙支文德)ㆍ김양언(金良彦)
충정서원(忠正書院) 정해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홍명구(洪命耈)
무열사(武烈祠) 제사조(諸祠條)에 상세하다.
용곡서원(龍谷書院) 효종 무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선우협(鮮于浹)
인현서원(仁賢書院) 가정 갑자년에 세웠고 무신년에 사액하였다. : 기자수용(箕子睟容)
벽동(碧潼) 구봉서원(九峯書院) 숙종 정축년에 세웠고,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 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
귀성(龜城) 정공사우(旌功祠宇) 계미년에 세웠고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박서(朴犀) 고려조의 병사(兵使)이다. 침공한 몽고병을 방어한 공으로 정원 대도호(定遠大都護)에 승진했다.ㆍ김경손(金慶孫) 분도장군(分道將軍)이다.
영변(寧邊) 약봉서원(藥峯書院) 숙종 무진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선천(宣川) 주자서원(朱子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이이(李珥)
충렬사(忠烈祠) : 김응하(金應河)ㆍ김만중(金萬重) 벼슬은 문형(文衡)이다.ㆍ박태보(朴泰輔)
충민사(忠愍祠) : 임경업(林慶業)
삼충사(三忠祠) 고려 목종 때에 거란(契丹)과 싸워 전사하였다. : 양규(楊規) 벽상공신(壁上功臣)이며, 서북도순검사(西北都巡檢使)이다.ㆍ김숙흥(金叔興) 벽상공신이며, 서북도지사(西北都指使)이다.ㆍ유백부(庾伯符) 통주부서(通州府署)
삭주(朔州) 금창서원(金昌書院) 정해년에 세웠다. : 김익호(金翼虎) 호는 만학재(晩學齋), 효행과 우애가 있고 학문이 깊었다.
곽산(郭山) □□서원 인조 기축년에 세웠다. : 이원(李黿)ㆍ홍경우(洪儆禹) 호는 월포(月浦), 벼슬은 봉상첨정(奉常僉正)이다.
태천(泰川) 둔암서원(遯庵書院) 무술년에 세웠다. : 선우협(鮮于浹)ㆍ김익호(金翼虎)
희천(熙川) 상현서원(象賢書院) 만력 병자년에 세웠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
박천(博川) 지천사우(遲川祠宇) 정해년에 세웠다. : 최명길(崔鳴吉)
의주(義州) 읍내사우(邑內祠宇) 숙종 16년 경오에 세웠다. : 을파소(乙巴素) 고구려의 국상(國相)ㆍ김상헌(金尙憲)
백마산성사우(白馬山城祠宇) 숙종 35년 을축에 세웠다. : 강감찬(姜邯贊)ㆍ임경업(林慶業)
영유(永柔) 삼충사(三忠祠) 제사(諸祠)에 들어 있다.


함경도(咸鏡道)
함흥(咸興) 문회서원(文會書院) 가정 계해년에 세웠으며, 선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문선왕(文宣王) 화상 사우(祠宇) 만력 정미년에 세웠는데 문회서원의 서쪽에 있다. : 이계손(李繼孫)ㆍ유강(兪絳) 감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숙민공(肅敏公)이다.ㆍ이후백(李後白)ㆍ한준겸(韓浚謙)ㆍ이광하(李光夏) 감사ㆍ남구만(南九萬)ㆍ문덕교(文德敎) 호는 동호(東湖), 좌랑을 지냈고 행실이 올바름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아우 선교(善敎)가 왜병에게 살해되자 공은 의병을 수창(首倡)하였으나 자기가 지은 임진록엔 이 일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창의사(彰義祠)에 들지 못했다. 현종 정미년에 추향되었다. 영종 때에 도령(都令)에 증직되었다.
운전서원(雲田書院) 정미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ㆍ조헌(趙憲)ㆍ민정중(閔鼎重)
창의사(彰義祠)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백응상(白應祥) 임진왜란 때에 묘파보(妙坡保) 권관(權管)으로 본부(本府) 판관에 승진되고 의사(義士)와 더불어 창의(倡義)하였다.ㆍ유응수(柳應秀) 삼수(三水) 군수를 지냈으며 판서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아버지가 적에게 살해됨을 통분히 여겨 중위장(中衛將)으로서 창의(倡義)하여 원수를 갚았다. 선조가 명을 내리어 별장(別將)을 삼았는데 영남에서 왜를 토벌하다가 전사하였다.ㆍ이유일(李惟一) 부사(府使)인데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동위장(東衛將)으로서 창의하였다.ㆍ한인제(韓仁濟) 벼슬은 우후(虞侯)이다.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방원 만호(坊垣萬戶)로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북진(北鎭)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여섯 번 격파하였다.ㆍ박중립(朴仲立) 벼슬은 만호이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좌기장(左騎將)으로서 창의하였다.ㆍ이희록(李希祿) 벼슬은 첨정이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 유생(儒生)으로 의병을 일으켰다.ㆍ정해택(鄭海澤) 벼슬은 만호(萬戶)이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 우위장(右衛將)으로서 의병을 일으켰다.ㆍ박길남(朴吉男) 만호이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의분심과 지략(智略)과 훌륭한 활솜씨로 의병을 일으켰다.ㆍ박응숭(朴應嵩) 벼슬은 만호이며 군기정중위장(軍器正中衛將)에 증직되었다. 정유년에 유응수(柳應秀)를 대신하여 별장(別將)이 되었다.ㆍ이사제(李思悌) 판관이며, 부정(副正)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나이 겨우 19세였으나 끝까지 충성을 다하였다.ㆍ한경상(韓敬商) 참봉이며 감찰에 증직되었다. 생원으로서 동위장(東衛將)이 되었고 임기응변과 지려(智慮)가 뛰어났다.ㆍ김응복(金應福) 직장(直長)이며 감찰에 증직되었다. 학식과 기절(氣節)이 있었고 격문을 전하여 적을 물리쳤다. 뒤에 문과에 올랐다.
영흥(永興) 흥현서원(興賢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이계손(李繼孫)
길주(吉州) 명천서원(溟川書院) 병오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
향현사(鄕賢祠) : 허유례(許惟禮) 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효장공(孝莊公)이며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적개공신(敵愾功臣)이다.ㆍ원충서(元忠恕) 참의에 증직되었다.ㆍ허진(許珍) 유례(惟禮)의 증손인데 도사(都事)에 증직되었다.ㆍ김국신(金國信) 금부도사에 증직되었다.ㆍ허수민(許秀敏)ㆍ허대성(許大成) 유례의 5대 손이다.ㆍ허성일(許誠一) 유례의 6대 손이다.
경성(鏡城) 창렬사우(彰烈祠宇) 병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문부(鄭文孚) 임진록에 들어 있다.ㆍ이붕수(李鵬壽) 지평에 증직되었다.ㆍ강문우(姜文佑)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다.ㆍ최배천(崔配天) 판관(判官)에 증직되었다.ㆍ지달원(池達源)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이희당(李希唐) 훈련부정(訓練副正)에 증직되었다.ㆍ이기수(李麒壽) 좌랑에 증직되었다.ㆍ박유일(朴惟一)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서수(徐遂)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오경헌(吳慶獻)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다.
□□묘우(□□廟宇) 고려조에 육진(六鎭)을 개척한 공으로 사당을 세운 것이다. 부(府)의 서쪽 2리에 있다. :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 평장사(平章事)이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선조 16년에 창건하였다.
청덕당(淸德堂) 을사년에 세웠다. : 성하종(成夏宗) 병사(兵使)이다. 창흥군(昌興君)으로 봉해졌고 청백리(淸白吏)이다.
흥혜사우(興惠祠宇) 숙종 계미년에 세웠다. : 이광하(李光夏) 판윤(判尹)으로서 선비 양성에 공을 세웠다.
회령(會寧) 현충사우(顯忠祠宇) 숙종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정문부(鄭文孚)ㆍ신세준(申世俊) 첨지(僉知)였는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최언영(崔彦英) 벼슬은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이다ㆍ오윤적(吳允迪) 벼슬은 군기시주부이다.ㆍ허관(許灌) 벼슬은 군기시주부이다.ㆍ정여경(鄭餘慶) 벼슬은 예빈봉사(禮賓奉事)이다.ㆍ윤립(尹岦) 벼슬은 예빈(禮賓)ㆍ이희백(李希白)ㆍ오준례(吳遵禮) 모두 수문장(守門將)이다.
□□사우(□□祠宇) 만력 병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ㆍ이윤우(李潤雨)ㆍ김시양(金時讓)
종성(鍾城) 종산서원(鍾山書院) 현종 병오년에 세웠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기준(奇遵)ㆍ유희춘(柳希春)ㆍ정엽(鄭曄)ㆍ김상헌(金尙憲)ㆍ정홍익(鄭弘翼)ㆍ정온(鄭蘊)ㆍ조석윤(趙錫胤)ㆍ유계(兪棨)ㆍ민정중(閔鼎重)ㆍ남구만(南九萬) 두분(二公)이 추향되었다.
행영사우(行營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ㆍ김응하(金應河)
온성(穩城) 충곡서원(忠谷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기준(奇遵)ㆍ김덕함(金德諴)ㆍ유계(兪棨)
덕원(德源) 용진서원(龍津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창주영각(滄洲影閣) : 주자(朱子)의 화상(畫像)
문천(文川) 문포서원(文浦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ㆍ민정중(閔鼎重)
□□영당(□□影堂) : 공자의 화상(畫像)
단천(端川) 복천영당(福川影堂) 임오년에 세웠다. : 문선왕(文宣王)의 화상(畫像)
경원(慶源) 충렬사(忠烈祠) 임신년에 세웠다. : 김응하(金應河)ㆍ최진립(崔震立)
북청(北靑) 노덕서원(老德書院) 숭정 갑오년에 세웠고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복(李恒福)ㆍ김덕함(金德諴)ㆍ정홍익(鄭弘翼)ㆍ이상진(李尙眞)ㆍ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
안변(安邊) 옥동서원(玉泂書院) 만력 무신년에 중건하고, 임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계손(李繼孫)ㆍ김상용(金尙容)ㆍ조석윤(趙錫胤)
삼현사(三賢祠)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이경승(李慶承) 호는 율도(栗島), 문과에 합격, 판관을 지냈다ㆍ이선승(李善承) 호는 미곡(薇谷), 감찰을 지냈다.ㆍ이지온(李之馧) 호는 빈교(貧郊), 참판을 지냈다.
정평(定平) 망덕서원(望德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김상헌(金尙憲)ㆍ조익(趙翼)ㆍ민정중(閔鼎重)
무산(茂山) □□사우(□□祠宇) 신묘년에 세웠다. : 남구만(南九萬)

[주D-001]장수(藏修) : 공부하는 것을 말하는데, 후세에 서당이나 서원을 장수하는 장소라고 칭하였다.
[주D-002]소수서원(紹修書院) :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서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중국에서 시초의 서원인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계승[紹]하여 닦는다[修]는 뜻으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하였다.
[주D-003]지명이 비록 같으나 :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 운곡(雲谷)이라는 지명이 있으면 주자(朱子)가 살았던 중국의 운곡을 따라 주자의 서원을 세웠었다.
[주D-004]태산(泰山)에 …… 하겠는가 : 노(魯) 나라의 진산(鎭山)인 태산에 노 나라의 임금이 아니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인데, 권신(權臣) 계씨(季氏)가 태산에 제사를 지내므로 공자가 태산의 산신(山神)이 그 제사를 받지 않으리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주D-005]절현사(節顯祠) : 현절사(顯節祠)의 오기인듯 하다.
健齋先生文集附錄卷之四
旌忠壇碑銘大提學李敏敍 a_047_061d


壬辰禍。賊屠城邑。殺長吏不可勝數。而晉介湖嶺爲賊衝。在我爲必守。在彼爲必爭。且一路創殘。州境獨完。南方諸將。皆保于晉。賊又先衄後奮。倂力必取。於是。晉終見屠。而忠義之士殲焉。始日本來寇。大勢兵047_062a踰鳥嶺。走李鎰。拉申砬。直搗京城。又分兵寇掠湖南。旣閑山不利。悉衆攻晉。千時。判官金公時敏。先賊之未至。糾合州兵。擊逐泗川, 固城賊。破賊將之據鎭海據金山者。威聲大振。回軍馳入城。大修守禦具以待賊。六月。賊果大至圍城。城中兵不滿千。賊將行長合諸屯賊十餘萬。攻圍六日。彼衆我寡。勢如壓卵。而公擧止安閒。有時吹笛鳴琴。軍中恃以爲安。督勵諸將。意氣奮發。士皆感泣。乘機赴節。捷出奇計。賊死傷如憤。知不可克。捲圍而退。賊退之日。公忽爲流丸所中。殞於城上。州民壯士。如喪父母。其明年。賊自平壤047_062b敗歸。以嶺爲巢穴。賊酋淸正憤前之不利。合兵復攻。時天朝以和誘賊。天將之進。賊在嶺南者。皆按兵不戰。摠兵劉綎移檄淸正使止兵。游擊沈惟敬力說行長。皆不聽。朝廷累下旨。督諸將進戰。都元帥金命元, 巡察使權慄以下官義兵皆聚宜寧。不敢先進。權慄責諸將。過江。至咸安。望見賊。皆潰。慄命元等先走。湖南倡義使金公千鎰。獨奮謂諸將曰。晉密邇湖南。實爲脣齒。無晉則無湖南矣。或欲空城避賊。以快其心者非計也。莫若竝力堅守。以遏賊勢。諸將不應。多散去。公與慶尙右兵使崔公慶會, 忠淸兵使黃公進, 義047_062c兵將高從厚, 泗川縣監張潤等。及諸將士十餘人。將兵入城。時金海府使李宗仁先入城矣。諸將兵僅數千。州民士女凡六七萬人。義兵將姜希悅李潛等繼至。牧使徐禮元素恇劫不知兵。凡守禦區畫。皆出千鎰。主客不相能。城本四面據險。其東稍平。至是部署諸軍。分城而守。黃進, 李宗仁, 張潤等各率兵。往來赴其急。約束旣定。人皆以死自誓。六月二十日。賊之前鋒。已至州境。吳宥, 李潛等出城詗賊。斬數級而來。城中鼓譟。千鎰遣梁山璹乞師劉綎。綎畏賊終不出師。其明日。賊大至圍城三帀。進薄城下。柵竹自蔽。從其047_062d內發砲丸如雨。城中人悉力拒守。賊又乘夜進逼東門。大呼登城。聲震天地。進等擊却之。一日。賊急攻西北隅。城幾陷。進奮劍督諸軍。登陴射賊。賊乃退。賊又築土山。臨城俯攻。進亦築高阜以當之。賊又設板屋置大木上。放火燒城中室屋。進用火砲碎之。時久雨。城一隅潰。賊遂乘之。金浚民力戰死之。賊又築五阜於城東西。登其上放丸。姜希輔死之。進乃放火箭焚柵。賊又作大櫃置四輪車上。被用者挽車逼城。進乃束火灌油而焚之。其後。賊潛來穴城。進等殊死戰。賊酋一人中丸斃。賊兵死者千餘人。賊退。進臨城視戰047_063a地。忽有賊丸中進左額而死。軍中使潤代進。旋又戰死。進, 潤智勇爲諸將最。而一時皆隕。士卒喪氣。賊因圮堞蟻附而上。宗仁等搏戰救之。旣已。賊趨西北躍入。禮元先走。諸軍大潰。千鎰等在矗石樓。與其子象乾及高從厚崔公慶會, 梁山璹等數十人。北面再拜。赴南江而死。李宗仁, 李潛, 姜希悅等十餘人。奮劍斫賊。力盡而死。宗仁將死。腋二賊赴水。大呼曰。金海府使李宗仁死於此。寔二十九日也。城旣陷。軍民皆被屠戮。無一人得脫。牛馬鷄犬亦不遺。夷城塡壕。堙井刋木。以快前憤。自是賊亦挫銳頓鋒。不能復振。湖南047_063b賴以全。蓋賊旣致死於晉。而諸公以弱卒守孤城。外援不至。終必折而不救。人人皆知之矣。然諸公誓死不去。力守於事去之後。要與城俱斃。以蔽遮湖南。忠壯義烈。固當與張巡匹美。而至其乘機立慬。出奇應卒。摧敗賊鋒無算。其功謀亦不可勝道者哉。其後累朝褒贈甚備。置彰烈祠。又設旌忠壇於近地之麓。祀以春秋。贈領議政金公時敏, 贈左贊成金公千鎰, 黃公進, 贈左參贊崔公慶會。在北南向。義兵將高從厚, 李潛, 金海府使李宗仁, 虞候成穎達, 泗川縣監張潤, 僉正尹思復, 學生李仁民, 代將孫承善, 主047_063c簿鄭惟敬, 守門將金太白, 宣務郞梁濟, 學生朴安道在西列。贈承旨梁山璹, 贈參議金象乾, 義兵將姜希悅, 巨濟縣令金俊民, 鎭海縣監曺慶亨, 判官琦弼, 贈主簿兪晗, 生員李郁, 守門將張胤賢, 義兵將姜熙復, 判官朴承男, 學生河繼先, 崔彦亮。在東列。晉城之事遠矣。而記功勳。著義烈。昭久遠者。闕然不圖。今御營大將徐公文重。觀察嶺南。過晉巡覽諸公死義之地。慨然興慕。大懼其久益昧沒也。遂與南鄕將士。謀所以彰示後世者。右兵使李公基夏主其事。統制使金公世翊佐其費。碑旣具。徐公請銘於不佞。047_063d不敢辭。乃爲之詞。嗚呼。晉城之事。豈不悲哉。寇再逞而勢益鷙。國方潰而援不至。主客相猜而輿尸凶。人衆雖多而聚蟻蜂。蒼黃叫號。卒就魚肉。獨使夫志土仁人。張空拳兮樹立卓。寧人謀之不臧。豈天意之祚惡。矗石高兮屹立。江流長兮萬古。紛煙愁兮雨泣。魂魄毅兮奮威怒。酌漂淸兮薦芳腯。祀春秋兮耿南土。
松亭先生文集卷之四
 
遊德山獐項洞盤石記 a_061_120c


自書院渡薩水。西北行數十里有洞焉。是謂獐項。窈而深。深而狹。其上下有松森列。其直如矢。自獐項過小菴。東北行數十步有石焉。是謂盤石。方而廣。廣而平。其左右有水環流。其鳴如佩。眞幽絶處也。昔南冥061_120d先生甞遊於斯。有十破牛脇之詩。用是諸君皆感慕踟蹰。睹其直而思其氣象。聆其鳴而慕其謦欬。余遂題一詩以吟曰。昔聞獐項有瑰觀。今日來尋薩水干。谷口兩崖懸似壁。澗心雙石矗如盤。春風已斷死牛脇。秋色空粧舞鳳顔。惆悵古人尋不見。洞天山月思無端。時同遊者六人。姜敏修士吉崔琦弼奎仲河憕子平吳長翼承及曺次磨二會。余亦與其數焉。是日也八月十八日丁卯享祀後。
선조 16 1583 계미 萬曆 11 19 8월, 南冥 曺植의 사당을 참배하고 茅山 崔琦弼,滄洲 河憕과 獐項洞을 유람하다.
선조 16 1583 계미 萬曆 11 19 8월, 南冥 曺植의 사당을 참배하고 茅山 崔琦弼,滄洲 河憕과 獐項洞을 유람하다.

茅山先記序]
   
[序]
   
 

茅山先生崔公實記序權相圭

恭惟茅山先生崔公晉陽殉節固已載之國乘登諸野史朝家寵贈其爵秩而賜額其壇祠秉管諸君子狀其行而銘其碣昭然光日月而垂宇宙東國之士莫不以唐之巡遠比擬焉於乎偉哉然而公私闡揚文字不可以不會萃爲一篇旣會萃則不可以不公行于世此實記之所以成而汲汲於繡梓者也盖甞論之晉陽國之要衝也在我爲必守在賊爲必爭故壬辰日寇之內搶也分兵攻晉失利而退及其自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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壤敗歸忿前日之失志悉衆攻圍勢若風雨當是時明將觀望鄰郡退怯曾無蚍蜉之援而城危如累卵矣公憤然曰無晉州無湖嶺無湖嶺則宗社危矣此豈臣子苟生時耶遂倡義幡率家丁六十冒危入城與金健齋高隼峰諸公誓死守城隨機應變斬獲甚多旣而雨潦城壞强虜爛入衆寡不敵事無可爲則遂與諸公北面四拜投南江而終世於乎此公殉節始終也夫忠君愛國人性之所同得而亦各有好生惡死之心故言而諭其性入人也淺死而激其心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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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也深公之一死不亶爲自身報國之忠其所以激勵天下彝性奮忠君愛國之義而所在起兵使湖嶺數千里終得以保障者安知非先生義烈風聲之所感耶太史氏所謂其所摧敗零落亦足有辭於天下者殆先生之云乎竊甞攷之公至孝天出早孤而執喪如成人鄰里稱孝童伯叔季諸公並而武顯而公獨以儒術自勵博學力行登薦剡而仕至晉州判官可仰其孝移於忠而熊魚取舍已判於經几講究之日也又豈與倉卒判命者同歸於一節已哉公後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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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契甫奉公實記北涉五百里屬相圭以序其端者顧耄弊不堪而苟寄於世抱庚戌之恥者于今四十年盥讀一篇不勝感激景慕之私不能終辭而敬書 卷端云

歲己亥之復陽月永嘉權相圭謹序

茅山先生實記卷之二
   
附錄
   
 

家狀

先生諱琦弼字圭仲系出全州始祖阿文科侍中 平章事謚文成公生龍生文科忠定庚寅以持平爲慶尙道按廉使至三世斯泌文科司僕寺正生得涇入我朝文科刑曺判書第二子孝良文科 贈刑曺參判寔先生之高祖也曾祖崙僉正祖永甄進士考涏贈戶曹參判妣貞夫人密陽孫氏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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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蘭友女參判卜居于晉西茅芳谷每指家後山曰山勢截而特立吾子孫必有忠武立節者又甞夢天降四珠祥光滿懷及生四男命名以琦而皆顯達時人謂之四顆寶珠長琦衍行全州判官贈 工曹參議次琦抃行泰安郡守季琦準行明川府使先生其第三也以嘉靖壬戌四月十一日未時生生有異質岐嶷如巨人才行兼備動止儼然參判甞曰昌大吾門者必此兒也年至四五口授文字一聞輒記七八歲涉經史文學日就讀至孟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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威武不能屈之語卽若有契悟處擊節歎曰大丈夫行事當如是彼庸碌者顧何人哉聞者聳然咸以爲遠大之器不幸早喪怙恃居憂之節一如成人日隨伯仲氏居於堊室每至晨昏哭泣過哀鄰里感傷稱之以孝童伯仲皆以武顯及服闋或勸舍文就武曰要速達而就武本出於安陽奉檄之意而今尙奚爲仍挾詩書晝夜講誦與吳守吾堂僴河松亭受一河滄洲憕吳思湖長爲道義之交時輩以崇文尙禮稱之朝廷以行義除參奉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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遷司甕奉事至晉州判官無求進意退居于州西白雲洞結茅數架書史自娛以舊居茅山之名揭于顔盖濂溪寓號之意也及當壬辰之亂賊騎蹂躙八路瓦解獨晉之矗石山城賴判官金公時敏以死守之僅支一髮其明年癸已賊酋兵又到晉陽勢若豕突而官義兵單弱不能格城將不曰陷遠近士民率皆驚竄山谷惟恐後時而獨慨出涕曰晉陽一城郞天寶之睢陽此城若不保三南從而不能支矣且賊忿前之不得志必欲屠之官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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旣不能救而爲士民者又皆鳥鼠竄而已則是無此城也養賊之鋒再驚陵闕則爲臣子者義安在哉吾世受國恩不可草間苟活乃措備弓矢率家丁六十餘人冒刃入城官義諸將士素聞名見其至喜曰此人至此城守矣當此波蕩之日奮不顧身特爲民士倡眞義士哉遂相與誓死共修戰守之具六月二十一日賊大至圍城三匝水洩不通自此日數十戰斬䤋極多餽餉士卒尤極誠實所部士皆歡呼樂赴死所以每戰多捷及軍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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罄盡外援不至陰雨連旬城西北隅三版一時崩頹諸軍急救之而賊已闌入劍戟如霜火丸如電冒刃血戰斬首亦多而是時黃兵使進張牧使潤先已中丸而死我軍已折右臂矣强寇滿城孤軍自潰設奇而不及矣搏戰而無救矣於是知事不可爲泣語諸將士曰本爲死守此城以報國矣今不可及義不可汙於賊鋒遂北面四拜與倡義使金千鎰義兵將高從厚等一時赴死於南江之水是日城遂陷萬曆癸巳六月二十九日也享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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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二以遺衣冠葬於州西加西里山岱洞負兌之原後以淑夫人沔川韓氏祔夫人大璞女文正公彪後也有淑德克配君子及早寡而鞠幼孤有敎法婦道母儀爲一門閨範生二子長洙司圃署別提季瀷將仕郞洙二男振立斯立一女柳寅亨瀷三男仁厚從厚以厚振立二女朴允泰姜聖翰斯立一女鄭天齡仁厚一男聖瞻從厚無后以厚二女姜仁範金萬胄聖瞻一男載岳二女鄭東運 朴長春載岳二男柱國柱震一女柳復明各有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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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志氣倜儻器局峻正與人不苟合氣節自厲讀書精通大義不拘拘於章句之末而要以實踐爲期事父母則孝處兄弟則友律家而有法居鄕而有義敬以自牧而和以接物外不崖岸內不畦畛而人惟恐或犯於皮裏陽秋也盖其愷悌之中自有嚴毅之容如此每對士友討前史至於古人殉身立節處未甞不慷慨流涕其臨難不渝之志平居之素所蓄積也故晉介湖嶺爲賊衝在我爲必守在彼爲必爭而賊之自平壤敗歸也恨前之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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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合兵別攻投鞭江斷踼靴城倒官兵不敢進天將不肯救士民四散無一應募而獨以六十家丁自募而赴之視死如歸而思欲隻手障狂瀾也苟非平素蘊抱之有自則安能臨危授命如此哉雖城孤黑子援絶蚍蜉終亦折而不救然其所摧敗亦足相當而賊亦自此挫銳不敢復窺湖南則與諸公一死之力夫豈淺尠哉亂定後朝家嘉其節義爲之立旌忠壇於山城而並享其同時殉節諸臣後十二年乙巳錄宣武原從二等功臣後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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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年丁未觀察使鄭賜湖與節度使金太虛謀建祠宇而啓請額號卽賜彰烈之額肅廟丙寅 觀察使徐文重與節度使李基夏統制使金世翊治石請文於吏曺判書李敏叙立碑於矗石樓前 英廟庚申節度使南德夏惜其或闕褒贈啓以一般殉義之狀而請之後三年癸亥牧使李齊聃又以通于政院領相金在魯奏之各賜褒贈於是有兵曺參議之贈矣從子竹塘濯又當丙子亂奉使虜庭致節死之兩世忠義朝家哀榮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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備至而旣刳於兵燹又以欝攸以世世早世可攷文蹟收拾無人闡揚先烈之道尙此闕今當七十垂死之日竊恐其愈久而益泯謹次家傳若干遺蹟參之忠烈記以搆家狀一道以俟夫當世大君 子秉筆者采擇焉

崇禎後三甲壬寅淸和節五世孫柱國謹識
茅山先生實記卷之二
   
附錄
   
 

墓碣銘並叙

盖當龍蛇之亂爲國家效忠烈者非止一二而惟晉陽城殉節爲最著若茅山崔公卽其一也用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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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家贈兵曹參議以褒之士林享彰烈祠以崇之而其七代孫重臨又欲顯刻於墓道屬余爲一言得不樂道乎謹按公諱琦弼字圭仲全州崔氏也高麗門下侍中平章事謚文成公阿爲鼻祖歷 按廉使龍生司僕寺正斯泌至我朝文科行判書得涇文科贈刑參孝良寔爲公高祖曾祖崙僉正祖永甄進士考涏贈戶曹參判妣貞夫人密陽孫氏護軍蘭友女參判公甞指家後特立者茅山曰吾子孫必如之又夢天降四珠果連擧四男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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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達公以第三生於嘉靖壬戌四月十一日幼岐嶷夙成七八歲已涉經史文學日就讀孟子至威武不屈之語擊節歎曰大丈夫當如是早失怙恃守制如成人鄰里聞哭泣聲皆傷感之以孝童稱公兄弟皆用武顯公獨事詩書與吳守吾河松亭受一河滄洲吳思湖相講磨朝廷嘉其行誼授參奉後遷司甕奉事至晉州判官公不樂仕結數架笷茨於州西白雲洞揭茅山號以寓不忘舊居意及壬辰倭大搶八路瓦解獨晉之矗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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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城賴判官金公時敏得保明年癸巳賊兵又壓城將陷公慨然奮曰無此城三南從而不能支賊之再驚陵闕必矣卽率家丁冒刃入城爲死守城血戰多斬首未幾被十匝圍援絶糧盡黃兵使進牧使張潤皆中丸死公知事不可爲義不汚賊鋒遂北面四拜與倡義使金千鎰義兵將高從厚幷投南江乃萬曆癸巳六月二十九日也享年纔三十二以遺衣冠葬於州四山岱洞負兌原淑夫人沔川韓氏祔焉公倜儻峻正與人不苟合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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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大義務實踐事父母處兄弟居鄕黨咸盡其道與士友討論前史見古人立慬處未甞不慷慨流涕盖其熊魚之辨素定於胸中者如此故雖當地塹天傾之時而視七尺如秋毫欲以隻手障狂瀾甘爲薤粉而不辭是非精忠烈氣直與日月爭光能如是乎亂定後朝廷命立旌忠壇於山城並享其同時死節臣又錄宣武原從勳二等旣建祠又賜彰烈額前後泉司閫帥曁銓相諸公並致力於闡揚之道觀於矗石樓前碑文可知已豈但贈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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曁尸祝爲然哉韓氏文正公彪後大璞女也有淑德婦道母儀俱備生二男洙別提翼將仕郞洙二男振立斯立一女柳寅亨瀷三男仁厚從厚以厚曾玄以下不盡錄銘曰國之所賴者忠忠之所勸者同然主而爲長城者其激人衷猶不若死而爲長城者之尤爲功也盍觀夫自公輩死晉陽城中湖南北以及關西東莫不慕其風爭奮忠以守其封吾故特書之以詔無 窮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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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訓大夫前行司憲府掌令晉陽鄭宗魯撰
山先生實記
  茅山先生實記卷之二
   
附錄
   
 

墓誌銘

故通訓大夫行晉州判官贈通政大夫兵曹參議茅山先生崔公之墓在晉州治負酉之原後孫榮契以竁誌尙闕求其文于余盖公殉節于癸已晉陽之役逮今三百餘年朝家之褒崇已備後賢之撰述已詳今無庸復贅特掇其事實大略而書之曰公諱琦弼字圭仲茅山其自號也崔氏貫全州以高麗門下侍中平章事文成公阿爲上祖四傳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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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朝鮮刑曹判書得涇始居晉州有子曰孝良贈 刑曹參判是爲公之高祖曾祖曰崙僉正祖曰永甄進士考曰涏贈戶曹參判妣曰密陽孫氏護軍蘭友女公生而岐嶷俊茂日就法度幼喪父母執禮如成人鄰里稱以孝童及長讀書勤甚至孟子威武不能屈之語擊節歎曰不如此非大丈天讀史至忠臣烈士殺身成仁處輒嗚咽流涕與一時名流吳守吾僴河松亭受一河滄洲憕吳思湖長諸公相追隨刮磨名聲日起用薦爲參奉遷司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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院奉事至晉州判官皆不應命就州西白雲洞水石佳處結茅數楹以藏修榜其楣曰茅山而因以自號焉盖公生長于茅芳山下先公甞指山以勵子弟曰玆山特立吾子孫必有似之者故爲是號以寓其意云及壬辰倭寇大搶列郡瓦解獨晉城賴判官金公時敏力戰逐賊得以完保明年賊自平壤敗歸蓄前憾悉衆來圍城危如累卵公慷慨泣曰晉陽嶺湖要衝無晉陽則無嶺湖矣無嶺湖則無八域矣豈可不死守乎卽率家丁數十冒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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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城與倡義使金公千鎰兵使崔公慶會復讎將高公從厚及諸義士合力戰守時門將及官軍皆屯近地而畏怯不敢救相持九日大雨城崩公知事去遂與諸公投江以死時癸巳六月二十九日也年止三十二賊雖幸得勝而銳氣亦摧不敢窺湖南適會諸道義士所在起兵同心戮力盡忠報國卒能廓掃妖氛再奠區宇亦安知非諸公一死之力有以感激皷動之然耶於乎偉矣亂定後朝廷命立旌忠壇于戰地並享同時殉節諸臣乙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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錄公宣武二等勳丁未賜額彰烈祠至英祖癸亥贈公兵曹參議今庚子士林奉享于景仁祠自公旣沒而無所尋其體魄遺衣冠葬于此後以淑夫人韓氏祔焉韓氏沔川人大璞女二男洙別提瀷將仕郞洙二男振立斯立一女柳寅亨瀷三男仁厚從厚以厚曾玄以下略銘曰嗚呼公乎旣能不有其身而赴水以死兮寧更顧戀其衣冠之葬于此然而在子孫事亡如存之誠兮衣冠亦足以想像其平生珠襦玉匣附身附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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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名骨俱臭者皆是兮人之有恥孰肯以此而易 彼
辛丑孟春上浣道州金在華謹撰
茅山先生實記
  茅山先生實記卷之三
   
別錄
   
 

彰烈祠賜祭文英廟癸巳三月日

一片晉陽雙廟對屹哿矣忠愍殉身亦烈儼其位序列宿是應千載想像孰不沾膺粤在龍蛇島夷猖獗湖嶺響震靡不摧覆晉獨截然若砥抗流賊所蓄憾兩歲一州歸師環攻蜂屯蟻聚烈烈倡義先兩節度白袍從事以孝以忠有來如雲義膽攸同地有必爭人能舍命非謀或忒奈天不靖雲梯百道敵及乘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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斂我豪英與堞同平或丸或刃視死如歸或赴于水腋挾靑衣北面慟哭義列愈彰列壁坐觀獨何心膓城雖覆矣氣則不泯化厲殲賊以洩餘憤亦作山河以壯關防遄掃匈氛寔賴陰相惟此寃欝貫徹古今滔滔大江與之共深建宇妥靈崇報靡替歲月寢遙 誠禮或怠曠焉相感恍其如昨命官齋沐替此泂酌

使臣本道都事金廷潤大祝兼典祀召村察訪臣 鄭壽崗齋郞祝史沙斤察訪臣任瓊
 
茅山先生實記卷之三
   
別錄
   
 

旌忠壇祠宇重修記進士河世應

晉陽城西隅有曰忠愍彰烈兩祠自前代立以祀龍蛇死義將士者厥初只設壇廟自官致祭而使武品將事故齋祓無所不免風露薦祼拜跪不中儀式今節度使崔公鎭漢來鎭玆州謁遺廟詢舊跡衋然興慨思所以新之省冗費殖錢穀經紀一年餘乃改塗祠廟丹雘創立東西齋室修門墻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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庭除簠簋罍爵祭服冠履咸能辦造以至供祭養士之具莫不纖悉措置而又陳啓于朝改定彰烈祠位次仍使儒士掌其祀盖前代之未擧之禮也昔韓文公叙張中丞傳後云愈親祭於所謂雙廟者雙廟卽巡遠廟也忠烈之士立廟祭之者厥惟遠矣晉陽之忠愍彰烈祠卽睢陽所謂雙廟者而我國之有晉陽猶唐室之有睢陽也睢陽得巡遠蔽遮江淮而唐以之不亡晉陽得彰烈諸公保障湖嶺而我國亦能重恢其弘功大節可以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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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齊聲而激多士之志氣也豈獨赴義死節而紹興中信州守王自中奏請立廟賜額朱晦庵爲之作碑銘稱美盖嘉王公之崇節義也崔公詰戎之餘兼通書史於古記無不貫達故其設施知所先後而革前時瀆昵之所作今日禮義之場顧不韙歟况重修之費不下數千而崔公皆能自辦其視掊克士卒輦賄權門圖寵利而嬰禍亂者其爲人賢與愚何如也當平居無事之時感激忠義之志若彼其磊磊儻使臨危亂則安知無仗節死義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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擧耶余晉之士也喜聞祀禮之新修樂道崔公之美擧而竊有感於韓公祭雙廟䀲庵之頌王公遂
영조 2년 5월 16일 (정미) 원본617책/탈초본33책 (28/30)

1726년 雍正(淸/世宗) 4

 

 

 
金時敏 등을 모신 사우에 병향된 李郁 등에게 贈職을 내려줄 것과 論介에게 정표를 내려줄 것을 청하는 崔鎭漢의 상소


○ 慶尙左兵使崔鎭漢疏曰, 伏以臣愚陋賤品, 決拾末流, 地分卑微, 見識窾啓, 鞅掌職事, 尙且區畫之不暇, 瀆擾宸嚴, 何敢僭妄之自干乎? 唯是尙節慕義之心, 顯忠遂良之誠, 所素蓄積于中, 而不肯自後於人矣。玆將隱卒之微忱, 敢陳燭幽之聖鑑, 伏願殿下, 澄省而採納焉。臣於辛丑年, 待罪于本道右兵營, 營卽三去壬癸年倡義軍復矢處, 而中有忠愍·彰烈賜額之兩祠, 年久之後, 未免頹圮, 故其時所見形止, 啓聞後修補, 而審察兩祠位牌, 則忠愍, 卽壬辰戰亡晉州判官臣贈領議政金時敏, 單位牌所享之祠, 彰烈, 卽癸巳戰亡慶尙右兵使臣贈右參贊崔慶會, 忠淸兵使臣贈左贊成黃進, 倡義使臣贈左贊成金千鎰, 泗川縣監臣贈兵曹判書張潤, 倡義使從事官臣贈承旨梁山璹, 贈參議臣金象乾, 巨濟縣令臣金俊民, 奮義義兵將臣贈主簿兪晗, 生員臣李郁, 義兵將臣姜熙復, 守門將臣張胤賢, 判官臣朴承男, 學生臣河繼先, 學生臣崔彦亮, 復讎義兵將臣高從厚, 敵愾義兵將臣李潛, 金海府使臣李宗仁, 右兵營虞候臣成穎達, 僉正臣尹思復, 學生臣李仁民, 義兵代將臣孫承先, 主簿臣鄭惟敬, 守門將臣金太白, 學生臣朴安道, 宣務郞臣梁濟, 奮義義兵將臣姜熙悅, 鎭海縣監臣曺慶亨, 判官臣崔琦弼, 二十八位牌竝享之祠矣。臣次第瞻敬, 繼以訝惑, 噫, 龍蛇之亂, 列郡風靡, 鳥伏鼠竄, 滔滔皆是, 急病攘夷, 寥寥無幾, 而惟彼卄八諸臣, 一般義膽, 力盡孤城, 同日殉節, 炳然義烈, 卓乎如彼故, 表奬之典, 最先於亂定之初, 而咸秩之禮, 竝享於一廟之中, 其在慰忠魂樹風聲之道, 可謂無歉, 而至於贈職一款, 竊有所未解者, 同時死事, 一體祭祀, 而七人位牌, 崇其寵贈, 卄一名位, 獨也蕭條, 或書行職, 或書義兵將, 或書生員, 或書學生, 此臣所以訝惑, 而未解者也。夫諸臣取義, 旣不上下則朝家褒贈, 宜無異同, 而何取何舍, 或贈或不, 一視均典, 似不若是, 瞻聆嗟異, 當復如何? 嗚呼, 睢陽當日, 巡遠之死, 先後異焉, 而唐家崇報, 一體無間者, 誠以斗許丹血, 兩介一腔, 況此諸臣, 死不先後, 而畢竟恩典, 同廟而異施者, 抑獨何哉? 雖取其表著者, 較而論之, 忠孝兩全, 如高從厚者, 果下於金象乾乎? 節義昭著, 如李潛者, 果下於梁山璹乎? 恩延揭厲, 古今通誼則, 義兵將題銜者, 此何義乎? 勿傷汪踦, 聖人衮筆, 則學生題銜者, 獨不冤乎? 臣雖至愚, 無所知識, 而區區一念, 用愍于是, 乃於壬寅年, 以倂施褒贈之意, 枚擧馳啓, 則其時籌司覆啓, 以爲同時立慬之人, 多未蒙一體褒贈者, 當時朝議, 似或出於參酌取舍之意, 則到今過百年之後, 不可率爾輕議, 其說不行, 其事遂寢, 臣誠慨惜, 而不能自已也。臣請拈出參酌取舍之語, 而明其不然, 夫事在疑信之間, 功有彼此之別然後, 始可參酌而取舍之矣。彼諸臣殉國之節, 旣無疑信於其間, 亦無彼此之可別, 則臣未知何以參酌, 而何以取舍乎? 當時實蹟, 雖不可盡考, 而廟焉享之, 額而榮之者, 實在於平亂之初, 則其死之明白可賞, 不待考蹟, 而可證左契, 況且可據實蹟, 昭載於旌忠壇麗牲之文, 取考其略, 則有曰當晉陽城陷之日, 倡義使金千鎰梁山璹等數十人, 北面再拜, 赴南江而死, 李宗仁姜熙悅等十餘人, 奮劍斫賊, 力盡而死。又曰, 宗仁將死, 掖二賊赴水, 大呼曰, 金海府使李宗仁, 死於此, 其忠壯氣節, 有令人髮豎者矣。屹然龜頭, 日星輝映, 昭昭赫赫, 照人耳目, 則載實之文, 有不可誣矣。噫, 當時之立廟竝享, 旣出公議, 中間之劖石齊芳, 又是實蹟, 則諸臣心事之昭著, 可謂通天地亘古今, 而不可疑信於其間矣。伊日朝議, 亦奚惜死後之哀贈, 別爲參酌而取舍之乎? 雖彼隷臺之賤, 苟有可賞之事, 則其在酬報之道, 不當分別而視, 豈以諸臣之忠, 俱辦一樣之節, 而獨於贈職之典, 有何差等之異乎? 事在久遠, 不可臆料, 而博採有識之流傳, 參以愚臣之賤慮, 則當亂離甫定之初, 庶事未遑之時, 道臣之請贈者, 未免疎漏之患, 禮官之奉命者, 或有忘忽之弊, 因循至今, 未能提起之致也。此豈由於參酌取舍而然哉? 至於到今過百年之後, 不可率爾輕議云者, 尤有所不然, 苟有卓卓之節, 烈烈之名則, 雖或湮沒於當時, 猶且褒揚於異代, 矧惟我聖朝崇奬旌表之方, 不間於歲月之久近者乎? 臣不必旁引而曲證, 請以死節於壬辰, 而贈旌於近日者明之, 忠淸兵使臣贈兵曹判書成應吉, 副司果臣贈承旨李瑋, 俱是倭亂殉身之人, 而乃於百餘歲後八九年前, 始因其子孫之呼籲, 特擧其贈旌之恩典, 則何獨於此, 不可輕議乎? 果若定取舍於當時, 不輕議於今日, 寵贈均典, 終始獨靳, 則彼卄一人忠魂義魄, 不亦冤鬱於冥冥之中耶? 此臣所以激切于心, 而愍惻于中者也。且臣嘗閱柳夢寅所著野談一冊, 有曰論介者, 晉州官妓也。當萬曆癸巳之歲, 金千鎰倡義師, 入據晉州, 以抗倭, 及城陷軍散, 人民俱死, 而論介, 凝粧靚服, 立于矗石樓下峭巖之前, 其下萬丈, 直入波心, 群倭, 見而悅之, 皆莫敢近, 而獨一倭, 挺然直前, 論介, 笑而迎之, 遂抱其倭, 直投于潭, 彼官妓淫倡也。而視死如歸, 不朽於賊, 渠亦聖化中一物, 不忍背國從賊, 無他, 忠而已, 猗歟哀哉。夢寅, 以文章名, 爲此傳, 頗詳密, 臣每讀至此, 未嘗不擊節, 而嗟異之, 及到晉營, 矗石之下南江之上, 果有峭岩, 而義巖二字, 大刻其上, 臣訪於古老, 則乃是論介殺身殱賊之處, 而其所傳說, 頗與古記無異, 臣見其巖而聞其說, 不覺義膽之自激也。噫, 當時之亂, 屈節賣身者, 不知其幾何人哉, 而孰謂一娼妓, 能辦士君子所難乎? 昔者薜仁杲降將旁地仙之復叛也。有王氏女, 取地仙所佩刀, 因刺地仙而斃之, 詔封崇義夫人, 以旌其義, 夫論介之所成就, 詎下於王氏之後哉? 嗚呼, 野記一編, 芳名昭載, 蒼巖半面, 義字不爛, 而泯沒至今, 獨無旌美, 此不但賤臣之所歎惜, 實是南士之共咨嗟者也。如臣愚賤, 地卑言微, 前日再啓, 俱未得行, 則事不當更爲煩瀆, 而且臣所管事務蝟劇, 凡於恤軍賑飢之方, 尙未自遑, 則誠知此等事, 不急於目前, 非關於分內, 而猶且不避猥越, 妄自論列者, 哀彼諸臣一妓之取義抱冤, 而旣無子孫之呼籲, 終絶天聰之登徹, 故不容泯默而止, 玆敢冒昧而陳, 伏願殿下, 勿以人廢言, 特於卄一諸臣, 均施贈職之典, 官妓論介, 亦加旌表之章, 用慰抑鬱之魂, 以爲激勸之方, 不勝幸甚, 臣無任激切屛營祈懇之至, 謹昧死以聞。答曰, 省疏具悉。當初區別, 必有委折, 義巖雖存, 野談所記, 何可憑信, 且百餘年之事, 似難輕擧, 而卿之欲褒忠烈之意, 嘉矣。其令廟堂, 稟處。
 
여지도서
慶尙道
晉州
人物
高麗 河拱辰 顯宗避契丹南幸拱辰奉表狀往契丹營乞班師契丹主許之遂留拱辰旣柀留內啚還園外木忠勤契丹主甚寵遇之拱辰多市良馬列置東路以爲歸計人告其謀
<하권0373-4>

契丹主鞫之拱辰具以實葑且曰臣於本國不敢有二心不願生事大國契丹主義以原之令改節效忠拱辰辭益厲不遜遂殺之
姜民瞻 穆宗朝登第顯宗朝以大將軍副 姜邯贊大破契丹鷹楊上將軍柱國轉右散騎常侍賜推誠致理翊戴功臣號以兵部尙書卒贈太子太傅 姜彰瑞 幼屬本州鄕拔力學善屬文江南學士無出其右者熙王八年春將赴省試父司戶適坐罪繫獄詣州請免放官不博許乃曰爾若登壯元及第可兌緩其獄以待果爲壯元錦還牧伯率幕僚州吏出迎于城外仍詣其家大開宴席觴父母以慶之一境榮之累遷職翰林院 姜引文 博士 啓庸之子父子皆以儒顯啓庸嘗以書狀通信日本及元朝征日本以曾知道里又擧爲書狀官風濤險艱且因兵交屢瀕於死及還不復仕戒子孫不業儒故子監察御史 師瞻門下侍中 昌貴皆由吏以進曾孫性敏好學復業儒登科位至宰輔謚文敬 河乙沚 忠惠朝壯元及第官至鷄林元帥 河楫 官至贊成事晉川君元正 河允源 之子忠惠末登第恭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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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以典理摠卽從諸將克復京城功爲二等辛旽用事獨不諂附辛禑初擢拜大司憲書知非誤斷皇天降罰八字於木籖掛臺上然後視事居憂廬墓下書徵之書未至卒
鄭乙輔 尙書工部侍郞菁川君善屬文 姜蓍 年十九中成均試歷 版啚判書 門下贊成事 賜推忠輔作功臣號封晉山君恭穆 姜淮伯 蓍文子辛禑初登第歷密直提學入本朝爲東北面都巡問使通亭集行於世 本朝河崙 高麗末登第歷敡中外有經濟之材佐我 太宗爲定杜佐命功臣封晉山府院君官至領議政文忠浩亭集 河演 允深之孫登第官至領議政文孝 河敬復 中武科官至議政府贊成事襄靖 河漢 敬復之子亦以武勇稱官至中樞剛莊 鄭以吾 登第官至都摠制文定工詩有郊隱集 鄭陟 以鄕貢登第官至知中樞院事 修文殿大提學恭戴性勤恪淸介自守凡朝廷儀禮多所擬議 世祖常語之曰 世宗以淸直二字許卿言猶在耳仍賜衣馬 姜碩德 維伯之子官至知敦寧府事戴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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坃易齊集
姜希顔 碩德之子登第官至仁順府尹有文名蒃隷眞草與畫俱妙 姜孟卿 淮伯孫也登第所歷皆淸要 世祖朝以佐翼功臣封晉山府院君官至領議政文景 姜希孟 希顔之弟丁卯科壯元後以翊戴佐理功臣封晉山君官至議政府左贊成文良詩文精深醖籍有私淑齊集十七卷 河政山 世祖朝親試壯元官至樂安郡守後以疾不仕 姜子平 丁丑科壯元再爲承旨官至全羅道觀察使弟子順尙翁主班城尉 舊增鄭誠謹 之子爲人忠孝淸直登第官至承旨嘗爲 成廟心喪三年燕山朝被殺子舟臣登第早歿 河叔溥 敬復之孫登武科歷官至參判以淸簡稱謚敬節 姜龜孫 希孟之子登第官至右議政肅憲 柳順汀 有文武材魁丁未科敡歷中外當燕山末與成希顔 朴元宗等決策靖國官至領議政文定 姜渾 早登第工文章燕山朝爲承旨參靖國功封晉川君官至判中樞文簡 姜詗 子平之子登第官至大司諫燕山甲子被殺 中廟反正贈參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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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高麗 姜呂翼 判書 姜輔忠 判書 姜君寶 官至宰輔鳳山君文敬 柳玕 官至左議政晉山君 鄭溫 大司憲麗亡托盲棄官歸家 太宗累聘不起遣中使欲知眞僞剌目而瞳子不撓後享鼎岡祠 河自宗 年十八登第三十八拜兵判見時事艱危托疾不就乞淸風郡事未幾還鄕終身不出 本朝柳藩 官至工曹判書菁川君 姜淮仲 參判 鄭苯 登文科 端宗朝官至左議政靖亂謫樂安賜死當宁丙寅復官戊寅贈謚忠莊 鄭穰 參判 趙之瑞 中生員壯元進土第二登文科魁重試官至輔德燕山時以直忤被極刑 中宗朝贈都承旨錄淸白吏 肅廟朝戊子立祠 賜額 姜安重 文科翰林官至都事翰林 李承幹 文科監司 姜叔卿 官至執義後享鼎岡 河游 漢城判尹 李仁亨 文科壯元官至大司憲 成安重 校理 孫昌 翰林 尹孝聘 進士壯元登第官至修撰有孝行 河潤 翰林持平享鼎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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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潤孫 武科官至兵曹判書莊胡 鄭吉邦 校理 李俊民 文科重試官至左參贊孝翼 宣廟賜祭享臨川 韓汝哲 翰林官至獻納 河晉寶 官至司諫嘗爲正言尹元衡曹植致書奬其直性淸白歿無棺 兪伯溫 才藝卓越孝友兼備中進士享鼎岡 金大鳴 文科壯元歷典三郡皆有治績以書狀官赴京 神宗皇帝賜玉龍硯壬辰亂金誠一辟召募官年六十慨然興募鄕兵領赴城中後享大覺 河沆 師事曹植踐履篤實中生員再除參奉不就享大覺 李琰 年十八讀書三角寺 文定王后以錦弊祈福僧舍琰焚之 慈殿怒欲刑之 明廟嘉而赦之以儒行薦參奉雲堂享鼎岡 崔道源 以抄選四除持平不就 柳宗智 謹厚好學少事曹植再除參奉不就號潮溪享大覺 河應圖 奉親至孝中進士累除縣令寧無成享大覺 孫天祐 孝友篤至號撫松享火覺 成汝信 師事曹植行誼見稱筆法亦妙俱中司馬號浮査享臨川 陳克敬 師事曹植得性理學號栢谷享鼎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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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憕 中進士孝友出天癸巳亂母姜氏抗節死平生坐不向東號滄洲享臨川 河天澍 孝友篤至號新溪享鼎岡 朴敏 中進士丁卯胡警爲義兵將號凌虛享鼎岡 河溍 文甲科官至司諫 仁祖朝毁斥自點直聲掫一時號台溪後享宗川 姜德龍 武科壬辰赴元均幕與倭寇連戰十二皆大捷朝廷特授三品職招諭使 金誠一 啓授咸昌縣監甲年遭艱喪畢李元翼辟爲體府營將丁酉與兵使 鄭起龍敗賊於星州花園又敗於高靈安林後 除長鬊縣以老母在辭職歸養 韓夢參 中生員踐履爲實早斥仁弘薦授敎官師傳皆不就號鈞隱享臨川 許東岦 武科副摠管魁偉剛直與自點爲友壻早絶之子武科壯勇逆堅要見故送昌還鄕使不見之及點堅誅人服先見丙子孔枝秀以先聖後自靖東歸淸捕之甚急人畏禍不受公獨匿之克與文正公 宋時烈爲知己文 顯廟賜祭文 皇祖中歲有憂西鄙命送將材用以不次時唯五人一則卿爾五掌兵□六分苻竹 崔濯 武科府使丁丑陪東宮久留虜中周旋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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機東還後不樂仕進號竹塘 仁廟朝贈左承旨享仁溪
柳世章 武科縣監不肯苟仕嘗登崇禮門有吟曰扙釰初來意豐功勒白頭如何和一字使我獨登樓 仁顯王后出居時聞 御供不繼日備精米三升書臣謹對三字投之墻內 白弘悌 性不羈壬辰亂將母匿山中遇賊被擄夜竊賊釰盡殺其賊率被擄者七十餘人而還事聞 除軍資監奉事 寓居本朝曺叔沂 登第官至觀察使 新增鄭汝昌 文獻公享文廟少時自咸陽擕二弟入智異山居花開洞 曺植 氣宇高邁講究性理目見乙巳之禍無意於世自三嘉采卜頭流徒山洞深藏自守徵辟皆不就 明廟朝一入奏對力陳治亂之道及爲學工夫 上歎賞翌日還山及歿 宣廟賜祭賻粟贈大司諫光海時加贈領議政文貞士林於三嘉 晉州等地立書院爼豆之有南冥集 崔永慶 天性孝友制行峻整自洛來居 明廟朝召拜持平不就己丑禍死於王獄後士林杭章得伸 贈大司諫配享德川 趙宗道 早遊曺植 盧禎之門深得性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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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學中生員萬曆倭亂以咸陽郡守安陰縣監 郭趨同入黃石山城城䧎不屈死有詩曰崆峝山外生猶幸巡遠城中死亦榮 宣廟朝陽祭 贈吏曹判書旌閭後戶事載三綱行實 肅廟朝贈謚忠毅
魚得江 登文科燕山朝知時事不靖絶意仕進托於謰語以自海官至大司諫固城移州東東山 許琛 左議政少時來居 李忠傑 南海移居官至大司憲 李濟臣 天稟超凡有忠孝之行見時事不靖之漸佯狂晦跡無意仕進從曹植深隱德山以終世稱高節後享鼎崗柌 李瀞 以功薦官至牧使孝友篤至後享大覺祠 鄭暄 仁弘擅權棲龍門山以絶之晩卜居於州西孤山搆學圃齋爲終老計 仁廟朝薦除活人署別提謝 恩後還山之日買釣鉤而來有詩曰秋鷹整翮擬高飛其奈風狂雪又霏莫將腐鼠歎呼烕最愛靑山沒是非以亦不仕之意又除靈山縣監不就 孝子新羅 聖覺 自號居士依止一利縣法定寺後歸家養母至孝母老病割股食之及死至誠袞事惠恭王賜租三百石 高麗 鄭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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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愻 知善州事 任德之子恭愍朝從父戍河東郡倭賊乘夜猝至衆皆遁任德病不能騎馬兄弟扶擁而走賊追及之愈騎馬射殺數人賊不敢前有一賊奮釰突進剌任德頰自以身蔽之且斬四人任德得免竟沒於賊事 聞授愈宗簿丞 姜安命 天性至孝父母每與隣老置酒自娯安命與妻盡刀供辦未嘗有難色親沒哀毁盡禮事死如生洪武庚午旌閭 河玄夫 仕爲司直爲九十歲母嘗糞吮腫前後居父母憂六年 余孝悌 性至孝嘗竭力事親母死居廬三年一日烏銜香案上砂杯而去孝悌歎曰烏雖微物實有反哺之誠余之孝心曾烏之不若故致此含去深自痛傷夢有老父曰勿哀三日必得及期烏復含置案上間者皆以爲誠孝所感事 聞旌閭 本朝牟恂 世宗朝登第歷官至左司諫大夫嘗吮母腫而愈後又母病嘗糞事 聞旌閣 君萬 優人也其父夜被虎搏君萬呼天待朝挾兮矢入山虎食之孟負隅視君萬哮吼而前吐所食支節君萬一箭殪之遂拔釰剖其腹盡收遺焚而葬之 得妃 其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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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繼南得癲疾四年不差得妃聞生人骨肉可以療自斷其左手第四指餌之其病遂愈成化八年旌閭
舊增金白山 年十六攵爲虎所囕白山揮釰擊虎父得免 成宗九年旌閭 朴氣 父歿當燕山時短喪法嚴眼衰居廬以終三年 中廟四年旌閭 姜應台 父得惡疾斷指和藥以進病愈 宣廟十一年旌閭 新增高麗 鄭默 前朝司正守墓三年一不到家事載三綱行實 李敬訓 父病風一足不仁孝養備至癸巳倭亂負父匿山賊猝至欲害其父以身翼蔽之賊竝殺之事 聞旌閭 尹忠寬 其家失火老母在房未出忠寬直入熱火負母而出爲熱火所射母子俱死 仁廟朝旌閭 河鏡輝 文枓生員性至孝壬辰倭亂遇賊賊先犯父以身衛父以兩手拒白刃賊竝殺之 宣廟朝旌閭 申尙溶 爲人愷悌誠孝出天遭父衷啜粥三年晝夜泣血以至蔽明事 聞旌閭 姜涵 事母至孝母臨歿謂曰吾必死以屋上三呼表汝誠孝及歿果然母嗜雉朔望必奠一日不緇憫泣雉八廬執以供奈屋上三哭感神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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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雉自八感物也事 聞旌閭
趙㻩 之瑞之曾孫性至孝十歲父有病斷指以進病愈父歿哀毁啜粥廬墓三年 肅廟朝事 聞特贈戶曹參判 河世熙 受一之玄孫年十四祖母沈疾危劇斷指以進事母至孝甘旨必嘗親病嘗糞母憂居廬啜粥三年足不出洞事 聞旌閭 姜敏孝 天性至孝父病斷指八歲喪母七十追表啜粥三年 宣廟朝及 金大妃國恤皆服三年 孝廟朝旌閭 李蘅 以孝行卓異事 聞特贈司憲府持平 金氏 文簡公 宗直之女李翮之妻十三母病斷指以進病愈旣歸事舅姑亦孝事 聞旌閭 梁氏 姜壽齊妻事舅姑盡孝舅歿喪制以禮 肅廟 朝旌閭 權召史 李震光妻其舅爲虎所咬挺身直入以手摶虎遂得免 肅廟朝事 聞旌閭 烈女高麗崔氏 靈巖士人仁佑之女也適州戶長鄭滿洪武巳未倭賊寇晉閤境奔竄時滿因事如京賊亂入閭里崔年方三十餘有姿色抱携四子走避山中賊四出驅掠遇崔露刃以䝱崔抱樹而距奮罵曰等死爾汚賊以生無寧死義罵不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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口賊遂害之斃於樹下賊擄二子以去第三子習甫六歲啼號屍側襁褓兒猶匍匐就乳血淋漓八口尋亦斃馬後十年己巳都觀察使 張以夏 閭乃命旌閭蠲習吏役
舊增本朝鄭氏 趙之端之妻燕山甲子之瑞遇害沒財溺宅鄭氏結廬其側設遺衣莫祭以終三年 中廟二年旌閭 新增安氏 南廷召妻孝事舅姑中饋無違夫亡斷髮截耳圖夫形像朝夕必奠朔望每祭 明宗朝封節婦旌閭 姜氏 司直 之女生員河國寶妻有婦道癸巳之亂遇賊抗節死 宣廟朝事聞旌閭 黃氏 都事 李蕃妻癸巳遇賊死節 宣廟朝旌閭 河氏 鄭希立妻丁酉亂賊近逼墜崖而死事 聞旌閭 鄭氏 鄭希聖妻癸巳亂賊欲汚之全節以死 宣廟朝旌閭 李氏 鄭薰妻倭寇殺欲汚之投石奮罵漸兩臂而剌殺之 宣廟朝事聞旌閭 處子姜氏 之女癸巳之亂匿山中賊欲汚之抗節被殺事 聞旌閭 處子韓氏 之女平居常曰女子不幸遭變死而已壬辰之亂遇賊不屈死節 宣廟朝事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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旌閭
李氏 鄭天祐之妻壬辰之亂遇賊賊悅之迫䝱上馬不從以釰加其頸終不屈賊寸斬之其女在傍自投池年十六賊拯之置屍傍而去 宣廟朝事聞旌閭 柳氏 鄭大享妻丁酉亂遇賊山中抗節死事 聞旌閭 鄭氏 金大鎔妻丁酉亂遇賊死之事 聞旌閭 金召史 許眞妻其夫爲賊所害以身掩其夫以杖打賊賊斷右脚又欲汚之罵不絶口賊割腹而去事 聞旌閭 金氏 姜世珍妻癸巳亂遇賊抗節死之事 聞旌閭 崔氏 尹汝訓妻癸巳亂遇賊死事 聞旌閭 姜氏 僉知金振妻癸巳亂遇賊死節事 聞旌閭 卞召史 保人蔡鶴妻丁酉亂遇賊欲汚抗節死事 聞旌閭 河氏 姜洵妻癸巳亂遇賊死節事 聞旌閭 成氏 李敬訓妻癸巳亂賊殺敬訓遂成氏至達灘泣曰旣失所天到此何往遂投水死事 聞旌閭 良女盞梅 正兵金應鳳妻癸巳亂賊欲汚之抗節死事 聞旌閭 金召史 水軍張億守妻倭亂抗節死事 聞旌閭 處子柳氏兄弟 之女癸巳之亂賊欲汚之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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節死事聞旌閭
姜氏 弘益之女丁酉亂遇賊死節事 聞旌閭 金氏 許綨妻丁酉亂遇賊死節事聞旌閭 金召史 鄭毛連妻癸巳亂遇賊死節事聞旌閭 河召史 曹彦世妻癸巳亂遇賊自頸死節事 間旌閭 良女 私奴李世妻癸巳亂遇賊死節旌閭 金召史 黃義直妻其夫死哀毁幾滅及葬自頸於柩側得以同穴 顯宗朝事 聞旌閭 私婢占花 私奴七元之妻歸夫家未久其夫死朝夕往哭草殯及葬縊死事 聞旌閭 崔氏 李德裕妻素性純貞事夫無違夫死臨葬飮藥而自盡 景宗朝事聞旌閭 鄭召史 驛吏崔泰舟妻其夫死自縊 當宁十五年事 聞旌閭 鄭召史 崔泰載妻其夫死以有孚不死過一朔知虛胎自縊死事 聞旌閭 趙氏 士人鄭相天妻夫死以有孚不死及其生女又爲矢死當夫終喪之日自縊死事 聞旌閭 許氏 李道曾妻合卺踰月夫死歸舅家定嗣待夫亡日飮毒自盡 當宁丁巳旌閭 新增忠臣崔琦弼 判官癸巳倭亂城陷死節享旌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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祠 當宁甲子贈兵曹參議
李仁民 癸巳倭亂城陷死節享旌忠柌 當宁甲子 贈兵曹佐郞 河繼先 癸巳倭亂城陷死節享旌忠祠 贈戶曹佐郞 崔彦亮 大司諫 卜麟曾孫壬辰亂白衣倡義時有妻挽以無職事輒吟曰睢陽城裏多男子不趐當年食祿人奮㭈八城殉節享彰烈祠 贈戶曹佐郞 張胤賢 癸巳亂以守門將城陷時殉節享彰烈祠 贈戶曹佐郞 孫承善 癸巳亂以義兵將入城殉節享彰烈祠 贈佐郞 金太白 癸巳亂以守門將殉節享彰烈祠 贈戶曹佐郞 兪晗 伯溫子以義兵將癸巳殉節享彰烈祠 贈主簿 李郁 萬曆己卯生員癸巳城陷殉節享彰烈柌甲子 贈戶曹佐郞 朴安道 之孫癸巳城陷殉節享彰烈祠 贈戶曹佐郞 尹思復 僉正癸巳殉節享彰烈祠 贈兵曹參議 孫承義 壬辰亂以判官尙州城陷殉節享彰烈祠 贈兵曹參議 河繼仁 武科丙子亂赴雙嶺力戰死節 贈監察 鄭復初 武科丙子亂赴雙嶺戰死 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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訓鍊僉正
義妓論介 癸巳城陷論介引倭酋於巖上抱而投江 景宗朝豦士鄭栻旣其泯沒倡論于兵使 崔鎭漢狀聞立碑義巖上以旌 忠奴義男 其主早死有一 孤兒祭祀奉行不絶香火負兒乞學竟得成就 肅廟朝事聞旌閭
健齋先生文集附錄卷之四
旌忠壇碑銘大提學李敏敍 a_047_061d


壬辰禍。賊屠城邑。殺長吏不可勝數。而晉介湖嶺爲賊衝。在我爲必守。在彼爲必爭。且一路創殘。州境獨完。南方諸將。皆保于晉。賊又先衄後奮。倂力必取。於是。晉終見屠。而忠義之士殲焉。始日本來寇。大勢兵踰鳥嶺。走李鎰。拉申砬。直搗京城。又分兵寇掠湖南。旣閑山不利。悉衆攻晉。千時。判官金公時敏。先賊之未至。糾合州兵。擊逐泗川, 固城賊。破賊將之據鎭海據金山者。威聲大振。回軍馳入城。大修守禦具以待賊。六月。賊果大至圍城。城中兵不滿千。賊將行長合諸屯賊十餘萬。攻圍六日。彼衆我寡。勢如壓卵。而公擧止安閒。有時吹笛鳴琴。軍中恃以爲安。督勵諸將。意氣奮發。士皆感泣。乘機赴節。捷出奇計。賊死傷如憤。知不可克。捲圍而退。賊退之日。公忽爲流丸所中。殞於城上。州民壯士。如喪父母。其明年。賊自平壤敗歸。以嶺爲巢穴。賊酋淸正憤前之不利。合兵復攻。時天朝以和誘賊。天將之進。賊在嶺南者。皆按兵不戰。摠兵劉綎移檄淸正使止兵。游擊沈惟敬力說行長。皆不聽。朝廷累下旨。督諸將進戰。都元帥金命元, 巡察使權慄以下官義兵皆聚宜寧。不敢先進。權慄責諸將。過江。至咸安。望見賊。皆潰。慄命元等先走。湖南倡義使金公千鎰。獨奮謂諸將曰。晉密邇湖南。實爲脣齒。無晉則無湖南矣。或欲空城避賊。以快其心者非計也。莫若竝力堅守。以遏賊勢。諸將不應。多散去。公與慶尙右兵使崔公慶會, 忠淸兵使黃公進, 義兵將高從厚, 泗川縣監張潤等。及諸將士十餘人。將兵入城。時金海府使李宗仁先入城矣。諸將兵僅數千。州民士女凡六七萬人。義兵將姜希悅李潛等繼至。牧使徐禮元素恇劫不知兵。凡守禦區畫。皆出千鎰。主客不相能。城本四面據險。其東稍平。至是部署諸軍。分城而守。黃進, 李宗仁, 張潤等各率兵。往來赴其急。約束旣定。人皆以死自誓。六月二十日。賊之前鋒。已至州境。吳宥, 李潛等出城詗賊。斬數級而來。城中鼓譟。千鎰遣梁山璹乞師劉綎。綎畏賊終不出師。其明日。賊大至圍城三帀。進薄城下。柵竹自蔽。從其內發砲丸如雨。城中人悉力拒守。賊又乘夜進逼東門。大呼登城。聲震天地。進等擊却之。一日。賊急攻西北隅。城幾陷。進奮劍督諸軍。登陴射賊。賊乃退。賊又築土山。臨城俯攻。進亦築高阜以當之。賊又設板屋置大木上。放火燒城中室屋。進用火砲碎之。時久雨。城一隅潰。賊遂乘之。金浚民力戰死之。賊又築五阜於城東西。登其上放丸。姜希輔死之。進乃放火箭焚柵。賊又作大櫃置四輪車上。被用者挽車逼城。進乃束火灌油而焚之。其後。賊潛來穴城。進等殊死戰。賊酋一人中丸斃。賊兵死者千餘人。賊退。進臨城視戰地。忽有賊丸中進左額而死。軍中使潤代進。旋又戰死。進, 潤智勇爲諸將最。而一時皆隕。士卒喪氣。賊因圮堞蟻附而上。宗仁等搏戰救之。旣已。賊趨西北躍入。禮元先走。諸軍大潰。千鎰等在矗石樓。與其子象乾及高從厚崔公慶會, 梁山璹等數十人。北面再拜。赴南江而死。李宗仁, 李潛, 姜希悅等十餘人。奮劍斫賊。力盡而死。宗仁將死。腋二賊赴水。大呼曰。金海府使李宗仁死於此。寔二十九日也。城旣陷。軍民皆被屠戮。無一人得脫。牛馬鷄犬亦不遺。夷城塡壕。堙井刋木。以快前憤。自是賊亦挫銳頓鋒。不能復振。湖南賴以全。蓋賊旣致死於晉。而諸公以弱卒守孤城。外援不至。終必折而不救。人人皆知之矣。然諸公誓死不去。力守於事去之後。要與城俱斃。以蔽遮湖南。忠壯義烈。固當與張巡匹美。而至其乘機立慬。出奇應卒。摧敗賊鋒無算。其功謀亦不可勝道者哉。其後累朝褒贈甚備。置彰烈祠。又設旌忠壇於近地之麓。祀以春秋。贈領議政金公時敏, 贈左贊成金公千鎰, 黃公進, 贈左參贊崔公慶會。在北南向。義兵將高從厚, 李潛, 金海府使李宗仁, 虞候成穎達, 泗川縣監張潤, 僉正尹思復, 學生李仁民, 代將孫承善, 主簿鄭惟敬, 守門將金太白, 宣務郞梁濟, 學生朴安道在西列。贈承旨梁山璹, 贈參議金象乾, 義兵將姜希悅, 巨濟縣令金俊民, 鎭海縣監曺慶亨, 判官琦弼, 贈主簿兪晗, 生員李郁, 守門將張胤賢, 義兵將姜熙復, 判官朴承男, 學生河繼先, 崔彦亮。在東列。晉城之事遠矣。而記功勳。著義烈。昭久遠者。闕然不圖。今御營大將徐公文重。觀察嶺南。過晉巡覽諸公死義之地。慨然興慕。大懼其久益昧沒也。遂與南鄕將士。謀所以彰示後世者。右兵使李公基夏主其事。統制使金公世翊佐其費。碑旣具。徐公請銘於不佞。不敢辭。乃爲之詞。嗚呼。晉城之事。豈不悲哉。寇再逞而勢益鷙。國方潰而援不至。主客相猜而輿尸凶。人衆雖多而聚蟻蜂。蒼黃叫號。卒就魚肉。獨使夫志土仁人。張空拳兮樹立卓。寧人謀之不臧。豈天意之祚惡。矗石高兮屹立。江流長兮萬古。紛煙愁兮雨泣。魂魄毅兮奮威怒。酌漂淸兮薦芳腯。祀春秋兮耿南土。